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곤도 도미오 선생이 2020년 5월31일자 <무쿠게통신(300호)>에 게재하신 기고문을 번역한 것이다. <무쿠게통신>은 한국/조선을 연구하는 일본인 중심의 모임인 <무궁화회>의 월간 기관지이다.)


정홍영 씨와의 일

곤도 도미오

 

1983년 가을의 어느 날 방과 후에 A중학교 직원연수회가 열렸다. 강사는 정홍영 선생으로 같은 교육구 내에 사시는 재일 코리안 지역사 연구가이다. 그해 여름, 무코 강이 범람해 정홍영 선생이 살던 지역이 거의 전역, 1층의 천장 근처까지 물에 잠겼다. 이 지역은 재일 코리안들이 밀집해 사는 곳이었는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1961년 여름, 무코강 하천 부지에는 공습 이재민이나 생활 곤궁자 등 많은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곳에는 다른 거주지를 찾기 어려운 코리아인들도 많았다. 현에서는 1958년부터 퇴거 권고를 반복하다가 19614월에는 아마가사키(尼崎), 니시노미야(西宮), 이타미(伊丹), 다카라즈카(宝塚)시 등에 걸쳐 무코강 하천 부지 거주자에게 퇴거 및 건물제거 명령을 내렸다. 불법 점거, 홍수의 위험성, 도쿄 올림픽을 위한 미관 정비가 이유였다. 이타미와 다카라즈카 시에서는 집단 이주지를 알선한 뒤에 철거를 진행했지만 아마가사키 시에서는 1961728일 한나절 만에 판자촌 철거를 강제 집행했다. 주민들에게 약간의 위로금이 지급되었을 뿐이었다.

 

2020년 5월31일자 <무쿠게통신(300호)에 실린 곤도 도미오 선생의 기고문 <정홍영 선생과의 일>.

 

이 때 다카라즈카시가 알선한 곳이 위의 땅이었다. 조사 결과 이 지역은 무코 강바닥보다 낮았다. 무코 강이 넘치면 반드시 물에 잠기는 곳이었던 것이다. 직원 연수회에서 정홍영씨가 인재라고 비난한 것도 당연했다. 다만 그의 말투는 지나칠 만큼 온화했고 확실한 사실을 조용히 제기했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졌다. 나는 그의 말투에 한 눈에 끌렸고, 모임이 끝나고 나서 연락처를 교환했다.

 

그 이후 나는 정홍영 선생의 금붕어 똥(金魚)”이 되었다.^^

 

정홍영 선생도 어디든 갈 때면 꼭 내게 연락을 주었다. 효고 조선관계 연구회의 일원으로 다카라즈카를 중심으로 지역 코리아인의 발자취도 조사해 왔지만, 특히 전국에 남겨진 일본 패전 시기의 공장 소개용 지하벙커에 대해서는 끈질기다고 할 만큼 자세히 조사했다. 이른바 마츠시로(松代) 대본영에 대해서도 정홍영 선생에게서 배웠고, 그곳에는 중학교의 수학여행으로 학생들을 데리고 2번이나 함께 갔다. 코요엔(甲陽園)의 지하호, 아이노(相野)의 지하호, 야마나카(山中) 온천의 지하호, 쿠쿠리()의 지하호에도 함께 갔다.

 

 

그러던 중 1993326일 아침, 무쿠게회의 호리우치 미노루(堀内稔) 선생이 전해주신 신문 기사 사본을 들고 정홍영 선생과 함께 차를 타고 타케다오(武田尾)로 향했다. 도중에 차를 세우고 근처의 찻집 겸 식당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면서 기사 내용을 확인했다. 신문은 1929328일자 기사로, 옛 국철 후쿠치야마선 개량공사 중에 얼어붙은 다이너마이트를 모닥불에 말리다가 실수로 폭발시켜 주위에서 불을 쬐던 조선반도 출신 인부가 죽고 다쳤다는 사건을 전하고 있다.

 

그 순간 알게 된 것이지만, 우연히도 사고가 있던 날이 64년 전 326일 바로 그날이었다. 기사는 윤길문(尹吉文, 21)이 즉사하고, 오이근(呉伊根, 25)이 병원에 실려 가던 중 사망했으며, 윤일선(尹日善, 25)과 그의 부인 여시선(余時善, 19) 등이 중경상을 입었다고 보도했다. 장소는 카와베군 니시타니무라 키리하타 나가오산 제6호 터널 입구라고 되어 있었다.

뜻밖에도 제삿날에 현장을 방문하게 된 우리는 아무 제물도 준비하지 못한 채 마음뿐인 제사를 지냈다. 지금의 타케다오역에서 제6호 터널까지는 걸어서 약 20, 맑은 날이면 무코 강의 졸졸졸 흐르는 소리에 섞여 꾀꼬리 울음소리가 들리는, 걷기에 아주 기분 좋은 길이다.

