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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영 선생이 발굴한 또 하나의 중요한 기초자료가 매장인허증이다. <가극의 도시의 또 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의 제1부 제1<니시타니 산 속에 잠든 조선인들>에 따르면 정홍영 선생이 이 3장의 매장인허증을 입수한 것은 1985년 봄이었다고 한다.

 

내가 고베수도 건설공사에 참가한 조선인을 처음 알게 되고 조사까지 하게 된 것은 다카라즈카 시 역사편찬실에 보존되어 있던 오래된 매장 인허증 때문이었다. 1985년 초부터 봄 무렵에 걸쳐서 나는 당시 사카세카와(逆瀬川)에 있는 다카라즈카시 중앙공민관 2층의 방 4개를 차지한 시사(市史)편찬실에 여러 번 간 적이 있다. ...

 

몇 번이나 다니는 동안에 거기서 시사(市史) 편집담당 주사로 근무하는 와카바야시 야스시(若林泰)씨와 친분이 생겼다. ... 어느 날 특별한 용무 없이 근처를 지나다가 잠시 들렀는데, 나를 보자마자 와카바야시씨가,‘, 정선생, 마침 잘됐네요. 연락하려고 했거든요. 이런 게 있는데 뭔가 참고가 될까요?’ 하며 복사한 것을 석 장 보여주셨다. 손에 받아들고 보니 모두 조선인의 이름이 적힌 옛날 니시타니 촌사무소가 발행한 매장인허증 사본이었다.

 

첫눈에 내 눈길을 끈 것은 그들의 사망 시기가 1914년과 1915년이었던 점이다. 내무성 경보국(警保局)의 통계보고서 <조선인개황(朝鮮人概況)>에 따르면, 1915년에 조선인은 일본 전국에 3986, 효고현에는 218명이 있었다. 물론 이 숫자를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겠는데, 한일합방 이후 불과 4, 5년밖에 지나지 않은 오래전 시기였으니 무리도 아니다. 그런 시기에 외딴 니시타니 마을에 조선인이 살고 있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고, 그것만으로도 크게 놀랄만한 일이었다.“

 

정홍영 선생의 저서 <가극도시의 또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 17쪽에 수록된 3장의 매장인허증

 

이렇게 해서 고베수도공사에서 순직한 조선인 노동자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에 대한 정홍영 선생의 조사가 시작되었다. 매장인허증에는 세 사람의 이름뿐 아니라 주소와 발행날짜를 비롯한 몇 가지 인적사항이 적혀 있었으므로, 사고의 시기와 매장일, 그리고 각 순직자들의 나이도 짐작할 수 있었다.

 

정홍영 선생과 마찬가지로 나도 세 순직자의 사망 시기에 주목했다. 김병순씨의 매장허가 날짜는 191483일로 가장 빨랐고, 1915121일에 매장허가가 난 남익삼씨가 두 번째, 그리고 1915324일에 매장허가를 받은 장장수씨가 가장 나중이었다.

 

고베수도공사는 3차에 걸쳐 이뤄졌다. 1897-1905년의 창설공사로 고베수도가 완공됐고, 급격히 증가하는 고베 인구의 상수도 수요를 맞추기 위해 1911-1921년에 제1차 확장공사, 일차세계대전 이후의 호황기로 고베의 산업과 인구가 더욱 늘어나자 1926-1936년의 제2차 확장공사가 이뤄졌다. 따라서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가 참가했던 고베수도공사란 제1차 확장공사임이 분명했다.

 

한편, 매장인허증에 나타난 김병순씨의 생일은 1883(메이지16) 519일생으로 명기되어 있어 사망 당시의 나이가 31세였음을 알 수 있다. 다른 두 사람의 생년월일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남익삼씨의 나이가 37, 장장수씨는 27세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남익삼씨는 대략 1877년생, 장장수씨는 1887년생 정도로 추정될 수 있다.

 

1929년에 발생한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로 사망하거나 중경상을 입은 5명의 나이가 모두 19세에서 25세 사이였던 것과 비교하면 고베수도공사에서 사망한 3인의 나이가 더 많았다. 1870년대와 1880년대에 태어난 고베수도공사에 참여한 이들은 아마도 일본으로의 노동이민 제1세대이자 후쿠치야마선 철도개수공사에 참여한 노동자들의 아버지 세대였음에 틀림없다.

 

이후 정홍영 선생은 고베수도공사 중에 순직한 3인의 조선인 노동자의 사망 장소와 사망 이유, 그리고 이들이 매장된 묘소를 찾기 위한 연구를 계속했고, 상당한 성과를 이뤘다. 이를 숙지하면서 나는 이 3인이 떠나온 조선반도 내 연고지를 찾는 데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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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영 선생의 <가극 도시의 또 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 17)>에는 1914년 고베수도공사 중에 사망한 김병순(金炳順), 남익삼(南益三), 장장수(張長守)씨의 매장인허증 사본이 사진으로 수록돼 있다. 하지만 3장의 매장인허증이 겹쳐져 있기 때문에 각 사람의 기록을 볼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이같은 사정을 알게 된 곤도 도미오 선생은 자신이 보관 중인 매장인허증 사본을 사진 찍어 보내주셨다. 훨씬 선명해진 매장인허증 사본을 꼼꼼이 살피면서 3인의 연고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우선 일본어로 된 김병순씨의 매장인허증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의 <지도3(1884)>에는 강릉의 주요 지명으로 <북일리면>과 <대창역>이 나타나 있다.

 

인허증, 4,

본적지, 조선 강원도 강릉군 북일리(北一里) 대천동(大天洞)

(주소) 가와베군(川邊郡) 니시타니촌(西谷村) 내 타마세촌(玉瀨村) (번지수/호수 없음)

(성명) 김병순(金炳順), (생일) 1883519

위 사람의 매장을 허가함, 191483일 오후2시 이후에 시행해야 함

191483, 카와베군 니시타니 촌장 다츠미 류이치 (도장)”

 

김병순씨의 매장인허증이 제4호라는 것은 1914년 니시타니촌에서 사망해 매장된 4번째 사람이라는 뜻일 것이다. 정홍영 선생의 조사에 따르면 그해 니시타니촌 사망자는 15명이며, 그중 타지방 출신인이 10명이었다. 김병순씨는 10명의 외지출신 사망자 중의 한명이었던 것이다.

 

남익삼, 장장수의 매장인허증에 비해 김병순씨의 기록은 분명했다. 그의 생년월일은 1883519일이었으므로 사망 당시의 나이는 31세였다. 최종 주소지는 가와베군 니시타니촌의 타마세였다. 번지수는 없지만 이 지역의 노동자 합숙소(=함바)가 그의 마지막 주소였을 것이다.

 

그의 조선 본적지 주소도 뚜렷했다. <강원도 강릉군 북일리 대천동>이라고 되어 있다. 191483일에 작성된 이 주소를 오늘날의 주소로 바꾸면 김병순씨의 연고지를 찾을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정홍영 선생의 저서에 실린 3장의 매장인허증(왼쪽)과 곤도 선생이 보내주신 김병순씨의 매장인허증.

 

1914년 이래 강원도 강릉군의 행정구역이 많이 변했다. 191441일 부터 강릉군의 북1리면과 북2리면, 그리고 남1리면이 합쳐져서 군내면(郡內面)이 되었고, 해방후 195591일의 행정구역 개편 때 군내면은 강릉시의 포남동(浦南洞)이 되었다.

4

포남은 경포 남쪽 마을이란 뜻인데, 이 지역의 옛이름인 보래미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어원은 보다()+()’의 합성어라고 한다. 어원대로 하면 <보람이>가 되어야 하겠지만 강릉 방언 발음으로 <보래미>가 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1970년대 이후 포남동 일대에 구획정리 사업이 이루어지면서 인구밀도가 급속히 증가했고, 이에 따라 199532일의 행정구역 정리 과정에서 포남1동과 포남2동으로 분리되었다. 2019년 현재 포남동의 인구는 3만 정도이고, 이 지역은 강릉시의 도심이자 상권의 중심지이다.

 

1884년의 지도에 나타난 <북일리면>과 <대창역>의 오늘날 위치는 <포남동>(오른쪽)과 <교동>(왼쪽)으로 추정할 수 있다. <교동> 남쪽의 <중앙동>과 <옥천동>도 <대창리>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매장인허증의 본적지 주소 마지막의 대천리대창리의 잘못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지도3(1884)>에는 강릉지역에 북일리면대창역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오늘날의 지도로 옮기면 북일리면은 대략 오늘날의 포남동’, 대창역은 교동중앙동옥천동에 해당할 것이다.

 

이 지역에 통일신라시대의 거대한 당간지주가 남아 있으며 그 공식 명칭이 <강릉 대창리 당간지주>이다. 당간지주의 오늘날 주소가 강릉시 옥천동 334번지이지만 이는 교동과 매우 가까우며,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까지도 교동과 옥천동은 모두 대창리로 불렸다.

 

이렇게 해서 김병순씨의 연고지 강릉군 북일리면 대천동은 오늘날의 강릉시 포남동과 교동으로 특정화될 수 있었다. (*)

 

오늘날의 강릉시 행정지역 지도 (출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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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최승희의 결혼기념일이다. 90년 전인 193159일 오전11, 안막과 최승희는 동대문 밖의 전문요리점 <청량관>에서 가족과 친척들만 모인 가운데 서정화 선생의 주례로 조촐한 결혼식을 가졌다. 결혼식에 걸린 시간은 불과 10분이었다.

 

최승희의 결혼식장에 대해서 논란이 있었다. 평전들은 대부분 <청량원>이라는 식당을 결혼식장이라고 서술했지만 그런 이름의 식당은 없었다. 그밖에도 문헌에 따라 <영도사><청량사>라는 사찰이 결혼식장으로 언급되기도 했다.

 

최승희의 결혼과정에 대한 거의 모든 문헌을 섭렵한 끝에 나는 안막-최승희의 결혼식장이 <청량원><영도사><청량사>도 아닌, 전문요리점 <청량관>임을 밝힐 수 있었다. 그것을 조사하는 과정은 원고지 80매 가량이 들어간 지루한 작업이었지만, 거두절미하면 결론이 <청량관>이었다.

 

그런데, 최승희의 결혼식장으로 <영도사><청량사> 등이 언급되면서 혼란이 생겼던 까닭은 무엇일까?

 

우선 결혼식 전까지의 매체 보도에 혼란이 생긴 것은 안막과 최승희의 결혼식이 촉급하게 결정되었고, 그에 따라 결혼식장을 예약하는 것 자체가 늦어졌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결혼 결정은 그해 417일 이후에 내려졌고, 최승희 부모의 승낙이 떨어진 것이 4월말이었다. 따라서 결혼 일시를 정하고 식장을 예약할 시간이 약 일주일뿐이었다.

 

특히 결혼식에 임박한 55일의 <조선일보>7일의 <동아일보>가 결혼장소를 보도하지 못한 것은 이례적인데, 이는 그때까지도 결혼식장이 정해지지 못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혹은 이 결혼식을 가족만의 조촐한 모임으로 진행하기 위해 가족들이 일부러 함구했을 가능성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날짜는 발표하면서 장소만 함구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매일신보>56일 보도에서 결혼장소를 <청량사>라고 한 것은 실수에 따른 오보였을 것이다. 혹은 5일까지의 취재를 통해 당사자나 가족으로부터 식장으로 <청량사>를 고려 중이라는 정도의 언질을 받고 그대로 기사화한 것이 아닌가 싶다.

 

결국 정확한 보도를 한 것은 58일까지의 취재를 통해 결혼식장이 <청량관>이라고 서술한 59일의 <경성일보> 뿐이었다.

 

매체들의 혼란보다 조금 더 이례적인 것은 최승희의 부정확한 기억이다. 그는 두 권의 자서전(1936, 1937)에서 자신의 결혼 일시를 잘못 기록했고 결혼식장은 언급도 하지 않았다.

 

<조선중앙일보(193431)>와의 인터뷰에서는 자신의 결혼이 재재작년(=1931) 5<청량관>”이었다고 옳게 대답했지만, <삼천리(19357월호)> 기고문에서는 소화7(=1932) 봄 청량리 영도사(永導寺)”라고 서술했고, <조광(19409월호)>과의 인터뷰에서는 그 이듬해(?) <청량사>”라고 답변했다. 시간이 갈수록 최승희의 회상이 사실과 멀어짐을 알 수 있다.

 

결혼한 지 4-5년만에 자신의 결혼식 일시와 장소에 대한 기억이 이렇게 모호해질 수 있는 것일까? 더구나 결혼이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여성에게 훨씬 더 중요했던 시대였던 것을 고려하면 최승희의 망각은 대단히 이례적이다.

 

그러나, 그동안 최승희의 삶과 춤을 조사하고 연구해 오던 지난 3년여 동안의 경험과 느낌으로 말한다면, 최승희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최승희의 삶은 일생을 통해서뿐 아니라 하루하루의 생활도 무용에 파묻힌 외골수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앞에 든 인터뷰나 기고문을 작성하던 시기는 1933년 일본으로 다시 건너가 새롭게 조선무용 분야를 개척하던 시기이다. 그의 최초의 조선무용 작품 <에헤야 노아라(1933)>가 이 시기에 발표되었고, 잇달아 <검무(1934)>, <승무(1934)>, <봉산탈춤(1935)>, <코리안 듀엣(1936)>, <초립동(1937)>, <보살춤(1937)> 등의 걸작을 창작하는 데에 매진하고 있을 때였다.

 

특히 19355월부터는 이시이 바쿠 무용단에서 독립하여 독자적인 무용연구소를 세웠으므로 이를 꾸려나가는 데에도 혼신의 힘을 쏟고 있었다. 온 신경이 신작품 창작과 무용연구소 운영에 집중되어 있을 때였다. 다행히 이런 노력은 결실을 거두었고 1936년부터 최승희는 조선은 물론 일본 제일의 무용가로 꼽히면서 1938년부터의 세계순회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같은 사정을 고려할 때 당시 최승희에게는 자신의 결혼식에 대한 기억마저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겨졌을 가능성이 크다. 무용 활동에 대해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계획하고 실행해 나가면서도, 그 밖의 일상사에 대해서는 너무도 명백한 오류를 범하곤 했던 것이다.

 

그렇다. 최승희는 자신의 결혼식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던 무용가였다. 자기 결혼식의 날짜나 장소를 잊거나 혼동하는 것은 쉽게 나타나는 실수가 아니다. 자기 인생의 중대사를 잊어버리는 맹한 실수일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맹한 실수는 정신을 온통 무용 한 군데에 집중하던 시기에 최승희에게 일어났던 일시적 건망증, 혹은 기억착오였을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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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이래의 각종 매체의 보도와 최승희 자신의 회상에서는 그의 결혼식장으로 불교사찰 <영도사><청량사>, 그리고 고급전문요리점 <청량관>이 언급되었음이 확인됐다. 이제 이 세 곳 중에서 어느 곳이 실제로 안막-최승희의 결혼식이 열린 곳인지를 추론할 단계이다.

 

안막과 최승희의 당시 시계열 동선을 파악한 결과 두 사람이 맞선을 통해 처음 만난 것은 193138-31일 사이였고, 아마도 이 3주일 동안 2-3회의 데이트를 더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최승희가 북선 지역 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417일 직후에 결혼 결정이 내려졌고, 4월말까지는 최승희 부모의 승낙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보았을 때 안막과 최승희가 결혼식을 준비할 시간은 대략 10일밖에 없었고, 날짜를 9일로 정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겠지만 결혼식장을 섭외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불과 일주일을 앞두고 결혼식장 예약을 한다는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쉬웠을 리 없기 때문이다.

 

55일의 <조선일보> 보도나 57일의 <동아일보> 보도에도 결혼식의 장소는 밝혀지지 않았고, 56일의 <매일신보> 보도에서 비로소 결혼식장을 <청량사>, 결혼당일인 59일의 <경성신문><청량관>이라고 밝힌 바 있다.

 

1931년 5월9일의 <경성일보>는 최승희의 결혼소식을 전하면서 예식장이 <청량관>이라고 정확히 보도했다.

 

매체 보도를 중심으로 그 세 장소의 간략한 역사와 1920-30년대의 상황을 검토해 본 결과, 세 곳 모두 교통이 편하고 경성 시민들에게 인기 있는 소풍지였던 데다가, 모두 식사를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혼식이나 피로연을 열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자료를 살피던 중 한 가지 결정적인 증거가 나타났다. 1900년부터 1930년대까지의 30년 동안 <영도사><청량관>에서는 다수의 결혼식이 있었던 기록이 나타났지만, <청량사>에서는 단 한 건의 결혼식도 보도된 것이 없었다. 결혼식 보도가 없다는 것이 곧 <청량사>가 결혼식장으로 사용된 바 없다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량사>가 결혼식장으로 적당하지 않다는 인식이 공유되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것은 <청량사>가 비구니 도량이라는 점 때문이다. 여승들만 기거하는 <청량사>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것이 당시는 물론 지금도 그리 일반적인 관행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일반 시민들의 인식뿐 아니라 <청량사>의 승려들의 인식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청량사>가 많은 단체행사들과 문화행사, 그리고 장례식과 각종 제례들이 열리면서도 유독 결혼식에 대해서만은 기록이 없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렇다면 안막-최승희의 결혼식장 후보는 <영도사><청량관>으로 좁혀지게 되는데, 그중 <청량관>이 결혼식장이었을 것이라고 믿을 만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영도사>에서 결혼했다는 기록은 19357월호 <삼천리>에 서술된 최승희의 회상 한 건 뿐이었다. 다른 문헌에는 <영도사>가 결혼식장으로 언급된 바 없었다. 게다가 이 회상에서는 결혼 시기도 잘못되어 있었다. 193159일이었던 결혼식을 ‘1932년 봄이라고 기억한 것이다. <영도사>가 결혼식장이었다는 주장의 근거는 신빙성이 낮은 회상 1건 뿐이다.

 

반면에 <청량관>이 결혼식장이었다는 결정적인 언급은 <경성일보>59일 보도이다. 이 보도는 결혼식이 열리는 당일 배포되었지만 기사는 전날인 58일 작성되었을 것이다. 결혼식장이 뒤늦게 정해졌다면 이 보도야말로 취재를 통해 가장 사실대로 보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매일신보>56일 보도에서 <청량사>라고 한 것은 <청량관>을 오해했거나, 혹은 결혼식장으로 <청량사>가 고려되고 있다는 언질을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둘째, 최승희의 회상에 바탕을 둔 193431일의 <조선중앙일보> 인터뷰 기사에서는 두 사람이 재재작년 5<청량관>에서 화촉의 성전을 거행했다고 서술한 반면, 1940년의 <조광>에서는 최승희가 “<청량사>에서 결혼식을 거행했다고 서술했다. 최승희의 상충되는 두 회상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다면, 결혼식에 더 가까운 1934년의 회상에 더 신빙성을 두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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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일보>최승희양은 9일 경성부 바깥 청량리의 <청량관>에서 서정희씨의 주례 아래 안막군과 결혼식을 거행한다고 보도했었다. 193431일의 <조선중앙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도 최승희는 재재작년(=1931) 5월 청량관에서 화촉의 성전을 거행했다고 회상했다.

 

<청량관>은 어떤 요리점이었던 것일까? 언론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보도된 것은 190036일의 <제국신문> 4면에 실린 광고였다. 이후 46일까지 총 30회의 동일한 광고를 통해 홍릉 정거장 좌우 요리집에서 외국 요리 잘하는 곡상을 두고 정결이 하오며, 동편채 뒤로 정쇄한 별당을 지어 내외하시는 부인을 위하여 여인을 시켜 대접할 터이오며, 혹 소창하라 하시는 이는 미리 통기하오면 포진 범백을 정결이 하여 드릴터오니 모든 손님은 찾아오시라고 했다. 이 광고문에는 <청량관(淸凉館)>의 주인이 조원규씨임도 밝혔다.

