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일보>최승희양은 9일 경성부 바깥 청량리의 <청량관>에서 서정희씨의 주례 아래 안막군과 결혼식을 거행한다고 보도했었다. 193431일의 <조선중앙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도 최승희는 재재작년(=1931) 5월 청량관에서 화촉의 성전을 거행했다고 회상했다.

 

<청량관>은 어떤 요리점이었던 것일까? 언론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보도된 것은 190036일의 <제국신문> 4면에 실린 광고였다. 이후 46일까지 총 30회의 동일한 광고를 통해 홍릉 정거장 좌우 요리집에서 외국 요리 잘하는 곡상을 두고 정결이 하오며, 동편채 뒤로 정쇄한 별당을 지어 내외하시는 부인을 위하여 여인을 시켜 대접할 터이오며, 혹 소창하라 하시는 이는 미리 통기하오면 포진 범백을 정결이 하여 드릴터오니 모든 손님은 찾아오시라고 했다. 이 광고문에는 <청량관(淸凉館)>의 주인이 조원규씨임도 밝혔다.

 

<제국신문>은 같은해 96일자 3면에 또다시 <청량관> 광고를 실었다. 그런데 광고 내용이 특이하다. “홍릉앞 정거장 요리집에서 외상이 심하와 철시하였다가 다시 개시하였사오니 내림하시옵. 청량리 청량관 고백.” 이 광고도 925일까지 모두 15회 게재되었는데, “외상 때문에 철시해야 했다는 사정 설명이 영업이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고, 주인 이름이 사라진 것으로 보아 혹시 주인이 바뀌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었다.

 

다카시마 유사부로와 정병호 공편저의 사진집 <세기의 미인 무용가 최승희(1994)> 60쪽에 실린 최승희-안막의 결혼식 장면. 사진설명 중의 <청량원>이라는 장소 이름은 <청량관>의 잘못으로 보인다.

 

그러나 경영자가 바뀌었어도 영업이 쉽지는 않았던 것 같다. 1908731일의 <황성신문(3)>근일 동문 외 홍릉 부근지에 있는 바 청량관 연희는 관람인이 매우 적어서 경비를 불능 담당인고로 일전부터 폐지하였다고 보도했다. 아마도 이 두 번째 청량관은 무대를 갖춘 극장식 식당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영업이 되지 않아 폐관했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 이후에는 요리점 청량관이 다시 영업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91381일의 <매일신보(3)>이 김모, 한모, 홍모씨 등 3명이 지난달 28(중복날) 다동조합 기생 부용과 광교조합 기생 산옥, 란홍 3명을 대동하고 청량관 요리점에서 질탕히놀다가 폭력 사고가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연회식의 음식점이 운영되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 세 번째 <청량관>은 나름대로 고정고객을 만들었던 것 같다. 1916513일과 62일의 윤치호의 영문 일기에도 가족과 지인들과 함께 <청량관>에서 점심이나 저녁식사를 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때 식사비가 160전이었음을 밝혀 놓았다. 인근 청량사의 식사비가 1인에 40-80전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청량관>은 두 배 이상 비싼 고급 음식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청량관>은 또다시 주인이 바뀌었다. 192144일의 <동아일보>는 새로운 <청량관> 광고가 실렸다. “고급 조선식/일식/양식요리를 제공하는 청량관 개시광고였다. 광고문 내용은 날은 따뜻하고 바람도 시원한 가절에 청량리 늘어진 버들에 새로운 봄향기를 맛보시며 버들피리의 자연의 음악을 벗삼아 일상의 노고를 유감없이 위로하실 곳은 청량관이오니 반드시 일차 왕림하심을빈다는 것이었다. 이 광고문 하단에는 대소 연회주문에 응함이라고 덧붙여져 있었고, 주인 이름을 유형호(柳瀅鎬)라고 밝혀져 있었다.

 

그런데 이 광고문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410일의 <동아일보>에 새로운 광고문을 게재하면서 이번에 본인이 당관을 인수 영업하옵는 바 제반 설비를 일신 개량하옵고 전화 기타 만반 기구를 구비하온 중 가절을 점하여 43일부터 개업했다는 점을 명시하고 당분간 정가에 2할인을 제공하겠다고 덧붙였다. 이 광고문에는 <청량관>의 주소가 청량리 199번지,” 전화번호도 2782번이라고 밝혀져 있었다.

