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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신>이 일본 효고현 니시노미야를 방문합니다. 풍물패 <동동>이 재일조선인 학생들과 함께 신명나는 <한일풍물교류회> 공연을 펼칩니다. 한국과 일본의 활동가들이 다시 한번 모여서 시민 교류의 기회를 모색합니다. 올해로 3회째를 맞은 <한일풍물교류회>를 1인1만원(이상^^)으로 후원해 주세요.

제3회 [한일풍물교류회] in 니시노미야
방문일시: 2026년 8월21-24일 (3박4일)

행사지역: 일본 효고현 니시노미야

공연일시: 2025년 8월23일(일), 오후2시

공연장소: 일본 효고현 니시노미야시 공민관

 

<코끼리회(1991)>는 니시노미아의 재일동포 학생들의 모임입니다.

 

<코끼리회>는 니시노미야의 초,중,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의 모임입니다. 학부모님들께서도 <니시노미야 재일외국인아동생도보호자회>를 결성하시고 <코끼리회>를 후원하고 계십니다. <코끼리회>는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가르치기 위한 단체입니다. 처음에는 각 학교의 교내 동아리를 만들기 위해 애쓰셨지만, 학교와 교육위의 동의를 얻지 못해 성공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에 학부모님들께서는 학교의 외부에 재일동포 학생들을 위한 모임을 결성하셨고, 이름을 <코끼리회>라고 정했습니다. <코끼리회>는 1991년 첫 회원으로 등록한 학생들이 스스로 정한 이름이라고 합니다.

 

<코끼리회>의 학생들은 한국말과 한국문화, 한국예술을 배우면서, 각종 교포행사에 공연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초대 회장 김원혜 선생께서 오래 수고해 주시다가, 지금은 2대 회장이시자 <팀아이>의 회원이기도 하신 구실 선생께서 <코끼리회>를 지도하고 계십니다.

 

 

니시노미야는 조선인 노동자의 벽서, “조선국 독립”이 발견된 곳입니다.

 

니시노미야는 두 가지 이유로 근대사에 등장합니다. 첫째는 이 지역 지하호에서 발견된 “조선국 독립”이라는 벽서입니다. 태평양 전쟁 말기 니시노미야의 고요엔에는 일제 해군 전투기 공장으로 사용할 지하호가 굴착됐습니다. 이 지하호 굴착에 조선인들이 동원되었습니다.

 

1945년 8월15일 일제가 항복하자, 해방과 함께 지하호 공사에서 풀려난 조선인 노동자들이 지하호의 벽에 “조선국 독립”과 “푸른 봄”이라는 글씨를 썼습니다. 1987년 11월에 발견된 이 벽서는 지하호 공사에 조선인 노동자들이 강제 동원되었다는 증거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니시노미야는 4.24 교육투쟁이 가장 치열했던 곳입니다.

 

일제가 패망하자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재일동포들은 자녀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칠 국어강습소를 개설했습니다. 국어강습소는 <재일조선인연합>의 지휘아래 조선인학교로 발전했는데, 1947년 일본 전역의 조선인학교는 563개(학생 57,498명, 교원 1,331명)에 달했습니다.

 

1948년 1월 일본 정부는 조선인 학교를 폐쇄하고 일본학교에 통합시키라는 명령을 발동했습니다. 조선인들은 이에 반대했고, 민족학교 수호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이 투쟁은 니시노미야에서 가장 격렬했고, 사망자가 발생하기에 이르렀으나, 끝내 조선인학교를 지켜냈습니다.

 

 

니시노미야는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와도 가깝습니다.

 

<무용신>은 작년 1월 다카라즈카를 방문해 조선인 추도비를 참배했습니다. 수도 공사와 철도 공사 중에 사고로 돌아가신 조선인 노동자들을 1백년이 넘도록 위령 제사를 드려 오신 타마세 마을을 방문, 불교사찰 만푸쿠지에서 감사의 국악 음악회도 열었습니다. 올해도 <무용신>은 니시노미야에 인접한 다카라즈카의 만푸쿠지를 방문하고 추도비에 참배할 예정입니다.

 

 

임인출 가족 풍물패 <동동>이 함께 합니다.

 

가족 풍물패 <동동>이 이번 방문단에 동행, 니시노미야 공민관에서 <코끼리회>를 비롯한 동포 학생들과 학부모를 초청, 풍물공연을 개최하고, 이어서 동포들과의 교류를 위해 야외 바비큐 모임도 가집니다.

 

 

효고현과 오사카부, 교토부의 재일동포, 일본인 활동가들과 함께 할 제3회 <한일풍물교류회>를 1인1만원(이상^^)으로 후원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모금기간: 2026년 7월20일-8월20일
모금목표: 560만원(공연단 항공료 및 체재비)
계좌: 카카오뱅크 3333-23-1600864
        (한일풍물교류회-무용신, 조정희) (jc, 2026/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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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신>이 가족풍물패 <동동>이 출연하는 <한일 풍물교류회>를 후원합니다. 오는 8월 23일 오후 2시, 일본 효고현 니시노미야 시립 공민관에서 열리는 <한일 풍물교류회>는 올해가 3회째입니다.

 

 

재일조선학교 무용부를 후원해 온 <무용신>은 2022년부터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방문을 시작했습니다. 이 추도비는 1910년대와 1920년대에 이 지역 토목공사에 참여했다가 사고로 사망한 5명의 조선인 노동자를 기리기 위한 것으로, 2020년 3월 일본인 활동가들과 재일동포들의 협력으로 일본 효고(兵庫)현 다카라즈카(宝塚)시 키리하타(切畑)에 건립되었습니다. 

 

 

키리하타 인근의 타마세(玉瀨) 마을 주민들은 1914년부터 100년이 넘도록 조선인 희생자들을 기리는 위령 제사를 지내왔습니다. 이분들의 희생으로 이 지역이 수도와 철도 등의 근대 문명을 누리게 된 것에 감사하는 뜻이라고 합니다. 타마세 마을에는 지금도 이들의 참배묘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된 <무용신>은 조선학교 후원을 위해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타마세의 참배묘와 키리하타의 추도비를 참배했습니다. 그와 함께 조선인 희생자들을 위령해 오신 타마세 주민과 추도비를 건립해 주신 일본인 및 재일동포 활동가들에게 감사 인사를 드렸습니다.

 

 

일본 방문단에 공연단이 동행한 것은 2023년부터입니다. 2023년에는 서울의 국악연주단 <풍류회(박인호 선생)>가 타마세 마을의 불교사찰 <만푸쿠지>에서 국악 공연을 열었습니다. 2024년부터는 한국의 대표적인 가족풍물단 <동동(임인출 선생)>이 참가하는 <한일 풍물교류회>가 시작되었고, 이후 <동동>의 <한일 풍물교류회>가 정례화되었습니다.

 

 

올해의 제3회 <한일 풍물교류회>는 일본의 시민단체 <팀아이>와 <니시노미야 외국인아동생도보호자회>와 <니시노미야 재일외국인교육연구협의회>가 공동 주최하고, 니시노미야시와 니시노미야시 교육위원회가 후원하는 공식행사입니다.

 

 

<무용신>은 2024년부터 3년간의 <한일 풍물교류회> 공연단 비용 지원을 약속했고, 마침내 올해 <무용신>이 지원하는 마지막 공연을 진행하게 됩니다. 내년부터는 일본 현지의 주최 및 후원 단체들이 <한일 풍물교류회>를 이어갈 방안을 마련해 주실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무용신>의 모든 사업은 시민들의 모금으로 진행됩니다. 2017년부터 시작된 <최승희 리서치>와 2019년부터 시작된 <무용신 캠페인>, 2022년부터 시작된 <조선인 추도비> 프로젝트가 모두 시민들의 힘으로 진행되었습니다. 2023년에 시작된 <연해주 고려인 민족학교 후원> 프로젝트와 2024년의 <방글라데시 민중혁명> 지원 프로젝트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희생자 김병순 씨가 강릉 출신임이 확인된 후에는 강릉의 시민단체들도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2022년에는 강릉시장이 추도비 건립자들에게 감사패를 전달했고, 올해의 신임 강릉시장도 효고현을 방문, 다카라즈카 시장과 면담을 가졌습니다. 강릉과 다카라즈카의 두 도시가 시민단체뿐 아니라 지방정부도 교류와 협력을 시작했습니다.

 

 

회원수 100여명의 임의단체에 머물고 있는 <무용신>이 이렇게 폭넓게 활동할 수 있는 것은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 덕분입니다. 올해의 제3회 <한일 풍물교류회>도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의 관심과 1인1만원 이상의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jc, 2026/7/20)

 

제목: [제3회 한일 풍물교류회] 지원 모금 캠페인

기간: 2026년 7월20일부터 8월20일까지 (1개월)

계좌: 카카오뱅크 3333-23-1600864 (한일풍물교류회-무용신)

목표: 560만원 (공연단 7명의 항공료 및 3박4일 체류 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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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신>은 2026년 상반기를 조용히 지냈습니다. 연초에 기획됐던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사진전이 <조선학교> 사진전으로 변경되는 바람에 <팀아이>의 반대 속에서 <무용신>이 공식 후원하기 어려운 사정이 생겼고, 그 와중에 8년 동안 긴밀하게 유지되었던 한국의 <무용신>과 일본의 <팀아이> 사이에 균열도 생겼습니다.

 

3월로 예정되었던 <제11차 무용신 캠페인>이 취소됐고, 4월에는 제가 예기치 않은 복막염 수술을 받은 후, 개인적으로는 심각할 수도 있는 진단을 확인하느라 병원 신세를 지는 바람에 <무용신>으로서는 상반기를 별일 없이 보내게 된 것이지요.

 

 

이런저런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무용신>이 지리멸렬해지지 않고 오히려 단톡방의 의견교환이 활발해 진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교를 위해 모인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무용신>이 이런저런 주장의 갑론을박에 매몰되는 모임이 아니지 않습니까? <무용신>은 ‘일하려고 모인 모임’이니까요.

 

그런데 또 일을 하다보면 별일이 다 생기게 마련입니다. 기분 나쁘다고 할 일을 안하는 것은 기분 좋다고 안 해도 될 일을 하는 것만큼이나 현명한 일은 아닙니다. 과거로 돌아가 머리카락 가르듯이 잘잘못을 들추는 것은 그 자체로도 똑똑한 일이 아니고, 앞으로 할 일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와중에도 ...

 

 

개인적으로 중요한 성과를 낸 분들이 계십니다. 성남의 임인출 선생께서 생애 통산 첫 풍물 독주회를 개최하셨는데, 넘너무 재밌었고, 성황도 이뤘습니다. 또 강릉의 김중남 선생이 강릉 시장에 당선되시는 바람에 강릉과 다카라즈카 사이의 교류와 협력이 긴밀해 질 수 있게 됐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김중남 선생은 당선되자마자 취임도 하시기 전에 다카라즈카에 가셔서 모리 린타로 시장을 만나셨습니다. 효고 현의회와 다카라즈카 시의회도 방문하셨고, 다카라즈카 가극단 관계자들과도 만나서 향후 교류하고 협력할 준비를 하고 오셨더군요.

 

 

연전에 저는 강원대 학술지 <평화들>에 <두 도시 이야기: 강릉과 다카라즈카>라는 글을 기고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글에서 최근에 발굴된 한일 시민들 사이의 역사적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인적, 물적 교류가 왕성하게 일어나기를 기대한다고 썼습니다. 그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지요.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프로젝트를 꾸준히 추진해 온 우리 <무용신>으로서는 아주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임인출, 김중남 선생처럼 말보다 행동하면서 실제로 성과를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무용신>이 지향하는 문화운동에서는 실질적인 성과가 필요합니다. 문화운동은 주장만으로는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합니다. 작품과 공연과 교류와 협력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박정희, 전두환 시절 같은 엄혹한 시기에도 저항의 문화운동이 필요했지만, 환경이나 조건이 훨씬 좋아진 지금에야말로 창의적이고 선도적인 문화운동이 필요하고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문화운동이 낮은 수준의 선전, 선동 행위에 머물지 않고, 본래의 역할을 다할 수 있으려면, 가깝거나 먼 미래에 다가올 일을 내다볼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암튼, 그 얘기는 또 다시 할 기회가 있겠고요.

 

 

다시 <무용신>이 일할 시간이 다가옵니다.

 

제3차 니시노미야 풍물교류회의 일정이 잡혔습니다. 풍물교류회는 예년처럼 <동동 친구들(임인출)>이 주도하게 됩니다. 니시노미야 공민관에서 열리게 되고, 날짜는 8월23일(일) 오후 2시입니다. 이를 위해 공연단과 함께 방문단이 구성될 예정입니다. 방문 예정일은 8월21일(금)부터 24일(월)까지 3박4일입니다. 구체적인 일정은 곧 발표를 드리겠습니다.

 

 

올해의 방문단 조직은 강릉의 조은혜 선생이 팀장으로 수고해 주시기로 연초에 약속하셨습니다. 올해는 강릉 분들이 많이 참여하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다른 지역에서도 참여하셔도 됩니다. 계획이 발표되면 바로 신청하시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시절이 어수선합니다. 국내적으로 그렇고, 국제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용신>은 하기로 한 일들을 차근히 해 나가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jc, 2026/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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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신>의 강릉 프로젝트가 좋은 결실을 맺었습니다. 강릉 시장에 당선되신 김중남 선생께서 취임도 하시기 전에 일본 효고현 다카라즈카를 방문하셨습니다. 당선자 신분으로 다카라즈카 시장도 만나고 시의원들과도 환담하셨다고 합니다. 효고 현의회와도 교류하기로 하신 것 같네요.

 

 

이 모든 일은 2020년에 건립된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서 시작됐습니다. 일제강점기 노동 이민을 가셨다가 그곳에서 희생된 조선인 노동자 다섯 분이 그곳 주민들에 의해 100년이 넘게 위령 제사를 받고 있는 것이 알려졌고, 그중 한 분이 강릉 출신임이 밝혀졌습니다. 이 이야기가 한국에 전해지면서 감사와 감동이 전파되었지요.

 

 

2022년에는 김한근 당시 강릉시장께서 추도비를 건립하신 분들에게 감사패를 전달했고, 김중남 선생은 강릉인권영화제를 통해 <타마세의 100년 전설>을 이어가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후 강릉과 다카라즈카, 강원도와 효고현이 교류하고 협력하는 일이 잦아지고 구체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작년 11월에는 하시모토 나루토시 효고 현의원이 강릉을 방문했고, 이번에 김중남 강릉 시장 당선자가 다카라즈카를 답방하신 것입니다. 두 도시를 위해서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날 것이라는 전조라고 생각합니다.

 

<무용신>은 그동안 말과 글, 방문과 답방, 참배와 공연 등의 방법으로 강릉과 다카라즈카가 가까워지도록 노력했습니다. 말하자면 중매를 선 것이지요. 이제 두 지역의 당사자들이 직접 만나 교류와 협력을 위한 방안을 마련하고 실천해 나갈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중매자의 역할은 잘 마무리된 것 같습니다. 중매가 성공했다고 양복 얻어 입을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연전에 정세화 선생님께 말씀드렸던 것처럼 "마땅히 할 일"을 한 것 뿐이니까요.

 

다만 <무용신>의 강릉 프로젝트가 결실을 맺게된 데에는 여러 해 동안 많은 분들의 노력이 있었다는 점이 기억되면 좋겠습니다.

 

일본의 <팀아이(콘도 타쿠미)>와 <센큐분코(히다 유이치)>, <무쿠게회>와 <고베학생청년센터>와 <니시노미야 교원연맹>, <코끼리회(구실)>와 <99%모임(카노 겐지)>과 <만푸쿠지(아다치 치쿄)>, <단심회>와 <타마세 부인회>, 그리고 한국의 <서울대민주동문회(정병문, 강충호, 장원택, 이은정)>와 <메아리OB>, <민예총>과, <민문연>, <전국시민활동가연대(이요상)>와  <AOK(정연진)>, <시민모임 독립(박덕진)>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박기찬)>과 <희망래일/대륙학교(황광석)>, <은하수(김용대)>와 <강릉포럼(강승호, 조은혜)>과 <연해주포럼(김현동)>, <동동(임인출)>과 <조각배들의 노래(강욱천)> 등의 수많은 단체/모임들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특히 강릉 프로젝트를 위한 공연과 모금과 방문을 위해 지난 수년간 연인원 수천 명의 개인들이 시간과 돈과 관심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런 집단 지성과 공동의 노력이 강릉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용신>은 아직도 배가 고픕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더 널리 알려지면 좋겠습니다. 특히 다섯 분의 희생자 중에서 두 분이 경남 고성, 한 분이 통영 출신이셨습니다. 1백년 전의 희생입니다. 그분들도 강릉의 김병순씨와 마찬가지로 다카라즈카의 타마세 마을 주민들로부터 1백년 동안 위령제사로 모셔졌습니다.

 

가까운 시일 안에 고성과 통영에서도 강릉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 기대가 실현될 수 있도록 <무용신>은 여러 단체와 개인들과 함께 노력과 준비를 계속해 나가려고 합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리고 싶네요. (jc, 2026/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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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김중남 선생의 다카라즈카 방문 보고의 일부입니다.)

 

주말을 이용해 일본 효고현 다카라츠카시를 방문했습니다.

 

다카라츠카시에서 100년 전 돌아가신 김병순씨(강릉출신, 무연고상태로 일본에서 수도공사중 폭발사고로 사망)를 기리며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어서 이에 대한 답방의 의미도 있었습니다.

 

다카라츠카시가 속한 효고현의 하시모토 나루토시 현의원을 통해 양 도시의 교류 확대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방문하게되었는데, 모리 린타로 시장님과 오찬 및 간담회를 길게 진행하는 뜻깊은 기회를 얻었습니다. 인구 22만의 도시와 20만의 도시가 공통으로 안고 있는 고민과 발전 방향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또한 일본 최고의 가극단으로 평가받는 다카라츠카 가극단을 방문해 우리 도시와의 교류 가능성을 확인했습니다. 2800석 규모의 대극장에서 하루 두 차례 공연 이 열리고, 매일 전석 매진을 기록하는 문화 콘텐츠의 힘을 직접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녁에는 하시모토 나루토시 현의원을 비롯해 시의원님들, 민단 대표님, 대한항공 서일본지점장님, 국제교류 관계자 등 많은 분들과 만나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고 왔습니다.

 

취임 후 내부적으로 충분히 논의하고 시의회를 비롯한 여러 관계자분들과도 협의하여 양 도시 간 교류의 가능성을 검토해 나가겠습니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낄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정성껏 환대해 주신 다카라츠카시 관계자 여러분과 일본의 모든 분들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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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13일, 제35회 민족민주 열사를 위한 범국민 추모제가 열렸다. 장소는 서울 시청 인근이었지만 영정 사진 행진은 안국동에서 시작했다. 서민동 단톡방에 영정 사진을 들고 행진할 사람은 신청하라는 공지가 올라왔을 때 나는 우종원 선생의 영정을 들겠다고 신청했다.

