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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신>이 일본 효고현 니시노미야를 방문합니다. 풍물패 <동동>이 재일조선인 학생들과 함께 신명나는 <한일풍물교류회> 공연을 펼칩니다. 한국과 일본의 활동가들이 다시 한번 모여서 시민 교류의 기회를 모색합니다. 올해로 3회째를 맞은 <한일풍물교류회>를 1인1만원(이상^^)으로 후원해 주세요.

제3회 [한일풍물교류회] in 니시노미야
방문일시: 2026년 8월21-24일 (34)

행사지역: 일본 효고현 니시노미야

공연일시: 2025년 8월23일(일), 오후2시

공연장소: 일본 효고현 니시노미야시 공민관

 

<코끼리회(1991)>는 니시노미아의 재일동포 학생들의 모임입니다.

 

<코끼리회>는 니시노미야의 초,,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의 모임입니다. 학부모님들께서도 <니시노미야 재일외국인아동생도보호자회>를 결성하시고 <코끼리회>를 후원하고 계십니다. <코끼리회>는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가르치기 위한 단체입니다. 처음에는 각 학교의 교내 동아리를 만들기 위해 애쓰셨지만, 학교와 교육위의 동의를 얻지 못해 성공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에 학부모님들께서는 학교의 외부에 재일동포 학생들을 위한 모임을 결성하셨고, 이름을 <코끼리회>라고 정했습니다. <코끼리회>는 1991년 첫 회원으로 등록한 학생들이 스스로 정한 이름이라고 합니다.

 

<코끼리회>의 학생들은 한국말과 한국문화, 한국예술을 배우면서, 각종 교포행사에 공연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초대 회장 김원혜 선생께서 오래 수고해 주시다가, 지금은 2대 회장이시자 <팀아이>의 회원이기도 하신 구실 선생께서 <코끼리회>를 지도하고 계십니다.

 

 

니시노미야는 조선인 노동자의 벽서, “조선국 독립이 발견된 곳입니다.

 

니시노미야는 두 가지 이유로 근대사에 등장합니다. 첫째는 이 지역 지하호에서 발견된 “조선국 독립이라는 벽서입니다. 태평양 전쟁 말기 니시노미야의 고요엔에는 일제 해군 전투기 공장으로 사용할 지하호가 굴착됐습니다. 이 지하호 굴착에 조선인들이 동원되었습니다.

 

1945 815일 일제가 항복하자, 해방과 함께 지하호 공사에서 풀려난 조선인 노동자들이 지하호의 벽에 “조선국 독립 푸른 봄이라는 글씨를 썼습니다. 1987 11월에 발견된 이 벽서는 지하호 공사에 조선인 노동자들이 강제 동원되었다는 증거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니시노미야는 4.24 교육투쟁이 가장 치열했던 곳입니다.

 

일제가 패망하자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재일동포들은 자녀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칠 국어강습소를 개설했습니다. 국어강습소는 <재일조선인연합>의 지휘아래 조선인학교로 발전했는데, 1947년 일본 전역의 조선인학교는 563(학생 57,498, 교원 1,331)에 달했습니다.

 

1948 1월 일본 정부는 조선인 학교를 폐쇄하고 일본학교에 통합시키라는 명령을 발동했습니다. 조선인들은 이에 반대했고, 민족학교 수호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이 투쟁은 니시노미야에서 가장 격렬했고, 사망자가 발생하기에 이르렀으나, 끝내 조선인학교를 지켜냈습니다.

 

 

니시노미야는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와도 가깝습니다.

 

<무용신>은 작년 1월 다카라즈카를 방문해 조선인 추도비를 참배했습니다. 수도 공사와 철도 공사 중에 사고로 돌아가신 조선인 노동자들을 1백년이 넘도록 위령 제사를 드려 오신 타마세 마을을 방문, 불교사찰 만푸쿠지에서 감사의 국악 음악회도 열었습니다. 올해도 <무용신>은 니시노미야에 인접한 다카라즈카의 만푸쿠지를 방문하고 추도비에 참배할 예정입니다.

 

 

임인출 가족 풍물패 <동동>이 함께 합니다.

 

가족 풍물패 <동동>이 이번 방문단에 동행, 니시노미야 공민관에서 <코끼리회>를 비롯한 동포 학생들과 학부모를 초청, 풍물공연을 개최하고, 이어서 동포들과의 교류를 위해 야외 바비큐 모임도 가집니다.

 

 

효고현과 오사카부, 교토부의 재일동포, 일본인 활동가들과 함께 할 제3회 <한일풍물교류회>를 1인1만원(이상^^)으로 후원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모금기간: 2026년 7월20일-8월20일
모금목표: 560만원(공연단 항공료 및 체재비)
계좌: 카카오뱅크 3333-23-1600864
        (한일풍물교류회-무용신, 조정희) (jc, 2026/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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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신>이 가족풍물패 <동동>이 출연하는 <한일 풍물교류회>를 후원합니다. 오는 823일 오후 2, 일본 효고현 니시노미야 시립 공민관에서 열리는 <한일 풍물교류회>는 올해가 3회째입니다.

 

 

재일조선학교 무용부를 후원해 온 <무용신>2022년부터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방문을 시작했습니다. 이 추도비는 1910년대와 1920년대에 이 지역 토목공사에 참여했다가 사고로 사망한 5명의 조선인 노동자를 기리기 위한 것으로, 20203월 일본인 활동가들과 재일동포들의 협력으로 일본 효고(兵庫)현 다카라즈카(宝塚)시 키리하타(切畑)에 건립되었습니다

 

 

키리하타 인근의 타마세(玉瀨) 마을 주민들은 1914년부터 100년이 넘도록 조선인 희생자들을 기리는 위령 제사를 지내왔습니다. 이분들의 희생으로 이 지역이 수도와 철도 등의 근대 문명을 누리게 된 것에 감사하는 뜻이라고 합니다. 타마세 마을에는 지금도 이들의 참배묘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된 <무용신>은 조선학교 후원을 위해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타마세의 참배묘와 키리하타의 추도비를 참배했습니다. 그와 함께 조선인 희생자들을 위령해 오신 타마세 주민과 추도비를 건립해 주신 일본인 및 재일동포 활동가들에게 감사 인사를 드렸습니다.

 

 

일본 방문단에 공연단이 동행한 것은 2023년부터입니다. 2023년에는 서울의 국악연주단 <풍류회(박인호 선생)>가 타마세 마을의 불교사찰 <만푸쿠지>에서 국악 공연을 열었습니다. 2024년부터는 한국의 대표적인 가족풍물단 <동동(임인출 선생)>이 참가하는 <한일 풍물교류회>가 시작되었고, 이후 <동동><한일 풍물교류회>가 정례화되었습니다.

 

 

올해의 제3<한일 풍물교류회>는 일본의 시민단체 <팀아이><니시노미야 외국인아동생도보호자회>와 <니시노미야 재일외국인교육연구협의회>가 공동 주최하고, 니시노미야시와 니시노미야시 교육위원회가 후원하는 공식행사입니다.

 

 

<무용신>2024년부터 3년간의 <한일 풍물교류회> 공연단 비용 지원을 약속했고, 마침내 올해 <무용신>이 지원하는 마지막 공연을 진행하게 됩니다. 내년부터는 일본 현지의 주최 및 후원 단체들이 <한일 풍물교류회>를 이어갈 방안을 마련해 주실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무용신>의 모든 사업은 시민들의 모금으로 진행됩니다. 2017년부터 시작된 <최승희 리서치>2019년부터 시작된 <무용신 캠페인>, 2022년부터 시작된 <조선인 추도비> 프로젝트가 모두 시민들의 힘으로 진행되었습니다. 2023년에 시작된 <연해주 고려인 민족학교 후원> 프로젝트와 2024년의 <방글라데시 민중혁명> 지원 프로젝트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희생자 김병순 씨가 강릉 출신임이 확인된 후에는 강릉의 시민단체들도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2022년에는 강릉시장이 추도비 건립자들에게 감사패를 전달했고, 올해의 신임 강릉시장도 효고현을 방문, 다카라즈카 시장과 면담을 가졌습니다. 강릉과 다카라즈카의 두 도시가 시민단체뿐 아니라 지방정부도 교류와 협력을 시작했습니다.

 

 

회원수 100여명의 임의단체에 머물고 있는 <무용신>이 이렇게 폭넓게 활동할 수 있는 것은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 덕분입니다. 올해의 제3<한일 풍물교류회>도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의 관심과 11만원 이상의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jc, 2026/7/20)

 

제목: [3회 한일 풍물교류회] 지원 모금 캠페인

기간: 2026720일부터 820일까지 (1개월)

계좌: 카카오뱅크 3333-23-1600864 (한일풍물교류회-무용신)

목표: 560만원 (공연단 7명의 항공료 및 34일 체류 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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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신>2026년 상반기를 조용히 지냈습니다. 연초에 기획됐던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사진전이 <조선학교> 사진전으로 변경되는 바람에 <팀아이>의 반대 속에서 <무용신>이 공식 후원하기 어려운 사정이 생겼고, 그 와중에 8년 동안 긴밀하게 유지되었던 한국의 <무용신>과 일본의 <팀아이> 사이에 균열도 생겼습니다.

 

3월로 예정되었던 <11차 무용신 캠페인>이 취소됐고, 4월에는 제가 예기치 않은 복막염 수술을 받은 후, 개인적으로는 심각할 수도 있는 진단을 확인하느라 병원 신세를 지는 바람에 <무용신>으로서는 상반기를 별일 없이 보내게 된 것이지요.

 

 

이런저런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무용신>이 지리멸렬해지지 않고 오히려 단톡방의 의견교환이 활발해 진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교를 위해 모인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무용신>이 이런저런 주장의 갑론을박에 매몰되는 모임이 아니지 않습니까? <무용신>일하려고 모인 모임이니까요.

 

그런데 또 일을 하다보면 별일이 다 생기게 마련입니다. 기분 나쁘다고 할 일을 안하는 것은 기분 좋다고 안 해도 될 일을 하는 것만큼이나 현명한 일은 아닙니다. 과거로 돌아가 머리카락 가르듯이 잘잘못을 들추는 것은 그 자체로도 똑똑한 일이 아니고, 앞으로 할 일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와중에도 ...

 

 

개인적으로 중요한 성과를 낸 분들이 계십니다. 성남의 임인출 선생께서 생애 통산 첫 풍물 독주회를 개최하셨는데, 넘너무 재밌었고, 성황도 이뤘습니다. 또 강릉의 김중남 선생이 강릉 시장에 당선되시는 바람에 강릉과 다카라즈카 사이의 교류와 협력이 긴밀해 질 수 있게 됐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김중남 선생은 당선되자마자 취임도 하시기 전에 다카라즈카에 가셔서 모리 린타로 시장을 만나셨습니다. 효고 현의회와 다카라즈카 시의회도 방문하셨고, 다카라즈카 가극단 관계자들과도 만나서 향후 교류하고 협력할 준비를 하고 오셨더군요.

 

 

연전에 저는 강원대 학술지 <평화들>에 <두 도시 이야기: 강릉과 다카라즈카>라는 글을 기고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글에서 최근에 발굴된 한일 시민들 사이의 역사적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인적, 물적 교류가 왕성하게 일어나기를 기대한다고 썼습니다. 그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지요.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프로젝트를 꾸준히 추진해 온 우리 <무용신>으로서는 아주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임인출, 김중남 선생처럼 말보다 행동하면서 실제로 성과를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무용신>이 지향하는 문화운동에서는 실질적인 성과가 필요합니다. 문화운동은 주장만으로는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합니다. 작품과 공연과 교류와 협력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박정희, 전두환 시절 같은 엄혹한 시기에도 저항의 문화운동이 필요했지만, 환경이나 조건이 훨씬 좋아진 지금에야말로 창의적이고 선도적인 문화운동이 필요하고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문화운동이 낮은 수준의 선전, 선동 행위에 머물지 않고, 본래의 역할을 다할 수 있으려면, 가깝거나 먼 미래에 다가올 일을 내다볼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암튼, 그 얘기는 또 다시 할 기회가 있겠고요.

 

 

다시 <무용신>이 일할 시간이 다가옵니다.

 

3차 니시노미야 풍물교류회의 일정이 잡혔습니다. 풍물교류회는 예년처럼 <동동 친구들(임인출)>이 주도하게 됩니다. 니시노미야 공민관에서 열리게 되고, 날짜는 823() 오후 2시입니다. 이를 위해 공연단과 함께 방문단이 구성될 예정입니다. 방문 예정일은 821()부터 24()까지 34일입니다. 구체적인 일정은 곧 발표를 드리겠습니다.

 

 

올해의 방문단 조직은 강릉의 조은혜 선생이 팀장으로 수고해 주시기로 연초에 약속하셨습니다. 올해는 강릉 분들이 많이 참여하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다른 지역에서도 참여하셔도 됩니다. 계획이 발표되면 바로 신청하시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시절이 어수선합니다. 국내적으로 그렇고, 국제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용신>은 하기로 한 일들을 차근히 해 나가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jc, 2026/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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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신>의 강릉 프로젝트가 좋은 결실을 맺었습니다. 강릉 시장에 당선되신 김중남 선생께서 취임도 하시기 전에 일본 효고현 다카라즈카를 방문하셨습니다. 당선자 신분으로 다카라즈카 시장도 만나고 시의원들과도 환담하셨다고 합니다. 효고 현의회와도 교류하기로 하신 것 같네요.

 

 

이 모든 일은 2020년에 건립된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서 시작됐습니다. 일제강점기 노동 이민을 가셨다가 그곳에서 희생된 조선인 노동자 다섯 분이 그곳 주민들에 의해 100년이 넘게 위령 제사를 받고 있는 것이 알려졌고, 그중 한 분이 강릉 출신임이 밝혀졌습니다. 이 이야기가 한국에 전해지면서 감사와 감동이 전파되었지요.

 

 

2022년에는 김한근 당시 강릉시장께서 추도비를 건립하신 분들에게 감사패를 전달했고, 김중남 선생은 강릉인권영화제를 통해 <타마세의 100년 전설>을 이어가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후 강릉과 다카라즈카, 강원도와 효고현이 교류하고 협력하는 일이 잦아지고 구체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작년 11월에는 하시모토 나루토시 효고 현의원이 강릉을 방문했고, 이번에 김중남 강릉 시장 당선자가 다카라즈카를 답방하신 것입니다. 두 도시를 위해서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날 것이라는 전조라고 생각합니다.

 

<무용신>은 그동안 말과 글, 방문과 답방, 참배와 공연 등의 방법으로 강릉과 다카라즈카가 가까워지도록 노력했습니다. 말하자면 중매를 선 것이지요. 이제 두 지역의 당사자들이 직접 만나 교류와 협력을 위한 방안을 마련하고 실천해 나갈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중매자의 역할은 잘 마무리된 것 같습니다. 중매가 성공했다고 양복 얻어 입을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연전에 정세화 선생님께 말씀드렸던 것처럼 "마땅히 할 일"을 한 것 뿐이니까요.

 

다만 <무용신>의 강릉 프로젝트가 결실을 맺게된 데에는 여러 해 동안 많은 분들의 노력이 있었다는 점이 기억되면 좋겠습니다.

