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826<モンスーンクラブ>李高恩(·ゴウン)代表はバングラデシュからメールを一通受りましたダッカの市民活動家ムスタイン·ビラ·ザヒル(Mustain Billah Zahir)さんからのメールでした

 

 

ザヒルはモンスーン革命経過結果らせ韓国市民けをめました。 (のメールはこのシリーズの7.ダッカ(ঢাকা)からの手紙原文翻訳文掲載されています。)

 

 

ザヒル<民主化運動記念事業会(KDF)>招請韓国訪問グローバルフォーラムに参加することになっていましたが別途にモンスーン革命学生代表韓国招請してほしいと要請しました

 

学生代表らはモンスーン革命韓国市民らせる一方革命過程死亡した犠牲者調査記録遺族礼遇責任者処罰などにする韓国経験びたいとしました

 

李高恩先生にザヒルさんの要請相談してきた詩人のラビンドラナート·タゴール(রবীন্দ্রনাথ ঠাকুর、1861-1941しましたはインドとしてられていますがバングラデシュでもありますタゴールの故郷がベンガルのコルカタではほとんどベンガルかれました

 

 

はインドがイギリスの植民地だった時期まれインドが独立する死亡しましたがインドとバングラデシュの両方尊敬されています1947にインドが独立するとタゴールの国籍はインドになり1971独立したバングラデシュも1976にタゴールに市民権追叙しました両国はタゴールの国歌にしました

 

タゴールはバングラデシュの独立重要影響ぼしましたバングラデシュがパキスタンの一部だった時期パキスタン政府がベンガル語弾圧でタゴールの作品国営メディアで放送できないよう禁止するとこれにする反発独立戦争につながりバングラデシュは1971独立しました。それだけタゴールの詩歌がバングラデシュ市民の精神世界にとって重要な滋養分となっていたという意味です。

 

 

ところがタゴールは韓国人にもありがたい詩人です1929日本訪問したタゴールは朝鮮訪問要請受諾できなかったことをなく6英文メッセージをいてくれましたこのメッセージはあいうえお作文として翻訳され192942日付東亜日報掲載され翌日(4/3)新聞にはタゴールの筆跡でメッセージの原文掲載されました

 

かつて亜細亜黄金時代

いていた灯火つである朝鮮

そのりをもう一度灯

あなたは東方るいになるだろう

 

 

三一万歳運動以降大韓民国臨時政府まで樹立されましたが朝鮮独立のいて朝鮮人挫折まっていきましたこのアジアとしてめてノーベル文学賞受賞したタゴールがったメッセージは朝鮮民衆にとってきなめとなり抵抗独立のための勇気えてくれました

 

タゴールの予言どおり解放後韓国りをともし東方るいになりつつありましたにバングラデシュの民衆大韓民国民主化経済成長羨望めているそうです

 

 

ザヒル氏は韓国の聖公会大学社会学科大学院で「韓国の民主化過程」を専攻した財源で、彼は「バングラデシュのモンスーン革命は事件の展開とその精神において光州の5·18抗争と類似性が多く、その精神が私のようなバングラデシュの人々に大きなインスピレーションを与えた」と伝えました。

 

朝鮮暗鬱だった時期朝鮮人のために希望ってくれたタゴールをいながら李高恩先生はバングラデシュの若者たちの要請れることにしました一世紀前にタゴールにけた民族歴史的恩恵すことができる機会だとったからです

 

 

<モンスーンクラブ>最初のバングラデシュキャンペーンはこのようにまりました(jc2024/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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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August 26, 2024, Ms. Lee Go-eun, the representative of the Monsoon Club, received an email from Bangladesh. It was an email from Mustain Billah Zahir, a civic activist in Dhaka.

 

 

Mr. Zahir asked for help from Korean citizens while informing them of the progress and results of the Monsoon Revolution. (The original and translated versions of his email are included in “7. Letters from Dhaka (ঢাকা)” in this series.)

 

 

Mr. Zahir was scheduled to visit Korea at the invitation of the Korea Democracy Foundation(KDF) to participate in the global forum, but he requested that additional student representatives of the Monsoon Revolution be invited to Korea.

 

The student representatives' missions are to inform Korean citizens of the Monsoon Revolution and learn about Korea’s experience in investigating and recording of Kwangju Uprising in 1980.

 

When Ms. Lee Go-eun told me about Mr. Zahir’s request, I immediately thought of the poet Rabindranath Tagore (রবীন্দ্রনাথ ঠাকুর, 1861-1941). He is known as an Indian, but he is also a Bangladeshi. Tagore’s hometown is Kolkata on the Bay of Bengal, and most of his poetry was written in Bengali.

 

 

Although he was born when India was a British colony and died before India gained independence, he is revered in both India and Bangladesh. India's national anthem “Jana Gana Mana” (the original Bengali title is ভারত ভাগ্য বিধাতা ) and Bangladesh's national anthem “Amar Shonar Bangla” (আমার সোনার বাংলা , Amar Shonar Bangla) are songs by Tagore. “Bangla Mati Banglar Jol” (বাংলার মাটি বাংলার জল , Banglar Mati Banglar Jol), the state anthem of West Bengal, a state located in the Bay of Bengal but a territory of India, is also a song by Tagore.

