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신>2024년에 기획한 일을 다음과 같이 모두 마쳤습니다

 

 

(1) 1월에는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김발레리아)> 후원 캠페인으로 민족학교의 재정난을 일시적이나마 유예시켜드릴 수 있었습니다.

 

(2) 5월에는 최재형 민족학교를 방문했고, <홍범도 고려극장(가칭)> 건립을 위한 첫 협의를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황광석 선생의 주도로 기획서를 마련하는 단계입니다.

 

(3) 7월에는 <동동(임인출)>의 풍물공연이 니시노미야 시당국과 교육위원회의 후원을 받아 진행됐습니다. 공연의 격을 올려주신 <팀아이(콘도 타쿠미, 정세화)>와 <코끼리회(구실, 김원혜)>의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4) 교토의 <라랑무용교실>에는 무용신, 니시노미야의 <코끼리회(구실)>에는 풍물의상을 후원할 수 있었습니다.

 

(5) 9월 초 제25<강릉인권영화제(김중남, 강승호, 조은혜)>를 후원했습니다. 재정적 후원과 함께 <동동>의 개막축하공연, 인권세미나를 개최하고, 김성수열사 추도비를 참배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을 위해 <희망래일/대륙학교><우리민족서로돕기>, <동북아평화연대(김현동, 윤미향)와 <화강문화재단(홍수연, 이홍범), 일본 <팀아이><코끼리회>, 연해주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 강릉의 <1강릉포럼><김성수열사기념사업회(홍진선, 이요한)>와 협력했고, 광주의 <우리문화예술원(김태훈, 안혜경)>과도 교류하기 시작했습니다.

 

내년(2025년)에는 다음과 같은 활동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1. 일본 무용신 프로젝트 (조정희)

(1) 내년(2024) 221-24일에는 제3차 일본 방문단을 구성합니다. 223일 오사카에서 열리는 <도모다치 페스타(카노 겐지)>에 참여(황재희)하고, <놀패(이인형)>의 풍물공연을 기획합니다. (약 200만원의 모금 필요)

(2) 오사카와 교토, 효고 지역의 3개 무용교실에 약 60켤레의 무용신을 후원할 예정입니다. (200만원의 모금 필요.)

(3) 강릉 <김성수열사기념사업회>는 조선인 학생들을 위한 축구공 후원을 기획 중입니다. (약 100만원 모금 필요) . 이 역시 <팀아이>와 협력해 진행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2. 연해주 민족학교와 고려극장 프로젝트 (황광석)

(4) 연해주 모금 캠페인을 진행합니다. 20245, 2차 연해주 방문단을 구성하면서 진행하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금의 액수와 방법, 방문 형식은 추후 논의될 것입니다.

(5) <홍범도 고려극장> 프로젝트는 황광석 선생님의 주도 아래, <무용신><우리민족서로돕기>, <동북아평화연대> 등이 뜻을 같이하기로 했고, 더 많은 단체가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3. 강릉인권영화제 (강승호)

(6) 내년에도 재정 후원과 공연 후원으로 제26회 강릉인권영화제를 후원할 계획입니다.

 

4.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사진전 (전재운)

(7) 전재운 선생의 주도로 일본과 한국에서 사진전을 개최할 예정입니다.

(8) 사진전과 함께 자료집을 출판해 기록으로 남길 예정입니다.

 

5. 방글라데시 프로젝트 (이고은)

(9) 민중혁명을 진행 중인 방글라데시 학생/시민을 지지하고 가능한 지원 방안을 모색 중입니다.

(10) 한국을 방문할 방글라데시 학생/시민운동 대표 2인의 경비(약 400만원)를 후원, 이들이 직접 방글라데시 몬순 혁명을 한국에 알리고, 필요한 자문을 얻을 수 있도록 한국내 단체들과의 연결을 주선합니다.

 

* 그밖에도, 민주, 통일, 진보를 표방하면서 문화예술활동을 후원하는 <무용신>의 내실을 다지고, 활동을 확대할 수 있는 방안이나 프로젝트가 있으시면 제안해 주시고, 토론을 거쳐 결정해 가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jc, 2024/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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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통명제도는 국제적으로 예가 없는 독특한 경우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외국인들에게 자국식 통명을 공식문서에 요구하지 않는다. 강요는커녕 요구하지도 않는다. 별명이 사용되는 경우는 있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자발적인 경우이며, 어떤 경우에도 통명이나 본명의 발음은 본인의 요청에 따른다. 일본의 통명 제도는 대단히 이례적이고 비정상적이다.

 

오늘날의 일본의 통명제도는 일본의 군국주의 시대에 식민지 조선에 강요했던 창씨개명에서 비롯된 관행이다. 창씨개명은 원천적으로 무효화되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일본은 그 악영향을 청산하기는커녕, 80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이는 마치 독일에서 지금도 유태인을 차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단히 이례적이고 비정상적인 일이다.

 

 

일본 안에서도 통명의 강요와 본명의 일본식 발음은 서양인들에게는 적용되지 않거나, 차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동양권의 나라, 특히 같은 한자권인 중국인들에게도 일본식 통명을 강요하거나, 한자 이름을 일본식으로 읽어 부르지 않는다. 통명의 강요와 본명의 일본식 발음은 재일조선인/한국인에게만 적용되고 있는 셈이다.

 

이쯤 되면, 일본의 통명제도, 그리고 본명을 일본식 발음으로 부르는 관행은 재일조선인/한국인에게만 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엔인권선언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일이다. 인종과 언어에 따른 차별이기 때문이다.

 

 

이런 차별적 관행은 보통 시민사회와 언론, 그리고 사법제도에 의해 시정되어 나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재일조선인/한국인을 차별하는 통명제도는 일본 시민사회에 의해 자성이나 교정 노력이 경주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재일조선인/한국인에 대한 통명제도, 그리고 본명의 일본식 발음을 편의성으로 정당화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그런데 누구의 편의인지는 따져지지 않는다. 최창화씨의 경우, 그것은 언론기관의 편의였다. 본인이 원치 않아도 언론사의 편의 때문에 유지한다는 답변은 놀라웠다.

