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는 내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이 추도비를 건립하기 위해 20년의 노력을 기울이신 콘도 도미오 선생님, 그리고 희생자들을 위해 1백년이 넘도록 제사를 지내오신 일본인들과 재일동포들에게 존경심도 솟았다.
콘도 선생께서 나에게 희생자들의 한국 내 연고를 찾아달라는 부탁하셨을 때 망설임 없이 승낙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희생자 다섯 분에 대한 연민의 마음과 함께 이분들을 제사하고 추도비까지 세우신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희생자 김병순씨의 고향이 강원도 강릉임이 문헌으로 확인되자, 나는 강릉시에 청원을 냈다. 추도비 건립자들에게 감사패를 증정해 달라는 청원이었다. 이것은 억울한 죽음을 당한 김병순씨를 기억하는 방법일 뿐 아니라, 김병순씨의 희생이 잊히지 않도록 애쓰신 일본인과 재일동포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이 청원에 여러 사람이 동참했다. 한국 <팀아이>의 정철훈 선생, 사진작가 안해룡 선생도 참여했고, 김성수기념사업회의 홍진선 이사장, 네트피아의 유선기 사장, 강릉원주대학의 강승호 교수 등, 강릉의 활동가들도 동참했다. 특히 김병순씨의 족보를 찾아내 그의 강릉 연고를 밝히는 단서를 발굴해준 강릉 경주김씨 종친회의 김자정, 김철욱 선생도 청원에 참여하셨고, 일본에서도 효고현의 정세화, 스미애 다이꼬꾸(大黑澄枝) 선생이 함께 해 주셨다.
이 청원은 강릉 시의회를 경유해 강릉 시청에 접수되었고 청원내용의 확인을 거쳐 받아들여졌다. 감사패 증정 대상도 여덟 사람으로 결정되었다. 일본인 여섯 분(콘도 도미오, 히다 유이치, 호리우치 미노루, 타마노 세이조, 아다치 타이쿄와 아다치 치쿄 부부)과 재일동포 두 분(정홍영, 김례곤)이었다.
강릉시청이 청원을 신속하게 받아들여 준 것은 청원 내용이 의미있다는 판단 때문이었겠지만 거기에는 콘도 도미오 선생의 건강이 악화된 것도 큰 역할을 했다. 청원서를 낼 즈음 2021년 11월에 콘도 선생께서 병원으로부터 6개월 남짓의 시한부 삶을 선고받으셨기 때문이다.
감사패 증정이 결정된 것은 2022년 1월말이었다. 도쿄 소재 강원도대표부의 강병직 본부장과 문미현 부장이 직접 다카라즈카를 방문해 청원내용을 확인한 직후였다. 이후 강병직 본부장은 강릉시청의 박종시, 이준하, 박인순 계장 등의 실무진과 협력해서 신속하게 감사패가 전달되도록 애쓰셨다.
김한근 강릉시장 명의의 감사패는 2022년 3월26일 전달되기로 결정됐지만 사정이 급박해졌다. 콘도 선생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마음이 급해진 청원자들과 실무자들은 감사패 전달이 결정되자마자 제작을 서둘렀지만 콘도 선생의 용태는 급속히 나빠졌다. 강릉시청의 담당 공무원들은 콘도 도미오 선생을 위한 감사패를 먼저 제작해 보내기로 했지만 그래도 시간이 모자란 듯 했다.
결국 강릉시청의 박인순 계장님은 콘도 도미오 선생의 감사패가 완성되자마자 이를 사진으로 찍어서 강병직 본부장과 나에게 보내주셨고, 나는 이 감사패 사진을 정세화 선생을 통해 콘도 도미오 선생에게 전달되도록 했다. 혼수상태가 계속되던 콘도 선생님은 잠깐 정신이 돌아오신 사이에 감사패 사진을 보신 후에 숨을 거두셨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른 7분에게 대한 감사패는 예정대로 3월26일 전달되었다.
일본에는 양심적인 학자들과 활동가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한일관계가 어느 한쪽의 자존감을 상하지 않은 채 상생과 협력관계로 발전하기를 바란다. 콘도 도미오 선생이 바로 그런 분들 중의 한 분이었다.
대한민국의 지방정부가 한국을 사랑하는 일본인 활동가들에게 공식적으로 감사를 표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콘도 도미오 선생께서 생전에 그 같은 감사를 받고 돌아가신 것은 안타까운 상황에서나마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다. (계속)
나는 콘도 도미오 선생님을 직접 뵌 적이 없다. 재일동포 사진가 정세화 선생님의 소개로 라인(LINE) 단톡방에서 만나 약 2년 동안 대화를 나눴을 뿐이다. 그런데도 콘도 선생님은 내가 그 동안 수행한 세 프로젝트를 위해 큰 도움을 주셨다.
첫째는 최승희 연구였다. 콘도 선생은 일본 조사에서 발굴된 1930년대의 고문헌 자료 해석을 도와주셨다. 내가 읽을 수 없는 부분을 사진으로 찍어서 ‘라인’ 문자로 콘도 선생님께 문의하면 대개 24시간 안에 답을 주셨다. 특히 최승희 선생의 나고야 공연에 대한 글을 쓸 때에는 콘도 선생께서 큰 도움을 주셨다.
둘째는 재일조선학교 무용부에 <무용신> 보내기 캠페인이었다. 이인형 선생과 함께 재일 조선학교 무용부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선물하기 시작했는데, 콘도 선생께서 정세화 선생과 함께 결성하신 청소년 지원단체 <팀아이>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팀아이>란 ‘아이’들을 ‘사랑(愛)’으로 ‘지켜보는(eye)’ 팀이라는 뜻으로, 콘도 선생께서 직접 지으신 이름이다. 한중일미 4개국 말의 동음이의어를 절묘하게 조합한 멋진 이름이었다. 그 이름과 취지가 좋았기 때문에 우리 모임도 <팀아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2021년 11월 오사카에서 열린 재일 조선학교 깅키(近畿)지역 무용경연대회에 콘도 선생께서 직접 참석하셔서 무용신도 전달하시고 격려사도 하셨다. 무용신 프로젝트는 콘도 선생과 정세화 선생의 <팀아이>가 없었다면 오래 계속되지도, 좋은 결과를 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셋째,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조사였다. 내가 콘도 선생님과 가까워진 것은 이 조사 덕분이었다. 콘도 선생님은 내게 추도비 주인공들의 한국 연고를 조사해 달라고 부탁하셨고, 조사 과정에서 격려와 도움을 아끼지 않으셨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는 다카라즈카 기리히타 소재 시립 사쿠라 공원 신수이 광장에 세워진 조선인 노동자들을 기리는 추도비이다. 이 비에는 1910년대와 1920년대에 효고현 수도공사와 철도공사에서 사고로 사망하신 다섯 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김병순, 장장수, 남익삼, 윤길문, 오이근씨 등이 바로 그분들이다.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공사에서 사망하신 분들을 함께 추도하는 이 추도비가 세워진 것은 콘도 선생의 노력의 결실이었다.
콘도 선생은 재일동포 지역사 연구자 정홍영 선생님과 함께 이 다섯 희생자의 사망 경위를 조사하여 기록으로 남기는 한편, 그분들을 위한 제사도 지내기 시작하셨다. 정홍영 선생님은 정세화 선생의 부친으로 고베 니시노미아 고요엔(甲陽園)의 지하호에서 조선인 노동자가 쓴 “조선국 독립”이라는 문자를 발견하신 분으로도 유명한데, 그 발굴현장에는 콘도 선생도 계셨다.
조선인 희생자들을 위한 제사는 사고 현장이었던 옛 후쿠치야마선 제6호 터널 앞에서 매년 열렸다. 해가 거듭될수록 일본인과 재일동포의 참여가 늘어났다. 정홍영 선생은 “이분들을 위한 추도비를 건립하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2000년 1월 타계하셨다.
한편 1914-15년에 고베수도공사 중에 사망하신 세 분의 유해는 니시타니 마을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고, 그 위패는 인근 불교사찰 만푸쿠지(滿福寺)에 모셔져, 3대에 걸친 주지 스님과 이 마을의 부녀회원들께서 1백년이 넘도록 무연고자 추모 제사를 지내오셨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콘도 도미오 선생은 철도공사 희생자와 수도공사 희생자를 위한 합동 추도비를 건립하기로 하셨고, 마침내 2020년 3월26일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건립되었다. 정홍영 선생이 남기신 뜻이 콘도 선생에 의해 20년 만에 빛을 본 것이다.
추도비 건립에 그치지 않고 콘도 선생은 나에게 희생자들의 한국 연고를 찾아달라고 하셨다. 나는 다각도의 조사 끝에 그 중 한 분인 김병순씨의 고향이 강원도 강릉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콘도 도미오 선생에게 알려드릴 수 있었다. 콘도 선생께서는 무척 기뻐하셨기 때문에 나는 다른 네 분의 연고를 찾는 일에도 열심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계속)
일본 효고(兵庫)현에 <무쿠게회(むくげの会)>라는 단체가 있다. <효고조선관계연구회>와 함께 대표적인 한국관련 연구단체이다. ‘무쿠게’는 무궁화(無窮花)를 일본어 발음으로 읽은 것이니, 이 단체가 한국에 우호적인 모임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미디어에 전해지는 뉴스에는 혐한단체 이야기가 많지만, 사실 일본에는 친한 단체도 적지 않다. <무쿠게회>의 연구자들은 대부분 한일 식민지 강점시기를 불행한 시기로 여기고, 과거에 대한 사과와 용서와 화해, 그리고 상생과 협력의 미래를 열기 바란다. 일본 주류 분위기와 거리가 있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고 잘 들리지는 않지만, 그들도 힘껏 목소리를 내고 있다.
나는 <무쿠게회>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최승희 조선무용> 연구와 <재일 조선학교> 후원, 그리고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조사하면서 <무쿠게회> 회원들로부터 도움을 받았고, 그 월간 소식지 <무쿠게통신>에 실린 글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런데 2022년 3월27일자 <무쿠게통신>에 부고가 실렸다. 콘도 도미오(近藤富男) 선생의 타계를 알리는 히다 유이치(飛田雄一) 선생의 추도문이었다. 이 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콘도 도미오씨가 지난 2월10일 사망했다. 1969년 3월말 고베대학 입학 시에 신입생으로 처음 만난 것이 그였다. 나는 농대 원예농학과였고, 그는 축산학과였다.”
나는 깜짝 놀랐다. 콘도 도미오 선생이 타계하셨다는 소식이나 명문 고베(神戶)대학 출신이셨다는 소개 때문이 아니었다. 타계 소식은 정세화 선생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고, 히다 선생과 콘도 선생이 신다이(神大) 졸업생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고베대학은 교토대학, 오사카대학과 함께 일본 간사이(關西) 3대 국립대학이며, 일본 전체에서도 톱10에 드는 명문대학이다.
그러나 콘도 도미오 선생의 전공이 ‘축산학’이었다는 점은 짐작도 못했다. 그는 평생을 국어, 즉 일본어 교사로 살아오신 분이었다. 1974년부터 다카라즈카 시립 아쿠라(安倉)중학교의 일본어 교사였고, 은퇴하신 뒤에도 코리아국제학교에서도 일본어 교사로 근무하셨다. 그래서 나는 콘도 선생의 전공이 당연히 일본어 혹은 일본문학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오해는 콘도 도미오 선생의 도움을 받으면서 더 굳어졌다. 무용가 최승희 선생에 관한 1930년대 일본문헌을 조사하다보면 현대 일본어와 표현이 다르거나, 심지어 철자가 다른 말들도 자주 나오는데, 그럴 때마다 콘도 선생이 명쾌하게 풀어주셨다. 그는 현대 일본어뿐 아니라 고문에도 능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분의 학부 전공이 ‘축산학’이라니...
1970년대 초에 ‘축산학’을 전공하셨으니 돈 잘 버는 직업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원예농학’을 전공하시고 한국사 연구자가 되신 히다 유이치 선생도 마찬가지다. 이분들이 명문 국립대학에서 유망한 분야를 전공하시고도 한국관련 학자와 활동가가 되신 이유가 궁금했다. 콘도 선생이 계신다면 당장 문자로 여쭤 보았을 텐데, 이젠 대답을 직접 들을 수가 없다.
콘도 선생은 <무쿠게회>의 회원들과 늘 가깝게 지내셨지만, 회원으로 가입하신 것은 2018년 11월로 최근의 일이다. 콘도 선생은 <무쿠게회> 가입 전부터 <무쿠게통신>에 글을 기고하셨는데, 첫 글이 부산과 비무장지대 방문기이다. 일제 강점기의 유적을 살피고 한반도 분단의 아픔을 공감하는 글이다. 콘도 선생의 한국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다.
그가 <무쿠게통신>에 기고한 학술적인 글이 2개 있다. 하나는 2019년에 5회에 걸쳐 연재한 <한자와 한글>이라는 글이다. 이 글의 부제는 “한자를 사용하지 않는 일본어를 만들기 위하여”이다. 한자병용을 버리고 한글전용으로 돌아선 한국어처럼 일본어도 한자를 버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평생 일본어 교사였던 분의 견해이니 일본 어문학자들도 귀담아들을 일이다.
다른 하나는 2021년부터 2022년까지 9회에 걸쳐 기고한 <서울시와 경기도의 친환경 무상급식>이라는 글이다. 한국의 학교 급식이 일반복지를 위해 ‘무상’으로, 시민 건강과 농가 부양을 위해 ‘친환경 유기농’으로 실시되는 것을 높이 평가하신 글인데, 유전자 조작이 없는 유기농 농축산물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축산학 전공자의 견해가 잘 나타나 있다. (계속)
추도비문은 많은 실마리를 주지 않았지만 핵심 정보를 제공했다. 희생자들의 이름과 그들이 참여한 공사와 사망한 사고가 기록되어 있었다. 윤길문(尹吉文), 오이근(吳伊根)씨는 옛국철 후쿠치야마(福知山)선 개수공사 중에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로 사망했고, 김병순(金炳順), 남익삼(南益三), 장장수(張長守)씨는 고베수도가설공사 중에 터널붕괴사고로 사망했다고 했다.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는 신문기사로 확인되었다. 1929년 3월28일자 <고베신문>과 <고베유신일보>에 사고 상황과 희생자 명단이 보도되었다. 이번 조사에서 <아사히신문 도쿄판>과 <오사카아사히신문>의 기사도 추가로 발굴되었다. 전자는 도쿄 소재 일본국가기록원의 기록관리사 쿠누기 에나(功刀恵那)씨가 찾아 주셨고, 후자는 정세화 선생이 고베도서관에서 발굴하셨다.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 발굴된 4개의 신문기사를 종합하면 이 다이너마이트 사고로 윤길문(21세), 오이근(25세)씨가 사망하고 윤일선(尹日善, 25세), 여시선(余時善, 19세), 오이목(吳伊目, 연령 미상)씨가 중경상을 입었는데, 피해자들은 모두 경상남도 고성과 통영 출신이었다.
다이너마이트 사고보다 15년 전에 발생했던 고베수도공사 터널붕괴사고에 대한 신문기사는 발견되지 않았다. 1910년대의 일간신문은 발행면수가 적었기 때문에 산간 오지에서 발생한 공사장 사고까지 보도되기 어려웠던 것 같았다. 그러나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의 사망 사실은 사고지역인 니시타니무라(西谷村)의 촌사무소가 발행한 매장인허증으로 확인되었다.
김병순씨의 매장인허증에는 그의 매장 일시가 1914년 8월3일 오후2시 이후로 명시되어 있었다. 오지에서 사고로 사망한 조선인 노동자 김병순씨의 장례가 3일장이나 5일장으로 치러졌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아마도 그는 8월2일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8월3일 오전에 매장인허증이 발행되자마자 당일 오후에 매장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매장인허증에 기록된 김병순(金炳順)씨의 한자 이름에 잘못이 있었다. 이름의 두 번째 글자가 ‘잡을 병(抦)’ 혹은 ‘자루 병(柄)’자로 보였지만, 이는 ‘빛날 병(炳)’의 오기였다. 한국에서는 ‘불 화(火)’변이 부가된 ‘빛날 병’자가 이름자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고, 실제로 훗날 발굴된 족보 자료에서도 김병순씨의 이름을 ‘金炳順’으로 기록해 놓고 있었다.
