阪神教育闘争在日朝鮮人1948414から26まで兵庫県大阪府展開した朝鮮人学校廃止反対デモです連合軍最高司令部(GHQ)戦後唯一非常事態宣言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ほどしかった民族教育守護闘争でした

 

 

明治学院大学鄭栄桓チョン·ヨンファン教授資料によると民族教育守護闘争最初きたのは山口その後岡山兵庫大阪そして東京いたためこれを4.24教育闘争したりもします

 

しかし山口県教育闘争まったのは331在日朝鮮人民族教育守護闘争阪神地域死者まで発生するほど熾烈められたという阪神教育闘争という本来用語使うのもくないといます

 

 

日本占領連合軍司令部GHQ194710日本政府在日朝鮮人日本教育基本法学校教育法わせるようにという指示下達しましたこれに文部省1948124全国都道府県知事朝鮮人子供たちを日本学校転校させろという公文書発送324には拒否する朝鮮人学校閉鎖せよという公文書再度発送しました

 

神戸では 47朝鮮人学校閉鎖命令発令されましたが在日朝鮮人日本人活動家はこれに抵抗しました西神戸朝鮮人小学校では保護者校門いで抵抗424には兵庫県庁前結集して学校閉鎖命令撤回要求しました1時間半にわたる交渉じて兵庫県神戸市当局学校閉鎖命令撤回するという文書署名しましたしかしこの覚書米軍政によって無視されました

 

 

大阪では423府庁前大手前公園3万人余りが集結朝鮮人学校閉鎖反対する人民大会開催中武装警官鎮圧過程23重傷200人余りが検挙されました426にも人民大会かれ警察8千人鎮圧隊動員しましたこの警察発砲により学生金太一(キム·テイル)死亡しました

 

 

阪神地域朝鮮人学校閉鎖反対デモに100万人参加警察鎮圧による負傷者150人余死者1でした3千人余りが検挙されこのうち212起訴されました各級裁判所回付され実刑判決けた受刑者36りました

 

 

在日朝鮮人くの犠牲ってきましたが53朝鮮人教育対策委員会文部大臣教育基本法学校教育法という前提のもと、「私立学校自主性範囲内朝鮮人独自教育うことを前提私立学校としての認可申請するという覚書交換朝鮮人学校存続できるようになりました阪神教育闘争勝利したのです

 

 

阪神教育闘争死者はもう一人いました朝鮮人連盟=朝連兵庫県委員長朴柱範パク·ジュボムさんです投獄され19491125病床悪化仮釈放されましたが4時間後死亡しました獄死したも同然だったのです

 

兵庫朝鮮関係研究会飛田雄一先生阪神教育闘争50周年えた199710大邱朴柱範さんの朴再禧(パク·ジェヒ)さんをねました阪神教育闘争50周年イベントに犠牲者家族招待するためでした

 

 

1885年生まれの朴柱範さんは1927日本神戸市東灘在住しました阪神消費組合設立参加して理事として活動解放後朝連阪神支部長となり1948には兵庫県委員長として阪神教育闘争いたのです

 

 

伯父遺骸故郷大邱った朴再禧さんは50ぎたが朴柱範さんの遺族ねてきたのは飛田雄一先生めてとおっしゃっていたそうですね阪神教育闘争成果広報されますがその犠牲者してえることはかだったのです残念なことだといます(jc, 202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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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교육투쟁은 재일조선인이 1948414일부터 26일까지 효고현과 오사카부에서 전개한 조선인학교 폐지에 반대시위입니다. 연합군최고사령부가 전후에 유일하게 비상사태를 선언해야 했을 만큼 치열했던 민족교육 수호투쟁이었습니다.

 

 

메이지가쿠인(明治學院) 대학의 정영환(鄭栄桓) 교수의 자료에 따르면 민족교육 수호투쟁이 처음 일어난 곳은 야마구치(山口)였고, 이후 오카야마(岡山), 효고(兵庫)와 오사카(大阪), 그리고 도쿄(東京)로 이어졌기 때문에, 이를 4.24교육투쟁으로 고쳐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야마구치현의 교육투쟁이 시작된 것은 331일이었고,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 수호투쟁이 한신지역에서 사망자까지 발생할 만큼 치열하게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한신교육투쟁이라는 원래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점령의 연합군사령부(GHQ)194710월 일본정부에 재일조선인을 일본의 교육기본법, 학교교육법에 따르게 하라는 지시를 하달했습니다. 이에 문부성은 1948124일 전국 도도부현의 지사에게 조선인 자녀들을 일본 학교로 전학시키라는 공문을 발송했고, 324일에는 거부하는 조선인 학교를 폐쇄하라는 공문을 재차 발송했습니다.