 

 

Tagore had a significant influence on Bangladesh’s independence. When Bangladesh was part of Pakistan, the Pakistani government suppressed the Bengali language and prohibited the broadcasting of Tagore's poems in the state-run media. The backlash against this policy led to the war of independence, and Bangladesh gained independence in 1971. This means that Tagore's poems were an important source of nourishment for the Bangladeshi spirit.

 

 

Koreans are also grateful to Tagore. When Tagore visited Japan in 1929, feeling sorry for not being able to visit Korea, he wrote a six-line English message to Korean people. This message was translated into a four-line poem and published in the Dong-A Ilbo on April 2, 1929, and the original English message in Tagore's handwriting was also published in the newspaper the next day (4/3).

 

In the golden age of Asia,

Korea was one of its lamp-bearers,

and that lamp is waiting

to be lighted once again,

for the illumination

in the East.- Rabindranath Tagore (28th March, 1929)

 

 

After the March 1st Movement,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was established, but Korea’s independence was far away and the frustration of the Korean people deepened. At that time, the message from Tagore, the first Asian to win the Nobel Prize in Literature, was a great comfort to the Korean people and unprecedented encouragement for independence.

 

As Tagore predicted, after liberation from Japanese occupation, Korea once again lit its lamp and became a bright light in the East. It is even said that Bangladeshis regard Korea as an example of achieving democratization and economic growth.

 

 

Mr. Zahir, a talented activist who majored in “The Process of Democratization in Korea” during his graduate study at Sungkonghoe University in Korea, said that "Monsoon Revolution in Bangladesh has a lot of similarities with the events and spirit of May 18 uprising. And, it was a great inspiration for the people like me." 

 

Thinking of Tagore, who sang hope for the Korean people during their darkest times, Ms. Lee, Go-eun and I decided to accept the request of Mr. Zahir. We thought it was an opportunity to repay the historical favor Korean people owed Tagore a century ago.

 

 

This is why and how the first Bangladesh campaign of <Monsoon Club> began. (jc, 2024/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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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826<몬순클럽> 이고은 대표는 방글라데시로부터 이메일을 한 통 받았습니다. 다카의 시민활동가 무스타인 자히르(Mustain Zahir)씨가 보낸 이메일이었습니다.

 

 

자히르씨는 몬순혁명의 경과와 결과를 알리면서, 한국 시민들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의 이메일은 이 시리즈의 7. 다카(ঢাকা)에서 온 편지에 원문과 번역문이 게재되어 있습니다.)

 

 

자히르씨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KDF)>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 글로발 포럼에 참여하게 되어 있었지만, 별도로 몬순혁명의 학생 대표를 한국에 초청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학생 대표들이 몬순혁명을 한국 시민들에게 알리고, 혁명 과정에서 사망한 희생자들의 조사와 기록, 유가족 예우, 책임자 처벌 등에 대한 한국의 경험을 배우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고은 선생이 내게 자히르씨의 요청을 알려주었을 때,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রবীন্দ্রনাথ ঠাকুর,1861-1941)가 생각났습니다. 그는 인도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방글라데시 사람이기도 합니다. 타고르의 고향이 벵골만의 콜카타이고, 그의 시는 대부분 벵갈어로 쓰였습니다.

 

 

그는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기에 태어났고, 인도가 독립하기 전에 사망했지만, 인도와 방글라데시에서 모두 존경을 받습니다. 인도의 국가 "야나 가나 마나(Jana Gana Mana, 원래의 벵갈어 제목은 ভারত ভাগ্য বিধাতা )"와 방글라데시의 국가 "아마르 쇼나르 방글라(  আমার সোনার বাংলা , Amar Shonar Bangla)"는 타고르의 노래입니다. 

 

 

타고르는 방글라데시의 독립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방글라데시가 파키스탄의 일부이던 시기, 파키스탄 정부가 벵갈어 탄압으로 타고르의 작품을 국영언론에서 방송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자, 이에 대한 반발이 독립전쟁으로 이어졌고, 방글라데시는 1971년 독립했습니다그만큼 타고르의 시가들이 방글라데시 시민들의 정신세계에 중요한 자양분이 되고 있었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런데 타고르는 한국인에게도 고마운 시인입니다. 1929년 일본을 방문한 타고르는 조선 방문 요청을 수락하지 못한 것을 미안하게 여기면서, 6행의 영문 메시지를 써 주었습니다. 이 메시지는 4행시로 번역되어 192942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되었고, 다음날(4/3) 신문에는 타고르의 필체로 메시지의 원문도 실렸습니다.

 

일찍이 아세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촉의 하나인 조선

그 등불 한 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삼일만세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지만, 조선의 독립은 요원했고 조선인의 좌절은 깊어갔습니다. 이때 아시아인으로서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타고르가 보낸 메시지는 조선민중에게 큰 위안이 되었고, 저항과 독립을 위한 용기를 북돋아주었습니다.

 

타고르의 예언대로 해방 후 한국은 다시 한 번 등불을 켰고, 동방의 밝은 빛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특히 방글라데시의 민중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합니다.

 

 

자히르씨는 한국의 성공회대학교 사회학과 대학원에서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전공한 재원으로, 그는 방글라데시의 몬순혁명은 사건의 전개와 그 정신에 있어서 광주의 518항쟁과 유사성이 많으며, 그 정신이 나같은 방글라데시 사람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고 전했습니다.

