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에 해당되는 글 753건

日本旅行者にとって両替必須でしたキャッシュレス決済れている韓国人にはこの強調されます現金のためにひどいうことがいのも事実です

 

 

日本産業省調査したところによりますと韓国のキャッシュレス決済割合はほぼ90%ですが日本20%たないんです日本2015まで80%以上現金決済でした。 「両替必須という言葉理由です

 

 

れる部分交通費ですめて日本調査めた2018まではJRパスでなければ電車現金切符わなければならずバスも小銭料金わ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食堂やコンビニでも現金決済優先でした

 

しかしこうした傾向わりつつありますコロナ以降日本でもクレジットカードと簡単決済しくえましたホテルやレストランマートやコンビニでほとんどクレジットカードをります電車やバス電車などにも交通カードが一般的になりました

 

 

日本政府2025大阪-関西万博開催までキャッシュレス決済率40%げる方針ですところがこのように努力する目標40%ですすでに90%している韓国べると半分にもばないんです

 

いなことにたちがれる大阪神戸大都市西宮宝塚尼崎伊丹などの阪神間地域もメトロポリタンにまれるので平均的日本地域べてクレジットカードと簡単決済がかなりんでいます

 

 

したがって両替必要性大幅りましたコロナ日本旅行経費のほとんどを両替して現金所持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のですがはホテルや食堂スーパーやコンビニは現金がほとんど必要ありません手数料問題はありますがクレジットカードでコンビニから現金すこともできます

 

 

ですがまだまだ日本旅行では現金使用習慣しは回帰する準備をしたほうがいいですたとえば公共交通機関交通カードを使用しますが交通カードは現金わなければなりません(もちろん韓国Apple Payをご利用場合これを日本交通カードとして使うことができます)

 

 

一部のグルメ老舗依然としてただ現金固執します(もちろんそこにはかなければいいんですがまた美味しいだから······^^えば訪問団12夕食をとる住所ねぎやき山本クレジットカードをるかどうかはまだ確認されていません現金支払必要がある可能性がありますしかし14夕食予約されている鳥焼つくねやはクレジットカードをっています

 

 

このように食堂もクレジットカードや簡単決済っているのかあらかじめ調べておく必要がありますそれで日本でクレジットカードと簡単決済使そしてそれぞれの長所短所えてくれるユーチューブがたくさんありますえばこんなところです

https://www.youtube.com/watch?v=n8HFZYIdJUM (日本でクレジットカードを使用)

https://www.youtube.com/watch?v=dQFnqVGuT1Q (アップルネイバーカカオペイ)

 

要約するとビザとマスターとJCBという日本のカードを使えば不便がなく韓国人使うアップルネイバーカカオペイも使えます

 

 

はビザカードとカカオペイで日本調査めてきましたがビザよりはマスターカードカカオよりはネイバーカードの便利節約になるというをよくきました手数料はありますが旅行経費があまりないのできなはなかったといますしかも早朝出発するので両替するのをれてしまいましたが調査中支障がなかったこともありました

 

 

さんも各自計画ってしずつもっと調べて各自両替する現金きさをあらかじめ見積もっておいたいといますApple Pay利用者でない場合交通カード(ICOCA)費用5千円両替めてください(jc, 2024/7/7)

,

일본에 가는 여행객들에게 환전은 필수였습니다. 비현금 결제에 익숙한 한국인 여행객들에게는 이 점이 무척 강조됩니다. 현금 때문에 낭패를 겪는 일이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죠.

 

 

일본 산업성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국의 비현금 결제 비율은 거의 90%이지만 일본은 20%가 안 됩니다. 그만큼 한국은 2천년대 초반부터 신용카드와 간편결제가 보편화되었지만, 일본은 2015년까지도 80% 이상이 현금 결제였습니다. “환전은 필수라는 말이 나온 까닭입니다.

 

 

가장 피부에 와 닿는 부분이 교통비입니다. 제가 처음 일본 조사를 다니기 시작했던 2018년만 해도 JR패스가 아니라면, 전철은 현금으로 표를 사야했고, 버스도 동전으로 요금을 내야했습니다. 식당이나 편의점에서도 현금 결제가 우선이었고요.

 

그러나 이런 경향은 바뀌고 있습니다. 코로나 이후 일본에서도 신용카드와 간편 결제가 현저하게 늘었습니다. 여행 중에 반드시 이용하는 호텔과 식당, 대형 마트와 편의점에서 모두 신용 카드를 받습니다. 전철과 버스, 기차 등의 교통수단에도 교통카드가 보편화되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2025년의 오사카-간사이 엑스포 개최까지 비현금 결제율을 40%로 끌어올린다는 방침 아래 신용카드와 간편결제 환경을 조성해 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노력하는 목표가 40%입니다. 이미 90%에 이른 한국에 비하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죠.

 

다행인 것은, 우리가 방문하는 오사카와 고베는 대도시이고, 니시노미야와 다카라즈카, 아마가사키와 이타미 등의 한신칸 지역도 메갈로폴리스에 포함되므로, 평균적인 일본 지역에 비해 신용카드와 간편 결제가 꽤 진전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환전의 필요성이 많이 줄었습니다. 코로나 전에는 일본 여행 경비 대부분을 환전해서 현금을 소지해야 했지만, 지금은 호텔과 식당, 마트와 편의점은 현금이 거의 필요 없습니다. 수수료의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신용카드로 편의점에서 현금을 인출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일본 여행에서는 현금 사용의 옛날 습관으로 조금은 회귀할 준비를 하는 게 좋습니다. 예컨대 대중교통에 교통카드를 사용하지만, 교통카드는 현금으로 사야 합니다. (물론, 한국에서 애플페이를 사용하신다면, 이를 일본 교통카드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일부 맛집 노포들은 여전히 오직 현금을 고집합니다. (물론 그런데는 안가면 됩니다만 또 맛집이라니까...^^) 예컨대, 우리 방문단이 12일 저녁식사를 하게 되는 주소의 <네기야키 야마모토>는 신용카드를 받는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현금으로 지불해야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14일 저녁식사가 예약된 <도리야키 츠쿠네야>는 신용카드를 취급합니다.

 

 

이처럼 식당에 갈 때도 신용카드나 간편결제를 취급하는지 미리 알아보는 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일본에서 신용카드와 간편결제 사용법, 그리고 각각의 장단점을 알려주는 유튜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곳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8HFZYIdJUM (일본에서 신용카드 사용)

https://www.youtube.com/watch?v=dQFnqVGuT1Q (애플, 네이버, 카카오페이)

 

요약하면, 비자와 매스터와 JCB라는 일본카드를 사용하면 불편이 없고, 한국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애플, 네이버, 카카오페이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저는 비자카드와 카카오페이로 일본 조사를 진행해 왔지만, 비자보다는 매스터카드, 카카오보다는 네이버카드가 더 편리하고 절약이 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수수료 차이가 있지만, 저는 워낙 여행경비가 얼마되지 않으니까 큰 차이는 없었다고 봅니다. 심지어 새벽에 출발하느라 환전하는 것을 잊어버렸지만, 조사하는 동안 지장이 없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각자 계획에 따라 조금씩 더 알아보시고, 각자 환전할 현금의 크기를 미리 요량 잡으시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애플페이 이용자가 아니시라면 교통카드(ICOCA) 비용 5천엔은 꼭 환전에 포함시켜 주세요. (jc, 2024/7/7)

,

この5年間活動してきた<舞踊靴>特徴があるとすれば活動行事公的後援けるように努力するということです

 

 

たちの活動在外同胞民族教育後援することで, 日本とロシアの同胞たちだけでなく日本人とロシア人活動家たちとの交流協力拡大してきましたこれにえてたちの訪問後援事業地元地方政府認定後援けられるように努力してきました

 

 

今回西宮訪問団活動714公民館公演西宮市西宮市教育委員会公式後援事業指定されたというニュースです鄭世和先生らせてきたところによれば西宮市市教育委員会<舞踊靴>訪日して進行する<ドンドン>公民館風物公演公式後援してほしいという申込書提出されましたが75ついに承認されたという連絡けたそうです

 

 

教育委員会公式後援行事になればどんな恩恵うのかはよくかりません後援金をはじめとするそののイベント支援提供されるかもりませんしかしそのような具体的後援よりもきな意味がありますたちの仕事私的であったり個人的活動ではなく自治体める公式行事になったということが重要だといます

 

 

このようなことは2年前韓国でもわれました当時日本チームアイ韓国舞踊靴宝塚朝鮮人追悼碑建立指導者8江陵市庁感謝牌してほしいと請願しました1914神戸水道工事中事故犠牲になった朝鮮人労働者金炳順(キム·ビョンスン)江陵出身だというらかにすることができたためです

 

 

江陵市議会提出した請願書江陵市政府され検討され請願実査江陵市長(当時市長金漢根)名義感謝牌6日本人活動家2在日同胞すことがまりました

 

 

当時はコロナ猛威るっていた時期だったため江陵市担当公務員直接宝塚れることはできず請願実態調査感謝牌贈呈東京所在江原道本部当時本部長姜秉直担当局長文美炫依頼しましたがこれがむしろ反応ましたこのことが江陵市らず東京神戸韓国公館にもられるようになったからです

 

 

実際江陵市公務員たちと江原道本部姜秉直本部長はこの仕事自分仕事のように熱心推進してさりついに20204宝塚感謝牌贈呈式かれました

 

感謝牌全部8贈呈されましたがこのたちは日帝強占初期日本労働移民られて苦労事故死にあった朝鮮人労働者たちを発掘記録慰霊祭げてられた々と宝塚兵庫県大阪府でキャンペーンをった2020326追悼碑建立するのに先頭った々です

 

 

この贈呈式では在日韓国人郷土史学者鄭鴻永 チョン·ホンヨン先生元日本公立学校教師近藤富男 先生在日朝鮮人事業家金礼坤キム·レゴン先生<神戸学生青年センター>研究者飛田雄一堀内稔先生玉瀬滿福寺足立泰教足立智敎先生彫刻家玉野勢三先生られました

 

 

このことは韓国でも前例のないことでしたが日本ではさらにきな反響びましたくの在日朝鮮人日本人活動家韓国在日朝鮮人権益のためにいていましたが韓国地方政府から公式的感謝挨拶けたのはめてだったからです

 

 

当時宝塚市はこの感謝牌贈呈式公式にはめなかったので残念でしたが今回西宮市教育委員会ドンドン風物公演公認後援することをめたのは大変なことでありがたいことです

 

 

<舞踊靴>今後市民交流協力拡大しながらもこのような努力公的められるようにすることにも一層力れていきます(jc, 2024/7/7)

,

지난 5년간 활동해 온 <무용신>의 특징이 있다면, 우리의 활동과 행사가 공적인 인정과 후원을 받도록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활동은 재외동포의 민족교육과 민족예술을 후원하는 일인데, 이를 위해서 일본과 러시아의 동포들뿐 아니라 일본인과 러시아인 활동가들과의 교류와 협력도 확대해 왔습니다.

 

 

이에 더해 우리의 방문이나 후원사업이 현지 지방정부의 인정이나 후원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 왔는데, 이번 니시노미야 방문단의 활동, 특히 714일의 공민관 풍물 공연이 니시노미야시와 니시노미야시 교육위원회의 공식 후원 사업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일본 <팀아이>의 사무국장 정세화 선생께서 알려 오신 바에 따르면, 일찍부터 니시노미야시와 교육위원회에, <무용신>이 방일해 진행하는 <동동> 공민관 풍물공연을 공식 후원해 달라는 신청서를 제출하셨는데, 75일 마침내 승인되었다는 연락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시와 교육위원회의 공식 후원행사가 되면 어떤 혜택이 따르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후원금을 비롯한 기타 행사 지원이 제공되는 지도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런 구체적인 후원보다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사적이거나 개인적인 활동이 아니라, 지자체가 인정하는 공식 행사가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같은 일은 2년 전 한국에서도 이뤄졌습니다. 당시 일본의 <팀아이>와 한국의 <무용신><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건립을 추진하신 지도자 8분에게 강릉시청이 감사패를 전달해 달라고 청원했습니다. 1914년에 고베수도공사 중에 사고사로 희생된 조선인 노동자 김병순씨가 강릉 출신이라는 점을 밝힐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강릉 시의회에 제출된 청원서는 강릉 시정부에 전달되어 검토되었고, 청원내용의 실사를 거쳐서 강릉시장(당시 시장 김한근) 명의의 감사패를 6분의 일본인 활동가와 2분의 재일동포에게 전달하기로 결정됐습니다.

 

 

당시는 코로나가 창궐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강릉시의 담당공무원이 직접 다카라즈카를 방문하지 못했고, 청원의 실사와 감사패 증정을 도쿄 소재 강원도본부(당시 본부장 강병직, 담당국장 문미혜)에 의뢰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이 일이 강릉시에 국한되지 않고, 도쿄와 고베의 한국공관에도 알려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강릉시의 공무원들과 강원도 본부의 강병직 본부장은 이 일을 자기 일처럼 열심히 추진해 주셨고, 마침내 20204, 다카라즈카에서 감사패 증정식이 열렸습니다.

 

감사패는 모두 8분에게 증정되었는데, 이 분들은 일제강점 초기에 일본으로 노동이민을 오셔서 고생 끝에 사고사를 당하신 조선인 노동자들을 발굴하고, 기록하고, 위령제사를 드려 오신 분들과 다카라즈카와 효고현, 오사카부에서 캠페인을 벌인 끝에 2020326일 추도비를 건립하는 데에 앞장서신 분들입니다.

 

 

이 증정식에서는 재일동포 향토사학자 정홍영(鄭鴻永) 선생, 일본공립학교 교사 출신의 활동가 콘도 도미오(近藤富男) 선생, 재일동포 사업가 김례곤(金禮坤) 선생, <고베학생청년센터>의 연구자 히다 유이치(飛田雄一), 호리우치 미노루(堀内稔) 선생, 타마세 만푸쿠지의 아다치 타이쿄(足立泰敎)와 아다치 치쿄(足立智敎) 스님, 조각가 타마노 세이조(玉野勢三) 선생이 감사패를 받으셨습니다.

 

 

이 일은 한국에서도 전례가 없는 일이었지만, 일본에서는 더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많은 재일동포와 일본인 활동가들이 한국과 재일조선인의 권익을 위해 일했지만, 한국 지방정부로부터 공식적인 감사의 인사를 받은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다카라즈카시는 이 감사패 증정식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아서 아쉬움이 좀 있었습니다만, 이번에 니시노미야시와 교육위원회가 <동동> 풍물공연을 공인하고 후원하기로 결정한 것은 대단히 큰일이고, 고마운 일입니다.

