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금강산보>에 쏟아졌던 초기의 열의가 사라지자 촬영 및 편집의 밀도가 현저하게 떨어졌다. 원작과 각색, 음악과 안무가 조선과 일본의 최고 전문가들에 의해 이뤄졌던 점은 앞에서 보았다. 하지만 중일전쟁 발발 4개월 후 촬영이 시작될 즈음에는 세계 수준의 무용영화를 만든다는 열의는 사라졌다. 그것은 니카츠 영화사가 구성한 감독과 배우진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니카츠 영화사는 <대금강산보>의 감독으로 미즈가에 류이치(江龍一)를 지명했다. 그는 해외 유학파이기는 했으나 세계 수준의 예술영화 제작 능력이 검증된 감독은 아니었다. 1937922일의 <매일신보>감독은 신진이라고 소개할 정도였다.

 

그는 <어머니의 미소(微笑, 1934)><소집령(召集令, 1935)>에서 와타나베 쿠니오(渡辺邦男) 감독의 조감독으로 실전수업을 받은 뒤 19375개의 영화를 감독한 바 있지만, 그중 4개가 러닝타임 3-40분의 국책 홍보영화였다. 극영화는 19371021일에 개봉된 <연애 하와이 항로(恋愛ハワイ航路)> 한 편이었다.

 

아마도 니카츠 영화사는 미즈가에 류이치 감독이 <연애하와이항로>를 완성한 것을 인정하여 그에게 <대금강산보>의 감독을 맡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극영화 제작 경험이 단 한 편인 감독에게 세계적 수준의 무용 영화제작 책임을 맡긴 것은 의아스러운 결정이 아닐 수 없다.

 

1937년 10월경 <대금강산보> 출연자 및 제작진과 함께 촬영한 기념사진,

 

실제로 미즈가에 류이치는 극영화 부문에서 그다지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고, <대금강산보>가 개봉된 후 19388월에 니카츠 영화사를 떠나 만주영화사로 이적했다. ‘만영에서도 12편의 국책영화를 더 만들었으나 1942년 이후에는 감독으로서의 활동을 중단했다.

 

한편 니카츠가 지명한 출연 배우도 대부분 신인이었다. 여주인공 이승희(李承姫) 역의 최승희부터 신인이었다. 비록 <반도의 무희> 출연경험이 있기는 했지만, 그의 연기가 칭찬받은 적은 없었다. 따라서 상대역의 리드가 필요했다. 하지만 니카츠가 지명한 남주인공 도모다 히데오(友田秀夫) 역의 가사하라 츠네히코(笠原恒彦)조차 데뷔 1년이 막 지난 신인배우였다.

 

더구나 그동안 가사하라 츠네히코가 출연한 8개 영화에서의 역할은 모두 조연이었고, 주연으로 발탁된 것은 <대금강산보>가 처음이었다. 그는 <대금강산보> 이후 4년간 더 배우로 활동했으나 1942년 이후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도 역시 만주영화사로 이적했다가 패전과 함께 영화계에서 은퇴한 것으로 보인다.

 

이승희의 여동생 순희(順姫) 역인 다치바나 키미코(橘公子, 1921- )1936년에 닛카츠에 입사한 이래 2편의 영화에 출연했던 신인이었다. 그나마 그가 출연했던 <꿈의 철모(鉄兜, 1937)><아버지의 노래시계(さんの歌時計, 1937)>는 국책영화였다.

 

이승희의 아버지 역을 맡은 코노 켄지(河野憲治)도 경력 짧은 단역이었고, 도모다 히데오의 어머니역의 미츠이 치에(三井智恵, )<대금강산보>가 처녀출연이었으며 1942년에 배우 생활에서 조기 은퇴했다.

 

1938년 1월26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대금강산보>의 한장면, 이승희 역을 맡은 최승희를 제외한 부친(왼쪽)과 여동생(가운데) 역은 모두 일본인 배우들이 담당했었다.

 

다만 도모다 히데오의 여동생 미에코(美枝子) 역의 무라타 치에코(村田知栄子, 1915-1995)는 중견배우로 1933년에 데뷔한 이래 26편의 영화에 출연한 바 있었다. 그밖에 도모다 히데오의 아버지 역을 맡은 다카기 에이지(高木永二, 1896-미상)와 무용교수 키시이(岸井) 역의 에가와 우레와(江川宇礼雄, 1902-1970)는 베테랑 연기자들이었다.

 

따라서 니카츠 영화사가 지정한 감독과 배우들은 그런대로 구색을 갖추기는 했지만 세계는커녕 일본에서도 일류라고 할 수는 없었다. <대금강산보>의 제작 초기에 보였던 세계 수준의 뛰어난 무용 영화를 목표로 하기에는 모자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니카츠 영화사의 결정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전쟁 중 총동원령이 내려질 것이 뻔한 마당에 <대금강산보>같은 예술영화가 흥행에 성공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제작이 취소되지 않고 진행된다 하더라도 후일의 손실을 줄이려면 현재의 투자를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니카츠 영화사가 당시의 2류 감독과 배우를 썼던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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