 

 

가장 놀라운 것은 사법기관이다. 기타큐슈 지방법원은 최창화씨의 정당한 요구를 기각했다. 오사카 지방법원은 본명 대신 통명을 사용하라는 사업주의 요구가 김임만 감독을 차별한 것이 아니라고 판시했는가 하면, 오사카 고등법원은 통명의 강요가 인정되며, 개인 정체성에 대한 침해라고 인정하면서도 통명의 강요가 사업자의 선의라고 결론 내렸다. 이는 유엔인권선언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판결이 아닐 수 없다.

 

국제적인 시각에서는 일본의 통명제도가 그 시작부터 대단히 이례적이고 비상식적이며, 따라서 비정상적인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일본 내에서는 그것이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정상적인 제도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필자는 일본을 방문할 때 3개 언어로 된 명함을 사용한다. 한국어, 한자, 그리고 영문자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 명함을 사용할 때는 반드시 영문자 이름을 강조한다. 그래야 필자의 이름이 제대로 발음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가피한 이유로 일본 땅에서 영주해야하는 재일조선인/한국인들은 누구도 통명제도의 불편함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이는 차별의 문제와 점층적인 악순환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본래의 차별은 저항을 낳게 마련이고, 이 저항을 누르기 위해 또 다른 차별을 고안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필자는 재일조선인/한국인의 통명제도가 차별의 문제와 직결되어있음을 지적했지만, 관찰자의 짧은 소견에 불과할 것이다. 따라서 해결방안을 제시할 식견이 필자에게는 없다.

 

하지만 자아정체성의 본질의 일부인 이름에 대한 차별적 현실이 일본에서 재일한국인/조선인들에게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일본 사회의 각성을 촉구하며, 재일조선인/한국인들의 용기있는 저항과 개선노력을 응원할 뿐이다. (jc, 202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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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헌양(宣憲洋, 2001)은 오타루상과대학 언어학센터의 학술잡지에 발표한 논문 [재일한국인/조선인의 본명사용을 촉진하는 한 가지 방법]에서 재일한국인 최창화(崔昌華, チョエ・チャンホア, 당시45)씨의 경우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기타큐슈시 목사 최창화는 NHK 뉴스 시간에 자신의 이름이 '사이 쇼카' 라고 자주 불려진 것에 대해 내 이름을 올바르게 불러 주었으면 좋겠다고 여러번 정정을 요구했다. 하지만 무시당했다. 그래서 당사자는 인격권 침해라고 하여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재일조선인의 인권 문제에 정진하여 주목을 받았으며, 또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방법에는 각별히 엄격했다. 본인의 이름 호칭에 대한 정정요구와 소송의 사정은 다음과 같다.

 

“197593일 기타큐슈(北九州)시 고쿠라(小倉)의 한국인 목사 최창화(崔昌華, 45)씨는 NHK 기타큐슈 방송국의 이치카와 사다오(市川定夫) 방송부장을 찾아가 항의하고 정정을 요구했다.

 

지난 826, “키타큐슈 시장에게 재일 한국인/조선인의 인권에 관한 공개 질문장제출하면서 기자회견을 했을 때, 자신의 이름을 '최창화'라고 여러 번에 걸쳐 발음해 주었는데도 NHK91일과 2일의 뉴스에서 의도적으로 사이·쇼카(サイ・ショウカ)’라고 일본식으로 발음했다. 이것은 인권상의 중대한 잘못이므로 정정해 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앞으로 재일한국인/조선인에 대해 일본식 발음으로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이름을 올바르게 불러주길 바란다. 이는 인권 존중의 출발점이라며 강력히 항의했다. 기자회견 때 그는 자신의 이름을 잘못 읽지 않도록 두 번이나 공을 들여서 설명했고, 명함의 이름 밑에 로마자로 발음을 적어 놓았다고 덧붙였다.

 

이 항의와 정정 요구에 대해서 이치카와 부장은, 협회에 연락을 취한 후, 927일 다음과 같이 회답했다

 

“NHK에서는 194810월부터 19559월까지 현지발음으로 읽었지만, 발음의 어려움이 있어, 모두 일본어를 읽는 방법으로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앞으로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지만 현 단계에서는 지금까지와 같이 하겠다.

 

그러나 최씨는 수긍하지 않고 내 이름은 사이씨가 아니라 라고 강하게 반발하며 재차 항의했다. 하지만 이치카와 부장은 방송의 어려움을 겪는다. 정정하면 전국적으로 문제가 된다. 그래서, 현단계에서는 지금까지와 같이 해 간다라고 같은 대답을 했다.

 

 

이에 최씨는 인격의 상징으로서의 이름이 다른 사람의 사정으로 변경될 수 있다는 기본적 인격 침해는 용서할 수 없다며 제소를 단행했다. 그래서 103일 일본방송협회(회장 오노 요시로)를 상대로 인권침해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를 후쿠오카지방법원 고쿠라지부에 제출했다. 이 재판은 대법원까지 다투었지만 결국 원고 패소가 됐다. [김일면, 조선인이 왜 '일본명'을 자칭하는가, 삼일책방, 1978, 203~204.]”

 

 

김임만 감독과 최창화 목사의 소송사건과 그 결과는 일본 사법부도 본명과 통명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해야 하는 재일한국인/조선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일본 정부나 기업이 국내법에 강하게 집착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더구나 국내법이 재일조선인/한국인 차별을 제도화하고 있는 일본 사회를 반영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사법부는 국제법과 보편적 상식을 판결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정부기관이다.

