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ugust 26, 2024, Ms. Lee Go-eun, the representative of the Monsoon Club, received an email from Bangladesh. It was an email from Mustain Billah Zahir, a civic activist in Dhaka.
Mr. Zahir asked for help from Korean citizens while informing them of the progress and results of the Monsoon Revolution. (The original and translated versions of his email are included in “7. Letters from Dhaka (ঢাকা)” in this series.)
Mr. Zahir was scheduled to visit Korea at the invitation of the Korea Democracy Foundation(KDF) to participate in the global forum, but he requested that additional student representatives of the Monsoon Revolution be invited to Korea.
The student representatives' missions are to inform Korean citizens of the Monsoon Revolution and learn about Korea’s experience in investigating and recording of Kwangju Uprising in 1980.
When Ms. Lee Go-eun told me about Mr. Zahir’s request, I immediately thought of the poet Rabindranath Tagore (রবীন্দ্রনাথ ঠাকুর, 1861-1941). He is known as an Indian, but he is also a Bangladeshi. Tagore’s hometown is Kolkata on the Bay of Bengal, and most of his poetry was written in Bengali.
Tagore had a significant influence on Bangladesh’s independence. When Bangladesh was part of Pakistan, the Pakistani government suppressed the Bengali language and prohibited the broadcasting of Tagore's poems in the state-run media. The backlash against this policy led to the war of independence, and Bangladesh gained independence in 1971. This means that Tagore's poems were an important source of nourishment for the Bangladeshi spirit.
Koreans are also grateful to Tagore. When Tagore visited Japan in 1929, feeling sorry for not being able to visit Korea, he wrote a six-line English message to Korean people. This message was translated into a four-line poem and published in the Dong-A Ilbo on April 2, 1929, and the original English message in Tagore's handwriting was also published in the newspaper the next day (4/3).
In the golden age of Asia,
Korea was one of its lamp-bearers,
and that lamp is waiting
to be lighted once again,
for the illumination
in the East.- Rabindranath Tagore (28th March, 1929)
After the March 1st Movement,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was established, but Korea’s independence was far away and the frustration of the Korean people deepened. At that time, the message from Tagore, the first Asian to win the Nobel Prize in Literature, was a great comfort to the Korean people and unprecedented encouragement for independence.
As Tagore predicted, after liberation from Japanese occupation, Korea once again lit its lamp and became a bright light in the East. It is even said that Bangladeshis regard Korea as an example of achieving democratization and economic growth.
Mr. Zahir, a talented activist who majored in “The Process of Democratization in Korea” during his graduate study at Sungkonghoe University in Korea, said that "Monsoon Revolution in Bangladesh has a lot of similarities with the events and spirit of May 18 uprising. And, it was a great inspiration for the people like me."
Thinking of Tagore, who sang hope for the Korean people during their darkest times, Ms. Lee, Go-eun and I decided to accept the request of Mr. Zahir. We thought it was an opportunity to repay the historical favor Korean people owed Tagore a century ago.
This is why and how the first Bangladesh campaign of <Monsoon Club> began. (jc, 2024/11/12)
2024년 8월26일 <몬순클럽> 이고은 대표는 방글라데시로부터 이메일을 한 통 받았습니다. 다카의 시민활동가 무스타인 자히르(Mustain Zahir)씨가 보낸 이메일이었습니다.
자히르씨는 몬순혁명의 경과와 결과를 알리면서, 한국 시민들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의 이메일은 이 시리즈의 “7. 다카(ঢাকা)에서 온 편지”에 원문과 번역문이 게재되어 있습니다.)
자히르씨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KDF)>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 글로발 포럼에 참여하게 되어 있었지만, 별도로 몬순혁명의 학생 대표를 한국에 초청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학생 대표들이 몬순혁명을 한국 시민들에게 알리고, 혁명 과정에서 사망한 희생자들의 조사와 기록, 유가족 예우, 책임자 처벌 등에 대한 한국의 경험을 배우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고은 선생이 내게 자히르씨의 요청을 알려주었을 때,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রবীন্দ্রনাথ ঠাকুর,1861-1941)가 생각났습니다. 그는 인도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방글라데시 사람이기도 합니다. 타고르의 고향이 벵골만의 콜카타이고, 그의 시는 대부분 벵갈어로 쓰였습니다.
타고르는 방글라데시의 독립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방글라데시가 파키스탄의 일부이던 시기, 파키스탄 정부가 벵갈어 탄압으로 타고르의 작품을 국영언론에서 방송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자, 이에 대한 반발이 독립전쟁으로 이어졌고, 방글라데시는 1971년 독립했습니다. 그만큼 타고르의 시가들이 방글라데시 시민들의 정신세계에 중요한 자양분이 되고 있었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런데 타고르는 한국인에게도 고마운 시인입니다. 1929년 일본을 방문한 타고르는 조선 방문 요청을 수락하지 못한 것을 미안하게 여기면서, 6행의 영문 메시지를 써 주었습니다. 이 메시지는 4행시로 번역되어 1929년 4월2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되었고, 다음날(4/3) 신문에는 타고르의 필체로 메시지의 원문도 실렸습니다.
일찍이 아세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촉의 하나인 조선
그 등불 한 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삼일만세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지만, 조선의 독립은 요원했고 조선인의 좌절은 깊어갔습니다. 이때 아시아인으로서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타고르가 보낸 메시지는 조선민중에게 큰 위안이 되었고, 저항과 독립을 위한 용기를 북돋아주었습니다.
타고르의 예언대로 해방 후 한국은 다시 한 번 등불을 켰고, 동방의 밝은 빛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특히 방글라데시의 민중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합니다.
자히르씨는 한국의 성공회대학교 사회학과 대학원에서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전공한 재원으로, 그는 “방글라데시의 몬순혁명은 사건의 전개와 그 정신에 있어서 광주의 518항쟁과 유사성이 많으며, 그 정신이 나같은 방글라데시 사람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고 전했습니다.
조선이 가장 암울하던 시기에 조선인들을 위해 희망을 노래해 주었던 타고르를 생각하면서, 이고은 선생과 저는 방글라데시 젊은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한 세기 전에 타고르에게 진 민족의 역사적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몬순클럽>의 첫 번째 방글라데시 캠페인은 이렇게 결정됐습니다. (jc, 2024/11/12)
아래는 이 포럼에 참석했던 몬순혁명 학생대표 사미아 악타르씨가 작성한 보고서입니다. 번역문과 원문을 전해 드립니다. (jc, 2024/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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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KDF) 글로벌 포럼 보고서 by 사미아 악타르
오늘 포럼의 주제는 “아시아 민주주의의 강화: 연대의 비전”입니다. 세계 민주주의 증진을 위한 국제 협력을 이루고,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고 있는 나라들에게 연대를 표시하는 것이 주요 의제였습니다.
연구자, 활동가, 젊은 리더 등의 여덟 명의 연사가 패널에 참가했습니다. 이들은 아시아 각국의 정치 상황, 민주화 과정에서 직면한 난관, 그런 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 그리고 민주주의 증진을 위해 국제 협력이 점점 더 필요하다는 점 등을 토론했습니다.
포럼에서는 민주주의 강화를 위해 포괄적인 파트너십, 시민 민주주의 교육을 위한 제도적 플랫폼, 정부와 민간 부문의 협력 등이 권고되었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책과 출판물을 제공하고 민주주의 교육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의 시민 교육이 특히 중요하다고 강조되었습니다.
민주주의와 기후 문제의 관계도 여러 시각에서 논의되었고,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생기는 부작용도 지적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모든 민주화 운동에서는 청년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습니다. 따라서 청년 활동가들이 정당에 참여해 그들의 아이디어를 내고 그들의 경험을 활용하는 것이 민주화 과정에 꼭 필요하다는 인식이 강조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민주화 경험이 자주 토론에 등장했는데, 이는 민주화 과정 중에 있는 여러 나라들에게 중요한 교훈입니다. 대한민국의 경제적 번영의 원동력은 민주주의였다는 점, 그리고 민주화 운동의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한국이 취한 주도적인 노력들이 중요했다고 강조되었습니다.
오늘 포럼의 결론은 민주주의가 고정된 최종 상태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향해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할 운동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민주화를 위해 국경을 넘어 함께 노력할 국제 공동체를 만들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강조는 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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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미아 악타르씨의 포럼 보고서 원문)
Report on KDF's Forum Session by Samia Aktar
Today’s forum was on “Empowering Asian Democracy :A Vision of Unity.” The agenda of the forum were creating international cooperation for promoting democracy worldwide and expressing solidarity with the countries struggling for democracy.
This forum was organized through an important discussion by a panel of 8 speakers. Researchers, activists, young leaders have participated in the panel discussion. The topics discussed included the current governance situations of various Asian countries, the challenges they are facing in democratic processes, solutions for overcoming those challenges, and the need of increasing international cooperation in promoting democracy.
"The recommendations to empower democracy that were highlighted in the discussion include inclusive partnerships, institutional platforms like civic education on democracy, government and private sector cooperation.
To empower democracy special emphasis has been given on civic education through providing free books, publications, organizing educational seminars.
The relationship between democracy and climate has been discussed from a very dimensional perspective and the development of democracy and its side effects has also been pointed out in the discussion.
In all democratic movements throughout history, the youth have played a key role.In democratization process, inclusion of young activists in the party framework to unfolds their idea and to utilize their experience has been felt necessary.
The experience of South Korea towards democratization has been shared in the discussion that would be a great learning for other countries struggling for democracy. "Democracy is considered to be the key behind South Korea's economic prosperity, and various initiatives taken by Korea to maintain the spirit of the democratic movement were highlighted.
The conclusion of today’s forum is democracy is not the ultimate thing, rather democracy is a movement itself to be continued for democracy .So,we need to work together to make an international community across border for democratization. (*)
<몬순클럽(대표 이고은)>이 한국에 초청한 또 한명의 학생대표는 사미아 악타르(Samia Akther)씨입니다.
사미아씨는 다카대학 법과대학원에 재학 중, 지난 7-8월의 몬순혁명에 참가했고 반정부 시위의 조직리더(coordinator)로 활동했습니다. 조직리더이란 시위를 기획하고 학생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시위대를 지휘하는 역할입니다.
사미아씨가 사전에 보내온 영상 및 서면 자료에 따르면 방글라데시의 몬순혁명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습니다. 이 전 과정은 사미아씨가 시위조직 리더로서 주도했거나 직접 목격한 것이라고 합니다.
공무원 할당제
7월14일 하시나 전총리는 기자회견에서 시위대를 “라자카르(Razakar, রাজাকার)"라고 모욕했습니다. 당시 하시나의 발언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자유투사(freedom fighters)의 자손들이 공무원 할당 혜택을 받지 못한다면, 그 혜택이 라자카르의 자손들에게 가지 않겠는가?“
1971년 방글라데시가 파키스탄의 압제와 차별대우에 저항해 독립전쟁을 일으켰을 때, 독립투사의 투쟁을 방해한 민병대가 ‘라자카르’였습니다.
예수를 배신한 가룟유다, 일제강점기 일제에 빌붙어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을 방해하던 간도특설대 같은 존재라는 말입니다.
1971년 독립직후 방글라데시 정부는 공직 할당제를 도입했습니다. 독립을 위해 싸운 자유투사들에게 30%, 독립전쟁 중에 강간당한 여성들에게 10%, 저개발지역 출신자에게 40%의 공직을 할당했습니다. 최초의 공직할당제로 80%의 공직이 특정 계층에 할당되었고, 20%만이 공개 채용에 할당되었습니다. 1972년에 시작된 이 공무원 할당 제도는 이후 46년간 지속되면서 자유투사들의 자녀들까지 그 혜택을 받았습니다.
이에 공무원 할당제가 차별적 제도라는 주장이 대두되어 개혁운동이 일어났고, 2018년 방글라데시 대법원은 공무원 할당제가 위헌이라는 이유로 이를 크게 폐지했습니다.
하시나 정권은 2022년 공무원 할당제의 재도입을 위해 소송을 제기하게 했고, 2024년 6월5일 대법원이 공무원 할당제가 합헌이라면서 하시나 정권의 손을 들어주자, 이후 방글라데시 공무원 일자리의 30%를 다시 자유투사들의 손자들에게 할당한 것입니다.
여성과 소수민족, 장애자 등의 소수계층에 할당된 공직을 합치면 56%의 공무원 일자리를 제외한 44%의 공무원 일자리가 일반인들에게 할당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내가 ‘라자카르’다.
문제는 최근 방글라데시의 청년 실업률이 15%를 넘어섰다는 점입니다. 이는 전체 실업률보다 3배나 높습니다.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대학졸업자 중에서 20%가 2년 이내에 취업하지 못합니다. 공무원 일자리마저 절반 이상이 할당제로 돌려진다면, 취업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할당제 이전의 방글라데시 공무원 취업 경쟁률은 100대1이 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공무원 할당제가 재개된다면 공무원 취업 경쟁률은 2배로 증가해 200대1에 근접하게 됩니다.
이에 대학생들은 공무원 할당제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발표된 2024년 6월5일부터 공무원 할당제 개혁을 요구하는 시위를 시작했고, 하시나 정부는 이를 탄압했습니다.
이같은 상황에서 하시나 총리가 7월14일의 기자회견에서 시위대를 “배신자들”이라고 몰아붙인 것이지요.
이날 전국의 대학생들은 하시나의 모욕적 발언에 분개했고, 본격적으로 시위를 조직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미아씨도 다카대학교 여학생 기숙사 학생들의 야간 시위를 주도했습니다. 당시 학생들의 구호는 ”내가 라자카르다.(আমি রাজাকার)“였습니다.
다카대학교 여학생들의 시위 영상을 보면, 선창자가 ”너는 누구냐, 나는 누구냐?“고 물으면, 시위대가 소리 높여 ”라자카르, 라자카르“하고 외치면서 행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তুমি কে? আমি কে? (Tumi Ke? Ami Ke? = 'Who are you? Who am I?)
রাজাকার, রাজাকার। (Razakar, Razakar.)
그런데 이 구호는 1971는 파키스탄과 그 앞잡이 라자카르에 대항해 독립투사들이 외치던 구호를 변형한 것입니다. 당시의 구호는 이와 같았습니다.
তুমি কে? আমি কে? (Tumi Ke? Ami Ke? = 'Who are you? Who am I?) বাঙালি, বাঙালি (Bengali, Bengali!)
흥미로운 사실은 ‘라자카르’라는 말은 아랍어 ‘레다카렌(رضا کار)’에서 유래한 말로 “자원봉사자(volunteer)"라는 뜻입니다. 하시나는 시위대를 가리켜 ”배신자들“이라고 매도했지만, 시위대는 이에 맞서 ”그래, 내가 자원봉사자다“라고 맞받아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시위대는, 방글라데시 독립 반세기가 경과한 지금, 하시나 정권이 파키스탄의 독재체제나 다름없으며, 자신들이 방글라데시의 새로운 자유투사라고 주장한 셈입니다.
하시나 정권의 탄압
7월14일 밤 다카대학 여학생들의 격렬한 시위를 계기로, 이튿날부터 정부는 군경과 여당지지자들을 투입해 대학생들을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7월15일 다카대학교 캠퍼스에서 평화적 시위가 개최되었을 때, 하시나 지지자들이 몽둥이와 하키스틱으로 휘두르며 시위대를 습격했고, 군경은 총을 발사했습니다.
여학생들의 시위에 폭력을 휘두른 것은 방글라데시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여학생들이 부상자를 인근 다카대학병원으로 옮기자, 여당지지자들은 병원 안으로까지 침입해 테러를 가했습니다.
7월16일 반정부 시위대 중에서 첫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베굼 로케야(Begum Rokeya) 대학교 학생 아부 사이드(Abu Sayed)가 진압 경찰의 총격에 맞아 사망한 것입니다.
이날 시위에서는 아부 사이드를 포함 6명의 학생들이 사망했고, 수백 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사망자가 발생하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습니다. 여당지지자들이 학생들을 대학교 기숙사에 감금하고 린치를 가하거나 고문을 자행했지만, 사미아가 조직한 여학생 시위대는 다카대학교 기숙사 정문에서 시위를 계속했습니다.
7월17일 아부 사이드의 장례식과 기도회가 다카대학교 캠퍼스에서 열렸습니다. 장례식이 끝난 후 4시30분경부터 학생들은 관을 운구하면서 캠퍼스를 행진했고, 경찰은 장례 행진에 소음수류탄과 최루탄을 난사했습니다.
이날 다카대학교에 무기한 휴교령이 내려졌고, 모든 학생들은 기숙사에서 나가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휴교령과 기숙사 퇴거명령이 진행되는 가운데서도 경찰은 소음수류탄을 투척했습니다. 학생들은 강압적으로 기숙사를 떠나야했습니다.
인터넷 폐쇄와 전국적 통금조치
7월19일부터 하시나 정권은 전국의 인터넷을 폐쇄하고 통금을 실시했고, 그와 함께 군대를 배치하기 시작했습니다. 군대는 무작위로 학생들을 연행했고, 경찰과 기타 정부요원들도 시위대를 체포했습니다.
다카시 경찰국(Dhaka Metro Police)은 7월17-18일 이틀 동안 1,117명을 체포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경찰의 체포와 연행으로 시위대 조직리더 6명이 구금되었고, 경찰은 이 6명의 학생들을 협박해 모든 시위를 중단하라는 성명서를 낭독하게 했습니다.
인터넷 폐쇄로 발생한 통신 부재의 상태에서 하시나 정권은 (1) 대량 학살, (2) 과도한 폭력, (3) 잔인한 공격, (4) 구금과 고문, (5) 살상, (6) 정보 억압 등의 만행을 자행했습니다.
이같은 조치들은 방글라데시가 민주국가인지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강제실종, 사법외 살인, 무작위 체포, 폭력행사 등이 수시로 하시나 정권에 의해 자행되었지만, 7월의 반정부 시위대에 가해진 하시나 정권의 반민주적 탄압은 극에 달했습니다.
정권 퇴진운동의 시작
이때부터 “공무원 할당제 개혁요구” 시위는 “하시나 정권 타도 운동”으로 확대됐습니다.
하시나 정권의 (1) 국민의 투표권 박탈, (2) 표현의 자유 박탈, (3) 언론 탄압, (4) 야당 탄압, (5) 부정부패, (6) 돈세탁, (7) 학생 테러조직 운영 등이 집중적으로 비판되기 시작했습니다.
공무원 할당제 개혁 요구가 하시나 정권 타도 운동으로 번지면서, 학생들이 주도했던 반정부 시위에 일반 시민들이 대거 참여했습니다.
이같은 학생-시민의 시위로 결국 권위주의적 정권을 무너뜨리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지난 15년 동안 억눌렸던 분노가 폭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시위는 날로 증폭되었고, 하시나 정권은 군대와 경찰에게 즉각사격(shoot at sight)의 발포명령을 내렸습니다. 총격 사망자 수는 650(공식)-1,000명 이상으로 늘어났습니다.
학생과 시민의 희생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자, 군대와 경찰은 하시나의 발포명령을 더 이상 따르지 않기로 결정하고 통보했습니다.
8월5일, 시위를 저지할 방편이 없어진 하시나는, 학생들과 시민들의 시위대가 총리공관으로 행진해 들어오는 가운데, 급히 사임하고 헬기와 항공기를 이용해 인도로 망명했습니다. 이로써 15년간 계속된 하시나 정권의 독재적, 권위주의적 통치가 막을 내렸습니다.
과도기의 정의
8월7일, 몬순혁명의 학생 대표들은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무함마드 유누스를 임시과도정부의 수반으로 추천했고,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하시나 정권의 탄압으로 방글라데시를 떠나 파리에 체재 중이던 유누스는 이를 수락했습니다.
임시과도정부는 성공한 혁명을 안착시키고 방글라데시를 민주사회로 이행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은 6개 부문의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1) 진실 발굴: 인권위반 행위를 조사하고, 피해자들의 현황을 파악하며, 정부기관에 의해 살상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2) 형사 기소: 모든 형태의 범죄를 자행한 하시나 정부의 책임자들과 공범들을 기소해 재판에 회부한다.
(3) 보상 회복: 피해자들에게 국가의 사과를 전달하고, 금전적 보상과 재정 지원을 제공하고, 공동체를 재건하기 위한 사회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4) 제도 개혁: 경찰, 군대, 사법제도 등이 인권을 유린하고 형사사법 원칙을 위반하지 못하도록 제도와 기관들을 개혁한다.
(5) 국민 참여: 피해자와 시민사회, 그리고 피해를 입은 공동체들의 요구에 부응하고, 이들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는 제도와 프로그램을 시작한다.
(6) 문화 책임: 인권에 대한 책임과 존중을 증진시키는 사회 규범을 진작하여, 장기적인 평화와 안정에 기여한다.