 

 

무용신은 앞으로도 시민들의 교류와 협력을 확대하면서도, 이러한 노력이 공적으로 인정되도록 하는 데에도 더욱 힘쓰겠습니다. (jc, 2024/7/7)

,

714今回<舞踊靴>訪問団主行事である家族風物牌<ドンドン>公演があるですこの風物公演去年から構想されていたものなんですが紆余曲折今年実現しました

 

 

ドンドン公演西宮市立若竹公民館12から1時間行われます演目(1)ビナリと(2)家族サムルノリ(3)家族サンモパングッそして(4)チェサン·ンソゴとチェサンソ·ソルチャングブポノリルムとバックノリなどの個人遊びにつながります

 

 

<ドンドン>林寅出(イム·インチュル)先生趙元子(チョ·ウォンジャ)先生夫婦林東明(イム·ドンミョン)林東權(イム·ドングォン)4家族構成されていますがバックノリの専門家楊享鎭(·ヒャンジン)先生わりより充実した公演になるものと期待されますしかし公民館公演には<ドンドン>だけが出演するのではなくより多様順序まれます

 

 

行事10まるので訪問団9公民館到着もかけて民画展示手伝ってく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訪問団観客だけでなく助力者になってくださ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

 

10時半開会されたらコッキリの具実会長舞踊靴挨拶言葉小西和治先生李鐘順先生西宮コッキリのについて紹介してくださるでしょう

 

 

11には日本人学生空手演舞いて地下号する映像上映されポン史郞先生真銅敏之先生経験談紹介されますポンシロ先生<アリランのえて>という作曲者真銅先生鄭鴻永先生一緒地下壕朝鮮国独立という壁書発見したです

 

 

11時半には<コッキリの>演奏がありますがこの時学生たちは韓國同胞<舞踊靴>がプレゼントした衣装舞台がるそうです舞踊靴伝達順序では<チームアイ>梁和進先生<ララン舞踊教室>生徒たちに舞踊靴伝達することになります

 

 

このような手順われば12<ドンドン>のビナリと家族サムルノリが演奏され<ララン舞踊教室>生徒たちの舞踊公演があった<ドンドン>演奏きます<ドンドン>演奏われば公演団林寅出先生<コッtキリ>生徒たちに演奏助言をしてさりしばらく協演時間ちます

 

 

公演がすべてわったら公民館講堂でお弁当昼食をとり後片付けをした公民館出発して西宮地下号れることになります地下壕所在地高級住宅街わったので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くにてられた記念碑ねることになりますこの<コッキリの>具実会長同行案内説明担当してくださることになります

 

 

地下壕訪問えて一行西宮北口駅移動します午後5からそこでかれる夕食会があります公演団とイム·ウナさん李高恩先生などはこの日帰国されるのでこの夕食会には参加できませんが訪問団8<チームアイ><コッキリの><ララン舞踊教室>先生たちがこの会食参加することになります

 

 

前日(13)日程これまで<舞踊靴>がよくった見慣れた場所です昨年1次訪問団切畑追悼碑玉瀬参拝墓滿福寺れましたしかしこの(14)日程<舞踊靴>にとってしいです風物公演めてですし西宮のいろんな行事めてです

 

 

いわば13<舞踊靴>行事復習なら14日程はこれから仕事予習といえます<舞踊靴>音楽舞踊写真などの芸術形式媒介韓国同胞在日同胞韓国人日本人交流協力拡大しようと努力してきました

 

 

西宮公民館公演じて韓国<ドンドン>西宮<コッキリ>京都<ララン舞踊教室>協演日本人学生たちが<空手演舞>試演されることも意味あることです

 

 

来年はこのような原則経験によって形式内容がよりかな訪問団構成され韓日間そして韓国-在日同胞間文化交流われることを期待しています(jc, 2024/7/7)

 

,

714일은 이번 <무용신> 방문단의 주행사인 가족풍물패 <동동>의 공연이 있는 날입니다. 원래 이 풍물공연은 작년부터 구상되었던 것인데, 우여곡절 끝에 올해 성사되었습니다.

 

 

<동동> 공연은 니시노미야시립 와카다케공민관(西宮市立若竹公民館)에서 12시부터 약 1시간동안 진행됩니다. 공연 내용은 (1) 비나리와 (2) 가족사물놀이, (3) 가족 상모판굿, 그리고 (4) 채상소고와 채상설장구, 부포놀음과 버꾸놀이 등의 개인놀이로 이어집니다.

 

 

<동동>은 임인출 선생과 조원자 사모, 임동명군과 임동권군의 4인의 가족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버꾸놀이 전문가 양향진 선생이 합세해 더욱 알찬 공연이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그러나 공민관 공연에는 <동동>만 출연하는 것이 아니라, 더 다양한 많은 순서들이 포함됩니다.

 

 

행사는 10시부터 시작되므로 방문단은 9시까지는 공민관에 도착, 현수막도 걸고 민화도 전시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방문단은 관객이 아니라 조력자이자 참여자가 되어주셔야 합니다.

 

10시반에 개회가 되면 <코끼리회>의 구실 회장님과 제가 인사말씀, 코니시 카즈하루(小西和治) 선생과 이종순(李鐘順) 선생께서 니시노미야와 코끼리회에 대해 소개하실 것입니다.

 

 

11시에는 일본인 학생들의 공수연무가 시연되고, 이어서 니시노미야 지하호에 대한 영상이 상영되면서, 폰시로(ポン史郞) 선생과 신도 도시유키(真銅敏之) 선생의 경험담이 소개됩니다.

 

폰시로 선생은 <아리랑의 고개를 넘어서>라는 노래로 작곡하신 분이고, 신도 도시유키 선생은 정홍영 선생과 함께 지하호에서 조선국 독립이라는 벽서를 발견하신 분입니다.

 

 

11시반에는 <코끼리회>의 연주가 있는데, 이때 학생들은 <무용신> 선물한 의상을 입고서 무대에 오른다고 합니다. 이어서 무용신 선물을 전하는 순서인데, <팀아이>의 량화진(梁和進) 선생께서 <라랑무용교실>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전달하시게 됩니다.

 

 

이같은 순서가 끝나면, 12시에 <동동>의 비나리와 가족사물놀이가 연주되고, <라랑무용교실> 학생들의 짧은 무용공연이 있은 다음, <동동>의 연주가 이어집니다. <동동>의 연주가 모두 끝나면, 공연단의 임인출 선생이 <코끼리회>의 학생들에게 연주 조언을 해 주시면서 잠시 협연의 시간을 갖습니다.

 

 

공연이 모두 끝나면 공민관 강당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고, 뒷정리를 한 후, 공민관을 출발해 니시노미야 지하호를 방문하게 됩니다. 지하호가 있는 지역은 고급 주택가로 변했기 때문에 지금은 들어가 볼 수는 없고, 인근에 세워진 기념비를 방문하게 됩니다. 이때 <코끼리회>의 구실 회장님이 동행하시면서 안내와 설명을 담당해 주시게 됩니다.

 

 

지하호 방문을 마치고, 일행은 니시노미야키다쿠치(西宮北口)역으로 이동합니다. 오후5시부터 그곳에서 열리는 저녁식사 모임이 있습니다. 공연단과 임은하씨, 이고은 선생 등은 이날 귀국하시기 때문에 이 저녁식사 모임에는 참여하시지 못하시지만, 방문단 8명과 <팀아이>, <코끼리회>, <라랑무용교실>의 선생님들께서 이 회식에 동참하시게 됩니다.

 

 

전날(13) 일정은 그동안 <무용신>이 자주 가본 익숙한 곳입니다. 작년의 1차 방문단도 키리하타 추도비와 타마세의 참배묘와 만푸쿠지를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이날(14) 일정은 <무용신>에게 새로운 장입니다. 풍물 공연도 처음이고, 니시노미야의 여러 행사도 처음입니다.

 

 

말하자면 13일은 <무용신> 행사의 복습이라면, 14일의 일정은 앞으로 이어갈 일의 예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용신>은 그동안 음악과 무용, 그림과 사진 등의 예술 형식을 매개로, 한국동포와 재일동포, 한국인과 일본인의 교류와 협력을 확대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니시노미야 공민관 공연을 통해 한국의 <동동>, 니시노미야의 <코끼리회>, 교토의 <라랑무용교실>이 협연하고, 일본인 학생들이 <공수연무>가 함께 시연되는 것도 의미있는 일입니다.

 

 

내년에는 이 같은 원칙과 경험에 따라, 형식과 내용이 더 풍부한 방문단이 구성되어서, 한일간, 그리고 한국-재일동포간의 문화교류가 이뤄지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jc, 2024/7/7)

,

713<舞踊靴>訪問団本格的日程まりますこの桐畑宝塚朝鮮人追悼碑玉瀬仏教寺院万福寺足立泰敎足立有里僧侶表敬訪問玉瀬婦女会をはじめとする地元々にもおげます

 

 

宝塚朝鮮人追悼碑1914から1929までこの地域土木工事事故死亡した5朝鮮人労働者追悼するです神戸水道工事中死亡した3金炳順南益三張長守遺体玉瀬共同墓地埋葬され玉瀬住民滿福寺僧侶たちによって110年間慰霊祭われています

 

 

福知山線鉄道公社くなった二人尹吉文吳伊根火葬され痕跡す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が1986在日朝鮮人郷土史学者鄭鴻永先生教師出身日本人活動家近藤富雄先生らの犠牲発掘<歌劇のもうつの歴史:宝塚朝鮮人歌劇のもうひとつの歴朝鮮人1997)>という著書記録しました

 

 

20203日本人在日韓国人活動家たちがらの犠牲えるために切畑追悼碑建立その後毎年326追悼会いています玉瀨でも毎年826犠牲になった朝鮮人労働者のための慰霊祭きます

 

 

<舞踊靴><チームアイ>2022追悼碑ることになりその後毎年玉瀬切畑訪問して参拝今年例外ではないので訪問団追悼碑参拝墓訪問します

 

 

昨年はバスをって移動しましたが今年公共交通移動します8十三駅から電車って武田尾移動乗用車分乗して切畑玉瀬順番れます訪問えたまた武田尾駅電車って宝塚移動そこで昼食をとり4時間ほど自由時間ごした電車伊丹移動します

 

 

伊丹では午後5から7まで兵庫県社会団体のメンバーとバーベキュー交流会いた夕方伊丹自由時間ごすかホテルにってリラックスしていただくことになります伊丹十三のカフェや居酒屋あるいはその時間れることのできる観光地については鄭世和全宰云姜承昊先生などからアドバイスをいただけるといます

 

 

訪問2日目日程がぎっしりまっています十三出発して切畑玉瀬宝塚伊丹などのいろいろな場所れてから宿所るからですいなことにこれらすべての地域兵庫県東部密集しているくです頻繁移動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が交通ですしかもこの地域在日朝鮮人歴史んだところなので意味深訪問になるでしょう

 

 

この昼休前後4時間ほど宝塚自由観光することができますが宝塚少女歌劇団1914創設されたところで日本漫画故郷のようなところです宝塚大劇場1930年代朝鮮舞踊家崔承喜先生がよく公演した場所でもありますこの大劇場手塚治虫漫画博物館れる価値があるといます

 

 

また伊丹バーベキューがわったらまた自由時間なので伊丹りながら同胞経営している食堂居酒屋ビールを一杯飲むのもいいことだといますあるいはすぐに十三ってくで時間ごすのもいいですよ

 

 

宝塚朝鮮人追悼碑参拝墓については昨年この地域への訪問準備しながらいておいた記録があります以下のリンクをクリックするとみになれます参考になればいです

 

https://teameye.tistory.com/349 (歌劇都市のもうつの歴史)

https://teameye.tistory.com/350 (宝塚朝鮮人追悼碑建立)

https://teameye.tistory.com/424 (万福寺参拝墓)

https://teameye.tistory.com/426 (参拝猫劇的再発見) (jc, 2024/7/6)

 

 

,

713<무용신> 방문단의 본격적인 일정이 시작됩니다. 이날은 키리하타(切畑)<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방문해 참배하고, 타마세(玉瀨)의 불교사찰 만푸쿠지(滿福寺)를 방문, 아다치 타이쿄(足立泰敎)와 치쿄(足立有里) 스님을 예방하고 타마세 부녀회를 비롯한 지역 주민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리게 됩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1914년부터 1929년까지 이 지역 토목공사에서 사고로 사망한 5명의 조선인노동자를 추도하는 비석입니다. 고베수도 개수공사 중에 사망한 3(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의 시신은 타마세의 공동묘지에 매장되었고, 타마세 주민과 만푸쿠지의 스님들에 의해 110년째 위령제사가 드려지고 있습니다.

 

 

후쿠치야마선 철도공사에서 사망한 2(윤길문, 오이근)은 화장되어 흔적을 남기지 못했지만, 1986년 재일조선인 향토사학자 정홍영 선생님과 교사출신의 일본인 활동가 콘도 도미오 선생님이 이들의 희생을 발굴해 <가극의 거리의 또 하나의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歌劇のもうひとつの歴史:宝塚朝鮮人, 1997)>이라는 저서에 기록했습니다.

 

 

20203월 일본인과 재일동포 활동가들이 이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키리하타에 추도비를 건립했고, 이후 매년 326일 추도회를 열고 있습니다. 타마세에서도 매년 826일 희생된 조선인 노동자들을 위한 위령제사가 계속됩니다.

 

 

<무용신><팀아이>2022년 추도비를 알게 됐고, 이후 매년 타마세와 키리하타를 방문해 참배를 계속했고, 올해의 예외가 아니어서 방문단이 추도비와 참배묘를 방문합니다.

 

 

작년에는 버스를 대절해 이동했지만, 올해는 대중교통을 이동합니다. 아침8시 주소(十三)역에서 전철을 타고 타케다오(武田尾)로 이동, 승용차에 나눠 타고 키리하타와 타마세를 차례로 방문합니다. 방문을 마친 후 다시 타케타오역에서 전차를 타고 다카라즈카(宝塚)로 이동, 그곳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4시간가량 자유시간을 가진 후 전철로 이타미(伊丹)로 이동합니다.

 

 

이타미에서는 오후5시부터 7시까지 일본 <팀아이> 등의 효고현 사회단체 회원들과 함께 바비큐 교류회를 가진 후, 저녁 시간에 이타미에서 자유시간을 가지거나, 호텔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시게 됩니다. 이타미와 주소의 카페나 이자카야, 혹은 그 시간에 방문할 수 있는 다른 관광지에 대해서는 정세화, 전재운, 강승호 선생님 등에게서 조언을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방문 2일째의 일정이 촘촘합니다. 주소를 출발해 키리하타, 타마세, 다카라즈카, 이타미 등의 여러 곳을 방문한 뒤에 숙소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다행인 것은 이 모든 지역이 효고현의 동부에 밀집된 가까운 곳입니다. 자주 이동하게 되지만, 교통편이 불편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더구나 이 지역은 재일조선인의 역사가 배인 곳들이어서 뜻 깊은 방문이 될 것입니다.

