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でダンスホールが流行している朝鮮では新舞踊胎動しました朝鮮新舞踊先駆者とされる裵龜子(1905-2003)趙澤源1907-1976)、崔承喜1912-19691920年代舞踊めたからです

 

 

191510天勝奇術団入団したバレーボール1924天勝奇術団のニューヨーク公演にアンナ·パブロワにしばらく師事1926には天勝奇術団脱退1928独自舞踊団設立1929朝鮮新舞踊公演開催しました

 

 

趙澤元徽文高普在学中だった1922朝鮮巡業海參崴天道敎靑年會演芸団朴世勉からロシアのコパッダンスをこれを1923土月公演披露しました1927石井漠舞踊団2度目京城公演観覧石井舞踊団入団舞踊授業めました

 

 

崔承喜19263淑明女学校卒業した長兄崔承一斡旋石井舞踊団京城公演観覧した新舞踊じることを決心すぐに石井舞踊団入団帰国する舞踊団について日本舞踊留学めました

 

 

朝鮮新舞踊胎動期である1920年代沿海州日本激動期でした沿海州はロシア革命191711以後1923まで内戦経験しており高麗人同胞はここに進駐した日本軍とロシア政府から二重弾圧けていました。 「海參崴天道教青年会芸能団朝鮮巡業ったのも沿海州同胞支援するためだったのです

 

 

たように沿海州同胞たちの朝鮮公演社交ダンスの擴散契機になったこともあります1922金東煥(キム·ドンファン)玄哲(ヒョンチョル)設立した舞蹈学館社交ダンスの普及先頭ったからです

 

一方日本第一次世界大戦勝利国として迅速産業化大正民主化文化芸術界変化きていました舞踊界でも伝統的歌舞伎とは洋風バレエや社交ダンスがれられていました

 

 

日本のバレエは191210帝国劇場赴任したイタリアジョヴァンニ·ロッシGiovanni Vittorio Rossi1867-?によって導入されましたが団員だった石井漠1887-1962格式られたバレエに反旗帝国劇場洋劇部脱退して新舞踊運動めました石井漠1916山田耕作1886~1965)、小山内薫1881~1928とともに断行した新劇場運動がそれでした

 

 

石井漠めた1916新舞踊運動とともに1917横浜鶴見花月園開業まった社交ダンスも急速大衆がりましたわずか10年後1927阪神間モダニズムの一部として尼崎にダンスホール全盛期まりました

 

 

芸術舞踊としての新舞踊娯楽舞踊としての社交ダンスが1920年代という時期まったのは偶然ではありません朝鮮日本では西洋舞踊れられ芸術娯楽区分があまりはっきりしていなかったからです

 

 

ロシア貴族出身革命けて日本帰化したエリアナ·パブロワ(Еле́на Па́влова, 1897-1941)芸術舞踊家でもありながら社交ダンス学院開業していたことからも芸術芸能境界曖昧だったことがかりますしかし1930社交ダンスがエログロナンセンス現象先頭走者となり当局まりをけていたところ1937日本中国侵略まり日本社会軍国主義逆戻りしダンスホールは閉鎖きます

 

 

このように朝鮮日本新舞踊社交ダンスは西洋舞踊れて期間芸術思潮文化現象形成した重要なジャンルとして位置づけられましたこのようなスピーディーでダイナミックな文化現象崔承喜朝鮮舞踊誕生したのです(jc, 2024/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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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댄스홀이 유행하는 동안 조선에서는 신무용이 태동했습니다. 조선 신무용의 선구자로 꼽히는 배구자(裵龜子, 1905-2003), 조택원(1907-1976), 최승희(1912-1969)1920년대에 무용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191510세의 나이로 텐가츠 마술단에 입단한 배구자는 1924년 텐가츠 마술단의 뉴욕 공연 때에 안나 파블로바에 잠시 사사했고, 1926년에는 텐가츠를 탈퇴, 1928년 독자적인 무용단을 설립하고, 1929년 조선에서 첫 신무용 공연을 개최했습니다.