국제사회의 협력 요청
사미아씨는 자신의 발표문에서 방글라데시가 민주사회로 순로롭게 진행할 수 있도록 국제사회의 관심과 협력을 요청했습니다.
(1) 진실 위원회가 그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인권 위반 사례나 사실들을 알려주세요.
(2) 진실 위원회와 법제도 개혁 위원회가 과도기 정의를 구현할 수 있도록 지방정부와 시민사회에 필요한 기술적 지원과 자원을 제공해 주세요.
(4) 반인권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을 국제재판소나 국내재판소로 기소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시고, 향후 유사한 범죄가 발생하지 않도록 후원해 주세요.
(5) 국제적 인권 규범에 부합하는 과도기 정의의 원칙을 유지하고, 다른 나라들도 유사한 기준을 채택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세요.
방글라데시 여성의 사회적 지위
한편, 방글라데시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매우 모순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지난 35년 동안 방글라데시의 국가수반은 여성이었습니다. 칼레다 지아(1991-1996, 2001-2009)와 셰이크 하시나(1996-2001, 2009-2024)가 그들입니다. 여성 총리의 리더십 아래 모든 정부기관은 33%이상의 여성 지도자들을 임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또 대학생들에 의해 시작된 이번 몬순혁명에서도 여학생들의 참여율이 높았고, 반정부 시위를 주도한 사미아와 같은 여성들의 활동도 돋보였습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방글라데시 여성의 초중등학교 취학률은 대략 51%로 남성보다 비슷하거나 더 높지만, 대학과 대학원 등의 고등교육기관 취학률은 남성의 절반에 불과합니다. 2023년 42개 공립대학 여학생 비율은 37%, 103개 사립대학 여학생 비율은 28%에 머물고 있습니다.
방글라데시 여성의 아동 결혼률이 매우 높습니다. 2020년 통계에 따르면, 18세 이전에 결혼하는 여성이 51%, 이중 15세 이전에 결혼한 여성은 15%에 달합니다. 그나마 이는 1970년의 93%와 77%에 비하면 많이 낮아진 수치입니다.
2023년 여성의 취업률(37%)은 남성(80%)의 절반 이하이며, 노동인구 중 여성의 실업률(5.9%)은 남성(2.8%)에 비해 두 배나 높습니다.
즉 방글라데시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 고등교육과 취업의 기회를 절반밖에 갖지 못하고 있으며, 대부분 가정생활과 저임금취업에 묶여 있다는 뜻입니다.
또 대학교의 여학생들은 재학 중 학업이나 생활에서 불이익을 겪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습니다. 특히 캠퍼스에서 교수나 남학생들에게 성희롱이나 추행을 당하는 경우가 많으며, 심지어 기숙사에서의 강간사건도 빈번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여성의 불이익은 점차 개선되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방글라데시의 여성의 지위는 아직도 세계 최하 10개국으로 분류될 정도입니다.
다만, 몬순혁명과 함께 방글라데시가 민주사회로 빠르게 이행한다면, 가정, 교육과 취업 등의 사회생활에서의 남녀의 격차도 빠르게 줄어들 것으로 기대되고 있습니다. (*)
이들은 지난 10월30일 한국 입국비자를 발급받았고, 11월4일 한국에 도착, 11월11일까지 서울과 광주 등을 방문해서, 몬순혁명의 배경과 경과를 설명하고, 혁명의 기록과 희생자 예우를 위한 자문을 구하게 됩니다.
모스피쿠르 라흐만 조한씨는 사립 브라크 대학에서 인류학을 전공했고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로 활동 중입니다.
그는 사진전과 SNS포스팅을 통해 방글라데시의 강제실종, 사법외 살인, 강제구금, 경찰의 잔혹행위 등을 기록하고 고발해 왔습니다.
하시나 정권 하의 강제실종
이번 방한을 통해 모스피쿠르씨는 방글라데시 전역에서 벌어진 강제실종과 사법외 살인의 실태를 발표할 예정입니다.
강제실종(enforced disappearance)이란 민간인이 법원의 영장 발부 없이 경찰과 정보기관, 군과 준군사조직 등에 의해 체포, 구금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법외 살인(extrajucial killing)이란 적법한 사법절차에 의하지 않은 정부의 민간인 살해행위를 가리킵니다.
민간인을 체포하거나 살해하면서도 기록을 남기지 않기 때문에 가족들조차 강제실종자들의 생사를 알 수 없고, 구금된 장소도 알 수 없습니다.
주로 야당 지도자들과 반정부 활동가들이 강제 실종되기 때문에, 고문과 잔혹행위가 자행되는 경우가 많고, 고문 중에 사망하더라도 사체가 암매장되거나 유기되기 때문에 가족들에게 전해지지 않습니다.
강제실종은 1930년대 나치 독일 치하에서 빈번하게 자행되었고, 1960년대에는 중남미의 군사정부들이 공포 정치의 수단으로 채택하곤 했습니다.
방글라데시의 인권단체인 오디카르(odhikar.org)에 따르면 하시나가 집권한 2009년부터 2024년까지 방글라데시의 강제실종자는 708명입니다.
이는 강제실종자 피해자연합회를 통해 파악된 숫자이기 때문에, 실제 강제실종자와 강제실종 중의 사망자 규모는 훨씬 클 것으로 추측되었습니다.
그러나 하시나 정부는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강제실종 관행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 왔습니다.
방글라데시의 경찰 기록은 일반기록(GD)와 중범죄기록(FIR)으로 나뉘지만, 가족들이 강제실종을 신고하더라도 경찰은 실종의 불법유무를 판단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 두 기록에 등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가족들의 조사 요구를 묵살한 것이지요.
나아가 하시나 정부는 피해자 가족들을 통해 강제실종을 조사하고 기록해 온 인권단체 오디카르를 탄압했습니다.
2018년 오디카르의 선거참관 자격을 박탈했고, 2022년에는 국가 위신을 실추시켰다는 이유로 시민단체 자격을 박탈했습니다. 2023년에는 정부의 인권위반 상황을 출판했다는 이유로 오디카르의 대표와 사무총장에게 2년 징역형을 부과했습니다.
UN과 인권감시(Human Rights Watch), 국제앰네스티 등의 국제기구들은 하시나 정권에게 이같은 인권유린 행위를 중지하도록 반복적으로 경고했지만, 아무 변화가 없었습니다.
하시나 정권의 공포정치와 신속대응부대(RAB)
방글라데시의 강제실종은 주로 신속대응부대(RAB, Rapid Action Battalion)라는 군사조직이 자행했습니다.
역설적인 사실은 RAB가 원래 하시나의 아와미리그(AL)가 야당이던 시절인 2004년 당시 총리 칼레다 지아가 이끄는 방글라데시 민족주의자 정당(BNP) 집권 하에서 조직되었다는 점입니다.
범죄와 테러에 신속하게 대응한다는 명분 아래 활동을 시작한 RAB의 요원들은 방글라데시 육해공군과 경찰, 국경수비대와 최대 준군사조직인 안사르(Ansar)에서 차출된 군인들로 충원됩니다.
이들은 명령받은 임무수행 중의 행위에 대해 면책특권을 부여받고 있었기 때문에, 사법외 살인과 강제실종의 소지가 있었습니다.
당시 야당이던 아와미 리그(AL)와 하시나 당수는 RAB가 “헌법조항과 인권법과 사법절차를 공공연하게 무시하는 조직”이라고 비판하면서 그 해체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2009년 아와미 리그가 집권하고 하시나가 총리에 취임하면서 RAB는 해체되기는커녕 오히려 조직이 증설되고 활동이 강화됐습니다. 2005년 5,500명이던 BAT요원들이 2021년 15개 부대에 편성된 15,000명으로 증가했습니다.
미국과 영국의 RAB 지원과 제재
2010년 영국과 미국 정부가 방글라데시의 RAB의 훈련에 관련되었다는 증거가 발견되었고, 따라서 서방 국가들도 방글라데시의 강제실종과 사법외 살인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는 주장도 제기됐습니다.
2021년 12월21일 <아틀란틱 협의회(Atlantic Council)>에 발표된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학교 석좌교수 알리 리아스(Ali Riaz)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RAB 창설 직후인 2005년부터 이 단체가 사법외 살인과 강제실종에 관련된 것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2005년 6월5일 미국의 맥컬프 자문위원은 2004년 출범한 RAB의 초대 부대장 초두리 파즐룰 바리(Chowdhury Fazlul Bari) 중령으로부터 “크로스파이어(=사법외 살인을 가리킴)는 단기적인 필수 방편”이라는 발언을 듣고도 묵인했다고 한 것입니다.
리아스 교수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2009년에도 RAB에 인권 교육 훈련을 제공했고, 영국 정부도 2008-2011년 RAB에 “심문 기술”과 “교전 수칙” 훈련을 제공했습니다.
이는 미국과 영국 정부가 RAB의 수사와 심문이 인권을 침해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이를 바로잡기 위한 훈련을 제공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리아스 교수는 또 2009년 제임스 모리아티 미국대사가 RAB는 “방글라데시의 테러진압을 위한 최고의 수단”이라고 말하고서 “앞으로 RAB는 미국의 FBI와 같은 기관으로 자리잡을 것”이라고 전망했던 사실도 지적했습니다.
방글라데시의 RAB가 효과적인 수사기관이 될 것을 기대하면서, RAB의 인권침해 활동을 묵인했던 것으로 해석됩니다.
미국 정부는 또 2019년 RAB 간부들을 미국으로 초청해이 “지역 기반 SNS 감시체계 소프트웨어” 사용법 교육을 받도록 했는데, 이는 하시나 정권의 RAB가 반정부 활동가나 야당 지도자들의 위치를 추적하는 데에 활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미국과 영국 정부의 RAB 지원 사실이 마침내 양국 의회에 알려져 제재 요구가 제기됐습니다. 2020년 10명의 미국 상원의원들이 마이크 폼페이 국무장관과 스티븐 먼친 재무장관에게 방글라데시 RAB 간부들을 제재할 것을 요구했고, 영국 의회에서도 2021년 15명의 전,현직 RAB 간부들을 제재하라는 요구가 제출되었습니다.
이에 미국은 2021년 강제실종과 사법외 살인의 주범으로 지목된 RAB 간부들에 대해 입국금지조치를 내리는 등, 방글라데시 정부에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고, 이와 함께 RAB의 강제실종과 사법외 살인의 건수는 현저하게 감소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도됐습니다.
미국과 영국 정부가 강제실종과 사법외 살인을 자행한 방글라데시의 RAB를 지원해왔다는 사실에 대한 임시과도정부의 입장이 무엇인지, 이고은씨를 통해 무스타인 빌라 자히르씨에게 질문했으나, 이 글을 포스팅하는 시간까지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혁명의 수습과 방글라데시 내부 개혁에 집중하고 있는 유누스 과도정부로서는 아직 내정과 외교 문제를 동시에 정리하거나 책임을 물을 단계가 아닌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드러나는 강제실종과 사법외 살인
하시나 정권이 무너지고 임시과도정부에서 강제실종과 사법외 살인 피해조사를 시작하자,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강제실종 구금자보다 살해된 사람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강제실종의 목표가 구금이 아니라 살해였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카에서 발행되는 벵갈어 신문 <보니크 바르타(Bonik Barta)>에 따르면, 하시나가 집권한 2009-2023년 사이에 677명이 강제실종으로 구금됐고, 구금 중 사망자 수가 1,048명에 달한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같은 기간 사법절차를 거치지 않고 정부기관에 의해 살해된 방글라데시의 사법외 살인 희생자가 적어도 2,699명에 달한 것으로 보도됐습니다.
유누스가 이끄는 임시과도정부는 2024년 8월29일 하시나 정권이 지속적으로 회피해 온 강제실종 국제협약에 가입했습니다.
그와함께 전직 판사와 고위직 공무원과 사회활동가로 구성된 강제실종 조사위원회를 발족, 하시나 정권 하에서 자행된 강제실종과 사법외 살인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하시나 정권의 인권유린 사례가 확인되기 시작함에 따라 임시과도정부는 2024년 10월17일 전총리 셰이크 하시나와 44명의 전직 고위관료들에게, 이들이 민중 봉기 기간에 자행한 “학살과 살인, 반인권 범죄”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했습니다.
모스피쿠르 라흐만 조한씨의 피해자 기록
모스피쿠르씨는 이번 방한 기간 적어도 2차례의 간담회를 통해 하시나 정권 하에서 자행된 강제실종과 사법외 살인의 피해자와 가족들의 실태를 발표할 예정입니다.
그동안 강제실종과 사법외 살인 피해자의 가족들을 취재해 온 모스피쿠르씨는 이번 한국 발표를 위해 85쪽에 달하는 피해자 관련 자료를 보내왔는데, 그 대부분은 강제실종 피해자 가족들의 증언과 이들이 지내온 고통의 순간들이 담겨 있습니다.
모스피쿠르씨가 전한 자료 중에는 강제실종 아카이브가 포함됩니다. 하시나 정권이 강제실종 자체를 부정하고 조사를 거부해온 가운데, 피해자 가족들은 강제실종된 부모, 남편과 아내, 아들과 딸에 대한 가능한 모든 기록을 보관해 왔는데, 이 기록들을 한데 모아 아카이브를 구성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강제실종과 관련된 신문기사와 사진, 영상과 CCTV기록, 가족들의 일기와 메모 등이 포함되어 있어, 향후 조사와 처벌, 피해보상 등을 위한 소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공포정치를 극복한 몬순혁명
강제실종과 사법외 살인은 하시나 정권이 지속적으로 활용한 통치기법임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유엔을 포함한 국제인권단체들이 지속적으로 이를 중지하도록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시나 정권은 이를 계속해 왔습니다.
이는 정치적 반대자들을 납치하고 살해함으로써, 전국민을 공포로 몰아넣는 방법으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모스피쿠르씨의 발표는 방글라데시 국민들이 경험해 온 공포와 슬픔을 대변합니다.
무스타인 빌라 자히르씨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국제포럼 발표문이 몬순혁명의 경과와 결과를 요약한다면, 모스피쿠르씨의 강제실종과 사법외 살인의 기록은 몬순혁명의 배경을 잘 설명해 줍니다.
공포와 슬픔 속에 사반세기를 살았던 방글라데시의 시민들이 마침내 공포를 극복하고 강제실종과 사법외 살인으로 정권을 유지해온 하시나 정부를 무너뜨린 것입니다.
무스타인 빌라 자히르씨는 그의 포럼 발표문에서 “(순교자) 사예드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동영상이 sns를 통해 전국으로 퍼져” 나가면서 “하시나가 만든 공포의 장막이 무너졌”다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그는 또 “사예드가 당긴 불길이 무그도의 순교로 화산처럼 폭발했”고, 이것이 대중을 단결시켜 “불가능해 보였던 것을 가능하게 했다”면서, 그것은 곧 “공포정치를 무너뜨리고 살인적인 몰록(Moloch)으로부터 나라의 영혼은 구하는 일”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모스피쿠르 라흐만 조한씨는 수십년 동안 방글라데시에 이같은 공포가 조성된 것은 강제실종과 사법외 살인에 의존한 하시나 정권의 통치 때문이었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
그러나, 이 그림엽서의 유래에 대해서는 상세한 검토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특히 텔레비전 방영 중에는 근거가 없는 추론도 볼 수 있다. 본고에서는 이 그림엽서에 대해 이 그림엽서가 작성되기에 이르는 과정과 오키노 이와사부로의 손아귀에 남아 있었던 경위에 대해 관련 자료를 제시하면서 검증한다.
오키노 이와사부로는 1876년 와카야마현 히다카군(日高郡) 사무카와무라(寒川村)에서 태어났다. 동사무소의 서기나 산림 노동자등을 거쳐, 1890년에 와카야마 사범학교에 입학, 졸업 후에는 초등학교 교원이 되어 사무카와(寒川) 초등학교의 교장을 맡았다. 1901년에 수세하여 크리스천이 되었고, 1904년에 상경해 9월에 메이지 학원 신학부에 입학했다. 메이지 학원 재학중, 동기 입학의 카가와 토요히코(賀川豊彦)등과 러일 전쟁에 반대해 비전론을 주장했다. 1907년 졸업과 동시에 와카야마현의 일본기독교회 신구교회 목사가 되어 신구(新宮) 거주 의사이자 사회운동가인 오이시 세이노스케(大石誠之助) 등과 친교를 맺었다. 1910년의 대역 사건에 휘말리지만, 오키노는 위기에서 체포를 면했다. 1917년에 대역 사건을 테마로 집필한 소설 「숙명(宿命)」이 『오사카아사히신문』의 현상 소설에 입선해, 이후 문필 활동에 들어가, 소설, 동화, 평론, 수필, 기행 등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다(4).
오키노는, 전후 1952년에, 장서 28상자, 자저 4상자와 원고, 서한등을 포함한 자료를 메이지 학원에 기증했다. 이 중 일반 서적류는 대학 도서관의 장서로서 열람에 제공되었지만, 8개의 두루마리로 표장된 서한류는 특별 귀중 자료로서 귀중 서고에 보관되어 있다. 이 서한류에 대해서는, 1969년 1월에 도서관내에서 「오키노 이와사부로 기증서한 내용소개」가 작성되어 1982년 11월에 메이지가쿠인 대학교 도서관으로부터 간행된 「오키노 이와사부로 문고목록」에 그것이 재록되어 있다(5).
서한·엽서 등을 표장한 8권의 두루마리는 각각 1~8권의 권수가 기록되어 있고, 제6권과 제8권에는 표에 「1910년 사건」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 중 제6권에는 오키노 이와사부로·하루(ハル)부부가 발행하고 있던 잡지 『선셋(サンセット)』의 발행이나 발금에 관련된 서류, 대역 사건의 재판에 관련된 항소 신청서나 변호사 히라데 오사무(平出修)의 서한, 사키쿠보 세이치(崎久保誓一), 오이시 세이노스케(大石誠之助)의 서한, 엽서 등이 표장되어 있다. 제8권은 사키쿠보 쇼이치(崎久保誓一), 오오이시 세이노스케(大石誠之助)에서 오키노 이와사부로에게 보낸 옥중 서한이 중심이다.
제6권은 폭 25cm, 전체 길이 1670cm로, 그 1040cm쯤에, 행덕추수(幸徳秋水)의 한시가 쓰여져, 영문 캡션이 들어간 그림엽서가 붙여져 있다(그림 1). 이 오른쪽에는 사키쿠보 쇼이치(崎久保誓一)가 1929년부터 1930년에 걸쳐 오키노 이와사부로에게 보낸 6장의 엽서가 붙어 있다.
사키쿠보 맹세이치는 1911년 1월18일에 대역죄로 사형 판결을 받았지만, 다음날의 천황 특사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아키타 형무소에서 복역하고 1929년에 가석방되었다. 두루마리의 이 부분 6장의 엽서는 가석방 후에 사키쿠보에서 오키노로 보내진 것으로, 엽서의 앞뒷면을 박리하여 양면을 나란히 표장하였다. 이 엽서의 줄에 붙어 있는 안중근의 그림엽서는 사진면만 표장되어 있다.
그림엽서 뒤(왼쪽)에는 ‘도쿄 우시고메 도미히사쵸 113 오이시 세이노스케’에서 ‘기노쿠니신구쵸 기독교회 오키노 이와사부로’ 앞으로 보낸 봉투와 1911년 1월 6일자 옥중에서 성경을 읽은 소감이라는 서한이 붙어 있다. 도쿄 우시고메 토미히사쵸 113은 도쿄 감옥의 주소로, 이곳에 수감되어 있던 오이시 세이노스케는 1월24일에 코토쿠 아키미즈(幸徳秋水)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오오이시 세이노스케로부터 오키노 이와사부로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1월20일자 서한은, 제8권의 마지막에 표장되어 있다.
이 '내용 소개'가 작성된 1969년보다 전인 1964~66년경에 대역 사건의 자료 조사를 위하여 오키노 이와사부로 문고를 조사한 칸자키 기요시(神崎清)가 이 그림엽서를 '발견'하여 1967년에 간행한 칸자키 기요시 '이 암흑 재판(혁명 전설 3)'(하가서점(芳賀書店) 1967)에 그림엽서의 화상을 게재하고 있었다(그림 2). 촬영 조건이 나빴기 때문인지, 매우 화질이 나쁜 것이지만, 사진 오른쪽 아래에 「47」이라는 연필의 기입(6)이 찍혀 있어 오키노 이와사부로 문고의 사진과 동일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대역사건의 재판에 있어서는, 대심원의 서기가 손으로 피고들의 압수물에 관한 일람 리스트를 작성했다. 대역 사건은 비밀재판이었기 때문에, 이 압수물 리스트도 엄격하게 관리되어, 담당의 변호사에게는 공판 종료 후의 반납을 조건으로 등본이 대여되고 있었다. 변호사 히라데 오사무(平出修)는, 그 일부의 복사물을 만들어, 신구(新宮)에서 피고 가족의 지원 등에 임하고 있던 오키노 이와사부로(沖野岩三郎)에게도 보냈다고 한다(7). 전후 칸자키 기요시(神崎清)가 담당 검사에게 남아 있던 그 압수물 리스트를 입수하여 이것에 색인을 붙여 영인 간행한 것이 대역 사건 기록 간행회 『증거물사』1964이다.