 

조선이 가장 암울하던 시기에 조선인들을 위해 희망을 노래해 주었던 타고르를 생각하면서, 이고은 선생과 저는 방글라데시 젊은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한 세기 전에 타고르에게 진 민족의 역사적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몬순클럽>의 첫 번째 방글라데시 캠페인은 이렇게 결정됐습니다. (jc, 2024/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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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 몬순혁명 청년-학생 대표 3인은 117<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Korea Democracy Foundation)>가 주최한 글로벌 포럼에 참석했습니다.

 

 

청년대표 무스타인 빌라 자히르(Mustein Billah Zahir)씨는 이 포럼에서 방글라데시 7월혁명과 저항의 언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고, 118일의 간담회에는 학생대표 사미아 악타르(Samia Akther)씨와 모스피쿠르 라흐만 조한(Mosfiqur Rahman Johan)도 참여했습니다.

 

아래는 이 포럼에 참석했던 몬순혁명 학생대표 사미아 악타르씨가 작성한 보고서입니다. 번역문과 원문을 전해 드립니다. (jc, 2024/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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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KDF) 글로벌 포럼 보고서 by 사미아 악타르

 

오늘 포럼의 주제는 아시아 민주주의의 강화: 연대의 비전입니다. 세계 민주주의 증진을 위한 국제 협력을 이루고,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고 있는 나라들에게 연대를 표시하는 것이 주요 의제였습니다.

 

 

 

연구자, 활동가, 젊은 리더 등의 여덟 명의 연사가 패널에 참가했습니다. 이들은 아시아 각국의 정치 상황, 민주화 과정에서 직면한 난관, 그런 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 그리고 민주주의 증진을 위해 국제 협력이 점점 더 필요하다는 점 등을 토론했습니다.

 

포럼에서는 민주주의 강화를 위해 포괄적인 파트너십, 시민 민주주의 교육을 위한 제도적 플랫폼, 정부와 민간 부문의 협력 등이 권고되었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책과 출판물을 제공하고 민주주의 교육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의 시민 교육이 특히 중요하다고 강조되었습니다.

 

민주주의와 기후 문제의 관계도 여러 시각에서 논의되었고,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생기는 부작용도 지적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모든 민주화 운동에서는 청년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습니다. 따라서 청년 활동가들이 정당에 참여해 그들의 아이디어를 내고 그들의 경험을 활용하는 것이 민주화 과정에 꼭 필요하다는 인식이 강조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민주화 경험이 자주 토론에 등장했는데, 이는 민주화 과정 중에 있는 여러 나라들에게 중요한 교훈입니다. 대한민국의 경제적 번영의 원동력은 민주주의였다는 점, 그리고 민주화 운동의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한국이 취한 주도적인 노력들이 중요했다고 강조되었습니다.

 

 

오늘 포럼의 결론은 민주주의가 고정된 최종 상태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향해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할 운동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민주화를 위해 국경을 넘어 함께 노력할 국제 공동체를 만들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강조는 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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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미아 악타르씨의 포럼 보고서 원문)

 

Report on KDF's Forum Session by Samia Aktar

 

Today’s forum was on “Empowering Asian Democracy :A Vision of Unity.” The agenda of the forum were creating international cooperation for promoting democracy worldwide and expressing solidarity with the countries struggling for democracy.

 

This forum was organized through an important discussion by a panel of 8 speakers. Researchers, activists, young leaders have participated in the panel discussion. The topics discussed included the current governance situations of various Asian countries, the challenges they are facing in democratic processes, solutions for overcoming those challenges, and the need of increasing international cooperation in promoting democracy.

 

"The recommendations to empower democracy that were highlighted in the discussion include inclusive partnerships, institutional platforms like civic education on democracy, government and private sector cooperation.

 

To empower democracy special emphasis has been given on civic education through providing free books, publications, organizing educational seminars.

 

The relationship between democracy and climate has been discussed from a very dimensional perspective and the development of democracy and its side effects has also been pointed out in the discussion.

 

In all democratic movements throughout history, the youth have played a key role.In democratization process, inclusion of young activists in the party framework to unfolds their idea and to utilize their experience has been felt necessary.

 

The experience of South Korea towards democratization has been shared in the discussion that would be a great learning for other countries struggling for democracy. "Democracy is considered to be the key behind South Korea's economic prosperity, and various initiatives taken by Korea to maintain the spirit of the democratic movement were highlighted.

 

The conclusion of today’s forum is democracy is not the ultimate thing, rather democracy is a movement itself to be continued for democracy .So,we need to work together to make an international community across border for democratiza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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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순클럽(대표 이고은)>이 한국에 초청한 또 한명의 학생대표는 사미아 악타르(Samia Akther)씨입니다.

 

사미아씨는 다카대학 법과대학원에 재학 중, 지난 7-8월의 몬순혁명에 참가했고 반정부 시위의 조직리더(coordinator)로 활동했습니다. 조직리더이란 시위를 기획하고 학생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시위대를 지휘하는 역할입니다.

 

 

사미아씨가 사전에 보내온 영상 및 서면 자료에 따르면 방글라데시의 몬순혁명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습니다. 이 전 과정은 사미아씨가 시위조직 리더로서 주도했거나 직접 목격한 것이라고 합니다.

