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살플레옐 공연 후의 비평 기사
살플레옐 공연이 성공적으로 끝난 후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표4>에 보이듯이 2월2일부터 3월1일까지 약 한 달간 파리 매체에 게재된 최승희 관련 기사는 모두 25건으로 조사됐는데 대부분 평론기사였다. 기고자들은 파리 예술계의 정상급 비평가들이었고, 이들은 대부분 최승희의 공연을 호평했다. 그리고 이들은 대부분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부르기 시작했다.
25개의 기사 중에서 최승희를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일본인 무용가’로 서술한 것은 3건, ‘극동의 무용가’가 1건에 머물렀던 반면, ‘꼬레안느 무용가’라고 소개한 것이 20건이었다. 1개의 기사는 최승희를 아무런 수식어 없이 그냥 ‘무용가’라고 불렀다,
일반적 경향이 역전되었지만 여전히 혼란스런 모습을 보인 매체도 있었다. <르앵트랑지장(L'Intransigeant)>은 2월2일의 공연 보도기사에서 최승희를 ‘미카도 제국에서온 ... 극동의 무용가’로, 그의 작품을 ‘꼬레안느 무용’으로 서술했으면서도 다음날(2/3)의 평론기사에서는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그의 작품을 ‘일본 무용’으로 서술했다.
이는 공연기사를 작성한 기자와 비평문을 기고한 평론가가 서로 다른 인식을 가지고 있음을 반영한 것으로, 당시 파리 언론인들이 아직 최승희와 조선의 상황에 대한 완전히 객관적인 인식을 공통적으로 가지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엑셀시오르(Excelsior)>는 1938년 12월26일의 기사에서 최승희를 ‘극동의 무용가’로 서술했다가, 한 달 후인 1939년 1월26일과 30일의 기사에서는 ‘일본인 무용가’로 바꾸었는데, 공연 당일인 1월31일 기사와 2월6일의 평론기사에서는 다시 ‘극동의 무용가’로 변경했다. 이 신문은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소개한 적이 없는 유일한 매체였다.
다만 공연 전까지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로 서술했던 파리의 유력 신문들이 공연 후에는 모두 ‘꼬레안느 무용가’로 서술을 바꾸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르땅(2/7)>과 <르마탱(2/4, 2/6, 2/13, 2/17)>, <르주날(2/18, 2/25)>과 <파리수와(2/25)> 등은 모두 당시 1백만부 이상의 발행부수를 기록했던 파리의 일간지들로서 이들이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소개한 것은 파리 시민들의 최승희 인식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력 매체들 중에서도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서술하면서 동시에 일본인으로 취급하는 모습을 보인 신문도 있었다. <르땅(2/7)>은 최승희를 ‘동양의 무용가’로 소개한 후 같은 기사에서 그를 ‘할리우드식의 일본 미인’이라고 서술했는가 하면, 정작 그의 무용작품은 ‘꼬레안느 무용’이라고 설명했다.
파리의 패션잡지 <보그(3/1)>도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라고 서술한 뒤에 ‘매우 아름다운 일본인’이라고 묘사하고, 그의 작품들을 ‘섬세한 극동의 무용’이라고 설명했다. 즉, 살플레옐 공연 전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로 보도했던 파리의 매체들이 공연 이후 ‘꼬레안느 무용가’로 전환되었지만, 아직도 어느 정도 혼란의 여지는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일부 평론가는 이러한 혼란을 정리하기 위해 비평문의 일부로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설명하기도 했다. 예컨대 <파리 수와>에 최승희 공연 평론을 기고한 모리스 상펠(Maurice Champel)은 “꼬레(Corée)와 일본(Japon)의 관계는 티롤(Tyrol)과 시실리(Sicile)의 관계와 같다”고 논평했다.
당시 이탈리아는 일차대전 직후 오스트리아 영토인 티롤의 남부지역을 자국 영토로 합병해 지배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정부는 이 지역에서 사용되던 독일어를 금지하는 한편 이탈리아어 사용을 강요했고, 각급 교육기관과 종교단체들을 회유해 이 지역을 이탈리아로 동화시키기 위한 강압적 정책을 펴고 있었다. 모리스 상펠의 논평은 간단했지만 파리의 지성계와 일반 시민들에게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알리는 효과적인 정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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