간자키 기요시는 메이지가쿠인대 오키노 이와사부로 문고의 두루마리 제6권에서 증거물사에 필사된 것과 같은 한시와 영문 캡션 그림엽서를 발견했다. 이에 따라 오키노 이와사부로 문고의 두루마리에 붙어 있는 것이 고토쿠추스이가 체포 시에 압수된 그림엽서와 같은 종류의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The Korean Martyr who killed Prince Ito at Harbin. As seen in this picture, the cut off Ring-Finger of the left hand represents the oath of a regicide, according to the old custom of the Koreans. The characters of the upper corners of the picture is facsimile of the Poem written by D. KOTOKU, a prominent Japanese Anarchist, praising the brave conduct of the martyr.
칸자키 기요시는, 이 그림엽서에 대해서, 화상을 게재한 저서 「이 암흑 재판」에는, 「메이지 42년 10월 26일, 하얼빈 역두에서 한국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암살한 조선인 혁명가 안중근의 사진으로, 샌프란시스코 평민사의 오카 시게키가 만든 그림엽서에, 「추수제」라고 하는 서명이 들어간 한시가 인쇄되어 있었다」(9)라고 적었다.
그러나, 칸자키 키요시가 저서에서 소개한 후에 나온 메이지 학원 발행의 「오키노 이와사부로 기증 서한 내용 소개」에는, 이 기술 내용은 반영되지 않고 「책의 오려내기」라고 하고 있다. 칸자키 기요시의 정보가 메이지가쿠인 대학 도서관에 전해지지 않았던가, 칸자키 기요시의 저서의 기재를 간과했을 것이다.
오카시게키(岡繁樹)는 1878년에 고치현 아키시(安芸市)에서 태어났다. 17세에 상경해 야학에 다니며 육군사관학교에 응시했지만 실패. 1899년에 만조보(萬朝報)에 입사해 기자가 되었다. 여기서 코토쿠 아키미즈(幸徳秋水), 사카이 토시히코(堺利彦), 키노시타 나오에(木下尚江) 등과 알게 되었지만, 주필인 마츠이 가시와켄(松井柏軒)을 구타해 퇴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코토쿠 아키미즈나 사카이 토시히코의 보살핌으로 미국에 건너갔다(10). 1902년 3월 15일 요코하마를 떠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것이 4월3일. 그 이후, 샌프란시스코에서 금문(金門)인쇄소를 경영하면서, 샌프란시스코 평민사(平民社)에서 활동하고 있었다(11).
1905년에 필화 사건으로 금고 5개월의 형을 받은 코토쿠 추스이는 형기를 마치고 출옥하자 11월14일에 요코하마에서 이요마루(伊予丸)에 승선하여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동행한 조카 코토쿠 코우에(幸徳幸衛)와 친구 오카시게키(岡繁樹)의 신세를 졌다(그림 4). 그런데 이듬해 4월 18일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이 일어났다. 그 때문에, 코토쿠 추스이는 6월5일에 홍콩환(香港丸)에 승선해 23일에 요코하마에 돌아올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조카 고토쿠 유키에(幸徳幸衛)는 그림 공부를 하기 위해 귀국하지 않고 그대로 샌프란시스코에 남았다(12). 이러한 관계로, 코토쿠 추스이는, 귀국 후에도 샌프란시스코의 오카 시게키(岡繁樹)와의 사이에서 서한이나 엽서로 교환을 하고 있었다.
그 교환 속에서 1910년 5월 후반에 오카 시게키로부터 코토쿠 아키스이 앞으로 안중근의 그림엽서의 견본이 보내져 있었다. 이 사실은 상술한 『증거물사』 속의 압수기록에 남아 있는 서한에 의해 확인할 수 있다. 코토쿠 추스이가 오이시 세이노스케에게 보낸 이 서한은 오이시 세이노스케가 신구에서 체포되었을 때 압수된 것으로, 이 서한의 말미에 샌프란시스코 동지가 만든 그림엽서의 「견본」을 동봉하자 코토쿠 추스이가 쓰고 있다.
코토쿠추스이가 유가와라에서 체포된 것은 1910년 6월1일이었다. 와카야마의 신구에서는 6월 3일 이른 아침부터 코토쿠 추스이의 관계자의 주거가 가택수색되었다. 이 시점에서는 코토쿠 아키미즈등의 체포는 아직 보도되지 않고, 다음 4일이 되어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에 코토쿠 아키미즈 체포의 기사가 실렸다. 그리고 6월5일에 오오이시 세이노스케가 체포되었다. 오키노 이와사부로도 3일에 가택 수색을 받고 있어 검사에 의한 사정 청취도 있었지만 체포는 되지 않았다. 그 후, 6월말부터 7월에 걸쳐, 세이시 헤이지로, 사키쿠보 誓一, 타카기 아키아키, 미네오 세츠도 등이 차례차례 체포되었다. 그러나 오키노 이와사부로만은 끝내 체포되지 않았다.
그는 남편이 무엇을 위한 가택수사였는지 전혀 몰랐지만, 다음날 신문을 보고 처음으로 남편이 페테르부르크에서 드미트리 일파가 사와야마의 폭탄을 제조해 겨울궁을 습격한 사건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드미트리는 그 달의 하루에 교외 동지의 집에서 포박된 것이었다.
오키노 이와사부로는 대역 사건에서의 체포를 면했지만, 이것에 대해서 오키노 이와사부로 자신은, 도쿄 여행에서 돌아온 오이시 세이노스케가 1909년 1월에 신구에서 연 신년회에 출석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14). 세이시 헤이지로, 사키쿠보 쇼이치, 타카기 아키아키, 미네오 세츠도가 참가한 이 신년회에, 「오키노는 술을 마시지 않기 때문에 부르지 말자」라고 하는 오오이시 세이노스케의 한마디로, 오키노 이와사부로에게는 권유가 걸리지 않았다. 수사 당국의 소식통에 의하면, 이 신년회에서 대역 사건의 모의가 행해졌다고 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키노 이와사부로는 체포를 면했다고 하는 것이다. 오오이시 세이노스케와 세이시 헤이지로는 형사, 특사로 무기형이 된 타카기 아키아키와 미네오 세츠도는 옥사, 사키쿠보 쇼이치만이 18년 후에 가석방으로 생환할 수 있었다. 오키노 이와사부로는, 재판중은 현지의 신구에 머물러 피고 가족등의 구원·지원 활동에 임했다.
상술한 바와 같이 칸자키 기요시가 오키노문고에 있는 안중근의 그림엽서에 대해 「오카 시게키가 영문을 넣어 인쇄한 것」이라고 단정한 것은, 이 5월26일자의 서한이 근거인 것일 것이다. 그러나 오이시 세이노스케의 압수물 목록 중에는 동봉되어 있었을 그림엽서 견본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 한편, 그 그림엽서와 같은 것이 오키노 이와사부로가 보관하고 있던 자료 속에 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칸자키 키요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라고 전하고 있다.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은, 이것보다 앞서, 1909년 11월 10일에 이미 안중근의 사진을 지면에 게재하고 있었다(그림 6). 이것은 하얼빈의 일본 영사관에서 찍은 뒷짐에 구속된 요승 차림의 안중근의 사진을 트리밍한 것으로, 절단된 손가락은 찍히지 않았다. 11월 28일에 재차 게재된 상기의 손가락을 보이고 있는 사진의 해설에서는, 「그 부분에 있어서 비밀에 부쳐 아직 세상에 발표되지 않은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이 두 장의 사진은 하얼빈(ハルビンの日本)의 일본 영사관에서 같은 시간에 찍혔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안중근의 이 두 장의 사진은, 정부 기관이나 수사 당국으로부터 신문사등의 외부에 11월중에 유출되고 있었다.
13.단지의 목적은 대한국의 독립을 기하기 위해서, 독립하기까지는 어떠한 방법 수단도 감행할 생각이나 단지는 작년 12월이나 금년 정월이라고 생각하는 「하리」김성방 전술의 여관에서 절단·단지의 당시는 민심 산란하고 또 자신을 믿는 것보다 자신은 국가를 위해 진진하는 열심을 타인에게 나타내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 단지된 것이므로, 이토를 죽일 목적으로 하는 것은 일본 황제도 속이고 정책의 잘못을 사회에 공포하고 이를 파괴하려고 하는 것이므로, 이러한 목적에 의해 나온 결과 이토를 죽인 것이다
일본에서는 에도시대부터 '손가락 자르기 겐만' 등과 같이, 굳은 약속의 증거로서, 또 개심을 나타내기 위해서 손가락을 떨어뜨린다는 행위가 있었다. 그러나, 유녀나 도세인등의 심상치 않은 행위, 특수한 집단내에서의 행위라고 여겨지고 있었다(16). 그러한 일도 있어서, 「손가락을 떨어뜨리는」 것이, 일본사회에서도 강한 호기의 눈으로 보여지고 있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조선사회에서는 '단지'가 부모나 근친자의 병을 고치기 위한 행위였다는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고, 단지를 한 것이 현창된 예도 있었다(17). 그러나 '암살의 맹약으로서' 손가락을 자르는 '구관'이 있었다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안중근 자신은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여 독립을 요구하는 굳은 결의의 증거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安重根の写真絵葉書
안중근 사진그림엽서
『大阪毎日新聞』に掲載された安重根の二枚の写真は,両方とも絵葉書になったものが現存している。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에 실린 안중근의 두 장의 사진은 둘 다 그림엽서가 된 것이 현존하고 있다.
하나는 한국에서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그림엽서(그림7:그림엽서1)로, 2015년 3월말부터 6월 초순까지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서 열린 '광복 70주년 특별전'에서 안중근을 만나다(울림, 안중근을 만나다'에서 전시된 것이다. 사진은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이 1909년 11월28일에 게재한 절단한 약지를 보여 주는 포즈의 사진을 사용하고 있다. 사진면 하부에
1910년 당시의 그림엽서는 사진면에 문자를 쓰는 경우가 많았다. 1906년까지는 그림엽서의 앞면에는 주소와 주소밖에 쓰지 못하고, 통신문은 사진 부분에 쓰게 되어 있었다. 1907년 이후에는 표면 아래 1/3에 통신문을 쓸 수 있게 되었지만, 사진면에도 글을 쓰는 경우가 많아 그림엽서는 사진면에 글씨를 쓸 수 있도록 배경 부분이 지워져 있었다. 이 그림엽서도 배경이 지워져 있다. 표면에는
유가와라(湯河原)에 있던 코토쿠 추스이는 '일본제' 안중근의 그림엽서가 판매되고 있었던 것을 알고 있고, 이 4월29일의 기사를 보고 그것이 발매 금지된 것을 알았고, 그래서 '안중근의 것은 발매 금지'라고 써 보낸 것으로 생각된다. 즉, 야마구치 긴타로(山口金太郎)가 작성,판매하고 있던 그림엽서가 그림엽서1로, 코토쿠 슈스이는 이를 입수한 적이 있다는 추측이 성립된다.
もう一つ,絵葉書1 の安重根の写真が2~3 月に東京市内で使われたと思われる事例がある。
또 하나, 그림엽서1의 안중근 사진이 2-3월에 도쿄 시내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사례가 있다.
1910년 4월1일 발행된 <신한자유종(新韓自由鐘)>제3호라는 잡지 자료가 남아 있다. 단, 남아 있는 것은 잡지의 실물이 아니라 정보 수집을 위해 도쿄에서 입수한 <신한자유종> 제3호를 대한제국 내부경무국에서 일본어로 번역하여 필사한 것이다. 이 <신한자유종>은 당시 도쿄에 유학하고 있던 조선인 학생의 결사 <소년회(少年会>가 내고 있던 회람 잡지로, 메이지 학원 보통부에 다니던 이광수가 1·2호의 편집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광수는 1910년 3월에 메이지학원을 졸업했으며, 3호는 다른 멤버가 인수해 낸 것으로 보인다(18).
이것은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대한제국 내부 경무국에서 일본어로 번역했을 때에 필사한 것이며, 화상도 원화의 모사이다. 회람지에서는 사진을 전재할 수 없기 때문에 스케치나 사진이 붙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림엽서의 사진 부분이 붙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도쿄에 거주하는 조선인 유학생이 안중근의 이 포즈의 그림엽서1을 입수했을 가능성이 있다.
코토쿠 추스이는 그림엽서1을 구입하여 안중근의 사형판결이 확정된 것이 보도되었던 2월21일 이후에 '사생취의(舎生取義)살신성인(殺身成仁)‘ 즉, '삶을 버리고 의(義)를 취하고, 몸을 죽이고 인(仁)을 이룬다'라는 안중근에 대한 칭찬의 한시를 그림엽서의 사진 면에 써 넣어, 이것을 샌프란시스코의 오카 시게키 앞으로 투함했다고 하는 상정에 무리나 모순은 없다.
신한민보의 편집 발행인이었던 최정익 등과 오카 시게키와의 연결고리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3월말의 시점에서 이 행덕추수의 한시가 쓰여진 안중근의 사진은 오카 시게키의 수중 밖에 없었던 것으로, 「신한 민보」에 게재된 사진은 샌프란시스코 평민사의 오카 시게키가 제공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된다.
그 후로는 격조했습니다. 소생도 여전히 비상한 역경으로, 동서 방랑점에 이르렀습니다, 고우에사 작년 이래 한 번도 아닌 폐를 끼쳐 깊이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우에 감사 인사까지, 그 중에서 유츠쿠리 쓰겠습니다, 야노가와로부터도 자세한 내용을 받았습니다, 제군에게 잘 전해 주십시오, 소생은 지금 여기서 절절한 저술을 하고 있습니다, 가능하면 보내겠습니다.
날짜는 적혀 있지 않지만, 문면으로부터 3월말에서 4월초 쯤에 투함한 엽서라고 생각된다. 여기서는 한시를 써 보냈을 안중근의 그림엽서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즉, 코토쿠 추스이로부터는 자신이 보낸 그림엽서에 대해 어떠한 의뢰(예를 들면 샌프란시스코에서의 그림엽서 작성 등)를 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오카시게키는 행덕추수의 한시가 들어있는 그림엽서를 3월 중순경에 받으면 그 사진을 『신한민보』에 제공함과 동시에 행덕추수의 한시와 안중근의 사진을 복제한 것에 일본어 캡션을 영역하고 거기에 행덕추수를 소개하는 영문을 더해 자신이 경영하는 금문인쇄소에서 그림엽서를 작성했을 것이다. 4월의 후반에, 코토쿠 아키스이가 유가와라 아마노야로부터 보낸 그림엽서를 받고 코토쿠 아키스이의 거처를 알게 된 오카 시게키는, 스스로 작성한 그림엽서를 「견본」으로서 아마노야의 코토쿠 아키스이 앞으로 보냈다.
오이시 세이노스케는 오리건 주립 대학의 의학부를 졸업하고 몬트리올 대학이나 인도의 뭄바이 대학으로의 유학 경험도 있는 영어권에 발판이 있는 인물이었다. 샌프란시스코의 오카시게키가 보내 온 영문 캡션이 들어간 안중근의 그림엽서의 「견본」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오오이시 세이노스케의 아이디어나 어드바이스에 코토쿠 아키미즈는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신궁에서 친하게 지내던 오이시 세이노스케와 오키노 이와사부로와는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가택 수색을 받기 전날인 6월 2일도, 오키노 이와사부로는, 내방한 메이지 학원의 관계자와 함께 오오이시 세이노스케를 만나러 가고 있다. 그 때인가, 혹은 그 이전에, 오오이시 세이노스케가 오키노 이와사부로에게 이 그림엽서 「견본」을 건넸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3일 이른 아침부터, 오키노 이와사부로의 자택도 철저한 수색이 행해져 장시간에 걸쳐 조사도 행해졌다. 그러나 오키노 이와사부로(沖野岩三三郎)는 체포를 면했다. 재판에 회부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오키노 이와사부로에 대해서는 압수품 리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어떠한 것이 오키노 이와사부로의 수중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지금은 행덕추수가 안중근을 찬양하는 한시를 쓴 그림엽서가 나오면 큰일이 난다, 놓칠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행덕추수가 소지하고 있던 안중근의 그림엽서는 대역 사건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압수품 목록에는 안중근의 초상 부분은 생략돼 있다. 중요시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재판에서도 이 그림엽서가 거론되는 일은 없었다.
1926년에 창경궁 앞에서 일본인 3명을 태운 차가 칼을 든 남자에게 습격당해 한 명이 숨지고 다른 한 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일어났다. 4월 25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이坧)이 죽고, 그 조문에 간 일본인이 조선총독 사이토 미노루로 오인되어 습격당한 사건이다. 습격한 것은, 29세의 송학선으로, 이 사건은 「김호문 사건」이라고 불리고 있다. 사건 다음 날인 1926년 4월 29일자로 송학선의 진술조서가 관할 종로경찰서에서 경성지방법원 검사정에게 보내져 있다. 그 중에서 송학선은
경성의 본 마을에는 혼마치 2가 모퉁이에 히노데상행이라는 그림엽서나 액자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가게가 있었다. 1906년의 창업으로, 자사에서 그림엽서의 제조·판매를 함과 동시에 내지의 각종 그림엽서도 취급하고 있으며, 매장에서 그림엽서를 전시하고 있었다. 송학선의진술에 의하면,1910년혼마치히노데상행店頭之出商行의점두에안중근의그림엽서가전시되어있어,그것을조선인이칭찬하면서보고있었다. 12~3세의 송학선도 그 자리에 있으면서 안중근을 동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안중근이 처형된 3월 26일 이후, 안중근의 그림엽서를 경성에서 발매하려던 일본인 사진관이 발매가 금지되었다. 1910년 3월 29일자 조선어 일간지 대한매일신보는 안진발 售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일본인 사진업자가 안중근의 사진을 복사해 내외국인에게 판매한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2일후인 3월 31일자에는
이와타 사진관은 그림엽서 2에 있는 「경성 이와타 冩 신관 제판부」이다. 이 당시는, 점주인 이와타 타다시는 남대문통에 점포를 두고 있었다. 그림엽서2가 이때 판매가 금지된 것일 가능성은 높다. 송학선이 말한 「혼마치 그림엽서 서점에 진열」되어 있던 것은 장소나 제작의 시기로부터는 그림엽서2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사용하지 않는 그림엽서1이 현재 한국 국내에 남아 있는 것을 고려하면, 도쿄에서 2월에는 판매되고 있던 그림엽서1을 히노데상행이 매입해 매장에 두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병합 이전인 이 시기에도 병합 이후에도 조선과 내지는 여러 가지 대응이 달랐다. 병합 직전의 한국 경성과 도쿄는 안중근의 그림엽서 취급에도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도쿄에서는 안중근의 그림엽서가 별다른 규제 없이 4월 말까지는 판매되고 있었다. 게다가 도쿄에서 만들어진 안중근의 그림엽서는 경성에서도 가장 메인 스트리트인 혼마치도리의 그림엽서 전문점 매장에 놓여 있던 시기도 있었다.
코토쿠 추스이는 도쿄에서 안중근의 그림엽서 1을 입수하고, 거기에 안중근을 찬양하는 한시를 써 샌프란시스코의 오카 시게키에게 투함했다. 그것을 받은 오카 시게키는, 코토쿠 추스이의 한시를 곁들인 안중근의 옥중 사진을 복사해, 영문 캡션 첨부의 그림엽서를 만들어, 그것을 「견본」으로서 유가와라 아마노야에 체재하는 코토쿠 추스이의 곁으로 보냈다.
그림엽서 1의 판매는 금지되었지만, 오키노 이와사부로가 오이시 세이노스케로부터 맡은 코토쿠추스이의 한시가 그려진 샌프란시스코제의 그림엽서 견본은 압수당하지도 않고 오키노 이와사부로에 의해 보관되어 일본의 패전 후 대역 사건의 관계 자료의 하나로서 표장되어 메이지 학원에 기증되었던 것이다.