 

 

재일 한국인 최창화 목사나 재일조선인 김임만 감독이 소송을 제기한 것도 법원의 이같은 권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 법원도 정부나 기업과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jc, 202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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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임만(金稔万) 선생은 일본 효고현 아마가사키에 거주하는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다. 그는 일용직 노동자로 생활하면서도 재일조선인의 모습을 20년 이상 카메라에 담아왔다.

 

한국에서 상영된 그의 작품으로는 [카마가사키 권리찾기(住民票, 2011)][용왕궁의 기억(2016)], [경찰아파트(キョンチャルアパー, 2022)], [돈즈루봉과 야나기모토 비행장(どんづる柳本飛行場, 2022)] 등이 있다.

 

 

김임만 감독의 작품들은 모두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카마가사키의 권리찾기]는 카마가사키의 재일외국인 일용직 노동자의 주민등록표가 악용되는 것을 고발했고, [용왕궁의 기억]은 김임만 감독의 모친이 활동하던 용왕궁을 중심으로 재일조선인의 고난을 추적하면서 모자간의 관계를 재조명했다. [경찰아파트][돈즈루봉과 야나기모토 비행장]은 태평양전쟁 말기 조선인 노동자들이 강제동원되었던 유적지들을 기록 영상으로 남겼다.

 

김임만 감독은 재일조선인 2세로 본명과 통명 사이에서 갈등을 경험했다. 그는 2009년 오사카 시의 하청을 받은 종합건설회사 [오테제네콘(大手ゼネコン)]의 재건축 일을 소개받았다. 오테제네콘의 재하청을 받은 [오바야시구미(大林組)]김임만이라는 본명을 사용해왔던 그에게, 이번에는 통명으로 일해 달라면서 그가 사용할 안전모에 가네우미라는 통명을 붙였다. 그의 본명 명찰은 버려져 있었다.

 

 

김임만 감독은 그리 화목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랐고, 일본학교에 다녀야 했기 때문에 조선말을 하지 못했다. 부친은 일본에서 살려면 일본식 통명을 써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자녀들에게 통명 사용을 강요했던 부친도 죽음을 앞두고 스스로 마련한 묘비에는 본명을 썼다. 재일 조선인은 죽어서야 떳떳하게 본명을 쓸 수 있다는 일본의 현실을 김임만 감독은 개탄했다.

 

이후 김임만 감독은 조선인 친구들을 만나면서 민족의식이 성장했고, 통명 대신 본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작품도 본명으로 발표했고, 직장에서도 불이익을 무릅쓰고 본명으로 일했다.

 

그러나 2009년 김임만 감독은 [오테제네콘]에서 하청을 받은 [오바야시구미(大林組)]에서 약 삼 개월 반 동안 가네우미라는 통명으로 일해야 했다. 통명을 사용하지 않으면 해고당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오바야시구미]는 취업 지원한 김임만 감독의 이름이 본명인 것을 보고 취업증명서를 요청했는데, 재일조선인으로서 특별영주권자인 김임만 감독은 취업증명서를 제출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하청업체는 [오테제네콘]에 이를 설명하는 대신에 김임만 감독에게 일본식 통명을 쓰도록 강요한 것이다.

 

[오테제네콘]의 계약이 끝난 후, 김임만 감독은 하청업체인 [오바야시구미]와 원청인 오사카시청을 상대로 정신적인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재일조선인에게 암묵적으로 일본식 통명을 강요하는 사회와 국가에 본격적으로 저항을 표시한 것이었다.

 

 

2년여의 심리 끝에 오사카 지방법원은 2013130일의 1심 판결에서 원고 패소라는 부당 판결을 선고했다. 통명을 요구를 강제하지도 않았고, 통명 사용을 요구한 것은 김임만 감독에게 신속하게 일을 맡기려는 것이었지, 차별대우 때문이 아니라는 게 판결 요지였다.

 

김임만 감독은 1심판결에 불복해 27일 항소했지만, 그해 1126일 오사카 고등법원은 재차 김임만 감독에게 실망을 안겼다. “오바야시구미가 불필요한 통명 사용을 강제한 것은 부정할 수 없으며, “안전모의 본명 명찰을 제거한 행위는 개인의 정체성을 침해한 것이라고 인정했지만, 그 이유가 차별대우 때문은 아니라, 김임만 감독이 신속하게 일할 수 있게 하려는 선의 때문이었다고 판결한 것이다.

 

 

이에 대해 김임만 감독은 2심에서는 1심보다 진전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법원도 재일조선인의 권리를 인정해 주지 않는 현실을 절감했다고 실망감을 표시했다. 그는 또 재일조선인의 본명 사용 보장을 위한 활동을 계속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jc, 202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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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은 용기를 내어 본명을 사용하는 경우에도, 일본인들은 이름의 발음을 일본식 한자 발음으로 바꿔버린다.

 

일제강점기 조선무용을 창안한 최승희(崔承喜) 선생은, 스승의 통명 요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본명을 지킨 사람이다. 이시이 바쿠는 재능 있고 전도가 유망한 제자에게 자신의 성인 이시이(石井)을 하사하곤 했다. 심지어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좋은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이시이 코나미나 이시이 미도리, 이시이 미에코 등은 스승이 지어준 이름이고, 그런 이름을 하사받는 것이 제자들에게는 큰 은혜였다. 그래서 평생 그 이름으로 무용활동을 하곤 했다. 이는 곧 나는 신무용의 대가 이시이 바쿠의 유능한 제자라는 뜻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승희는 이시이라는 성을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스승이 지어준 쇼코(勝子)”라는 예명도 몇 번 쓰다가 포기, 다시 본명인 최승희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나 최승희가 자신의 본명을 사용해도, 일본인들은 이름을 최승희라고 읽어주지 않았다. 이름 한자의 일본식 발음대로 사이 쇼키라고 읽어버렸던 것이다.

