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 초기(1937년 7월~10월), <대금강산보> 제작이 중단된 것은 조선총독부 외사과와 철도국의 지원이 끊겼기 때문이다. 권력 및 재력기관이었던 이 두 부서는 중일전쟁 중의 정보수집 업무와 폭증하는 병력 및 군수물자 수송업무로 무용영화에 관심가질 여유가 없었다.
1937년 10월에 들어서야 이같은 상황이 다소 완화되었다. 일본군은 중국 화북 지역을 장악했고, 상하이에서 승기를 잡았고,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난징 공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특히 랴오뚱과 산뚱반도를 점령한 일본군은 병력과 군수물자 수송을 한반도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졌다. 선편으로 바로 대련이나 청도로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중일전쟁 초기와는 달리 일본군의 조선총독부 의존도가 줄어들면서, 총독부로서는 숨 돌릴 여유가 생긴 것이다.
이에 따라 <대금강산보> 제작 당사자들의 관심도 되살아났다. 최승희와 니카츠 영화사로서는 7월초부터 10월말까지 거의 4개월 동안 끈질기게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10월22일자 <매일신보>는 마침내 <대금강산보> 제작에 대한 철도국의 후원이 확정되었다고 보도했고, 10월27일자 <동아일보>는 철도국 지원금이 1만원이라고 전했다. 철도국 부담액은 전체 제작비의 10분의1에 불과했지만, 니카츠 영화사가 기다린 것은 단지 예산만은 아니었다. 촬영지 선정을 위해 조선의 주요 명승지에 위수령을 내린 일본 군부의 허락도 필요했고, 철도국이 보유한 필름들을 비롯, 각종 대외비 자료도 활용할 수 있어야 했던 것이다.
철도국의 자금 지원이 이뤄지자 니카츠 영화사는 10월25일부터 촬영을 시작했고, 이후 일정은 다시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금강산과 석왕사, 평양과 경주와 부여와 수원에서의 촬영이 전부 야외 로케이션이었는데도 11월 말까지 한 달 만에 완료되었다.
그러나 <대금강산보> 제작을 위한 초창기 열의는 현저하게 식어 있었다. 철도국은 약속했던 지원금을 지급했을 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외사과도 중일 전쟁 정보 업무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특히 <대금강산보> 제작의 산파 역할을 했던 아이카와 외사과장이 사임하자, 무용영화에 대한 외사과의 관심은 크게 줄었고, 최승희나 니카츠 영화사의 요청에 수동적으로 협력하는 정도였다.
열의가 떨어진 것은 니카츠 영화사도 마찬가지였다. 그해 10월 중순까지만 해도 촬영이 시작되지 않았으므로 <대금강산보> 제작이 취소된다 해도 니카츠 영화사로서는 손해날 일이 없었다.
그러나 10월말 촬영이 시작되면서 문제가 달라졌다. 니카츠 영화사는 <대금강산보>를 국내 상영용으로 전환해 비용절감에 들어갔다. 해외 상연이 불가능해진 마당에 굳이 세계 최고 수준의 영화를 만들 필요가 없었고, 따라서 철도국 지원금 외에 자사 예산을 10만원이나 투입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다만 최승희는 입장 변화가 없었다. 그는 반드시 해외 순회공연을 떠난다는 계획이었고, 일정을 연기해서라도 <대금강산보>를 가지고 떠나겠다는 결심이었다. 전쟁과 올림픽 취소로 관련자들의 입장이 모두 변했지만, 세계 순회공연을 앞둔 최승희만은 원래의 목표와 의도를 그대로 유지했다.
따라서 1937년 10월말부터 <대금강산보>가 촬영되고 편집되어 12월21일에 시사회를 가지게 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최승희의 노력 덕분이라고 해야 했다. 만일 이때 최승희까지 <대금강산보>를 포기했다면 이 영화의 제작은 중단되었을 것이다.
1937년 10월은 최승희가 기다릴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었다. 해가 넘어가면 그의 순회공연 자체가 취소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시아에서는 중일 전쟁이 확대되고 있었고, 유럽에서는 히틀러의 재무장으로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유럽에서마저 전쟁이 터진다면 1935년 말부터 2년 이상 준비해온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 계획은 자칫 수포로 돌아갈 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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