 

짧은 터널을 두 개 빠져나가면 다카라즈카 시가 정비한 <벚꽃동산()> 입구이다. 이곳은 미즈카미 츠토무(水上勉)<사쿠라모리(櫻守)>로 유명해진 곳이기도 하다. 오른쪽에는 <신수이히로바(親水広場)>라고 이름 붙은 광장이 있는데, 이곳에 당시의 노무자 합숙소(飯場) 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무코 강이 크게 오른쪽으로 돌아나가는 곳에 이르면 6호 터널이 보이고 그 오른쪽으로는 무코 강을 건너는 녹색 철관도 보인다. 이 철관은 고베 시까지 식수를 운반하는 <고베 수도>가 지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상류에 만들어진 센가리 수원지에서 멀리 고베 시까지 대체로 어른 혼자 서서 걸을 수 있을 정도의 터널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 도수관은 1910년대부터 끊임없이 물을 나르고 있는데, 사실 이 터널 굴착공사 중에도 김병순(金炳順, 30), 남익삼(南益三, 37), 장장수(張長守, 27) 등 세 명의 조선반도 출신의 인부가 사망했다는 사실이 구 니시타니무라 사무소의 매장 인허증을 통해 밝혀졌다.

 

매년 326일에는 거르지 않고 이곳을 찾아와서 6호 터널 근처에서 간단한 제사를 지내왔다. 처음에는 둘이서만 왔지만 때로는 많은 사람들을 불러서 함께 오기도 했다. 2000118일 정선생이 숨진 뒤에는 나 혼자서 간 적도 여러 번 있다. 정홍영 선생은 이 사실을 후세에 남기는 비석을 세우고 싶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하셨다.

 

 

정홍영 선생의 작품의 압권은 그의 저서 <가극의 거리의 또 다른 역사-다카라즈카와 조선인(歌劇のもうひとつの歴史宝塚朝鮮人, 1997)>이다. 다카라즈카 지역에 찍힌 코리아인의 발자국은 거의 다 이 책에 망라되어 있다. 이 책이 출판되었을 때에 어떻게든 좀 '대단한 곳'에서 출판기념회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런 화려한 곳은 좀...”이라며 주저하는 본인을 제쳐두고, 망설임 없이 <다카라즈카 호텔>을 기념회장으로 정했다. 지금도 당일의 참가자 명단을 보면 1백명의 이름을 읽을 수 있다.

 

올해 2020223일 아침, 정홍영 선생의 책에도 서술되지 않은 중대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니시타니의 타마세(玉瀬)에 있는 만후쿠지(萬福寺)에서 온 소식이다. 100년 이상 사찰과 지역 부인회에서 조선인들을 위령하고 있는데, 부인회도 고령화되고 인원수도 줄어들어 이제 그만 마무리를 지으려 한다는 말씀이었다. 다만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전화로 대략 방문 약속을 하고 26일에 절에 찾아가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만후쿠지(萬福寺)에서는 매년 824일 아침 무연고 참배를 계속해 왔다. 주지 스님과 부녀회원이 무연불(無縁仏)씨와 삼계만령(三界萬霊)에게 꽃을 바치고 쟁반 과자를 바치고 각각 향을 피우며 영혼을 위로해 왔다. 아마도 100년 정도 계승되어 오는 동안에 그 의미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선대 주지 스님이 옛날 타케다오의 터널 폭파 공사로 사망한 조선인들을 추도하고 있다는 말씀이 계셨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나눈 후에 현장을 안내해 주시고, 꽃과 과자를 갖추어 불경을 외워 주셨다. 금년 326일에 다카라즈카의 조선인을 추도하는 비를 건립한다고 전하자, 지금까지 자신들이 계속해 온 위령의 마음을 이어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면서 몹시 기뻐해 주셨다. 그리고 놀랍게도 추도비가 완성되는 날 아침 만후쿠지의 주지 내외분이 우리보다 일찍 현지를 찾아 추도비 앞에서 법요(法要)를 지내 주셨다.

 

그날, 완성된 비석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정홍영 선생의 묘에 가서 비석이 완성된 것을 보고했다. 대체로 항상 326일 타케다오에 갔다 오는 길에 묘소에 들르기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벌써 20회 정도는 참배를 했지만, 이날에야 비로소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었다. 늘 무덤의 앞에서 참배할 뿐이어서 몰랐는데 이날은 일행 중의 한 사람이 묘 주위를 둘러보다가 묘석 옆에 무언가 글씨가 쓰였는데 무슨 말인지 못 읽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가서 읽어보니 한글로 통일을 바라면서 이곳에 묻음이라고 되어 있다.

<중국인과 조선인의 강제연행 강제노동을 생각하는 전국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마쓰에(松江)에 가는 길에 하쿠비(伯備)선 특급열차 박스석에서 정홍영씨가 통일되기 전까지는 고향인 한국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던 일이 지금도 마음에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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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531일자 <무쿠게통신> 300호에 실린 곤도 도미오 선생의 기고문 제목은 <정홍영(鄭鴻永)씨와의 일>이다. 곤도 도미오 선생이 정홍영 선생과 함께 했던 40년의 세월을 회고한 글이다.

