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는 졸업식날이었던 1926323일 저녁에 오빠 최승일과 함께 이시이 바쿠의 무용공연을 관람했다. 아마도 여동생을 위한 오빠의 졸업 선물이었겠지만, 이 선물은 여동생을 무용의 길로 이끌기 위해 최승일이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것이었다. 오빠의 의도는 성공했다. 이틀 후인 325일 최승희는 이시이 무용단에 입단해 경성을 출발해 도쿄로 향했다.

 

<경성일보><매일신보>가 당시 최승희의 나이가 16세였다고 보도했지만, 이는 세는 나이였고, 연 나이로는 15, 만 나이로는 14세였던 시기였음은 이미 앞에서 보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시간이 지나서 최승희의 생년월일이 알려지고 실제 나이가 밝혀졌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최승희가 16세에 무용을 시작했다는 보도가 계속되었다. 특히 세는 나이를 전혀 쓰지 않고 만 나이만 사용하던 일본에서도 그런 관행이 이어졌다.

 

 

1926615일자 <도쿄니치니치(東京日日)신문>무용계에 싹트는 조선의 꽃 한송이-최승자양이라는 기사에서 최승희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기사 중의 최승자는 스승 이시이 바쿠가 고쳐준 최승희의 일본 이름이었다.)

 

새로운 제자의 이름은 최승자(崔承子, 샤이 쇼코)씨로, 올해 16세이며, 조선에서는 상당히 존경을 받는 양반 가문 출신이며, 그의 오빠는 와세다 대학에서 수학했다. 그는 자신이 다녔던 경성의 여고,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올 3월에 졸업했다.”

 

19266월에도 최승희의 나이는 여전히 만14(+7개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쿄의 일간신문은 여전히 최승희의 나이를 16세라고 보도했다. 그로부터 한 달반이 더 지난 1926730일자 <야마토(やまと)신문>유일의 조선문용가 최승희, 눈물의 정진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도 같은 서술을 반복했다. (이 기사에서는 최승자라는 이름이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는데, 이는 최승희가 본명을 유지하고 싶다는 뜻을 스승에게 전달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기사에서는 조선이 낳은 유일한 무용가, 올해 16세의 아가씨 최승희, 최근 이 소녀로 하여금 더욱 예술의 길에 몰두하게 한 에피소드가 있다면서 무용을 천한 기생의 일로 여기는 가족과 친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도쿄 유학을 오게된 경위를 소개했다.

 

 

이때에도 최승희의 실제 나이는 여전히 만14(+8개월)이었지만 <야마토신문>은 그의 나이를 16세라고 서술했다. 이러한 경향은 시간이 더 지나서도 변하지 않았다. 최승희가 무용을 시작할 당시 <경성일보>의 학예부장으로서 오빠 최승일에게 이시이 바쿠를 만날 수 있도록 소개장을 써주었던 테라다 토시오(寺田壽夫, 1892-?)<조선행정> 19374월호에 기고한 무희 최승희론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최승희는 올해 26세이다. 그러니까 벌써 11년이나 전의 이야기다. 그녀가 16세의 젊은 나이에 숙명여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 봄, 이시이 바쿠가 경성에서 첫 번째 공연을 가졌다. 당시 나는 경성일보에 있으면서 연예계 일을 맡고 있었고, 또 이시이 바쿠의 매니저와도 알고 지내는 사이였기 때문에 이시이 바쿠의 공연에도 후원자의 마음으로 구경을 갔다.”

 

테라타 토시오가 1937년의 최승희가 26세라고 한 것은 맞게 계산한 것이다. 당시 최승희가 일본 언론이 사용하던 연 나이26세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937년 보다 11년 전이었던 1926년의 나이는 15세가 되어야 맞는 계산이다. 그런데 테라다 토시오는 최승희가 “11년 전에 ... 16세의 젊은 나이였다고 서술했다. 산수가 엉터리였는데도 버젓이 활자화되었고, 그 뒤로도 바로잡히지 않았다.

 

 

혹시 최승희 자신이 당시 나는 16세였다고 발표한 적이 있었는지 조사해 봤지만, 그런 사실도 없었다. 예컨대, 최승희는 조선어판 <나의 자서전(1936: 6)>에서 당시 자신은 15세였다고 밝혔다. “그때는 1926, 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시절이었는데 그 해에 서울에 있는 숙명여학교를 막 졸업했으니, 내가 열다섯 되던 해 봄이었다고 생각한다고 썼던 것이다.

 

최승희가 16세였다는 보도는 어째서 이렇게 끈질기게 계속되었던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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