매장인허증에는 김병순씨의 생년월일도 기록되어 있었는데 메이지(明治)16년, 즉 1883년 5월19일이었다. 따라서 사망 당시 김병순씨의 나이는 만31세(+약3개월)였다.
김병순씨의 최종거주지 주소는 카와베군(川邊郡) 니시타니촌(西谷村)의 타마세(玉瀨)였다. 번지수는 나와 있지 않았지만 당시 거주 인구가 많지 않았을 이 지역에서는 이 정도의 주소만으로도 신원을 밝히기에는 충분했을 터였고, 우편물도 제대로 배달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김병순씨의 최종 주소지는 그 지역의 조선인 노동자 합숙소(이른바 함바飯場)였을 가능성이 크다.
김병순씨의 한국 내 연고를 찾기 위해 필요한 가장 중요한 정보는 본적지 주소였다. 매장인허증에는 “조선 강원도 강릉군 북일리(北一里) 대천동(大天洞)”라고 되어 있었다. 즉 김병순씨의 고향은 강원도 강릉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1914년 8월3일에 작성된 이 주소를 오늘날의 주소로 바꿀 수 있다면 김병순씨의 연고지를 찾을 길이 열리는 것이다.
다만 이 주소에 이상한 점이 있었다. 도(道)와 군(郡), 리(里)와 동(洞)이 명시된 것은 좋으나 ‘군’과 ‘리’ 사이에 면(面)이 빠져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의 강릉시 지명 중에는 ‘대천동’이라는 이름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강점 이후 1백여년 동안 조선의 지역 구획과 지명 변동이 많았으므로 그 계보를 차분히 조사해 나가면 실마리가 발견될 것으로 여겨졌다. 지금으로서는 ‘김병순씨의 고향이 강릉’이라는 점이 밝혀진 것만도 대단한 소득이었다.
일본 매장인허증에 본적이 ‘강릉’으로 명시되었더라도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강릉의 호적이나 족보 기록을 찾아 일본과 한국의 기록이 일치하는지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기록이 반드시 완전하거나 확실하다고 보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
2020년 11월초 2차 무용신 캠페인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서 나는 비로소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주인공들을 찾아 나설 여유가 생겼다. 출발점은 당연히 추도비의 기록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추도비를 직접 본 적이 없었다. 다카라즈카와 고베, 오사카 등지를 취재하러 다녔던 2020년 3월초까지는 추도비가 세워지기 전이었고, 2020년 3월26일 추도비가 세워진 후에는 일본을 방문할 수 없었다. 때마침 불거진 한일 양국의 경제마찰과 양국의 코로나19 방역 정책이 중첩되면서 기존에 자유롭던 한,일 여행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도비가 희생자 조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나는 정세화 선생에게 추도비의 사진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비석의 전,후면과 좌우 측면, 받침대와 상단에 이르기까지 꼼꼼하게 촬영해 달라고 했다. 정세화 선생은 곧 사진을 보내 주셨고, 나는 추도비 희생자 연구를 위한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자료인 추도비 사진들을 꼼꼼이 살펴보았다.
추도비는 2개의 거대한 장방형의 돌이 2단으로 겹쳐져 세워져 있었고, 전면에는 <월조남조>라는 글귀와 함께 그 하단에 희생자 5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후면에는 추도비를 세운 이유와 목적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월조남지, 철새는 고향을 잊지 않고 머나먼 조국의 방향으로 뻗은 가지에 둥지를 만든다고 합니다.
“1914년부터 약 15년간 진행된 <고베시 수도터널공사> 중에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도 3명의 조선반도 출신 노동자가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이는 센가리 수원지에서 고베시까지 깨끗한 물을 보내기 위한 어려운 공사였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옛 국철 후쿠치야마선 부설 후, 이곳 무코강변에서 자주 일어나는 범람과 토석류로부터 철도를 지키기 위한 개수공사 중, 1929년 3월26일에 두 명의 조선반도 출신자가 폭발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역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수도와 철도 건설현장에서 희생된 다섯 분을 애도하면서, 사고를 잊지 않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 이 추모비를 건립합니다. 2020년 3월26일.”
비문에 따르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세운 목적은 두 가지이다. “희생된 다섯 분을 애도”하고 “사고를 잊지 않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이다. 지역생활에 중요한 근대적 기반시설을 건설하는 중에 순직한 분들을 애도하고 잊지 않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어서 추도비 건립을 주도한 단체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 <추도비 건립 모임>과 <다카라즈카시 외국인시민문화교류협회(이하 교류협회)>, 그리고 <목련회>의 세 단체이다. 이 세 단체의 구성과 활동, 대표자들에 대한 서술은 다른 글에서 이뤄졌으므로 여기서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 세 단체를 결성하거나 주도한 인물은 일본인 콘도 토미오 선생과 재일동포2세인 김예곤 선생이었음을 밝혀두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고베수도공사>와 <후쿠치야마선 개수공사>의 사고와 희생자들을 밝혀낸 정홍영 선생이 2000년 1월에 타계한 후에도 콘도 토미오 선생은 추도와 제사를 계속했다. 시간이 가면서 추모 제사의 규모가 커지면서 2013년에는 <교류협회>가 정식으로 추모 제사에 참여했고, 2017년 5월 <고베수도건설공사 및 구국도 후쿠치야마선 개수공사 중의 사망자 추도비를 건립하는 모임>(이하 <추도비건립모임>)이 발족되면서 추도비 건립은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는 다른 조선인 추도비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 있었다. 추도비 건립 당시의 다카라즈카 현직 시장 나카가와 도모코(中川智子) 씨가 ‘슬퍼할 도(悼)’자를 써 보냈고, 이를 추도비의 후면에 새긴 것이다. 일본에서는 물론 효고현과 다카라즈카 지역에서도 특히 조선인 추도비의 문제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였다. 그런 상황에서 현직 정치인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추도의 뜻을 나타낸 것은 대단히 용기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
2020년 3월 초 서울로 돌아온 뒤로 한동안 조선인 추도비를 잊고 있었다. 이미 조사한 최승희 관련 자료들이 상당히 쌓였기 때문에 이를 분류하고 번역해 정리하는 데에 여러 달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정세화 선생은 내가 최승희 자료를 정리하는 것도 도와주셨다.
2018년부터 2년여 동안 일본의 42개 도시에서 수집해온 최승희 관련 자료 중에는 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이 많아 흥미로웠지만, 애써 수집한 자료 중의 일부는 제대로 읽거나 해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복사된 자료들 중에는 읽지 못할 정도로 활자가 흐리거나 뭉개진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원본이 그런 경우도 있었고 복사가 잘못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대체로 1930년대 후반 이후의 신문 기사들은 원본이 좋지 않았는데 이는 1937년 중일 전쟁이 시작되면서 일제의 물자 통제로 신문 인쇄에 필요한 잉크도 배급제가 실시됐고, 따라서 신문사들은 상시적으로 잉크가 모자랐다고 한다. 그래서 이 시기부터 일제 패전까지의 신문들의 인쇄는 상태가 매우 나빴다.
활자를 읽을 수 있는데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1920-30년대의 일본어는 철자와 용례가 현대 일본어와 다른 점이 꽤 많았다. 오늘날 일본 대학입시에서 ‘현대일본어’와 별도로 ‘일본어 고문’ 과목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고 한다. 이 고문 과목에는 메이지유신(1876)이래 1930년대까지의 글들이 많이 출제된다고 한다. 따라서 일본어 고문에 해당하는 1930년대의 신문기사를 읽을 때는 오늘날의 사전이나 번역기가 소용없는 경우가 많다.
정세화 선생은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도움을 주셨다. 정세화 선생과 둘이서 연락하던 라인(LINE) 방에 콘도 토미오(近藤富男) 선생과 신도 도시유키(真銅敏之) 선생을 초대해서 함께 문자를 나눌 수 있게 해 주셨다. 내가 자료를 읽다가 막히면 그 부분을 사진으로 찍어서 라인 단톡방에 올렸고, 콘도 선생과 신도 선생께서 시간 되시는 대로 그 부분을 읽어주시고 해석도 해 주셨다. 덕분에 나는 수집해 온 자료들을 쑥쑥 읽어나갈 수 있었고, 필요한 부분들은 번역해서 기록으로 남겨둘 수 있게 됐다.
라인 단톡방을 통해 이루어진 일이 또 하나 있었다. <무용신 보내기> 2차 캠페인이 시작된 것이다. 한국에서는 1차 캠페인 때부터 이인형 선생의 합류로 활력과 추진력이 생겼는데, 일본에서도 콘도 토미오 선생과 신도 도시유키 선생께서 참여하시기로 한 것이다.
일은 점점 커져서 일본에 조선학교를 지원하는 시민단체 <팀아이>가 결성되었고, 콘도 토미오 선생께서 초대 회장으로 취임하셨다. <팀 아이(チームアイ>라는 이름도 콘도 토미오 선생께서 직접 지으셨는데 “아이들을 사랑(愛)으로 지켜보며(eye) 돕는 팀”이라는 뜻이라고 하셨다. 회원 모집도 이뤄져서 약 15인의 회원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일본 <팀아이> 출범에 자극을 받아 한국 <팀아이>도 결성되었다. 9명의 회원들이 모여 조선학교 무용부를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한국 <팀아이> 회원은 아직 공개모집할 단계가 아니었으므로 이인형 선생과 나의 대학 동문들이 대부분이었다. 먼저 황웅길, 강충호, 정철훈, 권홍우 선생이 참여하셨고, 곧이어 정회선, 이원영, 조성무 선생도 합류해 주셨다.
일본 <팀아이>는 재일 외국인 학생들을 전체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단체의 목적이었지만, 한국 <팀아이>는 지원의 대상을 재일 조선학교로 규정했다. 그러나 일본, 특히 다카라즈카가 속한 효고현에서는 외국인 중 재일조선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80% 이상이었으므로 한국과 일본의 <팀아이>가 재일 조선학생 지원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는 없는 셈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팀아이>가 협력해 이룬 첫 번째 사업이 제2차 <무용신> 캠페인이었다. 고베에서 오사카와 교토를 거쳐 나고야 지역에 이르는 일본 깅키(近畿) 지역의 조선학교 무용부 학생 160명에게 무용신을 보내는 것이 목표였다. 두 번째 <무용신> 프로젝트도 성공적이어서, 일본 <팀아이>의 회장이신 콘도 토미오 선생께서 2020년 11월 오사카에서 열린 <깅키지역 중앙예술경연대회>에 참석해 학생들에게 직접 무용신을 전달해 주셨다. (*)
첫 무용신을 선물하기 위해 고베를 방문했을 때 정세화 선생은 내게 자신의 절친 신도 도시유키(신도근동) 선생을 소개하셨다. 신도 선생은 정세화 선생의 부친 정홍영 선생과 함께 지역의 조선인 관련 사적을 답사하면서 연구 활동에 참여했던 분이었다. 고베의 니시노미야 지하호에서 “푸른 봄”과 “조선독립”이라는 벽서를 발견한 것도 정홍영-신도 도시유키 답사조였다.
정세화 선생은 이때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거의 준비되었고 3월26일에 세워질 것이라고 알려 주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최승희 연구자인 내게 조선인 추도비 이야기를 자꾸 해 주시는 게 조금 의아했다. 그 의문은 고베를 떠나기 전, 정세화 선생을 마지막으로 만나 식사를 하면서 풀렸다.
내가 시코쿠와 고베, 도쿄와 오사카 등을 방문하면서 동포 분들을 만날 때마다 스스로 ‘최승희 연구자’라고 소개했고, 일본 조사에서 발굴된 최승희 선생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곤 했다. 특히 최승희 선생의 지역 공연 에피소드를 이야기해 드릴 때마다 듣는 이들은 흥미로워했다.
예를 들면 최승희 선생이 우와지마 공연에서는 공연 수익금을 그 지역 도서관 건립에 기부해서 그 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이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며, 나고야 공연 수익금을 조선인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에 전달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삿포로 공연 수익금을 올림픽에 출전하는 스키 선수들의 여비로 쾌척했다는 이야기들을 해 드리곤 했다. 그러면서 항상 소지하는 랩탑 컴퓨터에 고이 저장된 신문, 잡지 기사들을 증거삼아 보여드리곤 했었다.
정세화 선생이 내게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주인공들을 찾아줄 수 있겠느냐고 처음 말을 꺼낸 것도 내가 수집한 자료들을 보고난 직후였다고 한다. 80여년전의 최승희 선생의 행적을 고신문과 잡지, 자서전과 예술사 서적들을 통해 밝혀내고 있는 것을 보시고, 혹시 조정희 선생이 1백년 전에 억울하게 돌아가신 다카라즈카의 조선인들의 행적도 찾아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런 부탁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내 능력의 한계를 이유로 거절하고 싶었다. 우선 나는 한국 근대사나 한일관계사 전공자가 아니었다. 일제강점 초기의 노동이민은커녕 후기의 강제동원의 역사도 잘 몰랐다. 비교적 오랜 학문 생활을 통해 나는 자기 전공이 아닌 분야에 발을 들여놓으면 각별히 주의해야 함을 잘 알고 있었다. 사회학 안에서도 일탈사회학 하던 사람이 예술사회학으로 분야를 바꾸면 초심자처럼 행동해야 한다. 이미 가진 학위나 장서, 지식과 경험이 거의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연구 대상의 성격이었다. 최승희 선생은 당대 최고의 예술가였고 그의 활동 범위도 일본 전역이었다. 따라서 그가 가는 곳마다 행적이 당시 언론에 보도되었다. 각 지역의 도서관이나 기록보관소에는 그 기록들이 잠들어 있었고, 나는 재주껏 그 기록을 찾아서 깨우기만 하면 되었다. 실제로 그렇게 기지개를 켠 기록은 엄청나게 많기는 했다.
그러나 추도비의 조선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생존 당시 차별받는 조선인 노동자였고,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을 사망하게 한 사고에 대한 기사는 발견될 수 있겠지만 희생자들의 인적 사항이나 생존시 사정에 대한 정보가 얼마나 기록으로 남아있을지 알 수 없다. 유명 인기인이었던 최승희 선생과는 달리 무명인들이었던 조선인 노동자들에 대한 기록을 발굴해 내기란 대단히 어려울 수 밖에 없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정세화 선생의 부탁을 대놓고 거절하지 못했다. 평소 장난기와 익살이 가득한 그의 얼굴이 그 부탁의 말씀을 하시는 동안 매우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조선인 추도비는 정세화 선생의 가계와도 관련된 문제였다. 조선인 추도비의 건립은 그의 부친 정홍영 선생이 1970년대에 시작하셨던 지역사 연구의 마지막 단추였던 것이다.
나는 다소 자신없는 목소리로 정세화 선생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연구자는 자료가 없으면 꽝입니다. 일단 어떤 자료들이 남아 있는지 살펴봅시다.” (*)
2019년 11월 오사카 <재일조선학생 중앙예술경연대회>를 참관하면서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대해 처음 들었고, 2020년 1월 고베의 <고베조고 취주악연주회>를 참관하면서 자세한 전후 사정을 알게 되었지만, 추도비에 대한 내 역할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없었다.
그보다는 재일 조선학교의 무용부에 점점 끌렸고, 그들이야말로 1930년대에 일본 땅에서 조선무용을 처음 시작했던 최승희 선생의 진정한 후예들이라는 믿음이 점점 강해졌다. 그리고 이 학생들의 노력에 무언가 도움이 되고 싶은 생각이 자꾸 떠올랐다.
때마침 두 번의 만남으로 급속히 가까워진 정세화 선생이 한 가지 제안을 하셨다. 정세화 선생이 나의 최승희 연구를 돕는 한편, 나는 조선학교를 도우라고 하신 것이다. 일본 내 인맥이 전혀 없는 나로서는 최승희 연구를 돕겠다는 정세화 선생의 제안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내가 어떻게 조선학교를 도울 수 있을지 몰랐다.