 

 

이날 점심시간 전후의 4시간가량 다카라즈카에서 자유롭게 관광하실 수 있는데, 다카라즈카는 소녀가극단(1914)이 창설된 곳이고, 일본 만화의 고향 같은 곳입니다. 특히 다카라즈카 대극장은 1930년대에 조선무용가 최승희 선생이 자주 공연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 대극장과 데즈카 오사무 만화박물관은 방문해 보실만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이타미 바비큐가 끝나면 다시 자유 시간이므로, 이타미를 돌아보시면서 동포가 경영하시는 식당이나 이자카야에서 나마비루를 한잔 하시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은 바로 주소로 돌아와서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시는 것도 좋습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와 참배묘에 대해서는 작년 이 지역 방문을 준비하면서 써놓은 기록이 있습니다.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참고가 되시면 좋겠습니다.

 

https://teameye.tistory.com/349 (가극의 도시의 또 다른 역사)

https://teameye.tistory.com/350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건립)

https://teameye.tistory.com/424 (만푸쿠지의 참배묘)

https://teameye.tistory.com/426 (참배묘의 극적 재발견) (jc, 2024/7/6)

 

,

日本滞在34訪問団8食事をします準備団全宰云李高恩趙正熙はこれまで7食事をあらかじめ準備しており13昼食場所最後渉外中です

 

 

まず12夕食公演団到着していない状況ですが10名様でホテルくのお食堂ねぎやまもと5から食事をしていただきますメインメニューのおきとねぎきについては以下2 つのインターネット ポスティングを参照してください

 

 

https://namu.wiki/w/%EC%98%A4%EC%BD%94%EB%85%B8%EB%AF%B8%EC%95%BC%ED%82%A4 (ナムウィキ項目)>

https://www.negiyaki-yamamoto.com/tenpo/ (本店ウェブサイトメニューと価格収録)

https://shpark610.tistory.com/340 (ある旅行客のレビュー)

 

 

朝食宿所のプラザ大阪ホテルですることになります周辺地域朝早くオープンする食堂があるのかからないしまた移動動線単純だという考慮しました

 

 

メニューはビュッフェなのですがアメリカンコンチネンタル和風がそろっているようですメニューが豊富だからたちとしてはいいことですレストランはホテル1<クリスタル(Crystal)>です

https://plazaosaka.com/kr/restaurant.html (ホテルレストランウェブサイト)

https://www.tripadvisor.com/Restaurant_Review-g298566-d7439305-Reviews-Buffet_Dining_Crystal-Osaka_Osaka_Prefecture_Kinki.html ( メニューサンプル収録 )

 

 

クリスタル645にオープンします13には8十三駅電車ら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べての準備えて朝食べた7時半にはホテルを出発することをおめします7には食堂出席チェックをげます^^

 

 

1415朝食<クリスタル>朝食ビュッフェです149までに西宮市立若竹公民館到着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が十三駅から西宮北口駅までは30距離ですので8にホテルを出発していただいて結構です(西宮北口駅西宮駅です)

 

 

訪問えて帰国する15にも朝食<クリスタル>ですホテルの朝食6:45-10:00なのでこの各自日程わせてゆっくり朝食をとってもいいですよ^^

 

 

13のランチはまだめていませんが宝塚駅近くの日本式ラーメンやそばをしています13夕食伊丹移動して運動場でバーベキューにしますバーベキューの準備日本<チームアイ>先生にしていただくことになりました

 

 

14昼食西宮公民館でお弁当としておがりいただきます公演終了後すぐに西宮地下壕記念碑れる予定なので食事時間りないからですこのお弁当日本チームアイ先生方があらかじめ用意配布してくださることになります

 

 

14夕食西宮北口駅近くの炭火焼通つくね屋本舗われます<チームアイ><コッキリ><ララン>先生たちを15参加する予定です

 

 

この食事現地協力感謝する意味訪問団提供することになります食堂予約されていて一人様4,500のメニューと一緒ドリンク/ビール/焼酎放題だそうです

https://tsukuneya.gorp.jp/ つくねや本店ウェブサイトメニューと価格収録

 

 

以上のように訪問期間中8食事7はすでに決定または予約されており112日宝塚ランチのみ決定しています

 

 

もしそのメニューについてベジタリアンやアレルギーなどのおりの事前におらせください個人必要わせて調整できます(jc, 2024/7/6)

,

일본 체류 34일 동안 방문단은 모두 8번의 식사를 하시게 됩니다. 준비단(전재운, 이고은, 조정희)은 지금까지 7번의 식사를 미리 준비해 두었고, 13일 점심 식사할 장소를 마지막으로 섭외 중입니다.

 

 

우선 12일의 저녁식사는 공연단이 도착하시지 않은 상황이지만, 10분이서 호텔 인근의 오코노미야키 식당 <네기야키 야마모토(ねぎやまもと)>에서 5시부터 식사를 하시게 됩니다. 주요 메뉴인 오코노미야키와 네기야키에 대해서는 아래의 세  인터넷 포스팅을 참고해 주세요.

 

 

https://namu.wiki/w/%EC%98%A4%EC%BD%94%EB%85%B8%EB%AF%B8%EC%95%BC%ED%82%A4 (나무위키, <오코노미야키 항목)>

https://www.negiyaki-yamamoto.com/tenpo/ (본점 웹사이트, 메뉴와 가격 수록)

https://shpark610.tistory.com/340 (한 여행객의 후기)

 

 

아침식사는 숙소인 플라자 오사카 호텔에서 하시게 됩니다. 주변 지역에 아침 일찍 문 여는 식당이 있는지 모르기도 하고, 또 이동 동선이 단순하다는 점도 고려했습니다.

 

 

메뉴는 뷔페식인데, 아메리칸, 컨티넨탈, 일본식이 모두 구비된 것 같습니다. 메뉴가 다양하니까, 우리로서는 좋은 일입니다. 식당은 호텔 1층의 <크리스탈(Crystal)>입니다.

https://plazaosaka.com/kr/restaurant.html (호텔 식당 웹사이트)

https://www.tripadvisor.com/Restaurant_Review-g298566-d7439305-Reviews-Buffet_Dining_Crystal-Osaka_Osaka_Prefecture_Kinki.html (메뉴 샘플 수록)

 

 

<크리스탈>은 아침 645분에 문을 엽니다. 13일 아침에는 8시에 주소역(十三驛)에서 전철을 타야하므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아침 식사를 하신 후, 7시 반에는 호텔을 출발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7시에는 식당에서 출석체크를 드리겠습니다.^^

 

 

14일과 15일 아침식사도 <크리스탈> 조식부페입니다. 14일 아침에는 9시까지 니시노미야 시립 와타다케 공민관(西宮市立若竹公民館)까지 이동하게 됩니다만, 주소역에서 니시노미야키타구치역까지 약 30분 거리이므로 8시에 호텔을 출발하셔도 충분합니다.

 

 

반면 방문 마치고 귀국하는 15일에도 아침식사는 <크리스탈>입니다. 호텔 조식은 6:45-10:00이므로 이날은 각자의 일정에 따라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하셔도 되겠습니다.^^

 

 

13일 점심은 아직 결정하지 못했지만, 다카라즈카(宝塚)역 근처의 일본식 <라멘>이나 <소바> 식당을 찾고 있습니다. 13일 저녁은 이타미(伊丹)로 이동해서 운동장에서 바비큐로 하게 됩니다. 바비큐 준비는 일본 <팀아이> 선생님들께서 해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14일 점심은 니시노미야 공민관에서 공연을 마친 후 도시락으로 점심을 드시게 됩니다. 이어서 니시노미야 지하호 기념비를 방문할 예정이므로, 식사 시간이 넉넉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이 도시락도 일본 <팀아이> 선생님들께서 미리 마련, 배포해 주시게 됩니다.

 

 

14일 저녁식사는 니시노미야기타구치역(西宮北口驛) 인근의 <숯불 야키도리 츠쿠네야 본점(炭火焼鳥つくねや 本店)>에서 하게 됩니다. 이 식사에는 방문단 8분과 <팀아이>, <코끼리>, <라랑>의 선생님들께서 참석하셔서 총원 15명쯤 될 것 같습니다.

 

 

이 식사는 현지 협조에 감사의 뜻으로 방문단이 제공하게 됩니다. 이 식당은 예약이 되어 있고 1인당 4,500엔의 메뉴와 함께 음료/맥주/일본식 소주는 무제한 드실 수 있다고 합니다.^^

https://tsukuneya.gorp.jp/ (츠쿠네야 본점 웹사이트, 메뉴와 가격 수록)

 

 

이상과 같이, 방문 기간 동안 8번의 식사 중에서 7번은 이미 결정되거나 예약되어 있고, 1(12일 다카라즈카 점심)만 결정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혹시, 해당 메뉴에 대해 채식주의나 알레르기 등의 어려움이 있으신 분들은 미리 알려주세요. 개인의 필요에 맞춰서 조정드릴 수 있습니다. (jc, 2024/7/6)

,

関西空港入国審査税関報告えてられたら関西空港駅十三(Juso)のホテルプラザ大阪移動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もちろん案内者がいます

 

 

訪問団15飛行日程ると3チームにかれて関西到着しますね1(3)102(7)2そして公演団(5)9空港到着します

 

 

1案内2全宰云先生そして公演団はまた空港からホテルまで案内します心配はありませんのでご安心ください下記空港-ホテルの情報のためまとめておきますので必要場合参考にしてください

 

(1) 関西空港から十三駅まで:

関西空港交通(ICOCA)カードをっておいたがいいとおえしました大阪では電車路線複雑頻繁え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がそのたびに切符うのが時間がかかって複雑になることがあるからです

 

 

全宰云先生提案によると関西空港駅南海空港線40970-天下茶屋駅堺筋線6460-淡路駅阪急京都線4200-十三駅方法がベストです回数3ですが各乗えが簡単区間いです

 

 

公演団楽器めた荷物いといますのでこの路線をおめします電車搭乗時間1時間くらいですがえと時間わせると1時間半くらいになるといます

 

 

一方関西空港からJR電車におりいただく方法もございます関西空港駅関西空港線1時間101,210-大阪駅-徒歩移動-梅田駅阪急線4170-十三駅経路ですこのルートも時間費用きくわりませんがえが1だけで便利です

 

 

ただ大阪駅から梅田駅徒歩移動する距離くて複雑ですそれでもこの地域大阪一番にぎやかなところなので夕方ならわざわざってみる価値がありますしかし深夜にたくさんの荷物って移動される公演団にはおめしません

 

 

(2) 十三(Juso)から宿所まで

十三駅からホテルプラザ大阪までは350メートルといですりたら西口地図案内するりに5だけいてくればいいです

 

 

ホテルのチェックインは午後2からですのチームはすぐにチェックインできますがのチームはたなければなりませんいなことにホテルが到着した宿泊客荷物をチェックインするまでかってくれますそのためのチームもホテルにカバンをけた昼食観光をされるのがだといます昼食住所駅くでしたほうがいいですね

 

 

宿題があるので中之島大阪図書館にちょっとら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が同行していただいても後悔しないといますここには史跡博物館淀川沿いの公園しいからですコーヒーのがよく写真もよくれる^^カフェがいです

 

 

(3) 12夕食

1(チーム)2(チーム)くとも4まではホテルに皆集まることができるといます客室チェックインの夕食5<山本ねぎ>でおいします

 

 

大阪式のおきとこのならではのネギをたくさんれたおきがカウンターにって手前調理していただくおきがわえますビールをえるととてもいです^^

 

 

(4) 夕食後

到着してみればおかりだといますが十三駅くは一種遊興街とグルメりです夕食後適当居酒屋一杯することができます夕食参加費から支払われますが二次会です^^ (jc, 2024/7/4)

 

 

,

간사이 공항에서 입국심사와 세관보고를 끝내고 나오시면 간사이공항역에서 주소(十三)의 호텔 플라자 오사카(Hotel Plaza Osaka)로 이동해야 합니다. 물론 안내자가 있습니다.

 

 

방문단 열다섯 분의 비행 일정을 보니까, 3팀으로 나뉘어 간사이에 도착하시네요. 1(3)은 아침10, 2(7)은 낮2, 그리고 공연단(5)은 저녁9시에 공항에 도착하시게 됩니다.

 

 

1진은 제가 안내하고, 2진은 전재운 선생, 그리고 공연단은 다시 제가 공항부터 호텔까지 안내드릴 것입니다. 길을 잃고 헤맬 염려는 없으므로 안심해 주세요. 아래 공항-호텔 정보는 만약을 위해 정리해 두는 것이니, 필요한 경우에 참고해 주시기 바래요.

 

(1) 간사이공항에서 주소역까지:

간사이 공항에서 교통카드를 구매해 두시는 게 좋다는 말씀을 이미 드렸습니다. 오사카에서는 전철 노선이 복잡하고, 자주 환승해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표를 구입하는 것이 시간이 걸리고 복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재운 선생의 제안에 따르면 간사이공항역(난카이공항선, 40, 970)-텐가차야역(사카이스지선, 6, 460)-아와지역(한큐교토선, 4, 200)-주소역의 방법이 최선입니다. 환승 횟수가 2번이지만, 각 환승이 쉽고, 환승간 걸어야 하는 구간이 짧습니다.

 

 

특히 공연단은 악기를 포함한 짐이 많으실테니까 이 노선을 강추드립니다. 전철 탑승 시간은 1시간가량이지만, 환승과 대기 시간을 합치면 1시간 반쯤 될 겁니다.

 

 

한편, 간사이공항에서 JR전철을 타시는 방법도 있습니다. 간사이공항(간사이공항선, 1시간10, 1,210)-오사카역-도보 이동-우메다역(한큐선, 4,170)-주소역의 경로입니다. 이 경로도 시간과 비용이 크게 차이나지 않지만, 환승이 1회뿐으로 편리합니다.

 

 

다만 오사카역에서 우메다역으로 도보 이동하는 거리가 좀 멀고 길이 복잡합니다. 그래도 이 지역은 오사카의 가장 번화한 곳이므로 낮이나 이른 저녁이라면 일부러라도 가볼 만한 곳입니다. 그러나 늦은 밤에 많은 짐을 가지고 이동하시는 공연단에는 권하지 않습니다.

