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4월28일, 미이민국의 뉴욕 입국자 명단에 나타난 최승희의 나이(27세)가 의구심을 던졌다면, 그보다 1년 전, 1939년 4월20일자로 발행된 벨기에의 노동허가서는 그 의구심을 증폭시킨다. 이 문서에는 최승희의 생일이 1912년 5월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승희는 1939년 4월30일부터 5월14일까지 약 2주일 동안 열린 제2회 국제무용경연대회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했고, 경연대회 중간인 5월10일에는 조선무용 “갈라 공연”도 개최했었다.
그런데 이 공연을 위해서는 최승희에게 노동허가서가 필요했다. 예술가들이 외국에서 공연을 하려면 노동허가를 얻어야 했다. 공연은 입장료를 받는 경제행위이기 때문이다. 80년 전의 일본은 벨기에의 노동 허가 면제국이 아니었으므로 일본 여권으로 순회공연을 하던 최승희도 벨기에에서 공연을 하려면 노동허가를 받아야 했다.
예술가가 타국에서 예술 행사를 할 때 노동허가는 주관사나 흥행사가 서류 작업을 담당한다. 최승희의 유럽 순회공연 흥행사는 <국제예술기구>였고, 벨기에 국제무용대회의 주관사는 <필하모닉협회>였다. 따라서 이 두 단체가 최승희의 노동 허가 문제를 해결해야 했을 것이다.
브뤼셀 시립기록보관소의 공문서 서고에서 발견된 최승희의 노동허가서에 따르면 과연 그의 흥행사 <필하모닉협회>가 후원자(sponsor)로서 최승희의 노동허가를 신청했고, 벨기에 노동 및 사회복지부(Ministere du Travail et de la Prevoyance Sociale)가 이를 승인해, 법무부 장관에게 고지하는 형식을 취했다. 외국인의 출입국 관리는 법무부 소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노동 허가서에 기록된 최승희의 인적사항이 이례적이다. 최승희가 “1912년 5월에(en mai 1912) 서울에서 태어났고(né a Seoul), 파리에 거주(demeurant à Paris)”하는 것으로 기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최승희가 파리에 거주하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유럽 순회공연 동안에는 파리 샹젤리제의 스튜디오를 근거지로 삼았기 때문이다. 최승희의 출생지를 ‘서울’이라고 기입한 것도 맞는 기록이다. 최승희는 서울의 수창동에서 태어나 체부동에서 숙명여학교를 마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서울’을 ‘경성(京城)’이라고 쓰고 일본어로는 ‘케이조’라고 불렀다. 그런데도 이 노동허가서에는 최승희의 출생지를 ‘게이조(Keijo)’가 아니라 ‘서울(Seoul)’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서울이라는 이름은 조선의 ‘한양’에서 시작되어 대한제국 시기에는 ‘한성’으로 변경되었다가 일제 강점기에 ‘경성’으로 재차 변경되었고,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에야 ‘서울’로 개칭되었다. 그런데 1939년에 발행된 벨기에 노동허가서에서 ‘한성’도 ‘경성’도 아닌 ‘서울’이라는 이름을 쓴 것이다.
벨기에 노동허가서의 ‘서울’ 표기가 이례적이라는 점은 다른 나라 입국기록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최승희가 1938년 1월11일 샌프란시스코에 입국했을 때나 1940년 10월10일 멕시코에 입국했을 때, 그리고 1940년 4월28일 뉴욕에 입항했을 때, 그의 입국 서류에는 출생지가 모두 ‘게이조(Keijo 혹은 Keiyo)’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유독 벨기에 노동허가서에 최승희의 출생지가 ‘서울’이라고 표기된 것은 아마도 18세기부터 조선에서 활동했었던 프랑스 선교사들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조선과 대한제국 시기에 한반도에서 포교활동을 하면서 조선을 ‘꼬레(Coree)’, 그 수도 한양을 서울(Seoul)이라고 불렀다. 이들이 남긴 기록이 굳어져서 프랑스어권에서는 ‘한양=한성=경성’을 ‘서울’이라고 불렀다. 프랑스어가 공용어의 하나인 벨기에도 이 관행을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최승희의 벨기에 노동허가서에 기입된 또 하나의 특이한 점은 최승희의 국적을 한국인(de nationalité Coréenne)으로 기재한 것이다. 최승희가 일본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적을 한국인(coréenne)으로 기입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1940년 10월의 멕시코 입국기록에는 최승희의 국적이 일본인(japonesa)으로 되어 있다. 모국어도 일본어(japonas), 출생지도 ‘일본 경성(Keijo, Japan)’, 거주지도 ‘일본 도쿄(Tokyo, Japan)’으로 기록되어 있었으므로, 이 기록에 따르면 최승희는 전적으로 일본인이었다.