오키노 이와사부로는 1922년 5월에 조선과 만주(중국 동북부) 여행을 떠났다. 5월 9일 부산에 상륙하여 마산·진해·경주·군산·목포·전주·청주·충주를 돌아 경성으로, 그리고 인천·개성을 들러 이번에는 경성에서 원산(元山), 함흥(咸興), 경성(京城), 평양(平平壌), 의주(義州)로, 그리고 안동(安東), 봉천(奉天), 무순(撫順)과 대련[大連/여순]으로 돌고 있다. 이 여행에 대해서, 오키노 이와사부로는 이듬해 「살얼음을 밟아 봐」(23)를 출판해 조선이나 중국 동북부에서의 체험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의 거만하고 차별적인 태도에 대한 비판이 곳곳에서 드러나면서 3·1독립운동에도 강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만주로 들어가 마지막에는 뤼순에 들르지만 이곳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된 안중근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뤼순에서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이 비전론을 주창한 러일전쟁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그림엽서가 오늘날까지 보존됨으로써 일본과 한반도와의 관계를 '일본 대 조선', '일본 대 한국'이라는 국가적 차원의 대립구조로 보는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을 휘두르는 자·침략을 행하려는 자와 그에 항거하는 사람들이라는 구도 속에서 이 그림엽서가 만들어져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사실에 대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많은 것이다.
도진순「한국의 안중근과 일본 지식인들의 평화론 비교 - "합치고 동하지 않음" "닮고 틀리는 것" 지바17·유키토쿠추스이·도쿠토미로카·이시카와 타쿠키·나쓰메 소세키」『2017년 제4회 국제학술회의·류코쿠대학 소장 안중근 유묵 등 관계 자료 전시 예고집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를 다시 바라보기 위한 역사인식' 2017
(3) SBS 조선독립의 숨은 주역 일본인 독립투사들' 2011년 8월 15일 방송, MBC '안중근 의거 105년 끝나지 않은 전쟁' 2014년 8월 13일 방송
(4) 노구치 다마야 『오키노 이와사부로』 답청사 1989
(5) 메이지가쿠인대학도서관『오키노이와사부로문고목록』1982년
(6) 이 연필로 쓰여진 숫자는 두루마리에 표장된 다른 서한이나 엽서에도 쓰여져 있어, 표장에 낼 때에 순서의 기억으로서 써진 번호일 것이다. 단지, 표장된 것을 보면 모든 것이 번호대로 나란히 있는 것은 아니다.
(7) 대역사건기록간행회 『증거물사』1964 엽서
(8) 칸자키 키요마에 게제서 170쪽
(9) 간자키 기요시 앞에 게제서 168쪽
(10) 아라하타 한촌『한촌자전』상권 이와나미문고 1975194쪽
(11) 카토 테츠로 "반골의 재미 저널리스트 오카 시게키의 1936년 일본 방문과 위장 전향" "인텔리전스" 제4호(2004년 5월)
(12) 고토쿠추수를 현창하는 모임 『추수통신』 제23호 (2017년 12월)
(13) 오키노 이와사부로 「나는 살아있다」 오사카야호 상점 1925
(14) 노구치 다마야 『오키노 이와사부로』 답청사 1989
(15) 한국 국사편찬위원회 통감부 문서 제7권 문서번호 271 뤼순감옥에서의 안중근 진술내용
(16) 미타무라연어 [오락의 에도] 에후칸 1925
(17) 『현종개수실록』 현종 11년 5월 13일 조 "중보또진정평갑사박대유문천향리전무적단지활치부모의몽포장上曰令해당조특행정표(洪重普)가또주하여"정평갑사박대유와문천향리전무적이단치하여그부모를살렸으니포상하고장려하라"고. 국왕이 말하기를 "담당부서로 하여금 특히 선행을 기려 세상에 널리 나타내도록 하라"고."
(18) 사토 히문 해설『메이지학원 역사자료관 자료집』 제8집 2011
(19) 『신한민보』 1910년 3월 30일자 지면은 현재 서울 안중근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20) 행덕추수 전집 편집위원회 『행덕추수 전집』 제9권 1982515 페이지. 그림엽서는 오카 시게키의 유족이 고치 문학관에 기증한 가운데 남아 있다.
(21) 한국국사편찬위원회 데이터베이스 '국내 항일운동 자료'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검찰사무에 관한 기록3"경종경고비 제4769호 매후자 살해에 관한 건
2024년 여름, 세계는 가장 흥미진진한 운동 경기를 보기 위해 파리에 모였습니다. 세계의 이목이 각국 최고 인재들이 겨루는 올림피아드에 집중되었습니다.
방글라데시는 세계에서 여덟 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지만, 이 화려한 스포츠 행사에서는 별로 눈에 띄지 않습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고, 방글라데시는 단 하나의 메달도 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방글라데시는 다른 이유로 파리에서 주목받았고, 이는 이 나라와 그 정치에 있어 결정적인 계기가 될 것입니다.
방글라데시의 유일한 노벨상 수상자인 유누스 박사는 파리 올림픽에 참석, 파리의 올림픽 유치에 기여한 공로로 7월22일 '무함마드 유누스 교수 광장'이 명명되는 영예를 받았습니다.
유누스가 파리에서 젊은 선수들이 발휘하는 탁월한 재능을 지켜보는 동안, 그의 마음 한편에는 고국의 젊은 학생들이 살해당하고 있다는 소식이 무겁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2024년 7월 초부터 다카 거리와 대학 캠퍼스, 그리고 여러 주요 도시에는 수천 명의 시위대로 가득했습니다. 7월초 학생들이 차별적인 공무원 채용제의 개혁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이 나라 역사에 새로운 장을 쓰게 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4천5백만 명이 넘는 방글라데시의 청년들 중에서 약 1천3백만 명이 교육이나 취업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좋은 일자리를 얻을 가능성은 정치적으로 왜곡된 공무원 채용 할당제로 더욱 희박해졌습니다.
이 때문에 대학 졸업생들이 선호하는 직업을 얻는 데에 큰 장애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학생들은 부패한 시스템의 개혁을 요구한 것은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옳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총리였던 셰이크 하시나는 이 요구를 무시했고, 그녀가 늘 사용하던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그녀는 지난 15년 동안 모든 반대 요구를 억압하기 위해 같은 전술을 사용했고, 세 차례나 선거조작으로 권력을 유지해 왔습니다. 학생들의 근본적이고 논리적인 요구는 비방과 모독, 폭력적 공격에 부딪혔습니다.
하시나의 대응은 잔인하고 어리석었습니다. 그녀는 대량 학살을 서슴지 않았고, 어린아이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군대와 준군사조직에 강경 진압을 명령했고, 그들에게 "즉각 사살(shoot at sight)"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광기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준군사 세력은 헬리콥터로 시위대에 총격을 가했습니다. 경찰은 수천 명의 시위대를 체포하기 시작했고, 한밤중에 학생들을 집에서 연행했습니다. 마치 나라가 외국 침략자들에게 점령당한 것 같았습니다.
1,500명 이상이 사망했고, 거의 2만 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그중 일부는 파편에 맞아 시력을 잃었습니다.
7월 중순부터 날마다 나라 전체에서 무자비한 살상이 계속되었습니다. 사상자가 늘어날수록 시위대의 수는 더욱 불어났습니다. 이는 방글라데시 역사에서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15년 계속된 하시나의 독재 기간 중에 처음으로 테러가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갑자기 사람들의 마음에서 두려움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는 유누스 박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동안 그는 100개 이상의 조작된 소송과 징역형으로 위협을 받으면서도 그는 정치적 발언을 삼갔고,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무관심으로 일관했고, 정권과 그 비판자의 주장에 분명하게 거리를 두었습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파리에서 그는 국제 사회에 호소했습니다. 그는 방글라데시가 겪는 참혹한 현실을 공개하면서 이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습니다. 그는 범상치 않은 일이 전개되고 있으며, 이 나라가 중요한 분수령을 넘어섰다고 느겼던 것입니다.
존엄성 회복을 위한 Z세대의 반란
7월14일의 기자회견에서, 하시나는 시위대에 대해 모욕적인 발언을 했습니다. "자유투사들의 손자들이 (할당제의) 혜택을 받지 않으면, 누가 받겠습니까? 라자카르(Razakars)들의 손자들입니까?"
하시나는 시위 학생들을 라자카르들의 자손에 비교했습니다. 라자카르는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당시 파키스탄군과 협력하여 자유투사들과 싸웠던 민병대입니다.
그녀의 모독적 발언은 몇 시간 만에 다카 대학 기숙사에서 시위를 촉발시켰습니다. 그날 밤, 격분한 여학생들이 기숙사 밖으로 나와 "너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라자카르, 라자카르"라는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습니다.
학생들의 저항에 대응하여 당시 아와미 연맹(AL)의 사무총장 오바이둘 카더(Obaidul Quader)는 당 회의에서, 악명 높은 자신들의 학생 조직인 방글라데시 차트라 리그(BCL)가 '불온한 학생들'을 충분히 제압할 것이라고 발언했습니다.
7월15일, 카더의 발언 직후 BCL은 다카 대학에서 학생 시위대를 잔인하게 공격하며 몽둥이, 대나무 막대기, 곤봉 등으로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했고, 많은 학생들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두려움을 딛고 일어선 불꽃
7월16일, 영문학과 학생 아부 사예드(Abu Sayed)가 뜻밖의 행동으로 전국을 결집시켰습니다. 그는 학생 시위대에 참가하던 중 경찰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다른 학생들이 실탄을 피해 도망치는 동안 사예드는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 홀로 서서, 두 팔을 벌리고, 가슴을 활짝 열고 경찰의 사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백주대낮에 총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사예드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동영상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전국으로 퍼졌습니다. 하시나가 만든 공포의 장막이 무너졌고, 아부 사예드의 용기가 전염되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날부터 사람들, 특히 청년들은 총구 앞에서 목숨을 바칠 각오로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붉은 몬순과 물
사예드의 순교 이틀 후, 또 다른 용감한 학생이 다카의 시위 중심지에서 물병을 들고 달리는 모습이 영상에 포착되었습니다.
수학을 전공한 후 MBA 과정에 진학한 미르 마흐푸주르 라만 무그도(Mir Mahfuzur Rahman Mughdo)는 경찰이 최루탄을 쏘아 시위대를 해산시킬 때 우타라(Uttara)에서 시위대에게 물을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총알이 그의 이마에 명중해 오른쪽 귀를 뚫고 관통했습니다. 그는 15분 동안 더 숨을 쉴 수 있었지만, 병원으로 이송되기 전에 사망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물을 나누어주던 무그도의 영상은 무슬림 사회에 뿌리내린 강력한 이미지, 즉 카르발라(Karbala) 이야기를 상기시켰습니다. 무그도의 죽음을 담은 영상이 예언자 무함마드의 손자, 후사인 이븐 알리의 비극적인 역사를 연상시켰습니다.
유프라데스 강가에서 후사인 이븐 알리는 하시나와 같은 억압적인 정권에게 패배했고 부하들과 함께 학살당했습니다. 그들은 포위를 당해 며칠 동안 물을 마실 수 없었습니다.
무그도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영상은 수백만회의 조회수를 기록하면서 방글라데시 전역에 퍼졌고, 무그도의 마지막 말을 전했습니다. "물! 물이 필요해?"
사예드가 당긴 불길이 무그도의 순교로 화산처럼 폭발했고, 이는 스러진 목숨들을 위한 정의를 요구하기 위해서는 군중들이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다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전국으로 퍼져나가 수많은 대중을 단결시켰고 불가능해 보였던 것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즉 공포 정치를 무너뜨리고 살인적인 몰록(Moloch)으로부터 나라의 영혼을 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저격수와 헬리콥터까지 동원해 시위대에 발포하고, 어린이들까지 무차별로 사살하는 하시나 정권의 아와미 리그(AL) 깡패들과 보안군들이 바로 그 몰록이었습니다.
전국적 통행금지와 인터넷 차단
이 때쯤, 어떤 폭력도 대중의 물결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매일 수십 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재자는 최후의 수단에 의존했습니다. 7월19일, 그는 전국적으로 통행금지를 발효하고 군대를 배치했습니다.
파시스트 아와미 리그(AL)의 사무총장은 다시 한 번 카메라 앞에서 “즉각 사격(shoot-on-sight)” 정책을 발표하면서 시위자는 누구든 죽이겠다고 위협했고, 저항운동을 완전히 진압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통행금지와 함께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 접근이 차단되었습니다. 온 나라가 창살 없는 감옥이 되었습니다. 군대가 거리를 순찰했고, 외부 세계와의 소통이 단절되었습니다.
이 단계에서 저항운동은 마지막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지만,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지는 여전히 불투명했습니다. 유누스 박사는 파리에서 인터뷰를 통해 국제 사회의 주목을 촉구했습니다.
그는 대담한 성명을 발표해, 정부가 군대를 동원함으로써, 마치 외적이 이 나라를 침공한 것처럼 시위자들과 맞서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자국민을 대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최후의 전투
시위를 진압할 수 없게 되자, 정권은 학생들에게 가짜 협상 게임을 제안했습니다. 정보기관은 학생 지도자들에게 협상에 참여하라고 압력을 가했고, 경찰은 시위 조직자 6명을 구속했습니다.
7월28일, 경찰은 이 시위 조직자들에게 비디오 성명을 녹화하도록 강요하면서 예정된 시위 일정을 연기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역효과만 일으켰습니다. 학생들은 납치나 강요된 비디오 성명이 대중을 저지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이같은 정부의 조치는 학생과 대중을 더욱 격분시켰습니다. 다른 시위 조직자들은 즉시 거리로 나왔고, 비디오 성명은 가짜라고 반박했습니다.
학생 지도자들은 전면적인 비협조 운동을 촉구했습니다. 통행금지는 무시되었고, 수천 명의 시위자들이 도심과 공원, 주요 거리와 공공장소에 모여 하시나의 사퇴를 요구했습니다.
파시스트 독재자의 몰락
8월4일 밤, 학생들이 다카 행진을 발표했고, 수백만 명이 여러 장소에서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아침까지 수십만 명이 하시나의 관저를 향해 행진했습니다.
그녀는 군 헬리콥터를 타고 인도로 도주했습니다. 그녀가 도망간 뒤에는 부패와 학살과 실종, 역기능의 사법부, 그리고 경제위기 직전의 나라가 남았을 뿐입니다.
8월5일은 맑고 화창했고, 이 특별한 몬순의 도시 다카는 ‘아자디!’를 외치며 행진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해방의 언어가 공기 중에 퍼졌고, 수백만의 행진자들의 얼굴에는 자유의 기쁨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많은 이들은 믿기지 않는 듯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방글라데시 2.0의 시작
이틀간의 치열한 논의 끝에 학생운동 지도자들은 몬순 혁명으로 막 탄생된 제2공화국의 운전대를 맡을 사람으로 유누스 박사보다 나은 사람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가 아직 파리에 체류하는 동안, 그들은 “유누스를 믿는다!”고 선언했습니다. 새로운 임시 과도정부는 2024년 8월8일에 출범했고, 유누스 박사가 방글라데시 2.0의 수장으로 임명됐습니다.
이제 방글라데시는 무너진 시스템을 일으켜 세우고 트라우마를 겪은 국민을 치유해야 하는 막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파시즘의 해악이 재발하는 것을 막는 데에 필요한 개혁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유와 정의, 존엄성 속에서 번영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만행, 정치적 폭력, 권력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신뢰성 있는 책임과 회복의 메커니즘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강력한 국제적 지지와 지원, 연대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외국의 친구들이 나서 주기를 원하고, 이 역사적인 여정에 참여해 주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같은 가치와 헌신과 희망을 가지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아시아 태평양과 그 너머에서 사람들과 시민단체들과 강한 협력관계를 구축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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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자 무스타인 빌라 자히르(Mustain Billah Zahir)씨는 시민 참여 사상가로, 한국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KDF)의 국제 민주주의 친선대사이자, 현재 방글라데시 개헌위원으로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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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문 원문)
The July Massacre, Monsoon Revolution and the Language of Resistance in Bangladesh
by Mustain Billah Zahir
In the summer of 2024, the world gathered in Paris to experience the most riveting athletic performances. All eyes were on the Olympics—the oldest Olympiad where nations vie to outshine each other with the best of their best.
In spite of being the world’s eighth populous country, Bangladesh usually remains unrecognisable in this magnificent sporting event. This time it was not an exception either and the country failed to secure a single medal. But Bangladesh was visible in Paris for a different reason, and it would be proved to be fateful for the nation and its polity.
The country’s only Nobel Laureate Dr. Yunus was in the Paris Olympics, being honoured with Place du Professeur Muhammad Yunus on July 22 to celebrate his contributions to the city's Olympic bid.
While Yunus was witnessing a generation of young athletes showcasing the best of their talents in Paris, at the back of his mind, he was burdened with the grim stories of young students getting killed in his homeland. From the beginning of July 2024, streets of Dhaka, university campuses and other divisional cities were filled with thousands of protesters.
When students took to the streets in early July, demanding reforms of the discriminatory government job recruitment, they had little idea how it was about to write a new chapter in the history of their country.
A country of over 45 million youth, Bangladesh has about 13 million of young people who are neither in study, and to make matters worse, they don’t have a job either. The slime chance of getting a good job was further complicated by the politically twisted discriminatory public service quota system.
This is unmistakably a big problem for the graduates seeking the coveted jobs. Therefore, the students were morally and politically right in demanding the reform of the corrupt system.
However, the then Prime Minister Sheikh Hasina was very dismissive about the movement and didn’t bother to employ her usual playbook. She has been using the same tactics to quell every opposition demand in the last 15 years and holding onto power by conducting three consecutive farcical elections. Hence, this very basic and logical demand was met with vilification, dehumanising tactics and violent attacks.
The response from Hasina was brutal and imbecilic. She didn’t care to let loose a monstrous killing spree, even children were not spared. She ordered a crackdown that was overseen by the army and the paramilitary forces who were given shoot at sight orders.
The insanity even touched the sky— helicopters used by paramilitary forces were mobilised to shoot at protestors. Police started rounding up thousands of protestors, hounding young students at midnight by picking them up from their homes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 if the country was in the grip of some foreign invaders. More than one fifteen hundred have been killed, nearly twenty thousand injured including those blinded by pellet injuries.
From the middle of July, day in and day out the whole country woke up to incidents of one senseless killing after the other. The more she was killing, the bigger the number of protesters grew. It was a pivotal moment in the country’s history, as for the first time in her 15 years of authoritarian rule, no amount of terror was working and suddenly fear evaporated from the minds of the people.
This was also true of Dr. Yunus. Despite facing over a hundred trumped up cases and a deferred jail term, he seldom talked about politics, rather maintained a stoic indifference towards the democratic backsliding, kept a sharp distance from being associated with the critics of the regime or dissident voices.
But, not this time. From Paris, he appealed to the international community; laid bare the facts of brutality and sought their urgent attention to what was happening in Bangladesh. He could sense that something extraordinary was unfolding and the country crossed a watershed moment.
> Gen-Z Revolt To Recapture Dignity
During a news conference on July 14, in response to a question Hasina made a very derogatory remark about the protesters—“If the grandchildren of freedom fighters don’t receive [quota] benefits, who will? The grandchildren of Razakars?” By this aspersion, she compared the student protesters to children and grandchildren of Razakars—a militia force who collaborated with the Pakistan army and fought against the freedom fighters during the country’s Liberation War of 1971.
Her contemptuous comments ignited protests within hours at different dormitories of Dhaka University. That night, agitated female students took the lead, came out from the dormitories chanting the slogan “Who are you? Who am I? Razakar, Razakar.”
In response to students’ defiance, Obaidul Quader, the then general secretary of Awami League (AL), commented at a party meeting that their notorious student wing, BCL was enough to subdue ‘the unruly students’. On July 15, soon after Quader’s comment, BCL launched a vicious assault on student protesters at Dhaka University by beating them with rods, bamboo sticks and clubs, many were severely injured.
> The Spark Of The Fearlessness
On July 16, Abu Sayed, a university student studying English Literature triggered the surprising turn of events that would galvanise the whole nation. He was one amongst many protesting students attacked by the police. While others were in retreat to save themselves from the live bullets, Sayed did a very unusual thing. He stood firm, standing alone with two hands stretched out, fearlessly holding his chest open at the firing range. Within a moment, he was shot dead in broad daylight.
Across the nation, through social media the video footage of Sayed’s heroic posture spread like wildfire. The iron dome of fear created by Hasina began to crumble—the courage of Abu Sayed became contagious. From the next day, people, especially the youth, took to the streets en masse, standing tall and ready to sacrifice their lives in front of the guns.
> The Water Of The Red Monsoon
After two days of martyr Abu Sayed, another valiant student was seen on a video holding water bottles and running amidst the throng of people who gathered in one of the epicentres of the demonstration in Dhaka. Mir Mahfuzur Rahman Mughdo, a graduate in Mathematics who was doing his MBA was seen distributing water to protesters in Uttara after law enforcers fired teargas shells to disperse them. A bullet hit his forehead and pierced through his right ear. He was able to breathe for another 15 minutes. He was dead by the time his friend and fellow protesters rushed his listless body to the hospital.
