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희 피디님의 최승희 선생 연구 활동에서 시작된 <무용신>의 "재일 조선동포학생 문화예술활동 지원 사업"은 "연해주 고려인 학생 문화예술활동 지원 사업"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재일조선인 학생들에게 무용신 30켤레를 전달하는 작은 시작이 다양한 이들이 함께하게 되며 더 다채로운 활동으로 이어진 결과였습니다.
이번에는 기존의 활동과는 다소 다른 맥락이지만, 지난 7월과 8월 방글라데시에서 일어난 몬순혁명을 지지하고 지원하는 캠페인을 진행하려 합니다.
몬순혁명의 대변인으로 활동했던 지인의 요청으로, 몬순혁명의 학생 리더와 예술 시위에 참여했던 두 명의 학생 리더를 한국으로 초청하고자 합니다.
그들이 한국 방문을 통해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이해하고, 방글라데시에서 시작된 사회 변화를 더 민주적인 사회 건설로 이어가는 연대의 길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무용신>은 그들의 한국 방문 비용을 지원하기 위한 캠페인을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무용신>은 그동안 재일·재러 동포를 지원하며, 이념적 갈등으로 소외된 그들의 문화예술 활동을 돕는 일을 지속해왔습니다. 이번 캠페인은 이러한 활동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우리가 경험한 민주화 과정이 세계 시민으로서 더 진보적인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고민과 맞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진행됩니다.
혁명의 완수는 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선배 세대의 많은 희생으로 이루어낸 사회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습니다. 때로는 비통함과 분노를 느끼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함께하는 이웃과 선의의 시민들이 연대하여 우리는 변화를 이야기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와 더불어, 세계의 이웃 사회가 겪는 문제를 바라보고, 그들의 어려움을 이해하며 연대하는 동시에 우리 사회의 방향과 문제를 고민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방글라데시 학생 리더들을 초청해 그들과 함께 연대하며 사회 진보를 고민할 단체들과의 만남을 추진하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한국의 민주화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마련된다면, 우리 사회에도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뜻깊은 자리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일본의 통명제도는 국제적으로 예가 없는 독특한 경우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외국인들에게 자국식 통명을 공식문서에 요구하지 않는다. 강요는커녕 요구하지도 않는다. 별명이 사용되는 경우는 있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자발적인 경우이며, 어떤 경우에도 통명이나 본명의 발음은 본인의 요청에 따른다. 일본의 통명 제도는 대단히 이례적이고 비정상적이다.
오늘날의 일본의 통명제도는 일본의 군국주의 시대에 식민지 조선에 강요했던 창씨개명에서 비롯된 관행이다. 창씨개명은 원천적으로 무효화되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일본은 그 악영향을 청산하기는커녕, 80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이는 마치 독일에서 지금도 유태인을 차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단히 이례적이고 비정상적인 일이다.
일본 안에서도 통명의 강요와 본명의 일본식 발음은 서양인들에게는 적용되지 않거나, 차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동양권의 나라, 특히 같은 한자권인 중국인들에게도 일본식 통명을 강요하거나, 한자 이름을 일본식으로 읽어 부르지 않는다. 통명의 강요와 본명의 일본식 발음은 재일조선인/한국인에게만 적용되고 있는 셈이다.
이쯤 되면, 일본의 통명제도, 그리고 본명을 일본식 발음으로 부르는 관행은 재일조선인/한국인에게만 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엔인권선언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일이다. 인종과 언어에 따른 차별이기 때문이다.
이런 차별적 관행은 보통 시민사회와 언론, 그리고 사법제도에 의해 시정되어 나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재일조선인/한국인을 차별하는 통명제도는 일본 시민사회에 의해 자성이나 교정 노력이 경주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재일조선인/한국인에 대한 통명제도, 그리고 본명의 일본식 발음을 ‘편의성’으로 정당화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그런데 “누구의 편의”인지는 따져지지 않는다. 최창화씨의 경우, 그것은 언론기관의 편의였다. 본인이 원치 않아도 언론사의 편의 때문에 유지한다는 답변은 놀라웠다.
가장 놀라운 것은 사법기관이다. 기타큐슈 지방법원은 최창화씨의 정당한 요구를 기각했다. 오사카 지방법원은 “본명 대신 통명을 사용하라는 사업주의 요구가 김임만 감독을 차별한 것이 아니”라고 판시했는가 하면, 오사카 고등법원은 “통명의 강요가 인정되며, 개인 정체성에 대한 침해”라고 인정하면서도 “통명의 강요가 사업자의 선의”라고 결론 내렸다. 이는 유엔인권선언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판결이 아닐 수 없다.
국제적인 시각에서는 일본의 통명제도가 그 시작부터 대단히 이례적이고 비상식적이며, 따라서 비정상적인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일본 내에서는 그것이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정상적인 제도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필자는 일본을 방문할 때 3개 언어로 된 명함을 사용한다. 한국어, 한자, 그리고 영문자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 명함을 사용할 때는 반드시 영문자 이름을 강조한다. 그래야 필자의 이름이 제대로 발음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가피한 이유로 일본 땅에서 영주해야하는 재일조선인/한국인들은 누구도 통명제도의 불편함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이는 차별의 문제와 점층적인 악순환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본래의 차별은 저항을 낳게 마련이고, 이 저항을 누르기 위해 또 다른 차별을 고안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필자는 재일조선인/한국인의 통명제도가 차별의 문제와 직결되어있음을 지적했지만, 관찰자의 짧은 소견에 불과할 것이다. 따라서 해결방안을 제시할 식견이 필자에게는 없다.
하지만 자아정체성의 본질의 일부인 이름에 대한 차별적 현실이 일본에서 재일한국인/조선인들에게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일본 사회의 각성을 촉구하며, 재일조선인/한국인들의 용기있는 저항과 개선노력을 응원할 뿐이다. (jc, 2024/9/3)
선헌양(宣憲洋, 2001)은 오타루상과대학 언어학센터의 학술잡지에 발표한 논문 [재일한국인/조선인의 본명사용을 촉진하는 한 가지 방법]에서 재일한국인 최창화(崔昌華, チョエ・チャンホア, 당시45세)씨의 경우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기타큐슈시 목사 최창화는 NHK 뉴스 시간에 자신의 이름이 '사이 쇼카' 라고 자주 불려진 것에 대해 ”내 이름을 올바르게 불러 주었으면 좋겠다“고 여러번 정정을 요구했다. 하지만 무시당했다. 그래서 당사자는 ”인격권 침해“라고 하여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재일조선인의 인권 문제에 정진하여 주목을 받았으며, 또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방법에는 각별히 엄격했다. 본인의 이름 호칭에 대한 정정요구와 소송의 사정은 다음과 같다.
“1975년 9월3일 기타큐슈(北九州)시 고쿠라(小倉)의 한국인 목사 최창화(崔昌華, 45세)씨는 NHK 기타큐슈 방송국의 이치카와 사다오(市川定夫) 방송부장을 찾아가 항의하고 정정을 요구했다.
“지난 8월 26일, “키타큐슈 시장에게 재일 한국인/조선인의 인권에 관한 공개 질문장” 제출하면서 기자회견을 했을 때, 자신의 이름을 '최창화'라고 여러 번에 걸쳐 발음해 주었는데도 NHK는 9월1일과 2일의 뉴스에서 의도적으로 ‘사이·쇼카(サイ・ショウカ)’라고 일본식으로 발음했다. 이것은 인권상의 중대한 잘못이므로 정정해 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앞으로 재일한국인/조선인에 대해 일본식 발음으로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이름을 올바르게 불러주길 바란다. 이는 인권 존중의 출발점이라며 강력히 항의했다. 기자회견 때 그는 “자신의 이름을 잘못 읽지 않도록 두 번이나 공을 들여서 설명했고, 명함의 이름 밑에 로마자로 발음을 적어 놓았다”고 덧붙였다.
“이 항의와 정정 요구에 대해서 이치카와 부장은, 협회에 연락을 취한 후, 9월27일 다음과 같이 회답했다
“NHK에서는 1948년 10월부터 1955년 9월까지 현지발음으로 읽었지만, 발음의 어려움이 있어, 모두 일본어를 읽는 방법으로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앞으로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지만 현 단계에서는 지금까지와 같이 하겠다.
“그러나 최씨는 수긍하지 않고 내 이름은 ‘사이’씨가 아니라 ‘최’라고 강하게 반발하며 재차 항의했다. 하지만 이치카와 부장은 ‘방송의 어려움을 겪는다. 정정하면 전국적으로 문제가 된다. 그래서, 현단계에서는 지금까지와 같이 해 간다’라고 같은 대답을 했다.
“이에 최씨는 ‘인격의 상징으로서의 이름이 다른 사람의 사정으로 변경될 수 있다는 기본적 인격 침해는 용서할 수 없다’며 제소를 단행했다. 그래서 10월3일 일본방송협회(회장 오노 요시로)를 상대로 ”인권침해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를 후쿠오카지방법원 고쿠라지부에 제출했다. 이 재판은 대법원까지 다투었지만 결국 원고 패소가 됐다. [김일면, 『조선인이 왜 '일본명'을 자칭하는가』, 삼일책방, 1978년, 203쪽~204쪽.]”
김임만 감독과 최창화 목사의 소송사건과 그 결과는 일본 사법부도 본명과 통명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해야 하는 재일한국인/조선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일본 정부나 기업이 국내법에 강하게 집착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더구나 국내법이 재일조선인/한국인 차별을 제도화하고 있는 일본 사회를 반영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사법부는 국제법과 보편적 상식을 판결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정부기관이다.
재일 한국인 최창화 목사나 재일조선인 김임만 감독이 소송을 제기한 것도 법원의 이같은 권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 법원도 정부나 기업과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jc, 2024/9/3)
김임만(金稔万) 선생은 일본 효고현 아마가사키에 거주하는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다. 그는 일용직 노동자로 생활하면서도 재일조선인의 모습을 20년 이상 카메라에 담아왔다.
한국에서 상영된 그의 작품으로는 [카마가사키 권리찾기(釜ヶ崎の住民票を返せ!, 2011)]와 [용왕궁의 기억(2016)], [경찰아파트(キョンチャルアパー, 2022)], [돈즈루봉과 야나기모토 비행장(どんづる峯と柳本飛行場, 2022)] 등이 있다.
