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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asahi.com/articles/ASP5N6KWMP5NPTIL00R.html

 

大阪市立木川南小学校・久保校長の「提言」全文:朝日新聞デジタル

 大阪市淀川区の市立木川南小学校(児童数140人)の久保敬校長が、市の教育行政への「提言書」を松井一郎市長(57)に実名で送った。全文は以下の通り(原文ママ)。     ◇

www.asahi.com

 

<아사히신문>이 쿠보 다카시 교장이 마츠이 이치로 오사카 시장에게 보낸 서한 <교육행정에 대한 제언>의 전문을 보도했습니다. 이제 논쟁이 본격화될 전망인 것 같습니다. 

(기사 번역)
오사카시립 키가와미나미 초등학교·쿠보 교장의 「제언」전문
2021년 5월 20일 21시 30분

 오사카시 요도가와구의 시립 키가와미나미 초등학교(아동수 140명)의 쿠보 타카시 교장이, 시의 교육 행정에의 「제언서」를 마츠이 이치로 시장(57)에게 실명으로 보냈다.전문은 다음과 같다(원문 마마).

"학교는 혼란스러웠다" 현직 교장 실명으로 오사카시장 비판
     ◇

오사카시장 마츠이 이치로님

오사카시 교육 행정에 대한 제언

풍요로운 학교문화를 되찾고 서로 배우는 학교를 만들기 위해

 우리 자녀들이 풍요로운 미래를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 공교육은 어떠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학교는 글로벌 경제를 지탱하는 인재라는 상품을 만들어내는 공장으로 변하고 있다.이 곳에서는, 아이들은, 테스트의 점에 의해서 선별되는 「경쟁」에 노출된다.그리고, 교직원은, 아이의 성장과 관계되는 교육의 본질에 기인한 일을 하지 못하고, 기쁨이 없는 무엇 때문인지 모르는 일에 쫓겨 피폐해져 간다.심지어는 보람과 사명감을 잃고 일할 의욕마저 잃어가고 있다.

 지금, 가치의 전환을 도모하지 않으면, 교육의 세계에 미래는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지속가능한 학교를 만들기 위해 정말 중요한 일만 할 필요가 있다.특별한 사업은 필요없다.학교의 규모나 상황에 따라 균등하게 예산과 사람을 분배하면 된다.특별한 일을 그만두면 평가를 위한 평가나 효과 검증을 위한 보고서나 설문도 필요 없게 될 것이다.전국 학력학습 상황 조사도, 학력 경년 조사도 그 결과를 분석한 방대한 자료가 필요 없다.각각의 아이들이 스스로 「배움」으로 향하기 위해서 어떠한 지원을 하면 좋은지는, 매일, 함께 학습하고 있으면 아는 이야기다.

 현재의 운영에 관한 계획도, 학교협의회도 절차적인 일에 시간과 노력이 들 뿐 학교 교육을 더 낫게 해 나가는 데 큰 효과를 보지는 못한다.지역 및 학부모와 함께 교육을 해나가는 더 좋은 형태가 있을 것이다.목표관리 시트에 의한 인사평가제도 교직원의 사기를 북돋우고 교육을 활성화하는 것으로는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

 또 코로나 화재로 인해 앞당겨진 GIGA 스쿨 구상에 따른 1인 1대 단말기 배치도 통신환경 정비 등 충분한 준비 없이 임기응변적인 계획으로 진행되고 있어 학교 현장에서는 앞으로의 진전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다.3차 비상사태 선포에 따라 오사카 시장이 모든 초중학교에서 온라인 수업을 하겠다고 나서면서 그 허술한 상황이 노출됐지만 그 결과 학교 현장은 혼란스럽고 무엇보다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다.결국, 아이의 안전·안심도 배울 권리도 어느 쪽도 보장되지 않는 상황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에, 가슴을 쥐어뜯기는 느낌이다.

 즉, 정말로 아이의 행복한 성장을 바라고, 아이의 인권을 존중해 「최선의 이익」을 생각한 사회가 아닌 것이, 코로나 화가 되어 명확하게 가시화되어 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사회의 과제의 영향이, 자꾸만 아이나 학교에 덮치고 있다.학대도 등교도 따돌림도 늘어만 간다.10대 자살도 늘어 코로나 화의 현재 중고교생 여성의 자살은 급증하고 있다.이토록 자식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우리 어른들은 그 일에 진지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된다.세계화로 급변하는 예측하기 힘든 사회를 살아나갈 힘을 길러야 한다는데 그런 사회 자체가 잘못된 것 아닌가.과도한 경쟁을 억지로 이겨낸 사람만이 열심히 사는 사람으로 평가받는 그런 불합리한 사회라야 되겠는가.누구나 행복하게 살 권리를 갖고 있고 사회는 자유롭고 공정하고 공평해야 한다.

 먹고 사는 세상이 아니라 서로 사는 세상이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이런 코로나 화에도, 지구온난화에도 대응할 수 없을 게 틀림없다.세계인이 연대해 이 전지구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힘은 학력경년조사의 평균점수를 1점 올리는 것과는 무관하다.전시 공통목표가 얼마나 허무하고 우리 교육의 열정을 시들게 할 것인지 상상해 주기 바란다.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고 노는 시간을 즐기고 싶다.아이들과 직접 관련된 일을 하고 싶은 것이다.아이들에게 작용한 결과는, 수치에 의한 효과 검증등이 아니고, 아이의 반응으로서 직접 피부로 느끼고 싶다.1점·2점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5년 후, 10년 후를 응시하고, 지금이라는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은 것이다.테스트 점수라는 증거는 그렇게도 올바른가.

 모든 것을 수치화해 평가함으로써, 사람과 사람과의 신뢰나 신용을 갈기갈기 찢어, 따뜻한 연결을 빼앗았을 뿐 아닌가.

 틀림없이, 교직원, 학교는 피폐해 있고, 교육의 질은 저하되고 있다.아무도 그런걸 바라진 않을거야.누구나가 열심히 일해서, 남에게 도움이 되고, 행복한 인생을 보내고 싶어 한다.그 당연한 소망을 키워 자아실현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 나가는 것이 학교여야 한다.

 경쟁이 아닌 협동 사회가 아니면 지속가능한 사회가 될 수 없다.

 코로나화의 지금, 정말로 아이들의 안심·안전과 배움을 어떻게 보장해 나갈지는, 어려운 문제다.온라인 학습 등 ICT 기기를 사용한 학습도 교육의 수단으로서는 유효한 것일 것이다.그러나 그것이 아이의 생명(인권)이 밝지 않다면 결국 아이들을 더 몰아붙이고 괴롭히지 않을까.이번 온라인 수업과 관련한 현장의 혼란은 성인 사정에 의한 제멋대로의 판단에 의한 것이다.

 근본적인 교육의 기본방향, 아니 정치나 사회의 모습을 재검토해, 아이들의 미래에 밝은 빛을 찾아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이는 어린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어른의 문제이며, 정치적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겐 그 큰 책임이 지워져 있는 게 아닐까.

레이와3(2021) 년 5월 17일

오사카시립 키가와미나미 초등학교 

교 나가쿠보 타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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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원문)

大阪市立木川南小学校・久保校長の「提言」全文
2021年5月20日 21時30分

 大阪市淀川区の市立木川南小学校(児童数140人)の久保敬校長が、市の教育行政への「提言書」を松井一郎市長(57)に実名で送った。全文は以下の通り(原文ママ)。

「学校は混乱極めた」 現職校長、実名で大阪市長を批判
     ◇

大阪市長 松井一郎 様

大阪市教育行政への提言

豊かな学校文化を取り戻し、学び合う学校にするために

 子どもたちが豊かな未来を幸せに生きていくために、公教育はどうあるべきか真剣に考える時が来ている。

 学校は、グローバル経済を支える人材という「商品」を作り出す工場と化している。そこでは、子どもたちは、テストの点によって選別される「競争」に晒(さら)される。そして、教職員は、子どもの成長にかかわる教育の本質に根ざした働きができず、喜びのない何のためかわからないような仕事に追われ、疲弊していく。さらには、やりがいや使命感を奪われ、働くことへの意欲さえ失いつつある。

 今、価値の転換を図らなければ、教育の世界に未来はないのではないかとの思いが胸をよぎる。持続可能な学校にするために、本当に大切なことだけを行う必要がある。特別な事業は要らない。学校の規模や状況に応じて均等に予算と人を分配すればよい。特別なことをやめれば、評価のための評価や、効果検証のための報告書やアンケートも必要なくなるはずだ。全国学力・学習状況調査も学力経年調査もその結果を分析した膨大な資料も要らない。それぞれの子どもたちが自ら「学び」に向かうためにどのような支援をすればいいかは、毎日、一緒に学習していればわかる話である。

 現在の「運営に関する計画」も、学校協議会も手続き的なことに時間と労力がかかるばかりで、学校教育をよりよくしていくために、大きな効果をもたらすものではない。地域や保護者と共に教育を進めていくもっとよりよい形があるはずだ。目標管理シートによる人事評価制度も、教職員のやる気を喚起し、教育を活性化するものとしては機能していない。

 また、コロナ禍により前倒しになったGIGAスクール構想に伴う一人一台端末の配備についても、通信環境の整備等十分に練られることないまま場当たり的な計画で進められており、学校現場では今後の進展に危惧していた。3回目の緊急事態宣言発出に伴って、大阪市長が全小中学校でオンライン授業を行うとしたことを発端に、そのお粗末な状況が露呈したわけだが、その結果、学校現場は混乱を極め、何より保護者や児童生徒に大きな負担がかかっている。結局、子どもの安全・安心も学ぶ権利もどちらも保障されない状況をつくり出していることに、胸をかきむしられる思いである。

 つまり、本当に子どもの幸せな成長を願って、子どもの人権を尊重し「最善の利益」を考えた社会ではないことが、コロナ禍になってはっきりと可視化されてきたと言え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社会の課題のしわ寄せが、どんどん子どもや学校に襲いかかっている。虐待も不登校もいじめも増えるばかりである。10代の自殺も増えており、コロナ禍の現在、中高生の女子の自殺は急増している。これほどまでに、子どもたちを生き辛(づら)くさせているものは、何であるのか。私たち大人は、そのことに真剣に向き合わなければならない。グローバル化により激変する予測困難な社会を生き抜く力をつけなければならないと言うが、そんな社会自体が間違っているのではないのか。過度な競争を強いて、競争に打ち勝った者だけが「がんばった人間」として評価される、そんな理不尽な社会であっていいのか。誰もが幸せに生きる権利を持っており、社会は自由で公正・公平でなければならないはずだ。

 「生き抜く」世の中ではなく、「生き合う」世の中でなくてはならない。そうでなければ、このコロナ禍にも、地球温暖化にも対応することができないにちがいない。世界の人々が連帯して、この地球規模の危機を乗り越えるために必要な力は、学力経年調査の平均点を1点あげることとは無関係である。全市共通目標が、いかに虚(むな)しく、わたしたちの教育への情熱を萎(な)えさせるものか、想像していただきたい。

 子どもたちと一緒に学んだり、遊んだりする時間を楽しみたい。子どもたちに直接かかわる仕事がしたいのだ。子どもたちに働きかけた結果は、数値による効果検証などではなく、子どもの反応として、直接肌で感じたいのだ。1点・2点を追い求めるのではなく、子どもたちの5年先、10年先を見据えて、今という時間を共に過ごしたいのだ。テストの点数というエビデンスはそれほど正しいものなのか。

 あらゆるものを数値化して評価することで、人と人との信頼や信用をズタズタにし、温かなつながりを奪っただけではないのか。

 間違いなく、教職員、学校は疲弊しているし、教育の質は低下している。誰もそんなことを望んではいないはずだ。誰もが一生懸命働き、人の役に立って、幸せな人生を送りたいと願っている。その当たり前の願いを育み、自己実現できるよう支援していくのが学校でなければならない。

 「競争」ではなく「協働」の社会でなければ、持続可能な社会にはならない。

 コロナ禍の今、本当に子どもたちの安心・安全と学びをどのように保障していくかは、難しい問題である。オンライン学習などICT機器を使った学習も教育の手段としては有効なものであるだろう。しかし、それが子どもの「いのち」(人権)に光が当たっていなければ、結局は子どもたちをさらに追い詰め、苦しめることにな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今回のオンライン授業に関する現場の混乱は、大人の都合による勝手な判断によるものである。

 根本的な教育の在り方、いや政治や社会の在り方を見直し、子どもたちの未来に明るい光を見出したいと切に願うものである。これは、子どもの問題ではなく、まさしく大人の問題であり、政治的権力を持つ立場にある人にはその大きな責任が課せられてい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

令和3(2021)年5月17日

大阪市立木川南小学校 

校 長 久保 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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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yahoo.co.jp/articles/e17e8419469b59f5902461447fd1a5f8d18f60a2

 

松井一郎市長 オンライン学習めぐり批判書面送付の校長に「社会人として外に出たことある

 大阪市の松井一郎市長(57)が20日、緊急事態宣言下で市が独自に取り組んだオンライン授業に関し、大阪市立木川南小の久保敬校長(59)から送付された書面について言及した。

news.yahoo.co.jp

쿠보 다카시 교장선생의 비판에 마츠이 이치로 오사카 시장이 처음으로 응수했습니다. 그는 쿠보 교장을 '사회인으로서 (학교의)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사람'에 불과하며 '조직원의 한사람으로서 룰을 지키지 않고 일탈'을 저지른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논쟁이 시작될 것 같은 분위기인데, 아직은 향방을 가늠하기 어려운 듯 합니다.

 

(기사번역)

 

마츠이 이치로 시장 온라인 학습을 둘러싸고 비판 서면 송부의 교장에게 「사회인으로서 밖에 나간 적이 있을까」
5/20 (목) 16:35 전달
히가시스포Web
마쓰이 이치로 오사카시장

 오사카시의 마츠이 이치로 시장(57)이 20일, 긴급사태 선언하에서 시가 독자적으로 임한 온라인 수업에 관해, 오사카시립 키가와미나미초등학교의 쿠보 타카시 교장(59)으로부터 송부된 서면에 대해 언급했다.

 쿠보 교장은 18일, 단말기의 배치나 통신 환경의 정비가 불충분한 채 온라인 수업을 도입해, 현장을 혼란시켰다는 등이라고 하는 서면을 마츠이씨 앞으로 송부했다.

 인터넷상에서 내용을 읽었다고 하는 마츠이씨는 「교장의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 있겠지만, 나와는 조금 다르다」라고 한 다음, 「지금 시대, 아이들은 대단한 속도감으로 경쟁 사회 속을 살아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사고방식의 차이지만 의무교육 기간 동안 전 세계 또래에서 살기 위한 기초 부분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지론을 밝혔다.

 온라인 수업에 관해서는 통신면등에서 문제가 있어, 많은 학교에서 형식상, 태블릿이 준비되었을 뿐 수업으로서 전혀 기능하지 않았다.

 서면에서는 「일회적인 계획으로 학교는 혼란을 극도로 시작해 아동, 학생이나 보호자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다.아이의 안전·안심도 배울 권리도 보장되지 않는다」라고 하고 있지만, 마츠이씨는 「그 교장의 생각은 그럴 것이다.우리는 아이의 생명을 지키는 것을 최우선으로서 온라인을 활용했다」라고 반론.

 그는 세상 좋은 사람들만 있고, 더 경쟁하기보다 모두가 모든 사람을 허용하고, 그런 사회 속에서 아이가 살아갈 수 있다면 그건 이상. 교장인데 현장을 모르고 있다.사회인으로서 밖에 나갔던 적은 있을까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쿠보 교장을 비판했다.

 서면에서는 교직원, 학교의 피폐도 지적되고 있지만, 마츠이씨는 「피폐하고 보람이 찾아내지 못하면, 다른 일을 찾아냈으면 좋겠다」라고 딱.

