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살플레옐 공연의 홍보
1939년 1월 최승희는 살플레옐 공연의 홍보를 시작했다. 최승희의 유럽 순회공연 주관사는 <국제 예술 기구(Organisation de International Artistique)>, 프랑스내 대행사는 <발말레트(Valmalette)>, 매니저는 남편 안막이 맡았다. 따라서 홍보 실무는 <발말레트>가 담당했겠지만, 홍보의 내용은 최승희와 안막의 의견을 반영해서 결정되었을 것이다.
[표2. 파리 매체에 나타난 최승희와 그의 무용 정체성 수식어 (1939년 1월1일-21일)]
1939년 새해 파리의 최승희 공연 관련 최초의 기사는 <파리 미디(Paris midi)>의 인터뷰 기사였다. 이 기사는 최승희를 “일본의 아르헨티나,” “꼬레안느,” “극동의 무용가” 등으로 소개했다. 최승희가 서구 신문에 “파블로바 꼬레안느(Pavlova coréenne)”으로 소개된 적은 있지만, 스페인 무용가 라 아르헨티나(La Argentina, 1890-1936)에 비겨 소개한 것은 <파리 미디>가 처음이었다. 이는 최승희의 조선무용이 근대무용가 파블로바보다는 민족무용가 아르헨티나에 더 가깝다는 뜻이었다.
이 기사는 최승희를 “출생에 따라서 꼬레안느, 귀화로 일본인, 직업상 미국인”이라고 정리했다. 최승희가 미국인이라는 서술은 사실이 아니지만 아마도 미국 공연을 마치고 프랑스로 건너왔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일제의 조선 합병을 귀화(adoption)라고 표현한 것도 사실과 다르다. 기자가 당시의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알고 있으면서도 용어를 순화한 것일 수도 있지만, 꼬레 태생이지만 국적이 일본인 점으로 미루어 최승희가 일본으로 귀화했을 것으로 유추한 것일 수도 있다. 유럽에서는 국적변경이 비교적 자유로웠다는 점을 고려하면 후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어떤 경우이든 1월3일자 <파리 미디>의 기사는 최승희의 국적이 일본이지만 꼬레 태생임을 파리 시민들에게 알린 최초의 기사였다.
한편 1월8일자 <파리 수와>는 파리의 신문들 중에서 가장 먼저 최승희의 공연이 등재된 공연일정표를 게재했다. 공연일정표란 파리에서 열리는 각종 공연을 최근날짜를 선두로 내림차순으로 정리해 표로 만든 것인데, 파리의 거의 모든 일간지가 이를 문화면에 게재했다. <파리 수와>의 공연일정표에는 최승희가 “꼬레안느 무용가(la célèbre danseuse coréenne)”라고 소개되었다.
일주일 전(1월3일자) <파리 미디> 기사가 최승희를 ‘일본인’과 ‘극동인’과 ‘꼬레안느’와 ‘미국인’으로 두루 서술했지만, <파리 수와> 공연일정표는 ‘꼬레안느’를 선택했다. 아마도 최승희의 요청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공연일정표 작성을 위해서는 신문사가 대행사를 통해 공연 및 공연자 정보를 받았어야 했는데, 이때 최승희는 자신을 “꼬레안느 무용가”로 소개해 주도록 요청했을 가능성이 높다. <파리>호 승객 명단에 이어 최승희가 다시 한 번 자신의 조선인 정체성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그 공연일정표가 게재된 바로 다음 날부터 최승희의 이름이 각 신문의 공연일정표에서 사라졌다. 이는 이례적인 일인데, 한번 공연일정표에 이름이 오르면 날이 가면서 순위만 변경될 뿐 공연이 끝날 때까지 일정표에 머물게 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최승희가 다시 공연일정표에 등장한 것은 일주일이 더 지난 1월16일의 <르피가로>와 <르주날>이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최승희가 “일본인 무용가”로 바뀌어 있었다. <파리 수와>는 첫 보도 이후 공연일정표에 최승희 공연을 수록하지 않았고, 다른 신문들은 ‘일본인 무용가’ 혹은 ‘극동의 무용가’로 소개한 것이다.
‘극동의 무용가’와 ‘일본인 무용가’의 비율도 최승희의 도착 기사 때와 달라져 있었다. 최승희 도착 기사들에서는 9개의 기사 중 6개가 ‘극동의 무용가’, 3개가 ‘일본인 무용가’였으나, 1월16일 이후에는 10개의 기사 중에서 9건이 ‘일본인 무용가’였고 ‘극동의 무용가’로 소개한 것은 1개뿐이었다.
이렇게 역전되어버린 경향으로 보아 최승희가 공연일정표에 자신을 ‘꼬레안느 무용가’로 소개하려던 시도가 난관에 부딪혔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때쯤 현지 언론도 최승희의 국적이 일본이지만 본래 꼬레 태생이며, 꼬레가 일본 제국에 병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승희 본인은 꼬레안느로 소개되기를 바라고 있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유럽인들에게 이 같은 상황은 낯설지 않았다. 스코틀랜드인이나 아일랜드인이 영국 국적보다 자신의 민족명으로 불리기를 선호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리 신문들은 최승희를 ‘꼬레안느’ 대신 ‘일본인’으로 기술했는데, 여기에는 아마도 일본 공관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 대사관이 ‘최승희는 일본제국의 무용수’임을 강조하는 보도문이라도 배포했다면 현지 언론은 공식 입장을 따라야 했을 것이다. 최승희가 1월8일의 공연일정표에 ‘꼬레안느 무용가’를 시도했으나 곧 철회되었고, 뒤이은 모든 공연자 정보가 ‘일본인 무용가’로 변경됐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다만 이때도, <표2>에 수록된 (괄호 안의) 무용 수식어를 살펴보면, 최승희의 작품만은 여전히 ‘꼬레안느 무용(danses coréennes)’으로 소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 당국에게는 최승희가 ‘일본인’인 것이 중요했을 뿐 그가 조선무용을 발표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승희에게는 발표 작품을 조선무용으로 발표하는 것도 중요했다. 자신의 조선인 정체성을 주장할 수 없는 상황이더라도 조선무용을 홍보하는 것도 그의 목적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 자신의 작품이 ‘꼬레안느 무용’으로 소개되면 될수록, 결국 최승희도 다시 ‘꼬레안느 무용가’로 소개될 반전의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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