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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역(1900-1922)과 경성역(1923-1945)은 경성의 최고 명소였다.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여행안내서에는 조선호텔과 함께 경성역의 사진이 빠진 적이 없었다. 또 경성역은 신문과 잡지, 방송 등의 미디어는 물론,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화제였다. 새로운 문물이 모두 이 역을 통해 경성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남대문역은 19226월부터 신축공사가 시작되어 19259월에 완공되었고, 공사 중이던 192311일부터 경성역으로 개칭되었다. 신청사 완공 후에는 식당업무가 크게 증가했다. 2층 구내식당에는 5백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연회장이 구비되었고, 1층에는 1등 승객 대합실 옆에 <티룸>이 생겼다. 지하1층에도 일식당과 양식당, 그리고 중식당이 영업을 개시했다.

 

 

남대문역 시절과 경성역 시절을 막론하고 이곳의 식사비는 비싸기로 유명했다. 앞서 소개한 19161020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기행문 철원행에는 홍차 값이 바가지요금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에피소드가 소개되어 있다.

 

남는 30분을 이용하여 정거장 끽다점에서 양식 2-3품을 먹으려고 들어간즉 뽀이가 말하기를, ‘시간이 절박하여 조달치 못하니, 산도우잇지(=샌드위치) 같으면 된다하는 고로 부득이 산도우잇지를 주문하고 (동행) 김군과 함께 홍차 1잔씩을 마시는데, 5분 남았다는 종소리가 발차를 재촉하므로 계산한즉 산도우잇지 3개와 홍차 2잔에 그 값이 140전이라고 했다.

 

무심히 지불하고 승차 후 생각해 보니 그 값이 지나치게 높았다. 산도우잇지 1개는 25전이나 30전으로 기억하는데 30전으로 하여도 3개에 90전이다. 그러므로 홍차 2잔의 가격이 50전이라면 이는 매우 높았던 것이다. 질문해 보고자 했으나 시간이 절박하니 어찌하겠는가. 이는 필시 뽀이의 계산 착오인 듯하다.”

 

글쓴이가 지불한 샌드위치와 홍차 두잔 값 50전은 종업원의 계산 착오가 아니었을 것이다. 1930년대까지도 경성 시내의 커피 값은 10전이거나 그 이하였다. <남대문역 끽다점>에서 그보다 2.5배 비싸게 받는 것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도 스타벅스 커피는 그랑데 사이즈가 5천원으로 결코 싼 편이 아니지만, 유수 호텔의 커피 값은 2만원 이상이다.

 

<조선급만주> 19346월호의 식당순례에 따르면 경성역 구내식당의 일식 아침식사는 60, 점심과 만찬은 1원이었고, 양식의 경우는 아침이 80, 점심과 만찬은 125전이었다. 1936년에 조사된 활판식자공의 평균 일당이 121, 이발공의 일당이 123전이었다. 숙련노동자의 하루 일당이 한 끼 식사비였던 것이다.

 

 

오늘날 대리석 석공의 하루 일당은 숙련도에 따라 12-20만원이다. 한끼 식사비가 15만원이라면 철원행저자의 말마따나 지나치게 비싼 것(太高)’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남대문역 끽다점>이나 <경성역 구내식당>은 그처럼 높은 가격이 용인될 만큼 고급 시설이었던 것이다.

 

음식값이 높은 만큼 식재료와 요리 솜씨가 좋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특히 신선한 고급 식재료 공급에 수완을 가진 사람들이 선발되어 식료품 및 잡화의 공급 계약을 맺곤 했다. 경성의 명사들의 이름을 수록한 <경성시민명감(1921)>에는 <남대문역 끽다점>에 식자재를 공급하면서 부자가 된 마츠이 카이치로(松井嘉一郞, 1877-?)의 이름도 올라있다.

 

히로시마현 출신인 마츠이 카이치로는 19042, 27세의 나이로 조선에 건너와 경성의 식료잡화상점인 무라타(村田)상점에서 종업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2년 후인 19063월 그는 무라타 상점을 인수해 조선주차군 사령관 관저와 군사령부에 식료품과 잡화를 공급했다. 군납 계약을 따낸 것이다.

 

이후로도 그의 사업은 번창해서 1910년부터 조선총독부 관저, 1911년부터 리왕직 선무실에 식료품을 납품했다. 19134월부터는 철도국 남대문역 끽다점과 식당차용 물품을, 191410월부터는 철도국 호텔(=조선호텔)에 식료품을 납품했다.

 

마츠이 카이치로는 경성 주요기관의 식료품 공급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남촌의 최부촌 욱정(旭町) 3-199번지 저택에서 살면서, 경성의 명사 인명부에까지 올랐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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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역사는 19002층 목조 건물로 완공되어 재건축이 시작된 19226월까지 사용되었다. 공사기간 중이었던 192311일부터 남대문역은 경성역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19259월에 완공된 3층의 석조 신역사는 19251012일부터 개관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다.

 

남대문역이 경성역으로 개축되고 개칭됨에 따라 그 내부의 식당 시설도 변화를 겪었다. 1909년 개업 이래 1922년까지 사용되었던 <남대문역 끽다점>은 문을 닫았지만, 192510월부터 문을 연 신역사에서는 식당부와 끽다부가 분리되어 문을 열었다.

 

신축중인 경성역, 1924년 10월경, 오늘날의 서울역

 

잡지 <조선과만주(朝鮮及滿洲)> 19346월호에 실린 식당순례(食堂めぐり)”라는 기사는 경성역의 <구내식당><끽다실>에 대해 이렇게 보도했다.

 

“(제목) 경성역 2층식당 (본문) 경성역의 구내식당은 2층의 대식당과 1,2등 대합실 옆에 있는 끽다실, 그리고 열차식당도 경영하고 있다. 조선호텔과 마찬가지로 41일부터 철도국의 손으로 돌아와 관영하게 되었다. 양식, 일식, 중국요리가 주문에 따라 가능하다.

 

식당의 설비는 나무랄 데 없는 곳이다. 위층 대식당은 동시에 200명을 수용할 수 있고, 연회장으로도 이용할 수 있다. 근대식 설비의 건물인 만큼 공기가 매우 맑고, 요리도 상위권이다. 따로 소식당이 있어서 30명까지 테이블을 마련할 수 있다.”

 

<남대문역 끽다점>에 합쳐져 있던 식당부와 끽다부가 <경성역 구내식당><경성역 끽다실>로 분리된 것이다. 2층의 <경성역 구내식당>은 한꺼번에 2백명을 수용하는 연회장으로 사용될 수 있었으므로 각종 단체의 총회나 연례 모임에 대관되었다. 이 기사는 또 2층의 대식당과 1층의 끽다실의 종업원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2층의 접객 뽀이는 전부 남자로 20명이다. 조리사는 약 40명이다. 이곳 식당에도 여자 뽀이가 있으면 부드러운 맛을 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주문이 많다. 아래층의 접객 뽀이는 15살부터 20살까지의 여자로 7명이다. 모두 모던한 그레이 유니폼을 입고 있다. 명랑하고 애교가 좋아서 인기를 얻고 있다.”

 

 

2백명을 접객할 수 있는 <구내식당>의 종업원이 20명인데, <끽다실>의 종업원이 7명이라고 한 것을 보면 끽다실의 규모도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적어도 50-70명을 한꺼번에 접대할 수 있는 정도의 규모가 되었을 것이다.

 

종업원을 뽀이라고 한 것이 이색적이다. ‘뽀이는 영어단어 보이(boy)’에서 전화된 말일 것임에 틀림없다. 일본이나 서양에서 들어온 신문물을 일찍부터 누리던 남성을 모던 뽀이라고 불렀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모던 뽀이는 흔히 모뽀(モポ)’라는 줄임말로 통용되었다.

 

그런데 이 기사에서는 여성 종업원도 뽀이라고 불렀다. 왜 여성을 뽀이라고 불렀을까? ‘모던 뽀이와 마찬가지로 모던 껄도 있었고, ‘모가르(モガール)라는 줄임말도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그런데도 당시 경성사회는 여자 종업원을 뽀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여종업원을 뽀이(ポーイ)라고 부른 것은 일본어 잡지 <조선급만주(19346월호)>의 실수가 아니다. 한국어로 발행되던 <동아일보(1927615)>에도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제목) 카페 엄중단속, 본정서의 철퇴, (본문) 시내에 있는 카페의 내용개선에 대하여 당국에서는 ... 뽀이고용관계에 여러 가지로 불미한 점이 많아서 ... 지난 십사일 오전 열시부터 관내 카페영업자 오십삼명을 동서루상으로 모아가지고 ... 작부나 여뽀이들을 카페문간에 내어보내어 손님을 끄는 등의 일은 절대로 하지 못한다...”

 

이 기사에는 아예 뽀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직역하면 여자소년이라는 형용 모순의 비어인데도 당시에는 신문에 쓸 정도로 정상적인 어법이었다. 아마도 식당과 끽다점 등의 신문물 서비스업의 종업원이 대부분 남성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뽀이라고 불렀던 관행이 그 직종에 여성들이 진출한 후에도 그대로 사용되었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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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야(1917)>보다 먼저 개업된 끽다점은 1909111일에 개업한 <남대문역 끽다점>이었다. 남대문역이란 지금의 서울역(1947-지금)이지만, 한동안 경성역(1923-1947)이라고 불렸고, 그 전의 명칭이 남대문역’(1900-1923) 혹은 남대문 정거장이었다.

 

일제 강점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던 1909년 한성에는 중구 순화동 1번지부근, 즉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자리 서남쪽에 서대문역이 있었고, 이것이 경인선(190078일 개통)의 시발점이었다.

 

경인선은 1899918일 개통되었지만 당시의 시발역과 종착역은 노량진역과 인천역이었다. 까지였다. 이때 경인선이 한성까지 닿지 못한 것은 한강을 건널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강 철교 공사는 1897329일 시작되었으나 인력난과 재정난으로 지연되다가 19007월에야 완공되었고, 이에 따라 용산역과 남대문역을 거쳐 서대문역까지 연결된 것이 190078일이었다. 일제 강점 후에는 서대문역이 경성역이라고 불렸다.

 

1910년경의 남대문 정거장

 

한편 서대문역과는 별도로 1900년 남대문역이 2층의 목조건물로 신축되었고, 1919년 서대문역이 폐쇄된 후에는 남대문역이 서울로 통하는 모든 철도의 관문 역할을 했다.

 

이 남대문 역사 2층에 끽다점이 생긴 것이다. 1909113일의 <황성신문> 2면에는 다음과 같은 한 문장짜리 단신이 보도되었다.

 

“(제목) 다방개설, (본문) 남대문 정거장에는 1일부터 끽다점을 개설하였다더라.”

 

<남대문역 끽다점>은 역사 2층에 마련되었고 식당부와 끽다부가 합쳐진 형태였다. , 일식과 양식, 중식뿐 아니라 커피와 홍차를 주문할 수 있었다. 1915년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출판한 여행 안내책자 <조선철도여행안내(1915)>에는 <남대문역 끽다점>의 내부 사진이 2장 실려 있다.

 

끽다점의 현관문을 찍은 사진에는 유리창에는 리프레쉬먼트 룸(Refreshment Room)”이라고 영문으로 쓰인 밑에 끽다점(喫茶店)이라고 한자로도 표기되어 있었다. 이 유리현관문의 윗편과 양 옆에는 꽃무늬의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이 되어 있었고, 그 위에는 부채꼴 모양으로 다시 한 번 <끽다점>이라고 씌여 있었다.

 

 

끽다점 내부를 촬영한 사진에는 2인용과 4인용 테이블들이 희고 긴 테이블보에 덮여 있었고, 각 테이블 위에는 두어 개의 양념통과 함께 꽃이 꽂혀 있어 미관에도 매우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했다. 테이블 뒤편, 현관문 바로 앞에 서 있는 남자 종업원은 흰색의 상의제복에 짙은색 바지를 갖춰 입고서 예의를 갖춰 접객할 준비를 갖춘 것으로 보여, 오늘날의 고급 레스토랑을 연상시킨다.

 

<다리야(1917)> 이전에 <남대문역 끽다점(1909)>이 영업 중이었던 사실을 보여주는 또 다른 문헌도 있다. 19161020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철원행이라는 기행문에는 승객이 남대문역을 출발하기 전에 끽다점을 방문했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14일 오후 6시발 열차를 탑승하여 철원으로 향하고저 남대문 정거장에 도착한즉 ... 시각이 정확히 530분이므로 발차까지 30분의 여유가 있었다. ... 남은 30분을 이용해 정거장 끽다점에서 양식 2-3품을 먹으려고 들어가...”

 

<조선철도여행안내(1915)>의 사진과 <매일신보(19161020)>의 기사는 <다리야 끽다점(1917)>이 생기기 8년 전에 <남대문역 끽다점(1909)>이 영업 중이었음을 확인해 준다. 따라서 <청색지>의 노다객이 <후타미(1926)>를 경성의 첫 끽다점이라고 한 것은 오류였던 것이다.

 

<남대문역 끽다점> 이전에도 일반인에게 커피를 판매하던 끽다점이 있었을 가능성은 높다.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그같은 사실을 암시하는 기록도 몇 가지 남아 있다. 하지만 우선 <남대문역 끽다점>에 대한 기록들을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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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다객의 경성다방 성쇠기는 경성다방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한 글이다. 따라서 최초의 끽다점이 무엇이었는지가 그에게 중요했다. 노다객은 경성에 개업된 최초의 일본인 끽다점은 <후타미>, 조선인 최초의 끽다점은 <카카듀>이었다고 서술했다.

 

우선 <후타미>가 과연 경성 최초의 끽다점이었는지 검토했는데 새로운 사실이 다수 발견됐다. 노다객을 포함하여 많은 저자들이 경성최초의 끽다점은 1923년 본정 3정목에 개업한 <후타미>라고 서술했다. 서울시의 공식문건인 <서울정도 600>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서울에 지금과 같은 형태와 기능을 갖춘 다방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3.1운동 후였다 ... 1923년에 명치정에는 <이견(二見)>, 일본말로 <후타미>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다방이 문을 열었고, 이어서 본정, 즉 진고개 2정목에는 식료품점 <귀옥(龜屋)> <가메야> 안에 <금강산>이란 이름의 다방이 문을 열었다. 이 두 다방은 모두 일본사람들의 경영으로 문을 열었지만 우리나라 그것도 서울의 다방으로서는 첫 테이프를 끊은 셈이었다.”

 

그러나 <후타미>가 개업한 것은 1923년이 아니라 1926년이었다. 1926822일의 <경성일보>에 따르면 바로 그날, 1926822일이 <후타미>의 개업일이었다. 광고문은 22일부터 24일까지 개업 피로 행사기간에 참여하는 고객에게 '사은품(粗品)을 증정한다고 했다.

 

 

<후타미>의 개업년도가 1926년이라면 1927년에 개업되었다는 조선인 끽다점 <카카듀>와는 1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으며, 그것이 경성 최초의 끽다점일 가능성은 현저하게 줄어든다.

 

한편 <나카무라상회 끽다부>가 경성의 첫 끽다점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1963220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개화초기-차와 다방이라는 글에서 화가 김용진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1910(융희4) 8월 망국의 칙서가 내리기가 무섭게 서울 진고개에는 다방이 생기기 시작했다. 왜인 나카무라(中村)’란 자의 다방이 제일 먼저 생겼으나 잇달아 <메이지(明治)>, <공고산(金剛山)>, <모리나가(森永)> 등의 찻집이 생겨났다.”

 

김용진이 경성 최초의 다방이라고 서술한 <나카무라><나카무라상회 끽다부(中村商會喫茶部)>를 가리킨다. 1928629일자 <경성일보> 1면에 <나카무라상회 끽다부>개시된다는 광고가 실렸다. <나카무라(1928)><후타미(1926)>보다 뒤에 생겼으므로 그것이 경성 최초의 끽다점이었을 리 없다. 김용진의 기억에 착오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다른 한편, 일본어 잡지 <조선공론> 19322월호에 실린 빨간 꽃도 피는 경성의 단 곳이라는 기사에는 1920<다리야 끽다점>이 개업했다는 내용이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

 

저 멀리 10년 전, 1920년 가을에는 단 것을 파는 가계로서 현재의 끽다점을 경영하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으나, ... 카미요시옹(神吉翁)이 본정 2정목에 다리야 끽다점을 경영하고 있던 정도가 나의 기억에 있다. ... 그리고 나서 5,6년 지나고 나서 요시카와군(吉川君)이 본정 3정목 우편국의 건너편에 끽다점 <후타미(二見)>를 개업했다.”

 

 

<조선공론>의 이 기사에 따르면 경성 최초의 끽다점은 1920년 카미요시 나가사쿠(神吉長作, 1874-?)가 본정 2정목에 개업한 <다리야 끽다점>이다. 효고현 고베 출생의 카미요시 나가사쿠는 고베에서도 과자가게를 경영했던 사람으로, 191510월 조선으로 건너와 경성 본정 2정목 81번지에 과자점을 개업해 다리야 일본과자를 제조해 판매했다.

 

과자점이 자리 잡자 카미요시 나가사쿠는 본정 2정목 90번지에 별도의 끽다점을 개업했다. <조선공론>은 그 시점이 1920년 경이었다고 서술했으나, 더 자세한 인명기록에 따르면 <다리야 끽다점>의 개업은 191712월이었다. 카미요시 나가사쿠는 1930년 미츠코시 백화점이 개점되자 그 3층에 <다리야 백과점>을 입점시키기도 했다.

