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의 부산공연] 1. 이시이무용단의 첫 부산공연

 

최승희는 1926327일 부산을 방문했다.

대구에서와 마찬가지로 생애 첫 부산 방문이었고 이시이 무용단과 함께였다.

 

최승희는 323일 오빠 최승일과 함께 이시이무용단의 경성공연을 관람한 후 대기실을 찾아가 이시이 바쿠에게 무용 입문을 요청했고, 25일 아침 경성역 2층 끽다점에서 최승희의 부형, 이시이 무용단, 그리고 경성일보의 학예부장 토시오 테라다가 동석한 가운데 계약을 맺고 이시이 무용단의 일원이 되었다. 최승희가 부산을 방문한 것은 무용단 입단 3일째였다.

 

이시이무용단의 대구 공연은 26일 하루였지만 부산 공연은 328일과 29일 이틀로 예정되었다. 부산 인구가 1925년 현재 11만 명으로 대구의 8만 명보다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시이무용단은 경성(34)에서는 3, 인천(6)에서는 하루 동안 공연한 바 있었다. 당시 조선 제3의 도시였던 평양(9)에서는 공연을 갖지 않았다.

 

1926328일의 <부산일보(7)>는 이시이 바쿠 일행이 “27일 오후 215분에 부산본역에 도착했다고 보도했다. 부산역이라고 한 것은 당시에 부산역이 하나 더 있었기 때문이다. 부산잔교역이었다. 잔교역은 본역을 지나 한 정거장 다음이었는데, 일본으로 가는 부관연락선에 바로 승선할 수 있도록 부두 바로 옆에 마련되어 있었다.

 

1926년 3월28일의 <부산일보>에 실린 이시이 바쿠-이시이 코나미 부산공연 광고문

 

부산역에 내린 이시이무용단 일행은 우선 숙소인 오이케(大池)여관으로 향했다. 대부분의 주요 여관들이 부산역 근처에 있었던 것과는 달리 오이케 여관은 시내 번화가에 있었기 때문에 이시이 일행은 자동차로 이동해야 했다고 <부산일보>가 보도했다. 오이케여관의 당시 주소는 부산부 벤텐초 1초메 38(오늘날의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138)이었다.

 

숙소에 간단히 짐을 푼 이시이 바쿠는 다시 부산역으로 나갔다. 부산역사 옆 철도호텔의 소휴게실에서 기자회견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자회견을 철도 호텔 라운지에서 가졌던 것은 다소 의외였다. 경성에서는 이시이 바쿠와 이시이 코나미가 경성역에 도착한 직후 경성일보와 매일신보, 조선신문 등의 신문사를 순방하며 도착 인사를 했었다.

 

공연 예술가들은 언론과의 만남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공연의 집중 홍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언론사도 마찬가지이다. 이시이 바쿠 정도의 세계적 명성을 지닌 예술가가 부산을 방문한 것은 뉴스 가치가 매우 컸다. 따라서 대개는 기자들이 이시이 무용단의 숙소를 방문하거나, 혹은 이시이 무용단이 신문사를 순방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부산에서는 기자회견을 위해 제3의 장소를 마련했다.

 

1926년 3월27일 이시이무용단은 부산정거장(오른쪽)에서 하차해 오이케여관(왼쪽)에 투숙했던 것으로 보도되었다. (지도는 1919년의 부산시가전도)

 

이 기자회견 자리에 최승희가 동석했는지는 의문이다. 아마도 이시이 바쿠와 이시이 코나미의 두 사람만 참석했을 가능성이 크다. 언론의 관심은 그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성에서는 최승희의 이시이무용단 입단이 큰 뉴스가 되었고, <매일신보>는 거의 한 면을 할애해서 경성역전의 이별의 장면까지 보도했지만, 그런 분위기가 부산까지 전해진 것 같지는 않다. 이시이무용단의 공연과 관련된 신문 보도에서 최승희가 언급된 것은 전혀 없었다.

 

또 기자회견이라면 부산지역의 언론사들이 모두 참여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실제로는 <부산일보>에만 회견문이 보도되었다. 당시 부산에는 부산일보 외에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경성일보와 매일신보 등의 지국이 활동하고 있었지만, 다른 신문들은 이시이 바쿠의 부산 도착 사실조차 보도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기자회견은 <부산일보>와의 단독회견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부산일보>가 이시이무용단 공연의 후원사였기 때문이다.

 

특이한 것은 이 공연의 주최측이 <이시이바쿠 부산후원회>였다는 점이다. 이시이 바쿠가 부산에서 공연하거나 방문한 적이 없는데 이미 결성되어 있었다는 것이 특이한데, 아마도 이시이 바쿠의 친구나 지인들이 결성했거나, 혹은 그의 세계적 명성 덕분이었을 것이다.

 

이시이 바쿠는 192212월부터 19243월까지의 유럽과 미국 순회공연을 통해 세계적인 무용가로 인정받았고, 특히 일본에서는 그의 명성이 대단히 높아져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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