서울로 돌아와 연락을 계속하던 중 나는 무용부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선물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고 정세화 선생도 좋다고 하셨다. 멋진 취주악 연주회를 열어준 고베조고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즉 고베조고 무용부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한 켤레씩 선물하기로 한 것이다. 고베조고는 정세화 선생의 모교이기도 했기 때문에, 내 제안에 대단히 흐뭇해 하셨던 것 같다.
결정이 되자 정세화 선생은 고베조고 무용부 학생들의 명단과 각 학생들의 신발 치수를 파악하기 시작하셨고, 나는 일반 모금을 시작했다. 오랜 외국 생활로 과거의 인맥이 거의 끊어진 나로서는 특정 지인들에게 기부를 요청할 방법은 없었고, 어차피 일반 모금을 해야 했다. 내가 하는 sns는 페이스북 밖에 없었으므로 거기서 출발하기로 했다.
이때 큰 원군이 나타났다. 최승희와 재일조선학교, 그리고 무용신 이야기를 듣고 이인형 선생이 동참해 주신 것이다. 이인형 선생은 발이 아주 넓어서 모금운동을 주도하기에 적임자였다. 그는 몸담아 활동하는 단체가 아주 많았고, 그중 일부에 나를 소개도 해 주셨다. 나도 고등학교와 대학 동창모임을 중심으로 지인들을 찾아 협조를 당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장 많은 노력은 페이스북에 기울였는데, 약 2주일 동안 계속된 모금운동에서는 97만원의 성금이 모금되었다. 정세화 선생이 파악해 주신 고베조고 무용부의 인원은 26명이었고, 지도교사를 포함해서 27켤레의 무용신을 준비하면 되었다. 97만원의 예산으로는 27켤레의 무용신 대금으로 충분했다.
그때 정세화 선생이 다시 제안을 하셨다. 무용신을 얼마간 더 주문할 수 있으니 마츠야마 소재 시코쿠 조선학교에도 무용신을 보내면 어떻겠느냐고 하신 것이다. 나는 좋다고 했고, 정세화 선생은 시코쿠 조선학교 무용부원과 지도교사를 위한 무용신의 신발칫수 조사하셨다.
무용신의 전달 시기는 3월초의 졸업식에 맞추기로 했다. 고베조고의 졸업식은 3월1일이었고, 이 행사에 맞춰서 모금운동을 주도했던 이인형 선생과 내가 이 졸업식에 참석해 무용부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전달하기로 했다.
이인형 선생보다 먼저 출국한 나는 먼저 마츠야마에 들러 시코쿠 조선학교에 무용신을 전달했다. 무용부 학생이 5명에 불과했던 시코쿠 조선학교에서는 작은 무용발표회를 열어가며 환영해 주었고, 그런 환대를 받고 보니 내가 오히려 미안할 정도였다.
고베조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졸업식이 끝난 후에 무용부 학생들이 한데 모인 가운데 정세화 선생이 정성껏 준비해 주신 무용신을 무용교사에게 전달했다. 무용신을 하나씩 전해 받은 학생들은 너무너무 고마워해서 우리가 몸 둘 바를 모를 정도였다.
그날 시코쿠와 고베에서 오고간 것은 ‘무용신’만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무용신 한 켤레는 그리 비싼 물건도 아니고, 뭐 영원히 남을 선물도 아니다. 그러나 학생들과 교사들에게 대한민국 동포들이 재일조선인을 잊지 않고 있음을 전달하기에는 충분했던 것 같다. 시코쿠와 고베에서의 아름다운 경험 때문에 우리는 조선학교 무용신 선물을 확대해 가기로 했다. (*)
일본 효고(兵庫)현 다카라즈카(寶塚)시에서 북쪽으로 5킬로미터쯤 떨어진 키리하타(切畑)의 나가오(長尾)산 기슭에는 조선인 추도비가 하나 세워져 있다. 옛 국철 후쿠치야마선(福知山線) 폐선 부지에 조성된 벚꽃동산(桜の園) 입구, 신수이(新水) 광장에 세워진 이 비석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라고 불리고 있다.
이 추도비가 건립된 것은 2020년 3월26일이다. 일제강점 초기인 1910-1920년대에 이 지역에서 대대적으로 벌어졌던 토목공사 중에 사고로 사망하신 조선인 노동자 5인의 넋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현지의 일본인 시민과 재일동포들은 일본 초기 근대화를 위해 치러야 했던 이 분들의 희생을 잊지 않기 위해 추도비를 건립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사람의 키를 훌쩍 넘는 커다란 추도비의 전면에는 추도비 주인공들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 김병순(金炳順, 1914년 사망), 남익삼과 장장수(南益三, 張長守, 1915년 사망), 윤길문과 오이근(尹吉文, 吳伊根, 1929년 사망)의 5명이었다.
내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2019년 11월초였다. 그때 나는 <재일조선학생 중앙예술경연대회>를 참관하러 오사카에 갔다가 우연히 교분을 갖게 된 이타미 거주 사진가 정세화 선생으로부터 이 추도비가 건립중이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이 추도비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는데, 당시 나는 최승희 선생의 조선무용 일본 공연을 조사하는 일에 온통 정신이 팔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중앙예술경연대회>를 참관한 것도 무용경연대회를 보기 위해서였다. 이 무용경연대회를 통해 나는 재일 조선학교의 무용이 80여년전 최승희 선생이 시작했던 조선무용과 관련되어 있음을 확신했다.
그때까지 나는 다카라즈카를 두 번 방문했었는데, 그곳에서 열렸던 최승희 선생의 조선무용 공연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그 답사에서 다카라즈카 대극장을 포함해 시내 구석구석을 돌아보았지만, 그곳이 재일 조선인들의 밀집 주거지역이라는 것도 감지하지 못했었다.
나는 2020년 1월에 다시 고베를 방문했다. 정세화 선생의 초대로 고베조고의 연례 취주악연주회를 참관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비로소 조선인 추도비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이 추도비에 대한 현지인들의 관심이 아주 높다는 점과 이분들이 지극한 정성으로 추도비가 건립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비로소 ‘1백 년 전에 돌아가신 분들에게 왜 이렇게 정성을 다하는 것일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의문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고, 질문할 때마다 정세화 선생은 기다렸다는 듯이 사안의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주셨다. 추도비의 희생자들이 누구인지, 어떤 사고로 목숨을 잃었는지, 그리고 현지인들이, 인본인과 재일동포를 불문하고, 왜 그렇게 애착을 가지는지를 자세히 설명하셨다. 그리고 이분들이 희생자들의 한국 내 연고를 애타게 찾고 있다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일본인 콘도 토미오 선생과 재일동포 정세화 선생은 추도비 건립에 대해 각별한 열심을 내고 계셨다. 콘도 토미오 선생은 다카라즈카의 중등학교에서 국어(=일본어) 교사로 오래 재직하신 후 정년퇴임하신 분으로 2000년에 작고하신 재일동포 향토역사가 정홍영 선생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이 추도비를 꾸준히 추진해 오신 것도 알게 되었다.
정홍영 선생은 1970년대 후반부터 다카라즈카를 비롯한 효고현 곳곳을 조사하고 답사해 조선인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게 된 과정과 지역 토목공사에 참여한 상황, 이들이 받았던 차별대우와 악조건 속에서도 분투하며 이루어낸 조선인 공동체에 대한 기록을 남기셨다. 이러한 조사 내용은 그의 저서 <가극의 도시의 또 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에 담겨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건립은 정홍영 선생의 소원이었는데, 그가 타계하신 후 그의 오랜 연구 파트너이셨던 콘도 도미오 선생이 이를 이어 받았다. 다카라즈카 학술단체와 인권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콘도 도미오 선생은 정홍영 선생의 유지를 잊지 않았고, 결국 정홍영 선생 사후 20년 만에 그의 뜻을 이루어 드린 것이었다. (*)
이상의 상황을 고려할 때 김상민 연구사의 설명은 대부분 설득력이 있었다. 경상남도 고성의 8만인구 중에서 이미 1920년대부터 상당한 비율이 일본으로 도항했고, 도항자의 대부분은 남성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가면서 먼저 도항한 사람들이 주거와 일자리를 찾은 후 다른 가족들을 합류하도록 했기 때문에 노동이민자 수는 더욱 늘어났을 것이다.
윤길문씨의 경우도 아버지 윤재유, 삼촌 , 큰형 윤일선, 형수 여시선, 사촌형 윤창선 등의 가족들과 함께 다카라즈카로 이주하여 후쿠치야마선 철도공사에서 터널 굴파 노동에 종사하던 중 사망했던 것이다. 그와 함께 사망한 오이근씨도 오이목이라는 사람과 함께 거처하고 있었고, 두 사람의 이름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이들은 아마도 형제이거나 적어도 사촌형제였을 것이다.
김상민 연구사의 조사방법이 희망을 준 것은 사실이다. 윤길문, 오이근씨의 연고를 찾을 가능성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전적으로 기대할 수 없는 이유도 있었다. 첫째, 강제동원 피해자가 아닌 신고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했다. 적어도 수백명, 많으면 1천명이 넘을 수도 있었다. 이 신청서들은 전산 처리된 자료가 아니기 때문에 컴퓨터를 이용한 데이터베이스 검색이 불가능하다. 그 대신 일일이 신청서를 넘기면서 이름과 주소, 가족사항과 이주지 등의 정보를 일일이 살펴야 한다.
둘째, 그같은 지난한 조사를 통해서도 윤길문, 오이근씨의 연고를 찾을 가능성이 확실하지 않았다. 단적으로 윤길문, 오이근씨의 가족이나 친척, 후손이 강제동원 피해자 신청서를 제출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자세히 조사를 한다고 해도 찾아내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게다가 그럴 가능성은 대단히 높았다. 윤길문, 오이근씨가 사망한 것이 1929년이므로 이들이 경남 고성을 떠난 것은 그 이전이다. 이들의 나이가 이때 21세와 25세였으므로 대략 1905년에서 1910년 출생자들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일본으로 노동이민을 떠난 것을 직접 보았거나 1차로 전해 들었을 사람들의 나이는 2004년 현재 70세에서 1백세에 달할 것이다.그중에서 이들을 강제동원 피해자로 ‘착각’해 신고서를 제출한 사람이 얼마나 될른지는 쉽게 추정해 볼 수 있다.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는 것이다.
셋째, 만에 하나 윤길문씨나 오이근씨를 ‘강제동원 피해자로 착각한 신고서’가 접수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폐기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같은 신청서의 문서 보존연한은 통상적으로 3년 혹은 길어야 5년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살펴볼 신청서 자체가 폐기되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김상민 선생의 조사 방법이 가능하지 않게 된다면 다른 어떤 방법이 있는 것일까? 가진 자료는 ‘경남 고성군 고성면’ 출신의 ‘윤길문(尹吉文, 21세)’과 ‘오이근(吳伊根, 25세)’라는 한자 이름과 그들의 나이 밖에 없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사람의 이름이 많은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 본관과 이름의 항렬을 알면 이들의 친족관계가 폭넓게 파악될 수 있다. 이는 족보에 기록되어 있고, 족보에서 이들의 이름을 찾아내면 오늘날까지 생존한 가족들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으며, 그들의 협조를 받으면 호적 기록을 열람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들의 족보기록을 찾아내는 것이 또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탐문의 방법이 있다. 고성군 내의 집성촌을 찾아가 탐문하거나, 혹은 언론의 협조를 얻어서 공개적으로 윤길문, 오이근씨의 행적을 탐문해 가족을 확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윤길문, 오이근씨의 연고를 찾는 문제는 시간을 다투는 시급한 문제는 아니므로, 우선 김상민 선생의 조사를 기다려 보기로 하고, 서로 연락처를 교환한 후에 고성의 1차 취재를 마치기로 했다.
앞에서 일제의 국민동원령이 시작된 1938-45년 사이에 약 1백80만명이 군인, 군속, 노무자로 해외로 강제 동원되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약 2천만명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거의 10명 중의 1명꼴로 조선 밖으로 강제 동원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1938년 이후 ‘강제동원’ 피해자이다. 내가 연고를 찾고자하는 윤길문, 오이근씨는 1929년에 사망했으므로 국민동원령이 내려지기 전이었고, 따라서 자발적인 노동이민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여기서 ‘자발적’이란 용어는 ‘강제적’의 상대어로 쓰인 것일 뿐, 당시의 현실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요인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첫째는 한일 합방 직후에 시행된 토지조사사업(1910-1918년)때문이었다. 일제의 토지조사는 지주와 소유권을 강화하고 소작인의 소작권을 폐지하는 내용으로 진행되었으므로, 땅이 없는 소작인들의 농업 종사는 더욱 어려워졌고 생활은 피폐해졌다.
1920년 조선인 농가 중 자영농이 23%, 반자작이 37%, 소작농이 40%였던 것이 1940년이 되면 각각 18%, 23%, 59%로 바뀌었다. 이렇게 몰락한 농민들은 농촌에서 과잉인구로 집적되어 소작경쟁을 더욱 치열하게 하는 악순환을 이루었다. 삶의 터전을 잃은 농민들은 국내의 도시빈민층을 형성하거나 산간벽지의 화전민으로 전락하거나 해외로 유출되었다.
둘째는 일제의 산미증산계획과 쌀의 반출이었다. 일제의 산미증산계획으로 조선의 쌀 생산량은 증가하였지만 일본으로 유출되는 양이 더욱 많아 조선의 식량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 때문에 이농인구가 증가하였으나 국내의 산업발전 수준이 낮아서 이들을 임금노동자로 수용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들의 상당수가 일자리가 있는 일본으로 떠난 것이었다.
이 두 가지 배출요인으로만 보아도 1910년대와 20년대 조선인의 도일 노동이민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떠나지 않을 수 없는’ 반강제적인 성격이 짙었다. 다만 일제의 직접적인 강제는 아니더라도 일제의 정책으로 인한 간접적인 강제였던 점을 지적해 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1차대전(1914-1918년) 이후의 경기 호황기에는 일본의 노동력 유인력이 컸기 때문에 조선인의 도일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1920년대말 세계가 불경기에 돌입했을 때, 일본의 일자리마저 쪼그라들었을때에는 조선인에게 미친 타격은 더욱 컸다. 1931년의 조선의 실업자 수가 3백만명으로 조사되었는데, 이는 전체 인구 2천만명, 경제활동인구 1천2백만명 중에서 실업률이 25%에 달했던 극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일제의 도항제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조선인의 노동이민은 더욱 늘어났고, 시간이 갈수록 합법적 도항보다는 불법 도항이 늘어났다. 불법이주한 사람들은 관공서나 회사에 기록을 남길 수 없었고, 따라서 이들의 정확한 숫자조차 파악하기 어려웠다.
공식 기록만 보더라도 경기불황으로 일본 내무성의 요청에 따라 조선총독부가 1925년 8월 도항저지제를 실시했음으로 불구하고, 조선인의 도항자수는 1920년의 30,189명에서 1930년에는 298,091명으로 10배나 증가했다. 1935년에는 625,678명으로 다시 5년 만에 두 배로 늘었고, 1940년에는 1,190,444명으로 1백만명을 넘었으며, 1944년에는 1,936,843명으로 4년만에 거의 두배로 늘어났다. 일제강점기 후기에 조선인들의 생활고가 매우 심각했다는 뜻이다.
생활고에 쫓겨 도일한 이농 노동이민자들은 대개 일본에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경상도, 제주도, 전라도 출신들이었다. 일본 내무성 경보국의 조사에 따르면 출신지가 알려진 1923년의 도항자 72,815명 가운데 경상남도 출신이 39%, 제주도를 포함한 전라남도 출신이 25%, 경상북도 출신이 16%이었다. 일본 도항자의 80%가 이 세 지역 출신이었던 것이다.