 

나는 한 달 전에 복막염 수술을 받았는데, 수술 중에 악성 종양도 발견됐다. 엉겁결에 암 환자가 된 것인데, 기회가 다시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종원 선생의 영정을 들고 행진하겠다고 신청한 것이다.

 

 

나는 모이기로 한 시간보다 1시간가량 일찍 행사장에 도착했다. 우종원 선생의 사진이 준비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내가 그의 영정 사진을 들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서민동 사무국장 이은정 선생은 전민동이 영정 사진을 준비하기 때문에 행진이 시작되기 전에 해당 텐트에 가서 그의 사진을 요청하면 된다고 했다. 다행히 올해는 내가 장갑을 낀 두 손으로 우종원 선생의 영정 사진을 들고 행진에 참여할 수 있었다.

 

안국동에서 광화문을 거쳐 시청 앞까지 1시간 남짓의 행진을 마치고 행사장에 도착했을 때 연단 전면에 영정 사진들이 이미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우종원 선생의 사진을 찾아보니 맨 윗 열 오른쪽 끝에서 23번째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내가 운반해온 영정사진을 행사 위원들에게 반납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행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우종원 선생을 생각했다.

 

 

나는 우종원 선생의 오랜 친구나 절친이 아니다. 같은 사회대 81학번이라는 점만 빼고는 다른 학연도 지연도 없다. 그렇다고 같은 현장에서 함께 일해 본 적도 없다. 나는 그가 명을 달리하기 전에 딱 한 번 만났을 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 희생된 열사들이 언급될 때마다 그를 떠올리곤 한다. 내가 떠올리는 그의 모습은 격렬하게 투쟁하거나 참혹하게 희생된 장면이 아니다. 내가 회상하는 그의 모습은, 심각한 표정의 영정 사진과는 달리, 말없이 웃고 있던 우종원 선생의 조용한 모습이다.

 

내가 오랜 외국 생활을 마치고 아주 귀국했을 때, 조선무용가 최승희 선생의 조사연구와 함께 재일 조선학교의 무용부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보내는 캠페인도 시작했다. 독지가들의 후원 덕분에 최승희 조사연구를 9년째 진행 중이고 이제 결과를 출판할 단계에 이르렀다. 또 서민동을 비롯한 많은 후원자들의 참여 덕분에 2018년부터 약 8년 동안 일본 전역의 조선학교 무용부에 약 1천4백 켤레의 무용신을 보낼 수 있었다.

 

재외동포 후원활동은 한두 분야에만 전념하는 전문 활동이 될 수 없었고, 동포들이 요청하는 일이면 무엇이든 하게 된다. 그래서 중국과 러시아 동포들과도 교류하기 시작했고, 일본에서는 일제강점기에 희생된 조선인 노동자들을 추모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그중 효고현 다카라즈카에 세워진 조선인 노동자 추모비가 관심을 사로잡았다. 다카라즈카시 타마세 마을의 주민들이 조선인 희생자들을 1백년이 넘도록 위령 제사해 온 것이 뒤늦게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2020년 3월 희생자들을 위한 추도비가 건립됐는데, 이는 일본 전역에 세워진 약 170기의 조선인 추도비와 위령비들 중에서 가장 최근에 건립된 것이다.

 

재일 활동가들의 요청에 따라 그 희생자 다섯 분의 한국 내 연고를 조사했고, 그중 한 분이 강원도 강릉 출신임을 밝혀낼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강릉과 다카라즈카의 교류가 시작됐다. 나도 강릉에 자주 오가게 되었는데, 강릉 출신의 민주열사 김성수 선생을 알게 된 것도 그 때였다. 강릉에는 김성수 열사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었는데, 동문인 홍진선 선생이 그 이사장직을 맡아 오래 일해 왔다.

 

 

기념사업회는 매년 마석 모란공원에서 김성수 열사 추모제를 거행했다. 나는 2021년에 처음으로 그 추모제에 참석했는데, 그때 우종원 선생을 다시 만났다. 우종원 선생의 묘가 김성수 열사의 묘 바로 아래에 마련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묘석 위 유리상자 안에는 우종원 선생의 영정이 담겨 있었고, 그 옆에는 “민주열사 고 우종원의 묘”라고 쓴 묘비가 세워져 있었다. 그때가 내가 귀국한 후 다시 우종원 선생을 만난 첫 만남이었다.

 

 

내가 생전의 우종원 선생을 만난 것은 1985년 6월이었다. 같은 사회대 81학번이었지만 나는 그를 몰랐고, 그도 나를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는 각자 맡은 일이 다양했고, 또 자신이 하는 일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던 시절이었다. 81학번이면서 85년에야 서로 통성명을 했다는 것 자체가 비정상 시대의 기형적인 일상일 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만난 곳은 사회대 7동 3층의 사회복지학과 대학원 연구실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교수 연구실 크기의 방에 8명의 대학원생들의 책상이 좌우에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 방 주인의 한 명이었던 이선우 선생은 아침나절이 아니면 볕도 잘 들지 않는 곳이라고 했다. 그러나 내게는 그날의 그 방의 분위기가 아주 환했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나는 1983년 메아리 회장을 맡았고 그해 5월에 노래책을 만들어 전국에 배포한 일로 수배 끝에 강집됐다. 아마도 그날 나는 말년 휴가를 이용해 복학 문제를 알아보려고 학교에 갔다가 절친 이선우 선생을 만나러 그 방을 찾았던 것 같다. 이선우 선생은 나와 단짝으로 메아리 집행부 활동을 하다가 대학원에 진학, 첫 학기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깡통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자판기 커피를 뽑아들고 대학원 연구실을 찾았다. 이선우 선생은 ‘커피는 여기도 있는데...’ 하면서 나를 맞아 주었는데, 방에는 이미 2명의 손님이 더 있었다. 한 명은 신문학과 81학번 허진 선생이었고, 다른 한 명이 우종원 선생이었다.

 

그냥 우연히 모인 것이기 때문에 이야기는 중구난방이었을 것이다. 사실 그날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외무고시에 막 합격한 허진 선생은 갑자기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기 시작한 주역 이야기를 오래 했지만, 나는 귀담아 듣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보다는 이선우 선생이 타준 이른바 ‘특제’ 커피를 홀짝거리면서 맑은 눈으로 말없이 듣고 있던 우종원 선생의 모습이 강한 인상으로 남았다.

 

그가 원래 그렇게 우직한 모습인지, 아니면 수감 생활이 만들어준 절제된 모습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지나치게 심각하거나 음울한 성격은 아니었다는 기억이다. 네 명이서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우종원 선생이 지나가듯이 한 마디 툭 던지자 우리들이 모두 폭소를 터뜨렸던 것도 기억난다.

 

 

그날 그 대학원 연구실의 우연한 만남은 확실히 이상한 만남이었다. 방주인 대학원생과 강집 끝에 복학을 앞둔 군바리, 주역에 푹 빠진 외무고시 합격자와 민추위 활동 중이던 빵잽이가 한 자리에 모인 그런 모임은, 내가 기억하는 한 그 전에도 없었고 그 후에도 없었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스물 서너살의 나이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모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조합의 모임은 그 2-3년 전에도 불가능했을 터이지만, 인생행로가 본격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한 후로는 가능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2022년 4월 나는 임상택 선배님과 함께 강릉을 찾았었다. 김성수 열사의 부모님은 임상택 선배님께 ‘고맙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은 임상택 선배님이 김성수 열사의 사망사건 진상규명 노력이 결실을 보도록 협력하셨기 때문이라고 했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나는 우종원에 대해서도 질문을 드려보았다. 임상택 선배는 기록과 증언 등의 자료가 너무 없어서 우종원에 대한 진상규명은 성공하지 못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런 이야기를 전하는 임선배의 표정이 우울했다.

 

우종원이라는 이름이 나오면 목소리가 낮아지고 분위기가 비장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나 역시 누군가와 그의 이야기를 하다보면 비감해지곤 한다. 그러나 혼자서 우종원 선생을 생각하면 이야기가 다르다. 40여 년 전 대학원연구실에서 만났던 그 한 번의 우연한 만남 때문이다.

 

 

그날 우리는 처음 만났고, 나도 그도 별로 말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만났다면 분명히 친구가 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종원 선생이 나를 어떻게 느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분명히 그를 친구로 삼기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고 다닌다. 한 번의 만남이 오랜 우정으로 이어지지 말란 법은 없다. 그것은 이생이든 저생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jc, 사회81, 2026/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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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阪中之島の名所として大阪公会堂(1918年)を紹介したが、それよりも前の時期に建てられたもう一つの名所がある。 大阪公会堂のすぐ裏手に位置する大阪府立図書館である。 1904年3月1日に開館したこの図書館は、日本で最も古い公立図書館の一つとされている。

 

 

日本初の公立図書館は1898年に京都で設立された『集書院』で、現在は京都府立図書館として運営されている。 図書館の建物は新築であるため、現代的な建築と設備を誇っている。

 

大阪府立図書館は京都府立図書館より6年後に開館したが、開館当時の建物が現在までそのまま使用されていることから、日本最古の図書館とされている。 図書館の機能はそのまま維持しつつ、同時にこの建築物は日本の重要文化財に指定されている。

 

 

実際、今日の大阪府立図書館は2つある。 中之島にある元の図書館は「大阪府立中之島図書館」で、1996年に東大阪に新築・開館した図書館は「大阪府立中央図書館」である。 前者は古書や古新聞、古文書や希貴資料を所蔵し、後者はほとんどの残りの書籍や資料を所蔵している。 規模は後者の方がはるかに大きいが、1945年の日本の敗戦以前の資料はほとんどが大阪府立中之島図書館に所蔵されている。

 

私が崔承喜リサーチを行ったのも主に中之島図書館だった。 崔承喜先生の大阪公演と宝塚公演に関する資料は、ほとんどがこの図書館で発掘された。 中之島府立図書館の1階には新聞閲覧室があるが、実際には古新聞は2階の電子資料室で閲覧できる。

 

 

電子資料室では、創刊当初から『大阪朝日新聞』と『大阪毎日新聞』を検索でき、これら二社が発行する他の定期刊行物も閲覧できる。 私はここで『アサヒグラフ』という週刊畵報雑誌を調査したところ、崔承喜先生に関する多くの資料を発見することができた。

 

 

<アサヒグラフ>には、1920年代から30年代の朝鮮の風景や大阪地域の朝鮮人の姿を捉えた写真資料も豊富に収められている。 孫其禎選手がベルリンオリンピックのマラソン競技で先頭に立ってスタジアムに飛び込む姿の写真が発掘されたのも、まさにこの電子資料室である。 さらに、朝鮮人が集まって暮らしていた大阪の猪飼野地区の1930年代の様子を示す貴重な写真も多数発見された。

 

 

私にとっては中之島図書館が日本による植民地時代の崔承喜と朝鮮人資料の宝庫だったが、日本人や観光客にとっては図書館自体が訪れる価値のある名所である。 外観はルネサンス様式、内部はネオバロック様式が調和したこの建物は日本の重要文化財に指定されており、中央ホールの階段と天井のドームは優雅で美しく、多くの観光客のフォトスポットとして利用されている。 特に曲線状の石段と美しく彫刻された木製の手すりが非常に印象的だ。

 

 

天井ドームのすぐ下部の縁には、8人の思想家・文学者・科学者の名前が刻まれている。 孔子、ソクラテス、アリストテレス、シェイクスピア、カント、ゲーテ、ダーウィンなどの東西の賢人たちと共に、日本人の菅原道真の名前も刻まれている。 韓国人や西洋人にはあまり知られていないが、菅原道真は平安時代の学者であり総神で、日本に学問の神として崇拝されている。

 

 

中之島図書館の2階南側ウィングの端には、カフェも佇んでいる。 2004年に開業した『スモブロ』は、北欧風の雰囲気とミニマリストスタイルのインテリア、そして濃いコーヒーと独特なサンドイッチを提供している。 「スモブロ」(smørrebrød)はデンマーク語で「サンドイッチ」という意味だ。

 

 

私は中之島図書館で取材するたびに『スモブロ』に立ち寄ったが、時間に追われてコーヒーだけを飲み、サンドイッチは味わえなかった。 今回の訪問中に中之島府立図書館を訪れたい方がいれば、電子資料室で崔承喜・尹東柱先生に関する資料を探し、約15分間のコピー作業を実演し、続いて『スモーブロ』にも案内したい。

 

 

もしかしたら、一人ではなく同行者と共に<スモブロ>でコーヒーを飲む初めての機会が生まれるかもしれない。 (jc, 2026/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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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나카노시마의 명소로 오사카 공회당(1918)을 소개했지만, 그보다 더 앞선 시기에 건축된 또 하나의 명소가 있다. 오사카 공회당 바로 뒤편에 자리 잡은 오사카부립도서관이다. 1904년 3월1일 개관한 이 도서관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공립 도서관의 하나로 꼽힌다.

 

 

일본 최초의 공립도서관은 1898년 교토에 설립된 <집서원(集書院)>으로, 지금은 교토부립도서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도서관 건물은 신축된 것이므로 현대식 건축과 설비를 자랑한다.

 

오사카 부립도서관은 교토 부립도서관보다 6년 뒤에 개관했지만, 개관 당시의 건물이 지금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는 일본 최고(最古)의 도서관이다. 도서관 기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건축물이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사실 오늘날의 오사카부립도서관은 2개이다. 나카노시마에 있는 원래의 도서관은 <오사카부립 나카노시마도서관>이고, 1996년에 히가시오사카에 신축, 개관한 도서관은 <오사카부립 중앙도서관>이다. 전자는 고서와 고신문, 고문서와 희귀자료들을 소장하고, 후자는 대부분의 나머지 서적과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다. 규모는 후자가 훨씬 크지만, 1945년 일본의 패전 이전 시기의 자료는 대부분 <오사카부립 나카노시마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필자가 최승희 리서치를 진행한 것도 주로 나카노시마 도서관이었다. 최승희 선생의 오사카 공연과 다카라즈카 공연에 대한 자료는 대부분 이 도서관에서 발굴되었다. 나카노시마 부립도서관의 1층에는 신문열람실이 있지만, 정작 고신문은 2층의 전자자료실에서 열람할 수 있다.

 

 

전자자료실에서는 <오사카아사히신문>과 <오사카마이니치신문>을 창간 때부터 검색할 수 있고, 이 두 신문사가 발행한 다른 정기간행물도 열람할 수 있다. 필자는 이곳에서 <아사히그라프>라는 주간 화보잡지를 조사했는데, 최승희 선생에 관한 많은 자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사히그라프>에는 또 1920-30년대의 조선의 풍광과 오사카 지역의 조선인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자료들도 풍부하다.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선두로 스타디움에 뛰어 들어오는 모습의 사진이 발굴된 것도 바로 이 전자자료실이다. 그밖에도 조선인들이 모여 살던 오사카의 이카이노 지역의 1930년대 모습을 보여주는 희귀한 사진들도 다수 발견되었다.

 

 

필자에게는 나카노시마 도서관이 일제강점기 최승희와 조선인 자료의 보고였지만, 일본인들이나 관광객들에게는 도서관 건물 자체가 방문할 가치가 있는 명소이다. 외관은 르네상스 양식, 실내는 네오바로크 양식이 어우러진 이 건물은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중앙 홀의 계단과 천정의 돔은 우아하고 아름다워서 많은 관광객들의 포토존으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곡선형의 돌계단과 아름답게 조각된 나무 난간이 아주 인상적이다.

 

 

천정 돔의 바로 아랫부분의 가장자리에는 8명의 사상가, 문학가, 과학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공자,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셰익스피어, 칸트, 괴테, 다윈 등의 동서양의 현인들과 함께 일본인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한국인이나 서양인에게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헤이안(平安) 시대의 학자이자 총신으로, 오늘날 일본인들에게 학문의 신으로 숭배되고 있는 인물이다.

 

 

나카노시마 도서관의 2층 남쪽 윙 끝에는 인상적인 카페도 자리잡고 있다. 2004년에 개업한 <스모브로>는 북유럽식의 분위기와 미니멀리스트 스타일의 인테리어, 그리고 진한 커피와 독특한 샌드위치를 제공한다. ‘스모브로(smørrebrød)’는 덴마크어로 ‘샌드위치’라는 말이다.

 

 

필자는 나카노시마 도서관에서 취재할 때마다 <스모브로>에 들렀지만, 시간에 쫓겨서 커피만 마셨고 샌드위치를 맛보지 못했다. 이번 방문 중에 나카노시마 부립도서관을 방문해 보고 싶은 분이 있다면 전자자료실에서 약 15분 동안 최승희, 윤동주 선생에 관한 자료를 찾아 복사하는 과정을 보여드리고, 이어서 <스모브로>에도 안내하고 싶다.

 

 

내게는 혼자서가 아니라 동행과 함께 <스모브로>에서 커피를 마시게 될 첫 번째 기회가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jc, 2026/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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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年6月12日、崔承喜先生のデビュー舞台であった大阪公会堂の正式名称は『大阪市中央公会堂』である。 新北研の訪問団は、3泊4日の歴史紀行の最終日である6月1日に、中之島にある大阪公会堂を訪問する予定だ。

 

 

今年は崔承喜先生が舞踊に入門してから100年目の年である。 6月1日は崔承喜の舞踊デビュー100周年記念日の10日前にあたる。 今回の訪問に特別な意味を加えたくて、私は公会堂にメールを送り、新北連訪問団が大集会室を見学できるかどうか問い合わせた。 大阪公会堂の担当者、杉岡氏は丁寧な口調で、一般の人が大規模集会室を見学することは不可能だと答えてきた。 彼のメールの返信は次のように簡潔だった。

 

「一般のお客さまへの見学は致しておりません。不可となります。申し訳ございません。大阪市中央公会堂 杉岡」

 

数十回にわたる日本取材を通じて日本の官公庁の姿勢に比較的慣れていた筆者にとって、予想外のことではなかった。 日本人は世界的に親切で優しいと評判だが、官公庁は例外である。 私はそう感じた。 日本の官公庁は国民や訪問者を「一般人」と呼ぶ権威を維持している。 官公庁の公務員は「一般人」ではなく「特別人」ということなのだろうか?