 

일본의 <팀아이(콘도 타쿠미)><센큐분코(히다 유이치)>, <무쿠게회><고베학생청년센터><니시노미야 교원연맹>, <코끼리회(구실)><99%모임(카노 겐지)><만푸쿠지(아다치 치쿄)>, <단심회><타마세 부인회>, 그리고 한국의 <서울대민주동문회(정병문, 강충호, 장원택, 이은정)>와 <메아리OB>, <민예총>과, <민문연>, <전국시민활동가연대(이요상)>  <AOK(정연진)>, <시민모임 독립(박덕진)>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박기찬)><희망래일/대륙학교(황광석)>, <은하수(김용대)><강릉포럼(강승호, 조은혜)><연해주포럼(김현동)>, <동동(임인출)><조각배들의 노래(강욱천)> 등의 수많은 단체/모임들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특히 강릉 프로젝트를 위한 공연과 모금과 방문을 위해 지난 수년간 연인원 수천 명의 개인들이 시간과 돈과 관심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런 집단 지성과 공동의 노력이 강릉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용신>은 아직도 배가 고픕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더 널리 알려지면 좋겠습니다. 특히 다섯 분의 희생자 중에서 두 분이 경남 고성, 한 분이 통영 출신이셨습니다. 1백년 전의 희생입니다. 그분들도 강릉의 김병순씨와 마찬가지로 다카라즈카의 타마세 마을 주민들로부터 1백년 동안 위령제사로 모셔졌습니다.

 

가까운 시일 안에 고성과 통영에서도 강릉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 기대가 실현될 수 있도록 <무용신>은 여러 단체와 개인들과 함께 노력과 준비를 계속해 나가려고 합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리고 싶네요. (jc, 2026/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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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김중남 선생의 다카라즈카 방문 보고의 일부입니다.)

 

주말을 이용해 일본 효고현 다카라츠카시를 방문했습니다.

 

다카라츠카시에서 100년 전 돌아가신 김병순씨(강릉출신, 무연고상태로 일본에서 수도공사중 폭발사고로 사망)를 기리며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어서 이에 대한 답방의 의미도 있었습니다.

 

다카라츠카시가 속한 효고현의 하시모토 나루토시 현의원을 통해 양 도시의 교류 확대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방문하게되었는데, 모리 린타로 시장님과 오찬 및 간담회를 길게 진행하는 뜻깊은 기회를 얻었습니다. 인구 22만의 도시와 20만의 도시가 공통으로 안고 있는 고민과 발전 방향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또한 일본 최고의 가극단으로 평가받는 다카라츠카 가극단을 방문해 우리 도시와의 교류 가능성을 확인했습니다. 2800석 규모의 대극장에서 하루 두 차례 공연 이 열리고, 매일 전석 매진을 기록하는 문화 콘텐츠의 힘을 직접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녁에는 하시모토 나루토시 현의원을 비롯해 시의원님들, 민단 대표님, 대한항공 서일본지점장님, 국제교류 관계자 등 많은 분들과 만나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고 왔습니다.

 

취임 후 내부적으로 충분히 논의하고 시의회를 비롯한 여러 관계자분들과도 협의하여 양 도시 간 교류의 가능성을 검토해 나가겠습니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낄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정성껏 환대해 주신 다카라츠카시 관계자 여러분과 일본의 모든 분들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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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613, 35회 민족민주 열사를 위한 범국민 추모제가 열렸다. 장소는 서울 시청 인근이었지만 영정 사진 행진은 안국동에서 시작했다. 서민동 단톡방에 영정 사진을 들고 행진할 사람은 신청하라는 공지가 올라왔을 때 나는 우종원 선생의 영정을 들겠다고 신청했다.

 

나는 한 달 전에 복막염 수술을 받았는데, 수술 중에 악성 종양도 발견됐다. 엉겁결에 암 환자가 된 것인데, 기회가 다시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종원 선생의 영정을 들고 행진하겠다고 신청한 것이다.

 

 

나는 모이기로 한 시간보다 1시간가량 일찍 행사장에 도착했다. 우종원 선생의 사진이 준비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내가 그의 영정 사진을 들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서민동 사무국장 이은정 선생은 전민동이 영정 사진을 준비하기 때문에 행진이 시작되기 전에 해당 텐트에 가서 그의 사진을 요청하면 된다고 했다. 다행히 올해는 내가 장갑을 낀 두 손으로 우종원 선생의 영정 사진을 들고 행진에 참여할 수 있었다.

 

안국동에서 광화문을 거쳐 시청 앞까지 1시간 남짓의 행진을 마치고 행사장에 도착했을 때 연단 전면에 영정 사진들이 이미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우종원 선생의 사진을 찾아보니 맨 윗 열 오른쪽 끝에서 23번째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내가 운반해온 영정사진을 행사 위원들에게 반납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행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우종원 선생을 생각했다.

 

 

나는 우종원 선생의 오랜 친구나 절친이 아니다. 같은 사회대 81학번이라는 점만 빼고는 다른 학연도 지연도 없다. 그렇다고 같은 현장에서 함께 일해 본 적도 없다. 나는 그가 명을 달리하기 전에 딱 한 번 만났을 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 희생된 열사들이 언급될 때마다 그를 떠올리곤 한다. 내가 떠올리는 그의 모습은 격렬하게 투쟁하거나 참혹하게 희생된 장면이 아니다. 내가 회상하는 그의 모습은, 심각한 표정의 영정 사진과는 달리, 말없이 웃고 있던 우종원 선생의 조용한 모습이다.

 

내가 오랜 외국 생활을 마치고 아주 귀국했을 때, 조선무용가 최승희 선생의 조사연구와 함께 재일 조선학교의 무용부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보내는 캠페인도 시작했다. 독지가들의 후원 덕분에 최승희 조사연구를 9년째 진행 중이고 이제 결과를 출판할 단계에 이르렀다. 또 서민동을 비롯한 많은 후원자들의 참여 덕분에 2018년부터 약 8년 동안 일본 전역의 조선학교 무용부에 약 14백 켤레의 무용신을 보낼 수 있었다.

 

재외동포 후원활동은 한두 분야에만 전념하는 전문 활동이 될 수 없었고, 동포들이 요청하는 일이면 무엇이든 하게 된다. 그래서 중국과 러시아 동포들과도 교류하기 시작했고, 일본에서는 일제강점기에 희생된 조선인 노동자들을 추모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그중 효고현 다카라즈카에 세워진 조선인 노동자 추모비가 관심을 사로잡았다. 다카라즈카시 타마세 마을의 주민들이 조선인 희생자들을 1백년이 넘도록 위령 제사해 온 것이 뒤늦게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20203월 희생자들을 위한 추도비가 건립됐는데, 이는 일본 전역에 세워진 약 170기의 조선인 추도비와 위령비들 중에서 가장 최근에 건립된 것이다.

 

재일 활동가들의 요청에 따라 그 희생자 다섯 분의 한국 내 연고를 조사했고, 그중 한 분이 강원도 강릉 출신임을 밝혀낼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강릉과 다카라즈카의 교류가 시작됐다. 나도 강릉에 자주 오가게 되었는데, 강릉 출신의 민주열사 김성수 선생을 알게 된 것도 그 때였다. 강릉에는 김성수 열사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었는데, 동문인 홍진선 선생이 그 이사장직을 맡아 오래 일해 왔다.

 

 

기념사업회는 매년 마석 모란공원에서 김성수 열사 추모제를 거행했다. 나는 2021년에 처음으로 그 추모제에 참석했는데, 그때 우종원 선생을 다시 만났다. 우종원 선생의 묘가 김성수 열사의 묘 바로 아래에 마련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묘석 위 유리상자 안에는 우종원 선생의 영정이 담겨 있었고, 그 옆에는 민주열사 고 우종원의 묘라고 쓴 묘비가 세워져 있었다. 그때가 내가 귀국한 후 다시 우종원 선생을 만난 첫 만남이었다.

 

 

내가 생전의 우종원 선생을 만난 것은 19856월이었다. 같은 사회대 81학번이었지만 나는 그를 몰랐고, 그도 나를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는 각자 맡은 일이 다양했고, 또 자신이 하는 일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던 시절이었다. 81학번이면서 85년에야 서로 통성명을 했다는 것 자체가 비정상 시대의 기형적인 일상일 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만난 곳은 사회대 73층의 사회복지학과 대학원 연구실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교수 연구실 크기의 방에 8명의 대학원생들의 책상이 좌우에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 방 주인의 한 명이었던 이선우 선생은 아침나절이 아니면 볕도 잘 들지 않는 곳이라고 했다. 그러나 내게는 그날의 그 방의 분위기가 아주 환했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나는 1983년 메아리 회장을 맡았고 그해 5월에 노래책을 만들어 전국에 배포한 일로 수배 끝에 강집됐다. 아마도 그날 나는 말년 휴가를 이용해 복학 문제를 알아보려고 학교에 갔다가 절친 이선우 선생을 만나러 그 방을 찾았던 것 같다. 이선우 선생은 나와 단짝으로 메아리 집행부 활동을 하다가 대학원에 진학, 첫 학기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깡통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자판기 커피를 뽑아들고 대학원 연구실을 찾았다. 이선우 선생은 커피는 여기도 있는데...’ 하면서 나를 맞아 주었는데, 방에는 이미 2명의 손님이 더 있었다. 한 명은 신문학과 81학번 허진 선생이었고, 다른 한 명이 우종원 선생이었다.

 

그냥 우연히 모인 것이기 때문에 이야기는 중구난방이었을 것이다. 사실 그날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외무고시에 막 합격한 허진 선생은 갑자기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기 시작한 주역 이야기를 오래 했지만, 나는 귀담아 듣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보다는 이선우 선생이 타준 이른바 특제커피를 홀짝거리면서 맑은 눈으로 말없이 듣고 있던 우종원 선생의 모습이 강한 인상으로 남았다.

 

그가 원래 그렇게 우직한 모습인지, 아니면 수감 생활이 만들어준 절제된 모습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지나치게 심각하거나 음울한 성격은 아니었다는 기억이다. 네 명이서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우종원 선생이 지나가듯이 한 마디 툭 던지자 우리들이 모두 폭소를 터뜨렸던 것도 기억난다.

 

 

그날 그 대학원 연구실의 우연한 만남은 확실히 이상한 만남이었다. 방주인 대학원생과 강집 끝에 복학을 앞둔 군바리, 주역에 푹 빠진 외무고시 합격자와 민추위 활동 중이던 빵잽이가 한 자리에 모인 그런 모임은, 내가 기억하는 한 그 전에도 없었고 그 후에도 없었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스물 서너살의 나이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모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조합의 모임은 그 2-3년 전에도 불가능했을 터이지만, 인생행로가 본격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한 후로는 가능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20224월 나는 임상택 선배님과 함께 강릉을 찾았었다. 김성수 열사의 부모님은 임상택 선배님께 고맙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은 임상택 선배님이 김성수 열사의 사망사건 진상규명 노력이 결실을 보도록 협력하셨기 때문이라고 했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나는 우종원에 대해서도 질문을 드려보았다. 임상택 선배는 기록과 증언 등의 자료가 너무 없어서 우종원에 대한 진상규명은 성공하지 못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런 이야기를 전하는 임선배의 표정이 우울했다.

 

우종원이라는 이름이 나오면 목소리가 낮아지고 분위기가 비장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나 역시 누군가와 그의 이야기를 하다보면 비감해지곤 한다. 그러나 혼자서 우종원 선생을 생각하면 이야기가 다르다. 40여 년 전 대학원연구실에서 만났던 그 한 번의 우연한 만남 때문이다.

 

 

그날 우리는 처음 만났고, 나도 그도 별로 말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만났다면 분명히 친구가 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종원 선생이 나를 어떻게 느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분명히 그를 친구로 삼기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고 다닌다. 한 번의 만남이 오랜 우정으로 이어지지 말란 법은 없다. 그것은 이생이든 저생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jc, 사회81, 2026/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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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阪中之島名所として大阪公会堂1918紹介したがそれよりも時期てられたもうつの名所がある大阪公会堂のすぐ裏手位置する大阪府立図書館である190431開館したこの図書館日本公立図書館つとされている

 

 

日本初公立図書館1898京都設立された集書院現在京都府立図書館として運営されている図書館建物新築であるため現代的建築設備っている

 

大阪府立図書館京都府立図書館より6年後開館したが開館当時建物現在までそのまま使用されていることから日本最古図書館とされている図書館機能はそのまま維持しつつ同時にこの建築物日本重要文化財指定されている

 

 

実際今日大阪府立図書館2つある中之島にある図書館大阪府立中之島図書館1996東大阪新築開館した図書館大阪府立中央図書館である前者古書古新聞古文書希貴資料所蔵後者はほとんどのりの書籍資料所蔵している規模後者がはるかにきいが1945日本敗戦以前資料はほとんどが大阪府立中之島図書館所蔵されている

 

崔承喜リサーチをったのも中之島図書館だった崔承喜先生大阪公演宝塚公演する資料ほとんどがこの図書館発掘された中之島府立図書館1には新聞閲覧室があるが実際には古新聞2電子資料室閲覧できる

 

 

電子資料室では創刊当初から大阪朝日新聞大阪毎日新聞検索できこれら二社発行する定期刊行物閲覧できるはここでアサヒグラフという週刊畵報雑誌調査したところ崔承喜先生するくの資料発見することができた

 

 

<アサヒグラフ>には1920年代から30年代朝鮮風景大阪地域朝鮮人姿えた写真資料豊富められている孫其禎選手がベルリンオリンピックのマラソン競技先頭ってスタジアムに姿写真発掘されたのもまさにこの電子資料室であるさらに朝鮮人まってらしていた大阪猪飼野地区1930年代様子貴重写真多数発見された

 

 

にとっては中之島図書館日本による植民地時代崔承喜朝鮮人資料宝庫だったが日本人観光客にとっては図書館自体れる価値のある名所である外観はルネサンス様式内部はネオバロック様式調和したこの建物日本重要文化財指定されており中央ホールの階段天井のドームは優雅しくくの観光客のフォトスポットとして利用されている曲線状石段しく彫刻された木製すりが非常印象的

 

 

天井ドームのすぐ下部には8思想家文学者科学者名前まれている孔子ソクラテスアリストテレスシェイクスピアカントゲーテダーウィンなどの東西賢人たちと日本人菅原道真名前まれている韓国人西洋人にはあまりられていないが菅原道真平安時代学者であり総神日本学問として崇拝されている

 

 

中之島図書館2階南側ウィングのにはカフェもんでいる2004開業したスモブロ北欧風雰囲気とミニマリストスタイルのインテリアそしていコーヒーと独特なサンドイッチを提供している。 「スモブロ」(smørrebrødはデンマークサンドイッチという意味

 

 

中之島図書館取材するたびにスモブロったが時間われてコーヒーだけをサンドイッチはわえなかった今回訪問中中之島府立図書館れたいがいれば電子資料室崔承喜尹東柱先生する資料15分間のコピー作業実演いてスモーブロにも案内したい

 

 

もしかしたら一人ではなく同行者<スモブロ>でコーヒーをめての機会まれるかもしれない(jc, 2026/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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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나카노시마의 명소로 오사카 공회당(1918)을 소개했지만, 그보다 더 앞선 시기에 건축된 또 하나의 명소가 있다. 오사카 공회당 바로 뒤편에 자리 잡은 오사카부립도서관이다. 190431일 개관한 이 도서관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공립 도서관의 하나로 꼽힌다.

 

 

일본 최초의 공립도서관은 1898년 교토에 설립된 <집서원(集書院)>으로, 지금은 교토부립도서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도서관 건물은 신축된 것이므로 현대식 건축과 설비를 자랑한다.

 

오사카 부립도서관은 교토 부립도서관보다 6년 뒤에 개관했지만, 개관 당시의 건물이 지금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는 일본 최고(最古)의 도서관이다. 도서관 기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건축물이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사실 오늘날의 오사카부립도서관은 2개이다. 나카노시마에 있는 원래의 도서관은 <오사카부립 나카노시마도서관>이고, 1996년에 히가시오사카에 신축, 개관한 도서관은 <오사카부립 중앙도서관>이다. 전자는 고서와 고신문, 고문서와 희귀자료들을 소장하고, 후자는 대부분의 나머지 서적과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다. 규모는 후자가 훨씬 크지만, 1945년 일본의 패전 이전 시기의 자료는 대부분 <오사카부립 나카노시마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필자가 최승희 리서치를 진행한 것도 주로 나카노시마 도서관이었다. 최승희 선생의 오사카 공연과 다카라즈카 공연에 대한 자료는 대부분 이 도서관에서 발굴되었다. 나카노시마 부립도서관의 1층에는 신문열람실이 있지만, 정작 고신문은 2층의 전자자료실에서 열람할 수 있다.