 

공무원 할당제

 

714일 하시나 전총리는 기자회견에서 시위대를 라자카르(Razakar, রাজাকার)"라고 모욕했습니다. 당시 하시나의 발언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자유투사(freedom fighters)의 자손들이 공무원 할당 혜택을 받지 못한다면, 그 혜택이 라자카르의 자손들에게 가지 않겠는가?“

 

 

1971년 방글라데시가 파키스탄의 압제와 차별대우에 저항해 독립전쟁을 일으켰을 때, 독립투사의 투쟁을 방해한 민병대가 라자카르였습니다.

 

예수를 배신한 가룟유다, 일제강점기 일제에 빌붙어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을 방해하던 간도특설대 같은 존재라는 말입니다.

 

1971년 독립직후 방글라데시 정부는 공직 할당제를 도입했습니다. 독립을 위해 싸운 자유투사들에게 30%, 독립전쟁 중에 강간당한 여성들에게 10%, 저개발지역 출신자에게 40%의 공직을 할당했습니다. 최초의 공직할당제로 80%의 공직이 특정 계층에 할당되었고, 20%만이 공개 채용에 할당되었습니다. 1972년에 시작된 이 공무원 할당 제도는 이후 46년간 지속되면서 자유투사들의 자녀들까지 그 혜택을 받았습니다.

 

이에 공무원 할당제가 차별적 제도라는 주장이 대두되어 개혁운동이 일어났고, 2018년 방글라데시 대법원은 공무원 할당제가 위헌이라는 이유로 이를 크게 폐지했습니다.

 

 

하시나 정권은 2022년 공무원 할당제의 재도입을 위해 소송을 제기하게 했고, 202465일 대법원이 공무원 할당제가 합헌이라면서 하시나 정권의 손을 들어주자, 이후 방글라데시 공무원 일자리의 30%를 다시 자유투사들의 손자들에게 할당한 것입니다.

 

여성과 소수민족, 장애자 등의 소수계층에 할당된 공직을 합치면 56%의 공무원 일자리를 제외한 44%의 공무원 일자리가 일반인들에게 할당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내가 라자카르.

 

문제는 최근 방글라데시의 청년 실업률이 15%를 넘어섰다는 점입니다. 이는 전체 실업률보다 3배나 높습니다.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대학졸업자 중에서 20%2년 이내에 취업하지 못합니다. 공무원 일자리마저 절반 이상이 할당제로 돌려진다면, 취업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할당제 이전의 방글라데시 공무원 취업 경쟁률은 100대1이 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공무원 할당제가 재개된다면 공무원 취업 경쟁률은 2배로 증가해 200대1에 근접하게 됩니다. 

 

이에 대학생들은 공무원 할당제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발표된 202465일부터 공무원 할당제 개혁을 요구하는 시위를 시작했고, 하시나 정부는 이를 탄압했습니다.

 

이같은 상황에서 하시나 총리가 714일의 기자회견에서 시위대를 배신자들이라고 몰아붙인 것이지요.

 

 

이날 전국의 대학생들은 하시나의 모욕적 발언에 분개했고, 본격적으로 시위를 조직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미아씨도 다카대학교 여학생 기숙사 학생들의 야간 시위를 주도했습니다. 당시 학생들의 구호는 내가 라자카르다.(আমি রাজাকার)“였습니다.

 

다카대학교 여학생들의 시위 영상을 보면, 선창자가 너는 누구냐, 나는 누구냐?“고 물으면, 시위대가 소리 높여 라자카르, 라자카르하고 외치면서 행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তুমি কে? আমি কে? (Tumi Ke? Ami Ke? = 'Who are you? Who am I?)

রাজাকার, রাজাকার। (Razakar, Razakar.)

 

그런데 이 구호는 1971는 파키스탄과 그 앞잡이 라자카르에 대항해 독립투사들이 외치던 구호를 변형한 것입니다. 당시의 구호는 이와 같았습니다.

 

তুমি কে? আমি কে? (Tumi Ke? Ami Ke? = 'Who are you? Who am I?)
বাঙালি, বাঙালি (Bengali, Bengali!)

 

흥미로운 사실은 라자카르라는 말은 아랍어 레다카렌(رضا کار)’에서 유래한 말로 자원봉사자(volunteer)"라는 뜻입니다. 하시나는 시위대를 가리켜 배신자들이라고 매도했지만, 시위대는 이에 맞서 그래, 내가 자원봉사자다라고 맞받아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시위대는, 방글라데시 독립 반세기가 경과한 지금, 하시나 정권이 파키스탄의 독재체제나 다름없으며, 자신들이 방글라데시의 새로운 자유투사라고 주장한 셈입니다.

 

하시나 정권의 탄압

 

714일 밤 다카대학 여학생들의 격렬한 시위를 계기로, 이튿날부터 정부는 군경과 여당지지자들을 투입해 대학생들을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715일 다카대학교 캠퍼스에서 평화적 시위가 개최되었을 때, 하시나 지지자들이 몽둥이와 하키스틱으로 휘두르며 시위대를 습격했고, 군경은 총을 발사했습니다.

 

여학생들의 시위에 폭력을 휘두른 것은 방글라데시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여학생들이 부상자를 인근 다카대학병원으로 옮기자, 여당지지자들은 병원 안으로까지 침입해 테러를 가했습니다.

 

 

716일 반정부 시위대 중에서 첫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베굼 로케야(Begum Rokeya) 대학교 학생 아부 사이드(Abu Sayed)가 진압 경찰의 총격에 맞아 사망한 것입니다.