The video of Mugdho handing out water before his death touched to the core of a deep-rooted and powerful imagery in the Muslim society, i.e., the story of Karbala. The emotional floodgate opened by Mughdo’s murder instantly electrified the memory of the tragic history of the Prophet Muhammad’s grandson.
On the bank of the Euphrates River Ḥussain ibn Ali was defeated and massacred along with his followers by an oppressive regime like Sheikh Hasina. While the group was under seize for days, they were denied access to water. The social media feeds of millions across Bangladesh could instantly relate to Mughdo’s last words—“Water! Do you need water?”
The fire lit by Sayed, now became a volcano with Mugdho’s martyrdom becoming a beacon that showed the masses the only direction they could take—hit the streets demanding justice for the lives lost. And it reverberated across the nation and united millions to think of the impossible—bringing down the reign of terror is not just necessary but essential to save the soul of the nation from a murderous Moloch—the thugs of AL functionaries in cohort with security forces indiscriminately killing children, using snipers and even helicopters to gun down the protestors.
> Nationwide Curfew And Communication Blackout
By this time, it was apparent that no amount of the violence would be enough to stop the tide of the masses. Despite scores killed and hundreds injured every single day, the dictator turned to the last resort—on July 19 imposed a nationwide curfew and deployed armed forces.
The Secretary General of the fascist AL, once again, announced on camera a “shoot-on-sight” policy to kill anyone protesting and vowed to crush the movement for once and all. In tandem with the curfew a communications blackout was imposed with the internet and social media access blocked. The entire nation was locked in what looked like an open prison, military convoys were patrolling the streets and no one could communicate with the outside world.
At this stage, the movement was visibly entering into the very final stage, but the outcome was not yet clear. Dr. Yunus gave an interview from Paris calling for international attention. With a bold statement, he said that by using the army the government was confronting the protestors as though a foreign enemy had invaded the country. “This is not how you deal with your own people.”
> The Final Battles
Unable to quell the protests, the regime set up a game of pseudo negotiation with the students. Intelligence agency mounted pressure on student leaders to engage in discussions. The police detained six movement coordinators. On July 28, the police forced these coordinators to record video statements urging student protesters to postpone all scheduled programs. But, that didn’t work, rather became counterproductive. Students made it clear that abduction or forcing students to issue video statements would not deter them.
This move by the government further incensed students and the masses. All other coordinators immediately took to the streets, denouncing the video statements. The student leaders called for an all-out non-cooperation movement unless their one-point demand was met. Defying curfew, protesters gathered in thousands at city centres, parks, major streets and other public places demanding Hasina’s resignation.
> The Fall Of the Fascist Dictator
On the night of 4th August, when students announced the march to Dhaka program, several million people started their march from different locations. By morning hundreds of thousands of people were already marching towards Hasina’s official residence. She fled to India by a military helicopter leaving behind a legacy of rampant corruption, mass murder, enforced disappearances, dysfunctional judiciary and a country on the verge of economic collapse.
August 5th was a bright sunny day and in this distinctive monsoon Dhaka city turned into a sea of people, marching and chanting ‘Aazadi’! The language of liberation percolated in the air and the joy of freedom glowing over on the face of million marchers—a great many of them were tearful and crying in disbelief.
> Steering Bangladesh 2.0
After two days of intense discussion the student leaders couldn’t find a better hand than Dr. Yunus to steer the wheel of the second republic bequeathed by the Monsoon Revolution. While he was still in Paris, they announced, “In Yunus we Trust!” The new interim government was sworn-in on the 8th August 2024 making Dr. Yunus the head of Bangladesh 2.0.
Now the country is confronted with an enormous challenge to navigate through the broken-down system and a traumatised nation. Necessary reforms are being initiated to prevent the evil of fascism resurface again. People want to flourish in liberty, justice and dignity.
In this regard dealing with the past atrocities, political violence and abuses of power will need a credible accountability and redress mechanism. It requires strong international support, assistance and solidarity. We would like friends across the board to come forward and be a part of this historic journey.
We wish to have a strong partnership with the people and civil society organizations who share the similar values, commitment and hopes for a better world in Asia Pacific and bey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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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tain Billah Zahir is a civic engagement thought leader, KDF International Democracy Goodwill Ambassador and currently serving as one of the members of the Constitutional Reform Commission in Bangladesh.
It all started with an email from Dhaka, the capital city of Bangladesh, from Mustain Zahir, a Bangladeshi civil rights activist, to Go-Eun Lee, a South Korean social activist.
The two were classmates at the Graduate School of Sociology at Sungkonghoe University in Seoul, Korea. Mr. Zahir, an international student from Bangladesh received his degree in 2016, and then participated in a series of projects related to 518 Gwangju.
Ms. Lee, Go-Eun, who majored in social movements in Bangladesh, worked on research projects at the Swedish Institute for Policy Studies for two years, and returned to Korea to work as a social activist. She has been an active participant in the <Muyong Shin> campaign since 2023.
In the email, Zahir described the situation in Bangladesh and asked for help.
"I'm so delighted to share that finally we got rid of the despot reigning and ravaging Bangladesh for the last 15 years! Now, we are passing through a momentous change after the successful mass uprising on 5th August 2024 that forced the autocrat to resign and flee from the country. She is now hiding in India!
"The student-people led Monsoon revolution has presented us with a historic opportunity to reimagine and rewrite the formation of a new political chapter. As a civil rights activist, and your friend, I'm proud to share that I have been very active during the movement and coordinated the student leaders at the forefront of this revolution. It was the best experience of my life, even though I had to go through ordeals of security crackdown and nightmarish situations!
"Before she left the country in the span of one month, the tyrant killed nearly one thousand people, thousands were severely injured and many more of the protesters are still traumatized. We are trying to collect the names, document the stories and wish to preserve this glorious history of our democratic struggle."
Having witnessed that the citizens of South Korea impeached then-President Park Geun-hye in 2016, and being familiar with the pro-democracy protests and sacrifices of the people of Gwangju in 1980, Mr. Zahir described South Korea as the role model for Bangladesh to redesign its politics and society.
"As you know in Korea CSO played an important role in initiating institutional mechanisms to find truths, seek accountability and instill the spirit to nurture ethos and sensibilities for the generations to come."
Mr. Zahir seems to believe that Bangladesh's monsoon revolution should learn from South Korea's experience in order to avoid following in the footsteps of the Arab Spring that took place in the Middle East and North Africa a decade ago.
"Having this knowledge and exposure, I couldn’t think of any better place to seek advice and suggestions to undertake a formal approach for Bangladesh so that we can also begin a process to do similar work in preserving and cultivating the aspiration of the heroes who made the supreme sacrifice for democracy, freedom and justice."
To facilitate the exchange and cooperation of citizens from both countries, Mr. Zahir asked for four things
1. It would be a great help, if PSPD/May18 or other like minded organizations come forward to help us make a systematic documentation of the events.
2. Korean Civil Society members and organizations can help us to pursue the truth and accountability measures in a structured way.
3. The May18 Memorial can come forward to help us build a collaborative Museum of democratic struggle and Monsoon Revolution in Bangladesh.
4. Inviting a group of young leaders in Korea to have an immersive orientation and practical knowhow for a week to share their experience and learn from Korean civil societies to know and do the above things.
After receiving the email, Ms. Lee, Go-Eun asked for help from Peace MOMO, the Democracy Movement Memorial Association, and Muyong Shin, and Muyong Shin agreed to invite two student representatives from Bangladesh to Korea.
Muyong Shin formed a sister organization, <Solidarity for Bangladesh>, led by Ms. Lee, Go-Eun, and asked her to be in charge of inviting student representatives of the Monsoon Revolution. With Mr. Zahir's help, Solidarity for Bangladesh selected two student representatives.
Ms. Samia Akther from Dhaka University (law, graduate school) and Mr. Rahman Johan from BRAC University (anthropology, photographer) are appointed. They have been leaders of the student movement during the Monsoon Revolution and will be visiting South Korea from November 4-11 with Mr. Zahir.
While Mr. Zahir will be visiting Korea at the invitation of the Democracy Movement Memorial Project, Ms. Samia Akter and Mr. Rahman Johan's invitation was supported by Solidarity for Bangladesh.
The cost of their visit was calculated to be 4.5 million won, including airfare and lodging, and <Solidarity for Bangladesh> started a fundraising campaign. It decided that it would be most meaningful to have Korean citizens sponsor their invitation.
This is how <Solidarity for Bangladesh> was formed, declared support for the Monsoon Revolution, and started fundraising activities.
We sincerely ask the citizens of the Republic of Korea to participate in the fundraising campaign with a donation of $10 (or more) so that Ms. Samia Aktor and Mr. Rahman Johan can visit Korea and fulfill their purpose. Thank you.
Fundraising Account: Kakao Bank, 7979-77-26093 (SFB, Ms. Lee, Go-Eun)
Fundraising Period: October 11, 2024 - November 3, 2024
Fundraising goal: 4.5 million won (7 days and 8 nights for two student representatives of the Monsoon Revolution)
Greetings from Bangladesh! Hope this email finds you well.
I'm so delighted to share that finally we got rid of the despot reigning and ravaging Bangladesh for the last 15 years! Now, we are passing through a momentous change after the successful mass uprising on 5th August 2024 that forced the autocrat to resign and flee from the country. She is now hiding in India!
The student-people led Monsoon revolution has presented us with a historic opportunity to reimagine and rewrite the formation of a new political chapter. As a civil rights activist, and your friend, I'm proud to share that I have been very active during the movement and coordinated the student leaders at the forefront of this revolution. It was the best experience of my life, even though I had to go through ordeals of security crackdown and nightmarish situations!
Before she left the country in the span of one month, the tyrant killed nearly one thousand people, thousands were severely injured and many more of the protesters are still traumatized. We are trying to collect the names, document the stories and wish to preserve this glorious history of our democratic struggle.
As you know in Korea CSO played an important role in initiating institutional mechanisms to find truths, seek accountability and instill the spirit to nurture ethos and sensibilities for the generations to come. Having this knowledge and exposure, I couldn’t think of any better place to seek advice and suggestions to undertake a formal approach for Bangladesh so that we can also begin a process to do similar work in preserving and cultivating the aspiration of the heroes who made the supreme sacrifice for democracy, freedom and justice.
And, this will also be an occasion to renew people to people ties between Bangladesh and Korea. In this regard, I would like to request few things:
1. It would be a great help, if PSPD/May18 or other like minded organizations come forward to help us make a systematic documentation of the events.
2. Korean Civil Society members and organizations can help us to pursue the truth and accountability measures in a structured way.
3. The May18 Memorial can come forward to help us build a collaborative Museum of democratic struggle and Monsoon Revolution in Bangladesh.
4. Inviting a group of young leaders in Korea to have an immersive orientation and practical knowhow for a week to share their experience and learn from Korean civil societies to know and do the above things.
These are my preliminary thoughts; I can expand on, given the interest and scope to explore a partnership. Will appreciate your kind help and advice in this regard.
이 모든 일이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에서 보내온 이메일 한 통으로 시작됐습니다. 방글라데시의 민권운동가 머스테인 자히르(Mustain Zahir)씨가 한국의 사회 활동가 이고은 선생에게 보내온 이메일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성공회대학교 사회학과 대학원의 동학입니다. 2016년 학위를 받은 방글라데시 유학생 자히르씨는 518광주 관련 프로젝트에 참가한 바 있다고 합니다. 또 방글라데시 사회운동을 전공한 이고은 선생은 졸업 후 2년간 스웨덴의 정책연구소 프로젝트를 수행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사회활동가로 일하기 시작했고, 2023년부터는 <무용신> 활동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이메일에서 자히르씨는 방글라데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면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영어로 보내온 이메일은 한국어 식으로 의역됐고, 원문은 이 글의 맨 끝에 전재했습니다.)
“(방글라데시의 학생과 시민들이) 15년 통치로 방글라데시를 피폐시킨 독재자를 몰아낼 수 있었다는 소식을 전해 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우리는 2024년 8월5일 대규모 시위를 통해 권위주의 정부를 무너뜨렸고, 하시나 전총리가 방글라데시를 떠나 인도에 망명한 후, 우리는 역사적인 변화를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몬순혁명>을 이끈 학생-시민들은 정치의 새 장을 열 수 있는 역사적인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민권운동가로서, 그리고 당신의 친구로서, 나도 이 혁명에 열성적으로 참가했고, 특히 이 혁명의 선봉에 선 학생 지도자들과 협력했습니다. 비록 당국의 보안단속을 피하면서 악몽 같은 상황을 견뎌야 했지만, 이 혁명은 제 인생 최고의 경험이었습니다.
“하시나 전총리는 방글라데시를 탈출하기 전까지 약 1개월 동안 1천여명의 시민을 사살했고, 수천명에게 중상을 입혔습니다. 시위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도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상자들의 신원을 파악하고, 이들의 희생과 피해 정황을 기록함으로써, 영광의 역사로 전환되는 민주화 투쟁 과정을 밝히고 보존하려고 합니다.”
2016년 대한민국의 시민들이 당시 대통령 박근혜를 탄핵하는 과정을 목격하고, 1980년 광주시민들의 민주화 항쟁과 희생도 잘 알고 있는 자히르씨는 방글라데시의 정치와 사회를 새롭게 설계하기 위해 대한민국이 전범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시민사회는 (518광주의) 진실을 밝히고, 책임 소재를 찾아내고, 다음 세대의 상식과 감성에 호소할 수 있는 정신을 일깨웠다고 생각합니다. 이 같은 한국의 경험을 잘 알고 있기에, 저는 앞으로 방글라데시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조언을 얻기에 대한민국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히르씨는 방글라데시의 몬순 혁명이 10여년 전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일어났던 아랍의 봄(Arab Spring)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한국의 경험을 배워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위해 그는 대한민국의 시민들이 방글라데시의 민주화 과정을 지지하고 연대함으로써 양국 시민운동이 교류하고 협력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민주와 자유와 정의를 위해 최고의 희생을 바친 영웅들의 열망을 보존하고 고양하기 위해서 방글라데시와 대한민국의 시민들이 협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같은 협력은 방글라데시와 대한민국 사이에 시민 연대를 새롭게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양국 시민의 교류와 협력을 위해 자히르씨는 다음과 같은 4가지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1. 참여연대나 518기념재단 등의 한국 단체들이 몬순 혁명 기록 작업에 도움을 주시면 큰 힘이 될 것입니다.
2. 한국의 시민들과 단체들이, 몬순혁명의 진실을 찾고 책임을 묻는 체계적인 방법을 자문해 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3. 518기념관의 경험을 통해 <몬순혁명> 민주화투쟁 기념관이 설립되도록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4. <몬순혁명>의 젊은 지도자들을 약 1주일 동안이라도 한국에 초청해 주셔서 한국의 경험을 배우고 대한민국 시민들에게 <몬순혁명>에 대해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메일을 받은 이고은 선생은 <피스모모>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무용신>에 도움을 요청했고, <무용신>은 이에 부응해 방글라데시의 학생대표 2명을 한국에 초청하기로 했습니다.
<무용신>은 이고은 선생을 대표로 한 자매단체 <방글라데시 연대>를 구성하고, 몬순혁명의 학생대표 초청을 담당해 주시도록 부탁했습니다. 자히르씨의 도움으로 <방글라데시 연대>는 2명의 학생대표를 선정했습니다.
다카 대학교의 여학생 사미아 악터(Samia Akther, 법학 대학원)씨와 브라크 대학교의 남학생 라흐만 조한(Rahman Johan, 인류학, 사진작가)씨가 그들입니다. 몬순혁명 동안 학생운동의 리더였던 이들은 자히르씨와 함께 11월4일부터 11일까지 한국을 방문하게 됩니다.
이들의 방한 경비는 항공료와 체재비를 포함 450만원으로 계산되었고, <방글라데시 연대>는 이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모금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초청비용을 대한민국 시민들의 후원으로 마련하는 것이 가장 뜻이 깊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상이 <방글라데시 연대>가 구성되고 몬순혁명 지지를 선언하고 모금활동을 시작하게 된 경과입니다. 부디 대한민국의 시민들께서, 사미아 악터씨와 라흐만 조한씨가 한국을 방문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1인1만원(이상)으로 모금운동에 참여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Greetings from Bangladesh! Hope this email finds you well.
I'm so delighted to share that finally we got rid of the despot reigning and ravaging Bangladesh for the last 15 years! Now, we are passing through a momentous change after the successful mass uprising on 5th August 2024 that forced the autocrat to resign and flee from the country. She is now hiding in India!
The student-people led Monsoon revolution has presented us with a historic opportunity to reimagine and rewrite the formation of a new political chapter. As a civil rights activist, and your friend, I'm proud to share that I have been very active during the movement and coordinated the student leaders at the forefront of this revolution. It was the best experience of my life, even though I had to go through ordeals of security crackdown and nightmarish situations!
Before she left the country in the span of one month, the tyrant killed nearly one thousand people, thousands were severely injured and many more of the protesters are still traumatized. We are trying to collect the names, document the stories and wish to preserve this glorious history of our democratic struggle.
As you know in Korea CSO played an important role in initiating institutional mechanisms to find truths, seek accountability and instill the spirit to nurture ethos and sensibilities for the generations to come. Having this knowledge and exposure, I couldn’t think of any better place to seek advice and suggestions to undertake a formal approach for Bangladesh so that we can also begin a process to do similar work in preserving and cultivating the aspiration of the heroes who made the supreme sacrifice for democracy, freedom and justice.
And, this will also be an occasion to renew people to people ties between Bangladesh and Korea. In this regard, I would like to request few things:
1. It would be a great help, if PSPD/May18 or other like minded organizations come forward to help us make a systematic documentation of the events.
2. Korean Civil Society members and organizations can help us to pursue the truth and accountability measures in a structured way.
3. The May18 Memorial can come forward to help us build a collaborative Museum of democratic struggle and Monsoon Revolution in Bangladesh.
4. Inviting a group of young leaders in Korea to have an immersive orientation and practical knowhow for a week to share their experience and learn from Korean civil societies to know and do the above things.
These are my preliminary thoughts; I can expand on, given the interest and scope to explore a partnership. Will appreciate your kind help and advice in this regard.
몬순혁명으로 쫓겨난 셰이크 하시나를 살피다 보니까, 방글라데시 현대사에서 비중을 차지하는 여성이 또 있습니다. 방글라데시 민족주의당(BNP)의 칼레다 지아(Khaleda Zia)입니다.
셰이크 하시나와 칼레다 지아는 죽고 죽이는 가족사의 원한이 얽힌데다가, 이들의 정당이 정권을 다투는 주요 정당이었기 때문에, 방글라데시 현대사에서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두 여성은 1991년 이래 방글라데시의 총리를 역임했습니다. 칼레다 지아는 1991-1996년과 2001-2009년, 셰이크 하시나는 1996-2001년과 2009-2024년에 방글라데시 총리였습니다.
칼레다 지아의 남편인 지아우르 라흐만은,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해방군 사령관을 역임한 군인으로, 1975년 쿠데타를 일으켜, 셰이크 하시나의 부친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을 살해하고 대통령이 된 인물입니다. 지아우르 라흐만은 셰이크 라흐만의 아내와 형제들, 세 아들과 며느리들까지 모든 가족을 사살했고, 서독을 방문 중이던 셰이크 하시나와 그의 여동생 셰이크 레하나만 살아남았습니다.
쿠데타에 성공한 지아우르 라흐만은 1975년 계엄령 아래서 정부수반이 된 후, 1977년 대통령이 되어 방글라데시민족주의당(BNP)를 창당, 이를 정치적 기반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5년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젊은 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로 1981년 사살당했습니다. 쿠데타 세력이 쿠데타를 당한 것이지요.
이 쿠데타로 집권한 후세인 에르샤드(Hussain Muhammad Ershad, 1930-2019)는 1983-1990년에 대통령으로 방글라데시를 통치했고, 재임중 창당한 자티야당(Jatiya Party)를 자신의 정치기반으로 삼았습니다.
에르샤드의 쿠데타정권은 그가 죽인 지아우르 라흐만의 아내 칼레다 지아의 BNP와 지아우르 라흐만이 죽인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의 장녀 셰이크 하시나의 AL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1991년 총선에서 패배했고, 이 선거에서 승리한 BNP의 칼레다 지아가 총리가 됐습니다.
다음 총선인 1996년 선거에서 승리한 AL의 셰이크 하시나는 집권하자마자 자신의 부모와 형제들을 죽인 1975년 쿠데타 가담자들을 체포해 주모자들을 죽였는데, 주모자의 대표격인 지아우르 라흐만을 처단하지 못한 것은, 그가 이미 에르샤드에게 암살당했기 때문이었지요.