 

 

(2) 주소(十三, Juso)역에서 숙소까지

주소역에서 <호텔 플라자 오사카>까지는 약 350미터로 가까운 편입니다. 역에서 내리시면 서쪽 출구(西口)로 나오셔서 지도가 안내하는 대로 약 5분만 걸어오시면 됩니다.

 

 

호텔 체크인은 오후2시부터입니다. 낮팀은 바로 체크인하실 수 있겠지만, 아침팀은 기다려야할 것입니다. 일본의 대부분의 호텔들이, 일찍 도착한 투숙객의 짐을 체크인할 때까지 맡아줍니다. 따라서 아침팀도 일단 호텔로 가서 짐을 맡긴 후에 점심식사와 약간의 관광을 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점심식사는 호텔에 짐을 맡긴 후에 주소역 근처에서 하는 것이 좋겠네요.

 

 

저는 숙제가 있어서 나카노지마의 오사카도서관에 잠시 들러야 합니다만, 시간이 되시면 동행하셔도 후회 않으실 겁니다. 이곳에 사적지와 박물관이 많고, 요도가와 강변의 공원길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너무 덥거나 비가 오면, 커피 맛이 좋고 사진 잘 받는^^ 카페가 많습니다.

 

 

(3) 12일 저녁식사

1(아침팀)2(낮팀)은 적어도 4시까지는 호텔에 모두 모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객실 체크인을 하신 다음 저녁 식사는 5시에 <야마모토 네기야키>에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사카식 오코노미야키와 이집 특유의 네기야키(파를 많이 넣은 오코노미야키)를 주문할 수 있고, 카운터에 앉아서 바로 앞에서 조리해주시는 오코노미야키를 맛볼 수 있습니다. 음료나 나마비루(생맥주)를 곁들이면 아주 좋습니다.^^

 

 

(4) 저녁식사 이후

도착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주소역 인근은 일종의 유흥가와 맛집 거리입니다. 저녁식사 후에 적당한 이자카야에서 한잔하실 수 있습니다. 저녁식사는 참가비에서 지불되지만, 2차는 각자 지불입니다.^^ (jc, 2024/7/4)

 

 

,

西宮訪問出発まであと一週間ほどです海外かけに必要基本的なもの旅券-満了期間確認航空券購入ホテルの予約はもう準備ができているといます

 

 

ここでは迅速かつ便利出入国及日本内移動のためにあらかじめ準備する5つを提案しようといます

 

 

(1) Visit Japan Web:

関西国際空港じて日本入国する入国申告税関申告をしますさてこの2つの申告をオンラインで事前うことができますVist Japan Webという手続きがそれです

 

https://services.digital.go.jp/ko/visit-japan-web/

 

Visit Japan Web | Digital Agency Services

입국 절차(입국 심사, 세관 신고)및 면세 구입에 필요한 정보를 등록할 수 있는 웹 서비스입니다.

services.digital.go.jp

 

このリンクをクリックするとそのサイトが表示されますサイトで利用開始をクリックすると事前登録開始することができます登録情報にはパスポート航空券そしてホテルの情報必要です

 

この情報をあらかじめ入力してQRコードを生成させておけば入国審査非常迅速通過することができます。 (かに最近もがこのサービスを使っているのでこちらの並大抵長いのは事実ですがそれでも審査にかかる時間非常短縮されます^^)

 

 

(2) 携帯電話ローミング:

空港たら電話ローミングを用意するのが普通なのですがはただ通信会社提供するサービスを自動的使ったりしていたのでこれについてはっていることがあまりありません電話ローミングについてはチョン·ジェウン先生えていただきたいです^^

 

 

(3) 交通カード(ICOCAカード):

関西空港から大阪駅までのはいろいろありますリムジンバス1時間302000もあればはるか503000という高速列車もあります

 

たいていは電車1時間30ほど1200ります大阪には電車路線がとてもいのですがそのすべての電車るときに使えるイコカ(ICOCA)という交通カードがあります関西空港駅購入できますがクレジットカードではえず現金でしかえません

 

 

日本入国から出国までだいたい5千円移動十分だと予想されるので空港駅自動販売機でイコカカードを購入されることをおめしますこのコカカードはコンビニでも現金わりに使えますのでめにチャージしていただいても結構です

 

 

(4) 携帯電話充電アダプタ豚鼻:

日本電気アウトレットが韓国いますですから通称"豚鼻"ばれる変換器用意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最初出国前ダイソーうことができましたがすべてのダイソーで豚鼻販売しているようにはえませんでした時間があればGマーケットのようなところでっておくといいです

 

 

ホテルのロビーで豚鼻無料してくれるところもありますあるいは日本到着して"ビックカメラ"とか"ドンキホーテ"というおでも購入できるといていますしかしあらかじめ準備しておくと電話のバッテリーがれるという困惑した状況直面しないことがあります

 

 

(5) グーグルマップGoogle Map:

韓国るとネイバーマップやカカオマップは使用できません日本ではヤフー マップとグーグル マップを使用していますはグーグルマップを使ってきましたがヤフーマップとべてはいませんが困難不便はありません

 

目的地英米式アルファベットで検索できるので日本語のカタカナやヒラカナを使わなくてもいいです電車ったり場所したりするのに便利なので出発前にグーグルマップを使練習事前にしておくといいといます

 

 

まずこの5つをおすすめしますもっとしい説明必要でしたら質問してください(jc, 2024/7/4)

,

니시노미야 방문 출발이 일주일 정도 남았습니다. 해외 나들이에는 대개 익숙하실 것이고, 기본적인 것(여권-만료기간 확인, 항공권 구매, 호텔 예약)은 준비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는 신속하고 편리하게 출입국 및 일본 내 이동을 위해서 미리 준비할 5가지를 제안드리려고 합니다.

(1) Visit Japan Web:

간사이국제공항을 통해 일본 입국할 때도 입국신고와 세관신고를 합니다. 그런데, 이 두 신고를 온라인으로 미리 할 수 있습니다. Vist Japan Web Service라는 절차가 그것입니다.

https://services.digital.go.jp/ko/visit-japan-web/

 

Visit Japan Web | Digital Agency Services

입국 절차(입국 심사, 세관 신고)및 면세 구입에 필요한 정보를 등록할 수 있는 웹 서비스입니다.

services.digital.go.jp

 

 

이 링크를 누르시면 해당 사이트가 나옵니다. 사이트에서 이용 시작하기를 누르시면 사전 등록을 시작하실 수 있습니다. 등록 정보에는 여권, 항공권, 그리고 호텔 정보가 필요합니다.

 

이 정보를 미리 입력해서 큐알 코드를 생성시켜 놓으면, 입국심사를 매우 신속하게 통과할 수 있습니다. (하긴, 요즘은 누구나 이 서비스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쪽 줄도 만만치 않게 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심사에 소요되는 시간이 매우 단축됩니다.^^)

 

Visit Japan Web에 등록하실때, 호텔 정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

[우편번호] 5320025;

[도도부현] OSAKA FU

[시구정촌명] OSAKA SHI YODOGAWA KU

[이후의 주소] SHINKITANO 1 CHOME-9-15

[체류지-호텔명] HOTEL PLAZA OSAKA

[전화번호] 81663031000 

 

 

(2) 휴대폰 로밍:

공항을 나서면 전화 로밍을 준비하는 것이 보통입니다만, 저는 그냥 통신사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를 자동으로 사용하곤 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제가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전화 로밍에 대해서는 전재운 선생께서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3) 교통카드(ICOCA 카드):

간사이 공항에서 오사카역까지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 있습니다. 리무진 버스(1시간30, 2000)도 있고, 하루카(50, 3000)라는 고속열차도 있습니다.

 

대개는 전철(1시간30분정도, 1200)을 탑니다. 오사카에는 전철 노선이 대단히 많습니다만, 그 모든 전철을 탈 때에 사용할 수 있는 이코카(ICOCA)라는 교통카드가 있습니다. 간사이공항역에서 구입할 수 있는데, 신용카드로는 살 수 없고, 현금으로만 살 수 있습니다.

 

 

일본 입국에서 출국까지 대략 5천엔이면 이동에 충분할 것이라고 예상되므로, 공항역의 자동판매기에서 이코카 카드를 구매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이코카 카드는 편의점에서도 현금대신 사용할 수 있으므로, 조금 넉넉하게 충전을 하셔도 됩니다.

 

 

(4) 휴대폰 충전 어댑터 (돼지코):

일본의 전기 아울렛이 한국과 다릅니다. 그래서 통칭 돼지코라고 부르는 변환기를 준비하셔야 합니다. 저는 첫 출국 전에 다이소에서 살 수 있었는데, 모든 다이소에서 돼지코를 판매하는 것 같지는 않더군요. 시간이 되면 G마켓 같은 데서 사두시면 좋습니다. 또 휴대전화를 위한 보조 배터리를 준비하는 것도 크게 도움이 됩니다.

 

 

호텔 로비에서 돼지코를 무료로 빌려주는 곳도 있습니다. 혹은 일본에 도착해서 빅카메라라든가 동키호테라는 상점에서도 구입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리 준비해 두시면 휴대폰 배터리가 떨어지는 당황스런 상황에 봉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5) 구글맵(Google Map):

한국 밖으로 나가면 네이버맵이나 카카오맵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일본에서는 야후맵과 구글맵을 주로 사용합니다. 저는 구글맵을 사용해 왔는데, 야후맵과 비교해 보지는 않았지만, 어려움이나 불편이 없습니다.

 

목적지를 영미식 알파벳은 물론 한글로 검색할 수 있어서 일본어 카타카나나 히라카나를 사용하지 않아도 됩니다. 전철을 타거나 장소를 찾아가는 데에 편리하므로, 구글맵을 사용하는 연습을 미리 해 두시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이 5가지를 추천드립니다.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시면 질문해 주세요. (jc, 2024/7/4)

,

712-15<舞踊靴>れる兵庫県西宮について予習中ですが、「阪神間モダニズム尼崎のダンスホールていたら脇道けました1920年代朝鮮沿海州日本複雑状況どのようにして新舞踊社交ダンスが登場したのか追跡それを背景崔承喜先生朝鮮舞踊誕生した過程簡単ていきました

 

 

本論西宮がどんな場所いつから朝鮮人移住したのかてみようといます現在日本には44万人在日韓国人んでいますこのうち26千人朝鮮韓国国籍拒否する朝鮮籍です

 

2000年代半ばまでは在日同胞はおよそ60万人でしたが2010年代には50万人40万人代っています1995から2021にかけて20万人在日同胞帰化したからです

 

 

兵庫県には201961日現在4万人韓国人/朝鮮人居住していますそのうちのほとんどは神戸16千人んでいますが尼崎65百人姫路43百人西宮31百人にも3千人以上朝鮮人/韓国人居住伊丹17百人宝塚16百人明石111にも1,000名以上んでいます

 

20236月現在西宮人口48万人ですがそのうち外国人人口8千人1.6%ですそのうち韓国人/朝鮮人(314440%)中国人(17%)ベトナム(12%)きます23外国人わせたものより1朝鮮人/韓国人いです

 

 

日本統計韓国人/朝鮮人という範疇使われるのには事情があります在日同胞総連系民団系そして韓国系新世代同胞かれますが総連系同胞自分のことを在日朝鮮人一方民団系新世代同胞在日韓国人自任しますしたがってこれらを一度通称する韓国人/朝鮮人」、または朝鮮人/韓国人という名前使うのです

 

 

3つのグループの通称ジャニチ(在日)という言葉もありますが正確言葉ではありません日本中国人やベトナム在日だからです韓国ではこの3つのグループをすべて在日同胞いますが韓国以外ではその用語していません日本学者たちは在日コリアンという言葉使いますが3つのグループ英語訳コリアンKorean)」共通しているからです

 

はこの3つのグループをあえてつにまとめて通称すべきかどうか疑問っています名前める当事者意思慣行重要考慮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原則がありますそれによるとただ在日朝鮮人在日韓国人という言葉々に使えばいいのです

 

 

沿海州在露同胞自分たちを高麗人びます沿海州から中央アジアに強制移住させられた高麗人とその子孫じですしたがってらは高麗人です中国朝鮮人朝鮮族んでいますのでその尊重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

 

2024朝鮮首班韓国敵対国だと宣言したので在日朝鮮人がこの宣言れれば今後韓国人在日韓国人交流することはないでしょうねそのような行為反逆罪やスパイになる可能性があるからですそのため在日韓国人/朝鮮人という範疇名前もその用例がますますしくなるでしょう

 

 

しかし韓半島朝鮮韓国分断される以前時期移住民すときは在日朝鮮人という言葉使うのがしいといますそのはイデオロギーの対立じるよりも当事者らを朝鮮人んだからですということで韓半島分断以前朝鮮人分断とともに在日朝鮮人在日韓国人かれたわけなんですね

 

 

このような用語整理ったものなので絶対的ではありませんではこの原則適用しますが研究者やジャーナリストがすでに使用している用語もあるので各用語意味用法細心注意うことがいといます(jc, 2024/6/29)

,

712-15<무용신>이 방문할 효고(兵庫)현의 니시노미야(西宮)에 대해 예습중입니다만, ‘한신칸 모더니즘아마가사키의 댄스홀을 살피다가 옆길로 샜습니다. 1920년대 조선과 연해주와 일본의 복잡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신무용과 사교댄스가 등장했는지 추적했고, 그것을 배경으로 최승희 선생의 조선무용이 탄생한 과정을 간략하게나마 살폈습니다.

 

 

본론으로 돌아가 니시노미야가 어떤 곳이고, 언제부터 조선인들이 이주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날 일본에는 약 44만명의 재일동포가 살고 있습니다. 이중 약 26천명이 조선과 한국 국적을 거부하는 조선적입니다.

 

2000년대 중반까지 재일동포의 수는 약 60만명이었지만, 2010년대에는 50만명, 지금은 40만명대로 줄었습니다. 1995년부터 2021년까지 약 20만명의 재일동포가 귀화했기 때문입니다.

 

 

효고현에는 201961일 현재 약 4만명의 한국인/조선인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중 대부분은 고베(神戶, 16천명)에 살지만, 아마가사키(尼崎, 65백명)와 히메지(姫路, 43백명)와 니시노미야(31백명)에도 3천명 이상의 조선인/한국인이 거주하고, 이타미(伊丹, 17백명)와 다카라즈카(宝塚, 16백명)와 아카시(明石, 11백명)에도 1천명 이상이 살고 있습니다.

 

20236월 현재 니시노미야의 인구가 약 48만명인데, 그중 외국인 인구가 약 8천명(1.6%)입니다. 그중 한국인/조선인(3144, 40%)이 가장 많고, 중국인(17%), 베트남인(12%)이 뒤따릅니다. 2,3위의 외국인 인구를 합친 것보다 1위의 조선인/한국인이 더 많습니다.