 

 

최승희라는 이름과 사이 쇼키라는 이름은 음성학적으로 공통점이 전혀 없다. 그래서 마치 본명을 무시하고 또 하나의 통명이 생겨버리는 셈이 된다. 이 경우에는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공개하고 나서도 또다시 차별을 받게 된다. 이 같은 폐단 때문에 재일조선인들은 아예 일본식 한자와 일본식 발음으로 된 통명을 사용함으로써 차별을 피하려고 노력한다.

 

서구의 경우와는 대단히 대조적이다. 나는 이름이 조정희이지만, 미국에서는 Jeonghee CHO라고 이름을 표기했다. 이름을 접한 미국인들은 항상 어떻게 발음하면 되는가, 하고 묻는다.

 

미국인들한테는 제이(J)의 발음이 어려울 수 있다. 심리학자 구스타브 융(Jung)처럼 제이 발음이 사라져버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아주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반자음이 남는 것이지만.

 

 

성의 ch발음도 마찬가지이다. 영어 단어에서 ch는 발음이 다양하다. 챨스(Charles)라는 이름에서처럼 치읓소리가 가장 보편적이지만, 경우에 따라서 스쿨(school)이나 콜레라(cholera)처럼 키읔 소리가 되기도 하고, 시카고(Chicago)나 기사도(chivalry)에서처럼 시옷 소리도 나온다. 그래도 몇 번 발음해 주면, 이내 제대로 이름을 불러준다.

 

일본인이 한자를 일본식 발음으로 읽는 것이 편하다는 것이 이해는 된다. 한국에서도 모택동(毛澤東)이나 주은래(周恩来)나 등소평(鄧小平)이라고, 한국식으로 발음했던 시기가 있었다. 일본인도 풍신수길(豊臣秀吉), 이등박문(伊藤博文), 재등실(齋藤實)이라고 부르곤 했다.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마오쩌뚱, 저우언라이, 덩샤오핑이라고 부르고, 토요토미 히데요시, 이토 히로부미, 사이토 마코토라고 부른다. 그 나라의 발음을 존중한다는 원칙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재일조선인의 이름을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일부 의식 있는 지식인들을 제외하면 한자권 외국인 이름을 일본식 발음으로 불러버린다. 쑨웬(孫文)을 손분(ソンブン), 마오쩌뚱(毛澤東)을 모타쿠토(モウタクトウ)라고 한다.

 

최근 중국이름 발음에는 변화가 생겼다. 모택동을 마오쪼통(マオ・ツォートン)이라고 표기한 백과사전도 있다. 그러나 원음 존중의 원칙이 재일조선인의 이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또 하나의 차별인 셈이다.

 

 

예컨대 조선학교(朝鮮學校)는 일본 교육법상 외국인학교와 함께 각종학교로 분류된다. 외국인학교는 가이고쿠진가코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인터내셔널 스쿨(International School)이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조선학교는 조선학교라고 부르지 않고 언제나 조센가코라고 부른다.

 

재일조선인의 이름뿐 아니다. 베이징(北京)은 페킹(ペキン)이라고 그런대로 원음에 가깝게 부르지만 부산(釜山)은 아직도 후잔(), 한국(韓國)한국(ハングク)라고 부르지 않고 강고쿠라고 부른다. 특히 일본인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기타조센(北朝鮮)‘이라고 부른다.

 

 

조선이나 한국에 관련된 것은 일본식 발음을 고집하는 것이다. (jc, 202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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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 1세와 2세들의 통명은 창씨개명의 직접적인 피해자들이었다. 조선에서는 강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약 20%의 조선인들이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창씨개명을 하는 경우에도 일본식 창씨는 많지 않았고, 자신의 관향이나 성을 파자해서 창씨하곤 했다. 예컨대 전주 이씨는 국본(國本)이나 조본(朝本)이라는 식으로 왕가임을 강조했다.

 

 

심지어 천황폐하와 발음이 같은 덴노 헤이카(田農炳下, 田農昞夏)로 창씨하여 천황을 조롱하거나, 미나미 타로(南太郞)라고 창씨개명해 당시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를 비난한 사람도 있었다. 또 산천초목(山川草木)이나 청산백수(靑山白水), 강원야원(江原野原) 등으로 장난삼아 창씨하거나, 성을 가는 놈은 개자식이라는 뜻으로 이누코(犬子)’라고 창씨한 사람도 있었다.

 

 

창씨개명에 대한 반항과 조롱은 조선에서는 가능했지만, 재일조선인들은 그럴 수 없었다. 거의 대부분 일본식으로 창씨와 개명을 해야 했고, 해방 후에도 이를 유지했다. 패전한 일본인들의 좌절감과 분노는 승자인 미국인들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 이상하게도 자신들이 노예처럼 부리던 조선인들에게 향했고, 조선인 차별은 더욱 심해졌다.

 

이같은 사회상황에서 재일조선인들은 더욱 자신의 정체성을 숨겨야했고, 재일조선인들의 생존을 위해 통명을 사용했던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유일한 예외가 재일조선학교였다.

 

 

해방 직후 재일조선인들이 귀국을 준비하면서 자녀들에게 조선말을 가르치기 위한 [국어강습소]로 시작된 조선학교는 1946년의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의 지도 아래 전국으로 확산됐다. 1948년의 한신교육투쟁을 거치면서 1949년 조선학교가 폐쇄되기도 했으나, 1953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이 결성되면서 재건됐고, 재일조선인들은 학교를 중심으로 결집했다.

 

 

조선학교의 특징은 조선말과 조선역사를 가르치고, 조선의 문화예술활동을 장려하는 등의 민족교육을 강조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본명 사용이었다. 조선학교 학생들의 본명 사용은 다른 재일조선인들에게는 대단히 용감한 행동이고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조선학생들도 기타 사회생활에서는 통명을 사용해야 했고, 특히 졸업 후 사회에 진출하면 통명으로 돌아가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정체성이 형성되는 학창 시절에 본명을 사용하고 모국어로 공부하는 것은 학생들의 자존감 형성에 매우 긍정적이다.