 

 

例えば日本では今でも「官民」という言葉が使われている。 日本の国土交通省のプログラムには、「官民連携」というものがある。 官公庁と民間人が互いに協力するという意味だが、「民」より「官」を前面に出している。 最近の韓国では、必ず「民官」と書かれたことだろう。 日本には「民」より「官」が優先されるという意識が残っている。

 

ある意味、当然のことだ。 大韓民国は民主共和国であり、すべての権力は国民から生まれる。 民主的でない要素があれば、取り除いていく。 大統領を二度も弾劾したのはそのためだ。 国民の意思に反すれば、最高権力者である大統領さえも引きずり下ろすのが民主共和国だ。 官は民を守り奉仕する存在として認識されている。

 

日本は立憲君主国である。 選挙制度などを導入して民主主義の外皮を持つことはできたが、憲法上の君主である天皇が最も高い存在であり、天皇を代行する内閣と内閣の指示を受ける官公庁が国民よりも優先されるのが正常だ。 したがって、民主共和国の韓国ではアレルギーを引き起こす「官民」という用語が、立憲君主制の日本では自然に使われている。

 

 

このような雰囲気をある程度感じ取っていた私は、100年前の石井漠舞踊団の大阪公演が歴史的な公演であり、石井漠の弟子である崔承喜先生のデビュー舞台であったことを強調したが、無駄だった。 メールの返信によれば、観覧が不可能な理由は「一般人」であることだけだった。

 

しかし、私たちの訪問団員が不満を持つ必要は全くない。 特に担当者が間違っているわけでもない。 彼はただ慣習に従っただけだ。 ローマに行けばローマの法に従い、大阪に行けば大阪の慣習に従うのが良い。 状況や条件が悪ければ、代替案を探せばよい。

 

1918年に開館した大阪公会堂は、それ自体が文化財であり、ネオルネサンス様式の外観と内部装飾が目を引く建築物である。 大集会場は見学できないが、外観の美しさは十分に鑑賞できる。 公会堂のロビーも「一般」来場者に公開されているので、見学できる。

 

 

1918年の開館当時、大阪公会堂大公演場の収容人数は3000人だった。 崔承喜のデビュー公演(1926年)の時も同様だった。 1978年に開館したソウルの世宗文化会館大劇場の収容人数は3,022席である。 1988年に開館した芸術の殿堂音楽堂(コンサートホール)は2,505席、オペラ劇場は2,305席である。 大阪市はソウルより60年前に世宗文会館規模の公演場を建設したので、感嘆に値する。

 

2002年に修復工事を行った大阪公会堂は、現在では大規模集会室の収容人数が1,161人に減少したが、今日の基準ではこれでも大規模な公演場に分類されるだろう。 (jc, 2026/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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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6월12일 최승희 선생의 데뷔 무대였던 ‘오사카 공회당’의 정식 이름은 ‘오사카시 중앙 공회당(大阪市中央公會堂)이다. 신북연 방문단은 3박4일의 역사기행 마지막 날인 6월1일 오사카 나카노시마(中之島)에 위치한 오사카 공회당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다.

 

 

올해는 최승희 선생이 무용에 입문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더구나 6월1일이면 최승희 무용 데뷔 1백주년 기념일의 열흘 전이다. 이번 방문에 특별히 뜻을 더하고 싶어서 필자는 공회당에 이메일을 보내, 신북연 방문단이 대집회실(大集會室)을 견학할 수 있느냐고 문의했다. 오사카 공회당의 담당자 스키오카(杉岡)씨는 공손한 어투로 일반인의 대집회실 견학은 불가능하다고 대답해 왔다. 그의 이메일 답장은 다음과 같이 간략했다.

 

“일반 관객의 견학은 받지 않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죄송합니다. 오사카시중앙공회당. 스기오카. (一般のお客さまへの見学は致しておりません。不可となります。申し訳ございません。大阪市中央公会堂 杉岡)”

 

수십 차례의 일본 취재를 통해 일본 관공서의 태도에 비교적 익숙한 필자로서는 예상하지 못한 바가 아니었다. 일본인들은 세계적으로 친절하고 상냥한 것으로 소문나 있지만 관공서는 예외이다. 필자는 그렇게 느꼈다. 일본의 관공서는 국민과 방문자를 ‘일반인’이라고 부르는 권위를 유지하고 있다. 관공서의 공무원은 ‘일반인’이 아닌 ‘특별인’이라는 말일까?

 

 

예컨대 일본에서는 아직도 ‘관민(官民)’이라는 말이 쓰인다. 일본 국토교통성(國土交通省)의 프로그램 중에는 관민연휴(官民連携)라는 것이 있다. 관공서와 민간인이 서로 협력한다는 말인데, ‘민’보다 ‘관’을 앞에 내세우고 있다. 요즘 한국에서라면 반드시 ‘민관(民官)’이라고 썼을 것이다. 일본에는 ‘민’보다 ‘관’이 우선이라는 의식이 남아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민주(民主)적이지 않은 요소가 있다면 제거해 나간다. 대통령을 두 번이나 탄핵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국민의 의사에 반하면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이라도 끌어내리는 것이 민주공화국이다. 관은 민을 보호하고 봉사하는 존재로 인식된다.

 

일본은 입헌군주국이다. 선거제도 등을 도입해서 민주주의의 외피를 가지긴 했지만, 헌법상 군주인 텐노가 가장 높은 존재이고, 텐노를 대행하는 내각과, 내각의 지시를 받는 관공서가 국민보다 우선이라고 여기는 것이 정상이다. 따라서 민주공화국 한국에서라면 알레르기를 일으킬 ‘관민’이라는 용어가 입헌군주국 일본에서는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를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던 필자는 1백 년 전 이시이 바쿠 무용단의 공연이 역사적 공연이었고, 이시이 바쿠의 수제자 최승희 선생의 데뷔무대였음을 강조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메일 답장에 따르면 관람이 불가능한 이유는 ‘일반인’이라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우리 방문단원이 불만을 가질 필요는 전혀 없다. 딱히 담당자가 잘못된 것도 아니다. 그는 단지 관행에 따랐을 뿐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에 따르고, 오사카에 가면 오사카의 관행에 따르는 것이 좋다. 상황이나 조건이 나쁘면 대안을 찾으면 된다.

 

1918년에 개관한 오사카 공회당은 그 자체가 문화재이고, 네오르네상스식의 외관과 내부 장식은 눈길을 끄는 건축물이다. 대집회장은 견학할 수 없지만, 외관의 아름다움은 얼마든지 감상할 수 있다. 공회당의 로비도 ‘일반인’ 관람객에게 공개되어 있으므로 구경할 수 있다.

 

 

1918년 개관 당시 오사카 공회당 대공연장의 수용인원은 3천명이었다. 최승희 데뷔공연(1926)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1978년에 개관한 서울의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의 수용인원이 3,022석이다. 1988년에 개관한 예술의전당 음악당(콘서트홀)이 2,505석, 오페라극장이 2,305석이다. 오사카시는 서울보다 60년 전에 세종문회회관 규모의 공연장을 건립한 것이니 감탄할 만 하다.

 

2002년 보수공사를 단행한 오사카 공회당은 지금은 대집회실의 수용인원은 1,161명으로 줄었지만, 오늘날 기준으로는 이 정도도 대규모 공연장으로 분류될 것이다. (jc, 2026/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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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承喜先生は『私の自敍伝』(1936)で、1934年9月20日の東京発表会を「デビュー」と呼んだが、これは意外だった。 彼女はそれ以前にも朝鮮と日本で多くの公演に出演していたからだ。

 

フランス語の「デビュー(debut)」は「ビリヤードで最初の球を打つ」という意味のデビューテ(débuter)から比喩的に派生した言葉で、「公衆に初めて現れたり、社交界に初めて登場すること」を指す。 「デビュー」という語は日本語でしばしば「初舞台」または「処女公演)」と訳される。

 

 

1934年9月以前にも崔承喜先生は観客の前に立ったことが多かった。 同年3月には石井漠舞踊団の北海道巡回公演に、5月12日には東京春の公演に出演した。 この時、崔承喜先生は「エレジー」と「エヘヤ・ノアラ」、「希望を抱いて」など、自身の創作物を発表していた。

 

さらに遡ると、1933年にも崔承喜先生は東京の舞台に少なくとも4回以上出演していた。 1934年1月1日付の『毎日新報』(12面)は次のように報じた。

 

「(日本に)渡ってから数日も経たないうちに、昨年(=1933年)春に開催された近代女性舞踊大会に出場し、満場の喝采を受け、さらに東京日刊新聞社主催の舞踊祭にも出演して好評を得た。 昨年10月に石井漠舞踊研究所の発表会で、「希望を抱いて」(サラサテ曲)、「エヘヤ・ノアラ」という二つの朝鮮情調が溢れ出る新しい舞踊を発表し、舞踊評論家から絶対的な歓迎を受けた。 昨年、最後に12月の時事新聞主催の全日本一流舞踊家を網羅した『1933年舞踊祭』に参加し、朝鮮人として万章の気を帯びた。」

 

 

京城での活動時期にも、崔承喜先生は1930年2月1日に京城公会堂で自身の初の京城公演を開催し、さらに3か月前の1929年12月5日・6日には讚映会が主催した『舞踊劇映画の夜』のイベントで「インド哀愁曲」、「金と銀」、「セレナータ」を発表した。 彼女は1929年12月から1933年3月まで京城で5回の新作発表会と4回の舞踊発表会を開催したことがある。

 

つまり、崔承喜先生は1926年から1934年までの8年間、京城と東京で20回以上の主要公演に出演し、地方公演も含めると100回以上の公演をこなしたベテランの舞踊家だった。 それでも彼女が『私の自敍伝』(1936)で1934年9月の東京発表会を「デビュー」と呼んだのは意外だ。 おそらく東京で「新たな出発」を宣言する決意を強調するためだったと判断される。

 

 

では、崔承喜先生の本当のデビュー、つまり生涯初の舞台出演はいつ、どこでだったのだろうか? 1926年6月27日付の『京城日報』(夕刊2面)は次のように報じた。

 

「石井漠の弟子として入った淑明女学校出身の崔承子(=石井漠が付けた崔承喜の芸名)は、6月22日に東京邦楽座の処女公演に出演…(写真説明)初舞台で「魚の舞」を踊る崔承子。」

 

崔承喜先生の「初舞台」、つまり「デビュー」が1926年6月22日の邦樂座公演だったというが、これは誤報だった。 彼女はそれより10日前に大阪公会堂の公演に出演していたからだ。

 

 

1926年6月13日付の『大阪毎日新聞』(9面)は、崔承喜先生が6月12日に大阪公会堂で開催された石井漠舞踊団の招待公演に出演したことを示す写真を掲載した。 この公演で彼女は「グロテスク」という作品に出演した。 1926年6月10日付の『大阪朝日新聞』(9面)も大阪公会堂の公演直前に崔承喜先生を独占インタビューし、次のような記事を報じた。

 

「舞踊家石井漠兄妹が京城で興行中弟子入りした朝鮮の娘さん崔承喜(十六)が今度金蘭會女学校の演藝會へ出演する。石井一行に加はつて六月十二日大阪中央公會堂の舞台に現れる。」

 

 

したがって、崔承喜先生の生涯初の舞台は1926年6月12日の大阪公会堂であり、「グロテスク」が初作品(石井小浪作)であった。 新聞は彼女の年齢を16歳と報じたが、実際には14歳(+4か月)で、京城を離れ東京で舞踊留学を始めてからわずか2か月半だった。 (jc, 2024/8/15; 2026/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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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선생은 <나의 자서전>(1936)에서 1934년 9월20일의 도쿄발표회를 “데뷔”라고 불렀는데, 이는 뜻밖이다. 최승희는 그 전에도 조선과 일본에서 많은 공연에 출연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어 ‘데뷔(debut)’는 “당구에서 첫 공을 치다”라는 뜻의 데뷔테(débuter)에서 비유적으로 파생된 말인데, “공중 앞에 처음 나타나거나 사교계에 처음 등장하는 것”을 가리킨다. 데뷔라는 말은 일본어에서 흔히 “초무대(初舞臺)” 또는 “처녀공연(處女公演)”으로 번역되었다.

 

 

1934년 9월 이전에도 최승희 선생은 관객 앞에 선 적이 많다. 그해 3월 이시이 바쿠 무용단의 홋카이도 순회공연과 5월12일의 도쿄 봄 공연에 출연했다. 이때 최승희 선생은 <엘레지>와 <에헤야 노아라>, <희망을 안고서> 등 자신의 창작품을 발표했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33년에도 최승희 선생은 도쿄 무대에 적어도 4회 이상 출연했다. 1934년 1월1일자 <매일신보>(12면)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일본에) 건너간 지 며칠 안 되어 작년(=1933년) 봄에 열린 근대여류무용대회에 나가서 만장의 기염을 토하였었고 이어서 동경 일일신문사 주최의 무용제에도 출연하여 호평을 받았다. 다시 작년 10월 석정막무용연구소 발표회에서는 <희망을 안고서(사라사테곡)>, <에헤야 노아라>라는 두 가지 조선정조가 넘쳐흐르는 새로운 무용을 발표하여 무용비평가의 절대적 환영을 받았다. 작년에 마지막으로 12월 시사신문 주최의 전일본 일류무용가를 망라한 <1933년 무용제>에 참가하여 조선인으로서 만장의 기염을 토하였다.”

 

 

경성 활동시기에도 최승희 선생은 1930년 2월1일 경성공회당에서 자신의 첫 경성 공연을 열었고, 그보다 3개월 전인 1929년 12월5-6일에는 찬영회(讚映會)가 주최한 <무용 극 영화의 밤> 행사에서 <인도 애상곡>, <금과 은>, <세레나테>를 발표했다. 그녀는 1929년 12월부터 1933년 3월까지 경성에서 5회의 신작발표회와 4회의 무용발표회를 개최한 바 있다.

 

즉, 최승희 선생은 1926년부터 1934년까지 8년 동안 경성과 도쿄에서 20차례 이상의 주요 공연에 출연했고, 지방공연까지 합치면 1백회 이상의 공연을 소화한 베테랑 무용가였다. 그런데도 그녀가 <나의 자서전>(1936)에서 1934년 9월의 도쿄발표회를 “데뷔”라고 불렀던 것은 의외다. 아마도 도쿄에서 “새 출발”하겠다는 결의를 강조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최승희 선생의 진짜 데뷔, 즉, 생애 최초의 무대 출연은 언제, 어디서였을까? 1926년 6월27일자 <경성일보>(석간2면)>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이시이 바쿠의 제자로 들어간 숙명여학교 출신의 최승자(崔承子=이시이 바쿠가 지어준 최승희의 예명)는 (6월)22일 도쿄 호가쿠자(邦樂座)의 처녀공연에 출연... (사진설명) 초무대에서 <물고기춤(魚の舞)>을 추는 최승자.”

 

최승희 선생의 ‘초무대’ 즉 ‘데뷔’가 1926년 6월22일의 호가쿠자 공연이었다는 것인데, 이는 오보였다. 그녀는 그보다 열흘 앞서 오사카 공회당 공연에 출연했기 때문이다.

 

 

1926년 6월13일자 <오사카마이니치신문>(9면)은 최승희 선생이 6월12일 오사카공회당에서 열린 이시이 바쿠 무용단 초청공연에 출연했음을 보여주는 사진을 게재했다. 이 공연에서 그녀는 <그로테스크>라는 작품에 출연했다. 1926년 6월10일자 <오사카아사히신문>(9면)도 오사카공회당 공연 직전에 최승희 선생을 단독 인터뷰해서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보도했다.

 

“무용가 이시이 바쿠 남매가 경성에서 흥행 중에 제자로 들어간 조선의 소녀 최승희(16)가 이번에 금란회여학교 연예회에 출연한다. 이시이 일행과 함께 6월12일 오사카 중앙공회당의 무대에 나타난다.”

 

 

따라서 최승희 선생의 생애 첫 무대는 1926년 6월12일의 오사카 공회당이었고, 첫 작품은 <그로테스크>였다. 기사는 그녀의 나이를 16세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만14세(+4개월)였고, 경성을 떠나 도쿄에서 무용 유학을 시작한지 두 달 반 만이었다. (jc, 2024/8/15; 2026/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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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都府の和束は静岡県、鹿児島県、埼玉県の狭山、愛知県とともに日本茶の主要生産地である。 静岡が緑茶の最大生産地であり、鹿児島が煎茶で有名なように、京都府の和束は高級抹茶の生産の中心である。

 

 

中国の団茶が日本に伝わったのは、奈良時代(710-794年)に中国に派遣された遣唐使によるものと推定されている。 平安時代(794〜1185年)に首都が京都に移されたことで茶産業と文化が発展し、ほとんどの茶畑は平城京と平安京の間に設けられた。 その中で最も有名なのが和束と宇治で、宇治に最初の茶店である通圓が開店したのは平安時代の末期であった。

 

参考までに、日本語で京都は一国の「首都」を指す一般名詞だったが、平安京が千年にわたり日本の首都として機能している間に、固有名詞である平安京は次第に使用されなくなり、一般名詞である京都が平安京を指す固有名詞へと変化した。 これは、韓国語で普通名詞だった「ソウル」が現在の首都を指す固有名詞になったことと似ている。 ただし違いがあるとすれば、ソウルは普通名詞になる前に新羅の首都慶州を指していた固有名詞「ソラボル」であったという点だ。

 

 

日本で最も古い茶店である通圓は、京都駅から南東へ約15キロ離れた宇治で1160年に開店した。 今年で867年目となる。 西洋では、1635年にトルコのガジアンテプ(Gaziantep)で開店したタフミス・カフヴェシ(Tahmis Kahvesi)が最も古いコーヒーハウスとされており、通圓の歴史はそれより約500年古い。

 

通圓は宇治市を貫く宇治川の宇治橋の東側の斜面に位置している。 現在の茶屋の建物は1672年に新築されたもので、これだけでも350年の歴史がある。 何度も改築を経ても元の建物構造を維持しているタフミス·コーヒーハウスに比べると、通圓の歴史は一世代ほど短い。

 

 

通圓の茶メニューは非常に多様だが、抹茶が本流だ。 お茶一杯の値段がかなり高かったと記憶しているが、韓国人はむしろ抹茶よりも抹茶アイスクリームに惹かれる傾向がある。

 

韓国人観光客が宇治市を多く訪れるのは、通圓の抹茶アイスクリームが理由でもあるが、そこに尹東柱先生の詩碑があるからでもある。 「記憶と和解の碑」とも呼ばれるこの詩碑は、2017年に尹東柱先生の誕生100周年を迎えて建立されたものである。 韓国と日本から持ち込まれた2つの碑には、尹東柱先生の作品「新しい道」(새로운 길)が韓国語と日本語で刻まれている。

 

 

この詩碑は、尹東柱先生が京都大の同窓生たちと行った最後の送別会の場所に近く設置された。 この送別会で流動株先生はアリランを歌い、友人たちと最後の記念写真を撮った。

 

同窓生の北島万里子さんのアルバムで見つかったこの写真には、木製の吊り橋である天ヶ瀬吊り橋を背景に、7人の男子学生と2人の女子学生の姿が写っている。 詩碑が建てられた場所は宇治川のもう一つの橋、白虹橋の北側の斜面で、ここでは記念写真の中の天ヶ瀬吊り橋が肉眼でも見える。

 

 

私はこの詩碑を参拝しながら、その日尹東柱先生を送別した20代の日本人若者8人が誰で、その後それぞれどのように生きていたのかを取材してみたいという衝動を感じた。 しかし、その衝動はまだ実行に移されていない。 崔承喜の取材が終われば可能かもしれないが、そうではないかもしれない。

 

京都から宇治へ行く最も良い方法は、京都駅から宇治駅まで奈良線の電車に乗ることだ。 所要時間は約30分で、料金は240円が基本料金だ。

 

 

宇地驛から南東に100メートル歩くと通圓で、通圓から宇治川の北岸に沿って南東に約2キロメートル進むと天ヶ瀬吊り橋があり、そこから東に300メートル歩くと白虹橋がある。 尹東柱先生の詩碑は白虹橋のすぐ隣にある。 (jc, 2026/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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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부의 와즈카(和束)는 시즈오카현, 가고시마현, 사이타마현의 사야마(狭山), 아이치현과 함께 일본차의 주요 생산지다. 시즈오카가 녹차(お茶)의 최대 생산지이고 가고시마가 센차(煎茶)로 유명하듯이, 교토부의 와즈카는 고급 맛차(抹茶) 생산의 중심이다.