셰이크 하시나는 또 정적인 칼레다 지아도 부정부패 정치인으로 몰아 5년형을 받고 복역하게 만들었는데, 올해 셰이크 하시나가 실각한 다음날 칼레다 지아가 석방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방글라데시의 세 주요 정당인 AL과 BNP와 Jatiya가 쿠데타로 죽고 죽임을 당하면서 얽히고설킨 가운데 탄생한 셈입니다. AL이 중도좌파 정당이지만 좌파정당이 아니라 쿠데타의 잔재이자 민족주의 정당인 Jatiya와 연합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아마도 그것은 BNP의 기반인 민족주의 지지자들을 갈라놓기 위해서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암튼, 셰이크 하시나와 칼레다 지아는 가족의 원한이 얽힌 가운데서도 지난 30년간 방글라데시의 정치를 이끌어왔다고 볼 수 있는데, 둘 다 부친과 남편의 후광으로 정치해 왔다는 공통점을 뺀다면, 칼레다 지아는 셰이크 하시나에 비해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셰이크 하시나가 축출된 지금, 석방된 칼레다 지아가 다시 정치 전면에 나설지가 주목됩니다만, 80세에 가까운 칼레다 지아가 다시 총리에 도전할 수 있을지가 의문입니다.
방글라데시에는 공산당을 비롯한 좌파 정당들도 있지만, 존재감이 미미합니다. 가장 큰 좌파정당은 방글라데시 공산당(Communist Party of Bangladesh, CPB)인데, 총선 득표율이 1% 미만입니다. 이는 쿠데타 정권들이 공산당과 사회주의정당, 그리고 노동운동을 심하게 탄압해왔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CPB는 다른 좌파정당들과 연합하여 좌파민주전선(Left Democratic Front, LDF)을 결성, 꾸준히 총선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즉, 오늘날 방글라데시의 정치지형은 독립운동 세력과 쿠데타 세력이 방글라데시의 세 주요정당을 구성해 각축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군소 좌파정당들이 독자적으로나 세 주요정당과 연합해서 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겠습니다. 어째 대한민국 정치 지형의 복사판을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jc, 2024/10/4)
2024년 7-8월의 방글라데시 몬순혁명의 성공으로 셰이크 하시나 총리는 사임하고 인도로 망명했습니다. 셰이크 하시나는 어떤 이유로 학생운동과 시민운동의 표적이 되었던 것일까요?
셰이크 하시나는 제1기(1996-2001년)와 제2기(2009-2024)를 합해 20년 동안 총리로 재임했습니다. 방글라데시에서는 물론 세계에서도 최장기 여성 정부수반으로 기록됩니다.
셰이크 하시나는 방글라데시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대통령과 2대 총리를 역임한 세이크 무지부르 라흐만(Sheikh Mujibur Rahman, 1920-1975)의 딸입니다. 셰이크 라흐만은 인도의 식민통치 아래서 발생했던 1757년의 벵골 독립전쟁 플래시 전투(Battle of Plassey) 이래 2백년 만에 벵골의 독립을 성취한 정치지도자로, 방글라데시의 국부로 칭송되는 인물입니다.
셰이크 라흐만은 1975년의 쿠데타로 암살됐습니다. 셰이크 하시나는 인도로 망명해 군부정권에 의해 입국 금지 당했지만, 부친 셰이크 라흐만이 설립한 방글라데시 아와미 연맹(AL)의 당수로 궐석 선출되어 1981년 귀국, 34세의 나이로 야당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중도좌파 성격의 AL 당수로 하시나는 후샤인 에르샤드(Hussain Muhammad Ershad) 군부정권의 탄압을 받았으나, 또 다른 야당 방글라데시 민족주의정당(BNP)의 칼레다 지아(Khaleda Zia)와 함께 에르샤드 군부독재에 맞섰습니다.
1991년 군부독재를 타도하고 총선에서 승리한 BNP의 칼레다 지아가 방글라데시의 첫 여성 총리에 취임했고, 1996년 총선에서는 AL가 승리해 셰이크 하시나가 총리에 취임했습니다. 방글라데시에도 민주화가 정착되고 평화로운 정권교체가 이뤄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시나는 첫 임기동안 긍정적 업적을 남겼습니다. 인도와 관계를 개선했고, 인플레이션을 5%미만으로 묶었고, 국민총생산(GDP) 연평균 성장률을 5.5%로 유지했습니다. 식량 생산이 증가했고 빈곤율이 낮아졌고, 주택마련 기회가 늘었고, 저소득층의 수입증가 기회도 생겼습니다.
외자유치에 성공해 기업 성장을 도왔고, 군부독재가 독점했던 IT산업을 민영화해 가격을 낮추고 사용자를 증가시켰습니다. 소액금융과 식량지원 등의 정책으로 소외계층의 기회를 넓혔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셰이크 하시나는 안정과 성장을 이끈 정치지도자로 인식되었지요.
성공적인 정책에도 불구하고 AL은 2001년 총선에서 BNP에 패배했고, 칼레다 지아에게 정권을 넘겨야 했습니다. 2006년 총선을 앞두고 쿠데타가 발생, 셰이크 하시나와 칼레다 지아는 군부정권에 의해 부패정치인으로 기소됐고, 하시나는 2008년 아들이 사는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2008년 12월 총선에서 AL는 군부독재의 잔재인 자티야당(Jatiya Party)을 포함한 14개 정당을 연합해 총선에서 승리, 두 번째 총리임기를 시작했으나, 이때부터 그의 행보는 권위주의적 지배의 경향을 보였습니다.
2014년, 2019년, 2024년 총선에서 연속 압승했으나 국내외에서 부정선거로 비난받았고, 소액금융으로 빈민의 재활을 돕던 무하마드 유누스와 결별했습니다. 야당과 학생운동과 언론을 탄압했고, 2018년에는 인터넷을 통제하는 디지털 보안법을 통과시켰습니다.
경제성장이 멈추고 외채가 급증한 가운데 2022년에는 상환불능 외채가 210억달러에 달해 IMF체재에 들어갔고, 그 와중에 부정축재 스캔들에도 휘말렸습니다.
2024년 청년 실업률이 40%를 넘어선 가운데,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공무원직 30%를 보장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공정성에 반한다는 대대적인 반발을 초래했고, 군경과 당조직까지 동원해 반정부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다가, 적어도 650명의 사망자를 낸 유혈사태를 초래한 끝에, 셰이크 하시나는 총리직을 사임하고 인도로 망명하게 된 것이지요.
좋은 집안에, 최상급 교육을 받고, 군부독재에 맞서 투쟁하고, 빈민과 여성의 인권과 경제성장을 이끌었던 셰이크 하시나가 어째서 이렇게 추락해버렸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방글라데시의 학자들이 분석, 해설할 일이겠고, 저는 권위주의 정부를 무너뜨린 학생운동과 시민운동에 집중해야 할 것 같군요. (jc, 2024/10/4)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의 벵갈어 최대 일간지 <프로톰 알로(Prothom Alo)>는, 하시나 정부가 시위대에 발포해 발생한 최초의 사망자 150명 중에서 94명(64%)이 18-29세의 청년들이라고 보도했습니다.
또 다른 다카의 일간지 <사마칼(Samakal)>도 200명의 사망자 중에서 19-30세가 104명(50%이상)이라고 발표했습니다. 몬순혁명 참여자 대부분이 청년이었고, 이들이 가장 큰 희생을 치렀다는 말입니다.
“XYZ세대”라는 용어는 미국 사회과학자들이 인구의 특징을 구별하는 별명이지만, 생애경험의 세계화로 한국을 포함한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자주 사용됩니다.
밀레니얼 세대는 Y세대의 별명으로 1981-1996년에 출생한 세대를 가리키며, Z세대는 1997년부터 2013년 출생자로 유년기부터 디지털 매체의 영향을 받은 세대입니다.
이들은 청소년기에 베를린 장벽 붕괴와 소련 해체, 탈냉전, 9.11과 미국발 경제위기, 코로나 팬데믹 등을 경험한 세대이며, IT에 능하고 sns소통에 익숙한 세대이기도 합니다.
MZ세대는 개인주의가 강하다고 평가되며, 사회나 공동체 의식보다 소규모 동료집단에의 충성심이 강하기 때문에 사회변혁의 주체로 떠오르지 못한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방글라데시의 MZ세대는 그 같은 선입견을 뒤집었습니다. 이들은 하시나 정권의 야당과 언론탄압에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고, 학생운동 탄압에 맞서 굳게 단결해 투쟁했습니다. 결국 올해는 학생운동이 시민운동으로 번지면서 몬순혁명을 성공시킨 것이지요.
방글라데시의 학생운동은 적어도 19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는 방글라데시가 파키스탄에서 분리, 독립하기 전이기 때문에, 학생운동은 파키스탄 정부의 탄압에 저항했습니다. 다카대학의 저항은 워낙 격렬했기 때문에 미국과 유럽의 68운동과 나란히 언급되곤 했습니다.
1969년 다카대학의 학생운동가 아사드 우즈 잠만(Asad uz Zamman)이 경찰에 의해 잔혹하게 사살되자, 다카대학에는 10만명의 시위대가 운집, 피묻은 아사드 우즈 잠만의 셔츠를 장대에 걸고 시위를 계속했고, 결국 이는 1971년 방글라데시가 파키스탄에서 분리, 독립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1982년 민주정부를 전복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후세인 무하마드 에르샤드(Hussain Muhammad Ershad)의 군부독재를 종식하는 데에도 학생운동의 기여가 컸습니다.
특히 다카대학의 학생중앙조합(Dhaka Univ. Central Students' Union)은 군부독재를 종식하기 위한 1990년 반독재운동의 선봉에 섰고, 결국 1991년의 총선을 통해 에르샤드 독재를 종식하면서, 8개정당연합의 아와미 리그(AL)가 집권할 수 있었습니다.
2022년 방글라데시 학생들은 다시 한 번 봉기했습니다. 세이크 하시나(Sheikh Hasina) 정권의 부정부패와 경제실정에 책임을 물어 총리의 사임을 요구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학생시위는 결국 2024년 8월의 하시나 총리의 사임과 망명으로 귀결되었습니다.
다카대학을 중심으로 한 방글라데시 학생운동은 인도의 영국식민지 시기부터 인도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로 이어지는 현대사에서 민주주의와 진보운동의 산실이자 동력이었습니다.
따라서 2024년의 몬순혁명을 “MZ세대의 사회변혁운동”이라고 부르기에는 어폐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방글라데시의 학생운동은 적어도 1968년부터 반세기 이상 방글라데시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계속해 온 전통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전통적 학생운동의 단호함과 MZ세대의 재기발랄함이 어우러져 성취된 몬순혁명은 실로 감동적인 역사입니다. 부디 몬순혁명이 평화적으로 안착되면서 방글라데시에서 오래 염원되어온 민주화가 이뤄지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jc, 2024/10/2)
조정희 피디님의 최승희 선생 연구 활동에서 시작된 <무용신>의 "재일 조선동포학생 문화예술활동 지원 사업"은 "연해주 고려인 학생 문화예술활동 지원 사업"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재일조선인 학생들에게 무용신 30켤레를 전달하는 작은 시작이 다양한 이들이 함께하게 되며 더 다채로운 활동으로 이어진 결과였습니다.
이번에는 기존의 활동과는 다소 다른 맥락이지만, 지난 7월과 8월 방글라데시에서 일어난 몬순혁명을 지지하고 지원하는 캠페인을 진행하려 합니다.
몬순혁명의 대변인으로 활동했던 지인의 요청으로, 몬순혁명의 학생 리더와 예술 시위에 참여했던 두 명의 학생 리더를 한국으로 초청하고자 합니다.
그들이 한국 방문을 통해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이해하고, 방글라데시에서 시작된 사회 변화를 더 민주적인 사회 건설로 이어가는 연대의 길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무용신>은 그들의 한국 방문 비용을 지원하기 위한 캠페인을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무용신>은 그동안 재일·재러 동포를 지원하며, 이념적 갈등으로 소외된 그들의 문화예술 활동을 돕는 일을 지속해왔습니다. 이번 캠페인은 이러한 활동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우리가 경험한 민주화 과정이 세계 시민으로서 더 진보적인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고민과 맞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진행됩니다.
혁명의 완수는 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선배 세대의 많은 희생으로 이루어낸 사회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습니다. 때로는 비통함과 분노를 느끼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함께하는 이웃과 선의의 시민들이 연대하여 우리는 변화를 이야기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와 더불어, 세계의 이웃 사회가 겪는 문제를 바라보고, 그들의 어려움을 이해하며 연대하는 동시에 우리 사회의 방향과 문제를 고민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방글라데시 학생 리더들을 초청해 그들과 함께 연대하며 사회 진보를 고민할 단체들과의 만남을 추진하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한국의 민주화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마련된다면, 우리 사회에도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뜻깊은 자리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일본의 통명제도는 국제적으로 예가 없는 독특한 경우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외국인들에게 자국식 통명을 공식문서에 요구하지 않는다. 강요는커녕 요구하지도 않는다. 별명이 사용되는 경우는 있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자발적인 경우이며, 어떤 경우에도 통명이나 본명의 발음은 본인의 요청에 따른다. 일본의 통명 제도는 대단히 이례적이고 비정상적이다.
오늘날의 일본의 통명제도는 일본의 군국주의 시대에 식민지 조선에 강요했던 창씨개명에서 비롯된 관행이다. 창씨개명은 원천적으로 무효화되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일본은 그 악영향을 청산하기는커녕, 80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이는 마치 독일에서 지금도 유태인을 차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단히 이례적이고 비정상적인 일이다.
일본 안에서도 통명의 강요와 본명의 일본식 발음은 서양인들에게는 적용되지 않거나, 차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동양권의 나라, 특히 같은 한자권인 중국인들에게도 일본식 통명을 강요하거나, 한자 이름을 일본식으로 읽어 부르지 않는다. 통명의 강요와 본명의 일본식 발음은 재일조선인/한국인에게만 적용되고 있는 셈이다.
이쯤 되면, 일본의 통명제도, 그리고 본명을 일본식 발음으로 부르는 관행은 재일조선인/한국인에게만 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엔인권선언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일이다. 인종과 언어에 따른 차별이기 때문이다.
이런 차별적 관행은 보통 시민사회와 언론, 그리고 사법제도에 의해 시정되어 나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재일조선인/한국인을 차별하는 통명제도는 일본 시민사회에 의해 자성이나 교정 노력이 경주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재일조선인/한국인에 대한 통명제도, 그리고 본명의 일본식 발음을 ‘편의성’으로 정당화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그런데 “누구의 편의”인지는 따져지지 않는다. 최창화씨의 경우, 그것은 언론기관의 편의였다. 본인이 원치 않아도 언론사의 편의 때문에 유지한다는 답변은 놀라웠다.
가장 놀라운 것은 사법기관이다. 기타큐슈 지방법원은 최창화씨의 정당한 요구를 기각했다. 오사카 지방법원은 “본명 대신 통명을 사용하라는 사업주의 요구가 김임만 감독을 차별한 것이 아니”라고 판시했는가 하면, 오사카 고등법원은 “통명의 강요가 인정되며, 개인 정체성에 대한 침해”라고 인정하면서도 “통명의 강요가 사업자의 선의”라고 결론 내렸다. 이는 유엔인권선언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판결이 아닐 수 없다.
국제적인 시각에서는 일본의 통명제도가 그 시작부터 대단히 이례적이고 비상식적이며, 따라서 비정상적인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일본 내에서는 그것이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정상적인 제도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필자는 일본을 방문할 때 3개 언어로 된 명함을 사용한다. 한국어, 한자, 그리고 영문자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 명함을 사용할 때는 반드시 영문자 이름을 강조한다. 그래야 필자의 이름이 제대로 발음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가피한 이유로 일본 땅에서 영주해야하는 재일조선인/한국인들은 누구도 통명제도의 불편함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이는 차별의 문제와 점층적인 악순환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본래의 차별은 저항을 낳게 마련이고, 이 저항을 누르기 위해 또 다른 차별을 고안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필자는 재일조선인/한국인의 통명제도가 차별의 문제와 직결되어있음을 지적했지만, 관찰자의 짧은 소견에 불과할 것이다. 따라서 해결방안을 제시할 식견이 필자에게는 없다.
하지만 자아정체성의 본질의 일부인 이름에 대한 차별적 현실이 일본에서 재일한국인/조선인들에게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일본 사회의 각성을 촉구하며, 재일조선인/한국인들의 용기있는 저항과 개선노력을 응원할 뿐이다. (jc, 2024/9/3)
선헌양(宣憲洋, 2001)은 오타루상과대학 언어학센터의 학술잡지에 발표한 논문 [재일한국인/조선인의 본명사용을 촉진하는 한 가지 방법]에서 재일한국인 최창화(崔昌華, チョエ・チャンホア, 당시45세)씨의 경우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기타큐슈시 목사 최창화는 NHK 뉴스 시간에 자신의 이름이 '사이 쇼카' 라고 자주 불려진 것에 대해 ”내 이름을 올바르게 불러 주었으면 좋겠다“고 여러번 정정을 요구했다. 하지만 무시당했다. 그래서 당사자는 ”인격권 침해“라고 하여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재일조선인의 인권 문제에 정진하여 주목을 받았으며, 또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방법에는 각별히 엄격했다. 본인의 이름 호칭에 대한 정정요구와 소송의 사정은 다음과 같다.
“1975년 9월3일 기타큐슈(北九州)시 고쿠라(小倉)의 한국인 목사 최창화(崔昌華, 45세)씨는 NHK 기타큐슈 방송국의 이치카와 사다오(市川定夫) 방송부장을 찾아가 항의하고 정정을 요구했다.
“지난 8월 26일, “키타큐슈 시장에게 재일 한국인/조선인의 인권에 관한 공개 질문장” 제출하면서 기자회견을 했을 때, 자신의 이름을 '최창화'라고 여러 번에 걸쳐 발음해 주었는데도 NHK는 9월1일과 2일의 뉴스에서 의도적으로 ‘사이·쇼카(サイ・ショウカ)’라고 일본식으로 발음했다. 이것은 인권상의 중대한 잘못이므로 정정해 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앞으로 재일한국인/조선인에 대해 일본식 발음으로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이름을 올바르게 불러주길 바란다. 이는 인권 존중의 출발점이라며 강력히 항의했다. 기자회견 때 그는 “자신의 이름을 잘못 읽지 않도록 두 번이나 공을 들여서 설명했고, 명함의 이름 밑에 로마자로 발음을 적어 놓았다”고 덧붙였다.
“이 항의와 정정 요구에 대해서 이치카와 부장은, 협회에 연락을 취한 후, 9월27일 다음과 같이 회답했다
“NHK에서는 1948년 10월부터 1955년 9월까지 현지발음으로 읽었지만, 발음의 어려움이 있어, 모두 일본어를 읽는 방법으로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앞으로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지만 현 단계에서는 지금까지와 같이 하겠다.
“그러나 최씨는 수긍하지 않고 내 이름은 ‘사이’씨가 아니라 ‘최’라고 강하게 반발하며 재차 항의했다. 하지만 이치카와 부장은 ‘방송의 어려움을 겪는다. 정정하면 전국적으로 문제가 된다. 그래서, 현단계에서는 지금까지와 같이 해 간다’라고 같은 대답을 했다.
“이에 최씨는 ‘인격의 상징으로서의 이름이 다른 사람의 사정으로 변경될 수 있다는 기본적 인격 침해는 용서할 수 없다’며 제소를 단행했다. 그래서 10월3일 일본방송협회(회장 오노 요시로)를 상대로 ”인권침해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를 후쿠오카지방법원 고쿠라지부에 제출했다. 이 재판은 대법원까지 다투었지만 결국 원고 패소가 됐다. [김일면, 『조선인이 왜 '일본명'을 자칭하는가』, 삼일책방, 1978년, 203쪽~204쪽.]”
김임만 감독과 최창화 목사의 소송사건과 그 결과는 일본 사법부도 본명과 통명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해야 하는 재일한국인/조선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일본 정부나 기업이 국내법에 강하게 집착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더구나 국내법이 재일조선인/한국인 차별을 제도화하고 있는 일본 사회를 반영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사법부는 국제법과 보편적 상식을 판결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정부기관이다.
재일 한국인 최창화 목사나 재일조선인 김임만 감독이 소송을 제기한 것도 법원의 이같은 권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 법원도 정부나 기업과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jc, 2024/9/3)
김임만(金稔万) 선생은 일본 효고현 아마가사키에 거주하는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다. 그는 일용직 노동자로 생활하면서도 재일조선인의 모습을 20년 이상 카메라에 담아왔다.
한국에서 상영된 그의 작품으로는 [카마가사키 권리찾기(釜ヶ崎の住民票を返せ!, 2011)]와 [용왕궁의 기억(2016)], [경찰아파트(キョンチャルアパー, 2022)], [돈즈루봉과 야나기모토 비행장(どんづる峯と柳本飛行場, 2022)] 등이 있다.