 

그렇다면 <후타미(1926)>보다 9년이나 일찍 개업한 <다리야(1917)>가 경성의 첫 끽다점이었을까? 아니었다. <다리야>보다 11년 전인 1909년에 개업된 끽다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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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듀> 조사의 출발점은 <왈츠와 닥터만>의 에세이였다. 그 에세이에는 3개의 문헌이 언급되었다. 잡지 <청색지> 19385월호에 실린 경성다방 성쇠기,’ 1940214일의 <조선일보>에 실린 안석영의 은막 천일야화,’ 그리고 잡지 <세대> 19644월호에 실린 이봉구의 한국 최초의 다방: 카카듀에서 에리자까지가 그것이었다.

 

우선 경성다방 성쇠기에 주목했다. 세 문헌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자료였고 <카카듀>의 개업에 가장 가까운 글이었기 때문이다. <왈츠와 닥터만>의 에세이에는 이 글의 일부만 인용되어 있었으므로 나는 중앙도서관에 가서 <청색지> 창간호를 찾아 글 전체를 복사했다.

 

 

경성다방 성쇠기3부분으로 나뉘어 서술되었는데, 노다객(老茶客)2부를 <낙랑파라(1932)>부터 서술하면서 이때부터가 경성다방문화사의 제2기라고 했다. 그 이전의 끽다점인 <카카듀><멕시코><뽄아미>는 경성다방 문화사의 초기에 해당한다고 분류한 셈이다. 경성다방 문화사 1부분을 통짜로 인용해 보자.

 

“(제목) 경성 다방 성쇠기, (글쓴이) 노다객(老茶客=필명), (본문) 서울서 맨 처음 우리가 다점(茶店)이라고 드나든 곳은 본정(本町=충무로) 3정목(=3), 현재 근처에 있던 이견(二見, 후타미)’이란 곳으로 이곳이 아마 경성 다방의 원조일 것이다. 그 다음이 현재 본정 2정목에 식료품점 구옥(龜屋=카메야쇼텐의 줄임말) 안에 있는 금강산으로 우리들과 같이 동경서 새 풍습을 익혀 가지고 돌아온 문학자나 화가나 그 밖에 지극히 소수의 내지인(內地人=일본인) 청년이 있을 뿐이었다. 아마 그 시절 다방 손님은 현재 적어도 나이가 30을 훨씬 넘은 중년으로 지금엔 대부분이 다방출입을 그만둔 이들이나 지금에 융성한 다방문화의 개척자들도 선공(先功)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뒤 조선사람 손으로 조선인 가()에 맨 처음 났던 다방은 9년 전 관훈동 초() 3층 벽돌집(현재는 식당 기타가 되어 있다.) 아래층 일우(一偶=한 구석)에 이경손씨가 포왜(布哇=하와이)에선가 온 묘령 여인과 더불어 경영하던 카카듀. 이 집은 이씨의 떼카(데카당스의 줄임말=퇴폐적) 취미를 반영하야 촛불을 켜고 인도 모직마포 테이블 크로스에다 조선가면을 걸어 놓고 간판 대신에 붉은 칠한 바가지 세 쪽을 달아 놓아 한때 경성 가두에 이채를 발()하였다. 그러나 경영에 능치 못한 이씨이고 다방도 그리 흔치 못한 때라 불과 수수(數數) 월에 문을 닫고 이씨는 상해로 가고 여주인의 행방도 알 길이 없었다.

 

 

그 뒤 2년인가 지나 본정에 명과(明果=메이지제과의 줄임말, 1930)가 개점을 하여 정말 맛있는 가배(珈琲=커피)를 먹여 이후 차 맛을 따라 모이는 손들을 끌거니와 역시 전문적 다점으로 종로대로에 근대적 장식을 갖춰 나타난 것은 8년 전 일미(日美=일본미술학교)의 도안과를 나와 현재 영화배우 노릇을 하는 김인규(金寅圭)씨와 심영(沈影)씨가 차려 놓았던 <멕시코(1929)>. 지금은 <뽀나미(1932)>와 더불어 가 되어 주객(酒客)의 모양밖에 찾을 길 없으나 당대엔 문사, 음악가, 배우, 신문기자들을 위시하야 문화인이 모여드는 양대 중심이었다.”

 

이어서 노다객은 제2기의 끽다점으로 김연실의 <낙랑파라(1931)>, 이상의 <69>, <제비(1933)>, <무기(, 1935)>, 유치진의 <플라타느(1932)>를 들었고, 이상의 <무기>가 북촌의 조선인 끽다점이 처음으로 남촌의 명치정으로 진출한 효시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어서 노다객은 제3기에 해당하는 끽다점으로 김관의 <에리자>, <하리우드>, <노아노아>, <미야지마>, <백룡>, <따이나>, 당시 신설의 <오리온>과 경성 역전의 <돌체>, 본정 3정목의 독일풍 다점 <>등을 들면서, 이 시기에는 명동이 끽다점의 중심이 되었다고 덧붙였다.

 

노다객의 경성다방 성쇠기는 경성의 조선인 끽다점 문화가 인사동과 종로에서 시작하여 소공동과 명동으로 이동했던 과정을 잘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가 당시의 끽다점을 망라한 것 같지는 않다.

 

예컨대 일본인이 개업했다는 <다리야(ダリヤ, 1920)>과 쇼카코오키나(小構子おきな, 1921)를 언급하지 않았고, 조선인이 개업한 <비너스(1928 혹은 1932)>도 누락되었다.

 

그보다 조금 더 심각한 것은 저자가 서술한 내용에도 몇 가지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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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츠와 닥터만><카카듀> 자료는 내용은 사뭇 미흡했지만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왈츠와 닥터만>의 창립자 박종만 선생의 열정에 감탄했다. 얼마나 커피를 좋아했으면 카페를 여는 데에 그치지 않고, 서울 중심가에서 뚝 떨어진 북한강가로 옮겨 박물관까지 세운단 말인가.

 

게다가 그는 커피 탐험대라는 조사단을 꾸려서 몇 년째 커피와 관련 지역을 탐방하고 있었고, 한국뿐 아니라 해외 원정까지 다니고 있다는 홍보문을 읽으면서 우리는 경탄했다. 홍보문에 다소 과장이 섞여 있더라도 그런 사업이 시도되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이맹수 선생과 주환중 선생은, 우리가 박물관의 <카카듀> 자료를 보충해서 박종만 사장의 노력을 도와주자고 했다. 나도 찬성했다. 우리가 이런 호기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은 그 무렵 우리가 무용가 최승희 선생의 집 주소를 두 개나 밝혀낸 바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찾아낸 것은 최승희 선생이 학창시절 거주지였던 체부동의 초가집 주소와 그의 생가였던 수창동의 기와집 주소였다. 리서치를 주로 담당했던 것은 나였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건축가인 주환중 선생이나 은행가인 이맹수 선생이 이런 종류의 자료 조사와 해석 작업에 익숙할 리 없었고, 그것은 문헌 조사와 자료 분석이 생업이었던 나의 일이었다.

 

새로운 결과가 나올 때마다 나는 이맹수 선생과 주환중 선생에게 보고했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우리는 다회를 열고 함께 의논해 나갔다. 나의 보고에 대한 이맹수 선생과 주환중 선생의 피드백은 유용했고, 때로는 신선하리만큼 창의적이어서 내가 조사를 계속하는 데에 새로운 방향을 열어주기도 했다.

 

최승희 선생의 학창시절 주소를 찾아냈을 때 우리는 구글맵에서 그 위치를 찾아내어 나란히 서촌 어귀의 <토속촌 삼계탕>집을 방문했다. 그 삼계탕 식당의 주차장으로 변해 버린 최승희 선생의 집터를 둘러보고 나서 우리는 한방 삼계탕을 한 그릇씩 먹었다. 성업 중인 <토속촌 삼계탕>의 내부는 시끄러운 편이어서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눈에 보이는 현상을 바꾸는 세월의 힘에 대해 잠깐이나마 이야기했던 것 같다.

 

 

최승희 선생의 생가 주소를 발견했을 때도 우리는 세종문화회관 뒤편에 모였다. 커피 한잔씩을 사들고 주시경 공원에서 경희궁 자이 아파트단지 사이를 거닐면서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최승희 선생의 생가를 머리속으로나마 그려보곤 했다.

 

최승희 선생의 두 주소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토지조사부><지적원도>를 열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자료를 보려면 복잡한 신청과 대기의 과정을 겪어야 했겠지만, 지금은 모두 인터넷 검색으로 가능하다. 이 자료에 대한 기초지식이 필요하고, 범위를 좁혀 들어가기 위해서 다소 지루한 시행착오 과정을 거쳐야 했지만, 어쨌든 그 자료는 공개되어 있고 어디서나 가용했다. 내 연구실의 책상 앞을 떠나지 않고도 80여년 전의 자료를 검색해서 참조할 수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임에 틀림없다.

 

법원의 <등기부>도 도움이 되었다. 이 자료를 보기 위해서는 해당 법원에 가서 자료 신청을 해야 했지만,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1910년대와 1920년대의 경성 주소지를 찾아낼 수 있다는데, 그 정도의 수고를 지불하는 것은 오히려 싼 편이었다.

 

 

<카카듀>를 추가로 조사해 박용만 사장의 노력을 돕기로 우리끼리 결정한 그날이 우리 모임 <카카듀를 찾아서>가 시작된 날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1920년대와 30년대의 커피 관련 자료를 찾아다녔다. 인터넷 검색은 기본이었고 수시로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을 방문했다. 한국의 커피사를 다룬 책이면 닥치는 대로 사서 읽었다. 영화감독 이경손을 조사하기 위해 방콕을 세 차례나 방문하기도 했다.

 

새로운 사실이 나올 때마다 나는 <카카듀를 찾아서>를 소집했고, 우리는 소박한 식사와 긴 다회를 통해 새로 발견된 사실을 이모저모로 곱씹으며 뿌듯해 하곤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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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내가 주환중, 이맹수 두 선생을 졸라서 <왈츠와 닥터만>에 가자고 한 것은 커피 박물관의 이 <카카듀> 설명문을 보기 위해서였다. 기대와는 달리 <카카듀>에 대한 설명은 지나치게 간략했다. “카카듀, 조선인이 운영한 최초의 다방이라는 제목의 패널 한 장과 유리 액자에 끼워진 인사동 일대의 지도 사진 한 장이 전부였다. 패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조선인이 운영하는 최초의 다방은 영화감독 이경손이 3층으로 된 병원 건물의 1층에 문을 연 카카듀였다. 1927년 개점하였다는 기록과 28년 개점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운영은 영화감독 이경손과 하와이 출신의 미스 현이라는 여인이 함께 했다. 전시회, 문학 좌담회 등 의욕적으로 문화행사를 개최했으나 경영상의 문제로 얼마 못 가 문을 닫았다.”

 

기록에 의하면 카카듀는 관훈동 초입 안국동 네거리 나가기 전 3층 벽돌집 병원건물의 1층에 위치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관훈동 지도를 통해 대략의 위치를 추정할 수는 있으나 아직까지 정확한 소재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왈츠와 닥터만 커피 박물관은 카카듀가 있었던 위치를 찾기 위해 조사를 수년째 계속 진행하고 있다.”

 

 

이 두 문단 사이에 사진 두 장이 나란히 끼워져 있었는데, 한 장은 <혜정박물관>이 제공했다는 1929년의 인사동 지도였고, 다른 한 장은 1917년의 경성부 관내 지적 목록이었다. 지도는 적절한 시기의 것을 제시했으나 <카카듀>의 정확한 위치를 표시하지 못했고, 지적 목록은 <카카듀>가 생기기 10년도 더 전인 1917년의 것이어서 <카카듀>와는 상관없는 자료였다.

 

그밖에 이 커피 박물관 전시물 중에는 <카카듀>에 대한 자료가 하나 더 있었지만 패널과 같은 내용이었다. 1929년의 인사동 지도가 다시 게재되었고 거기에 조선인이 운영한 최초의 다방 <카카듀>는 지금의 인사동, 안국동 네거리 나가는 곳에 위치했다.”고 설명되어 있었다.

 

커피 박물관을 방문하기 전, 나는 <왈츠와 닥터만> 웹사이트를 검색해 거기 포스팅된 20편 이상의 에세이들을 미리 읽었다. 그중에는 <카카듀>에 대한 글도 한 편 있었다. 박물관의 전시물은 이 <카카듀> 에세이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에 더해진 내용은 없었다.

 

<카카듀> 에세이가 밝혀내지 못한 사실도 있었다. 첫째는 <카카듀>의 개업시기였다. 전시물과 마찬가지로 에세이도 개업년도에 대한 견해도 분분해 사람에 따라 1927년 혹은 1928년이라 제각기 주장하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했다.

 

 

둘째는 <카카듀>의 소재지였다. 에세이는 <카카듀>현재의 인사동, 안국동 네 거리 나가는 길 못 미쳐 3층 병원의 1층 건물에 위치하였다고 하면서도 그러나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고 썼다.

 

셋째는 <카카듀>의 경영자였다. 에세이가 인용한 잡지 <청색지>경성다방성쇠기라는 기사는 <카카듀>이경손씨가 하와이에선가 온 묘령여인과 더불어 경영했다고 썼다. 에세이는 이 하와이에서 온 묘령의 여인미스 현이라고 밝혔지만 이름이 무엇이며 그가 누구였는지는 밝히지 못했다. 더구나 영화감독 이경손도 한국 커피사와 영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인물이지만 그에 대해 밝혀진 사실은 많지 않다고 했다.

 

넷째는 <카카듀>라는 이름의 의미다. 에세이는 이봉구를 인용하면서 국적조차 알 수 없는 이름을 둘러싸고 당시 사람들은 노서아어라느니 서반아어라느니 투우사의 애인이름이라느니 각종 추측을 쏟아 내었지만 (경손)씨에게 직접 들었다는 사람의 입에서 카카듀는 불란서 혁명 때 경찰의 눈을 피해 모이는 비밀아지트인 술집 이름이었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이 설명은 신뢰하기 어려웠다. 우선 카카듀라는 말은 프랑스어 단어가 아니다. 프랑스인들이 성이나 이름으로 쓰던 말도 아니다. 프랑스어에서도 외국어나 외래어임에 틀림없을 이 말을 근거로 그것이 프랑스의 술집 이름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커피 박물관을 둘러보고 다시 카페로 향하면서 이맹수 선생이 내게 말했다. “<카카듀> 소재지를 자네가 한번 찾아보면 어떨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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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개업한 최초의 커피전문점으로 알려진 <카카듀>를 찾아 나선 것은 20181229일이었다. 그날 우리는 서울 동북부 30킬로미터쯤에 위치한 남양주의 커피전문점 <왈츠와 닥터만>을 찾았다. 그날의 우리란 이맹수 선생과 주환중 선생,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었다. 이후 여러 명이 더 참여하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카카듀를 찾아서>의 첫모임이었다.

 

한 겨울이었고 강변도로 건너로 보이는 얼음 덮인 북한강은 차갑고 을씨년스러웠다. 하지만 유럽의 성채 같은 <왈츠와 닥터만>은 단단하고 믿음직스러운 외양으로 차가운 겨울 강바람을 완벽하게 차단해주고 있었다. 현관 옆 외벽에 걸린 청동 명패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커피 캐슬, <왈츠와 닥터만>100년 가는 커피 명가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북한강가에 세운 아름다운 커피 왕국입니다. 1989년 홍대앞 커피하우스 <왈츠>의 문을 연 것으로 시작해 우리나라 노지에서의 커피재배 연구(1998), 한국 최초의 커피 박물관 개관(2009), 닥터만 금요음악회(2006), 그리고 커피 역사 탐험대 출정(2007) 등 한국 커피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겨오고 있습니다.”

 

남양주 북한강가에 세워진 왈츠와 닥터만. 레스토랑과 카페, 커피 박물관을 함께 운영할뿐 아니라 금요음악회가 3백회를 넘긴 '커피 왕국'이다.

 

이 명패에 따르면 <왈츠와 닥터만>의 역사는 30년이 넘었고, 차와 식사를 제공하는 카페 겸 레스토랑이자 한국 커피사를 전시한 박물관이고, 커피 재배까지 시도한 커피 캐슬이다. 게다가 매주 금요일 밤에 열리는 음악회가 이미 3백회를 넘겼다는 것으로 보아 <왈츠와 닥터만>커피와 음악의 왕국을 자처한다 해도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현관 옆에 다양한 크기의 항아리와 크고 작은 선인장 화분들이 배열되어 있어서 입장객의 시선을 잠시나마 머물게 했고, 현관 오른편으로는 야외 테이블이 몇 개 놓여 있었다. 겨울철에야 차가운 날씨로 야외에 자리 잡는 손님이 없겠지만 봄가을이나 한여름에는 시원한 강바람을 즐기면서 커피를 마실 수 있게 준비해 놓았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쪽에는 바가 마련되어 있고 왼편이 카페 겸 레스토랑이다. 원목 테이블과 짙은 갈색 소파들이 가지런히 배열된 모습은 전체적으로 중후하고 차분한 옛 유럽풍이다. 크고 두터운 유리창들이 오후 햇살을 충분히 투과시켜 실내는 밝고 따뜻하고 아늑했다.

 

<왈츠와 닥터만>에서 내가 주문한 커피. 내가 그때 뭘 주문했는지는 잊었다. 아마도 쓸지언정 시지 않은 브랜드로 달라고 했을 것이다.^^ 이곳의 커피는 향과 맛도 좋지만 커피 잔이 아주 매력적이다.

 

우리는 가장 안쪽의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정장 차림의 주문 받으시는 분으로부터 메뉴판에 빼곡히 수록된 커피에 대한 설명을 경청한 후, 우리는 각자 마음에 드는 커피를 한잔씩 주문했다. 점심을 걸렀다는 주환중 선생은 크림소스 새우 파스타도 하나 주문했는데 배만 부르지 않았다면 나도 하나 주문하고 싶을 정도로 맛깔져 보였다.