 

 

앞서 잠시 언급한 김명곤 감독의 삿포로 조선학교 전입생의 경우, 구시로의 일본학교 재학 중에는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밝히지도 못했고, 삿포로 전학도 일본학교로 간다고 거짓말을 해야 할 정도였다. 친구들과의 교유관계에서 본명 사용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김명곤 감독이 또 다른 예로 들었던 2019년 한 오사카 공립학교의 민족학급 수업 참관도 마찬가지였다. 그 마지막 수업에서 민족학급 강사는 손정의가 본명을 쓰면서도 일본 사회에서 훌륭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예로 들면서 여러분도 본명쓰기를 권한다고 했다고 한다.

 

 

이는 마치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마지막 수업(La dernière classe, 1873)]을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1871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가 알사스-로렌을 프로이센에 넘겨주어야 했던 시기, 프랑스어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칠판에 프랑스 만세(VIVE LA FRANCE!!)”를 썼던 아멜 선생처럼,

 

조선민족학급의 강사는, “어디까지나 여러분의 선택이라면서도 본명에 대한 자부심을 잃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던 것이다. 그만큼 재일조선인들은 일본사회에서 일본식 통명을 사용해야 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본명 사용을 명예로운 일로 간주하는 것이다.

 

 

세계인권선언은 제26조에서 교육은 인격의 완전한 발전과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중의 강화를 목표로 하며, ”부모는 자녀에게 제공되는 교육의 종류를 선택할 우선권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일본은 세계인권선언에 참여하고 있다.

 

 

2019년에는 유엔아동권리위원회로부터 총련계 민족학교인 조선학교를 교육무상화 대상에 포함시킬 것을 권고했지만, 일본 정부는 유독 재일조선인과 조선학교에 대해서는 국제기구의 어떤 권고나 제재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jc, 202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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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1940211일부터 식민지 주민들의 황국신민화를 이유로 창씨개명을 추진했다. 일본 정부가 식민지 주민들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라고 강요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19391110<조선민사령>을 개정, 조선에서도 일본씩 씨명제를 따르도록 규정하고, 1940211일부터 810일까지 씨()를 정해 제출할 것을 명령했다. 조선인 창씨개명의 대상자는 조선에 본적을 둔 모든 조선인이었으므로 재일조선인도 포함됐다.

 

 

친일파들은 자발적으로 창씨개명에 응했으나 조선민사령 개정이 발효한 후 3개월 동안 창씨개명한 조선인 가구는 7.6%에 불과했다. 이에 총독부는 본격적으로 창씨개명을 압박, 신고마감까지 약 332만가구(79.3%)가 창씨하게 했다. 문정창(文定昌, 1899-1980)[군국일본조선강점36년사] 하권에서 일제가 창씨개명에 동원한 강요 방식을 열 가지로 서술했다.

 

(1) 창씨(創氏)를 하지 않은 사람의 자녀에 대해서는 각급 학교의 입학과 진학을 거부한다. 이미 입학한 학생은 정학 또는 퇴학 조치를 하고, 학교 차원에서 거부할 경우 해당 학교는 폐교한다. (2) 아동들을 이유 없이 질책·구타하여 아동들의 애원으로 부모의 창씨를 강제한다. (3)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은 공·사 기관에 채용하지 않으며 현직자도 점차 해고 조치를 취한다. 다만, 일본식 씨명으로 창씨개명한 후에는 복직할 수 있다.

 

(4) 행정 기관에서는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의 모든 민원 사무를 취급하지 않는다. (5)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은 비국민·불령선인으로 단정하여 경찰수첩에 기입해 사찰을 철저히 한다. (6)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은 우선적인 노무 징용 대상자로 지명한다. (7)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은 식량 및 물자의 배급 대상에서 제외한다.

 

(8) 철도 수송 화물의 명패에 조선식 씨명이 쓰여진 것은 취급하지 않으며, 해당 화물은 즉시 반송 조치한다. (9)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은 내지(일본 본토)로 도항할 수 없다. (10) 창씨개명령 제정 이후 출생한 자녀에 대하여 일본식 씨명으로 출생 신고하지 아니할 경우에는 그 신고를 계속 반려하여 자녀와 그 부모가 창씨하도록 강제한다.

 

 

일제의 조선인 창씨개명은 명목상 내선일체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서였다. 일제는 43일부터 조선에 지원병제도를 시행했다. ‘지원병이란 말은 이중으로 기만적이다. (1) 조선인에게 일본국적을 주지 않으면서도 병역을 부과하기 위해서였고, (2) 강압과 회유로 지원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거듭된 패전으로 병력 손실이 심각하자, 일제는 병력 보충을 위해 1944년 징병제까지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일제는 지원병 제도를 준비하면서 193855일 본국과 식민지에 [국가총동원법]을 발효했는데, 이는 전쟁 물자를 강탈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19391110일 조선민사령을 개정해 창씨개명을 강요한 것이다.

 

 

지원병제도와 국가총동원령, 창씨개명은 황국신민화와 내선일체라는 명목 아래 진행됐지만, 전쟁을 위한 인력과 물자를 강탈하는 것이 실제 목적이었을 뿐,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차별을 철폐하거나 완화할 생각은 없었다. 이는 조선 호적의 변경 과정으로 확인된다.

 

1910년 일제는 [민적법] 개정을 통해 조선 호적을 일제 민적으로 번역했지만, 창씨는 시도되지 않았고, 조선인의 이름은 성+이름의 형태로 기입됐다. 1940년 일제는 창씨개명을 통해 창씨를 강요하고, 개인의 이름을 씨+이름의 형태로 기입했다. 일제가 패망한 후 1946년 창씨개명령은 원천무효로 선언되었고, 일제 민적은 대한민국 호적으로 되돌려졌다.

