旅程2日目一行国際バスで中国-ロシアの国境えましたバスがホテルまでてくれて琿春バスターミナルまで移動しなければならない手間らしたのですがこれは旅行社渉外のおかげでした

 

 

バスが追加乗客のために琿春駅停車した旅行社のホ·ドンヒョク社長とガイドの金仙女さんとれました中国日程几帳面管理しながらくの便宜提供してくださったお二人感謝バスの記念撮影もしました金仙女さんは白頭山旅行にまたおうとびかけました

 

 

バスは琿春南西外郭海関移動しましたが海関とは国境設置された中国税関です淸國阿片戦争-南京条約開国され設置したのでったわけですがそのではなく国境税関もただ海関んでいるようです

 

 

旅行社のアドバイス朝早到着したら海関複雑になるやかに中国への出国手続きをえることができました乗客とバスは々に税関出国手続きを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乗客海関荷物ってバスを空港でのように入国審査通関手続きをバスもしい検索けましたバスを検査する通路になっていてバスのまでくまなく調べ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っていましたね

 

 

乗客りたバスの内部係員んで々まで調べます許可されていない物品搬出または搬入されることを統制するためです乗客荷物検査には探知犬動員されましたがおそらく麻薬類搬入·搬出されるかどうかを調べるためのものとみられます

 

地上移動国境える手続きが空港じようにめられるのを経験したのは今回めてですアメリカ-カナダ国境とアメリカ-メキシコ国境るときには自動車からりずに手続きがヨーロッパを旅行するときには越境手続きも必要なかったからです

 

 

中国出国過程問題じました団体ビザで旅行する訪問団入国海関出国海関じで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原則のためです個人旅行者わないのですが団体ビザで延吉空港入国したたち一行原則として琿春出国できないということでした

 

旅行社はその原則っていましたが金仙女さんは中国てロシアに出国する韓国人団体旅行客何度案内した経験らしてきな問題はないだろうと安心させてくれましたしかし琿春海関審査官たちは前例らなかったのかいに議論しながら規定手続きを確認するのにかなり時間がかかりました結局訪問団一行出国され出国審査まると審査にはそれほど時間はかかりませんでした

 

 

ロシアでは国境守備隊検問税関および移民局調査々にわれたため手続きがくなりました検問には武装していない軍人がバスにんで一行見渡移民局官吏乗車して一行のパスポート所持有無一次検査しましたそれからはロシアの出入国管理所前めて乗客とバスの入国審査われました

 

ロシアへの入国審査中国出国審査よりも簡単でした韓国とロシアのビザ協定締結されていてパスポートだけ提出すればよかったからですしかし税関荷物検査中国よりも几帳面でしたにはスーツケースをけてみろという要求はしませんでしたがすでにレントゲン装置通過したバックパックと腰袋けてせてもらいました

 

 

バックパックとウエストバッグの検査では現金集中的調べましたドルやユーロをっているのかいていましたおそらくウクライナ·ロシア戦争進行中これを口実にアメリカとヨーロッパの経済制裁状況でドルとユーロが流入することを統制するものと解釈されましたロシアのルーブルと韓国のウォンは問題にならないようでした

 

財布けて韓国のおとロシアのおせたら入国審査とともに税関検査やかにわりました一行一部がスーツケースをけてみろという要請けましたが問題きず一行全員正常にロシアに入国することができました(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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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 둘째 날 아침, 일행은 국제버스로 중국-러시아 국경을 넘었습니다. 버스가 호텔까지 와주어서 훈춘 버스터미널까지 이동해야할 수고를 덜었는데, 여행사의 섭외덕분이었습니다.

 

 

버스가 추가 승객을 위해 훈춘역에 정차했을 때 여행사 허동혁 사장님과 가이드 김선녀씨와 헤어졌습니다. 중국 일정을 꼼꼼하게 챙기면서 많은 편의를 제공하신 두 분에게 감사드렸고, 버스 앞에서 기념촬영도 했습니다. 김선녀씨는 백두산 여행 때 다시 만나자고 당부했습니다.