 

 

일본 통계에 한국인/조선인이라는 범주가 사용되는 데에는 사정이 있습니다. 재일동포는 총련계와 민단계, 그리고 한국계 신세대 동포로 나뉘는데, 총련계 동포들은 자신을 재일조선인이라고 부르는 반면, 민단계나 신세대 동포들은 재일한국인을 자처합니다. 따라서 이들을 한꺼번에 통칭할 때는 한국인/조선인’, 또는 조선인/한국인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이지요.

 

 

세 그룹의 통칭으로 자이니치(在日)’라는 말도 있지만 정확한 말은 아닙니다. 일본에 사는 중국인이나 베트남인도 자이니치이기 때문이죠. 한국에서는 이 세 그룹을 모두 재일동포라고 말하지만, 한국 밖에서는 그 용어가 적합하지 않습니다. 일본의 학자들은 재일코리안이라는 말도 쓰는데, 세 그룹 이름의 영어 번역에 코리안(Korean)’이 공통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세 그룹을 굳이 한데 묶어서 통칭해야 하는 지에 의문을 가집니다. 이름을 정할 때는 당사자의 의사와 관행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습니다. 그에 따르자면 그냥 재일조선인재일한국인이라는 말을 따로 사용하면 됩니다.

 

 

연해주의 재러동포는 자신들을 고려인이라고 부릅니다.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했던 고려인과 그 후손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고려인입니다. 중국의 조선인들은 스스로 조선족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그 이름도 존중해야 합니다.

 

2024년 벽두 조선의 국가수반이 한국을 적대국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에, 재일조선인들이 이 선언을 받아들인다면, 앞으로 재일조선인과 재일한국인이 교류할 일은 없겠지요. 그런 행위는 반역죄나 간첩죄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재일한국인/조선인이라는 범주와 이름도 그 용례가 점점 드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한반도가 조선과 한국으로 분단되기 이전 시기의 일본 이주민을 가리킬 때는 재일조선인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때는 이데올로기 대립이 생기기 전이었고, 무엇보다도 당사자들이 모두 스스로를 조선인이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반도 분단 이전의 조선인이 분단과 함께 재일조선인과 재일한국인으로 나뉜 것이지요.

 

 

그러나 이같은 용어 정리는 제가 만든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제가 쓰는 글에서는 이 원칙을 적용하겠지만, 다른 연구자나 저널리스트들이 이미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도 있기 때문에, 각 용어의 의미와 용법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jc, 2024/6/29)

,

日本でダンスホールが流行している朝鮮では新舞踊胎動しました朝鮮新舞踊先駆者とされる裵龜子(1905-2003)趙澤源1907-1976)、崔承喜1912-19691920年代舞踊めたからです

 

 

191510天勝奇術団入団したバレーボール1924天勝奇術団のニューヨーク公演にアンナ·パブロワにしばらく師事1926には天勝奇術団脱退1928独自舞踊団設立1929朝鮮新舞踊公演開催しました

 

 

趙澤元徽文高普在学中だった1922朝鮮巡業海參崴天道敎靑年會演芸団朴世勉からロシアのコパッダンスをこれを1923土月公演披露しました1927石井漠舞踊団2度目京城公演観覧石井舞踊団入団舞踊授業めました

 

 

崔承喜19263淑明女学校卒業した長兄崔承一斡旋石井舞踊団京城公演観覧した新舞踊じることを決心すぐに石井舞踊団入団帰国する舞踊団について日本舞踊留学めました

 

 

朝鮮新舞踊胎動期である1920年代沿海州日本激動期でした沿海州はロシア革命191711以後1923まで内戦経験しており高麗人同胞はここに進駐した日本軍とロシア政府から二重弾圧けていました。 「海參崴天道教青年会芸能団朝鮮巡業ったのも沿海州同胞支援するためだったのです

 

 

たように沿海州同胞たちの朝鮮公演社交ダンスの擴散契機になったこともあります1922金東煥(キム·ドンファン)玄哲(ヒョンチョル)設立した舞蹈学館社交ダンスの普及先頭ったからです

 

一方日本第一次世界大戦勝利国として迅速産業化大正民主化文化芸術界変化きていました舞踊界でも伝統的歌舞伎とは洋風バレエや社交ダンスがれられていました

 

 

日本のバレエは191210帝国劇場赴任したイタリアジョヴァンニ·ロッシGiovanni Vittorio Rossi1867-?によって導入されましたが団員だった石井漠1887-1962格式られたバレエに反旗帝国劇場洋劇部脱退して新舞踊運動めました石井漠1916山田耕作1886~1965)、小山内薫1881~1928とともに断行した新劇場運動がそれでした

 

 

石井漠めた1916新舞踊運動とともに1917横浜鶴見花月園開業まった社交ダンスも急速大衆がりましたわずか10年後1927阪神間モダニズムの一部として尼崎にダンスホール全盛期まりました

 

 

芸術舞踊としての新舞踊娯楽舞踊としての社交ダンスが1920年代という時期まったのは偶然ではありません朝鮮日本では西洋舞踊れられ芸術娯楽区分があまりはっきりしていなかったからです

 

 

ロシア貴族出身革命けて日本帰化したエリアナ·パブロワ(Еле́на Па́влова, 1897-1941)芸術舞踊家でもありながら社交ダンス学院開業していたことからも芸術芸能境界曖昧だったことがかりますしかし1930社交ダンスがエログロナンセンス現象先頭走者となり当局まりをけていたところ1937日本中国侵略まり日本社会軍国主義逆戻りしダンスホールは閉鎖きます

 

 

このように朝鮮日本新舞踊社交ダンスは西洋舞踊れて期間芸術思潮文化現象形成した重要なジャンルとして位置づけられましたこのようなスピーディーでダイナミックな文化現象崔承喜朝鮮舞踊誕生したのです(jc, 2024/6/28)

,

일본에서 댄스홀이 유행하는 동안 조선에서는 신무용이 태동했습니다. 조선 신무용의 선구자로 꼽히는 배구자(裵龜子, 1905-2003), 조택원(1907-1976), 최승희(1912-1969)1920년대에 무용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191510세의 나이로 텐가츠 마술단에 입단한 배구자는 1924년 텐가츠 마술단의 뉴욕 공연 때에 안나 파블로바에 잠시 사사했고, 1926년에는 텐가츠를 탈퇴, 1928년 독자적인 무용단을 설립하고, 1929년 조선에서 첫 신무용 공연을 개최했습니다.

 

 

조택원은 휘문고보 재학 중이던 1922년 조선 순회공연을 단행했던 해삼위 연예단의 박세면으로부터 러시아식 코팍춤을 배웠고, 이를 1923년 토월회 공연에서 선보였습니다. 1927년 이시이 무용단의 두 번째 경성공연을 관람하고, 이시이 무용단에 입단, 무용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최승희는 19263월 숙명여학교를 졸업한 후, 큰 오빠 최승일의 주선으로 이시이 무용단의 경성 공연을 관람한 후 신무용에 투신하기로 결심했고, 바로 이시이 무용단에 입단, 귀국하는 무용단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무용 유학을 시작했습니다.

 

 

조선 신무용의 태동기인 1920년대는 연해주와 일본이 격동기였습니다. 연해주는 러시아 혁명(191711)이후 1923년까지 내전을 겪고 있었고, 고려인 동포들은 이곳에 진주한 일본군과 러시아 정부로부터 이중의 탄압을 받고 있었습니다. <해삼위 천도교청년회 연예단>이 조선 순회공연을 단행한 것도 연해주의 동포들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던 것이었습니다

 

 

앞 글에서 보았듯이 연해주 동포들의 조선 공연은 사교 댄스의 학산의 계기가 뙤긷도 했습니다. 1922년 김동환(金東煥)이 현철과 설립한 <무도학관(舞蹈學館)>이 사교댄스의 보급에 앞장섰기 때문입니다.

 

한편 일본은 일차대전 승전국으로서 빠른 산업화와 다애쇼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문화예술계에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무용계에서도 전통적인 가부키와 노와는 전혀 다른 서양식 발레와 사교댄스가 도입되고 있었습니다.

 

 

일본의 발레는 191210월 제국극장에 부임한 이탈리아인 죠반니 로시(Giovanni Vittorio Rossi, 1867-?)에 의해 도입됐지만, 단원이던 이시이 바쿠(石井漠, 1887-1962)가 격식에 얽매인 발레에 반기를 들고, 제국극장 양극부를 탈퇴해 신무용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시이 바쿠는 1916년 야마다 코사쿠(山田耕作18861965), 오사나이 카오루(小山内薫18811928)와 함께 단행한 <신극장> 운동이 그것이었습니다.

 

 

이시이 바쿠가 시작한 1916년의 신무용 운동과 함께 1917년 요코하마 쓰루미(鶴見)의 카게츠엔(花月園)의 개업으로 시작된 사교댄스도 빠르게 대중에게 퍼져나갔습니다. 불과 10년 만인 1927년 한신칸 모더니즘의 일부로 아마가사키에 댄스홀 전성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술 무용으로서의 신무용과 오락 무용으로서의 사교댄스가 1920년대라는 같은 시기에 시작되었던 것은 우연은 아닙니다. 조선과 일본에서는 서양 무용이 도입되면서 예술과 오락의 구분이 그다지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귀족 출신으로 혁명을 피해 일본으로 귀화한 엘리아나 파블로바는 예술무용가였으면서도 사교댄스학원을 개업했던 것으로 보아도 예술과 연예의 경계가 모호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1930년데에 사교댄스가 <에로그로넌센스> 현상의 선두주자가 되면서 당국의 단속을 받던 중, 1937년 일본의 중국침략이 시작되고 일본 사회가 군국주의로 곤두박질치면서, 댄스홀은 폐쇄의 길을 걷습니다.

 

 

이처럼 조선과 일본의 신무용과 사교댄스는 서양의 무용을 받아들여 짧은 기간에 예술사조와 문화현상을 형성한 중요한 장르로 자리잡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빠르고 역동적인 문화현상 속에서, 최승희의 조선무용이 탄생했던 것이지요. (jc, 2024/6/28)

,

2021920BTSはニューヨークの国連総会文在寅大統領とともに演説したあと国連本部背景ったミュージックビデオパーミッション·トゥ·ダンス(Permission to Dance)映像公開しました"りの許可"という意味です

 

 

80年以上前京城でもりの許可める嘆願書公開されました1937雑誌三千里1月号)掲載されたソウルのダンスホールをせよという文章ですタイトルは挑発的ですが朝鮮総督府三橋孝一郎警務局長への嘆願書形式です

 

 

嘆願者8<大日本レコード>文芸部長·ソグ喫茶店<ヴィーナス>のマダム·ボクへスク<朝鮮券番>妓生·ウンヒ<ハンソン券番>妓生チェ·オクジン<鍾路券番>妓生パク·グムドバー<メキシコ>女級キム·ウンヒ映画俳優·ドシル<東洋劇場>俳優チェ·ソンファなどでした

 

らはダンスホールが文明都市可能にする象徴的基準としダンスがどれほど健全るい娯楽なのかを説明しながら京城にもダンスホール営業許可してほしいと要請しました

 

 

この公開嘆願れられませんでした8年前19293京城のある日本人鍾路警察署ソシアル倶楽部という社交ダンスホールの開業申請しましたが許可されなかったことがありました日本にはダンスホールの熱気っていましたが朝鮮ではダンスホールの営業されなかったのですね

 

だからといって朝鮮社交ダンスがなかっ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食堂やリクエストカフェやバーなどで秘密のダンスホールがんだったからです1930年代じて秘密のダンスホールが警察摘発されたという記事がよく新聞ました

 

 

朝鮮社交ダンスが導入されたのは日本ではなくロシアをじてでした。 「海參崴天道教青年会芸能団1922414から810まで朝鮮27都市巡回公演いました団員一人だった金東煥巡回公演後京城ロシア公使館通訳官としてきながら京城社交ダンスを普及しました

 

 

19228金東煥玄哲とともに京城新門路朝鮮初のダンス専門学院舞蹈学館開設しましたが音楽科演劇科とともに舞蹈科設置されました。 「舞踏学館192362中央キリスト教青年会館(=YMCA)連合舞踏音楽会」、19249には通商舞踏大会開催社交ダンスの普及大衆から熱烈歓迎けました

 

 

舞踏学館1925新門路から中心街黄金町=乙支路移転舞踏科社交舞踏家庭舞踏叙情舞踏細分、「西洋各国高等社交界流行する社交紹介された社交ダンスが人気のあるプログラムでした

 

 

日本留学生帰国日本式のダンスホールの要素わり社交ダンスはさらにんになる一方エロティックな要素わりめました朝鮮総督府風俗するという理由でダンスホールの開業さなかったのもこうしたエログロナンセンス文化現象のためでした

 

 

朝鮮初のダンスホールは解放後1945910三越百貨店(=新世界百貨店)3設立された<国際文化社>でした経営主舞踊家裵龜子だったのでセンセーションになりました最初洪淳彥とともに<東洋劇場>経営していた裵龜子2番目金桂祚とともにダンスホールを開業したのです

 

 

しかし<国際文化社>米軍情報収集反日人物殺害するなど米軍追放親日政権樹立しようとする陰謀てる秘密本部として告発されいわゆる金桂祚事件まもなく廃業しました

 

 

韓国のダンスホールは1950年代になってようやく許可されましたキャバレーという名前のダンスホールが野火のようにがりました鄭飛石自由夫人いだという評価もありますその社交ダンスは内容えながら大衆されています

 

 

BTSるのに許可はいらないっていましたが韓国人権利るのにほぼ半世紀かかったのでしょう(jc, 2024/6/25)

,

2021920일 방탄소년단(BTS)은 뉴욕 유엔총회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연설한 뒤, 유엔본부를 배경으로 찍은 뮤직비디오 퍼미션 투 댄스(Permission to Dance)’ 영상을 공개했습니다. “춤의 허가라는 뜻이겠습니다.

 

 

80여년전 경성에서도 춤의 허가를 요청하는 탄원서가 공개됐었습니다. 1937년 잡지 <삼천리(1월호)>에 실린 서울에 딴스홀을 하라는 글입니다. 제목이 도발적이지만, 조선총독부의 미츠하시 고이치로(三橋孝一郎) 경무국장에게 보내는 탄원서 형식입니다.

 

 

탄원자들은 댄스홀이 문명도시를 가능하는 상징적인 기준이며 “(사교)댄스가 얼마나 건전하고 명랑한 오락인지를 설명하면서, 경성에도 댄스홀 영업을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탄원자는 8명으로 <대일본레코드사>의 문예부장 이서구, 끽다점 <비너스>의 마담 복혜숙, <조선권번>의 기생 오은희, <한성권번> 기생 최옥진, <종로권번> 기생 박금도, <멕시코>의 여급 김은희, 영화배우 오도실, <동양극장>의 배우 최선화 등이었습니다.