 

<제국신문>은 같은해 96일자 3면에 또다시 <청량관> 광고를 실었다. 그런데 광고 내용이 특이하다. “홍릉앞 정거장 요리집에서 외상이 심하와 철시하였다가 다시 개시하였사오니 내림하시옵. 청량리 청량관 고백.” 이 광고도 925일까지 모두 15회 게재되었는데, “외상 때문에 철시해야 했다는 사정 설명이 영업이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고, 주인 이름이 사라진 것으로 보아 혹시 주인이 바뀌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었다.

 

다카시마 유사부로와 정병호 공편저의 사진집 <세기의 미인 무용가 최승희(1994)> 60쪽에 실린 최승희-안막의 결혼식 장면. 사진설명 중의 <청량원>이라는 장소 이름은 <청량관>의 잘못으로 보인다.

 

그러나 경영자가 바뀌었어도 영업이 쉽지는 않았던 것 같다. 1908731일의 <황성신문(3)>근일 동문 외 홍릉 부근지에 있는 바 청량관 연희는 관람인이 매우 적어서 경비를 불능 담당인고로 일전부터 폐지하였다고 보도했다. 아마도 이 두 번째 청량관은 무대를 갖춘 극장식 식당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영업이 되지 않아 폐관했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 이후에는 요리점 청량관이 다시 영업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91381일의 <매일신보(3)>이 김모, 한모, 홍모씨 등 3명이 지난달 28(중복날) 다동조합 기생 부용과 광교조합 기생 산옥, 란홍 3명을 대동하고 청량관 요리점에서 질탕히놀다가 폭력 사고가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연회식의 음식점이 운영되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 세 번째 <청량관>은 나름대로 고정고객을 만들었던 것 같다. 1916513일과 62일의 윤치호의 영문 일기에도 가족과 지인들과 함께 <청량관>에서 점심이나 저녁식사를 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때 식사비가 160전이었음을 밝혀 놓았다. 인근 청량사의 식사비가 1인에 40-80전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청량관>은 두 배 이상 비싼 고급 음식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청량관>은 또다시 주인이 바뀌었다. 192144일의 <동아일보>는 새로운 <청량관> 광고가 실렸다. “고급 조선식/일식/양식요리를 제공하는 청량관 개시광고였다. 광고문 내용은 날은 따뜻하고 바람도 시원한 가절에 청량리 늘어진 버들에 새로운 봄향기를 맛보시며 버들피리의 자연의 음악을 벗삼아 일상의 노고를 유감없이 위로하실 곳은 청량관이오니 반드시 일차 왕림하심을빈다는 것이었다. 이 광고문 하단에는 대소 연회주문에 응함이라고 덧붙여져 있었고, 주인 이름을 유형호(柳瀅鎬)라고 밝혀져 있었다.

 

그런데 이 광고문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410일의 <동아일보>에 새로운 광고문을 게재하면서 이번에 본인이 당관을 인수 영업하옵는 바 제반 설비를 일신 개량하옵고 전화 기타 만반 기구를 구비하온 중 가절을 점하여 43일부터 개업했다는 점을 명시하고 당분간 정가에 2할인을 제공하겠다고 덧붙였다. 이 광고문에는 <청량관>의 주소가 청량리 199번지,” 전화번호도 2782번이라고 밝혀져 있었다.

 

192043일 네 번째로 신장개업한 <청량관>은 비로소 성업을 구가한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까지도 영업을 계속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1968724일의 <동아일보>725일의 <조선일보>가 공무원이 출입해서는 안 되는 387개의 유흥업소 목록을 발표하면서 동대문구의 <청량관>을 이 목록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주인과 소재지가 동일한 업소였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청량관>이 요리와 함께 술을 판매했지만 <청량사><영도사>처럼 풍기문란으로 경찰당국의 제재를 받은 적은 없었다. 다만 밥과 술을 먹고 돈을 내지 않는 무전취식이나 술에 취해 난동을 벌이는 폭행사건, 혹은 <청량관>과 관련된 교통사고 등이 더러 발생하곤 했다.

 

예컨대 1915815일의 <매일신보>는 무전취식 미수 사건을 보도했고, 1925617일에는 2명의 취한의 난동으로 손님과 기생이 폭행당한 사건을 전했다. 1929326<매일신보>에는 <청량관>으로 가던 자동차가 전복되어 동행하던 기생 2명이 전치 3주의 중상을 입었다는 기사도 실렸다.

 

하지만 <청량관>은 당시 경성의 주요 사회단체의 모임이 열리는 곳으로 명성이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회장을 구비한 한//양식 고급 음식점이었으므로 상류층이나 인텔리층 고객이 많았고, 각종 사회단체들의 회의나 회식도 자주 열렸다. 윤치호가 그의 영문 일기에서 1934531일과 1935610일 조선체육회 총회를 주재하기 위해 <청량관>을 방문했던 사실을 기록한 것을 보면 <청량관>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그밖에도 경성의 각종 경제단체나 이익단체, 종교단체나 주요 학교의 동창회 등이 <청량관>에서 모임을 가졌다. 1914617일자 <매일신보>경성남부동현 이발조합원 일행이 17일 낮 12시에 청량관에서 제3회 기념식을 가졌다고 보도했고, 1916513일에는 윤치호가 이상재 등과 함께 청량관에서 점심식사, 1920328일에는 보성법률상업학교 교우회가 청량관에서 총회를 열었다.

 

사장이 유형호로 바뀐 뒤로도 1920614일에는 경성종로조선인여관주인 간친회, 1921426일 조선인 정동총대연합회 초대회, 19211012일에는 야소교신학교 목사승진축하연, 19221029일에는 선린상업학교 동창회, 1925524일에는 법학전문학교 동창회, 1928630일에는 한성사범학교 동창회, 1930614일에는 재경성 니혼대학 교우회 등이 청량관에서 모임을 가졌다.

 

최승희의 결혼식 이후에도 193159일에 조선체육회 이사회, 62일에는 조선주류제조업자 59명의 주류가격협정 회의, 817일에는 와세다대학 동창회, 1933721일 용우회 친목총회, 193645일에는 조선 가구수선직공조합 총회 등이 계속되었다.

 

체육행사와 기타 환영회 등도 자주 열렸다. 192574일부터 3일간 <청량관> 앞에서 제1회 추천(그네타기) 대회가 열렸고, 1928723일 조선체육회 정기총회가 열린 것도 <청량관>이었다. 또한 이곳에서는 1940723일에는 함귀봉 귀국환영회가 열리기도 했다.

 

끝으로 <청량관>은 결혼식장으로도 이용되었다. 1923827일에는 전응열군과 김갑순양의 결혼식, 192669일에는 정창운군과 리정희양의 결혼식, 1933430일에는 중앙일보기자 최문우의 결혼식 등이 그것이었다. 결혼식을 다른 곳에서 한 후에 <청량관>에서는 피로연만 열기도 했다. 192579일의 박용대군과 김희순양의 결혼 피로연이 그런 경우였다.

 

따라서 최승희의 결혼식이 <청량관>에서 열렸다면 그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최승희와 안막은 이미 예술계와 문학계의 촉망받는 젊은이였고, 두 사람의 집안도 모두 양반 가문의 지체 있는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일부 평전이 <청량관>을 염두에 두고 자그마한 식당”(강이향, 1993:85; 정병호, 1995:65)이라고 서술했다면 이는 잘못이다. <청량관>은 경성 시내의 <명월관>이나 <장춘관>에 비견되는 대형 요리점이었기 때문이다.

 

또 최승희의 결혼식이 <청량원/청량관>이라는 식당에서 열렸다고 서술한 평전들 중 일부는 이 식당이 <청량사>의 부속 식당이었다고 서술한 것도 있다. (강준식, 2012:88).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달랐다. 적어도 1900년부터 1968년까지의 문헌으로 확인되는 <청량관>4차례나 소유주가 바뀌기는 했으나 사장의 이름이 남성인 사기업이었으므로, 비구니 도량인 <청량사>의 부속식당이었을 리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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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사는 <매일신보>가 최승희의 결혼식장으로 보도한 사찰이다. 최승희 자신도 <조광(19409월호)>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청량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고 회상했다.

 

청량사(淸凉寺)는 천장산(天藏山)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비구니 도량이다. 예부터 탑골 승방 보문사, 두뭇개 승방 미타사, 새절 승방 청룡사와 함께 한양 인근의 4대 비구니 도량으로 유명한 돌꽂이 승방도 이 곳이다. 지금은 돌꽂이 승방과 청량사가 같은 절이지만,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청량사는 홍릉 자리, 돌꽂이 승방은 임업시험장 자리에 따로 기록되어 있었으므로 원래는 별개의 사찰이었다.

 

청량사의 창건연대와 창건자에 대한 자료가 없지만 <고려사절요> 3권 예종12(1117)의 기록에 그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고려 예종(1105-1122년 재위) 이전에 창건된 역사 깊은 절이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일본인들에게 살해된 명성왕후의 묘(=홍릉)가 그곳에 조성되면서 청량사는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돌꽂이 승방과 합사된 것도 이즈음일 것이다.

 

일제강점기 경성 시민들의 대표적인 소풍 유원지는 성 안의 동물원과 성 바깥의 청량사가 있었다고 한다. 191257일의 <매일신보>에 실린 여행기 <경성일장10>에도 영도사(8)와 함께 청량사가 9감으로 선정되었고, 1915316일의 <매일신보>초춘의 일요일이라는 기사의 부제가 천지 가득한 봄의 동물원과 청량리였다.

 

요즘 지도에서 찾아본 <영도사>와 <청량사>, 그리고 <청량관>의 위치. (네이버 지도)

 

1915420일의 <매일신보>요새 놀러 가는 손이 제일 많기로는 동대문 밖 청량사라면서 그 이유는 한가하고 고요한 절의 취미는 도무지 구경할 수 없고 속되고 번요하기는 시내의 요리집보다 심하지만 교통도 편하고 연도의 녹음도 좋은 까닭에 찾는 사람이 많고, 찾는 사람이 많은 까닭에 음식도 다른 곳보다는 구비한 즉 절간에 밥을 사먹으러 가려면 경성 근처에서는 ... 역시 청량사나 탑골승방의 두 곳이 가장 낫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영도사와 마찬가지로 청량사도 풍기문란과 일탈범죄의 온상으로 지목되었고, 이에 1917424일의 <매일신보>요새 경성 내 방화수류객들이 청량사에 모여들어 주식(酒食)이 난만하여 더욱 갈수록 도량이 오손(汚損)되므로 5,6일 전부터 청량리 헌병 출장소로부터 밥팔고 술파는 것을 일절 엄금했다고 보도했고, 그로부터 약 2년 뒤인 1919422<매일신보>주식(酒食)판매 금지되어 청량사가 쓸쓸하다는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

 

그러나 1920년대 들어 활기가 되살아났다. 192347일의 <조선일보>에 실린 <청량사에 하루>라는 기행기사는 청량리의 울창한 송림 사이를 지나서 청량사 문턱에 발을 멈추었더니 이 초막, 저 초막 할 것 없이 벌써 유산객들은 방방칸칸이 꽉 들어차서 만금을 주더라도 한 칸의 초막을 차지하여 보기가 어려울 만치 풍성풍성하게 보인다. 어떠한 대자대비한 여승에게 좌청우알을 하여 간신히 얼음장보다도 찬 마루 한 칸을 빌어가지고 일행 3인이 다리를 쉬이고 절밥을 맛보았다고 썼다. 다시 단속 이전의 성황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기사는 또 청량사 내방객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 절에 온 사람들은 법관도 있으며 관리도 있으며 변호사도 있으며 학교의 교사도 있으며 사상가도 있으며 과격자도 있으며 문학가도 있으며 미술가도 있으며 신문사의 기자도 있으며 회사의 사무원도 있으며 거만한 사회주의자도 있으며 심술 많은 공산주의자도 있으며 신사 같은 고등 부랑자도 있으며 아비어미 속 썩이는 보통 부랑자도 있으며 찬찬의복으로 몸을 감고 애교를 부리고 돌아다니는 기생과 또는 무명한 미인도 있고 서양머리를 틀어 얹고 굽 높은 양화를 맵시 있게 신은 여학생같은 비여학생도 있다.” 남녀노소와 신분고하를 막론한 사람들이 청량사를 찾았다는 말이다.

 

영도사와 마찬가지로 청량사에도 관광객이 끊이지 않았고, 조선체육회와 언론인단체 무명회를 비롯한 각종 단체의 총회와 회식, 그리고 각종 추도회와 출판기념회 등도 자주 개최되었다. 심지어 우국지사들의 회동이 청량사에서 열리고 독립군 밀사가 이곳을 거점으로 활동하기도 해 일본 관헌의 감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따라서 최승희의 결혼식이 청량사에서 열렸을 가능성도 아직은 배제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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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와 최승희의 회상에 따르면 그가 결혼식을 올렸던 곳은 불교 사찰 영도사와 청량사, 그리고 요리점 청량관으로 좁혀졌다. 이 세 장소는 모두 청량리에 있지만 같은 곳은 아니다.

 

영도사(永導寺)는 최승희가 19357월호 <삼천리>에서 자신이 결혼한 곳이라고 주장한 불교 사찰이다. 조선 건국 직후인 1396년 이성계의 국사 무학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창건 당시의 이름이 영도사인데, 1799년 정조의 후궁 홍빈(洪嬪)의 묘인 명인원(明仁院)이 들어서면서 영도사는 동쪽으로 2마장쯤 이전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절터를 옮기면서 당시 주지였던 인파화상(仁波和尙)은 절 이름을 개운사(開運寺)라고 고쳤지만, 1930년대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 절을 원래 이름대로 영도사라고 불렀다. (돈암동 고려대학교 캠퍼스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이 절은 지금은 <개운사>라고 불리고 있다. 오늘날의 주소는 서울 성북구 개운사길 73’ 혹은 안암동 5가 산4-11번지이다.)

 

1925617<동아일보>는 영도사를 소개하면서 어둠 속에 헤매는 삼계중생을 깨우치는 종소리가 한번 때-하고 울리매 울울창창한 솔밭사이로 그 소리가 멀리멀리 퍼지어 인근 산촌의 농사짓는 백성들은 물론 십리를 격한 문안 사람들까지 불덕을 사모하여 찾아오는 선남선녀가 문턱에 닿았그때야말로 극락세계였다고 했다.

 

그러나 1921년 영도사가 18천원의 거금을 들여 대대적으로 새 단장을 한 후 하루 관광객이 5-6백명에 이르면서 시속이 변했다. 영도사 승려들은 20여 호의 밥집을 만들어 밥과 술과 요리를 팔면서 방문객들은 음주가무와 음담패설로 절터를 어지럽히기 시작했다고 한다.

 

1925년 6월17일의 <동아일보>에 게재된 <영도사>의 전경 사진.

 

1922118일의 <매일신보><영도사 유기(遊記)>라는 기고문에서 원래 사원은 진인(眞人)의 지경()이요 신성의 영역()”이지만 근년에는 진인속객(塵人俗客)의 술 마시고 노래 부르는 장소로 변하였으며 청년탕아(靑年蕩兒)의 유희오락의 장소로 되었다면서 이것은 사원이 주사(酒肆)와 요정(料亭)으로 변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청년탕아의 유희오락의 장소라고 한 것은 영도사가 젊은이들의 데이트 장소로 자주 이용되었기 때문이었다. 전무길의 소설 <과도기(1932)>춘자가 영도사에 놀러 갔다가 영식이에게 몸을 허락한 것도 벌써 두 달이나 되었다는 대목이 나오게 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영도사의 풍기가 문란해지고 폭력이 빈발하고 심지어 범죄의 온상이 되자 일본 경찰까지 단속에 나섰다. 192767일의 <중외일보>최근 동대문 밖 각 승방 사찰에는 탕자와 음녀가 가위 진을 벌이고 주야로 떠나지 아니하여 신성타는 불경이 자못 노류장화의 음분한 지경을 이룬 까닭에 ... 소관 동대문서는 5일 새벽 4시를 기하여 ... 영도사를 급습 수색한 결과 ... 여덟 명의 기생을 발견하여 고발했다고 전했다.

 

이 같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영도사는 여전히 경성시민들이 즐겨 찾는 소풍지였고, 단체들이 총회를 열고 청년들이 결혼하는 곳으로 이용되었다. <매일신보>192037일 하루에 6천여 명이 영도사를 찾아 본년 처음 가는 성황을 이루었다고 전했고, 19261017일에 문인 도향 나빈씨의 추도식, 1927425일에 언론인 권익단체 무명회의 제7회 총회, 같은 해 814일에 제일고등보통학교(=경기고)의 동창회 등이 영도사에서 열렸다고 보도했다.

 

영도사는 당연히 결혼식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1939411일의 <동아일보>는 청년 서화연구가인 김태수군(26)과 신부 성순애양(22)의 결혼식이 9일 오전10시에 열리기로 되어 있었으나 신부가 나타나지 않아 파혼된 경위를 보도하기도 했다.

 

최승희가 실제로 영도사에서 결혼을 했는지는 그 자신의 일회 증언 외에는 다른 문헌 증거가 없다. 그러나 영도사가 경성 상층 시민들의 모임과 관혼상제 의례가 자주 열렸던 곳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안막-최승희가 이곳에서 결혼했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신혼여행지가 함경남도 안변군의 석왕사였던 것을 보면 영도사가 결혼식장이었던 것으로 믿고 싶기도 한다. 두 사찰이 모두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창건했다고 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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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하면, 1931년의 언론보도와 이후 최승희의 회상에 따르면 그가 결혼했을 지도 모르는 예식장 후보는 3군데였다. 불교사찰인 <영도사><청량사>, 그리고 요리점 <청량관>이었다.

 

이제 그 각각의 기관이 소장한 기록을 조사하는 것이 순서이고 정도이겠으나, 나는 이 기관들이 기록을 갖추지 못했을 것이라고 지레 결론을 내렸다. 당시는 기록이 화를 부를 수 있었던 일제 강점기였으므로 사찰이든 식당기업이 기록을 충실히 남겼을 리 없었다. 설사 그런 기록이 있었다 해도 이후 90년의 일제강점기, 해방정국, 한국전쟁, 매카시즘과 무차별 근대화의 시기에 그런 기록이 남아있을 리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신 상황을 살피기로 했다. ‘내가 최승희와 안막이라면어떤 곳을 결혼식 장소로 선택했을 지를 추론하기 위해 상황을 파악하고 감정이입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일본 여성지 <부인공론> 1935년 6월호에 실린 최승희와 안막의 결혼 사진. 아마도 <청량관>의 뒷산을 배경으로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추론에 활용할 근거 상황을 파악할 때는 3가지 축에 주목해야 한다. ‘시간공간인간이 그것이다. , 당시 최승희와 안막이 어떤 시간틀(time frame) 속에서 어떤 활동 맥락(work context)에 처해 있었는지를 파악하면 그들의 공간적 위상(locational position)도 추론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셋은 항상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최승희가 오빠 최승일과 그의 배재고보 동창 박영희의 주선으로 안막을 처음 만난 것이 언제였는지 서술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최승희와 안막이 각각 어떤 시간틀과 공간 위상 속에서 어떤 활동을 하고 있었는지를 파악하면 이들이 언제 처음 만났는지 추론해 볼 수 있다.