 

1983년에 처음 만난 두 사람은 20년 동안 다카라즈카 지역 재일 조선인 역사를 함께 조사하고 연구했다. 2000년 정홍영 선생이 타계하신 후에는 곤도 선생이 그의 유지를 받들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모비>를 건립하기까지 또 다시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A4 한 장 분량의 기고문에 40년의 추억을 채우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곤도 도미오 선생은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필체로 그 일을 해내셨다. 문장과 문장들 사이에 담긴 추억과 감성의 밀도가 워낙 높아서 읽는 이의 마음을 소용돌이치게 하는 멋진 글이었다.

 

곤도 도미오 선생(왼쪽)은 2020년 5월31일에 발행된 <무쿠게통신> 300호에 재일조선인 향도사학자 정홍영 선생과 함께 했던 40년을 회상하는 기고문을 발표했다. 오른쪽은 정홍영 선생의 저서 <가극의 거리의 또 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의 표지.

 

특히 추모비 제막식 직후 곤도 선생도 전에 몰랐던 정홍영 선생의 묘비문을 발견한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일본어가 서툰 내가 번역해가며 읽으면서 느낀 것이 이 정도이니, 일본어 원문은 얼마나 명문일지 짐작만 할 뿐이다.

 

곤도 선생은 1983년 가을 다카라즈카의 시립A중학교 직원연수회에 강연자로 초청된 정홍영 선생을 처음 만났고 그의 온화한 말투에 끌린 나머지 연락처를 교한하자마자 그의 금붕어똥(金魚)”이 되었다고 했다. 일본어 관용표현으로 항상 붙어 다니는 단짝이라는 뜻이다.

 

그 첫 부분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떠올랐다. 최승희 선생의 일본 초무대 작품이 <금붕어춤(金魚)>이었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도쿄 유학 시절 이시이바쿠 무용단에 속했던 최승희 선생이 1926625일 도쿄의 호가쿠자(邦樂座)에서 데뷔하면서 춘 춤이다.

 

2020년 5월31일자 <무쿠게통신> 300호에 실린 300호발간 축하문(왼쪽)과 곤도 도미오 선생의 기고문 <정홍영선생과의 일> (오른쪽)

 

최승희의 <금붕어춤><물고기춤()>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아마도 금붕어가 어항 속에서 너울너울 헤엄치는 모습을 형상화한 춤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짐작하고 있다. 이 춤은 1930년대 중반에 <인어의춤(人魚)>으로 더욱 발전되었기 때문에 잘 기억하고 있었다.

 

암튼, 그렇게 만난 금붕어와 금붕어똥은 효고현의 향토사는 물론 일본 전역의 재일조선인 수난사를 연구하는 단짝이 되었다. 마츠시로(松代) 대본영은 물론 코요엔(甲陽園)과 아이노(相野), 야마나카(山中) 온천과 쿠쿠리()의 지하호 등을 함께 답사하고 기록을 남겼다. 그 하나하나가 일제강점기의 재일조선인들에게 기억하기조차 가슴 아픈 곳들이다.

 

곤도 도미오 선생의 기고문은 한국어로 번역해서 이 글 뒤에 덧붙일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5인의 조선인 순직자들을 발굴하여 추도비에 새겨지도록 노력한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정리하는 데에 그치려고 한다.

 

우선 정홍영 선생과 곤도 도미오 선생이다. 두 사람은 후쿠치야마선 철도터널공사에서 사망한 윤길문, 오이근씨의 사고장소를 확인하고 1993년부터 제사하기 시작했다. 니시타니무라 사무소가 발행한 매장 인허증을 발굴해 고베 수도공사 중에 사망한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의 기록을 찾아낸 것도 이 두 사람이었다.

 

2020년 3월26일, 효고현 다카라즈카 시에서 북쪽으로 5킬로미터 지점의 나가오산 기슭, 벚꽃동산 입구의 신수이 광장에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세워졌다. 요즘 코로나19로 일본여행이 자유롭지 않지만 서울 연구실 책상에서 구글맵을 이용하면 신수이 광장의 추도비를 만나볼 수 있다.

 

한편 무쿠게회의 호리우치 미노루(堀内稔)씨는 윤길문, 오이근씨를 발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했다. 그는 1929328일자 <고베신문>의 사본을 정홍영 선생에게 전달해 사고현장인 카와베군 니시타니무라 키리하타 나가오산 제6호 터널 입구를 방문하도록 한 것이다.

 

끝으로 니시타니의 타마세(玉瀬)에 있는 불교사찰 만후쿠지(萬福寺)의 주지스님이다. 그는 만후쿠지의 여신도 회원들이 1백년이상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를 제사해 왔음을 알려왔고, 결국 이들이 윤길문, 오이근씨와 함께 추도비에 새겨져 추도되도록 했다.