친분관계도 노동이민자의 도일에 영향을 주었다. 1927년에 실시된 조사에 따르면 이주자의 73%가 친척 또는 친구를 통해서 일자리를 찾았다. 1925년의 센서스에 따르면 경상남도 고성군의 인구는 약 8만7천명이었다. (*)
김상민 선생이 지적한 ‘강제동원 피해자 조사’란 2004년에 시작된 조사를 가리킨다. 그해 3월5일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등에관한특별법>이 통과되었고, 11월에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되어, 첫 번째 업무가 ‘강제동원 피해자 조사’였다.
이후 2010년 3월22일에는 다시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에관한특별법>이 제정되었고, 이 법률에 따른 <국외강제동원희생자 지원위원회>를 신설했다. 피해자 조사와 함께 피해자들을 보상하고 지원하는 업무도 병행된 것이다.
생각해 보면 한심한 일이다. 해방된 지 60년이나 지나, 민주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야 본격적인 ‘강제동원 피해조사’가 체계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독재정부, 박정희-전두환-노태우의 쿠데타 정부가 근대사의 질곡을 60년이나 연장시킨 것이다.
더구나 이들의 집권으로 양성된 반민족 정치인들은 민주정부의 ‘강제동원 피해조사와 보상’에 협조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나갔으니 잊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 간의 유감을 푸는 방법일 수는 있지만, 국가 간의 외교문제를 정리하는 방법일 수 없었다.
사실 2004년 이전에도 각종 강제동원 피해자 명부가 수집되었다. 우선 1945년 조선총독부가 퇴각하면서 남긴 <노무군 문서> 3권에는 1,012명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었다.
1952-3년에는 내무부가 전국조사로 작성한 <일정시 피징용자명부>, 1957-8년 지방 읍·면지역에서 신고 받은 <왜정시피징용자명부>, 그리고 1970년대 대일민간인청구권 보상을 위해 작성한 <피징용사망자연명부>가 있다. 이 3종의 명부에 수록된 피해자는 총 537,077명이었다.
1990년 노태우 전대통령의 방일 외교의 성과로 일본정부로부터 돌려받은 <군인군속명부(12종, 346,733명)>와 <노동자명부(3종, 114,822명)>, <군인군속공탁금명부(120,525명)>도 추가되었다. 이 16종 명부에 기록된 강제동원 피해자는 582,080명이었다.
그밖에도 민간이나 해외에서 수집된 명부가 있다. 2005년 김용현이 기증한 <동명회명부록(1권, 419명)>, 2005년 독립기념관으로부터 인수받은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명부(81종, 116책, 413,407명>, 2011년 러시아 국립군사문서보관소에서 발굴된 <조선인포로명부(2,767명)>, 2017년 김광렬 선생의 유족이 기증한 <강제동원기록(151,737명)> 등이 있다.
2004년의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자 진상규명위원회>와 2010년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 지원위원회>가 신규 수집자료와 함께 국가기록원으로 이관된 피해자 명단도 568,330명에 달했다. 김상민 선생이 언급한 피해자 신고가 바로 이것이었다.
한편 2004년의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특별법> 제정을 위한 국회청원 자료에 의하면 1939년부터 1945년까지 강제동원된 조선인 피해자의 수는 총 7,879,708명이었고, 이중 국내 동원이 6,126,180명, 국외 동원 1,390,063명, 군인·군속이 363,465명으로 집계되었다.
강제동원 피해자 기록을 취합해 검색 가능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현재까지 인적사항이 파악된 피해자 수는 약 118만명이라고 했다. 전체의 5분의1, 해외 강제동원 피해자만 따지면 약 60만명 이상이 누락된 상태이다. 해외 강제동원 피해자의 3분의1 가량이 아직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이므로 ‘노동이민’으로 일본에 건너가 철도공사 노동자로 일하던 중 사망한 윤길문, 오이근씨는 이 데이터베이스에서 찾을 수 없다. 국가기록원의 강제동원 피해자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하면 <경남고성> 출신의 피해자는 3,523명이었다. 파악되지 않은 피해자를 3분의1로 본다면, 1938-1945년 사이의 강제 동원된 고성군 출신의 피해자는 대략 5천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산된다.
고성군에서 약 5천명의 강제동원 피해자가 발생했다는 것은 이 지역에서 강제동원이 시작되기 전에도 노동이민의 숫자 역시 상당한 숫자에 달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고성군청에 들어가 우선 민원실을 찾았다. 차례를 기다렸다가 창구계원에게 ‘1백년전에 일본에서 사망하신 고성면민 윤길문, 오이근씨를 찾는다’고 말했다. 계원은 말을 제대로 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함인지 미간을 찌푸리면서 나를 바라봤다. 이윽고 잠깐 기다려 달라면서 전화를 했다. 일상적 민원업무 외에 다소 복잡한 민원을 다루는 담당자가 따로 있었다.
나를 안내해 민원실 한 켠에 마련된 테이블로 안내한 특별 민원담당자에게 나는 똑같이 요청했다. 윤길문, 오이근씨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알고자 찾아왔다고 했다. 그 역시 잠시 생각을 가다듬는 눈치였다. 나는 가져간 자료 폴더를 꺼내어 조금 더 자세히 설명했다. <조선인 추도비> 사진과, 제사상 장면, 그리고 나무 위패에 이름이 적힌 사진 등을 보여주었다.
“이분들이 1914년과 1929년에 일본 다카라즈카에서 철도 터널공사와 수도관 터널공사 중에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고성 출신의 윤길문, 오이근씨는 다이너마이트 폭발 사고로 돌아가셨지요. 일본 분들이 1백년 가까이 이분들의 제사를 지내오셨습니다.
“작년에는 이 다섯 분을 위한 추도비를 건립하셨는데, 뒤늦게나마 이분들이 어떤 분들이셨는지 연고를 알고자 하십니다. 저는 그분들의 부탁을 받고 조사를 시작한 끝에 마침내 이곳을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방법을 알려주시고,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민원담당관은 내 말을 다 듣고 ‘커피 한잔 하시겠어요?’하고 말했다. 나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고, 물도 한잔 달라고 했다. 밤새 버스에서 쪽잠을 잔데다가 새벽 통영 자전거 관광으로 피곤했다. 고성까지 3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해서 시외버스 안에서 잠을 청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고성군청 민원실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다보니 목이 말라왔던 것이다.
내가 물과 커피를 마시는 동안 잠시 자리를 떴던 담당자가 누군가와 함께 다시 나타났다. 고성군청의 역사자료연구사 김상민 선생이었다. 나는 드디어 적임자를 만난 것을 직감했다. 그에게도 프레젠테이션을 반복했다. 하지만 지루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창구나 민원담당관에게 이야기할 때보다 편한 마음이었고, 간결하게 설명해 나갈 수 있었다.
“윤길문, 오이근씨의 공적 기록, 즉 민적/호적을 열람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강화된 개인정보 보호법 때문에 쉽지 않겠지만, 역사연구라는 이유로 열람할 수 있으면 가장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자료가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고, 공적 자료 조사가 불가능하다면, 향교를 통한 족보 조사, 혹은 집성촌을 방문해서 탐문조사도 해 볼 생각입니다.”
김상민 연구사는 말없이 들으면서 간간이 내가 꺼내놓은 자료 사진들을 뒤적이기도 했다. 마침내 그가 일어섰다. “제 자리가 있는 2층으로 가시지요.”
2층의 절반을 차지하는 역사연구실은 책상마다 서류뭉치와 문서철들이 쌓여 있었다. 고성의 역사가 오래고 유서가 깊은데다가 문화재와 사적지 등이 많기 때문에 할 일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안쪽 깊숙한 곳에 마련된 그의 책상 앞에 앉았을 때 김상민 연구사가 컴퓨터 자판을 몇 번 두들기더니 말했다.
“10여년전에 강제동원 피해자 신고기간이 있었습니다. 그때 신고된 사람이 고성에서만 수백 명입니다. 그중에는 강제동원 피해자도 있었고 자발적 노동이민자도 있었습니다. 본인이 신고한 경우는 별로 없고 가족이나 친척, 기타 연고자들이 신고하셨기 때문에 일단 신고서를 다 받고 분류는 나중에 했지요.
“강제동원 피해자로 확인된 분들은 중앙부서로 자료가 이전됐고, 노동이민자로 밝혀진 분들의 자료는 군청 자료실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료연한으로 폐기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자료가 남아 있으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 가지 방법이 열렸다. 나는 몇일이 걸리더라도 그 자료를 일일이 조사할 용의가 있었지만 ‘개인정보 보호’ 때문에 내가 직접 볼 수는 없었다. 김상민 연구사가 그 신청서 조사를 자신이 해보겠다고 하셨다. 다시 희망이 솟았다. (*)
고성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군청으로 찾아갔다. 미리 전화를 걸어 방문의사를 밝히고 일정을 조정할 수도 있었겠으나, 그냥 민원실로 방문하기로 했다. 군청의 협조를 얻으면 일이 쉬워질 것이었고, 협조를 받지 못하더라도 바로 개인적인 조사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고성터미널에서 군청까지는 걸어서도 1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1929년에 ‘고성면’이라고 불렸지만 1938년 10월 ‘고성읍’으로 승격된 이래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그다지 많은 발전이 이뤄지지 못해왔다는 뜻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성은 변한12국의 하나인 고사포국(古史浦國) 혹은 고자국(古資國)의 영토였고, 서기 42년부터 461년까지 소가야(小伽倻)의 도읍지였다. 고자국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한조의 중국기록에는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일본 사기에는 고차국(古嵯國) 혹은 구차국(久嵯國)으로 기록되어 있다.
소가야가 속했던 가야연맹이 신라에 합병(562년)된 이후에는 ‘고자군(古自郡)’으로 불리다가 경덕왕 16년(757년)에 ‘고성군’으로 개칭했는데, 이때의 이름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가야시대 이래 조선에 이르기까지 고성은 경상도 서남 해안지역의 중심지였다. 산악과 해안이 구비되어 있고 농업을 위한 평야와 교통을 위한 도로가 잘 정비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고성의 변방이던 창원과 사천, 통영과 진주가 대도시로 발전하면서 고성군만 도농복합지역으로 남아 있다. 고성군의 면적은 서울시 크기이지만 인구는 5만1천명에 머물러, 2백만명이 사는 주변 4도시에 둘러싸여 있는 형국이었다. 1925년 8만7천명이던 고성의 인구는 1960년대 13만 명에 달했으나 2020년 현재 약 5만1천명으로 집계되었다.
고성 시내를 가로 질러 들어가는데 뜻밖에도 ‘공룡’이라는 말이 자주 발견되었다. 시장이름도 공룡, 거리이름도 공룡이 있고, 곳곳에 공룡이라는 이름을 가진 식당과 가게가 많았다. 고성에서 공룡 화석이 출토되었던 것임에 틀림없었다.
사실이었다. 고성 소개서 <나무가 알려주는 고성 이야기(2015: 257-8)>와 고성군 웹사이트(goseong.go.kr)의 설명에 따르면,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에서 약 1억2천만년 전 중생대 백악기의 공룡 발자국 화석과 새발자국 화석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1982년 1월 이곳에서 최초로 용각류의 공룡발자국 화석이 발견된 이래, 덕명리 해안을 따라 약 1천9백여족, 고성군 전체에서는 약 5천4족의 공룡발자국 화석이 확인되었는데, 다고 한다.
공룡 발자국 화석 중에는 “브라키오사우루스”의 발자국도 발견되었는데, 발자국 하나의 길이가 102센티미터, 너비 64센티미터에 달해, 이 공룡의 크기는 발에서 등까지 약 8미터, 머리까지는 15미터에 달하고, 무게가 1백 톤이 넘는 거대한 공룡으로 추정되었다.
고성군은 1983년 11월 하이면 덕명리와 월흥리 일대를 군립공원으로 지정해 공룡발자국을 보존하고 관광자원으로 개발하기 시작했는데, 이곳의 공룡발자국 화석의 양과 종류, 규모 덕분에 고성은 미국 콜라라도주와 아르헨티나 해안지역과 함께 세계 3대 공룡발자국 화석지로 인정되었고, 특히 중생대 새발자국 화석지로는 세계 최대라고 한다.
고성군은 이곳에서 출토된 공룡들을 널리 알리기 위해 2004년 하이면 상족암군립공원 내에 공룡박물관을 개관하여 약 96종의 공룡관련 전시물을 일반에 공개했고, 2006년 4월부터 매3-4년마다 공룡세계엑스포를 개최해 오고 있다. 2021년 9월에도 제5회 고성공룡세계엑스포가 열릴 예정이라고 한다.
나의 고성 취재는 삼국시대나 중생대 백악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는 없다. 대략 1백여년 전에 이곳을 출발해 일본으로 건너갔던 조선 청년 두 사람의 행방을 찾으면 된다. 그다지 도시화되어 있지 않은 고성에서 윤길문, 오이근씨의 흔적을 찾는 것이 오히려 쉬울 수도 있다. 인구가 적고 이동이 빈번하지 않은 지역이었다면 1백년 전 이주자 가족의 기억을 갖고 있는 분들이 남아 계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2020년 11월30일 월요일, 나는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주인공을 찾는 첫 답사에 나섰다. 목적지는 경남 고성이었다. 일본 효고현의 일간지 <고베신문>과 <고베유신일보>의 1929년 3월28일의 보도에 따르면, 후쿠치야마선 개수공사에 참여했다가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로 사망한 윤길문, 오이근씨의 고향이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면”이었기 때문이다.
일요일인 29일 밤11시에 서울을 출발한 고속버스는 30일 새벽 4시쯤 통영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고성으로 가는 고속버스가 없었으므로 통영이나 진주에서 갈아타야 했다. 진주에서 환승하면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웠지만, 버스 시간표가 좋았기 때문에 통영 환승을 선택했다.
유럽 취재를 통해 터득한 한 가지 요령은, 야간에 이동하면 주간 취재시간이 넉넉해진다는 것이었다. 취재는 대부분 도서관이나 기록보관소를 방문하거나, 사람들을 탐문하는 것이므로 밤에 일할 수 없다. 따라서 야간 시간을 이동에 활용하면 시간과 경비가 확실히 절감되었다. 다만 일본 취재에서는 야간 이동의 교통편이 거의 없어서 이 요령을 활용할 수가 없었다.
고성 취재에는 자전거를 가지고 갔다. 고속버스나 시외버스는 별도의 운임 없이 자전거를 실어주게 되어 있었다. 최승희 선생의 지방공연 취재를 위해 지방 도시를 방문했을 때 자전거를 가져가서 톡톡히 덕을 보았었다. 현지 교통사정을 잘 모르는 만큼 도시 내 이동에 자주 택시를 타야했는데 자전거를 가져가면 그런 수고와 비용을 아낄 수 있었다.
군산이나 공주 같은 중소도시에서는 시내 이동을 전적으로 자전거에 의존해도 좋았고, 대구나 광주 같은 대도시에서도 자전거가 유용했다. 가까운 거리는 자전거를 타면 되었고, 이동 거리가 멀면 자전거를 자전거보관소에 묶어놓고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통영은 자전거 친화적인 도시가 아니었다. 언덕이 너무 많았다. 새벽녘에 통영 시내 구경을 할 생각으로 바닷가 구도심으로 향했는데, 간선도로에 오르자마자 거대한 언덕이 나타났다. 도로는 캄캄하고 가로등도 드문드문한데다가 이따금씩 무서운 속도로 달려 지나가는 차량들이 위협적이었기 때문에 오르막길은 자전거를 밀고 올라가야 했다. 내리막도 길었지만 마냥 내리 달릴 수 없었다. 도로가 고르지 않았고 무섭게 달려지나가는 트럭과 승용차들 때문에 자주 브레이크를 잡아야 했다. 구도심에 도착하기 전에 그런 언덕이 하나가 더 있었다.
가까스로 두 번째 고개를 넘어 세병관 표지판을 지나치면서 비로소 바닷가에 접근했다. 남망산 공원에서 일출을 볼 생각이었지만 시간이 남았으므로 한동안 선창에서 어선들이 고기 내리는 모습을 구경했다. 새벽시간에 깨어 있는 곳이 선창뿐이었다. 막 귀항한 어선들이 수백 개의 백열등을 대낮같이 밝힌 채 야간 어로에서 잡은 고기를 부리고 있었다. 한켠에서는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손가락 경매로 물건들이 판매되고 있었다.