김임만 감독의 작품들은 모두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카마가사키의 권리찾기]는 카마가사키의 재일외국인 일용직 노동자의 주민등록표가 악용되는 것을 고발했고, [용왕궁의 기억]은 김임만 감독의 모친이 활동하던 용왕궁을 중심으로 재일조선인의 고난을 추적하면서 모자간의 관계를 재조명했다. [경찰아파트]와 [돈즈루봉과 야나기모토 비행장]은 태평양전쟁 말기 조선인 노동자들이 강제동원되었던 유적지들을 기록 영상으로 남겼다.
김임만 감독은 재일조선인 2세로 본명과 통명 사이에서 갈등을 경험했다. 그는 2009년 오사카 시의 하청을 받은 종합건설회사 [오테제네콘(大手ゼネコン)]의 재건축 일을 소개받았다. 오테제네콘의 재하청을 받은 [오바야시구미(大林組)]는 ‘김임만’이라는 본명을 사용해왔던 그에게, 이번에는 통명으로 일해 달라면서 그가 사용할 안전모에 ‘가네우미’라는 통명을 붙였다. 그의 본명 명찰은 버려져 있었다.
김임만 감독은 그리 화목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랐고, 일본학교에 다녀야 했기 때문에 조선말을 하지 못했다. 부친은 “일본에서 살려면 일본식 통명을 써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자녀들에게 통명 사용을 강요했던 부친도 죽음을 앞두고 스스로 마련한 묘비에는 ‘본명’을 썼다. 재일 조선인은 죽어서야 떳떳하게 본명을 쓸 수 있다는 일본의 현실을 김임만 감독은 개탄했다.
이후 김임만 감독은 조선인 친구들을 만나면서 민족의식이 성장했고, 통명 대신 본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작품도 본명으로 발표했고, 직장에서도 불이익을 무릅쓰고 본명으로 일했다.
그러나 2009년 김임만 감독은 [오테제네콘]에서 하청을 받은 [오바야시구미(大林組)]에서 약 삼 개월 반 동안 ‘가네우미’라는 통명으로 일해야 했다. 통명을 사용하지 않으면 해고당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오바야시구미]는 취업 지원한 김임만 감독의 이름이 본명인 것을 보고 취업증명서를 요청했는데, 재일조선인으로서 특별영주권자인 김임만 감독은 취업증명서를 제출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하청업체는 [오테제네콘]에 이를 설명하는 대신에 김임만 감독에게 일본식 통명을 쓰도록 강요한 것이다.
[오테제네콘]의 계약이 끝난 후, 김임만 감독은 하청업체인 [오바야시구미]와 원청인 오사카시청을 상대로 정신적인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재일조선인에게 암묵적으로 일본식 통명을 강요하는 사회와 국가에 본격적으로 저항을 표시한 것이었다.
2년여의 심리 끝에 오사카 지방법원은 2013년 1월30일의 1심 판결에서 원고 패소라는 부당 판결을 선고했다. 통명을 요구를 강제하지도 않았고, 통명 사용을 요구한 것은 김임만 감독에게 신속하게 일을 맡기려는 것이었지, 차별대우 때문이 아니라는 게 판결 요지였다.
김임만 감독은 1심판결에 불복해 2월7일 항소했지만, 그해 11월26일 오사카 고등법원은 재차 김임만 감독에게 실망을 안겼다. “오바야시구미가 불필요한 통명 사용을 강제한 것은 부정할 수 없”으며, “안전모의 본명 명찰을 제거한 행위는 개인의 정체성을 침해한 것”이라고 인정했지만, 그 이유가 차별대우 때문은 아니라, 김임만 감독이 신속하게 일할 수 있게 하려는 선의 때문이었다고 판결한 것이다.
이에 대해 김임만 감독은 2심에서는 1심보다 진전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법원도 재일조선인의 권리를 인정해 주지 않는 현실을 절감했다”고 실망감을 표시했다. 그는 또 “재일조선인의 본명 사용 보장을 위한 활동을 계속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jc, 2024/9/2)
재일조선인은 용기를 내어 본명을 사용하는 경우에도, 일본인들은 이름의 발음을 일본식 한자 발음으로 바꿔버린다.
일제강점기 조선무용을 창안한 최승희(崔承喜) 선생은, 스승의 통명 요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본명을 지킨 사람이다. 이시이 바쿠는 재능 있고 전도가 유망한 제자에게 자신의 성인 이시이(石井)을 하사하곤 했다. 심지어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좋은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이시이 코나미나 이시이 미도리, 이시이 미에코 등은 스승이 지어준 이름이고, 그런 이름을 하사받는 것이 제자들에게는 큰 은혜였다. 그래서 평생 그 이름으로 무용활동을 하곤 했다. 이는 곧 “나는 신무용의 대가 이시이 바쿠의 유능한 제자”라는 뜻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승희는 “이시이”라는 성을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스승이 지어준 “쇼코(勝子)”라는 예명도 몇 번 쓰다가 포기, 다시 본명인 최승희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나 최승희가 자신의 본명을 사용해도, 일본인들은 이름을 “최승희”라고 읽어주지 않았다. 이름 한자의 일본식 발음대로 “사이 쇼키”라고 읽어버렸던 것이다.
‘최승희’라는 이름과 ‘사이 쇼키’라는 이름은 음성학적으로 공통점이 전혀 없다. 그래서 마치 본명을 무시하고 또 하나의 통명이 생겨버리는 셈이 된다. 이 경우에는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공개하고 나서도 또다시 차별을 받게 된다. 이 같은 폐단 때문에 재일조선인들은 아예 일본식 한자와 일본식 발음으로 된 통명을 사용함으로써 차별을 피하려고 노력한다.
서구의 경우와는 대단히 대조적이다. 나는 이름이 조정희이지만, 미국에서는 Jeonghee CHO라고 이름을 표기했다. 이름을 접한 미국인들은 항상 어떻게 발음하면 되는가, 하고 묻는다.
미국인들한테는 제이(J)의 발음이 어려울 수 있다. 심리학자 구스타브 융(Jung)처럼 제이 발음이 사라져버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아주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반자음이 남는 것이지만.
성의 ch발음도 마찬가지이다. 영어 단어에서 ch는 발음이 다양하다. 챨스(Charles)라는 이름에서처럼 치읓소리가 가장 보편적이지만, 경우에 따라서 스쿨(school)이나 콜레라(cholera)처럼 키읔 소리가 되기도 하고, 시카고(Chicago)나 기사도(chivalry)에서처럼 시옷 소리도 나온다. 그래도 몇 번 발음해 주면, 이내 제대로 이름을 불러준다.
일본인이 한자를 일본식 발음으로 읽는 것이 편하다는 것이 이해는 된다. 한국에서도 모택동(毛澤東)이나 주은래(周恩来)나 등소평(鄧小平)이라고, 한국식으로 발음했던 시기가 있었다. 일본인도 풍신수길(豊臣秀吉), 이등박문(伊藤博文), 재등실(齋藤實)이라고 부르곤 했다.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마오쩌뚱, 저우언라이, 덩샤오핑이라고 부르고, 토요토미 히데요시, 이토 히로부미, 사이토 마코토라고 부른다. 그 나라의 발음을 존중한다는 원칙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재일조선인의 이름을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일부 의식 있는 지식인들을 제외하면 한자권 외국인 이름을 일본식 발음으로 불러버린다. 쑨웬(孫文)을 손분(ソンブン), 마오쩌뚱(毛澤東)을 모타쿠토(モウタクトウ)라고 한다.
최근 중국이름 발음에는 변화가 생겼다. 모택동을 마오쪼통(マオ・ツォートン)이라고 표기한 백과사전도 있다. 그러나 원음 존중의 원칙이 재일조선인의 이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또 하나의 차별인 셈이다.
예컨대 조선학교(朝鮮學校)는 일본 교육법상 외국인학교와 함께 각종학교로 분류된다. 외국인학교는 ‘가이고쿠진가코’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인터내셔널 스쿨(International School)이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조선학교는 ‘조선학교’라고 부르지 않고 언제나 ‘조센가코’라고 부른다.
재일조선인의 이름뿐 아니다. 베이징(北京)은 페킹(ペキン)이라고 그런대로 원음에 가깝게 부르지만 부산(釜山)은 아직도 후잔(フザン), 한국(韓國)도 ‘한국(ハングク)라고 부르지 않고 ’강고쿠‘라고 부른다. 특히 일본인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기타조센(北朝鮮)‘이라고 부른다.
재일조선인 1세와 2세들의 통명은 창씨개명의 직접적인 피해자들이었다. 조선에서는 강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약 20%의 조선인들이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창씨개명을 하는 경우에도 일본식 창씨는 많지 않았고, 자신의 관향이나 성을 파자해서 창씨하곤 했다. 예컨대 전주 이씨는 국본(國本)이나 조본(朝本)이라는 식으로 왕가임을 강조했다.
심지어 ‘천황폐하’와 발음이 같은 덴노 헤이카(田農炳下, 田農昞夏)로 창씨하여 천황을 조롱하거나, 미나미 타로(南太郞)라고 창씨개명해 당시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를 비난한 사람도 있었다. 또 산천초목(山川草木)이나 청산백수(靑山白水), 강원야원(江原野原) 등으로 장난삼아 창씨하거나, 성을 가는 놈은 개자식이라는 뜻으로 ‘이누코(犬子)’라고 창씨한 사람도 있었다.
창씨개명에 대한 반항과 조롱은 조선에서는 가능했지만, 재일조선인들은 그럴 수 없었다. 거의 대부분 일본식으로 창씨와 개명을 해야 했고, 해방 후에도 이를 유지했다. 패전한 일본인들의 좌절감과 분노는 승자인 미국인들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 이상하게도 자신들이 노예처럼 부리던 조선인들에게 향했고, 조선인 차별은 더욱 심해졌다.
이같은 사회상황에서 재일조선인들은 더욱 자신의 정체성을 숨겨야했고, 재일조선인들의 생존을 위해 통명을 사용했던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유일한 예외가 재일조선학교였다.