 

최승희는 193127일 경성공회당에서 <2회 신작발표 무용공연회>를 가졌고, 곧 지방순회공연에 나섰다. 부산(2/17-18), 춘천(2/21), 대구(2/24-25), 마산(2/26-27), 이리(3/1), 전주(3/2-3), 군산(3/4-5), 김제(3/6), 예산(3/8) 등의 남선 지방에서 공연을 가졌고, 경성으로 돌아와 약 3주간 휴식을 취한 다음, 평양(3/31-4/1), 정주(4/3), 신의주(4/5-6), 의주(4/9), 사리원(4/12), 개성(4/14) 등의 북선 지방에서도 공연했다. 그로부터 2주 후인 51일부터 3일까지는 단성사에서 <3회 신작발표 무용회>도 열었다. 그렇게 분주한 공연활동이 일단 마무리되고 나자마자 일주일 만에 최승희는 59일 안막과 결혼한 것이다.

 

한편 와세다 대학에 재학 중이었던 안막은 방학을 이용해 경성에 돌아왔다고 했다. 일본의 학기제에 따르면 8월초부터 9월말까지 여름방학, 12월말부터 1월 중순까지 겨울방학, 그리고 2월 중순부터 3월말까지가 봄방학이다. 안막은 1931년의 봄방학을 맞아 경성에 돌아왔다가 방학이 끝나고도 도쿄의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경성에 머물러 있다가 최승희와 결혼한 것이다.

 

따라서 두 사람의 시간과 공간이 겹치는 부분은 (1) 안막이 경성에 돌아온 210일경부터 최승희가 남선 순회공연을 떠난 217일 사이의 일주일과 (2) 최승희가 남선 순회공연에서 돌아와 북선 순회공연을 떠나기 전인 38일부터 331일 사이의 약 3주일의 기간이다. (3) 안막이 4월초에 시작되는 신학기에 복학하지 않았으므로 최승희가 북선 순회공연에서 돌아온 414일 이후도 시공간이 겹치기는 하지만, <별건곤> 4월호가 이미 최승희의 약혼설을 보도한 것을 보면 최승희와 안막이 처음 만난 것이 414일 이후였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안막과 최승희가 박영희의 서재에서 처음 만난 것은 (1) 210일부터 17일 사이이거나 (2) 38일부터 31일 사이였음에 틀림없다. 최승희의 자서전에 따르면 두 사람의 결혼이 첫 맞선 후 2-3회의 데이트 후에 비교적 빠르게 결정되었고 결혼 준비도 바쁘게 진행되었다고 했으므로, 두 사람이 맞선을 보고 두세 번의 데이트를 한 것은 (2)38-31일 사이였고, 결혼 준비는 최승희가 북선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3) 417일 이후였을 것이다.

 

맞선을 본지 2달 만에 결혼한 것은 그리 빠른 것이 아닐 수는 있다. 하지만 당시 최승희의 공연 스케줄을 고려하면 결혼 결정과 준비에 시간이 넉넉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안막의 결혼 전력 때문에 최승희가 부모의 허락을 얻는 데에 난항까지 겹쳤던 사정을 고려하면 실제로 결혼날짜와 식장을 결정하는 일에 시간이 더더욱 모자랐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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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장이 모호해 진 데에는 최승희 자신의 책임도 있었다. 그는 <나의 자서전(1936)>에서도 결혼식장을 언급하지 않았고, 큰오빠 최승일이 편집해 출판한 <최승희 자서전(1937)>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그는 결혼연도를 ‘1932년 봄이라고 잘못 서술하기까지 했다. 자신의 결혼식 일시와 장소에 대해 이렇게까지 기억이 정확하지 않은 것이 의아할 정도이다.

 

최승희-안막의 결혼 뒤에도 결혼식장에 대한 기억에는 혼란이 계속되었다. 193431일의 <조선중앙일보>에 보도된 연재기사 예원에 피는 꽃들-최승희 편은 두 사람이 재재작년 5월 청량관에서 화촉의 성전을 거행했다고 서술했다. 이 기사는 최승희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므로 결혼식장이 <청량관>’이었다는 주장은 최승희의 기억일 것이다.

 

한편, 19357월호 <삼천리>에는 <신록의 신혼여행>이라는 큰 제목 아래 최승희의 신혼여행기가 실렸다. 이 기고문에서 최승희는 결혼식장이 <영도사>라고 했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만 3년 전인 소화7(1932) 봄 한양의 옛 성에는 봄풀이 푸르렀고 청량리 영도사(永導寺)에는 녹음이 바야흐로 무르녹으려던 때 내 나이 바로 20의 봄을 맞이하게 되는 해에 서울의 교외의 어느 한 조그마한 절간에서 청춘으로서의 가장 거룩하고 행복스러운 향연인 결혼의 예식을 끝마쳤습니다.”

 

<영도사>는 당시 서울의 교외청량리에 위치한 것은 맞지만 조그마한 절간은 아니었다. 1396년 조선 개국과 함께 국사 무학대사가 창건한 영도사는 역사가 오래고 규모가 상당했다. 자리를 이전한 1799년 이래 1930년대까지도 영도사는 한양사람들의 최애 유람지의 하나였다.

 

다른 한편, 19409월호 <조광>에는 최승희의 <무용 15년기>가 실렸는데, 그중에 그 이듬해 우리는 <청량사>에서 결혼식을 거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본인에 의해 또 다른 사찰이 결혼식장으로 거론된 것이다. <청량사>도 역시 청량리 홍릉 인근의 불교 사찰이며 많은 사람들의 예불과 소풍의 목적지였다.

 

최승희의 회상에 따르더라도 결혼식장은 3군데나 거론되었다. <청량관><영도사><청량사>는 모두 청량리에 소재했지만 위치는 모두 달랐다. 어디가 진짜 결혼식장이었을까?

 

그런데 진짜 결혼식장을 찾기 전에 먼저 바로잡을 오류가 있다. 많은 문헌이 최승희의 결혼식장으로 <청량원>을 들었는데 이는 명백한 잘못이다. 당시 문헌에 <청량원>이라는 장소는 나오지 않는다. 경성의 매체들이 자주 언급한 장소로 <청량관>이 있을 뿐이다.

 

단행본으로 출판된 최초의 평전인 다카시마 유사부로의 <최승희(1959)>에는 식과 피로연도 간단하게 청량원이라는 식당에서했다고 서술되었다. <청량관><청량원>으로 바뀐 것인데, 여기에 주의할 부분이 있다. 다카시마 유사부로는 최승희의 결혼을 서술하면서 유아사 가츠에(湯浅克衛, 1910-1982)<무희기(舞姫記, 1947)>를 인용한 것이다.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으로 조선어에도 능했고, 또 안막-최승희 부부와 친구사이였던 유아사 가츠에는 훗날 최승희의 전기영화 <반도의 무희(1936)>의 대본을 썼다. 이 대본은 <주간아사히(週刊アサヒ)>에 연재한 <노도의 외침(怒濤, 1935)>을 훗날 단행본으로 출판하면서 제목을 <무희기: 최승희의 반생(1947)>이라고 바꾼 것이었다.

 

<반도의 무희>처럼 <무희기>도 픽션이었으므로 주인공의 이름도 안막-최승희가 아니라 나계(羅桂)-백성희(聖姫)로 바뀌었다. 저자는 최승희와 안막의 반생을 서술하면서도 소설 형식을 택하는 바람에 가명을 써야했던 것인데, <청량관><청량원>으로 바뀐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카시마 유사부로가 논픽션인 평전을 쓰면서 픽션인 <무희기>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이후의 평전들은 줄줄이 다카시마 유사부로의 예를 따랐다. 강이향(1993:85), 정병호(1995:64-65), 김찬정(2002:86), 강수웅(2004:76), 강준식(2012:88-89) , 한국에서 출판된 모든 평전이 최승희의 결혼식장을 청량원이라고 서술했다. 북한에서 출판된 서만일(1957:73-74)과 배윤희(2011)의 평전에는 결혼식이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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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무용가 최승희의 결혼 소식은 경성 장안을 강타했다. 예술가와 연예인의 구별이 모호하던 시절, 근대 예술무용의 개척자이면서도 아름다운 용모와 시원시원한 몸매로 만인의 애인 대접을 받던 최승희가 아직 학교도 마치지 않은 백면서생안막과의 결혼을 발표하자 인텔리 계층은 물론, 화류계의 단골 한량들과 일반 대중까지도 충격을 받았다.

 

최승희의 결혼 소식은 속속 언론에 보도되었다. 최초의 보도는 뜻밖에도 일간지가 아니라 종합월간지 <별건곤>이었다. 19314월호에 최승희양이 약혼했다...고 한다는 추측기사를 내보냈다. 호기심을 잔뜩 유발하는 이 기사에는 최승희의 짧은 인터뷰도 삽입되었는데, 최승희는 언젠가 결혼은 하겠지만 정해진 것은 없고, 약혼했다는 풍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그런데도 기자는 이 대답을 묵살하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최승희양이 약혼을 하였다는 것은 전연 사실도 아니요, 전연 거짓말도 아니다. 그런데 당사자는 앞으로 결혼할 것을 부인은 아니 한다. 그러니까 아직까지 약혼까지는 아니 하였더라도 인제 오래지 않아 약혼을 할 전야(前夜)에 있다는 것이다. 만일 이 추측이 빗나간다면 최양을 비롯하여 만천하의 최양 패트론에게 백배 사죄 하겠다.”

 

기자에게는 다행하게도 이 추측보도는 맞아 들어갔다. <별건곤>의 추측기사가 나간 지 한 달이 지난 59일 오전11시 흰색 투피스 양장 차림의 최승희와 밝은 색 세비로를 입은 안막은 서정희 선생의 주례로 결혼식을 마치고, 청량리 역에서 경원선 기차를 타고 함경남도 석봉산의 고찰 석왕사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최승희가 거짓말(?)을 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4월호 잡지에 내려면 취재는 3월 중에 이뤄졌을 것인데, 그때는 최승희와 안막의 결혼 결정이 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언론의 최승희 결혼식 보도는 혼란스러웠다. <별건곤>5월호에서 최승희 양이 정말 결혼을 한다고 보도했지만 결혼일시와 결혼식장을 밝히지 못했다. 55일의 <조선일보>결혼식은 9일 오전11라고 전했지만 장소는 <공회당> 사정으로 아직 미정이라고 했다. 아마도 경성 공회당을 결혼식장으로 섭외했지만 무슨 이유인지 성사되지 않았고, 결혼식이 4일 앞으로 다가왔는데도 식장은 발표되지 않았다.

 

결혼식 3일 전인 56일에야 <매일신보>그들의 결혼은 오는 9일 낮에 시외 <청량사>에서라고 전했다. <동아일보>57일 최승희 결혼 소식을 단신으로 전하면서도 결혼식장은 언급하지 않았다. 마침내 <경성일보>가 결혼식 당일(5/9)에야 최승희양은 9일 경성부 바깥 청량리의 <청량관>에서 서정희씨의 주례 아래 안막군과 결혼식을 거행한다고 보도했다.

 

<청량관>은 동대문 밖 청량리에 연회장을 갖춘 요리집이었다. 그 지역은 지금의 홍릉 근처로 경치 좋은 유원지였다. 젊은 커플들은 <청량관>에서 결혼식을 했고, 학교들은 운동회를 열었고, 동문회나 사회단체들은 총회를 개최했다. 윤치호도 가족이나 요인들과 함께 식사하러 이곳에 올 정도였다. 1920년대면 청량리까지 가는 전차도 개통되었기 때문에 교통도 편했다.

 

결혼 당일까지의 보도를 종합하면 안막과 최승희의 결혼은 급하게 결정되었거나 결혼 소식을 공표하지 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 같다. 결혼식장 섭외가 늦었거나 발표되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최승희는 소공동의 경성공회당을 예식장으로 확보하려 했던 것 같으나 실패했고, 결국 청량리의 사찰 청량사(매일신보) 혹은 요리점 청량관(경성일보) 중에서 한 곳을 결혼식장으로 정한 것으로 보인다. 혹은 두 신문 보도를 상충되지 않게 종합한다면, <청량사>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청량관>에서 피로연을 열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최승희-안막 부부의 결혼식 장소를 아직 단정할 수 없다. 이후의 문헌에서 당시 언론 보도와 상충되는 기록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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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영 선생이 발굴한 또 하나의 중요한 기초자료가 매장인허증이다. <가극의 도시의 또 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의 제1부 제1<니시타니 산 속에 잠든 조선인들>에 따르면 정홍영 선생이 이 3장의 매장인허증을 입수한 것은 1985년 봄이었다고 한다.

 

내가 고베수도 건설공사에 참가한 조선인을 처음 알게 되고 조사까지 하게 된 것은 다카라즈카 시 역사편찬실에 보존되어 있던 오래된 매장 인허증 때문이었다. 1985년 초부터 봄 무렵에 걸쳐서 나는 당시 사카세카와(逆瀬川)에 있는 다카라즈카시 중앙공민관 2층의 방 4개를 차지한 시사(市史)편찬실에 여러 번 간 적이 있다

 

몇 번이나 다니는 동안에 거기서 시사(市史) 편집담당 주사로 근무하는 와카바야시 야스시(若林泰)씨와 친분이 생겼다. ... 어느 날 특별한 용무 없이 근처를 지나다가 잠시 들렀는데, 나를 보자마자 와카바야시씨가,‘, 정선생, 마침 잘됐네요. 연락하려고 했거든요. 이런 게 있는데 뭔가 참고가 될까요?’ 하며 복사한 것을 석 장 보여주셨다. 손에 받아들고 보니 모두 조선인의 이름이 적힌 옛날 니시타니 촌사무소가 발행한 매장인허증 사본이었다.

 

다카라즈카 니시타니 촌장 명의로 발행된 1914년의 김병순, 1915년의 남익삼, 장장수씨의 매장인허증. 정홍영 선생은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77)>에서 이들은 다카라즈카 지역에 가장 먼저 도착해 정착을 시도한 최초의 조선인들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첫눈에 내 눈길을 끈 것은 그들의 사망 시기가 1914년과 1915년이었던 점이다. 내무성 경보국(警保局)의 통계보고서 <조선인개황(朝鮮人概況)>에 따르면, 1915년에 조선인은 일본 전국에 3986, 효고현에는 218명이 있었다. 물론 이 숫자를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겠는데, 한일합방 이후 불과 4, 5년밖에 지나지 않은 오래전 시기였으니 무리도 아니다. 그런 시기에 외딴 니시타니 마을에 조선인이 살고 있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고, 그것만으로도 크게 놀랄만한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고베수도공사에서 순직한 조선인 노동자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에 대한 정홍영 선생의 조사가 시작되었다. 매장인허증에는 세 사람의 이름뿐 아니라 주소와 발행날짜를 비롯한 몇 가지 인적사항이 적혀 있었으므로, 사고의 시기와 매장일, 그리고 각 순직자들의 나이도 짐작할 수 있었다.

 

정홍영 선생과 마찬가지로 나도 세 순직자의 사망 시기에 주목했다. 김병순씨의 매장허가 날짜는 191483일로 가장 빨랐고, 1915121일에 매장허가가 난 남익삼씨가 두 번째, 그리고 1915324일에 매장허가를 받은 장장수씨가 가장 나중이었다.

 

고베수도공사는 3차에 걸쳐 이뤄졌다. 1897-1905년의 창설공사로 고베수도가 완공됐고, 급격히 증가하는 고베 인구의 상수도 수요를 맞추기 위해 1911-1921년에 제1차 확장공사, 일차세계대전 이후의 호황기로 고베의 산업과 인구가 더욱 늘어나자 1926-1936년의 제2차 확장공사가 이뤄졌다. 따라서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가 참가했던 고베수도공사란 제1차 확장공사임이 분명했다.

 

1914-1915년 사이에 고베수도 제1차 확장공사에 참가했다가 희생된 김병순, 남익순, 장장수씨는 이 지역 불교사찰 만후쿠지에 위령패가 안치되고 이 사찰 여신도회가 1백년 이상동안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한편, 매장인허증에 나타난 김병순씨의 생일은 1883(메이지16) 519일생으로 명기되어 있어 사망 당시의 나이가 31세였음을 알 수 있다. 다른 두 사람의 생년월일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남익삼씨의 나이가 37, 장장수씨는 27세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남익삼씨는 대략 1877년생, 장장수씨는 1887년생 정도로 추정될 수 있다.

 

1929년에 발생한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로 사망하거나 중경상을 입은 5명의 나이가 모두 19세에서 25세 사이였던 것과 비교하면 고베수도공사에서 사망한 3인의 나이가 조금더 많았다. 고베수도공사에 참여한 이들은 아마도 일본으로의 노동이민 제1세대이자 후쿠치야마선 철도개수공사에 참여한 노동자들의 아버지 세대였음에 틀림없다.

 

이후 정홍영 선생은 고베수도공사 중에 순직한 3인의 조선인 노동자의 사망 장소와 사망 이유, 그리고 이들이 매장된 묘소를 찾기 위한 연구를 계속했고, 상당한 성과를 이뤘다. 이를 살펴보면서 나는 이 3인이 떠나온 조선반도 내 연고지를 찾는 데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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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후쿠치야마선 철도개수공사 사고를 보도한 1929328일자 4개 신문의 기사를 꼼꼼히 살피면서 사고 당시의 상황과 피해자들의 인적사항과 한국 내 연고지를 정리해 보았다. 그런데 정홍영 선생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1980년대까지 생존해 계신 지역 어르신들에 대한 탐문 조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항을 추가로 밝혀놓았다.

 

(1) “그 지역(=나마제)의 몇 원로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로부터 사고로 숨진 조선인들의 사연이 차차 드러났다. 고된 노동이 계속되던 어느 날이었다. 공사장 근처에서 젖은 화약을 모닥불에 말리던 중 갑자기 폭발해 조선인 3명이 즉사했다. 무참한 모습이 되어버린 시신을, 함께 일하던 동포 인부들이 나무통이나 깡통에 담아서 키노모토()의 지장존(地蔵尊) 아래까지 짊어지고 가서 장작을 모아 화장하고, 울면서 장례를 치렀다는 것이다. 화장이 끝난 뒤에도 그들은 아무도 일하지 않았고 아침부터 술만 마셨다. 아이고, 아이고 하는 울음소리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고 그런 날이 며칠이나 계속됐다고 한다.” (<다카라즈카와 조선인>, 1997, 39)

 

1989년 9월7일 효고현 지역방송 <썬티비>가 방영한 정세화 선생의 인터뷰 장면. 당시 정홍영 선생은 <효고조선관계연구회>의 회원으로 이 지역 근대화를 위해 희생된 조선인 노동자들을 조사하고 발굴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정홍영 선생이 수집한 증언에 따르면 다이너마이트 폭발 사고로 인한 조선인 사망자는 3명이다. 이는 4개의 신문기사가 사망자의 수를 2명이라고 보도한 것과 차이가 난다. 사고 발생과 함께 즉사한 윤길문씨와 병원으로 옮겨져 사망한 오이근씨 말고도 또 다른 사망자가 있었다는 뜻이다. 신문들은 사고발생 직후부터 48시간을 취재해 보도한 것이므로 그 이후에 사망자가 추가되었을 경우 이를 보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윤일선씨는 후일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고, 여시선/김시선/양시춘씨의 부상은 경상이었으므로, 추가로 사망한 사람은 오이목씨일 가능성이 크지만 결정적인 문헌증거가 나타나기 전에는 최종적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2) “또한 몇 사람을 탐문한 끝에 요시다 노무자 합숙소의 우두머리가 윤재유(尹在裕?)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항상 공사현장에서 진두지휘한 k고 통칭 요시다 분키치(吉田文吉)로 불리던 그의 장남 윤일선(尹日善)이었다. 그는 공사와 합숙소의 현장지휘 책임 맡은 간사(=십장?)였는데, 인부들로부터는 항상 중대장(中隊長)이라고 불렸다. 사고로 죽은 세 명 중 두 명은 이름도 나이도 알 수 없었지만, 한 명은 윤일선의 둘째 동생이었다고 한다.” (<다카라즈카와 조선인, 1997, 40)

 

정홍영씨는 또 다른 탐문을 통해 다이너마이트 사고 현장에서 중상을 입었으나 목숨을 건진 윤일선씨의 부친이 윤재유씨임을 알아냈다. 또 윤일선씨의 일본식 이름(=통명)이 요시다 분키지(吉田文吉)였으며, 윤일선씨는 윤재유씨의 장남이라는 사실도 밝혔다. 이에 더해 사고에서 사망한 윤길문씨가 윤일선씨의 둘째 동생이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또 정홍영씨는 사고로 죽은 세 명이라는 증언을 다시 한 번 채집했다. 복수의 지역 원로들이 다이너마이트 사고의 사망자가 3명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고로 죽은 3명 중 2명은 이름도 나이도 알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신문 보도에 따르면 그 익명의 사망자 2명 중의 한 명은 오이근(25)씨였다. 다시 말해, 이름과 나이를 알 수 없는 다른 한 사람의 사망자가 더 있었다는 말이다. 이는 앞으로 조사 작업에서 잊지 말고 확인해 볼 사항이다.