 

고베(神戶)에서는 47일 조선인학교 폐쇄 명령이 발령되었는데, 재일조선인과 일본인 활동가들은 여기에 저항했습니다. 니시고베(西神戶) 조선인소학교에서는 학부모들이 몸으로 교문을 막고 항거했고, 424일에는 효고 현청 앞에 결집하여 학교폐쇄 명령 철회를 요구했습니다. 1시간 반에 걸친 교섭을 통해 효고현과 고베시 당국은 학교폐쇄 명령을 철회한다는 문서에 서명했습니다. 그러나 이 각서는 미군정에 의해 무시되었습니다.

 

 

오사카에서는 423일 부청 앞의 오테마에(大手前) 공원에 3만여명이 집결해 조선인학교 폐쇄에 반대하는 인민대회를 개최하던 중, 무장경관의 진압과정에서 23명이 중상을 입었고 200여명이 검거되었습니다. 426일에도 인민대회가 열렸고, 경찰은 8천명의 진압대를 동원했습니다. 이날 경찰의 발포로 김태일(金太一) 학생이 사망했습니다.

 

 

한신지역의 조선인 학교 폐쇄 반대시위에 연인원 1백만명이 참가했고, 경찰의 진압으로 인한 부상자가 150여명, 사망자가 1명이었습니다. 3천여명이 검거되었고, 이중 212명이 기소되었습니다. 각급재판소에 회부되어 실형을 선고받은 수형자가 36명에 이르렀습니다.

 

 

재일조선인은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53일 조선인교육대책위원회와 문부대신 간에 교육기본법과 학교교육법을 따른다는 전제 아래, “사립학교의 자주성 범위 내에서 조선인의 독자적인 교육을 행하는 것을 전제로 사립학교로서의 인가를 신청한다는 각서를 교환, 조선인학교가 존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신교육투쟁이 승리한 것이지요.

 

 

한신교육투쟁의 사망자는 한사람이 더 있었습니다. 조선인연맹(=조련) 효고현 위원장 박주범(朴柱範)씨입니다. 그는 투옥되었다가 19491125일 병상악화로 가석방되었으나 4시간 만에 사망했습니다. 옥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지요.

 

효고조선관계연구회(兵庫朝鮮関係研究会)의 히다 유이치(飛田雄一) 선생은 한신교육투쟁 50주년을 앞둔 199710월 대구를 방문, 박주범씨의 동생의 따님인 박재희(朴再禧)씨를 찾아갔습니다. 50주년 행사에 희생자 가족을 초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885년생인 박주범씨는 1927년 일본에 건너가 고베시 히가시나다에 거주했습니다. 그는 한신소비조합 설립에 참여해 이사로 활동했고, 해방 후에는 조련의 한신 지부장이 되었다가, 1948년에는 효고현 위원장으로서 한신교육투쟁을 이끌었던 것입니다.

 

 

큰아버님의 유해를 고향 대구로 모신 박재희씨는 “50년이 지났지만 박주범씨의 유족을 찾아온 것은 히다 유이치 선생이 처음이라고 하셨다는군요. 한신교육투쟁의 성과는 대대적으로 홍보되지만, 그 희생자들을 찾아보고 기리는 일에는 소홀했던 것이지요.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jc, 202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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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でもよくられている西宮有名歴史的事実甲陽園地域発掘された地下壕であるはずですここで発掘された7つのトンネルのうち4トンネルのから朝鮮国独立という壁書発見されたからです

 

 

太平洋戦争末期米軍空襲けるため日本軍部本土決戦のために全国にトンネルをりましたが西宮地下壕日本海軍戦闘機紫電改生産していた川西航空会社部品工場建設される予定でした

 

 

このトンネルをったのはほとんどが朝鮮人でした強制動員された朝鮮人労働者5-600最悪労働条件昼夜わず工事強行されましたが川西社がこの秘密工場飛行機部品生産める日本敗亡しました

 