일출시간이 가까워지자 남망산 공원에 올랐다. 선창에서는 자전거로 불과 5분 거리였다. 이순신 장군의 동상 옆에 자전거를 세우고 해가 뜨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드문드문 구름이 끼었지만 그 사이사이로 떠오르는 해가 보였다. 통영의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때만 해도 새벽 통영의 자전거 관광은 고성 취재까지 남는 시간을 때우기 위한 방편이었고, 자전거를 타고 쏘다니는 바람에 통영 도심의 지리를 제법 익힐 수 있었다. 이것이 유용한 경험과 지식이 되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또 다른 희생자 남익삼씨의 고향이 통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통영의 사전 답사를 한 셈이었다.
남망산 공원에서 내려와 문을 연 첫 식당에서 매운탕으로 아침식사를 한 후, 자전거를 시장 맞은편 자전거 주차장에 묶어둔 채 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자전거로 고개를 2개나 다시 넘을 생각을 하니 아찔했기 때문이었다. 자전거는 고성 취재를 마치고 찾으러 올 생각이었다.
고성행 시외버스는 거의 30분 간격으로 있었고, 통영에서 고성까지는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고성에 도착하니 오전 10시쯤 되었다. (*)
3장의 매장인허증에서 조선 연고지를 찾는 일이 가장 어려웠던 것이 남익삼씨의 경우였다. 김병순씨의 본적주소는 분명해서 약간의 조사를 통해 오늘날의 위치를 금방 확인할 수 있었고, 장장수씨의 매장인허증에는 조선 주소가 기재되지 않았으므로 곧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남익삼씨의 매장인허증에는 조선의 주소가 기록되어 있지만 그것이 오늘날의 어느 곳인지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우선 그의 매장인허증을 번역해 보자.
「인허증、제1호、
(본적) 조선 충청도 춘원우 연북면 선삼촌
(주소) [전부 지워져 있음]
(성명) 남익삼, (생년월일) 미상, (나이) 37세
위 사람의 매장을 허가함, 단 1915년 1월23일 오후2시 이후에 시행해야 함
1915년 1월23일, 카와베군 니시타니 촌장 다츠미 류이치 (도장)」
남익삼씨는 김병순씨가 사망한 다음해(1915년) 1월에 사망했다. 현재의 주소가 기입되어 있지는 않지만 정홍영 선생은 니시타니 촌장이 인허증이 발행한 것으로 보아 다른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타마세 지역의 노동자합숙소(=함바)에 기거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나는 그동안 조사한 것을 요약해서 ... 사망자를 연도별, 본적지별, 현주소별, 연령별로 분류한 다음, 니시타니 타마세 지역의 연도별, 본적지별 사망자를 표로 정리했다. 매장 허가증에 기입된 주소는 모두 타마세 지역에 한정되었다.
“타마세는 니시타니(西谷)의 여덟 지역 중 하나로 호수와 인구수가 그리 많지 않아서 연간 사망자 수는 평균 3명에서 5명에 지나지 않았고, 사망 원인도 대부분 노쇠와 질병이었다. 그러나 1914년부터 1917년에 걸친 사망자 수가 비정상적으로 많았고, 본적지가 오이타(大分), 에히메(愛媛), 돗토리(鳥取) 등 다른 지역인 사망자 20명이 이 시기에 집중되어 있었다. 성별 연령별 내역을 보면 ... 14명이 18세부터 45세까지 한창 일할 나이의 남성이었으며, 그 중에 조선인 3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몇 가지 자료를 이용해서 센가리 도수 터널에 관한 부분을 발췌하여 일람표로 만들었다. 그러자 공사가 이루어진 시기, 장소, 주소가 딱 일치하여 사망자가 생긴 것이 터널 공사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매장인허증에 사망 이유가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정홍영선생은 정황증거를 모두 종합해서 남익삼씨도 역시 고베수도공사 중에 사고로 사망했던 것을 확인한 것이다.
또 정홍영 선생은 평생 고베수도에서 근무한 하즈(波豆)에 거주하는 후쿠모토 지츠지(福本實二, 당시 75세)씨를 인터뷰해서 1910년대 고베수도 제1차 확장공사 중에 많은 조선인이 참가해서 일했고, 사고로 사망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증언을 확보했다.
따라서 이제 나는 남익삼씨의 조선 연고지를 찾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남익삼씨의 주소에서 조선(朝鮮)이라는 첫 단어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읽기 어려울 만큼 초서체가 심했고, 간신히 독해를 해도 한국에 그런 이름의 지역과 장소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우선 ‘도(道)’부터 문제였다. ‘조선’ 다음의 세 글자를 충청도(忠淸道)로 읽는 이도 있었고, 북해도(北海道)로 읽는 사람도 있었다. 북해도는 조선의 영토가 아니었고, 충청도라는 행정지명은 1929년당시의 조선에 없었다. 지금도 충청남,북도를 합쳐서 충청도라는 말이 쓰이기는 하지만, 주소를 말하려면 언제나 충청남,북도를 구별해야 한다.
설사 그것이 ‘충청남,북도’를 가리킨다고 하더라도 그 다음 세 글자가 문제였다. 가장 근접한 독해가 ‘춘원군(春元郡)’이었으나 충청남도와 충청북도에 그런 이름의 군은 없었다. ‘군’ 단위에서 막히니 그 아래 ‘면’단위나 (‘리’ 단위는 없었다) ‘촌’ 단위의 이름은 조사해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가능한 모든 자료를 동원해서 다른 ‘도’에서도 ‘춘원군’을 찾아보았으나 그런 이름을 가진 ‘군’은 조선13도에 없었다. 같은 방법으로 ’연북면‘과 ’선삼촌‘을 찾아보았으나 결과는 같았다.
남익삼씨의 조선 주소를 읽기 시작한 것이 곤도 선생으로부터 매장인허증 사본을 받았던 2020년 11월이었으나, 해를 넘기고 2021년 4월이 되도록 아무런 실마리도 잡지 못했다.
그동안 내가 이 주소를 읽어달라고 부탁드린 분들이 약 이십 명쯤 되었다. 그중에는 한학자와 고전문학자, 역사학 교수와 초서체 전문가도 있었다. 심지어 일본 고문의 초서체를 판독하는 컴퓨터 프로그램까지 동원했다. 그러나 누구도 주소를 읽어내지 못했고, 컴퓨터도 마찬가지였다.
5월에 들어서면서 나는 이 주소가 잘못된 기록이라고 결론 내렸다. 6개월 동안 조사를 했는데 아무도 읽어내지 못했다면 그것은 주소가 잘못된 것으로 추정하는 수밖에 없다.
매장인허증의 필체는 매우 능숙한 초서체였다. 초서체의 한 전문가는 인허증의 서체가 일본식 초서체라고 확인해 주었다. 즉, 조선인이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막노동 일자리를 찾아 일본까지 와야했던 가난한 조선인이 이렇게 능숙한 초서체를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매장인허증은 일본인 인텔리, 예컨대 니시타니 촌사무소의 서기 같은 사람이 작성한 서류임에 틀림없다. 서기가 질문하면 서툴게나마 일본말을 할 줄 알았을 공사판 십장이 인허증 작성에 필요한 내용을 대답해 주었을 것이다.
문제는 아무리 십장이라고 해도 사망자의 인적사항과 주소를 다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가 생전에 사망자와 나눴던 대화를 통해 알게 된 인적 사항을 대답하는 데에 그쳤을 것이다. 남익삼씨의 경우에는 그의 생년월일을 아는 동료조차 없었던 모양이다.
조선 사정을 모르는 일본인 서기와 사망자를 잘 모르는 조선인 십장 사이의 대화를 통해 인허증이 작성되었다면, 여기에 기록된 주소는 믿기 어려울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조사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인허증에 쓰인 주소를 제대로 읽으려고 노력하는 대신에 ‘도’와 ‘군’과 ‘면’과 ‘리’와 ‘촌’의 행정 단위들을 다 떼어 버리고 ‘춘원’과 ‘연북’과 ‘선삼’이라는 고유명사만 조사했다. 그랬더니 ‘춘원’이라는 지명이 있었다. 그것은 ‘군’이 아니라 ‘면’의 이름이었고, ‘춘원면(春元面)’은 지금의 ‘경상남도 통영’을 가리키는 옛 지명이었다.
그 다음에는 지도를 보면서 ‘춘원면’을 찾았다. 2개의 지도가 ‘춘원면’을 기록했다. <지도2: 경상도, 전라도 (1884년)>와 <팔도지도초본2(1770)>였다. 전자에는 통영과 미륵도를 ‘춘원면’으로 표시했고, 후자는 오늘날의 통영시만 ‘춘원면’으로 표시했다.
나는 두 지도에서 ‘춘원면’ 부근을 샅샅이 살폈다. 춘원면 북쪽에 광일면(光一面)과 광이면(光二面)이 보였다. 광삼면(光三面)도 있는 것일까? 지도에는 보이지 않았다. 다른 자료를 보니 조선 중기에는 지금의 안정과 황리 지역이 광삼면이었고, 그 남쪽이 춘원면이었다고 한다.
1900년에 이 지역을 진남군(鎭南郡)으로 편성하면서 광삼면은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춘원면은 도남면(道南面)으로 개칭되었다. 1914년에는 진남군이 통영군으로 바뀌면서 광삼면과 도남면을 합하여 광도면(光道面)이 되었다. 즉, 오늘날의 통영시 중심부가 1900년 이전에는 ‘춘원면’이었고, 그 북쪽으로 인접한 지역이 ‘광삼면’이었던 것이다.
내가 ‘광삼면’에 주목했던 까닭은 여기에 쓰인 한자 ‘빛 광(光)’자가 쉽게 ‘먼저 선(先)’자로 오인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남익삼씨 주소의 맨 끝에 나오는 ‘선삼촌(先三村)’은 ‘광삼촌(光三村)’의 잘못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상의 길고 지리한 조사와 추론을 거쳐서 나는 남익삼씨의 주소가 오늘날의 <경상남도 통영시 광도면>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확인을 위해 이 지명들을 더 찾아보았지만 다른 지역에는 그런 이름은 없었다. ‘춘원’이나 ‘광삼’이 독특한 이름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남익삼씨의 연고지는 통영시 광도면이며, 그곳은 우연히도 후쿠치야마선 부설공사의 희생자들의 연고지인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면과 매우 가깝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
김병순씨의 매장인허증에는 자세한 조선 주소와 대략적인 일본 주소가 둘 다 기재되어 있었지만, 장장수씨의 인허증에는 아래에 번역된 내용과 같이 일본 주소는 자세히 기입되어 있는 반면, 조선 주소는 아예 기재되지 않았다.
"인허증、제5호、
(본적주소) 없음
(주소) 카와베군 니시타니촌 내의 타마세촌 이즈리하 1번지의 45
(성명) 장장수、(생년월일) 없음, (나이) 37세
위사람의 매장을 허가한다. 다만 1915년 3월24일 오후2시 후에 이행할 것.
1915년3월24일、카와베군 니시타니 촌장다츠미 류이치(도장)”
정홍영 선생이 이 인허증에서 주목한 것은 타마세의 주소 “이즈리하 1번지의 45”였다. 이것이 장장수씨가 기거했던 주소지라면 조선인 노동자들의 합숙소(=함바)였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정홍영 선생은 “「이즈리하」가 타마세에서 타케다오 일대의 넓은 산간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이며, 「코요칸(紅葉館)」의 주소가 지금도 이즈리하 1번지의 44”이었다고 했다.
곤도 선생이 1993년 3월26일 아침 정홍영 선생과 함께 호리우치 미노루(堀内稔) 선생에게서 받은 신문기사 사본을 들고 다케다오(武田尾)로 향하던 중, “도중에 차를 세우고 커피를 마시면서 기사 내용을 확인했다는 찻집 겸 식당”도 코요칸이 아니었을까?
<코요칸>은 지금도 여관/음식점으로 영업 중인데, 특히 <아자레(あざれ)>라고 불리는 코요칸 별채 정원(紅葉舘 別庭)은 예약률이 높은 고급 온천관광 숙박지이다. <아자레>의 웹사이트에는 이곳의 주소는 ‘다카라즈카시 타마세 이지리하 1-47번지’라고 되어 있다.
당시의 주소 체계가 지금과 유사했다면 조선인 노동자 합숙소(1번지-45)는 <코요칸>(1번지44)과 <아자레>(1번지47)의 사이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도를 보면 무코강변의 <아자레>와 소가와(惣川) 천변의 <코요칸>은 1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데, 그 중간의 어느 지점에 장장수씨가 기거했던 조선인 노동자 합숙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정홍영 선생은 코요칸의 여주인 마츠모토 아야미(松本文美, 당시 78세)씨를 인터뷰하면서 조선인 노동자 합숙소와 사고 상황을 물었다. 마츠모토씨는 코요칸 근처에 큰 합숙소가 2개 있었는데, 하나는 언덕 위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무코강변에 있었다고 했다.
“조선인이 있었느냐”는 정홍영 선생의 질문에 마츠모토씨는 “조선 사람도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공사 중의 사고”에 대해 마츠모토씨는 “터널에서 발파 사고로 부상자가 꽤 많았”고 “온 몸에 돌이 박혀서 오늘은 세 명, 내일은 다섯 명이라는 식으로 피투성이가 되어 의사에게 실려 가는 것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정홍영 선생은 마츠모토씨가 지적한 곳에 가봤으나 “의사가 살았다는 별장 같은 건물도 없었고, 노무자 합숙소가 있었다는 곳은 테니스장”이 되어 있었다고 했다. 무코강변의 합숙소 건물 터에도 아무 흔적이 없었지만 “그 자리가 4호 터널이 강 건너 수관교(水管橋) 아래 5호 터널 입구 근처”임을 확인했다고 했다.
따라서 장장수씨가 <아자레>와 <코요칸> 인근 이즈리하의 합숙소에서 기거했다면 그가 참가했던 공사장은 정홍영 선생의 관찰대로 이즈리하 부근의 4호터널 공사였음에 틀림없다. 거주지와 공사장이 같은 지역일 뿐 아니라 4호터널의 공사 기간(1914년 8월18일부터 1916년 7월13일까지)이 장장수씨의 사망일(1915년 3월24일)과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한편, 김병순씨의 사망일은 1914년 8월3일, 남익삼씨의 사망일은 1915년 1월23일이므로, 남익삼씨는 12개 터널의 어느 공사에도 종사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김병순씨는 5-10호터널 공사중의 하나에 종사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김병순씨의 사망일은 1-4호와 11-12호터널 공사가 시작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
정홍영 선생이 발굴한 또 하나의 중요한 기초자료가 매장인허증이다. <가극의 도시의 또 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의 제1부 제1장 <니시타니 산 속에 잠든 조선인들>에 따르면 정홍영 선생이 이 3장의 매장인허증을 입수한 것은 1985년 봄이었다고 한다.
“내가 고베수도 건설공사에 참가한 조선인을 처음 알게 되고 조사까지 하게 된 것은 다카라즈카 시 역사편찬실에 보존되어 있던 오래된 매장 인허증 때문이었다. 1985년 초부터 봄 무렵에 걸쳐서 나는 당시 사카세카와(逆瀬川)에 있는 다카라즈카시 중앙공민관 2층의 방 4개를 차지한 시사(市史)편찬실에 여러 번 간 적이 있다. ...
“몇 번이나 다니는 동안에 거기서 시사(市史) 편집담당 주사로 근무하는 와카바야시 야스시(若林泰)씨와 친분이 생겼다. ... 어느 날 특별한 용무 없이 근처를 지나다가 잠시 들렀는데, 나를 보자마자 와카바야시씨가,‘아, 정선생, 마침 잘됐네요. 연락하려고 했거든요. 이런 게 있는데 뭔가 참고가 될까요?’ 하며 복사한 것을 석 장 보여주셨다. 손에 받아들고 보니 모두 조선인의 이름이 적힌 옛날 니시타니 촌사무소가 발행한 매장인허증 사본이었다.