 

정홍영 선생이 다카라즈카 각 지역의 원로들을 찾아가 1910년대와 1920년대 조선인 노동자들의 상황과 사고 및 희생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1989년 9월7일 효고현 케이블 <썬티비> 방영의 한 장면.)

 

(3) “타케다오에서 무코강을 따라 폐선 부지를 30분 정도 걸어가면, 길이 350미터의 6호 터널에 닿는다. 타케다오부터 강폭은 점차 넓어지고, 터널의 바로 앞에서 급커브를 그려 오른쪽 왼쪽으로 구불구불 꺾이고 있다. ... 주위를 유심히 살피면서 걷다가 모닥불을 피운 장소가 터널 입구에서 50미터 전방 왼쪽에 있는 콘크리트 보호벽 안쪽의 작은 공터라는 것을 알았다. 어느 신문에는 가까운 오두막에서 취사를 하던 윤일선의 아내도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고 했는데, 그 오두막이 공사 노무자 합숙소였는지, 휴식용의 작은 집을 가리킨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또한 열차가 운행되고 있던 낮 시간에 터널 내부에서 발파를 시도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다이너마이트는 도대체 어디에 쓰기 위한 것이었을까. 또 어째서 시신을 그렇게 먼 키노모토까지 옮겼을까. 그런 의문을 풀어줄 단서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글은 정홍영씨가 다케다오 지역을 직접 답사해 남긴 기록이다. 나가오산 자락의 신6호 터널의 입구에서 약 50미터 전방 왼쪽에 작은 공터가 있음을 발견했다. 정홍영씨는 이곳이 신문기사가 지적했던 오두막/함바 자리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폭발이 발생한 입구에서 50미터쯤 떨어져 있었으므로 이곳에서 취사준비를 하던 여시선/김시선/양시춘씨는 가벼운 안면 찰과상을 입는 데에 그쳤던 것이다.

 

(4) “윤일선(尹日善)의 숙부는 일명 요시다 이치로(吉田一郞)라고 불렸는데, ... 처음에는 지역 토건업체를 경영하다가 나중에는 하청을 받아 하천 사방 교량 등의 공사를 했다. 옛 타케다오역 앞에서 무코강에 가설된 <온센교(温泉橋)>1934년에 준공되었는데, ... 다리 공사를 할 때 합숙소가 건너편 냇가에 두 동이 있었고, 조선인 인부들이 숙박을 하고 있었는데 ... 이 합숙소의 우두머리가 나마제에서 온 요시다 이치로였다. 터널과 옹벽 등의 철도 관련 일이 끝난 뒤에도 윤일선(尹日善)은 요시다 합숙소뿐 아니라 나마제 일대의 조선인들을 보살피며 많은 인부를 거느리고 고베 수도 확장 공사, 롯코산의 사방 공사 등의 일을 했다.” (<다카라즈카와 조선인>, 1997, )

 

정홍영 선생이 직접 답사와 탐문으로 수집한 자료는 그의 저서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정홍영 선생의 탐문조사에 따르면 다이너마이트 폭발 사고로 사망한 윤길문과 그의 맏형 윤일선에게는 요시다 이치로(吉田一郞)라는 통명을 가진 숙부가 있었다. 즉 윤일선과 윤길문의 아버지 윤재유에게는 남자 형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의 한국식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의 일본식 통명은 요시다 이치로였다. 그리고 통명에 이치로(一郞)’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가 장남이고 윤일선과 윤길문의 아버지 윤재유는 그의 동생이었을 것이다.

 

(5) “해방 후인 1952, 오타타카와(大多) 강변의 산을 개척해 신설된 모리구미(森組) 채석장 건설 공사를 마지막으로 사촌동생인 윤창선(尹昌善)에게 뒤를 맡기고 나마제를 떠났고, 곧이어 모리구미(森組)의 하청업자로서 교토부(京都府)와 나라현(奈良縣)에서 많은 터널 공사를 도급맡았으나 이내 병에 걸렸고, 터널 공사를 하면서 나날을 보냈던 그의 일생을 오사카의 병원에서 마쳤다. 지금도 그의 사촌동생이 소가와에, 그의 딸들이 교토와 다카라즈카에 살고 있다. 윤일선씨는 생전에 술을 마시면 총각으로 죽은 동생(윤길문, 尹吉文)을 떠올리며 자주 눈물을 글썽였다고 한다.” (다카라즈카와 조선인>, 1997, )

 

정홍영씨는 추가조사를 통해 윤길문-윤일선 형제의 가족이 더 있었음을 밝혔다. , 윤일선에게는 윤창선이라는 사촌동생이 있었다는 것이다. 정홍영 선생에 따르면 지금(=1990년대)도 윤창선이 소가와에 살고 있었으며, 윤일선의 딸들이 교토와 다카라즈카에 살고 있다고 했다.

 

따라서 정홍영 선생의 추가조사를 정리해 보면 후쿠치야마선 개수공사 중의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로 사망한 조선인 노동자는 윤길문, 오이근씨와 그 밖의 성명과 연령 미상의 1명을 포함해 모두 3명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들은 대부분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면에서 가족 단위로 이주해온 이주노동자였을 것이다.

 

정홍영 선생의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에는 후쿠치야마선 개수공사에서 사망한 윤길문, 오이근씨의 가족사항이 자세히 조사-기록되어 있다.

 

사망한 윤길문씨의 가족은 그의 아버지 윤재유씨, 그의 큰아버지 요시다 이치로, 그의 큰형인 윤일선과 형수인 여시선/김시선/양시춘, 그리고 사촌 윤창선이 모두 한 가족의 구성원이었음에 틀림없다. 이들은 모두 경남 고성군 고성면 출신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한편 다른 사망자 오이근씨에게는 오이목씨라는 형제가 있고, 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들도 경남 고성군 고성면 출신이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따라서 이들 두 가족에 대한 조사는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는 한국에서 경남 고성을 중심으로 윤길문-윤일선-윤창선, 윤재유-요시다 이치로, 그리고 여시선/김시선/양시춘의 공식기록이나 족보 기록을 찾는 일이다. 또한 같은 지역에서 오이근-오이목씨의 공식기록과 족보기록을 탐색하는 일도 여기에 포함된다.

 

다른 한편, 일본에서는 다이너마이트 사고 이후 윤일선, 윤창선씨의 흔적을 탐문하고, 윤일선씨의 딸들이 다카라즈카와 교토에 살았다는 증언을 바탕으로, 다카라즈카를 비롯한 효고현과 오사카, 그리고 교토에 걸쳐 폭넓은 탐문 조사를 시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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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도쿄의 기록학 전문가 크누기 에나(功刀惠那) 선생이 아사히신문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해서 찾아주신 <아사히신문> 도쿄판과 오사카판의 기사이다. 두 기사는 대동소이하며, 실수나 오자까지 동일한 것으로 보아 한 기사가 다른 기사를 거의 전재한 것으로 보인다.

 

<아사히신문, 1929328, 오사카판>

“(제목과 소제목) 다이너마이트 폭발/ 4명 사상/ 다카라즈카 오지의 터널 공사에서/ 모닥불로 말리는 동안

 

“(기사본문) 26일 오전 8시 반 경에 효고현 다카라즈카의 변방 나가오산 중의 후쿠치야마선 6호터널의 터널 굴착 공사에 사용하는 다이너마이트 10개가 빙결되어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조선인 토공 3명이 철망 위에 올려놓고 모닥불에 말리던 중 실수로 그 안의 1개를 불 속에 떨어뜨렸기 때문에 10개가 요란하게 폭발하여 토공 윤길문일(尹吉文一, 21) 오이근(吳伊根, 25)의 두 명은 약 20(36미터)정도 날아가 신체가 산산조각이 나는 참사를 당했다. 토공의 우두머리 이일선(伊日善, 25)는 대퇴부에 중상을 입고 기절했고, 인근 오두막에서 취사 중이던 동인의 처 양시선(揚時春, 19)은 안면에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

 

정세화 선생이 고베중앙도서관에서 찾아낸 1929년 3월28일의 <아사히신문> 오사카판에 실린 다카라즈카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의 보도 기사. 사망 및 중경상자의 이름이 정확히 표기되지는 않았으나 사고의 정황이 좀 더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아사히신문, 1929328, 도쿄판>

“(제목과 소제목) 다이너마이트 폭발 참사/ 2명이 죽고 2명 중상/ 얼어붙은 다이너마이트를 불에 쬐다가"

 

“(기사 본문) [다카라즈카 전화] (19293)26일 오전 8시반경 효고현 다카라즈카 외곽의 나가오 산중의 후쿠치야마선 6호 터널 도랑굴착 공사에 사용할 다이너마이트 10개가 결빙되었으므로 조선인 토공(土工) 3명이 이를 철망 위에 올려놓고 모닥불에 말리는 중 실수로 그 중 1개를 불 속에 떨어뜨렸기 때문에 10개가 모두 폭발해서, 토공 이길문 (伊吉文, 21) 오이근 (吳伊根, 25)의 두 명은 약 20(=36미터)이나 날아가 신체가 산산조각이 나는 참사를 당했고, 토공의 우두머리 이일선(伊日善, 25)은 크게 중상을 입고 졸도했으며, 인근 오두막에서 식사준비 중이던 이일선의 아내 양시춘(揚時春, 19)은 얼굴에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

 

오사카판 <아사히신문>의 기사는 취재원을 나타내는 머리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기자가 직접 취재해서 쓴 기사이다. 반면 도쿄판에는 [다카라즈카 전화]라는 머리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전화 통지로 전해진 기사이다. 오사카판과 도쿄판 <아사히신문>의 기사는 <고베신문><고베유신일보>이 밝힌 윤길문과 윤일선의 이름을 이()길문과 이()일선으로, 여시선/김시선의 이름을 양시춘으로 보도했다. 한국에는 이()씨 성이 없으므로, 고베의 신문들의 보도가 정확할 것으로 보이며, 정홍영 선생도 고베 신문들의 기록을 따랐다. 그러나 향후 조사에서는 다른 이름의 가능성도 배제하지 말고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크누기 에나(功刀惠那)선생이 <아사히신문> 데이터베이스에서 찾아낸 1929년 3월28일의 <아사히신문> 도쿄판 11면의 다카라즈카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 기사 전문. 오사카판 기사와 제목이 달라졌지만 기사 본문은 거의 전재되어 있다.

 

사고 현장의 참상은 아사히신문의 보도로 조금 더 구체화되었다. 다이너마이트의 폭발 현장에 있던 윤길문, 오이근씨는 전신이 파손되어 20(=대략 36미터)이나 공중으로 날아갔다고 한다. 윤일선씨도 중상을 입고 졸도해 병원으로 옮겨졌다가 깨어났으며, 윤일선씨의 아내 여시선/김시선/양시춘씨는 현장에서 50미터쯤 떨어진 오두막(=아마도 이들이 머물던 함바)에서 아침식사 준비를 하다가 얼굴에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고 했다.

 

<아사히신문>은 이들의 한반도 연고지를 보도하지 않았지만, <고베신문><고베유신일보>를 통해 이들이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면출신이라는 점이 확인되었으므로, 이들의 소재와 인적사항, 그리고 한국 내 연고지와 연고자를 찾는 데에는 충분한 실마리를 얻은 셈이다.

 

특히 윤길문, 오이근씨의 연고지를 찾는 데에 윤일선-여시선/김시선/양시춘씨 부부와 오이목씨의 인적사항을 조사에 포함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이 모두 같은 고향을 가진 사람들일뿐 아니라 서로 형제, 결혼, 친척관계로 맺어져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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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정세화 선생이 고베중앙도서관에서 찾아내신 1929328일자 <고베유신일보>의 기사 전문이다. 이 기사도 역시 정홍영 선생의 저서 자료편에 스크랩되어 있었다. 그리고 <다카라즈카와 조선인> 12장의 내용으로 미루어 이 기사는 <고베신문>의 기사와 함께 가장 많이 참조된 기초자료인 것으로 보인다.

 

<고베유신일보, 1929328일자>

(제목과 소제목)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해/ 네 명이 즉석에서 사상/ 뇌관을 모닥불로 건조시키려다/ 나가오산 터널 입구에서 발생한 사고

 

(기사 본문) “26일 오전 8시경 가와베군 니시타니촌 키리하타 나가오산 제6호 터널 입구(간자키 기점 15마일 동쪽)에서 전선 후쿠치산선 개수공사에 종사 중이던 조선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면 출신의 조선인 윤길문(21), 윤일선(25), 오이근(25), 김시선(19) 4명이 암석 폭파 작업 중 다이너마이트가 빙결되어 폭발하지 않기에 모닥불을 피워 다이너마이트의 뇌관을 건조하려 하였는데,

 

1929년 3월26일 발생한 다카라즈카 후쿠치야마선 개수공사 현장의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를 보도한 <고베유신일보>(왼쪽)과 <고베신문>(오른쪽)의 기사. 이 기사들은 정홍영 선생의 저서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77)의 자료편에도 수록되어 있었다.

 

실수로 뇌관에서 인화했으므로 순식간에 굉연한 음향과 함께 다수의 다이너마이트는 폭발하고 옆에서 불을 쬐고 있던 윤길문은 무참히 전신을 파르르 분쇄되어 살점이 주변에 흩어지는 형상을 보였고 오이근은 왼쪽 다리를 뜯겨 피에 스며들었으며, 윤일선은 왼손에 중상을 입었으며, 김시선 만은 몸에 몇 군데 찰과상을 입었을 뿐이었다. 김씨의 비명과 폭음에 놀란 사람들은 직접 현장으로 뛰어가 피에 물든 윤일선과 오이근의 두 명을 이케다마치의 회생병원에 맡겼으나 오이근은 같은 날 11시쯤 사망했다.

 

다이너마이트의 뇌관을 모닥불에 건조시키는 등의 무모함에 현 당국도 놀라고 있지만, 무지한 선인에게 위험한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하게 하는 것은 문제이고, 또 폭발한 다이너마이트의 폭발력도 너무 크므로, 남아 있는 다이너마이트에 대해서, 28일 아침 현 보안과 기사의 손으로 폭발성능시험을 실시할 것이다.”

 

<고베유신일보>의 기사가 <고베신문>과 다른 점은 4가지였다. 첫째, <고베신문>은 사고 발생 시간을 밝히지 않았으나 <고베유신일보>26일 아침 8시경이라고 보도했다. 둘째, <고베신문>은 피해자를 5명으로 보도했으나 <고베유신일보>4명으로 보도했다. 사망자는 윤길문, 오이근씨의 2사람으로 공통되지만, <고베유신일보>는 오이목씨를 부상자에서 제외했다.

 

일본 다카라즈카시의 키리하타 소재 벚꽃동산 입구의 신수이 광장에 세워진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전면 하단에는 구국철 후쿠치야마선 개수공사에서 희생된 윤길문, 오이근씨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셋째, <고베신문>은 윤일선의 아내를 여시선(19)이라고 보도한 반면, <고베유신일보>는 윤일선의 아내라는 언급 없이 김시선(19)으로 보도했다. 나이가 동일한 것으로 보아 서로 다른 인물이 아닌 듯 하며 두 기사 중의 하나가 성을 잘못 쓴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쇠 금()’자와 나 여()’자가 비슷하게 보여서 발생한 실수가 아닌가 싶다. 넷째, <고베신문>이 피해자들의 한반도 내 연고지를 경상남도로만 보도한 반면 <고베유신일보>경상남도 고성군 고성면이라고 더 구체적으로 밝혔다.

 

이같은 차이점을 제외하고 두 신문의 보도를 종합하면 사고 당시의 피해상을 그려볼 수 있다. 10개의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해 윤길문(21)씨는 장기가 노출되고 살점이 흩어질 만큼 온몸이 파열되어 현장에서 즉사했고, 오이근씨는 왼쪽 다리가 절단되어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3시간 후에 사망했다. 윤일선씨는 대퇴부와 왼손에 중상을 입고 병원에 이송되었으나 목숨은 건졌고, 그의 아내 여일선(혹은 김일선)씨는 얼굴과 몸의 몇 군데에 찰과상을 입었다. 오이목씨도 폭발의 충격으로 여러 간을 튕겨나갔으나 타박상이나 찰과상 정도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기사를 읽으면서 상상하게 되는 사고 현장의 모습이 끔찍하기는 했지만, 순직자들의 연고지를 밝혀내고 친족 등의 연고자를 찾아야 하는 나로서는 그들의 고향이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면이라고 밝혀준 <고베유신일보>에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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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정세화 선생이 고베중앙도서관에서 찾아내신 1929328일자 <고베신문> 기사를 번역한 것이다. 정홍영 선생의 저서 <가극 도시의 또 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의 부록편에도 실려 있는 이 기사는 조선인 노동자 2명이 사망하고 3명이 중경상을 입은 후쿠치야마선 철도개수공사 중에 발생한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를 보도한 것이다.

 

<고베신문, 1929328, 한신판>

(제목과 소제목) “이건 또 얼마나 횡포한 일인가!/ 다이너마이트를 모닥불에 말리다가/ 2명이 비참하게 사망하고 3명이 중상을 입다/ 가와베군 철도 터널 공사장의 참사

 

 

(기사 본문-문단 번호는 필자가 붙인 것) (1) “철도성선(=오늘날의 JR) 후쿠치야마선의 개수공사에 종사중인 조선 경상남도 출신 윤길문(尹吉文, 21) 동 윤일선(尹日善, 25) 오이근(吳伊根, 25) 여시선(余時善, 19) 오이목(吳伊目)의 다섯 명이, 다른 다수의 조선인 인부들과 함께 가와베군 니시타니무라 기리하타 나가오산 제6호 터널 입구(간자키 기점 15리 지점)에서 공사 중,

 

(2) “이 공사에 사용하는 다이너마이트가 결빙되고 있으므로 모닥불로 이것을 녹이면서 그 부근에 이들 조선인 토목노동자 남녀들이 모여 몸을 녹이고 있는 중, 1개의 다이너마이트가 10개로 인화되어 아연 대음향과 함께 폭발했는데,

 

(3) “윤길문(21)은 장부가 노출되어 보기에도 끔찍한 모습으로 즉사했고, 오이목(25)은 여러 간을 튕겨 나갔고, 경상남도 태생 토공 윤일선(25)은 대퇴부를 비롯해 그 밖의 심한 부상을 당했고, 그의 아내 여시선(19)은 안면에 부상을 당했으며, 오이근은 왼쪽 다리를 뿌리부터 절단 당했고, 그 외 여러 명의 부상자를 냈다.