 

 

버스는 훈춘 남서쪽 외곽의 해관(海關)으로 이동했는데, 해관이란 항구나 국경에 설치된 중국의 세관입니다. 청나라가 아편전쟁-난징조약으로 개국당하면서 항구에 설치했기 때문에 ''관이라고 한 것인데, 이후 항구가 아닌 국경의 세관도 그냥 해관이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여행사의 조언대로 아침 일찍 도착했더니 해관이 복잡해지기 전에 신속하게 중국 출국 절차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승객과 버스는 따로따로 해관의 출국 절차를 받아야 했습니다. 승객들이 해관 앞에서 짐을 가지고 버스를 내려서 공항에서처럼 입국 심사와 통관 절차를 밟는 동안, 버스도 까다로운 검색을 받았습니다. 버스를 검사하는 통로는 바닥이 거울로 되어 있어서 버스의 밑바닥까지 샅샅이 살펴볼 수 있게 되어 있더군요.

 

 

승객이 내린 버스의 내부도 관원이 탑승해 샅샅이 살핍니다. 허가되지 않은 물품이 반출, 또는 반입되는 것을 통제하기 위해서이겠습니다. 승객의 짐 검사에는 탐지견도 동원되었는데, 아마도 마약류가 반입/반출되는지 조사하기 위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지상 이동으로 국경을 넘는 절차가 공항에서와 마찬가지로 진행되는 것을 경험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미국-캐나다 국경과 미국-멕시코 국경을 건널 때에는 자동차에서 내리지 않고 절차가 진행되었고, 유럽을 여행할 때에는 월경에 아무 절차도 필요 없었기 때문입니다.

 

 

중국 출국 과정에서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단체 비자로 여행하는 방문단은 입국해관과 출국해관이 같아야 한다는 원칙 때문입니다. 개인 여행자는 상관없지만, 단체 비자로 옌지 공항으로 입국한 우리 일행은 원칙상 훈춘으로 출국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여행사는 그 원칙을 알고 있었지만, 김선녀씨는 중국을 거쳐 러시아로 출국하는 한국인 단체여행객을 여러 번 안내한 경험에 비추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안심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훈춘 해관의 심사관들은 전례를 알지 못했는지 서로 의논해 가면서 규정과 절차를 확인하느라 꽤 시간이 걸렸습니다. 결국 방문단 일행의 출국은 허용되었고, 출국심사가 시작되자 개개인의 심사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러시아 쪽에서는 국경수비대의 검문과 세관 및 이민국의 조사가 따로따로 이루어지는 바람에 절차가 길어졌습니다. 검문에는 무장하지 않은 군인이 버스에 올라 일행을 살폈고, 이민국 관리도 승차해서 일행의 여권 소지 여부를 일차 검사했습니다. 그리고는 러시아의 출입국관리소 앞에서 내려, 다시 한 번 승객과 버스의 입국 심사가 진행되었습니다.

 

러시아 입국심사는 중국의 출국심사보다 간편했습니다. 한국과 러시아 사이에 무비자 협정이 체결되어 있어서, 여권만 제출하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관의 짐 검사는 중국보다 꼼꼼했습니다. 제게는 캐리어를 열어보라는 요구는 하지 않았지만, 이미 엑스레이 장치를 통과한 백팩과 허리가방을 열어서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백팩과 허리가방의 검사에서는 현금을 집중적으로 조사했습니다. 달러나 유로화를 가지고 있는지 반복해서 묻더군요. 아마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진행 중이고, 이를 빌미로 미국과 유럽의 대러 경제제재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달러화와 유로화가 유입되는 것을 통제하는 것으로 해석되었습니다. 러시아 루불화와 한국 원화는 문제되지 않는 듯 했습니다.