 교직원이 시장에게 의견하는 것을 「표현의 자유,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된다」라고 이야기했지만, 처분에 이를 가능성에 대해서는 「내게는 인사권은 없다.처분 같은 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어.단지, 조직내이므로 룰이 있다.룰 대로 현장을 진행시켜 나가는 것이 사회인으로서 당연한 행동.개인 의견을 말하는 건 상관없지만 우리에겐 교육진흥기본계획이 있다.그에 따른 형태로 운영되지 않으면 조직의 일원으로서 일탈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토쿄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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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원문)

松井一郎市長 オンライン学習めぐり批判書面送付の校長に「社会人として外に出たことあるんかな」
5/20(木) 16:35配信
東スポWeb
松井一郎大阪市長

 大阪市の松井一郎市長(57)が20日、緊急事態宣言下で市が独自に取り組んだオンライン授業に関し、大阪市立木川南小の久保敬校長(59)から送付された書面について言及した。

 久保校長は18日、端末の配備や通信環境の整備が不十分なままオンライン授業を導入し、現場を混乱させたなどとする書面を松井氏宛てに送付した。

 ネット上で内容を読んだという松井氏は「校長の考えというのは一つあるんでしょうけど、僕とは少し違う」とした上で、「今の時代、子供たちはすごいスピード感で競争社会の中を生き抜いていかないといけない。考え方の違いだけど、義務教育の間に世界中の同年代の中で生きるための基礎部分を培うことは大事だと思う」と持論を述べた。

 オンライン授業に関しては通信面などで問題があり、多くの学校で形式上、タブレットが用意されただけで授業として全く機能しなかった。

 書面では「場当たり的な計画で学校は混乱を極め、児童、生徒や保護者に大きな負担がかかっている。子供の安全・安心も学ぶ権利も保証されない」としているが、松井氏は「その校長の考え方はそうなんだろう。我々は子供の命を守るのを最優先として、オンラインを活用した」と反論。

 その上で「世の中いい人ばかりで、もっと競争するよりもみんながすべての人を許容して、そういう社会の中で子供が生きていければそれは理想。校長だけど現場が分かってない。社会人として外に出たことはあるんかなと思いますね」と久保校長を批判した。

 書面では教職員、学校の疲弊も指摘されているが、松井氏は「疲弊してやりがいが見つけらないんやったら、違う仕事を見つけたらいい」とバッサリ。

 教職員が市長に意見することを「表現の自由、言いたいことを言えばいい」と話したが、処分に至る可能性については「僕には人事権はない。処分とかはまったく考えていない。ただ、組織の中なのでルールがある。ルール通りに現場を進めていくのが社会人として当然の行動。個人の意見を言うのは構わないが、我々には教育振興基本計画がある。それに沿った形で運営してもらわないと、組織の一員として逸脱していることになる」と語った。

東京スポー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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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히신문의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오사카시립 키가와미나미 초등학교의 쿠보 다카시 교장

 

https://news.yahoo.co.jp/articles/fb11429d3463b5af3cf97ca88ae613e16f775b4f

 

「学校は混乱極めた」 現職校長、実名で大阪市長を批判(朝日新聞デジタル) - Yahoo!ニュー

 大阪市立小学校の校長が、市の教育行政への「提言書」を松井一郎市長(57)に実名で送った。今回の緊急事態宣言中、市立小中学校の学習を「自宅オンラインが基本」と決めた判断につ

news.yahoo.co.jp

드디어 쿠보 다카시 선생의 문제 제기가 미디어를 통해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5월20일의 <아사히신문>이 쿠보 선생을 인터뷰해 보도했습니다. <쿄도통신>의 최초 보도에 비하면 많이 상세해 졌는데, 아직 코로나 대책 문제에 집중하고 있긴 하지만, 처음으로 "전국 학력 조사나 교원 평가 제도등에 대해서도 아이들이 과도한 경쟁에 노출되어 교사는 피폐해지고 있다고 호소했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사번역)
"학교는 혼란스러웠다" 현직 교장 실명으로 오사카시장 비판
5/20(목) 21:30 
아사히 신문 디지털


오사카시의 마츠이 이치로 시장에게 「제언」을 보낸 시립 키가와미나미 초등학교의 쿠보 타카시 교장. 취재중에는 마스크를 쓰고, 기자와의 사이에 칸막이를 놓았다=2021년 5월 18일, 오사카시 요도가와구 기카와히가시 1가, 미야자키 료 촬영

 오사카시립 초등학교의 교장이, 시의 교육 행정에의 「제언서」를 마츠이 이치로 시장(57)에게 실명으로 보냈다. 이번 긴급사태 선언중, 시립 초중학교의 학습을 「자택 온라인이 기본」이라고 결정한 판단에 대해 「학교 현장은 혼란을 지극히 했다」라고 호소하는 내용. 전국 학력 조사나 교원 평가 제도등에 대해서도 아이들이 과도한 경쟁에 노출되어 교사는 피폐해지고 있다고 호소했다. 마쓰이 시장은 20일 보도진에게 아이들의 목숨을 지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코로나 대응 수단으로 온라인을 활용했다고 반박했다.(미야자키 료, 가토 아즈사)

【사진】기자단의 질문에 응하는 오사카시의 마츠이 이치로 시장=2021년 5월 20일 오후 0시 3분, 오사카시, 소에다 이츠키 촬영


 현직 교장이 실명으로 시장을 비판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제언서의 필자는 오사카시 요도가와구의 시립 키카와미나미 초등학교(아동수 140명)의 쿠보 타카시 교장(59).17일 아침, 마츠이 시장 앞으로 봉서로 우송해, 야마모토 신지·시 교육장에게도 같은 내용을 보냈다.

 제언은, 온라인 학습을 기본으로 한 마츠이 시장의 판단을 「아이의 안전·안심도, 배울 권리도, 어느쪽도 보장되지 않는 상황을 만들어 내고 있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쿠보 교장 자신은 SNS에 투고하고 있지 않지만, 내용을 들은 지인이 본인의 허가를 얻어 투고해, 퍼지고 있다.

 마츠이 시장이 이 판단을 보도진에 표명한 것은 부내에서 신형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자가 증가하고 있던 4월 19일. 이에 따라 시교육위원회는 시립초에서는 3교시 또는 4교시부터 급식까지를 「등교 시간」으로 결정했다. 가정의 요청이 있을 경우 이외의 시간도 학생을 교내에 맡길 것을 요구했다. 이번 달 17일, 마츠이 시장은 선언하에서 아이가 중증화한 예가 없다고 하고, 24일에 통상 수업을 재개한다고 발표했다.

 반면 초중학교 현장은 온라인 학습 대응과 학생마다 다른 등교시간을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보호자에게도 불안이 퍼지고 있었다. 쿠보 교장의 제언은 「통신 환경의 정비등 충분히 단련되는 일(이) 없이 임기응변적인 계획으로 진행되어」 「보호자나 아동 학생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다」라고 썼다.

아사히 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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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원문)

 

「学校は混乱極めた」 現職校長、実名で大阪市長を批判
5/20(木) 21:30配信
朝日新聞デジタル


大阪市の松井一郎市長に「提言」を送った市立木川南小学校の久保敬校長。取材中はマスクをし、記者との間についたてを置いた=2021年5月18日、大阪市淀川区木川東1丁目、宮崎亮撮影

 大阪市立小学校の校長が、市の教育行政への「提言書」を松井一郎市長(57)に実名で送った。今回の緊急事態宣言中、市立小中学校の学習を「自宅オンラインが基本」と決めた判断について「学校現場は混乱を極めた」と訴える内容。全国学力調査や教員評価制度などにも触れ、子どもが過度な競争に晒(さら)され教師は疲弊していると訴えた。松井市長は20日、報道陣に「子どもの命を守ることを最優先にコロナ対応の手段としてオンラインを活用した」と反論した。(宮崎亮、加藤あず佐)

【写真】記者団の質問に応じる大阪市の松井一郎市長=2021年5月20日午後0時3分、大阪市、添田樹紀撮影


 現職の校長が実名で市長を批判するのは異例だ。提言書の筆者は大阪市淀川区の市立木川南(きかわみなみ)小学校(児童数140人)の久保敬(たかし)校長(59)。17日朝、松井市長宛てに封書で郵送し、山本晋次・市教育長にも同じ内容を送った。

 提言は、オンライン学習を基本とした松井市長の判断を「子どもの安全・安心も学ぶ権利もどちらも保障されない状況をつくり出している」と批判している。久保校長自身はSNSに投稿していないが、内容を聞いた知人が本人の許可を得て投稿し、広がっている。

 松井市長がこの判断を報道陣に表明したのは、府内で新型コロナウイルスの感染者が増えていた4月19日。これを受け市教育委員会は市立小では3限または4限から給食までを「登校時間」と決めた。家庭の要望がある場合、それ以外の時間も児童生徒を校内で預かることも求めた。今月17日、松井市長は宣言下で子どもが重症化した例がないとして、24日に通常授業を再開すると発表した。

 一方で小中学校の現場は、オンライン学習への対応や児童ごとに異なる登校時間の把握に追われた。保護者にも不安が広がっていた。久保校長の提言は「通信環境の整備など十分に練られること(が)ないまま場当たり的な計画で進められ」「保護者や児童生徒に大きな負担がかかっている」と書いた。

朝日新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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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오사카시의 학교행정 문제로 오사카 시장을 비판하고 나섰던 쿠보 다카시(久保敬) 교장이 2021년 5월20일자 <마이니치신문(도쿄판)>에 기고한 글이다.

 

 
[번역문]

ICT교육의 논의가 불충분하다

소학교 교장 쿠보 다카시(久保敬)


지난해 전국 일제 휴교로 정보통신기술(ICT) 교육을 추진하는 국가의 GIGA 스쿨 구상이 충분한 논의 없이 진행되는 느낌이다. 구상에서는, 전체 초,중학생이 PC등의 단말기를 1명 1대 사용해 배울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문부 과학성은 하드면의 준비는 거의 끝났기 때문에, 다음은 학교 현장에서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가 문제라고 한다.

7 일석간신문의 「ICT 교육 바꾼다」(오사카 본사판)는 기사는, 학원과 학교의 현상이나 과제를 다루고 있었다. 다만 학원과 학교는 다르고, 초등학교 1학년과 중학교 3학년은 학습 상황 등이 많이 다르다. 아이의 생활을 리얼하게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 발달단계에 따른 배움과 성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ICT 교육에 무작정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아이의 성장이란? 누구나가 행복하게 살기 위한 「학력」이란? 이런 근본적인 것을 따지지 않고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언론은 현장의 다양한 상황을 꼼꼼히 취재해 복합적인 시각에서 사회에 묻는 역할을 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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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ICT敎育論議不十分

小學校長 久保敬


昨年の全国一斉休校を受け、情報通信技術(ICT)教育を推進する国の「GIGAスクール構想」が、十分な議論のないまま進んでいる気がしてならない。構想では、全小中学生がパソコンなどの端末を1人1台使って学べる。文部科学省はハード面の準備はほぼ終わり、後は学校現場でどう活用するかだという。

7日夕刊「ICT教育変える」(大阪本社版)は、学習塾と学校の現状や課題を取り上げていた。ただ、塾と学校は違うし、小学1年生と中学3年生では学習状況などが相当異なる。子どもの生活をリアルに想像し、考えてほしい。発達段階に応じた「学び」や「成長」があるからだ。

私はICT教育にやみくもに反対しているわけではない。子どもの成長とは?誰もが幸せに生きるための「学力」とは?根本的なことを問い直すことなしに進めてはいけないと思う。メディアは現場の多様な状況を丁寧に取材し、複合的な視点で社会に問う役割を果たしてほしい。

 

https://mainichi.jp/articles/20210520/ddm/005/070/007000c

 

みんなの広場:ICT教育、議論不十分=小学校長・久保敬・59 | 毎日新聞

 (大阪府吹田市)  昨年の全国一斉休校を受け、情報通信技術(ICT)教育を推進する国の「GIGAスクール構想」が、十分な議論のないまま進んでいる気がしてならない。構想では

mainichi.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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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a.city-osaka.ed.jp/swas/index.php?id=e641402&frame=kocho 

 

校長あいさつ

校長あいさつ  平成30年4月1日付で、登佐博行校長の後任として、木川南小学校に赴任して参りました久保 敬(くぼ たかし)です。どうぞよろしくお願いいたします。  学校のすぐ南側

swa.city-osaka.ed.jp

키가와미나미 초등학교 홈페이지에 실린 쿠보 다카시 교장 선생의 취임사네요.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헤세이30년(=2018년) 4월1일자로, 토사 히로유키 교장의 후임으로서 키가와미나미 초등학교에 부임해 온 쿠보 타카시입니다.잘 부탁드립니다.

"학교 바로 남쪽에는 요도가와 강이 흐르고, 커다란 녹나무가 교정에 가지를 뻗고, 평온한 학교 주변의 풍취를 기분 좋게 느끼고 있습니다.

"밝고 솔직한 아이들입니다. 평소 보호자 여러분, 지역의 여러분의 애정을 충분히 받고, 안심하고 학습에 임하거나 놀거나 할 수 있기 때문임에 틀림없습니다.

"지금부터 이 키가와미나미 초등학교에서, 아이들, 교직원과 함께, 그리고, 보호자나 지역의 분들과 함께, 학교 교육 활동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급훈 "강한 몸 부드러운 마음"
"학교 교육 목표  「마음 풍요롭고 씩씩하며,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아이를 기른다」를 제대로 가슴에 새겨, 동료와 함께 성장하는 아이들의 웃는 얼굴이 넘치는 학교로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의 개성이 빛나, 장래의 꿈을 길러 갈 수 있도록, 앞으로도 본교 교육 활동에의 이해와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다음은 취임사 원문입니다.

 平成30年4月1日付で、登佐博行校長の後任として、木川南小学校に赴任して参りました久保 敬(くぼ たかし)です。どうぞよろしくお願いいたします。


 学校のすぐ南側には淀川が流れ、大きなクスノキが校庭に枝を伸ばし、穏やかな学校周辺の佇まいを心地よく感じています。


 明るく素直な子どもたち。常日頃から、保護者の皆様、地域の皆様の愛情をたっぷりと受けて、安心して学習に取り組んだり、遊んだりできているからにちがいありません。


 これからこの木川南小学校で、子どもたち、教職員とともに、そして、保護者や地域の方々と一緒に、学校教育活動をつくり出していけることを大変うれしく思います。

  校訓  「つよい体 やさしい心」
  学校教育目標  「心豊かでたくましく、自ら考え行動する子どもを育てる」
をしっかりと胸に刻み、仲間とともにのびゆく子どもたちの笑顔があふれる学校にしていきたいと考えております。


 一人一人の個性が輝き、将来の夢を育んでいくことができますよう、今後とも本校教育活動へのご理解とお支援のほどをよろしくお願いいた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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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tokyo-np.co.jp/article/105075

 

小学校長が大阪市長に批判書面 オンライン学習で現場混乱と:東京新聞 TOKYO Web

新型コロナウイルス緊急事態宣言に伴い、大阪市が小中学校で「原則実施」を求めたオンライン学習に関し、大阪市立木川南小の久保敬校長(59)...

www.tokyo-np.co.jp

<도쿄신문>이 받아쓴 <교도통신(共同通信)>의 기사 번역입니다.

 

"신형 코로나 바이러스 긴급사태 선언에 대해, 오사카시가 초,중학교에 「원칙 실시」를 요구한 온라인 학습에 관해, 오사카시립 키가와미나미(木川南)초등학교의 쿠보 타카시(久保敬) 교장(59)은 18일, 단말의 배치나 통신 환경의 정비가 불충분한 채 도입해 현장을 혼란시켰다고 비판하는 서한을, 마츠이 이치로(松井一郎) 시장 앞으로 송부했다고 밝혔다.

 

"이 서한에서는 「일방적인 계획으로 학교 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워 학생이나 보호자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아이의 안전·안심도 배울 권리도 보장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

 

"키가와미나미 초등학교에서는 대면 수업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쿠보 교장은 보호자 대상의 앙케이트에서는 감염 대책을 철저히 한 후의 대면 수업을 하는 방안에 긍정적인 의견이 많았다고 주장했다."


아래는 기사 원문입니다.