 

그밖에도 많은 다카라즈카 시민들과 재일동포들이 추도비 건립을 후원했고 참여했다. 이렇게 보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는 이 지역 근대화 과정에서 희생된 5인의 조선인을 잊지 않으려는 많은 일본인 시민들과 재일동포들이 힘을 합쳐 이룬 작품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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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326,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제막됐다. 나는 제막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가고 싶기는 했으나, 코로나19의 국제 방역이 까다로워지면서 여행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즈음 한일 양국 사이에 발생한 무역 분쟁의 후폭풍이 겹쳐서 자유로웠던 한국인의 일본 여행에도 비자가 필요해졌다. 서울의 일본대사관이 정한 방문비자 발급 조건이 엄격했기 때문에 당분간 일본 여행은 불가능해졌다.

 

그 때문에 <최승희 후속 조사>가 중단되었지만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미 1년 반 동안 수집해온 자료가 방대하기 때문에 그것을 읽고 정리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오히려 쉬는 시간이 생긴 셈이어서 속도조절을 할 수가 있어서 좋았다.

 

2020년 3우얼26일 제막된 <다카라즈카조선인추도비>. 앞면에는 5사람의 희생자 이름과 함께, 고향을 그린다는 뜻으로 <월조남지(越鳥南枝)>가 크게 새겨져 있다. "월나라 새가 남쪽가지에 둥지를 튼다"는 뜻이다. 뒷면에는 이 추도비를 건립하게된 경위와 주관단체가 기록되어 있다. 

 

<무용신 프로젝트>에도 지장은 없었다. 정세화 선생께서 일본에서 모든 일을 잘 관장해 주셨기 때문이다. 고베와 시코쿠의 조선학교에 무용신이 전달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정세화 선생에게 우리 학교에도 무용신이 전달되는가하는 문의가 자주 들어온다고 하셨다.

 

이런 긍정적인 반응에 고무된 이인형 선생과 나는 <무용신 선물>을 확대하기로 했다. 맹렬해 지는 코로나19 때문에 2020년의 재일조선학생 예술경연대회가 3개 지역으로 나뉘어 진행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우선 깅키 지역의 조선학교에 <2차 무용신 선물>을 보내기로 했다.

 

다만 <1차 무용신>2개 학교의 초,,고급학생들에게 모두 전달했지만, <2차 무용신>은 중,고급학생들에게만 보내기로 했다. 초급학생들을 제외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단기간에 선물을 준비해야 하는 우리의 능력에도 제한이 있었다.

 

다시 한 번 정세화 선생의 도움으로 각 학교의 무용부 학생 수와 각 학생들의 신발 치수를 조사했다. 지역이 넓어지고 학교 수와 학생 수가 많아졌기 때문에 이 조사도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정세화 선생은 무슨 수를 쓰셨는지 필요한 정보를 신속하게 전해 주셨다.

 

 

제2차 무용신 선물 프로젝트는 11월6일에 열리는 깅키지역 재일조선학생 예술경연대회에 맞추어, 6개 조선중고급학교의 170명의 무용부 학생과 교원들에게 전달하기로 했다. 두번째 무용신 모금 캠페인은 한국동포들의 관심도 높고 참여도 많아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정세화 선생의 조사에 따르면 깅키 지역 6개 조선학교의 중,고급 무용부학생의 수는 160명이었다. 교원 분을 포함시킨다면 약 170켤레의 무용신을 준비하면 되었다. 필요한 예산은 약 430만원(=40만엔)으로 추산되었다. <1>때보다 5배가량 늘어난 셈이었다.

 

이인형 선생과 나는 20206월과 9월에 두 번으로 나누어 모금하기로 했다. 한국에서도 재일조선학교 후원에 대한 호응이 높아지고 참여가 늘어났기 때문에 모금운동은 어렵지 않았다.

 

<2차 무용신>을 위한 첫 번째 모금을 마치고 잠시 쉬던 6월말경, 나는 다시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다. <무쿠게통신(無窮花通信, 2020531일자, 통권300)>에 실린 곤도 도미오(近藤富男)선생의 글을 읽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2020년 5월31일 발행된 <무궁화모임>의 기관지 <무쿠게통신> 300호. 나는 <무궁화모임>의 홈페이지에 올려진 곤도 도미오 선생의 기고문을 읽으면서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높아지는 것을 느꼈다. (사진은 <무궁화모임> Facebook에서 전재.)

 

<무쿠게통신><무쿠게회(むくげの)>의 기관지이다. 최초의 최승희 평전인 다카시마 유사부로(高嶋雄三郎)<최승희>의 초판(1959)은 도쿄의 <학풍서원(學風書院)>에서 출판되었지만, 1981년에 개정판을 낼 때에는 <무쿠게사(むくげ)>가 출판했던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19711월에 결성된 <무쿠게회>의 홈페이지에는 조선의 문화와 역사, 풍속과 언어를 연구하는 일본인들 중심의 동아리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기관지 <무쿠게통신>이 벌써 300호가 발행되었다는 것은 놀라웠다.