 

 

이 공개탄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8년 전인 19293월 경성의 한 일본인이 종로경찰서에 <소시얼 구락부>라는 사교댄스 개업 신청을 냈으나 허가되지 않았던 바 있었습니다. 일본에는 댄스홀 열품이 불었지만, 조선에서는 댄스홀 영업이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조선에 사교댄스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식당이나 요청, 카페나 바 등에서 비밀 댄스홀이 성행했기 때문입니다. 1930년대를 통하여 비밀 댄스홀이 경찰에 적발되었다는 기사가 자주 신문에 났습니다.

 

 

조선에 사교댄스가 도입된 것은 일본이 아니라 러시아를 통해서였습니다. <해삼위 천도교청년회연예단>1922414일부터 810일까지 조선을 방문, 27개 도시에서 약 넉 달 동안 순회공연을 가졌습니다. 단원의 한 명이었던 김동환(金東煥)은 순회공연 후에도 경성에 남아 러시아 공사관의 통역관으로 일하면서 경성에 사교댄스를 보급했습니다.

 

 

19228월 김동환은 현철과 함께 경성 신문로에 조선 최초의 댄스 전문학원 <무도학관(舞蹈學館)>을 개설했는데, 음악과, 연극과와 함께 무도과가 설치됐습니다. <무도학관>192362일 중앙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연합무도음악회,” 19249월에는 통상무도대회(通商舞蹈大會)를 개최하면서 사교댄스의 보급에 나섰고, 대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무도학관>1925년 신문로에서 중심가인 황금정(=을지로)로 이전하면서 무도과를 사교무도, 가정무도, 서정무도로 세분했고, “서양 각국의 고등사교계에서 유행하는 사교라고 소개된 사교댄스가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이후 일본 유학생들이 귀국하면서 일본식 댄스홀의 요소가 가미되면서 사교댄스는 더욱 번창하는 한편, 에로틱한 요소가 가미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풍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댄스홀의 개업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도 이같은 에로그로넌센스의 문화현상 때문이었습니다.

 

 

조선 최초의 댄스홀은 1945910일 미츠코시백화점(=신세계백화점) 3층에 설립된 <국제문화사>이었습니다. 경영주가 무용가 배구자였기에 센세이션이 됐습니다. 첫 남편 홍순언과 함께 <동양극장>을 경영했던 배구자가, 두 번째 남편 김계조와 함께 댄스홀을 개업한 것입니다.

 

 

그러나 <국제문화사>미군 정보를 수집하고 반일 인사를 살해하는 등, 미군을 축출하고 친일 정권을 수립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비밀본부로 고발되었고, 이른바 김계조 사건으로 비화되면서, 이내 폐업됐습니다.

 

 

한국의 댄스홀은 1950년대에야 허가됐습니다. 캬바레라는 이름의 댄스홀이 들불처럼 번졌습니다. 정비석의 <자유부인>이 기름을 부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이후 사교댄스는 형태와 내용를 바꿔가면서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BTS춤추는 데에 허가는 필요 없다고 노래했지만, 한국인은 춤출 권리를 얻는 데에 거의 반세기가 걸렸던 것이지요. (jc, 2024/6/25)

,

日本最初のダンスホールは1917横浜鶴見花月園でしたもともとはレストランだったのですがダンスホールが併設されすぐにダンスホール専業わりましたその社交ダンスは野火のようにがり1923年頃東京都56のダンスホールがあったそうです

 

 

以前にも社交ダンスはありました1891から天長節=天皇誕生日帝国ホテルで舞踏会かれましたがこの行事には日本皇族貴族参加外交使節招待されました

 

1922からは帝国ホテルのライト舞踏会かれそのにも外交使節招待され社交ダンスがわれましたこのような舞踏会上流社会社交場音楽もミニュエットやワルツなどの西洋クラシックのでした

 

 

社交ダンスを大衆娯楽として普及させたのがダンスホールです花月園一般人男女同伴入場欧米社交ダンスをしんだ場所ですすぐに関西にもダンスホールができました

 

1920大阪難波コテージ開業しましたるカフェでしたがダンスホールをねていましたが1923関東大震災以降専門のダンスホールになりましたコテージダンスホールが成功すると1924道頓堀千日前パウリスタ」、「ユニオン」、「赤玉などのダンスホールが開業しました。 「コテージ以来3年間大阪には20所以上のダンスホールができました

 

 

ダンスホールの音楽はジャズが主流でした大阪のダンスホールではレコードで音楽しましたがもなく東京からってきたジャズバンドが大阪のダンスホールの音楽担当しましたダンスホールの中心地関東から関西ってきたのです

 

たような方法神戸にもダンスホールができました元町ソーシャルダンスホール」、浪速町ダイヤ倶楽部」、三宮町キャピタル武道場北長狭通花隈ダンスホールなどがそれです

 

 

1926 年末、大阪のダンス ホールが大々的な規制を受けました。 天王が死亡し、葬儀が行われているのにダンスホールが盛業中だったことが当局の目に障ったからです。 風俗を害するという新聞記事が次々と出て、警察の取り締まりが続き、大阪のダンスホールが静まり、その代わり阪神国道沿いに兵庫県の尼崎にダンスホールが移っていきました。

1927年の「尼崎ダンスホール」を皮切りに、1930年まで「杭瀬ダンスホール」、「キングダンスホール」、「阪神会館ダンスパレス」が次々と開業し、尼崎が日本の社交ダンスの中心地となりました。

 

 

関西のダンスホールはユニークな營業方式開発しました横浜花月園では入場者がパートナーを同行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が、「コテージなどの大阪ダンスホールはあらかじめ女性ダンサーをっており男性がパートナーを同行する必要がないようにしました

 

男性入場時にチケットをいます12010ずつまとめた回数券2でした昼間半額でした音楽まると男性たちはダンスホールのってっているダンサーたちのところにチケットをしますダンサーはチケットをした男性1のダンスをりますダンサーがチケットをることができず複数男性がチケットを場合女性ダンサーがパートナーをぶことができます

 

 

ダンサーの平均年齢22-3高級なイブニングドレスをたモダンガールですダンスが上手美人ダンサーにチケットがまりますらは待機席からいます最高人気ダンサーは中央りますが人気ランキングは前月のチケット販売量まります

 

チケット販売収入60%がダンスホール40%がダンサーのですダンサーの収入月平均7-80人気ダンサーは200いだそうですちなみに1930大卒就業者初任給70でした年齢男性トップの職業所有者より3倍収入げていたわけですね

 

 

ダンサーたちはアイドルのような存在でしたがくの収入にもかかわらずかにらすことはできなかったそうです人気順位げるためにダンサー同士無限競争を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し美容衣装などにくのお使わ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からです借金しむダンサーが男性パトロンに従属するダンサーもかったということです

 

 

2万円保険っていた畝雅子はごく例外的なダンサーだったはずですあるいは保険加入がダンサーの有名になろうとするイベントだったのかもしれませんね(jc, 2024/6/26)

,

일본의 첫 댄스홀은 1917년 요코하마 쓰루미(鶴見)의 카게츠엔(花月園)이었습니다. 원래는 레스토랑이었는데, 댄스홀이 병설되었다가, 이내 댄스홀 전업으로 바뀌었습니다. 이후 사교댄스는 들불같이 번져서 1923년경 도쿄도에만 56개소의 댄스홀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전에도 사교댄스는 있었습니다. 1891년부터 매년 천장절(=텐노 탄신일)에 맞춰 제국호텔에서 무도회가 열렸는데, 이 행사에는 일본 황족과 귀족이 참석했고, 외교사절이 초청됐습니다.

 

1922년부터는 제국호텔의 <라이트관>에서 무도회가 열렸고, 이때에도 외교 사절이 초청되어 사교댄스가 이뤄졌습니다. 이같은 무도회는 상류사회의 사교장이었고, 음악도 미뉴엣이나 왈츠 등의 서양 클래식 춤곡이었습니다.

 

 

사교댄스를 대중오락으로 보급한 것이 댄스홀입니다. 카게츠엔은 일반인들이 남녀 동반으로 입장해 구미의 사교댄스를 즐겼던 곳입니다. 이내 간사이(關西)에도 댄스홀이 생겼습니다.

 

1920년 오사카의 남바(難波)에 카페 <코티지(コテージ)>가 개업했습니다. 술과 음료를 파는 카페였으나, 댄스홀을 겸했는데,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전문 댄스홀이 되었습니다. 코티지 댄스홀이 성공하자 1924년 도톤보리(道頓堀)와 센니치마에(千日前)<파울리스타(パウリスタ)>, <유니온(ユニオン)>, <아카타마(赤玉)>등의 댄스홀이 개업했습니다. <코티지> 이후 3년 동안 오사카에는 20개소 이상의 댄스홀이 생겼습니다.

 

 

댄스홀의 음악은 재즈가 대종이었습니다. 오사카의 댄스홀에서는 레코드로 음악을 틀었지만, 오래지 않아 도쿄에서 옮겨온 재즈 밴드들이 오사카 댄스홀의 음악을 담당했습니다. 댄스홀의 중심지가 간토에서 간사이로 옮겨온 것이지요.

 

비슷한 방식으로 고베에도 댄스홀이 생겼습니다. 모토마치(元町)<소셜(ソシヤル) 댄스홀>, 나니와마치(浪花町)<다이야(ダイヤ) 구락부>, 산노미야쵸(三宮町)<캐피탈(キャピトル) 무도장>과 키타나가사도리(北長狭通)<하나쿠마(花隈) 댄스홀> 등이 그것입니다.

 

 

1926년 말 오사카의 댄스홀들이 대대적인 규제를 받았습니다. 텐노가 사망해 장례가 진행 중인데도 댄스홀이 성업 중이었던 것이 당국의 눈에 거슬렸기 때문입니다. 풍속을 해친다는 신문기사가 계속 나고, 경찰의 단속이 이어지면서, 오사카의 댄스홀들이 잦아들고, 그대신 한신국도 연변을 따라 효고현의 아마가사키에 댄스홀들이 옮겨갔습니다.

1927 <아마가사키 댄스홀(尼崎ダンスホール)>을 시작으로 1930년까지 <쿠이세(杭瀬)댄스홀>, <(キング)댄스홀>, <한신회관 댄스팰리스(阪神會館ダンスパレス)>가 차례로 개업해, 아마가사키가 일본 사교댄스의 중심지가 됐습니다.

 

 

간사이 댄스홀들은 독특한 영업방식을 개발했습니다. 요코하마의 <카게츠엔>에서는 입장객이 파트너를 대동해야 했지만, <코티지> 등의 오사카 댄스홀은 미리 여성 댄서를 고용해 두어서, 남성들이 파트너를 대동할 필요가 없게 했습니다.

 

남성들은 입장할 때 티켓을 삽니다. 한 장에 20전이고, 10장씩 묶은 회수권은 2엔이었습니다. 낮에는 반값이었습니다. 음악이 시작되면 남성들은 댄스홀 앞쪽에 앉아 기다리는 댄서들에게 가서, 티켓을 건넵니다. 댄서는 티켓을 건넨 남성과 1곡의 춤을 춥니다. 댄서가 티켓을 거절할 수 없고, 여러 남성이 티켓을 건넬 경우에는 여성 댄서가 파트너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댄서들의 평균 연령은 22-3. 고급 이브닝드레스를 차려입은 모던 걸입니다. 춤을 잘 추고, 키가 큰, 미인 댄서에게 티켓이 몰립니다. 유명 댄스홀의 간판 댄서는 댄스 테크닉, 외모, 서비스가 일류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대기석에 앉는 자리부터 다릅니다. 최고인기 댄서는 중앙에 앉는데, 인기 순위는 전월의 티켓 판매량으로 정해집니다.

 

 

티켓 판매 수입은 60%가 댄스홀, 40%가 댄서 몫입니다. 댄서들의 수입은 월평균 7-80, 인기 댄서는 200엔을 벌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1930년 대졸 취업자 초임이 약 70엔이었습니다. 같은 나이의 남성 최고 직업 소유자들보다 3배 수입을 올렸던 것이지요.

 

 

댄서들은 요즘의 아이돌 같은 존재였지만, 많은 수입에도 불구하고 넉넉히 살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인기순위를 올리기 위해 댄서들끼리 무한 경쟁을 해야 했고, 미용과 의상 등에 많은 돈을 써야했기 때문입니다. 빚에 허덕이는 댄서들이 많았고, 남성 패트론(=기둥서방)에게 종속된 댄서도 많았다고 합니다.