 

다른 손님이 없는 틈을 타서 우리는 실내에 전시된 장식물들도 찬찬히 돌아보았다. 고풍스런 오르간을 중심으로 한 성탄 장식이 섬세했고, 우리 테이블과 통로를 사이에 두고 가드레일 저편에 마련된 한 테이블에는 수필가 피천득 선생이 즐겨 앉던 자리라고 쓰인 안내판이 있었다. 그 테이블 옆의 작은 서가에는 피천득 선생의 수필집 <대화><인연>, <어린 벗에게> 등이 꽂혀 있었다.

 

제공된 초콜릿 쿠키와 함께 커피 맛을 충분히 즐긴 우리는 박물관 구경에 나섰다. 같은 건물의 반을 박물관으로 꾸민 것이지만, 입구는 건물 바깥쪽에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입장권을 구입하고 들어서자 고즈넉한 박물관 특유의 냄새에 커피향이 섞여서 밀려왔다.

 

커피 박물관 중앙 전시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곳의 커피 관련 전시물들은 그 수와 종류가 많은데도 번잡하지 않게 잘 정리되어 있다.

 

가장 먼저 눈길을 잡아끈 것은 박물관 중앙 바닥에 놓인 전시물이었다. 커피 물을 끓이는 화로와 함께 다구 세트가 놓여있고, 그 주위를 빙 둘러 고급스런 천으로 장식된 방속이 장방형으로 마련되어 있었다.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가 커피를 즐기던 자리를 복원한 것이라고 했다.

 

박물관은 그리 넓지 않았지만 한국 커피사를 잘 정리해 전시하고 있었다. 특히 3면의 벽에는 한국에 커피가 들어온 이래로 있었던 여러 사실과 에피소드들을 보여주는 8개의 설명 패널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중 우리의 눈길을 끈 것은 한국 최초의 커피전문점으로 알려진 <카카듀>의 안내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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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1937217일의 경성 조선호텔에서 열렸던 관광협회 간담회에서 처음 제안되어, 1939217일의 파리 시사회를 끝으로 기록에서 사라졌다.

 

이후 50년 동안 <대금강산보>는 잊혀졌다. 초기의 평전 저자들도 <대금강산보>를 몰랐다. 서만일의 <조선을 빛내고저(1958)>와 다카시마 유사부로의 <최승희(1959)>에도 이 영화는 언급되지 않았고, 다카시마 유사부로가 <최승희(1981)>의 재판을 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10여년이 더 지나서 출판된 강이향의 <생명의춤 사랑의춤(1993)>도 자전적 영화 <반도의 무희(1936)>에 대해서는 비교적 길게 서술했지만, 불과 2년 후에 개봉된 <대금강산보(1938)>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1939년 2월17일 <대금강산보>가 상영되었던 파리의 살드예나 극장. 이후 이 영화에 대한 기록은 발견된 바 없다.

 

평전 중 처음으로 <대금강산보>를 언급한 것은 정병호(1995)이다. 파리 시사회 이후 이 영화가 기록에서 사라진 지 56년만의 일이었고, 정병호의 가장 큰 공헌이다. 정병호는 다카시마 유사부로와 공동 편집한 사진집 <세기의 미인무용가 최승희(1994)>에서도 <대금강산보> 로케이션 기간에 촬영한 최승희의 사진 5장을 수록했다. 이 사진들에 붙여진 설명은 불충분하거나 잘못된 것도 있지만, <대금강산보> 촬영 과정과 경로를 추적할 수 있는 단서가 되었다.

 

김찬정(2002)도 정병호(1995)를 인용하지 않고서 독자적으로 <대금강산보>를 서술했지만, 그는 일본 신문기사 하나에 지나치게 의존한 단점이 있다. 이후 정수웅(2004)과 강준식(2012)<대금강산보>를 언급하기는 했지만, 정병호와 김찬정의 서술을 인용한 것이 대부분이다.

 

강준식(2012)의 평전이 출간된 지 5년 후인 20175, 필자는 유럽취재를 통해 <대금강산보>가 파리에서 상영되었던 사실을 찾아낼 수 있었다. <대금강산보>8개의 최승희 무용작품이 삽입되어 있다는 점도 밝혀냈다. 그밖에도 <대금강산보>의 줄거리와 배역, 각 배역을 담당한 배우들을 밝힐 수 있었다. 이같은 사실은 2018년에 연재한 필자의 취재기에 언급되었고, 이 글에서도 좀 더 자세히 서술되었다.

 

최근의 조사로 최승희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에 대한 많은 것이 알려졌으나, 그 필름의 소재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필자의 조사에서 발견된 가장 중요한 점은 <대금강산보>의 제작 의도를 밝혀낸 것이었다. 최승희가 이 영화를 자신의 세계 순회공연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려고 했던 점은 기존의 평전 저자들이 잘 지적하고 있다. , 최승희는 해외 공연 전에 이 영화를 미리 상영함으로써 관객들이 조선무용에 대한 선이해를 갖기를 바랐고, 평론가들도 조선무용의 아름다움을 이국적이라는 관점 뿐 아니라 미학적관점에서 감상하고 비평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와 함께 필자는 조선 총독부가 최승희와 전혀 다른 관점에서 <대금강산보> 제작에 나섰던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다. 총독부의 강조점은 금강산에 있었다. 해외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것이 근본 의도였던 것이다. <대금강산보>는 조선총독부의 상시적인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한 방편으로 고안되었고, 1940년 도쿄 올림픽을 찾는 구미의 관광객들을 조선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홍보물로 사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최승희와 총독부는 <대금강산보>를 둘러싸고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었지만, 이 영화의 제작에 최선을 다했다. 최승희는 바쁜 공연 일정에도 불구하고 영화 촬영을 위해 일본과 조선을 여러 차례 오가면서 음악과 안무, 촬영과 편집과 시사회에 참여했다. 총독부도 철도국과 외사과를 동원해 최승희의 영화제작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총독부와 최승희의 의도는 둘 다 실현되지 못했다. 19377월에 터진 중일전쟁 때문이었고, 그 여파로 1940년 도쿄 올림픽이 취소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대형 악재가 터지자 <대금강산보>에 대한 총독부와 영화사의 관심은 퇴조했지만, 최승희는 끝까지 이 영화를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파리에서 시사회를 갖기에 이르렀다.

 

이 글은 <대금강산보>에 대한 희소하게나마 남아 있는 문헌을 중심으로 사실을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 앞으로 이 영화에 대한 자료가 더 발견되면 더 구체적인 사실들이 서술될 수 있을 것이다. <대금강산보>에 대한 연구는 이제부터 시작일 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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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는 1939년 2월17일의 파리 시사회를 끝으로 문헌에서 사라졌다. 이후 이 영화가 다시 상영되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세계 순회공연 기간뿐 아니라, 순회공연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파리 살드예나 극장 시사회 이후 <대금강산보>의 필름은 의상과 악기, 소품과 축음기 등과 함께 샹젤리제의 스튜디오에 보관되었음에 틀림없다. 전운이 감돌자 최승희는 8월 말경 파리 외곽의 바노성으로 숙소를 옮겼지만 스튜디오는 그대로 유지했다.

9월1일 전쟁이 터지고 일본 대사관으로부터 대피령을 받자 최승희는 숙소와 스튜디오를 철수해 보르도로 갔다. 제2피난선 카지마마루(鹿島丸)는 9월7일 보르도에 입항했지만, 순회공연을 이어가고 싶었던 최승희는 승선을 포기하고 기차 편으로 로마로 향했다. 

 

무용영화 <대금강산보>의 필름은 1939년 2월17일 시사회 이후 샹젤리제에 위치한 최승희 무용 스튜디오에 보관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환승을 위해 마르세유에 내린 최승희는 일본 영사관으로부터 이탈리아도 참전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더 이상 순회공연을 계속할 수 없음을 깨달은 최승희는 마르세유에서 제3피난선 하코네마루에 승선했다. 이 배는 9월18일 마르세유를 출발, 10월25일에 뉴욕에 도착했다.

최승희는 1939년 말부터 미국 공연을 재개했고, 1940년의 남미공연으로 이어졌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와 칠레, 페루와 콜롬비아, 에콰도르와 멕시코 공연을 마치고, 1940년 11월2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다츠타마루(龍田丸)에 승선했고, 12월5일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이상의 여정을 고려하면 1939년 2월17일 이후 <대금강산보> 필름의 소재는 4시기로 나눌 수 있다. (1) 9월7일까지는 상젤리제의 스튜디오에 보관되었을 것이다. (2) 파리를 출발해 보르도와 마르세유를 거쳐 10월25일 뉴욕에 도착할 때까지는 다른 짐과 함께 기차나 배의 화물칸에 적재되었을 것이다. (3) 미국과 남미 순회공연 시기에도 최승희는 이를 소지했을 것이다. (4) 일본에 돌아온 이후에는 에이후쿠초의 자택에 보관되었을 것이다.

순회공연 전 기간 동안 최승희가 필름을 분실하지 않았다면, <대금강산보>는 에이후쿠초의 자택에 보관되었다가 1944년 최승희가 도쿄를 떠나 베이징에 정착할 때 소지했을 것이다. 혹시 수하물 제한 등의 이유로 자택에 남겨두었다면 도쿄 대공습으로 저택이 파괴되었을 때 사라졌을 것이다. 약 2년의 베이징 체재 기간에도 <대금강산보>가 중국에서 상영되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이 필름은 도쿄에서 파괴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는 하다.

 

최승희는 1939년 9월18일 마르세유에서 피난선 하코네마루를 타고 유럽을 떠났다.


그러나 이 필름이 다른 곳에서 분실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파리를 떠날 때 스튜디오에 남겨두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소중한 필름이었으므로 일부러 남겨두었을 리는 없지만 실수로 분실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래서 필자는 유럽 취재 동안에 최승희의 대행사였던 <발말레트>와 시사회를 주최했던 <프랑코 야폰 위원회>를 조사했다. <프랑코 야폰 위원회>는 없어졌고 관련 자료는 패전과 함께 일본으로 이관되었다고 했다. <발말레트>는 독자적인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지만 목록상으로는 최승희와 관련된 어떤 자료도 소장하고 있지 않았다.

최승희가 파리를 떠나 보르도를 거쳐 마르세유로 이동하는 동안에 분실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피난민들이 한꺼번에 이동하던 시기였으므로 분실도 잦았고 분실물을 되찾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때 분실되었다면 <대금강산보>의 소재를 조사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미국과 남미 순회공연 기간에 필름을 분실했을 가능성은 낮다. 최승희가 비교적 안정적인 환경에서 공연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다만 1940년 10월 최승희가 칠레에서 스파이 혐의를 받고 황급히 보고타를 떠났을 때, <대금강산보>의 필름을 분실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는 없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대금강산보>의 필름은 도쿄의 에이후쿠초 저택에서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고, 혹은 남미 순회공연 시기에 칠레에서 분실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밖에 최승희가 이 필름을 중국으로까지 가져갔다면 그의 중국 체류시절을 조사해 볼 필요도 있다. 그러나 80여년이 지난 지금, <대금강산보>의 필름 소재를 찾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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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에 대한 조사를 계속하면서 어쩌면 이 영화가 칸 영화제에 출품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런 주장을 담은 문헌이나 증언을 접한 적은 없다. 그렇지만 조사를 진행할수록 그 생각이 떠나지 않았던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정황 때문이다.

첫째, 최승희는 프랑스의 새로운 영화제가 조직되던 시기에 프랑스에 체재했고, 1938년에 개봉된 극영화 <대금강산보>의 필름을 수중에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그는 조선과 일본을 제외한 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이 영화를 상영할 권리도 보유하고 있었다.

최승희는 또 파리 시사회를 통해 <대금강산보>를 유럽에서 상영한 바 있다. 어쩌면 이 시사회는 유럽 상영을 증명하기 위한 행사로 조직되었을 수도 있다. 이로써 <대금강산보>는 프랑스에서 조직되는 새로운 영화제에 출품할 수 있는 기본적인 여건을 갖춘 것이다.

 

1939년 9월 제1회 칸영화제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던 <카지노 뮈니시팔> 극장. 그해 2월26일 최승희는 이 극장에서 조선무용을 공연한바 있다.



둘째, 최승희가 칸과 비아리츠에서 공연을 기획했다는 점이다. 칸 공연은 1939년 2월26일, <카지노 뮈니시팔> 극장에서 열렸다. 1939년 상반기의 칸은 새로운 영화제 열풍에 휩싸여 있었다. 경쟁도시인 비아리츠를 제치고 영화제를 칸으로 끌어오기 위한 치열한 로비도 전개 중이었다. 새로운 영화제가 한창 화제가 되고 있었던 칸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최승희는 조선무용을 공연했던 것이다. 

한편 최승희는 비아리츠에서도 공연을 열기로 되어 있었다. 6월28일자 <바이온, 비아리츠, 바스크 가제트(Gazette de Bayonne, de Biarritz et du Pays basque)>는 최승희의 비아리츠 공연이 9월14일로 예정되었다고 발표했다. 

1936년 센서스에 따르면 프랑스 도시 인구는 파리(3백만명), 마르세유(90만명), 리용(57만명)의 순서였고, 보르도(26만명)와 니스(24만명), 툴루즈와 비아리츠(각 21만명), 낭트와 릴레(각 20만명), 스트라스부르(19만명)과 르아브르(16만명)가 뒤를 이었다. 칸의 인구는 5만명이었다.

최승희가 파리(1월31일)와 마르세유(3월1일)에서 공연을 가진 후, 인구가 더 많은 다른 도시들을 제치고 칸(2월26일)과 비아리츠(9월14일)에서 공연을 기획했던 것은 흥행 이외에 다른 고려가 있었다는 뜻이다. 칸과 비아리츠는 둘 다 새로운 영화제의 최종 후보지였다.  

특히 비아리츠 공연일은 9월14일이었는데, 이는 9월1일부터 20일까지로 결정된 새로운 영화제 개최기간에 포함되어 있었다. 당초 결정대로 비아리츠가 개최지로 확정되었다면, 영화제가 한창 무르익을 때 최승희의 무용공연이 열렸을 것이다. 그와 함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가 영화제의 출품작으로 상영되었다면 이는 흥행이나 홍보의 면에서 최상의 상황이었을 것이다. 

 

1939년 8월까지 유럽에 체재했던 최승희는 수중에 <대금강산보> 필름을 지니고 있었고, 해외 개봉권도 확보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프랑스에서 막 조직되고 있던 제1회 칸영화제에 <대금강산보>를 출품하려고 시도하지 않았을까?


최승희가 <대금강산보>를 유럽 영화제에 출품하려고 노력했다면, 베니치아 영화제보다는 칸영화제를 선호했을 것이다. 일본의 동맹국인 이탈리아와 독일이 주도권을 잡은 베네치아 영화제가 유리했을 수는 있다. 정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던 베네치아 영화제에 일본 정부의 도움을 받았다면 더욱 손쉬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최승희와 안막은 전체주의 국가의 예술 관행과 거리를 두었다. 최승희가 이탈리아와 독일, 그리고 독일의 영향아래 있던 오스트리아에서 공연하지 않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제1회 칸영화제의 출품작 40개의 명단에는 <대금강산보>가 포함되지 않았다. 또 1939년의 베니스 영화제에 출품된 13개 외국영화 출품작 명단에도 <대금강산보>는 없었다. <대금강산보>가 베네치아와 칸 영화제에 초청받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유럽 상영이 단 한차례 시사회에 그쳤기 때문에 영화제 조직위의 주목을 받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대금강산보>에 유럽어 자막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중일전쟁 발발로 <대금강산보> 제작이 4개월 지연되는 바람에 해외 상영용 필름에 자막을 달지 못한 결과는 이렇게 길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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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국이 프랑스의 새로운 영화제를 지원하고 나선 것은 이탈리아에 대한 정치적 항의였을 뿐 아니라, 경제적 대결이기도 했다. 이탈리아가 베네치아 영화제를 빌미로 할리우드 영화 수입을 독점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아의 할리우드 영화 독점을 막으려면 미국 영화산업이 유럽 시장에 진출할 새로운 창구를 마련해야 했다. 프랑스도 이탈리아를 제치고 할리우드 영화를 수입할 기회를 잡고 싶었다. 할리우드 영화의 유럽 판로를 둘러싸고 미국과 프랑스의 이해가 일치한 것이다.

새로운 영화제 창설이 호소력을 가지게 된 데에는 영화 종주국으로서의 프랑스인들의 자부심도 한 몫을 했다. 프랑스인들이 영화 종주국을 자처한 것은 뤼미에르 형제 때문이다. 

 

1939년 제1회 칸영화제 전야제 포스터, 그러나 성대한 전야제까지 마친 끝에 칸영화제는 이차대전 발발로 취소되었다.


오귀스트 뤼미에르(Auguste Marie Louis Nicholas Lumière, 1862-1954)와 루이 장 뤼미에르(Louis Jean Lumière, 1864-1948) 형제는 1895년 12월28일 파리의 그랑 카페 앵지앵 살롱(Le Salon Indien du Grand Café)에서 4-50초짜리 초단편 필름 10개를 상영했는데, 프랑스인들은 이것이 세계 최초의 일반 관객 영화 상영이라고 믿고 있었다.