 

(4) “이케다 마을의 회생병원으로 이송했으나 도중에 오이근은 마침내 절명했다. 급보에 의해 관할 다카라즈카서에서 경관을 현장으로 출동시켜 관계자를 소환 조사 중이다.”

 

이 기사는 전체가 4백자도 채 안 되는 짧은 기사이지만 6하 원칙에 충실해서 폭발사고 상황을 짐작하기에 충분하고, 그렇게 상상되는 상황이 매우 끔찍한 것도 사실이다.

 

우선 이 기사에는 피해자 5명의 이름과 나이가 나타난다. 위의 문단(1)에는 이름과 나이만 나오지만, 문단(3)에는 그들이 각각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도 서술되어 있다. 특히 문단(3)은 들여쓰기로 되어 있는데 이는 다른 기사나 보고서를 인용한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문단(1)은 기자가 직접 취재해 작성한 것이지만 문단(3)은 병원 보고서를 입수해 인용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다카라즈카 지역을 관통하는 국철 후쿠치야마선 개수공사에서 사망한 윤길문, 오이근씨가 고베수도공사에서 순직한 다른 3명의 조선인 노동자들과 함께 일본인들과 재일조선인들의 추모제사를 받고 있다. 이들은 지난 1백년동안 이 5인의 무연고 조선인 희생자들을 제사지내 왔다.

 

문단(1)과 문단(3)의 명단은 거의 일치한다. 피해자 윤길문(21)과 윤일선(25)과 여시선(19)의 이름과 나이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두 문단 사이에 약간의 차이도 있다. 문단(1)에서는 오이근(25)이 먼저 등장하고 나이가 명시된 반면 나중에 등장하는 오이목의 나이가 누락되어 있다. 그러나 문단(3)에서는 오이목(25)이 나이와 함께 먼저 서술되었고 나중에 서술된 오이근의 나이는 누락되었다.

 

이 사고의 사망자는 윤길문(3문단)과 오이근(4문단)이고,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이름이 새겨진 사람도 이 두 사람이다. 오이근과 오이목의 나이가 엇갈린 것은 두 사람 모두 사고당시 25세였거나, 혹은 보도과정에서 두 사람의 나이가 혼동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문단(3)이 인용문이라는 점, 그리고 문단(1)의 오이근 언급과 문단(4)의 오이근 사망 보도가 같은 기자의 보도인 것을 고려하면 오이근의 나이가 25세였던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결론적으로 이 기사는 5인의 피해자가 모두 경상남도 출신이라는 점은 일관되게 보도했고, 이들의 이름과 가족관계 설명으로 보아 윤길문과 윤일선과 여시선이 한 가족이라는 점, 그리고 오이근과 오이목도 형제관계이라는 점도 추측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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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홍영 선생의 저서 <가극 도시의 또 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를 읽기 시작한 것은 정세화 선생이 사진으로 찍어 보내주신 그 책의 챕터 두 개부터였다. 이 책은 1997년에 초판이 나온 이래 절판됐기 때문에 아마존에서도 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약 일주일 만에 정세화 선생은 그 책을 우편으로 보내셨다. 책 내용에 대한 질문이 많아지자, 아예 책을 속달로 보내신 것이다. 저자이신 부친의 마지막 소장본이 아닌가 싶었는데, 선뜻 보내주신 것이 고마웠다. 나는 마음을 더욱 다잡고 조사에 열심을 내기로 했다.

 

<다카라즈카와 조선인>을 읽어보니, 정홍영 선생은 역사학 전공자가 아니면서도 대단히 실증적인 연구를 남기셨음을 알 수 있다. 이 책 제1부에 수록된 12개의 논문 하나하나가 현장을 직접 답사해 현지인의 구술을 토대로 써내려간 알찬 기록이었다.

정홍영 선생의 <가극의 도시의 또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희생자들을 찾는 출발점이었다.

 

후쿠치야마선 철도공사의 희생자들을 조사한 내용은 그 책의 제12장에 나왔다. 이 책의 부록 <자료편>에는 <고베유신일보><고베신문>의 기사 스크랩이 실려 있었다. 이 자료편을 미리 볼 수 있었다면 정세화 선생께서 고베중앙도서관에 가셔서 마이크로필름을 돌려가며 기사를 찾아야 했던 수고를 덜 수 있었을 것이다.

 

<고베신문><고베유신일보>1929328일자 기사에서 중요한 실마리가 나왔다. 우선 <고베신문> 기사에는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의 사망자 2명과 부상자 3명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었고, 그들이 조선 경상남도 출신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순직자 연고지 조사 범위가 한반도 전역에서 경상남도로 축소된 것이다. 1개의 신문기사로 조사대상의 범위가 13분의1로 대폭 줄었으니 이런 것이 기록의 힘이 아닌가 싶었다.

 

다음으로 <고베유신일보>의 기사는 한 걸음 더 나갔다. 사고를 당한 희생자들이 조선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면 출신이라고 더 구체적으로 보도했다. 이 정도면 당장 다음날 고속버스 티켓을 예매해도 될 만큼 구체적인 주소였다. 번지수까지 기록되어 있지는 않아도, 찾아가 탐문할 수 있는 지역과 관공서가 특정화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기사들을 읽자마자 나는 바로 고성으로 떠나고 싶었다. 그것이 정홍영 선생의 방식이었다. 그도 역시 호리우치 미노루(堀内稔)선생으로부터 <고베유신일보> 기사를 전해 받자마자 바로 다음날 곤도 도미오(近藤富男)선생과 함께 현장으로 달려갔었다.

 

다카라즈카시 키리하타 소재 벚꽃동산 입구 신수이 광장에 세워진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지금은 구글맵으로도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내 정홍영 선생과 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인식했다. 정홍영 선생은 여러 해 동안 후쿠치야마선 철도개수공사와 조선인 순직자들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 오셨기 때문에 그 지역과 사고에 대해 잘 알고 계셨다. 새로운 정보가 나타나자마자 바로 현장 답사에 나설 준비가 갗줘져 있었다. 절친 동료 곤도 선생까지 있었으니 얼마나 든든했을까?

 

나 역시 조사연구를 도와주시는 여러 선생님들이 계신다. 정세화, 곤도, 신도 선생 등이 그분들이다. 그러나 정작 나는 아직 이 지역에 대한 배경지식이 모자랐고 사고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고베와 다카라즈카를 두세 번씩 방문하기는 했으나 사고 현장인 니시타니의 키리하타 혹은 다케다오 지역을 잘 몰랐고 경상남도 고성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먼저 순직자들이 종사했던 후쿠치야마선 철도공사가 어떤 공사였는지 조사하기로 했다. 특히 문제의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했다. 다행히도 조사연구에 필요한 배경지식과 상황 및 맥락은 정홍영 선생의 <다카라즈카와 조선인>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었다.

 

나는 2건의 신문기사를 읽자마자 <다카라즈카와 조선인>의 제12장을 다시 읽으면서 번역을 해나갔다. 정홍영 선생의 저서를 꼼꼼히 읽은 덕분에 나는 효고현 다카라즈카 산간지역에서 전개되었던 조선인 노동자들의 고된 삶과 그들에게 닥친 비극적인 폭발사고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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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4개의 신문기사와 3장의 매장인허증에서 시작되었다. <고베신문> 4개 신문사의 1929328일 기사와 니시타니 촌장이 발행한 사망자의 매장 허가증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 기초자료가 발견된 경위는 정홍영 선생의 저서 <가극의 도시의 또 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 이하 <다카라즈카와 조선인>)에 기록되어 있다.

 

정홍영 선생은 1985년 봄, 3명의 조선인 사망자에게 발행된 매장인허증을 처음 입수했다. 그가 연초부터 다카라즈카에 시() 제도가 시행되기 이전의 료겐(良元), 코하마(小浜), 나가오(長尾), 니시타니(西谷) 각 촌의 자료 속에 조선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지 조사하던 중에, 다카라즈카 시사(市史) 편찬실의 편집담당주사 와카바야시 야스시(若林泰)씨로부터 3장의 매장인허증 사본을 입수한 것이다. 정홍영 선생은 이를 근거로 고베수도공사(1914-15) 중에 사망한 조선인 노동자 3인에 대한 조사연구를 시작했다.

 

한편 1993325, 정홍영 선생은 조선인 관련 신문기사 데이터베이스를 작성 중이던 무쿠게회의 호리우치 미노루(堀内稔) 선생으로부터 1929년의 다이나마이트 폭발사고를 보도한 신문기사를 입수했다. 바로 다음날 아침 정홍영 선생은 곤도 도미오 선생과 함께 타케다오(武田尾)를 답사해 64년만의 첫 제사를 드렸고, 그것이 후쿠치야마선 철도개수공사에서 사망한 조선인 노동자 2인에 대한 조사연구의 시작이었다.

 

정홍영 선생이 1985년 봄, 와카바야시 야스시씨로부터 입수한 조선인 노동자 3인에게 발행된 매장인허증.

 

이 조선인 노동자 5인의 한반도내 연고지를 찾기로 하면서 나는 정홍영 선생의 출발점을 내 출발점으로 삼기로 했다. 우선 신문기사 조사로부터 시작했다. 최승희 공연 자료를 조사하면서 중앙과 각 지역의 일본신문 조사에 어느 정도 자신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일본에 갈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2020년 여름 이후 일본 내 코로나 상황은 악화되었고 무역마찰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인의 일본 방문은 여전히 어려웠다. 미국과 유럽과 한국의 신문들은 어디서나 인터넷 조사가 가능하지만, 일본 신문들은 대부분 현지 도서관에 가야했고, 대개 마이크로필름을 돌려가면서 눈으로 기사를 찾아야 한다.

 

나는 정세화 선생께 도움을 요청했다. 한편으로는 정홍영 선생의 저서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 중에서 이 두 공사와 그 희생자들이 서술된 챕터를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주시기를 요청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베중앙도서관에서 해당 신문기사를 검색해 주시기를 부탁했다.

 

정세화 선생이 보내주신 <다카라즈카와 조선인>의 제2장에는 정홍영 선생이 호리우치 미노루 선생으로부터 받은 신문기사는 <고베유신일보(1929328일 석간)>였다. 그런데 정홍영 선생이 만약을 위해 같은 날짜의 다른 신문을 살펴보니 <고베>, <아사히>, <마이니치> 신문 등이 각각 상당히 자세한 기사를 보도했다고 서술한 것을 읽었기 때문에, 나는 정세화 선생께 다른 신문에도 이 사건이 보도되었는지 검색해 주시기를 부탁드렸다.

 

정홍영 선생의 저서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의 부록, 자료편에 실린 <고베신문>과 <고베유신일보>의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 기사.

 

정세화 선생은 고베중앙도서관에서 <고베신문>과 <오사카아사히신문>의 기사를 찾아내셨다. 부친이 시작하신 조사를 아드님이 계속하시게 된 것이었다. 부친께서 가업 외에 조사연구 작업으로 과로하시는 것이 걱정되었고 별세하신 뒤에도 아버지가 남기신 자료를 탐내는 사람들 때문에 불쾌하고 번거로웠다던 정세화 선생이 20년이 지나서 다시 부친이 못 다하신 일을 계속하시게 된 것이다.

 

고베중앙도서관에서 찾지 못한 <아사히><마이니치>의 기사는 도쿄의 쿠누기 에나(功刀恵那)선생에게 다시 도움을 청했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기록학 박사과정을 마친 후 일본국립기록원에 근무하는 에나 크누기씨는 바로 다음날 <아사히신문>의 도쿄판 기사를 찾아서 보내주었다. <마이니치신문>의 기사는 아직도 찾지 못했는데, 후일의 일본 취재를 통해 더 찾아보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고베유신일보><고베신문>, 그리고 <아사히신문> 도쿄판과 오사카판의 기사 4건이 확보되었고, 이것이 조선인 순직자들의 연고를 찾는 내 조사의 기초자료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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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새겨진 비문에 따르면 이 추도비의 건립을 담당한 것은 <추도비 건립 모임><다카라즈카시 외국인시민문화교류협회(이하 교류협회)>, 그리고 <목련회>의 세 단체이다. 추도비 건립의 이유와 날짜 다음에 이 세 단체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

 

정계향 선생의 논문(2019:146)은 세 단체를 비교적 자세히 서술해 놓았다. 가장 먼저 생긴 것은 <교류협회(1996)>이다. 1990년대 초반에 김예곤 선생이 자신의 회사에 일본계 브라질인을 수십 명 고용하면서, 이들이 겪는 언어문제와 거주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교류협회>를 창립했다. 처음에는 외국인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동했으나 시간이 가면서 재일 조선인을 위한 활동의 비중이 커졌다. 창립자이자 초대회장인 김예곤 선생이 재일 조선인이었고 다카라즈카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대부분이 재일 조선인이기 때문이다.

 

창립자 김예곤 선생의 사업경영을 통해 만들어진 넓은 교우범위 덕분에 <교류협회>에는 다카라즈카와 고베 등, 효고 지역의 재일조선인과 일본인들이 많이 참가하고 있다. 여기에는 정계, 재계, 문화계의 인사들이 많이 포함되었는데, 이들은 지식인집단이 거의 없었던 다카라즈카의 재일조선인들의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다카라즈카시외국인시민문화교류협회>를 창립한 김예곤 선생이 2020년 3월 제주도를 방문해 재일2세로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강연하고 있다. 

 

<교류협회>가 추도비 건립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2010년경이었다. <고베수도공사><후쿠치야마선 개수공사>의 희생자들을 발굴한 정홍영 선생이 20001월에 타계한 후에도 곤도 도미오 선생은 정홍영 선생과 함께 시작했던 추도와 제사를 계속하면서 재일 조선인들은 물론 일본인들의 참여를 요청했다. 추모제사의 범위가 확대되면서 <교류협회>도 이에 동참하게 된 것으로 보이며, 2013년에는 곤도 선생도 <교류협회>에 가입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추도비 건립의 문제가 구체화되면서 마침내 20175<고베수도건설공사 및 구국도 후쿠치야마선개수공사 중의 사망자 추도비를 건립하는 모임>(이하 <추도비건립모임>)이 발족됐고, 곤도 선생이 회장에 선임되었다.

 

한편 정계향 선생의 서술(460)에 따르면 <목련회>추도비 건립을 위해 결성된 단체였다. “<목련회>의 회장은 곤도 선생, 공동회장은 김예곤 선생이었고, “발기인으로 참여한 사람은 두 사람의 대표를 포함한 23명으로, 재일조선인과 일본인이 섞여 있었으며, “이 중 상당수의 사람들은 <교류협회>의 회원이었다고 했다.

 

추도비를 건립하는데 앞장선 세 단체의 대표자는 <추도비건립모임>의 회장이 곤도 선생, <교류협회>의 고문이 김예곤 선생, 그리고 <목련회>의 공동회장이 곤도 선생과 김예곤 선생이었다. 결국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건립은 김예곤, 곤도 도미오 두 사람의 주도 아래 다카라즈카의 <교류협회>와 오사카의 <목련회> 회원들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이뤄진 것이다.

 

곤도 도미오(왼쪽 첫번째), 정세화(오른쪽 첫번째) 선생들께서 고베 조선학교 학생들을 인솔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견학-추도하고 있다.

 

물론 추도비 건립에 협력한 것은 이들 뿐은 아니었다. 효고현과 오사카부의 많은 재일 조선인과 일본인들이 시간과 노력과 돈을 들여 건립 운동에 나섰다. 그중에는 추도비 건립을 위한 각종 모임에 빠짐없이 참여하여 의논된 내용을 홍보하는데 앞장선 분들도 있었고, 자신의 재능을 기부하여 추도비가 지금의 모양을 갖추도록 애쓴 분들도 있었다.

 

곤도 선생의 전언에 따르면 절대로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는 전제 아래 추도비의 조각과 장식, 그리고 설치에 이르기까지의 실제작업을 직접 담당한 재일 조선인도 있었다. 그는 타마노 세이조 선생의 추도비 디자인을 받아서 그것을 돌에 새기고 장식하는 일을 손수 담당했고, 그렇게 자신의 손으로 완성된 추도비를 보면서 보람을 느끼셨다고 한다.

 

그밖에도 <교류협회><목련회>, <추도비 건립모임> 등의 회원이 아니면서도 수다한 일본인과 재일 조선인들이 추도비 건립에 참여했다고 한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는 참여 단체와 그 지도자들뿐 아니라 그 취지에 동조하는 많은 참여자들의 성원으로 건립되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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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는 아주 세련된 비석이다.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이 편찬한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2019)>에는 일본 전역에 산재한 170여개의 추도비가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이 출판된 이후에 건립된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2020)>는 여기에 등재되어 있지 않지만, 다른 어떤 추도비와 비교하더라도 그 현대적 감각과 세련된 디자인이 돋보인다.


추도비는 상하 2개의 장방형의 돌이 겹쳐져 구성되었고, 각각의 가장자리에는 돌을 자르기 위해 구멍을 낸 자국을 그대로 남아 두었다. 앞면에는 <월조남지>의 글씨를 중심으로 윗돌과 아랫돌에 각각 세 개씩의 줄이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그어져 있고, 글씨의 위쪽에는 양쪽에 두 명의 아기 천사 모습이 청동 조각으로 부착되어 있다. 아래쪽 돌에도 꽃을 묘사한 듯한 2개의 작은 청동조각상들이 덧붙여져 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앞면에는 <월조남지>와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것과는 별도로 2명의 어린 천사상과 꽃문양이 청동으로 부조되어 있다. 이 조각은 오사카를 중심으로 활발한 작품활동 중인 타마노 세이조 선생의 작품이다.


돌과 글씨와 장식물들이 전체적으로 균형 있게 배열되어 있는데다가, 음각으로 새겨진 <월조남지>의 행서체 큰 글씨와 역시 음각으로 새기고 짙은 색깔로 채워진 해서체의 희생자 이름이 현대적이지만 가볍지 않고, 단순하지만 우아한 모습이다. 뒷면에도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모두 새겼지만 전체적으로 번잡하지 않고, 위와 이래의 여백이 중앙에 잘 배열된 글씨와 어울려 안정감을 준다. 상당한 수준의 미적 감각을 가진 디자이너의 작품임을 금방 알아볼 수 있다.


이처럼 세련되면서도 우아한 추도비를 디자인한 사람은 누구일까? 사진을 통해 추도비의 앞면과 뒷면을 꼼꼼히 살펴보았으나 디자이너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았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서 곤도 도미오 선생께 질문을 드렸더니 이 추도비의 디자이너가 오사카를 중심으로 작품활동을 해 온 조각가 타마노 세이조(玉野勢三)선생이라고 하셨다. 