 

 

2만엔짜리 다리 보험에 들었던 우네 마사코 같은 무용수는 극히 예외적인 존재였을 것입니다. 혹은 그런 보험 가입이 무용수의 유명세를 올리려는 이벤트였는지도 모르죠. (jc, 2024/6/26)

,

1990年代初めから日本学界阪神間モダニズム地道研究してきましたが時期的には明治維新1868から敗戦1945まで地理的には神戸東灘から芦屋西宮宝塚集中する傾向がありましたつまり武庫川西側地域研究られていたのです

 

 

しかしたようにこの時期武庫川尼崎でもしいダンス文化きました高級住宅街だった西宮とは尼崎大阪郊外工業都市でしたが1926阪神国道開通1927大阪風俗れを理由にダンスホールを事実上禁止すると鉄道道路交通便利になった尼崎がダンスホールのメッカとして浮上したのです

 

 

1927-1930尼崎から杭瀬まで4つのダンスホールが開業盛業、『ダンス時代ダンスファン社交雑誌2発行されるにりましたまた毎年11には尼崎4つのダンスホールが合同尼崎ダンスフェスティバル開催しています関東大震災直後東京った良質のバンドが関西まり尼崎のダンスホールブームは量的質的にもくなりました

 

 

尼崎のダンスホールにはモダンボーイとモダンガールがまって盛市作家谷崎潤一郎画家藤田嗣治などの著名人もダンスホールの常連客になったりしました一言えば尼崎社交ダンスのメッカとして浮上したのでしょう

 

 

尼崎社交ダンスの熱意がどれほどかったかを写真一枚ありますこの写真朝鮮舞踊家崔承喜調査研究過程ゲッティイメージズ(gettyimages)アーカイブの1920年代日本写真という範疇調査していてめて発見されましたゲッティアーカイブの写真説明には写真女性映画俳優マサコ·ウネ(Masako Une)であることがらかになっているだけで情報はまったくありませんでした

 

 

唯一追加情報この写真がドイツの新聞しか使用できないという使用権制限でした100年以上時間ったので著作権消滅したでしょうがおそらくゲッティイメージズがこれをらせたようですねこの写真高画質プリントを購入するには500ドルをわなければならないんですよ

 

 

この写真をはじめてみたときは"よくれた写真だな"いました人物いも写真構図印画やかでした写真背景もかなり高級なインテリアがされた建物内部でしたしかし崔承喜関連して調査けるがかりはありませんでした

 

 

ところが20175この写真をドイツ·ケルンの舞踊博物館(Tanzmuseum des Deutschen Tanzarchiv Köln)びおいしました19301213日付日刊紙ケルナーシュタットアンザイガー(Kölner Stadt-Anzeiger)掲載された写真原本保管されていました

 

 

写真裏側には英語とドイツ写真説明がタイピングされていました人物名前マサコウネゲッティイメージズじでしたが職業映画俳優ではなく尼崎ダンスホールのダンサーとなっていました写真出所AP通信社でした

 

 

ダンスホールの舞踊手AP通信社注目びて撮影されドイツの新聞掲載された理由のウネ·マサコが自分2万円=2ポンド保険加入したからでした写真説明には欧米芸能人保険にかけることはよくあったが日本人女性保険にかけたのはめてされていました

 

 

19302万円現在77ドル2015賃金ベース)、11ウォンに相当します畝雅子怪我してダンサーとしてけなくなると保険金として11ウォンをるという意味です当時尼崎のダンサーの人気金銭的価値がどれだけかったかがわかります

 

 

ウネ·マサコの写真一枚社交ダンスの姿尼崎席巻した阪神間モダニズムの狂風がどれほど強烈だったかを象徴的しているのです(jc, 2024/6/23)

,

1990년대 초부터 일본학계는 <한신칸 모더니즘>을 꾸준히 연구해 왔으나, 시기적으로는 메이지유신(1868)부터 패전(1945)까지, 지리적으로는 고베의 히가시나다에서 아시야와 니시노미야, 다카라즈카까지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즉 무코카와 서쪽지역으로 연구가 국한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앞글에서 보았듯이 이 시기에 무코카와 동쪽의 아마가사키에서도 새로운 춤 문화가 일어났습니다. 고급주택가였던 니시노미야와는 달리 아마가사키는 오사카 외곽의 공업도시였지만, 1926년 한신 국도가 개통되고 1927년 오사카가 풍속 문란을 이유로 댄스홀을 사실상 금지하자, 철도와 도로로 교통이 편리해진 아마가사키가 댄스홀의 메카로 떠올랐던 것입니다.

 

 

1927-1930년 사이에 아마가사키에서 나루세까지 4개의 댄스홀이 개업해 성업했, <댄스 시대><댄스 팬>의 사교잡지 2개가 발행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 매년 11월에는 아마가사키의 4개 댄스홀이 합동으로 <아마가사키 댄스 축제>를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간토 대지진 직후에 도쿄에서 일자리를 잃은 양질의 밴드가 간사이로 모여들면서 아마가사키의 댄스홀 붐은 양적으로 많아지고 질적으로도 높아졌습니다.

 

 

아마가사키의 댄스홀에는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이 모여들어 성시를 이루었고, 작가 다나자키 준이치로, 화가 후지타 츠구하루 등의 저명인사들도 댄스홀의 단골손님이 되곤 했습니다. 한마디로 아마가사키는 사교댄스의 메카로 떠올랐던 것이지요.

 

 

아마가사키의 사교댄스 열품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주는 사진 한 장이 있습니다. 이 사진은 최승희 조사연구 과정에서 <게티이미지스> 아카이브의 1920년대 일본의 사진이라는 범주를 조사하다가 처음 발견됐습니다. 게티 아카이브의 사진 설명에는 사진 속 여성이 영화배우 마사코 우네(Masako Une)라고 밝혀져 있을 뿐 다른 정보가 전혀 없었습니다.

 

 

유일한 추가 정보는 이 사진이 독일의 신문만 사용할 수 있다는 사용권 제한이었습니다. 100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으니 저작권은 소멸되었겠지만 아마도 <게티이미지스>가 이를 되살려 놓은 것 같네요. 이 사진의 고화질 프린트를 구입하려면 약 5백달러를 내야 한다니까요.

 

 

이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는 잘 찍은 사진이네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인물 단장도 좋았고, 사진의 구도도 좋고, 인화도 선명했습니다. 사진의 배경도 상당히 고급스런 인테리어로 꾸며진 건물 내부였습니다. 하지만 최승희와 관련해서 조사를 계속할 단서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20175월 이 사진을 독일 쾰른의 무용박물관(Tanzmuseum des Deutschen Tanzarchiv Köln)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19301213일자 일간지 쾰르너 슈타트 안자이거(Kölner Stadt-Anzeiger)에 실린 사진의 원본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사진의 뒷면에는 영어와 독일어로 사진설명이 타이핑 되어 있었습니다. 인물의 이름은 우네 마사코(Une Masako)<게티 이미지스>와 같았지만, 그의 직업은 영화배우가 아니라 아마가사키 댄스홀(Amagasaki Danse Hall)의 무용수(danseuse)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사진의 출처는 AP통신사였습니다.

 

 

댄스홀의 무용수가 AP통신사의 주목을 받아 촬영되고, 독일 신문에 게재된 까닭은 무용수 우네 마사코가 자신의 다리를 2만엔(=2천 파운드)의 보험에 가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진 설명에는 미국과 유럽의 연예인이 다리를 보험드는 일은 자주 있었으나, 일본 여성이 다리 보험을 든 것은 처음이라고 서술되어 있었습니다.

 

 

1930년의 2만엔이면 오늘날의 77만달러(2015년 임금 기준), 한화 약 11억원에 해당합니다. 우네 마사코가 다리를 다쳐서 무용수로 일할 수 없게 되면 보험금으로 11억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당시 아마가사키의 무용수의 인기와 금전적 가치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네 마사코의 사진 한 장이, 사교댄스의 모습으로 아마가사키를 휩쓸었던 한신칸 모더니즘의 광풍이 얼마나 강렬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jc, 2024/6/23)

,

阪神間モダニズムは日本ではかなり先導的幅広現象でした建築音楽美術遊興やスポーツなどの全般的文化活動活性化したからです

 

 

阪神間モダニズムは関西からまりましたが関東にも影響20世紀日本高級芸術だけでなく通俗文化まで変化させたと評価されています

 

 

阪神間モダニズムが成立発展することができたのはこの地域移住してきた人口のおかげですこの地域かつて明治時代から京阪神京都大阪神戸一度言葉裕福商人住吉村今日神戸市東灘区豪邸てたのがまりでした

 

 

いて神戸開港とともに商人宣教師をはじめとする西洋人大勢流入六甲山地域高級住宅大正期には大学卒業したホワイトカラーの知識人つまり不動産所有していない中産階級西宮七園地域せてきたのですこのように裕福知的環境造成されると芸術家文化人がこの地域移住してってきたのです

 

 

裕福知的文化芸術的雰囲気造成された阪神間地域には文化教育社交空間提供するホテルと娯楽施設てられました建築音楽美術などの典型的文化芸術活動活発になる一方しいダンス文化もこの地域んになりめました

 

 

阪神間のモダニズムの文化指摘したのはそれが崔承喜先生朝鮮舞踊発展にも寄与したとじられているからです崔承喜先生東京舞踊活動めましたがそれが満開になったのは関西地域でした

 

 

日本新舞踊関西花開いたのは崔承喜師匠石井漠からまります石井漠1915帝国劇場退団19166東京新劇場第1回公演として日本新舞踊活動めましたが興行失敗観客評論家にそっぽをかれました

 

 

がっかりした石井爆191610宝塚移住生計てるために少女歌劇団舞踊教師としてめました新舞踊未練てきれなかった石井漠1917224大阪近松座近代声楽舞踊大会興行成功しただけでなく評論家からも好評しました東京づかなかった新舞踊大阪調べたのです

 

 

崔承喜先生1935石井舞踊団から独立した大阪神戸京都京阪神地域でよく公演宝塚でも何度公演しました崔承喜先生朝鮮舞踊阪神間モダニズムの中心地緊密関連していたということです

 

 

この地域文化芸術家たちと観客石井漠新舞踊崔承喜朝鮮舞踊好評した理由だったのでしょうか阪神間モダニズムの開放性のためですこれらはしい芸術開放的であり日本伝統外国新文物交流することに閉鎖的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

 

 

阪神間モダニズムの開放性しいものにする寛容さは石井漠崔承喜芸術舞踊だけでなく<ダンスホール>代表される社交ダンスにも適用されました

 

 

192612大阪神戸阪神国道開通その沿線大型ダンスホールができました1927<尼崎ダンスホール>皮切りに1930まで<杭瀬ダンスホール><キングダンスホール><阪神会館ダンスパレス>々と開業日本ダンス文化中心地となりました

 

 

ダンスホールのダンスは西洋式社交ダンスでにエロティックな要素くなったことで1937軍国主義政府によって閉鎖されましたがなくとも阪神間地域しい芸術舞踊西洋式社交ダンスをどれほど熱烈れたかがかります

 

 

このような開放的情熱的雰囲気石井漠新舞踊崔承喜民族舞踊包容することができたのです(jc, 2024/6/22)

,

한신칸 모더니즘(阪神間モダニズム)은 일본에서 상당히 선도적이고 폭넓은 현상이었습니다. 건축과 음악과 미술, 유흥과 스포츠 등의 전반적인 문화 활동이 활성화되었기 때문입니다.

 

 

한신칸 모더니즘은 간사이에서 시작되었지만 간토 지방에도 영향을 주게 되고, 20세기 일본의 고급예술뿐 아니라 통속문화까지 변화시킨 것으로 평가됩니다.

 

 

한신칸 모더니즘이 성립,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지역으로 이주해 들어온 인구 덕분입니다. 이 지역은 일찍이 메이지 시대부터 게이한신(京阪神, 교토와 오사카와 고베를 한꺼번에 이르는 말)의 부유한 상인들이 스미요시무라(住吉村, 오늘날의 고베시 히가시나다구)에 호화 저택을 지은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이어서 고베 개항과 함께 상인과 선교사를 비롯한 서양인들이 대거 유입되어 롯코산 지역에 고급 주택을 지었고, 이어지는 다이쇼 시기에는 대학을 졸업한 화이트칼라 지식인, 즉 부동산을 소유하지 않은 중산층이 니시노미야 나나엔 지역으로 밀려들어온 것이지요. 이처럼 부유하고 지적인 환경이 조성되자 예술가와 문화인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해 들어온 것이지요.

 

 

부유하고 지적이며 문화예술적인 분위기가 조성된 가운데, 한신칸 지역은 그 때문에 문화, 교육, 사교 공간을 제공하는 호텔과 오락시설도 들어섰습니다. 건축과 음악과 미술 등의 전형적인 문화예술 활동이 활발해 지는 한편, 새로운 춤 문화도 이 지역에 성행하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한신칸 모더니즘의 춤문화를 지적한 것은 그것이 최승희 선생의 조선무용 발전에도 기여했다고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최승희 선생은 도쿄 지역에서 무용 활동을 시작했지만, 그것이 활짝 꽃핀 것은 간사이 지역이었습니다.

 

 

일본의 신무용이 간사이에서 꽃핀 것은 최승희의 스승, 이시이 바쿠로부터 시작됩니다. 이시이 바쿠는 1915년 제국극장에서 탈퇴, 19166월 도쿄에서 <신극장 제1회공연>으로 일본 신무용 활동을 시작했지만, 흥행에 실패하고 관객과 평론가들에게 외면당했습니다.

 

 

실망한 이시이 바쿠는 191610, 다카라즈카로 이주, 생계를 벌기 위해 소녀가극단에서 무용교사로 근무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무용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이시이 바쿠는 1917224일 오사카 긴마츠자(近松座)에서 <근대성악무용대회>를 열었고, 흥행에 성공했을 뿐 아니라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았습니다. 도쿄가 알아보지 못한 신무용을 오사카가 알아본 것이지요.

 

 

최승희 선생도 1935년 이시이 무용단에서 독립한 후, 오사카와 고베, 교토의 케이한신(京阪神)지역에서 자주 공연했고, 다카라즈카에서도 여러 번 공연했습니다. 최승희 선생의 조선무용이 한신칸 모더니즘의 중심지들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지역의 문화예술인들과 관객이 이시이 바쿠의 신무용과 최승희의 조선무용을 호평했던 까닭이 무엇이었을까요? 한신칸 모더니즘의 개방성 때문입니다. 이들은 새로운 예술에 개방적이었고, 일본 전통과 외국 문물이 교류하는 것에 폐쇄적이지 않았습니다.

 

 

한신칸 모더니즘의 개방성과 새로운 것에 대한 관용은 이시이 바쿠와 최승희의 예술무용뿐 아니라 <댄스홀>로 대표되는 사교춤에도 적용됐습니다.

 

 

192612, 오사카와 고베를 잇는 한신 국도(현재의 국도2)가 개통되면서 그 연선에 대형 댄스홀이 생겼습니다. 1927<아마가사키 댄스홀(尼崎ダンスホール)>을 시작으로 1930년까지 <쿠이세(杭瀬)댄스홀>, <(キング)댄스홀>, <한신회관 댄스팰리스(阪神會館ダンスパレス)>가 차례로 개업해, 일본 댄스 문화의 중심지가 됐습니다.

