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작 최승희는 자신의 생일과 나이에 대해 뭐라고 했을까? 지금까지는 신문이나 잡지의 보도, 학적부와 출입국 기록 등의 문헌을 중심으로 최승희의 생일과 나이를 정리해 왔지만, 정작 본인은 자서전에서 자신의 나이에 대해서 뭐라고 서술했는지 살펴봤다.

 

최승희의 자서전에도 두 권이 있다. 하나는 도쿄에서 일본어로 발행된 <나의 자서전(自敍傳, 1936)>이고, 다른 하나는 경성에서 조선어로 출판된 <최승희 자서전(1937)>이다. <나의 자서전>의 저자는 최승희이고, <최승희 자서전>의 저자는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로 되어 있다.

 

17장으로 구성된 <나의 자서전>은 전부 최승희가 직접 서술한 것이지만, <최승희 자서전>150쪽 중 약 70쪽은 최승희의 글이고 나머지 80여 쪽은 오빠 최승일을 비롯 조선과 일본의 저명 문화예술인들의 평론이다. 두 자서전의 최승희 글에 겹치는 내용이 전혀 없고, 한 책이 다른 책을 번역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 두 권의 자서전은 별개의 책이다.

 

 

<최승희 자서전>2006년 한국에서 <세기의 춤꾼 최승희 자서전: 불꽃>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판된 바 있지만, 일본어 <나의 자서전>은 한국어로 번역된 적이 없고, 조선어판 <최승희 자서전>도 일본어를 비롯한 외국어로 번역 소개된 바 없다.

 

<최승희 자서전>에는 최승희가 자신의 나이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9번쯤 나오는데, 그중 첫 번째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그때는. 1926, 꽂이 흐드러지게 피던 시절이었는데, 그해에 서울에 있는 숙명여학교를 막 졸업했으니, 내가 열다섯 살 되던 해 봄이었다.” (<최승희 자서전>, 1937:6)

 

최승희는 자신이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것이 15세라고 명시적으로 말했다. 이때의 15세라는 나이가 어떤 나이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양력 19111124일이 그의 생일이었다면 이때의 15세는 연 나이가 되지만, 19111124일이 음력 날짜였고 이를 양력으로 환산한 1912112일이 실제의 생일이었다면, 졸업 당시의 15세는 세는 나이가 된다. 어느 경우에나 만 나이로는 14(+4개월, 혹은 +2개월반)이었던 셈이다. 같은 책에는 숙명여학교 졸업 즈음의 나이에 대한 서술이 한 번 더 나온다.

 

 

그 사범학교의 입학시험에 나는 쉽게 합격이 되었다. 이만하면 좋다, 하고 모두 나의 손을 잡고 즐거워했다. 그러나 나는 나이가 너무 어려서 입학이 허락되지 않았다. 문득 어두워지는 나의 운명! 추운 삼한사온의 계절이 지나가고 북한산에 덮였던 눈이 녹아 흐르며 벚꽃과 살구꽃이 웃는 듯이 피는 봄이 우리들을 찾아왔으나, 암담한 가정에 불행한 나는 다만 고요한 침묵 속에서 오빠가 빌려준 소설과 시를 읽기에 그날그날을 보냈다. 그중에도 석천탁목 선생님의 시와 노래는 내 안의 피가 끓어오를 만큼 나에게 생생한 감동을 전해 주었다. 겨우 열다섯 살밖에 안 된 어린 계집애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인생에 관한 문제에 푹 빠져 있었다. (<최승희 자서전>, 1937:13-14)

 

최승희가 치렀던 경성사범 입학시험은 192636일부터 3일간이었고, 면접시험은 마지막날인 38일이었을 것이므로, 숙명여학교 졸업 직전이었고, 최승희는 이때의 자신은 열다섯 살밖에 안 된 어린 계집애라고 서술했던 것이다. 당시 최승희의 나이가 15세였다는 점은 일본어판 <나의 자서전>에도 서술되어 있다.

 

모교의 교원회의 결과, 나를 학교 급비생(=장학생)으로 동경음악학교에 입학시키기로 하였다. 그런데 나이가 어린 까닭에 하는 수 없이 열여섯 살이 되는 봄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집에서 일 년 동안 있다가 동경에 가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나의 자서전>, 1936:22-23)

 

사범학교 입학에 실패한 후 숙명여학교에서 최승희를 동경음악학교에 유학시킬 계획을 세웠던 것인데, 이 역시 연령 제한으로 1년 더 기다렸다가 16세가 되는 봄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으므로, 졸업 당시의 나이는 15세였음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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