 

 

중국의 단차(團茶)가 일본에 전해진 것은 나라 시대(710-794년)에 중국에 파견했던 견당사(遣唐使)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헤이안 시대(794-1185년)에 수도가 교토로 옮겨지면서 차 산업과 문화가 발전했고 대부분의 차밭은 나라의 수도 헤이조쿄(平城京)와 헤이안의 수도 헤이안쿄(平安京) 사이에 조성됐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와즈카와 우지(宇治)이고, 우지에 최초의 찻집인 츠엔(通圓)이 개점한 것은 헤이안 시대의 말기였다.

 

참고로, 일본어에서 교토(京都)는 한 나라의 ‘수도’를 가리키는 일반 명사였으나, 헤이안쿄가 1천년 동안 일본의 수도 역할을 하는 동안, 고유명사인 헤이안쿄는 점점 덜 사용되고 일반명사인 교토가 헤이안쿄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바뀌었다. 이는 한국어에서 보통명사였던 ‘서울’이 오늘날의 수도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된 것과 유사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서울’은 보통명사가 되기 전에 신라의 수도 경주를 가리키던 고유명사 ‘서라벌’이었다는 점이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찻집 츠엔은 교토역에서 남동쪽으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우지(宇治)에서 1160년에 개점됐다. 올해(2026년)로 867년째이다. 서양에서는 1635년 터키의 가지안텝(Gaziantep)에 개점한 타흐미스 카흐베시(Tahmis Kahvesi)를 가장 오래된 커피 하우스로 꼽는데, 츠엔의 역사는 그보다 거의 5백년을 앞선다.

 

츠엔은 우지시(宇治市)를 관통하는 우지강(宇治川)의 다리 우지교(宇治橋) 동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의 찻집 건물은 1672년에 신축된 것이라고 하니 이것만도 역사가 350년이다. 여러 번의 개축을 거치면서도 원래의 건물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타흐미스 커피하우스에 비하면 츠엔의 역사가 한 세대쯤 짧다.

 

 

츠엔의 차 메뉴는 극히 다양하지만 맛차가 본류이다. 차 한 잔 값이 상당히 비쌌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한국인들은 정작 말차보다 말차 아이스크림에 더 매혹되는 경향이 있다.

 

한국인 방문객이 우지시를 많이 찾는 것은 츠엔의 맛차 아이스크림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여기에 윤동주 선생의 시비가 있기 때문이다. <기억과 화해의 비(記憶と和解の碑)>라고도 불리는 이 시비는 2017년 윤동주 선생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건립된 것이다. 한국과 일본에서 공수된 2개의 비석에는 윤동주 선생의 작품 <새로운 길>이 한국어와 일본어로 새겨져 있다.

 

 

이 시비는 윤동주 선생이 교토대의 동창생들과 가졌던 마지막 송별회 장소에 가깝게 세워졌다. 이 송별회에서 윤동주 선생은 아리랑을 노래했고, 친구들과 마지막 기념사진을 찍었다.

 

동창생인 기타지마 마리코(北島萬里子) 씨의 앨범에서 발견된 이 사진에는 목제 현수교인 아마가세 츠리바시(天ヶ瀬吊り橋)를 배경으로 7명의 남학생과 2명의 여학생의 모습이 담겨있다. 시비가 세워진 곳은 우지강의 또 다른 다리 호카바시(白虹橋)의 북쪽 기슭인데, 여기에서는 기념사진 속의 아마가세 현수교가 육안으로도 보인다.

 

 

나는 이 시비를 참배하면서, 그날 윤동주 선생을 송별해 준 20대의 일본인 젊은이 8명이 누구였으며, 이후 각자 어떻게 살았는지 취재해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아직 그 충동은 실천에 옮겨지지 못했다. 최승희 취재가 끝나면 가능할 지도 모를 일이기는 하다.

 

교토에서 우지까지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교토역에서 우지역까지 나라선(奈良線) 전철을 타는 것이다. 약 30분쯤 걸리고, 요금은 240엔으로 기본요금이다.

 

 

우지 역에서 남동쪽으로 1백미터만 걸으면 츠엔이고, 츠엔에서 우지강 북안을 따라 남동쪽으로 약 2킬로미터를 더 가면 아마가세 현수교, 그리고 거기서 동쪽으로 3백미터만 더 걸으면 호카교이다. 윤동주 선생의 시비는 호카교의 바로 옆에 있다. (jc, 2026/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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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承喜先生はコーヒーを楽しんでいたのだろうか? コーヒーマニアだった安昌浩先生ほど愛好家だったかは分からないが、彼女がコーヒーを飲む姿は二枚の写真に残っている。 一枚は京釜線特急列車アカツキの食堂車、もう一枚は京城朝鮮ホテルの洋食店ファームコートのサンルームで撮影したものである。

 

 

2枚の写真は1937年2月19日に撮影された。 崔承喜先生は2月20日から21日の京城公演のため、2月17日夜11時に東京を出発し、2月18日夜9時5分に下関に到着し、その日の夜10時30分に出発する夜船で対馬海峡を渡った。 2月19日朝6時に釜山の残橋駅で降りた崔承喜先生は、朝6時50分に京城行き特急列車「アカツキ」に乗り換え、午後2時5分に京城駅で下車した。

 

アカツキは釜山-京城を6時間45分で走破したが、これは過去のヒカリとノゾミの走行時間10時間よりも3時間15分短縮されたもので、30年前に開通した京釜線の初列車である隆熙が30時間走ら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ことに比べると4倍も速くなった。

 

アカツキは当時の最高速度の豪華列車だったため、運営費が高かった。 収支を合わせるために鉄道局は大規模な宣伝を行い、最高のスターである崔承喜先生を写真モデルとして起用した。

 

 

当日は、釜山の残橋駅、東来の温泉ホテル、アカツキの展望車とレストラン車を背景にした崔承喜先生の写真が撮影され、その日の宿泊先であった朝鮮ホテルのファームコート・サンルームでも撮影が行われた。 釜山の残橋駅とアカツキの展望車の写真、そしてサンルームのコーヒーの写真は1937年版『半島の近影』に掲載され、東莱温泉の写真とアカツキ食堂車のコーヒーの写真は同じ本の1938年版に掲載された。

 

2枚の写真で崔承喜先生の衣装と帽子が同じで、同時に撮影された娘の安勝子の衣装も同一であるのは、両者が同じ日に撮影されたためである。 また、2枚の写真で崔承喜先生の手に持たれたコーヒーカップの姿が完全に同じだったのは、鉄道局が2つのレストランを直営していたからだった。

 

 

尹東柱先生がコーヒーを楽しんでいたかどうかはあまり知られていない。 龍井でも、京城でも、東京や京都でも、尹東柱先生がコーヒーを飲んだという直接的な記録は見つかっていない。 ただし、ウェソル会(외솔회)が出版した『ナラサラン』(1976年6月、23号)に掲載された鄭炳昱先生の回顧録「忘れられない尹東柱の出来事」(132-139ページ)には、二人が楼上洞9番地の劇作家金松(1909-1988)氏の家に下宿していた時代の話が次のように記されている。

 

「1941年5月の月末、私たちは金松さんの家族として入り込み、新しい下宿生活が始まった。 金松さんの妻、趙姓女さんは声楽家として美しい声を時折私たちに聞かせてくれ、夕食が終わると大廳の床で紅茶を飲みながら音楽を楽しみ、文学について語り合っていた。」

 

 

尹東柱と鄭炳昱が下宿の女主人趙姓女さんが淹れた「紅茶」を飲んだという記録はあるが、「コーヒー」の話は出てこない。 当時、尹東柱は4年生、鄭炳昱は2年生で、新村で学校が終わると忠武路の書店、寬勳洞の古本屋、そして積善洞の書店を巡っていたという。 鄭炳昱は同じ文章(137ページ)で次のように回想した。

 

「下学後は電車を利用し、韓国銀行の前まで電車で入り、忠武路の書店を巡った。 至誠堂、일한서방、マルゼン、群書堂などの新刊書店や古書店を回った後、『冬の宿』や『南風荘』という音楽喫茶に立ち寄り、音楽を楽しみながら、まず新しく買った本をめくることもあった。

 

「帰り道に『明治座』(今の明洞芸術劇場)で面白い番組があれば映画を見たこともあった。 劇場に立ち寄らなければ、明洞から徒歩で乙支路を通り、清渓川を渡って寬勳洞の古本屋を再び巡礼する。 そこからさらに歩いて積善洞の有吉書店に立ち寄り、書棚をめくると、通りには電気が灯っている時になる。」

 

尹東柱と鄭炳昱は書店巡りの途中で音楽喫茶に立ち寄り、音楽を楽しみながら新しく買った本を見ていたという。 音楽喫茶なら紅茶も売っていたでしょうが、コーヒーも飲める場所ではなかったのかな? 私も1980年代中頃に鍾路の「ルネサンス」や明洞の「フィルハーモニー」で音楽をリクエストして聴いていた。 これらの音楽喫茶が入場料を取って提供していた飲み物はコーヒーだったが、それよりも半世紀前の1930年代の明洞の音楽喫茶『冬の宿』や『南風荘』でもコーヒーを提供していた可能性が高い。

 

 

当時の京城では、1920年代後半から『白林館』(1926年)や『カカデュ』(1928年)、『メキシコ』(1929年)などのコーヒー専門店が朝鮮人によって開業し始め、1930年代には『ナクランパラ』(1931年)、『ポンアミ』(1931年)、『プラタナ』(1930年代初頭)、『ツバメ』(1933年)、『ナクラン』(1934年)などの営業店が繁盛し、知識人や文化芸術家の拠点となった。 女性給与を置いて酒を売るカフェとは異なり、喫茶店はコーヒーを販売することが主な特徴だった。

 

1930年代にコーヒーが流行し始めた以上、音楽喫茶『冬の宿』や『南風荘』でもコーヒーを販売していたはずだ。 ただし、『冬の宿』や『南風荘』がコーヒーを提供し、尹東柱と鄭炳昱先生が音楽喫茶を頻繁に利用していたとしても、彼らが実際にコーヒーを飲んだかどうかは断言できない。

 

 

一方、尹東柱先生より10年以上前に京都大学で留学した鄭芝溶先生も、コーヒーに関連する文章やエピソードは見つかっていない。 コーヒーに最も近い作品が「カフェ・フランス」(1926)で、異国情緒あふれるカフェを訪れた朝鮮人留学生たちの苦労と哀れな生活が描かれている。

 

特に主人公は自嘲的な声で「私は子爵の息子でも何でもない」と嘆き、「私は國も家もない」と嘆き、鬪士になれずに勉強だけ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学生として「手がひび割れていて悲しい」と言い、「大理石のテーブルに触れる自分の頬が悲しい」と、酔ってぼやくだけの植民地知識人に過ぎなかった。

 

しかし、「カフェ・フランス」でもコーヒーとの関連性は見つけにくい。 1920年代の日本の「カフェ」は、コーヒー店というより「女給のある居酒屋」だったからだ。 この作品にも女給が登場し、「輕絲カーテンの下で」うたた寝している「鬱金香お嬢さん」がまさに彼女である。鬱金香とは、チューリップを指す漢字である。

 

 

今でも京都に行くと、四条通りに『サロン・フランソワ』(Salon de the Francois)というカフェがある。 コーヒーや紅茶、ペストリー、ケーキを販売している店で、外の看板には「喫茶」とも書かれている。

 

鄭芝溶先生を訪ねて京都を訪れる韓国人の中には、ここを「カフェ・フランス」の背景だと誤解する場合がある。 しかし、『サロン・フランソワ』が開業したのは1934年で、鄭芝溶先生の「カフェ・フランス」は1925年に日本語で、1926年に朝鮮語で発表された。 さらにフランソワ(François)はフランチェスコという人名であり、国名フランス(France)とは異なる言葉である。

 

鄭芝溶の留学時期(1923年-1929年)の京都に「フランス」という名前のカフェが実際に存在したかどうかは確認されていない。 おそらく、作品に異国情緒を吹き込むために、鄭芝溶先生が想像で作り上げたカフェの名前だったのだろう。

 

 

タバコへの愛着が深く、意味を与えていた崔承喜、尹東柱、鄭芝溶先生は、コーヒーとはあまり縁がなかったようだ。 コーヒーを飲んだ可能性はあるが、実際に飲んだり、好んで飲んだという記録は見つかっていない。

 

尹東柱先生は音楽喫茶で音楽を聴き、本を読みながらコーヒーを飲んだことはあるかもしれないが、実際にコーヒーを飲んだという記録はない。 鄭芝溶先生も異国的カフェの朝鮮人留学生たちの話を詩にしたが、そのカフェでコーヒーを飲んだという話は記録されていなかった。 崔承喜先生は2枚のコーヒー写真を残したが、それは新たに開通した列車アカツキの宣伝用の設定ショットだった可能性が高い。

 

 

それでも、3人がコーヒーと少しずつ縁を持っていたのは事実だ。 もしかしたらそれは避けられないことだったのかもしれない。 1930年代の朝鮮と日本、特に京城と京都と東京はコーヒーと喫茶店の都市だったからだ。 (jc, 2026/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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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선생은 커피를 즐겼을까? 커피 매니아였다는 안창호 선생만큼 애호가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가 커피를 마시는 모습은 두 장의 사진으로 남아 있다. 한 장은 경부선 특급열차 아카츠키의 식당칸, 다른 한 장은 경성 조선호텔의 양식당 팜코트의 선룸에서 찍은 것이다.

 

 

두 사진은 1937년 2월19일에 촬영됐다. 최승희 선생은 2월20-21일의 경성 공연을 위해 2월17일 밤 11시에 도쿄를 출발, 2월18일 밤 9시5분에 시모노세키에 도착했고, 그날 밤 10시30분에 출발하는 밤배로 대한해협을 건넜다. 2월19일 아침 6시에 부산 잔교역에 내린 최승희 선생은 아침 6시50분 경성행 특급열차 아카츠키로 갈아타고 오후 2시5분 경성역에 내렸다.

 

아카츠키는 부산-경성을 6시간 45분에 주파했는데, 이는 과거의 히카리와 노조미의 주행시간 10시간보다 3시간15분을 단축한 것이고, 30년 전에 개통된 경부선의 첫 열차 융희(隆熙)가 30시간을 달려야 했던 것에 비하면 4배나 빨라진 것이었다.

 

아카츠키는 당시의 최고속 호화 열차였으므로 운영비가 비쌌다. 수지를 맞추기 위해 철도국은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고, 최고의 스타 최승희 선생을 사진 모델로 섭외했던 것이다.

 

 

이날 부산의 잔교역, 동래의 온천호텔, 아카츠키의 전망차와 식당차를 배경으로 한 최승희 선생의 사진이 촬영됐고, 숙소였던 조선호텔의 팜코트 선룸에서도 촬영이 이뤄졌다. 부산 잔교역과 전망차의 사진, 그리고 선룸의 커피 사진은 1937년판 <반도의 근영(半島近影)>에 실렸고, 동래 온천의 사진과 아카츠키 식당차의 커피 사진은 같은 책의 1938년판에 실렸다.

 

두 사진에서 최승희 선생의 의상과 모자가 같은 것은 이 두 사진이 같은 날 촬영되었기 때문이다. 또 두 사진에서 최승희 선생의 손에 들린 커피잔의 모습이 완전히 같은 것은 철도국이 두 식당을 직영했기 때문이었다.

 

 

윤동주 선생이 커피를 즐겼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용정에서든, 경성에서든, 도쿄나 교토에서든, 유동주 선생이 커피를 마셨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발견된 바 없다. 다만 외솔회가 펴낸 <나라사랑>(1976년 6월, 23호)에 실린 정병욱 선생의 회고록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132-139쪽)>에는 두 사람이 누상동 9번지의 극작가 김송(金松, 1909-1988) 씨의 집에 하숙하던 시절의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1941년 5월 그믐께 우리는 김송 씨의 식구로 끼어들어 새로운 하숙 생활이 시작되었다. 김 송 씨의 부인 조성녀(趙姓女) 여사는 성악가로서 아름다운 목소리를 우리에게 가끔 들려 주셨고, 저녁 식사가 끝나면 대청마루에서 홍차를 마시며 음악을 즐기고, 문학을 담론하기도 했었다.”

 

 

윤동주와 정병욱이 하숙집 여주인 조성녀 씨가 끓여 내온 ‘홍차’를 마셨다는 기록은 있지만 ‘커피’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당시 윤동주는 4학년, 정병욱은 2학년생이었는데 신촌에서 학교가 끝나면 충무로의 책방들, 관훈동의 헌책방, 그리고 적선동의 서점을 순례하곤 했다고 한다. 정병욱은 같은 글(137쪽)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하학 후에는 기차편을 이용했었고, 한국은행 앞까지 전차로 들어와 충무로 책방들을 순방하였다. 지성당, 일한서방, 마루젠, 군서당 등, 신간서점과 고서점을 돌고 나면 '후유노야도'(冬の宿)나 '남풍장'(南風莊)이란 음악다방에 들러 음악을 즐기면서 우선 새로 산 책을 들춰보기도 했다.