 

웹사이트에는 잡지의 모든 글이 포스팅되지는 않았지만 곤도 도미오 선생의 기고문은 읽을 수 있었다. 아마도 곤도 도미오 선생은 326일의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제막식을 마치신 후, 이 글을 <무쿠게통신>에 기고하신 것 같다. 이글에는 오랜 숙원을 이룬 사람의 조용한 자부심과 함께 명을 달리하신 선배에 대한 회상이 잔잔하게 서술되어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 글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대한 나의 관심을 폭발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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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 재일조선학생 중앙예술경연대회를 참관하고 나는 조선학교 무용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무용부를 운영하는 조선학교가 얼마나 되는지, 무용부 학생들은 몇 명이나 되는지, 어떻게 연습하고 훈련받는지, 작품은 어떻게 창작되고 공연되는지, 등등이 모두 궁금했다.

 

오사카에 머물렀던 5일 동안 정세화 선생은 내 의문의 상당부분을 풀어주셨다. 정세화 선생도 내 최승희 연구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물으셨는데, 그동안의 국내 조사와 유럽 조사, 그리고 그때까지의 일본 조사에서 드러난 사실을 성심껏 말씀드렸다.

 

그러다가 우리는 의기투합했고 약속을 하나 했다. 서로 돕자는 약속이었다. 정세화 선생은 나의 최승희 조사연구를 돕겠다고 하셨고, 나는 재일 조선학교를 도울 방법을 모색하기로 했다.

 

2020년 3월1일은 고베조고의 졸업식이었고, 이인형 선생과 나는 고베조고를 방문해 무용부 학생들에게 성금으로 마련된 무용신을 선물했다.

이듬해(2020) 1월초, 내가 다시 고베를 방문했을 때부터 정세화 선생은 당장 약속을 지키기 시작하셨다. 재일 조선무용가들을 소개해 주셨고, 내가 그분들을 만나 인터뷰할 수 있게 주선해 주셨다. 덕분에 내 조사에는 80년 전의 최승희 공연 발굴뿐 아니라 현역 조선무용가들의 생생한 말씀도 들을 수 있게 됐다. 진짜 고마운 일이었다.

 

문제는 내가 어떻게 내 약속을 지킬 것인가, 였다. 내가 조선학교를 도울 방법은 거의 없어보였다. 거액의 재산가거나 잘나가는 사업가는 아니므로 내가 재력으로 도울 수는 없었다. 그저 은퇴한 연구자에 불과하므로 연구주제와 관련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정세화 선생과 의논을 거듭하던 중 한 가지 방안을 생각해 냈다. 고베조고 무용부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선물하자는 것이었다. 대단한 선물은 아니라 해도 의미있는 선물은 될 것 같았다. 마침 31일이 고베조고의 졸업식이라고 하니, 그 시기에 맞춰 학생들에게 연습과 공연에 필요한 무용신을 한 켤레씩 선물하기로 했다.

 

당연히 정세화 선생의 도움이 필요했다. 무용부 학생 수와 각 학생의 무용신 치수를 알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정세화 선생은 고베조고에 연락해서 내 뜻을 전해 주셨고 승낙을 받으셨다. 교장선생님과 무용부 교사의 협조아래 학생들의 이름과 신발치수가 파악되었다. 지도교사 2분을 포함해서 필요한 무용신의 수는 28켤레였다.

 

 

정세화 선생과 의논 끝에 조선학교 무용부 학생들에게 연습과 공연에 쓸 무용신을 선물하기로 했다. 이인형 선생과 함께 모금 캠페인을 벌인 끝에 57분의 후원자들이 모아주신 성금으로 고베조고와 시코쿠초중급학교의 무용부 학생들과 교원들에게 무용신을 전달할 수 있었다.

서울에 돌아온 나는 <무용신 모금> 캠페인을 시작했다. 한국 돈으로 70만원쯤 모금하면 비용을 충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부러 11만원의 후원을 요청했다. 액수를 채우는데 급급하기보다는 후원자 수가 더 중요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57명의 후원자가 94만원의 성금을 모아주셨다. 예산이 넉넉해졌으므로 마침 연락이 된 시코쿠조선초중급학교에도 무용신을 보낼 수 있었다.

 

무용신 모금 캠페인에 이인형 선생이 적극 참여했고, 결국 우리 두 사람은 무용신을 전달하러 227일에 마츠야마, 31일에 고베를 방문했다. 무용신을 받아든 학생들은 뜻밖의 선물에 기뻐했고, 지나치게 좋아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우리는 약소한 선물에 쑥스러우면서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무용신 전달을 끝내고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정세화 선생은 다시 한번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말씀을 하셨다. 두 번째 말씀을 꺼내시는 것을 보니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나는 주의를 기울여 경청했다.

 

1백 년 전 다카라즈카 인근 토목공사에서 사고로 희생된 조선인 노동자 5분이 계신데, 그분들의 영령을 기리기 위해 326일에 새로 추모비를 제막한다는 말씀이셨다. 다카라즈카의 시민단체와 재일동포들이 함께 추진하는 행사라고도 하셨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덧붙이셨다.