새로운 영화제가 정부의 승인을 얻자 조직위원회는 장소 물색에 나섰다. 5-6개 도시가 영화제 개최를 신청했고, 최종적으로 대서양 연안의 비아리츠(Biarritz)와 지중해 연안의 칸(Cannes)과 니스(Nice)가 경합했다. 조직위원회는 1939년 5월9일 비아리츠를 영화제 개최지로 결정했지만, 공식 문헌에는 5월15일까지도 최종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기간에 칸 시정부와 시민 단체들은 영화제의 도시로 지정받기 위해 공격적인 로비를 계속했다. 칸 시정부와 시민들은 60만 프랑의 재원을 조성해 영화제 조직위원회를 지원하기로 결의했고, 니스를 포함한 주변 도시들과 협력해 숙박시설을 충분하게 준비하겠다고 약속했다. 이같은 로비 덕분으로 1939년 5월31일 영화제 개최지가 칸으로 변경되었고 최종 결정되었다. 

제1회 칸 영화제는 1939년 9월1일부터 20일까지로 결정되었다. 베네치아 영화제(8월8일-9월1일)가 끝나는 날 칸 영화제가 시작되게 일정을 조정함으로써, 베네치아 영화제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 조직위원회는 영화제의 명예 회장으로 뤼미에르 형제의 동생인 루이 뤼미에르로 추대했고, 루이 뤼미에르는 6월2일 이 제안을 정식으로 수락하고 취임했다.

조직위는 곧바로 참가국과 참가작품 물색에 나섰다. 독일과 이탈리아를 포함한 모든 영화 생산국에게 참가를 권유했고 약 2천명의 영화계 명사들에게도 초청장을 보냈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참가를 거부했지만 미국과 영국을 포함한 9개국이 참가하겠다고 통보했다. 참가한 영화 편수는 프랑스(11개)와 미국(9편)과 소련(8개)이 가장 많았고, 네덜란드(3편), 폴란드(3편), 스웨덴(2편), 영국(2편), 룩셈부르크와 체코슬로바키아가 각 1편씩이었다. 

 

 

1939년 제1회 칸 영화제에 출품되었던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 1939)>. 아카데미 6개부문에 지명되고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에 밀려 1개의 수상하지 못한 이 영화는, 칸영화제에서도 호평이 예상되었으나 영화제 자체가 취소되어 버렸다. 


칸 영화제 조직위원회는 교통편과 숙박시설도 점검했다. 1천여명이상이 참가의사를 밝혀왔기 때문에 이들을 수송하기 위한 기차 편을 증설하고, 숙박을 위한 호텔도 마련해야 했다. 대서양을 건너오는 미국 참가자들을 위한 전세 여객선도 마련되었다.

제1회 칸영화제는 <카지노 뮈니시팔> 극장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그해 2월26일 최승희가 조선무용 공연을 가졌던 바로 그 극장이었다. 이 극장은 1천 객석을 구비한 대형극장이었으므로 영화제를 열기에는 부족함은 없어 보였다.

마침내 1939년 8월31일, 제1회 칸 영화제의 전야제가 시작되었다. 전야제 상영작품은 <노틀담의 꼽추(The Hunchback of Notre Dame, 1939)>였고, 유럽과 미국의 영화인들은 흥분과 함께 기꺼이 참여했다. 모든 일이 순조로워 보였다. 

 



하지만 개막일인 9월1일, 조직위원회는 영화제를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곧이어 프랑스도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영화제는 취소되었다. 

전야제까지 치르고 취소된 칸영화제가 다시 열린 것은 이차대전이 끝난 이듬해였다. 1939년의 전야제는 까맣게 잊혀 졌고, 지금은 1946년에 열린 칸 영화제가 제1회로 간주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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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영화제(1939)는 베네치아 영화제(1932), 베를린 영화제(1951)와 함께 유럽의 3대 영화제로 꼽히지만 1938년까지만 해도 미국의 아카데미(1929)를 제외하면 국제 영화제로는 베네치아 영화제가 유일했다. 

1932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일부로 시작된 영화제는 1933년을 건너뛰고 1934년부터 연례행사로 전환되고 경쟁 부문이 도입되어서 1938년에 여섯 번째를 맞았다. 1937년의 5회 대회에서는 프랑스의 쟝 르노아르(Jean Renoir) 감독의 <거대한 환상(La Grande Illusion, 1937)>이 “최고 예술상(Prix du meilleur ensemble artistique)”을 받았다.

<거대한 환상>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발흥한 극우 민족주의와 파시즘을 경계하고 임박한 또 다른 전쟁을 경고하는 반전 평화 영화였다. 이 영화는 프랑스에서만 1천2백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대성공을 거두었고, 유럽 각국에서 절찬리에 상영되었다. 

 

 

1938년 제5회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최고 예술상을 수상한 쟝 르노아르 감독의 <거대한 환상> 포스터.


그러나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이 영화에 분노했다. 특히 독일의 선전상 요제프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 1897-1945)는 이 영화를 “공공의 적 제1호”로 규정하면서 독일에서 상영되던 <거대한 환상>의 필름을 압수해 파괴했다. 1940년 독일군이 파리에 입성했을 때에도 괴벨스의 첫 명령 중에는 <거대한 환상>의 원본과 복사본을 모두 압수해 파괴하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거대한 환상>에 대한 독일과 이탈리아 정부의 분노는 이듬해의 베네치아 영화제에도 반영됐다. 이 두 정부가 수상작 선정에 개입한 것이다. 괴벨스는 독일 영화가 수상하도록 압력을 넣었고, 그 때문에 다큐멘터리 영화는 수상작에 포함될 수 없다는 규정을 무시한 채 독일의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 감독의 <올림피아(Olympia)>가 해외작품상을 받았다.

최우수 작품상도 무솔리니의 아들  비토리오 무솔리니(Vittorio Mussolini)의 후원을 받아 고프레도 알레산드리니(Goffredo Alessandrini) 감독이 제작한 <파일럿, 루치아노 세라(Luciano Serra, pilota, 1938)>에게 돌아갔다. 당시 베네치아 영화제의 수상 결정은 여론이나 투표가 아니라 주최 측이 결정하는 방식이었으므로 이 같은 비정상적인 결과가 나올 여지가 있었다. 

정치적으로 편파적인 이 같은 수상 결과를 놓고 미국과 다른 유럽국 영화인들이 분개했다. 영국과 미국의 대표단은 즉각 베네치아에서 철수하면서 다시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프랑스에서는 정계와 예술계를 중심으로 새로운 국제 영화제를 조직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베네치아 영화제가 이탈리아와 독일 전체주의 입김에 좌우되기에 이르자, 미국과 프랑스 등은 새로운 영화제를 조직하기로 결정하고, 1939년 9월 첫번째 칸 영화제가 기획되었다.



새로운 영화제 조직에 발 벗고 나선 것은 프랑스 교육예술부의 영화 담당 차관 필리페 에르랑거(Philippe Erlanger)였다. 프랑스 정부 대표로 베네치아 영화제에 참여했던 그는 수상작 선정 결과에 분노한 나머지 귀국행 열차 안에서 바로 새로운 영화제를 구상했고, 이를 쟝 쟤(Jean Zay) 교육예술부 장관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프랑스 정부는 새로운 영화제 조직가 그다지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1938년 9월30일에 체결한 뮌헨 협약 때문이었다. 이 협약으로 프랑스와 영국, 이탈리아 정부는 유럽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히틀러의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을 사후 승인했었다. 간신히 조성한 유럽의 평화 분위기를 해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영화인들과 관객들도 프랑스가 새로운 영화제를 만드는 것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직전 해에 <거대한 환상>이 베네치아 영화제 최고상을 수상한 데에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달 지나지 않아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 영화제 조직안을 승인했다. 미국이 유럽의 새로운 영화제를 환영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정치적 목적 외에도 할리우드 영화의 수입권을 둘러싼 경제적인 이유도 개입되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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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코 야폰 위원회>가 개최한 일본 영화 시사회에서는 최승희의 <대금강산보> 외에 2편의 다큐멘터리가 더 상영되었다. 흑백 다큐멘터리 <눈의 호소(L'Appel de la Neige)>와 컬러 다큐멘터리 <도쿄(Tokio)>였다.

 

<도쿄>컬러영화였다고 특별히 소개한 것은 당시 컬러 영화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테크니컬러기법으로 만든 컬러 영화로, 일본 수도 도쿄를 소개하는 내용이지만 일본 영화사가 제작한 일본 영화는 아니었고, 미국의 MGM사가 제작한 미국 다큐멘터리 영화였다.

 

파리 일간지에 <토쿄(Tokio)>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이 영화의 원제목은 <모던 토쿄(Modern Tokyo, 1935)>이며, 미국의 영화 제작자 제임스 핏츠패트릭(James A. FitzPatrick)가 출연해 해설을 맡은 상영시간 730초의 여행 다큐멘터리였다.

 

<모던 토쿄>는 핏츠패트릭의 세계여행 다큐멘터리 시리즈의 하나였다. 1925년 영국과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소개한 이후, 1926년부터는 서유럽 국가들의 도시와 음악을 담은 짧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나갔다. 1930년 핏츠패트릭은 아시아 국가로는 처음으로 일본을 소개하는 7분짜리 <벚꽃 필 때의 일본(Japan in Cherry Blossom Time, 1930)>를 방영했고, 1935년 두 번째 일본 다큐멘터리 <모던 도쿄>를 제작한 것이다.

 

제임스 피츠패트릭이 진행하는 여행다큐 <트래블톡>의 첫장면과 홍보 포스터. 피츠패트릭은 1935년 도쿄를 취재해 <모던 도쿄>를 제작, 방영했다.

 

<모던 도쿄(1935)>는 도쿄가 대지진을 이겨내고 동양적 가치를 유지하면서도 서양 문명의 영향으로 빠르게 세계적인 대도시로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듬해(1931) 샴 왕국과 한국을 동시에 취재해 제작한 <샴과 코리아(Siam and Korea)>를 방영하기도 했다.

 

시사회의 두 번째 다큐멘터리 <눈의 호소>는 나의 각별한 관심을 끌었다. 이 필름이 다큐멘터리였다고 하므로 일본 다큐멘터리의 효시라고 알려진 <유키구니(雪國, 1939)>임에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유키구니>는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소설(1937년 단행본 간행)이기도 하지만, 이시모토 토키치(石本統吉) 감독의 이 다큐멘터리 영화(1939년 개봉)로도 유명하다.

 

다큐멘터리 <유키구니>1935년 오무라 에이노스케(大村英之助)가 설립한 예술영화사(藝術映畵社)가 제작한 사회운동적 성격의 기록영화로 상영시간은 약 38분이었다. 19371월부터 1938년 봄까지 만 13개월 동안 7차례의 로케이션을 통해 촬영된 필름을 편집해 제작된 <유키구니>1939년 문부성의 표창을 받을 만큼 수준이 높았고, 오늘날까지 일본 영화사에서도 일본 다큐멘터리 영화의 효시이자 전범으로 꼽히고 있다.

 

파리의 시사회에서 상영된 <유키구니>가 특별한 관심을 끌었던 것은 그 촬영감독 이노우에 칸(井上莞) 때문이다. 그는 조선인으로 본명이 이병우(李炳宇). 일찍이 오오무라 에이노스케와 함께 사회주의 영화운동에 참여했으나, 1935년 창업된 <예술영화사>에 동참하면서 리얼리즘에 바탕을 둔 다큐멘터리 제작에 열성을 보였다.

 

 

1939년 <예술영화사>가 제작, 개봉한 기록영화 <유키구니>, 이 다큐멘터리의 촬영 감독은 조선인 카메라맨 이병우였다.

 

<예술영화사>1935년 창립 후 한동안 관광이나 산업 관련의 문화 영화를 제작했는데, 맨 처음 제작한 여행 다큐멘터리가 <조선의 여행(朝鮮, 1935)>이었고, 이 작품의 촬영을 담당한 것도 이병우였다.

 

1938518일의 <조선일보>는 이병우가 “3년 전(=1935) 조선철도국의 초청을 받아 <조선의 여행>이라는 조선 풍경 소개영화를 촬영했으며 이때 촬영한 장면에서 최승희 여사가 주연한 <금강산보>에 이용된 것이 적지 아니하다고 했다.

 

다시 말해 1939217일 파리 <살드예나> 극장에서 열린 일본 영화 시사회상영작 3편중에서 2편이 이병우가 촬영한 영상을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다.

 

<랭트랑지장>의 평론가 도랑쥐는 <눈의 호소>라는 다큐멘터리가 진행은 느렸지만 현란했으며 촬영이 매우 탁월했다고 평가했다. 당대 일본 최고의 카메라맨의 한 사람이었던 이병우의 촬영기술이 빛을 발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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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강산보>의 파리 시사회는 기록으로 발견된 최초이자 유일한 해외 상영이었다. 제작이 시작된 지 2년만이고 조선과 일본에서 개봉된 지 약 1년이나 지난 뒤였다. 이후 이 영화가 조선과 일본 이외의 지역에서 다시 상영된 기록은 아직까지 발견된 바 없다.

 

<대금강산보>의 시사회가 파리 언론의 주목을 받기는 했지만, 영화의 내용이나 작품성 때문이 아니라 유럽에서 막 시작된 최승희의 명성 때문이었다. <대금강산보>의 내용이나 작품성을 소개한 기사나 평론은 없었고, 영화 속의 최승희의 무용 장면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310일자 <랭트랑지장>에 실린 간략한 시사회 후기가 전부였다.

 

일본 다큐멘터리와 발성영화 시사회. 먼저 다큐멘터리 <눈의 호소(L'Appel de la Neige)>가 상영되었다. 설원, 스키학교와 스키경기, 얼어붙은 거대한 호수에서의 스케이트 장면들이 있었다. 화면은 전체적으로 흰색이었고, 진행은 느렸지만 현란했다. 촬영이 매우 탁월했다.

 

 

1939년 3월10일의 파리 일간지 <랭트랑지장>은 <대금강산보>의 감상후기를 보도하면서 주인공 최승희가 대단히 아름다웠다고 강조했다.^^ 

두 번째 다큐멘터리는 컬러영화 <도쿄(Tokio)>였다.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이 영화는 미국영화사 MGM의 제작이었다. 해설도 영어로 이뤄졌고, 프랑스어 자막이 달려 있었다. 일본을 촬영한 것이지만 일본 영화는 아니었다.

 

 

메인 메뉴는 <산의 노래(Le Chant de la Montagne)>였다. 발성영화기는 했으나 일본어로 녹음되었고 자막도 없었기 때문에 기모노 차림의 일본인 여류 시인이 프랑스어로 통역했다. 그녀의 프랑스어는 일본식 액센트가 조금도 없이 유창했다. 주최 측에서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자 저명한 코리안 무용가 최승희양을 소개했는데, 그녀는 놀랄 만큼 아름다웠고 화면에 나타난 그녀의 모습도 사랑스러웠다. 도랑쥐.”

 

<대금강산보>에 프랑스어 자막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인 여성 시인이 통역했다는 대목이 주목을 끈다. 이 여성의 이름은 밝혀져 있지 않지만, 그녀가 유창한 프랑스어로 마치 무성영화의 변사의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이로써 <대금강산보>가 파리에서 일반 상영될 수 없었던 이유 한 가지가 밝혀진 셈이다. 일본어 발성영화를 프랑스어로 전달할 수단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도 그 때문에 파리에서 일반 개봉을 하기 위한 서류작업이나 검열과정에 신청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대금강산보>가 왜 미국에서도 상영되지 못했는지 추측하게 해 준다. 1938219일의 뉴욕 길드극장 공연 이후 최승희는 거의 10개월을 공연도 없이 뉴욕에서 지냈다. 이때 최승희가 <대금강산보>의 상영을 시도해 보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러나 자신이 가진 필름에 영어 자막이 달려있지 않았고, 아마도 뉴욕에서 일본 영화에 영어 자막을 입히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대금강산보>의 파리 시사회가 열렸던 <살드예나> 극장. 그러나 프랑스어 자막이 없이 변사를 동원해 상영되는 바람에 이후 일반 개봉의 기회도 얻지 못했고, 평론가들로부터도 영화의 내용이나 작품성에 대한 적절한 비평을 받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금강산보>의 해외 상영용 필름에 외국어 자막을 달지 못한 것은 제작과정의 지연 때문이었다. 중일전쟁이 일어나 촬영이 4개월이나 지연되었고, 편집을 끝내고 시사회를 가진 것이 19371217일로 최승희가 미국으로 출발(1229)하기 2주 남짓 전이었다. 그 사이에 영어나 프랑스어로 자막을 입힌 새로운 필름을 마련하기가 시간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도쿄 시사회 이후 <대금강산보>는 조선용, 일본용, 해외용으로 3벌의 필름이 복사되었다. 조선어 자막이 입혀진 조선 상영용 필름은 1938129일에 개봉되었다. 복사본 제작과 자막 입히기, 그리고 운송에 약 1달이 걸렸다는 뜻이다. 복사본 제작과 운송에 걸렸던 시간은 수일에 불과했으므로 그 대부분은 조선어 자막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본 영화가 일상적으로 상영되던 조선의 경우에도 약 3주일의 시간이 걸렸다면, 영어나 프랑스어 자막을 다는 일은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러나 최승희는 시사회를 마친지 열흘 만에 미국으로 출발해야 했다.

 

순회공연의 목적지마저 유럽에서 미국으로 급히 변경되는 바람에 온갖 준비가 미비했을 최승희는 결국 영어나 프랑스어 자막을 입히지 못한 <대금강산보> 필름을 가지고 해외 순회공연 길에 올라야 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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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가 파리에 도착한 것은 19381224일이었다. 최승희를 맞는 파리의 분위기는 뉴욕과 사뭇 달랐다. 피켓을 들고 플래카드를 늘어뜨린 환영 인파는 없었지만 조선인과 일본인 교민들의 대립도 없었고, 반일 시위도 없었다. 조르주 생크 호텔에 숙소를 정하고 샹젤리제에 스튜디오도 마련한 최승희는 비로서 차분하게 공연 준비에 몰두 할 수 있었다.