 

このトンネルの存在終戦後られていましたが4トンネルから朝鮮国独立という壁書発見されたのは198711でした

 

 

これを発見した探査隊4構成されましたが探査隊長在日朝鮮人郷土史学者鄭鴻永先生その鄭志永その息子鄭世和友人である真銅敏之そのにも探査装備ぶために志願した在日朝鮮人青年一人同行したということです真銅敏之先生筆者当時状況をこのように証言しています

 

 

そのたち四人めて地下壕現場きました鄭鴻永先生終戦後公開された米軍戦略爆撃調査報告書調べていたところ西宮爆撃対象になったのはそこにあった川西航空機会社地下工場があったからだとかりましたその地下工場位置把握したくの々と探査隊構成されたのですね

 

最初鄭鴻永先生息子友人である鄭世和さんも一緒くことにしたが事情があって参加できず朝鮮人青年一人荷物んでくれるアルバイトとしてついてきましたそのカメラや電灯簡易発電機などをはじめ荷物がかなりかったんですよ

 

 

地下壕ったばかりでつにかれました片方天井がセメントでられた仕上げのもう片方はでこぼこした岩壁露出したれたでしたたちは2かれて探索しましたが鄭鴻永先生一緒れたりました

 

 

漆黒のように懐中電灯したのようなものをましたちに鄭鴻永先生らせるとしく調べて朝鮮人労働者たちのだとおっしゃいましたたちはいで二人んでこのすごい発見らせみんな興奮してどうしていいかからなかったです興奮がおさまるとたちは自分っていったカメラのフラッシュとタイマーを使ってその文字背景4写真って記録しました

 

 

20001鄭鴻永先生他界された飛田雄一先生むくげ通信1782000130日付)』収録した弔辭鄭鴻永先生のように紹介しました

 

 

「(鄭鴻永先生兵庫朝鮮関係研究会中心的なメンバーのひとりだがなにより朝鮮国獨立文字西宮市甲陽園地下壕発見者としてられている西宮宝塚伊丹等在日朝鮮人歴史精力的研究されておりそのトンネル発見以前から米軍戦略爆撃調査報告書記述調べていてその地域たな宅地開発らせをいてかけつけたので発見することができたというものである

 

 

甲陽園宅地開発されるとトンネルがすべてえることを憂慮して鄭鴻永先生いで調査断行したのですが意外にもこの地下壕壁書発見されたのです

 

この西宮光陽園地下壕壁書日本政府否認する朝鮮人労働者強制動員存在したことを立証する強力根拠として引用されています(jc, 202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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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도 잘 알려진 니시노미야의 가장 유명한 역사적 사실은 코요엔(甲陽園) 지역에서 발굴된 지하호일 것입니다. 이 지역에서 발굴된 7개의 땅굴 중에서 제4호 땅굴의 벽에서 조선국 독립이라는 벽서가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 일제 군부는 본토 결전을 위해 전국에 땅굴을 팠는데, 니시노미야의 지하호는 일제 해군의 전투기 시덴카이(紫電改)를 조립하던 카와니시(川西)항공사의 부품생산 공장이 들어설 예정이었습니다.

 

 

이 땅굴을 판 것은 대부분 조선인이었습니다. 강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 5-6백명이 최악의 노동조건 속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사가 강행됐지만, 카와니시사가 이 비밀공장에서 비행기 부품 생산을 시작하기도 전에 일본은 패망했습니다.

 

 

이 땅굴의 존재는 종전 후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4호 땅굴에서 조선국 독립(朝鮮國獨立)”푸른 봄()”이라는 벽서가 발견된 것은 198711월이었습니다.

 

 

이를 발견한 탐사대는 4명으로 구성되었는데, 탐사대장은 재일조선인 향토사학자 정홍영(鄭鴻永) 선생이었고, 그의 동생 정지영(鄭志永), 그의 아들 정세화의 친구인 신도 도시유키(真銅敏之), 그밖에도 탐사 장비를 운반하기 위해 자원한 재일조선인 청년 한명이 동행했다고 합니다. 신도 도시유키 선생은 필자에게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증언하신 바 있습니다.