 

이날 시위에서는 아부 사이드를 포함 6명의 학생들이 사망했고, 수백 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사망자가 발생하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습니다. 여당지지자들이 학생들을 대학교 기숙사에 감금하고 린치를 가하거나 고문을 자행했지만, 사미아가 조직한 여학생 시위대는 다카대학교 기숙사 정문에서 시위를 계속했습니다.

 

717일 아부 사이드의 장례식과 기도회가 다카대학교 캠퍼스에서 열렸습니다. 장례식이 끝난 후 430분경부터 학생들은 관을 운구하면서 캠퍼스를 행진했고, 경찰은 장례 행진에 소음수류탄과 최루탄을 난사했습니다.

 

 

이날 다카대학교에 무기한 휴교령이 내려졌고, 모든 학생들은 기숙사에서 나가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휴교령과 기숙사 퇴거명령이 진행되는 가운데서도 경찰은 소음수류탄을 투척했습니다. 학생들은 강압적으로 기숙사를 떠나야했습니다.

 

인터넷 폐쇄와 전국적 통금조치

 

719일부터 하시나 정권은 전국의 인터넷을 폐쇄하고 통금을 실시했고, 그와 함께 군대를 배치하기 시작했습니다. 군대는 무작위로 학생들을 연행했고, 경찰과 기타 정부요원들도 시위대를 체포했습니다.

 

다카시 경찰국(Dhaka Metro Police)717-18일 이틀 동안 1,117명을 체포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경찰의 체포와 연행으로 시위대 조직리더 6명이 구금되었고, 경찰은 이 6명의 학생들을 협박해 모든 시위를 중단하라는 성명서를 낭독하게 했습니다.

 

 

인터넷 폐쇄로 발생한 통신 부재의 상태에서 하시나 정권은 (1) 대량 학살, (2) 과도한 폭력, (3) 잔인한 공격, (4) 구금과 고문, (5) 살상, (6) 정보 억압 등의 만행을 자행했습니다.

 

이같은 조치들은 방글라데시가 민주국가인지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강제실종, 사법외 살인, 무작위 체포, 폭력행사 등이 수시로 하시나 정권에 의해 자행되었지만, 7월의 반정부 시위대에 가해진 하시나 정권의 반민주적 탄압은 극에 달했습니다.

 

정권 퇴진운동의 시작

 

이때부터 공무원 할당제 개혁요구시위는 하시나 정권 타도 운동으로 확대됐습니다.

 

하시나 정권의 (1) 국민의 투표권 박탈, (2) 표현의 자유 박탈, (3) 언론 탄압, (4) 야당 탄압, (5) 부정부패, (6) 돈세탁, (7) 학생 테러조직 운영 등이 집중적으로 비판되기 시작했습니다.

 

공무원 할당제 개혁 요구가 하시나 정권 타도 운동으로 번지면서, 학생들이 주도했던 반정부 시위에 일반 시민들이 대거 참여했습니다.

 

이같은 학생-시민의 시위로 결국 권위주의적 정권을 무너뜨리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지난 15년 동안 억눌렸던 분노가 폭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시위는 날로 증폭되었고, 하시나 정권은 군대와 경찰에게 즉각사격(shoot at sight)의 발포명령을 내렸습니다. 총격 사망자 수는 650(공식)-1,000명 이상으로 늘어났습니다.

 

학생과 시민의 희생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자, 군대와 경찰은 하시나의 발포명령을 더 이상 따르지 않기로 결정하고 통보했습니다.

 

 

85, 시위를 저지할 방편이 없어진 하시나는, 학생들과 시민들의 시위대가 총리공관으로 행진해 들어오는 가운데, 급히 사임하고 헬기와 항공기를 이용해 인도로 망명했습니다. 이로써 15년간 계속된 하시나 정권의 독재적, 권위주의적 통치가 막을 내렸습니다.

 

과도기의 정의

 

87, 몬순혁명의 학생 대표들은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무함마드 유누스를 임시과도정부의 수반으로 추천했고,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하시나 정권의 탄압으로 방글라데시를 떠나 파리에 체재 중이던 유누스는 이를 수락했습니다.

 

임시과도정부는 성공한 혁명을 안착시키고 방글라데시를 민주사회로 이행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은 6개 부문의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1) 진실 발굴: 인권위반 행위를 조사하고, 피해자들의 현황을 파악하며, 정부기관에 의해 살상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2) 형사 기소: 모든 형태의 범죄를 자행한 하시나 정부의 책임자들과 공범들을 기소해 재판에 회부한다.

(3) 보상 회복: 피해자들에게 국가의 사과를 전달하고, 금전적 보상과 재정 지원을 제공하고, 공동체를 재건하기 위한 사회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4) 제도 개혁: 경찰, 군대, 사법제도 등이 인권을 유린하고 형사사법 원칙을 위반하지 못하도록 제도와 기관들을 개혁한다.

(5) 국민 참여: 피해자와 시민사회, 그리고 피해를 입은 공동체들의 요구에 부응하고, 이들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는 제도와 프로그램을 시작한다.

(6) 문화 책임: 인권에 대한 책임과 존중을 증진시키는 사회 규범을 진작하여, 장기적인 평화와 안정에 기여한다.