 

유럽 첫 공연은 1939131일의 파리 <살플레옐> 극장이었고, 두 번째 공연은 26일 브뤼셀의 <팔레 데 보자르> 극장이었다. 두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최승희는 파리에서 <대금강산보>를 상영했다. 1939217일 오후9<살 드예나(Salle D'Iena)> 극장에서였다.

 

<테아트르 드예나(Théâtre d'Iéna)>라고도 불렸던 이 극장은 약 5백석 규모의 영화 상영 극장이었다. 파리16구의 살드예나 애비뉴 10번지에 위치해, 인근에 트로데카로 정원과 팔레드예나 박물관, 그리고 지금은 한국문화원도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센 강 너머로 에펠탑이 바라다 보이는 살드예나 지역은 경관이 탁월한 파리의 문화 중심지의 하나였다.

 

1939년 2월17일, 최승희는 파리 <살드예나> 극장에서 <대금강산보> 시사회를 개최했다. 이 극장은 오늘날의 샹그릴라 호텔이 되었다.

 

극장 건물은 1896년 롤랑 보나파르트 왕자의 저택으로 건축되었으나 1924년 왕자가 사망한 후 수에즈운하 회사에 매각, 1929년부터 1955년까지 극장으로 개조되었다. 이후 프랑스 정부가 매입해 국립무역회관으로 사용되다가 2005년 민간에 매각되어 2010년부터는 샹그릴라 호텔로 사용되고 있다.

 

<대금강산보><살드예나> 상영은 일반 개봉이 아니라 일회 상영의 시사회였고, 프랑스와 일본 사이의 민간 문화교류단체인 <프랑코 야폰 위원회(Le Comité Franco-Japonais, 일본명 일불협회 日仏協會)>가 주최했다. 아마도 <대금강산보>의 일반 개봉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최승희가 <프랑코 야폰 위원회>에 도움을 청했고, 이 위원회는 <대금강산보>와 다른 2개의 영화를 묶어서 일본영화 시사회를 개최한 것으로 보인다.

 

<대금강산보> 시사회는 거의 모든 파리 일간지에 보도됐다. 상영 이틀 전인 215<르땅(Le Temps)><랭트랑지장(L'Intransigeant)>이 가장 먼저 보도했고, 16<엑셀수아(Excelsior)><르쁘띠주날(Le Petit Journal)>이 뒤를 이었다. 상영 당일인 17일에는 <르피가로(Le Figaro)><르주날(Le Journal)>, <르마탱(Le Matin)><롬리브르(L'Homme Libre)>, <랭트랑지장>이 시사회 소식을 실었다.

 

상영 다음날인 218일에는 <파리수와(Paris Soir)>, 24일에는 <라프랑스(La France)>가 이 시사회 소식을 보도했고, 310일에는 <랭트랑지장>이 영화평을 실었다. 모두 10개의 파리 일간지가 <대금강산보>의 상영을 보도한 셈인데, 특히 <랭트랑지장>은 사전 2, 사후 1, 모두 3회나 보도해 <대금강산보> 보도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215일자 <랭트랑지장>의 보도는 다음과 같았다.

 

<살드예나> 극장은 오늘날 파리16구의 문화 중심지에 위치한 5백석 규모의 영화 상영관이었다. 사진은 <살드예나> 극장의 소강당 내부의 모습이다.

프랑스-일본 위원회는 프랑스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인 무용가 최승희가 출연하는 일본 영화 <산의 노래(le Chant de la montagene)>를 상영한다. 최승희씨는 최근 파리에서 가졌던 공연에서 큰 성공을 거둔바 있다. 이 프로그램은 천연색 영화 <도쿄(Tokio)>와 다큐멘터리 <눈의 호소(L'Appel de la Neige)>를 동시 상영한다. 이 시사회는 217일 금요일 밤 9시에 살드예나 (salle d'Iéna)에서 열린다.”

 

이로써 최승희는 ‘<대금강산보>를 해외에서 상영한다는 자신의 목표를 이뤘다. 그러나 이 시사회가 그의 목적을 달성해 준 것은 아니었다. <대금강산보>가 최승희 공연을 도운 것이 아니라 거꾸로 파리 공연을 마치고 얻어진 최승희의 유명세가 <대금강산보> 홍보에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대금강산보>의 프랑스어 제목이 <산의 노래>로 약식 번역됨으로써 금강산을 홍보한다는 조선총독부의 의도도 달성되지 못했다.

 

하지만 영화의 제작과정이 순탄하지 못했고, 미국에서 겪었던 우여곡절을 고려하면, 끝내 <대금강산보>의 파리 상영을 이뤄낸 최승희의 추진력만큼은 높이 평가되어 마땅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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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반일 분위기는 1938년 들어 더욱 격화됐다. 일본정부의 엄격한 보도 통제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난징 대학살의 참상이 알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19371215일자 <시카고 데일리뉴스>가 난징 대학살을 처음 보도한 이래 일본군의 잔혹한 행위들이 속속 보도했다.

 

심지어 일본 언론이 보도한 일본군의 영웅적 행위들이 국제사회에 알려지면서 공분에 기름을 부었다. 특히 19371130일자 <도쿄니치니치신문(東京日日新聞)>111일자 <오사카마이니치신문(大阪每日新聞)>이 경쟁적으로 보도한 “1백명 참수경쟁은 지금까지도 중일전쟁 중 일본군의 잔학성을 드러낸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되었다.

 

두 신문은 토야마(富山) 부대의 무카이 토시아키(向井敏明, 26) 소위와 노다 타케시(野田毅, 25) 소위가 무석(無錫)을 점령한 후 난징(南京)에 입성할 때까지 누가 먼저 1백 명의 중국인 목을 베는지 경쟁한 사실을 보도했다. 19371213일자의 두 신문은 무카이 소위가 105, 노다 소위가 106명의 중국인의 목을 베어, 두 소위가 같은 날 목표를 달성했으므로 연장전이 필요하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1937년 11월30일자  도쿄니치니치신문( 東京日日新聞)은 일본군 소위 2명이 중국인 1백명의 목을 누가 먼저 베는지 경쟁했으며, 같은날 목표를 달성해 승부를 가리지 못했으므로 연장전이 필요하다고 보도했다.

 

종전 후 열린 전범재판에서 두 소위가 목을 벤 중국인들은 대부분 투항한 포로이거나 농민들이었음이 밝혀졌고, 결국 이들은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형이 집행됐다.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한 이후 6주 동안 학살한 중국군 포로와 민간인의 수가 약 30만명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미국은 중국내 조차지를 잃고 충칭으로 쫓겨났을 뿐 아니라 곧이어 미군과 미국인들은 중국을 떠나야 했다. 미국인들은 자국의 손실과 일본군의 반인도적인 학살에 분노했다. 이에 대해 최승희 평전의 저자 김찬정(2003[2002]:196)은 이렇게 서술했다.

 

최승희가 미국에 도착하기 바로 전인 1213, 난징(南京)이 함락되면서 일본군의 중국인 대학살 사건이 발생하여 그 사실이 일본군의 엄격한 보도 관제를 뚫고 세계 각지로 새어 나가기 시작했다. 미국 대부분의 도시에서 반일 데모가 발생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일본영사관은 재외공관으로서 미국인의 대일감정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미국인의 대일감정을 개선하려고 노력한 것은 샌프란시스코의 일본 영사관뿐 아니었다. 일본군의 잔학상이 전 세계에 알려지고 국제 여론이 악화되자 일본 정부는 이를 무마할 방안이 필요했다. 특히 생필품과 군수물자를 크게 의존하던 미국에 대한 선무공작이 시급했다. 그 같은 공작의 하나가 예술단 파견이었고,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도 그중의 하나였다.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의 첫 목적지가 변경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1935년 하반기부터 세계 순회공연을 기획하던 최승희의 첫 목적지는 유럽이었다. 최승희는 1937927일 도쿄극장에서 세계순업 고별공연을 가졌는데, 공연의 제목은 <최승희 도구(渡歐) 고별공연>이었다.

 

일본군의 난징대학살은 미국 정부와 시민들의 공분을 일으켜, 미국 전역을 통해 광범위한 일제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최승희의 공연이 보이콧되고 그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가 상영되지 못한 것도 이러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1014일에도 같은 극장에서 다시 한 번 고별공연을 단행했는데, 이때의 제목도 <최승희 도구(渡歐) 최후의 대중고별공연>이었다. 19371120일자 <오사카마이니치신문>과의 인터뷰에서도 최승희는 유럽의 런던을 시발로 해서 프랑스·독일·이탈리아를 돌고 미국으로 건너가겠다고 밝혔다. 첫 목적지가 여전히 유럽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최승희는 125일 히비야 극장에서 고별공연을 다시 열면서 공연 제목을 <최승희 도미(渡米) 고별공연>으로 바꿨다. 첫 목적지가 미국으로 바뀐 것이다. 2년 동안 유럽을 목표로 준비한 순회공연의 첫 목적지가 미국으로 바뀐 것은 일본정부의 요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찬정(2003: 195)의 서술대로 최승희는 일본 정부의 앞잡이로 미국과 일본의 관계 개선을 노리고 일본 정부가 미국으로 보낸 일본의 개라는 단정적인 소문이 난 것도 근거가 없지 않았던 셈이다. 재미 동포들이 최승희의 공연을 보이콧한 것은 최승희 자신에 대한 반대라기보다는 그의 공연을 이용해 이미지를 개선하려는 일본의 의도를 보이콧한 것이었던 것이다.

 

최승희의 미국 공연이 보이콧당하고 전화협박까지 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중일전쟁, 특히 19381월경 미국 전역에 퍼진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의 참상에 대한 미국인의 분노 때문이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최승희는 미국에서 1년 동안 4회의 공연을 하는데 그쳤고, <대금강산보>는 한 차례도 상영하지 못한 채 유럽으로 떠나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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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는 미국에서 상영되지 못했다. 샌프란시스코와 LA, 그리고 뉴욕에서의 이유가 조금씩 다르기는 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같았다. 미국에서 격화되었던 반일 시위와 일화배척 때문이었다.

 

일부 평전 저자들은 당시의 재일 조선인과 재미 조선인이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재미 동포들이 최승희의 공연활동을 방해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카시마 유사부로(1981[1959]:75)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최승희의 이름이 사이 쇼키라고 소개된 것이나 그가 일본 영사관과 신문사에 자주 출입하고 일본공관의 행사에 참석한 것이 재미 조선인을 자극했고, 결국 조선인 동포들이 LA 이벨극장 앞에서 배일 배지를 판매하고, 뉴욕 호텔로 협박 전화를 하는 사태로 발전했다고 서술했다.

 

1938년 들어 미국에서는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반일 시위와 일화배척(일제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미국의 국익이 손상되었을뿐 아니라, 미국에도 난징 대학살이 알려지면서 일본군이 저지른 비인도적인 잔혹 행위가 시민들을 격분시켰기 때문이었다.

 

이는 제국주의 본국에 거주하고 있는 재일조선인과 재미조선인이 처해 있는 정치적·사회적 조건의 차이에서 비롯된 사고 행동의 차이, 즉 재일조선인은 재미조선인에 비해 극히 행동이 제한되어 있었는데, 소수의 재미조선인 독립지사들은 승희 등의 행위를 의심하여 승희에게 무리한 주문을 했을 것이다.” (다카시마 유사부로, 1981[1959]: 76)

 

한편 강이향(1993:136)최승희는 단지 문화선전만을 위해 온 것이 아니고 비밀지령을 띠고 정치적 선전을 위해 와있다는 말까지 떠돌았다고 서술했고, 정병호(1995:149)독립운동가들은 최승희를 한편으로는 배일적 인물로 전환시켜 보려는 작전을 펴면서 친일파로 몰았고, 최승희의 공연을 계기로 하여 반일 여론을 미국인에게 알리려는 목적으로 그리 활동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같은 서술에는 일견 수긍할 측면도 있지만, 국제적 맥락과 미국내 분위기를 도외시함으로써 재미 조선인들을 동족 예술가조차 수용하지 못하는 극단적 민족주의자로 몰아간 측면이 있다. 실제로 캘리포니아의 교포신문 <신한민보>에는 최승희를 비난하는 보도가 한 건도 없었다.

 

최승희의 미국 공연이 보이콧 당한 것은 단지 재미 조선인 동포들의 몰이해나 감정적 앙금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국을 침공한 일본에 대한 미국 내 여론이 악화될 만큼 악화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의 일화배척 운동에는 여성들도 적극 참여했다. 미국여성들은 특히 일제 실크 스타킹 불매운동을 벌임으로써 일본의 수출에 타격을 주었다.

 

미일관계는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켰을 때부터 나빠지기 시작했으나, 1937년 일본의 도발로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특히 그해 10월 일본군이 상해를 점령하면서 미국이 조차지를 잃게 되자 미국은 추축국에 대한 경제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다.

 

특히 1937105일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른바 격리 연설(Quarantine Speech)”을 통해 침략국 일본과 이탈리아, 나치독일에게 경제적 제재를 가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를 신호로 미국민들은 대대적인 일제 불매운동에 돌입했다. 1937109일의 <동아일보>격렬해지는 각지 일화배척운동이라는 제목아래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미국에서의 일본관계 상품의 제조업자중 반일적인 파에 의하여 <미국품표준보호동맹>이 결성되어 일본의 원료품 및 제조품의 영구적인 보이코트운동을 개시하기로 되었다고 한다. 기타 미국 <반전 반파시즘> 연맹과 <중국민중의 벗> 협회는 반일운동의 착수로 1일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 시위대회를 개최하고 일본상품의 보이코트 등을 결의하였다. 또 미국노동총동맹(AFL)과 산업조직위원회(CLO)에서도 근간 개시되는 연차대회에서 일화배척이 문제로 될 것을 예상하고 대책협의중이라고 전한다.”

 

최승희의 공연이 취소되고 그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가 상연되지 못한 것을 최승희와 재미 조선인 교포들 사이의 갈등 탓으로 돌리는 것은 지나치게 안이한 서술이다. 최승희와 재미 조선인들은 서로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고, 그에 대한 양해도 제공하고 있었다.

 

공연 보이콧과 영화 상영의 실패는 미국 정부가 앞장서고, 미국내 노동조합을 포함한 각종 사회단체들이 총동원된 대대적이고 전국적인 일제불매운동 때문이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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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는 샌프란시스코와 LA에서 각 1회씩의 공연을 간신히 마치고 <대금강산보>도 상영하지 못한채 23일 뉴욕으로 출발했다. 뉴욕 길드극장 공연은 219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공연까지 2주일의 시간이 있었으므로 <대금강산보>의 뉴욕 상영을 위한 서류작업과 검열통과를 위한 시간은 충분했겠지만, 일본공관과 조선인 동포들 사이의 대립적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다. 조선인 동포들이 유태인, 중국인들과 합세해 최승희의 공연을 보이콧했기 때문이었다.

 

중국인들이 나선 것은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베이징과 상하이, 난징을 빼앗기면서 중국 정부가 와해 위기에 몰렸기 때문이었고, 유태인들은 일본이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반일 시위와 일화배척(日貨排斥=일제 불매운동)운동에 적극적이었다. 그밖에도 침략적 제국주의 국가 일본에 항의하는 미국내 사회주의자들도 이에 참여했다.

 

1938년 2월19일, 최승희의 뉴욕 첫번째 공연이 열렸던 길드 극장

 

최승희는 뉴욕에서 조선인 동포로부터 전화협박을 받기도 했다. 정병호(1995:141, 145)와 강준식(2012:210)은 최승희가 투숙한 호텔로 전화를 건 익명의 교포가 라디오 방송을 통해 배일연설을 하라면서 그러지 않으면 공연을 방해하겠다고 협박했다고 서술했다.

 

이같은 협박은 심각한 범죄행위였지만 두 평전자의 서술에 출처가 밝혀져 있지는 않았다. 강준식(2012)은 내용의 유사성이나 서술의 구성으로 보아 정병호(1995)를 인용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인용의 주는 달려있지 않았다.

 

최초의 최승희 평전인 다카시마 유사부로(1959)는 호텔 전화협박 사건에 대한 서술이 없고, 강이향(1993)은 호텔로 걸려온 전화를 언급하기는 했으나 그것이 협박전화였다고 서술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정병호(1995)는 다른 자료를 참고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어떤 자료인지 명시하지 않았다. 김찬정(2002)과 정수웅(2004)은 이 협박 사건을 언급하지 않았다.

 

평전에 따라 서술에 차이가 있고 출처도 모호하지만 최승희가 받았던 뉴욕 호텔 전화협박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서술이 구체적이고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최승희나 안막으로부터 직접 들은 사람의 증언일 것이다. 안막의 동생 안제승, 혹은 최승희의 제자이자 시누이 김백봉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LA 사건의 증언에서처럼 뉴욕의 일본 영사관을 대사관이라고 한 것을 보면 증언자는 같은 사람, 즉 안제승으로 보인다.

 

더구나 이 사건은 이후 연쇄적 결과로 이어졌다. 전화협박 사건 이후 뉴욕 일본 대사관(=영사관)에서는 뉴욕 경시청에 (최승희의) 신변 보호를 요청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공연할 때 무대 위와 화장실까지 경관이 지키는 소동”(강이향, 1993:137; 정병호, 1995:146; 강준식, 2012:211)이 벌어졌다고 한다.

 

거리에는 최승희의 공연을 보지 말자라는 플래카드가 걸렸고, “메트로폴리탄 뮤직 컴퍼니에 최 승희와의 계약을 파기하리는 압력이 가해졌. (정병호, 1995:146). 결국 메트로폴리탄 뮤직 컴퍼니와의 계약은 파기되었고 최승희의 향후 미국 공연은 모두 취소되었다.