추도비의 디자인에 대해 궁금했던 몇 가지에 대해 구체적인 질문을 더 드렸다. 곤도 선생은 즉시 타마노 선생에게 연락을 취하셨고, 그동안 나는 타마노 선생의 웹사이트를 찾아가 그분의 작품세계를 학습했다. 어린아이를 모티브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계신 타마노 선생의 홈페이지에는 추도비의 청동 부조를 연상시키는 작품도 여러 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작품 제작에 열중하고 있는 타마노 세이조 선생 (사진 출처: 타마노 세이조 웹사이트) 


타마노 선생의 답변이 도착했다. 우선 “글씨 상단의 두 어린 천사”에 대해 타마노 선생은 “내 작품 주제는 ‘아이’이며, ‘아이’는 “민족이나 역사도 넘어서는 인류 보편의 테마”라고 하시면서, “추도비 전면에 부착한 남녀 2명의 아이의 모습은 하늘을 나는 ‘비천(飛天)’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비천은 한반도에서 불교 전래와 함께 전해진 모티브이기 때문에 한반도와 일본의 문화 교류의 역사를 암시함과 동시에 추도비가 목적하는 '위령'의 마음과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하신 후, “반드시 불교를 의식할 필요는 없으며 보는 사람들에 따라서는 서양적 '천사'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월조남지> 글씨의 좌우에 형상화된 5개의 꽃은 '목련' 꽃봉오리이며, 이는 희생된 다섯 분들의 '영혼'을 상징”하면서도 “추모비 건립에 앞장선 '목련회'를 가리키도록 했다”고 전했다. 심혈을 기울인 예술 작품답게 추도비의 디테일에까지 적절한 의미가 담겨있었다. 

 

타마노 세이조 선생의 또 다른 비천상 작품들. 그의 작품에는 어린아이들이 모티브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는 "아이는 민족이나 역사도 넘어서는 인류 보편의 테마”라는 인식으로 자신의 작품의 주된 소재와 주제로 삼고 있다고 하셨다.


또 추도비의 상단 왼쪽과 하단의 중간쯤에 그려진 물결 모양의 선들은 “각각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해안선을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두 물결 사이의 공간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고향을 떠나 건너온 현해탄이 될 것이며, 그 한 가운데에 새겨진 <월조남지>는 일본 땅에 묻힌 조선인 노동자들의 망향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겠다. 


타마노 선생은 또 이 선들이 “조수의 흐름, 바람의 흐름, 그리고 시간의 흐름까지도 암시하여 한반도와 일본의 항구적인 우호와 유대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다”고 덧붙였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디자인과 거기에 담긴 뜻도 감탄스러웠지만, 이같은 자상한 관심과 실력을 가진 조각가에게 추도비의 디자인을 의뢰하게 된 경위도 궁금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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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뒷면에는 또 하나의 이례적인 문구가 새겨져 있다. 후쿠치야마선 공사에서 순직한 다른 노동자들의 추도비가 세워진 위치를 다음과 같이 언급한 것이다.

 

후쿠치야마선 부설공사 순직자비는 키리하타 다치아이신덴에 있습니다.”

 

후쿠치야마선 철도는 18917월 아마가사키-나가스 사이의 가와나베 철도로 시작되었다. 이 철도는 같은 해 9월에 이타미, 1897년 다카라즈카, 1898년에는 나마제까지 연장되었고, 1912년에는 아마가사키에서 후쿠치야마까지의 전 노선이 개통되었다.

 

다카라즈카의 키리하타 다치아이신덴에는 후쿠치야마선 부설공사(1891-1912)에서 순직한 일본인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추도비가 세워져 있다.

 

키리하타에 세워진 <순직자의비>1891년부터 1912년까지의 후쿠치야마선 부설공사에서 희생된 순직자들을 기리는 추도비이다. <순직자의 비>1979년 니시타니 청년회의 주도로 세워졌는데, 여기에 새겨진 20명의 순직자 명단에는 조선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없다.

 

그러다가 1987년 정홍영 선생과 곤도 선생은 후쿠치야마선 제1차 개수공사(1929)에서 희생된 조선인 노동자 2명의 이름을 확인했고, 그들이 순직한 지점이 무코강 6호터널 앞이라는 점도 밝혀냈다. 이 연구를 바탕으로, 김예곤 선생과 곤도 선생 등은 20203<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세우면서 그 비문에서 니시타니의 <순직자비>를 언급한 것이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니시타니의 <순직자비>를 언급한 까닭은 추도비 설립 목적을 통해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다카라즈카 근대화를 위해 노력하다가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이라면 서로 연계되어 추도되어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희생자들은 국적에 상관없이 동등하게 추도되고 기억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뒷면에는 기리하타의 다치아이신덴에 세워진 <순직자의비> 위치를 명시한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는 같은 철도의 건설하고 보수하기 위해 순직한 일본인과 조선인 노동자들의 연대하여 추도한다는 의미를 강조한 문구이다.

 

일본인 노동자를 기리는 <순직자의비>와 조선인 노동자를 기리는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역사적으로 서로 다른 시기에 세워지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일본인과 조선인이 구별이나 차별로 비쳐지면 안 된다는 것은 추도비 설립자들의 공통된 인식이었던 것 같다. 그 때문에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건립자들은 그 비문에 <순직자의 비>를 언급함으로써 연대감을 표시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어느 사회에서나 현지인과 외래인의 구별과 대립과 갈등은 사회문제가 되어 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출신지와 상관없이 지역사회에 공헌한 점이 공정하게 인정되고 기억되는 것이 또한 정상적인 흐름이다.

 

미국의 보스톤과 샌프란시스코를 연결하는 대륙횡단철도 공사(1863-1869)에서도 중국인 노동자들의 희생은 지대했었다. 공사가 끝난 후 센트럴퍼시픽 철도회사의 스탠포드 사장은 중국인들의 희생을 애도하면서 샌프란시스코에 차이나타운을 기부했다. 또 자신이 설립한 스탠포드 대학에 일정한 수의 중국인이 입학하도록 할당을 두기도 했다. 지금도 대륙횡단철도를 따라 중국인 노동자들의 추도비가 곳곳에 세워져 그들의 희생을 기억한다.

 

미국의 대륙횡단철도 부설공사에 동원된 중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저서와 기념비. 미국의 동부와 서부를 연결하는 대대적인 철도공사 과정에서 중국인 노동자들이 겪었던 고난과 희생을 기록하고 이를 추도하는 모습은 철도 연변의 주요 도시들에서 자주 발견된다.

 

비슷한 일이 다카라즈카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비록 철도공사 당시에는 가난하고 힘없고 언어까지 서툴었을 조선인들이 고통스럽게 일해야 했을 것이고, 현지인들이 그들을 차별하거나 멸시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다카라즈카의 시민들과 지도자들은 지역사회 근대화를 위해 조선인들이 치른 희생을 기억하기 시작한 것이다.

 

뒤늦게나마 후쿠치야마선 부설공사(1891-1912)와 개수공사(1929)에 참가한 노동자들의 희생을 기리는 <순직자의비(1979)><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2020)>를 건립한 것도 그 때문이다. 후자의 비문에 전자의 위치를 명시한 것은 국적을 초월한 연대감을 나타낸 것이다.

 

강물은 굽이쳐 흐르지만 결국 바다로 흘러든다. 인간의 역사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온갖 상충과 갈등을 겪더라도 결국 인류애의 바다로 귀결된다. 그것은 <순직자의비><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연결하는 한 줄의 문장이 의도한 바이기도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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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는 다른 조선인 추도비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점이 있다. 당시의 다카라즈카 시장 나카가와 도모코(中川智子)씨의 글씨를 함께 새긴 것이 그것이다.

 

추도합니다(). 다카라즈카 시장 나카가와 토모코 씀.”

 

추도비의 뒷면에 새겨진 이 문구는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지역사적 의미를 높이는 데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다카라즈카 시정부의 대표가 추도비 건립에 공개적으로 찬성했을 뿐 아니라,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글을 직접 써서 추도비에 새겨지도록 했기 때문이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뒷면에는 나카가와 도모코 당시 시장의 추도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는 이 지역 근대화를 위해 노력한 조선인들의 희생을 다카라즈카 시정부의 수장이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추도의 대열에 동참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20세기 초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조선인들이 값싼 노동력으로 활용되었다는 점과 그들이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는 것은 한일 양국의 역사가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바이다. 당시 일본제국의 식민지의 처지에 있던 조선인들은 때로는 자발적인 이민노동력으로, 때로는 비자발적인 강제노동력으로 일본의 탄광과 댐, 철도와 도로, 수도와 전력 등의 사회기반시설을 확충하는 데에 다수 동원되었다.

 

다카라즈카 지역에서도 조선인 노동자들은 고베수도공사, 무코강 개수공사, 사카세강 개수공사, 롯코사방공사, 후쿠치야마 철도공사, 한신국도공사, 현도아마가사키-다카라즈카선 공사 등에 대거 참가했었다. 그러나 그러한 내용이 다카라즈카의 공식 역사에 제대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정계향 선생은 <다카라즈카 시사><다카라즈카 시제 30년사>, <다카라즈카 대사전>과 논문집 <다카라즈카>(10)의 네 문헌을 조사한 후 자신의 논문에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다카라즈카 시사>와 <다카라즈카 시제30년사>를 비롯한 이 지역의 주요 역사 문헌에는 조선인 노동자들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다카라즈카 시사에는 재일 조선인과 관련된 내용이 거의 없다. 무코가와 개수공사에서 조선인이 일했다는 기록이 아주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고, 전후(戰後)의 다카라즈카를 서술할 때 초급학교에 대해 몇 줄을 서술한 것이 전부이다. 다카라즈카 시제 30년사에는 재일조선인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다.

 

다카라즈카 대사전에는 다카라즈카의 외국인을 소개하며 중국인과 재일조선인을 비슷한 양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주의 연원에 대한 언급은 없다. 논문집인 다카라즈카에는 권당 4~5편의 논문이 실려 있는데, 50여 편의 논문 중 재일조선인과 관련된 것은 조선사(朝鮮寺)에 관한 소논문 한 편 뿐이다. 재일조선인이 다카라즈카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에서 발행하는 책에는 재일조선인의 존재가 지워져 있다.”

 

뒤늦게나마 정홍영 선생이 조선인 노동자들의 희생을 밝혀냈고, 결국 그들을 기리는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세워지기에 이르렀다. 이 추도비 건립 과정에서 나카가와 도모코 시장이 이를 인지하고 애도한다()”는 글씨를 보내어 추도의 행렬에 참여한 것이다. 이는 그동안 다카라즈카 지역사회에서 도외시되었던 조선인 노동자들의 공헌과 희생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중요한 사례일 것이다.

 

정홍영 선생의 <가극의 도시의 또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은 이지역 재일 조선인들의 이주 및 정착의 과정을 정리한 주요한 연구서이다. 

 

나카가와 시장의 추도 글씨가 다카라즈카시의 전체 의견을 대표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카라즈카의 시민사회 전체의 공식 입장이라면 아마도 시의회의 의결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의회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대한 논의를 하거나 의결을 시도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나카가와 도모코 시장은 아마도 시정부나 소속정당을 대표하거나 혹은 개인 자격으로 희생된 조선인 노동자 추도의 대열에 합류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심지어 그런 경우일지라도 현직 시정부의 대표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건립 과정에 참여한 것은 대단히 중요해 보인다. 오랫동안 공식 기록에 무시되었던 이 지역의 조선인들이 지역 근대화를 위해 일본인 시민들과 함께 노력하고 희생한 점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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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뒷면에는 앞면의 비문 <월조남조>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함께 추도비를 세운 이유가 기록되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월조남지, 철새는 고향을 잊지 않고 머나먼 조국의 방향으로 뻗은 가지에 둥지를 만든다고 합니다.

“1914년부터 약 15년간 진행된 <고베시 수도터널공사> 중에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도 3명의 조선반도 출신 노동자가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이는 센가리 수원지에서 고베시까지 깨끗한 물을 보내기 위한 어려운 공사였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옛 국철 후쿠치야마선 부설 후, 이곳 무코강변에서 자주 일어나는 범람과 토석류로부터 철도를 지키기 위한 개수공사 중, 1929326일에 두 명의 조선반도 출신자가 폭발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뒷면. <월조남지>의 의미가 간략히 설명되고, 추도비를 세운 이유, 건립의 주관 단체들이 명시되어 있다. 그에 더해 당시 다카라즈카의 시장, 나카가와 도모코씨의 "애도한다"는 글씨를 새겼고, 같은 공사에서 순직한 일본인들의 추도비 위치도 명시해 놓았다.

 

지역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수도와 철도 건설현장에서 희생된 다섯 분을 애도하면서, 사고를 잊지 않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 이 추모비를 건립합니다. 2020 326.”

 

비문에서 밝힌 <고베시 수도터널공사><옛국철 후쿠치야마선 개수공사>에 대해서는 정홍영 선생의 저서 <가극의 도시의 또 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그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요약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추도비의 건립 목적에 주목해 보자.

 

위의 인용문 마지막 문장에 따르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목적은 두 가지이다. “희생된 다섯 분을 애도하고 사고를 잊지 않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이다. 희생자들이 왜 애도 받는 것일까? 지역생활에 중요한 기반시설을 건설하는 중에 순직한 분들이기 때문이다. 왜 기억하고 전하려는 것일까? 그런 사고들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이런 목적으로 추도비를 세웠다면 나는 그것이 성숙한 근대적 시민의식의 발로라고 생각한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위령비>보다는 <추모비>라는 말을 쓰기로 한 데에는, 근대적, 시민사회적인 뜻으로 '기억'하고 '애도'한다는 뜻이 배어 있다고 생각한다. '억울한 넋을 위로'한다거나 '악령을 쫓아낸다'는 중세적, 종교적 용어와는 거리가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때로 <추도비><위령비>는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어원적으로는 그 둘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위령>이 중세적, 종교적 개념이라면 <추도>는 근대적, 시민사회적 개념이다. 사고나 질병, 전쟁으로 죽은 사람은 모두 억울한 죽음을 맞은 것이다. 그들의 억울한 넋을 위로하는 것은 사실 종교적 영역이다. 굳이 영혼이나 넋의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도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애도할 수 있다. 그것이 현대적 시민사회의 추도라고 나는 생각한다.

 

<위령비>라는 말에는 억울한 넋악령이 되어 자행할지도 모를 해악을 방지하려는 의도가 포함된다. 이는 과거 한국에서도 낯익은 개념이다. 서낭당에 색색의 리본을 매는 일이나, 마을 어귀에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을 세웠던 것이 그런 것이다. 이는 종교적 측면에서 이해할 만한 관습이고, 그렇게 남겨진 비석이나 유물이 소중한 문화유산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인식의 바탕에는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종교적 주술의 관념이 포함된다. 이는 근대적 사고방식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주술 개념이나 종교적인 관행이 좋다거나 나쁘다는 판단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개인들의 그러한 신앙은 존중받아야 마땅하지만, 근대적 공동체의 차원에서는 좀 더 객관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사회적 의미를 갖는 기념물이라면 중세적, 종교적 의미의 <위령비>보다는 근대적, 시민사회적 의미의 <추도비>가 더 어울리는 말이다.

고베조선학교 학생들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방문해 묵념을 올리고 있다. 이 추도비는 조선인 노동자들의 노력과 희생이 다카라즈카시와 이곳에 사는 재일 조선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거듭 생각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나는 일찍이 정세화 선생과 곤도 도미오 선생에게 이 추도비의 정식 이름이 무엇인가고 질문한 적이 있었다. <월조남지비>, <위령비>, <추모비>, <추도비> 등이 후보로 올랐었다. 그중에서 곤도 선생과 정세화 선생은 <추도비>가 가장 적절하겠다는 대답을 주셨고, 그 후로 우리는 이 추도비를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라는 부르고 있다.

 

우리는 때로 <위령비>라고 쓰고도 <추도비>로 이해한다. 그것은 위령이라는 말을 비유적, 상징적인 뜻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나치게 자구적인 해석에 매달릴 필요는 없기는 하다. 하지만 현대의 시민사회에서라면 추도라는 말이 정확하고 의미 있을 뿐 아니라 소모적인 문제의 소지가 적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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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도 도미오 선생은 <무쿠게통신>에 기고한 <정홍영상과의 일>에서 1983년 가을부터 자신은 정홍영 선생의 금붕어 똥이 되었다고 했다. 두 사람은 다카라즈카와 효고, 더 나아가 일본 전역의 재일조선인 관계 조사연구 활동의 단짝이 된 것이다.

 

정홍영 선생은 생전에, 후쿠치야마선 부설공사에서 사망한 일본인 노동자들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지만, 같은 철도의 개수공사에서 사망한 조선인 노동자들의 추모비가 없다는 것을 자주 개탄했다. 곤도 선생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건립에 열과 성을 쏟은 것은 그같은 정홍영 선생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정홍영선생의 저서 <가극의도시의 또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에는 곤도 도미오 선생과 함께했던 연구 업적이 빼곡이 정리되어 있다.

 

한편, 곤도 선생은 김예곤 선생과도 가깝게 활동했다. 2013<다카라즈카시 외국인시민문화교류협회>에 가입하면서 김예곤 선생과 함께 일했고, 2017년부터는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건립을 위해 결성된 <목련회>의 공동대표를 맡았다. 그로부터 3년 후 두 사람은 다른 많은 단체와 개인들의 협력을 이끌어내면서 결국 추도비를 세웠다.

 

즉 곤도 선생은 정홍영, 김예곤 선생과 각각 협력하면서 재일 조선인 관련 조사연구와 시민단체 활동을 해왔다. 그렇다면 정홍영 선생과 김예곤 선생은 서로 어떤 관계였을까? 이 짧은 글에서 두 사람의 인적사항과 교우관계를 전체적으로 살펴볼 수는 없다. 하지만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건립의 문제에 국한한다면, 정홍영 선생의 생전이나 사후에도 두 사람은 매우 긴밀한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았다. 우선 나이가 비슷한 연배이다. 정홍영 선생이 1929년생이고, 김예곤 선생은 1933년생이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총련에 몸담아 활동했다. 정홍영 선생은 오랫동안 총련 다카라즈카 지부의 위원장(1965-1976)으로 근무했고, 김예곤 선생은 조선중,,대학교를 졸업하고 조선대학교 동창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재일2세인 김예곤 선생은 청년시절에는 학술활동으로, 중년이후 기업경영과 시민단체활동으로 재일조선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최근에는 정홍영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건립을 위해 비석의 석재를 마련하고, 글씨를 쓰고, 부지를 마련하는 일에도 열성을 다했다.

 

두 사람은 모두 학술 및 사회운동에 열심이었다. 정홍영 선생은 주로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천착했고, 김예곤 선생은 다카라즈카 지역의 외국인시민 운동을 전개하셨다. 이같은 학술 및 사회운동은 모두 재일 조선인의 과거와 현재의 삶을 개선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차이점도 있었다. 정홍영 선생은 경상남도 상주에서 태어나 7세에 일본에 건너온 재일1세였지만, 김예곤 선생은 효고현 카와베군에서 태어난 재일2세였다.

 

정홍영 선생은 어린 시절 다카라즈카의 일본인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16세에 해방을 맞은 후에는 간사이의 명문 간칸도리츠(関関同立)의 하나인 리츠메이칸(立命館大学) 대학에서 농학을 전공했다. 김예곤 선생은 13세에 해방을 맞을 때까지 일본 소학교를 다녔으나,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은 때마침 설립된 조선학교의 민족교육을 받았다. 그의 전공은 어문학이었다.

 

두 사람의 활동 영역과 시기도 달랐다. 정홍영 선생은 젊은 시절에는 총련의 다카라즈카 지역 위원장으로 사회 및 정치 활동을 했고, 위원장을 사임한 후에는 역사 분야의 학술운동에 투신했다. 김예곤 선생은 젊은 시절에는 도쿄를 중심으로 학술 운동을 했고, 1970년에 다카라즈카로 돌아온 후에는 기업경영에 전념했으나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시민사회운동을 전개했다.

 

 

곤도 도미오 선생은 정홍영 선생과의 연구조사와 김예곤 선생과의 시민단체활동을 통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세운 주역이자 산증인이다.