 

 

저는 지갑을 열어 한국 돈과 러시아 돈을 보여주었더니 입국심사와 함께 세관 검사가 신속하게 끝났습니다. 일행 중의 일부가 캐리어를 열어보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별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고, 일행 전원이 정상적으로 러시아에 입국할 수 있었습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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広野というがあります19871013ソウル鍾路5のキリスト教百周年記念館かれた<める(=ノチャッサ)>創立公演めて公開演奏されたです

 

 

<広野>1984成均館大学校サークル<ソリサラン>誕生しました文大鉉(ムン·デヒョン, 貿易学83)作詞作曲広野はその後運動歌謡代表曲となりましたがいつも/反合法集会愛唱されましたそれが<ノチャッサ>最初公開公演決定すると演奏曲ばれたのです

 

<ノチャッサ>1983ソウル大学サークル<メアリ>創立者·ギョンホ(経営学75)先生文大鉉実兄文承鉉(政治78)先生などが主軸になって延世大学<ウリムト>高麗大学<アル>成均館大学<ソリサラン>梨花女子大学<ハンソリ>などの卒業生たちが参加して創立された演奏團です

 

 

金光石(キム·グァンソク)大学サークル出身ではありませんが1982結成された汎大学歌サークル連合メアリ参加運動歌謡第一歩卓越した歌唱力ですぐにノチャッサの中核メンバーとなりましたノチャッサ創立公演でも金光石緑豆金芝河詩/趙念作曲)」この山河文承鉉作詞/作曲)」、「広野でもイ·ジュイク先生交互にソロ部分歌唱担当しました

 

広野編曲文承鉉先生担当文大鉉先生伴奏班でドラムを担当しました。 「おいここのドラムは文大鉉がやらないとっていた文承鉉先生々しいです正確力強よくシンバルをつことができるというのが理由でした

 

 

はこの公演司会、『のシンシンわがわが民族』、『広野などの合唱にも参加しましたがそれはがノチャッサの初期代表歌手であるチョ·ギョンオク·ジュイクパク·ミソンキム·ジェソプソン·スクファンキム·グァンソクのように上手だったからではありません

 

ただ公演司会をしながら歌手紹介そのままるのではなく合唱でもえなさいという文承鉉先生指示があったからですこの歴史的公演でそのような役割でもけたことがには人生がいっぱいになった瞬間つとしてりました

 

 

広野くなりましたがそれは広闊満州原野という歌詞のためですそれまでは日帝植民地時代独立軍歌いては満州運動歌素材になったことはほとんどありませんでした。 「広野じて満州原野韓国主流運動歌謡流入したのです

 

広闊という形容詞りましたが満州原野直接見るまではその言葉意味をきちんと理解す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ようですアメリカのウィスコンシンやアリゾナ横断しながらそのたようなじをっていたのは事実ですがそのはその広大さがとは関係ありませんでした他人土地だというえが先走ったからだといます

 

 

しかし今回延吉空港りるまでから見下ろす満州広闊この広大土地一時韓民族らしの基盤だったという事実がこみげてきましたでもかかっていたら事情っていたでしょうがそのって天気がとてもくて3フィート上空時速700キロでびながらもてしなく々とその広大丘陵野原がはっきりと見下ろせたのです

 

 

今回訪問前後旅程<広野>する親近感してくれました仁川空港出発する直前はユジュン画伯五月美術館展示会応援するために光州ってきましたそしてすぐに満州上空ぶようになったのです

 

また沿海州には飛行機便西海上空経由帰国には船便東海横切って東海港入港することになっていました沿海州訪問前後南道満州西海東海両方旅行するようになったのです今度旅行<広野>主題歌になった理由です

 

"日が昇る東海から/ 日が沈む西海まで/ 熱い南道から/ 広闊な満州原野" (jc, 2024/5/14)

 

 

 

1987年10月、『ノチャッサ』の初公演で演奏された『広野で』を聴いてみたいなら、下のリンクを押してみてください。(さらに、私が歌っている姿も出てきます。^^)

 

https://www.youtube.com/watch?v=U3U8jasua0Y&list=PLqY5Wn1plEnGlTGhoZUoiHE9JcSMgJtqL&index=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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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19871013, 서울 종로5가의 기독교 백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창단 공연에서 처음으로 공개 연주되었던 노래입니다. 그 공연에서 <광야에서>3부 첫 곡이자 전체 공연의 9번째 곡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광야에서>1984년 성균관대학교의 노래패 <소리사랑>에서 탄생했습니다. 문대현(무역83) 작사/작곡의 <광야에서>는 이후 운동가요의 대표곡이 되었지만, 언제나 비/반합법 집회나 술자리에서 애창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첫 번째 공개공연을 결정하자 연주곡으로 선택된 것이지요.