 

1937년 12월29일, 최승희는 미주 순회공연을 위해 <치치부마루>에 올라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다. 이때만 해도 미국에서 엄청난 시련과 난관이 기다리고 있음을 몰랐다.

 

뉴욕에서의 일련의 사건이 일본에 와전되면서 최승희는 자신이 배일행위자로 몰리게 되었고, 안막과 최승희는 급히 해명의 편지를 보내어 이를 수습해야 했다.

 

이렇게 급속히 악화되는 상황 때문에 최승희는 뉴욕에서도 <대금강산보>를 상영할 수 없었다. 정병호(1995:149)는 최승희가 자기가 주연한 <대금강산보>라는 영화를 ... 상영... 하려 했으나 이 일 또한 반일행위로 감시받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되어 취소했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최승희가 이 영화의 상영을 포기한 것은 반일행위로 감시받았기 때문이 아니었을 것이다. 조선총독부가 직접 나서서 외국 상영을 위해 제작한 <대금강산보>가 뉴욕에서 상영되는 것을 반일행위로 분류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대금강산보>를 상영하지 못한 것은 그것이 일본영화였기 때문이다. 당시 광풍처럼 뉴욕을 휩쓸던 일화배척운동의 물결 속에서 보이콧 당할 것이 뻔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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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강산보>가 샌프란시스코와 LA에서 상영되지 못한 데에는 서류작업과 검열통과 문제 말고도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대금강산보>가 보이콧 당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최승희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 재미 조선인 동포들이 대대적으로 환영해 주었다. 그런데 더 큰 규모의 재미 일본인 환영단도 출영했다. 배에서 내려 두 환영단을 마주한 최승희는 착잡했을 것이다. 어느 쪽도 실망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인 동포들은 세계의 무희로 발돋움하는 조선의 무희를 만나고 싶어 했고, 대개 독립운동가였던 교포사회 유력인사들은 그녀와의 면담을 기대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발행한 여권으로 여행하면서 일본 공관의 상시적 감시 아래 있었던 최승희의 사정은 복잡했다.

 

최승희는 결국 샌프란시스코의 교포 인사들과의 면담을 거절했고, 교포단체의 환영행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공연 준비 때문이라고 변명했지만, 진짜 이유는 일본 공관원들에게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최승희의 이 같은 행동은 재미 동포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1938년 2월2일, 최승희의 LA공연이 열렸던 <윌셔 이벨> 극장.

그러던 중 최승희는 115일 일본영사관이 개최한 <일미친선의밤>에 참석했다. 주 샌프란시스코 일본영사가 마련한 이 행사는 지역의 정계와 재계 인사들뿐 아니라 언론인과 문화계 인사들을 초청해 최승희를 소개하는 자리였다. 최승희의 무용공연을 홍보하기 위해 일본 영사관이 특별히 마련한 행사였기 때문에 최승희는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포들과의 만남을 피하면서도 일본 영사관의 행사에 참석한 최승희가 동포들의 눈에 곱게 보일리 없었다. 더구나 <일미친선의밤>에서 최승희가 무용 감상회까지 열었던 사실이 알려지면서 동포들의 분노는 증폭됐지만, 다행히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124LA에 도착한 최승희는 조선인 동포들의 분위기가 심각함을 인식했다. 관계 개선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126LA교포들이 개최한 환영회에 참석해 한인 청년회로부터 기념금배를 증정받기도 했다.

 

그러나 교민들 중에 최승희에게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했다. 정병호(1995)와 김찬정(2003), 강준식(2012) 등의 평전자들은 이들이 반일 독립운동단체의 구성원들이며, 최승희가 사이 쇼키(Sai Shoki)’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는 것부터 불만이었다고 서술했다.

 

이들은 LA 공연 당일 윌셔이벨(Wilshire Ebell) 극장 앞에서 시위를 벌였고, 유태인들도 시위에 가담했다. 유태인들은 나치 독일과 동맹관계였던 일본의 상품에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일본 국적의 공연도 불매 대상이었으므로 최승희의 공연도 보이콧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

 

1938년 미국에서는 중일전쟁과 난징대학살을 계기로 대대적인 반일 시위와 일제 불매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시위와 불매운동에는 사용자와 노동조합뿐 아니라 여성단체들도 적극 가담했다.

 

정병호(1995)가 인용한 안제승의 증언에 따르면 흥사단에서 나온 교포가 마이크를 갖고 와서 최승희에게 나는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라고 공표하면 공연을 후원하겠다고 했으나 극장에 포진한 일본 대사관원들을 의식한 최승희는 그럴 수 없다고 대답했다고 했다고 한다.

 

당시나 지금이나 주미 일본 대사관은 워싱턴에 있기 때문에 안제승이 증언한 대사관원들이란 아마도 주LA 일본 영사관원들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이벨 극장에 다수 나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영사관 직원들에게 공연에 참석하라는 총영사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최승희는 이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승희의 배일 행위가 나타나면 언제든지 상부와 본국에 보고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도쿄에 남겨둔 딸 안승자의 안위가 위태로워지는 것은 물론 무용연구소의 앞날과 향후 자신의 무용 활동이 위협받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최승희는 샌프란시스코나 LA에서 일부 조선인 교포들의 요구대로 나는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라고 선언할 수 없었다. ‘배일 행위로 비쳐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최승희는 <대금강산보>를 상영할 수 없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금강산의 풍광과 최승희의 무용은 조선인 교포들에게 환영받을 만한 내용이었겠지만, 일본 영화였기 때문에 보이콧 대상이었다. 결국 최승희는 LA에서도 <대금강산보>를 상영하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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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가 요코하마를 떠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것은 1938111일이었다. 미주 첫 공연인 샌프란시스코 커랜 극장 공연은 122일로 잡혀 있었다.

 

따라서 예정대로라면 최승희는 111일과 22일 사이에 샌프란시스코에서 <대금강산보>를 상영해야 했다. 그것이 이 영화의 본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대금강산보>의 해외상영을 위해 최승희는 필름 한 벌을 따로 제작했고, 그 상영권을 전적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와 LA에서 <대금강산보>를 상영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미주 순회공연 흥행사가 이를 대행해 주는 것이었다. LA의 미주동포신문 <신한일보> 193823일의 기사에 따르면 최승희는 컬럼비아 컨설팅사와 흥행계약을 맺었고, 최승희의 대행사는 퍼킨스였다.

 

최승희의 세계순회공연(1937-1940)의 첫 기착지 샌프란시스코의 공연은 1938년 1월22일, <커랜극장>에서 열렸다.

 

그러나 최승희의 샌프란시스코 도착 후 <대금강산보>의 상영에 대한 보도가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아 컬럼비아나 퍼킨스가 영화의 미주 상영을 위한 업무를 대행했던 것 같지는 않다.

 

혹은 샌프란시스코의 일본 영사관이나 재미 일본인 혹은 한국인 단체들이 영화 상영에 관한 업무를 대신해 주었을 수도 있겠지만, 일본영사관의 최승희 관련보고서 문건에는 <대금강산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고, 재미 일본인 신문이나 조선 교포 신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최승희 본인이나 매니저 역할의 안막이 이 일을 직접 처리해야 했을 텐데, 영어에 능통하지 못했던 두 사람의 언어장벽은 별도로 하더라도 시간이 부족했다. 도쿄를 출발하기 전의 일주일, 혹은 태평양을 건너는 2주일 동안 미국 영화 배급사와 원격으로 계약을 맺고, 상영관을 확보하고, 미디어에 영화 광고를 집행하는 것은 가능하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미국에서 <대금강산보>를 상영하려면 국제무역 절차와 서류작업도 필요했겠지만, 무엇보다도 검열을 통과해야 했다. 1938년경 미국에는 두 가지 종류의 검열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다. 정부 검열과 영화업계의 자체검열이었다.

 

미국 영화의 정부 검열의 시작은 1897년에 시작되었다. 그해 메인 주가 도박성 권투 영화 상영을 금지하는 법률을 통과시키자 수개 주가 메인주의 선례를 따랐다. 1907년 시카고는 경찰청장에게 영화 검열권을 주었고, 이후 1백개 이상의 미국 도시가 시카고의 선례를 따랐다.

 

1915년 미연방 대법원은 영화는 예술이 아니라 상품이므로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보장한 미국헌법 제1수정조항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고 판결함으로써 정부의 영화검열을 뒷받침했다. 영화의 정부 검열은 1981년에야 미국에서 완전히 폐지되었다.

 

샌프란시스코 공연에서 최승희는 <대금강산보>를 상영하지 못했다. 당시 미국에서 상영되는 모든 영화는 정부 검열과 영화업계 자체 검열도 받아야 했다. (사진은 당시 미국 영화들이 자체검열을 받은 후 필름 앞부분에 삽입하게 되어 있었던 검열 통과 증명서.)

 

한편 영화업계는 자체검열도 도입했다. 1920년대의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영화들과 영화인들 사이에 만연한 비윤리적인 행위 때문에 영화계 전반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을 때, 영화계는 대중의 비난을 피하고 정부의 검열을 완화시킬 목적으로 자체 검열 제도를 도입했다.

 

1927년부터 도입되기 시작해 1934년에 확정된 <헤이스 코드>라는 자체검열 조항에는 신성모독나체,’ ‘국가, 인종, 신념 등에 대한 고의적 공격등의 <절대 금지 장면> 11개와, ‘국기국제관계’, ‘사형집행이나 범죄자에 대한 동정<주의할 장면> 25종이 명시되었다.

 

미국 영화에 대해서는 영화사, 외국 영화에 대해서는 배급사들이 자체검열을 실시했고, 19347월 이후에는 모든 영화가 이 검열을 통과한 증명서를 발급받아야 극장 상영이 가능했다.

 

<대금강산보>가 미국의 정부검열이나 영화사 자체검열에 저촉될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결과에 상관없이 그 두 검열 절차를 통과해야 했다.

 

그러나 최승희는 시사회 일주일 후에 요코하마를 출발했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후에도 공연까지 열흘밖에 시간이 없었다. 영화상영을 위한 서류작업은 물론 검열 절차를 통과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같은 절차상의 문제 때문에라도 최승희와 안막은 <대금강산보>의 미국 상영, 적어도 샌프란시스코와 LA 상영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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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강산보>의 경성 개봉일은 도쿄보다 일주일이 늦은 1938129일이었고 개봉관은 을지로의 황금좌였다. 황금좌는 당시 주소 황금정 제4정목 30번지에 위치한 극장으로 해방 이후의 국도극장,’ 지금은 국도호텔자리이다.

 

1907년 한국 최초의 근대식 극장인 원각사가 세워진 이후 광무대(1907), 단성사(1907), 연흥사(1907), 장안사(1908), 우미관(1910) 등이 차례로 설립되었고, 1913년에는 을지로4가에 황금연예관(黃金演藝館)’이 개관됐다. 줄여서 황금관이라고 불리던 이 극장은 1917동아구락부(東亞俱樂部)’, 1925경성보창극장(京城普昌劇場)’으로 이름이 바뀌어 운영되다가, 193611월 동양풍 르네상스식의 지상 3층 지하 1층의 대리석 극장 건물이 신축되었고, 이것이 1천명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던 황금좌(黃金座)’이다.

 

<대금강산보>의 서울 개봉은 1938년 1월29일, 을지로의 극장 <황금좌>에서였다.

 

1930년대 경성의 극장들은 청계천을 경계로 남북으로 나뉘어 있었다. 청계천 이북의 북촌에는 동양극장(東洋劇場), 우미관(優美館), 단성사(團成社) 등이 있었고, 남촌에는 명치좌(明治座)와 황금좌(黃金座), 희락관(喜樂館) 등이 있었다. 19385월호 <삼천리>에 따르면 북촌의 동양극장은 관객의 거의 전부가 조선인이었고 우미관은 조선인이 9, 일본인이 1’, 단성사는 조선인이 8, 일본인이 2이었다고 한다. 반면에 남촌의 명치좌와 희락관은 조선인과 일본인이 반반’, 황금좌의 관객은 조선인 6, 일본인 4이었다.

 

<대금강산보>가 황금좌에서 개봉된 것은 경성에서도 통용되던 일본 영화사의 배급 관행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소유한 남촌의 극장들은 각각 일본 영화사와 제휴되어 있었다. 신작 영화 개봉의 전속 계약이었다. 명치좌는 쇼치쿠(松竹), 약초극장은 도호(東寶), 경성극장은 신코(新興)의 영화를 개봉했고, 황금좌는 니카츠(日活) 영화사와 전속 계약이 되어 있었다. <대금강산보>는 니카쓰 타마카와 촬영소의 작품이었으므로 황금좌에서 개봉된 것이다.

 

당시 개봉관들은 토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주일 단위로 신작 영화를 상영했다. <대금강산보>1938129일 토요일부터 24일 금요일까지 황금좌에서 상영됐다. 이를 홍보하기 위한 <동아일보><매일신보>, <경성일보>의 극장 광고는 126일 수요일부터 시작되었고 개봉일인 129일에 기사와 함께 가장 큰 광고가 실렸다. 신작 영화 개봉 일수가 일주일에 머문 것은 아마도 경성 영화 관람객 시장의 한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금강산보>는 약 넉 달 후에 다시 극장가에 등장했다. 이번에는 재상영관이었다. 1938510일부터 13일까지는 신부좌(新富座), 514일부터 17일까지는 도화(桃花)극장이 <대금강산보>를 상영했다. 신부좌는 신당동의 극장이었고 도화극장은 마포의 극장이었다. 두 극장 모두 경성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 극장들이었고, 이미 개봉되었던 영화를 재상영하는 이른바 2류 극장들이었다.

 

개봉 직전, 1938년 1월27일의 <동아일보>에 실린 <대금강산보>의 광고문.

 

이상한 것은 두 극장이 <대금강산보>를 일주일이 아니라 4일씩 상영한 것인데, 이는 필름 임대료 때문이었다. 19385월호 <삼천리>에 따르면 당시 외화 필름 임대료는 1주일에 25백원에서 45백원까지 다양했다. 찰리 채플린의 <거리의 등불(1931)>45백원으로 가장 비쌌고 <오케스트라의 소녀(1937)>25백원으로 가장 저렴했다.

 

<대금강산보>의 대여비는 3-4천원선으로 채플린 영화 급이었다. 2류 극장들은 비싼 대여비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두 영화관이 공동으로 한편을 대여해 3-4일씩 나누어 상영했던 것이다. 신부좌와 도화극장은 193810월 다시 한 번 공동으로 <대금강산보>를 대여해 상영했다. 신부좌는 1021일부터 23일까지, 도화극장은 1022일부터 25일까지였다.

 

한편 <대금강산보>는 지방에서도 상영되었다. 1938728일의 <매일신보>오는 (7) 30, 31일 양일간 당지 읍애관에서최승희 주연의 <대금강산보>가 상영된다고 보도했다.

 

이렇게 <대금강산보>1938년 내내 경성과 지방에서 상영되었다. 같은 영화가 한 해에 경성에서만 3차례, 그리고 지방에서도 상영되었던 것은 이 영화의 흥행이 좋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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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강산보> 시사회가 있은 지 일주일 후인 19371229, 최승희는 오후 3시에 요코하마를 출발해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호화여객선 치치부마루(秩父丸)’ 1등실에 승선했다. 마침내 1935년 말부터 2년여 이상 준비하면서 기다렸던 세계 순회공연 길에 오른 것이다.

 

최승희는 치치부마루의 화물칸에 악기와 의상, 공연 소도구를 담은 수십 개의 여행용 가방을 실었는데, 그중에는 <대금강산보>의 필름이 담긴 가방도 포함돼 있었다. 최승희는 자신이 절실하게 원했던 <대금강산보> 필름을 가지고 세계 순회공연의 장도에 올랐던 것이다.

 

최승희가 도쿄를 떠난 지 3주 후, 1938121<대금강산보>는 마침내 도쿄 <후지칸(富士館)>에서 개봉됐다. 아사쿠사6구에 위치한 <후지칸>은 니카츠 영화사의 개봉관이었으므로, 타마카와 촬영소에서 제작된 <대금강산보>가 이 극장에서 개봉되는 것은 예정된 것이었다.

 

 

<대금강산보>는 1938년 1월21일, 도쿄 아사쿠사6구의 <후지관>에서 개봉되었다.

 

<후지관>19088월에 개관한 객석 18백석의 대규모 영화전문 극장이었다. <후지관>의 개관은 당시 일본 전역의 주요 도시에서 일었던 영화전문극장 개관 러쉬의 일부였다. 이 지역 최초이자 일본 최초의 영화상설관 <텐키칸(電気館)>1903년 아사쿠사6구 설립되었는데, 이는 쇼치쿠(松竹) 영화사의 개봉관으로 최승희의 <반도의 무희(1936)>도 여기서 개봉되었다.

 

이후 190741일의 <신성관(新聲館)>, 7월에는 오사카 최초의 상설관 천일전전기관(千日前電気館), 716일 도쿄 아사쿠사6구의 삼우관(三友館), 1220일 오사카의 제일문명관(第一文明館), 19087월에 아사쿠사6구의 대승관(大勝館)이 줄줄이 개관했고, 마침내 그해 8<후지칸(富士館)>이 개관한 것이다. 이후로도 10월 나고야 최초의 상설관 문명관, 11월에는 천일전일본관(千日前日本館)이 문을 열어, 이른바 일본은 영화전문 상영관 시대가 열렸다.