첫눈에 내 눈길을 끈 것은 그들의 사망 시기가 1914년과 1915년이었던 점이다. 내무성 경보국(警保局)의 통계보고서 <조선인개황(朝鮮人概況)>에 따르면, 1915년에 조선인은 일본 전국에 3천9백86명, 효고현에는 2백18명이 있었다. 물론 이 숫자를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겠는데, 한일합방 이후 불과 4, 5년밖에 지나지 않은 오래전 시기였으니 무리도 아니다. 그런 시기에 외딴 니시타니 마을에 조선인이 살고 있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고, 그것만으로도 크게 놀랄만한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고베수도공사에서 순직한 조선인 노동자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에 대한 정홍영 선생의 조사가 시작되었다. 매장인허증에는 세 사람의 이름뿐 아니라 주소와 발행날짜를 비롯한 몇 가지 인적사항이 적혀 있었으므로, 사고의 시기와 매장일, 그리고 각 순직자들의 나이도 짐작할 수 있었다.
정홍영 선생과 마찬가지로 나도 세 순직자의 사망 시기에 주목했다. 김병순씨의 매장허가 날짜는 1914년 8월3일로 가장 빨랐고, 1915년 1월21일에 매장허가가 난 남익삼씨가 두 번째, 그리고 1915년 3월24일에 매장허가를 받은 장장수씨가 가장 나중이었다.
고베수도공사는 3차에 걸쳐 이뤄졌다. 1897-1905년의 창설공사로 고베수도가 완공됐고, 급격히 증가하는 고베 인구의 상수도 수요를 맞추기 위해 1911-1921년에 제1차 확장공사, 일차세계대전 이후의 호황기로 고베의 산업과 인구가 더욱 늘어나자 1926-1936년의 제2차 확장공사가 이뤄졌다. 따라서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가 참가했던 고베수도공사란 제1차 확장공사임이 분명했다.
한편, 매장인허증에 나타난 김병순씨의 생일은 1883년(메이지16년) 5월19일생으로 명기되어 있어 사망 당시의 나이가 31세였음을 알 수 있다. 다른 두 사람의 생년월일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남익삼씨의 나이가 37세, 장장수씨는 27세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남익삼씨는 대략 1877년생, 장장수씨는 1887년생 정도로 추정될 수 있다.
1929년에 발생한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로 사망하거나 중경상을 입은 5명의 나이가 모두 19세에서 25세 사이였던 것과 비교하면 고베수도공사에서 사망한 3인의 나이가 더 많았다. 1870년대와 1880년대에 태어난 고베수도공사에 참여한 이들은 아마도 일본으로의 노동이민 제1세대이자 후쿠치야마선 철도개수공사에 참여한 노동자들의 아버지 세대였음에 틀림없다.
이후 정홍영 선생은 고베수도공사 중에 순직한 3인의 조선인 노동자의 사망 장소와 사망 이유, 그리고 이들이 매장된 묘소를 찾기 위한 연구를 계속했고, 상당한 성과를 이뤘다. 이를 숙지하면서 나는 이 3인이 떠나온 조선반도 내 연고지를 찾는 데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
정홍영 선생의 <가극 도시의 또 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 17쪽)>에는 1914년 고베수도공사 중에 사망한 김병순(金炳順), 남익삼(南益三), 장장수(張長守)씨의 매장인허증 사본이 사진으로 수록돼 있다. 하지만 3장의 매장인허증이 겹쳐져 있기 때문에 각 사람의 기록을 볼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이같은 사정을 알게 된 곤도 도미오 선생은 자신이 보관 중인 매장인허증 사본을 사진 찍어 보내주셨다. 훨씬 선명해진 매장인허증 사본을 꼼꼼이 살피면서 3인의 연고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우선 일본어로 된 김병순씨의 매장인허증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인허증, 제4호,
본적지, 조선 강원도 강릉군 북일리(北一里) 대천동(大天洞)
(주소) 가와베군(川邊郡) 니시타니촌(西谷村) 내 타마세촌(玉瀨村) (번지수/호수 없음)
(성명) 김병순(金炳順), (생일) 1883년 5월19일
위 사람의 매장을 허가함, 단 1914년 8월3일 오후2시 이후에 시행해야 함
1914년 8월3일, 카와베군 니시타니 촌장 다츠미 류이치 (도장)”
김병순씨의 매장인허증이 제4호라는 것은 1914년 니시타니촌에서 사망해 매장된 4번째 사람이라는 뜻일 것이다. 정홍영 선생의 조사에 따르면 그해 니시타니촌 사망자는 15명이며, 그중 타지방 출신인이 10명이었다. 김병순씨는 10명의 외지출신 사망자 중의 한명이었던 것이다.
남익삼, 장장수의 매장인허증에 비해 김병순씨의 기록은 분명했다. 그의 생년월일은 1883년 5월19일이었으므로 사망 당시의 나이는 31세였다. 최종 주소지는 가와베군 니시타니촌의 타마세였다. 번지수는 없지만 이 지역의 노동자 합숙소(=함바)가 그의 마지막 주소였을 것이다.
그의 조선 본적지 주소도 뚜렷했다. <강원도 강릉군 북일리 대천동>이라고 되어 있다. 1914년 8월3일에 작성된 이 주소를 오늘날의 주소로 바꾸면 김병순씨의 연고지를 찾을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1914년 이래 강원도 강릉군의 행정구역이 많이 변했다. 1914년 4월1일 부터 강릉군의 북1리면과 북2리면, 그리고 남1리면이 합쳐져서 군내면(郡內面)이 되었고, 해방후 1955년 9월1일의 행정구역 개편 때 군내면은 강릉시의 포남동(浦南洞)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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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남은 ‘경포 남쪽 마을’ 이란 뜻인데, 이 지역의 옛이름인 〈보래미〉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어원은 ‘보다(見)+남(南)’의 합성어라고 한다. 어원대로 하면 <보람이>가 되어야 하겠지만 강릉 방언 발음으로 <보래미>가 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1970년대 이후 포남동 일대에 구획정리 사업이 이루어지면서 인구밀도가 급속히 증가했고, 이에 따라 1995년 3월2일의 행정구역 정리 과정에서 포남1동과 포남2동으로 분리되었다. 2019년 현재 포남동의 인구는 3만 정도이고, 이 지역은 강릉시의 도심이자 상권의 중심지이다.
매장인허증의 본적지 주소 마지막의 ‘대천리’는 ‘대창리’의 잘못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지도3(1884년)>에는 강릉지역에 ‘북일리면’과 ‘대창역’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오늘날의 지도로 옮기면 북일리면은 대략 오늘날의 ‘포남동’, 대창역은 ‘교동’과 ‘중앙동’과 ‘옥천동’에 해당할 것이다.
이 지역에 통일신라시대의 거대한 당간지주가 남아 있으며 그 공식 명칭이 <강릉 대창리 당간지주>이다. 당간지주의 오늘날 주소가 ‘강릉시 옥천동 334번지’이지만 이는 교동과 매우 가까우며,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까지도 교동과 옥천동은 모두 대창리로 불렸다.
이렇게 해서 김병순씨의 연고지 ‘강릉군 북일리면 대천동’은 오늘날의 ‘강릉시 포남동과 교동’으로 특정화될 수 있었다. (*)
정홍영 선생이 발굴한 또 하나의 중요한 기초자료가 매장인허증이다. <가극의 도시의 또 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의 제1부 제1장 <니시타니 산 속에 잠든 조선인들>에 따르면 정홍영 선생이 이 3장의 매장인허증을 입수한 것은 1985년 봄이었다고 한다.
“내가 고베수도 건설공사에 참가한 조선인을 처음 알게 되고 조사까지 하게 된 것은 다카라즈카 시 역사편찬실에 보존되어 있던 오래된 매장 인허증 때문이었다. 1985년 초부터 봄 무렵에 걸쳐서 나는 당시 사카세카와(逆瀬川)에 있는 다카라즈카시 중앙공민관 2층의 방 4개를 차지한 시사(市史)편찬실에 여러 번 간 적이 있다.
“몇 번이나 다니는 동안에 거기서 시사(市史) 편집담당 주사로 근무하는 와카바야시 야스시(若林泰)씨와 친분이 생겼다. ... 어느 날 특별한 용무 없이 근처를 지나다가 잠시 들렀는데, 나를 보자마자 와카바야시씨가,‘아, 정선생, 마침 잘됐네요. 연락하려고 했거든요. 이런 게 있는데 뭔가 참고가 될까요?’ 하며 복사한 것을 석 장 보여주셨다. 손에 받아들고 보니 모두 조선인의 이름이 적힌 옛날 니시타니 촌사무소가 발행한 매장인허증 사본이었다.
"첫눈에 내 눈길을 끈 것은 그들의 사망 시기가 1914년과 1915년이었던 점이다. 내무성 경보국(警保局)의 통계보고서 <조선인개황(朝鮮人概況)>에 따르면, 1915년에 조선인은 일본 전국에 3천9백86명, 효고현에는 2백18명이 있었다. 물론 이 숫자를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겠는데, 한일합방 이후 불과 4, 5년밖에 지나지 않은 오래전 시기였으니 무리도 아니다. 그런 시기에 외딴 니시타니 마을에 조선인이 살고 있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고, 그것만으로도 크게 놀랄만한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고베수도공사에서 순직한 조선인 노동자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에 대한 정홍영 선생의 조사가 시작되었다. 매장인허증에는 세 사람의 이름뿐 아니라 주소와 발행날짜를 비롯한 몇 가지 인적사항이 적혀 있었으므로, 사고의 시기와 매장일, 그리고 각 순직자들의 나이도 짐작할 수 있었다.
정홍영 선생과 마찬가지로 나도 세 순직자의 사망 시기에 주목했다. 김병순씨의 매장허가 날짜는 1914년 8월3일로 가장 빨랐고, 1915년 1월21일에 매장허가가 난 남익삼씨가 두 번째, 그리고 1915년 3월24일에 매장허가를 받은 장장수씨가 가장 나중이었다.
고베수도공사는 3차에 걸쳐 이뤄졌다. 1897-1905년의 창설공사로 고베수도가 완공됐고, 급격히 증가하는 고베 인구의 상수도 수요를 맞추기 위해 1911-1921년에 제1차 확장공사, 일차세계대전 이후의 호황기로 고베의 산업과 인구가 더욱 늘어나자 1926-1936년의 제2차 확장공사가 이뤄졌다. 따라서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가 참가했던 고베수도공사란 제1차 확장공사임이 분명했다.
한편, 매장인허증에 나타난 김병순씨의 생일은 1883년(메이지16년) 5월19일생으로 명기되어 있어 사망 당시의 나이가 31세였음을 알 수 있다. 다른 두 사람의 생년월일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남익삼씨의 나이가 37세, 장장수씨는 27세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남익삼씨는 대략 1877년생, 장장수씨는 1887년생 정도로 추정될 수 있다.
1929년에 발생한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로 사망하거나 중경상을 입은 5명의 나이가 모두 19세에서 25세 사이였던 것과 비교하면 고베수도공사에서 사망한 3인의 나이가 조금더 많았다. 고베수도공사에 참여한 이들은 아마도 일본으로의 노동이민 제1세대이자 후쿠치야마선 철도개수공사에 참여한 노동자들의 아버지 세대였음에 틀림없다.
이후 정홍영 선생은 고베수도공사 중에 순직한 3인의 조선인 노동자의 사망 장소와 사망 이유, 그리고 이들이 매장된 묘소를 찾기 위한 연구를 계속했고, 상당한 성과를 이뤘다. 이를 살펴보면서 나는 이 3인이 떠나온 조선반도 내 연고지를 찾는 데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
지금까지 후쿠치야마선 철도개수공사 사고를 보도한 1929년 3월28일자 4개 신문의 기사를 꼼꼼히 살피면서 사고 당시의 상황과 피해자들의 인적사항과 한국 내 연고지를 정리해 보았다. 그런데 정홍영 선생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1980년대까지 생존해 계신 지역 어르신들에 대한 탐문 조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항을 추가로 밝혀놓았다.
(1) “그 지역(=나마제)의 몇 원로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로부터 사고로 숨진 조선인들의 사연이 차차 드러났다. 고된 노동이 계속되던 어느 날이었다. 공사장 근처에서 젖은 화약을 모닥불에 말리던 중 갑자기 폭발해 조선인 3명이 즉사했다. 무참한 모습이 되어버린 시신을, 함께 일하던 동포 인부들이 나무통이나 깡통에 담아서 키노모토(木の元)의 지장존(地蔵尊) 아래까지 짊어지고 가서 장작을 모아 화장하고, 울면서 장례를 치렀다는 것이다. 화장이 끝난 뒤에도 그들은 아무도 일하지 않았고 아침부터 술만 마셨다. 아이고, 아이고 하는 울음소리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고 그런 날이 며칠이나 계속됐다고 한다.” (<다카라즈카와 조선인>, 1997, 39쪽)
정홍영 선생이 수집한 증언에 따르면 다이너마이트 폭발 사고로 인한 조선인 사망자는 3명이다. 이는 4개의 신문기사가 사망자의 수를 2명이라고 보도한 것과 차이가 난다. 사고 발생과 함께 즉사한 윤길문씨와 병원으로 옮겨져 사망한 오이근씨 말고도 또 다른 사망자가 있었다는 뜻이다. 신문들은 사고발생 직후부터 48시간을 취재해 보도한 것이므로 그 이후에 사망자가 추가되었을 경우 이를 보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윤일선씨는 후일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고, 여시선/김시선/양시춘씨의 부상은 경상이었으므로, 추가로 사망한 사람은 오이목씨일 가능성이 크지만 결정적인 문헌증거가 나타나기 전에는 최종적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2) “또한 몇 사람을 탐문한 끝에 요시다 노무자 합숙소의 우두머리가 윤재유(尹在裕?)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항상 공사현장에서 진두지휘한 k고 통칭 요시다 분키치(吉田文吉)로 불리던 그의 장남 윤일선(尹日善)이었다. 그는 공사와 합숙소의 현장지휘 책임 맡은 간사(=십장?)였는데, 인부들로부터는 항상 중대장(中隊長)이라고 불렸다. 사고로 죽은 세 명 중 두 명은 이름도 나이도 알 수 없었지만, 한 명은 윤일선의 둘째 동생이었다고 한다.” (<다카라즈카와 조선인, 1997, 40쪽)
정홍영씨는 또 다른 탐문을 통해 다이너마이트 사고 현장에서 중상을 입었으나 목숨을 건진 윤일선씨의 부친이 윤재유씨임을 알아냈다. 또 윤일선씨의 일본식 이름(=통명)이 요시다 분키지(吉田文吉)였으며, 윤일선씨는 윤재유씨의 장남이라는 사실도 밝혔다. 이에 더해 사고에서 사망한 윤길문씨가 윤일선씨의 둘째 동생이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또 정홍영씨는 “사고로 죽은 세 명”이라는 증언을 다시 한 번 채집했다. 복수의 지역 원로들이 다이너마이트 사고의 사망자가 3명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고로 죽은 3명 중 2명은 이름도 나이도 알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신문 보도에 따르면 그 익명의 사망자 2명 중의 한 명은 오이근(25)씨였다. 다시 말해, 이름과 나이를 알 수 없는 다른 한 사람의 사망자가 더 있었다는 말이다. 이는 앞으로 조사 작업에서 잊지 말고 확인해 볼 사항이다.