해방 직후 재일조선인들이 귀국을 준비하면서 자녀들에게 조선말을 가르치기 위한 [국어강습소]로 시작된 조선학교는 1946년의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의 지도 아래 전국으로 확산됐다. 1948년의 한신교육투쟁을 거치면서 1949년 조선학교가 폐쇄되기도 했으나, 1953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이 결성되면서 재건됐고, 재일조선인들은 학교를 중심으로 결집했다.
조선학교의 특징은 조선말과 조선역사를 가르치고, 조선의 문화예술활동을 장려하는 등의 민족교육을 강조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본명 사용이었다. 조선학교 학생들의 본명 사용은 다른 재일조선인들에게는 대단히 용감한 행동이고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조선학생들도 기타 사회생활에서는 통명을 사용해야 했고, 특히 졸업 후 사회에 진출하면 통명으로 돌아가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정체성이 형성되는 학창 시절에 본명을 사용하고 모국어로 공부하는 것은 학생들의 자존감 형성에 매우 긍정적이다.
앞서 잠시 언급한 김명곤 감독의 삿포로 조선학교 전입생의 경우, 구시로의 일본학교 재학 중에는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밝히지도 못했고, 삿포로 전학도 일본학교로 간다고 거짓말을 해야 할 정도였다. 친구들과의 교유관계에서 본명 사용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김명곤 감독이 또 다른 예로 들었던 2019년 한 오사카 공립학교의 민족학급 수업 참관도 마찬가지였다. 그 마지막 수업에서 민족학급 강사는 손정의가 본명을 쓰면서도 일본 사회에서 훌륭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예로 들면서 “여러분도 본명쓰기를 권한다”고 했다고 한다.
이는 마치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의 [마지막 수업(La dernière classe, 1873)]을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1871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가 알사스-로렌을 프로이센에 넘겨주어야 했던 시기, 프랑스어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칠판에 “프랑스 만세(VIVE LA FRANCE!!)”를 썼던 아멜 선생처럼,
조선민족학급의 강사는, “어디까지나 여러분의 선택”이라면서도 “본명에 대한 자부심을 잃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던 것이다. 그만큼 재일조선인들은 일본사회에서 일본식 통명을 사용해야 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본명 사용을 명예로운 일로 간주하는 것이다.
세계인권선언은 제26조에서 “교육은 인격의 완전한 발전과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중의 강화를 목표”로 하며, ”부모는 자녀에게 제공되는 교육의 종류를 선택할 우선권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일본은 세계인권선언에 참여하고 있다.
2019년에는 유엔아동권리위원회로부터 총련계 민족학교인 조선학교를 교육무상화 대상에 포함시킬 것을 권고했지만, 일본 정부는 유독 재일조선인과 조선학교에 대해서는 국제기구의 어떤 권고나 제재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jc, 2024/9/2)
일제는 1940년 2월11일부터 식민지 주민들의 황국신민화를 이유로 창씨개명을 추진했다. 일본 정부가 식민지 주민들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라고 강요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1939년 11월10일 <조선민사령>을 개정, 조선에서도 일본씩 씨명제를 따르도록 규정하고, 1940년 2월11일부터 8월10일까지 씨(氏)를 정해 제출할 것을 명령했다. 조선인 창씨개명의 대상자는 “조선에 본적을 둔 모든 조선인”이었으므로 재일조선인도 포함됐다.
친일파들은 자발적으로 창씨개명에 응했으나 조선민사령 개정이 발효한 후 3개월 동안 창씨개명한 조선인 가구는 7.6%에 불과했다. 이에 총독부는 본격적으로 창씨개명을 압박, 신고마감까지 약 332만가구(79.3%)가 창씨하게 했다. 문정창(文定昌, 1899-1980)은 [군국일본조선강점36년사] 하권에서 일제가 창씨개명에 동원한 강요 방식을 열 가지로 서술했다.
(1) 창씨(創氏)를 하지 않은 사람의 자녀에 대해서는 각급 학교의 입학과 진학을 거부한다. 이미 입학한 학생은 정학 또는 퇴학 조치를 하고, 학교 차원에서 거부할 경우 해당 학교는 폐교한다. (2) 아동들을 이유 없이 질책·구타하여 아동들의 애원으로 부모의 창씨를 강제한다. (3)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은 공·사 기관에 채용하지 않으며 현직자도 점차 해고 조치를 취한다. 다만, 일본식 씨명으로 창씨개명한 후에는 복직할 수 있다.
(4) 행정 기관에서는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의 모든 민원 사무를 취급하지 않는다. (5)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은 비국민·불령선인으로 단정하여 경찰수첩에 기입해 사찰을 철저히 한다. (6)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은 우선적인 노무 징용 대상자로 지명한다. (7)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은 식량 및 물자의 배급 대상에서 제외한다.
(8) 철도 수송 화물의 명패에 조선식 씨명이 쓰여진 것은 취급하지 않으며, 해당 화물은 즉시 반송 조치한다. (9)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은 내지(일본 본토)로 도항할 수 없다. (10) 창씨개명령 제정 이후 출생한 자녀에 대하여 일본식 씨명으로 출생 신고하지 아니할 경우에는 그 신고를 계속 반려하여 자녀와 그 부모가 창씨하도록 강제한다.
일제의 조선인 창씨개명은 명목상 내선일체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서였다. 일제는 4월3일부터 조선에 지원병제도를 시행했다. ‘지원병’이란 말은 이중으로 기만적이다. (1) 조선인에게 일본국적을 주지 않으면서도 병역을 부과하기 위해서였고, (2) 강압과 회유로 지원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거듭된 패전으로 병력 손실이 심각하자, 일제는 병력 보충을 위해 1944년 징병제까지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일제는 지원병 제도를 준비하면서 1938년 5월5일 본국과 식민지에 [국가총동원법]을 발효했는데, 이는 전쟁 물자를 강탈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1939년 11월10일 조선민사령을 개정해 창씨개명을 강요한 것이다.
지원병제도와 국가총동원령, 창씨개명은 황국신민화와 내선일체라는 명목 아래 진행됐지만, 전쟁을 위한 인력과 물자를 강탈하는 것이 실제 목적이었을 뿐,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차별을 철폐하거나 완화할 생각은 없었다. 이는 조선 호적의 변경 과정으로 확인된다.
1910년 일제는 [민적법] 개정을 통해 조선 호적을 일제 민적으로 번역했지만, 창씨는 시도되지 않았고, 조선인의 이름은 성+이름의 형태로 기입됐다. 1940년 일제는 창씨개명을 통해 창씨를 강요하고, 개인의 이름을 씨+이름의 형태로 기입했다. 일제가 패망한 후 1946년 창씨개명령은 원천무효로 선언되었고, 일제 민적은 대한민국 호적으로 되돌려졌다.
일제가 내선일체를 원했다면 1910년부터 창씨개명을 시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도적으로 조선인을 차별했던 일제는 실제로는 내선일체를 원하지 않았거나, 혹은 자유로운 일본인과 노예의 조선인으로서의 내선일체를 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쟁 동원을 위해 마지못해 황국신민화나 내선일체를 주장했지만, 총독부 경무국이나 일제 본국에서는 조선인 구별이 어렵다는 이유로 창씨개명에 반대했다. 이 같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창씨개명을 강압적으로 추진한 것은 그만큼 전쟁 동원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jc, 2024/9/2)
재일조선인들은 이름을 두 개씩 가진다. 본명과 통명이다. 본명은 집에서 쓰는 한국식 이름이고, 통명은 사회생활에서 사용하는 일본식 이름이다. 재일조선인들이 통명을 사용해야 하는 것은 차별 때문이다. 이름만으로도 재일조선인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에서든 외국인이 통명을 사용하는 것은 있음직한 일이다. 미국에서도 재미한국인들은 미국식 통명을 사용한다. 2세나 3세들은 성은 그대로 한국식을 유지하더라도, 이름은 아예 미국식으로 짓기도 한다. 편의성 때문이다.
그러나 재일동포 상황은 다르다. 우선, 통명을 좋아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본명을 사용하면 재일조선인이라는 사실을 공개하는 셈이므로 차별을 자초하게 된다. 차별받지 않으려면 조선인이라는 점을 숨겨야 하고, 그러기 위해 4자로 된 일본식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
<몽당연필>의 김명준 사무총장의 “이름을 빼앗긴 사람들”이라는 기고문을 읽으면, 본명과 통명에 대한 재일동포들의 애환이 많고 깊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창씨개명을 해야 했다. 그렇게 통명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일제는 '내선일체(内鮮一体)'를 주장하면서도 내지인(内地人)과 조선인(朝鮮人) 혹은 한토진(半島人)을 확실히 구분했고, 조선인에게는 내지호적을 부여하지 않았다. 이름에 얽힌 모욕은 해방 후에도 지속되었고, 21세기에 접어든지 벌써 25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하다.
1947년 일본의 신헌법이 공표되기 전날 일본정부는 텐노 칙령으로 '외국인등록령'을 발표, 재일조선인에게 '외국인등록'을 강제했다. 한반도에 아직 정부가 없으니 나라이름은 그냥 '조선'이었다. 조선적(朝鮮籍)이라는 없는 나라의 국적이 이렇게 탄생했다.
조선인들은 외국인 등록증에 본명을 기재했다. 미점령군 치하에서는 조선인들이 일본국적자로 인정되고 있었으므로, 재일조선인은 조선과 일본의 이중 국적자였던 셈이다.
그러나 1952년 미점령군이 물러나자마자 일본정부는 재일조선인의 일본국적을 본인의 의사를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박탈했다. 그래도 계속 일본에서 살아야 했던 난민 신세였던 재일조선인들은 일본 이름을 버릴 수 없었다. 차별을 피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패막이었기 때문이다.
외국인등록증 소지가 의무였던 재일조선인은 불신검문을 당해 등록증이 없으면 추방, 감금, 투옥이 예사였다. 일제강점기부터 통제와 차별에 시달렸으니 일상생활에서도 조선 사람의 마을을 벗어나는 순간 서로를 통명으로 부르고 일본말로 대화하는 것이 안전했던 것이다.
일본인 경영의 공장에 취직하면 '사내 조화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경영진이 먼저 통명을 사용해 달라고 요구한다. 분란도 해고도 싫었던 재일조선인들은 그런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본명과 통명의 분열과 이를 둘러싼 내면의 갈등은 세대에서 세대로 전승되어 오늘에 이른다.