 

 

일제가 내선일체를 원했다면 1910년부터 창씨개명을 시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도적으로 조선인을 차별했던 일제는 실제로는 내선일체를 원하지 않았거나, 혹은 자유로운 일본인과 노예의 조선인으로서의 내선일체를 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쟁 동원을 위해 마지못해 황국신민화나 내선일체를 주장했지만, 총독부 경무국이나 일제 본국에서는 조선인 구별이 어렵다는 이유로 창씨개명에 반대했다. 이 같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창씨개명을 강압적으로 추진한 것은 그만큼 전쟁 동원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jc, 202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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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들은 이름을 두 개씩 가진다. 본명과 통명이다. 본명은 집에서 쓰는 한국식 이름이고, 통명은 사회생활에서 사용하는 일본식 이름이다. 재일조선인들이 통명을 사용해야 하는 것은 차별 때문이다. 이름만으로도 재일조선인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에서든 외국인이 통명을 사용하는 것은 있음직한 일이다. 미국에서도 재미한국인들은 미국식 통명을 사용한다. 2세나 3세들은 성은 그대로 한국식을 유지하더라도, 이름은 아예 미국식으로 짓기도 한다. 편의성 때문이다.

 

그러나 재일동포 상황은 다르다. 우선, 통명을 좋아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본명을 사용하면 재일조선인이라는 사실을 공개하는 셈이므로 차별을 자초하게 된다. 차별받지 않으려면 조선인이라는 점을 숨겨야 하고, 그러기 위해 4자로 된 일본식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

 

<몽당연필>의 김명준 사무총장의 이름을 빼앗긴 사람들이라는 기고문을 읽으면, 본명과 통명에 대한 재일동포들의 애환이 많고 깊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창씨개명을 해야 했다. 그렇게 통명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일제는 '내선일체(内鮮一体)'를 주장하면서도 내지인(内地人)과 조선인(朝鮮人) 혹은 한토진(半島人)을 확실히 구분했고, 조선인에게는 내지호적을 부여하지 않았다. 이름에 얽힌 모욕은 해방 후에도 지속되었고, 21세기에 접어든지 벌써 25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하다.

 

1947년 일본의 신헌법이 공표되기 전날 일본정부는 텐노 칙령으로 '외국인등록령'을 발표, 재일조선인에게 '외국인등록'을 강제했다. 한반도에 아직 정부가 없으니 나라이름은 그냥 '조선'이었다. 조선적(朝鮮籍)이라는 없는 나라의 국적이 이렇게 탄생했다.

 

조선인들은 외국인 등록증에 본명을 기재했다. 미점령군 치하에서는 조선인들이 일본국적자로 인정되고 있었으므로, 재일조선인은 조선과 일본의 이중 국적자였던 셈이다.

 

 

그러나 1952년 미점령군이 물러나자마자 일본정부는 재일조선인의 일본국적을 본인의 의사를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박탈했다. 그래도 계속 일본에서 살아야 했던 난민 신세였던 재일조선인들은 일본 이름을 버릴 수 없었다. 차별을 피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패막이었기 때문이다.

 

외국인등록증 소지가 의무였던 재일조선인은 불신검문을 당해 등록증이 없으면 추방, 감금, 투옥이 예사였다. 일제강점기부터 통제와 차별에 시달렸으니 일상생활에서도 조선 사람의 마을을 벗어나는 순간 서로를 통명으로 부르고 일본말로 대화하는 것이 안전했던 것이다.

 

일본인 경영의 공장에 취직하면 '사내 조화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경영진이 먼저 통명을 사용해 달라고 요구한다. 분란도 해고도 싫었던 재일조선인들은 그런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본명과 통명의 분열과 이를 둘러싼 내면의 갈등은 세대에서 세대로 전승되어 오늘에 이른다.

 

 

<몽당연필>의 김명준 사무총장은 2004년 홋카이도 조선학교를 촬영할 때 고3학생을 인터뷰했다고 한다. 쿠시로에서 일본학교를 다니다가 삿포로의 조선학교로 전학한 학생이었다. 통명으로 학교를 다녔으니 전학하면서도 삿포로의 일본학교로 간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2019년 한 오사카 공립학교의 민족학급 수업을 참관했는데, 마지막 수업에서 민족학급 강사가 손정의의 예를 들면서 본명쓰기를 권했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여러분의 선택이라면서도 본명에 대한 자부심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선생님의 마지막 수업이었던 것이다.

 

 

2001년 오사카 조사에서는 학교에서 본명을 쓰는 학생은 15%, 통명을 쓰는 학생이 66%였다. 2007년의 교토시 조사는 직장이나 학교에서 통명을 사용하는 재일조선인이 60%라고 밝혔다. 대부분의 재일조선인들이 아직도 떳떳하게 자신의 본명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본명을 사용할 때 부딪혀야 하는 모멸적 대접과 차별대우 때문이다. 재일조선인들은 해방된 지 70년이 넘도록, 그리고 21세기의 사반세기가 되었어도, 아직도 차별을 피하기 위해 본명과 통명 사이에서 고민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jc, 202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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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그리고 일본의 쇼와 텐노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은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전사자가 25백만명, 민간인 사망자가 58백만명에 달했다. 이 전쟁으로 약 83백만명이 목숨을 잃은 것인데, 이는 당시 20억명이 조금 넘었던 세계인구의 5%에 육박한 인명손실이었다.

 

일제의 중국침략으로 중국군이 약 375만명이 전사했고, 중국의 민간인 82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일제 강점 아래서 사망한 조선인들의 수는 533천명으로 집계됐다.

 

나치의 소련 침략으로 소련군 1140만명이 전사했고, 민간인 19백만명이 사망했다. 나치의 인종차별로 인한 사망자도 11백만명에 달했는데, 그중 6백만명이 유태인이었다.