(3) “타케다오에서 무코강을 따라 폐선 부지를 30분 정도 걸어가면, 길이 350미터의 6호 터널에 닿는다. 타케다오부터 강폭은 점차 넓어지고, 터널의 바로 앞에서 급커브를 그려 오른쪽 왼쪽으로 구불구불 꺾이고 있다. ... 주위를 유심히 살피면서 걷다가 모닥불을 피운 장소가 터널 입구에서 50미터 전방 왼쪽에 있는 콘크리트 보호벽 안쪽의 작은 공터라는 것을 알았다. 어느 신문에는 가까운 오두막에서 취사를 하던 윤일선의 아내도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고 했는데, 그 오두막이 공사 노무자 합숙소였는지, 휴식용의 작은 집을 가리킨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또한 열차가 운행되고 있던 낮 시간에 터널 내부에서 발파를 시도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다이너마이트는 도대체 어디에 쓰기 위한 것이었을까. 또 어째서 시신을 그렇게 먼 키노모토까지 옮겼을까. 그런 의문을 풀어줄 단서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글은 정홍영씨가 다케다오 지역을 직접 답사해 남긴 기록이다. 나가오산 자락의 신6호 터널의 입구에서 약 50미터 전방 왼쪽에 작은 공터가 있음을 발견했다. 정홍영씨는 이곳이 신문기사가 지적했던 오두막/함바 자리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폭발이 발생한 입구에서 50미터쯤 떨어져 있었으므로 이곳에서 취사준비를 하던 여시선/김시선/양시춘씨는 가벼운 안면 찰과상을 입는 데에 그쳤던 것이다.
(4) “윤일선(尹日善)의 숙부는 일명 요시다 이치로(吉田一郞)라고 불렸는데, ... 처음에는 지역 토건업체를 경영하다가 나중에는 하청을 받아 하천 사방 교량 등의 공사를 했다. 옛 타케다오역 앞에서 무코강에 가설된 <온센교(温泉橋)>는 1934년에 준공되었는데, ... 다리 공사를 할 때 합숙소가 건너편 냇가에 두 동이 있었고, 조선인 인부들이 숙박을 하고 있었는데 ... 이 합숙소의 우두머리가 나마제에서 온 요시다 이치로였다. 터널과 옹벽 등의 철도 관련 일이 끝난 뒤에도 윤일선(尹日善)은 요시다 합숙소뿐 아니라 나마제 일대의 조선인들을 보살피며 많은 인부를 거느리고 고베 수도 확장 공사, 롯코산의 사방 공사 등의 일을 했다.” (<다카라즈카와 조선인>, 1997, 쪽)
정홍영 선생의 탐문조사에 따르면 다이너마이트 폭발 사고로 사망한 윤길문과 그의 맏형 윤일선에게는 요시다 이치로(吉田一郞)라는 통명을 가진 숙부가 있었다. 즉 윤일선과 윤길문의 아버지 윤재유에게는 남자 형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의 한국식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의 일본식 통명은 요시다 이치로였다. 그리고 통명에 ‘이치로(一郞)’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가 장남이고 윤일선과 윤길문의 아버지 윤재유는 그의 동생이었을 것이다.
(5) “해방 후인 1952년, 오타타카와(大多々川) 강변의 산을 개척해 신설된 모리구미(森組) 채석장 건설 공사를 마지막으로 사촌동생인 윤창선(尹昌善)에게 뒤를 맡기고 나마제를 떠났고, 곧이어 모리구미(森組)의 하청업자로서 교토부(京都府)와 나라현(奈良縣)에서 많은 터널 공사를 도급맡았으나 이내 병에 걸렸고, 터널 공사를 하면서 나날을 보냈던 그의 일생을 오사카의 병원에서 마쳤다. 지금도 그의 사촌동생이 소가와에, 그의 딸들이 교토와 다카라즈카에 살고 있다. 윤일선씨는 생전에 술을 마시면 총각으로 죽은 동생(윤길문, 尹吉文)을 떠올리며 자주 눈물을 글썽였다고 한다.” (다카라즈카와 조선인>, 1997, 쪽)
정홍영씨는 추가조사를 통해 윤길문-윤일선 형제의 가족이 더 있었음을 밝혔다. 즉, 윤일선에게는 윤창선이라는 사촌동생이 있었다는 것이다. 정홍영 선생에 따르면 지금(=1990년대)도 윤창선이 소가와에 살고 있었으며, 윤일선의 딸들이 교토와 다카라즈카에 살고 있다고 했다.
따라서 정홍영 선생의 추가조사를 정리해 보면 후쿠치야마선 개수공사 중의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로 사망한 조선인 노동자는 윤길문, 오이근씨와 그 밖의 성명과 연령 미상의 1명을 포함해 모두 3명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들은 대부분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면에서 가족 단위로 이주해온 이주노동자였을 것이다.
사망한 윤길문씨의 가족은 그의 아버지 윤재유씨, 그의 큰아버지 요시다 이치로, 그의 큰형인 윤일선과 형수인 여시선/김시선/양시춘, 그리고 사촌 윤창선이 모두 한 가족의 구성원이었음에 틀림없다. 이들은 모두 경남 고성군 고성면 출신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한편 다른 사망자 오이근씨에게는 오이목씨라는 형제가 있고, 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들도 경남 고성군 고성면 출신이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따라서 이들 두 가족에 대한 조사는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는 한국에서 경남 고성을 중심으로 윤길문-윤일선-윤창선, 윤재유-요시다 이치로, 그리고 여시선/김시선/양시춘의 공식기록이나 족보 기록을 찾는 일이다. 또한 같은 지역에서 오이근-오이목씨의 공식기록과 족보기록을 탐색하는 일도 여기에 포함된다.
다른 한편, 일본에서는 다이너마이트 사고 이후 윤일선, 윤창선씨의 흔적을 탐문하고, 윤일선씨의 딸들이 다카라즈카와 교토에 살았다는 증언을 바탕으로, 다카라즈카를 비롯한 효고현과 오사카, 그리고 교토에 걸쳐 폭넓은 탐문 조사를 시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
다음은 도쿄의 기록학 전문가 크누기 에나(功刀惠那) 선생이 아사히신문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해서 찾아주신 <아사히신문> 도쿄판과 오사카판의 기사이다. 두 기사는 대동소이하며, 실수나 오자까지 동일한 것으로 보아 한 기사가 다른 기사를 거의 전재한 것으로 보인다.
<아사히신문, 1929년 3월28일, 오사카판>
“(제목과 소제목) 다이너마이트 폭발/ 4명 사상/ 다카라즈카 오지의 터널 공사에서/ 모닥불로 말리는 동안
“(기사본문) 26일 오전 8시 반 경에 효고현 다카라즈카의 변방 나가오산 중의 후쿠치야마선 6호터널의 터널 굴착 공사에 사용하는 다이너마이트 10개가 빙결되어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조선인 토공 3명이 철망 위에 올려놓고 모닥불에 말리던 중 실수로 그 안의 1개를 불 속에 떨어뜨렸기 때문에 10개가 요란하게 폭발하여 토공 윤길문일(尹吉文一, 21) 오이근(吳伊根, 25)의 두 명은 약 20간(약 36미터)정도 날아가 신체가 산산조각이 나는 참사를 당했다. 토공의 우두머리 이일선(伊日善, 25)는 대퇴부에 중상을 입고 기절했고, 인근 오두막에서 취사 중이던 동인의 처 양시선(揚時春, 19)은 안면에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
<아사히신문, 1929년 3월28일, 도쿄판>
“(제목과 소제목) 다이너마이트 폭발 참사/ 2명이 죽고 2명 중상/ 얼어붙은 다이너마이트를 불에 쬐다가"
“(기사 본문) [다카라즈카 전화] (1929년 3월)26일 오전 8시반경 효고현 다카라즈카 외곽의 나가오 산중의 후쿠치야마선 6호 터널 도랑굴착 공사에 사용할 다이너마이트 10개가 결빙되었으므로 조선인 토공(土工) 3명이 이를 철망 위에 올려놓고 모닥불에 말리는 중 실수로 그 중 1개를 불 속에 떨어뜨렸기 때문에 10개가 모두 폭발해서, 토공 이길문 (伊吉文, 21) 오이근 (吳伊根, 25)의 두 명은 약 20칸(=36미터)이나 날아가 신체가 산산조각이 나는 참사를 당했고, 토공의 우두머리 이일선(伊日善, 25)은 크게 중상을 입고 졸도했으며, 인근 오두막에서 식사준비 중이던 이일선의 아내 양시춘(揚時春, 19)은 얼굴에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
오사카판 <아사히신문>의 기사는 취재원을 나타내는 머리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기자가 직접 취재해서 쓴 기사이다. 반면 도쿄판에는 [다카라즈카 전화]라는 머리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전화 통지로 전해진 기사이다. 오사카판과 도쿄판 <아사히신문>의 기사는 <고베신문>과 <고베유신일보>이 밝힌 윤길문과 윤일선의 이름을 이(伊)길문과 이(伊)일선으로, 여시선/김시선의 이름을 양시춘으로 보도했다. 한국에는 이(伊)씨 성이 없으므로, 고베의 신문들의 보도가 정확할 것으로 보이며, 정홍영 선생도 고베 신문들의 기록을 따랐다. 그러나 향후 조사에서는 다른 이름의 가능성도 배제하지 말고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고 현장의 참상은 아사히신문의 보도로 조금 더 구체화되었다. 다이너마이트의 폭발 현장에 있던 윤길문, 오이근씨는 전신이 파손되어 20칸(=대략 36미터)이나 공중으로 날아갔다고 한다. 윤일선씨도 중상을 입고 졸도해 병원으로 옮겨졌다가 깨어났으며, 윤일선씨의 아내 여시선/김시선/양시춘씨는 현장에서 50미터쯤 떨어진 오두막(=아마도 이들이 머물던 함바)에서 아침식사 준비를 하다가 얼굴에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고 했다.
<아사히신문>은 이들의 한반도 연고지를 보도하지 않았지만, <고베신문>과 <고베유신일보>를 통해 이들이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면” 출신이라는 점이 확인되었으므로, 이들의 소재와 인적사항, 그리고 한국 내 연고지와 연고자를 찾는 데에는 충분한 실마리를 얻은 셈이다.
특히 윤길문, 오이근씨의 연고지를 찾는 데에 윤일선-여시선/김시선/양시춘씨 부부와 오이목씨의 인적사항을 조사에 포함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이 모두 같은 고향을 가진 사람들일뿐 아니라 서로 형제, 결혼, 친척관계로 맺어져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
다음은 정세화 선생이 고베중앙도서관에서 찾아내신 1929년 3월28일자 <고베유신일보>의 기사 전문이다. 이 기사도 역시 정홍영 선생의 저서 자료편에 스크랩되어 있었다. 그리고 <다카라즈카와 조선인> 제1부 2장의 내용으로 미루어 이 기사는 <고베신문>의 기사와 함께 가장 많이 참조된 기초자료인 것으로 보인다.
<고베유신일보, 1929년 3월28일자>
(제목과 소제목)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해/ 네 명이 즉석에서 사상/ 뇌관을 모닥불로 건조시키려다/ 나가오산 터널 입구에서 발생한 사고
(기사 본문) “26일 오전 8시경 가와베군 니시타니촌 키리하타 나가오산 제6호 터널 입구(간자키 기점 15마일 동쪽)에서 전선 후쿠치산선 개수공사에 종사 중이던 조선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면 출신의 조선인 윤길문(21), 윤일선(25), 오이근(25), 김시선(19) 4명이 암석 폭파 작업 중 다이너마이트가 빙결되어 폭발하지 않기에 모닥불을 피워 다이너마이트의 뇌관을 건조하려 하였는데,
“실수로 뇌관에서 인화했으므로 순식간에 굉연한 음향과 함께 다수의 다이너마이트는 폭발하고 옆에서 불을 쬐고 있던 윤길문은 무참히 전신을 파르르 분쇄되어 살점이 주변에 흩어지는 형상을 보였고 오이근은 왼쪽 다리를 뜯겨 피에 스며들었으며, 윤일선은 왼손에 중상을 입었으며, 김시선 만은 몸에 몇 군데 찰과상을 입었을 뿐이었다. 김씨의 비명과 폭음에 놀란 사람들은 직접 현장으로 뛰어가 피에 물든 윤일선과 오이근의 두 명을 이케다마치의 회생병원에 맡겼으나 오이근은 같은 날 11시쯤 사망했다.
“다이너마이트의 뇌관을 모닥불에 건조시키는 등의 무모함에 현 당국도 놀라고 있지만, 무지한 선인에게 위험한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하게 하는 것은 문제이고, 또 폭발한 다이너마이트의 폭발력도 너무 크므로, 남아 있는 다이너마이트에 대해서, 28일 아침 현 보안과 기사의 손으로 폭발성능시험을 실시할 것이다.”
<고베유신일보>의 기사가 <고베신문>과 다른 점은 4가지였다. 첫째, <고베신문>은 사고 발생 시간을 밝히지 않았으나 <고베유신일보>는 26일 아침 8시경이라고 보도했다. 둘째, <고베신문>은 피해자를 5명으로 보도했으나 <고베유신일보>는 4명으로 보도했다. 사망자는 윤길문, 오이근씨의 2사람으로 공통되지만, <고베유신일보>는 오이목씨를 부상자에서 제외했다.
셋째, <고베신문>은 윤일선의 아내를 여시선(19)이라고 보도한 반면, <고베유신일보>는 윤일선의 아내라는 언급 없이 김시선(19)으로 보도했다. 나이가 동일한 것으로 보아 서로 다른 인물이 아닌 듯 하며 두 기사 중의 하나가 성을 잘못 쓴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쇠 금(金)’자와 ‘나 여(余)’자가 비슷하게 보여서 발생한 실수가 아닌가 싶다. 넷째, <고베신문>이 피해자들의 한반도 내 연고지를 ‘경상남도’로만 보도한 반면 <고베유신일보>는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면”이라고 더 구체적으로 밝혔다.
이같은 차이점을 제외하고 두 신문의 보도를 종합하면 사고 당시의 피해상을 그려볼 수 있다. 10개의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해 윤길문(21)씨는 장기가 노출되고 살점이 흩어질 만큼 온몸이 파열되어 현장에서 즉사했고, 오이근씨는 왼쪽 다리가 절단되어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3시간 후에 사망했다. 윤일선씨는 대퇴부와 왼손에 중상을 입고 병원에 이송되었으나 목숨은 건졌고, 그의 아내 여일선(혹은 김일선)씨는 얼굴과 몸의 몇 군데에 찰과상을 입었다. 오이목씨도 폭발의 충격으로 여러 간을 튕겨나갔으나 타박상이나 찰과상 정도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기사를 읽으면서 상상하게 되는 사고 현장의 모습이 끔찍하기는 했지만, 순직자들의 연고지를 밝혀내고 친족 등의 연고자를 찾아야 하는 나로서는 그들의 고향이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면”이라고 밝혀준 <고베유신일보>에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
아래는 정세화 선생이 고베중앙도서관에서 찾아내신 1929년 3월28일자 <고베신문> 기사를 번역한 것이다. 정홍영 선생의 저서 <가극 도시의 또 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의 부록편에도 실려 있는 이 기사는 조선인 노동자 2명이 사망하고 3명이 중경상을 입은 후쿠치야마선 철도개수공사 중에 발생한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를 보도한 것이다.
<고베신문, 1929년 3월28일, 한신판>
(제목과 소제목) “이건 또 얼마나 횡포한 일인가!/ 다이너마이트를 모닥불에 말리다가/ 2명이 비참하게 사망하고 3명이 중상을 입다/ 가와베군 철도 터널 공사장의 참사”
(기사 본문-문단 번호는 필자가 붙인 것) (1) “철도성선(=오늘날의 JR) 후쿠치야마선의 개수공사에 종사중인 조선 경상남도 출신 윤길문(尹吉文, 21) 동 윤일선(尹日善, 25) 오이근(吳伊根, 25) 여시선(余時善, 19) 오이목(吳伊目)의 다섯 명이, 다른 다수의 조선인 인부들과 함께 가와베군 니시타니무라 기리하타 나가오산 제6호 터널 입구(간자키 기점 15리 지점)에서 공사 중,
(2) “이 공사에 사용하는 다이너마이트가 결빙되고 있으므로 모닥불로 이것을 녹이면서 그 부근에 이들 조선인 토목노동자 남녀들이 모여 몸을 녹이고 있는 중, 1개의 다이너마이트가 10개로 인화되어 아연 대음향과 함께 폭발했는데,
(3) “윤길문(21)은 장부가 노출되어 보기에도 끔찍한 모습으로 즉사했고, 오이목(25)은 여러 간을 튕겨 나갔고, 경상남도 태생 토공 윤일선(25)은 대퇴부를 비롯해 그 밖의 심한 부상을 당했고, 그의 아내 여시선(19)은 안면에 부상을 당했으며, 오이근은 왼쪽 다리를 뿌리부터 절단 당했고, 그 외 여러 명의 부상자를 냈다.