 

 

전자자료실에서는 <오사카아사히신문><오사카마이니치신문>을 창간 때부터 검색할 수 있고, 이 두 신문사가 발행한 다른 정기간행물도 열람할 수 있다. 필자는 이곳에서 <아사히그라프>라는 주간 화보잡지를 조사했는데, 최승희 선생에 관한 많은 자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사히그라프>에는 또 1920-30년대의 조선의 풍광과 오사카 지역의 조선인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자료들도 풍부하다.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선두로 스타디움에 뛰어 들어오는 모습의 사진이 발굴된 것도 바로 이 전자자료실이다. 그밖에도 조선인들이 모여 살던 오사카의 이카이노 지역의 1930년대 모습을 보여주는 희귀한 사진들도 다수 발견되었다.

 

 

필자에게는 나카노시마 도서관이 일제강점기 최승희와 조선인 자료의 보고였지만, 일본인들이나 관광객들에게는 도서관 건물 자체가 방문할 가치가 있는 명소이다. 외관은 르네상스 양식, 실내는 네오바로크 양식이 어우러진 이 건물은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중앙 홀의 계단과 천정의 돔은 우아하고 아름다워서 많은 관광객들의 포토존으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곡선형의 돌계단과 아름답게 조각된 나무 난간이 아주 인상적이다.

 

 

천정 돔의 바로 아랫부분의 가장자리에는 8명의 사상가, 문학가, 과학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공자,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셰익스피어, 칸트, 괴테, 다윈 등의 동서양의 현인들과 함께 일본인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한국인이나 서양인에게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헤이안(平安) 시대의 학자이자 총신으로, 오늘날 일본인들에게 학문의 신으로 숭배되고 있는 인물이다.

 

 

나카노시마 도서관의 2층 남쪽 윙 끝에는 인상적인 카페도 자리잡고 있다. 2004년에 개업한 <스모브로>는 북유럽식의 분위기와 미니멀리스트 스타일의 인테리어, 그리고 진한 커피와 독특한 샌드위치를 제공한다. ‘스모브로(smørrebrød)’는 덴마크어로 샌드위치라는 말이다.

 

 

필자는 나카노시마 도서관에서 취재할 때마다 <스모브로>에 들렀지만, 시간에 쫓겨서 커피만 마셨고 샌드위치를 맛보지 못했다. 이번 방문 중에 나카노시마 부립도서관을 방문해 보고 싶은 분이 있다면 전자자료실에서 약 15분 동안 최승희, 윤동주 선생에 관한 자료를 찾아 복사하는 과정을 보여드리고, 이어서 <스모브로>에도 안내하고 싶다.

 

 

내게는 혼자서가 아니라 동행과 함께 <스모브로>에서 커피를 마시게 될 첫 번째 기회가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jc, 2026/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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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612崔承喜先生のデビュー舞台であった大阪公会堂正式名称大阪市中央公会堂である新北研訪問団34歴史紀行最終日である61中之島にある大阪公会堂訪問する予定

 

 

今年崔承喜先生舞踊入門してから100年目である61崔承喜舞踊デビュー100周年記念日10日前にあたる今回訪問特別意味えたくて公会堂にメールを新北連訪問団大集会室見学できるかどうかわせた大阪公会堂担当者杉岡氏丁寧口調一般大規模集会室見学することは不可能だとえてきたのメールの返信のように簡潔だった

 

一般のおさまへの見学しておりません不可となりますございません大阪市中央公会堂 杉岡

 

数十回にわたる日本取材じて日本官公庁姿勢比較的慣れていた筆者にとって予想外のことではなかった日本人世界的親切しいと評判だが官公庁例外であるはそうじた日本官公庁国民訪問者一般人権威維持している官公庁公務員一般人ではなく特別人ということなのだろうか

 

 

えば日本ではでも官民という言葉使われている日本国土交通省のプログラムには、「官民連携というものがある官公庁民間人いに協力するという意味だが、「より前面している最近韓国では民官かれたことだろう日本にはより優先されるという意識っている

 

ある意味当然のことだ大韓民国民主共和国でありすべての権力国民からまれる民主的でない要素があればいていく大統領二度弾劾したのはそのためだ国民意思すれば最高権力者である大統領さえもきずりろすのが民主共和国奉仕する存在として認識されている

 

日本立憲君主国である選挙制度などを導入して民主主義外皮つことはできたが憲法上君主である天皇存在であり天皇代行する内閣内閣指示ける官公庁国民よりも優先されるのが正常したがって民主共和国韓国ではアレルギーをこす官民という用語立憲君主制日本では自然使われている

 

 

このような雰囲気をある程度感っていた100年前石井漠舞踊団大阪公演歴史的公演であり石井漠弟子である崔承喜先生のデビュー舞台であったことを強調したが無駄だったメールの返信によれば観覧不可能理由一般人であることだけだった

 

しかしたちの訪問団員不満必要くない担当者間違っているわけでもないはただ慣習っただけだローマにけばローマの大阪けば大阪慣習うのが状況条件ければ代替案せばよい

 

1918開館した大阪公会堂それ自体文化財でありネオルネサンス様式外観内部装飾建築物である大集会場見学できないが外観しさは十分鑑賞できる公会堂のロビーも一般来場者公開されているので見学できる

 

 

1918開館当時大阪公会堂大公演場収容人数3000だった崔承喜のデビュー公演1926同様だった1978開館したソウルの世宗文化会館大劇場収容人数3,022である1988開館した芸術殿堂音楽堂コンサートホール2,505オペラ劇場2,305である大阪市はソウルより60年前世宗文会館規模公演場建設したので感嘆する

 

2002修復工事った大阪公会堂現在では大規模集会室収容人数1,161減少したが今日基準ではこれでも大規模公演場分類されるだろう(jc, 2026/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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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612일 최승희 선생의 데뷔 무대였던 오사카 공회당의 정식 이름은 오사카시 중앙 공회당(大阪市中央公會堂)이다. 신북연 방문단은 34일의 역사기행 마지막 날인 61일 오사카 나카노시마(中之島)에 위치한 오사카 공회당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다.

 

 

올해는 최승희 선생이 무용에 입문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더구나 61일이면 최승희 무용 데뷔 1백주년 기념일의 열흘 전이다. 이번 방문에 특별히 뜻을 더하고 싶어서 필자는 공회당에 이메일을 보내, 신북연 방문단이 대집회실(大集會室)을 견학할 수 있느냐고 문의했다. 오사카 공회당의 담당자 스키오카(杉岡)씨는 공손한 어투로 일반인의 대집회실 견학은 불가능하다고 대답해 왔다. 그의 이메일 답장은 다음과 같이 간략했다.

 

일반 관객의 견학은 받지 않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죄송합니다. 오사카시중앙공회당. 스기오카. (一般のおさまへの見学しておりません不可となりますございません大阪市中央公会堂 杉岡)”

 

수십 차례의 일본 취재를 통해 일본 관공서의 태도에 비교적 익숙한 필자로서는 예상하지 못한 바가 아니었다. 일본인들은 세계적으로 친절하고 상냥한 것으로 소문나 있지만 관공서는 예외이다. 필자는 그렇게 느꼈다. 일본의 관공서는 국민과 방문자를 일반인이라고 부르는 권위를 유지하고 있다. 관공서의 공무원은 일반인이 아닌 특별인이라는 말일까?

 

 

예컨대 일본에서는 아직도 관민(官民)’이라는 말이 쓰인다. 일본 국토교통성(國土交通省)의 프로그램 중에는 관민연휴(官民連携)라는 것이 있다. 관공서와 민간인이 서로 협력한다는 말인데, ‘보다 을 앞에 내세우고 있다. 요즘 한국에서라면 반드시 민관(民官)’이라고 썼을 것이다. 일본에는 보다 이 우선이라는 의식이 남아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민주(民主)적이지 않은 요소가 있다면 제거해 나간다. 대통령을 두 번이나 탄핵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국민의 의사에 반하면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이라도 끌어내리는 것이 민주공화국이다. 관은 민을 보호하고 봉사하는 존재로 인식된다.

 

일본은 입헌군주국이다. 선거제도 등을 도입해서 민주주의의 외피를 가지긴 했지만, 헌법상 군주인 텐노가 가장 높은 존재이고, 텐노를 대행하는 내각과, 내각의 지시를 받는 관공서가 국민보다 우선이라고 여기는 것이 정상이다. 따라서 민주공화국 한국에서라면 알레르기를 일으킬 관민이라는 용어가 입헌군주국 일본에서는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를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던 필자는 1백 년 전 이시이 바쿠 무용단의 공연이 역사적 공연이었고, 이시이 바쿠의 수제자 최승희 선생의 데뷔무대였음을 강조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메일 답장에 따르면 관람이 불가능한 이유는 일반인이라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우리 방문단원이 불만을 가질 필요는 전혀 없다. 딱히 담당자가 잘못된 것도 아니다. 그는 단지 관행에 따랐을 뿐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에 따르고, 오사카에 가면 오사카의 관행에 따르는 것이 좋다. 상황이나 조건이 나쁘면 대안을 찾으면 된다.

 

1918년에 개관한 오사카 공회당은 그 자체가 문화재이고, 네오르네상스식의 외관과 내부 장식은 눈길을 끄는 건축물이다. 대집회장은 견학할 수 없지만, 외관의 아름다움은 얼마든지 감상할 수 있다. 공회당의 로비도 일반인관람객에게 공개되어 있으므로 구경할 수 있다.

 

 

1918년 개관 당시 오사카 공회당 대공연장의 수용인원은 3천명이었다. 최승희 데뷔공연(1926)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1978년에 개관한 서울의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의 수용인원이 3,022석이다. 1988년에 개관한 예술의전당 음악당(콘서트홀)2,505, 오페라극장이 2,305석이다. 오사카시는 서울보다 60년 전에 세종문회회관 규모의 공연장을 건립한 것이니 감탄할 만 하다.

 

2002년 보수공사를 단행한 오사카 공회당은 지금은 대집회실의 수용인원은 1,161명으로 줄었지만, 오늘날 기준으로는 이 정도도 대규모 공연장으로 분류될 것이다. (jc, 2026/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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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承喜先生自敍伝』(19361934920東京発表会デビューんだがこれは意外だった彼女はそれ以前にも朝鮮日本くの公演出演していたからだ

 

フランスデビュー(debut)ビリヤードで最初という意味のデビューテ(débuter)から比喩的派生した言葉、「公衆めてれたり社交界めて登場すること。 「デビューという日本語でしばしば初舞台または処女公演)」される

 

 

19349月以前にも崔承喜先生観客ったことがかった同年3には石井漠舞踊団北海道巡回公演512には東京春公演出演したこの崔承喜先生エレジーエヘヤ・ノアラ」、「希望いてなど自身創作物発表していた

 

さらにると1933にも崔承喜先生東京舞台なくとも4回以上出演していた193411日付毎日新報』(12のようにじた

 

「(日本ってから数日たないうちに昨年=1933開催された近代女性舞踊大会出場満場喝采さらに東京日刊新聞社主催舞踊祭にも出演して好評昨年10石井漠舞踊研究所発表会、「希望いて」(サラサテ)、「エヘヤ・ノアラというつの朝鮮情調しい舞踊発表舞踊評論家から絶対的歓迎けた昨年最後12時事新聞主催全日本一流舞踊家網羅した1933年舞踊祭参加朝鮮人として万章びた

 

 

京城での活動時期にも崔承喜先生193021京城公会堂自身京城公演開催さらに3月前19291256には讚映会主催した舞踊劇映画のイベントでインド哀愁曲」、「」、「セレナータ発表した彼女192912から19333まで京城5新作発表会4舞踊発表会開催したことがある

 

つまり崔承喜先生1926から1934までの8年間京城東京20回以上主要公演出演地方公演めると100回以上公演をこなしたベテランの舞踊家だったそれでも彼女自敍伝』(193619349東京発表会デビューんだのは意外おそらく東京たな出発宣言する決意強調するためだったと判断される

 

 

では崔承喜先生本当のデビューつまり生涯初舞台出演はいつどこでだったのだろうか1926627日付京城日報』(夕刊2のようにじた

 

石井漠弟子としてった淑明女学校出身崔承子=石井漠けた崔承喜芸名622東京邦楽座処女公演出演…(写真説明初舞台崔承子。」

 

崔承喜先生初舞台」、つまりデビュー1926622邦樂座公演だったというがこれは誤報だった彼女はそれより10日前大阪公会堂公演出演していたからだ

 

 

1926613日付大阪毎日新聞』(9崔承喜先生612大阪公会堂開催された石井漠舞踊団招待公演出演したことを写真掲載したこの公演彼女グロテスクという作品出演した1926610日付大阪朝日新聞』(9大阪公会堂公演直前崔承喜先生独占インタビューしのような記事じた

 

舞踊家石井漠兄妹京城興行中弟子入りした朝鮮さん崔承喜(十六)今度金蘭會女学校演藝會出演する石井一行はつて六月十二日大阪中央公會堂舞台れる

 

 

したがって崔承喜先生生涯初舞台1926612大阪公会堂であり、「グロテスク初作品(石井小浪作)であった新聞彼女年齢16じたが実際には14(+4京城東京舞踊留学めてからわずか2月半だった(jc, 2024/8/15; 2026/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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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선생은 <나의 자서전>(1936)에서 1934920일의 도쿄발표회를 데뷔라고 불렀는데, 이는 뜻밖이다. 최승희는 그 전에도 조선과 일본에서 많은 공연에 출연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어 데뷔(debut)’당구에서 첫 공을 치다라는 뜻의 데뷔테(débuter)에서 비유적으로 파생된 말인데, “공중 앞에 처음 나타나거나 사교계에 처음 등장하는 것을 가리킨다. 데뷔라는 말은 일본어에서 흔히 초무대(初舞臺)” 또는 처녀공연(處女公演)”으로 번역되었다.

 

 

19349월 이전에도 최승희 선생은 관객 앞에 선 적이 많다. 그해 3월 이시이 바쿠 무용단의 홋카이도 순회공연과 512일의 도쿄 봄 공연에 출연했다. 이때 최승희 선생은 <엘레지><에헤야 노아라>, <희망을 안고서> 등 자신의 창작품을 발표했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33년에도 최승희 선생은 도쿄 무대에 적어도 4회 이상 출연했다. 193411일자 <매일신보>(12)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일본에) 건너간 지 며칠 안 되어 작년(=1933) 봄에 열린 근대여류무용대회에 나가서 만장의 기염을 토하였었고 이어서 동경 일일신문사 주최의 무용제에도 출연하여 호평을 받았다. 다시 작년 10월 석정막무용연구소 발표회에서는 <희망을 안고서(사라사테곡)>, <에헤야 노아라>라는 두 가지 조선정조가 넘쳐흐르는 새로운 무용을 발표하여 무용비평가의 절대적 환영을 받았다. 작년에 마지막으로 12월 시사신문 주최의 전일본 일류무용가를 망라한 <1933년 무용제>에 참가하여 조선인으로서 만장의 기염을 토하였다.”

 

 

경성 활동시기에도 최승희 선생은 193021일 경성공회당에서 자신의 첫 경성 공연을 열었고, 그보다 3개월 전인 1929125-6일에는 찬영회(讚映會)가 주최한 <무용 극 영화의 밤> 행사에서 <인도 애상곡>, <금과 은>, <세레나테>를 발표했다. 그녀는 192912월부터 19333월까지 경성에서 5회의 신작발표회와 4회의 무용발표회를 개최한 바 있다.

