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行はバラバシュで30分休憩ったびバスに乗車してウスリスクにかう途中ラズドルノイエ(Раздольное)でもう一度停車しましたここの鉄道駅1937高麗人強制移住まった場所だからですここは北韓2代目主席金正日国防委員長生誕地でもあります

 

 

ブラジボストックの北約70キロメートルウスリスクの南約30キロメートルれた場所位置するラズドルノイエはロシアが沿海州割譲されるやいなや形成された沿海州初期定着地ですここに軍隊駐屯していたからですが軍事的要衝交通要衝でもあります

 

 

現在ラズドルノイエはクラスキノから北上するA189国道ウラジオストクから北上するA370国道出会場所でありハッサン-ウスリスク鉄道とウラジオストク-ウスリスク鉄道出会場所です

 

 

このようにわさったつの鉄道はウスリスクにつながりハバロフスキーをてモスクワへくシベリア横断鉄道とハルビンをてチーターへ満州横断鉄道かれます満州横断鉄道はチーターでシベリア横断鉄道合流しますから結局シベリア横断鉄道満州横断鉄道目的地はすべてモスクワです

 

 

ラズドルノイエにも高麗人がありましたロシアの記録によると1895年頃形成された高麗人村には餘戶人30世帯らし1906年頃には62世帯300えました1907ラズドルノイエの全体人口570だったということですから高麗人多数だったということですラズドルノイエの人口はロシア革命内戦終息1923には4千人増加しました

 

 

19241にレーニンが死亡スターリンが政権って集団農場化強行したラズドルノイエ人口きく19397,70019591万人増加して頂点しましたがその持続的人口減少2021には5,700らしていると集計されました

 

1939人口77百人はラズドルノイエの高麗人強制移住させられた数字であるためここの人口はおそらく1937年頃1万人以上最高値記録したと推定されます

 

 

連政府高麗人強制移住迅速みました1937821強制移住決定された2段階われましたがまず9月初めから国境地域(下山秋風ウスリスク水清地域)高麗人優先的移送されました

 

ラズドルノイエの高麗人そのでも一番先移送されました強制移住列車出発点がここだったからですが高麗人せた最初強制移住列車がラズドル奴隷出発したのは193799でした

 

 

その928日付けの追加決定により極東州りの地域高麗人強制移住され1025のソ連内務人民部イェジョポ議長報告書によると36,442世帯171,781高麗人移住えたということですそのカムチャツカおよびオホーツク地域っていた700人余りの高麗人111から最終列車移住したことで高麗人強制移住完結しました

 

 

同年11には移住民配置まで完了しましたが1937125報告書によるとカザフスタン共和国20,141世帯95,427ウズベキスタン共和国16,079世帯73,990タジクスタン共和国13世帯89キルギススタン共和国215世帯42136,448世帯169,927高麗人移送配置完了したそうです

 

 

ラズドルノイエが有名なのはここが北韓2代目主席金正日国防委員長生誕地でもあるからです北韓当局金正日誕生日1942216だと発表しましたが日本関東軍満州軍文書そしてソ連政府記録などによりますと金正日国防委員長誕生日1941216誕生地はラズドルノイエの旧名であるハマタンであることがらかになっています

 

 

金正日まれた当時ちゃんをかった助産院証言によると金正日出生地はラズドルノイエ·ラジョ(улица Лазо)88番地集合住宅であることが確認されます

 

 

最後にラズドルノエは南北にとても都市ですがそのうちラズからまでの距離12キロメートルにロシアで距離としてられています(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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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바라바쉬에서 30분 휴식을 취한 후 다시 버스에 승차해 우수리스크로 향하던 중, 라즈돌노예(Раздольное)에서 한 번 더 정차했습니다. 이곳의 기차역이 1937년의 고려인 강제이주가 시작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북한의 2대 주석 김정일의 탄생지이기도 합니다.