 

 

이 지역 시민들이 조선인 희생자 세 분을 위해 1백 년 동안 제사를 지내오셨습니다. 다른 두 분도 일본시민들과 재일동포들이 20년 이상 연례 추도제로 모셔오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1백년 동안 제사를 받으신 분들과 1백년 동안 제사를 지내신 분들이 동시에 궁금해졌다. 1백년전에 무연고자로 분류되신 이 조선인 희생자들은 과연 누구였던가? 일면식도 없는 그들을 그토록 오랫동안 제사 지내온 일본인들은 대체 어떤 분들이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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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본 효고현 다카라즈카(寶塚)에 묻힌 다섯 명의 조선인 노동자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201911월초 오사카에서였다. 효고현 이타미(伊丹) 시에 거주하시는 재일동포 사진가 정세화 선생으로부터였다. 1910년대와 20년대에 있었던 이 지역 토목공사 중에 사고로 사망한 조선인들을 추도하는 비석이 세워진다는 말씀을 처음 들은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내가 추도비 이야기를 귀담아들을 마음 상태가 아니었다. 재일 조선인 위령비나 추도비에 대한 선지식도 별로 없었을 때였고, 무엇보다 당시 나는 무용가 최승희 선생에게 푹 빠져서 그가 1930년대 일본 각지에서 가졌던 조선무용 공연을 조사하고 다니는 중이었다.

 

일본 효고현 다카라즈카시에서 북쪽으로 5킬로미터쯤 떨어진 키리하타의 나가오산 기슭에 세워진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추도비의 전면 하단에는 5인 희생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윤길문(尹吉文)과 오이근(吳伊根), 김병순(金炳順)과 남익삼(南益三)과 장장수(張長守)가 그들이다. 

 

그보다 2년쯤 전인 20175월 나는 최승희 선생의 유럽 공연을 조사해 취재기를 쓴 바 있었고, 연재가 끝나자 바로 일본 공연 조사를 시작했었다. 그뒤로 1년 반 동안 나는 홋카이도의 구시로에서 오키나와의 나하에 이르기까지 최승희 선생의 공연이 있었던 곳이면 어디든 쫓아갔다. 정세화 선생을 만났던 2019년 말에는 이미 일본 내 42개 도시를 조사한 뒤였다.

 

각 지역 조사에서는 공연 날짜와 극장을 확인하고, 발표된 작품들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정리했다. 신문이나 잡지에 난 공연 광고나 홍보 기사, 그리고 평론가들의 비평과 기자들의 후기, 혹은 일반인들의 감상문도 빠짐없이 스크랩했다.

 

조사 초기에는 무용 작품에 대한 관심보다는 최승희라는 인물에게 더 끌려 있었다. 엄혹한 일제강점기에 어떻게 조선무용을 창작하고 공연할 생각을 했는지, 어떻게 그 시기에 국제무대에서 그다지 활발하게 공연활동을 할 수 있었는지, 또 어떻게 가는 곳마다 환영받고, 감탄을 자아내고, 최상의 평가를 받을 수 있었는지, 그런 것이 궁금했다.

2019년 10월30일부터 11월1일까지 3일간, 오사카조선고급학교 문화회관에서는 <제52회 재일조선학생 중앙예술경연대회>가 열렸다.

 

자료가 쌓이고 유럽과 일본의 평론가들의 비평을 정리하면서 최승희 조선무용의 미학에도 눈이 떠지기 시작했다. 평론가들의 비평과 최승희 자신의 작품 묘사를 읽으면서 최승희가 공연했던 조선무용의 특징적인 동작과 정조가 어떤 것이었는지 조금씩 상상해 볼 수 있었다.

 

그러던 중에 나는 조선무용에 대한 또 한 번의 전기를 맞았다. 20191031일부터 112일까지 오사카에서 재일 조선학교 중앙예술경연대회를 참관하게 된 것이다. 4개 부문으로 나뉘어 열렸던 이 경연대회에서 나는 오사카조고 문화회관에서 진행된 무용경연대회를 처음부터 끝까지 참관했다. 내가 재일 조선학생들의 조선무용을 직접 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각국 비평가들의 평론과 최승희 자신의 단편적인 작품 설명을 통해 불완전하게나마 머릿속에 그려지던 조선무용의 실체가 눈앞에서 완벽한 형태로 펼쳐지고 있었다. 학생들의 작품이 주는 느낌과 감동은 내가 상상으로 구축해오던 바로 그 무용이었던 것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내가 최승희 조선무용에 대한 전문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 직관은 재일조선학교 무용부 학생들이야말로 최승희 선생의 직계 제자들이라고 말해 주었다.

 

오사카에서 열린 재일조선학생 중앙예술경연대회에서 만난 정세화 선생. 그는 나의 최승희 조선무용 조사연구에도 큰 도움을 주셨을뿐 아니라 재일조선학교 무용부를 후원하거나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주인공들의 연고를 찾는 프로젝트를 시작하도록 이끌어 주신 분이다.

 

오사카 예술경연대회에서 만난 또 하나의 행운은 정세화 선생을 만난 것이었다. 그는 이 경연대회의 사진 및 영상 촬영책임자로 각 학생들의 공연 작품들을 일일이 사진과 영상에 담고 있었다. 그의 작품은 학생들에게 기념품으로 전달되고 각 학교에 기록으로 보관된다고 했다.