 

국제사회의 협력 요청

 

사미아씨는 자신의 발표문에서 방글라데시가 민주사회로 순로롭게 진행할 수 있도록 국제사회의 관심과 협력을 요청했습니다.

 

 

(1) 진실 위원회가 그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인권 위반 사례나 사실들을 알려주세요.

(2) 진실 위원회와 법제도 개혁 위원회가 과도기 정의를 구현할 수 있도록 지방정부와 시민사회에 필요한 기술적 지원과 자원을 제공해 주세요.

(3) 과도정부가 국제적인 인권기준을 유지하도록 요구함으로써 과도기 정의의 기본틀이 유지되도록 후원해 주세요.

(4) 반인권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을 국제재판소나 국내재판소로 기소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시고, 향후 유사한 범죄가 발생하지 않도록 후원해 주세요.

(5) 국제적 인권 규범에 부합하는 과도기 정의의 원칙을 유지하고, 다른 나라들도 유사한 기준을 채택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세요.

 

방글라데시 여성의 사회적 지위

 

한편, 방글라데시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매우 모순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지난 35년 동안 방글라데시의 국가수반은 여성이었습니다. 칼레다 지아(1991-1996, 2001-2009)와 셰이크 하시나(1996-2001, 2009-2024)가 그들입니다. 여성 총리의 리더십 아래 모든 정부기관은 33%이상의 여성 지도자들을 임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또 대학생들에 의해 시작된 이번 몬순혁명에서도 여학생들의 참여율이 높았고, 반정부 시위를 주도한 사미아와 같은 여성들의 활동도 돋보였습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방글라데시 여성의 초중등학교 취학률은 대략 51%로 남성보다 비슷하거나 더 높지만, 대학과 대학원 등의 고등교육기관 취학률은 남성의 절반에 불과합니다. 202342개 공립대학 여학생 비율은 37%, 103개 사립대학 여학생 비율은 28%에 머물고 있습니다.

 

방글라데시 여성의 아동 결혼률이 매우 높습니다. 2020년 통계에 따르면, 18세 이전에 결혼하는 여성이 51%, 이중 15세 이전에 결혼한 여성은 15%에 달합니다. 그나마 이는 1970년의 93%77%에 비하면 많이 낮아진 수치입니다.

 

 

2023년 여성의 취업률(37%)은 남성(80%)의 절반 이하이며, 노동인구 중 여성의 실업률(5.9%)은 남성(2.8%)에 비해 두 배나 높습니다.

 

즉 방글라데시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 고등교육과 취업의 기회를 절반밖에 갖지 못하고 있으며, 대부분 가정생활과 저임금취업에 묶여 있다는 뜻입니다.

 

 

또 대학교의 여학생들은 재학 중 학업이나 생활에서 불이익을 겪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습니다. 특히 캠퍼스에서 교수나 남학생들에게 성희롱이나 추행을 당하는 경우가 많으며, 심지어 기숙사에서의 강간사건도 빈번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여성의 불이익은 점차 개선되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방글라데시의 여성의 지위는 아직도 세계 최하 10개국으로 분류될 정도입니다.

 

 

다만, 몬순혁명과 함께 방글라데시가 민주사회로 빠르게 이행한다면, 가정, 교육과 취업 등의 사회생활에서의 남녀의 격차도 빠르게 줄어들 것으로 기대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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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순 클럽(대표 이고은)>은 방글라데시 시민혁명의 학생대표 2명을 한국에 초청했습니다. 사미아 악타르(Samia Akther)씨와 모스피쿠르 라흐만 조한(Mosfiqur Rahman Johan)씨입니다.

 

이들은 지난 1030일 한국 입국비자를 발급받았고, 114일 한국에 도착, 1111일까지 서울과 광주 등을 방문해서, 몬순혁명의 배경과 경과를 설명하고, 혁명의 기록과 희생자 예우를 위한 자문을 구하게 됩니다.

 

 

모스피쿠르 라흐만 조한씨는 사립 브라크 대학에서 인류학을 전공했고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로 활동 중입니다.

 

그는 사진전과 SNS포스팅을 통해 방글라데시의 강제실종, 사법외 살인, 강제구금, 경찰의 잔혹행위 등을 기록하고 고발해 왔습니다.

 

하시나 정권 하의 강제실종

 

이번 방한을 통해 모스피쿠르씨는 방글라데시 전역에서 벌어진 강제실종과 사법외 살인의 실태를 발표할 예정입니다.

 

강제실종(enforced disappearance)이란 민간인이 법원의 영장 발부 없이 경찰과 정보기관, 군과 준군사조직 등에 의해 체포, 구금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법외 살인(extrajucial killing)이란 적법한 사법절차에 의하지 않은 정부의 민간인 살해행위를 가리킵니다.

 

 

민간인을 체포하거나 살해하면서도 기록을 남기지 않기 때문에 가족들조차 강제실종자들의 생사를 알 수 없고, 구금된 장소도 알 수 없습니다.

 

주로 야당 지도자들과 반정부 활동가들이 강제 실종되기 때문에, 고문과 잔혹행위가 자행되는 경우가 많고, 고문 중에 사망하더라도 사체가 암매장되거나 유기되기 때문에 가족들에게 전해지지 않습니다.

 

강제실종은 1930년대 나치 독일 치하에서 빈번하게 자행되었고, 1960년대에는 중남미의 군사정부들이 공포 정치의 수단으로 채택하곤 했습니다.