 

, 최승희 선생은 1926년부터 1934년까지 8년 동안 경성과 도쿄에서 20차례 이상의 주요 공연에 출연했고, 지방공연까지 합치면 1백회 이상의 공연을 소화한 베테랑 무용가였다. 그런데도 그녀가 <나의 자서전>(1936)에서 19349월의 도쿄발표회를 데뷔라고 불렀던 것은 의외다. 아마도 도쿄에서 새 출발하겠다는 결의를 강조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최승희 선생의 진짜 데뷔, , 생애 최초의 무대 출연은 언제, 어디서였을까? 1926627일자 <경성일보>(석간2)>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이시이 바쿠의 제자로 들어간 숙명여학교 출신의 최승자(崔承子=이시이 바쿠가 지어준 최승희의 예명)(6)22일 도쿄 호가쿠자(邦樂座)의 처녀공연에 출연... (사진설명) 초무대에서 <물고기춤()>을 추는 최승자.”

 

최승희 선생의 초무대데뷔1926622일의 호가쿠자 공연이었다는 것인데, 이는 오보였다. 그녀는 그보다 열흘 앞서 오사카 공회당 공연에 출연했기 때문이다.

 

 

1926613일자 <오사카마이니치신문>(9)은 최승희 선생이 612일 오사카공회당에서 열린 이시이 바쿠 무용단 초청공연에 출연했음을 보여주는 사진을 게재했다. 이 공연에서 그녀는 <그로테스크>라는 작품에 출연했다. 1926610일자 <오사카아사히신문>(9)도 오사카공회당 공연 직전에 최승희 선생을 단독 인터뷰해서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보도했다.

 

무용가 이시이 바쿠 남매가 경성에서 흥행 중에 제자로 들어간 조선의 소녀 최승희(16)가 이번에 금란회여학교 연예회에 출연한다. 이시이 일행과 함께 612일 오사카 중앙공회당의 무대에 나타난다.”

 

 

따라서 최승희 선생의 생애 첫 무대는 1926612일의 오사카 공회당이었고, 첫 작품은 <그로테스크>였다. 기사는 그녀의 나이를 16세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만14(+4개월)였고, 경성을 떠나 도쿄에서 무용 유학을 시작한지 두 달 반 만이었다. (jc, 2024/8/15; 2026/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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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都府和束静岡県鹿児島県埼玉県狭山愛知県とともに日本茶主要生産地である静岡緑茶最大生産地であり鹿児島煎茶有名なように京都府和束高級抹茶生産中心である

 

 

中国団茶日本わったのは奈良時代710-794中国派遣された遣唐使によるものと推定されている平安時代7941185首都京都されたことで茶産業文化発展ほとんどの茶畑平城京平安京けられたその有名なのが和束宇治宇治最初茶店である通圓開店したのは平安時代末期であった

 

参考までに日本語京都一国首都一般名詞だったが平安京千年にわたり日本首都として機能している固有名詞である平安京次第使用されなくなり一般名詞である京都平安京固有名詞へと変化したこれは韓国語普通名詞だったソウル現在首都固有名詞になったこととているただしいがあるとすればソウルは普通名詞になる新羅首都慶州していた固有名詞ソラボルであったという

 

 

日本茶店である通圓京都駅から南東15キロれた宇治1160開店した今年867年目となる西洋では1635にトルコのガジアンテプGaziantep開店したタフミス・カフヴェシTahmis Kahvesiいコーヒーハウスとされており通圓歴史はそれより500年古

 

通圓宇治市宇治川宇治橋東側斜面位置している現在茶屋建物1672新築されたものでこれだけでも350歴史がある何度改築ても建物構造維持しているタフミス·コーヒーハウスにべると通圓歴史一世代ほど

 

 

通圓メニューは非常多様だが抹茶本流茶一杯値段がかなりかったと記憶しているが韓国人はむしろ抹茶よりも抹茶アイスクリームにかれる傾向がある

 

韓国人観光客宇治市れるのは通圓抹茶アイスクリームが理由でもあるがそこに尹東柱先生詩碑があるからでもある。 「記憶和解ともばれるこの詩碑2017尹東柱先生誕生100周年えて建立されたものである韓国日本からまれた2つのには尹東柱先生作品しい(새로운 길)韓国語日本語まれている

 

 

この詩碑尹東柱先生京都大同窓生たちとった最後送別会場所設置されたこの送別会流動株先生はアリランを友人たちと最後記念写真った

 

同窓生北島万里子さんのアルバムでつかったこの写真には木製である瀬吊背景7男子学生2女子学生姿っている詩碑てられた場所宇治川のもうつの白虹橋北側斜面ここでは記念写真瀬吊肉眼でもえる

 

 

はこの詩碑参拝しながらその日尹東柱先生送別した20日本人若者8そのそれぞれどのようにきていたのかを取材してみたいという衝動じたしかしその衝動はまだ実行されていない崔承喜取材われば可能かもしれないがそうではないかもしれない

 

京都から宇治方法京都駅から宇治駅まで奈良線電車ることだ所要時間30料金240基本料金

 

 

宇地驛から南東100メートルくと通圓通圓から宇治川北岸沿って南東2キロメートルむと瀬吊がありそこから300メートルくと白虹橋がある尹東柱先生詩碑白虹橋のすぐにある(jc, 2026/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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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부의 와즈카(和束)는 시즈오카현, 가고시마현, 사이타마현의 사야마(狭山), 아이치현과 함께 일본차의 주요 생산지다. 시즈오카가 녹차()의 최대 생산지이고 가고시마가 센차(煎茶)로 유명하듯이, 교토부의 와즈카는 고급 맛차(抹茶) 생산의 중심이다.

 

 

중국의 단차(團茶)가 일본에 전해진 것은 나라 시대(710-794)에 중국에 파견했던 견당사(遣唐使)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헤이안 시대(794-1185)에 수도가 교토로 옮겨지면서 차 산업과 문화가 발전했고 대부분의 차밭은 나라의 수도 헤이조쿄(平城京)와 헤이안의 수도 헤이안쿄(平安京) 사이에 조성됐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와즈카와 우지(宇治)이고, 우지에 최초의 찻집인 츠엔(通圓)이 개점한 것은 헤이안 시대의 말기였다.

 

참고로, 일본어에서 교토(京都)는 한 나라의 수도를 가리키는 일반 명사였으나, 헤이안쿄가 1천년 동안 일본의 수도 역할을 하는 동안, 고유명사인 헤이안쿄는 점점 덜 사용되고 일반명사인 교토가 헤이안쿄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바뀌었다. 이는 한국어에서 보통명사였던 서울이 오늘날의 수도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된 것과 유사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서울은 보통명사가 되기 전에 신라의 수도 경주를 가리키던 고유명사 서라벌이었다는 점이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찻집 츠엔은 교토역에서 남동쪽으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우지(宇治)에서 1160년에 개점됐다. 올해(2026)867년째이다. 서양에서는 1635년 터키의 가지안텝(Gaziantep)에 개점한 타흐미스 카흐베시(Tahmis Kahvesi)를 가장 오래된 커피 하우스로 꼽는데, 츠엔의 역사는 그보다 거의 5백년을 앞선다.

 

츠엔은 우지시(宇治市)를 관통하는 우지강(宇治川)의 다리 우지교(宇治橋) 동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의 찻집 건물은 1672년에 신축된 것이라고 하니 이것만도 역사가 350년이다. 여러 번의 개축을 거치면서도 원래의 건물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타흐미스 커피하우스에 비하면 츠엔의 역사가 한 세대쯤 짧다.

 

 

츠엔의 차 메뉴는 극히 다양하지만 맛차가 본류이다. 차 한 잔 값이 상당히 비쌌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한국인들은 정작 말차보다 말차 아이스크림에 더 매혹되는 경향이 있다.

 

한국인 방문객이 우지시를 많이 찾는 것은 츠엔의 맛차 아이스크림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여기에 윤동주 선생의 시비가 있기 때문이다. <기억과 화해의 비(記憶和解)>라고도 불리는 이 시비는 2017년 윤동주 선생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건립된 것이다. 한국과 일본에서 공수된 2개의 비석에는 윤동주 선생의 작품 <새로운 길>이 한국어와 일본어로 새겨져 있다.

 

 

이 시비는 윤동주 선생이 교토대의 동창생들과 가졌던 마지막 송별회 장소에 가깝게 세워졌다. 이 송별회에서 윤동주 선생은 아리랑을 노래했고, 친구들과 마지막 기념사진을 찍었다.

 

동창생인 기타지마 마리코(北島萬里子) 씨의 앨범에서 발견된 이 사진에는 목제 현수교인 아마가세 츠리바시(瀬吊)를 배경으로 7명의 남학생과 2명의 여학생의 모습이 담겨있다. 시비가 세워진 곳은 우지강의 또 다른 다리 호카바시(白虹橋)의 북쪽 기슭인데, 여기에서는 기념사진 속의 아마가세 현수교가 육안으로도 보인다.

 

 

나는 이 시비를 참배하면서, 그날 윤동주 선생을 송별해 준 20대의 일본인 젊은이 8명이 누구였으며, 이후 각자 어떻게 살았는지 취재해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아직 그 충동은 실천에 옮겨지지 못했다. 최승희 취재가 끝나면 가능할 지도 모를 일이기는 하다.

 

교토에서 우지까지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교토역에서 우지역까지 나라선(奈良線) 전철을 타는 것이다. 30분쯤 걸리고, 요금은 240엔으로 기본요금이다.

 

 

우지 역에서 남동쪽으로 1백미터만 걸으면 츠엔이고, 츠엔에서 우지강 북안을 따라 남동쪽으로 약 2킬로미터를 더 가면 아마가세 현수교, 그리고 거기서 동쪽으로 3백미터만 더 걸으면 호카교이다. 윤동주 선생의 시비는 호카교의 바로 옆에 있다. (jc, 2026/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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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承喜先生はコーヒーをしんでいたのだろうかコーヒーマニアだった安昌浩先生ほど愛好家だったかはからないが彼女がコーヒーを姿二枚写真っている一枚京釜線特急列車アカツキの食堂車もう一枚京城朝鮮ホテルの洋食店ファームコートのサンルームで撮影したものである

 

 

2写真1937219撮影された崔承喜先生220から21京城公演のため217日夜11東京出発218日夜95下関到着その1030出発する夜船対馬海峡った219日朝6釜山残橋駅りた崔承喜先生650京城行特急列車アカツキ午後25京城駅下車した

 

アカツキは釜山-京城6時間45走破したがこれは過去のヒカリとノゾミの走行時間10時間よりも3時間15分短縮されたもので30年前開通した京釜線初列車である隆熙30時間走ら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ことにべると4くなった

 

アカツキは当時最高速度豪華列車だったため運営費かった収支わせるために鉄道局大規模宣伝最高のスターである崔承喜先生写真モデルとして起用した

 

 

当日釜山残橋駅東来温泉ホテルアカツキの展望車とレストラン背景にした崔承喜先生写真撮影されその宿泊先であった朝鮮ホテルのファームコート・サンルームでも撮影われた釜山残橋駅とアカツキの展望車写真そしてサンルームのコーヒーの写真1937年版半島近影掲載され東莱温泉写真とアカツキ食堂車のコーヒーの写真1938年版掲載された

 

2写真崔承喜先生衣装帽子じで同時撮影された安勝子衣装同一であるのは両者撮影されたためであるまた2写真崔承喜先生たれたコーヒーカップの姿完全じだったのは鉄道局2つのレストランを直営していたからだ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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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5月末たちは金松さんの家族としてしい下宿生活まった金松さんの趙姓女さんは声楽家としてしい時折私たちにかせてくれ夕食わると大廳紅茶みながら音楽しみ文学についてっていた。」

 

 

尹東柱鄭炳昱下宿女主人趙姓女さんがれた紅茶んだという記録はあるが、「コーヒーてこない当時尹東柱4年生鄭炳昱2年生新村学校わると忠武路書店寬勳洞古本屋そして積善洞書店っていたという鄭炳昱文章137ページのように回想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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当時京城では1920年代後半から白林館』(1926カカデュ』(1928)、『メキシコ』(1929などのコーヒー専門店朝鮮人によって開業1930年代にはナクランパラ』(1931)、『ポンアミ』(1931)、『プラタナ』(1930年代初頭)、『ツバメ』(1933)、『ナクラン』(1934などの営業店繁盛知識人文化芸術家拠点となった女性給与いてるカフェとはなり喫茶店はコーヒーを販売することが特徴だ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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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方尹東柱先生より10年以上前京都大学留学した鄭芝溶先生コーヒーに関連する文章やエピソードはつかっていないコーヒーに作品カフェ・フランス1926異国情緒あふれるカフェをれた朝鮮人留学生たちの苦労れな生活かれ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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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芝溶留学時期1923-1929京都フランスという名前のカフェが実際存在したかどうかは確認されていないおそらく作品異国情緒むために鄭芝溶先生想像げたカフェの名前だったのだろ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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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れでも3がコーヒーとしずつっていたのは事実もしかしたらそれはけられないことだったのかもしれない1930年代朝鮮日本京城京都東京はコーヒーと喫茶店都市だったからだ(jc, 2026/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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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선생은 커피를 즐겼을까? 커피 매니아였다는 안창호 선생만큼 애호가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가 커피를 마시는 모습은 두 장의 사진으로 남아 있다. 한 장은 경부선 특급열차 아카츠키의 식당칸, 다른 한 장은 경성 조선호텔의 양식당 팜코트의 선룸에서 찍은 것이다.

 

 

두 사진은 1937219일에 촬영됐다. 최승희 선생은 220-21일의 경성 공연을 위해 217일 밤 11시에 도쿄를 출발, 218일 밤 95분에 시모노세키에 도착했고, 그날 밤 1030분에 출발하는 밤배로 대한해협을 건넜다. 219일 아침 6시에 부산 잔교역에 내린 최승희 선생은 아침 650분 경성행 특급열차 아카츠키로 갈아타고 오후 25분 경성역에 내렸다.

 

아카츠키는 부산-경성을 6시간 45분에 주파했는데, 이는 과거의 히카리와 노조미의 주행시간 10시간보다 3시간15분을 단축한 것이고, 30년 전에 개통된 경부선의 첫 열차 융희(隆熙)30시간을 달려야 했던 것에 비하면 4배나 빨라진 것이었다.

 

아카츠키는 당시의 최고속 호화 열차였으므로 운영비가 비쌌다. 수지를 맞추기 위해 철도국은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고, 최고의 스타 최승희 선생을 사진 모델로 섭외했던 것이다.

 

 

이날 부산의 잔교역, 동래의 온천호텔, 아카츠키의 전망차와 식당차를 배경으로 한 최승희 선생의 사진이 촬영됐고, 숙소였던 조선호텔의 팜코트 선룸에서도 촬영이 이뤄졌다. 부산 잔교역과 전망차의 사진, 그리고 선룸의 커피 사진은 1937년판 <반도의 근영(半島近影)>에 실렸고, 동래 온천의 사진과 아카츠키 식당차의 커피 사진은 같은 책의 1938년판에 실렸다.

 

두 사진에서 최승희 선생의 의상과 모자가 같은 것은 이 두 사진이 같은 날 촬영되었기 때문이다. 또 두 사진에서 최승희 선생의 손에 들린 커피잔의 모습이 완전히 같은 것은 철도국이 두 식당을 직영했기 때문이었다.