<몽당연필>의 김명준 사무총장은 2004년 홋카이도 조선학교를 촬영할 때 고3학생을 인터뷰했다고 한다. 쿠시로에서 일본학교를 다니다가 삿포로의 조선학교로 전학한 학생이었다. 통명으로 학교를 다녔으니 전학하면서도 삿포로의 일본학교로 간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2019년 한 오사카 공립학교의 민족학급 수업을 참관했는데, 마지막 수업에서 민족학급 강사가 손정의의 예를 들면서 본명쓰기를 권했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여러분의 선택”이라면서도 “본명에 대한 자부심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선생님의 마지막 수업이었던 것이다.
2001년 오사카 조사에서는 학교에서 본명을 쓰는 학생은 15%, 통명을 쓰는 학생이 66%였다. 2007년의 교토시 조사는 직장이나 학교에서 통명을 사용하는 재일조선인이 60%라고 밝혔다. 대부분의 재일조선인들이 아직도 떳떳하게 자신의 본명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본명을 사용할 때 부딪혀야 하는 모멸적 대접과 차별대우 때문이다. 재일조선인들은 해방된 지 70년이 넘도록, 그리고 21세기의 사반세기가 되었어도, 아직도 차별을 피하기 위해 본명과 통명 사이에서 고민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jc, 2024/9/1)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그리고 일본의 쇼와 텐노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은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전사자가 2천5백만명, 민간인 사망자가 5천8백만명에 달했다. 이 전쟁으로 약 8천3백만명이 목숨을 잃은 것인데, 이는 당시 20억명이 조금 넘었던 세계인구의 5%에 육박한 인명손실이었다.
일제의 중국침략으로 중국군이 약 3백75만명이 전사했고, 중국의 민간인 8백2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일제 강점 아래서 사망한 조선인들의 수는 53만3천명으로 집계됐다.
나치의 소련 침략으로 소련군 1천1백40만명이 전사했고, 민간인 1천9백만명이 사망했다. 나치의 인종차별로 인한 사망자도 1천1백만명에 달했는데, 그중 6백만명이 유태인이었다.
1차대전에 비해 2차대전의 사망자 규모가 이렇게 컸던 것은 민간인들의 사망자가 많았기 때문이고, 그 대부분이 인종차별로 인한 것이었다는 것이 국제연합(UN)의 결론이었다. 이에 UN은 1948년 12월10일 <세계인권선언>을 발표하고, 이같은 인류 존망의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계인권선언>은 30개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조는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동등하다. 인간은 천부적으로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으며 서로 형제애의 정신으로 행동하여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평등하고 보편적인 천부인권을 명시한 것이다. 그래서 이 선언의 영어 제목도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이다.
세계인권선언의 제1조는 ‘자유’와 ‘평등’과 ‘형제애’를 명문화하고 있어서 프랑스 대혁명이 내걸었던 세 가지 선언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임을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원칙은 예외없이 지켜져야 한다는 뜻으로 “보편성”의 원칙이 추가된 것이다. 보편적 인권의 반대말이 차별이다.
강릉의 인권영화제의 인권세미나에서 재일조선인/한국인이 받는 차별에 대해 발표하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 덕분이다. 일본의 시민단체 <팀아이>와 협력해 재일조선학교 무용부에 무용신발을 후원해 온 <무용신>은, 다소 우연한 기회에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알게 됐다.
<팀아이>의 요청에 따라 추도비의 희생자 5분의 한국 내 연고를 조사한 결과, 그 중 한 분이신 김병순(金炳順)씨가 강릉출신임이 밝혀졌다. 이후 강릉과 다카라즈카 사이에 다양한 교류와 협력이 시작되었고, 작년의 제24회 강릉인권영화제에서는 재일조선인 영화감독 김임만(金稔万) 선생의 다큐멘터리 <타마세 마을의 1백년 전설>이 상영되기에 이르렀다.
<무용신> 회원들은 잦은 일본 방문을 통해 재일조선학교 학생들이 오랜 세월 일본정부와 시민사회로부터 차별대우를 받아왔음을 목격했다. 재일조선인들이 받아온 억압과 차별은 그 연원이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조선이 해방되고 난 뒤에도 차별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였는데도 차별을 받는다는 것이 놀라웠다.
특히 재일조선학교를 둘러싼 차별은 매우 끈질긴 것이었고, 특히 일본정부가 시행한 고교무상화 정책에서 조선학교만 제외한 것은 시기적으로 가장 가깝고도 가장 가시적인 차별이었다.
해방 직후 일본을 점령한 미군사령부와 일본정부가 조선학교를 폐쇄하려던 시도는 4.24 한신교육투쟁을 야기했고, 교육의 현장인 학교에서 사상자가 나올 정도로 격렬했다.
또 2002년에는 도쿄를 비롯한 대도시에서 조선학교 여학생들의 한복 교복을 면도칼로 찢는 테러행위가 발생,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조선학교는 여학생들의 교복을 세일러복으로 교체해야 했다.조선학교 정문 앞에서 헤이트스피치를 하는 재특회의 모임이 기승을 부렸다. 마침내 2012년 아베 정권은 고교무상화 시행령을 수정해 조선학교를 심사 대상에서 제외했다.
조선학교에 대한 이같은 전방위적인 차별과 테러에 대해 모두 살펴볼 수는 없다. 이번 발표에서는 그 모든 차별을 가로지르는 “이름의 문제”를 제기해 보려고 한다. (jc, 2024/9/1)
인권은 말 그대로 사람으로서 갖는 권리이다. 서양어 휴먼 롸이트(human right)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두 가지 조건이 내포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똑같이 누려야 하는 권리’가 인권이기 때문이다. 보편적이며 평등한 자연권이라는 말이다.
이 같은 인권 개념이 지금은 당연시되지만, 인권이라는 말이 생긴 것은 40억년 인류 역사에서 오래되지 않는다. 프랑스 혁명을 기원으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니까, 대략 2백50년쯤이다.
그 이전에는 평등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귀족과 평민과 노예 등의 신분제도가 오래 유지됐고, 그것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 프랑스혁명이었다. 지금도 유럽의 일부국가에는 귀족제도가 남아 있지만 인간으로서의 자연권은 보편성과 평등성을 인정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보편적이고 평등한 자연권으로서의 인권을 해방 이후에야 누리게 된다. 조선은 양반과 상민과 천민의 구별이 있던 전근대사회였고, 일제강점기에도 조선인은 일본인과 평등한 권리를 누리기는커녕, 차별대우를 받았던 ‘노예상태“였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의 수구세력 중에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인의 국적이 일본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 무식한 주장이다. 일제는 자국의 ‘국적법’을 조선인에게 적용하지 않았다. 그 대신 ‘조선호적령’으로 조선인을 관리했을 뿐이다. 일본의 ‘법’도 아니고 총독의 ‘령’이었다.
조선을 병합한 후 일제는 조선인을 ‘조센징’이라고 불렀고, 일본인 대접을 한 적이 없다. 조선인들이 일본 국적을 가졌다면, 당연히 국적법상의 ‘일본국적 이탈권’도 가지게 되는데, 이것을 막아야 했던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일본 국적법을 적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일제는 ‘국제법’상으로는 조선인도 일본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독립투사들이 중국이나 러시아의 국적을 취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한 안중근 의사의 재판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경쟁을 벌였다. 러시아는 자국 영토에서 발생한 일이라고 주장했지만, 일제는 안중근 의사가 ‘국제법’상 일본인이라며 재판권을 탈취했다.
국제법상 일본인 취급을 받으면서 정작 일본 국내법상 일본인 취급을 받지 못한 상황은 “노예제도”였다. 1945년 8월 포츠담에서 전후 대책을 논의했던 트루먼과 처칠과 스탈린은 “한국인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한국을 적절한 시기에 해방, 독립시킨다는 내용을 포함시켰다.
“한국인의 노예상태”는 그보다 2년 전인 <카이로 선언>에도 명시됐다. 루즈벨트와 처칠, 장제스가 이집트 카이로에서 발표한 이 선언에는 “(영,미,중) 3대국은 조선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자주 독립시킬 결의를 한다. (The aforesaid three great powers, 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re determined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고 선언했다.
이 선언문이 발표되자 당시에는 “적당한 시기에”라는 구절 때문에 말들이 많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미,영,중의 3국 지도자들이 “조선민의 노예상태”를 직시했다는 점이다. 즉, 일제의 지배 아래서 일본인처럼 온갖 의무는 져야 했지만 일본인으로서의 권리는 전혀 누리지 못하는 조선인의 상황을 “노예상태(enslavement)”라고 정확하게 파악했던 것이다.
중일전쟁이 장기화되고 태평양 전쟁이 격화되는 중에도, 일제는 조선인에게 “병역의 의무”를 부과하지 못했다. 일본인 대접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인을 징집하는 대신 “지원병 제도”를 시행했다. 조선인 청년들에게 자원해서 입대하라는 건데, 조선인 청년이 개죽음을 위해 지원할 리가 없다. 말만 ‘지원’일뿐 일제는 지역별 할당까지 만들어 “강제 지원”을 강요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었는데도 한국의 수구세력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의 국적이 일본이었다”는 얼빠진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런 거짓말을 그대로 받아서 퍼뜨리는 언론이 큰 문제다. 한국 수구세력과 언론이 모르고 그런다면 무식한 것이고, 알면서도 그런다면 사악한 것이다. sns가 아니었다면, 대부분의 한국민은 그게 정말인 줄 알았을 것이다.
암튼,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도 조선인=한국인들은 보편적이고 평등한 인권을 누리지 못했다. 일제가 패망하고 해방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인권을 누릴 가능성이 생겼다. 따라서 프랑스의 인권의 역사가 250년이라면 한국의 인권의 역사는 80년에 불과하다.
한편, 1919년 4월11일의 상하이 임시정부의 헌법에 인권이 보장되어 있었다는 점은 중요하다. 반포당시 “임시헌장”이라고 했다가 그해 9월11일 “임시헌법”으로 개명된, 10개조로 구성된 이 헌법의 제3조와 제4조가 대한민국 인민의 인권을 보장했다.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
제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종교,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통신, 주소 이전, 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누린다.