 

192043일 네 번째로 신장개업한 <청량관>은 비로소 성업을 구가한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까지도 영업을 계속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1968724일의 <동아일보>725일의 <조선일보>가 공무원이 출입해서는 안 되는 387개의 유흥업소 목록을 발표하면서 동대문구의 <청량관>을 이 목록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주인과 소재지가 동일한 업소였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청량관>이 요리와 함께 술을 판매했지만 <청량사><영도사>처럼 풍기문란으로 경찰당국의 제재를 받은 적은 없었다. 다만 밥과 술을 먹고 돈을 내지 않는 무전취식이나 술에 취해 난동을 벌이는 폭행사건, 혹은 <청량관>과 관련된 교통사고 등이 더러 발생하곤 했다.

 

예컨대 1915815일의 <매일신보>는 무전취식 미수 사건을 보도했고, 1925617일에는 2명의 취한의 난동으로 손님과 기생이 폭행당한 사건을 전했다. 1929326<매일신보>에는 <청량관>으로 가던 자동차가 전복되어 동행하던 기생 2명이 전치 3주의 중상을 입었다는 기사도 실렸다.

 

하지만 <청량관>은 당시 경성의 주요 사회단체의 모임이 열리는 곳으로 명성이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회장을 구비한 한//양식 고급 음식점이었으므로 상류층이나 인텔리층 고객이 많았고, 각종 사회단체들의 회의나 회식도 자주 열렸다. 윤치호가 그의 영문 일기에서 1934531일과 1935610일 조선체육회 총회를 주재하기 위해 <청량관>을 방문했던 사실을 기록한 것을 보면 <청량관>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그밖에도 경성의 각종 경제단체나 이익단체, 종교단체나 주요 학교의 동창회 등이 <청량관>에서 모임을 가졌다. 1914617일자 <매일신보>경성남부동현 이발조합원 일행이 17일 낮 12시에 청량관에서 제3회 기념식을 가졌다고 보도했고, 1916513일에는 윤치호가 이상재 등과 함께 청량관에서 점심식사, 1920328일에는 보성법률상업학교 교우회가 청량관에서 총회를 열었다.

 

사장이 유형호로 바뀐 뒤로도 1920614일에는 경성종로조선인여관주인 간친회, 1921426일 조선인 정동총대연합회 초대회, 19211012일에는 야소교신학교 목사승진축하연, 19221029일에는 선린상업학교 동창회, 1925524일에는 법학전문학교 동창회, 1928630일에는 한성사범학교 동창회, 1930614일에는 재경성 니혼대학 교우회 등이 청량관에서 모임을 가졌다.

 

최승희의 결혼식 이후에도 193159일에 조선체육회 이사회, 62일에는 조선주류제조업자 59명의 주류가격협정 회의, 817일에는 와세다대학 동창회, 1933721일 용우회 친목총회, 193645일에는 조선 가구수선직공조합 총회 등이 계속되었다.

 

체육행사와 기타 환영회 등도 자주 열렸다. 192574일부터 3일간 <청량관> 앞에서 제1회 추천(그네타기) 대회가 열렸고, 1928723일 조선체육회 정기총회가 열린 것도 <청량관>이었다. 또한 이곳에서는 1940723일에는 함귀봉 귀국환영회가 열리기도 했다.

 

끝으로 <청량관>은 결혼식장으로도 이용되었다. 1923827일에는 전응열군과 김갑순양의 결혼식, 192669일에는 정창운군과 리정희양의 결혼식, 1933430일에는 중앙일보기자 최문우의 결혼식 등이 그것이었다. 결혼식을 다른 곳에서 한 후에 <청량관>에서는 피로연만 열기도 했다. 192579일의 박용대군과 김희순양의 결혼 피로연이 그런 경우였다.

 

따라서 최승희의 결혼식이 <청량관>에서 열렸다면 그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최승희와 안막은 이미 예술계와 문학계의 촉망받는 젊은이였고, 두 사람의 집안도 모두 양반 가문의 지체 있는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일부 평전이 <청량관>을 염두에 두고 자그마한 식당”(강이향, 1993:85; 정병호, 1995:65)이라고 서술했다면 이는 잘못이다. <청량관>은 경성 시내의 <명월관>이나 <장춘관>에 비견되는 대형 요리점이었기 때문이다.

 

또 최승희의 결혼식이 <청량원/청량관>이라는 식당에서 열렸다고 서술한 평전들 중 일부는 이 식당이 <청량사>의 부속 식당이었다고 서술한 것도 있다. (강준식, 2012:88).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달랐다. 적어도 1900년부터 1968년까지의 문헌으로 확인되는 <청량관>4차례나 소유주가 바뀌기는 했으나 사장의 이름이 남성인 사기업이었으므로, 비구니 도량인 <청량사>의 부속식당이었을 리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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