 

노찾사는 1983, 서울대 노래패 <메아리>의 창립자 이경호(경영학75) 선생과 문대현의 친형 문승현(정치78) 선생 등이 주축이 되고, 고려대 <노래얼>, 성균관대 <소리사랑>, 연세대 <울림터>,  이화여대 <한소리> 등의 졸업생들이 참여해 창립된 노래패입니다.

 

 

김광석은 대학 노래패 출신은 아니지만 1982년 결성된 범대학 노래패 <연합메아리>에 참가해 운동가요에 첫발을 디뎠고, 탁월한 가창력으로 이내 노찾사의 핵심 멤버가 되었습니다. 노찾사 창단 공연에서도 김광석은 <녹두꽃(김지하 시/조념 작곡)><이 산하에(문승현 작사/작곡)>를 불렀고, <광야에서>에서도 이주익 선생과 번갈아 솔로 부분 가창을 맡았습니다.

 

<광야에서>의 편곡은 문승현 선생이 맡았고, 문대현 선생은 반주반에서 드럼을 맡았습니다. “, 여기 드럼은 대현이가 해야 겠다고 말하던 문승현 선생의 목소리가 생생합니다. 가장 정확하고 힘차고 맛깔지게 심벌즈를 때릴 줄 안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저는 이 공연에서 사회를 맡았었고, <바람씽씽><내나라 내겨레>,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광야에서> 등의 합창에도 참가했는데, 그것은 제가 노찾사의 초기 대표가수들인 조경옥, 이주익, 박미선, 김제섭, 송숙환, 김광석처럼 노래를 잘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다만, 공연 사회를 보면서 곡과 가수 소개하고 그냥 들어가기 뭐하니까, 합창에 소리나 보태라는 문승현 선생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역사적인 공연에서 그런 역할이나마 맡았던 것이 제게는 인생의 뿌듯했던 순간의 하나로 남았습니다.

 

 

<광야에서>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그것은 광활한 만주 벌판이라는 가사 때문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제강점기의 독립군가를 제외하고는 만주가 운동가의 소재가 된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광야에서>를 통해 만주 벌판이 다시 한국 주류의 운동가요에 유입된 것이지요.

 

저는 광활한이라는 형용사가 마음에 들었지만, 만주 땅을 직접 보기 전까지는 그 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미국 위스컨신주나 아리조나주를 횡단하면서 그 비슷한 느낌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때는 그 광활함이 나와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남의 땅이라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연길 공항에 내릴 때까지 창문으로 내려다 본 만주는 광활했고, 이 광활한 땅이 한때 한민족의 삶의 터전이었다는 사실이 북받치더군요. 구름이라도 꼈다면 사정이 달랐겠지만, 그날따라 날씨가 너무 좋아서 3만피트 상공을 시속 7백킬로미터로 날아가면서도, 끝없이 이어지는 산들과 그 사이의 광활한 구릉이나 들판이 또렷하게 내려다 보였던 겁니다.

 

 

이번 방문의 전후 여정이 <광야에서>에 대한 친근감을 더해 주었습니다. 인천 공항을 출발하기 직전에 저는 유준 화백의 오월미술관 전시회를 응원하기 위해 광주를 다녀왔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만주 상공을 날아보게 된 것이지요.

 

 

또 연해주에 갈 때는 비행기편으로 서해 상공을 경유하고, 귀국길에는 배편으로 동해를 가로질러 동해항에 입항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연해주 방문을 전후로 남도와 만주, 서해와 동해를 모두 여행하게 된 것이지요. 이번 여행에서 <광야에서>가 저의 주제가가 된 까닭입니다.

 

“해뜨는 동해에서/ 해지는 서해까지/ 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벌판” (jc, 2024/5/14)

 

 

 

1987년 10월 <노찾사> 첫공연에서 연주된 <광야에서>를 들어보시려면 아래 링크를 눌러 보세요. (심지어 제가 노래하는 모습도 나옵니다.^^ 화질은.... 썩 좋지 않지만요.)
https://www.youtube.com/watch?v=U3U8jasua0Y&list=PLqY5Wn1plEnGlTGhoZUoiHE9JcSMgJtqL&index=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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