이 조항은 서양 각국의 기준으로도 손색이 없는 인권 조항인데, 몽테스키외의 3권분립론을 수용하면서, 그 바탕인 천부인권 개념을 자연스럽게 전제했기 때문이다. 다만, 일제 강점 상황으로 이 헌법을 국내에 적용하지 못했던 것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이 “임시헌법”은 1948년 7월17일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으로 이어지면서 인권개념도 그대로 전수됐다. 제5조는 “대한민국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자유, 평등과 창의를 존중하고 보장하며 공공복리의 향상을 위하여 이를 보호하고 조정하는 의무를 진다”고 함으로써 대한민국 국민의 인권을 수호할 의무가 정부에게 있음을 명시했다.
제8조에서는 “모든 국민이 평등하며,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규정했고, 제9조는 신체의 자유, 제10조는 거주이전의 자유, 제11조는 통신의 비밀의 자유, 제12조는 신앙과 양심의 자유, 제13조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제14조는 학문과 예술의 자유, 제15조는 재산권, 제16조는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 제17조는 근로의 권리와 의무, 제18조는 노동권, 제19조는 노동할 수 없는 국민의 생활유지의 권리, 제20조는 남녀평등권 등을 보장했다.
또 제7조에서는 “외국인의 법적지위는 국제법과 국제조약”에 의해 보장된다고 함으로써,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에게도 대한민국 국민이 누리는 인권을 대부분 누릴 수 있도록 규정했다.
제헌 헌법의 인권 내용은 향후 7차례의 개정을 거치면서도 유지되거나 강화됐고, 따라서 헌법상으로는 대한민국의 국민과 외국인들에게 인권이 보장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승만의 독재시기, 그리고 박정희-전두환-노태우의 군사독재 시기에는 헌법을 무시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특히 이승만의 부정선거, 박정희의 쿠데타와 유신 행각, 전두환과 노태우의 쿠데타와 광주학살은 피로 점철된 인권 유린의 역사였다.
강릉에도 인권탄압의 사례가 있다. 의문사 피해자 김성수 열사이다. 1986년 강릉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지리학과에 입학한 그는 그해 6월18일 행방불명, 6월21일 부산 송도 앞바다에서 시멘트 덩이를 매단 채 주검으로 발견됐다.
해녀 김씨가 이를 신고하자, 경찰은 자살로 처리했으나, 18년 만인 2004년 제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김성수의 죽음에 공권력이 개입돼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그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
명문화된 헌법의 인권조항이 있어도, 무시되었던 시절이었다. 오늘날 인권운동은 이미 명문화된 인권이 지켜지도록 요구하고 감시하고, 위반사항이 처벌되도록 해야 한다. 시간이 가면서 과거의 인권 유린이 조금씩이나마 밝혀지고, 처벌과 배상이 이루어지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강릉을 비롯한 전국의 인권 운동가들은, 한국에서 인권이 지켜지도록 하는 것은 아직도 지난한 일이라고 여기고 있다.
올해의 제25회 <강릉인권영화제>의 표어는 “당신을 지켜주는 인권”이다. 이 표어는 작년의 제24회때도 사용됐는데, 거기에는 “차별 없는 세상!”이라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다. 차별은 인권유린의 가장 가시적인 형태이다. 인권의 보편성과 평등성을 위배하기 때문이다.
이글에서는 <무용신>의 일본내 활동에서 목격한 재일조선인/한국인들이 겪는 다양한 차별 중에서, 통명이라는 제도 때문에 겪어야 하는 인권유린 상황을 보고하고자 한다. (jc, 2024/9/1)
제25회<강릉인권영화제>가9월6(금)-10일(화)강릉 월화거리에서 열립니다.작년에도 <무용신>과 <대륙학교> 등의 자매단체들이 모금과 방문으로 인권영화제를 후원한 바 있습니다.올해도 후원을 계속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올해는 후원 모금은 하지 않습니다. <무용신>의 직전 행사 예산 잔여분으로 인권영화제 후원금을 이미 전달했습니다.하지만 방문단은 구성하고자 합니다.
우리들의 <강릉인권영화제>방문 참여는 큰 의미가 두 가지나 있습니다.
첫째는,강릉지역의 시민운동가들에게 연대의 뜻을 전할 수 있습니다. 지방의 시민운동은 사정이 열악합니다.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좋지 않습니다.강원도는 영남지역에 못지않게 보수주의가 강하며,강릉은 특히 심각합니다.그런 상황에서도 소수의 시민활동가들이 이 지역의 민주-노동-여성-환경-인권 운동에 전방위로 노력해 왔습니다.
예컨대, <제1강릉포럼>의 김중남, 강승호, 조은혜 선생과 <김성수열사기념사업회>의 홍진선, 유선기, 이요한 선생 등을 예로 들수 있습니다.
공무원 노조운동을 해오신 김중남 선생, 강릉원주대 국제통상학과의 교수이자 <제1강릉포럼>의 공동대표이신 강승호 선생, <제1강릉포럼>의 사무국장 조은혜 선생은 줄곧 민주-노동-환경운동에 매진해 오셨습니다.
<강릉인권영화제>는 강릉지역의 시민운동가들이 결집해서 추진하는 중요한 행사입니다. 우리의 <강릉인권영화제>후원과 연대는 이들에게 큰 힘이 됩니다.작년과는 달리 올해는 후원금을 모금하지 않았기 때문에,직접 참여해 주시는 것이 무척 중요합니다.
둘째는, 인권영화제의 직접 행사는 아니지만, 강릉 출신의 의문사 희생자 김성수열사의 추도비를 참배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합니다.매년 마석공원에서 추도제가 열립니다만,일년에 한번쯤은 많은 분들이 강릉고 교정에 마련된 추도비를 직접 방문해 참배하면,김성수열사의 늙으신 부모님과 기념사업회에 큰 힘과 격려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올해는 영화제에서 김상진 열사 추모 다큐멘터리도 상영되기 때문에 뜻이 더욱 깊다고 하겠습니다.
추도비 참배 직후에는 기념사업회가 인근 초당순두부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대접해 주십니다.이 자리는 강릉의 진보운동과 인권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좋은 자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무용신> 활동 중,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강릉과 연관되었음을 알게되어 강릉과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이 지역의 진보운동이 강원도 전체에 중요하다는 점을 알게 되었고,최근 수년의 선거상황으로 보아 강릉에도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생겼다고 생각합니다.이런 시점에서 우리들의 강릉 지원은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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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단의 일정은9/6-8일의2박3일이지만,각자 사정이 되시는 대로1박2일만 참여해 주셔도 좋겠습니다. 또 시간이 되시면 9/6-10일의 모든 행사에 참석하시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다만 방문단은 9월7일 오후4시부터 시작되는 축하공연(풍물패 동동,임인출)과 개막식,그리고9월8일(일)오전8시의 김성수열사 추도비 참배에는 참석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작년과는 달리 올해는 교통편을 준비해 드리지 못합니다.예산 문제도 있고,개개인의 일정에 맞춤형으로 예약해 드리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그러나3주일 전이므로ktx를 예약하실 수 있고,고속버스를 이용하신다면 출발 당일에도 어려움이 없으실 것입니다.승용차를 이용해 여러분이 함께 방문하시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숙소 예약은 방문단과<김성수열사기념사업회>가 준비해 드릴 수 있습니다.미리 일정을 알려주시면 그에 맞게 영화제 참가와 추도비 참배, 그리고 해변 산책에 편한 위치의 호텔을 예약해 드리겠습니다.
참여하실 분들은 댓글을 주시거나 아래의 전화번호로 연락 주세요. 강릉인권영화제 조직위원회와 김성수열사기념사업회에 전달해서 필요한 편의를 제공 받으실 수 있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25회 <강릉인권영화제>가 9월6(금)-10일(화) 강릉 월화거리에서 열립니다. 작년에도 서울대민주동문회 회원들이 모금과 방문으로 인권영화제를 후원한 바 있습니다. 올해도 후원을 계속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올해는 후원 모금을 하지 않습니다. <무용신>의 직전 행사 예산 잔여분으로 인권영화제 후원금을 이미 전달했습니다. 하지만 방문단은 구성하고자 합니다.
서민동의 <강릉인권영화제> 방문 참여는 큰 의미가 두 가지나 있습니다.
첫째는, 강릉지역에서 시민운동을 해온 동문들에게 연대의 의미가 됩니다. 강승호 선생(중문82)과 홍진선 선생(농학84)이 그 대표적인 인사들입니다.
강승호 선생은 강릉원주대학 국제통상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지만, <제1강릉포럼>의 공동대표를 겸임하면서 강릉지역의 민주화와 환경운동에 열과 성을 다해 왔습니다. 홍진선 선생도 <김성수열사기념사업회>의 상임이사로서 이 지역의 노동-인권운동에 신명을 다해 왔습니다.
지방의 시민운동은 사정이 열악합니다.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좋지 않습니다. 강원도는 영남지역에 못지않게 보수주의가 강하며, 강릉은 특히 심각합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소수의 시민활동가들이 이 지역의 민주-노동-여성-환경-인권 운동에 전방위로 노력해 왔습니다.
<강릉인권영화제>는 강릉지역의 시민운동가들이 결집해서 진행하는 중요한 행사입니다. 서민동의 <강릉인권영화제> 후원과 연대는 이들에게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작년과는 달리 올해는 후원금을 모금하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 참여해 주시는 것이 무척 중요합니다.
둘째는, 강릉 출신의 의문사 희생자 고김성수열사(지리86)의 추도비 참배입니다. 매년 마석공원에서 추도제가 열립니다만, 일년에 한번쯤은 동문들이 강릉고 교정에 마련된 추도비를 직접 방문해 참배하면, 김성수열사의 부모님과 기념사업회에 큰 힘과 격려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올해는 김상진 열사 추모 다큐멘터리도 상영되기 때문에 뜻이 더욱 깊다고 하겠습니다.