(4) “이케다 마을의 회생병원으로 이송했으나 도중에 오이근은 마침내 절명했다. 급보에 의해 관할 다카라즈카서에서 경관을 현장으로 출동시켜 관계자를 소환 조사 중이다.”
이 기사는 전체가 4백자도 채 안 되는 짧은 기사이지만 6하 원칙에 충실해서 폭발사고 상황을 짐작하기에 충분하고, 그렇게 상상되는 상황이 매우 끔찍한 것도 사실이다.
우선 이 기사에는 피해자 5명의 이름과 나이가 나타난다. 위의 문단(1)에는 이름과 나이만 나오지만, 문단(3)에는 그들이 각각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도 서술되어 있다. 특히 문단(3)은 들여쓰기로 되어 있는데 이는 다른 기사나 보고서를 인용한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문단(1)은 기자가 직접 취재해 작성한 것이지만 문단(3)은 병원 보고서를 입수해 인용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문단(1)과 문단(3)의 명단은 거의 일치한다. 피해자 윤길문(21)과 윤일선(25)과 여시선(19)의 이름과 나이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두 문단 사이에 약간의 차이도 있다. 문단(1)에서는 오이근(25)이 먼저 등장하고 나이가 명시된 반면 나중에 등장하는 오이목의 나이가 누락되어 있다. 그러나 문단(3)에서는 오이목(25)이 나이와 함께 먼저 서술되었고 나중에 서술된 오이근의 나이는 누락되었다.
이 사고의 사망자는 윤길문(3문단)과 오이근(4문단)이고,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이름이 새겨진 사람도 이 두 사람이다. 오이근과 오이목의 나이가 엇갈린 것은 두 사람 모두 사고당시 25세였거나, 혹은 보도과정에서 두 사람의 나이가 혼동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문단(3)이 인용문이라는 점, 그리고 문단(1)의 오이근 언급과 문단(4)의 오이근 사망 보도가 같은 기자의 보도인 것을 고려하면 오이근의 나이가 25세였던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결론적으로 이 기사는 5인의 피해자가 모두 경상남도 출신이라는 점은 일관되게 보도했고, 이들의 이름과 가족관계 설명으로 보아 윤길문과 윤일선과 여시선이 한 가족이라는 점, 그리고 오이근과 오이목도 형제관계이라는 점도 추측할 수 있다. (*)
내가 정홍영 선생의 저서 <가극 도시의 또 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를 읽기 시작한 것은 정세화 선생이 사진으로 찍어 보내주신 그 책의 챕터 두 개부터였다. 이 책은 1997년에 초판이 나온 이래 절판됐기 때문에 아마존에서도 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약 일주일 만에 정세화 선생은 그 책을 우편으로 보내셨다. 책 내용에 대한 질문이 많아지자, 아예 책을 속달로 보내신 것이다. 저자이신 부친의 마지막 소장본이 아닌가 싶었는데, 선뜻 보내주신 것이 고마웠다. 나는 마음을 더욱 다잡고 조사에 열심을 내기로 했다.
<다카라즈카와 조선인>을 읽어보니, 정홍영 선생은 역사학 전공자가 아니면서도 대단히 실증적인 연구를 남기셨음을 알 수 있다. 이 책 제1부에 수록된 12개의 논문 하나하나가 현장을 직접 답사해 현지인의 구술을 토대로 써내려간 알찬 기록이었다.
후쿠치야마선 철도공사의 희생자들을 조사한 내용은 그 책의 제1부 2장에 나왔다. 이 책의 부록 <자료편>에는 <고베유신일보>와 <고베신문>의 기사 스크랩이 실려 있었다. 이 자료편을 미리 볼 수 있었다면 정세화 선생께서 고베중앙도서관에 가셔서 마이크로필름을 돌려가며 기사를 찾아야 했던 수고를 덜 수 있었을 것이다.
<고베신문>과 <고베유신일보>의 1929년 3월28일자 기사에서 중요한 실마리가 나왔다. 우선 <고베신문> 기사에는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의 사망자 2명과 부상자 3명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었고, 그들이 “조선 경상남도 출신”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순직자 연고지 조사 범위가 한반도 전역에서 “경상남도”로 축소된 것이다. 1개의 신문기사로 조사대상의 범위가 13분의1로 대폭 줄었으니 이런 것이 기록의 힘이 아닌가 싶었다.
다음으로 <고베유신일보>의 기사는 한 걸음 더 나갔다. 사고를 당한 희생자들이 “조선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면 출신”이라고 더 구체적으로 보도했다. 이 정도면 당장 다음날 고속버스 티켓을 예매해도 될 만큼 구체적인 주소였다. 번지수까지 기록되어 있지는 않아도, 찾아가 탐문할 수 있는 지역과 관공서가 특정화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기사들을 읽자마자 나는 바로 고성으로 떠나고 싶었다. 그것이 정홍영 선생의 방식이었다. 그도 역시 호리우치 미노루(堀内稔)선생으로부터 <고베유신일보> 기사를 전해 받자마자 바로 다음날 곤도 도미오(近藤富男)선생과 함께 현장으로 달려갔었다.
하지만 나는 이내 정홍영 선생과 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인식했다. 정홍영 선생은 여러 해 동안 후쿠치야마선 철도개수공사와 조선인 순직자들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 오셨기 때문에 그 지역과 사고에 대해 잘 알고 계셨다. 새로운 정보가 나타나자마자 바로 현장 답사에 나설 준비가 갗줘져 있었다. 절친 동료 곤도 선생까지 있었으니 얼마나 든든했을까?
나 역시 조사연구를 도와주시는 여러 선생님들이 계신다. 정세화, 곤도, 신도 선생 등이 그분들이다. 그러나 정작 나는 아직 이 지역에 대한 배경지식이 모자랐고 사고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고베와 다카라즈카를 두세 번씩 방문하기는 했으나 사고 현장인 니시타니의 키리하타 혹은 다케다오 지역을 잘 몰랐고 경상남도 고성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먼저 순직자들이 종사했던 후쿠치야마선 철도공사가 어떤 공사였는지 조사하기로 했다. 특히 문제의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했다. 다행히도 조사연구에 필요한 배경지식과 상황 및 맥락은 정홍영 선생의 <다카라즈카와 조선인>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었다.
나는 2건의 신문기사를 읽자마자 <다카라즈카와 조선인>의 제1부 2장을 다시 읽으면서 번역을 해나갔다. 정홍영 선생의 저서를 꼼꼼히 읽은 덕분에 나는 효고현 다카라즈카 산간지역에서 전개되었던 조선인 노동자들의 고된 삶과 그들에게 닥친 비극적인 폭발사고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됐다. (*)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는 4개의 신문기사와 3장의 매장인허증에서 시작되었다. <고베신문> 등 4개 신문사의 1929년 3월28일 기사와 니시타니 촌장이 발행한 사망자의 매장 허가증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 기초자료가 발견된 경위는 정홍영 선생의 저서 <가극의 도시의 또 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 이하 <다카라즈카와 조선인>)에 기록되어 있다.
정홍영 선생은 1985년 봄, 3명의 조선인 사망자에게 발행된 매장인허증을 처음 입수했다. 그가 연초부터 “다카라즈카에 시(市) 제도가 시행되기 이전의 료겐(良元), 코하마(小浜), 나가오(長尾), 니시타니(西谷) 각 촌의 자료 속에 조선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지 조사”하던 중에, 다카라즈카 시사(市史) 편찬실의 편집담당주사 와카바야시 야스시(若林泰)씨로부터 3장의 매장인허증 사본을 입수한 것이다. 정홍영 선생은 이를 근거로 고베수도공사(1914-15년) 중에 사망한 조선인 노동자 3인에 대한 조사연구를 시작했다.
한편 1993년 3월25일, 정홍영 선생은 조선인 관련 신문기사 데이터베이스를 작성 중이던 무쿠게회의 호리우치 미노루(堀内稔) 선생으로부터 1929년의 다이나마이트 폭발사고를 보도한 신문기사를 입수했다. 바로 다음날 아침 정홍영 선생은 곤도 도미오 선생과 함께 타케다오(武田尾)를 답사해 64년만의 첫 제사를 드렸고, 그것이 후쿠치야마선 철도개수공사에서 사망한 조선인 노동자 2인에 대한 조사연구의 시작이었다.
이 조선인 노동자 5인의 한반도내 연고지를 찾기로 하면서 나는 정홍영 선생의 출발점을 내 출발점으로 삼기로 했다. 우선 신문기사 조사로부터 시작했다. 최승희 공연 자료를 조사하면서 중앙과 각 지역의 일본신문 조사에 어느 정도 자신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일본에 갈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2020년 여름 이후 일본 내 코로나 상황은 악화되었고 무역마찰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인의 일본 방문은 여전히 어려웠다. 미국과 유럽과 한국의 신문들은 어디서나 인터넷 조사가 가능하지만, 일본 신문들은 대부분 현지 도서관에 가야했고, 대개 마이크로필름을 돌려가면서 눈으로 기사를 찾아야 한다.
나는 정세화 선생께 도움을 요청했다. 한편으로는 정홍영 선생의 저서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 중에서 이 두 공사와 그 희생자들이 서술된 챕터를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주시기를 요청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베중앙도서관에서 해당 신문기사를 검색해 주시기를 부탁했다.
정세화 선생이 보내주신 <다카라즈카와 조선인>의 제2장에는 정홍영 선생이 호리우치 미노루 선생으로부터 받은 신문기사는 <고베유신일보(1929년 3월28일 석간)>였다. 그런데 정홍영 선생이 “만약을 위해 같은 날짜의 다른 신문을 살펴보니 <고베>, <아사히>, <마이니치> 신문 등이 각각 상당히 자세한 기사를 보도했다”고 서술한 것을 읽었기 때문에, 나는 정세화 선생께 다른 신문에도 이 사건이 보도되었는지 검색해 주시기를 부탁드렸다.
정세화 선생은 고베중앙도서관에서 <고베신문>과 <오사카아사히신문>의 기사를 찾아내셨다. 부친이 시작하신 조사를 아드님이 계속하시게 된 것이었다. 부친께서 “가업 외에 조사연구 작업으로 과로하시는 것이 걱정”되었고 “별세하신 뒤에도 아버지가 남기신 자료를 탐내는 사람들 때문에 불쾌하고 번거로웠다”던 정세화 선생이 20년이 지나서 다시 부친이 못 다하신 일을 계속하시게 된 것이다.
고베중앙도서관에서 찾지 못한 <아사히>와 <마이니치>의 기사는 도쿄의 쿠누기 에나(功刀恵那)선생에게 다시 도움을 청했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기록학 박사과정을 마친 후 일본국립기록원에 근무하는 에나 크누기씨는 바로 다음날 <아사히신문>의 도쿄판 기사를 찾아서 보내주었다. <마이니치신문>의 기사는 아직도 찾지 못했는데, 후일의 일본 취재를 통해 더 찾아보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고베유신일보>와 <고베신문>, 그리고 <아사히신문> 도쿄판과 오사카판의 기사 4건이 확보되었고, 이것이 조선인 순직자들의 연고를 찾는 내 조사의 기초자료가 되었다. (*)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새겨진 비문에 따르면 이 추도비의 건립을 담당한 것은 <추도비 건립 모임>과 <다카라즈카시 외국인시민문화교류협회(이하 교류협회)>, 그리고 <목련회>의 세 단체이다. 추도비 건립의 이유와 날짜 다음에 이 세 단체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
정계향 선생의 논문(2019:146쪽)은 세 단체를 비교적 자세히 서술해 놓았다. 가장 먼저 생긴 것은 <교류협회(1996)>이다. 1990년대 초반에 김예곤 선생이 자신의 회사에 일본계 브라질인을 수십 명 고용하면서, 이들이 겪는 언어문제와 거주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교류협회>를 창립했다. 처음에는 외국인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동했으나 시간이 가면서 재일 조선인을 위한 활동의 비중이 커졌다. 창립자이자 초대회장인 김예곤 선생이 재일 조선인이었고 다카라즈카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대부분이 재일 조선인이기 때문이다.
창립자 김예곤 선생의 사업경영을 통해 만들어진 넓은 교우범위 덕분에 <교류협회>에는 다카라즈카와 고베 등, 효고 지역의 재일조선인과 일본인들이 많이 참가하고 있다. 여기에는 정계, 재계, 문화계의 인사들이 많이 포함되었는데, 이들은 지식인집단이 거의 없었던 다카라즈카의 재일조선인들의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교류협회>가 추도비 건립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2010년경이었다. <고베수도공사>와 <후쿠치야마선 개수공사>의 희생자들을 발굴한 정홍영 선생이 2000년 1월에 타계한 후에도 곤도 도미오 선생은 정홍영 선생과 함께 시작했던 추도와 제사를 계속하면서 재일 조선인들은 물론 일본인들의 참여를 요청했다. 추모제사의 범위가 확대되면서 <교류협회>도 이에 동참하게 된 것으로 보이며, 2013년에는 곤도 선생도 <교류협회>에 가입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추도비 건립의 문제가 구체화되면서 마침내 2017년 5월 <고베수도건설공사 및 구국도 후쿠치야마선개수공사 중의 사망자 추도비를 건립하는 모임>(이하 <추도비건립모임>)이 발족됐고, 곤도 선생이 회장에 선임되었다.
한편 정계향 선생의 서술(460쪽)에 따르면 <목련회>도 “추도비 건립을 위해 결성”된 단체였다. “<목련회>의 회장은 곤도 선생, 공동회장은 김예곤 선생”이었고, “발기인으로 참여한 사람은 두 사람의 대표를 포함한 23명으로, 재일조선인과 일본인이 섞여 있”었으며, “이 중 상당수의 사람들은 <교류협회>의 회원”이었다고 했다.
추도비를 건립하는데 앞장선 세 단체의 대표자는 <추도비건립모임>의 회장이 곤도 선생, <교류협회>의 고문이 김예곤 선생, 그리고 <목련회>의 공동회장이 곤도 선생과 김예곤 선생이었다. 결국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건립은 김예곤, 곤도 도미오 두 사람의 주도 아래 다카라즈카의 <교류협회>와 오사카의 <목련회> 회원들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이뤄진 것이다.
물론 추도비 건립에 협력한 것은 이들 뿐은 아니었다. 효고현과 오사카부의 많은 재일 조선인과 일본인들이 시간과 노력과 돈을 들여 건립 운동에 나섰다. 그중에는 추도비 건립을 위한 각종 모임에 빠짐없이 참여하여 의논된 내용을 홍보하는데 앞장선 분들도 있었고, 자신의 재능을 기부하여 추도비가 지금의 모양을 갖추도록 애쓴 분들도 있었다.
곤도 선생의 전언에 따르면 ‘절대로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는 전제 아래 추도비의 조각과 장식, 그리고 설치에 이르기까지의 실제작업을 직접 담당한 재일 조선인도 있었다. 그는 타마노 세이조 선생의 추도비 디자인을 받아서 그것을 돌에 새기고 장식하는 일을 손수 담당했고, 그렇게 자신의 손으로 완성된 추도비를 보면서 보람을 느끼셨다고 한다.
그밖에도 <교류협회>나 <목련회>, <추도비 건립모임> 등의 회원이 아니면서도 수다한 일본인과 재일 조선인들이 추도비 건립에 참여했다고 한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는 참여 단체와 그 지도자들뿐 아니라 그 취지에 동조하는 많은 참여자들의 성원으로 건립되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