김임만 감독의 작품들은 모두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카마가사키의 권리찾기]는 카마가사키의 재일외국인 일용직 노동자의 주민등록표가 악용되는 것을 고발했고, [용왕궁의 기억]은 김임만 감독의 모친이 활동하던 용왕궁을 중심으로 재일조선인의 고난을 추적하면서 모자간의 관계를 재조명했다. [경찰아파트]와 [돈즈루봉과 야나기모토 비행장]은 태평양전쟁 말기 조선인 노동자들이 강제동원되었던 유적지들을 기록 영상으로 남겼다.
김임만 감독은 재일조선인 2세로 본명과 통명 사이에서 갈등을 경험했다. 그는 2009년 오사카 시의 하청을 받은 종합건설회사 [오테제네콘(大手ゼネコン)]의 재건축 일을 소개받았다. 오테제네콘의 재하청을 받은 [오바야시구미(大林組)]는 ‘김임만’이라는 본명을 사용해왔던 그에게, 이번에는 통명으로 일해 달라면서 그가 사용할 안전모에 ‘가네우미’라는 통명을 붙였다. 그의 본명 명찰은 버려져 있었다.
김임만 감독은 그리 화목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랐고, 일본학교에 다녀야 했기 때문에 조선말을 하지 못했다. 부친은 “일본에서 살려면 일본식 통명을 써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자녀들에게 통명 사용을 강요했던 부친도 죽음을 앞두고 스스로 마련한 묘비에는 ‘본명’을 썼다. 재일 조선인은 죽어서야 떳떳하게 본명을 쓸 수 있다는 일본의 현실을 김임만 감독은 개탄했다.
이후 김임만 감독은 조선인 친구들을 만나면서 민족의식이 성장했고, 통명 대신 본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작품도 본명으로 발표했고, 직장에서도 불이익을 무릅쓰고 본명으로 일했다.
그러나 2009년 김임만 감독은 [오테제네콘]에서 하청을 받은 [오바야시구미(大林組)]에서 약 삼 개월 반 동안 ‘가네우미’라는 통명으로 일해야 했다. 통명을 사용하지 않으면 해고당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오바야시구미]는 취업 지원한 김임만 감독의 이름이 본명인 것을 보고 취업증명서를 요청했는데, 재일조선인으로서 특별영주권자인 김임만 감독은 취업증명서를 제출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하청업체는 [오테제네콘]에 이를 설명하는 대신에 김임만 감독에게 일본식 통명을 쓰도록 강요한 것이다.
[오테제네콘]의 계약이 끝난 후, 김임만 감독은 하청업체인 [오바야시구미]와 원청인 오사카시청을 상대로 정신적인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재일조선인에게 암묵적으로 일본식 통명을 강요하는 사회와 국가에 본격적으로 저항을 표시한 것이었다.
2년여의 심리 끝에 오사카 지방법원은 2013년 1월30일의 1심 판결에서 원고 패소라는 부당 판결을 선고했다. 통명을 요구를 강제하지도 않았고, 통명 사용을 요구한 것은 김임만 감독에게 신속하게 일을 맡기려는 것이었지, 차별대우 때문이 아니라는 게 판결 요지였다.
김임만 감독은 1심판결에 불복해 2월7일 항소했지만, 그해 11월26일 오사카 고등법원은 재차 김임만 감독에게 실망을 안겼다. “오바야시구미가 불필요한 통명 사용을 강제한 것은 부정할 수 없”으며, “안전모의 본명 명찰을 제거한 행위는 개인의 정체성을 침해한 것”이라고 인정했지만, 그 이유가 차별대우 때문은 아니라, 김임만 감독이 신속하게 일할 수 있게 하려는 선의 때문이었다고 판결한 것이다.
이에 대해 김임만 감독은 2심에서는 1심보다 진전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법원도 재일조선인의 권리를 인정해 주지 않는 현실을 절감했다”고 실망감을 표시했다. 그는 또 “재일조선인의 본명 사용 보장을 위한 활동을 계속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jc, 2024/9/2)
재일조선인은 용기를 내어 본명을 사용하는 경우에도, 일본인들은 이름의 발음을 일본식 한자 발음으로 바꿔버린다.
일제강점기 조선무용을 창안한 최승희(崔承喜) 선생은, 스승의 통명 요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본명을 지킨 사람이다. 이시이 바쿠는 재능 있고 전도가 유망한 제자에게 자신의 성인 이시이(石井)을 하사하곤 했다. 심지어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좋은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이시이 코나미나 이시이 미도리, 이시이 미에코 등은 스승이 지어준 이름이고, 그런 이름을 하사받는 것이 제자들에게는 큰 은혜였다. 그래서 평생 그 이름으로 무용활동을 하곤 했다. 이는 곧 “나는 신무용의 대가 이시이 바쿠의 유능한 제자”라는 뜻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승희는 “이시이”라는 성을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스승이 지어준 “쇼코(勝子)”라는 예명도 몇 번 쓰다가 포기, 다시 본명인 최승희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나 최승희가 자신의 본명을 사용해도, 일본인들은 이름을 “최승희”라고 읽어주지 않았다. 이름 한자의 일본식 발음대로 “사이 쇼키”라고 읽어버렸던 것이다.
‘최승희’라는 이름과 ‘사이 쇼키’라는 이름은 음성학적으로 공통점이 전혀 없다. 그래서 마치 본명을 무시하고 또 하나의 통명이 생겨버리는 셈이 된다. 이 경우에는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공개하고 나서도 또다시 차별을 받게 된다. 이 같은 폐단 때문에 재일조선인들은 아예 일본식 한자와 일본식 발음으로 된 통명을 사용함으로써 차별을 피하려고 노력한다.
서구의 경우와는 대단히 대조적이다. 나는 이름이 조정희이지만, 미국에서는 Jeonghee CHO라고 이름을 표기했다. 이름을 접한 미국인들은 항상 어떻게 발음하면 되는가, 하고 묻는다.
미국인들한테는 제이(J)의 발음이 어려울 수 있다. 심리학자 구스타브 융(Jung)처럼 제이 발음이 사라져버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아주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반자음이 남는 것이지만.
성의 ch발음도 마찬가지이다. 영어 단어에서 ch는 발음이 다양하다. 챨스(Charles)라는 이름에서처럼 치읓소리가 가장 보편적이지만, 경우에 따라서 스쿨(school)이나 콜레라(cholera)처럼 키읔 소리가 되기도 하고, 시카고(Chicago)나 기사도(chivalry)에서처럼 시옷 소리도 나온다. 그래도 몇 번 발음해 주면, 이내 제대로 이름을 불러준다.
일본인이 한자를 일본식 발음으로 읽는 것이 편하다는 것이 이해는 된다. 한국에서도 모택동(毛澤東)이나 주은래(周恩来)나 등소평(鄧小平)이라고, 한국식으로 발음했던 시기가 있었다. 일본인도 풍신수길(豊臣秀吉), 이등박문(伊藤博文), 재등실(齋藤實)이라고 부르곤 했다.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마오쩌뚱, 저우언라이, 덩샤오핑이라고 부르고, 토요토미 히데요시, 이토 히로부미, 사이토 마코토라고 부른다. 그 나라의 발음을 존중한다는 원칙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재일조선인의 이름을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일부 의식 있는 지식인들을 제외하면 한자권 외국인 이름을 일본식 발음으로 불러버린다. 쑨웬(孫文)을 손분(ソンブン), 마오쩌뚱(毛澤東)을 모타쿠토(モウタクトウ)라고 한다.
최근 중국이름 발음에는 변화가 생겼다. 모택동을 마오쪼통(マオ・ツォートン)이라고 표기한 백과사전도 있다. 그러나 원음 존중의 원칙이 재일조선인의 이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또 하나의 차별인 셈이다.
예컨대 조선학교(朝鮮學校)는 일본 교육법상 외국인학교와 함께 각종학교로 분류된다. 외국인학교는 ‘가이고쿠진가코’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인터내셔널 스쿨(International School)이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조선학교는 ‘조선학교’라고 부르지 않고 언제나 ‘조센가코’라고 부른다.
재일조선인의 이름뿐 아니다. 베이징(北京)은 페킹(ペキン)이라고 그런대로 원음에 가깝게 부르지만 부산(釜山)은 아직도 후잔(フザン), 한국(韓國)도 ‘한국(ハングク)라고 부르지 않고 ’강고쿠‘라고 부른다. 특히 일본인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기타조센(北朝鮮)‘이라고 부른다.
재일조선인 1세와 2세들의 통명은 창씨개명의 직접적인 피해자들이었다. 조선에서는 강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약 20%의 조선인들이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창씨개명을 하는 경우에도 일본식 창씨는 많지 않았고, 자신의 관향이나 성을 파자해서 창씨하곤 했다. 예컨대 전주 이씨는 국본(國本)이나 조본(朝本)이라는 식으로 왕가임을 강조했다.
심지어 ‘천황폐하’와 발음이 같은 덴노 헤이카(田農炳下, 田農昞夏)로 창씨하여 천황을 조롱하거나, 미나미 타로(南太郞)라고 창씨개명해 당시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를 비난한 사람도 있었다. 또 산천초목(山川草木)이나 청산백수(靑山白水), 강원야원(江原野原) 등으로 장난삼아 창씨하거나, 성을 가는 놈은 개자식이라는 뜻으로 ‘이누코(犬子)’라고 창씨한 사람도 있었다.
창씨개명에 대한 반항과 조롱은 조선에서는 가능했지만, 재일조선인들은 그럴 수 없었다. 거의 대부분 일본식으로 창씨와 개명을 해야 했고, 해방 후에도 이를 유지했다. 패전한 일본인들의 좌절감과 분노는 승자인 미국인들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 이상하게도 자신들이 노예처럼 부리던 조선인들에게 향했고, 조선인 차별은 더욱 심해졌다.
이같은 사회상황에서 재일조선인들은 더욱 자신의 정체성을 숨겨야했고, 재일조선인들의 생존을 위해 통명을 사용했던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유일한 예외가 재일조선학교였다.
해방 직후 재일조선인들이 귀국을 준비하면서 자녀들에게 조선말을 가르치기 위한 [국어강습소]로 시작된 조선학교는 1946년의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의 지도 아래 전국으로 확산됐다. 1948년의 한신교육투쟁을 거치면서 1949년 조선학교가 폐쇄되기도 했으나, 1953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이 결성되면서 재건됐고, 재일조선인들은 학교를 중심으로 결집했다.
조선학교의 특징은 조선말과 조선역사를 가르치고, 조선의 문화예술활동을 장려하는 등의 민족교육을 강조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본명 사용이었다. 조선학교 학생들의 본명 사용은 다른 재일조선인들에게는 대단히 용감한 행동이고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조선학생들도 기타 사회생활에서는 통명을 사용해야 했고, 특히 졸업 후 사회에 진출하면 통명으로 돌아가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정체성이 형성되는 학창 시절에 본명을 사용하고 모국어로 공부하는 것은 학생들의 자존감 형성에 매우 긍정적이다.
앞서 잠시 언급한 김명곤 감독의 삿포로 조선학교 전입생의 경우, 구시로의 일본학교 재학 중에는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밝히지도 못했고, 삿포로 전학도 일본학교로 간다고 거짓말을 해야 할 정도였다. 친구들과의 교유관계에서 본명 사용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김명곤 감독이 또 다른 예로 들었던 2019년 한 오사카 공립학교의 민족학급 수업 참관도 마찬가지였다. 그 마지막 수업에서 민족학급 강사는 손정의가 본명을 쓰면서도 일본 사회에서 훌륭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예로 들면서 “여러분도 본명쓰기를 권한다”고 했다고 한다.
이는 마치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의 [마지막 수업(La dernière classe, 1873)]을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1871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가 알사스-로렌을 프로이센에 넘겨주어야 했던 시기, 프랑스어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칠판에 “프랑스 만세(VIVE LA FRANCE!!)”를 썼던 아멜 선생처럼,
조선민족학급의 강사는, “어디까지나 여러분의 선택”이라면서도 “본명에 대한 자부심을 잃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던 것이다. 그만큼 재일조선인들은 일본사회에서 일본식 통명을 사용해야 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본명 사용을 명예로운 일로 간주하는 것이다.
세계인권선언은 제26조에서 “교육은 인격의 완전한 발전과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중의 강화를 목표”로 하며, ”부모는 자녀에게 제공되는 교육의 종류를 선택할 우선권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일본은 세계인권선언에 참여하고 있다.
2019년에는 유엔아동권리위원회로부터 총련계 민족학교인 조선학교를 교육무상화 대상에 포함시킬 것을 권고했지만, 일본 정부는 유독 재일조선인과 조선학교에 대해서는 국제기구의 어떤 권고나 제재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jc, 2024/9/2)
일제는 1940년 2월11일부터 식민지 주민들의 황국신민화를 이유로 창씨개명을 추진했다. 일본 정부가 식민지 주민들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라고 강요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1939년 11월10일 <조선민사령>을 개정, 조선에서도 일본씩 씨명제를 따르도록 규정하고, 1940년 2월11일부터 8월10일까지 씨(氏)를 정해 제출할 것을 명령했다. 조선인 창씨개명의 대상자는 “조선에 본적을 둔 모든 조선인”이었으므로 재일조선인도 포함됐다.
친일파들은 자발적으로 창씨개명에 응했으나 조선민사령 개정이 발효한 후 3개월 동안 창씨개명한 조선인 가구는 7.6%에 불과했다. 이에 총독부는 본격적으로 창씨개명을 압박, 신고마감까지 약 332만가구(79.3%)가 창씨하게 했다. 문정창(文定昌, 1899-1980)은 [군국일본조선강점36년사] 하권에서 일제가 창씨개명에 동원한 강요 방식을 열 가지로 서술했다.
(1) 창씨(創氏)를 하지 않은 사람의 자녀에 대해서는 각급 학교의 입학과 진학을 거부한다. 이미 입학한 학생은 정학 또는 퇴학 조치를 하고, 학교 차원에서 거부할 경우 해당 학교는 폐교한다. (2) 아동들을 이유 없이 질책·구타하여 아동들의 애원으로 부모의 창씨를 강제한다. (3)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은 공·사 기관에 채용하지 않으며 현직자도 점차 해고 조치를 취한다. 다만, 일본식 씨명으로 창씨개명한 후에는 복직할 수 있다.
(4) 행정 기관에서는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의 모든 민원 사무를 취급하지 않는다. (5)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은 비국민·불령선인으로 단정하여 경찰수첩에 기입해 사찰을 철저히 한다. (6)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은 우선적인 노무 징용 대상자로 지명한다. (7)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은 식량 및 물자의 배급 대상에서 제외한다.
(8) 철도 수송 화물의 명패에 조선식 씨명이 쓰여진 것은 취급하지 않으며, 해당 화물은 즉시 반송 조치한다. (9)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은 내지(일본 본토)로 도항할 수 없다. (10) 창씨개명령 제정 이후 출생한 자녀에 대하여 일본식 씨명으로 출생 신고하지 아니할 경우에는 그 신고를 계속 반려하여 자녀와 그 부모가 창씨하도록 강제한다.
일제의 조선인 창씨개명은 명목상 내선일체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서였다. 일제는 4월3일부터 조선에 지원병제도를 시행했다. ‘지원병’이란 말은 이중으로 기만적이다. (1) 조선인에게 일본국적을 주지 않으면서도 병역을 부과하기 위해서였고, (2) 강압과 회유로 지원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거듭된 패전으로 병력 손실이 심각하자, 일제는 병력 보충을 위해 1944년 징병제까지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일제는 지원병 제도를 준비하면서 1938년 5월5일 본국과 식민지에 [국가총동원법]을 발효했는데, 이는 전쟁 물자를 강탈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1939년 11월10일 조선민사령을 개정해 창씨개명을 강요한 것이다.
지원병제도와 국가총동원령, 창씨개명은 황국신민화와 내선일체라는 명목 아래 진행됐지만, 전쟁을 위한 인력과 물자를 강탈하는 것이 실제 목적이었을 뿐,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차별을 철폐하거나 완화할 생각은 없었다. 이는 조선 호적의 변경 과정으로 확인된다.
1910년 일제는 [민적법] 개정을 통해 조선 호적을 일제 민적으로 번역했지만, 창씨는 시도되지 않았고, 조선인의 이름은 성+이름의 형태로 기입됐다. 1940년 일제는 창씨개명을 통해 창씨를 강요하고, 개인의 이름을 씨+이름의 형태로 기입했다. 일제가 패망한 후 1946년 창씨개명령은 원천무효로 선언되었고, 일제 민적은 대한민국 호적으로 되돌려졌다.
일제가 내선일체를 원했다면 1910년부터 창씨개명을 시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도적으로 조선인을 차별했던 일제는 실제로는 내선일체를 원하지 않았거나, 혹은 자유로운 일본인과 노예의 조선인으로서의 내선일체를 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쟁 동원을 위해 마지못해 황국신민화나 내선일체를 주장했지만, 총독부 경무국이나 일제 본국에서는 조선인 구별이 어렵다는 이유로 창씨개명에 반대했다. 이 같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창씨개명을 강압적으로 추진한 것은 그만큼 전쟁 동원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jc, 2024/9/2)
재일조선인들은 이름을 두 개씩 가진다. 본명과 통명이다. 본명은 집에서 쓰는 한국식 이름이고, 통명은 사회생활에서 사용하는 일본식 이름이다. 재일조선인들이 통명을 사용해야 하는 것은 차별 때문이다. 이름만으로도 재일조선인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에서든 외국인이 통명을 사용하는 것은 있음직한 일이다. 미국에서도 재미한국인들은 미국식 통명을 사용한다. 2세나 3세들은 성은 그대로 한국식을 유지하더라도, 이름은 아예 미국식으로 짓기도 한다. 편의성 때문이다.
그러나 재일동포 상황은 다르다. 우선, 통명을 좋아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본명을 사용하면 재일조선인이라는 사실을 공개하는 셈이므로 차별을 자초하게 된다. 차별받지 않으려면 조선인이라는 점을 숨겨야 하고, 그러기 위해 4자로 된 일본식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
<몽당연필>의 김명준 사무총장의 “이름을 빼앗긴 사람들”이라는 기고문을 읽으면, 본명과 통명에 대한 재일동포들의 애환이 많고 깊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창씨개명을 해야 했다. 그렇게 통명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일제는 '내선일체(内鮮一体)'를 주장하면서도 내지인(内地人)과 조선인(朝鮮人) 혹은 한토진(半島人)을 확실히 구분했고, 조선인에게는 내지호적을 부여하지 않았다. 이름에 얽힌 모욕은 해방 후에도 지속되었고, 21세기에 접어든지 벌써 25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하다.
1947년 일본의 신헌법이 공표되기 전날 일본정부는 텐노 칙령으로 '외국인등록령'을 발표, 재일조선인에게 '외국인등록'을 강제했다. 한반도에 아직 정부가 없으니 나라이름은 그냥 '조선'이었다. 조선적(朝鮮籍)이라는 없는 나라의 국적이 이렇게 탄생했다.
조선인들은 외국인 등록증에 본명을 기재했다. 미점령군 치하에서는 조선인들이 일본국적자로 인정되고 있었으므로, 재일조선인은 조선과 일본의 이중 국적자였던 셈이다.
그러나 1952년 미점령군이 물러나자마자 일본정부는 재일조선인의 일본국적을 본인의 의사를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박탈했다. 그래도 계속 일본에서 살아야 했던 난민 신세였던 재일조선인들은 일본 이름을 버릴 수 없었다. 차별을 피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패막이었기 때문이다.
외국인등록증 소지가 의무였던 재일조선인은 불신검문을 당해 등록증이 없으면 추방, 감금, 투옥이 예사였다. 일제강점기부터 통제와 차별에 시달렸으니 일상생활에서도 조선 사람의 마을을 벗어나는 순간 서로를 통명으로 부르고 일본말로 대화하는 것이 안전했던 것이다.
일본인 경영의 공장에 취직하면 '사내 조화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경영진이 먼저 통명을 사용해 달라고 요구한다. 분란도 해고도 싫었던 재일조선인들은 그런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본명과 통명의 분열과 이를 둘러싼 내면의 갈등은 세대에서 세대로 전승되어 오늘에 이른다.
<몽당연필>의 김명준 사무총장은 2004년 홋카이도 조선학교를 촬영할 때 고3학생을 인터뷰했다고 한다. 쿠시로에서 일본학교를 다니다가 삿포로의 조선학교로 전학한 학생이었다. 통명으로 학교를 다녔으니 전학하면서도 삿포로의 일본학교로 간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2019년 한 오사카 공립학교의 민족학급 수업을 참관했는데, 마지막 수업에서 민족학급 강사가 손정의의 예를 들면서 본명쓰기를 권했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여러분의 선택”이라면서도 “본명에 대한 자부심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선생님의 마지막 수업이었던 것이다.