추도비 참배 직후에는 기념사업회가 인근 초당순두부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대접해 주십니다. 이 자리는 강릉의 진보운동과 인권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좋은 자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무용신> 캠페인을 하던 중,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과 강릉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되어 강릉과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지역의 진보운동이 강원도 전체에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고, 최근 수년의 선거상황으로 보아 강릉에도 변화가 일어날 조건이 갖춰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시점에서 서민동의 강릉 지원은 큰 힘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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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단의 일정은 9/6-8일의 2박3일이지만, 각자 사정이 되시는 대로 1박2일만 참여해 주셔도 좋겠습니다. 다만 9월7일 오후4시부터 시작되는 축하공연(풍물패 동동, 임인출)과 개막식, 그리고 9월8일(일) 오전8시의 김성수열사 추도비 참배에는 꼭 참석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작년과는 달리 올해는 교통편을 준비해 드리지 못합니다. 예산 문제도 있고, 개개인의 일정에 맞춤형으로 예약해 드리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3주일 전이므로 ktx를 예약하실 수 있고, 고속버스를 이용하신다면 출발 당일에도 어려움이 없으실 것입니다. 승용차를 이용해 여러분이 함께 방문하시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숙소 예약은 방문단과 <김성수열사기념사업회>가 준비해 드릴 수 있습니다. 미리 일정을 알려주시면 그에 맞게 영화제 참가와 추도비 참배, 그리고 남대천이나 해변 산책에 편한 위치의 호텔을 예약해 드리겠습니다.
작년에는 이은정 사무총장님의 선도적인 안내로 서민동 회원분들의 참여가 돋보였습니다. 올해도 같은 수고를 해 주시면 얼마나 감사할지 모르겠네요. 고맙습니다.
3박4일로 예정되었던 <무용신>의 일본 효고현 니시노미야 방문이 끝났습니다. 방문단에 참여하신 15분 중에서, 7분이 14일 밤 귀국하셨고, 6분이 15일, 2분이 17일에 귀국함으로써 전원이 무사히 돌아오셨습니다. 아무 사고 없이 방문이 마무리된 것이 참 고마운 일입니다.
이번 방문은 작년(2023년) 2월에 이은 <무용신>의 2차 방문입니다. 이번 방문의 첫 번째 목표는 니시노미야의 <코끼리회>와 교토의 <라랑무용교실>의 동포 학생들에게 무용신과 풍물의상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무용신> 8차 캠페인이 진행됐고, 일반모금(450만원)과 크라우드 펀딩(150만원)이 모두 성공하여, 학생들에게 약속한 선물을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현지에서는 공연 제목을 <한일풍물교류회 in 니시노미야(日韓風物交流會in西宮)>라고 붙이셨더군요. 아마도 향후, 오사카, 고베, 아마가사키, 다카라즈카, 이타미 등에서는 물론, 도쿄와 큐슈에서도 이런 풍물교류회가 열릴 수 있기를 기원하신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니시노미야 공연 직후 아마가사키와 이타미에서 <동동> 가족풍물 공연을 열어 줄 수 있느냐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일정과 예산이 허락되면, 얼마든지 응할 것입니다. 풍물을 통해 한국동포가 재일동포와 일본인 활동가와 교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니시노미야 공민관 공연은 두 가지 면에서 의미가 깊었습니다. 첫째는 <동동>과 양향진 선생의 공연이 탁월했던 것입니다. 재일동포들도 더러더러 풍물을 연습하고 공연도 하지만, 이번 <동동> 공연은 관객들에게 높은 차원의 풍물 경험을 선사한 것 같았습니다. 감동과 감탄을 표현해 주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둘째는, 이번 공연이 니시노미야시와 시교육위원회의 공식 후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공연은 원래 지자체의 후원 없이 시민단체의 공연으로 조직되기 시작했지만, 기획이 진전되면서 현지 활동가들께서 시정부와 시교육위원회에 후원을 요청하셨다고 합니다.
절차가 번거로웠을 텐데 이분들이 수고해 주신 덕분에 시와 교육위원회가 후원을 결정했고, 덕분에 이 행사는 공식적인 공연이 되었습니다. 향후에도 풍물 공연이 일본 지자체의 공식 후원을 받을 수 있는 선례를 남기셨기 때문에, 이 조치는 중요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방문에는 니시노미야 공민관의 풍물공연 말고도 두 개의 중요한 일정이 포함되었습니다. (1) 7월13일 방문단은 키리하타의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와 타마세의 조선인 참배묘를 방문했고, 만푸쿠지를 방문해 다회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2) 7월14일 공민관 공연이 끝난 후에는 니시노미야 코요엔의 지하호를 탐방했습니다.
2020년 3월에 건립된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는 110년전 이 지역에서 수도공사와 철도공사 중에 사망하신 5분의 조선인 노동자들을 기리는 추도비입니다.
희생자들을 위해 제사를 드려오신 타마세 마을 주민과 만푸쿠지의 스님들에게 감사드리는 뜻에서 <무용신>은 작년부터 이곳을 방문해 음악회를 열고 있습니다.
올해는 참배묘 앞에서 <동동>과 양향진 선생이 위령의 비나리와 위령의 버꾸놀이를 시연하셨는데, 매우 인상적인 풍물공연이었습니다. 현지 주민들과 만푸쿠지의 스님께서도 깊은 인상과 감동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내년에는 어떤 연주단을 모시고 갈 것인지 지금부터 아이디어를 가다듬고 있습니다.^^
7월14일의 코요엔 지하호 탐방도 의미있는 일정이었습니다. 일본인 활동가 하라다 코이치 선생과 재일동포 구실 선생의 안내로, 1945년에 착공되었다가 중단된 7개의 땅굴을 차례로 탐방했습니다. 이 땅굴 노역에 조선인 노동자들이 동원되었는데, 특히 4호 땅굴에서는 해방을 맞아 “조선국독립”이라는 벽서가 새겨진 것이 발견된 곳이기도 합니다.
주말을 이용한 3박4일의 짧은 기간에 이같은 주요한 행사와 일정을 소화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방문단과 공연단은 재미도 있지만 의미가 깊은 이번 방문에 열성적으로 참여했고, 덕분에 현지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자평하고 있습니다. (jc, 2024/7/18)
한신교육투쟁은 재일조선인이 1948년 4월14일부터 26일까지 효고현과 오사카부에서 전개한 조선인학교 폐지에 반대시위입니다. 연합군최고사령부가 전후에 유일하게 비상사태를 선언해야 했을 만큼 치열했던 민족교육 수호투쟁이었습니다.
메이지가쿠인(明治學院) 대학의 정영환(鄭栄桓) 교수의 자료에 따르면 민족교육 수호투쟁이 처음 일어난 곳은 야마구치(山口)였고, 이후 오카야마(岡山), 효고(兵庫)와 오사카(大阪), 그리고 도쿄(東京)로 이어졌기 때문에, 이를 4.24교육투쟁으로 고쳐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야마구치현의 교육투쟁이 시작된 것은 3월31일이었고,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 수호투쟁이 한신지역에서 사망자까지 발생할 만큼 치열하게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한신교육투쟁이라는 원래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점령의 연합군사령부(GHQ)는 1947년 10월 일본정부에 “재일조선인을 일본의 교육기본법, 학교교육법에 따르게 하라”는 지시를 하달했습니다. 이에 문부성은 1948년 1월24일 전국 도도부현의 지사에게 “조선인 자녀들을 일본 학교로 전학시키라”는 공문을 발송했고, 3월24일에는 “거부하는 조선인 학교를 폐쇄하라”는 공문을 재차 발송했습니다.
고베(神戶)에서는 4월7일 조선인학교 폐쇄 명령이 발령되었는데, 재일조선인과 일본인 활동가들은 여기에 저항했습니다. 니시고베(西神戶) 조선인소학교에서는 학부모들이 몸으로 교문을 막고 항거했고, 4월24일에는 효고 현청 앞에 결집하여 학교폐쇄 명령 철회’를 요구했습니다. 약 1시간 반에 걸친 교섭을 통해 효고현과 고베시 당국은 학교폐쇄 명령을 철회한다는 문서에 서명했습니다. 그러나 이 각서는 미군정에 의해 무시되었습니다.
오사카에서는 4월23일 부청 앞의 오테마에(大手前) 공원에 3만여명이 집결해 조선인학교 폐쇄에 반대하는 인민대회를 개최하던 중, 무장경관의 진압과정에서 23명이 중상을 입었고 200여명이 검거되었습니다. 4월26일에도 인민대회가 열렸고, 경찰은 8천명의 진압대를 동원했습니다. 이날 경찰의 발포로 김태일(金太一) 학생이 사망했습니다.
한신지역의 조선인 학교 폐쇄 반대시위에 연인원 1백만명이 참가했고, 경찰의 진압으로 인한 부상자가 150여명, 사망자가 1명이었습니다. 3천여명이 검거되었고, 이중 212명이 기소되었습니다. 각급재판소에 회부되어 실형을 선고받은 수형자가 36명에 이르렀습니다.
재일조선인은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5월3일 조선인교육대책위원회와 문부대신 간에 “교육기본법과 학교교육법을 따른다”는 전제 아래, “사립학교의 자주성 범위 내에서 조선인의 독자적인 교육을 행하는 것을 전제로 사립학교로서의 인가를 신청한다”는 각서를 교환, 조선인학교가 존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신교육투쟁이 승리한 것이지요.
한신교육투쟁의 사망자는 한사람이 더 있었습니다. 조선인연맹(=조련) 효고현 위원장 박주범(朴柱範)씨입니다. 그는 투옥되었다가 1949년 11월25일 병상악화로 가석방되었으나 4시간 만에 사망했습니다. 옥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지요.
효고조선관계연구회(兵庫朝鮮関係研究会)의 히다 유이치(飛田雄一) 선생은 한신교육투쟁 50주년을 앞둔 1997년 10월 대구를 방문, 박주범씨의 동생의 따님인 박재희(朴再禧)씨를 찾아갔습니다. 50주년 행사에 희생자 가족을 초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885년생인 박주범씨는 1927년 일본에 건너가 고베시 히가시나다에 거주했습니다. 그는 한신소비조합 설립에 참여해 이사로 활동했고, 해방 후에는 조련의 한신 지부장이 되었다가, 1948년에는 효고현 위원장으로서 한신교육투쟁을 이끌었던 것입니다.