"新型コロナウイルス緊急事態宣言に伴い、大阪市が小中学校で「原則実施」を求めたオンライン学習に関し、大阪市立木川南小の久保敬校長(59)は18日、端末の配備や通信環境の整備が不十分なまま導入し現場を混乱させたと批判する書面を、松井一郎市長宛てに送付したと明らかにした。  

"書面では「場当たり的な計画で学校現場は混乱を極め、児童、生徒や保護者に大きな負担がかかっている。子どもの安全・安心も学ぶ権利も保障されない」としている。  

"木川南小では対面授業を続けているという。久保校長は保護者アンケートでは感染対策を徹底した上での対面授業に肯定的な意見が多かったと主張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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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jp.reuters.com/article/idJP2021051801003143

 

小学校長が大阪市長に批判書面

 新型コロナウイルス緊急事態宣言に伴い、大阪市が小中学校で「原則実施」を求めたオンライン学習に関し、大阪市立木川南小の久保敬校長(59)は18日、端末の配備や通信環境の整

jp.reuters.com

<로이터통신>이 받아쓴 <교도통신(共同通信)>의 기사 번역입니다.

 

"신형 코로나 바이러스 긴급사태 선언에 대해, 오사카시가 초,중학교에 「원칙 실시」를 요구한 온라인 학습에 관해, 오사카시립 키가와미나미(木川南)초등학교의 쿠보 타카시(久保敬) 교장(59)은 18일, 단말의 배치나 통신 환경의 정비가 불충분한 채 도입해 현장을 혼란시켰다고 비판하는 서한을, 마츠이 이치로(松井一郎) 시장 앞으로 송부했다고 밝혔다.

 

"이 서한에서는 「일방적인 계획으로 학교 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워 학생이나 보호자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아이의 안전·안심도 배울 권리도 보장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

 

"키가와미나미 초등학교에서는 대면 수업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쿠보 교장은 보호자 대상의 앙케이트에서는 감염 대책을 철저히 한 후의 대면 수업을 하는 방안에 긍정적인 의견이 많았다고 주장했다."


아래는 기사 원문입니다.


"新型コロナウイルス緊急事態宣言に伴い、大阪市が小中学校で「原則実施」を求めたオンライン学習に関し、大阪市立木川南小の久保敬校長(59)は18日、端末の配備や通信環境の整備が不十分なまま導入し現場を混乱させたと批判する書面を、松井一郎市長宛てに送付したと明らかにした。  

"書面では「場当たり的な計画で学校現場は混乱を極め、児童、生徒や保護者に大きな負担がかかっている。子どもの安全・安心も学ぶ権利も保障されない」としている。  

"木川南小では対面授業を続けているという。久保校長は保護者アンケートでは感染対策を徹底した上での対面授業に肯定的な意見が多かったと主張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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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yahoo.co.jp/articles/0a02728a512af57721ab28ab434595528a82e515

 

小学校長が大阪市長に批判書面 オンライン学習で現場混乱と(共同通信) - Yahoo!ニュース

 新型コロナウイルス緊急事態宣言に伴い、大阪市が小中学校で「原則実施」を求めたオンライン学習に関し、大阪市立木川南小の久保敬校長(59)は18日、端末の配備や通信環境の整備が不

news.yahoo.co.jp

<일본 야후>에 게재된 <교도통신(共同通信)>의 기사 번역입니다.

"신형 코로나 바이러스 긴급사태 선언에 대해, 오사카시가 초,중학교에 「원칙 실시」를 요구한 온라인 학습에 관해, 오사카시립 키가와미나미(木川南)초등학교의 쿠보 타카시(久保敬) 교장(59)은 18일, 단말의 배치나 통신 환경의 정비가 불충분한 채 도입해 현장을 혼란시켰다고 비판하는 서한을, 마츠이 이치로(松井一郎) 시장 앞으로 송부했다고 밝혔다.

 

"이 서한에서는 「일방적인 계획으로 학교 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워 학생이나 보호자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아이의 안전·안심도 배울 권리도 보장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

 

"키가와미나미 초등학교에서는 대면 수업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쿠보 교장은 보호자 대상의 앙케이트에서는 감염 대책을 철저히 한 후의 대면 수업을 하는 방안에 긍정적인 의견이 많았다고 주장했다."


아래는 기사 원문입니다.


"新型コロナウイルス緊急事態宣言に伴い、大阪市が小中学校で「原則実施」を求めたオンライン学習に関し、大阪市立木川南小の久保敬校長(59)は18日、端末の配備や通信環境の整備が不十分なまま導入し現場を混乱させたと批判する書面を、松井一郎市長宛てに送付したと明らかにした。  

"書面では「場当たり的な計画で学校現場は混乱を極め、児童、生徒や保護者に大きな負担がかかっている。子どもの安全・安心も学ぶ権利も保障されない」としている。  

"木川南小では対面授業を続けているという。久保校長は保護者アンケートでは感染対策を徹底した上での対面授業に肯定的な意見が多かったと主張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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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17일, 일본 오사카시립 키가와미나미 초등학교의 쿠보 타카시(久保敬) 교장은 지금 오사카시의 교육행정이 일부 정치세력에 의해 장악되어 학교가 "인재라는 상품을 찍어내는 공장"으로 변했고, 아이들이 "시험점수에 따라 선별되는 경쟁에 노출"되어 있으며, 교사들도 "교육의 본질에 관한 일을 하지 못하고 ... 보람과 사명감을 잃고 일할 의욕마저 잃어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쿠보 교장은 오사카시의 마츠이 이치로 시장에게 <오사카시 교육행정에 대한 제언>이라는 제목의 공개서한에서 이렇게 말하고, 앞으로 대대적인 교육개혁을 요구하면서, 일반 시민들에게도 연대 서명으로 동참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쿠보 시장의 문제지적은 일본 교육계에서도 오래 비판받아온 문제였을 뿐 아니라, <재일조선학교>의 공개적이고 제도적인 차별도 이러한 교육정책에서 나온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에대해 일본 시민과 재일동포들의 모임인 <팀아이>도 쿠보 타카시 교장의 문제제기에 공감하면서 향후 이 운동을 오사카시뿐 아니라 일본 전역으로 확대시켜, 왜곡된 교육정책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하면서, 한국의 <팀아이>와 <무용신> 후원자분들에게도 서명운동에 동참해 주실 것을 요청해 왔습니다.

 

서명 방법은 간단합니다. 이 포스팅의 댓글난에 이름만 남겨 주시면 됩니다. 간단하게 의견을 남겨 주셔도 좋습니다. 여러분의 서명과 지지선언이 <재일 조선학교>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고, 일본 학생들의 교육 정상화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팀아이> 회원 일동

아래는 쿠보 다카시 교장의 공개서한 전문의 원문과 번역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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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 오사카시장 마츠이 이치로님
[제목] 오사카시 교육 행정에 대한 제언
[목적] 풍요로운 학교문화를 되찾고 서로 배우는 학교를 만들기 위해

 우리 자녀들이 풍요로운 미래를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 공교육은 어떠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학교는 글로벌 경제를 지탱하는 인재라는 상품을 만들어내는 공장으로 변하고 있다.그러면 아이들은 시험점에 따라 선별되는 경쟁에 노출된다.그리고, 교직원은, 아이의 성장과 관계되는 교육의 본질에 기인한 일을 하지 못하고, 기쁨이 없는 무엇 때문인지 모르는 일에 쫓겨 피폐해져 간다.심지어는 보람과 사명감을 잃고 일할 의욕마저 잃어가고 있다.

 지금, 가치의 전환을 도모하지 않으면, 교육의 세계에 미래는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속가능한 학교를 만들기 위해 정말 중요한 일만 할 필요가 있다.특별한 사업은 필요없다.학교의 규모나 상황에 따라 균등하게 예산과 사람을 분배하면 된다.특별한 일을 그만두면 평가를 위한 평가나 효과 검증을 위한 보고서나 설문도 필요 없게 될 것이다.전국 학력학습 상황 조사도, 학력 경년 조사도 그 결과를 분석한 방대한 자료가 필요 없다.각각의 아이들이 스스로 「배움」으로 향하기 위해서 어떠한 지원을 하면 좋은지는, 매일, 함께 학습하고 있으면 아는 이야기다.

 현재의 운영에 관한 계획도, 학교협의회도 절차적인 일에 시간과 노력이 들 뿐 학교 교육을 더 낫게 해 나가는 데 큰 효과를 보지는 못한다.지역 및 학부모와 함께 교육을 해나가는 더 좋은 형태가 있을 것이다.목표관리 시트에 의한 인사평가제도 교직원의 사기를 북돋우고 교육을 활성화하는 것으로는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

 또 코로나 화재로 인해 앞당겨진 GIGA 스쿨 구상에 따른 1인 1대 단말기 배치도 통신환경 정비 등 충분한 준비 없이 임기응변적인 계획으로 진행되고 있어 학교 현장에서는 앞으로의 진전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다.3차 비상사태 선포에 따라 오사카 시장이 모든 초중학교에서 온라인 수업을 하겠다고 나서면서 그 허술한 상황이 노출됐지만 그 결과 학교 현장은 혼란스럽고 무엇보다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다.결국, 아이의 안전·안심도 배울 권리도 어느 쪽도 보장되지 않는 상황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에, 가슴을 쥐어뜯기는 느낌이다.

 즉, 정말로 아이의 행복한 성장을 바라고, 아이의 인권을 존중해 「최선의 이익」을 생각한 사회가 아닌 것이, 코로나 화가 되어 명확하게 가시화되어 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사회의 과제의 영향이, 자꾸만 아이나 학교에 덮치고 있다.학대도 등교도 따돌림도 늘어만 간다.10대 자살도 늘어 코로나 화의 현재 중고교생 여성의 자살은 급증하고 있다.이토록 아이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우리 어른들은 그 일에 진지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된다.세계화로 급변하는 예측하기 힘든 사회를 살아나갈 힘을 길러야 한다는데 그런 사회 자체가 잘못된 것 아닌가.과도한 경쟁을 억지로 이겨낸 사람만이 열심히 사는 사람으로 평가받는 그런 불합리한 사회라야 되겠는가.누구나 행복하게 살 권리를 갖고 있고 사회는 자유롭고 공정하고 공평해야 한다.

 먹고 사는 세상이 아니라 서로 사는 세상이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이런 코로나 화에도, 지구온난화에도 대응할 수 없을 게 틀림없다.세계인이 연대해 이 전지구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힘은 학력경년조사의 평균점수를 1점 올리는 것과는 무관하다.전시 공통목표가 얼마나 허망하고 우리 교육의 열정을 시들게 하는 것인지 상상해보기 바란다.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고 노는 시간을 즐기고 싶다.아이들과 직접 관련된 일을 하고 싶은 것이다.아이들에게 작용한 결과는, 수치에 의한 효과 검증등이 아니고, 아이의 반응으로서 직접 피부로 느끼고 싶다.1점·2점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5년 후, 10년 후를 응시하고, 지금이라는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은 것이다.테스트 점수라는 증거는 그렇게도 올바른가.

 모든 것을 수치화해 평가함으로써, 사람과 사람과의 신뢰나 신용을 갈기갈기 찢어, 따뜻한 연결을 빼앗았을 뿐 아닌가.

 틀림없이, 교직원, 학교는 피폐해 있고, 교육의 질은 저하되고 있다.아무도 그런걸 바라진 않을거야.누구나가 열심히 일해서, 남에게 도움이 되고, 행복한 인생을 보내고 싶어 한다.그 당연한 소망을 키워 자아실현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 나가는 것이 학교여야 한다.

 경쟁이 아닌 협동 사회가 아니면 지속가능한 사회가 될 수 없다.

 코로나화의 지금, 정말로 아이들의 안심·안전과 배움을 어떻게 보장해 나갈지는, 어려운 문제다.온라인 학습 등 ICT 기기를 사용한 학습도 교육의 수단으로서는 유효한 것일 것이다.그러나 그것이 아이의 생명(인권)이 밝지 않다면 결국 아이들을 더 몰아붙이고 괴롭히지 않을까.이번 온라인 수업과 관련한 현장의 혼란은 성인 사정에 의한 제멋대로의 판단에 의한 것이다.

 근본적인 교육의 기본방향, 아니 정치나 사회의 모습을 재검토해, 아이들의 미래에 밝은 빛을 찾아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이는 어린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어른의 문제이며, 정치적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겐 그 큰 책임이 지워져 있는 게 아닐까.

레이와3(2021) 년 5월 17일
오사카시립 키가와미나미 초등학교 
교 나가쿠보 타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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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要望書全文>
[제목] 大阪市教育行政への提言
[수신] 大阪市長 松井一郎 様
[제목] 豊かな学校文化を取り戻し、学び合う学校にするために

 子どもたちが豊かな未来を幸せに生きていくために、公教育はどうあるべきか真剣に考える時が来ている。

 学校は、グローバル経済を支える人材という「商品」を作り出す工場と化している。そこでは、子どもたちは、テストの点によって選別される「競争」に晒される。そして、教職員は、子どもの成長にかかわる教育の本質に根ざした働きができず、喜びのない何のためかわからないような仕事に追われ、疲弊していく。さらには、やりがいや使命感を奪われ、働くことへの意欲さえ失いつつある。

 今、価値の転換を図らなければ、教育の世界に未来はないのではないかとの思いが胸をよぎる。

 持続可能な学校にするために、本当に大切なことだけを行う必要がある。特別な事業は要らない。学校の規模や状況に応じて均等に予算と人を分配すればよい。特別なことをやめれば、評価のための評価や、効果検証のための報告書やアンケートも必要なくなるはずだ。全国学力・学習状況調査も学力経年調査もその結果を分析した膨大な資料も要らない。それぞれの子どもたちが自ら「学び」に向かうためにどのような支援をすればいいかは、毎日、一緒に学習していればわかる話である。

 現在の「運営に関する計画」も、学校協議会も手続き的なことに時間と労力がかかるばかりで、学校教育をよりよくしていくために、大きな効果をもたらすものではない。地域や保護者と共に教育を進めていくもっとよりよい形があるはずだ。目標管理シートによる人事評価制度も、教職員のやる気を喚起し、教育を活性化するものとしては機能していない。

 また、コロナ禍により前倒しになったGIGAスクール構想に伴う一人一台端末の配備についても、通信環境の整備等十分に練られることないまま場当たり的な計画で進められており、学校現場では今後の進展に危惧していた。3回目の緊急事態宣言発出に伴って、大阪市長が全小中学校でオンライン授業を行うとしたことを発端に、そのお粗末な状況が露呈したわけだが、その結果、学校現場は混乱を極め、何より保護者や児童生徒に大きな負担がかかっている。結局、子どもの安全・安心も学ぶ権利もどちらも保障されない状況をつくり出していることに、胸をかきむしられる思いである。

 つまり、本当に子どもの幸せな成長を願って、子どもの人権を尊重し「最善の利益」を考えた社会ではないことが、コロナ禍になってはっきりと可視化されてきたと言え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社会の課題のしわ寄せが、どんどん子どもや学校に襲いかかっている。虐待も不登校もいじめも増えるばかりである。10代の自殺も増えており、コロナ禍の現在、中高生の女子の自殺は急増している。これほどまでに、子どもたちを生き辛くさせているものは、何であるのか。私たち大人は、そのことに真剣に向き合わなければならない。グローバル化により激変する予測困難な社会を生き抜く力をつけなければならないと言うが、そんな社会自体が間違っているのではないのか。過度な競争を強いて、競争に打ち勝った者だけが「がんばった人間」として評価される、そんな理不尽な社会であっていいのか。誰もが幸せに生きる権利を持っており、社会は自由で公正・公平でなければならないはずだ。

 「生き抜く」世の中ではなく、「生き合う」世の中でなくてはならない。そうでなければ、このコロナ禍にも、地球温暖化にも対応することができないにちがいない。世界の人々が連帯して、この地球規模の危機を乗り越えるために必要な力は、学力経年調査の平均点を1点あげることとは無関係である。全市共通目標が、いかに虚しく、わたしたちの教育への情熱を萎えさせるものか、想像していただきたい。

 子どもたちと一緒に学んだり、遊んだりする時間を楽しみたい。子どもたちに直接かかわる仕事がしたいのだ。子どもたちに働きかけた結果は、数値による効果検証などではなく、子どもの反応として、直接肌で感じたいのだ。1点・2点を追い求めるのではなく、子どもたちの5年先、10年先を見据えて、今という時間を共に過ごしたいのだ。テストの点数というエビデンスはそれほど正しいものなのか。

 あらゆるものを数値化して評価することで、人と人との信頼や信用をズタズタにし、温かなつながりを奪っただけではないのか。

 間違いなく、教職員、学校は疲弊しているし、教育の質は低下している。誰もそんなことを望んではいないはずだ。誰もが一生懸命働き、人の役に立って、幸せな人生を送りたいと願っている。その当たり前の願いを育み、自己実現できるよう支援していくのが学校でなければならない。

 「競争」ではなく「協働」の社会でなければ、持続可能な社会にはならない。

 コロナ禍の今、本当に子どもたちの安心・安全と学びをどのように保障していくかは、難しい問題である。オンライン学習などICT機器を使った学習も教育の手段としては有効なものであるだろう。しかし、それが子どもの「いのち」(人権)に光が当たっていなければ、結局は子どもたちをさらに追い詰め、苦しめることにな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今回のオンライン授業に関する現場の混乱は、大人の都合による勝手な判断によるものである。

 根本的な教育の在り方、いや政治や社会の在り方を見直し、子どもたちの未来に明るい光を見出したいと切に願うものである。これは、子どもの問題ではなく、まさしく大人の問題であり、政治的権力を持つ立場にある人にはその大きな責任が課せられてい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

令和3(2021)年5月17日
大阪市立木川南小学校 
校長 久保 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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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살플레옐 공연의 마지막 작품은 <서울의 무녀(Sorcière de Séoul)>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무녀춤> 혹은 <무당춤>이다. 작품 해설에는 한국의 무녀는 때로는 웃음으로 때로는 눈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유혹한다. 때로는 승려를 유혹하기도 한다. 무녀의 아름다움이 인생의 지혜보다 더 강하다는 설명도 덧붙여져 있다.

