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의 큰 오빠 최승일이 여동생의 나이를 1살 올려서 <경성일보> 취재에 응한 것은 고의적인 것으로 보인다. 세는 나이로 15세였던 최승희를 16세라고 전했던 것은 실수나 착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01년에 태어난 최승일은 최승희가 태어났을 때 이미 10세 내외의 나이로 보통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그 나이면 막내 동생이 태어난 시기를 정확히 기억할 수 있었음에 틀림없다. 더구나 최승일은 남동생 최승오나 다른 여동생 최영희보다 막내 최승희와 가장 가까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승희도 큰 오빠 최승일을 마치 제2의 아버지처럼 따랐다고 했다. 그렇게 가까운 사이에 생일이나 나이를 잘못 기억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최승일은 최승희를 이시이 바쿠에게 소개하기 위해 <경성일보> 학예부장 테라다 토시오와 처음 만났을 때 무용가로 나서려는 여동생의 나이를 ‘16세’라고 말했다. 왜 그랬을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문학적 패러디’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다.
최승일은 문인이었다. 1924년 6월호 <신여성>에 단편 “아내”와 “떠나가는 날”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고, “김첨지의 죽음”(<매일신보>, 1924년 12월7일자), “바둑이”(<개벽>, 1926년 2월호), “봉희(鳳姬)”(<개벽>, 1926년 4월호) 등의 작가였고, 사회주의 계열의 문학예술인 단체에서 활동했다. 당시 조선의 문화예술인 써클에서는 여성의 ‘가장 꽃다운 나이’는 16세로 정형화되어 있었다. 16세 여성에게 그런 수식어가 붙었던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전통적으로 여성의 16세는 성년으로 인식되었다. 남성은 15세에 상투를 틀고 갓을 쓰는 관례(冠禮)를 치렀고, 여성도 땋은 머리를 쪽지고 비녀를 꽂는 계례(筓禮)를 행했다. 그래서 16세의 여성은 소녀티를 벗은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뜻으로 이해되었다.
고전 국문학과 한문학에서도 여성의 16세를 과년(瓜年)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여성이 혼기에 이르렀다는 말이었다. ‘오이 과(瓜)’자를 쓴 데에는 해학과 퍼즐이 담겨 있다. 오이 과(瓜)자를 파자(破字)하면 여덟 팔(八)자가 2개 나오는데, 이를 합치면 16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의 16세를 파과지년(破瓜之年)이라고 불렀다. (한편 파과지년은 64세의 남성에게도 쓰이곤 했는데, 이는 팔을 두 번 곱하면 64세가 되기 때문이다.)
둘째, 조선 민중문학의 대표작의 하나였던 판소리 <열녀춘향수절가>의 주인공 춘향의 작중 나이가 16세였다. 조선 문학에서 가장 아름답고, 재주가 출중하고, 정절이 높은 최고의 여성상으로서 그려진 춘향이 이몽룡을 만났을 때의 나이가 16세였던 것이다. 완판본 <열녀춘향수절가>에 따르면 춘향과 몽룡은 합방 첫날밤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도령 하는 말이, ‘성현(聖賢)도 불취동성(不取同姓)이라 일렀으니 네 성은 무엇이며 나이는 몇 살이뇨?’ ‘성은 성(成)가옵고 연세(年歲)는 십육 세로소이다.’ 이도령 거동 보소. ‘허허 그 말 반갑도다. 네 연세 들어보니 나와 동갑 이팔이라.’”
춘향이 나이가 16세라고 대답하자 몽룡은 “나와 동갑 이팔(二八)”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이팔’이란 두(二)개의 팔(八), 즉 16세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나온 말이 이팔청춘(二八靑春)이다. 두 사람 모두 파과지년이자 이팔청춘이었던 것이다.
이몽룡이 16세였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만, 춘향이 16세였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날 밤 두 사람이 벌인 춘사는 요즘의 포르노 영화에 못지않은데, 조선 시대의 16세 여성은 그런 성적 자세와 입담이 가능하도록 무르익은 나이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때마침 <춘향전>은 이광수에 의해 현대소설로 개작되어 <일설춘향전(一說春香傳)>이라는 제목으로 1925년 9월30일부터 1926년 1월3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고, 이내 단행본으로도 출판되었다. 최승희가 숙명여학교를 졸업할 무렵 이광수의 <일설춘향전>이 경성에서 인구에 회자되고 있었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최승일이 여동생 최승희의 나이를 묻는 테라다 토시오에게 ‘16세’라고 대답했던 것은 아마도 문사 최승일의 뇌리에 박혀있던, 춘향을 전형으로 하는 16세 여성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이는 또 무엇을 해도 충분한 성숙한 나이라는 뜻이기도 해서 무용을 시작하는 최승희의 나이로 묘사되기에 적합하다고 여겨졌을 것이다. 이렇게 보도된 ‘16세 최승희’는 ‘16세 춘향이’의 이미지와 함께 조선 사회에 손쉽고 빠르게 퍼질 수 있었던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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