큰아버님의 유해를 고향 대구로 모신 박재희씨는 “50년이 지났지만 박주범씨의 유족을 찾아온 것은 히다 유이치 선생이 처음”이라고 하셨다는군요. 한신교육투쟁의 성과는 대대적으로 홍보되지만, 그 희생자들을 찾아보고 기리는 일에는 소홀했던 것이지요.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jc, 2024/7/10)
한국에도 잘 알려진 니시노미야의 가장 유명한 역사적 사실은 코요엔(甲陽園) 지역에서 발굴된 지하호일 것입니다. 이 지역에서 발굴된 7개의 땅굴 중에서 제4호 땅굴의 벽에서 “조선국 독립”이라는 벽서가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 일제 군부는 본토 결전을 위해 전국에 땅굴을 팠는데, 니시노미야의 지하호는 일제 해군의 전투기 시덴카이(紫電改)를 조립하던 카와니시(川西)항공사의 부품생산 공장이 들어설 예정이었습니다.
이 땅굴을 판 것은 대부분 조선인이었습니다. 강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 5-6백명이 최악의 노동조건 속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사가 강행됐지만, 카와니시사가 이 비밀공장에서 비행기 부품 생산을 시작하기도 전에 일본은 패망했습니다.
이 땅굴의 존재는 종전 후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제4호 땅굴에서 “조선국 독립(朝鮮國獨立)”과 “푸른 봄(綠の春)”이라는 벽서가 발견된 것은 1987년 11월이었습니다.
이를 발견한 탐사대는 4명으로 구성되었는데, 탐사대장은 재일조선인 향토사학자 정홍영(鄭鴻永) 선생이었고, 그의 동생 정지영(鄭志永), 그의 아들 정세화의 친구인 신도 도시유키(真銅敏之), 그밖에도 탐사 장비를 운반하기 위해 자원한 재일조선인 청년 한명이 동행했다고 합니다. 신도 도시유키 선생은 필자에게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증언하신 바 있습니다.
“그날, 우리 네 사람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서 지하호 현장으로 갔습니다. 정홍영 선생님은 종전 후에 공개된 ‘미군 전략폭격 조사보고서’를 조사하던 중, 니시노미야가 폭격의 대상이 된 것은 거기에 있던 카와니시 항공기회사의 지하 공장이 있었기 때문임을 아셨습니다. 그 지하공장의 위치를 파악하신 후에 가까운 분들과 탐색대를 꾸리신 것이지요.
“처음에는 정홍영 선생의 아들이자 내 친구인 정세화씨도 같이 가기로 했으나 뭔가 사정이 있어서 참석하지 못했고, 조선인 청년 한명이 짐을 운반해 줄 아르바이트로 따라 나섰습니다. 그날 카메라와 전등, 간이 발전기 등을 비롯해서 운반할 짐이 꽤 많았거든요.
“지하호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갈래 길이 나왔어요. 한쪽은 천장과 벽이 시멘트로 발라진 다듬어진 길이었고, 다른 한쪽은 울퉁불퉁한 암벽이 드러난 거친 길이었지요. 우리는 두 패로 나뉘어 탐색에 나섰는데, 나는 정홍영 선생과 함께 거친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칠흑 같이 깜깜한 굴속에서 손전등으로 벽을 훑어보았을 때 나는 무언가 글씨 같은 것을 본 것 같았어요. 즉시 정홍영 선생님께 알리자 자세히 살펴보시고 조선인 노동자들의 글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급히 다른 두 사람을 불러서 이 ‘대단한 발견’을 알렸고, 다들 흥분해서 어쩔 줄을 몰랐어요. 흥분이 조금 가라앉자 우리는 내가 가져간 카메라의 플래시와 타이머를 이용해서 그 글씨를 배경으로 4명의 사진을 찍어서 기록을 남겼습니다.”
2000년 1월 정홍영 선생이 타계하셨을 때, 히다 유이치(飛田雄一) 선생은 <무쿠게통신(178호, 2000년 1월30일자)>에 수록한 조사에서 정홍영 선생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습니다.
“(정홍영 선생은) 효고 조선관계 연구회의 중심 멤버 중 한 명이지만, 무엇보다도 <조선국 독립>이라는 문자가 남아있는 니시노미야시 코요엔의 지하벙커의 발견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 정선생은 니시노미야, 다카라즈카, 이타미 등의 재일 조선인 역사를 정력적으로 연구하고 있었는데, 그 터널을 발견한 것도 이전부터 “미군 전략폭격 조사보고서”를 조사하다가 그 지역의 새로운 택지개발 소식을 듣고 달려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요엔에 택지가 개발되면 땅굴이 모두 사라지게 될 것을 우려해 정홍영 선생이 급히 조사를 단행하셨던 것인데, 뜻밖에도 이때 지하호의 벽서가 발견되었던 것이지요.
이 니시노미야 코요엔의 지하호 벽서는 일본 정부가 부인하는 조선인 노동자 강제 동원이 존재했음을 입증하는 강력한 근거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jc, 2024/7/10)
<무용신>이 방문하는 니시노미야에 대해 소개하면서, 한신칸 모더니즘과 댄스홀 문화에 대해서 살펴보았고, 이같은 사회문화적 분위기에서 일본의 신무용과 최승희의 조선무용이 출발되었다는 점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그런데, 니시노미야의 역사를 보면 재일조선인과 관련된 3가지 사건이 더 있습니다. 한신소비조합(1931)과 니시노미야 지하호의 벽서(1945년경), 그리고 한신교육투쟁(1948)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방문하는 지역의 조선인관련 역사를 이해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서, 이 세 사건을 간략하게 소개해 두고자 합니다.
호리우치 미노루 선생의 논문 <한신소비조합에 대하여(阪神消費組合について, 1980)>에 따르면, 1931년 3월20일 발족한 한신소비조합은 일제강점기 재일조선인들이 결성한 공동구매조합입니다. 결성된 곳은 아마가사키(尼崎)의 츠키지(築地)이고 본부도 그곳에 두었지만, 니시노미야(西宮), 나루오(鳴尾), 아시야(芦屋), 아오키(靑木) 등지에 지부를 두었고, 니시노미야 지부의 활동이 활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비조합, 혹은 구매조합이란, 오늘날 한국의 생활협동조합과 비슷합니다. 생필품 생산자와 구매자들을 직접 연결하여 중간유통 과정을 생략함으로써, 생산자에게는 판로를 안정시키고, 소비자들에게는 싼값에 구매할 수 있게 하는 조합이었던 것이지요.
니시노미야와 아마가사키, 다카라즈카 등의 한신칸 지역에는 수천명의 재일조선인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이들의 의식주는 일본인 주류사회의 그것과 다른 것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쌀, 된장, 간장, 명태, 고추 등의 식료품과 고무신과 조선의복 등의 의류 등의 생활필수품을 시가보다 20-30%정도 싸게 공급하여 재일조선인들의 생활이익 확보에 주력했던 것인데, 당시 이 지역의 재일조선인들은 영세상이거나 막노동 등의 저소득층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이같은 소비조합은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창립 당시 약 280여명의 조선인 상인들이 참석했고, 아시야의 면공장 경영자 안태운(安泰云)을 초대 이사장으로 선임하여 조직하였는데, 전성기였던 1930년대 초반에는 한신칸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인 450세대가 조합원으로 가입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신소비조합의 규약은 11장 34개조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제2조에는 “생활필수품의 구입, 생산가종, 기타 소비경제의 이익옹호를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되었고, 제3조와 4조에는 “조합원의 자격은 한신칸에 거주하는 노동자, 농민 무산시민”으로 설정했고, 제18조는 “출자금을 1구좌에 5엔”으로 설정했고, 제24조는 “이익금의 일부는 구좌 금액에 따라 배당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한신소비조합은 조합원들의 생활 이익을 확보하는 데에 주력하면서도, <한쇼뉴스(阪消ニュース)>라는 소식지를 발행하여 조합원들 사이의 언론 역할도 담당했고, 야간부를 마련하여 “식자학급(識字学級)”을 운영하여 조선어와 일본어의 문자 보급활동도 벌였습니다.
또 이 조합은 동포들의 재난구원 활동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1934년과 1936년 한국의 남부지방에 큰 수해가 발생했을 때 구호금을 보냈고, 1934년 태풍 무로토(室戸)가 한신지역을 강타했을 때에도 다치바나(立花) 촌에 응급주택 25호를 건설해 집을 잃은 조선인 난민들을 수용하기도 했습니다.
호리우치 미노루 선생에 따르면 이 조합의 1935년 3월17일에 열린 제5회 대회에 참석한 150명의 대의원들은 “소비조합의 확대와 활동의 강화”를 결의한 데 이어 “조합원의 의료, 사망, 결혼, 출산, 주택에 대한 원조”도 결의되었습니다.
한신소비조합은 이 시기에 성행했던 많은 소비조합 중에서 활동이 가장 왕성했고, 1941년 12월말에 일제 당국에 의해 해산될 때까지 수명도 가장 길었는데, 이는 한신칸에 거주하는 재일조선인 민중의 일상생활의 요구에 밀착된 수요를 충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jc, 2024/7/10)
니시노미야 방문단은 15권의 <수묵화로 보는 김대중>을 가져갑니다. 한국 유수의 수묵화가 유준 화백이 출판한 김대중 선생의 전기입니다. 이 책을 기증하는 데에는 박인호, 이원영 선생의 후원이 있었습니다.
처음에 12권을 준비한 것은 재일동포와 일본인 활동가 열두 분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조사연구를 꾸준히 후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름은 <조정희후원회>라고 붙였지만, 제 개인 후원을 위한 것은 아니고,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희생자 5분의 한국내 연고지를 조사하는 리서치를 특정해서 지원하신 것입니다.
이분들의 후원 덕분에 희생자 5분 중에서 김병순씨가 강원도 강릉 출신임을 밝힐 수 있었고, 윤길문, 오이근씨가 경상남도 고성군 출신, 남익삼씨가 경상남도 통영 출신임을 밝혀낼 수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장장수씨의 한국내 연고지는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리서치를 위한 기록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리서치의 결과를 바탕으로 강릉시는 2022년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건립에 기여하신 8분에게 감사패를 증정했습니다. 올해 하반기에는 고성군과 통영시에도 감사패 증정을 청원할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통영시와 고성군이 청원을 받아들여 준다면 내년 3월경 감사패 증정식을 조직하려고 기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강릉-통영-고성의 지원을 요청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주제로한 전재운 선생의 사진전을 진행하면서 이 프로젝트를 공식적으로 마무리하게 됩니다.