 

 

<무당춤>, 서울의 무녀(Sorcière de Séoul)

 

무교는 한국의 역사시대 이전부터 민간에 뿌리박은 신앙으로, 불교와 유교와 기독교 등의 외래종교가 전래된 이후에도 강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무속신앙의 제사장인 무당도 그만큼 연원이 오래고 민간의 생활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무당이 민간과 만나는 행사가 굿이며 굿을 통해 신적 존재와 인간을 이어주는 무당의 움직임이 이다.

무당춤은 무당의 역할을 기준으로 강신무와 세습무로 나뉜다. 신내림을 받은 무당이 신령의 역할을 하면 강신무이고, 신령과 인간을 잇는 제사장 역할을 하면 세습무이다. 프로그램의 해설에 따르면 최승희의 <무당춤>은 세습무로 분류될 것이다.

 

무당춤은 지역에 따라서도 구별된다. 강원도의 강릉굿과 삼척굿, 경상도의 부산굿과 영덕굿과 통영굿, 전라도의 진도굿 등이 널리 알려져 있으며 각작 독특한 특징을 갖는다.

 

프로그램의 제목이 서울의 무당이기 때문에, 최승희의 <무당춤>은 서울식 굿춤이다. 서울굿은 무복이 아름답고 춤도 우아하며 차분한 편이다. 무당은 쾌자를 입고 깃을 꽂은 높은 관이나 절립을 쓰고 한 손에 방울, 다른 손에 삼불제석(三佛祭釋)을 그린 부채를 드는 것이 보통이지만, 때로는 삼치장이나 장검, 혹은 길고 붉은 수건을 사용하기도 한다. 타악기 중심의 음악이 보통이나 리듬악기를 쓰기도 한다. 도드리, 굿거리, 타령 등의 빠른 리듬을 사용한다.

 

<무당춤>, 서울의 무녀(Sorcière de Séoul)

 

<신한민보(1938210)>도 로스엔젤레스 이젤 극장 공연에서 발표된 <무당춤>에 대해 통 높은 갓에다 구슬끈을 다라쓰고 전포를 입고 부채를 들고 방울을 흔들며 점을 치는 춤이라고 묘사하고, “부채를 폈다 접었다 방울을 흔들며 분주히 돌아가는 것이 대체로 보아 이것도 활기 있는 춤이라고 설명했다.

 

무당굿이 예술무용으로 전화된 것은 근대의 일이며 이는 최승희의 <무당춤>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무당춤이 초연된 것은 1936922일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렸던 제3회 발표회였으나, 무당춤의 연구는 1929년 무용유학을 마치고 경성으로 돌아왔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19333월 다시 도쿄로 돌아갈 때까지 최승희는 한반도 곳곳의 무당과 기생들을 찾아다니면서 춤사위를 배웠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후 <무당춤>은 최승희 공연의 주요 레퍼토리였다.

 

서울 무당춤에서 방울 대신 또 하나의 부채를 들면 <부채춤>이 되고, 부채 대신 방울만 사용하면 <쟁강춤>이 된다. 또 붉은 수건만 들고 악령을 쫓는 춤을 추면 <수건춤>이 된다.

 

따라서 무당춤은 오늘날 예술무용으로 정착된 각종 전통무용의 원류이자, 다양한 발전을 위한 소재로 작용해 왔음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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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그 다음 작품은 <칼춤> 혹은 <검무>이다. 프로그램은 이 작품을 전사의 기사정신은 조금씩 사그러들었지만 최승희의 춤이 위축된 정신을 불러 일으켜 활발하게 고양시킨다고 설명하고 있다.

 

<검무(1934)><에헤야 노아라(1933)>, <승무(1934)>와 함께 최승희가 창작한 초기 조선무용 작품이다. 칼춤은 신라시대 황창의 영웅적인 행위를 칭송하기 위한 목적의 빠르고 힘있는 무용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주로 기생들에 의해 주안석에서 연희되는 방식으로 계승되는 바람에 빠르고 힘찬 원형은 잦아들고 칼의 교묘한 움직임을 위주로 하는 섬세한 춤으로 변했다고 한다. 최승희는 이를 다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여 장쾌하고 쾌활한 춤으로 재창작했다는 것이다.

 

<검무> (Danse de l'Epée)


이는 최승희가 조선 전통무용의 고증을 위한 자세한 리서치를 추진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 강준식(2012, 118-120)은 최승희가 19335<레이조카이>가 주최한 여류무용대회에서 발표한 <에헤야 노아라>가 폭발적인 성공을 거둔 데에 힘입어 새로운 조선무용을 창작하기 위해 심형을 기울였다고 서술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 고전문헌에 대한 리서치가 필요했는데, 그같은 고증 작업에는 남편 안막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고 서술했다.

 

강준식이 그 한 가지 예로 든 것이 바로 <칼춤>이었다. 안막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경상도 정주부 인물조에 기록된 신라시대 황창(黃昌)의 고사를 찾아냈고, 거기에서 <칼춤>의 모티브를 찾아냈다. 황창의 칼춤이 백제 저잣거리에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결국 백제왕을 살해하기에 이르렀을 정도로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것이었다고 해도, 실제로 그것이 어떤 모양으로 연기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에 안막은 다시 정약용의 시선집에 실린 <무검편증미인> 부분에서 칼춤에 대한 기록을 찾아 주었다.

 

안막이 정약용의 칼춤을 번역해서 읽어주었을 때 최승희는 그 시가 주는 감동만 가지고도 혼자서 칼춤을 출 수 있었다고 한다. 북한의 <문학신문(1961620)>에 실린 <무용과 문학>이라는 기고문에서 최승희는 이렇게 썼다. “이 시는 그 동작묘사에서 얼마나 선명하고 생동한가? 이 시를 읽으면 칼춤을 모르는 사람도 칼춤을 만들 수 있고 칼춤을 출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정약용의 <칼춤>에도 섬세함과 부드러움이 주조를 이루고 있어서, 황창 검무의 장엄하고 용맹스러움을 복원시키려면 또 다른 영감이 필요했다. 이에 안막은 이덕무와 박제가가 정조의 명을 받아 집필한 <무예도보통지><무예도>를 찾아왔다. 여기에는 무기를 다루는 동작을 비유법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용이 바다에서 뛰어오르는 기세라거나 붉은 봉새가 날개를 펼치는 기세혹은 엎드린 호랑이의 기세로 일격을 가하는 형세등의 서술이 그것이었다. 이러한 기록은 실제 동작을 서술한 것이라기 보다는 비유법을 주로 사용한 것이지만, 최승희는 이런 비유적 서술을 통해 오히려 더 생생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 최승희의 검무는 직선적이고 폭이 큰 춤사위와 발산적인 힘의 분출, 사지의 예리한 뻗침과 탁탁 끊기는 춤사회가 두드러졌으며 검무라고 해서 이렇게 칼을 가지고 무사 비슷하게 갑옷 같은 것을 입고 장화에 뿔같은 모자를 둘러쓰고 샷샷샷하고 춤추던 모습으로 완성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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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제목이 <옥중 슌코의 고통(Détresse de Shunko dans la prison)>이라고 번역된 이 작품의 원제목은 <옥중춘향> 혹은 <춘향애사>이다. 프로그램의 해설에는 춘향의 이름이 슌코(春子)’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표기됐다. 춘향이 유럽에서 춘자(春子)’가 되어 버린 셈인데, 그래도 작품 해설에서는 봄 향기(parfum de printemps)’라고 제대로 뜻풀이가 되어 있다.

 

살플레옐 프로그램은 춘향은 젊고 매력적인 한국의 기생으로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소설의 여주인공이라고 소개하면서 작품의 내용을 이렇게 해설했다. “춘향은 부패한 사또의 사랑을 받지만 이를 거부한다. 이미 젊은 학동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또는 춘향이를 박해하고 투옥한다. 봄 향기와도 같은 젊음과 아름다움은 감옥에 갇혀 고통 받는다.”

 

<옥중춘향>, 옥중 슌코의 고난(Détresse de Shunko dans la prison), 이 작품의 사진은 발견된 것이 없고, 작품구상에 사용된 스케치가 남아 있다. 

 

<옥중춘향>은 유럽 공연 이전에 발표된 기록이 없으므로 살플레옐 공연이 초연이다. 강준웅은 최승희가 반년 이상 뉴욕에 체재하면서 새로운 작품을 구상했다고 서술한 바 있고, 정병호(1995:151)도 최승희가 파리에 도착한 후 자그마한 스튜디오를 빌려 ...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기 시작했다고 서술했다. 이런 기록으로 미루어 <옥중춘향>은 뉴욕이나 파리에서 창작된 것으로 보인다.

 

최승희는 어째서 세계 순회공연을 떠나기 전에는 미리 준비하지 않았던 춘향전 이야기를 갑자기, 그것도 외국에서 안무할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193811월호 <삼천리>에 실린 최승희의 기고문 <춘향전의 향기>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 글에서 최승희는 신협 극단이 도선(渡鮮) 공연의 각본에 <춘향전>을 택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면서 춘향역은 어느 분이 하십니까하며 배역에까지 관심을 보였다. 조사해 보니 최승희가 궁금해 하던 춘향의 역은 일본인 배우 아카고메 란코(赤米蘭子)가 맡았다.

 

신협(新協)이란 <신극협회(新劇協會)>를 가리키며 도쿄에서 활동하는 일본극단이다. 신협의 <춘향전> 극본은 장혁주(張赫宙, 1905-1998)가 맡았다. 대구 출신의 소설가 장혁주는 1938<춘향전>을 일본어로 번역했는데, 원문대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일본식 ()’의 희곡 형식으로 편역했다. 이 작품을 신협의 무라야마 토모요시(村山知義)가 연출을 맡아 도쿄와 오사카와 교토에서 공연한 것인데 일본인 관객의 호평을 받았다.

 

<춘향전>의 일본 공연이 성공한 것에 힘입어 조선 공연도 결정되었는데 그 흥행을 최승일이 맡았다. 최승희는 신협의 <춘향전>이 오빠의 주도 아래 조선에서 공연된다는 소식을 듣고 축하 겸 격려의 편지를 보냈고, 최승일은 이 편지를 <삼천리>에 공개한 것인데, 아마도 최승일은 동생의 인기를 빌어 흥행에 보탬이 되게 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 달 후의 <삼천리(19391월호)>는 최승일이 최승희 무용회의 성공 경험을 믿고 (춘향전의) 공연계약을 체결했으나 결국 4천원의 손해를 보았다고 전했다. 당시의 4천원은 오늘날의 약 1억원(임금 기준) 정도이다.

 

1949년 12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아 부인대회에 출품된 무용극 <춘향전>에 출연한 최승희(오른쪽)

 

최승희의 편지는 최승일의 <춘향전> 흥행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최승희 자신은 이를 계기로 뉴욕 혹은 파리에서 <옥중춘향>을 새로 안무했던 것 같다. 이 작품은 살플레옐 극장에서 초연된 이후 브뤼셀과 뒤스부르크, 암스텔담과 헤이그 등에서도 공연되었지만, 언론에는 <옥중춘향>의 언급이 별로 없었고 해설이나 평론기사도 없었다. 유럽인들에게 그다지 인상적인 작품으로 비쳐지지 않았다는 말이겠다.

 

최승희가 셰계 순회공연을 마치고 도쿄로 돌아온 후에도 <옥중춘향>다시 공연한 기록이 거의 없었다. 귀조 후 2년이 지난 194212월의 공연에서 한 번 더 공연된 것이 유일하다. 이 작품이 때로 <춘향애사>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해방 전까지 최승희에 의해 다시 공연된 적이 없었다. 최승희 자신도 이 작품에 그다지 애착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옥중춘향>은 해방 후에야 무용극으로 개편되면서 크게 발전되었다. 최승희는 19487월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무용극 <춘향전>을 공연했고, 194912월에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아 부인대회에서도 무용극 <춘향전>을 무대에 올린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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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가 끝난 후에는 긴 중간 휴식(ENTR’ACTE)이 있었다. 9개의 작품을 모두 독무로 공연한 최승희는 숨 돌릴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막간 휴식이 끝난 후 시작된 3부에서는 <초립동(1937)>, <춘향애사(1939)>, <검무(1934)>, <무녀춤(1936)>의 네 작품이 발표되었다.

 

3-1. 프랑스어로 꼬마 신랑(Enfant marie)”으로 번역된 작품의 원제는 <초립동>이다. 프로그램은 이 작품이 과거 한국에서는 조혼이 성행했다고 소개하고 결혼식을 마친 후 더 이상 아이가 아니고 어른이 되었지만 꼬마신랑은 풀로 만든 모자를 쓴 채 명랑하고 순진하게 행동한다고 작품을 설명한 후 과연 꼬마신랑은 사랑을 아는 걸까?”하고 묻는다.

<초립동>, 꼬마 신랑(Enfant marie)

 

풀잎으로 만든 작은 모자(petit chapeau d'herbes)’란 초립(草笠)을 가리킨다. 초립은 어린 나이에 결혼한 사람이 쓰던 갓을 가리키며 보통은 가늘고 누런 빛깔이 나는 풀이나 말총으로 엮어서 만들었던 작은 모자이다. 순 한국말로는 풀갓이라고도 불렀다. 최승희가 <살 플레옐> 공연을 마친 후 이 모자가 파리 여성들에게 유행했다는 기록도 있어 당시 최승희의 <초립동>과 그 소품 초립의 인기를 짐작케 한다.

 

로스엔젤레스 공연 직후에 공연평을 실었던 <신한민보>는 이 작품을 <신랑춤>이라고 불렀고 코흘리는 초립동이가 신부를 맞는데 청바지 저고리에 분홍 두루막을 입고 초립을 쓰고 혼자 남모르게 좋아서 춤도 추고 생각도 하고 명상도 해보는 로맨스의 곡이라고 해설했었다.

 

<신한민보>에 묘사된 <초립동>의 의상은 이 작품의 밝고 명랑한 분위기를 상상하는 데 도움을 준다. <초립동>은 오늘날에도 재일 조선학교 무용부의 학생들에 의해 자주 공연되는데 이들의 의상이 지금도 푸른색 바지 저고리에 분홍색 두루막을 입고 초립을 쓴 차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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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살플레옐 프로그램은 <봉산탈춤> 혹은 <유랑예인(Bouffon errant)>한국 풍습의 전형적인 한 가지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며, 최승희는 이 작품에서 유머러스하고 환상적인 해석을 통해 원시적인 기괴성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움을 완성했다고 설명했다.