 

 

조택원은 휘문고보 재학 중이던 1922년 조선 순회공연을 단행했던 해삼위 연예단의 박세면으로부터 러시아식 코팍춤을 배웠고, 이를 1923년 토월회 공연에서 선보였습니다. 1927년 이시이 무용단의 두 번째 경성공연을 관람하고, 이시이 무용단에 입단, 무용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최승희는 19263월 숙명여학교를 졸업한 후, 큰 오빠 최승일의 주선으로 이시이 무용단의 경성 공연을 관람한 후 신무용에 투신하기로 결심했고, 바로 이시이 무용단에 입단, 귀국하는 무용단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무용 유학을 시작했습니다.

 

 

조선 신무용의 태동기인 1920년대는 연해주와 일본이 격동기였습니다. 연해주는 러시아 혁명(191711)이후 1923년까지 내전을 겪고 있었고, 고려인 동포들은 이곳에 진주한 일본군과 러시아 정부로부터 이중의 탄압을 받고 있었습니다. <해삼위 천도교청년회 연예단>이 조선 순회공연을 단행한 것도 연해주의 동포들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던 것이었습니다

 

 

앞 글에서 보았듯이 연해주 동포들의 조선 공연은 사교 댄스의 학산의 계기가 뙤긷도 했습니다. 1922년 김동환(金東煥)이 현철과 설립한 <무도학관(舞蹈學館)>이 사교댄스의 보급에 앞장섰기 때문입니다.

 

한편 일본은 일차대전 승전국으로서 빠른 산업화와 다애쇼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문화예술계에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무용계에서도 전통적인 가부키와 노와는 전혀 다른 서양식 발레와 사교댄스가 도입되고 있었습니다.

 

 

일본의 발레는 191210월 제국극장에 부임한 이탈리아인 죠반니 로시(Giovanni Vittorio Rossi, 1867-?)에 의해 도입됐지만, 단원이던 이시이 바쿠(石井漠, 1887-1962)가 격식에 얽매인 발레에 반기를 들고, 제국극장 양극부를 탈퇴해 신무용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시이 바쿠는 1916년 야마다 코사쿠(山田耕作18861965), 오사나이 카오루(小山内薫18811928)와 함께 단행한 <신극장> 운동이 그것이었습니다.

 

 

이시이 바쿠가 시작한 1916년의 신무용 운동과 함께 1917년 요코하마 쓰루미(鶴見)의 카게츠엔(花月園)의 개업으로 시작된 사교댄스도 빠르게 대중에게 퍼져나갔습니다. 불과 10년 만인 1927년 한신칸 모더니즘의 일부로 아마가사키에 댄스홀 전성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술 무용으로서의 신무용과 오락 무용으로서의 사교댄스가 1920년대라는 같은 시기에 시작되었던 것은 우연은 아닙니다. 조선과 일본에서는 서양 무용이 도입되면서 예술과 오락의 구분이 그다지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귀족 출신으로 혁명을 피해 일본으로 귀화한 엘리아나 파블로바는 예술무용가였으면서도 사교댄스학원을 개업했던 것으로 보아도 예술과 연예의 경계가 모호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1930년데에 사교댄스가 <에로그로넌센스> 현상의 선두주자가 되면서 당국의 단속을 받던 중, 1937년 일본의 중국침략이 시작되고 일본 사회가 군국주의로 곤두박질치면서, 댄스홀은 폐쇄의 길을 걷습니다.