3년에 걸친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리서치가 가능했던 것은 후원회원들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분들은 조사경비를 지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조사에 필요한 기록과 자료를 찾아내는 데에도 도움을 주셨고, 강릉시의 감사패 증정식을 직접 조직해 주셨습니다.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이같은 사정을 전해들은 유준 화백은 후원회원들에게 자신의 최신 저서를 기증할 의사를 밝히셨는데, 이를 무상으로 받을 수 없었으므로 이원영, 박인호 선생께 도움을 요청했고, 두 분이 각각 5권의 <수묵화로 보는 김대중>의 값을 후원하셨습니다. 모자라는 2권은 유준 작가가 기증하셨고, 나중에 요청된 3권의 저서는 제가 마련했습니다. 15권의 책에는 저자가 직접 쓰고 서명하신 감사의 인사말이 들어 있습니다.
얼른 보기에는 <수묵화로 보는 김대중>은 내용상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와 직접 관련이 없어 보일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의 민주화와 경제위기 극복, 그리고 남북화해를 위해 많은 업적을 내신 분이지만, 그의 기본 철학은 인간의 기본 권리로서의 인권을 강조하셨던 분입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도 희생자들을 발굴하고, 기록하고, 1백년이 넘도록 위령제사를 지내오신 분들의 인권의식의 발로였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김대중 대통령은 박정희 독재치하에서 현해탄에 수장될 위기에 처했을 때, 그를 구출한 것은 일본인 활동가들의 적극적이고 발빠른 구명운동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일본인 활동가들과 재일동포들에게 <수묵화로 보는 김대중>을 선물하는 것은 뜻깊은 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후원회원분들의 오랜 후원에 비하면 <수묵화로 보는 김대중>은 시기로 보나 값으로 보나 그리 큰 선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작은 선물로나마 그동안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프로젝트를 후원해 주신 분들에게 작은 감사의 표시는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앞으로 반년 동안 계속될 이 프로젝트에 대하여 끝까지 관심을 가져주시고, 프로젝트가 성공하도록 후원을 계속해 주십사는 당부의 뜻도 담겨 있습니다. 저도 역시 이분들의 뜻을 잊지 않고, 고성과 통영에서도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뜻 깊은 선물에 일일이 저자 사인을 해 주신 유준 화백께 감사드립니다. (jc, 2024/7/10)
이번 방문단의 주요 행사는 (1) 키리하타의 추도비와 타마세의 참배묘 방문과 타마세 주민과 만푸쿠지 스님들과 만남, (2) 이타미 바비큐 교류회, 그리고 (3) 니시노미야의 공민관 공연입니다만, 그밖에도 틈틈이 해야 할 중요한 숙제가 세 가지나 더 있습니다.
첫째는, 내년 3월20일 오사카에서 개최될 <도모다치 페스타>에 즈음하여 <무용신>의 제3차 일본 방문단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인지를 조사하는 일입니다. 제가 지난 2월 일본을 방문했을 때 구실 선생께서 <코끼리회>의 지원을, 카노 겐지(加納健次) 선생께서 <도모다치 페스타> 참여를 요청해 오셨습니다.
구실 선생의 요청은 이번 니시노미야 방문단으로 성취되었고, 이제 카노 겐지 선생의 말씀대로 내년 3월에 방문단을 구성할 수 있을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카노 선생님을 만나서 <도모다치 페스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무용신>이 협력할 수 있는 행사인지, 어떻게 협력할 수 있을 것인지를 파악하겠습니다. 물론 <팀아이>의 도움이 필요한 일입니다.
둘째는, <제25회 강릉인권영화제>에 초청할 영화의 섭외입니다. <무용신>은 작년(2023년)부터 <강릉인권영화제>를 후원하기 시작했는데, 수도권이 아니면 생존하기 힘든 지방의 영화제를 후원함으로써 수년 내에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무용신>이 <강릉인권영화제>를 후원하게 된 것도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와의 관련성 때문입니다. 작년에는 정세화 선생께서 다큐멘터리 <타마세 마을의 1백년 전설>을 출품하셨기 때문에 <팀아이>와 <무용신>, 그리고 <강릉인권영화제>의 인연은 더욱 끈끈해 지고 있습니다.
강릉인권영화제 공동조직위원장이신 강승호 선생께서 이번 방문단에 참여하신 것도, 재일동포나 일본인 활동가들이 제작하신 인권관련 영화를 찾아보고, <강릉인권영화제>에 초청할 수 있는지 섭외하시기 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셋째는, 전재운 선생의 사진전 가능성을 타진하는 일입니다. 전재운 선생은 오랫동안 우리학교 사진을 찍어 오신 작가입니다만, 무용신 캠페인과 방문단 때마다 적극 참여하여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관련 사진도 많이 찍으셨습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는 원래 <무용신>의 주요 목표활동이 아니었지만, 어느새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주제가 되었습니다. 추도비에 관련된 전재운 선생의 좋은 사진이 이미 많지만, 앞으로 1-2회 다카라즈카를 더 방문해 추가 촬영을 하시면, 서로 다른 계절과 여러 관련자들을 포함하는 사진들이 많아져서, 전시회를 열기에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시회를 진행하려면 적지 않은 예산과 많은 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황광석 선생의 지적대로,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추도비와 관련된 강릉, 고성, 통영의 활동가들과 지자체의 지원도 필요하고, 또 이 세 곳에서 순회공연을 먼저 단행할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일본 전시회에서도 재일동포와 일본인 활동가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합니다. <팀아이>의 협력도 기대하고 있고, <고베학생청년센터>와 같은 탄탄한 시민단체와 <청구문고>와 같은 학술단체의 도움도 필요합니다. (예컨대, 전시회가 고베중앙도서관에서 열릴 가능성도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청구문고>와 <고베학생청년센터>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사진전의 가능성을 위해, 전재운 선생 자신도 필요한 예산을 추산하고, 전시할 사진들의 포트폴리오도 작성하고 계십니다. 이 자료를 가지고 방문기간 중에 여러 활동가들을 만나게 될 텐데, 고베나 오사카나 다카라즈카에서, 혹은 세 곳 모두에서 순회 사진전을 열 수 있을 것인지 알아보게 됩니다.
이렇게 이번 방문단은 가족풍물 <동동>의 공연과 교류회 못지않게 향후의 중요한 행사들을 준비하거나 섭외해야 하는 중요한 숙제도 안고 있습니다. 각 담당자가 이 숙제들을 잘 할 수 있도록 일본의 활동가 분들에게도 미리 널리 알려 주시고, 필요한 만남이 이뤄지도록 주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jc, 2024/7/8)
14일의 공민관 공연과 교류회에서 <무용신> 방문단의 인사말 순서가 마련되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방문 준비단의 한사람으로서 이번에는 제가 인사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인사말씀의 초고는 아래와 같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무용신>의 조정희입니다.
<무용신>은 2020년 3월에 <팀아이>와 함께 첫 번째 무용신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이번에 8번째 무용신 캠페인으로 <코끼리회>와 <라랑무용교실>을 만나기 위해 니시노미야에 오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팀아이>는 학생과 청년들이 공평한 배움의 기회와 공정한 취업의 기회를 가지도록 지원하는 다카라즈카의 시민 단체입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께서 초대회장이셨고, 지금은 콘도 다쿠미 선생이 회장직을 수행하시면서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팀아이>와 협력하면서 <무용신>도 지난 5년간 재일코리안 학생들과 청년들의 예술 활동을 지원해 왔습니다. 이번 니시노미야 방문을 위해서 한국에서는 168명의 개인회원과 18개의 후원단체가 1만원이상의 후원금을 내 주셨고, 이분들의 후원 덕분에 <라랑무용교실>에 무용신, <코끼리회>에 풍물의상을 선물할 수 있었고, 여기서 <동동> 공연도 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용신>은 일본 활동을 통해 <팀아이>뿐 아니라 효고와 오사카의 많은 시민단체들과 교류하고 협력하게 된 것을 매우 고맙게 생각합니다. <팀아이>의 정세화 선생님, 신도 도시유키 선생님, 다이꼬꾸 스미애 선생님, 량화진 선생님과 황정혜 선생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밖에도 <고베학생청년센터>의 히다 유이치 선생님과 호리우치 미노루 선생님, <청구문고>의 서근식, 미즈노 나오키, 야마네 토시로 선생님 등께서 많은 도움을 주셨고, 이번에 <코끼리회>의 구실 선생님과 김원혜 선생님, <도모다치 페스타>의 카노 겐지 선생님과도 협력하면서 함께 일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특히 <니시노미야 재일외국인 아동생도 보호자회>가 이번 <동동>공연과 교류회를 공동 주최해 주신 것과, <니시노미야 재일외국인 교육연구협의회>가 여기에 협력해 주신 것에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니시노미야시와 니시노미야시 교육위원회가 교류회와 <동동> 공연을 공식 후원해 주신 것에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같은 우호적인 교류와 협력이 계속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오늘 공연해 주실 가족풍물패 <동동>은 한국의 정상급 연주단체입니다. 임인출 선생님과 그의 부인 조원자 선생님은 풍물과 창 연주자로 널리 알려진 분이고, 두 아드님인 임동명군과 임동권군은 국립국악중,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한국 풍물계의 다음 세대를 이어갈 재목입니다. 함께 연주하실 양향진 선생도 버꾸놀이로 정평이 나신 분입니다.
이같이 훌륭한 연주단을 니시노미야에서 여러분께 소개드릴 수 있게 되어서 무척 기쁩니다. 부디 이분들의 연주와 놀이를 잘 즐겨주시고, 앞으로도 음악을 통한 한국과 일본 사이의 교류와 협력이 이어지고 깊어지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오늘의 이 공연과 교류회를 열 수 있도록 실무적으로 수고해 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한국에서는 강승호, 전재운, 이고은 선생님이 준비해 주셨고, 일본에서도 정세화, 김원혜, 구실, 황정혜 선생님께서 수고를 많이 해 주셨습니다.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공연에 앞선 교류회에서는 이런 인사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혹시 사실관계가 다르거나 누락된 이름이 없는지 살펴보아 주시고, 내용이나 표현이나 수정되어야 할 것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jc, 2024/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