<봉산탈춤>, 유랑예인(Bouffon errant)

 

이 작품이 미국에서 공연되었을 때는 가면을 쓰고 하는 코믹한 유랑패의 춤(<LA 헤럴드 앤 익스프레스, 193823)>”이라고 서술되었고, “<조선의 유랑패거리>... 번갈아가면서 활기찼다가 쭉 빠지는 모습은 분위기를 전달하며 커다란 가면은 우스꽝스러운 면모를 더해 준다(<뉴욕 월드 텔레그람>, 1938220)”라고 보도되기도 했다.

 

즉 살플레옐 공연 프로그램은 가면을 언급하지 않았으나 <유랑예인>은 가면을 쓰고 춘 우스꽝스런 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1938210일의 <신한민보>의 공연평에는 <유랑예인>이나 그와 비슷한 이름의 작품은 없었고, 그 대신 최승희가 가면을 쓰고 추었던 우스꽝스러운춤으로 <봉산탈춤>을 기록했다.

 

이 춤이야말로 대활극이다. 통바지 저고리에 왕발을 들고 바가지 같은 탈을 쓰고 쌍말로 하면 지랄 네굽을 부리는 모양은 관중으로 하여금 허리를 붙잡지 않으면 안 될 대활계극이다.”

 

나는 유럽 취재기에서 <유랑예인>19351022, 도쿄의 히비야 공회당에서 초연되었던 <호니호로시(ほにほろ)>의 조선풍 버전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 추정은 빗나간 것으로 보인다. 로스엔젤레스와 뉴욕의 신문보도와 <신한민보>의 감상을 종합할 때, <유랑예인>의 원래 제목은 <봉산탈춤>으로 <호니호로시>와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었다.

 

정병호-다카시마 유사부로의 <세기의 미인무용가 최승희(1994)>210쪽에 실린 사진이 <봉산가면무(Korean Vagabond=조선의 유랑인)>라는 제목을 갖고 있었고, 이 사진이 최승희의 <남미 순회공연 팜플렛(1940)>에 실렸던 것임을 고려할 때, 살플레옐 공연에서 발표된 <유랑예인>의 원래 제목이 <봉산탈춤>이었다는 사실은 더욱 확실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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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낙랑의 벽화(Fresque de Royang)>에 대해 프로그램은 낙랑은 동방문명의 요람으로 여겨지며, 아름다운 여인이 그려진 낙랑의 벽화에 대한 명상을 통해 이 작품이 창작되었다고 설명했다. 김채원도 <낙랑의 벽화>천년의 꿈을 말하듯 벽화에 그려진 고대 가인을 통해 보게 된 환상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낙랑군은 기원전 108년 고조선이 망하면서 한사군의 하나로 평양 지역에 설치되어 372년 미천왕이 이를 멸망시켜 고구려에 복속시킬 때까지 거의 5백년 가까운 국체를 유지했었다. 낙랑군이 망한 뒤에도 중국에서는 이 지역을 차지한 고구려를 낙랑이라고 부르는 관행이 있었고, 삼국이 통일되고 난 뒤에는 통일신라와 고려도 낙랑이라고 지칭한 예도 있다.

 

따라서 최승희가 <낙랑의 벽화>라고 한 것은 <고구려의 벽화>라는 뜻이다. 평양 부근에서는 다수의 고구려 벽화가 발굴되었는데, <사신도><행렬도>, <하례도> 등이 그것이다. 한편 지린성 집안 지역에서 발굴된 무용총의 <무용도>에는 14인의 남녀가 한복차림으로 춤추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아름다운 여인이 그려진 낙랑의 벽화라는 설명으로 보아 아마도 무용총의 <무용도>가 최승희의 작품 <낙랑의 벽화>의 소재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볼 수 있다.

 

 

<낙랑의 벽화>의 소재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구려의 무덤 무용총에서 출토된 <무용도>

 

<낙랑의 벽화>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공연에서도 공연되었다. 193823일의 <신한민보>는 전날 밤 이벨극장에서 열렸던 최승희 공연 중의 <낙랑의 벽화>에 대해 머리에 화관을 쓰고 은행색 옅은 빗깔 우에 어깨로부터 붉은 띠를 걸어 허리에 두르고 앞으로 늘어뜨린 그 모양만 보아도 낙랑 고대의 그 화려하고 귀족적인 것을 찾아 볼 수가 있다고 해설했다.

 

<낙랑의 벽화>1936922-23일 도쿄 히비야(日比谷)공회당에서 열린 최승희 제3회 신작무용 발표회에서 처음 무대에 올려진 작품이다. 19373월 경성의 부민관에서 열린 공연과 같은 해 12월 동경에서 열린 도구(渡歐)고별공연에서도 잇달아 공연되었다. 1938219일 미국 뉴욕 길드극장 공연에서도 이 작품이 등장했다. 최승희가 얼마나 애착과 자신을 가졌던 작품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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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프랑스어로 젊은 엽색가(Un jeune charmeur)’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작품의 원제목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를 <에헤야 노아라>로 보는 이도 있지만 <한량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프로그램에 따르면 매력적이고 쾌활한 서울의 젊은이가 호기심 많은 여성들의 마음을 유혹하는의 작품이며, “투명한 젊음에는 걱정과 계산이 없다고 덧붙여져 있다. 이는 조선시대의 한량과 개념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에 일부 평전이나 학술서들은 이를 <한량무>라고 불렀다.

 

<한량무>, 젊은 엽색가(Un jeune charmeur)

 

그러나 최승희의 작품들을 유형별, 내용별로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한 김채원의 최승희 작품목록에는 <한량무>라는 작품이 없고, <한량춤>에 대한 거의 모든 서술은 <에헤라 노아라>와 일치시켰다. 즉 이 작품을 <에헤야 노아라(1934)>이거나 그 변주곡이라고 본 것이다.

 

<에헤야 노아라>는 최승희가 안무한 최초의 조선무용이자, 일본에서 공연된 최초의 조선무용이기도 하다. 1933520일 당시 일본 잡지사 레이죠가이가 주최하고 일본 청년회관에서 개최된 여류무용대회에서 초연되었다. 최승희는 <에헤야 노아라>는 기생들의 춤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마음을 표현한 새로운 무용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춤은 술에 취한 자기 아버지의 굿거리 춤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작품이라고 고백한 바 있었다.

 

그러나 <최승희팜플렛 1(19352)><2(19359)>에 나오는 <에헤야 노아라><남미 순회공연 팜플렛(1940)>에 나오는 <한량무>는 스틸 사진만 보아도 다른 작품으로 보인다. , <에헤야 노아라>는 중년의 남성이 흰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모습이지만, <한량무>는 청년 남성이 채색 쾌자를 입고 전립을 쓴 모습이다.

 

이 같은 차이는 정병호-다카시마 유사부로 공편의 사진집 <세기의 미인무용가 최승희>178-9쪽의 <에헤야 노아라>207쪽의 <한량무>를 비교해 보아도 금방 알 수 있다. 1938210일의 <신한민보><한량무>전립을 적게 쓰고 쾌자를 걸쳐 입고 거들거려 추는 춤이라며, “몸짓, 어깨짓, 눈짓, 발짓, 별별 멋을 다 부리는 흥춤이라고 해설했다. 그러나 <한량무>의 초연이 언제인지는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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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가 끝나고 약간의 사이(Pause)를 두었다가 시작된 2부에서는 <보살춤(1937)>, <한량춤(1938)>, <낙랑의 벽화(1936)>, <유랑예인(1935)>의 네 작품이 공연되었다.

 

2-1. <보살(Bodhisativa)>불교 분위기에 푹 잠긴 최승희는 차분하고도 우아한 불교 예술의 아름다움, 즉 순수하고 고요한 부처의 청정심, 곧 열반의 심상을 표현하려고 한다고 설명되어 있다.

 

보현보살(왼쪽)과 최승희의 <보살품>, (Bodhisativa)

 

1부에서 공연된 <승무>가 불교를 비판하는 내용이었고, 그 비판은 불교의 타락과 사회적 악영향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1부 첫작품으로 <승무>를 배치했던 최승희는 2부의 첫작품으로 <보살춤>을 선정하면서 불교의 원래적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보살춤>의 초연이 언제였는지 알려지지 않은 상태이다. ‘보살이라는 말이 들어간 최초의 작품은 <보현보살(1937)>인데, 이 작품은 19373월말 혹은 4월초의 이왕직 본청 주최의 순정효황후 윤씨의 위로 특별공연에서 초연되었다.

 

한편 최승희는 같은 해 927일부터 사흘 동안 도쿄극장에서 열린 특별 공연에서도 <보살도>라는 제목의 작품을 발표했는데, <보현보살>과 같은 작품이거나 수정 또는 개작된 작품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본다면 파리 플레옐 공연에서 공연된 <보살춤>의 초연시기는 1937년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후 최승희는 <가무보살(1941)><관음보살(1941)>, <지장보살(1947)><암굴의 보살(1947) 등의 보살춤 시리즈를 잇달아 발표했으나, <보살춤(1937)이나 <보현보살(1937)>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참고로 <보살도(1937)>를 제외하고는 <보살(Bodhisativa)>이라는 제목은 서양 공연에서만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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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부 마지막 작품의 프랑스어 제목이 젊은 날의 꿈(Rêve de sa jeunesse)’이지만 해설을 읽어보니 원제목이 <신노심불로(身老心不老)>이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는 뜻이다. 프로그램의 설명에는 한국의 노인이 담배를 피우며 책을 읽다가 갑자기 청년처럼 춤추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내 야위고 힘없는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실망하면서 다시 노인으로 되돌아온다고 되어 있다.

 

김채윤도 이 작품을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고, 지나간 청춘시절의 추억에 빠져 젊은 날 추었던 춤을 추려고 해도 쇠한 육신이 그 꿈을 이뤄주지 못한다는 내용이라고 풀었다.

 

하지만 이 작품에는 개인의 노화로 인한 좌절감 표현을 넘어서는 사회적 의미도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한때는 강성했던 조선이 힘도 잃고 꿈도 없이 늙어버린 상황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신노심불로>, 젊은 날의 꿈(Rêve de sa jeunesse)

 

이 작품도 <옥적곡>과 함께 1937년 순정효황후 윤씨(1894-1966)의 위로 특별공연에서 초연되었다. 이 특별공연은 왕실 행사로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언론에도 보도되지 않았다. 그러나 정병호(1995:116)는 예술원 회의 성경린의 증언과 당시의 프로그램을 근거로 순정효황후 윤씨를 위로하기 위한 이왕직 본청 주최의 특별 무용공연이 인정전 서행각 앞에 설치된 가설무대에서 열렸다고 서술했다.

 

이 공연이 열린 시기는 최승희가 부민관에서 숙명여자전문학교 창립을 위한 특별공연을 가졌던 1937329일 이후 사리원 지방공연을 가졌던 43일 사이의 어느 시점이었을 것이다. 이 공연의 레퍼토리는 10작품이었는데, 그중 8작품이 최승희에 의해 공연되었던 것으로 확인되므로 이 공연은 사실상 최승희가 이왕직의 전속 반주로 순정효황후 윤씨를 위해 마련한 개인공연이었던 셈이다. 이 공연의 레퍼토리와 연희자는 다음과 같았다.

 

[1] 1. 속무(속곡) 최승희, 2. 옥적곡(고전곡) 최승희, 3. 인도조(타악기반주), 장귀희, 4. 초립동(속곡), 최승희, 5. 세 개의 전통적리듬(고전곡), 최승희, [2] 1. 보현보살(고전곡), 최승희, 2. 신노심불로(고전곡), 최승희, 3. 민요조(속곡) 와가구사로시고, 4. 무녀춤(속곡), 최승희, 5. 즉흥무(고전곡) 최승희

 

이때 최승희가 윤황후를 위해 초연한 <신노심불로> 등의 5곡이 파리 살플레옐 극장 공연에서도 공연되었던 것인데, 이 다섯 작품은 일반 공연 전에 조선의 황족을 위해 먼저 특별 공연되었다는 특별한 기록을 갖게 되었다.

 

순정효황후 윤씨(純貞孝皇后 尹氏, 1894년 양력 919(음력 820) ~ 196623)는 대한제국의 황후이자 한국사의 마지막 황후이다. 대한제국 순종의 계후(繼后)이며, 일제 강점기의 이왕비, 이왕대비로 칭해졌다. 그는 190712세의 나이로 황태자비로 책봉되었고, 그해 황태자 순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그녀도 황후가 되었다.

 

순정효황후는 1910년 병풍 뒤에서 어전 회의를 엿듣다가 친일 대신들이 순종에게 한일병합조약의 날인을 강요하자, 국새(國璽)를 자신의 치마 속에 감추고 내주지 않는 결기를 보이기도 했다. 결국 백부 윤덕영에게 국새를 강제로 빼앗겼고, 이후 대한제국의 국권은 일제에 피탈되어, 순종이 황제에서 이왕으로 격하되면서 자신도 이왕비로 내려앉았고,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에 머물렀다가, 19264월 순종이 사망하자 대비(大妃)로 불리며 창덕궁 낙선재(樂善齋)로 거처를 옮겨 살고 있었던 것이다.

 

윤황후가 최승희의 <신노심불로>를 관람할 때의 나이는 40대로 아직 신노(身老)’라고 할 만한 연배는 아니었으니, 이 작품은 윤황후나 혹은 다른 어떤 개인을 지칭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뇌쇠하여 과거의 영화를 회복하기는커녕 식민지로 전락해버린 조선의 상태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작품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 조선인들은 마음으로는 옛날의 영화를 잊지 않고 있지만, 지금은 나라를 잃고 옛 영화를 회복할 능력이 없음을 개탄하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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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기생춤(Danse de Kiisan)>장구를 맨 기생이 춤추며 노래하면서 방랑 시인의 관심을 빼앗는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소품으로 장구가 등장하기 때문에 흔히 <장고춤>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기생(妓生)을 일본식 발음의 게샤(geisha)라고 쓰지 않고 한국식 단어에 가깝게 키생(Kiisan)으로 발음되도록 철자를 사용한 것이 눈에 띤다.

 

 

<기생춤>, (Danse de Kiisan)

 

다른 작품 설명과는 다르게 <기생춤>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한 수 덧붙여져 있다. 앞선 곡해설과 연결해 이해한다면, 장구를 메고 춤을 추던 기생이 지나가는 방랑 시인을 유혹하면서 부르는 노래로 볼 수 있겠다.

 

젊음은 지나가는 법입니다

슬퍼하거나 괴로울 게 무엡니까?

죽고 나면 우리는 어찌 될까요?

아름다운 여인들과 위대한 영웅들도

모두 죽었고 여기에 없는 것을...

 

젊음은 지나가는 법(Il faut que jeunesse se passe)”이라고 직역한 첫 줄은 프랑스 속담이다. 대개 애들은 애들일 뿐이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여기서처럼 젊은 시절은 곧 지나가므로 맘껏 즐겨야 한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따라서 이 속담은 한국민요 <성주풀이>의 받는 소리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로구나/ 놀고놀고 놀아봅시다/ 아니 노지는 못허리라와 그 뜻이 같다. 이후의 구절들도 낙양성 십리 하에 높고 낮은 그 무덤들/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세가인이 그 누구냐<성주풀이>매기는 소리와 내용이 같다.

 

이 시는 다섯줄에 불과하고 프랑스 속담까지 동원해 번역됐지만 내용은 한국적이다. 아마도 안막과 최승희가 <성주풀이><편시춘>의 가사를 제공했고, 이를 기획사나 주관사가 프랑스어로 번역하면서 위의 구절이 등장하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하지만 이 번역이 <성주풀이><편시춘>의 비관과 낙관, 허무와 쾌락이 혼재된 분위기를 얼마나 프랑스 관객들에게 잘 전달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지나가는 길손을 유혹하는 기생의 매혹적인 노래와 교태로 넘치는 최승희의 <기생춤>은 그같은 정조를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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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프랑스어로 매혹적인 멜로디(Melodie enchanteresse)’로 번역된 세 번째 작품의 원제목은 <옥적곡>이다. ‘옥적곡이란 옥피리 노래라는 뜻이다. 이 작품은 때로 <옥적곡(玉笛曲)>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이는 한자 적()의 뜻이 이기 때문이다. ‘란 한국 고유어로 가로로 부는 피리를 가리킨다.

 

 

<옥적곡>-매혹적인 멜로디(Melodie enchanteresse), 살플레옐 공연 프로그램의 앞표지로 사용되었다.