 

 

불라디보스톡 북쪽 약 70킬로미터, 우수리스크 남쪽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라즈돌노예는 러시아가 연해주를 할양받자마자 마을이 형성된 연해주 초기의 정착지입니다. 이곳에 군대가 주둔했기 때문인데, 군사적 요충지는 곧 교통의 요충지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오늘날도 라즈돌노예는 크라스키노에서 북상하는 A189번 국도와 블라디보스톡에서 북상하는 A370번 국도가 만나는 곳이자, 하산-우수리스크 철도와 블라디보스톡-우스리스크 철도가 만나는 곳입니다.

 

 

이렇게 합쳐진 두 철도는 우수리스크로 이어져, 하바로프스키를 거쳐 모스크바로 가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하르빈을 거쳐 치타로 가는 만주횡단철도로 다시 나뉩니다. 만주횡단철도는 치타에서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합류되니까, 결국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만주횡단철도의 목적지는 모두 모스크바입니다.

 

 

라즈돌노예에도 고려인 마을이 있었습니다. 러시아 기록에 따르면 1895년경 형성된 고려인 마을에는 여호인(餘戶人) 30가구가 살았고, 1906년경에는 62가구 30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1907년 라즈돌노예 전체 인구가 570명이었다고 하니까, 고려인이 다수였다는 말입니다. 라즈돌노예의 인구는 러시아혁명과 내전이 종식되면서 1923년에는 4천명으로 증가했습니다.

 

 

19241월 레닌이 사망하고, 스탈린이 집권해 집단농장화를 강행했을 때 라즈돌노예 인구는 크게 늘어서 1939년의 77백명, 1959년의 1만명으로 증가해 정점을 이뤘지만, 이후에는 지속적으로 인구가 감소해, 2021년에는 57백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특히 1939년의 인구 77백명은 라즈돌노예의 고려인들이 강제이주당한 이후의 숫자이기 때문에, 이곳의 인구는 아마도 1937년경에 1만명 이상의 최고치를 기록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소련 정부의 고려인 강제이주는 신속하게 진행됐습니다. 1937821일 강제이주가 결정된 후 2단계로 진행됐는데, 우선 9월초부터 국경지역(하산, 수풍, 우수리스크, 수청지역)의 고려인들이 우선적으로 이송됐습니다.

 

라즈돌노예의 고려인은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이송됐습니다. 강제이주 열차의 출발점이 바로 이곳이었기 때문인데, 고려인을 실은 최초의 강제이주 열차가 라즈돌노예를 출발한 것은 193799일이었습니다.

 

 

이후 928일자 추가 결정에 따라 극동주의 나머지 지역의 고려인이 강제 이주되었고, 1025일의 소련 내무인민부 예조포 의장의 보고서에 따르면 총 36,442가구 171,781명의 고려인이 이주를 마쳤다고 합니다. 이후 캄차카 및 오호츠크 지역에 남아 있던 700여명의 고려인들이 111일부터 마지막 열차로 이주됨으로써 고려인 강제이주가 완결되었습니다.

 

 

그해 11월에는 이주민 배치까지 완료되었는데, 1937125일의 보고서에 따르면, 카자흐 공화국에 20,141가구 95,427, 우즈베크 공화국에 16,079가구 73,990, 타지크 공화국에 13가구 89, 키르기즈 공화국에 215가구 421명 등 총 36,448가구 169,927명의 고려인들이 이송, 배치가 완료되었다고 합니다.

 

 

라즈돌노예가 유명한 것은 이곳이 북한의 2대 주석 김정일의 탄생지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북한 당국은 김정일의 탄생일이 1942216일이라고 발표했지만, 일제 관동군과 만주군의 문서, 그리고 소련정부 기록 등에 따르면 김정일의 생일은 1941216일이며, 탄생지는 라즈돌노예의 옛 이름인 하마탄으로 밝혀져 있습니다.

 

 

특히 김정일이 태어날 당시 아기를 받았던 조산원의 증언에 따르더라도, 김정일의 출생지는 라즈돌노예 라조가(улица Лазо) 88번지의 연립주택인 것으로 확인됩니다.