 

“오는 길에 '명치좌'(明治座; 지금의 명동예술극장)에 재미있는 프로가 있으면 영화를 보기도 했었다. 극장에 들르지 않으면 명동에서 도보로 을지로를 거쳐 청계천을 건너서 관훈동 헌책방을 다시 순례한다. 거기서 또 걸어서 적선동 유길서점(有吉書店)에 들러 서가를 훑고 나면 거리에는 전기불이 켜져 있을 때가 된다.”

 

윤동주와 정병욱은 서점 순례 중에 음악다방에 들러 음악을 즐기면서 새로 산 책을 살펴보았다고 했다. 음악다방이라면 홍차도 팔았겠지만, 커피도 마실 수 있는 곳이 아니었을까? 필자도 1980년대 중반에 종로의 <르네상스>나 명동의 <필하모니>에서 음악을 신청해서 듣곤 했다. 이 음악다방들이 입장료를 받고 제공하던 음료가 커피였지만, 그보다 반세기 전인 1930년대 명동의 음악다방 <후유노야도>와 <남풍장>에서도 커피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경성에서는 1920년대 말부터 <백림관>(1926), <카카듀(1928)>, <멕시코(1929)> 등의 커피 전문점이 조선인에 의해 개업하기 시작해, 1930년대에는 <낙랑파라>(1931), <뽄아미>(1931), <푸라타나>(1930년대초), <제비>(1933), <낙랑>(1934) 등의 끽다점들이 성업하면서 지식인과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여급을 두고 술을 파는 카페와는 달리 끽다점들은 커피를 판매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1930년대에 커피가 유행하기 시작한 이상, 음악다방 <후유노야도>와 <남풍장>에서도 커피를 판매했을 것이다. 다만, <후유노야도>와 <남풍장>이 커피를 제공했고, 윤동주, 정병욱 선생이 음악다방을 자주 이용했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실제로 커피를 마셨는지는 단언할 수가 없다.

 

 

한편, 윤동주 선생보다 10여년 앞서 교토 대학에서 유학한 정지용 선생도 커피와 연관된 글이나 에피소드는 발견되지 않는다. 커피에 가장 근접한 작품이 <카페 프란스>(1926)인데, 이국적인 카페를 찾은 조선인 유학생들의 힘들고 안타까운 삶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특히 주인공은 자조적인 목소리로 “나는 자작의 아들도 아무 것도 아니”며, “나라도 집도 없”다고 한탄하고, 투사가 되지 못한 채 공부만 해야 하는 학생으로서 “남달리 손이 희어서 슬프”고, “대리석 테이블에 닿는 내 뺨이 슬프”다고, 술 취해 넋두리하는 식민지 지식인일 뿐이었다.

 

하지만 <카페 프란스>에서도 커피와의 연관성은 찾기 어렵다. 1920년대의 일본의 ‘카페’는 커피 가게라기보다는 ‘여급이 있는 술집’이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도 여급이 등장하는데 ‘경사 커텐 밑에서’ 졸고 있는 ‘울금향 아가씨’가 바로 그녀이다. 울금향(鬱金香)이란 ‘튤립’을 가리키는 한자이다.

 

 

지금도 교토에 가면 시조(四条) 거리에 <살롱 프랑소와(Salon de the Francois)>라는 카페가 있다. 커피와 홍차, 패스튜리와 케익을 파는 곳인데, 외부 간판에는 <킷사텐(喫茶店)>이라고도 쓰여 있다.

 

정지용 선생을 찾아 교토를 방문하는 한국인들 중에는 이곳을 <카페 프란스>의 배경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살롱 프랑소와>가 개업한 것은 1934년이고, 정지용 선생의 <카페 프란스>는 1925년에 일본어로, 1926년에 조선어로 발표되었다. 더구나 ‘프랑소와(François)’는 프란체스코 또는 프란시스라는 사람 이름의 프랑스어 표기이고 나라 이름 ‘프랑스(France)’와는 다른 말이다.

 

정지용의 유학시기(19233-1929)의 교토에 ‘프랑스’라는 상호를 가진 카페가 실제로 존재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아마도 작품에 이국적인 분위기를 불어넣기 위해 정지용 선생이 상상으로 지어낸 카페 이름이었을 것이다.

 

 

담배에 대한 애착이 깊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던 최승희, 윤동주, 정지용 선생이 커피와는 그다지 인연이 깊지 않았던 것 같다. 커피를 마셨을 가능성은 있지만 실제로 커피를 마셨거나, 즐겨 마셨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윤동주 선생은 음악다방에서 음악을 듣고 책을 읽으면서 커피를 마셨을 수 있지만 실제로 커피를 마셨다는 기록은 없다. 정지용 선생도 이국적 카페의 조선인 유학생들 이야기를 시로 썼지만, 그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는 이야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최승희 선생은 두 장의 커피 사진을 남겼지만, 그것은 새로 개통한 열차 아카츠키의 홍보를 위한 설정 샷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사람이 커피와 조금씩 인연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다. 어쩌면 그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1930년대의 조선과 일본, 특히 경성과 교토와 도쿄는 커피와 깃사텐의 도시들이었기 때문이다. (jc, 2026/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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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月18日、2026年の我が民族相互扶助運動(我相運)と新韓銀行北韓研究会(新北研)の年次文化紀行の第3回セミナーに参加し、いよいよ出発が迫っていることを実感した。 すべての旅行がそうであるように、出発が数日後に迫ると軽い興奮が始まる。 誰かが言っていたように、準備からが旅の始まりではないか。

 

すでに朴起燦(パク・ギチャン)先生の主導で2回の準備セミナーが行われた。 尹東柱先生に関する集まりだったと記憶している。 私も参加したかったが、突然発症した腹膜炎の手術と入院、家療と後続の精密検査に1ヶ月以上かかったため、私は出席できなかった。 尹東柱先生についての知識が不足していたため期待が高かったが、最初の2つのセミナーに参加できなかったのが残念だった。

 

 

今回の文化紀行での私の役割は、訪問先である関西地域に残る崔承喜先生の足跡を紹介し、現地では関連する史跡について適切に解説することだ。 したがって、今回の第3回セミナーでは、3本の映像と短い解説、そして質疑応答を通じて、崔承喜先生の朝鮮舞踊と宝塚の朝鮮人追悼碑について簡潔に紹介した。

 

我相運と新北研は昨年も京都を中心に尹東柱文化紀行を実施したことがある。 同行はできなかったが、企画段階では私も少し準備を手伝った記憶がある。 今年は昨年よりも少し充実した、面白い文化紀行になればいいと思っており、そのために自分が担当する分野の準備に万全を期している。

 

セミナーが終わった後も当然言い残したことがあり、それが夕食の飲み会の理由でもあった。 蒸し肉とパジョンで食事をしながらいろいろな会話を交わしていると、ひとりで突拍子もない疑問が浮かんだ。 尹東柱先生はタバコを楽しんでいたのだろうか? このような疑問が突然浮かんだのは、個人的な理由がある。

 

 

私も京都の同志社大学のキャンパスに設けられた鄭芝溶、尹東柱先生の詩碑を何度も参拝した。 最後の訪問は2025年4月だった。 その時、私は鄭芝溶先生の詩碑の前で、韓国から持ってきたタバコの箱を開けて一本を取り出し、火をつけて捧げた。 それは、鄭芝溶先生が生前タバコを非常に嗜んでいたという記事を読んだ記憶が蘇ったからだ。

 

鄭芝溶先生はタバコに関する詩を残したこともある。 「再び海峡」という詩には、最後に「21歳のとき、最初の航路で恋愛よりもタバコを先に覚えた」という詩句が登場する。 21歳になっても恋愛をしたことがないとは、鄭芝溶先生も恋愛が遅れていたということだ。 さらにタバコも21歳で覚えたなんて、その時代の人としては遅すぎるのではないか?

 

 

1935年に『朝鮮文壇』8月号に掲載されたこの詩は、彼が日本留学のために初めて船で大韓海峡を渡ったときの感想を回想して書かれたものである。 留学する自分の姿を「哀れだな」や「怖くて泣く」といった詩語で表現したことが残念だ。 それが不運の時代が感受性の鋭い天才に押し付けた運命だったのだろう。

 

尹東柱先生も21歳の時に初めてタバコを吸った。 彼の詩「鬱寂」(1937)にそう描かれている。 とても憂鬱だったので、初めてタバコを吸ってみたら、喉がむずむずするという2連4行の簡単な詩だ。 1937年は、尹東柱先生が北間島で明東中学校の卒業年次だった時期である。 卒業したら何をするのか、悩みも多かったが、父と医学部に行くかどうかの問題で対立しているだろう。

 

 

タバコと悩んだ末、尹東柱先生は1938年から延禧專門學校の英文学科に入学した。 息子と孫の対立を祖父が仲裁してくれたからだと言われている。 つまり、尹東柱先生は中学校(現在の高校)卒業を前に進路の問題で悩んでいたが、タバコを始めたのだ。

 

尹東柱先生のタバコの詩がもう一つある。 「愛らしい思い出」である。 この詩は1942年5月13日に書かれたものである。 最初の留学は1942年4月、東京の立教大学への入学だったから、「愛らしい思い出」は東京時代の詩だ。

 

「愛らしい思い出」は、ソウルの駅でタバコを吸っていた回想と詩情を歌っている。 東京でソウルを懐かしみ、その思い出が愛おしいと言ったことから、尹東柱先生は東京があまりにも賑やかだったのだろう。 彼は同年10月に京都の同志社大学英文学科へ転校した。

 

 

崔承喜先生もタバコを吸っていた。 東京で発行されていた英字新聞『The Japan Advertiser』1935年2月10日号(9面)には次のような記事が掲載されており、偶然にも崔承喜先生のタバコの時期が鄭芝溶や尹東柱先生と似ている。

 

「今年22歳の崔承喜は背が高くてスリムだが、食事療法や体重管理には気を使っていない。 彼女は韓国料理、日本料理、西洋料理のすべてを好み、その三種類の料理をたくさん食べるそうだ。 彼女はお酒が飲めないので飲まないが、時々タバコを吸うこともある。」

 

 

崔承喜(1912-1969)先生は鄭芝溶(1902-1950)先生より10歳年下で、尹東柱(1917-1945)先生より5歳年上である。 年齢差のある3人が全員21歳、22歳でタバコを吸っていたなんて、なんだか偶然のように感じる。

 

崔承喜先生はタバコを作品の素材として使用したことはない。 また、公開の場ではタバコを吸わず、振付や編曲などの創作活動の際にのみ喫煙していたとされている。

 

私はヨーロッパ取材中に、崔承喜先生がタバコを吸いながら満面の笑みを浮かべている写真を発見した。 パリのオペラハウス近くのカフェでのことだった。 おそらく、朝鮮や日本とは違い、パリには気を使う人がいないという解放感からだったのだろうか?

 

 

崔承喜先生の墓所は北朝鮮平壌の愛国烈士陵に設けられているだけで、他の記念館や追悼碑は存在しない。 だから彼女には火をつけたタバコを一服する場所がないということだ。 残念なことだ。

 

今回の文化紀行で再び京都に行くなら、同志社大学のキャンパスに設置された鄭芝溶先生と尹東柱先生の詩碑の前で、再び韓国のタバコを一本ずつ灯しておいてもらおうと思う。 (jc, 2026/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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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18일 역사 기행을 위한 세 번째 준비 세미나에 참석했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우서운)과 신한은행북한연구회(신북연)의 연례 역사 기행인데 드디어 출발이 임박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여행이 그렇지만 출발이 며칠 앞으로 다가오면 가볍게 흥분이 시작된다.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준비부터가 여행의 시작이 아니던가.

 

박기찬 선생의 주도로 이미 2번의 준비 세미나가 진행됐다. 윤동주 선생에 대한 모임이었다고 기억한다. 필자도 참가하려고 했으나, 복막염 수술과 병원과 집에서의 가료, 그리고 후속 정밀검사로 약 한 달이 소요되는 바람에 참석하지 못했다. 윤동주 선생에 대한 지식이 고팠던 터라 기대가 높았는데, 첫 두 세미나에 참석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이번 역사 기행에서 내 역할은 방문지인 간사이 지역에 남은 최승희 선생의 흔적을 소개하고, 현지에 가서도 관련 사적지에 대해 적절하게 해설하는 것이다. 따라서 3차 세미나에서는 3개의 영상과 짧은 해설, 그리고 질의응답을 통해 최승희 선생의 조선무용과 다카라즈카의 조선인 추도비를 간략히 소개했다.

 

우서운과 신북연은 작년에도 교토를 중심으로 윤동주 역사기행을 단행한 바 있다. 동행할 수는 없었지만, 기획 단계에서는 나도 약간의 준비를 거들었던 기억이다. 올해는 최승희 선생의 사적도 포함되었으므로, 작년보다 조금 더 내실도 있고 재미도 있는 역사기행이 되었으면 좋겠고, 이를 위해 내가 맡은 부문에 대한 준비에 만전을 기하는 중이다.

 

세미나가 끝났는데도 당연히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았고, 그것은 저녁 회식의 이유이기도 했다. 수육과 파전으로 식사도 하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혼자서 엉뚱한 의문을 떠올렸다. 윤동주 선생은 담배를 피셨던가? 이런 의문이 불쑥 떠올랐던 데에는 개인적인 이유가 있다.

 

 

필자도 교토의 도시샤대학 교정에 마련된 정지용, 윤동주 선생의 시비를 여러 번 참배했다. 마지막 방문은 2025년 4월이었다. 그때 나는 정지용 선생의 시비 앞에 한국에서 사간 담배 한 갑을 뜯고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여 올려드렸었다. 정지용 선생이 생전에 담배를 즐기셨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한국 담배 맛 좀 보시라는 뜻이었다.

 

당시에는 윤동주 선생이 담배를 하셨는지 몰랐기 때문에 그 앞에는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라이터와 함께 놓아드렸다. 피고 싶으시면 직접 불붙여 피시라는 뜻이었다.

 

정지용 선생은 담배에 대한 시를 남긴 적도 있다. <다시 해협>이라는 시에는 맨 마지막에 “스물한 살 적 첫 항로에 연애보다 담배를 먼저 배웠다”는 싯귀가 등장한다. 스물 한 살이 되도록 연애를 안 해 보셨다니, 정지용 선생도 늦깎이였던 셈이다. 게다가 담배도 스물한 살에 배웠다니 그 시대 사람치고 너무 늦게 배운 것이 아닌가?

 

 

1935년 <조선문단> 8월호에 발표된 이 시는 그가 일본 유학을 위해 처음 배를 타고 대한해협을 건넜을 때의 감상을 회상하여 쓴 시이다. 유학을 가는 자신의 모습을 ‘희망에 부푼 청운의 꿈’이 아니라 ‘처량하구나’라든가 ‘무서워서 운다’는 시어로 표현한 것이 안타깝다. 그게 비운의 시대가 감수성 예민한 천재에게 덮어씌운 운명이었을 것이다.

 

윤동주 선생도 스물한 살에 담배를 처음 피웠다. 그의 시 <울적(鬱寂, 1937)>에 그렇게 나온다. 하도 울적해서 처음으로 담배를 피워보았더니 목안이 간질간질하다는 2연4행짜리 간단한 시다. 1937년이면 윤동주 선생이 북간도에서 명동중학교 졸업반이었다. 졸업하면 뭐하나, 고민도 많았겠는데, 의대를 가네 마네 하는 문제로 부친과 대립하고 있었다.

 

 

고민과 담배 끝에 윤동주 선생은 1938년부터 연희전문 영문과에 입학했다. 아들과 손자의 대립을 할아버지가 중재해 주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윤동주 선생은 중학교(지금의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진로문제로 고민하다가 담배를 시작한 셈이다.

 

윤동주 선생의 담배시가 하나 더 있다. <사랑스런 추억>이다. 이 시는 1942년 5월 13일에 쓴 것이다. 첫 유학이 1942년 4월 도쿄의 릿쿄대학 입학이었으니까 <사랑스런 추억>은 도쿄 시절의 시이다.

 

<사랑스런 추억>은 서울의 어떤 기차 정거장에서 담배를 피우던 상념을 노래했다. 도쿄에서 서울을 그리워하면서 그 추억이 사랑스럽다고 한 것을 보면 윤동주 선생한테는 도쿄가 너무 번잡스러웠나 보다. 그는 그해 10월에 교토의 도시샤대학 영문과로 학교를 옮겼다.

 

최승희(1912-1969) 선생도 담배를 피웠다. 도쿄에서 발행되던 영자신문 <The Japan Advertiser> 1935년 2월10일자(9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는데, 우연히도 최승희 선생의 담배 시기도 정지용, 윤동주 선생과 비슷하다.

 

“올해 22세인 최승희는 키가 크고 날씬하지만, 식이요법이나 체중조절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녀는 한국음식과 일본음식과 서양음식을 다 같이 좋아하며 그 세 종류의 음식을 모두 많이 먹는다고 한다. 그녀는 술을 못 마시기 때문에 마시지는 않지만 이따금씩 담배는 더러 피운다.”

 

 

최승희(1912-1969) 선생은 정지용(1902-1950) 선생보다 10세 연하이고, 윤동주(1917-1945) 선생보다는 5세 연상이다. 연배 차이가 있는 세 사람이 모두 21, 22세에 담배를 피웠다니까 뭔가 우연처럼 느껴진다.

 

최승희 선생은 담배를 작품의 주제로 사용한 적은 없다. 또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안무와 편곡 등의 창작활동 때에만 피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필자는 유럽 취재 중에 최승희 선생이 담배를 피우며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을 발굴했다. 파리의 오페라 하우스 인근의 한 카페에서 남편과 함께 차를 마시는 모습이었다. 최승희 선생의 오른쪽에 뒷통수만 보이는 분이 안막 선생이다. 아마도 조선이나 일본에서와는 달리 파리에는 눈치 볼 사람이 없다는 해방감 때문이었을까?