 

 

1차대전에 비해 2차대전의 사망자 규모가 이렇게 컸던 것은 민간인들의 사망자가 많았기 때문이고, 그 대부분이 인종차별로 인한 것이었다는 것이 국제연합(UN)의 결론이었다. 이에 UN19481210<세계인권선언>을 발표하고, 이같은 인류 존망의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계인권선언>30개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1조는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 인간은 천부적으로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으며 서로 형제애의 정신으로 행동하여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평등하고 보편적인 천부인권을 명시한 것이다. 그래서 이 선언의 영어 제목도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이다.

 

세계인권선언의 제1조는 자유평등형제애를 명문화하고 있어서 프랑스 대혁명이 내걸었던 세 가지 선언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임을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원칙은 예외없이 지켜져야 한다는 뜻으로 보편성의 원칙이 추가된 것이다. 보편적 인권의 반대말이 차별이다.

 

 

강릉의 인권영화제의 인권세미나에서 재일조선인/한국인이 받는 차별에 대해 발표하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 덕분이다. 일본의 시민단체 <팀아이>와 협력해 재일조선학교 무용부에 무용신발을 후원해 온 <무용신>, 다소 우연한 기회에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알게 됐다.

 

<팀아이>의 요청에 따라 추도비의 희생자 5분의 한국 내 연고를 조사한 결과, 그 중 한 분이신 김병순(金炳順)씨가 강릉출신임이 밝혀졌다. 이후 강릉과 다카라즈카 사이에 다양한 교류와 협력이 시작되었고, 작년의 제24회 강릉인권영화제에서는 재일조선인 영화감독 김임만(金稔万) 선생의 다큐멘터리 <타마세 마을의 1백년 전설>이 상영되기에 이르렀다.

 

 

<무용신> 회원들은 잦은 일본 방문을 통해 재일조선학교 학생들이 오랜 세월 일본정부와 시민사회로부터 차별대우를 받아왔음을 목격했다. 재일조선인들이 받아온 억압과 차별은 그 연원이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조선이 해방되고 난 뒤에도 차별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였는데도 차별을 받는다는 것이 놀라웠다.

 

특히 재일조선학교를 둘러싼 차별은 매우 끈질긴 것이었고, 특히 일본정부가 시행한 고교무상화 정책에서 조선학교만 제외한 것은 시기적으로 가장 가깝고도 가장 가시적인 차별이었다.

 

 

해방 직후 일본을 점령한 미군사령부와 일본정부가 조선학교를 폐쇄하려던 시도는 4.24 한신교육투쟁을 야기했고, 교육의 현장인 학교에서 사상자가 나올 정도로 격렬했다.

 

2002년에는 도쿄를 비롯한 대도시에서 조선학교 여학생들의 한복 교복을 면도칼로 찢는 테러행위가 발생,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조선학교는 여학생들의 교복을 세일러복으로 교체해야 했다. 조선학교 정문 앞에서 헤이트스피치를 하는 재특회의 모임이 기승을 부렸다. 마침내 2012년 아베 정권은 고교무상화 시행령을 수정해 조선학교를 심사 대상에서 제외했다.

 

 

조선학교에 대한 이같은 전방위적인 차별과 테러에 대해 모두 살펴볼 수는 없다. 이번 발표에서는 그 모든 차별을 가로지르는 이름의 문제를 제기해 보려고 한다. (jc, 202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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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은 말 그대로 사람으로서 갖는 권리이다. 서양어 휴먼 롸이트(human right)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두 가지 조건이 내포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똑같이 누려야 하는 권리가 인권이기 때문이다. 보편적이며 평등한 자연권이라는 말이다.

 

이 같은 인권 개념이 지금은 당연시되지만, 인권이라는 말이 생긴 것은 40억년 인류 역사에서 오래되지 않는다. 프랑스 혁명을 기원으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니까, 대략 250년쯤이다.

 

 

그 이전에는 평등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귀족과 평민과 노예 등의 신분제도가 오래 유지됐고, 그것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 프랑스혁명이었다. 지금도 유럽의 일부국가에는 귀족제도가 남아 있지만 인간으로서의 자연권은 보편성과 평등성을 인정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보편적이고 평등한 자연권으로서의 인권을 해방 이후에야 누리게 된다. 조선은 양반과 상민과 천민의 구별이 있던 전근대사회였고, 일제강점기에도 조선인은 일본인과 평등한 권리를 누리기는커녕, 차별대우를 받았던 노예상태였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의 수구세력 중에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인의 국적이 일본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 무식한 주장이다. 일제는 자국의 국적법을 조선인에게 적용하지 않았다. 그 대신 조선호적령으로 조선인을 관리했을 뿐이다. 일본의 도 아니고 총독의 이었다.

 

 

조선을 병합한 후 일제는 조선인을 조센징이라고 불렀고, 일본인 대접을 한 적이 없다. 조선인들이 일본 국적을 가졌다면, 당연히 국적법상의 일본국적 이탈권도 가지게 되는데, 이것을 막아야 했던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일본 국적법을 적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일제는 국제법상으로는 조선인도 일본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독립투사들이 중국이나 러시아의 국적을 취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한 안중근 의사의 재판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경쟁을 벌였다. 러시아는 자국 영토에서 발생한 일이라고 주장했지만, 일제는 안중근 의사가 국제법상 일본인이라며 재판권을 탈취했다.

 

국제법상 일본인 취급을 받으면서 정작 일본 국내법상 일본인 취급을 받지 못한 상황은 노예제도였다. 19458월 포츠담에서 전후 대책을 논의했던 트루먼과 처칠과 스탈린은 한국인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한국을 적절한 시기에 해방, 독립시킨다는 내용을 포함시켰다.