 

 

윤동주 선생이 커피를 즐겼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용정에서든, 경성에서든, 도쿄나 교토에서든, 유동주 선생이 커피를 마셨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발견된 바 없다. 다만 외솔회가 펴낸 <나라사랑>(19766, 23)에 실린 정병욱 선생의 회고록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132-139)>에는 두 사람이 누상동 9번지의 극작가 김송(金松, 1909-1988) 씨의 집에 하숙하던 시절의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19415월 그믐께 우리는 김송 씨의 식구로 끼어들어 새로운 하숙 생활이 시작되었다. 김 송 씨의 부인 조성녀(趙姓女) 여사는 성악가로서 아름다운 목소리를 우리에게 가끔 들려 주셨고, 저녁 식사가 끝나면 대청마루에서 홍차를 마시며 음악을 즐기고, 문학을 담론하기도 했었다.”

 

 

윤동주와 정병욱이 하숙집 여주인 조성녀 씨가 끓여 내온 홍차를 마셨다는 기록은 있지만 커피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당시 윤동주는 4학년, 정병욱은 2학년생이었는데 신촌에서 학교가 끝나면 충무로의 책방들, 관훈동의 헌책방, 그리고 적선동의 서점을 순례하곤 했다고 한다. 정병욱은 같은 글(137)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하학 후에는 기차편을 이용했었고, 한국은행 앞까지 전차로 들어와 충무로 책방들을 순방하였다. 지성당, 일한서방, 마루젠, 군서당 등, 신간서점과 고서점을 돌고 나면 '후유노야도'(宿)'남풍장'(南風莊)이란 음악다방에 들러 음악을 즐기면서 우선 새로 산 책을 들춰보기도 했다.

 

오는 길에 '명치좌'(明治座; 지금의 명동예술극장)에 재미있는 프로가 있으면 영화를 보기도 했었다. 극장에 들르지 않으면 명동에서 도보로 을지로를 거쳐 청계천을 건너서 관훈동 헌책방을 다시 순례한다. 거기서 또 걸어서 적선동 유길서점(有吉書店)에 들러 서가를 훑고 나면 거리에는 전기불이 켜져 있을 때가 된다.”

 

윤동주와 정병욱은 서점 순례 중에 음악다방에 들러 음악을 즐기면서 새로 산 책을 살펴보았다고 했다. 음악다방이라면 홍차도 팔았겠지만, 커피도 마실 수 있는 곳이 아니었을까? 필자도 1980년대 중반에 종로의 <르네상스>나 명동의 <필하모니>에서 음악을 신청해서 듣곤 했다. 이 음악다방들이 입장료를 받고 제공하던 음료가 커피였지만, 그보다 반세기 전인 1930년대 명동의 음악다방 <후유노야도><남풍장>에서도 커피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경성에서는 1920년대 말부터 <백림관>(1926), <카카듀(1928)>, <멕시코(1929)> 등의 커피 전문점이 조선인에 의해 개업하기 시작해, 1930년대에는 <낙랑파라>(1931), <뽄아미>(1931), <푸라타나>(1930년대초), <제비>(1933), <낙랑>(1934) 등의 끽다점들이 성업하면서 지식인과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여급을 두고 술을 파는 카페와는 달리 끽다점들은 커피를 판매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1930년대에 커피가 유행하기 시작한 이상, 음악다방 <후유노야도><남풍장>에서도 커피를 판매했을 것이다. 다만, <후유노야도><남풍장>이 커피를 제공했고, 윤동주, 정병욱 선생이 음악다방을 자주 이용했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실제로 커피를 마셨는지는 단언할 수가 없다.

 

 

한편, 윤동주 선생보다 10여년 앞서 교토 대학에서 유학한 정지용 선생도 커피와 연관된 글이나 에피소드는 발견되지 않는다. 커피에 가장 근접한 작품이 <카페 프란스>(1926)인데, 이국적인 카페를 찾은 조선인 유학생들의 힘들고 안타까운 삶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특히 주인공은 자조적인 목소리로 나는 자작의 아들도 아무 것도 아니, “나라도 집도 없다고 한탄하고, 투사가 되지 못한 채 공부만 해야 하는 학생으로서 남달리 손이 희어서 슬프, “대리석 테이블에 닿는 내 뺨이 슬프다고, 술 취해 넋두리하는 식민지 지식인일 뿐이었다.

 

하지만 <카페 프란스>에서도 커피와의 연관성은 찾기 어렵다. 1920년대의 일본의 카페는 커피 가게라기보다는 여급이 있는 술집이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도 여급이 등장하는데 경사 커텐 밑에서졸고 있는 울금향 아가씨가 바로 그녀이다. 울금향(鬱金香)이란 튤립을 가리키는 한자이다.

 

 

지금도 교토에 가면 시조(四条) 거리에 <살롱 프랑소와(Salon de the Francois)>라는 카페가 있다. 커피와 홍차, 패스튜리와 케익을 파는 곳인데, 외부 간판에는 <킷사텐(喫茶店)>이라고도 쓰여 있다.

 

정지용 선생을 찾아 교토를 방문하는 한국인들 중에는 이곳을 <카페 프란스>의 배경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살롱 프랑소와>가 개업한 것은 1934년이고, 정지용 선생의 <카페 프란스>1925년에 일본어로, 1926년에 조선어로 발표되었다. 더구나 프랑소와(François)’는 프란체스코 또는 프란시스라는 사람 이름의 프랑스어 표기이고 나라 이름 프랑스(France)’와는 다른 말이다.

 

정지용의 유학시기(19233-1929)의 교토에 프랑스라는 상호를 가진 카페가 실제로 존재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아마도 작품에 이국적인 분위기를 불어넣기 위해 정지용 선생이 상상으로 지어낸 카페 이름이었을 것이다.

 

 

담배에 대한 애착이 깊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던 최승희, 윤동주, 정지용 선생이 커피와는 그다지 인연이 깊지 않았던 것 같다. 커피를 마셨을 가능성은 있지만 실제로 커피를 마셨거나, 즐겨 마셨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윤동주 선생은 음악다방에서 음악을 듣고 책을 읽으면서 커피를 마셨을 수 있지만 실제로 커피를 마셨다는 기록은 없다. 정지용 선생도 이국적 카페의 조선인 유학생들 이야기를 시로 썼지만, 그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는 이야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최승희 선생은 두 장의 커피 사진을 남겼지만, 그것은 새로 개통한 열차 아카츠키의 홍보를 위한 설정 샷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사람이 커피와 조금씩 인연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다. 어쩌면 그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1930년대의 조선과 일본, 특히 경성과 교토와 도쿄는 커피와 깃사텐의 도시들이었기 때문이다. (jc, 2026/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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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2026民族相互扶助運動我相運新韓銀行北韓研究会新北研年次文化紀行3セミナーに参加いよいよ出発っていることを実感したすべての旅行がそうであるように出発数日後ると興奮まるかがっていたように準備からがまりではないか

 

すでに朴起燦(パク・ギチャン)先生主導2準備セミナーがわれた尹東柱先生するまりだったと記憶している参加したかったが突然発症した腹膜炎手術入院家療後続精密検査1月以上かかったため出席できなかった尹東柱先生についての知識不足していたため期待かったが最初2つのセミナーに参加できなかったのが残念だった

 

 

今回文化紀行での役割訪問先である関西地域崔承喜先生足跡紹介現地では関連する史跡について適切解説することだしたがって今回3セミナーでは3映像解説そして質疑応答じて崔承喜先生朝鮮舞踊宝塚朝鮮人追悼碑について簡潔紹介した

 

我相運新北研昨年京都中心尹東柱文化紀行実施したことがある同行はできなかったが企画段階では準備手伝った記憶がある今年昨年よりも充実した面白文化紀行になればいいとっておりそのために自分担当する分野準備万全している

 

セミナーがわった当然言したことがありそれが夕食理由でもあったとパジョンで食事をしながらいろいろな会話わしているとひとりで突拍子もない疑問かんだ尹東柱先生はタバコをしんでいたのだろうかこのような疑問突然浮かんだのは個人的理由がある

 

 

京都同志社大学のキャンパスにけられた鄭芝溶尹東柱先生詩碑何度参拝した最後訪問20254だったその鄭芝溶先生詩碑韓国からってきたタバコのけて一本をつけてげたそれは鄭芝溶先生生前タバコを非常んでいたという記事んだ記憶ったから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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らしいソウルのでタバコをっていた回想詩情っている東京でソウルをかしみそのおしいとったことから尹東柱先生東京があまりにもやかだったのだろう同年10京都同志社大学英文学科転校した

 

 

崔承喜先生もタバコをっていた東京発行されていた英字新聞The Japan Advertiser1935210日号9にはのような記事掲載されており偶然にも崔承喜先生のタバコの時期鄭芝溶尹東柱先生ている

 

今年22崔承喜くてスリムだが食事療法体重管理には使っていない彼女韓国料理日本料理西洋料理のすべてをその三種類料理をたくさんべるそうだ彼女はおめないのでまないが々タバコをうこともある。」

 

 

崔承喜1912-1969先生鄭芝溶1902-1950先生より10歳年下尹東柱1917-1945先生より5歳年上である年齢差のある3全員2122でタバコをっていたなんてなんだか偶然のようにじる

 

崔承喜先生はタバコを作品素材として使用したことはないまた公開ではタバコをわず振付編曲などの創作活動にのみ喫煙していたとされている

 

はヨーロッパ取材中崔承喜先生がタバコをいながら満面みをかべている写真発見したパリのオペラハウスくのカフェでのことだったおそらく朝鮮日本とはパリには使がいないという解放感からだったのだろうか

 

 

崔承喜先生墓所北朝鮮平壌愛国烈士陵けられているだけで記念館追悼碑存在しないだから彼女にはをつけたタバコを一服する場所がないということだ残念なことだ

 

今回文化紀行京都くなら同志社大学のキャンパスに設置された鄭芝溶先生尹東柱先生詩碑韓国のタバコを一本ずつしておいてもらおうと(jc, 2026/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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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18일 역사 기행을 위한 세 번째 준비 세미나에 참석했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우서운)과 신한은행북한연구회(신북연)의 연례 역사 기행인데 드디어 출발이 임박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여행이 그렇지만 출발이 며칠 앞으로 다가오면 가볍게 흥분이 시작된다.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준비부터가 여행의 시작이 아니던가.

 

박기찬 선생의 주도로 이미 2번의 준비 세미나가 진행됐다. 윤동주 선생에 대한 모임이었다고 기억한다. 필자도 참가하려고 했으나, 복막염 수술과 병원과 집에서의 가료, 그리고 후속 정밀검사로 약 한 달이 소요되는 바람에 참석하지 못했다. 윤동주 선생에 대한 지식이 고팠던 터라 기대가 높았는데, 첫 두 세미나에 참석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이번 역사 기행에서 내 역할은 방문지인 간사이 지역에 남은 최승희 선생의 흔적을 소개하고, 현지에 가서도 관련 사적지에 대해 적절하게 해설하는 것이다. 따라서 3차 세미나에서는 3개의 영상과 짧은 해설, 그리고 질의응답을 통해 최승희 선생의 조선무용과 다카라즈카의 조선인 추도비를 간략히 소개했다.

 

우서운과 신북연은 작년에도 교토를 중심으로 윤동주 역사기행을 단행한 바 있다. 동행할 수는 없었지만, 기획 단계에서는 나도 약간의 준비를 거들었던 기억이다. 올해는 최승희 선생의 사적도 포함되었으므로, 작년보다 조금 더 내실도 있고 재미도 있는 역사기행이 되었으면 좋겠고, 이를 위해 내가 맡은 부문에 대한 준비에 만전을 기하는 중이다.

 

세미나가 끝났는데도 당연히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았고, 그것은 저녁 회식의 이유이기도 했다. 수육과 파전으로 식사도 하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혼자서 엉뚱한 의문을 떠올렸다. 윤동주 선생은 담배를 피셨던가? 이런 의문이 불쑥 떠올랐던 데에는 개인적인 이유가 있다.

 

 

필자도 교토의 도시샤대학 교정에 마련된 정지용, 윤동주 선생의 시비를 여러 번 참배했다. 마지막 방문은 20254월이었다. 그때 나는 정지용 선생의 시비 앞에 한국에서 사간 담배 한 갑을 뜯고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여 올려드렸었다. 정지용 선생이 생전에 담배를 즐기셨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한국 담배 맛 좀 보시라는 뜻이었다.

 

당시에는 윤동주 선생이 담배를 하셨는지 몰랐기 때문에 그 앞에는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라이터와 함께 놓아드렸다. 피고 싶으시면 직접 불붙여 피시라는 뜻이었다.

 

정지용 선생은 담배에 대한 시를 남긴 적도 있다. <다시 해협>이라는 시에는 맨 마지막에 스물한 살 적 첫 항로에 연애보다 담배를 먼저 배웠다는 싯귀가 등장한다. 스물 한 살이 되도록 연애를 안 해 보셨다니, 정지용 선생도 늦깎이였던 셈이다. 게다가 담배도 스물한 살에 배웠다니 그 시대 사람치고 너무 늦게 배운 것이 아닌가?

 

 

1935<조선문단> 8월호에 발표된 이 시는 그가 일본 유학을 위해 처음 배를 타고 대한해협을 건넜을 때의 감상을 회상하여 쓴 시이다. 유학을 가는 자신의 모습을 희망에 부푼 청운의 꿈이 아니라 처량하구나라든가 무서워서 운다는 시어로 표현한 것이 안타깝다. 그게 비운의 시대가 감수성 예민한 천재에게 덮어씌운 운명이었을 것이다.

 

윤동주 선생도 스물한 살에 담배를 처음 피웠다. 그의 시 <울적(鬱寂, 1937)>에 그렇게 나온다. 하도 울적해서 처음으로 담배를 피워보았더니 목안이 간질간질하다는 24행짜리 간단한 시다. 1937년이면 윤동주 선생이 북간도에서 명동중학교 졸업반이었다. 졸업하면 뭐하나, 고민도 많았겠는데, 의대를 가네 마네 하는 문제로 부친과 대립하고 있었다.

 

 

고민과 담배 끝에 윤동주 선생은 1938년부터 연희전문 영문과에 입학했다. 아들과 손자의 대립을 할아버지가 중재해 주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윤동주 선생은 중학교(지금의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진로문제로 고민하다가 담배를 시작한 셈이다.

 

윤동주 선생의 담배시가 하나 더 있다. <사랑스런 추억>이다. 이 시는 1942513일에 쓴 것이다. 첫 유학이 19424월 도쿄의 릿쿄대학 입학이었으니까 <사랑스런 추억>은 도쿄 시절의 시이다.

 

<사랑스런 추억>은 서울의 어떤 기차 정거장에서 담배를 피우던 상념을 노래했다. 도쿄에서 서울을 그리워하면서 그 추억이 사랑스럽다고 한 것을 보면 윤동주 선생한테는 도쿄가 너무 번잡스러웠나 보다. 그는 그해 10월에 교토의 도시샤대학 영문과로 학교를 옮겼다.

 

최승희(1912-1969) 선생도 담배를 피웠다. 도쿄에서 발행되던 영자신문 <The Japan Advertiser> 1935210일자(9)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는데, 우연히도 최승희 선생의 담배 시기도 정지용, 윤동주 선생과 비슷하다.

 

올해 22세인 최승희는 키가 크고 날씬하지만, 식이요법이나 체중조절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녀는 한국음식과 일본음식과 서양음식을 다 같이 좋아하며 그 세 종류의 음식을 모두 많이 먹는다고 한다. 그녀는 술을 못 마시기 때문에 마시지는 않지만 이따금씩 담배는 더러 피운다.”

 

 

최승희(1912-1969) 선생은 정지용(1902-1950) 선생보다 10세 연하이고, 윤동주(1917-1945) 선생보다는 5세 연상이다. 연배 차이가 있는 세 사람이 모두 21, 22세에 담배를 피웠다니까 뭔가 우연처럼 느껴진다.