 

 

이처럼 조선과 일본의 신무용과 사교댄스는 서양의 무용을 받아들여 짧은 기간에 예술사조와 문화현상을 형성한 중요한 장르로 자리잡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빠르고 역동적인 문화현상 속에서, 최승희의 조선무용이 탄생했던 것이지요. (jc, 2024/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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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920BTSはニューヨークの国連総会文在寅大統領とともに演説したあと国連本部背景ったミュージックビデオパーミッション·トゥ·ダンス(Permission to Dance)映像公開しました"りの許可"という意味です

 

 

80年以上前京城でもりの許可める嘆願書公開されました1937雑誌三千里1月号)掲載されたソウルのダンスホールをせよという文章ですタイトルは挑発的ですが朝鮮総督府三橋孝一郎警務局長への嘆願書形式です

 

 

嘆願者8<大日本レコード>文芸部長·ソグ喫茶店<ヴィーナス>のマダム·ボクへスク<朝鮮券番>妓生·ウンヒ<ハンソン券番>妓生チェ·オクジン<鍾路券番>妓生パク·グムドバー<メキシコ>女級キム·ウンヒ映画俳優·ドシル<東洋劇場>俳優チェ·ソンファなどでした

 

らはダンスホールが文明都市可能にする象徴的基準としダンスがどれほど健全るい娯楽なのかを説明しながら京城にもダンスホール営業許可してほしいと要請しました

 

 

この公開嘆願れられませんでした8年前19293京城のある日本人鍾路警察署ソシアル倶楽部という社交ダンスホールの開業申請しましたが許可されなかったことがありました日本にはダンスホールの熱気っていましたが朝鮮ではダンスホールの営業されなかったのですね

 

だからといって朝鮮社交ダンスがなかっ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食堂やリクエストカフェやバーなどで秘密のダンスホールがんだったからです1930年代じて秘密のダンスホールが警察摘発されたという記事がよく新聞ました

 

 

朝鮮社交ダンスが導入されたのは日本ではなくロシアをじてでした。 「海參崴天道教青年会芸能団1922414から810まで朝鮮27都市巡回公演いました団員一人だった金東煥巡回公演後京城ロシア公使館通訳官としてきながら京城社交ダンスを普及しました

 

 

19228金東煥玄哲とともに京城新門路朝鮮初のダンス専門学院舞蹈学館開設しましたが音楽科演劇科とともに舞蹈科設置されました。 「舞踏学館192362中央キリスト教青年会館(=YMCA)連合舞踏音楽会」、19249には通商舞踏大会開催社交ダンスの普及大衆から熱烈歓迎けました

 

 

舞踏学館1925新門路から中心街黄金町=乙支路移転舞踏科社交舞踏家庭舞踏叙情舞踏細分、「西洋各国高等社交界流行する社交紹介された社交ダンスが人気のあるプログラムでした

 

 

日本留学生帰国日本式のダンスホールの要素わり社交ダンスはさらにんになる一方エロティックな要素わりめました朝鮮総督府風俗するという理由でダンスホールの開業さなかったのもこうしたエログロナンセンス文化現象のためでした

 

 

朝鮮初のダンスホールは解放後1945910三越百貨店(=新世界百貨店)3設立された<国際文化社>でした経営主舞踊家裵龜子だったのでセンセーションになりました最初洪淳彥とともに<東洋劇場>経営していた裵龜子2番目金桂祚とともにダンスホールを開業したのです

 

 

しかし<国際文化社>米軍情報収集反日人物殺害するなど米軍追放親日政権樹立しようとする陰謀てる秘密本部として告発されいわゆる金桂祚事件まもなく廃業しました

 

 

韓国のダンスホールは1950年代になってようやく許可されましたキャバレーという名前のダンスホールが野火のようにがりました鄭飛石自由夫人いだという評価もありますその社交ダンスは内容えながら大衆されています

 

 

BTSるのに許可はいらないっていましたが韓国人権利るのにほぼ半世紀かかったのでしょう(jc, 2024/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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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920일 방탄소년단(BTS)은 뉴욕 유엔총회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연설한 뒤, 유엔본부를 배경으로 찍은 뮤직비디오 퍼미션 투 댄스(Permission to Dance)’ 영상을 공개했습니다. “춤의 허가라는 뜻이겠습니다.

