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의 두 자서전은 각각 150쪽 안팎의 분량이지만 거기에는 최승희의 나이가 10회 이상 언급되었다. 더구나 그중에는 상충되는 서술도 등장한다.

 

최승희가 여학교를 졸업하고 무용 유학을 시작했던 당시의 나이에 대한 서술이 특히 그렇다. <나의 자서전(1936)>에서는 당시 나이를 15세로 일관되게 서술했지만, <최승희 자서전(1937)>에는 당시 15세였다는 서술과 함께 16세였다는 기술도 여러 군데 등장했다.

 

그렇지, 그래, 올해 들어가서 2년 후 을종 교원으로 임명이 된다하더라도 나이가 열여덟 살이니 열여덟 먹은 처녀가 어떻게 남의 집 아이들을 가르치니? 다 그만두어라, 승희야.” (<최승희 자서전>, 1937:34)

 

 

이는 오빠 최승일의 말이었다. 최승희가 1926319일 경성사범학교의 면접시험에서 낙방하고 귀가하자 최승일이 여동생을 위로하려고 한 말이다. “2년 후에 18가 된다는 것은 지금 16세라는 뜻이다. 같은 책에서 최승희가 자신은 15세의 어린 소녀였다는 서술과는 다르다. 여학교 졸업 당시 최승희가 15세가 아니라 16세였다는 기술은 같은 책에 2번 더 나온다.

 

경성의 여학생인 최승희는 성악가로서 출세코자 하였었다. 동경음악학교에 입학코자 하였다. 그러나 4년제의 여학교를 졸업하면 16세인 까닭에 음악학교의 수험에는 연령이 어렸던 까닭도 있었다. 그때에 공교롭게 석정막씨의 일행이 경성에서 공연하였다.” (<최승희 자서전>, 1937:78-79).

 

“‘흑백의 조선 여학생복을 입은’ 16세의 그는, 곧 석정씨와 한가지로 출발하게 되었는데기차의 창에서 어머니와 서로 붙들고 얼굴을 창에 내놓고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최승희 자서전>, 1937:79-80).

 

최승희가 직접 자신이 15세였다고 서술한 자서전에 당시 나이가 16세였다는 내용이 3번이나 더 실렸다는 것은 일견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16세 언급의 화자들을 살펴보면 그 의문이 어느 정도 풀릴 수 있다.

 

 

‘2년 후에 18세가 된다는 말한 것은 오빠 최승일이고, ‘16세인 까닭에 음악학교 수험에 연령이 어렸으며 ‘16세의 그녀가 이시이 바쿠씨와 함께 경성을 출발하게 되었다고 한 것은 일본의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였다. , ‘16세 발언을 한 것은 최승희 본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중 최승일의 발언이 특히 주목을 끈다. 그는 본인과 부모와 함께 자기 여동생의 나이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런데 어째서 여동생의 나이를 16세로 언급했던 것일까? 어째서 본인이 언급한 나이와 오빠가 언급한 나이에 차이가 생겼던 것일까?

 

<경성일보><매일신보>에 보도된 최승희의 나이도 16세였다. 그런데 이 두 신문 기사의 취재원은 최승일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최승일이 동생 최승희를 이시이 바쿠에게 소개하기 위한 소개장을 받은 것이 <경성일보>의 당시 학예부장 테라다 토시오(사전)였기 때문이다. 조선어로 발행되던 <매일신보>는 일본어로 발행되던 <경성일보>와 같은 사옥을 사용하는 자매지였으므로, <경성일보>의 취재 내용은 손쉽게 <매일신보>에도 보도되곤 했었다.

 

 

따라서 숙명여학교를 졸업한 16세의 최승희라는 최초의 신상정보는 맨 처음 최승일로부터 테라다 토시오에게 전해졌고, 그 내용이 <경성일보><매일신보>에 보도된 이후, 모든 일본어권 미디어에서는 최승희의 여학교 졸업 당시의 나이가 16세로 전해졌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그것이 결국 일본에서 활동하던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까지 전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최승희는 왜 자신의 나이가 15세였다고 한 것일까? 그리고 최승일은 어째서 동생의 나이가 16세였다고 한 것일까? 두 사람은 가족이므로 서로의 생일이나 나이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이같은 차이가 나타난 까닭은 무엇일까? 그리고 어째서 나중에라도 바로잡히지 않았던 것일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