 

최승희 선생은 담배를 작품의 주제로 사용한 적은 없다. 또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안무와 편곡 등의 창작활동 때에만 피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필자는 유럽 취재 중에 최승희 선생이 담배를 피우며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을 발굴했다. 파리의 오페라 하우스 인근의 한 카페에서 남편과 함께 차를 마시는 모습이었다. 최승희 선생의 오른쪽에 뒷통수만 보이는 분이 안막 선생이다. 아마도 조선이나 일본에서와는 달리 파리에는 눈치 볼 사람이 없다는 해방감 때문이었을까?

 

 

최승희 선생의 묘소는 북한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마련되어 있을 뿐, 그밖에는 다른 곳에 기념관이나 추모비가 없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불붙인 담배 한 대 놓아드릴 곳이 없는 셈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번 역사기행으로 다시 교토에 가면, 정지용 선생과 윤동주 선생의 시비 앞에 또다시 한국 담배를 놓아드리고 올 계획이다. 이번에는 윤동주 선생의 담배에도 불을 붙여 드려야겠다. (jc, 2026/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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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5月現在アジアの3憲法改正みているかすでに完了しています朝鮮はすでに憲法改正しており韓国日本はそれをみています

 

 

韓国憲法改正1987年体制をさらに発展させるための4つの趣旨民主党政府推進民主市民支持していますが国民保守勢力反対していますよねしかし反対名分いか意味がないため韓国憲法数年内改正される見込みです

 

 

日本憲法改正第二次大戦後制定された平和憲法放棄戦争核武装可能ないわゆる正常国家目指自民党推進していますが野党市民反対しています53日本憲法には憲法改正戦争反対のデモが日本主要大都市展開されました日本市民社会がこれほどきくいたのは1968日本全共闘時代以来初めてのことのようですしかし自民党議会内多数高市首相目標確固たるものであるため市民反対みずにでも憲法改正められるとられています

 

 

朝鮮憲法改正はすでに完了したようです詳細はよくかりませんが全体的朝鮮単一国家であれ連邦制であれ朝鮮半島国家的統一あるいは平和的民族統一放棄したように見受けられますそれが今回憲法改正究極的目的のようです

 

つのいは過去数年間にわたり韓国敵対的ってきた姿勢撤回されたようにえることです朝鮮立場からすれば韓国中国やロシア日本やアメリカと同様周辺国つにぎないとえるでしょうそれはそれほどくありません関係改善余地まれたからです

 

 

統一可能性われたことは朝鮮だけの責任ではありません韓国ではすでに21世紀世代統一関心がなく高齢化世代平和統一吸収統一ってってきました韓国人口43平和統一関心がありません投票権世代高齢世代死亡率いため韓国人口学的統一時期をすでにしているとえますこのような韓国状況把握した朝鮮指導者たちも統一可能性はないと判断今回憲法改正にその反映させたと推測されますしたがって分断二国家体制まったのは韓国主権者である国民朝鮮最高決定権者である金正恩主席共同責任であるとえます

 

 

今回朝鮮憲法改正重要なのは、「公民同胞明確区別したことです公民とは居住地関係なく朝鮮国籍する同胞世界各地韓民族構成員むが外国籍する概念として理解されます同胞定義するには家系血統といった客観的条件えて本人らを韓民族認識しているかといった主観的条件考慮されるでしょうこれは朝鮮立法機関決定すべき問題です

 

 

とにかく敵対国条項削除されたことで舞踊靴活動たな可能性まれるでしょうが将来変化きないと判断しますまた舞踊靴朝鮮同胞在日同胞だけでなくロシアの高麗人同胞在中朝鮮族同胞とも交流協力しているため今回朝鮮憲法改正一喜一憂するのではなく状況じた柔軟姿勢められるとえます

 

 

舞踊靴キャンペーンは舞踊靴核心プロジェクトのつであったため今年11キャンペーンが中止されたことは残念ですもし2月待っていれば金正恩主席敵対国撤回のニュースをっていたでしょうしキャンペーンが中止されなかったかもしれませんねしかしすでにったことです今年舞踊神キャンペーンが再開される可能性いですが朝鮮学校姉妹団体であるチームアイ立場わり舞踊神キャンペーンが要請されれば来年再来年にでも再開されるとえています

 

 

二国家体制しのつかないほど確固たるものとなった以上韓国市民もそれに見合った認識態度える必要があります韓民族三国時代500高麗渤海南北国時代250にわたって経験した歴史的経験があります統一われるたびに領土縮小してきましたが次回統一では民族領土利益拡大する方向むといですね(jc, 2026/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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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5월 현재 동아시아의 3국이 헌법 개정을 시도 중이거나 완료했습니다. 조선은 이미 헌법을 개정했고, 한국과 일본은 시도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헌법 개정은 1987년 체제를 더 발전시키기 위한 4가지 취지로 민주당과 정부가 추진하고, 민주 시민들이 지지하지만, 국힘을 포함한 수구세력이 반대하고 있죠? 그러나 반대의 명분이 약하거나 별 의미가 없기 때문에 한국의 헌법은 수년 내에 개정될 전망입니다.

 

 

일본의 헌법 개정은 이차대전 후에 제정한 평화 헌법을 포기하고 전쟁과 핵무장이 가능한 이른바 정상국가를 지향하는 자민당이 추진하고 있지만, 야당과 시민들이 반대하고 있습니다. 지난 53일 일본의 헌법의 날에는 개헌과 전쟁 반대의 시위가 일본 주요 대도시에서 전개됐습니다. 일본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이렇게 크게 울린 것은 1968년 일본의 전공투 시기 이래로 처음인 듯합니다. 그러나 자민당이 의회내 다수이고 다카이치 총리의 목표가 확고하기 때문에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개헌은 진행될 것이라고 전망됩니다.

 

 

조선의 개헌은 이미 완료된 것으로 보입니다. 세부사항은 잘 모르겠지만, 전체적으로 조선은 단일국가이든 연방제이든 한반도의 국가적 통일, 혹은 평화적 민족통일을 포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게 이번 개헌의 궁극 목적인 것 같고요.

 

한 가지 다행이라면 한국을 적대적으로 취급해 온 지난 수년간의 태도가 철회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조선의 입장에서는 한국도 중국이나 러시아, 일본이나 미국처럼 그냥 주변국의 하나인 셈이지요. 그것은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관계 개선의 여지가 생긴 것이니까요.

 

 

통일 가능성이 사라진 것이 조선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한국에서는 이미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젊은 세대가 통일에 관심이 없었고, 노령화 세대는 평화통일과 흡수통일로 치고받고 싸웠습니다. 한국 인구의 4분의3은 이미 평화 통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투표권을 가진 젊은 세대가 늘고 노령세대는 사망률이 높기 때문에 한국은 이미 인구학적으로 통일의 시기를 놓친 것이지요. 이같은 한국 상황을 파악한 조선의 지도자들도 통일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 이번 개헌에서 그 점을 반영한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따라서 분단과 2국가 체제가 굳어진 것은 한국의 주권자인 국민과 조선의 최고결정권자인 김정은 주석의 공동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조선의 개헌에서 중요한 것은 공민동포를 명확히 구별한 것입니다. 공민이란 거주지에 상관없이 조선 국적을 가진 사람이고, 동포는 세계 각지의 한민족 구성원을 포함하되 외국 국적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이해됩니다. 동포를 규정하는 데에는 가계와 혈통 등의 객관적 조건과 함께 스스로 한민족이라고 여기는지와 같은 주관적 조건도 고려되겠는데, 그것은 조선의 입법기관이 결정할 문제이겠습니다.

 

 

암튼 적대국조항이 삭제된 만큼 <무용신> 활동에 새로운 가능성이 생기겠지만, 가까운 장래에 변화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무용신>은 조선동포와 재일동포뿐 아니라 재러 고려인 동포와 재중 조선족 동포와도 교류, 협력하기 때문에, 이번 조선의 개헌에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는 유연한 사고와 태도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용신 캠페인은 <무용신>의 핵심 프로젝트의 하나였기 때문에, 올해의 11차 캠페인이 취소된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두 달만 기다렸다면 김정은 주석의 적대국 배제소식을 접했을 것이고, 캠페인이 취소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올해는 무용신 캠페인이 재개될 가능성이 없겠습니다만, 조선학교 혹은 자매단체인 <팀아이>의 입장이 바뀌고, 무용신 캠페인이 요청된다면 내년이나 내후년에라도 재개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2국가 체제가 돌이킬 수 없이 확고해진 만큼, 한국 시민들도 그에 맞은 인식과 태도를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한민족은 삼국시대를 5백년, 고려와 발해의 남북국시대를 250년 동안 겪었던 역사적 경험이 있습니다. 통일이 될 때마다 영토가 줄어들곤 했지만, 다음번 통일 때에는 민족의 영토와 이해가 확대되는 쪽으로 진행되면 좋겠군요. (jc, 2026/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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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日土曜日江陵ってきましたつの目的がありました(1) 江陵市長候補として民主党予備選通過した金重男先生選挙対策本部出発式にも出席(2) 江陵同僚たちと今年舞踊靴する事業決定するためでした

 

 

金重男先生出発式連合選對委発足として当日午後3江陵端午祭伝授教育館われましたが民主党行事ということで全体青色まっていました当日市長候補出征式だけでなく江原道議員江陵市議員候補者決定出征式いました

 

予選通過した20名余りの候補者がステージに賀客くお辞儀をした家族知人同僚がステージにがり候補者しいスニーカーをかせてくれました青色しいスニーカーです選挙日まであるいは当選後一生懸命走けるという意味だそうです

 

 

金重男先生ってからまだ34しかっていませんが一緒仕事をする信頼かちったです江陵市公務員として勤務した公務員労働組合結成初代全国委員長めた明確目標とそれを達成する根気同時した経歴です

 

その10年間市長選国会議員選落選しながらも意志げず市長選挑戦されたことからもめない頑固さが十分想像できます

 

 

一部では勝利楽観視するもあります先月世論調査現職市長15でリードしたためですしかしまだ楽観するのはいとえていますその2月前のことで選挙1月前先週末調査では78縮小していました

 

江陵大邱慶北地域よりも保守的投票傾向すため最後まで油断できませんこれは候補者選挙対策委員会状況をよりよく認識えるとじていますが

 

 

江陵民主化たちもそれぞれできることで支援できればといますそのでも重要なのは江陵家族親戚知人連絡投票びかけると同時金重男先生への支持えることですくの関心とご協力をおげます

 

 

(1) 姜承昊先生趙殷慧先生一緒にサゴルラーメンで夕食りながら江陵今年計画をしっかりといました今年在日朝鮮学校へのサッカーボール支援事業継続するとともに、「江陵フォーラム代表であり金成洙記念事業会理事でもある姜承昊先生がチームとして主導してくださいます

 

(2) 2025には日韓同胞親善サッカー大会実現しませんでしたが今年事前日本江陵のイベント日程確認実現できるよう努力するとおっしゃっていますおそら民主党のサッカークラブ中心訪問団結成されるとわれますがチームはクラブめられるとえています趙殷慧先生當分間連絡業務担当されることになりそうです

 

 

(3) 27回江陵人権映画祭風物団ドンドンと仲間たち祝賀公演再提案されました。 『ドンドン若手演奏者10名以内でご参加いただければいですまた、『ドンドンと仲間たち祝賀公演参加費舞踊靴支援できることを期待していますこの提案実現すれば募金活動担当しようとえています

 

(4) 今年8月末宝塚訪問団江陵中心編成される予定その業務趙恩恵先生がチームとして主導されます時期規模各細部行事趙殷慧先生江陵関係者宝塚姉妹団体協議決定されます

 

 

(5) さらに金中南先生市長選勝利した場合就任71宝塚市役所市議会そして兵庫県議会訪問することがましいという提案されていますこの計画実現すれば市民団体だけでなく両国地域政治家交流協力ける機会になるとえます

 

以上江陵訪問報告わります(jc, 202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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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2일 토요일 당일로 강릉에 다녀왔습니다. 두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강릉시장 후보로 민주당 경선을 통과하신 김중남 선생의 선대위 출정식에도 참석하고, 강릉 식구들과 올해의 <무용신> 관련 행사를 확정하기 위해서였죠.

 

 

김중남 선생의 출정식은 연합선대위의 출범은 이날 오후3시 강릉단오제 전수교육관에서 열렸는데, 민주당의 행사인 만큼 온통 푸른색이더군요. 이날은 시장후보의 출정식이었을 뿐 아니라 강원도의원과 강릉시의원 후보들도 확정되어서 함께 출정식을 가졌습니다.

 

경선을 통과한 20여명의 후보들이 단상에 늘어서서 참석자들에게 큰 절을 올린 뒤에는, 가족, 지인, 동료들이 단상에 올라가서 후보들에게 새 운동화를 신겨주더군요. 파란색 새 운동화입니다. 선거일인 63일까지, 혹은 당선된 이후에도 열심히 잘 달리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제가 김중남 선생과는 알게 된 것이 3-4년 밖에 되지 않지만, 함께 일하면서 진득한 믿음을 나눈 분입니다. 강릉시 공무원을 근무하다가 공무원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그 초대 전국위원장을 역임한 분인데, 확실한 목표와 그것을 달성하는 끈기를 동시에 보여주신 경력입니다.

 

이후 10년 동안 시장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고, 재차 시장 선거에 도전하신 것을 보아도 포기를 모르는 그의 고집스러움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그의 승리를 낙관하기도 합니다. 지난달의 여론조사에서 현직시장과 15%의 격차로 앞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 낙관하기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그 격차는 두 달 전의 일이고, 선거를 한 달 앞둔 지난 주말의 조사에서는 그 격차가 7-8%로 줄어들었습니다.

 

강릉이 대구, 경북지역 보다 더 보수적인 투표성향을 보이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습니다. 이는 상황은 후보와 선대위가 더 잘 인식하고 대비할 것이라고 믿습니다만,

 

 

강릉의 민주화를 바라는 우리도 각자 할 수 있는 일로 도와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강릉의 가족이나 친척, 지인들에게 연락해서 투표 독려와 함께 김중남 선생 지지를 호소하는 것입니다. 많은 관심과 협력을 부탁드립니다.

 

 

(1) 강승호, 조은혜 선생과 함께 사골라면으로 저녁식사를 하면서, 강릉의 올해 계획을 잘 청취했습니다. 올해도 재일조선학교에 축구공 지원 사업을 계속하신다고 하며, <강릉포럼>의 대표이시자 <김성수기념사업회>의 이사이신 강승호 선생께서 팀장으로 주도해 주실 것입니다.

 

(2) 작년(2025)에는 한일동포 친선축구대회가 실현되지 못했지만, 올해는 미리미리 일본과 강릉의 행사 일정을 확인해서 꼭 성사되도록 노력하겠다고 하십니다. 아마도 민주당 축구단을 중심으로 일본 방문단이 결성될 듯합니다만, 팀장은 축구단에서 정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강릉과 간사이의 연결 업무는 조은혜 선생이 담당하시게 될 듯합니다.

 

 

(3) 27회 강릉인권영화제에 풍물패 <동동과 친구들>의 축하공연이 재차 제안됐습니다. <동동>과 젊은 연주자들을 포함해 10명 이내로 참가하시면 좋겠고, <동동과 친구들>의 축하공연 참가비용은 <무용신>이 지원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제안이 성사되면 모금 행사는 제가 담당하려고 합니다.

 

(4) 올해 8월말의 다카라즈카 방문단은 강릉 중심으로 조직될 예정이고, 그 일은 조은혜 선생이 팀장으로 주도하시게 됩니다. 시기와 규모, 각 세부 행사는 조은혜 선생께서 강릉 식구들과 다카라즈카의 자매단체들과 협의해서 결정하시게 될 것입니다.