한편 1938년 1월의 미국 입국기록에는 최승희의 국적(Nationality)은 일본(Japan), 민족(Race or People)은 한국인(Korean)이다. 최근 거주지는 일본의 도쿄(Tokio, Japan), 출생지는 일본의 한국(Korean, Japan)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미국 입국 기록에 따르면 최승희는 일본인이며, 일본의 속방인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종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1939년 4월의 벨기에 노동허가서는 전혀 다르다. 최승희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서울에서 태어난 한국인”으로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벨기에 노동허가서가 작성된 프랑스어에서는 나쇼날리티(nationalité)가 ‘국적’뿐 아니라 ‘민족’이나 ‘인종’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국적’난이 따로 없이 ‘코레안느 나쇼날리티’라고 썼다면 이는 최승희를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고 인지했다는 뜻이다.
이 노동허가서에 기입된 최승희의 인적사항 중에서 가장 이상한 것은 “1912년 5월”이라는 최승희의 출생연도이다. 그의 생일은 흔히 1911년 11월24일이라고 알려져 왔고, 1940년 10월10일의 멕시코 출입국 기록에 그의 출생연도가 1912년으로 기재된 적이 있지만, 생월이 1912년 5월로 명기된 것은 벨기에의 노동허가서가 유일하다.
최승희의 생년이 1912년으로 기록된 공식 문서가 1건 이상이라는 점은 중요하다. 일회성 실수가 아님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앞에서 최승희의 생일 1911년 11월24일이 음력날짜였다면 그의 실제 생년월일은 1912년 1월12일임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벨기에 노동허가서는 최승희의 생월이 1912년 1월이 아니라 5월이라고 기록했다. 프랑스어에서 1월(janvier, 쟈비에)와 5월(mai, 메)은 표기나 발음이 다르기 때문에 이를 기록상의 실수라고 보기 어렵다.
또 이것을 의도적 오기라고 보기도 어렵다. 이것이 오기라면 그 의도는 나이를 줄이려는 것이었을 텐데, 이 기록으로 최승희의 나이가 변하지는 않는다. 최승희의 실제 생일이 1911년 11월24일이라면 이 노동허가서 발급이 신청되었던 1939년 4월20일 현재 최승희는 만27세(+5개월)이다. 실제 생일이 1912년 1월이었더라도 만27세(+3개월10일)임에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의 생일이 1912년 5월이라면 최승희는 만26세(+11개월)가 되지만 만27세를 만26세로 줄이는 것이 어떤 필요 때문이었을지 짐작할 수 없다. 더구나 이 노동허가서는 1939년 5월10일에 발효되기 때문에, 그때는 최승희의 나이는 다시 만27세가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최승희의 생일이 1912년 5월로 기록된 것은 기록상의 실수이거나 의도적인 오기라고 보기 어렵다. 더구나 생년월일처럼 금방 확인이 될 수 있는 신상정보를 실수나 왜곡할 가능성도 없고, 아무리 건망증이 심하거나 기억력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도 자신의 생년월일을 잊거나 잘못 기억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최승희의 벨기에 노동허가서에 나타난 ‘1912년 5월’이라는 생일 정보는 무언가 사실에 닿아있었음에 틀림없다. 어떤 사실이었을까? 당시 조선의 상황을 고려하면 유일한 설명은 그것이 최승희의 공문서 기록이거나, 최승희의 실제 생일일 수 있다는 것이다.
최승희의 학적부에는 그의 생일이 1911년 11월24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날짜가 음력날짜였다면 최승희의 실제 생일은 1912년 1월12일로 환산되고, 이는 그의 미국과 멕시코 입국기록에 나타난 나이를 잘 설명할 수 있다. 이에 더해 벨기에 노동허가서가 기록한 생일 1912년 5월은 출생신고일이 아니었을까?
출생신고는 원래 아이가 태어난 직후에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영아 사망률이 높았던 20세기 초 한국에서는 아이가 출생한 이후 몇 달씩 기다렸다가 출생신고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출생신고가 늦었을 경우 원래의 생일대로 신고를 하면 대개 벌과금을 내야하기 때문에 이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는 보통 출생신고일을 생일로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같은 관행으로 보아 최승희가 노동허가서에 생일을 ‘1912년 5월’이라고 쓴 것은, 실수나 왜곡이 아니라면, 출생일이라기보다는 출생신고일이었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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