 

 

최승희 선생의 묘소는 북한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마련되어 있을 뿐, 그밖에는 다른 곳에 기념관이나 추모비가 없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불붙인 담배 한 대 놓아드릴 곳이 없는 셈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번 역사기행으로 다시 교토에 가면, 정지용 선생과 윤동주 선생의 시비 앞에 또다시 한국 담배를 놓아드리고 올 계획이다. 이번에는 윤동주 선생의 담배에도 불을 붙여 드려야겠다. (jc, 2026/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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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年5月現在、東アジアの3か国が憲法改正を試みているか、すでに完了しています。 朝鮮はすでに憲法を改正しており、韓国と日本はそれを試みています。

 

 

韓国の憲法改正は、1987年体制をさらに発展させるための4つの趣旨で、民主党と政府が推進し、民主市民が支持していますが、国民の力を含む保守勢力が反対していますよね? しかし、反対の名分が弱いか、特に意味がないため、韓国の憲法は数年内に改正される見込みです。

 

 

日本の憲法改正は、第二次大戦後に制定された平和憲法を放棄し、戦争と核武装が可能ないわゆる「正常国家」を目指す自民党が推進していますが、野党や市民は反対しています。 5月3日の日本の憲法の日には、憲法改正と戦争反対のデモが日本の主要大都市で展開されました。 日本の市民社会の声がこれほど大きく響いたのは、1968年の日本の全共闘時代以来初めてのことのようです。 しかし、自民党が議会内で多数を占め、高市首相の目標が確固たるものであるため、市民の反対を顧みずにでも憲法改正は進められると見られています。

 

 

朝鮮の憲法改正はすでに完了したようです。 詳細はよく分かりませんが、全体的に見て、朝鮮は単一国家であれ連邦制であれ、朝鮮半島の国家的統一、あるいは平和的な民族統一を放棄したように見受けられます。 それが今回の憲法改正の究極的な目的のようです。

 

一つの救いは、過去数年間にわたり韓国を「敵対的」に扱ってきた姿勢が撤回されたように見えることです。 今や朝鮮の立場からすれば、韓国も中国やロシア、日本やアメリカと同様に、単に周辺国の一つに過ぎないと言えるでしょう。 それはそれほど悪くありません。 関係改善の余地が生まれたからです。

 

 

統一の可能性が失われたことは、朝鮮だけの責任ではありません。 韓国ではすでに21世紀に入り、若い世代は統一に関心がなく、高齢化世代は平和統一と吸収統一を巡って争ってきました。 韓国の人口の4分の3は平和統一に関心がありません。 投票権を持つ若い世代が増え、高齢世代の死亡率が高いため、韓国は人口学的に統一の時期をすでに逃していると言えます。このような韓国の状況を把握した朝鮮の指導者たちも、統一の可能性はないと判断し、今回の憲法改正にその点を反映させたと推測されます。 したがって、分断と二国家体制が固まったのは、韓国の主権者である国民と、朝鮮の最高決定権者である金正恩主席の共同の責任であると考えます。

 

 

今回の朝鮮の憲法改正で重要なのは、「公民」と「同胞」を明確に区別したことです。 公民とは、居住地に関係なく朝鮮国籍を有する人を指し、同胞は世界各地の韓民族構成員を含むが、外国籍を有する人を指す概念として理解されます。 同胞を定義する際には、家系や血統といった客観的条件に加えて、本人が自らを韓民族と認識しているかといった主観的条件も考慮されるでしょう。これは朝鮮の立法機関が決定すべき問題です。

 

 

とにかく「敵対国」条項が削除されたことで「舞踊靴」の活動に新たな可能性が生まれるでしょうが、近い将来に変化は起きないと判断します。 また「舞踊靴」は朝鮮同胞や在日同胞だけでなく、在ロシアの高麗人同胞や在中朝鮮族同胞とも交流・協力しているため、今回の朝鮮の憲法改正に一喜一憂するのではなく、状況に応じた柔軟な考え方と姿勢が求められると考えます。

 

 

舞踊靴キャンペーンは「舞踊靴」の核心プロジェクトの一つであったため、今年の第11回キャンペーンが中止されたことは残念です。 もし2か月待っていれば、金正恩主席の「敵対国撤回」のニュースを知っていたでしょうし、キャンペーンが中止されなかったかもしれませんね。 しかし、すでに過ぎ去ったことです。 今年は舞踊神キャンペーンが再開される可能性は低いですが、朝鮮学校や姉妹団体である「チームアイ」の立場が変わり、舞踊神キャンペーンが要請されれば、来年か再来年にでも再開されると考えています。

 

 

今や二国家体制が取り返しのつかないほど確固たるものとなった以上、韓国市民もそれに見合った認識と態度を整える必要があります。 韓民族は三国時代を500年、高麗と渤海の南北国時代を250年にわたって経験した歴史的経験があります。 統一が行われるたびに領土は縮小してきましたが、次回の統一では民族の領土と利益が拡大する方向で進むと良いですね。 (jc, 2026/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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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 현재 동아시아의 3국이 헌법 개정을 시도 중이거나 완료했습니다. 조선은 이미 헌법을 개정했고, 한국과 일본은 시도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헌법 개정은 1987년 체제를 더 발전시키기 위한 4가지 취지로 민주당과 정부가 추진하고, 민주 시민들이 지지하지만, 국힘을 포함한 수구세력이 반대하고 있죠? 그러나 반대의 명분이 약하거나 별 의미가 없기 때문에 한국의 헌법은 수년 내에 개정될 전망입니다.

 

 

일본의 헌법 개정은 이차대전 후에 제정한 평화 헌법을 포기하고 전쟁과 핵무장이 가능한 이른바 ‘정상국가’를 지향하는 자민당이 추진하고 있지만, 야당과 시민들이 반대하고 있습니다. 지난 5월3일 일본의 헌법의 날에는 개헌과 전쟁 반대의 시위가 일본 주요 대도시에서 전개됐습니다. 일본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이렇게 크게 울린 것은 1968년 일본의 전공투 시기 이래로 처음인 듯합니다. 그러나 자민당이 의회내 다수이고 다카이치 총리의 목표가 확고하기 때문에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개헌은 진행될 것이라고 전망됩니다.

 

 

조선의 개헌은 이미 완료된 것으로 보입니다. 세부사항은 잘 모르겠지만, 전체적으로 조선은 단일국가이든 연방제이든 한반도의 국가적 통일, 혹은 평화적 민족통일을 포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게 이번 개헌의 궁극 목적인 것 같고요.

 

한 가지 다행이라면 한국을 ‘적대적’으로 취급해 온 지난 수년간의 태도가 철회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조선의 입장에서는 한국도 중국이나 러시아, 일본이나 미국처럼 그냥 주변국의 하나인 셈이지요. 그것은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관계 개선의 여지가 생긴 것이니까요.

 

 

통일 가능성이 사라진 것이 조선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한국에서는 이미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젊은 세대가 통일에 관심이 없었고, 노령화 세대는 평화통일과 흡수통일로 치고받고 싸웠습니다. 한국 인구의 4분의3은 이미 평화 통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투표권을 가진 젊은 세대가 늘고 노령세대는 사망률이 높기 때문에 한국은 이미 인구학적으로 통일의 시기를 놓친 것이지요. 이같은 한국 상황을 파악한 조선의 지도자들도 통일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 이번 개헌에서 그 점을 반영한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따라서 분단과 2국가 체제가 굳어진 것은 한국의 주권자인 국민과 조선의 최고결정권자인 김정은 주석의 공동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조선의 개헌에서 중요한 것은 ‘공민’과 ‘동포’를 명확히 구별한 것입니다. 공민이란 거주지에 상관없이 조선 국적을 가진 사람이고, 동포는 세계 각지의 한민족 구성원을 포함하되 외국 국적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이해됩니다. 동포를 규정하는 데에는 가계와 혈통 등의 객관적 조건과 함께 스스로 한민족이라고 여기는지와 같은 주관적 조건도 고려되겠는데, 그것은 조선의 입법기관이 결정할 문제이겠습니다.

 

 

암튼 ‘적대국’ 조항이 삭제된 만큼 <무용신> 활동에 새로운 가능성이 생기겠지만, 가까운 장래에 변화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또 <무용신>은 조선동포와 재일동포뿐 아니라 재러 고려인 동포와 재중 조선족 동포와도 교류, 협력하기 때문에, 이번 조선의 개헌에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는 유연한 사고와 태도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용신 캠페인은 <무용신>의 핵심 프로젝트의 하나였기 때문에, 올해의 11차 캠페인이 취소된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두 달만 기다렸다면 김정은 주석의 ‘적대국 배제’ 소식을 접했을 것이고, 캠페인이 취소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올해는 무용신 캠페인이 재개될 가능성이 없겠습니다만, 조선학교 혹은 자매단체인 <팀아이>의 입장이 바뀌고, 무용신 캠페인이 요청된다면 내년이나 내후년에라도 재개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2국가 체제가 돌이킬 수 없이 확고해진 만큼, 한국 시민들도 그에 맞은 인식과 태도를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한민족은 삼국시대를 5백년, 고려와 발해의 남북국시대를 2백50년 동안 겪었던 역사적 경험이 있습니다. 통일이 될 때마다 영토가 줄어들곤 했지만, 다음번 통일 때에는 민족의 영토와 이해가 확대되는 쪽으로 진행되면 좋겠군요. (jc, 2026/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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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月2日土曜日に、江陵へ行ってきました。 二つの目的がありました。 (1) 江陵市長候補として民主党の予備選を通過した金重男先生の選挙対策本部出発式にも出席し、(2) 江陵の同僚たちと今年の『舞踊靴』に関する事業を決定するためでした。

 

 

金重男先生の出発式は、連合選對委の発足として当日午後3時に江陵端午祭の伝授教育館で行われましたが、民主党の行事ということで全体が青色に染まっていました。 当日は市長候補の出征式だけでなく、江原道議員と江陵市議員の候補者も決定し、共に出征式を行いました。

 

予選を通過した20名余りの候補者がステージに並び、賀客に深くお辞儀をした後、家族や知人、同僚がステージに上がり、候補者に新しいスニーカーを履かせてくれました。 青色の新しいスニーカーです。 選挙日まで、あるいは当選後も一生懸命走り続けるという意味だそうです。

 

 

私が金重男先生と知り合ってからまだ3〜4年しか経っていませんが、一緒に仕事をする中で深い信頼を分かち合った方です。 江陵市の公務員として勤務した後、公務員労働組合を結成し、初代全国委員長を務めた方で、明確な目標とそれを達成する根気を同時に示した経歴です。

 

その後の10年間、市長選や国会議員選で落選しながらも意志を曲げず、再び市長選に挑戦されたことからも、諦めない彼の頑固さが十分に想像できます。

 

 

一部では彼の勝利を楽観視する声もあります。 先月の世論調査で現職市長と15%の差でリードしたためです。 しかし、まだ楽観するのは早いと考えています。 その差は2か月前のことで、選挙の1か月前の先週末の調査では差が7〜8%に縮小していました。

 

江陵は大邱や慶北地域よりも保守的な投票傾向を示すため、最後まで油断できません。 これは、候補者と選挙対策委員会が状況をよりよく認識し、備えると信じていますが、

 

 

江陵の民主化を願う私たちも、それぞれできることで支援できればと思います。 その中でも最も重要なのは、江陵の家族や親戚、知人に連絡を取り、投票を呼びかけると同時に金重男先生への支持を訴えることです。 多くの関心とご協力をお願い申し上げます。

 

 

(1) 姜承昊先生、趙殷慧先生と一緒にサゴルラーメンで夕食を取りながら、江陵の今年の計画をしっかりと伺いました。 今年も在日朝鮮学校へのサッカーボール支援事業を継続するとともに、「江陵フォーラム」の代表であり「金成洙記念事業会」の理事でもある姜承昊先生がチーム長として主導してくださいます。

 

(2) 2025年には日韓同胞親善サッカー大会が実現しませんでしたが、今年は事前に日本と江陵のイベント日程を確認し、必ず実現できるよう努力するとおっしゃっています。 おそら「民主党のサッカークラブ」を中心に訪問団が結成されると思われますが、チーム長はクラブ側で決められると考えています。 趙殷慧先生が當分間の連絡業務を担当されることになりそうです。

 

 

(3) 第27回江陵人権映画祭で、風物団『ドンドンと仲間たち』の祝賀公演が再提案されました。 『ドンドン』と若手演奏者を含め、10名以内でご参加いただければ幸いです。また、『ドンドンと仲間たち』の祝賀公演の参加費は「舞踊靴」が支援できることを期待しています。 この提案が実現すれば、募金活動は私が担当しようと考えています。

 

(4) 今年8月末の宝塚訪問団は江陵を中心に編成される予定で、その業務は趙恩恵先生がチーム長として主導されます。 時期や規模、各細部の行事は、趙殷慧先生が江陵の関係者や宝塚の姉妹団体と協議の上で決定されます。

 

 

(5) さらに、金中南先生が市長選で勝利した場合、就任(7月1日)前に宝塚市役所と市議会、そして兵庫県議会を訪問することが望ましいという提案も出されています。 この計画が実現すれば、市民団体だけでなく両国の地域政治家も交流と協力を続ける良い機会になると考えます。

 

以上で江陵訪問の報告を終わります。 (jc, 202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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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2일 토요일 당일로 강릉에 다녀왔습니다. 두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강릉시장 후보로 민주당 경선을 통과하신 김중남 선생의 선대위 출정식에도 참석하고, 강릉 식구들과 올해의 <무용신> 관련 행사를 확정하기 위해서였죠.

 

 

김중남 선생의 출정식은 연합선대위의 출범은 이날 오후3시 강릉단오제 전수교육관에서 열렸는데, 민주당의 행사인 만큼 온통 푸른색이더군요. 이날은 시장후보의 출정식이었을 뿐 아니라 강원도의원과 강릉시의원 후보들도 확정되어서 함께 출정식을 가졌습니다.

 

경선을 통과한 20여명의 후보들이 단상에 늘어서서 참석자들에게 큰 절을 올린 뒤에는, 가족, 지인, 동료들이 단상에 올라가서 후보들에게 새 운동화를 신겨주더군요. 파란색 새 운동화입니다. 선거일인 6월3일까지, 혹은 당선된 이후에도 열심히 잘 달리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제가 김중남 선생과는 알게 된 것이 3-4년 밖에 되지 않지만, 함께 일하면서 진득한 믿음을 나눈 분입니다. 강릉시 공무원을 근무하다가 공무원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그 초대 전국위원장을 역임한 분인데, 확실한 목표와 그것을 달성하는 끈기를 동시에 보여주신 경력입니다.

 

이후 10년 동안 시장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고, 재차 시장 선거에 도전하신 것을 보아도 포기를 모르는 그의 고집스러움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그의 승리를 낙관하기도 합니다. 지난달의 여론조사에서 현직시장과 15%의 격차로 앞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 낙관하기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그 격차는 두 달 전의 일이고, 선거를 한 달 앞둔 지난 주말의 조사에서는 그 격차가 7-8%로 줄어들었습니다.

 

강릉이 대구, 경북지역 보다 더 보수적인 투표성향을 보이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습니다. 이는 상황은 후보와 선대위가 더 잘 인식하고 대비할 것이라고 믿습니다만,

 

 

강릉의 민주화를 바라는 우리도 각자 할 수 있는 일로 도와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강릉의 가족이나 친척, 지인들에게 연락해서 투표 독려와 함께 김중남 선생 지지를 호소하는 것입니다. 많은 관심과 협력을 부탁드립니다.

 

 

(1) 강승호, 조은혜 선생과 함께 사골라면으로 저녁식사를 하면서, 강릉의 올해 계획을 잘 청취했습니다. 올해도 재일조선학교에 축구공 지원 사업을 계속하신다고 하며, <강릉포럼>의 대표이시자 <김성수기념사업회>의 이사이신 강승호 선생께서 팀장으로 주도해 주실 것입니다.

 

(2) 작년(2025년)에는 한일동포 친선축구대회가 실현되지 못했지만, 올해는 미리미리 일본과 강릉의 행사 일정을 확인해서 꼭 성사되도록 노력하겠다고 하십니다. 아마도 민주당 축구단을 중심으로 일본 방문단이 결성될 듯합니다만, 팀장은 축구단에서 정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강릉과 간사이의 연결 업무는 조은혜 선생이 담당하시게 될 듯합니다.

 

 

(3) 제27회 강릉인권영화제에 풍물패 <동동과 친구들>의 축하공연이 재차 제안됐습니다. <동동>과 젊은 연주자들을 포함해 10명 이내로 참가하시면 좋겠고, <동동과 친구들>의 축하공연 참가비용은 <무용신>이 지원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제안이 성사되면 모금 행사는 제가 담당하려고 합니다.

 

(4) 올해 8월말의 다카라즈카 방문단은 강릉 중심으로 조직될 예정이고, 그 일은 조은혜 선생이 팀장으로 주도하시게 됩니다. 시기와 규모, 각 세부 행사는 조은혜 선생께서 강릉 식구들과 다카라즈카의 자매단체들과 협의해서 결정하시게 될 것입니다.