 

 

방글라데시의 인권단체인 오디카르(odhikar.org)에 따르면 하시나가 집권한 2009년부터 2024년까지 방글라데시의 강제실종자는 708명입니다.

 

이는 강제실종자 피해자연합회를 통해 파악된 숫자이기 때문에, 실제 강제실종자와 강제실종 중의 사망자 규모는 훨씬 클 것으로 추측되었습니다.

 

 

그러나 하시나 정부는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강제실종 관행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 왔습니다.

 

방글라데시의 경찰 기록은 일반기록(GD)와 중범죄기록(FIR)으로 나뉘지만, 가족들이 강제실종을 신고하더라도 경찰은 실종의 불법유무를 판단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 두 기록에 등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가족들의 조사 요구를 묵살한 것이지요.

 

나아가 하시나 정부는 피해자 가족들을 통해 강제실종을 조사하고 기록해 온 인권단체 오디카르를 탄압했습니다.

 

 

2018년 오디카르의 선거참관 자격을 박탈했고, 2022년에는 국가 위신을 실추시켰다는 이유로 시민단체 자격을 박탈했습니다. 2023년에는 정부의 인권위반 상황을 출판했다는 이유로 오디카르의 대표와 사무총장에게 2년 징역형을 부과했습니다.

 

UN과 인권감시(Human Rights Watch), 국제앰네스티 등의 국제기구들은 하시나 정권에게 이같은 인권유린 행위를 중지하도록 반복적으로 경고했지만, 아무 변화가 없었습니다.

 

하시나 정권의 공포정치와 신속대응부대(RAB)

 

방글라데시의 강제실종은 주로 신속대응부대(RAB, Rapid Action Battalion)라는 군사조직이 자행했습니다.

 

역설적인 사실은 RAB가 원래 하시나의 아와미리그(AL)가 야당이던 시절인 2004년 당시 총리 칼레다 지아가 이끄는 방글라데시 민족주의자 정당(BNP) 집권 하에서 조직되었다는 점입니다.

 

 

범죄와 테러에 신속하게 대응한다는 명분 아래 활동을 시작한 RAB의 요원들은 방글라데시 육해공군과 경찰, 국경수비대와 최대 준군사조직인 안사르(Ansar)에서 차출된 군인들로 충원됩니다.

 

이들은 명령받은 임무수행 중의 행위에 대해 면책특권을 부여받고 있었기 때문에, 사법외 살인과 강제실종의 소지가 있었습니다.

 

당시 야당이던 아와미 리그(AL)와 하시나 당수는 RAB헌법조항과 인권법과 사법절차를 공공연하게 무시하는 조직이라고 비판하면서 그 해체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2009년 아와미 리그가 집권하고 하시나가 총리에 취임하면서 RAB는 해체되기는커녕 오히려 조직이 증설되고 활동이 강화됐습니다. 20055,500명이던 BAT요원들이 202115개 부대에 편성된 15,000명으로 증가했습니다.

 

미국과 영국의 RAB 지원과 제재

 

2010년 영국과 미국 정부가 방글라데시의 RAB의 훈련에 관련되었다는 증거가 발견되었고, 따라서 서방 국가들도 방글라데시의 강제실종과 사법외 살인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는 주장도 제기됐습니다.

 

20211221<아틀란틱 협의회(Atlantic Council)>에 발표된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학교 석좌교수 알리 리아스(Ali Riaz)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RAB 창설 직후인 2005년부터 이 단체가 사법외 살인과 강제실종에 관련된 것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200565일 미국의 맥컬프 자문위원은 2004년 출범한 RAB의 초대 부대장 초두리 파즐룰 바리(Chowdhury Fazlul Bari) 중령으로부터 크로스파이어(=사법외 살인을 가리킴)는 단기적인 필수 방편이라는 발언을 듣고도 묵인했다고 한 것입니다.

 

리아스 교수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2009년에도 RAB에 인권 교육 훈련을 제공했고, 영국 정부도 2008-2011RAB심문 기술교전 수칙훈련을 제공했습니다.

 

이는 미국과 영국 정부가 RAB의 수사와 심문이 인권을 침해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이를 바로잡기 위한 훈련을 제공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리아스 교수는 또 2009년 제임스 모리아티 미국대사가 RAB방글라데시의 테러진압을 위한 최고의 수단이라고 말하고서 앞으로 RAB는 미국의 FBI와 같은 기관으로 자리잡을 것이라고 전망했던 사실도 지적했습니다.

 

방글라데시의 RAB가 효과적인 수사기관이 될 것을 기대하면서, RAB의 인권침해 활동을 묵인했던 것으로 해석됩니다.

 

미국 정부는 또 2019RAB 간부들을 미국으로 초청해이 지역 기반 SNS 감시체계 소프트웨어사용법 교육을 받도록 했는데, 이는 하시나 정권의 RAB가 반정부 활동가나 야당 지도자들의 위치를 추적하는 데에 활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미국과 영국 정부의 RAB 지원 사실이 마침내 양국 의회에 알려져 제재 요구가 제기됐습니다. 202010명의 미국 상원의원들이 마이크 폼페이 국무장관과 스티븐 먼친 재무장관에게 방글라데시 RAB 간부들을 제재할 것을 요구했고, 영국 의회에서도 202115명의 전,현직 RAB 간부들을 제재하라는 요구가 제출되었습니다.

