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샤이오 공연의 보도 경향

 

한편, 최승희의 두 번째 파리 공연인 샤이오 극장 공연을 보도한 파리매체의 경향을 보면 살플레옐 공연 이후의 경향이 더욱 굳어졌음을 알 수 있다. 살플레옐 공연 이후 최승희는 벨기에의 브뤼셀과 안트베르펜, 네덜란드의 암스텔담과 헤이그에서 공연을 가졌고, 독일의 뒤스부르크와 프랑스 남부의 칸과 마르세유 등에서 활발한 공연 활동을 벌인 후, 615일 샤이오 극장에서 파리 2차 공연을 단행했다. 이 공연은 결과적으로 유럽 고별공연이 되었다

 

최승희의 살플레옐 공연 직후에 개관한 샤이오 극장은 2천명의 수용인원을 가진 파리 최대의 극장이었고, 개인 무용가로서 샤이오 극장에서 공연을 한 것은 세르주 리파르와 사하로프 부부 등의 정상급 무용가들에 이어 최승희가 세 번째였다.

 

샤이오 공연을 보도한 파리 매체의 기사는 모두 67건으로 조사되었다. 그중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라고 서술한 기사는 단 한 건도 없었고, 62건의 기사가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라고 서술했다. 나머지 5건은 최승희에 대한 수식어 없이 무용가 최승희혹은 그냥 최승희라고 보도했다.

 

1939년 6월15일 최승희가 파리 제2차 공연을 가졌던 샤이오 극장

 

이러한 경향은 131일의 1차 파리 공연 때와는 두 가지 면에서 사뭇 달라진 모습이다. 첫째는 최승희가 꼬레안느 무용가로 완전히 굳어졌다는 것이다. 살플레옐 공연 때는 79건의 기사 중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지칭했던 건수가 23건으로 전체의 29%에 불과했고, 그나마 대부분이 살플레 공연 이후의 기사들이었다.

 

살플레옐 공연을 전후로 나누어 파리 언론이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호칭한 보도를 다시 집계해 보면, 살플레옐 공연 전에는 모두 55건의 기사 중에서 3(5%)에 불과했으나, 공연 이후에는 25건의 기사 중에서 20(80%)이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지칭했다. 그러던 것이 샤이오 공연 때는 전 기간을 통틀어 67건의 기사 중에서 62(93%)이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호칭했을 뿐 아니라 일본인 무용가라고 한 기사는 한 건도 없었던 것이다.

 

두 번째 특징은 최승희를 국적이나 민족명 없이 그냥 최승희마드모아젤 최승희혹은 무용가 최승희라고만 부르는 신문이 늘고 있었다는 점이다. 민족명 조차 붙이지 않은 신문은 모두 5개였는데, 그중 <르주날(6/15)><르앵트랑지장(6/16)>, <파리수와(6/16)>는 발행부수가 1백만 부가 넘는 파리의 메이저 일간지였다.

 

이 신문들은 던컨이나 파블로바, 니진스키나 비그만이나 크로이츠베르크를 지칭할 때 미국인 무용가라든가 러시아계 무용가,’ 혹은 독일인 무용가라는 설명을 붙이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모든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정상급 무용가였기 때문이다.

 

 

드디어 최승희도 파리의 매체들에 의해 정상급 무용가로 대접받기 시작한 것이다. 만일 최승희가 한 시즌만 더 유럽에 머물러 공연 활동을 계속했다면, 유럽 전역의 매체들이 그에게 꼬레안느 무용가라는 수식어조차 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최승희가 파리에 처음 도착했을 때에는 일본인 무용가로 보도했던 파리 언론이 약 반년 만에 그를 꼬레안느 무용가이거나 혹은 호칭 없이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최승희의 조선무용 공연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공연들을 통해 최승희는 조선무용의 예술성을 한껏 과시했고, 이를 통해 조선무용이 일본무용과는 전혀 다른 예술이라는 점을 웅변적으로 보여주었다.

 

살플레옐과 샤이오 공연의 레퍼토리를 분석해 보면 그 이유를 더 뚜렷이 알 수 있다. 최승희는 이 두 공연의 발표 작품들을 조선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보여주는 한편, 조선인들의 성별, 연령별, 지역별 특성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치밀하게 구성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작품을 감상한 관객들이라면 언론인이나 평론가는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도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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