 

프로그램에는 저 멀리 하늘에서 선녀들이 부는 감미로운 피리 소리에 꿈꾸듯 춤추는 작품이라고 설명되어 서정적인 작품인 것 같지만, 사실은 만파식적의 전설을 작품화한 것이다. 만파식적 신화는 통일신라의 신문왕(682)이 동해에서 감은사로 떠내려온 섬의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부니 나라가 평안해졌다는 전설에서 시작되었다.

 

신문왕 이후 만파식적은 분실과 회수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재질도 대피리에서 옥피리로 바뀌었고, 왜구와 역병과 홍수와 가뭄 등의 국난을 해결하는 신라의 국보로 지정되었다. 신라가 멸망한 이후에는 고려 광종의 명령으로 경주의 동경관에 보관되었는데, 지금도 경주박물관에는 만파식적으로 소개된 2개의 옥피리가 소장되어 있다.

 

최승희의 <옥적곡>1937년 순정효황후 윤씨를 위로하기 위해 이왕직 본청이 주최한 특별 무용공연에서 초연되었다. 창덕궁 인정전 서행각에서 열렸던 이 특별 공연에서 최승희는 공연 1부의 두 번째 작품으로 <옥적곡>을 직접 발표했는데, 몰락한 왕조가 회복되고 일제 침략에 의한 국난이 타개되기를 기원하는 뜻이 포함된 작품이라고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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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두 번째 작품 <천하대장군>은 조선시대 마을 입구마다 세워진 장승을 희화화한 작품이다. 프로그램에 텐카 타이쇼군(Tenka Taishogun)으로 표기된 것은 천하대장군의 한자를 일본식 발음으로 읽은 것이다.

 

<천하대장군> (Tenka Taishogun)

 

장승(長栍)은 마을 또는 절 입구에 세운, 꼭대기에 사람의 얼굴 모양을 새긴 기둥이다. 지방에 따라서는 벅수라고도 한다. 장승은 이정표 또는 마을의 수호신 구실을 한다. 일반적으로 남녀 한 쌍의 모습으로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으며, 남자 장승에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이라 씌어져 있고, 여자 장승에는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라 씌어있는 것이 보통이다. 나무나 돌로 만든 것이 대부분인데, 나무로 만든 장승이 더 일반적이고 이를 목장승이라고 부른다. 제주도의 돌하르방은 육지의 돌장승이 특화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역사적으로 장승에 대한 기록은 삼국시대에도 더러 발견되지만 마을마다 보편화된 것은 조선시대이다. 장승을 세울때는 얼굴부분에 험상궂거나 우스꽝스런 모습을 조각하는데, 이는 장승이 악귀나 외부세력을 쫓는 수호신의 역할을 한다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보통 마을의 어귀에 세우기 때문에 경계를 표시하는 이정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최승희의 <천하대장군>자신이 최고로 강하고 똑똑하다고 뽐내는 장군을 비웃는 환상적인 작품으로 설명되었는데, 조선의 지배세력이 강역을 지키지도 못하고 일제의 침략을 물리치지도 못했음을 풍자한 셈이니, 결국 조선 지배층을 풍자적으로 비판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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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프랑스어로 불자를 유혹하는 여성(Séductrice Bouddhiste)’으로 번역된 첫 작품의 원제목은 <승무>이다. 승무는 적어도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민간에 널리 퍼진 춤인데, 이를 채집하고 정리하여 최초로 근대적인 무대에서 공연한 것은 한성준(1874-1941)이다. 그는 1936년 제1회 무용발표회를 열었을 때 <승무>를 발표곡의 하나로 포함시켰다.

 

한성준의 <승무(1936)>가 무대에서 발표되기 전인 1934, 최승희는 스승 이시이 바쿠의 권고로 한성준으로부터 조선무용 여러 작품을 전수받은 바 있는데, 이때 한성준이 정리한 <승무>도 최승희에게 전수된 것으로 추측된다. 최승희는 그해 921일에 도쿄청년관에서 개최한 자신의 제1회발표회에서 <승무>를 발표함으로써, 최승희의 <승무(1934)>가 한성준의 <승무(1936)>보다 발표 시기는 빠르지만 사실상 그 원류는 한성준씨였음을 알 수 있다.

 

<승무>, 불자를 유혹하는 여성(Séductrice Bouddhiste)

 

한성준 사망 후에는 그의 따님인 한영숙(1920-1989)이 승무를 계승하여, 무용문화재 기능보유자로서 승무의 교육과 전파에 힘썼다. 다만 한영숙으로 전승된 한성준의 <승무>와 최승희의 <승무>는 서로 다른 작품으로 보아야 한다. 한영숙류 <승무>의 작품길이가 약 26분에 달하는 반면, 최승희의 <승무>5분 이내이기 때문이다.

 

승무의 기원에 대해서는 (1) 황진이가 지족선사를 유혹하기 위해 추었다는 황진이초연설(黃眞伊初演說), (2) 상좌중이 스승의 범절과 독경과 설법하는 모습을 희롱조로 흉내냈다는 동자기무설(童子技舞說), (3) 성진(性眞)8선녀의 미색에 현혹되었다가 불도를 깨달아 해탈하는 과정을 묘사했다는 구운몽인용설(九雲夢引用說), (4) 파계로 환속했다가 가책으로 번민하는 모습을 묘사했다는 파계승번뇌설(破戒僧煩惱說), (5) 산대가면극 중 노장춤이 기원이라는 노장춤유래설(老長舞由來說) 등이 있다.

 

살플레옐 공연 프로그램은 무용가가 불교 승려로 가장하고 절에 들어가 북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면서 불교도들을 타락시킨다고 해설하고 있어 황진이초연설에 바탕을 둔 작품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해설 중에 불교의 세력이 너무 강해진 시대란 고려시대를 가리킨다. 사회를 어지럽히고 부패시키는 타락한 종교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사회 비판의 성격을 가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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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살플레옐 공연 프로그램에 나타난 레퍼토리와 그 해설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1-1. 불교의 유혹자 (Séductrice Bouddhiste=<승무>, 고전 음악): 그녀는 불교 승려로 위장하고 사원에 들어가 북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면서 불교도를 타락시키려 한다. 이 무용은 지나치게 강해진 불교도를 상대로 한국인들이 투쟁하기 시작했던 시대를 회상시킨다.

 

“2. <천하대장군> (Tenka Taishogun, 타악기 반주): 자신이 제일 힘세고 똑똑하다고 믿는 장군의 맹목적의 자기 우상숭배의 이미지를 폭로하는 환상적인 춤이다. 토템 시대의 우스꽝스런 장면.

 

“3. 매혹적인 멜로디 (Melodie enchanteresse=<옥적곡>, 고전 음악): 멀리 높은 하늘에서 여신들이 연주하는 멜로디가 희미하게 들린다. 그녀는 매혹적이고 고상한 피리 소리에 이끌려 꿈꾸듯 춤춘다. 하늘은 항상 높고 푸르다.

 

 

최승희의 <살플레옐> 공연의 프로그램. 3부로 나뉘어 총 13작품이 공연되었다.


“4. <
기생춤> (Danse de <Kiisan>, 민속 음악): 장구를 맨 기생이 춤추며 노래하면서 방랑시인의 관심을 빼앗는다.

젊음은 지나가는 법입니다

슬퍼하거나 괴로울 게 무엡니까?

죽고 나면 우리는 어찌 될까요?

아름다운 여인들과 위대한 영웅들도

모두 죽었고 여기에 없는 것을...

 

“5. 젊은 날의 꿈(Rêve de sa jeunesse=<신노심불로>, 타악기 반주): 책을 읽으며 담배를 피우던 한국 노인이 젊은 시절을 꿈꾼다. 갑자기 그는 젊은이가 된 것처럼 춤추기 시작한다. 하지만, 어쩌랴, 그의 마르고 연약한 다리가 고통스럽다. 노인은 크게 실망하면서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2-1. <보살춤> (Bodhisativa, 궁정 음악): 불교 분위기에 침잠하여 최승희는 차분하고 우아한 불교 예술의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그것은 깨끗하고 고요한 불교적 평온함, 즉 열반의 마음 상태이다.

 

“2. 젊은 엽색가 (Un jeune charmeur=<한량무>, 민속 음악): 서울 젊은이의 유쾌함을 보여준다. 그는 매력적이고, 쾌활, 명랑하며, 솔깃해하는 여성들의 마음을 유혹한다. 투명한 젊음에 걱정과 계산은 없다.

 

“3. <낙랑의 벽화> (Fresque de Royang, 궁정 음악): 한국에서 낙랑은 동방 문명의 요람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이 춤은 최승희가 아름다운 여인이 그려진 벽화를 바라보면서 명상에 잠겨있던 중에 안무한 작품이다.

 

“4. 유랑예인 (Bouffon errant=<봉산탈춤>, 타악기 반주): 이 춤은 한국의 가장 전형적인 풍습의 하나이다. 최승희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환상적인 해석을 가미하자 이 풍습은 완성되었다. 그것은 원시적 그로테스크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이다.

 

“3-1. <어린 신랑> (Enfant marie=<초립동>, 민속 음악): 옛 시대 한국인들은 일찍 결혼하곤 했다. 혼례가 끝난 후, 인제 성인이 된 꼬마는 초립을 쓰기는 했지만 여전히 즐겁고 천진난만하다. 그는 사랑을 알까?

 

“2. 옥중 슌코의 고난 (Détresse de Shunko dans la prison=<옥중춘향>, 고전 음악): 이름의 뜻이 봄의 향기인 춘향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소설의 여주인공으로, 젊고 매력적인 기생이다. 그녀는 포악한 사또의 사랑을 받지만 그의 사랑을 거부한다. 그녀는 이미 학생 몽룡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또는 그녀를 박해하고 투옥한다. 봄 향기와도 같은 그의 젊음과 아름다움이 모두 감옥에 갇혔다.

 

“3. <검무> (Danse de l'Epée, 타악기 반주): 늙은 용사의 기사도 정신은 조금씩 사라진다. 기생들이 그의 정신을 불러일으키려고 춤을 추지만 그것도 이젠 예전같지 않다. 최승희가 이 정신을 고양시키고 생기를 불어넣는다.

 

“4. 서울의 무녀 (Sorcière de Séoul=<무녀춤>, 고전 음악): 한국의 무녀는 때로는 웃음으로 때로는 눈물로 손짓하고 유혹한다. 그녀는 심지어 불교의 현자도 유혹한다. 무당의 아름다움과 향기는 인간의 지혜보다 강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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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플레옐 공연 팜플렛의 최승희 소개는 몇 가지 면에서 이례적이다. 몇 줄의 약력으로 줄일 수 있는 내용이지만 8면 팜플렛의 한 면을 통으로 할애했고, 문단을 자주 바꾸고 읽기 쉬운 단문을 사용해 최승희의 출생과 출신, 무용입문과 성공적인 공연활동을 자세히 소개했다.

 

살플레옐 공연이 최승희의 유럽 데뷔 공연이었던 만큼 작품 설명에 앞서 무용가 최승희 자신을 알리는데 공을 들인 것은 이해할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오류와 과장이 포함된 것은 지적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최승희가 도쿄 무용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것은 1930년이 아니라 1929년이었고, 최승희가 젊은 음악가들과 작곡 활동에 관여했다는 것은 다른 증거가 필요한 주장이며, 미묘한 정치적 지형 때문에 미국 공연이 초기에 중단된 사정은 언급되지 않았다.

 

특히 최승희가 1934년부터 1937년까지 2백만 명 이상의 관객을 위해 6백회 이상의 공연을 했다는 주장은 숫자를 이용한 호소력있는 표현이지만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과장이었다. 일주일에 3일씩 33백명의 관객 앞에서 4년간 공연을 해야 가능한 숫자인데, 당시 조선과 일본에는 객석 3천 이상이 극장은 없었다. 최승희가 자주 공연했던 서울의 경성공회당과 도쿄의 히비야공회당의 수용인원도 2천명 남짓이었다.

 

사소한 오류와 과장에도 불구하고 이 소개문은 다른 문헌이 언급하지 않은 새로운 사실을 보여준다. 첫째는 최승희의 모교 숙명여학교를 소개한 것인데, 숙명여고보 졸업생이 유럽에 공개적으로 소개된 것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1930년대의 숙명여고보는 조선 최고의 여학교임에 틀림없었으나 졸업생들의 대부분은 조선에 머물렀고, 해외 활동도 일본과 중국 등에 국한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최승희 덕분에 숙명여학교는 유럽에 소개된 최초의 조선 여학교가 된 것이다. 다만 유감인 것은 숙명(淑明)이라는 원래의 이름이 아니라 슈쿠메이(Shukumei)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알려진 것이었다. 이는 '최승희(崔承喜)'가 아니라 '사이 쇼키(Sai Shoki)'라고 발음되었던 것과 같은 이유였다.

 

살플레옐 공연 팜플렛은 최승희가 14세에 무용에 입문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최승희 유럽데비 8년전인 1930년에야 오르세 미술관 영구소장이 결정된 에드가 드가의 <14세의 어린 무용수>를 연상시켰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무용유학을 떠났던 시기 최승희의 나이가 14세였다고 밝힌 것이다. 출생연도를 비롯해 각종 연도나 최승희 나이를 밝히는 데에 적극적이지 않은 소개문에서 무용입문시기의 나이만 밝혀놓은 것이다.

 

최승희가 이시이 바쿠를 따라 무용유학에 나섰을 때 경성의 신문들은 최승희가 16세라고 보도했었다. 그러나 이를 14세로 밝힌 살플레옐 팜플렛이 오류를 범한 것은 아니다. 당시 최승희의 만나이가 14(+4개월)이었기 때문이다.

 

14세라는 나이를 밝힌 것은 최승희의 천재성을 암시하려는 의도였겠지만, 그와 함께 최승희를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의 조각작품 <14세의 어린 무희(La Petite Danseuse de Quatorze Ans, 1880)>와 연관시키려는 시도였을 수도 있다.

 

회화에서도 무용수를 자주 소재로 삼았던 드가는 1881년 제6회 인상파 전시회에 <14세의 어린 무희>를 출품했는데 평가는 좋지 않았고 아즈텍 원주민이냐는 인종차별적 비난까지 받았다. 그러나 밀랍으로 만들어 인체 질감이 생생하고, 진짜 무용복을 입히고 댕기까지 새틴으로 묶어주어 화제가 되었던 이 작품의 모델은 벨기에 출신의 무용지망생 마리 반 고템(Marie van Goethem)이었고, 드가의 모델이 되었을 때 그녀의 나이가 14세였다.

 

반세기 동안 화제를 뿌린 후 <14세의 어린 무희>는 마침내 1930년에 오르세 미술관에 영구 소장되었다. 최승희의 파리 데뷔 8년 전이. 동양에서 온 새로운 무용가가 ‘14세에 무용을 시작한 무희로 소개되자 드가에 대한 기억이 생생한 파리 시민들은 <14세의 어린 무희>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드가의 <14세의 어린 무용수>를 생각하면서 공연에 왔던 파리 시민들은 깜짝 놀랐을 것이다. 드가의 모델 마리 반 고템과는 달리 한국 무용가 최승희는 빼어난 미인이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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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살플레옐 공연 프로그램은 2017년에 재발굴되어 일반에 공개되었고, 이 프로그램의 발굴과정과 내용을 소개한 필자의 취재기가 후아이엠(2017829) 사이트에 연재되었고, 그중 일부는 일간지 세계일보(201797)중앙일보(201798), 통신사 뉴시스(201798) 등에 보도된 바 있다.

 

이 프로그램이 공개된 후에도 그 내용이 자세히 분석된 적은 없었고, 최승희의 살플레옐 공연의 레퍼토리가 가지는 예술적 혹은 사회적 의미가 밝혀진 적이 없었다.

 

살플레옐 프로그램은 4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1) 공연 일시와 장소, 주관사 등의 공연정보는 표지에 나타나 있고, (2) 최승희 소개는 2, (3) 작품의 순서와 간략한 해설은 4면과 5면에 서술되어 있다. (4) 이 팜플렛에 실린 사진은 모두 7장으로, 옥적곡(1면 앞표지)과 보살춤(3), 천하대장군(4)과 검무(5), 한량춤(6)과 무당춤(7), 초립동(8면 뒷표지)의 사진이다. 사진들은 대부분 조명이 잘된 스튜디오에서 전문 사진가들이 촬영한 흑백 작품들이었다.