 

 

끝으로 라즈돌노예는 남북으로 매우 긴 도시인데, 그중 라조가는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의 거리가 12킬로미터에 달해, 러시아에서 가장 긴 거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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訪問団一行朴漢龍先生高麗人移住史独立運動史講演きながらウスリスク(Уссурийск)かいましたクラスキーノからウスリースクまでは200キロメートルの距離A189番国道A370番国道って2時間40ら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のでキム·ヴァレリア先生途中一度停車して休憩することをめました

 

 

休憩所はクラスキノとウスリスクの中間地点であるバラバシュ(Барабашское)にありました韓国高速道路のサービスエリアのように設備ってい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が道路沿いにガソリンスタンドや24時間カフェがありスーパーもいている便利場所でした

 

スーパーのにはタバコだけを販売する専門店もありました屋根のカフェKAФE付属建物のようにつながった黄色平屋建ての建物応急室AПTEKAんでタバク(Табак)かれたさながそれでしたフランスやスペインなどのヨーロッパでよくられたタバクが沿海州にもあるのをるとああここがヨーロッパなんだというがしました

 

 

李黃徽先生一緒にタバクにわった種類のタバコをってそのわっている一行はスーパーにってをしましたロシアのパンやアイスクリーム菓子などをってきてスーパーのけられたケグのテーブルにせてみんなでけてべましたにアイスクリームがとてもおいしかったです

 

バラバシュに停車したのはクラスキーノとウスリスクの中間地点休憩便利だったからだけ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1937強制移住以前バラバシュは高麗人住居でした

 

 

バラバシュは交通便利軍事的要衝地です1911日本軍スパイが報告したバラバシュ駐留ロシア兵力1千人だったそうですここが軍事的要衝だったという意味です

 

また1911524洪範圖全濟益·ヨンジャン李鎭龍チョ·ジャンウォン·チュンシクキム·ジュンファ崔秉圭嚴仁燮などの義兵指揮官がウラジオストクで会合義兵運動開始すると同時義兵集結場所をバラバシュとめました義兵たちもバラバシュを軍事的要衝地として認識したという意味です

 

 

一方バラバシュは高麗人密集住居地でした高麗人はここをモングガイとびましたが高麗人定着まった1885年頃にはここの公式名がモングガイだったからですおそらくモンゴルと関連した名前だったとわれます

 

高麗人はモングガイをモンゴゲ漢字表記するためにメンゴゲ(孟古介)」、「メンリョン(孟嶺)」、「メンヒョン(孟峴)」、「メンサンドン(孟山東)などの名前使いました

 

 

モングガイの高麗人人口1906年頃23世帯125調査されましたが1937強制移住直前にはここに1千人高麗人少数のロシア一緒んでいたそうですモングガイが30ぶりにこのように急速発展したのは新設された道路のおかげでした

 

 

1890年代初沿海州当局はウラジオストクから豆満江河口のクラスノイェ·セロ(=鹿屯)軍用道路建設決定ノボキエフスキー(延秋)駐屯ロシア軍守備隊兵士300人余りと近隣地域高麗人たちにノボキエフスキーからラズドルノイェに道路建設担当させました

 

このロシア高麗人民間人協業仲介したのが鉄道幹線敷設管理局通訳として勤務していた崔在亨先生ロシア政府動員された高麗人人件費支払いました

 

 

この工事崔在亨先生はロシア当局方針高麗人説明高麗人苦情当局にうまくえることで道路建設任務迅速完了しましたこれにする補償として崔在亨先生はロシア政府から銀星勲章1893には延秋地域都憲選出されました

 

 

そしてこのように建設された道路沿ってくの高麗人蓮秋からモングガイやラズドルノイェなどに簡単移住することができ農業商業じて安定した生活ることができたのです(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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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단 일행은 박한용 선생의 고려인 이주사와 독립운동사 강연을 들으면서 우수리스크(Уссурийск)로 향했습니다. 크라스키노에서 우수리스크까지는 약 200킬로미터의 거리이고 A189번 국도와 A370번 국도를 타고 약 2시간40분을 달려야 했으므로, 김 발레리아 선생은 중간에 한번 정차해서 휴식하기를 권했습니다.

 

 

휴게소는 크라스키노와 우수리스크의 중간지점인 바라바쉬(Барабашское)에 있었습니다. 한국의 고속도로 휴게소처럼 시설이 잘 된 것은 아니지만, 도로 변에 주유소와 24시간 카페가 있고 수퍼마켓도 문을 열고 있는 편리한 곳이었습니다.