 

 

그날, 우리 네 사람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서 지하호 현장으로 갔습니다. 정홍영 선생님은 종전 후에 공개된 미군 전략폭격 조사보고서를 조사하던 중, 니시노미야가 폭격의 대상이 된 것은 거기에 있던 카와니시 항공기회사의 지하 공장이 있었기 때문임을 아셨습니다. 그 지하공장의 위치를 파악하신 후에 가까운 분들과 탐색대를 꾸리신 것이지요.

 

처음에는 정홍영 선생의 아들이자 내 친구인 정세화씨도 같이 가기로 했으나 뭔가 사정이 있어서 참석하지 못했고, 조선인 청년 한명이 짐을 운반해 줄 아르바이트로 따라 나섰습니다. 그날 카메라와 전등, 간이 발전기 등을 비롯해서 운반할 짐이 꽤 많았거든요.

 

 

지하호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갈래 길이 나왔어요. 한쪽은 천장과 벽이 시멘트로 발라진 다듬어진 길이었고, 다른 한쪽은 울퉁불퉁한 암벽이 드러난 거친 길이었지요. 우리는 두 패로 나뉘어 탐색에 나섰는데, 나는 정홍영 선생과 함께 거친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칠흑 같이 깜깜한 굴속에서 손전등으로 벽을 훑어보았을 때 나는 무언가 글씨 같은 것을 본 것 같았어요. 즉시 정홍영 선생님께 알리자 자세히 살펴보시고 조선인 노동자들의 글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급히 다른 두 사람을 불러서 이 대단한 발견을 알렸고, 다들 흥분해서 어쩔 줄을 몰랐어요. 흥분이 조금 가라앉자 우리는 내가 가져간 카메라의 플래시와 타이머를 이용해서 그 글씨를 배경으로 4명의 사진을 찍어서 기록을 남겼습니다.”

 

 

20001월 정홍영 선생이 타계하셨을 때, 히다 유이치(飛田雄一) 선생은 <무쿠게통신(178, 2000130일자)>에 수록한 조사에서 정홍영 선생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습니다.

 

 

“(정홍영 선생은) 효고 조선관계 연구회의 중심 멤버 중 한 명이지만, 무엇보다도 <조선국 독립>이라는 문자가 남아있는 니시노미야시 코요엔의 지하벙커의 발견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 정선생은 니시노미야, 다카라즈카, 이타미 등의 재일 조선인 역사를 정력적으로 연구하고 있었는데, 그 터널을 발견한 것도 이전부터 미군 전략폭격 조사보고서를 조사하다가 그 지역의 새로운 택지개발 소식을 듣고 달려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요엔에 택지가 개발되면 땅굴이 모두 사라지게 될 것을 우려해 정홍영 선생이 급히 조사를 단행하셨던 것인데, 뜻밖에도 이때 지하호의 벽서가 발견되었던 것이지요.

 

이 니시노미야 코요엔의 지하호 벽서는 일본 정부가 부인하는 조선인 노동자 강제 동원이 존재했음을 입증하는 강력한 근거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jc, 202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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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舞踊靴>訪問する西宮について紹介しながら阪神間モダニズムとダンスホール文化について調べてみたしこのような社会文化的雰囲気から日本新舞踊崔承喜朝鮮舞踊出発したという調べてみたことがあります

 

 

さて西宮歴史ますと在日朝鮮人にまつわる3つの事件がさらにあります阪神消費組合1931甲陽園地下壕壁書1945年頃)、そして阪神教育闘争1948がそれですたちがれる地域朝鮮人関連歴史理解したがいいということでこの3つの事件簡単にご紹介しておきたいといます

 

 

堀内稔先生論文阪神消費組合について(1980)によると1931320発足した阪神消費組合植民地時代在日朝鮮人結成した共同購買組合です結成されたのは尼崎築地本部もそこにきましたが西宮鳴尾芦屋青木などに支部西宮支部活動活発だったといわれています

 

消費組合あるいは購買組合とは今日韓国生活協同組合ています生活必需品生産者購買者たちを直接連結して中間流通過程省略することで生産者には販路安定させ消費者には安値購買できるようにするわせだったのです

 

 

西宮尼崎宝塚などの阪神間地域には数千人在日朝鮮人居住していてらの衣食住日本人主流社会のそれとなるものがかったですそのため味噌醤油明太(=スケトウダラ)唐辛子などの食料品やゴム朝鮮衣服などの生活必需品時価より20-30%ほど供給在日朝鮮人生活利益確保いだのです当時この地域在日朝鮮人零細商人肉体労働などの低所得層がほとんどでしたのでこのような消費組合らにとってきなけになりました