 

프로그램의 텍스트는 최승희와 발표작품을 소개하는 것으로 한정되어 있는데, 우선 프랑스어로 쓰인 최승희 소개글을 한국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1939년 1월31일에 열렸던 파리 <살플레옐> 극장 공연의 팜플렛에 실린 무용가 최승희 소개의 글. 파리의 시민들에게 처음으로 소개되는 내용이었던 만큼 최승희의 극적인 무용입문 과정과 그동안 조선과 일본에서 해온 공연활동에 대해 약간의 과장도 섞여 있었다.

 

극동의 저명한 무용가 최승희는 고색창연한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행복하고 명랑한 가정에서 자랐고, 14세에 숙명여학교를 졸업했다.

 

그 당시 그녀의 꿈은 음악을 공부하는 것이었다. 숙명여학교의 교사들은 최승희의 성악 재능을 알았기 때문에 학교의 비용으로 그녀를 도쿄 음악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했으나, 나이가 너무 어려서 입학할 수 없었다. 그녀는 서울에서 일 년 동안 기다려야했다.

 

그때 저명한 일본 무용가 이시이 바쿠가 서울에서 발표회를 열었다. 최승희는 그의 무용 예술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자신도 무용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 새로운 예술이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드러내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부모는 반대했고 친척과 지인들도 반대했다. 당시 무용은 하층계급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승희는 꺾이지 않고 도쿄의 이시이 바쿠 무용학교에 입학했다. 4년 동안 최승희는 현대 발레의 원리와 기술을 익혔고 이시이 무용단의 스타가 되었다.

 

“1930년 고국으로 돌아온 최승희는 한국 무용 공연에 관심을 가졌다. 2천년 전통의 한국 무용 예술이 거의 사라진 것을 발견한 최승희는 이를 되살려야 함을 깨달았다. 다행히 궁정 무용의 전통이 일부 남아 있었기에 그녀는 그 춤들을 연구했고, 과거의 민속 무용을 찾기 위해 시골 마을을 찾아다녔다.

 

당시에는 한국의 고전 음악도 잊혀져 있었다. 최승희는 몇 명의 젊은 작곡가들과 함께 이 음악을 되살렸고, 그와 함께 한국의 무용 예술도 부활시켰다. 그녀가 새로운 작품들을 발표할 때마다 관객들은 열광했다. 그동안 누구도 한국 고대의 신성한 춤들을 재현하는데 성공하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최승희는 유럽과 미국에 한국의 예술을 소개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 앞서 19349월 도쿄에서 무용발표회를 열었다. 일본의 수도에서 가진 그의 데뷔 공연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무용 비평가뿐 아니라 작가와 배우, 화가와 정치가들까지도 언론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1934년부터 1937년까지 최승희는 극동의 여러 도시에서 2백만 명 이상의 관객을 위해 6백회 이상의 공연을 열었다.

 

“19379월 최승희는 첫 번째 세계 순회공연을 결정했다. 미국은 고국에서와 똑같은 열광으로 최승희를 맞아 주었고, 이제 파리에서 그녀의 첫 번째 유럽 투어를 시작한다.”

 

이 소개문 내용은 대부분 이미 조선과 일본의 언론과 두 권의 자서전을 통해 잘 알려진 것이지만, 악의적인 것은 아니라고 해도 약간의 오류와 과장이 포함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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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유럽순회공연은 예술 공연 기획사 <국제예술기구>에 의해 기획되었고, 그 실무의 주관은 파리의 대행사 <발말레트>가 맡았다.

 

기획사와 주관사는 이 순회공연의 일정을 적어도 6개월 전에 확정했고 극장들을 예약했다. 이 예약을 앞당기기는 불가능했고 미룰 수는 있었으나 무거운 벌금을 내야했다. 최승희가 미국공연이 중단된 후에도 바로 유럽으로 가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국제예술기구>가 공연 일정을 마련했지만 최승희는 기획과정에서 자신의 요구를 주장할 수 있었다. 최승희는 공연 극장에 대해 2가지 확고한 선호사항이 있었다. 어느 나라든지 첫 공연은 그 나라 수도의 최대 극장이어야 하며, 극장의 조명이 좋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이시이무용단에서 독립해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했을 때도 첫 공연은 경성공회당에서 열었다. 두 번째 일본으로 건너갔을 때도 그의 제1회 발표회는 예약 사정 때문에 불가피하게 일본청년관에서 열었지만 제2회 발표회는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렸다. 최승희의 이같은 극장 선호 원칙은 훗날 남미 제국과 중국, 러시아와 동유럽 제국의 순회공연 때도 지켜졌다.

 

최승희의 유럽 첫공연은 파리의 최대극장 <살플레옐>에서 열렸다. 1939년 1월현재 살플레옐은 객석 2천4백석으로 파리 최대의 극장이었다. 그러나 최승희가 첫 공연을 가진 후 40일만에 '파리 최대극장' 타이틀은 그해 3월10일 개관된 객석수 2천7백석의 <팔레데 샤이오> 극장으로 넘겨졌다.

 

<국제예술기구>는 최승희의 요구를 최대한 충족시켰다. 프랑스 첫 공연을 파리의 살플레옐 극장으로 예약했고, 벨기에 첫 공연은 브뤼셀의 팔레데 보자르 극장, 네덜란드 공연은 암스텔담의 위성도시 할렘의 슈타트 쇼우부르크와 헤이그의 프린세스 극장으로 정했다.

 

살플레옐 극장은 19391월말 기준으로 파리 최대 극장이었다. 183912월에 개관할 때는 3백석의 소극장이었기 때문에 살(salle, )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나, 1927년의 재건축 때 3천석으로 대폭 늘었다. 1928년의 화재로 내부가 재건축되었 때 좌석수는 24백석으로 조정됐지만, 최승희 공연 당시에도 살플레옐은 객석 수 기준으로 여전히 파리 최대 극장이었다.

 

그러나 최승희 공연 이후 40일 만에 파리 최대극장이라는 타이틀은 팔레드 샤이오 극장에게로 넘어갔다. 1939310일에 개관한 샤이오 극장의 객석수가 27백석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최승희의 두 번째 파리공연은 그해 615일 샤이오 극장에서 열렸다.

 

살플레옐 공연은 최승희가 파리에 도착한지 한 달 후에 열렸고, 국제예술기구와 발말레트사는 홍보에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다만 홍보 전략에는 혼선이 있었다. 이해관계가 다른 세 주체의 요구가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최승희은 당연히 자신을 조선인으로, 자신의 작품들을 조선무용으로 홍보하고 싶었다. 반면 일본공관은 일본 무용가의 일본 무용으로 홍보하면서 최승희가 자국 평화사절 역할을 해주기 바랬다. 기획사와 주관사도 일본 무용가로 홍보되기를 바랬는데 이는 흥행에 더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최승희의 파리 첫공연은 신문의 연주 일정표와 같은 형식으로 거리에 세워진 광고탑에 연일 홍보되었다. 이 홍보난에 어떤 표현을 쓰느냐를 두고 최승희와 일본 대사관, 그리고 흥행사/주관사 사이에 치열한 밀고 당기기가 이뤄졌다. 결국 최승희는 <일본무용가>로 표기되었지만 그의 무용작품은 <조선 무용>으로 명기되도록 타협이 이뤄졌던 것으로 보인다. 

 

세 주체의 상이한 요구와 현지 언론인들의 무지가 뒤섞이는 바람에 결국 일본인 무용가의 조선무용으로 타협이 이뤄졌다. 물론 이 타협은 세 당사자가 한자리에 모여 회의를 통해 결정한 것은 아니며, 언론보도를 통한 밀고 당기기가 계속된 끝에 자동적으로 조정된 결과였다.

 

일본공관과 기획사/관사는, 서로 다른 이유 때문이기는 했으나,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로 홍보하게 된 것에 만족했고, 이후 기획사와 주관사는 언론을 통해 활발한 홍보를 벌였고, 일본 대사관은 파리뿐 아니라 온 유럽의 일본교민들에게 최승희 공연에 참석하도록 독려했다.

 

1939214일 파리주재 일본대사관이 본국 외무성에 발송한 보고서에는 본관이 초대한 이탈리아와 벨기에 양국 대사, 프랑스 외무성 관리, 기타 일본 관계자 등을 포함하여 관객 천육백을 넘어 예상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고 신문비평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는 내용이 담겼다.

 

최승희는 살플레옐 공연 홍보 과정에서 조선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일단 양보하는 대신 자신의 발표작품에 조선무용이라는 말을 쓸 수 있게 된 데에 만족했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었다. 살플레옐 공연의 레퍼토리는 1백퍼센트 조선무용이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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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1217일 프랑스의 호화여객선 파리호에 승선해 뉴욕을 출발한 최승희는 일주일동안 대서양을 건너 그달 24일 오후에 프랑스의 대서양 최대항구 르아브르의 조안네스 쿠베르(Joannès Couvert) 선창에 도착했다. 바로 기차로 갈아탄 최승희는 그날 밤 파리의 상라자레(Saint-Lazare)역에 도착했다. 죠르쥬 생크(George V) 호텔에 숙소를 마련한 최승희는 샹젤리제에 스튜디오를 빌고 공연 준비에 들어갔다.

 

파리의 언론은 최승희를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12(확인)의 일간지가 최승희의 파리 도착을 사진과 함께 1면에 보도했다. 미디어는 최승희의 출신배경과 무용입문, 조선과 일본에서의 성공, 미국을 거쳐 유럽무대 데뷔하게 된 과정을 상세히 보도했다.

 

프랑스 최대항구 르아브르에 입항하는 호화여객선 <파리>호. 최승희는 <파리>호로 뉴욕을 떠나 대서양을 건넌 후 르아브르에 도착했다.

 

유럽 첫 공연이 시작되기 전인 1939112일 파리주재 일본대사관은 최승희 환영리셉션을 열었다. 파리 주재 각국 외교관들과 문화부문의 주요 인사들, 그리고 파리의 기자와 평론가들을 대거 초청되었다. 명시적으로는 일본 여권을 가지고 공연 여행 중인 최승희를 지원하는 행사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전운이 감도는 유럽과 이미 전쟁 중인 아시아의 북새통 속에서 일본의 평화적 제스처를 선전하는 방편이기도 했음에 틀림없다.

 

최승희도 일본 외무성과 외교공관의 이중적 태도를 잘 알고 있었다. 당초 최승희는 남편 안막과 딸 안승자와 함께 세계 순회공연을 치를 예정이었고, 외무성에 3명의 여권을 신청했다. 외무성은 딸 안승자의 여권만 발급을 거부했다. 최승희가 세계 순회공연을 하는 동안 딸을 도쿄에 잡아둔다는 것이었다. 조선 출신의 정상급 예술가 최승희가 반일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한편, 가족과 함께 망명이라도 하게 되는 곤란한 사태를 사전에 방지하려던 것이었다.

 

최승희와 안막은 이같이 족쇄가 채워진 상태에서도 줄 것은 주지만 받을 것은 받는다는 생각이었다. , 일본정부의 평화 제스처의 역할을 담당해 주지만,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이 순회공연을 통해 조선무용을 세계무용계의 한 장르로 부각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최승희의 이같은 줄타기 전략은 그 자체가 상당히 위험한 것이었지만 피식민지 예술가로서는 독립운동을 제외하고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차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최승희가 이러한 위험한 전략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은 국제정세와 문화운동에 대한 식견이 뚜렷했던 남편 안막 덕분이었을 것이다.

 

1938년 12월24일 르아브르를 거쳐 파리의 상라자레역에 도착한 최승희(왼쪽)와 그가 파리에서 촬영한 <한량무> 모습(오른쪽).

 

이를 위해 최승희는 두 가지 전략을 사용했다. 하나는 자신과 자신의 무용의 정체성을 밝히는 것이었다. ‘자신은 조선인이며 자신의 무용은 조선무용임을 최승희는 강조했다. 자신과 자기 예술의 정체성을 명확히 밝힌 것이다. 일제 공관의 방해와 유럽 언론의 무지 때문에 이같은 시도가 항상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9개월의 유럽 체류를 마치고 마르세이유를 떠날 즈음에는 적어도 그가 공연했던 서유럽에서는 최승희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는 공연의 레퍼토리를 특정한 방식으로 구성하는 것이었다. , 개개의 작품들뿐 아니라 그 작품들을 구성과 상호연관성을 통해서도 최승희는 유럽인들에게 조선의 실상을 알리려고 했던 것이다. 그의 발표작품들은 한국 예술사의 주요한 작품이나 사건들을 소재로 한 것이 대부분이었고, 이를 시기별, 계층별, 연령별, 성별로 골고루 제시하기 위해 애썼다.

 

이글에서 최승희의 살플레옐 공연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분석하는 것은 이 두 번째 전략이 어떻게 수립, 실행에 옮겨졌고, 그에 대한 관객과 비평가들의 반응이 어떠했는지 살펴보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서 우선 2017년 여름, 80년 만에 발굴된 살플레옐 공연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그 내용을 번역해 제시한 다음, 각 작품들의 내용과 배경을 소개하게 될 것이다.

 

살플레옐 프로그램을 그 이전 미국 공연의 프로그램들과 유럽의 다른 공연 프로그램들과 비교하면 최승희의 유럽공연 의도가 더욱 뚜렷해 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많은 지면을 요구하는 작업이 될 것이므로, 이번 글에서는 최승희 유럽순회공연 중의 첫 공연인 1939131일의 <살플레옐> 공연 프로그램의 분석에 한정하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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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는 1939년 유럽 순회공연을 단행했다. 이 순회공연은 한국예술사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아마도 1964년 비틀즈의 미국 침공(British Invasion)에 비견할 문화적 사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문화와 예술의 차원과 방향을 질적으로 도약시킬 계기였기 때문이다.

 

이차대전과 냉전이 아니었다면 최승희의 조선무용은 비틀즈의 팝과 록에 비견할 문화 현상을 이뤘을 것이다. 19세기 러시아 제실 무용이 한동안 유럽 발레를 이끌었던 것처럼 20세기 조선무용이 유럽이나 동양에서 그런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 한국 예술 전반이 일찌감치 세계화를 시작했을 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한편, 1930년대 최승희의 조선무용은, ‘한류의 이름으로, 2010년대의 비티에스에 비견되기도 한다. 현상의 규모와 내용의 면에서 그 둘이 비교될 수 있는 대목이 분명히 있다. 특히 둘 다 민족문화의 특성을 유지하면서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해 나갔다는 점에서 그렇다.

 

최승희의 유럽공연은 조선의 민족무용이 어떻게 처음으로 유럽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에 대해 유럽 관객과 비평가와 언론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알 수 있는 기회였다. 그리고 1939131일 살플레옐 극장에서의 공연은 그 서막이었다. 그 레퍼토리를 찬찬히 살펴보면 이 공연이 최승희와 조선무용에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1939년 유럽순회공연 중의 최승희.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에서 포즈를 취했다.

 

살플레옐 공연의 레퍼토리는 1936년 최승희가 세계 순회공연을 처음 구상할 때부터 구성되기 시작했고, 1937년 무용영화 <대금강산보>를 촬영하면서 구체화되었고, 1938년 미국 무대에서 일차 테스트를 거친 후, 파리에 도착한 후에도 심사숙고 끝에 보완되어서 발표되었다.

 

유럽의 관객과 평론가들이 최승희 공연의 내용과 의미를 속속들이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당시 유럽에는 조선이라는 나라와 민족을 아는 사람조차 거의 없었으니, 그 문화와 예술에 대한 이해를 갖춘 사람은 더더욱 드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승희와 안막도 자기들의 의도를 말로나 글로 설명하지 않았다. 안막은 글을 잘쓰기로 유명해서 이미 20세에 경성의 주요 일간신문에 두루 문학평론을 연재했다. 최승희도 25세의 나이에 자서전을 출판한 저술가이고, 단편소설까지 발표했을 뿐 아니라 여러 잡지에 자전적인 회고록을 기고하던 작가이기도 했다.