 

<대금강산보>는 주연 여배우가 없는 가운데 개봉된 것이어서 홍보와 판촉에 도움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반도의 무희> 개봉 때와는 달리 도쿄에서 발행되던 수십 종의 일본 잡지에는 <대금강산보>에 대한 기사가 거의 없었다.

 

더구나 <반도의 무희> 개봉은 도쿄에서만도 4개 극장에서 동시에 이뤄졌지만 <대금강산보>의 개봉관은 <후지칸> 하나뿐이었다. <대금강산보>의 예상 흥행 수준이 <반도의 무희> 때보다 낮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금강산보>는 보통 이상의 흥행을 이어나간 것으로 보인다. 1월말 도쿄의 <후지칸> 상영이 종료되자 오사카의 텐노지 신세카이 공원에 위치한 <다이산칸(大山館)>21일부터 상영을 이어받았다. 오사카의 니카츠 개봉관인 <다이산칸>이 발행한 홍보지 629호에는 <대금강산보>을 다음과 같이 홍보했다.

 

1939년3월 <조선악극단>이 도쿄의 <화요극장>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의 맨 왼쪽의 입간판을 보면 이 극장의 당시 상영 영화가 <대금강산보>였음을 알 수 있다.

 

“... 반도의 기이한 명승, 금강산의, ... 경승과 오랜 제사 행사의 진기함, ... 미지의 나라 조선을 남김없이 소개하고, 자신감 넘치는 최승희의 멋진 무용장면, ... 요염한 미희, 최승희의 무용 걸작집... 천연미와 미술미를 혼연시킨 이채편...”

 

오사카 <다이센칸> 상영은 193821일부터라고 되어 있었으나, 이후에도 일본 각지에서 <대금강산보>가 지속적으로 상연되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진도 발견되었다. 1935년에 결성된 <조선악극단>은 소속단원이 35명에 달했던 본격 악극단으로, 19393월 일본 순회공연을 단행한 바 있었다.

 

39일자 <매일신보>는 이 악극단이 카게츠(花月)극장에서 공연한다는 광고문이 실렸고, 악극단의 트럼펫 연주자 현경섭의 유품 중에서도 단원들이 <카게츠극장> 앞에서 촬영한 기념사진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 사진 속의 <카게츠극장>의 상연 영화가 <대금강산보>였던 점이 발견된 것이다.

 

1938121일 도쿄에서 개봉된 <대금강산보>가 적어도 1년 이상 오사카와 도쿄를 비롯한 일본 전역에서 지속적으로 상연되고 있었음을 보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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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4일자 <매일신보>에는 <대금강산보> 시사회에 이왕 전하와 함께 조선총독부의 오노 로쿠이치로(大野緑一郎) 정무총감과 요시다 히로시(吉田浩) 철도국장이 참석했다고 보도했다.

 

조선총독부의 2인자인 정무총감이 총독을 대신해 참석하고, <대금강산보>의 제작에 자금과 협력을 아끼지 않았던 철도국의 국장이 참석한 것은 이해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 참석할 사람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아이카와 가츠로쿠(相川勝六, 1891- 1973) 외사과장이었다.

 

<대금강산보> 제작결정을 비롯해 초기의 신속한 진행은 아이카와 외사과장의 추진력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그의 목적은 총독부의 재정난 타개를 위한 해외관광객 유치였지만, 적어도 그의 업무 추진 방식과 능력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그는 최승희와 최승일을 도와 음악과 원작 마련을 지원했고, 최승희가 안무를 마칠 때까지 온갖 편의를 봐주었다

 

아이카와 가츠로쿠는 똑똑하고 능력있고 강직한 경찰공무원이었다. 도쿄제국대학 법대 출신이었고 고등고시를 통과해 내무성 공무원이 되었다. 1934년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장으로 승진했지만 1936년 우시오 시게노스케(潮恵之輔, 1881-1955)의 히로타(広田弘毅, 1878-1948) 내각 입각에 반대 의견을 내는 바람에 그 보복으로 좌천되었다. 그가 조선총독부 경찰부 경무국 외사과장으로 부임한 것이 그 때문이었다. <동아일보>의 사령 보도에 따르면 그가 총독부 외사과장으로 부임한 것은 1936422일이었다.

 

아이카와 카츠로쿠, 그는 1936년 4월부터 1937년 7월까지 조선총독부 외사과장으로 근무하던 중, 최승희의 <대금강산보> 제작에 적극 협력했다.

 

그의 외사과장 재임 중인 193685일 조선 총독이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에서 미나미 지로(南次郎)로 교체되었다. 아이카와 가츠로쿠는 신임총독을 충실히 보좌했는지 이후 미나미 총독의 신임이 두터워졌다. 19372<대금강산보> 제작 제안이 들어왔을 때 이를 적극 추진할 수 있었던 것도 총독의 신임 덕분이었을 것이다.

 

최승희가 <대금강산보> 제작을 위한 음악과 원작과 안무의 준비를 마쳤을 때, 촬영을 담당할 영화사로 니카츠를 선정한 것도 그의 수완이었을 것이다. 니카츠 영화사의 재정지원 요청을 만족시키기 위해 철도국의 참여를 유도한 것이다. 그 결과 71일 니카츠 영화사가 타마카와 촬영소에 <대금강산보>의 촬영을 할당한다는 발표가 나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듯이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대금강산보>를 위해서는 불운한 일이 2가지 생겼다. 하나는 앞에서 본바와 같이 77일 중일전쟁이 터진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이카와 외사과장이 78일자로 외사과장을 물러나 미야자키현(宮崎県)의 지사로 승진, 영전하게 된 것이었다.

 

75일자 도쿄 토메이 통신의 전화통지문을 인용한 <조선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76일의 일제 각의 결정으로 지방장관 4명이 사임하게 됨으로써 부장급에서 지사로 영전할 사람이 4명이 지명되었는데 그중의 한명이 아이카와 가츠로쿠였던 것이다.

 

이례적인 것은 아이카와 가츠로쿠는 외사과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장급으로 간주되어 지사로 승진한 것이다. 그가 우시오 시게노스케의 히로타 내각 입각을 반대했던 것이 옳았다는 점이 인정된 결과였던 것으로 보이며, 일시적인 좌천을 두 단계 승진으로 보상받은 것이다.

 

아이카와 카츠로쿠는 조선총독부 외사과장을 사임한 후 미야자키현의 지사로 영전했다. 사진은 미야자키현 종합공원에 세워진 그의 동상.

 

이후 아이카와 가츠로쿠는 1939년 히로시마현 지사, 1941년 아이치현 지사를 거쳐 1944년 중앙정부 후생성 차관으로 승진했다가, 일제의 2차대전 패전과 함께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1952년에는 자민당 소속으로 미야자키 지역구에서 중의원 선거에 당선된 이후 내리 8선을 달성했고, 자민당 안에서는 치안대책특별위원장으로 오래 재직했다.

 

만일 아이카와 외사과장이 조금만 더 재임했다면 <대금강산보>의 제작은 당초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었을 지도 몰랐다. 중일전쟁으로 총독부 정책의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하더라도, 그는 계획은 빠르고 목표를 반드시 이뤄내는 역량있는 행정가였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최승희도 조바심을 내며 4달이나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대금강산보>, 적어도 최승희를 위해서는, 원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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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강산보>는 한 달의 촬영과 한 달의 편집을 거친 뒤 완성되어서 1937년 12월21일 시사회를 열었다. 장소는 도쿄 소재 니카츠 영화사의 타마카와 촬영소였는데, 이 시사회 참석자들이 눈길을 끈다.

12월24일자 <매일신보>의 보도에 따르면 이 시사회에 “황공하옵게도 이왕(李王) 전하의 태림(台臨)으로 받들어 뫼시고, 오노 로쿠이치로(大野緑一郎) 정무총감과 요시다 히로시(吉田浩) 철도국장 등이 출석”했다고 전했다.

‘이왕 전하’란,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였으나 제위에 오르지 못하고 나라를 잃은 영친왕(英親王, 1897-1970)을 가리킨다. 1907년 황태자로 책봉된 후의 정식 호칭은 ‘의민태자’이지만, 조선이 일본의 보호령이 되자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그해 12월 강제로 일본 유학에 보내졌다. 

 

이토 히로부미에 이끌려 10세의 나이로 일본에 강제 유학을 갔던 의미태자와 그의 모친 엄귀비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합병되자 황제 순종은 왕으로 격하됐고, 의민태자도 왕세자로 격하되어 일본 황족에 준하는 예우를 받기 시작했다. 1920년 4월 그는 일본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와 결혼했다. 해방 후 귀국하려했으나 이승만 정부가 거부했고, 박정희 정권 때에야 국적을 회복했으나, 여전히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살다가 1970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사망했다.

이왕은 어떻게 <대금강산보>의 시사회에 참석하게 되었을까? 신문 보도에는 경위가 나와 있지 않지만, 주최측이 이왕을 초청했거나 이왕의 요청이 있었을 것이다. 일본에 머물며 아카사카 저택에 유폐되었던 이왕은 조선 미술품에 관심이 높았고, 특히 금강산을 사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아마도 이왕 쪽에서 요청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기는 하다. 

어떤 경우이든 이 자리에서 최승희는 이왕을 만날 수 있었고, 10세 때부터 일본에 억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능숙하게 조선어를 구사했던 이왕은 최승희와 조선어로 인사를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최승희에게 <대금강산보> 제작에 대한 이모저모를 묻기도 하고, 또 일주일 후면 요코하마를 출발해 장도에 오를 세계 순회공연에 대해서도 질문했을 법하다.

이왕과 최승희는 그보다 12년 전에 만났을 수도 있었다. 영친왕이 일본에 억류당한 이후 그는 도쿄 치요다구 소재 아카사카의 이왕 저택에 거주했는데, 이 저택은 조선의 숙명, 진명, 양정고보 학생들의 단골 수학여행 목적지의 하나였다. 이 세 학교는 영친왕의 어머니 엄귀비가 설립한 학교들이었기 때문이다. 최승희가 속했던 숙명17회 졸업생들도 3학년 시절인 1925년 일본 수학여행 중에 이 저택을 방문했고 이왕을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친왕이 살았던 도쿄 아카사카의 저택


그러나 최승희는 이때 이왕을 만나지 못했다. 1922년 최승희 집안이 몰락한 이래 지속적인 가난 속에 살았기 때문에 수학여행비를 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약 80명의 동급생 중에서 일본 수학여행을 가지 못한 학생은 5명으로 알려졌는데, 최승희가 그중 한명이었다. 

1925년에 이왕을 만나지 못했던 최승희는 마침내 1937년 12월21일 <대금강산보> 시사회에서 이왕을 만날 수 있었다. 아카사카의 이왕 저택에서는 아니었지만 그로부터 15킬로미터쯤 서쪽의 초푸시 타마카와 6초메의 니카츠 타마카와 촬영소에서였다. 

이왕은 저명한 무용가로 성장한 최승희가 숙명여고보 출신인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어머니가 설립한 학교의 졸업생이 일본 최고의 예술가가 된 것을 대견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왕이 금강산 영화를 관람한 것은 <대금강산보>가 처음은 아니었다. 1929년 조선을 방문했을 때 이왕은 다른 “금강산 활동사진”도 관람한 적이 있었다. 그해 10월6일자 <매일신보>는 “(영친왕) 전하께서 ... 조선사회사업과 금강산, 조선농업 등에 대한 제 활동사진을 어람하”셨으며, “<금강산>이란 활동사진에 대하여는 전하께서 실지로 어관람(=방문)하실 터이므로 예비지식을 준비하시기 위하여 더욱이 열심히 어람하셨더라”고 보도했었다. 

직접 금강산 관광까지 했던 이왕은 <대금강산보>에 촬영된 금강산을 어떤 기분으로 감상했을까? 자신의 영토였을 금강산을 빼앗기고 일본 땅에서 창살 없는 감옥살이를 하고 있던 그로서는 비록 영화로나마 다시 보는 금강산에 대한 감회가 남달랐을 것임에 틀림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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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대금강산보>의 필름은 소실되었다. 그것이 어떤 영화였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사의 문헌도 남아 있지 않다. 즉 원작이나 각본도 없고 필름도 없으니 <대금강산보>의 내용이나 작품성을 짐작할 자료가 거의 없는 셈이다.

 

다만 여기저기 흩어진 단편적인 미디어의 기사와 일본영화 데이터베이스의 배역 기록을 참고하면 그것이 대략 어떤 내용의 영화였는지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우선 <대금강산보>의 일본 개봉을 앞두고 살포된 전단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반도의 기이한 명승, 금강산의, ... 경승과 오랜 제사 행사의 진기함이 줄거리와 병행되어서, 미지의 나라 조선을 남김없이 소개하고, 그에 더해, 자신감 넘치는 최승희의 멋진 무용장면, ... 요염한 미희, 최승희의 무용 걸작집... 천연미와 미술미를 혼연시킨 이채편...”

 

이 홍보문에서 줄거리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은 별로 없다. 다만 유서깊은 제사 행사가 등장한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한편, 1938129일자 <경성일보> 3면에 게재된 영화 광고문에는 줄거리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대금강산보> 전단지, 영화 내용을 "반도의 무희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로맨스"라고 소개했다.

신기한 명승지 대금강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반도의 무희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로맨스를 묘사... 최승희의 반생을 가로지른 고투를 이야기하는 애련의 비창곡...”

 

고통스런 투쟁이란 무용가로 성공하기 위한 분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 ‘슬프고도 아름다운 로맨스애련의 비창곡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주인공 이승희가 무용가로서의 꿈은 이루지만 사랑까지 이루지는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금강산보>는 무용영화이므로 암시와 복선이 깔리고 반전이 숨어있는 복잡한 스토리는 필요하지 않았다. 단순한 스토리 속에서나마 금강산의 승경을 배경으로 최승희의 무용 자태가 소개되는 영화였음에 틀림없다. 다행히도 193823일자 <경성일보>에는 <대금강산보>에 대한 짧은 비평문이 게재되었고 여기에 대강의 줄거리가 서술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정략결혼을 피하여 조선으로 도망간 작곡가 지망의 일본인 대학생 토모다(=가사하라 츠네히코)는 부관 연락선에서 무희 이승희(=최승희)를 만난다. 금강산 속에 자리 잡은 그녀의 생가를 방문하는 사이에 두 사람은 사랑하게 되고 결혼을 약속한 뒤, 도모다는 부모의 승낙을 얻기 위해 도쿄로 돌아간다. 하지만 토모다의 부모가 승희와의 결혼을 허락할 리 없다, 그는 사랑에 몸부림치며 부모님의 집을 떠나 학업을 포기하고 <대금강산보> 작곡에 몰두한다.

 

한편, 무희가 되려는 승희도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무단으로 상경, 향토무용을 기초로 새로운 무용공부에 전념한다. 이윽고 승희의 힘겨운 정진은 결실을 맺어 반도의 무희;로서 화려한 데뷔의 날이 왔다. 그러나 바로 그날 병상에 누운 토모다는 완성된 <대금강산보>를 승희에게 바치면서 죽어간다.”

 

1938년 1월28일의 <동아일보>에 게재된 <대금강산보>의 한장면, 가사히라 츠네히고(왼쪽)과 최승희(오른쪽)

 

1937127일자 <미야코신문(都新聞)>에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서술이 한 가지 등장한다. 석왕사에 대하여 이 절은 올해가 축성 12백년 째였기에 114일의 촬영을 위해 특별 임시 대제(大祭)를 열게했다고 설명하면서 그 장면의 촬영을 위해 시골사람 총출동으로 거의 2천명에 가까운 엑스트라를 동원했다는 것이다.

 

80년 전의 영화 촬영에 2천명 가까운 엑스트라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그보다 20년 후에 제작된 <벤허(1959)>의 전차경주 장면의 엑스트라도 15백명이었다. 그런데 <대금강산보(1938)>의 석왕사 축제장면 엑스트라가 2천명이었다고 하니, <미야코신문>의 서술이 오류가 아니라면, <대금강산보>는 생각보다 규모가 큰 엄청난 영화였다는 뜻이다.

 

그 같은 대규모의 석왕사 축제 속에서 최승희 선생은 <승무><검무>, 혹은 <아리랑>이나 <봉산탈춤> 같은 조선무용 작품을 공연했던 것일까? 최승희의 무용작품뿐을 보고싶은 마음도 굴뚝같지만, 2천명의 엑스트라가 나오는 장면을 보기 위해서라도 <대금강산보>의 필름이 조만간 어디선가 발견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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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강산보>의 감독과 배우 지명이 다소 실망스러웠지만, 특급 촬영감독을 위촉한 것만으로도 니카츠 영화사는 성의를 보인 셈이었다. 금강산의 경치를 찍는 관광영화이자 최승희의 무용을 찍는 무용영화라는 점을 고려한 배려였을 것이다.

 

촬영이 시작되자 외사과와 철도국의 협조도 재개되었다. 철도국은 니카츠 촬영팀의 이동에 최대한 편의를 주었고, 외사과는 촬영지 섭외를 위해 애썼다. 특히 금강산 지역은 군사지역으로 지정되어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 많았지만, 니카츠 촬영팀이 이에 구애되지 않도록 일본군의 협조를 이끌어낸 것이 바로 외사과였다.

 

평전과 연구서들을 종합하면 니카츠 촬영팀의 조선 로케이션은 19371018일부터 1124일까지였다. 1022일의 <매일신보>1027일의 <동아일보>감독 미즈가에 류이치(江龍一) 14명의 선발대가 20일 오후 135분에 입경하여 그날 밤으로 금강산 로케이션을 떠났다고 보도한 것으로 보아, 이들은 1018일 도쿄를 출발했을 것이다.

 

<대금강산보> 촬영시 최승희가 '만상계(萬相溪)' 입구에서 부친과 남편, 동료 배우들과 포즈를 취해 기념 촬영. 