 

 

댄스홀의 춤은 서양식 사교춤이었고, 후에 에로틱한 요소가 강해지면서 1937년 군국주의 정부에 의해 폐쇄되었지만, 적어도 한신칸 지역이 새로운 예술무용과 서양식 사교춤을 얼마나 열렬히 받아들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개방적이고 열정적인 분위기가 이시이 바쿠의 신무용과 최승희의 민족무용을 포용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jc, 2024/6/22)

,

西宮紹介しながら甲子園をまずてきたのは日本ではもちろん韓国にもられている野球場がここにあるからです阪神甲子園野球場ですよね最近して甲子園っても全部聞さらに日本高校野球大会のことをそのまま甲子園ともいます

 

 

甲子園という名前この野球場竣工した1924十干十二支甲子年だったからですところでなぜ甲子ろにがついたのか疑問いました甲子村甲子町ではなく甲子園になった理由になりましたそれでしてみました

 

 

1920年代から西宮しく造成された高級住宅団地のためですよく西宮七園ばれますが甲子園香櫨園苦楽園甲陽園甲東園甲風園昭和園がありますこれらの7つの高級住宅地でも西宮七園つまり西宮7つの庭園地域んでいます

 

地名庭園という意味けたのはよく整備された庭園のようにしく快適住宅団地という意味けた言葉です韓国にアパートをてながらマンションとかキャッスルとかザイみたいな言葉をつける現象100年以上前日本ではだったんですよね

 

またには小山という意味もありますがこれらの住宅団地甲山という造成されたからです甲陽園甲東園甲風園という名前ったのも甲山にあるからです

 

神戸市六甲山南斜面建設されたように西宮甲山南斜面建設された都市です六甲山甲山両方ったものはくそびえる山勢日本風ていることからけられた名前だそうです

 

 

六甲山頂上標高約930メートル兜山さは解放約310メートルです六甲山さが甲山よりちょうど3倍高いのは偶然でしょうかそして神戸六甲山西宮兜山6わせたきさという意味でついた名前かもしれません

 

 

甲山六甲山南斜面高級住宅団地造成されたのはそのれた景観のためです日本開港1854いて明治維新1868まり神戸港開港1868されこの地域国際化めました20 世紀初頭には神戸港東洋最大として発展しました

 

 

一方大阪明治維新後急速工業化されました東洋のマンチェスターという異名がつくほど初期都市化工業化急速1925から1932までは大阪人口関東大震災都市成長まってしまった東京人口上回世界第5大都市浮上しました

 

 

神戸大阪都市化工業化国際化とともに阪神電鉄1905年開業阪急電鉄1910年開業大阪神戸電気鉄道架設したためこの地域交通便利でした

 

 

大阪神戸地域、(1急速工業化とともに人口過密化住居環境劣悪になった大阪神戸背後地であり、(2交通便利3景観れている地域であったため阪急電鉄阪神電鉄はこの阪神間高級住宅街造成大都市富裕層人口誘引しましたそれが西宮七園甲子園がそのつだったのですね

 

 

交通便利阪神間地域高級住宅街造成されるとここに音楽美術遊興芸能ゴルフと競馬などをしい文化現象めました温泉地域にはホテルや遊園地ができ公演展示れるために劇場美術館建設されました競馬場野球場もでき宝塚少女歌劇団1914ができたのもこのでした

 

 

このように阪神間地域造成された住宅街高級建築そしてそれに日本式伝統西洋式近代ざりって盛行したこの地域独特文化現象阪神間モダニズムびます(jc, 2024/6/22)

,

니시노미야를 소개하면서 고시엔을 먼저 살펴본 것은 일본에서는 물론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야구장이 이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한신 고시엔 야구장이죠. 요즘은 줄여서 고시엔이라고 말해도 다 알아 듣고, 더 나아가 일본의 고교야구대회를 그냥 고시엔이라고도 합니다.

 

 

고시엔(甲子園)이라는 이름은 이 야구장이 준공된 1924년이 십간십이지로 갑자(甲子)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갑자(甲子) 뒤에 정원 원()자가 붙었는지 궁금했습니다. 고시무라()이나 고시마치()가 아니라 고시엔()이 된 까닭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찾아봤죠.

 

 

1920년대부터 니시노미야에 새로 조성된 고급 주택단지 때문입니다. 흔히 니시노미야 나나엔(西宮7)이라고 부르는데, 고시엔 말고도 고로엔(香櫨園), 구라쿠엔(苦楽園), 고요엔(甲陽園), 고토엔(甲東園), 고후엔(甲風園), 쇼와엔(昭和園)이 더 있습니다. 7개의 고급 주택지역을 지금도 니시노미야 나나엔(西宮七園), 즉 니시노미야의 7개 정원지역이라고 부릅니다.

 

지명에 정원이라는 뜻의 원()자를 붙인 것은 잘 꾸며진 정원처럼 아름답고 쾌적한 주택단지라는 뜻으로 붙인 말인 것이지요. 한국에 아파트를 지으면서 맨션이니 캐슬이니 자이같은 말을 붙이는 현상이 1백여년전 일본에서는 원()이었던 것이지요.

 

 

또 원()에는 동산이라는 뜻도 있는데, 이는 이 주택단지들이 가부토야마(甲山)이라는 산 밑에 조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고요엔, 고토엔, 고후엔이라는 이름에 갑()자가 들어간 것도 바로 가부토야마(甲山) 기슭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베시가 롯코산(六甲山) 남쪽 사면에 건설된 것처럼 니시노미야는 가부토야마(甲山) 남사면에 건설된 도시입니다. 롯코산과 가부토야마에 모두 갑()자가 들어간 것은 높이 솟은 산세가 일본식 갑옷의 투구(かぶと)와 비슷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롯코산 정상은 해발 약 930미터, 가부토야마의 높이는 해방 약 310미터입니다. 롯코산 높이가 가부토야마보다 정확히 3배가 높은 것은 우연일까요? 그리고 고베의 롯코(六甲)산은 니시노미야의 가부토야마(甲山)6개 합친 크기라는 뜻으로 붙은 이름일 지도 모릅니다.

 

 

가부토야마와 롯코산 남사면에 고급 주택 단지가 조성된 것은 그 빼어난 경관 때문입니다. 일본의 개항(1854)에 이어 메이지유신(1868)이 시작되면서 고베항이 개항(1868)되면서 이 지역이 국제화되기 시작했습니다. 20세기 초에는 고베항이 동양 최대의 항구로 발전했습니다.

 

 

한편, 오사카는 메이지유신 이후 급속히 공업화되었습니다. 동양의 맨체스터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초기 도시화와 공업화가 급속해서, 1925년부터 1932년까지는 오사카의 인구는 간토대지진으로 도시 성장이 멈춰버린 도쿄 인구를 상회하면서 세계 제5위의 대도시로 떠올랐습니다.

 

 

고베와 오사카의 도시화, 공업화, 국제화와 함께 한신전철(1905)과 한큐전철(1910)이 오사카와 고베를 연결하는 전기철도를 가설했기 때문에 이 지역은 교통도 편리했습니다.

 

 

오사카와 고베 사이(阪神間) 지역은 (1) 급속한 공업화와 함께 인구가 과밀해지고 주거환경이 열악해진 오사카와 고베의 배후지이자 (2) 교통이 편리하고 (3) 경관이 빼어난 지역이었기 때문에, 한큐전철과 한신전철은 이 한신칸(阪神間)에 고급 주택가를 조성, 대도시의 부유층 인구를 유인해 냈습니다. 그것이 니시노미야 나나엔이었고, 고시엔이 그 중의 하나였던 것이지요.

 

 

교통이 편리한 한신칸 지역에 고급 주택가가 조성되자, 이곳에 음악과 미술, 유흥과 연예, 골프와 경마 등을 포함한 새로운 문화현상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온천 지역에는 호텔과 놀이 공원이 생겼고, 공연과 전시를 수용하기 위해 극장과 미술관이 건립됐습니다. 경마장과 야구장도 생겼고, 다카라즈카 소녀가극단(1914)이 생긴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이렇게 한신칸 지역에 조성된 주택가의 고급 건축, 그리고 이에 뒤따른 일본식 전통과 서양식 근대가 혼합되어 성행한 이 지역의 독특한 문화 현상을 한신칸 모더니즘(阪神間モダニズム)이라고 부릅니다. (jc, 2024/6/22)

,

日本兵庫県西宮大阪神戸中間位置しますがつの大都市境界することはありません尼崎西芦屋まっているからです

 

 

西宮へは4つの電車路線るのでどこからでも神戸大阪中心街まで30分以内くことができます交通要地なので2つの大都市住宅街です宝塚観光芸能なら西宮交通住居中心です

 

 

西宮っている韓国人なら十中八九野球ファンでしょう日本のプロ野球チーム阪神タイガースのホーム球場西宮にあるからです阪神甲子園野球場ばれるこの球場日本全国高校野球大会かれる場所でもあります

 

 

甲子園エリアの旧称鳴尾村全国高校野球大会3回大会(1919)からここで開催されましたしい野球場竣工した1924甲子年だったので野球場地域甲子園改名され高校野球大会甲子園大会ぶようになりました

 

 

甲子園大会3春大会8夏大会2つがあります大会毎日新聞社大会朝日新聞社開催します普通甲子園といえば大会47,000観客席満員中継放送視聴率20%ります

 

 

甲子園競争しいです日本高校野球連盟登録された学校3,8182023ですが各野球チームの部員30和歌山県智弁和歌山高校から150人以上高知県明徳義塾高校です甲子園選手エントリーは1チーム18なので選手30であっても出場競争率21部員ければ81だけが試合ることができます

 

3818高校野球部地域予選優勝した49チームのみが甲子園出場します都道府県47ですが49チームが出場するのは東京都北海道2チームその2(大阪京都43では地域優勝チーム1チームだけ出場するからです

 

 

各地域予選通過するためには極限競争通過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神奈川県大阪府愛知県では毎年1601競争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が2014千葉県地域予選競争率1741歷代最高記録しました

 

 

予選もトーナメントなので地域によっては5-7試合々とらなければならず1試合負けても甲子園出場不可能になります本選出場した49チームも地域予選優勝チームを相手5-6連勝めてこそ優勝することができます

 

 

甲子園1991外国人学校にも出場資格えましたが韓国系京都国際学校2001から予選出戰2021には本戦みベスト4進出するという快挙げました

 

 

日本敗戦前には植民地高校甲子園参加しました台湾1923から甲子園参加1931嘉義農林学校甲子園本大会準優勝しましたこの野球団カノ(Kano, 2014)という映画化もされました

 

 

朝鮮1919三一革命以降文化政治一環として齋藤實各学校野球部創設甲子園参加するようめました1921釜山商業学校7回甲子園出場したのを皮切りに京城中学校(1922,1924,1926,1927,1928)仁川商業学校(1936,1938,1939)平壌中学校(1929,1932,1940)京城商業学校(1931,1934)徽文高等普通学校(1923)釜山中学校(1925)大邱商業学校(1930)善隣商業学校(1933)新義州商業学校(1935)龍山中学校(1937)などが朝鮮代表として甲子園進出していました

 

 

徽文高普選手監督(朴錫胤)がともに朝鮮人だけで構成されたチームで1923甲子園のベスト8りをたしましたしかし朴錫胤極悪親日行為のため徽文中高校野球部監督として活躍したことをそれほどりにっていないということです(jc, 2024/6/19)

,

일본 효고현의 니시노미야(西宮)는 오사카와 고베의 중간에 위치하지만, 두 대도시와 경계를 맞대지는 않습니다. 동쪽의 아마가사키(尼崎)와 서쪽의 아시야(芦屋)가 끼어있기 때문이죠.

 

 

니시노미야에는 4개 전철노선이 통과하기 때문에 어디에서든 고베와 오사카 중심가까지 30분 이내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에 두 대도시의 주택가입니다. 북쪽의 다카라즈카가 관광과 예능의 도시라면, 니시노미야는 교통과 주거 중심 도시입니다.

 

 

니시노미야를 아는 한국인이라면 십중팔구 야구팬일 것입니다. 일본 프로야구팀 한신 타이거스의 홈구장이 니시노미야에 있기 때문입니다. 한신고시엔(阪神甲子園)야구장이라고 불리는 이 구장은 일본의 전국고교야구대회가 열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고시엔 지역의 옛 이름은 나루오촌(鳴尾村)이었고, 전국고교야구대회가 제3회 대회(1919)부터 이곳에서 개최됐습니다. 새 야구장이 준공된 1924년이 갑자년(甲子年)이었으므로 야구장과 지역이 고시엔으로 개명됐고, 고교야구대회도 고시엔대회라고 부르게 됐습니다.

 

 

고시엔대회도 3월의 봄대회와 8월의 여름대회의 두 개가 있습니다. 봄대회는 마이니치신문사, 여름대회는 아사히신문사가 개최합니다. 보통 고시엔이라고 하면 여름대회를 가리키며, 47,000석의 관중석이 항상 만원이고, 중계방송의 시청률도 20%에 육박합니다.

 

 

고시엔의 경쟁은 치열합니다. 일본 고교야구연맹에 등록된 학교가 3,818(2023)인데, 각 야구팀의 부원은, 적으면 30(와카야마현 치벤 와카야마 고교), 많으면 고치현 메이토쿠 기주쿠 고교처럼 150명이 넘습니다. 고시엔 선수 엔트리는 한 팀당 18명이기 때문에 선수가 30명이더라도 출전 경쟁률이 21이고, 150명이 넘으면 8명 중 1명만 선수로 뛸 수 있습니다.

 

3,818개의 고교 야구부는 지역 예선에서 우승한 49개 팀만 고시엔에 출전합니다. 도도부현이 47개인데 49개 팀이 출전하는 것은 도쿄도()와 홋카이도()에서 2, 그 밖의 2개부(, 오사카와 교토)43개현()에서는 지역 우승팀 1팀만 출전하기 때문입니다.

 

 

각 지역예선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극한 경쟁을 통과해야 합니다. 카나가와현과 오사카부, 아이치현에서는 매년 1601의 경쟁을 뚫어야 하는데, 2014년 치바현의 지역예선 경쟁률은 1741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예선도 토너먼트식이기 때문에 지역에 따라 5-7경기를 잇달아 승리해야 하며, 한 게임만 져도 고시엔 출전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본선에 출전한 49개 팀도 지역 예선 우승팀들을 상대로 5-6연승을 거두어야 우승할 수 있습니다.

 

 

고시엔은 1991년 외국인학교에도 출전 자격을 부여했는데, 한국계의 교토국제학교가 2001년부터 예선에 출전, 2021년에는 본선에 올라 4강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일본의 패전 전에는 식민지 고등학교들도 고시엔에 참가했습니다. 타이완은 1923년부터 고시엔에 참가했는데, 1931년 가의농림학교(嘉義農林學校)가 고시엔 본선에서 준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가의농림학교의 야구단 이야기는 <카노(Kano, 2014)>라는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조선은 1919년 삼일혁명 이후 시작된 문화정치의 일환으로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각 학교에 야구부를 창설해 고시엔에 참가하도록 요구했습니다. 부산상업학교가 1921년 제7회 고시엔에 출전한 것을 시작으로, 경성중학교(1922, 1924, 1926, 1927, 1928), 인천상업학교(1936, 1938, 1939), 평양중학교(1929, 1932, 1940), 경성상업학교(1931, 1934), 휘문고등보통학교(1923), 부산중학교(1925), 대구상업학교(1930), 선린상업학교(1933), 신의주상업학교(1935), 용산중학교(1937) 등이 조선 대표로 고시엔에 진출한 바 있었습니다.

 

 

이중 휘문고보는 선수와 감독(박석윤)이 조선인으로만 구성된 팀으로 1923년 고시엔 8강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박석윤의 극악한 친일행적 때문에, 지금도 휘문중,고등학교는 그가 야구부 감독으로 활약했던 사실을 그리 자랑스럽지 않게 여기고 있다고 합니다. (jc, 2024/6/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