 

 

(5) 그밖에도 김중남 선생이 시장 선거에서 승리하실 경우 시장 취임(71) 전에 다카라즈카 시청과 시의회, 그리고 효고현 의회를 답방하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도 나왔습니다. 상황을 보아 추진될 수 있으면 시민단체뿐 아니라 양국의 지역정치인들도 교류와 협력이 이어질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상 강릉방문 보고를 마칩니다. (jc, 202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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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年2026来年2027にはこれまでの舞踊靴活動する記録出版する予定です2017まった崔承喜研究2019まった舞踊靴キャンペーン2020まった宝塚朝鮮人追悼碑プロジェクト2024まった江陵人権映画祭後援2025まったドンドン西宮風物交流会などにする記録公式すためです

 

舞踊靴短期間でかなりの活動推進しましたがそれを記録すことも重要仕事だとえています記憶時間つとむこともあるからです記録としてせばかが参考にでき後日より活動展開できるでしょう

 

 

記録重要であることは強調する必要すらありません宝塚朝鮮人追悼碑がその典型的です1914宝塚くなった江陵出身朝鮮人労働者金炳順氏80年間外部ら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でした1985まった鄭鴻永近藤富男先生調査研究1997歌劇のもうつの歴史宝塚朝鮮人というとして出版されその時初めて金炳順氏をはじめとする朝鮮人労働者5犠牲日本られるようになり2020には追悼碑というもうつの記録建立されました

 

鄭鴻永先生著書近藤富男先生いた追悼碑きな反響金炳順氏故郷である江陵にもら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江陵市追悼碑設立者感謝状贈呈、「舞踊靴会員をはじめくの韓国人毎年キリハタの追悼碑とタマセの参拝墓れていますこれは出版された書籍建立された追悼碑のおかげできたことです

 

 

鄭鴻永, 近藤富男先生足跡をたどるとして同様舞踊靴活動記録そうとえています記録出版のために202512舞踊靴という名前出版社登録20263事業者登録完了しました

 

崔承喜リサーチと舞踊靴活動展開しているTistoryブログにいた記事1,400しています取材やイベントのたびに舞踊靴会員情報提供対外広報のために執筆した文章ですがこれが出版用原稿になる予定です今年2026には崔承喜100シーンという単行本とともに12論文とエッセイを出版する予定そこには舞踊靴キャンペーンや朝鮮人追悼碑沿海州キャンペーンモンスーン革命キャンペーンの記録まれます

 

 

出版頻繁提案されましたが最終的電子書籍出版びましたコストで迅速出版できるからです依然として費用必要なため募金活動展開する予定です

 

一人でできることではありませんそこで、「舞踊靴活動創設メンバーである鄭澈勳先生編集者としてがってくださいました原稿担当鄭澈勳先生編集出版担当していますどれほど感謝してもしきれませんまた電子書籍出版しい々のご協力期待しています

 

 

最近まれてめて病院にひどくお世話になりました急性腹膜炎救急室搬送され手術10日間入院現在退院回復かっていますまた腹膜炎原因であったのかを精密検査でも調めました比較的健康生活っていたにとっては衝撃的でした健康祝福ですがいつでもるというだから比較的健康なときにできることをくやら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自覚つようになりました

 

来年崔承喜のリサーチをめてから10になります。 「舞踊靴活動今年7年目になりますいとはえませんがくもない時間ですこれまでくの同僚友人先輩後輩いたことはせで意義深経験でした一緒いてくださり本当に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電子書籍出版じて舞踊靴げたことは数人努力ではなくくの々のゆったりとした協力によって実現したものであることを強調したいといます原稿次第まず舞踊靴公開いたします内容形式についてフィードバックをいただければ大変助かりますこのしいプロジェクトにもくの々の関心協力期待しています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jc, 2026/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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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2026)와 내년(2027)에는 그동안의 <무용신> 활동에 대한 기록을 출판할 예정입니다. 2017년에 시작된 최승희 리서치, 2019년에 시작된 무용신 캠페인, 2020년에 시작된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프로젝트, 2024년에 시작된 강릉인권영화제 후원, 2025년에 시작된 <동동>의 니시노미야 풍물교류회 등에 대한 기록을 공식적으로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무용신>은 짧은 기간 동안 적지 않은 활동을 추진했지만,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기억은 짧고 시간이 지나면 왜곡되기도 하기 때문이죠. 기록으로 남기면 누군가 참고할 수 있고, 후일 더 나은 활동을 전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록이 중요한 것은 강조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그 단적인 예입니다. 1914년 다카라즈카에서 사망한 강릉 출신 조선인 노동자 김병순씨는 80년 동안 바깥 세계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1985년에 시작된 정홍영,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조사연구가 1997년에 <가극의 거리의 또 하나의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고, 그때에야 비로소 김병순씨를 비롯한 조선인 노동자 5명의 희생이 일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2020년에는 추도비라는 또 하나의 기록이 건립되었습니다.

 

정홍영 선생의 저서와 콘도 도미오 선생이 솔선하신 추도비는 많은 반향을 일으켰고, 김병순씨의 고향 강릉에도 알려졌습니다. 강릉시가 추도비 설립자들에게 감사패를 증정했고, <무용신> 회원을 비롯한 많은 한국인들이 매년 키리하타의 추도비와 타마세의 참배묘를 방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출판된 저서와 건립된 추도비 덕분에 일어난 일입니다.

 

 

정홍영-콘도 도미오 선생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저도 역시 <무용신>의 활동을 기록으로 남겨두려고 합니다. 기록의 출판을 위해서 저는 202512월 도서출판 <무용신>이라는 이름으로 출판사를 등록했고, 20263월 사업자 등록도 마쳤습니다.

 

최승희 리서치와 무용신 활동을 전개하는 동안 티스토리 블로그에 써놓은 글들이 14백 개에 이릅니다. 취재와 행사 때마다 <무용신> 회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대외 홍보를 위해 쓴 글들인데, 이것이 출판을 위한 초고가 될 예정입니다. 올해(2026)에는 <최승희 100장면>이라는 단행본과 함께 약 12개의 논문과 에세이를 출판할 예정인데, 여기에는 무용신 캠페인과 조선인 추도비, 연해주 캠페인과 몬순혁명 캠페인의 기록도 포함됩니다.

 

 

종이책 출판을 자주 제안 받았지만, 결국 전자책 출판을 선택했습니다. 적은 비용으로 신속하게 출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비용이 필요하므로 모금 활동도 전개할 예정입니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무용신> 활동의 원년 회원이신 정철훈 선생이 편집자로 나서주셨습니다. 저는 원고를 담당하고 정철훈 선생이 편집과 출판을 담당합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또 전자책 출판에 조예가 있으신 분들의 도움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제가 최근에 난생 처음으로 병원 신세를 심하게 졌습니다. 급성 복막염으로 응급실에 실려가 수술을 받았고, 약 열흘의 입원 끝에 지금은 퇴원해서 회복 중입니다. 또 복막염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정밀 검사도 시작했습니다. 비교적 건강한 삶을 누리던 제게는 약간의 충격이었습니다. 건강은 축복이지만 또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다는 점, 그래서 비교적 건강할 때 할 수 있는 일들을 빨리빨리 해야 한다는 자각도 가지게 됐습니다.

 

내년이면 제가 최승희 리서치를 시작한 지 10년이 됩니다. <무용신> 활동도 올해가 7년째입니다. 길다고 할 수 없지만 짧지도 않은 세월입니다. 그동안 숱한 동료, 친구, 선후배들과 함께 일했던 것은 행복하고 뜻 깊은 경험이었습니다. 함께 일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전자책 출판을 통해 <무용신>이 해 온 일들이 한두 사람의 짧은 노력이 아니라, 많은 분들의 느긋한 협력으로 이뤄진 것임을 강조하려고 합니다. 원고가 마련 되는대로 <무용신>에 먼저 공개하겠습니다. 내용과 형식에 대한 피드백을 주시면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이 새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많은 분들의 관심과 협력을 기대합니다. 고맙습니다. (jc, 2026/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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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年2026舞踊靴活動これまでに受付された4会員参加観望重要であることを強調しましたきなら参加まなければ様子見ですまた自分でやりたい仕事があればでもいつでもどうやってでも主導していただけます

 

主導参加観望、「舞踊靴重要つの方法ですこの概念はそれほど特別なものではありませんほとんどのまりや団体がこれを目指していますしかしやかな任意団体である舞踊靴ではこれらつがさらに重要です主導参加がなければ仕事はできず観望美徳がなければ対立じて分裂してしまうからです

 

 

主導参加そして観望々でも一緒効果的機能するためには会員同意する共通関心認識必要ですいにも、「舞踊靴会員はほとんどが1進歩的傾向2民主主義者であり、(3平和主義者ですそのため、「舞踊靴民主平和のための連帯追求します

 

民主とは市民主人であることを意味します。 「舞踊靴市民主体的活動する団体であるため政府企業影響けません事業予算政府補助金企業拠出依存せず市民寄付金ります事業によっては中央政府地方自治体協力したり企業支援けることもありますが主導権決定権依然として市民にあります政府企業支援けているという理由だけで<無用神>活動方針内容変更されたりめられたりしてはなりません

 

また、「舞踊靴民主すべての会員意見実践尊重します会員はすべて舞踊靴支援者です1ウォン以上支援金寄付この加入する意思した々ですつまり、「支払必要のないお、「使える時間、「やらなくてもよいこと自発的たちです状況能力じて寄付する時間金額なることがありますがすべての会員舞踊靴活動のすべての平等権利平等責任いますそれが舞踊靴民主主義概念です

 

 

また、「舞踊靴平和志向しています社会的対立らげ国家間戦争反対するだけでなく平和のための条件拡大しようとめています対立戦争不義無関心からじます在日朝鮮学校差別的扱朝鮮人労働者犠牲への忘却沿海州高麗人同胞苦難江陵人権映画祭廃止危機などは正義にかなっていませんバングラデシュの民衆革命じた若者たちも国家暴力排除正義平和回復めています

 

舞踊靴はその問題直接解決できるとじてい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不義わらせ平和すことはその状況にある市民使命です。 「舞踊靴連帯感すだけです舞踊靴キャンペーンや民族学校への支援追悼碑への訪問人権映画祭後援日韓風物交流会支援そうした連帯方法ぎません

 

 

には舞踊靴目標target目的goal区別することが必要です表面的える目標舞踊靴キャンペーン民族学校への募金追悼碑への訪問人権映画祭風物交流会支援などですがこれらの目標じて達成しようとする目的民主平和のための連帯ですしたがって、「舞踊靴目的達成するためにはいつでもたな目標設定その達成けて努力することができます。 「舞踊靴事業活動がいくつかに固定できない理由です

 

舞踊靴活動国際的文脈められるため国際情勢把握する必要があります南北韓硬直した関係のため在日朝鮮学校への支援困難ですロシア・ウクライナ戦争影響ロシアの同胞との交流容易ではありません中国政府民族政策影響朝鮮族同胞との協力同様です一方米国・イスラエル・イランの戦争影響日本市民反戦反改憲運動激化していますそれに韓国日本市民協力連帯必要性まっています

 

 

舞踊靴民主平和連帯という目的れず状況変化柔軟対応しながら具体的目標設定達成していく必要があるとえています(jc, 2026/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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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2026)<무용신> 활동을 지금까지 접수된 4개로 조정했고, 거기에는 회원들의 참여관망이 중요함을 강조했습니다. 좋아하면 참여하고, 내키지 않으면 관망합니다. 또 자신이 직접 하고 싶은 다른 일이 있다면 누구나, 언제나, 어떻게든지 주도하시면 됩니다.

 

주도참여관망<무용신>에서 일하는 중요한 세 가지 방법입니다. 이런 개념이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모임이나 단체가 이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느슨한 임의단체인 <무용신>에서는 이 세 가지가 더욱 중요합니다. 주도와 참여가 없으면 일할 수 없고, 관망의 미덕이 없으면 갈등으로 지리멸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죠.

 

 

주도와 참여와 관망이 따로 또 같이효과적으로 작동하려면 회원들이 동의하는 공통의 관심과 인식이 필요합니다. 다행히도 <무용신> 회원은 대부분 (1) 진보 성향의 (2) 민주주의자이며 (3) 평화주의자입니다. 그래서 <무용신>은 민주와 평화를 위한 연대를 추구합니다.

 

민주란 시민이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무용신>은 시민들이 주도적으로 일하는 모임이기 때문에 정부와 기업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사업 예산을 정부 지원금이나 기업의 출연에 의존하지 않고, 시민들의 기부금에 의존합니다. 사업에 따라서는 중앙 또는 지방정부와 협력하거나, 기업의 도움을 받을 때도 있겠습니다만, 주도권과 결정권은 여전히 시민에게 있습니다.

 

<무용신>민주모든 회원의 의견과 실천을 존중합니다. 회원은 모두 <무용신>의 후원자입니다. 1만원 이상의 후원금을 내고, 이 모임에 가입할 의사를 표시한 분들입니다. , ‘내지 않아도 되는 돈을 내고, ‘다른 데 쓸 수 있는 시간을 쏟고,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자발적으로 하시는 분들이죠. 상황과 능력에 따라 기부하는 시간의 양과 돈의 액수가 다를 수는 있지만, 모든 회원은 <무용신> 활동의 모든 면에서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동등한 책임을 집니다. 그것이 <무용신>이 말하는 민주의 개념입니다.

 

 

<무용신>은 평화를 지향합니다. 사회적 갈등을 누그러뜨리고 국가간 전쟁에 반대할 뿐 아니라 평화를 위한 조건을 확대하려고 노력합니다. 갈등과 전쟁은 대개 부정의무관심때문에 생깁니다. 재일조선학교의 차별 대우, 조선인 노동자들의 희생에 대한 망각, 연해주 고려인 동포들의 고난과 분투, 강릉인권영화제의 폐지 위기 등은 정의롭지 않습니다. 방글라데시 민중혁명에 투신한 젊은이들도 국가 폭력을 제거하고 정의와 평화를 회복을 위해 노력합니다.

 

<무용신>은 그 문제를 직접 해결할 수 있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불의를 종식하고 평화를 회복하는 것은 그 상황에 처한 시민들의 소명입니다. <무용신>은 연대감을 표시할 뿐이죠. 무용신 캠페인과 민족학교 지원, 추도비 방문과 인권영화제 후원, 한일 풍물교류회 지원은 그런 연대의 방법일 뿐입니다.

 

 

때로는 <무용신>의 목표(target)와 목적(goal)을 구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목표는 무용신 캠페인, 민족학교를 위한 모금, 추도비 방문, 인권영화제와 풍물교류회 후원 등이지만, 그런 목표를 통해 달성하려는 목적은 민주와 평화를 위한 연대입니다. 따라서 <무용신>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그 성취를 위해 노력할 수 있습니다. <무용신>의 사업과 활동이 몇 가지로 고정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무용신> 활동이 대개 국제적 맥락에서 추진되기 때문에 국제 상황도 파악해야 합니다. 남북한의 경직된 관계 때문에 재일 조선학교 지원이 어렵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재러 동포들과의 교류도 쉽지 않습니다. 중국 정부의 민족정책 때문에 조선족 동포들과의 협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면에 미국-이스라일-이란 전쟁 때문에 일본 시민들의 반전, 반개헌 운동이 격화되고 있습니다. 이에 한국과 일본 시민들의 협력과 연대의 필요성도 커졌습니다.