 

 

한국인의 노예상태는 그보다 2년 전인 <카이로 선언>에도 명시됐다. 루즈벨트와 처칠, 장제스가 이집트 카이로에서 발표한 이 선언에는 “(,,) 3대국은 조선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자주 독립시킬 결의를 한다. (The aforesaid three great powers, 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re determined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고 선언했다.

 

이 선언문이 발표되자 당시에는 적당한 시기에라는 구절 때문에 말들이 많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미,,중의 3국 지도자들이 조선민의 노예상태를 직시했다는 점이다. , 일제의 지배 아래서 일본인처럼 온갖 의무는 져야 했지만 일본인으로서의 권리는 전혀 누리지 못하는 조선인의 상황을 노예상태(enslavement)”라고 정확하게 파악했던 것이다.

 

중일전쟁이 장기화되고 태평양 전쟁이 격화되는 중에도, 일제는 조선인에게 병역의 의무를 부과하지 못했다. 일본인 대접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인을 징집하는 대신 지원병 제도를 시행했다. 조선인 청년들에게 자원해서 입대하라는 건데, 조선인 청년이 개죽음을 위해 지원할 리가 없다. 말만 지원일뿐 일제는 지역별 할당까지 만들어 강제 지원을 강요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었는데도 한국의 수구세력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의 국적이 일본이었다는 얼빠진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런 거짓말을 그대로 받아서 퍼뜨리는 언론이 큰 문제다. 한국 수구세력과 언론이 모르고 그런다면 무식한 것이고, 알면서도 그런다면 사악한 것이다. sns가 아니었다면, 대부분의 한국민은 그게 정말인 줄 알았을 것이다.

 

암튼,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도 조선인=한국인들은 보편적이고 평등한 인권을 누리지 못했다. 일제가 패망하고 해방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인권을 누릴 가능성이 생겼다. 따라서 프랑스의 인권의 역사가 250년이라면 한국의 인권의 역사는 80년에 불과하다.

 

한편, 1919411일의 상하이 임시정부의 헌법에 인권이 보장되어 있었다는 점은 중요하다. 반포당시 임시헌장이라고 했다가 그해 911임시헌법으로 개명된, 10개조로 구성된 이 헌법의 제3조와 제4조가 대한민국 인민의 인권을 보장했다.

 

 

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

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종교,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통신, 주소 이전, 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누린다.

 

이 조항은 서양 각국의 기준으로도 손색이 없는 인권 조항인데, 몽테스키외의 3권분립론을 수용하면서, 그 바탕인 천부인권 개념을 자연스럽게 전제했기 때문이다. 다만, 일제 강점 상황으로 이 헌법을 국내에 적용하지 못했던 것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임시헌법1948717일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으로 이어지면서 인권개념도 그대로 전수됐다. 5조는 대한민국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자유, 평등과 창의를 존중하고 보장하며 공공복리의 향상을 위하여 이를 보호하고 조정하는 의무를 진다고 함으로써 대한민국 국민의 인권을 수호할 의무가 정부에게 있음을 명시했다.

 

8조에서는 모든 국민이 평등하며,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규정했고, 9조는 신체의 자유, 10조는 거주이전의 자유, 11조는 통신의 비밀의 자유, 12조는 신앙과 양심의 자유, 13조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14조는 학문과 예술의 자유, 15조는 재산권, 16조는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 17조는 근로의 권리와 의무, 18조는 노동권, 19조는 노동할 수 없는 국민의 생활유지의 권리, 20조는 남녀평등권 등을 보장했다.

 

 

또 제7조에서는 외국인의 법적지위는 국제법과 국제조약에 의해 보장된다고 함으로써,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에게도 대한민국 국민이 누리는 인권을 대부분 누릴 수 있도록 규정했다.

 

제헌 헌법의 인권 내용은 향후 7차례의 개정을 거치면서도 유지되거나 강화됐고, 따라서 헌법상으로는 대한민국의 국민과 외국인들에게 인권이 보장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승만의 독재시기, 그리고 박정희-전두환-노태우의 군사독재 시기에는 헌법을 무시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특히 이승만의 부정선거, 박정희의 쿠데타와 유신 행각, 전두환과 노태우의 쿠데타와 광주학살은 피로 점철된 인권 유린의 역사였다.

 

 

강릉에도 인권탄압의 사례가 있다. 의문사 피해자 김성수 열사이다. 1986년 강릉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지리학과에 입학한 그는 그해 618일 행방불명, 621일 부산 송도 앞바다에서 시멘트 덩이를 매단 채 주검으로 발견됐다.

 

해녀 김씨가 이를 신고하자, 경찰은 자살로 처리했으나, 18년 만인 2004년 제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김성수의 죽음에 공권력이 개입돼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그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

 

 

명문화된 헌법의 인권조항이 있어도, 무시되었던 시절이었다. 오늘날 인권운동은 이미 명문화된 인권이 지켜지도록 요구하고 감시하고, 위반사항이 처벌되도록 해야 한다. 시간이 가면서 과거의 인권 유린이 조금씩이나마 밝혀지고, 처벌과 배상이 이루어지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강릉을 비롯한 전국의 인권 운동가들은, 한국에서 인권이 지켜지도록 하는 것은 아직도 지난한 일이라고 여기고 있다.

 

올해의 제25<강릉인권영화제>의 표어는 당신을 지켜주는 인권이다. 이 표어는 작년의 제24회때도 사용됐는데, 거기에는 차별 없는 세상!”이라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다. 차별은 인권유린의 가장 가시적인 형태이다. 인권의 보편성과 평등성을 위배하기 때문이다.

 

 

이글에서는 <무용신>의 일본내 활동에서 목격한 재일조선인/한국인들이 겪는 다양한 차별 중에서, 통명이라는 제도 때문에 겪어야 하는 인권유린 상황을 보고하고자 한다. (jc, 202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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