 

경연대회 첫날 점심 겸 휴식 시간에 대회장 바깥으로 나와 흥분을 가라앉히다가 정세화 선생과 눈이 마주쳤다. 붙임성 좋은 정세화 선생께서 먼저 말을 걸어오셨다. “한국에서 오셨지요?” 그리고는 이 모든 일이 시작되었다.

 

그 뒤로 정세화 선생은 내 최승희 조사연구를 적극 도와주셨고, 재일조선학교 무용부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선물하는 프로젝트를 인도해 주셨다. 효고현의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와 함께 이 지역 조선인 정착의 아픈 역사를 소개해 주셨고, 마침내 우리는 추도비의 주인공 다섯 분의 한국내 연고를 찾는 일에 함께 나서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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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 예술가의 눈에 띤 최승희양." 1926326일자 <매일신보> 2면에 실린 기사 제목입니다. 이 기사가 이른바 "최승희 현상"의 출발점이라고 알려져 왔습니다

일제 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20년 동안 '최승희'라는 이름은 조선과 일본 전역에 퍼졌습니다. 중국과 타이완과 오키나와는 물론 남북 미주와 유럽 언론의 주목도 받았습니다해방 후 남한 매체에서는 그의 이름이 지워졌지만 북한에서는 더 대대적으로 퍼졌을 것입니다. 1950년대와 60년대에는 소련과 동유럽 각국에서도 그 이름에 열광했습니다.

 

사진1: 최승희의 무용유학을 보도한 1926년 3월26일의 <매일신보> 기사. 그동안 이 기사가 최승희를 보도한 최초의 신문기사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조정희PD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이보다 하루 전인 3월25일, 일본어신문 <경성일보>가 최승희의 무용유학을 단독 보도한 것이 확인되었다.


대부분의 평전들은
<매일신보>의 이 기사가 최승희의 이름이 신문에 보도된 첫 기사라고 서술해왔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매일신보>보다 하루 전인 325일에 최승희를 보도한 신문이 있었습니다. <매일신보>의 자매지이자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경성일보>입니다. 일본어로 발행되었던 이 신문의 3면에 최승희 기사가 사진과 함께 보도되었습니다.

 

<경성일보>의 기사는 최승희(16)경성부내 체부동 137번지 최준현씨의 영양이며 금년 3월에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재원일뿐 아니라 학교시절부터 성악을 잘해서 학우들부터 <카나리아 누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고 서술했습니다.

 

또 이 기사는 최승희가 음악학교를 꿈꾸었으나 입학허가를 받지 못하자 여자사범학교를 지망하여 4월부터 다니게 되었지만, “마침 이시이 남매가 경성에 온다는 말을 듣고 부모님을 설득한 끝에 ... 오늘 아침10시에 일행과 함께 도쿄로 향하게 되었다고 보도했습니다.

 

<경성일보>는 또 승희씨는 두 오빠를 가진 사랑스런 외동딸로 ... 부모님의 사랑을 받았숙명여학교에서도 최연소 졸업생으로 부러움을 받아왔으며, 이제 조선이 낳은 한 사람의 무용가로서 밝은 희망을 가슴에 품고 떠나게 되었다고 덧붙였습니다.

 

사진2: 최승희의 일본 무용유학을 최초로 보도한 1926년 3월25일의 <경성일보>. 최승희의 가족관계와 학창생활에 대한 몇가지 '오보'가 개재되어 있기는 하지만, 최승희가 이시이 바쿠 일행을 따라 무용유학을 가게된 동기와 경위가 비교적 상세히 보도되어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 기사에는 몇 가지 오보가 끼어 있습니다. 첫째, 최승희는 숙명여고보를 수석으로 졸업한 것은 아닙니다. 78명의 졸업생 중에서 7등이었고, 졸업반 성적이 90점 이상으로 우등상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숙명여고보 17회의 수석 졸업자는 이미 작가로 활약하고 있던 박화성입니다.

 