 

수퍼마켓 옆에는 담배만 판매하는 전문점도 있었습니다. 빨간 지붕의 카페(KAФE) 옆에 부속건물처럼 이어진 노란색 단층 건물에 응급실(AПTEKA, 압티카)과 나란히 타바크(Табак)라고 쓰인 작은 가게가 그것이었습니다. 프랑스나 스페인 등의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타바크가 연해주에도 있는 것을 보니까, , 이곳이 유럽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황휘 선생과 함께 타바크에 들어가 특이한 종류의 담배를 사서 그 맛을 음미하고 있는 동안, 다른 일행은 수퍼마켓에 들어가 쇼핑을 했습니다. 러시아식 빵과 아이스크림, 과자와 마실 것 등을 사가지고 나와서 수퍼마켓 앞에 마련된 케그식 테이블에 올려놓고 다같이 나눠 먹었습니다. 특히 아이스크림이 아주 맛있더군요.

 

바라바쉬에 정차한 것은 크라스키노와 우수리스크의 중간지점이고, 휴식에 편리한 곳이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1937년 강제이주 이전에는 바라바쉬는 고려인 밀집 주거지였습니다.

 

 

바라바쉬는 교통이 편리한 군사적 요충지입니다. 1911년 일본군 간첩이 보고한 바라바쉬 주둔 러시아 병력이 약 1천명이었다고 합니다. 이곳이 군사적 요충지였다는 뜻입니다.

 

1911524일 홍범도, 전제익, 허근(허영장), 이진룡, 조장원, 이춘식, 김중화, 최병규, 엄인섭 등의 의병 지휘관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회합을 갖고 의병운동을 개시하면서, 의병 집결장소를 바라바쉬로 정했습니다. 의병들도 바라바쉬를 군사적 요충지로 인식했다는 뜻입니다.

 

 

한편 바라바쉬는 고려인 밀집 주거지였습니다. 고려인들은 이곳을 몽구가이라고 불렀는데, 고려인 정착이 시작되었던 1885년 경에는 이곳의 공식이름이 몽구가이였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몽골과 관련된 이름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인들은 몽구가이를 멍고개라고 고쳐 부르기도 했고, 한자로 표기하기 위해 맹고개(孟古介)’ ‘맹령(孟嶺)’ ‘맹현(孟峴)’ ‘맹산동(孟山洞)’ 등의 이름도 사용했습니다.

 

 

몽구가이의 고려인 인구는 1906년경 23가구 125명으로 조사되었지만, 1937년 강제이주 직전에는 이곳에 1천명의 고려인과 소수의 러시아인들이 함께 살았다고 합니다. 몽구가이가 30년만에 이렇게 급속이 발전한 것은 신설된 도로 덕분이었습니다.

 

 

1890년대 초반 연해주 당국은 블라디보스톡에서 두만강 하구의 크라스노예 셀로(=鹿屯島)에 이르는 군용도로를 건설하기로 결정했고, 노보키예프스키(=연추마을) 주둔 러시아군 수비대의 병사 3백여명과 인근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에게 노보키예프스키에서 몽구가이에 이르는 도로 건설을 담당하게 했습니다.

 

이때 러시아군과 고려인 민간인들의 협업을 중개한 것이 철도간선부설관리국의 통역으로 근무 중이었던 최재형 선생이었고, 러시아 정부는 동원된 고려인들에게 인건비를 지불했습니다.

 

 

최재형 선생은 러시아 당국의 방침을 고려인들에게 설명하고, 고려인들의 고충을 당국에 전달함으로써, 노보키예프스키(=연추)와 바라바쉬(=몽구가이) 사이의 도로 건설 임무는 신속하게 완수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최재형 선생은 러시아 정부로부터 은성훈장을 받았고, 1893년에는 연추 지역의 도헌(都軒)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건설된 도로를 따라서 많은 고려인들은 연추에서 몽구가이로 손쉽게 이주해, 농사와 상업을 통해 안정된 삶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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