 

 

創立当時280人余りの朝鮮人商人参加芦屋綿工場経営者安泰運(アン·テウン)初代理事長選任して組織しましたが全盛期だった1930年代初めには阪神間地域居住する朝鮮人450世代組合員として加入したと記録されています

 

阪神消費組合規約1134構成されていましたが2には生活必需品購入生産加工その他消費経済利益擁護目的とすると規定され34には組合員資格阪神間居住する労働者農民無産市民設定18出資金1口座5設定24利益金一部口座金額じて配当するとなっています

 

 

韓信消費組合組合員生活利益確保することに注力しながらも<阪消ニュース>という情報誌発行して組合員言論役割担当夜間部用意して識字学級運営して朝鮮語日本語文字普及活動いました

 

またこの組合同胞災害救援活動にも積極的でした19341936韓国南部地方きな水害発生した救護金1934颱風室戸阪神地域ったにも立花村応急住宅25建設してった朝鮮人難民収容したりもしました

 

 

堀内稔先生によると同組合1935317かれた5回大会参加した150代議員消費組合拡大活動強化決議したのに、「組合員医療死亡結婚出産住宅する援助決議されました

 

 

阪神消費組合はこの時期んだったくの消費組合活動んで194112月末当局によって解散されるまで寿命かったのですがこれは阪神間在日朝鮮人民衆日常生活のニーズに密着した需要たしたためでした(jc, 202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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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신>이 방문하는 니시노미야에 대해 소개하면서, 한신칸 모더니즘과 댄스홀 문화에 대해서 살펴보았고, 이같은 사회문화적 분위기에서 일본의 신무용과 최승희의 조선무용이 출발되었다는 점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그런데, 니시노미야의 역사를 보면 재일조선인과 관련된 3가지 사건이 더 있습니다. 한신소비조합(1931)과 니시노미야 지하호의 벽서(1945년경), 그리고 한신교육투쟁(1948)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방문하는 지역의 조선인관련 역사를 이해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서, 이 세 사건을 간략하게 소개해 두고자 합니다.

 

 

호리우치 미노루 선생의 논문 <한신소비조합에 대하여(阪神消費組合について, 1980)>에 따르면, 1931320일 발족한 한신소비조합은 일제강점기 재일조선인들이 결성한 공동구매조합입니다. 결성된 곳은 아마가사키(尼崎)의 츠키지(築地)이고 본부도 그곳에 두었지만, 니시노미야(西宮), 나루오(鳴尾), 아시야(芦屋), 아오키(靑木) 등지에 지부를 두었고, 니시노미야 지부의 활동이 활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비조합, 혹은 구매조합이란, 오늘날 한국의 생활협동조합과 비슷합니다. 생필품 생산자와 구매자들을 직접 연결하여 중간유통 과정을 생략함으로써, 생산자에게는 판로를 안정시키고, 소비자들에게는 싼값에 구매할 수 있게 하는 조합이었던 것이지요.

 

 

니시노미야와 아마가사키, 다카라즈카 등의 한신칸 지역에는 수천명의 재일조선인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이들의 의식주는 일본인 주류사회의 그것과 다른 것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쌀, 된장, 간장, 명태, 고추 등의 식료품과 고무신과 조선의복 등의 의류 등의 생활필수품을 시가보다 20-30%정도 싸게 공급하여 재일조선인들의 생활이익 확보에 주력했던 것인데, 당시 이 지역의 재일조선인들은 영세상이거나 막노동 등의 저소득층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이같은 소비조합은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창립 당시 약 280여명의 조선인 상인들이 참석했고, 아시야의 면공장 경영자 안태운(安泰云)을 초대 이사장으로 선임하여 조직하였는데, 전성기였던 1930년대 초반에는 한신칸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인 450세대가 조합원으로 가입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신소비조합의 규약은 1134개조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2조에는 생활필수품의 구입, 생산가종, 기타 소비경제의 이익옹호를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되었고, 3조와 4조에는 조합원의 자격은 한신칸에 거주하는 노동자, 농민 무산시민으로 설정했고, 18조는 출자금을 1구좌에 5으로 설정했고, 24조는 이익금의 일부는 구좌 금액에 따라 배당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한신소비조합은 조합원들의 생활 이익을 확보하는 데에 주력하면서도, <한쇼뉴스(阪消ニュース)>라는 소식지를 발행하여 조합원들 사이의 언론 역할도 담당했고, 야간부를 마련하여 식자학급(識字学級)”을 운영하여 조선어와 일본어의 문자 보급활동도 벌였습니다.