 

 

(5) 그밖에도 김중남 선생이 시장 선거에서 승리하실 경우 시장 취임(7월1일) 전에 다카라즈카 시청과 시의회, 그리고 효고현 의회를 답방하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도 나왔습니다. 상황을 보아 추진될 수 있으면 시민단체뿐 아니라 양국의 지역정치인들도 교류와 협력이 이어질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상 강릉방문 보고를 마칩니다. (jc, 202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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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年(2026年)と来年(2027年)には、これまでの「舞踊靴」活動に関する記録を出版する予定です。 2017年に始まった崔承喜研究、2019年に始まった舞踊靴キャンペーン、2020年に始まった宝塚朝鮮人追悼碑プロジェクト、2024年に始まった江陵人権映画祭の後援、2025年に始まった『ドンドン』の西宮風物交流会などに関する記録を公式に残すためです。

 

「舞踊靴」は短期間でかなりの活動を推進しましたが、それを記録に残すことも重要な仕事だと考えています。 人の記憶は短く、時間が経つと歪むこともあるからです。 記録として残せば、誰かが参考にでき、後日より良い活動を展開できるでしょう。

 

 

記録が重要であることは、強調する必要すらありません。 宝塚朝鮮人追悼碑がその典型的な例です。 1914年に宝塚で亡くなった、江陵出身の朝鮮人労働者、金炳順氏は、80年間外部に知ら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でした。 1985年に始まった鄭鴻永、近藤富男先生の調査研究は、1997年に『歌劇の街のもう一つの歴史:宝塚と朝鮮人』という本として出版され、その時初めて金炳順氏をはじめとする朝鮮人労働者5名の犠牲が日本に広く知られるようになり、2020年には追悼碑というもう一つの記録が建立されました。

 

鄭鴻永先生の著書と、近藤富男先生が率いた追悼碑は大きな反響を呼び、金炳順氏の故郷である江陵にも知ら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 江陵市は追悼碑の設立者に感謝状を贈呈し、「舞踊靴」の会員をはじめ多くの韓国人が毎年キリハタの追悼碑とタマセの参拝墓を訪れています。 これは出版された書籍と建立された追悼碑のおかげで起きたことです。

 

 

鄭鴻永, 近藤富男先生の足跡をたどる者として、私も同様に「舞踊靴」の活動を記録に残そうと考えています。 記録の出版のために、私は2025年12月に「舞踊靴」という名前で出版社を登録し、2026年3月に事業者登録も完了しました。

 

崔承喜リサーチと「舞踊靴」の活動を展開している間、Tistoryブログに書いた記事は1,400件に達しています。 取材やイベントのたびに「舞踊靴」の会員に情報を提供し、対外広報のために執筆した文章ですが、これが出版用の原稿になる予定です。 今年(2026年)には『崔承喜100シーン』という単行本とともに、約12本の論文とエッセイを出版する予定で、そこには舞踊靴キャンペーンや朝鮮人追悼碑、沿海州キャンペーン、モンスーン革命キャンペーンの記録も含まれます。

 

 

紙の本の出版を頻繁に提案されましたが、最終的に電子書籍の出版を選びました。 低コストで迅速に出版できるからです。 依然として費用が必要なため、募金活動も展開する予定です。

 

一人でできることではありません。 そこで、「舞踊靴」活動の創設メンバーである鄭澈勳先生が編集者として立ち上がってくださいました。 私は原稿を担当し、鄭澈勳先生が編集と出版を担当しています。 どれほど感謝してもしきれません。 また、電子書籍出版に詳しい方々のご協力も期待しています。

 

 

私は最近、生まれて初めて病院にひどくお世話になりました。 急性腹膜炎で救急室に搬送され手術を受け、約10日間の入院を経て現在は退院し回復に向かっています。 また、腹膜炎の原因が何であったのかを精密検査でも調べ始めました。 比較的健康な生活を送っていた私にとっては、少し衝撃的でした。 健康は祝福ですが、いつでも崩れ得るという点、だから比較的健康なときにできることを早くやら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自覚も持つようになりました。

 

来年で、私が崔承喜のリサーチを始めてから10年になります。 「舞踊靴」の活動も今年で7年目になります。 長いとは言えませんが、短くもない時間です。 これまで多くの同僚や友人、先輩後輩と共に働いたことは、幸せで意義深い経験でした。 一緒に働いてくださり、本当に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電子書籍の出版を通じて「舞踊靴」が成し遂げたことは、数人の短い努力ではなく、多くの方々のゆったりとした協力によって実現したものであることを強調したいと思います。 原稿が整い次第、まず「舞踊靴」で公開いたします。 内容や形式についてフィードバックをいただければ、大変助かります。 この新しいプロジェクトにも、多くの方々の関心と協力を期待しています。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jc, 2026/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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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2026년)와 내년(2027년)에는 그동안의 <무용신> 활동에 대한 기록을 출판할 예정입니다. 2017년에 시작된 최승희 리서치, 2019년에 시작된 무용신 캠페인, 2020년에 시작된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프로젝트, 2024년에 시작된 강릉인권영화제 후원, 2025년에 시작된 <동동>의 니시노미야 풍물교류회 등에 대한 기록을 공식적으로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무용신>은 짧은 기간 동안 적지 않은 활동을 추진했지만,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기억은 짧고 시간이 지나면 왜곡되기도 하기 때문이죠. 기록으로 남기면 누군가 참고할 수 있고, 후일 더 나은 활동을 전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록이 중요한 것은 강조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그 단적인 예입니다. 1914년 다카라즈카에서 사망한 강릉 출신 조선인 노동자 김병순씨는 80년 동안 바깥 세계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1985년에 시작된 정홍영,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조사연구가 1997년에 <가극의 거리의 또 하나의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고, 그때에야 비로소 김병순씨를 비롯한 조선인 노동자 5명의 희생이 일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2020년에는 추도비라는 또 하나의 기록이 건립되었습니다.

 

정홍영 선생의 저서와 콘도 도미오 선생이 솔선하신 추도비는 많은 반향을 일으켰고, 김병순씨의 고향 강릉에도 알려졌습니다. 강릉시가 추도비 설립자들에게 감사패를 증정했고, <무용신> 회원을 비롯한 많은 한국인들이 매년 키리하타의 추도비와 타마세의 참배묘를 방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출판된 저서와 건립된 추도비 덕분에 일어난 일입니다.

 

 

정홍영-콘도 도미오 선생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저도 역시 <무용신>의 활동을 기록으로 남겨두려고 합니다. 기록의 출판을 위해서 저는 2025년 12월 도서출판 <무용신>이라는 이름으로 출판사를 등록했고, 2026년 3월 사업자 등록도 마쳤습니다.

 

최승희 리서치와 무용신 활동을 전개하는 동안 티스토리 블로그에 써놓은 글들이 1천4백 개에 이릅니다. 취재와 행사 때마다 <무용신> 회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대외 홍보를 위해 쓴 글들인데, 이것이 출판을 위한 초고가 될 예정입니다. 올해(2026년)에는 <최승희 100장면>이라는 단행본과 함께 약 12개의 논문과 에세이를 출판할 예정인데, 여기에는 무용신 캠페인과 조선인 추도비, 연해주 캠페인과 몬순혁명 캠페인의 기록도 포함됩니다.

 

 

종이책 출판을 자주 제안 받았지만, 결국 전자책 출판을 선택했습니다. 적은 비용으로 신속하게 출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비용이 필요하므로 모금 활동도 전개할 예정입니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무용신> 활동의 원년 회원이신 정철훈 선생이 편집자로 나서주셨습니다. 저는 원고를 담당하고 정철훈 선생이 편집과 출판을 담당합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또 전자책 출판에 조예가 있으신 분들의 도움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제가 최근에 난생 처음으로 병원 신세를 심하게 졌습니다. 급성 복막염으로 응급실에 실려가 수술을 받았고, 약 열흘의 입원 끝에 지금은 퇴원해서 회복 중입니다. 또 복막염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정밀 검사도 시작했습니다. 비교적 건강한 삶을 누리던 제게는 약간의 충격이었습니다. 건강은 축복이지만 또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다는 점, 그래서 비교적 건강할 때 할 수 있는 일들을 빨리빨리 해야 한다는 자각도 가지게 됐습니다.

 

내년이면 제가 최승희 리서치를 시작한 지 10년이 됩니다. <무용신> 활동도 올해가 7년째입니다. 길다고 할 수 없지만 짧지도 않은 세월입니다. 그동안 숱한 동료, 친구, 선후배들과 함께 일했던 것은 행복하고 뜻 깊은 경험이었습니다. 함께 일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전자책 출판을 통해 <무용신>이 해 온 일들이 한두 사람의 짧은 노력이 아니라, 많은 분들의 느긋한 협력으로 이뤄진 것임을 강조하려고 합니다. 원고가 마련 되는대로 <무용신>에 먼저 공개하겠습니다. 내용과 형식에 대한 피드백을 주시면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이 새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많은 분들의 관심과 협력을 기대합니다. 고맙습니다. (jc, 2026/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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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年(2026年)の「舞踊靴」活動は、これまでに受付された4件に絞り、会員の「参加」と「観望」が重要であることを強調しました。 好きなら参加し、気が進まなければ様子見です。 また、自分でやりたい他の仕事があれば、誰でも、いつでも、どうやってでも「主導」していただけます。

 

「主導」と「参加」と「観望」は、「舞踊靴」で働く重要な三つの方法です。 この概念はそれほど特別なものではありません。 ほとんどの集まりや団体がこれを目指しています。 しかし、緩やかな任意団体である「舞踊靴」では、これら三つがさらに重要です。 主導と参加がなければ仕事はできず、観望の美徳がなければ対立が生じて分裂してしまうからです。

 

 

主導と参加、そして観望が「別々でも一緒に」効果的に機能するためには、会員が同意する共通の関心と認識が必要です。 幸いにも、「舞踊靴」の会員はほとんどが(1)進歩的な傾向の(2)民主主義者であり、(3)平和主義者です。 そのため、「舞踊靴」は民主と平和のための連帯を追求します。

 

「民主」とは、市民が主人であることを意味します。 「舞踊靴」は市民が主体的に活動する団体であるため、政府や企業の影響を受けません。 事業予算は政府の補助金や企業の拠出に依存せず、市民の寄付金に頼ります。 事業によっては中央政府や地方自治体と協力したり、企業の支援を受けることもありますが、主導権と決定権は依然として市民にあります。 政府や企業の支援を受けているという理由だけで、<無用神>の活動方針や内容が変更されたり歪められたりしてはなりません。

 

また、「舞踊靴」の「民主」は「すべての会員」の意見と実践を尊重します。 会員はすべて「舞踊靴」の支援者です。 1万ウォン以上の支援金を寄付し、この会に加入する意思を示した方々です。 つまり、「支払う必要のないお金」を出し、「他に使える時間」を注ぎ、「やらなくてもよいこと」を自発的に行う人たちです。 状況や能力に応じて寄付する時間の量や金額は異なることがありますが、すべての会員は「舞踊靴」の活動のすべての面で平等な権利を持ち、平等な責任を負います。 それが「舞踊靴」が語る民主主義の概念です。

 

 

また、「舞踊靴」は平和を志向しています。 社会的対立を和らげ、国家間の戦争に反対するだけでなく、平和のための条件を拡大しようと努めています。 対立や戦争は、主に「不義」や「無関心」から生じます。 在日朝鮮学校の差別的扱い、朝鮮人労働者の犠牲への忘却、沿海州の高麗人同胞の苦難と闘い、江陵人権映画祭の廃止危機などは正義にかなっていません。 バングラデシュの民衆革命に身を投じた若者たちも、国家の暴力を排除し、正義と平和の回復に努めています。

 

「舞踊靴」はその問題を直接解決できると信じてい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 不義を終わらせ平和を取り戻すことは、その状況にある市民の使命です。 「舞踊靴」は連帯感を示すだけです。 舞踊靴キャンペーンや民族学校への支援、追悼碑への訪問、人権映画祭の後援、日韓風物交流会の支援は、そうした連帯の方法に過ぎません。

 

 

時には「舞踊靴」の目標(target)と目的(goal)を区別することが必要です。 表面的に見える目標は、舞踊靴キャンペーン、民族学校への募金、追悼碑への訪問、人権映画祭や風物交流会の支援などですが、これらの目標を通じて達成しようとする目的は、民主と平和のための連帯です。 したがって、「舞踊靴」の目的を達成するためには、いつでも新たな目標を設定し、その達成に向けて努力することができます。 「舞踊靴」の事業と活動がいくつかに固定できない理由です。

 

「舞踊靴」の活動は主に国際的な文脈で進められるため、国際情勢も把握する必要があります。 南北韓の硬直した関係のため、在日朝鮮学校への支援が困難です。 ロシア・ウクライナ戦争の影響で、在ロシアの同胞との交流も容易ではありません。 中国政府の民族政策の影響で、朝鮮族の同胞との協力も同様です。 一方、米国・イスラエル・イランの戦争の影響で、日本市民の反戦・反改憲運動が激化しています。 それに伴い、韓国と日本の市民の協力と連帯の必要性も高まっています。

 

 

「舞踊靴」は、民主と平和の連帯という目的を忘れず、状況の変化に柔軟に対応しながら、具体的な目標を設定し達成していく必要があると考えています。 (jc, 2026/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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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2026년)의 <무용신> 활동을 지금까지 접수된 4개로 조정했고, 거기에는 회원들의 ‘참여’와 ‘관망’이 중요함을 강조했습니다. 좋아하면 참여하고, 내키지 않으면 관망합니다. 또 자신이 직접 하고 싶은 다른 일이 있다면 누구나, 언제나, 어떻게든지 ‘주도’하시면 됩니다.

 

‘주도’와 ‘참여’와 ‘관망’은 <무용신>에서 일하는 중요한 세 가지 방법입니다. 이런 개념이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모임이나 단체가 이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느슨한 임의단체인 <무용신>에서는 이 세 가지가 더욱 중요합니다. 주도와 참여가 없으면 일할 수 없고, 관망의 미덕이 없으면 갈등으로 지리멸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죠.

 

 

주도와 참여와 관망이 ‘따로 또 같이’ 효과적으로 작동하려면 회원들이 동의하는 공통의 관심과 인식이 필요합니다. 다행히도 <무용신> 회원은 대부분 (1) 진보 성향의 (2) 민주주의자이며 (3) 평화주의자입니다. 그래서 <무용신>은 민주와 평화를 위한 연대를 추구합니다.

 

‘민주’란 시민이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무용신>은 시민들이 주도적으로 일하는 모임이기 때문에 정부와 기업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사업 예산을 정부 지원금이나 기업의 출연에 의존하지 않고, 시민들의 기부금에 의존합니다. 사업에 따라서는 중앙 또는 지방정부와 협력하거나, 기업의 도움을 받을 때도 있겠습니다만, 주도권과 결정권은 여전히 시민에게 있습니다.

 

또 <무용신>의 ‘민주’는 ‘모든 회원’의 의견과 실천을 존중합니다. 회원은 모두 <무용신>의 후원자입니다. 1만원 이상의 후원금을 내고, 이 모임에 가입할 의사를 표시한 분들입니다. 즉, ‘내지 않아도 되는 돈’을 내고, ‘다른 데 쓸 수 있는 시간’을 쏟고,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자발적으로 하시는 분들이죠. 상황과 능력에 따라 기부하는 시간의 양과 돈의 액수가 다를 수는 있지만, 모든 회원은 <무용신> 활동의 모든 면에서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동등한 책임을 집니다. 그것이 <무용신>이 말하는 민주의 개념입니다.

 

 

또 <무용신>은 평화를 지향합니다. 사회적 갈등을 누그러뜨리고 국가간 전쟁에 반대할 뿐 아니라 평화를 위한 조건을 확대하려고 노력합니다. 갈등과 전쟁은 대개 ‘부정의’와 ‘무관심’ 때문에 생깁니다. 재일조선학교의 차별 대우, 조선인 노동자들의 희생에 대한 망각, 연해주 고려인 동포들의 고난과 분투, 강릉인권영화제의 폐지 위기 등은 정의롭지 않습니다. 방글라데시 민중혁명에 투신한 젊은이들도 국가 폭력을 제거하고 정의와 평화를 회복을 위해 노력합니다.

 

<무용신>은 그 문제를 직접 해결할 수 있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불의를 종식하고 평화를 회복하는 것은 그 상황에 처한 시민들의 소명입니다. <무용신>은 연대감을 표시할 뿐이죠. 무용신 캠페인과 민족학교 지원, 추도비 방문과 인권영화제 후원, 한일 풍물교류회 지원은 그런 연대의 방법일 뿐입니다.

 

 

때로는 <무용신>의 목표(target)와 목적(goal)을 구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목표는 무용신 캠페인, 민족학교를 위한 모금, 추도비 방문, 인권영화제와 풍물교류회 후원 등이지만, 그런 목표를 통해 달성하려는 목적은 민주와 평화를 위한 연대입니다. 따라서 <무용신>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그 성취를 위해 노력할 수 있습니다. <무용신>의 사업과 활동이 몇 가지로 고정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무용신> 활동이 대개 국제적 맥락에서 추진되기 때문에 국제 상황도 파악해야 합니다. 남북한의 경직된 관계 때문에 재일 조선학교 지원이 어렵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재러 동포들과의 교류도 쉽지 않습니다. 중국 정부의 민족정책 때문에 조선족 동포들과의 협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면에 미국-이스라일-이란 전쟁 때문에 일본 시민들의 반전, 반개헌 운동이 격화되고 있습니다. 이에 한국과 일본 시민들의 협력과 연대의 필요성도 커졌습니다.

 

 

<무용신>은 민주와 평화의 연대라는 목적을 잊지 않으면서도, 상황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성취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jc, 2026/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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仕事はエネルギーが作ります。 エネルギー(energy)が集中すると、運動(movement)が生まれ、仕事(work)へと発展するものです。 物理学だけでなく、人間社会も同様です。 良いことも悪いことも同じです。 エネルギーが運動と仕事を生み出します。

 

これまで「舞踊靴」は多くのことを成し遂げてきました。 (1) 崔承喜リサーチは9年目であり、(2) 舞踊靴キャンペーンは7年間にわたり10回にわたって成功裏に実施されました。 (3) 宝塚朝鮮人追悼碑訪問団を3年連続で組織し、(4) 江陵人権映画祭を3年間支援しました。 (5) 西宮の日韓風物交流会を2回支援し、今年の支援が成功すれば、3年間の支援約束を守ることができます。

 

 

その他、(6)沿海州の高麗人民族学校を支援し、(7)高麗劇場の建設についても議論を始め、(8)バングラデシュの民衆革命の青年活動家を支援しました。 昨年(2025年)には、江陵の仲間たちの努力により、(9)朝鮮学校のサッカーボール支援が始まり、(10)日韓同胞親善サッカー大会も企画されました。

 

 

「舞踊靴」よりも会員数がはるかに多く、組織がしっかりしており、著名人も多く、会費や助成金が豊富な社会団体も多数あります。 組織や規約がなく、会則や会費もない「舞踊靴」が、効率的かつ効果的に運営されてきたことは不思議に思えるかもしれません。 しかし、私にはそうしたものがなかったので、会員のエネルギーが自由に流れ、運動が増幅されて多くのことを成し遂げられたと考えています。

 

<아트코어 굿마을> 대표 이진희(李眞熙) 선생

 

しかし、成功は失敗の種でもあります。 いつの間にか「舞踊靴」のエネルギーの流れを制御し、会員を組織し、存在よりも命題を、自由よりも義務を掲げようとする動きが生まれました。 「舞踊靴」の活動が鈍化し、同僚間の意見の相違が対立に発展し、姉妹団体である『チームアイ』とも意見の相違が表面化しました。 良いことほど成功したときにより注意すべきものですが、「舞踊靴」は危機を賢く乗り越える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

 

 

しかし、「舞踊靴」の活動は6〜7年目に入っているので、そうしたことが起きる時期でもあります。 過去の出来事を振り返り、方向性を調整すべき時が来たのです。 大学が休職年を与えるようなものです。

 

今はどうせ『舞踊神』が活動するには良い状況ではありません。国際的に南北中露米日関係が緊張しており、国内でも内乱鎮圧や大統領罷免に続き検察・裁判所・メディア改革が控えているため、在外同胞運動が優先されにくい状況です。 昨年1月の写真展の対立の中で、3月に予定されていた第11回舞踊靴キャンペーンが中止されたことがその例です。

 

 

困難な状況では、無理に働く必要はありません。 そんな時期には、一歩引いて楽しみとリフレッシュの機会を探すのが良いでしょう。 「舞踊靴」の目的と目標、方法論を改めて考え直し、仕事をより簡単で楽しくできる方法論も検討してほしいです。 特に、これまで協力してきた姉妹団体の活動に関心を持ち、彼らのイベントに積極的に参加することも良いでしょう。

 

 

「舞踊靴」は今年(2026年)のイベントが多くありません。 (1) 3月の第11回舞踊神キャンペーンは中止となったため、出版運動(趙正熙、鄭澈勳先生)を開始します。 「舞踊靴」の活動を記録として残すためです。 (2) 5月末には「我々民族相互扶助運動」の神戸訪問団(朴起燦先生)が編成されます。 これは「舞踊靴」のイベントではありませんが、成功のために「舞踊靴」の会員が積極的に協力します。 (3) 8月末には、第1江陵フォーラムが主導する宝塚朝鮮人追悼碑訪問団(姜承昊, 趙殷慧先生)が編成され、(4) 家族風物隊「ドンドン」の第3回西宮風物交流会(林寅出, 楊享鎭先生)が開催される予定です。 例年に比べて種類は少なくても、楽しく働く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