 

이 같은 몇 가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세우는 일에 협력한 셈이다. 정홍영 선생은 조사연구를 통해 순직자들의 존재를 드러냈고, 그들의 죽음이 다카라즈카 시민사회와 재일 조선인 공동체에 던지는 의미를 밝혔다. 김예곤 선생은 정홍영 선생의 뜻을 받들어 석재를 마련하고, 글씨를 쓰고, 추도비가 적절한 곳에 세워지도록 부지를 마련하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세워진 것은 정홍영 선생의 선구적인 노력뿐 아니라 김예곤 선생의 실질적인 활동, 그리고 이 두 사람과 모두 함께 일하면서 결국 일이 이루어지도록 이끈 곤도 도미오 선생의 오래고 끈질긴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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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월조남지>의 글을 쓴 사람은 김예곤 선생이다. 글쓴이의 이름은 보통 비석의 뒷면이나 옆면에 새기는 법인데, <월조남지>에는 그 바로 옆에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본인의 이의제기가 있었다는 데도 그렇게 한 것은 무언가 특별한 의미가 담긴 것처럼 느껴진다.

 

<재일2세의 기억(2016)>에 실린 김예곤 선생 인터뷰를 읽으면서 나는 그같은 추도비의 특별한 의미가 그가 어머님과 큰 형님에 대해 가졌던 연민과 통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18세의 첫아들과 42세의 둘째 아들을 일본 땅에서 잃었고 그때마다 큰 충격을 받으셨다고 했다.

 

특히 김예곤 선생은 어린 시절 자신의 큰 형님 김지곤씨를 장티푸스로 잃고 어머님이 무코강가에서 그 영혼을 달래던 가슴 아픈 기억을 지니고 있었다. 그 기억은 추도비의 5인을 대하는 김계곤 선생의 감성과 맞닿을 수밖에 없었다. “아들을 죽게 한 건 내 탓이라고 통곡하면서 하늘을 보며 조선의 고향을 생각하시던 어머니의 심정으로 쓴 글이 <월조남조>였을 것이다.

 

오구마 에이지(小熊英二), 고찬유(高賛侑), 고수미(高秀美) 공동편집의 <재일2세의 기억(2016)>은 이차대전 이후 일본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재일조선인 2세 50명을 인터뷰한 결과를 엮은 책이다. 표지 하단의 사진들 중에서 첫번째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김예곤 선생이다.

 

그러므로 <월조남지>하늘을 보며 조선의 고향을 생각했던 모든 재일1세에게 드리는 헌사이다. 그 헌사가 추도비에 새겨진 5인의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바쳐진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매서운 시대의 채찍에 갈겨 조선의 고향을 떠났다가 결국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 땅에 묻힌 재일1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재일2세가 선택한 가장 적절한 문구일지도 모른다.

김예곤 선생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공헌한 것은 추도비에 쓰인 <월조남지>의 글씨뿐이 아니었다. 두 층으로 이뤄진 이 추도비의 석재를 제공한 것도 그이다.

 

정계향 선생의 <다카라즈카의 조선인 역사(2019: 156쪽과 주462)>에는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길 비석은 교류협회의 고문이자 목련회의 공동대표였던 김우석이 기증을 하기로 했다고 되어 있다. ‘김우석이라는 가명으로 인터뷰에 응했지만, 당시에 교류협회의 고문이자 목련회의 공동회장을 맡았던 사람은 김예곤 선생이었다.

 

그가 다카라즈카에서 쇄석회사를 경영하면서 확보한 고급 석재를 선뜻 추도비 건립을 위해 희사한 것은 상징적이면서도 뜻 깊은 일이었다. 특히 그가 한반도에서 운송해 온 2개의 돌을 겹쳐 쌓아서 추도비를 구성할 수 있게 한 것은 남북한이 통일되기를 바라는 그의 염원을 담은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는 커다란 4각형의 석재 2개를 겹쳐 쌓은 형태로 구성되어 있어, 남북한이 하나로 통일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상징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이 두개의 양질의 석재는 김예곤 선생이 추도비 제작을 위해 기증한 것이다.

 

김예곤 선생은 또 석재를 기부하고 글씨를 쓰는데 그치지 않고, 추도비 건립을 성사시키기 위해 직접 발 벗고 나섰다. 그는 자신의 회고에서 “40대부터 ... 문화적 계발활동을 했다고 말했는데, 그가 <국제교류협회>의 회원으로서 <이문화(異文化)상호이해사업>을 추진한 일과, <외국인시민문화교류협회>를 결성해 초대 회장을 역임했던 것, 그리고 이 두 단체의 협력을 이끌면서 <다카라즈카시외국인시민간담회>를 이끌어오고 있는 것 등을 가리킨다.

 

이같은 활발한 문화 및 사회활동을 통해 다카라즈카의 문화계와 시민운동계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어온 김예곤 선생은 결국 20175월 조선인 추도비를 건립하기 위한 모임으로 결성된 <목련회(もくれんの)>의 공동대표에 취임했고, 그로부터 3년 후에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세워진 것이다.

 

내가 주목한 것은 김예곤 선생이 <다카라즈카시외국인시민문화교류협회>의 초대 회장이었고 <목련회>의 공동대표였다는 점이다. 이 두 단체는 곤도 도미오 선생의 활동의 장이기도 했다. 특히 김예곤 선생이 <목련회>의 공동회장일 때 다른 공동회장이 곤도 선생이었다. , 두 사람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건립을 위해 앞장서서 노력한 동료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곤도 선생의 시민운동 파트너인 김례곤 선생은 그의 조사연구 파트너 정홍영 선생과도 잘 아는 사이였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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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자크 뉴턴(Isaac Newton)의 인용구 중에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간 난쟁이라는 비유가 있다. 개개인 연구자들의 능력은 제한되지만, 선배 연구자들의 업적을 배움으로써 거인의 어깨 위에 오르게 되며, 거기서 더 넓은 시야와 더 정확한 방향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주인공들을 찾아 나서면서 가졌던 내 느낌이 바로 뉴턴의 난장이였다. 미지의 세계에 조사의 첫 발을 디디면서도 나는 이 분야의 사전 지식도 전혀 없었고 관련 연구방법론을 터득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뉴턴은 내게 거인의 어깨 위로 올라가라고 권하고 있었다. 선배 연구자들의 업적을 찾아 익히라는 말이다.

 

한편, 패트릭 마이어스(Patrick Meyers)의 희곡 <K2>는 조난당한 등산가들에게 이렇게 권한다. “먼저 현 상황을 파악해라. 조난당한 지형을 조사하고, 몸에 부상이 있는지 알아내고, 남은 장비를 점검해라. 그래야 다음 할 일을 정할 수 있다.” 기억에 의존한 인용이므로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아마도 그런 비슷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연구자는 누구나 능력이 제한되지만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탄 난쟁이처럼 선배들의 업적을 잘 숙지하면 더 멀리, 그리고 더 정확하게 볼 수 있다. 

 

조난당한 등산가가 당황한 나머지 계획 없이 방황만 하게 되면 구조받기는커녕 사망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먼저 지형과 부상과 장비를 점검하라는 말이다. 그래야 최대한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가장 좋은 행동 지침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이어스와 뉴턴의 조언을 따라서 나는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라도 관련된 모든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첫째가 추도비 자체였다. 나는 아직 그 추도비를 직접 본적이 없었다. 그동안 사진을 통해서만 보았을 뿐인데, 그 사진들은 해상도가 낮아서 비석 앞뒷면의 작은 글씨들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정세화 선생에게 모든 글씨가 똑똑히 보이는 사진을 보내 주십사고 부탁했다.

 

정홍영 선생의 저서 <가극의 도시의 또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도 요청했다. 이 책은 추도비의 주인공들에 대한 최초이자 가장 심도 있는 연구서이므로 교과서이자 필독서였다. 정홍영 선생은 내가 그 어깨에 올라가야할 바로 그 거인이었기 때문이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주인공들을 찾기 위해서는 정홍영, 곤도 도미오 선생의 두 어깨가 꼭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또 다른 거인들은 곤도 도미오, 신도 도시유키, 정세화 선생이 있다. 이들은 내가 정홍영 선생의 어깨 위에 올라갈 수 있도록 무등을 태워줄 동료들이다. 실제로 이 세 사람은 추도비 주인공들의 연고를 찾기 시작한 이래 조언과 도움을 아끼지 않으셨고, 앞으로도 어떤 궁금한 점이 생기더라도 거리낌 없이 질문을 드릴 수 있는 분들이기도 하다.

 

특히 곤도 선생은 역대 <무쿠게통신(むくげ通信)>에 실린 정홍영 선생 관련 기고문들을 알려주셨고, 나는 그것들을 차례차례 읽어나가기로 했다. 그중 5개는 무쿠게회의 웹사이트에서 당장 다운로드할 수 있었다. 노무나가 마사요시 선생의 <사람사람: 정홍영 인터뷰(115)>, 호리우치 미노루 선생의 <신문기사로 보는 무코강 개수공사와 조선인(153)>, 히다 유이치 선생의 <정홍영 선생의 죽음을 애도하며(178)><효고의 재일조선인사 연구를 다시 시작하자(256)>, 그리고 곤도 도미오 선생의 <정홍영씨와의 일(300)>이 그것이었다.

 

곤도 선생은 또 <무쿠게회><효고조선관계연구회><효고현재일외국인교육연구협의회>가 공동 편찬한 <효고 속의 조선(2001)>다카라즈카시(寶塚市)가 출판한 <우리고장 다카라즈카> 1(1999)2(2001)도 권하셨다.

 

곤도 도미오 선생께서 추천하신 <우리고장 다카라즈카>의 1권과 2권.  다카라즈카시가 발행한 소책자이다.

 

그밖에도 곤도 선생은 정홍영 선생과의 공동 연구의 기폭제의 하나였던 니시타니촌 사무소 발행의 매장인허장 3장을 사진으로 보내주셨고, 정세화 선생은 이 지역의 조선인 역사로 박사학위 논문을 쓴 울산대의 정계향 선생의 연구도 참고하면 좋을 것이라고 조언해 주셨다.

 

나는 비로소 안심이 됐다. 이 정도의 자료라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대한 상황파악거인의 어깨에 올라가기에 충분한 사다리가 되어 줄 것이라는 확실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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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나는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주인공들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존경하는 곤도 도미오 선생과 형님처럼 친근한 정세화 선생의 권유가 계기였다. 하지만 엄두가 잘 나지 않았다. 1백년의 역사 속에 묻히신 분들의 흔적을 어떻게 찾아낼 지 요량이 서지 않았다.

 

문득, 왜 내게 그런 부탁을 하신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최승희 선생의 공연 기록을 찾아내는 것을 보시고 새로운 가능성을 보셨던 것일까? 2018년 여름부터 나는 40개 이상의 일본 도시를 방문하면서 최승희 선생의 공연 기록을 발굴했다. 대개 단신이거나 홍보기사에 불과한 것도 많았지만 새로운 사실을 드러내 주는 중요한 기록들도 꽤 발견되었다.

 

작년(2020년) 3월 고베 취재할때, 정세화 선생(오른쪽)과 함께 신도 도시유키선생(가운데)을 만나뵙고 점심을 함께 하며 인사를 드린 바 있었다. 신도 선생은 아시는 것도 많고 유머감각이 뛰어나신데다가 인터넷 검색과 일본어 고문 해독에서 능하셔서 내 연구에도 큰 도움을 주셨다.

 

나는 그런 자료를 어렵사리 발굴해 놓고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형편없는 일본어 실력 때문이기도 했고, 80년 전의 일본어가 지금과 사뭇 달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애를 먹인 것은 불분명한 활자였다. 시간과 돈과 노력을 들여 복사해온 자료들 중에는 읽을 수 없을 만큼 글자들이 흐릿하거나 뭉개져 있는 것이 많았다.

 

그런 자료가 나타날 때마다 나는 실례를 무릅쓰고 신도 도시유키(真銅敏之) 선생께 읽어주시기를 부탁드렸다. 신도 선생은 정세화 선생의 절친이자 동료이고, 20203월 내가 고베를 방문했을 때 기카와니시(木川西)의 라멘 전문점 라이라이테이(来来亭)에서 점심을 하며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 쾌활하신 성품에 재밌는 농담도 잘하시는데, 놀랍게도 인터넷 검색도 잘하신다. 내가 무언가 궁금한 것을 질문 드리면 순식간에 답을 찾아 링크와 함께 보내주신다.

 

신도 선생은 일본어 고문(古文) 읽기에도 능하셨다. (1920-30년대의 일본어가 고문으로 분류되는지는 모르겠으나, 단어가 오늘날과 다른 것도 많고, 심지어 오늘날 볼 수 없는 철자들이 사용되기도 한다.) 신도 선생은 흐리거나 뭉개진 글자도 앞뒤의 맥락과 단어들 사이의 관련성을 참고해서 금방 판독해 주시곤 하셨다.

 

신도 선생께 부탁하는 일이 잦아지니까 죄송한 마음에 곤도 도미오 선생께도 부탁을 드리기 시작했고, 결국 두 분과 정세화 선생과 내가 참가하는 단체LINE방이 생긴 것을 계기로 두 분이 번갈아가며 내 질문에 대답해 주시곤 했다.

 

일본 각 도시에서 수집한 최승희 선생 공연관련 자료는 때로 읽기 어려운 글자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신도 선생과 곤도 선생은 앞뒤 맥락과 1920-30년대의 상황을 참고하여, 내가 도저히 읽어내지 못한 글자와 뜻을 모르는 단어들을 해독해 주시곤 했다.

 

언어도 서툴고 일본의 역사와 지리 개념도 부족한 내가 80년 전의 최승희 선생 일본 공연 자료를 찾아 해독해 나가는 모습이 엉뚱하게 보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내게는 그런 핸디캡을 메우기 위한 몇 가지 방법이 있기는 했지만, 그냥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라면 마치 내가 자료조사에 재능이 있는 것 같은 잘못된 인상을 주었을 수도 있다.

 

아무튼 이런 과정 중에 나는 자연스럽게 곤도 선생과 정세화 선생을 통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희생자들의 신원과 연고를 찾아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20209월 말경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난감했다. <강제동원>은 중요한 연구 주제지만 내게는 익숙하지 않은 분야였다. 게다가 추도비의 주인공들은 강제동원이 시작되기 전에 노동이민으로 일본에 오신 분들이고, 당시에는 관공서 기록이나 회사 기록도 매우 부실했던 시기였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새겨진 다섯 이름은 윤길문, 오이근,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였다. 나는 이들의 연고를 찾아나서기로 했다.

공사 중의 사고가 지역 신문에 보도되더라도 일회성 기사에 그치는 것이 다반사였기 때문에 관련자들의 인적사항을 파악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언론의 주목을 받던 인기예술가 최승희 선생과는 달리 매체나 기록보관소에서 문헌 자료를 찾기가 어려운 분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곤도 선생과 신도 선생, 정세화 선생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분들은 수십 년 동안 희생자분들을 조사하고, 기록하고, 제사해온 분들이었다. 그런 고마운 분들의 소원은 내게 중요하다. 어려울 것 같다는 이유로 노력까지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는 정세화 선생에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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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화 선생한테서 말씀만 전해 들어오던 곤도 도미오 선생과 처음 인사를 나눈 것은 20209월이었다. 라인(LINE)을 통해서 첫인사를 드렸다. 그 뒤로도 지금까지 곤도 선생을 직접 만나뵌 적이 없다. 코로나19 방역이 엄격해진데다 갑자기 발생한 한일 교역마찰의 여파로 한국인의 일본 여행이 자유롭지 못하게 된 까닭이다.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곤도 선생이 재일 조선인의 역사를 연구해 오신 것도 존경할 만한 일이지만, 내게는 그가 신의를 갖춘 인물로 특별히 각인되었다. 그가 스승처럼 따르던 정홍영 선생의 유지를 잊지 않으시고 뜻밖의 연락을 주신 만후쿠지 주지스님의 당부도 받아들여 오랜 준비 끝에 5인의 순직자를 위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세우신 것이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2020)>는 많은 일본인 시민들과 재일동포들의 뜻을 잊지 않은 곤도 도미오 선생의 오랜 노력 끝에 세워졌다.

곤도 선생에게 또 한 가지 감사한 것은 우리가 재일 조선학교에 <무용신 보내기 캠페인>을 벌일 때 가장 먼저 찬성하고 참여해 주신 일본인이셨기 때문이다. 정세화 선생의 친절한 설명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곤도 선생은 아마도 이 일이 당신이 오래 활동해 온 <다카라즈카 외국인시민문화교류협회>의 취지와도 부합된다고 이해해 주셨던 것 같다.

 

한국에서 <2차 무용신 보내기 캠페인>을 마치고 모아진 후원금으로 무용신이 준비되었을 때, 곤도 선생은 2020116일 직접 오사카에 가서 조선학교 무용부 학생들에게 손수 무용신을 전달해 주셨다. 그 자리에서 그는 학생들에게 격려의 말씀도 해 주셨는데, 그 격려사 원고를 내게도 보내 주셨다. 서두의 위트 있는 말씀도 재미있었고, 그날 관람하신 무용작품들에 대한 감상평도 좋았지만, 내게 감명 깊었던 것은 아래와 같은 말씀이었다.

 

나는 일본인으로서 이분들(=한국의 후원자들)에게 마음이 움직여서 한국과 미국 사람들에게도 호소하면서 힘을 모아 재일 조선학교 학생들에 대한 지원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2020년 11월6일, 곤도 도미오 선생은 오사카에서 열린 깅키지역 조선학생 무용경연대회장을 방문해 준비된 무용신을 학생들에게 전달했다.  

 

마음이 움직였다는 표현이 가슴에 박혔다. 재일 동포 학생들을 후원하는 일이야 한국 동포로서 마땅히 할 일이지만, 거기에 마음이 움직이셨다고 한다. 사실 나도 그랬다. 일본인 교육자로서 재일 조선인의 역사를 연구하고, 그들이 겪어온 편견과 차별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온 곤도 도미오 선생의 인품과 활동에 나 역시 마음이 움직였던 것이다.

 

그해 11월 중순에 일본에서 재일 조선학교 학생들을 지원하기 위한 시민단체를 결성한 것도 정세화 선생과 함께 곤도 도미오 선생이 앞장 서 주신 덕분이다. 한국에서 이인형 선생과 내가 <무용신> 후원회원을 모집해가는 동안 일본에서는 <팀아이>가 결성된 것이다. <무용신><팀아이>는 연락을 계속하면서 뜻을 모았고 필요한 사업에 적극 협력하기로 했다.

 

<팀아이>“'아이'들을 '사랑()'하고 '지켜보는(eye)' 이라는 뜻으로, 곤도 선생이 직접 지으신 이름이다. <팀아이> 회원들은 젊은이들이 각자 살아가는 터전에서 편견과 차별 없이, 자기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교육 환경을 만드는 일을 추진하기로 했다. 재일 조선학교 후원도 그런 대의에 부합되는 일이라고 판단되었던 것이다.

 

곤도 도미오 선생의 또 한가지 소원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기록된 5인의 순직자들의 한국내 연고를 찾는 일이다.

 

곤도 선생에게는 또 한 가지 소원이 있으셨다. 그것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기록된 조선인 희생자 다섯 사람의 연고를 찾는 것이었다. 정세화 선생은 곤도 선생이 그분들의 연고를 찾기 위해 한국을 두 차례 방문한 적도 있다는 말씀도 전해 주셨다.