둘째 오보는 가족사항입니다. 최승희가 외동딸이라고 했지만 그에게는 최영희(崔英喜)라는 이름의 언니가 있었습니다. 최영희도 진명여고보 출신의 재원이었고, 졸업후 일찍 결혼했지만, 최승희가 숙명여고보를 졸업할 무렵에는 이혼하고 친정에 돌아와서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셋째는 그의 진로에 대한 오보입니다. 기사는 승희씨는 음악학교를 꿈꾸고 있었으나 입학허가를 받지 못하자 여자사범학교를 지망하여 4월부터 다니게 되었다고 서술했지만, 최승희는 음악학교에 응시한 적은 없습니다. <경성사범학교>에도 필기시험에 합격했으나 면접에서 낙방했으므로 “4월부터 다니게 되었다고 한 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이런 몇 가지 오보에도 불구하고 <경성일보>의 기사는 최승희의 부친과 큰오빠의 이름을 확인해 주었고, 그의 무용 유학을 도와준 데라다(寺田)와 기무라(木村)씨 등의 일본인들의 이름도 밝혀 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최승희가 무용유학을 떠나게 된 과정과 그 정확한 날짜와 시간까지 알려주고 있으니 소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경성일보>가 최승희의 무용유학을 가장 먼저 보도할 수 있었던 까닭이 무엇일까요? 첫째, 이시이 바쿠의 경성공연 후원사가 <경성일보>였습니다. 둘째, 최승희-최승일 남매가 이시이 바쿠를 만날 수 있도록 소개장을 써준 사람이 <경성일보>의 학예부장 데라다 도시오(寺田壽夫)였습니다. 그는 이시이 바쿠를 대신해서 최승희를 면접까지 했었기 때문에 최승희의 가정과 학력에 대해서는 물론, 최승희의 무용유학이 결정된 것도 가장 먼저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매일신보><경성일보>325일자 단독기사를 보고 몇 가지 오보를 바로잡은 후, 다음날인 326, 조선어 신문으로는 처음으로 최승희의 무용유학을 보도할 수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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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후쿠오카에 있는 <큐슈 조선학교> 무용부 학생들이 무용신을 받고 후원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이쁜 편지지를 고르느라고 애를 쓴 흔적이 역력하고요, 사진을 많이 넣어서 잘 편집하려고 노력을...

게시: 조정희 2021년 3월 23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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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요코하마에 있는 <가나가와 조선학교> 무용부 학생들이 무용신 잘 받았다는 인사를 보내왔습니다. 귀엽습니다. 이렇게 이쁘게 꾸며서까지 보내올 줄은 몰랐습니다. <무용신 보내기>에 참여해 주신 후원자분들께 새삼 고맙습니다.^^

게시: 조정희 2021년 3월 19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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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에 도착했습니다. 했는데, 그 사이에 일본 <이바라키 조선학교>의 '중급부' 학생들이 무용신을 받고 감사하다며 보낸 사진과 영상이 도착했네요. 반가운 마음에 다짜고짜 포스팅...^^ 2초짜리 영상이지만, 엑기스가 담겨있습니다. 아이들의 천진스런 웃음...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재일 조선학교는 일본정부 인가학교가 아니며, 각종학교로 분류되므로 <고등학교>라든가 <중학교>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조선학교 중급부>라든가 <조선학교 고급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일전에 <이바라키 조선학교>의 고급부 학생들이 감사의 이메일과 함께 사진을 보내왔길래, "중급부 학생들에게는 무용신이 전달되지 못한건가?"하고 궁금했었습니다만... 받았네요.^^ 작은 정성으로나마 이 학생들을 저렇게 웃을 수 있게 한 걸 보면, 우리가 쫌 보람있는 일을 하고 있는거, 맞는 듯 합니다.^^

게시: 조정희 2021년 3월 15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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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관심과 정성으로 마련된 무용신이 재일 조선학교 무용부 학생들에게 속속 전달되고 있습니다. 사진은 <히로시마 조선학교>의 중급부와 고급부의 무용부 학생들이 보내온 감사의 인사말과 사진입니다. 사진은...

게시: 조정희 2021년 3월 12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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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신을 받은 재일 조선학교 무용부 학생들의 감사 인사가 속속 도착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바라키(茨城)조선학교>의 고급부 학생들이 이메일을 통해 감사 인사를 보내왔습니다. <히로시마 조선학교>의 중,고급부...

게시: 조정희 2021년 3월 11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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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마음)으로 이어지는 KOREA × JAPAN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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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23일 오후 6 공연 실황 중(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 윤민석 곡)

 

매년 연초에 신년축하 공연을 여는 <교토조선가무단>은 올해 한국 동포들에게 특별한 선물을 마련했습니다. 조선학교에 <무용신>을 보내주신 일에 감사하여, 조선학교 후원모임 <팀아이> 회원들에게 공연을 공개하신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2천5백엔(=약3만원)의 입장료를 받는 격조 있고 인기 있는 공연입니다. 하지만 한국 <팀아이> 회원들이 무료로 참가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번 공연 중에 특별한 노래가 한곡 연주됩니다. <아리랑의 고개를 넘어서>라는 노래입니다. 작사가는 정홍영 선생이신데 오랫동안 재일 조선인의 역사를 연구하신 분입니다. 

정홍영 선생은 1920년대에 다카라즈카에서 돌아가신 5분의 조선인 노동자의 역사를 발굴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유지를 받들어 일본 <팀아이>의 콘도 도미오 선생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건립하셨습니다. 정홍영 선생의 아드님이신 정세화 선생도 희생자분들의 유족을 찾는 일에 노력하고 계십니다.

올해 <교토조선가무단>이 <아리랑의 고개를 넘어서>를 초연합니다. 무척 뜻 깊은 일입니다. 잘 들어주시고 기억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재일동포 가무단의 일반공연을 실시간으로 관람하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소중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한국 <팀아이>, 황웅길, 정회선, 이인형, 강충호, 정철훈, 조정희 드림.

p.s.: 유튜브 사이트에 가시면 <구독>과 <좋아요>, 꼭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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