2001년 오사카 조사에서는 학교에서 본명을 쓰는 학생은 15%, 통명을 쓰는 학생이 66%였다. 2007년의 교토시 조사는 직장이나 학교에서 통명을 사용하는 재일조선인이 60%라고 밝혔다. 대부분의 재일조선인들이 아직도 떳떳하게 자신의 본명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본명을 사용할 때 부딪혀야 하는 모멸적 대접과 차별대우 때문이다. 재일조선인들은 해방된 지 70년이 넘도록, 그리고 21세기의 사반세기가 되었어도, 아직도 차별을 피하기 위해 본명과 통명 사이에서 고민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jc, 2024/9/1)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그리고 일본의 쇼와 텐노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은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전사자가 2천5백만명, 민간인 사망자가 5천8백만명에 달했다. 이 전쟁으로 약 8천3백만명이 목숨을 잃은 것인데, 이는 당시 20억명이 조금 넘었던 세계인구의 5%에 육박한 인명손실이었다.
일제의 중국침략으로 중국군이 약 3백75만명이 전사했고, 중국의 민간인 8백2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일제 강점 아래서 사망한 조선인들의 수는 53만3천명으로 집계됐다.
나치의 소련 침략으로 소련군 1천1백40만명이 전사했고, 민간인 1천9백만명이 사망했다. 나치의 인종차별로 인한 사망자도 1천1백만명에 달했는데, 그중 6백만명이 유태인이었다.
1차대전에 비해 2차대전의 사망자 규모가 이렇게 컸던 것은 민간인들의 사망자가 많았기 때문이고, 그 대부분이 인종차별로 인한 것이었다는 것이 국제연합(UN)의 결론이었다. 이에 UN은 1948년 12월10일 <세계인권선언>을 발표하고, 이같은 인류 존망의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계인권선언>은 30개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조는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동등하다. 인간은 천부적으로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으며 서로 형제애의 정신으로 행동하여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평등하고 보편적인 천부인권을 명시한 것이다. 그래서 이 선언의 영어 제목도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이다.
세계인권선언의 제1조는 ‘자유’와 ‘평등’과 ‘형제애’를 명문화하고 있어서 프랑스 대혁명이 내걸었던 세 가지 선언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임을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원칙은 예외없이 지켜져야 한다는 뜻으로 “보편성”의 원칙이 추가된 것이다. 보편적 인권의 반대말이 차별이다.
강릉의 인권영화제의 인권세미나에서 재일조선인/한국인이 받는 차별에 대해 발표하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 덕분이다. 일본의 시민단체 <팀아이>와 협력해 재일조선학교 무용부에 무용신발을 후원해 온 <무용신>은, 다소 우연한 기회에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알게 됐다.
<팀아이>의 요청에 따라 추도비의 희생자 5분의 한국 내 연고를 조사한 결과, 그 중 한 분이신 김병순(金炳順)씨가 강릉출신임이 밝혀졌다. 이후 강릉과 다카라즈카 사이에 다양한 교류와 협력이 시작되었고, 작년의 제24회 강릉인권영화제에서는 재일조선인 영화감독 김임만(金稔万) 선생의 다큐멘터리 <타마세 마을의 1백년 전설>이 상영되기에 이르렀다.
<무용신> 회원들은 잦은 일본 방문을 통해 재일조선학교 학생들이 오랜 세월 일본정부와 시민사회로부터 차별대우를 받아왔음을 목격했다. 재일조선인들이 받아온 억압과 차별은 그 연원이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조선이 해방되고 난 뒤에도 차별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였는데도 차별을 받는다는 것이 놀라웠다.
특히 재일조선학교를 둘러싼 차별은 매우 끈질긴 것이었고, 특히 일본정부가 시행한 고교무상화 정책에서 조선학교만 제외한 것은 시기적으로 가장 가깝고도 가장 가시적인 차별이었다.
해방 직후 일본을 점령한 미군사령부와 일본정부가 조선학교를 폐쇄하려던 시도는 4.24 한신교육투쟁을 야기했고, 교육의 현장인 학교에서 사상자가 나올 정도로 격렬했다.
또 2002년에는 도쿄를 비롯한 대도시에서 조선학교 여학생들의 한복 교복을 면도칼로 찢는 테러행위가 발생,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조선학교는 여학생들의 교복을 세일러복으로 교체해야 했다.조선학교 정문 앞에서 헤이트스피치를 하는 재특회의 모임이 기승을 부렸다. 마침내 2012년 아베 정권은 고교무상화 시행령을 수정해 조선학교를 심사 대상에서 제외했다.
조선학교에 대한 이같은 전방위적인 차별과 테러에 대해 모두 살펴볼 수는 없다. 이번 발표에서는 그 모든 차별을 가로지르는 “이름의 문제”를 제기해 보려고 한다. (jc, 2024/9/1)
인권은 말 그대로 사람으로서 갖는 권리이다. 서양어 휴먼 롸이트(human right)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두 가지 조건이 내포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똑같이 누려야 하는 권리’가 인권이기 때문이다. 보편적이며 평등한 자연권이라는 말이다.
이 같은 인권 개념이 지금은 당연시되지만, 인권이라는 말이 생긴 것은 40억년 인류 역사에서 오래되지 않는다. 프랑스 혁명을 기원으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니까, 대략 2백50년쯤이다.
그 이전에는 평등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귀족과 평민과 노예 등의 신분제도가 오래 유지됐고, 그것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 프랑스혁명이었다. 지금도 유럽의 일부국가에는 귀족제도가 남아 있지만 인간으로서의 자연권은 보편성과 평등성을 인정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보편적이고 평등한 자연권으로서의 인권을 해방 이후에야 누리게 된다. 조선은 양반과 상민과 천민의 구별이 있던 전근대사회였고, 일제강점기에도 조선인은 일본인과 평등한 권리를 누리기는커녕, 차별대우를 받았던 ‘노예상태“였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의 수구세력 중에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인의 국적이 일본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 무식한 주장이다. 일제는 자국의 ‘국적법’을 조선인에게 적용하지 않았다. 그 대신 ‘조선호적령’으로 조선인을 관리했을 뿐이다. 일본의 ‘법’도 아니고 총독의 ‘령’이었다.
조선을 병합한 후 일제는 조선인을 ‘조센징’이라고 불렀고, 일본인 대접을 한 적이 없다. 조선인들이 일본 국적을 가졌다면, 당연히 국적법상의 ‘일본국적 이탈권’도 가지게 되는데, 이것을 막아야 했던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일본 국적법을 적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일제는 ‘국제법’상으로는 조선인도 일본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독립투사들이 중국이나 러시아의 국적을 취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한 안중근 의사의 재판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경쟁을 벌였다. 러시아는 자국 영토에서 발생한 일이라고 주장했지만, 일제는 안중근 의사가 ‘국제법’상 일본인이라며 재판권을 탈취했다.
국제법상 일본인 취급을 받으면서 정작 일본 국내법상 일본인 취급을 받지 못한 상황은 “노예제도”였다. 1945년 8월 포츠담에서 전후 대책을 논의했던 트루먼과 처칠과 스탈린은 “한국인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한국을 적절한 시기에 해방, 독립시킨다는 내용을 포함시켰다.
“한국인의 노예상태”는 그보다 2년 전인 <카이로 선언>에도 명시됐다. 루즈벨트와 처칠, 장제스가 이집트 카이로에서 발표한 이 선언에는 “(영,미,중) 3대국은 조선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자주 독립시킬 결의를 한다. (The aforesaid three great powers, 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re determined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고 선언했다.
이 선언문이 발표되자 당시에는 “적당한 시기에”라는 구절 때문에 말들이 많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미,영,중의 3국 지도자들이 “조선민의 노예상태”를 직시했다는 점이다. 즉, 일제의 지배 아래서 일본인처럼 온갖 의무는 져야 했지만 일본인으로서의 권리는 전혀 누리지 못하는 조선인의 상황을 “노예상태(enslavement)”라고 정확하게 파악했던 것이다.
중일전쟁이 장기화되고 태평양 전쟁이 격화되는 중에도, 일제는 조선인에게 “병역의 의무”를 부과하지 못했다. 일본인 대접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인을 징집하는 대신 “지원병 제도”를 시행했다. 조선인 청년들에게 자원해서 입대하라는 건데, 조선인 청년이 개죽음을 위해 지원할 리가 없다. 말만 ‘지원’일뿐 일제는 지역별 할당까지 만들어 “강제 지원”을 강요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었는데도 한국의 수구세력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의 국적이 일본이었다”는 얼빠진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런 거짓말을 그대로 받아서 퍼뜨리는 언론이 큰 문제다. 한국 수구세력과 언론이 모르고 그런다면 무식한 것이고, 알면서도 그런다면 사악한 것이다. sns가 아니었다면, 대부분의 한국민은 그게 정말인 줄 알았을 것이다.
암튼,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도 조선인=한국인들은 보편적이고 평등한 인권을 누리지 못했다. 일제가 패망하고 해방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인권을 누릴 가능성이 생겼다. 따라서 프랑스의 인권의 역사가 250년이라면 한국의 인권의 역사는 80년에 불과하다.
한편, 1919년 4월11일의 상하이 임시정부의 헌법에 인권이 보장되어 있었다는 점은 중요하다. 반포당시 “임시헌장”이라고 했다가 그해 9월11일 “임시헌법”으로 개명된, 10개조로 구성된 이 헌법의 제3조와 제4조가 대한민국 인민의 인권을 보장했다.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
제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종교,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통신, 주소 이전, 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누린다.
이 조항은 서양 각국의 기준으로도 손색이 없는 인권 조항인데, 몽테스키외의 3권분립론을 수용하면서, 그 바탕인 천부인권 개념을 자연스럽게 전제했기 때문이다. 다만, 일제 강점 상황으로 이 헌법을 국내에 적용하지 못했던 것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이 “임시헌법”은 1948년 7월17일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으로 이어지면서 인권개념도 그대로 전수됐다. 제5조는 “대한민국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자유, 평등과 창의를 존중하고 보장하며 공공복리의 향상을 위하여 이를 보호하고 조정하는 의무를 진다”고 함으로써 대한민국 국민의 인권을 수호할 의무가 정부에게 있음을 명시했다.
제8조에서는 “모든 국민이 평등하며,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규정했고, 제9조는 신체의 자유, 제10조는 거주이전의 자유, 제11조는 통신의 비밀의 자유, 제12조는 신앙과 양심의 자유, 제13조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제14조는 학문과 예술의 자유, 제15조는 재산권, 제16조는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 제17조는 근로의 권리와 의무, 제18조는 노동권, 제19조는 노동할 수 없는 국민의 생활유지의 권리, 제20조는 남녀평등권 등을 보장했다.
또 제7조에서는 “외국인의 법적지위는 국제법과 국제조약”에 의해 보장된다고 함으로써,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에게도 대한민국 국민이 누리는 인권을 대부분 누릴 수 있도록 규정했다.
제헌 헌법의 인권 내용은 향후 7차례의 개정을 거치면서도 유지되거나 강화됐고, 따라서 헌법상으로는 대한민국의 국민과 외국인들에게 인권이 보장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승만의 독재시기, 그리고 박정희-전두환-노태우의 군사독재 시기에는 헌법을 무시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특히 이승만의 부정선거, 박정희의 쿠데타와 유신 행각, 전두환과 노태우의 쿠데타와 광주학살은 피로 점철된 인권 유린의 역사였다.
강릉에도 인권탄압의 사례가 있다. 의문사 피해자 김성수 열사이다. 1986년 강릉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지리학과에 입학한 그는 그해 6월18일 행방불명, 6월21일 부산 송도 앞바다에서 시멘트 덩이를 매단 채 주검으로 발견됐다.
해녀 김씨가 이를 신고하자, 경찰은 자살로 처리했으나, 18년 만인 2004년 제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김성수의 죽음에 공권력이 개입돼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그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
명문화된 헌법의 인권조항이 있어도, 무시되었던 시절이었다. 오늘날 인권운동은 이미 명문화된 인권이 지켜지도록 요구하고 감시하고, 위반사항이 처벌되도록 해야 한다. 시간이 가면서 과거의 인권 유린이 조금씩이나마 밝혀지고, 처벌과 배상이 이루어지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강릉을 비롯한 전국의 인권 운동가들은, 한국에서 인권이 지켜지도록 하는 것은 아직도 지난한 일이라고 여기고 있다.
올해의 제25회 <강릉인권영화제>의 표어는 “당신을 지켜주는 인권”이다. 이 표어는 작년의 제24회때도 사용됐는데, 거기에는 “차별 없는 세상!”이라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다. 차별은 인권유린의 가장 가시적인 형태이다. 인권의 보편성과 평등성을 위배하기 때문이다.
이글에서는 <무용신>의 일본내 활동에서 목격한 재일조선인/한국인들이 겪는 다양한 차별 중에서, 통명이라는 제도 때문에 겪어야 하는 인권유린 상황을 보고하고자 한다. (jc, 2024/9/1)
제25회<강릉인권영화제>가9월6(금)-10일(화)강릉 월화거리에서 열립니다.작년에도 <무용신>과 <대륙학교> 등의 자매단체들이 모금과 방문으로 인권영화제를 후원한 바 있습니다.올해도 후원을 계속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올해는 후원 모금은 하지 않습니다. <무용신>의 직전 행사 예산 잔여분으로 인권영화제 후원금을 이미 전달했습니다.하지만 방문단은 구성하고자 합니다.
우리들의 <강릉인권영화제>방문 참여는 큰 의미가 두 가지나 있습니다.
첫째는,강릉지역의 시민운동가들에게 연대의 뜻을 전할 수 있습니다. 지방의 시민운동은 사정이 열악합니다.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좋지 않습니다.강원도는 영남지역에 못지않게 보수주의가 강하며,강릉은 특히 심각합니다.그런 상황에서도 소수의 시민활동가들이 이 지역의 민주-노동-여성-환경-인권 운동에 전방위로 노력해 왔습니다.
예컨대, <제1강릉포럼>의 김중남, 강승호, 조은혜 선생과 <김성수열사기념사업회>의 홍진선, 유선기, 이요한 선생 등을 예로 들수 있습니다.
공무원 노조운동을 해오신 김중남 선생, 강릉원주대 국제통상학과의 교수이자 <제1강릉포럼>의 공동대표이신 강승호 선생, <제1강릉포럼>의 사무국장 조은혜 선생은 줄곧 민주-노동-환경운동에 매진해 오셨습니다.
<강릉인권영화제>는 강릉지역의 시민운동가들이 결집해서 추진하는 중요한 행사입니다. 우리의 <강릉인권영화제>후원과 연대는 이들에게 큰 힘이 됩니다.작년과는 달리 올해는 후원금을 모금하지 않았기 때문에,직접 참여해 주시는 것이 무척 중요합니다.
둘째는, 인권영화제의 직접 행사는 아니지만, 강릉 출신의 의문사 희생자 김성수열사의 추도비를 참배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합니다.매년 마석공원에서 추도제가 열립니다만,일년에 한번쯤은 많은 분들이 강릉고 교정에 마련된 추도비를 직접 방문해 참배하면,김성수열사의 늙으신 부모님과 기념사업회에 큰 힘과 격려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올해는 영화제에서 김상진 열사 추모 다큐멘터리도 상영되기 때문에 뜻이 더욱 깊다고 하겠습니다.
추도비 참배 직후에는 기념사업회가 인근 초당순두부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대접해 주십니다.이 자리는 강릉의 진보운동과 인권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좋은 자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무용신> 활동 중,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강릉과 연관되었음을 알게되어 강릉과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이 지역의 진보운동이 강원도 전체에 중요하다는 점을 알게 되었고,최근 수년의 선거상황으로 보아 강릉에도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생겼다고 생각합니다.이런 시점에서 우리들의 강릉 지원은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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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단의 일정은9/6-8일의2박3일이지만,각자 사정이 되시는 대로1박2일만 참여해 주셔도 좋겠습니다. 또 시간이 되시면 9/6-10일의 모든 행사에 참석하시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다만 방문단은 9월7일 오후4시부터 시작되는 축하공연(풍물패 동동,임인출)과 개막식,그리고9월8일(일)오전8시의 김성수열사 추도비 참배에는 참석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작년과는 달리 올해는 교통편을 준비해 드리지 못합니다.예산 문제도 있고,개개인의 일정에 맞춤형으로 예약해 드리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그러나3주일 전이므로ktx를 예약하실 수 있고,고속버스를 이용하신다면 출발 당일에도 어려움이 없으실 것입니다.승용차를 이용해 여러분이 함께 방문하시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숙소 예약은 방문단과<김성수열사기념사업회>가 준비해 드릴 수 있습니다.미리 일정을 알려주시면 그에 맞게 영화제 참가와 추도비 참배, 그리고 해변 산책에 편한 위치의 호텔을 예약해 드리겠습니다.
참여하실 분들은 댓글을 주시거나 아래의 전화번호로 연락 주세요. 강릉인권영화제 조직위원회와 김성수열사기념사업회에 전달해서 필요한 편의를 제공 받으실 수 있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25회 <강릉인권영화제>가 9월6(금)-10일(화) 강릉 월화거리에서 열립니다. 작년에도 서울대민주동문회 회원들이 모금과 방문으로 인권영화제를 후원한 바 있습니다. 올해도 후원을 계속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올해는 후원 모금을 하지 않습니다. <무용신>의 직전 행사 예산 잔여분으로 인권영화제 후원금을 이미 전달했습니다. 하지만 방문단은 구성하고자 합니다.
서민동의 <강릉인권영화제> 방문 참여는 큰 의미가 두 가지나 있습니다.
첫째는, 강릉지역에서 시민운동을 해온 동문들에게 연대의 의미가 됩니다. 강승호 선생(중문82)과 홍진선 선생(농학84)이 그 대표적인 인사들입니다.
강승호 선생은 강릉원주대학 국제통상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지만, <제1강릉포럼>의 공동대표를 겸임하면서 강릉지역의 민주화와 환경운동에 열과 성을 다해 왔습니다. 홍진선 선생도 <김성수열사기념사업회>의 상임이사로서 이 지역의 노동-인권운동에 신명을 다해 왔습니다.
지방의 시민운동은 사정이 열악합니다.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좋지 않습니다. 강원도는 영남지역에 못지않게 보수주의가 강하며, 강릉은 특히 심각합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소수의 시민활동가들이 이 지역의 민주-노동-여성-환경-인권 운동에 전방위로 노력해 왔습니다.
<강릉인권영화제>는 강릉지역의 시민운동가들이 결집해서 진행하는 중요한 행사입니다. 서민동의 <강릉인권영화제> 후원과 연대는 이들에게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작년과는 달리 올해는 후원금을 모금하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 참여해 주시는 것이 무척 중요합니다.
둘째는, 강릉 출신의 의문사 희생자 고김성수열사(지리86)의 추도비 참배입니다. 매년 마석공원에서 추도제가 열립니다만, 일년에 한번쯤은 동문들이 강릉고 교정에 마련된 추도비를 직접 방문해 참배하면, 김성수열사의 부모님과 기념사업회에 큰 힘과 격려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올해는 김상진 열사 추모 다큐멘터리도 상영되기 때문에 뜻이 더욱 깊다고 하겠습니다.
추도비 참배 직후에는 기념사업회가 인근 초당순두부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대접해 주십니다. 이 자리는 강릉의 진보운동과 인권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좋은 자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무용신> 캠페인을 하던 중,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과 강릉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되어 강릉과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지역의 진보운동이 강원도 전체에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고, 최근 수년의 선거상황으로 보아 강릉에도 변화가 일어날 조건이 갖춰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시점에서 서민동의 강릉 지원은 큰 힘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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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단의 일정은 9/6-8일의 2박3일이지만, 각자 사정이 되시는 대로 1박2일만 참여해 주셔도 좋겠습니다. 다만 9월7일 오후4시부터 시작되는 축하공연(풍물패 동동, 임인출)과 개막식, 그리고 9월8일(일) 오전8시의 김성수열사 추도비 참배에는 꼭 참석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작년과는 달리 올해는 교통편을 준비해 드리지 못합니다. 예산 문제도 있고, 개개인의 일정에 맞춤형으로 예약해 드리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3주일 전이므로 ktx를 예약하실 수 있고, 고속버스를 이용하신다면 출발 당일에도 어려움이 없으실 것입니다. 승용차를 이용해 여러분이 함께 방문하시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숙소 예약은 방문단과 <김성수열사기념사업회>가 준비해 드릴 수 있습니다. 미리 일정을 알려주시면 그에 맞게 영화제 참가와 추도비 참배, 그리고 남대천이나 해변 산책에 편한 위치의 호텔을 예약해 드리겠습니다.
작년에는 이은정 사무총장님의 선도적인 안내로 서민동 회원분들의 참여가 돋보였습니다. 올해도 같은 수고를 해 주시면 얼마나 감사할지 모르겠네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