 

또 이 조합은 동포들의 재난구원 활동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1934년과 1936년 한국의 남부지방에 큰 수해가 발생했을 때 구호금을 보냈고, 1934년 태풍 무로토(室戸)가 한신지역을 강타했을 때에도 다치바나(立花) 촌에 응급주택 25호를 건설해 집을 잃은 조선인 난민들을 수용하기도 했습니다.

 

 

호리우치 미노루 선생에 따르면 이 조합의 1935317일에 열린 제5회 대회에 참석한 150명의 대의원들은 소비조합의 확대와 활동의 강화를 결의한 데 이어 조합원의 의료, 사망, 결혼, 출산, 주택에 대한 원조도 결의되었습니다.

 

 

한신소비조합은 이 시기에 성행했던 많은 소비조합 중에서 활동이 가장 왕성했고, 194112월말에 일제 당국에 의해 해산될 때까지 수명도 가장 길었는데, 이는 한신칸에 거주하는 재일조선인 민중의 일상생활의 요구에 밀착된 수요를 충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jc, 202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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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宮訪問団水墨画金大中15っていきます韓国トップクラスの水墨画家兪俊(·ジュン)画伯出版した金大中先生伝記ですこの寄贈するのには朴仁浩(パク·インホ)李元榮(·ウォニョン)先生後援がありました

 

 

最初12用意したのは在日朝鮮人日本人活動家12宝塚朝鮮人追悼碑調査研究をたゆまず後援し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名前趙正熙後援会とつけましたが私個人後援のためのものではなく宝塚朝鮮人追悼碑犠牲者5韓国内縁故地調査するリサーチを特定して支援されたのです

 

 

この々の後援のおかげで犠牲者5から金炳順さんが江原道江陵出身であることをらかにすることができ尹吉文さん吳伊根さんが慶尚南道固城郡出身南益三さんが慶尚南道統営出身であることをらかにすることができました残念ながら張長守さんの韓国内のゆかりのらかにできませんでしたリサーチのための記録くなかったからです

 

 

このリサーチの結果江陵市2022、「宝塚朝鮮人追悼碑建立貢献した8感謝牌贈呈しました今年下半期には固城郡統営市にも感謝牌贈呈請願する準備えています

 

 

統営市固城郡請願れてくれるなら来年3月頃感謝牌贈呈式組織しようと企画していますそして江陵-統営-固城支援要請<宝塚朝鮮人追悼碑>主題にした全宰云先生写真展このプロジェクトを公式えることになります

 

3年間、『宝塚朝鮮人追悼碑のリサーチが可能だったのは後援会員支援があったからですこの々は調査経費支援されただけでなく調査必要記録資料すことにもけを江陵市感謝牌贈呈式組織してくださいました本当にありがたいことです

 

 

このような事情いた兪俊画伯後援会員たちに自身最新著書寄贈する意思らかにしましたがこれを無償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ので李元榮朴仁浩先生けを要請二人がそれぞれ5水墨画金大中値段後援しましたりない2兪俊作家寄贈要請された3著書用意しました15には著者直接書いて署名した感謝挨拶っています

 

 

一見すると、『水墨画金大中内容上<宝塚朝鮮人追悼碑>とは直接関係がなさそうです金大中大統領韓国民主化経済危機克服そして南北和解のためにくの業績げたですが基本哲学人間基本権利としての人権強調していたです宝塚朝鮮人追悼碑犠牲者発掘記録100年以上慰霊祭ってきた々の人権意識れだったといます

 

 

そのうえ金大中大統領朴正熙独裁玄海灘水葬される危機した救出したのは日本人活動家積極的素早救命運動があったからでもありますこうしたからると日本人活動家在日朝鮮人水墨画金大中をプレゼントすることは意味深いことかもしれないといます

 

 

もちろん後援会員々の長年後援べると、『水墨画金大中時期からしても値段からしてもそれほどきなではありませんしかしこのささやかなとしてこれまで<宝塚朝鮮人追悼碑>プロジェクトを後援してくださった々にささやかな感謝のしるしにはなるといます

