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의 자서전에는 졸업 당시 혹은 무용 유학을 떠나던 시기 외에도 군데군데 자신의 나이를 밝힌 부분이 있다. <나의 자서전(1936)>에는 최승희가 도쿄에 도착해 이시이무용단에서 배우고 연습하던 초기 상황이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아무리 강철 같은 결의를 가지고, 무슨 일이 있어도 한사람 몫을 하는 어엿한 무용가가 되겠다며 필사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나라고 해도, 결국은 열대여섯 살의 소녀가 아닌가요?” (<나의 자서전>, 1936:57)

 

 

최승희가 경성을 떠나 도쿄에 처음 도착한 것이 19264월초였으므로, 위의 서술은 그 직후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 당시에 자신이 열대여섯 살의 소녀라고 했으므로 여학교 졸업과 무용 유학 시작 시점의 나이는 15세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또 최승희가 무용 유학을 끝내고 19297월 경성으로 귀국했을 당시에도 최승희의 나이가 등장한다.

 

마침내 경성에 자신의 무용연구소를 설립하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저는 18, 마침 경성 하늘에는 흰 구름이 반짝이는 한여름의 일이었습니다.” (<나의 자서전>, 1936:78-79)

 

최승희가 경성의 고시정 19번지에 자신의 무용연구소를 처음 설립했던 것은 1929111일이었다. 최승희의 생일이 양력 19111124일이라면 경성 무용연구소 설립 당시의 최승희의 만 나이17(+11개월), ‘연 나이18, ‘세는 나이19세였다. 최승희는 이때 자신이 18세라고 했으므로 이는 연 나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만일 공공기록의 생일 19111124일이 음력 날짜였다면, 이를 양력으로 환산한 날짜는 1912112일이므로, 최승희의 무용연구소 설립 당시의 만 나이는 여전히 17(+9개월), ‘연 나이17, ‘세는 나이로는 18세가 된다. 이 경우 최승희가 자신의 나이가 18살이라고 했던 것은 세는 나이였던 셈이 된다.

 

 

따라서 19111124일이 원래 양력 날짜인지 혹은 음력 생일을 양력 날짜로 기록한 것인지에 따라 이 18세는 연 나이일 수도 있고 세는 나이가 될 수도 있었다. 어느 경우에나 19263월의 나이는 15세였던 것으로 역산할 수 있다.

 

<나의 자서전>에 나타난 이 서술은 <최승희 자서전(1937)>과 비교해 보아도 일치된다. 이 조선어 자서전에도 무용연구소 설립 당시 상황이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계획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더 이상의 진전이 없었다. 나는 하는 수없이 경성에 조그마한 연구소를 설립하고새로운 예술분야에 있어 향토 개척의 첫 번째 발걸음을 떼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부터 본격적인 고난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돌아보건대 내 나이 열여덟 살 되는 해였다.” (<최승희 자서전>, 1937:23)

 

, 최승일이 편집한 자서전에도 경성 고시정 무용연구소 설립 시절의 최승희 나이는 18세로 되어 있었다. 더 나아가 <최승희 자서전>에 첨가된 최승일 자신의 회상에도 비슷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이리하여 몇 달이 못 되어 너는 집으로 돌아와서 열여덟 살 된 몸으로 러시아에 가려고 러시아 영사관에 있던 김온 군을 통하여 러시아행을 실현하려고 운동을 하였었지. 그러나 그것도 뜻과 같지 아니하여 고시정(古市町) 언덕에 연구소 문패를 붙이고 대담하게 안무를 하여 보았었지.” (<최승희 자서전>, 1937:53)

 

최승희가 무용 유학을 마치고 경성에 돌아와 1929111일 무용연구소를 개설했을 때의 나이는 18세였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27개월 전이었던 19263월의 나이는 15세라고 보아야 한다. 192911월의 나이가 세는 나이이든, 연 나이이든, 19263월의 나이는 역시 세는 나이이든, 연 나이이든 15세였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문헌들을 볼 때 최승희나 그 오빠 최승일이 만 나이를 단 한 번도 쓰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냥 관습적으로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일제 강점에 동조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심지어 나이 계산에까지 반영되었던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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