 

최승희는 촬영팀에 뒤늦게 합류했다. 1025일의 <매일신보>주역이 될 반도가 낳은 무희 최승희 여사는 일행과 함께 24일 오후135<아까츠키(あかつき)>로 입성했고 경성에서 2박한 후 25일 금강산으로 향할 터라고 전했다. 최승희가 늦게 합류한 것은 1014일부터 도쿄츠키지(東京築地)극장에서 공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최승희는 1달이 넘는 로케이션 기간 동안 촬영팀과 함께 조선에 머물지도 못했다. 예컨대 1030일에는 시마네(島根)현의 마츠에(松江) 시공회당에서 <최승희여사 신작무용 발표회>의 일정이 잡혀 있었으므로, 이 공연을 위해서라도 일본에 다녀왔기 때문이다.

 

최승희가 마츠에 공연을 마치고 촬영을 위해 언제 조선에 돌아왔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음 공연이 125일 도쿄 히비야 공회당의 <도구고별공연>이었으므로 아마도 다시 촬영팀과 합류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1025일부터 1030일까지 불과 5일 동안의 촬영으로 금강산과 석왕사를 포함, 부여와 수원, 경주와 평양 로케이션을 모두 소화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소 미숙한 감독과 배우, 스탭들과 분주한 공연 일정에도 불구하고 최승희는 촬영에 최선을 다했다. 무용영화였기에 다행이었던 것은 다른 배우들의 도움이 없더라도 8개 무용작품 장면만큼은 자신의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극영화로서의 성공은 보장할 수 없더라도 무용영화로서의 작품의 수준은 최승희가 결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최승희는 <대금강산보>의 촬영에도 대단히 적극적이었다. 1937127일자 <미야코신문(都新聞)>은 금강산 촬영장면을 이렇게 서술했다.

 

<대금강산보> 촬영을 위해 들것에 타고 금강산으로 올라가는 최승희. <미야코신문>은 최승희가 금강산을 오르내리는 동안에도 영어 공부를 했다고 보도했다. 

 

“(옥류담) 위로는 산 전체가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산 정상에서 최승희의 라스트 신을 찍었다. 으스스한 찬바람을 맞으며 그녀는 흰옷 한 벌만 입고 춤을 추었는데 산을 내려와서 보니 일손을 거들었던 일행은 모두 콧물을 훌쩍였지만 그녀만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미야코신문> 보도가 127일인 것으로 보아 옥류담 촬영은 최승희가 시마네현 마츠에 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11월 중순 이후였을 것이다. 11월 중순이면 금강산 속은 한겨울이었다. 찬바람을 맞으며 흰옷 한 벌만 입고 춤을 춘다는 것은 배우는 물론 무용예술가라면 절대 시도하지 않을 일일 것이다. 그러나 최승희는 이를 마다하지 않았고 기꺼이 촬영에 임했다. 그만큼 <대금강산보>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옥류담 촬영에 동참했던 동료 배우 코노 켄지의 발언도 주목할 만하다. “최승희는 (촬영을 위해) 금강산을 올라가면서도 이번 외국여행을 대비한다며 영어 단어를 외우고 있었다. 정말 감탄했다.”

 

당시의 최승희가 얼마나 의지가 단단하고 열의에 차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반드시 완성된 <대금강산보>를 가지고 세계 순회공연에 나서고 싶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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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강산보>의 감독과 배우 수준이 기대에 못미쳤다 해도 최승희가 이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일본의 영화제작 시스템은, 스튜디오 체계를 갖춘 대형 영화사가 감독과 배우를 전속 고용해 풀을 만든 다음, 제작 영화에 따라 감독과 배우를 배분하는 식이었다. 최승희 조차도 <대금강산보> 출연을 위해 니카츠 영화사의 고용계약서에 서명해야 했다.

 

따라서 최승희가 아무리 저명한 예술가라고 해도 고용주인 대형 영화사의 결정을 거부하거나 뒤집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빠른 시일 안에 영화를 완성하려면 과정이 불만스럽더라도 영화사가 지명한 감독, 배우들과 협력해 촬영을 해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감독과 배우들과는 별도로 니카츠 영화사가 지명한 <대금강산보>의 촬영 스태프가 탁월했다는 점이다. 특히 촬영감독 요코타 타츠유키(横田達之)는 전설적인 카메라맨으로 1921년의 <부침()>부터 1961년의 <석가(釈迦)>에 이르기까지 평생 114개의 영화와 다큐멘터리, 및 기타 필름을 촬영한 베테랑 촬영감독이었다.

 

<대금강산보>의 촬영감독은 일본 영화의 수작 <석가(1961)>의 촬영을 맡았던 요코타 타츠유키(横田達之)였다. 

 

그가 촬영한 영화 중에는 일본 영화사에 기록되는 작품들도 적지 않다. 특히 그가 니카츠 영화사의 교토 촬영소에서 활동하던 시절에는 전설적인 감독 미조구치 켄지(講口健二)와 콤비를 이루어 걸작을 양산했다.

 

여성영화의 거장으로 불리던 미조구치 켄지 감독은 1952년부터 연속 3년 베네치아 영화제의 국제상(<사이카쿠 일대녀(西鶴一代女, 1952)>), 산마르코 은사자상(<우월이야기(雨月物語, 1953)><산초대부(山椒大夫, 1954)>)을 수상해 국제적으로도 주목받는 영화감독이었다. 특히 1953년의 <우월이야기>는 금사자상 해당작이 없는 사실상 최고상 수상작이었다.

 

미조구치 켄지 감독과 요코타 타츠유키 촬영감독은 간토대지진 이후 교토의 니카츠 영화사에서 만나 함께 활동하면서 <사랑을 끊는 도끼(, 1924)>부터 <양귀비(楊貴妃, 1955)>에 이르기까지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28편의 영화를 함께 제작한 바 있었다.

 

그런데 <대금강산보>의 완성에 기여한 또 한명의 탁월한 촬영감독이 있었다. 일본 다큐멘터리의 효시라고 불리는 <설국(雪國, 1939)>의 촬영감독 이병우(李炳宇)였다.

 

일본에서 이노우에 칸(井上莞)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이병우는 1920년대 일본에서 사회주의 영화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1935년부터는 <예술영화사(術映画社)>에 몸담고 예술영화와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에 몰두했다. <하늘의 소년병(少年兵, 1941)>은 그의 초기 대표작 중의 하나이며, 이 영화는 프랑스의 국립도서관에도 소장되어 있을 정도였다.

 

1938514일의 <매일신보>조선영화주식회사 제1회 작품 <무정>의 촬영을 위하여 10일 동경예술영화사의 중진 카메라맨 이병우씨가 입성했다고 보도하면서 그는 수년전에는 철도국의 초빙을 받아 관광영화를 제작한 일도 있는 명 카메라맨이라고 소개했다.

 

이병우가 촬영했다는 관광영화는 <조선의 여행(朝鮮, 1935)>이었다. 이 영화는 조선 전국의 명승지를 자세히 소개했는데 그 촬영 담당이 바로 이병우였던 것이다.

 

<대금강산보>에는 이병우(일본이름 이노우에 칸)가 촬영했던 <조선의 여행(1935)의 장면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사진은 이병우의 대표작 <하늘의 소년병(1941)의 한 장면.

 

1938518일의 <조선일보>도 같은 소식을 전하면서 이병우씨가 “1932<강 건너편의 청춘(河向らの靑春)>을 촬영해 단연 영화계에 두각을 낸 후 “3년 전에는 조선철도국의 초청을 받아 <조선의 여행>이라는 조선 풍경 소개영화를 촬영했다고 설명하면서 이때 촬영한 장면에서 최승희 여사가 주연한 <금강산보>에 이용된 것이 적지 아니하다고 덧붙였다.

 

, <대금강산보>에는 이병우 촬영의 <조선의 여행>의 장면들이 적지 않게 편집되어 포함되었던 것이다. 두 영화가 모두 철도국이 후원한 작품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대금강산보>는 당대 최고의 촬영감독 요코타 타츠유키와 일본영화 리얼리즘의 선구자이자 다큐멘터리 영화의 권위자인 이병우의 작품이 나란히 콜라보를 이루어, 적어도 영상 면에서는 뛰어난 영화가 될 가능성을 보였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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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강산보>에 쏟아졌던 초기의 열의가 사라지자 촬영 및 편집의 밀도가 현저하게 떨어졌다. 원작과 각색, 음악과 안무가 조선과 일본의 최고 전문가들에 의해 이뤄졌던 점은 앞에서 보았다. 하지만 중일전쟁 발발 4개월 후 촬영이 시작될 즈음에는 세계 수준의 무용영화를 만든다는 열의는 사라졌다. 그것은 니카츠 영화사가 구성한 감독과 배우진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니카츠 영화사는 <대금강산보>의 감독으로 미즈가에 류이치(江龍一)를 지명했다. 그는 해외 유학파이기는 했으나 세계 수준의 예술영화 제작 능력이 검증된 감독은 아니었다. 1937922일의 <매일신보>감독은 신진이라고 소개할 정도였다.

 

그는 <어머니의 미소(微笑, 1934)><소집령(召集令, 1935)>에서 와타나베 쿠니오(渡辺邦男) 감독의 조감독으로 실전수업을 받은 뒤 19375개의 영화를 감독한 바 있지만, 그중 4개가 러닝타임 3-40분의 국책 홍보영화였다. 극영화는 19371021일에 개봉된 <연애 하와이 항로(恋愛ハワイ航路)> 한 편이었다.

 

아마도 니카츠 영화사는 미즈가에 류이치 감독이 <연애하와이항로>를 완성한 것을 인정하여 그에게 <대금강산보>의 감독을 맡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극영화 제작 경험이 단 한 편인 감독에게 세계적 수준의 무용 영화제작 책임을 맡긴 것은 의아스러운 결정이 아닐 수 없다.

 

1937년 10월경 <대금강산보> 출연자 및 제작진과 함께 촬영한 기념사진,

 

실제로 미즈가에 류이치는 극영화 부문에서 그다지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고, <대금강산보>가 개봉된 후 19388월에 니카츠 영화사를 떠나 만주영화사로 이적했다. ‘만영에서도 12편의 국책영화를 더 만들었으나 1942년 이후에는 감독으로서의 활동을 중단했다.

 

한편 니카츠가 지명한 출연 배우도 대부분 신인이었다. 여주인공 이승희(李承姫) 역의 최승희부터 신인이었다. 비록 <반도의 무희> 출연경험이 있기는 했지만, 그의 연기가 칭찬받은 적은 없었다. 따라서 상대역의 리드가 필요했다. 하지만 니카츠가 지명한 남주인공 도모다 히데오(友田秀夫) 역의 가사하라 츠네히코(笠原恒彦)조차 데뷔 1년이 막 지난 신인배우였다.

 

더구나 그동안 가사하라 츠네히코가 출연한 8개 영화에서의 역할은 모두 조연이었고, 주연으로 발탁된 것은 <대금강산보>가 처음이었다. 그는 <대금강산보> 이후 4년간 더 배우로 활동했으나 1942년 이후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도 역시 만주영화사로 이적했다가 패전과 함께 영화계에서 은퇴한 것으로 보인다.

 

이승희의 여동생 순희(順姫) 역인 다치바나 키미코(橘公子, 1921- )1936년에 닛카츠에 입사한 이래 2편의 영화에 출연했던 신인이었다. 그나마 그가 출연했던 <꿈의 철모(鉄兜, 1937)><아버지의 노래시계(さんの歌時計, 1937)>는 국책영화였다.

 

이승희의 아버지 역을 맡은 코노 켄지(河野憲治)도 경력 짧은 단역이었고, 도모다 히데오의 어머니역의 미츠이 치에(三井智恵, )<대금강산보>가 처녀출연이었으며 1942년에 배우 생활에서 조기 은퇴했다.

 

1938년 1월26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대금강산보>의 한장면, 이승희 역을 맡은 최승희를 제외한 부친(왼쪽)과 여동생(가운데) 역은 모두 일본인 배우들이 담당했었다.

 

다만 도모다 히데오의 여동생 미에코(美枝子) 역의 무라타 치에코(村田知栄子, 1915-1995)는 중견배우로 1933년에 데뷔한 이래 26편의 영화에 출연한 바 있었다. 그밖에 도모다 히데오의 아버지 역을 맡은 다카기 에이지(高木永二, 1896-미상)와 무용교수 키시이(岸井) 역의 에가와 우레와(江川宇礼雄, 1902-1970)는 베테랑 연기자들이었다.

 

따라서 니카츠 영화사가 지정한 감독과 배우들은 그런대로 구색을 갖추기는 했지만 세계는커녕 일본에서도 일류라고 할 수는 없었다. <대금강산보>의 제작 초기에 보였던 세계 수준의 뛰어난 무용 영화를 목표로 하기에는 모자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니카츠 영화사의 결정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전쟁 중 총동원령이 내려질 것이 뻔한 마당에 <대금강산보>같은 예술영화가 흥행에 성공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제작이 취소되지 않고 진행된다 하더라도 후일의 손실을 줄이려면 현재의 투자를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니카츠 영화사가 당시의 2류 감독과 배우를 썼던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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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 초기(19377~10), <대금강산보> 제작이 중단된 것은 조선총독부 외사과와 철도국의 지원이 끊겼기 때문이다. 권력 및 재력기관이었던 이 두 부서는 중일전쟁 중의 정보수집 업무와 폭증하는 병력 및 군수물자 수송업무로 무용영화에 관심가질 여유가 없었다.

 

193710월에 들어서야 이같은 상황이 다소 완화되었다. 일본군은 중국 화북 지역을 장악했고, 상하이에서 승기를 잡았고,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난징 공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특히 랴오뚱과 산뚱반도를 점령한 일본군은 병력과 군수물자 수송을 한반도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졌다. 선편으로 바로 대련이나 청도로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중일전쟁 초기와는 달리 일본군의 조선총독부 의존도가 줄어들면서, 총독부로서는 숨 돌릴 여유가 생긴 것이다.

 

이에 따라 <대금강산보> 제작 당사자들의 관심도 되살아났다. 최승희와 니카츠 영화사로서는 7월초부터 10월말까지 거의 4개월 동안 끈질기게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1937년 10월7일자 <매일신보>, 금강산을 배경으로 한 무용영화 촬영이 오랜 지연끝에 시작할 예정이며, 영화 제작이 마치는대로 최승희가 유럽 순회공연을 떠날 것이라고 보도했다.

 

1022일자 <매일신보>는 마침내 <대금강산보> 제작에 대한 철도국의 후원이 확정되었다고 보도했고, 1027일자 <동아일보>는 철도국 지원금이 1만원이라고 전했다. 철도국 부담액은 전체 제작비의 10분의1에 불과했지만, 니카츠 영화사가 기다린 것은 단지 예산만은 아니었다. 촬영지 선정을 위해 조선의 주요 명승지에 위수령을 내린 일본 군부의 허락도 필요했고, 철도국이 보유한 필름들을 비롯, 각종 대외비 자료도 활용할 수 있어야 했던 것이다.

 

철도국의 자금 지원이 이뤄지자 니카츠 영화사는 1025일부터 촬영을 시작했고, 이후 일정은 다시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금강산과 석왕사, 평양과 경주와 부여와 수원에서의 촬영이 전부 야외 로케이션이었는데도 11월 말까지 한 달 만에 완료되었다.

 

그러나 <대금강산보> 제작을 위한 초창기 열의는 현저하게 식어 있었다. 철도국은 약속했던 지원금을 지급했을 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외사과도 중일 전쟁 정보 업무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특히 <대금강산보> 제작의 산파 역할을 했던 아이카와 외사과장이 사임하자, 무용영화에 대한 외사과의 관심은 크게 줄었고, 최승희나 니카츠 영화사의 요청에 수동적으로 협력하는 정도였다.

 

열의가 떨어진 것은 니카츠 영화사도 마찬가지였다. 그해 10월 중순까지만 해도 촬영이 시작되지 않았으므로 <대금강산보> 제작이 취소된다 해도 니카츠 영화사로서는 손해날 일이 없었다.

 

그러나 10월말 촬영이 시작되면서 문제가 달라졌다. 니카츠 영화사는 <대금강산보>를 국내 상영용으로 전환해 비용절감에 들어갔다. 해외 상연이 불가능해진 마당에 굳이 세계 최고 수준의 영화를 만들 필요가 없었고, 따라서 철도국 지원금 외에 자사 예산을 10만원이나 투입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1937년 10월27일의 <동아일보>, 최승희의 <대금강산보> 촬영이 시작됐음을 보도했다.

 

다만 최승희는 입장 변화가 없었다. 그는 반드시 해외 순회공연을 떠난다는 계획이었고, 일정을 연기해서라도 <대금강산보>를 가지고 떠나겠다는 결심이었다. 전쟁과 올림픽 취소로 관련자들의 입장이 모두 변했지만, 세계 순회공연을 앞둔 최승희만은 원래의 목표와 의도를 그대로 유지했다.

 

따라서 193710월말부터 <대금강산보>가 촬영되고 편집되어 1221일에 시사회를 가지게 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최승희의 노력 덕분이라고 해야 했다. 만일 이때 최승희까지 <대금강산보>를 포기했다면 이 영화의 제작은 중단되었을 것이다.

 

193710월은 최승희가 기다릴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었다. 해가 넘어가면 그의 순회공연 자체가 취소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시아에서는 중일 전쟁이 확대되고 있었고, 유럽에서는 히틀러의 재무장으로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유럽에서마저 전쟁이 터진다면 1935년 말부터 2년 이상 준비해온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 계획은 자칫 수포로 돌아갈 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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