 

곤도 선생의 <무쿠게통신(300)> 기고문을 읽어보면 그가 조선인 순직자들의 연고를 찾으려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정홍영 선생의 뜻이기도 했고, 또 타마세의 만후쿠지의 주지스님과 부녀회원들의 소원이기도 했던 것이다.

 

정홍영 선생이 아직 살아계시고 연구를 계속하셨다면 분명히 그 순직자들의 연고를 찾아 나섰을 것이다. 1백년 이상 무연고자 제사를 드려온 스님들과 부녀회원들의 바람도 마찬가지였다.

 

곤도 도미오 선생은 그분들의 소원을 실현해 드리고 싶으셨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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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영 선생은 198711, 고베시 니시노미아(西宮) 고요엔(甲陽園)地下壕에서 조선인 노동자가 쓴 벽서를 발견했다. 이 깊숙한 지하 땅굴 속 암벽에서 조선국 독립초록의 봄()이라고 쓴 문자를 발견한 것이다.

 

일본 전역에 산재한 지하호에서 그것을 건설한 조선인 노동자들의 벽서가 발견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마츠시로의 대본영 지하 땅굴 속에서 밀양대구’, ‘세배구운몽이라는 조선인 노동자의 벽서가 발견된 것도 그로부터 3년여가 지난 후였다.

 

마츠시로 지하호의 벽서는 그 뜻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이 있다는 점을 지적해 두어야 할 것같다. ‘밀양대구등은 그곳 출신자들이 고향을 그리며 쓴 문구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세배구운몽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마츠시로 대본영> 지하호에서 발견된 조선인 노동자들의 벽서.

 

그중 ‘1945년 새해를 맞아 부모님께 세배를 드리지 못하는 슬픔을 표시한 것이라는 설명과 김만중이 자기 어머니를 위해 썼다는 구운몽을 빗대어, 조선인 노동자가 어머니를 보고 싶어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는 설명도 나와 있다.

 

하지만 다른 설명도 있었다. 자세한 근거는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일본인 소설가이자 동화작가인 와다 노부로(和田登)씨는 이 벽서의 사진을 설명하면서 너희들도 군대의 파괴도 모두 끝이다(おまえらも軍隊もみんなおわりだ)”라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이 벽서가 과연 그렇게까지 해석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니시노미야 고요엔 지하호에서 발견된 조선인 노동자의 벽서에는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다. “조선국 독립(朝鮮國獨立)”이란 일제의 패전과 함께 갑자기 다가온 조선의 독립을 축하하는 뜻임에 틀림없다. “푸른 봄()”이라는 글도 해방과 함께 찾아온 새로운 희망을 비유한 것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마츠시로 대본영> 지하호의 조선인 노동자 벽서의 의미는 아직 완전히 해석되지 않은 상태이다. 소설가 와다 노보루는 이 벽서가 "너희들도 군대의 파괴도 모두 끝이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했으나, 이 해석이 유일한 해석인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벽서의 저자에 대해서는 결론을 내리기 아직 이르다. 조선인들한테는 조선국보다는 조선이라는 표현에 익숙하고, 녹의춘()’ 보다는 녹춘(綠春)’이라는 표현이 더 자연스럽다. ‘(이나 ()’를 삽입한 것은 일본어 표현에 가깝다. 따라서 이 벽서는 일본인이나 일본어에 능숙한 조선인이 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 역사적인 발견의 현장에는 정홍영 선생과 함께 놀라움과 기쁨을 나눈 3명의 동료가 있었다. 그의 동생 정지영(鄭志永), 그의 아들 정세화씨의 친구 신도 도시유키(真銅敏之), 그리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조선인 청년이었다. 정홍영 선생과 정지영 선생은 타계하셨고 조선인 청년은 행방을 알 수 없지만,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신도 도시유키 선생의 증언을 나는 뒤늦게나마 전해들을 수 있었다.

 

 

고베 니시노미아 고요엔 지하호에서 발견된 <조선국 독립>과 <푸른 봄>의 조선인 노동자 벽서.

그날, 우리 네 사람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서 지하호 현장으로 갔습니다. 정홍영 선생님은 종전 후에 공개된 미군 전략폭격 조사보고서를 조사하던 중, 니시노미야가 폭격의 대상이 된 것은 거기에 있던 가와니시 항공기회사의 지하 공장 때문임을 아셨습니다. 그 지하공장의 위치를 파악하신 후에 가까운 분들과 탐색대를 꾸리신 것이지요.

 

처음에는 정홍영 선생의 아들이자 내 친구인 정세화씨도 같이 가기로 했으나 뭔가 사정이 있어서 참석하지 못했고, 조선인 청년 한명이 짐을 운반해 줄 아르바이트로 따라 나섰습니다. 그날 카메라와 전등, 간이 발전기 등을 비롯해서 운반할 짐이 꽤 많았거든요.

 

지하호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갈래 길이 나왔어요. 한쪽은 천장과 벽이 시멘트로 발라진 다듬어진 길이었고, 다른 한쪽은 울퉁불퉁한 암벽이 드러난 거친 길이었지요. 우리는 두 패로 나뉘어 탐색에 나섰는데, 나는 정홍영 선생과 함께 거친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칠흑 같이 깜깜한 굴속에서 손전등으로 벽을 훑어보았을 때 나는 무언가 글씨 같은 것을 본 것 같았어요. 즉시 정홍영 선생님께 알리자 자세히 살펴보시고 조선인 노동자들의 글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급히 다른 두 사람을 불러서 이 대단한 발견을 알렸고, 다들 흥분해서 어쩔 줄을 몰랐어요. 흥분이 조금 가라앉자 우리는 내가 가져간 카메라의 플래시와 타이머를 이용해서 그 글씨를 배경으로 4명의 사진을 찍어서 기록을 남겼습니다.”

 

고요엔 지하호의 <조선국 독립> 벽서는 다카라즈카의 조선인 관계 연구자 정홍영 선생에 의해 발견됐다. 사진은 노무나가 마사요시 선생아 <무쿠게통신(115호, 1989년 7월30일)>에 기고한 정홍영 선생의 인터뷰 기사.

 

이 발견은 정홍영 선생의 발견으로 발표되었다. <효고조선관계연구회>의 노부나가 마사요시(信長正義) 선생은 <무쿠게통신(1989730, 115)>에 게재한 인터뷰 기사에서 니시노미야시 고요엔 터널 안에서 조선국 독립이라는 글자를 발견한 정홍영씨라는 표현을 썼다.

 

<무쿠게통신(2000130, 178)>에 실린 히다 유이치(飛田雄一) 선생의 글에도 정홍영 선생은 무엇보다도 <조선국 독립>이라는 문자가 남아있는 니시노미야시 코요엔의 지하벙커의 발견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고 밝혀져 있다.

 

<효고 안의 조선(兵庫のなかの朝鮮, 2001)>에 실린 서원수(徐元洙) 선생의 글에도 “‘조선국 독립’, ‘녹색의 봄이라는 문구가 남아 있는 고요엔 비밀 지하벙커는 지금은 작고한 고 정홍영 씨 등이 198711월에 발견한 것이라고 명시했다.

 

한국의 <세계한민족백과사전>에도 고요엔 지하호 유적은 효고조선관계연구회 회원인 정홍영(鄭鴻永)이 발견하여 세상에 알렸다. ... 특히 198711월에 정홍영이 발견한 4호 터널에는 조선국 독립’, ‘초록의 봄이라는 낙서가 남겨져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효고 안의 조선(2001)> 에 실린 기고문에서도 서원수 선생은 고요엔 지하호의 <조선국 독립> 벽서는 정홍영 선생의 발견이라고 밝혔다.

(이 백과사전이 고요엔 지하호 암벽의 문구를 낙서(落書)’라고 표현한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조선인이 조국의 독립을 축하하고, 새로운 희망을 표현한 글을 낙서라고 폄하할 수는 없겠기 때문이다. ‘낙서라는 말보다는 벽서(壁書)’라는 표현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 지하호의 벽서는 정홍영 선생이 단독으로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 4명의 일행이 있었고, 특히 신도 도시유키씨의 직접적인 도움이 있었던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신도 선생이 글자를 발견했고 탐색대장이셨던 정홍영 선생께서 즉석에서 그것을 해독하고 그 중요성을 알아보셨기 때문이다. 서원수 선생도 이 벽서의 발견자로 정홍영씨 등이라고 한 것을 보면 그도 역시 당시의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날 탐색대에 참가하지 못했던 정세화씨도 그 벽서 발견의 날을 회상하면서 지하호에서 돌아온 신도 도시유키씨가 나를 보자마자 조선국 독립이라는 문구를 발견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던 것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 뒤에도 신도씨는 그 벽서의 발견과정을 몇 번이고 세세하게 설명하곤 했기 때문에 나도 익히 알게 되었다고 전했다.

 

1945년 초에 착공된 고요엔 지하호는 겉으로는 미군의 공습에 대비한 일반시민의 방공호로 위장했지만, 실제로는 가와니시(川西) 항공기제작사의 전투기 시덴카이(紫電改)의 부품을 제작하는 비밀 지하공장이었다.

 

 

<조선국 독립>의 벽서가 발견된 니시노미야 고요엔 지하호 제4호의 끝부분.

땅굴은 1호부터 7호까지 7개를 파기로 계획되었으며, 강제 동원된 조선인 젊은이 5-6백명이 최악의 노동조건 속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사가 강행됐다. 그러나 카와니시사가 이 비밀공장에서 비행기 부품 생산을 시작하기도 전에 일본은 패망했다.

 

조선국 독립푸른 봄이라는 벽서는 아마도 일본제국 패망의 날, , 1945815, 일본 천황의 항복문 낭독이 방송된 직후에 광복의 기쁨과 귀향의 희망에 찬 조선인들이 지하호를 떠날 채비를 갖추면서 썼을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정홍영 선생은 곤도 도미오, 신도 도시유키 선생 등과 협력하면서 니시노미아의 고요엔에서 나가노의 마츠시로에 이르기까지, 조선인 노동자들의 고난이 있었던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연구주제로 삼았고, 조사한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하지만 이들이 연구의 심혈을 기울인 곳은 역시 그들이 터를 잡고 살았던 효고현 다카라즈카였다. 그것은 정홍영 선생의 저서 <가극의 도시의 또 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과 곤도 도미오 선생의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2020)>가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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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도 도미오 선생의 <무쿠게통신(300)> 기고문에는 그가 정홍영 선생과 함께 답사했던 사적지가 나열돼 있었다. 두 사람의 협력과 공동연구의 성격을 짐작해 보기 위해 그 사적지들을 조사해 보았다. 특히 마츠시로(松代) 대본영과 고요엔(甲陽園)의 지하호가 내 주목을 끌었다.

 

마츠시로 대본영은 나가노현 산간지역에 설치된 대규모 지하 벙커이다. 패색이 짙어진 일제 군부가 본토결전을 위해 일왕가족과 군 지휘부(죠잔象山), 정부 기관과 NHK 방송국(마이즈루산舞鶴山), 그리고 이들을 먹일 식량 창고(미나가미산皆神山)를 수용하려고 만든 땅굴이었다.

 

19441111일부터 산간 암반지역의 지하를 파들어 간 이 지하호는 폭 4미터, 높이 2.7미터, 총 연장 13킬로미터로 계획되었다. 대형 덤프트럭 2대가 마주 달릴 수 있는 크기였으며, 일본 패전으로 중단될 때까지 9개월간 거의 10킬로미터가 완공되어 75%의 진척율을 보였다.

 

태평양 전쟁 전 7.8킬로미터의 단나(丹那)터널 공사에 16(1918-1934)이 걸렸고, 전쟁 이후 약 14킬로미터의 호쿠리쿠(北陸)터널을 완공하는 데에 4년 반(1957-1962)이 걸렸던 것에 비교하면, 마츠시로의 지하호 공사가 얼마나 상식 밖의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는지 알 수 있다.

 

지하호의 규모와 공사 속도를 생각하면 이를 건설한 노동자들이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는지 짐작하기도 어렵지 않다. 기록과 증언에 따르면 마츠시로 지하호 공사에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는 6-7천여 명, 그중 2천명은 조선에서 강제 동원되었다. 공사에 동원된 일본인 노동자가 15-3천 명이었다고 하니, 마츠시로 지하호는 조선인에 의해 건설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위험도가 높은 암반 굴착공사는 거의 조선인이 담당했으므로 사상자가 자주 발생했는데, 증언에 따르면 조선인 사망자는 적어도 3백 명, 많게는 1천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산되었다.

 

피해는 지하호 건설 중의 사망자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마츠시로 지하호 완공에 필요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 군부는 오키나와 결사항전을 명령했고, 수백차례의 미군 공습을 감내했고, 결국 2발의 원자폭탄을 맞아야 했다.

 

 

194539일 자정부터 5시간동안 계속된 도쿄대공습의 민간인 사망자는 최소 10만명(최대 19만명)으로 추산되었는데, 그중 적어도 1만 명이 조선인이었다. 194541일부터 83일간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에서도 일본군 11만명, 민간인 12만명이 사망했고, 강제 동원된 조선인 군인, 군속, 노무자, 정신대원 중에서도 1만 명이 사망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사망자는 각각 166천명과 8만명으로 추산되었는데, 이중 조선인 사망자가 1만 명 이상이었다.

 

요컨대 마츠시로 지하호를 건설하느라 강제동원한 조선인 노동자 중에서 1천명의 사망자가 나온 것도 끔찍한 일이지만, 그 대본영 완공의 시간을 벌기 위해 3만여 명의 재일 조선인을 포함해 40만 이상의 일본인 민간인이 희생되었던 것이다.

희생은 사망자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증언에 따르면 조선인 노동자들은 상시적인 과로와 영양실조에 시달렸다고 한다. 하루 12시간의 장시간 노동과 배고픔을 못 이겨 도망하다가 사살되거나 잡혀서 고문당한 사례도 보고되었다. 동굴 벽에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고향을 그리며 쓴 대구밀양,” 부모님을 생각하며 쓴 구운몽세배라는 문구들이 발견되었다.

 

패전과 함께 일제 군부가 기록을 소각하고 입구를 폐쇄했기 때문에 마츠시로 대본영의 존재는 오랫동안 잊혔다가, 이 지하호가 보호하려던 쇼와 천황(1901-1989)이 사망한 직후인 1990년에야 부분 개방되었다. 일제 군부와 정부가 천황제 존속과 그의 체면 유지를 위해 쏟는 노력은 일반 상식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는 지금도 노동자의 희생을 축소하거나 부정한다. 나가노시가 지하호 입구에 세운 안내문은 이 땅굴이 강제 동원된 일본인과 조선인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서술하면서도 모두 강제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등 여러 견해가 있다는 변명을 덧붙여 놓았다.

 

곤도 도미오 선생은 기고문에서 마츠시로 대본영에 대해서도 정홍영 선생에게서 배웠고, 그곳에는 중학교의 수학여행으로 학생들을 데리고 2번이나 함께 갔다.”고 서술했다. 곤도 선생께 수학여행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시기를 요청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첫 번째 수학여행은 19895월이었습니다. 당시 다카라즈카 시립중학교 3학년생들의 수학여행이었지요. 518일부터 5일간의 일정이었는데, 그중에서 마츠시로 대본영 지하호 방문은 520일이었습니다. 참가 학생은 3학년 6개 반이었으니까 약 2-240명이었을 것입니다.

 

곤도 도미오 선생과 함께 <마츠시로 대본영 지하호>에 수학여행을 갔던 학생들이, 이 전쟁 사적지의 '보존운동'에 적극 잠여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그 수학여행의 사전답사를 위해 서너 명의 동료 교원들과 함께 한 달쯤 전인 44일에 마츠시로 대본영을 방문했습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그 지하호에 들어가 본 것입니다. 터널 안에서는 눈을 뜨고 있어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습니다. 그래서 손전등을 들고도 서로 길을 잃기 않기 위해서 기다란 줄을 잡고 다녀야 했습니다.

 

두 번째 수학여행은 19925월이었는데, 이때는 나가노시가 지하호를 정비하고 관리하기 시작한 직후였습니다. 지하호의 내부에 전등이 가설되어 관람하기는 편리해졌지만 제한구역이 설치되어서 관람할 수 있는 범위가 극히 한정되었습니다. 손전등을 준비하거나 줄을 잡고 다닐 필요는 없었지만 지하호를 방문한 의미나 감회가 줄어들었던 것 같습니다.”

 

곤도 선생이 대본영 지하호 건설과정에서 벌어진 노동자들의 참혹상을 제대로 인식한 것은 1994년 정홍영 선생과 함께 마츠시로에서 열린 <5회 조선인 중국인 강제연행 강제노동을 생각하는 전국교류집회>에 참가했을 때였을 것이다.

 

곤도 도미오 선생이 사진으로 보내주신 <제5회 조선인 중국인의 강제연행 강제노동을 생각하는 전국교류집회(1994년 7월)>의 안내 브로셔.

 

이 전국교류집회는 이미 1990년 아이치현의 나고야(1, 825-26), 1991년 효고현의 니시노미야와 고베(727-28), 1992년 히로시마현의 구레(725-26), 1993년 나라현의 시기산 교쿠조인(信貴山玉蔵院, 731-81) 등에서 열린 바 있었다. 이는 일본 전역의 뜻있는 역사연구자들이 모여서 일제 식민지 시절과 태평양 전쟁 시기에 재일 조선인과 중국인들이 겪어야 했던 강제연행과 강제노동에 관한 조사연구를 발표하는 연례행사였다.

 

이 전국교류집회는 전쟁범죄와 반인권행위를 부정하거나 은폐하려는 일본 정부를 반박하는 데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예컨대 1993년의 제3회 나라현 집회에서는 이른바 <후생성 명부>를 공개해 일본정부로서도 강제연행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일본 역사 교과서에 강제연행과 위안부에 관한 기술을 포함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마츠시로에서 열렸던 제5회 집회에서도 다수의 조선인 노동자를 혹사하고 본토결전의 최후의 보루로 만들어진 마츠시로 대본영은 실로 일본이 감행한 강제연행, 강제노동의 상징적 존재라고 규정하고, “사실을 부정하여온 일본 정부도 시민들에 의하여 밝혀진 사실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선언했다.

 

 

마츠시로 대본영 지하호 입구에는 이 터널 공사에 강제 동원되었다가 작업 혹은 수용생활 중에 사망한 조선인 노동자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마츠시로의 전국교류집회 이후에도 오사카부 다카츠키(高槻), 기후현 기후(岐阜), 시마네현 마츠에(松江), 이시카와현 카나자와(金沢) 등지에서 연례모임이 계속되었으나, 1999년 큐슈의 구마모토(熊本)에서 열린 제10회 집회를 마지막으로 연례집회는 종료되었다. 이후에는 각 지역 연구자들이 다른 연구자들을 초청해 그 지역의 연구를 보고하는 집회를 이어가고 있다.

 

<효고현 조선사연구회>의 히다 유이치(飛田雄一) 선생은 <무쿠게통신(178)>에 실은 기고문에서 정홍영 선생이 <조선인, 중국인 강제연행, 강제노동을 생각하는 전국교류집회>의 제안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밝혔다.

 

전국교류집회의 주창자 정홍영 선생과 함께 모든 집회에 빠짐없이 참가했던 곤도 선생은 조선인 강제연행과 강제노동의 실상을 가장 사실적으로 인식한 일본 지식인의 한사람이었다. 그같은 인식은 결국 자신의 고장 다카라즈카와 효고현에서 벌어졌던 유사한 일에 대해 자세히 연구하고 기록하는 일에 매진하게 했을 것이다.

 

곤도 선생이 주도한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건립도 정홍영 선생과 함께 다듬은 역사 인식과 시민단체 활동의 구체적인 결과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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