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와 경성관광협회가 주도한 <대금강산보> 제작 계획에 최승희는 수동적으로 동원되어 끌려간 것이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최승희 자신이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나서 이를 추진했다는 증거가 곳곳에 보인다.
1937년 2월18일자 <매일신보>에 보도에 따르면, 오빠 최승일은 예비교섭 자리에서 “최승희가 일찍부터 금강산을 무용화하려고 연구해 왔다”면서 외사과장의 제안을 수락했다고 한다. 이 말이 단지 총독부의 권력자 비위를 맞추기 위한 립서비스가 아니라면, 최승희는 이미 조선의 절경 금강산과 자신의 조선무용을 결합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또 다른 증거는 최초 보도에 이어진 2월19일의 <매일신보>의 보도이다. 이 기사는 “(공연 첫날인) 20일 밤10시부터 (장소미정) 이왕직 아악부 리종태씨와 음악가 홍난파씨, 최승일씨, 최승희 여사 등이 모이어 금강산 춤의 작곡 협의회를 열기로 되었다.”고 보도했다.
같은 날짜의 <조선일보> 기사를 보면 최승희의 경성 일정이 얼마나 분주했는지 알 수 있다. “20일부터의 고별공연을 압둔 최승희는 ... 경성도착은 19일 오전8시... 그날 오후 6시부터 ... 좌담회에 참석하였다가, 8시의 모교 숙명여고의 환영회에 참석하기로 되었다.”
공연 전날과 당일의 분주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최승희는 7시에 시작되는 첫 공연이 끝나자마자 밤10시에 이종태, 홍난파씨와 함께 금강산 춤의 작곡협의회 일정을 잡았다. 불과 하루 전에 저명 음악가들을 접촉해 수락을 얻어내었을 뿐 아니라, 바로 실무회의에 돌입한 것이다. 설사 오빠 최승일과 관광협회 및 당국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최승희가 이처럼 신속하게 준비작업에 돌입했던 것은 자신도 이 금강산 무용영화 계획이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었다.
<대금강산보> 제작을 위해 열린 첫 실무회의가 ‘작곡협의회’였던 것도 최승희의 제안이었다. 음악이 있어야 작품을 안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그가 무용가였기에 알 수 있었던 사항이다. 총독부와 관광협회가 일을 서두른 것은 사실이지만 최승희도 주도권을 가지고 적극성을 보였다는 말이다. 최승희는 어째서 금강산 무용영화에 이렇게 적극적이었을까?
세계 순회공연을 앞둔 최승희가 무용영화의 유용성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의 명승지를 세계에 소개해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한다는 것은 총독부의 관심이었다. 그러나 최승희의 관심은 조금 달랐다.
해외 공연을 앞둔 최승희는 <대금강산보>를 먼저 현지에 보내어 개봉한다면 자신의 공연 흥행에도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조선무용에 대한 현지의 사전인식을 넓히고, 비평가들로부터도 예술적으로 깊이 있는 평가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즉, 최승희는 이 영화를 세계 순회공연의 선발대로 삼으려고 했다.
이는 금강산 무용영화의 입안 초기부터 언급된 바 있었다. 1937년 2월18일의 <매일신보>는 “그의 도구(渡歐)에 당하여 그의 예술을 통하여서 천하의 명승 금강산을 널리 세계에 선전”할 것이라고 보도하는 한편, 1937년 10월7일의 <동아일보>도 “니카츠(日活)에서 계획 중인 이 영화는 해외에 수출하기 위하여 제작한 것”이며, “본래 계획은 대금강산보를 먼저 구미에 보내고 그 뒤를 따라 최승희씨가 무용행각을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었다.
최승희는 언제부터 금강산 무용영화의 유용성을 깨달았을까? <조광> 1937년 4월호에 실린 <도구기념 좌담회>에서 그 답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서양에 가시면 특별히 뵈이기로 한 춤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최승희는 “<재팬(Japan)>이라는 잡지와 <오사카마이니치신문>의 영문판에 많이 소개가 되어 그들은 나의 춤이 어떤 것인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최승희는 영문판 신문과 잡지의 기사와 화보가 세계 순회공연의 사전 홍보에 도움이 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더 나아가 영화, 특히 금강산을 배경으로 한 무용 영화를 미리 배포한다면 그 효과는 잡지나 신문에 비할 바가 아님은 분명했다. 즉, <대금강산보> 제작에 대해 최승희의 적극성과 열의를 보인 것은 곧 전개될 자신의 세계 순회공연을 위한 것이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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