 

 

<무용신>은 민주와 평화의 연대라는 목적을 잊지 않으면서도, 상황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성취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jc, 2026/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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仕事はエネルギーがりますエネルギー(energy)集中すると運動(movement)まれ仕事(work)へと発展するものです物理学だけでなく人間社会同様ですいこともいこともじですエネルギーが運動仕事します

 

これまで舞踊靴くのことをげてきました(1) 崔承喜リサーチは9年目であり(2) 舞踊靴キャンペーンは7年間にわたり10にわたって成功裏実施されました(3) 宝塚朝鮮人追悼碑訪問団3年連続組織(4) 江陵人権映画祭3年間支援しました(5) 西宮日韓風物交流会2回支援今年支援成功すれば3年間支援約束ることができます

 

 

その、(6沿海州高麗人民族学校支援、(7高麗劇場建設についても議論、(8バングラデシュの民衆革命青年活動家支援しました昨年2025には江陵仲間たちの努力により、(9朝鮮学校のサッカーボール支援まり、(10日韓同胞親善サッカー大会企画されました

 

 

舞踊靴よりも会員数がはるかに組織がしっかりしており著名人会費助成金豊富社会団体多数あります組織規約がなく会則会費もない舞踊靴効率的かつ効果的運営されてきたことは不思議える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にはそうしたものがなかったので会員のエネルギーが自由運動増幅されてくのことをげられたとえています

 

<아트코어 굿마을> 대표 이진희(李眞熙) 선생

 

しかし成功失敗でもありますいつのにか舞踊靴のエネルギーのれを制御会員組織存在よりも命題自由よりも義務げようとするきがまれました。 「舞踊靴活動鈍化同僚間意見相違対立発展姉妹団体であるチームアイとも意見相違表面化しましたいことほど成功したときにより注意すべきものですが、「舞踊靴危機える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

 

 

しかし、「舞踊靴活動67年目っているのでそうしたことがきる時期でもあります過去出来事方向性調整すべきたのです大学休職年えるようなものです

 

はどうせ舞踊神活動するには状況ではありません国際的南北中露米日関係緊張しており国内でも内乱鎮圧大統領罷免検察裁判所・メディア改革えているため在外同胞運動優先されにくい状況です昨年1写真展対立3予定されていた11回舞踊靴キャンペーンが中止されたことがそのです

 

 

困難状況では無理必要はありませんそんな時期には一歩引いてしみとリフレッシュの機会すのがいでしょう。 「舞踊靴目的目標方法論めて仕事をより簡単しくできる方法論検討してほしいですこれまで協力してきた姉妹団体活動関心らのイベントに積極的参加することもいでしょう

 

 

舞踊靴今年2026のイベントがくありません(1) 311回舞踊神キャンペーンは中止となったため出版運動趙正熙鄭澈勳先生開始します。 「舞踊靴活動記録としてすためです(2) 5月末には民族相互扶助運動神戸訪問団朴起燦先生編成されますこれは舞踊靴のイベントではありませんが成功のために舞踊靴会員積極的協力します(3) 8月末には1江陵フォーラムが主導する宝塚朝鮮人追悼碑訪問団姜承昊, 趙殷慧先生編成され(4) 家族風物隊ドンドン3回西宮風物交流会林寅出, 楊享鎭先生開催される予定です例年べて種類なくてもしくく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

 

 

仕事げるのはエネルギーですエネルギーのれをコントロールしないようにしよう各事業のチームリーダーやメンバーに支援提供するのはいことだが無駄いをこさないようにしようらのエネルギーが素晴らしい仕事くの体験提供します成功したら一緒しみ失敗したら一緒えよう

 

 

エネルギーの最高形態ですそして本来正気状態ではありませんしでもわなければしくすることはできませんこれまでたちは組織情報金銭いていませんでしたエネルギーでいていました今年舞踊靴をもって活動できることを期待しています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jc, 2026/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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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年舞踊靴のやるべきことは4つです(1) 舞踊靴活動記録として出版活動チーム長 趙正熙); (2) 尹東柱崔承熙える関西視察チーム長 朴起燦先生); (3) 宝塚訪問団チーム長 趙殷慧先生); (4) 西宮風物交流会チーム長 林寅出先生ですすべてが成功裏完了すれば理想的ですが状況じて進行有無程度わることがあります

 

そのうち5関西視察、「民族相互扶助運動主催、「舞踊靴協力する実施されますまた機会があれば11回舞踊神キャンペーンが実施される可能性があり急変する国際情勢じて市民国際連帯促進するプロジェクトが企画されることもありますしかしなくとも現時点では舞踊靴今年のプロジェクトは上記4つにまとめられます

 

 

種類りましたが各事業推進方法過去同様ですつまり(1) チームリーダーが主導メンバーは (2) そのプロジェクトに参加するか(3) 退くかのどちらかですまた(4) 自分たにやりたいことがあれば公開宣伝主導していけばよいです。 「舞踊靴には事前事業承認したり許可したりできる意思決定機関がありません

 

このような手法のおかげで、「舞踊靴多方面くの仕事ができましたメンバーや事業多様であるにもかかわらず、「舞踊靴深刻対立まれたり極端対立したり分裂したりしません賛成すれば参加反対すれば退という原則のおかげです

 

この原則実現できるには理由があります。 「舞踊靴もともと一糸乱れぬ組織でもなく固定された目標追求する硬直したまりでもありません最低限世界観認識論共有すれば、「舞踊靴でもそしてでもできるプラットフォームです

 

この原則理由すべての会員関心創造性そして実践がすべて重要であるからですでも自分関心実践すことができますこれまでにない創造的仕事であればなお歓迎しますかの反対批判原因重要なことが実行できないのは不幸なことです賛成しにくいからといって反対したり阻止したりすべきだというわけではありませんただ退いて様子るだけでいませんとてもシンプルで簡単なことではありませんか

 

 

舞踊靴会員関心皆同じではありません認識実践方向性やレベルもじではありません。 『舞踊神でもでもそんなことは不可能です関心方向やレベルがうからといって他人関心実践むことはできません自分意見行動尊重されるためには他人意見行動尊重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すから同僚のやっていることに賛成すれば参加反対すれば退くだけでいません自分でやりたいことがあるなら率先して推進すればよいのです同僚スケジュールと予算実行すればいいのです

 

舞踊靴にも当然ながら反対があり存在していますなぜ舞踊靴朝鮮人追悼碑人権映画祭バングラデシュプロジェクトを推進するのかという意見もありましたさらに最近では一部会員舞踊靴から追放すべきだという意見ています個人がそのような意見つことはありますがそれを強制できないことが舞踊靴特徴であり長所です

 

でも自分意見えるしやりたいことをやることができますただし自分意見重要であれば会員意見重要だということに同意できれば問題ありませんプロジェクトへの参加可否各自める問題ですチームリーダーは自分推進した事業経過結果責任てばよいのですプロジェクトが成功すればしめ失敗すればえればよいのです

 

 

1990年代にアメリカのテレビで放送されていたコーヒー広告されます。 「Sit back and relax, it's Some coffee time.どんなコーヒーの広告だったかはれましたが、「退いてゆっくりコーヒーを一杯飲んでという言葉はとてもめになりました。 「舞踊靴活動原則もそれとているとえています参加観望両方重要ですそこでのように整理できます

 

Jump in, if you like it;                    ったらんで

Step back, if you don’t;                 らなければ一歩引いて

Just don’t mess with others      他人のことにむな


(jc, 2026/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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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무용신>의 할 일은 4가지입니다. (1) <무용신>의 활동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출판 활동(팀장 조정희); (2) 윤동주-최승희를 기리는 간사이 답사(팀장 박기찬 선생); (3) 다카라즈카 방문단(팀장 조은혜 선생); (4) 니시노미야 풍물교류회(팀장 임인출 선생)입니다. 모두 성공적으로 수행되면 좋겠지만, 상황에 따라 진행 여부와 정도가 달라질 수는 있습니다.

 

이 중 5월의 간사이 답사는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이 주최하고 <무용신>이 협력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또 기회가 되면 제11차 무용신 캠페인이 다시 진행될 수도 있고,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따라 시민들의 국제연대를 추진하는 프로젝트가 기획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무용신>의 올해 프로젝트는 이상의 4개로 정리됩니다.

 

 

가짓수는 줄었지만, 각 사업이 추진되는 방식은 과거와 같습니다. , (1) 각 팀장이 주도하며, 회원들은 (2) 그 프로젝트에 참여하시거나, (3) 물러나 계시면 됩니다. (4) 자신이 새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공개적으로 홍보하시고 주도해 나가시면 됩니다. <무용신>에는 사전에 사업을 승인하거나 허락할 수 있는 의사결정기구가 없습니다.

 

이런 방식 덕분에 <무용신>은 다양한 방면에서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구성원과 사업이 다양한데도 <무용신>은 심각한 갈등에 휘말리거나 극단적으로 대립하거나 분열되지 않습니다. 찬성하면 참여하고, 반대하면 물러난다, 라는 원칙 덕분이죠.

 

이 원칙이 가능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무용신>은 원래 일사불란한 조직도 아니고, 고정된 목표를 추구하는 경직된 모임도 아닙니다. 최소한의 세계관과 인식론을 공유한다면 <무용신>은 누구나, 그리고 무슨 일이나 할 수 있는 플랫폼입니다.

 

이 원칙을 지키는 까닭은 모든 회원들의 관심과 창의와 실천이 모두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관심을 실천에 옮길 수 있습니다. 전에 없던 창의적인 일이라면 더욱 좋습니다. 누군가의 반대나 비판 때문에 중요한 일이 실천되지 못한다면 불행한 일입니다. 내가 찬성하기 어렵다고 해서 반대하거나 저지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냥 물러나서 지켜보기만 해도 됩니다. 아주 간단하고 쉬운 일이 아닙니까?

 

 

<무용신> 회원들의 관심이 모두 같지 않습니다. 인식과 실천의 방향과 수준도 동일하지 않습니다. <무용신> 안에서든 밖에서든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관심의 방향과 수준이 다르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관심과 실천을 막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의견과 행동이 존중받으려면 다른 사람의 의견과 행동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동료가 하는 일에 찬성하면 참여하시면 되고, 반대하면 물러나 있으면 됩니다. 자신이 직접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자신이 주도적으로 추진하면 됩니다. 동료를 모으고, 일정과 예산을 기획하고, 실천하면 됩니다.

 

<무용신> 안에도 당연히 반대의 목소리가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어째서 <무용신>이 조선인 추도비나 인권영화제나 방글라데시 프로젝트를 추진하느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급기야 최근에는 일부 회원을 <무용신>에서 축출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개인들이 그런 의견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강요할 수 없는 것이 <무용신>의 특징이자 장점입니다.

 

누구나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자신의 의견이 중요하다면 다른 회원의 의견도 중요하다는 데에 동의할 수 있으면 됩니다. 프로젝트의 참여 여부는 각자가 결정할 문제입니다. 팀장들은 자기가 추진한 사업의 경과와 결과에 대해 책임지면 됩니다.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함께 즐길 수 있고, 실패하면 함께 견디면 됩니다.

 

 

1990년대에 미국 티비에 방영되던 커피 광고가 생각납니다. “Sit back and relax, it’s Some coffee time.” 무슨 커피의 광고였는지는 잊었지만 물러나서 느긋하게 커피 한 잔 해라는 말은 무척 위안적이었습니다. <무용신>의 활동 원칙도 그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참여와 관망이 둘 다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Jump in, if you like it;               좋으면 참여해 주세요. 

Step back, if you don’t;            싫으면 관망하세요. 

Just don’t mess with others.    방해하지 마시고요.        (jc, 2026/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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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에너지가 만듭니다. 에너지(energy)가 몰리면 운동(motion)이 생기고 일(work)로 발전하게 마련이죠. 물리학뿐 아니라 인간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일도 그렇고, 나쁜 일도 그렇습니다. 에너지가 운동과 일을 만듭니다.

 

그동안 <무용신>은 많은 일을 했습니다. (1) 최승희 리서치가 9년째이고, (2) 무용신 캠페인이 7년 동안 10차에 걸쳐 성공적으로 수행됐습니다. (3)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방문단을 3년 연속 조직했고, (4) 강릉 인권영화제를 3년 동안 후원했습니다. (5) 니시노미야 한일 풍물교류회를 2회 후원했고, 올해 후원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면 3년 후원의 약속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 밖에 (6) 연해주 고려인 민족학교를 지원했고, (7) 고려극장 건립도 의논하기 시작했고, (8) 방글라데시 민중혁명의 청년 활동가들을 지원했습니다. 작년(2025)에는 강릉 식구들의 노력으로 (9) 조선학교 축구공 후원이 시작됐고, (10) 한일동포 친선축구대회도 기획되었습니다.

 

 

<무용신>보다 회원 수가 훨씬 많고, 잘 조직되어 있고, 명사들도 많고, 회비와 지원금이 풍부한 사회단체들도 많습니다. 조직과 규약이 없고, 회칙과 회비가 없는 <무용신>이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일해 온 것이 이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것들이 없었기 때문에 회원들의 에너지가 자유롭게 흐르고, 운동이 증폭되어 많은 일들을 이룰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아트코어 굿마을> 대표 이진희(李眞熙) 선생

 

그러나 성공은 실패의 씨앗이기도 합니다. 어느덧 <무용신>의 에너지 흐름을 제어하고, 회원을 조직하고, 존재보다는 명제를, 자유로움보다는 당위를 내세우려는 움직임이 생겼습니다. <무용신>의 활동이 둔화됐고, 동료들 사이의 의견 차이가 갈등으로 번졌고, 자매단체인 <팀아이>와도 의견 차이가 불거졌습니다. 좋은 일일수록 성공했을 때 더 조심해야 하는 법인데, <무용신>은 위기를 슬기롭게 넘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무용신> 활동이 6-7년째이므로 그런 일들이 생길 때도 됐습니다. 지난 일을 되돌아보고 방향을 조정할 때가 된 것이지요. 대학에서 안식년을 주듯이 말이죠.

 

지금은 어차피 <무용신>이 활동하기에 상황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국제적으로 남북중소미일의 관계가 긴장되어 있고, 국내적으로도 내란 진압과 대통령 파면에 이어 검찰/법원/언론 개혁을 앞두고 있기때문에 재외동포 운동이 우선순위를 가지기 어려울 수 있죠. 지난 1월의 사진전 갈등 속에서 3월로 예정된 11차 무용신 캠페인이 취소된 것이 그런 예입니다.

 

 

내외의 상황이 좋지 않을 때는 꾸역꾸역 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시기에는 한 걸음 물러서서 즐김과 재충전의 기회를 찾는 것이 좋습니다. <무용신>의 목적과 목표, 방법론을 되새겨보고, 일을 더 쉽고 재미있게 할 수 있는 방법론도 강구하면 좋겠습니다. 특히 그동안 협력해 온 자매단체들의 활동에 관심을 갖고, 그들의 행사에 적극 참여하는 것도 좋습니다.

 

 

무용신은 올해(2026)의 행사가 많지 않습니다. (1) 3월의 11차 무용신 캠페인은 취소되었으므로, 출판 운동(조정희, 정철훈 선생)을 시작합니다. <무용신>의 활동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2) 5월 말에는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고베 방문단(박기찬 선생)이 구성됩니다. 이는 <무용신>의 행사는 아니지만, 그 성공을 위해 <무용신>의 회원들이 적극 협력하게 됩니다. (3) 8월 말에는 <1강릉포럼>이 주도하는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방문단(강승호, 조은혜 선생)이 조직되고, (4) 가족풍물패 <동동>의 제3회 니시노미야 풍물교류회(임인출 선생)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예년에 비해 가짓수는 적어도, 재미있게 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을 이루는 것은 에너지입니다. 에너지의 흐름을 통제하지 맙시다. 각 사업의 팀장과 팀원들에게 도움을 제공하는 것은 좋지만 딴지는 걸지 맙시다. 그들의 에너지가 멋진 일을 만들고, 많은 이들에게 좋은 경험을 줄 수 있습니다. 성공하면 같이 즐기고 실패하면 같이 견딥시다.

 

 

에너지의 최고 형태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원래 제정신이 아니죠. 살짝 미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조직이나 정보나 돈으로 일하지 않았습니다. 에너지로 일했죠. 올해도 <무용신>은 사랑으로 일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jc, 2026/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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