 

이에 미국은 2021년 강제실종과 사법외 살인의 주범으로 지목된 RAB 간부들에 대해 입국금지조치를 내리는 등, 방글라데시 정부에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고, 이와 함께 RAB의 강제실종과 사법외 살인의 건수는 현저하게 감소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도됐습니다.

 

 

미국과 영국 정부가 강제실종과 사법외 살인을 자행한 방글라데시의 RAB를 지원해왔다는 사실에 대한 임시과도정부의 입장이 무엇인지, 이고은씨를 통해 무스타인 빌라 자히르씨에게 질문했으나, 이 글을 포스팅하는 시간까지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혁명의 수습과 방글라데시 내부 개혁에 집중하고 있는 유누스 과도정부로서는 아직 내정과 외교 문제를 동시에 정리하거나 책임을 물을 단계가 아닌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드러나는 강제실종과 사법외 살인

 

하시나 정권이 무너지고 임시과도정부에서 강제실종과 사법외 살인 피해조사를 시작하자,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강제실종 구금자보다 살해된 사람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강제실종의 목표가 구금이 아니라 살해였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카에서 발행되는 벵갈어 신문 <보니크 바르타(Bonik Barta)>에 따르면, 하시나가 집권한 2009-2023년 사이에 677명이 강제실종으로 구금됐고, 구금 중 사망자 수가 1,048명에 달한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같은 기간 사법절차를 거치지 않고 정부기관에 의해 살해된 방글라데시의 사법외 살인 희생자가 적어도 2,699명에 달한 것으로 보도됐습니다.

 

유누스가 이끄는 임시과도정부는 2024829일 하시나 정권이 지속적으로 회피해 온 강제실종 국제협약에 가입했습니다.

 

그와함께 전직 판사와 고위직 공무원과 사회활동가로 구성된 강제실종 조사위원회를 발족, 하시나 정권 하에서 자행된 강제실종과 사법외 살인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하시나 정권의 인권유린 사례가 확인되기 시작함에 따라 임시과도정부는 20241017일 전총리 셰이크 하시나와 44명의 전직 고위관료들에게, 이들이 민중 봉기 기간에 자행한 학살과 살인, 반인권 범죄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했습니다.

 

모스피쿠르 라흐만 조한씨의 피해자 기록

 

모스피쿠르씨는 이번 방한 기간 적어도 2차례의 간담회를 통해 하시나 정권 하에서 자행된 강제실종과 사법외 살인의 피해자와 가족들의 실태를 발표할 예정입니다.

 

그동안 강제실종과 사법외 살인 피해자의 가족들을 취재해 온 모스피쿠르씨는 이번 한국 발표를 위해 85쪽에 달하는 피해자 관련 자료를 보내왔는데, 그 대부분은 강제실종 피해자 가족들의 증언과 이들이 지내온 고통의 순간들이 담겨 있습니다.

 

 

모스피쿠르씨가 전한 자료 중에는 강제실종 아카이브가 포함됩니다. 하시나 정권이 강제실종 자체를 부정하고 조사를 거부해온 가운데, 피해자 가족들은 강제실종된 부모, 남편과 아내, 아들과 딸에 대한 가능한 모든 기록을 보관해 왔는데, 이 기록들을 한데 모아 아카이브를 구성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강제실종과 관련된 신문기사와 사진, 영상과 CCTV기록, 가족들의 일기와 메모 등이 포함되어 있어, 향후 조사와 처벌, 피해보상 등을 위한 소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공포정치를 극복한 몬순혁명

 

강제실종과 사법외 살인은 하시나 정권이 지속적으로 활용한 통치기법임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유엔을 포함한 국제인권단체들이 지속적으로 이를 중지하도록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시나 정권은 이를 계속해 왔습니다.

 

 

이는 정치적 반대자들을 납치하고 살해함으로써, 전국민을 공포로 몰아넣는 방법으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모스피쿠르씨의 발표는 방글라데시 국민들이 경험해 온 공포와 슬픔을 대변합니다.

 

무스타인 빌라 자히르씨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국제포럼 발표문이 몬순혁명의 경과와 결과를 요약한다면, 모스피쿠르씨의 강제실종과 사법외 살인의 기록은 몬순혁명의 배경을 잘 설명해 줍니다.

 

공포와 슬픔 속에 사반세기를 살았던 방글라데시의 시민들이 마침내 공포를 극복하고 강제실종과 사법외 살인으로 정권을 유지해온 하시나 정부를 무너뜨린 것입니다.

 

 

무스타인 빌라 자히르씨는 그의 포럼 발표문에서 “(순교자) 사예드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동영상이 sns를 통해 전국으로 퍼져나가면서 하시나가 만든 공포의 장막이 무너졌다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그는 또 사예드가 당긴 불길이 무그도의 순교로 화산처럼 폭발했, 이것이 대중을 단결시켜 불가능해 보였던 것을 가능하게 했다면서, 그것은 곧 공포정치를 무너뜨리고 살인적인 몰록(Moloch)으로부터 나라의 영혼은 구하는 일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모스피쿠르 라흐만 조한씨는 수십년 동안 방글라데시에 이같은 공포가 조성된 것은 강제실종과 사법외 살인에 의존한 하시나 정권의 통치 때문이었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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