 

 

80여년전 경성에서도 춤의 허가를 요청하는 탄원서가 공개됐었습니다. 1937년 잡지 <삼천리(1월호)>에 실린 서울에 딴스홀을 하라는 글입니다. 제목이 도발적이지만, 조선총독부의 미츠하시 고이치로(三橋孝一郎) 경무국장에게 보내는 탄원서 형식입니다.

 

 

탄원자들은 댄스홀이 문명도시를 가능하는 상징적인 기준이며 “(사교)댄스가 얼마나 건전하고 명랑한 오락인지를 설명하면서, 경성에도 댄스홀 영업을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탄원자는 8명으로 <대일본레코드사>의 문예부장 이서구, 끽다점 <비너스>의 마담 복혜숙, <조선권번>의 기생 오은희, <한성권번> 기생 최옥진, <종로권번> 기생 박금도, <멕시코>의 여급 김은희, 영화배우 오도실, <동양극장>의 배우 최선화 등이었습니다.

 

 

이 공개탄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8년 전인 19293월 경성의 한 일본인이 종로경찰서에 <소시얼 구락부>라는 사교댄스 개업 신청을 냈으나 허가되지 않았던 바 있었습니다. 일본에는 댄스홀 열품이 불었지만, 조선에서는 댄스홀 영업이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조선에 사교댄스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식당이나 요청, 카페나 바 등에서 비밀 댄스홀이 성행했기 때문입니다. 1930년대를 통하여 비밀 댄스홀이 경찰에 적발되었다는 기사가 자주 신문에 났습니다.

 

 

조선에 사교댄스가 도입된 것은 일본이 아니라 러시아를 통해서였습니다. <해삼위 천도교청년회연예단>1922414일부터 810일까지 조선을 방문, 27개 도시에서 약 넉 달 동안 순회공연을 가졌습니다. 단원의 한 명이었던 김동환(金東煥)은 순회공연 후에도 경성에 남아 러시아 공사관의 통역관으로 일하면서 경성에 사교댄스를 보급했습니다.

 

 

19228월 김동환은 현철과 함께 경성 신문로에 조선 최초의 댄스 전문학원 <무도학관(舞蹈學館)>을 개설했는데, 음악과, 연극과와 함께 무도과가 설치됐습니다. <무도학관>192362일 중앙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연합무도음악회,” 19249월에는 통상무도대회(通商舞蹈大會)를 개최하면서 사교댄스의 보급에 나섰고, 대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무도학관>1925년 신문로에서 중심가인 황금정(=을지로)로 이전하면서 무도과를 사교무도, 가정무도, 서정무도로 세분했고, “서양 각국의 고등사교계에서 유행하는 사교라고 소개된 사교댄스가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이후 일본 유학생들이 귀국하면서 일본식 댄스홀의 요소가 가미되면서 사교댄스는 더욱 번창하는 한편, 에로틱한 요소가 가미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풍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댄스홀의 개업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도 이같은 에로그로넌센스의 문화현상 때문이었습니다.

 

 

조선 최초의 댄스홀은 1945910일 미츠코시백화점(=신세계백화점) 3층에 설립된 <국제문화사>이었습니다. 경영주가 무용가 배구자였기에 센세이션이 됐습니다. 첫 남편 홍순언과 함께 <동양극장>을 경영했던 배구자가, 두 번째 남편 김계조와 함께 댄스홀을 개업한 것입니다.

 

 

그러나 <국제문화사>미군 정보를 수집하고 반일 인사를 살해하는 등, 미군을 축출하고 친일 정권을 수립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비밀본부로 고발되었고, 이른바 김계조 사건으로 비화되면서, 이내 폐업됐습니다.

 

 

한국의 댄스홀은 1950년대에야 허가됐습니다. 캬바레라는 이름의 댄스홀이 들불처럼 번졌습니다. 정비석의 <자유부인>이 기름을 부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이후 사교댄스는 형태와 내용를 바꿔가면서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BTS춤추는 데에 허가는 필요 없다고 노래했지만, 한국인은 춤출 권리를 얻는 데에 거의 반세기가 걸렸던 것이지요. (jc, 2024/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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