 

 

仕事を成し遂げるのはエネルギーです。 エネルギーの流れをコントロールしないようにしよう。 各事業のチームリーダーやメンバーに支援を提供するのは良いことだが、無駄に争いを起こさないようにしよう。 彼らのエネルギーが素晴らしい仕事を生み出し、多くの人に良い体験を提供します。 成功したら一緒に楽しみ、失敗したら一緒に耐えよう。

 

 

エネルギーの最高形態は愛です。 そして、愛は本来正気の状態ではありません。 少しでも狂わなければ、正しく愛することはできません。 これまで私たちは組織や情報、金銭で働いていませんでした。 エネルギーで働いていました。 今年も「舞踊靴」が愛をもって活動できることを期待しています。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jc, 2026/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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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年の「舞踊靴」のやるべきことは4つです。 (1) 「舞踊靴」の活動を記録として残す出版活動(チーム長 趙正熙); (2) 尹東柱・崔承熙を称える関西視察(チーム長 朴起燦先生); (3) 宝塚訪問団(チーム長 趙殷慧先生); (4) 西宮風物交流会(チーム長 林寅出先生)です。 すべてが成功裏に完了すれば理想的ですが、状況に応じて進行の有無や程度が変わることがあります。

 

そのうち5月の関西視察は、「我々民族相互扶助運動」が主催し、「舞踊靴」が協力する形で実施されます。 また機会があれば第11回舞踊神キャンペーンが再び実施される可能性があり、急変する国際情勢に応じて市民の国際連帯を促進するプロジェクトが企画されることもあります。 しかし、少なくとも現時点では「舞踊靴」の今年のプロジェクトは、上記の4つにまとめられます。

 

 

種類は減りましたが、各事業の推進方法は過去と同様です。 つまり、(1) 各チームリーダーが主導し、メンバーは (2) そのプロジェクトに参加するか、(3) 退くかのどちらかです。 また、(4) 自分が新たにやりたいことがあれば、公開で宣伝し、主導していけばよいです。 「舞踊靴」には、事前に事業を承認したり許可したりできる意思決定機関がありません。

 

このような手法のおかげで、「舞踊靴」は多方面で多くの仕事ができました。 メンバーや事業が多様であるにもかかわらず、「舞踊靴」は深刻な対立に巻き込まれたり、極端に対立したり、分裂したりしません。 賛成すれば参加し、反対すれば退く、という原則のおかげです。

 

この原則が実現できるには理由があります。 「舞踊靴」は、もともと一糸乱れぬ組織でもなく、固定された目標を追求する硬直した集まりでもありません。 最低限の世界観と認識論を共有すれば、「舞踊靴」は誰でも、そして何でもできるプラットフォームです。

 

この原則を守る理由は、すべての会員の関心と創造性、そして実践がすべて重要であるからです。 誰でも自分の関心を実践に移すことができます。 これまでにない創造的な仕事であれば、なお歓迎します。 誰かの反対や批判が原因で重要なことが実行できないのは、不幸なことです。 私が賛成しにくいからといって、反対したり阻止したりすべきだというわけではありません。 ただ退いて様子を見るだけで構いません。 とてもシンプルで簡単なことではありませんか?

 

 

「舞踊靴」の会員の関心は皆同じではありません。 認識と実践の方向性やレベルも同じではありません。 『舞踊神』の中でも外でも、そんなことは不可能です。 関心の方向やレベルが違うからといって、他人の関心や実践を阻むことはできません。 自分の意見や行動が尊重されるためには、他人の意見や行動も尊重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ですから、同僚のやっていることに賛成すれば参加し、反対すれば退くだけで構いません。 自分でやりたいことがあるなら、自ら率先して推進すればよいのです。 同僚を集め、スケジュールと予算を立て、実行すればいいのです。

 

「舞踊靴」の中にも当然ながら反対の声があり、今も存在しています。 なぜ「舞踊靴」が朝鮮人追悼碑や人権映画祭、バングラデシュプロジェクトを推進するのかという意見もありました。 さらに最近では、一部の会員を「舞踊靴」から追放すべきだという意見も出ています。 個人がそのような意見を持つことはあり得ますが、それを強制できないことが「舞踊靴」の特徴であり長所です。

 

誰でも自分の意見を言えるし、やりたいことをやることができます。 ただし、自分の意見が重要であれば、他の会員の意見も重要だということに同意できれば問題ありません。 プロジェクトへの参加可否は各自が決める問題です。 チームリーダーは、自分が推進した事業の経過と結果に責任を持てばよいのです。 プロジェクトが成功すれば共に楽しめ、失敗すれば共に耐えればよいのです。

 

 

1990年代にアメリカのテレビで放送されていたコーヒー広告が思い出されます。 「Sit back and relax, it's Some coffee time.」 どんなコーヒーの広告だったかは忘れましたが、「退いてゆっくりコーヒーを一杯飲んで」という言葉はとても慰めになりました。 「舞踊靴」の活動原則もそれと似ていると考えています。 参加と観望の両方が重要です。 そこで、次のように整理できます。

 

Jump in, if you like it;                    気に入ったら飛び込んで、

Step back, if you don’t;                 気に入らなければ一歩引いて、

Just don’t mess with others。      他人のことに首を突っ込むな。


(jc, 2026/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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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무용신>의 할 일은 4가지입니다. (1) <무용신>의 활동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출판 활동(팀장 조정희); (2) 윤동주-최승희를 기리는 간사이 답사(팀장 박기찬 선생); (3) 다카라즈카 방문단(팀장 조은혜 선생); (4) 니시노미야 풍물교류회(팀장 임인출 선생)입니다. 모두 성공적으로 수행되면 좋겠지만, 상황에 따라 진행 여부와 정도가 달라질 수는 있습니다.

 

이 중 5월의 간사이 답사는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이 주최하고 <무용신>이 협력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또 기회가 되면 제11차 무용신 캠페인이 다시 진행될 수도 있고,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따라 시민들의 국제연대를 추진하는 프로젝트가 기획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무용신>의 올해 프로젝트는 이상의 4개로 정리됩니다.

 

 

가짓수는 줄었지만, 각 사업이 추진되는 방식은 과거와 같습니다. 즉, (1) 각 팀장이 주도하며, 회원들은 (2) 그 프로젝트에 참여하시거나, (3) 물러나 계시면 됩니다. 또 (4) 자신이 새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공개적으로 홍보하시고 주도해 나가시면 됩니다. <무용신>에는 사전에 사업을 승인하거나 허락할 수 있는 의사결정기구가 없습니다.

 

이런 방식 덕분에 <무용신>은 다양한 방면에서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구성원과 사업이 다양한데도 <무용신>은 심각한 갈등에 휘말리거나 극단적으로 대립하거나 분열되지 않습니다. 찬성하면 참여하고, 반대하면 물러난다, 라는 원칙 덕분이죠.

 

이 원칙이 가능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무용신>은 원래 일사불란한 조직도 아니고, 고정된 목표를 추구하는 경직된 모임도 아닙니다. 최소한의 세계관과 인식론을 공유한다면 <무용신>은 누구나, 그리고 무슨 일이나 할 수 있는 플랫폼입니다.

 

이 원칙을 지키는 까닭은 모든 회원들의 관심과 창의와 실천이 모두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관심을 실천에 옮길 수 있습니다. 전에 없던 창의적인 일이라면 더욱 좋습니다. 누군가의 반대나 비판 때문에 중요한 일이 실천되지 못한다면 불행한 일입니다. 내가 찬성하기 어렵다고 해서 반대하거나 저지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냥 물러나서 지켜보기만 해도 됩니다. 아주 간단하고 쉬운 일이 아닙니까?

 

 

<무용신> 회원들의 관심이 모두 같지 않습니다. 인식과 실천의 방향과 수준도 동일하지 않습니다. <무용신> 안에서든 밖에서든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관심의 방향과 수준이 다르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관심과 실천을 막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의견과 행동이 존중받으려면 다른 사람의 의견과 행동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동료가 하는 일에 찬성하면 참여하시면 되고, 반대하면 물러나 있으면 됩니다. 자신이 직접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자신이 주도적으로 추진하면 됩니다. 동료를 모으고, 일정과 예산을 기획하고, 실천하면 됩니다.

 

<무용신> 안에도 당연히 반대의 목소리가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어째서 <무용신>이 조선인 추도비나 인권영화제나 방글라데시 프로젝트를 추진하느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급기야 최근에는 일부 회원을 <무용신>에서 축출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개인들이 그런 의견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강요할 수 없는 것이 <무용신>의 특징이자 장점입니다.

 

누구나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자신의 의견이 중요하다면 다른 회원의 의견도 중요하다는 데에 동의할 수 있으면 됩니다. 프로젝트의 참여 여부는 각자가 결정할 문제입니다. 팀장들은 자기가 추진한 사업의 경과와 결과에 대해 책임지면 됩니다.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함께 즐길 수 있고, 실패하면 함께 견디면 됩니다.

 

 

1990년대에 미국 티비에 방영되던 커피 광고가 생각납니다. “Sit back and relax, it’s Some coffee time.” 무슨 커피의 광고였는지는 잊었지만 “물러나서 느긋하게 커피 한 잔 해라”는 말은 무척 위안적이었습니다. <무용신>의 활동 원칙도 그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참여와 관망이 둘 다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Jump in, if you like it;               좋으면 참여해 주세요. 

Step back, if you don’t;            싫으면 관망하세요. 

Just don’t mess with others.    방해하지 마시고요.        (jc, 2026/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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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에너지가 만듭니다. 에너지(energy)가 몰리면 운동(motion)이 생기고 일(work)로 발전하게 마련이죠. 물리학뿐 아니라 인간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일도 그렇고, 나쁜 일도 그렇습니다. 에너지가 운동과 일을 만듭니다.

 

그동안 <무용신>은 많은 일을 했습니다. (1) 최승희 리서치가 9년째이고, (2) 무용신 캠페인이 7년 동안 10차에 걸쳐 성공적으로 수행됐습니다. (3)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방문단을 3년 연속 조직했고, (4) 강릉 인권영화제를 3년 동안 후원했습니다. (5) 니시노미야 한일 풍물교류회를 2회 후원했고, 올해 후원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면 3년 후원의 약속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 밖에 (6) 연해주 고려인 민족학교를 지원했고, (7) 고려극장 건립도 의논하기 시작했고, (8) 방글라데시 민중혁명의 청년 활동가들을 지원했습니다. 작년(2025년)에는 강릉 식구들의 노력으로 (9) 조선학교 축구공 후원이 시작됐고, (10) 한일동포 친선축구대회도 기획되었습니다.

 

 

<무용신>보다 회원 수가 훨씬 많고, 잘 조직되어 있고, 명사들도 많고, 회비와 지원금이 풍부한 사회단체들도 많습니다. 조직과 규약이 없고, 회칙과 회비가 없는 <무용신>이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일해 온 것이 이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것들이 없었기 때문에 회원들의 에너지가 자유롭게 흐르고, 운동이 증폭되어 많은 일들을 이룰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아트코어 굿마을> 대표 이진희(李眞熙) 선생

 

그러나 성공은 실패의 씨앗이기도 합니다. 어느덧 <무용신>의 에너지 흐름을 제어하고, 회원을 조직하고, 존재보다는 명제를, 자유로움보다는 당위를 내세우려는 움직임이 생겼습니다. <무용신>의 활동이 둔화됐고, 동료들 사이의 의견 차이가 갈등으로 번졌고, 자매단체인 <팀아이>와도 의견 차이가 불거졌습니다. 좋은 일일수록 성공했을 때 더 조심해야 하는 법인데, <무용신>은 위기를 슬기롭게 넘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무용신> 활동이 6-7년째이므로 그런 일들이 생길 때도 됐습니다. 지난 일을 되돌아보고 방향을 조정할 때가 된 것이지요. 대학에서 안식년을 주듯이 말이죠.

 

지금은 어차피 <무용신>이 활동하기에 상황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국제적으로 남북중소미일의 관계가 긴장되어 있고, 국내적으로도 내란 진압과 대통령 파면에 이어 검찰/법원/언론 개혁을 앞두고 있기때문에 재외동포 운동이 우선순위를 가지기 어려울 수 있죠. 지난 1월의 사진전 갈등 속에서 3월로 예정된 11차 무용신 캠페인이 취소된 것이 그런 예입니다.

 

 

내외의 상황이 좋지 않을 때는 꾸역꾸역 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시기에는 한 걸음 물러서서 즐김과 재충전의 기회를 찾는 것이 좋습니다. <무용신>의 목적과 목표, 방법론을 되새겨보고, 일을 더 쉽고 재미있게 할 수 있는 방법론도 강구하면 좋겠습니다. 특히 그동안 협력해 온 자매단체들의 활동에 관심을 갖고, 그들의 행사에 적극 참여하는 것도 좋습니다.

 

 

무용신은 올해(2026년)의 행사가 많지 않습니다. (1) 3월의 11차 무용신 캠페인은 취소되었으므로, 출판 운동(조정희, 정철훈 선생)을 시작합니다. <무용신>의 활동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2) 5월 말에는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고베 방문단(박기찬 선생)이 구성됩니다. 이는 <무용신>의 행사는 아니지만, 그 성공을 위해 <무용신>의 회원들이 적극 협력하게 됩니다. (3) 8월 말에는 <제1강릉포럼>이 주도하는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방문단(강승호, 조은혜 선생)이 조직되고, (4) 가족풍물패 <동동>의 제3회 니시노미야 풍물교류회(임인출 선생)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예년에 비해 가짓수는 적어도, 재미있게 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을 이루는 것은 에너지입니다. 에너지의 흐름을 통제하지 맙시다. 각 사업의 팀장과 팀원들에게 도움을 제공하는 것은 좋지만 딴지는 걸지 맙시다. 그들의 에너지가 멋진 일을 만들고, 많은 이들에게 좋은 경험을 줄 수 있습니다. 성공하면 같이 즐기고 실패하면 같이 견딥시다.

 

 

에너지의 최고 형태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원래 제정신이 아니죠. 살짝 미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조직이나 정보나 돈으로 일하지 않았습니다. 에너지로 일했죠. 올해도 <무용신>은 사랑으로 일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jc, 2026/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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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舞踊靴>キャンペーンが始まってから6年、年数で言うと7年目に入りました。 2020年3月1日に四国と神戸の朝鮮学校に約30足の舞踊靴を寄贈して以来、北海道から九州までのすべての朝鮮学校の舞踊部の学生に約1400足の舞踊靴を届けました。

 

コロナもあり、韓国の尹錫悦政権や朝鮮の敵対国宣言などの困難がありましたが、何とか着実に仕事を続けてきました。 舞踊靴キャンペーンだけでなく、宝塚朝鮮人追悼碑プロジェクト、沿海州の崔在亨高麗人学校への舞踊衣装支援、江陵人権映画祭の後援、西宮の風物交流会、さらにはバングラデシュの民衆革命を導いた若者たちの支援も行いました。

 

 

会員が多くない<舞踊靴>がその中心事業だけでなく、さまざまな関連プロジェクトを進めることができたのは、後援會員や活動家たちの「開かれた心」と「継続的な実践」のおかげだと思います。

 

'開かれた心'とは寛容と配慮です。 お互いの違いを受け入れ、時には自分の期待に反しても我慢することです。 <舞踊靴>はほとんどが海外プロジェクトを遂行しているため、寛容と配慮がさらに必要です。 状況や文化の違いを認め、受け入れることができなければならないからです。

 

配慮と寛容は同情とは異なるものです。 沿海州や中央アジアの高麗人同胞や日本の朝鮮人同胞は、同情の対象では決してありません。 強い誇りと強い生活力を持つ方々である点では、朝鮮や韓国の同胞たちと同じです。 同じ言語とルーツ意識でつながっているだけに、交流し協力しようということです。 交流と協力は、配慮と寛容が働いたときにのみ効果を発揮します。

 

 

'継続的な実践'も配慮と寛容が働くときに可能です。 理解し、受け入れることで実質的な助けを与え合うことができ、それを続け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 舞踊靴や衣装を贈ることは、ほんの小さな贈り物に過ぎません。 それでもそれを受け取る在外同胞、特に若い学生たちに大きな感動を与えることができるのは、韓国同胞の開かれた心が感じられるからではないでしょうか?

 

開かれた心と開かれた心が出会い、配慮と寛容が積み重なるとき、<舞踊靴>の実践も続くことができると思います。 これまで5年間続いた舞踊靴の活動が、その生きている証拠でしょう。

 

<舞踊靴>はこれまで多くの姉妹団体と共に活動してきました。 ソウルや仁川、富川や城南、江陵や洪川、春川や三陟、釜山や慶州、羅州や光州、木浦、統營や固城などで活動する多くの市民団体の活動家と交流し、協力してきました。 今年は大邱・大田・全州・清州の市民団体も参加してくれる見込みです。

 

 

<舞踊靴>はもはや自らの会員を増やそうと努力する必要はありません。 姉妹団体の活動家をわざわざ<舞踊靴>の会員として迎える必要はありません。 <舞踊靴>がキャンペーンを始め、その趣旨と目標を丁寧に説明すると、多くの方々が喜んで参加してくださいます。

 

だからこそ、私たちは<別々に、また一緒に>働く<緩やかな連帯>を目指しています。 <舞踊靴>は「強固な単一隊伍」という言葉が好きではありません。 各市民団体や活動家の違いを無視する傾向があるからです。 お互いに違っていても構いません。 必要な時期に重なる部分だけでも一緒に働けば、素晴らしい成果を上げることができます。 それがまさに過去5年間、<舞踊靴>が行ってきた方法です。

 

今年も開かれた心と継続的な実践、寛容と配慮、そして別々に、また一緒に働く緩やかな連帯を続けられればと思います。 そうであれば、今年も<舞踊靴>の集まりには組織や定款、会計帳簿は必要ないでしょう。 過去5年間、うまくやってきたのと同じように。

 

誰でもやりたいことがあれば、自分で主導すればいいのです。 他の方もその仕事が気に入れば参加すればいいです。 状況や条件が合わなければ、退いていればいいのです。

 

 

<舞踊靴>は緩やかな組織が特徴だと言われますが、本当に重要なのは開かれた心と継続的な実践、配慮と寛容だと思います。 そのような心構えが生きている限り、<舞踊靴>は今年も良い年を過ごすことができると信じています。 (jc, 2026/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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