(1) 최승희의 파리 도착 보도
최승희의 조선인 정체성 주장은 그녀가 프랑스에 도착하는 날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승선했던 <파리>호는 르아브르에 기항하기 이틀 전 ‘저명인사 승객’의 명단을 무전으로 타전했고, 이 명단은 1938년 12월23일자 르아브르의 일간지 <주날뒤아브르(Journal de Havre>에 게재되었다.
13명의 승객 이름이 포함된 이 명단에서 최승희는 예술가로서 레종 되뇌르 훈장을 받은 프랑스의 오르가니스트 앙드레 마르샬과 함께 가장 먼저 언급되었고, 그의 호칭은 “코레안느 무용가”로 소개되었다.
이 명단이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라고 기록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공식 서류에 따르면 최승희의 국적은 ‘일본(Japon)’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최승희가 자신을 국적보다 민족으로 기록해 주기를 특별히 요청했다는 뜻이다. 샌프란시스코를 통해 미국에 입국할 때 민족명을 ‘일본인’에서 ‘코리안’으로 정정했던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후 사태는 최승희가 바라는 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표1>에 보이는 바와 같이 <주날뒤아브루> 이후 12월24일부터 28일까지 최승희의 파리 도착 소식을 게재한 파리 일간지의 9개 기사 중에서 그녀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소개한 기사는 한 건도 없었다.
<르쁘띠 파리지앵(Le Petit Parisen)>을 비롯한 6개의 일간지가 최승희를 “극동의 무용가”라고 소개했고, <르주르(Le Jour)>를 비롯한 3개 신문은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라고 보도했다.
이처럼 뜻밖의 분포가 나타난 것은 프랑스 언론이 대부분 (1) 최승희를 일본인으로 알았거나, 혹은 (2) 동양의 무용가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최승희에 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3) 최승희가 ‘꼬레안느 무용가’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일본인 무용가’로 홍보하는 일본대사관의 입장을 고려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중 어떤 것이 사실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파리의 모든 일간지들이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가 아니라 ‘극동의 무용가’ 혹은 ‘일본인 무용가’로 서술했던 것은 사실이다.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소개한 유일한 신문인 <주날뒤아브르>는 르아브르의 지역신문이었으므로, 최승희가 파리에 도착한 뒤 일주일 동안 파리의 시민들에게는 최승희가 ‘꼬레안느’ 즉 ‘조선인’이라는 사실이 전혀 전해지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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