 

그런 안막과 최승희가 공연에 대해서 말을 아꼈다. 이들이 말이나 글로 작품을 설명하지 않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우선 말/글로 설명해야 의미가 전달되는 작품이라면 예술적 감동의 효과는 반감될 수 밖에 없다. 그런 작품이라면 예술성에 의심의 여지가 생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다른 이유는, 공연 의도와 의미를 말이나 글로 공개할 경우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조국 조선의 피식민 상황 때문이었다. 외국에서도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일본공관에 의해 본국에 보고되고 있었고, 잘못된 말 한마디나 글 한 줄이 향후의 공연 활동뿐 아니라 이들의 생활과 생존 자체를 위협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국인이라면 말과 글이 없었더라도 최승희 공연과 그 발표작품들의 의미를 금방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최승희의 조선과 일본 공연을 감상한 숱한 조선인들과 재일동포들이 생생하게 증언했던 점이다.

 

80년이나 지난 지금도 나는 살플레옐 공연의 발표작품 리스트를 보는 순간 최승희와 안막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불과 수년전만 해도 조선무용의 문외한이었던 내가 그랬을 정도이니, 오늘날의 한국 무용인들과 평론가들에게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이글에서는 최승희의 살플레옐 공연 레퍼토리를 다시 한 번 공개하고 그에 대한 해설과 기초 분석을 제공해 보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최승희의 유럽공연의 의도가 조금 더 뚜렷해 지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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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의 매장인허증에서 조선 연고지를 찾는 일이 가장 어려웠던 것이 남익삼씨의 경우였다. 김병순씨의 본적주소는 분명해서 약간의 조사를 통해 오늘날의 위치를 금방 확인할 수 있었고, 장장수씨의 매장인허증에는 조선 주소가 기재되지 않았으므로 곧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지도에 대한 설명은 글의 뒷쪽에 다시 나온다.

 

남익삼씨의 매장인허증에는 조선의 주소가 기록되어 있지만 그것이 오늘날의 어느 곳인지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우선 그의 매장인허증을 번역해 보자.

 

인허증1

(본적) 조선 충청도 춘원우 연북면 선삼촌

(주소) [전부 지워져 있음]

(성명) 남익삼, (생년월일) 미상, (나이) 37

위 사람의 매장을 허가함, 1915123일 오후2시 이후에 시행해야 함

1915123, 카와베군 니시타니 촌장 다츠미 류이치 (도장)

 

 

니시타니 촌장의 명의로 발행된 남익삼씨의 매장인허증. 상단의 <본행17자삭제>라는 말은 일본주소를 삭제했다는 뜻으로 보인다.

 

남익삼씨는 김병순씨가 사망한 다음해(1915) 1월에 사망했다. 현재의 주소가 기입되어 있지는 않지만 정홍영 선생은 니시타니 촌장이 인허증이 발행한 것으로 보아 다른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타마세 지역의 노동자합숙소(=함바)에 기거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나는 그동안 조사한 것을 요약해서 ... 사망자를 연도별, 본적지별, 현주소별, 연령별로 분류한 다음, 니시타니 타마세 지역의 연도별, 본적지별 사망자를 표로 정리했다. 매장 허가증에 기입된 주소는 모두 타마세 지역에 한정되었다.

 

타마세는 니시타니(西谷)의 여덟 지역 중 하나로 호수와 인구수가 그리 많지 않아서 연간 사망자 수는 평균 3명에서 5명에 지나지 않았고, 사망 원인도 대부분 노쇠와 질병이었다. 그러나 1914년부터 1917년에 걸친 사망자 수가 비정상적으로 많았고, 본적지가 오이타(大分), 에히메(愛媛), 돗토리(鳥取) 등 다른 지역인 사망자 20명이 이 시기에 집중되어 있었다. 성별 연령별 내역을 보면 ... 14명이 18세부터 45세까지 한창 일할 나이의 남성이었으며, 그 중에 조선인 3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몇 가지 자료를 이용해서 센가리 도수 터널에 관한 부분을 발췌하여 일람표로 만들었다. 그러자 공사가 이루어진 시기, 장소, 주소가 딱 일치하여 사망자가 생긴 것이 터널 공사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정홍영 선생의 저서 16면에 게재된 <니시타니 타마세 지역의 연도, 본적지별 사망자> 통계. 남익삼씨가 사망한 1915년의 타지역 사망자수가 8명으로, 남익삼씨가 그중의 한명이다.

매장인허증에 사망 이유가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정홍영선생은 정황증거를 모두 종합해서 남익삼씨도 역시 고베수도공사 중에 사고로 사망했던 것을 확인한 것이다.

 

또 정홍영 선생은 평생 고베수도에서 근무한 하즈(波豆)에 거주하는 후쿠모토 지츠지(福本實二, 당시 75)씨를 인터뷰해서 1910년대 고베수도 제1차 확장공사 중에 많은 조선인이 참가해서 일했고, 사고로 사망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증언을 확보했다.

 

따라서 이제 나는 남익삼씨의 조선 연고지를 찾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남익삼씨의 주소에서 조선(朝鮮)이라는 첫 단어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읽기 어려울 만큼 초서체가 심했고, 간신히 독해를 해도 한국에 그런 이름의 지역과 장소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우선 ()’부터 문제였다. ‘조선다음의 세 글자를 충청도(忠淸道)로 읽는 이도 있었고, 북해도(北海道)로 읽는 사람도 있었다. 북해도는 조선의 영토가 아니었고, 충청도라는 행정지명은 1929년당시의 조선에 없었다. 지금도 충청남,북도를 합쳐서 충청도라는 말이 쓰이기는 하지만, 주소를 말하려면 언제나 충청남,북도를 구별해야 한다.

 

설사 그것이 충청남,북도를 가리킨다고 하더라도 그 다음 세 글자가 문제였다. 가장 근접한 독해가 춘원군(春元郡)’이었으나 충청남도와 충청북도에 그런 이름의 군은 없었다. ‘단위에서 막히니 그 아래 단위나 (‘단위는 없었다) ‘단위의 이름은 조사해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가능한 모든 자료를 동원해서 다른 에서도 춘원군을 찾아보았으나 그런 이름을 가진 은 조선13도에 없었다. 같은 방법으로 연북면선삼촌을 찾아보았으나 결과는 같았다.

 

1770년대의 조선시대 지도에서 <춘원면>(붉은 원)의 지명을 찾을 수 있었다. 인근에는 광일면과 광이면(파란 원)도 기록되어 있었고 광일면과 춘원면 사이에 광삼면(초록원)이 있었으나 춘원군에 포함되었다. 

 

남익삼씨의 조선 주소를 읽기 시작한 것이 곤도 선생으로부터 매장인허증 사본을 받았던 202011월이었으나, 해를 넘기고 20214월이 되도록 아무런 실마리도 잡지 못했다.

 

그동안 내가 이 주소를 읽어달라고 부탁드린 분들이 약 이십 명쯤 되었다. 그중에는 한학자와 고전문학자, 역사학 교수와 초서체 전문가도 있었다. 심지어 일본 고문의 초서체를 판독하는 컴퓨터 프로그램까지 동원했다. 그러나 누구도 주소를 읽어내지 못했고, 컴퓨터도 마찬가지였다.

 

5월에 들어서면서 나는 이 주소가 잘못된 기록이라고 결론 내렸다. 6개월 동안 조사를 했는데 아무도 읽어내지 못했다면 그것은 주소가 잘못된 것으로 추정하는 수밖에 없다.

 

매장인허증의 필체는 매우 능숙한 초서체였다. 초서체의 한 전문가는 인허증의 서체가 일본식 초서체라고 확인해 주었다. , 조선인이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막노동 일자리를 찾아 일본까지 와야했던 가난한 조선인이 이렇게 능숙한 초서체를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매장인허증은 일본인 인텔리, 예컨대 니시타니 촌사무소의 서기 같은 사람이 작성한 서류임에 틀림없다. 서기가 질문하면 서툴게나마 일본말을 할 줄 알았을 공사판 십장이 인허증 작성에 필요한 내용을 대답해 주었을 것이다.

 

문제는 아무리 십장이라고 해도 사망자의 인적사항과 주소를 다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가 생전에 사망자와 나눴던 대화를 통해 알게 된 인적 사항을 대답하는 데에 그쳤을 것이다. 남익삼씨의 경우에는 그의 생년월일을 아는 동료조차 없었던 모양이다.

 

조선 사정을 모르는 일본인 서기와 사망자를 잘 모르는 조선인 십장 사이의 대화를 통해 인허증이 작성되었다면, 여기에 기록된 주소는 믿기 어려울 수 밖에 없다.

 

1884년에 작성된 <지도이>에도 경상남도 고성현 지도에 춘원면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 북쪽에 광일면과 광이면이 보이고, 춘원과 광일면 사이에 광삼면이 있었으나 춘원면에 포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나는 조사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인허증에 쓰인 주소를 제대로 읽으려고 노력하는 대신에 의 행정 단위들을 다 떼어 버리고 춘원연북선삼이라는 고유명사만 조사했다. 그랬더니 춘원이라는 지명이 있었다. 그것은 이 아니라 의 이름이었고, ‘춘원면(春元面)’은 지금의 경상남도 통영을 가리키는 옛 지명이었다.

 

그 다음에는 지도를 보면서 춘원면을 찾았다. 2개의 지도가 춘원면을 기록했다. <지도2: 경상도, 전라도 (1884)><팔도지도초본2(1770)>였다. 전자에는 통영과 미륵도를 춘원면으로 표시했고, 후자는 오늘날의 통영시만 춘원면으로 표시했다.

 

나는 두 지도에서 춘원면부근을 샅샅이 살폈다. 춘원면 북쪽에 광일면(光一面)과 광이면(光二面)이 보였다. 광삼면(光三面)도 있는 것일까? 지도에는 보이지 않았다. 다른 자료를 보니 조선 중기에는 지금의 안정과 황리 지역이 광삼면이었고, 그 남쪽이 춘원면이었다고 한다.

 

1900년에 이 지역을 진남군(鎭南郡)으로 편성하면서 광삼면은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춘원면은 도남면(道南面)으로 개칭되었다. 1914년에는 진남군이 통영군으로 바뀌면서 광삼면과 도남면을 합하여 광도면(光道面)이 되었다. , 오늘날의 통영시 중심부가 1900년 이전에는 춘원면이었고, 그 북쪽으로 인접한 지역이 광삼면이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통영시 행정구역 지도. 표의 1-7의 지역이 1900년 이전에는 <춘원면>이었고, 지금의 광도면의 일부가 과거의 <광삼면>이었다.

 

내가 광삼면에 주목했던 까닭은 여기에 쓰인 한자 빛 광()’자가 쉽게 먼저 선()’자로 오인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남익삼씨 주소의 맨 끝에 나오는 선삼촌(先三村)’광삼촌(光三村)’의 잘못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상의 길고 지리한 조사와 추론을 거쳐서 나는 남익삼씨의 주소가 오늘날의 <경상남도 통영시 광도면>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확인을 위해 이 지명들을 더 찾아보았지만 다른 지역에는 그런 이름은 없었다. ‘춘원이나 광삼이 독특한 이름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남익삼씨의 연고지는 통영시 광도면이며, 그곳은 우연히도 후쿠치야마선 부설공사의 희생자들의 연고지인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면과 매우 가깝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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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순씨의 매장인허증에는 자세한 조선 주소와 대략적인 일본 주소가 둘 다 기재되어 있었지만, 장장수씨의 인허증에는 아래에 번역된 내용과 같이 일본 주소는 자세히 기입되어 있는 반면, 조선 주소는 아예 기재되지 않았다.

 

 

"인허증、제5호

(본적주소) 없음

(주소) 카와베군 니시타니촌 내의 타마세촌 이즈리하 1번지의 45

(성명) 장장수(생년월일) 없음, (나이) 37

위사람의 매장을 허가한다. 다만 1915년 3월24일 오후2시 후에 이행할 것.

1915년 3월24일、카와베군 니시타니 촌장 다츠미 류이치 (도장)”

 

1915년 3월24일、카와베군 니시타니 촌장  명의로 발행된 장장수씨의 매장 인허증. 일본내 주소는 자세히 기록되었지만 조선 본적지 주소는 없다.

 

정홍영 선생이 이 인허증에서 주목한 것은 타마세의 주소 이즈리하 1번지의 45”였다. 이것이 장장수씨가 기거했던 주소지라면 조선인 노동자들의 합숙소(=함바)였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정홍영 선생은 이즈리하가 타마세에서 타케다오 일대의 넓은 산간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이며, 코요칸(紅葉館)의 주소가 지금도 이즈리하 1번지의 44”이었다고 했다.

 

곤도 선생이 1993326일 아침 정홍영 선생과 함께 호리우치 미노루(堀内稔) 선생에게서 받은 신문기사 사본을 들고 다케다오(武田尾)로 향하던 중, “도중에 차를 세우고 커피를 마시면서 기사 내용을 확인했다는 찻집 겸 식당도 코요칸이 아니었을까?

 

<코요칸>은 지금도 여관/음식점으로 영업 중인데, 특히 <아자레(あざれ)>라고 불리는 코요칸 별채 정원(紅葉舘 別庭)은 예약률이 높은 고급 온천관광 숙박지이다. <아자레>의 웹사이트에는 이곳의 주소는 다카라즈카시 타마세 이지리하 1-47번지라고 되어 있다.

 

정홍형 선생의 저서에 기술된 <코요칸(이즈리하1-44번지)>의 위치와 <아자레(이즈리아1-47번지)>의 위치. 장장수씨가 기거했던 노동자 합숙소의 주소가 이즈리아 1-45번지이므로, 그 위치는 <코요칸>과 <아자레> 사이의 어느 지점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당시의 주소 체계가 지금과 유사했다면 조선인 노동자 합숙소(1번지-45)<코요칸>(1번지44)<아자레>(1번지47)의 사이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도를 보면 무코강변의 <아자레>와 소가와(惣川) 천변의 <코요칸>1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데, 그 중간의 어느 지점에 장장수씨가 기거했던 조선인 노동자 합숙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정홍영 선생은 코요칸의 여주인 마츠모토 아야미(松本文美, 당시 78)씨를 인터뷰하면서 조선인 노동자 합숙소와 사고 상황을 물었다. 마츠모토씨는 코요칸 근처에 큰 합숙소가 2개 있었는데, 하나는 언덕 위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무코강변에 있었다고 했다.

 

조선인이 있었느냐는 정홍영 선생의 질문에 마츠모토씨는 조선 사람도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공사 중의 사고에 대해 마츠모토씨는 터널에서 발파 사고로 부상자가 꽤 많았온 몸에 돌이 박혀서 오늘은 세 명, 내일은 다섯 명이라는 식으로 피투성이가 되어 의사에게 실려 가는 것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정홍영 선생의 저서 15면에 수록된 니시타니 지역에서 진행되었던 <고베수도 제1차확장공사의 도수터널 공사 목록>. 이 목록에 따르면 장장수씨는 제4호터널공사에 종사하던 중 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주소와 공사장이 가장 가깝고, 공사시기와 그의 사망시기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정홍영 선생은 마츠모토씨가 지적한 곳에 가봤으나 의사가 살았다는 별장 같은 건물도 없었고, 노무자 합숙소가 있었다는 곳은 테니스장이 되어 있었다고 했다. 무코강변의 합숙소 건물 터에도 아무 흔적이 없었지만 그 자리가 4호 터널이 강 건너 수관교(水管橋) 아래 5호 터널 입구 근처임을 확인했다고 했다.

 

따라서 장장수씨가 <아자레><코요칸> 인근 이즈리하의 합숙소에서 기거했다면 그가 참가했던 공사장은 정홍영 선생의 관찰대로 이즈리하 부근의 4호터널 공사였음에 틀림없다. 거주지와 공사장이 같은 지역일 뿐 아니라 4호터널의 공사 기간(1914818일부터 1916713일까지)이 장장수씨의 사망일(1915324)과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한편, 김병순씨의 사망일은 191483, 남익삼씨의 사망일은 1915123일이므로, 남익삼씨는 12개 터널의 어느 공사에도 종사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김병순씨는 5-10호터널 공사중의 하나에 종사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김병순씨의 사망일은 1-4호와 11-12호터널 공사가 시작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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