 

 

また今後半年間続くこのプロジェクトにして最後まで関心っていただきプロジェクトが成功するように後援けてくださるといういもめられていますもやはりこの々の意思れずに固城統営でも結果せるよう最善くします

 

 

この意味深いプレゼントにいちいち著者サインをしてくださった兪俊画伯感謝いたします(jc, 202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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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노미야 방문단은 15권의 <수묵화로 보는 김대중>을 가져갑니다. 한국 유수의 수묵화가 유준 화백이 출판한 김대중 선생의 전기입니다. 이 책을 기증하는 데에는 박인호, 이원영 선생의 후원이 있었습니다.

 

 

처음에 12권을 준비한 것은 재일동포와 일본인 활동가 열두 분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조사연구를 꾸준히 후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름은 <조정희후원회>라고 붙였지만, 제 개인 후원을 위한 것은 아니고,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희생자 5분의 한국내 연고지를 조사하는 리서치를 특정해서 지원하신 것입니다.

 

 

이분들의 후원 덕분에 희생자 5분 중에서 김병순씨가 강원도 강릉 출신임을 밝힐 수 있었고, 윤길문, 오이근씨가 경상남도 고성군 출신, 남익삼씨가 경상남도 통영 출신임을 밝혀낼 수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장장수씨의 한국내 연고지는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리서치를 위한 기록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리서치의 결과를 바탕으로 강릉시는 2022<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건립에 기여하신 8분에게 감사패를 증정했습니다. 올해 하반기에는 고성군과 통영시에도 감사패 증정을 청원할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통영시와 고성군이 청원을 받아들여 준다면 내년 3월경 감사패 증정식을 조직하려고 기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강릉-통영-고성의 지원을 요청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주제로한 전재운 선생의 사진전을 진행하면서 이 프로젝트를 공식적으로 마무리하게 됩니다.

 

3년에 걸친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리서치가 가능했던 것은 후원회원들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분들은 조사경비를 지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조사에 필요한 기록과 자료를 찾아내는 데에도 도움을 주셨고, 강릉시의 감사패 증정식을 직접 조직해 주셨습니다.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이같은 사정을 전해들은 유준 화백은 후원회원들에게 자신의 최신 저서를 기증할 의사를 밝히셨는데, 이를 무상으로 받을 수 없었으므로 이원영, 박인호 선생께 도움을 요청했고, 두 분이 각각 5권의 <수묵화로 보는 김대중>의 값을 후원하셨습니다. 모자라는 2권은 유준 작가가 기증하셨고, 나중에 요청된 3권의 저서는 제가 마련했습니다. 15권의 책에는 저자가 직접 쓰고 서명하신 감사의 인사말이 들어 있습니다.

 

 

얼른 보기에는 <수묵화로 보는 김대중>은 내용상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와 직접 관련이 없어 보일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의 민주화와 경제위기 극복, 그리고 남북화해를 위해 많은 업적을 내신 분이지만, 그의 기본 철학은 인간의 기본 권리로서의 인권을 강조하셨던 분입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도 희생자들을 발굴하고, 기록하고, 1백년이 넘도록 위령제사를 지내오신 분들의 인권의식의 발로였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김대중 대통령은 박정희 독재치하에서 현해탄에 수장될 위기에 처했을 때, 그를 구출한 것은 일본인 활동가들의 적극적이고 발빠른 구명운동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일본인 활동가들과 재일동포들에게 <수묵화로 보는 김대중>을 선물하는 것은 뜻깊은 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후원회원분들의 오랜 후원에 비하면 <수묵화로 보는 김대중>은 시기로 보나 값으로 보나 그리 큰 선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작은 선물로나마 그동안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프로젝트를 후원해 주신 분들에게 작은 감사의 표시는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앞으로 반년 동안 계속될 이 프로젝트에 대하여 끝까지 관심을 가져주시고, 프로젝트가 성공하도록 후원을 계속해 주십사는 당부의 뜻도 담겨 있습니다. 저도 역시 이분들의 뜻을 잊지 않고, 고성과 통영에서도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뜻 깊은 선물에 일일이 저자 사인을 해 주신 유준 화백께 감사드립니다. (jc, 202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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