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독부와 최승희 모두에게 <대금강산보>는 해외 홍보를 위한 영화였다. 따라서 세계 어디에서 상연하더라도 손색이 없을 만큼 최고 수준의 영화이어야 했다. 총독부는 최고 수준의 제작비를 책정했고 최승희도 각 단계의 제작자들을 최고 수준의 전문가로 선정했다.
<대금강산보>의 제작비는 10만원으로 책정되었다. 1928년 1월4일자 <조선일보>의 <조선영화계의 현재와 장래>라는 기고문에서 심훈(沈熏)은 당시 조선영화 한 편의 최고 제작비가 6천원이었다고 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무성영화가 토키영화로 바뀌고 장비와 필름이 비싸졌다고 해도, 조선영화의 제작비는 2만원을 넘지 못했다. 그런데 <대금강산보>의 제작비는 10만원이었으니 일본 유수 영화사 <니카츠(日活)>도 부담을 느낄 정도였다.
제작비뿐 아니었다. 최승희는 음악과 편곡, 원작과 각본, 의상과 조명 등의 담당자를 조선과 일본 최고 전문가로 지명했고, 관광협회와 총독부, 니카츠 영화사는 군소리 없이 이를 수용했다. 돈과 재능을 절약하려 해서는 안 되는 영화임을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승희는 영화음악 작곡자로 이종태와 홍난파를 선정했다. 본명이 홍영후(洪永厚, 1897-1941)인 홍난파는 이미 <애수(1920)>와 <봉선화(1926)>의 작곡가로 널리 알려졌고, 바이얼린 연주자로서도 호평을 받고 있었다. 그밖에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고향의 봄>, <고향 생각> 등 10여곡의 가곡과 <나뭇잎>과 <개구리> 등 1백여곡의 동요를 작곡했다.
1931년 7월 미국 셔우드 음악학교에 유학했고 미국 유학기간에 안창호 선생이 이끄는 흥사단에 가입, 단우번호(266번)을 받기도 했다. 1933년 귀국한 홍영우는 경성보육학교, 이화여전, 빅터레코드사, 경성방송국 등에서 음악주임 및 교사로 재직하면서 활발한 음악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1937년 8월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일경에 체포되었고, 72일의 옥고 끝에 전향서를 쓰고 출옥했다. 이후 그는 1941년 사망할 때까지 음악과 저술을 통해 극렬한 친일음악인의 길을 걸었다.
그가 <대금강산보>의 주제가 작곡을 의뢰받았던 것은 1937년 2월이므로 변절하기 전이기는 했으나 “조선음악 대부분이 극히 더디고 느려서 해이하고 퇴영적인 기분에 싸였지마는 서양의 음악은 특수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거개 경쾌 장중하다”는 의견을 가진 양악 예찬론자였다. 그런 홍영우가 어떻게 이종태와 함께 아악 분위기를 가진 <금강산보>를 작곡했는지 의문이다.
한편 이종태는 아악 전문가로 알려져 있었지만, 그는 1930년 일본음악학교를 졸업한 후 서양음악과 궁중음악 등 영역을 가리지 않고 활발하게 활동했던 음악가였다. 1930년부터 <소년>, <내일>, <김소좌를 생각함>, <총후> 등의 친일 작품을 양산했다. 홍난파가 도중에 변절한 반면 이종태는 처음부터 친일음악인이었던 것이다. 다만 조선 전래의 궁중음악을 서양식 악보로 채록한 덕분에 조선 전통음악의 계승자로서의 업적을 낸 것이 인정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이왕직 아악부에 근무하는 10년 동안에도 일본국가 <기미가요>와 <우미유카바>를 조선식 아악기로 연주하도록 편곡해, 경성방송국에서 자주 연주했는가 하면, 중동학교, 중앙불교전문학교, 경성고등음악학원, 이화여전 등에서 음악을 가르쳤고, 경성관현악단과 영미합창단 등을 지휘하기도 했다.
해방후 이종태는 42세의 늦은 나이로 군에 입대해 <상이군인의 노래>, <조국찬가>, <광복10년> 등을 작곡하고 군대내 음악행사를 진행하면서 진급을 거듭했고, 이후 그의 친일 행적이 감춰지면서 국가유공자로 등재되었는가 하면, 사후에는 부인 스즈키 미사호(鈴木美佐保)와 함께 국립묘지 장군묘역에 묻히기에 이르렀다.
홍영우와 이종태가 일제강점하 탁월한 음악가였던 것은 사실이고, 바로 그점 때문에 <대금강산보>의 음악 작곡자로 선정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1937년 2월20일 밤10시에 최승희, 최승일과 함께 최초의 작곡회의를 열었던 네 사람이 모두 훗날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것은 그리 우연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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