ウズベキスタンとじくカザフスタンでも高麗人事情ていました高麗人公民権制限され韓国語ぶこともできず兵役居住移転自由もありませんでした

 

しかしスターリンが韓国語少数民族言語から除外高麗人学校廃止して韓国語教育中止させたカザフスタンは高麗人新聞<レーニン旗幟(Ленин киӌи)><高麗劇場(Корейский Театр)>維持するよう配慮しました

 

 

レーニン旗幟でハングルで刊行された唯一全国日刊紙でしためた新聞なので政府法令綱領掲載解説する機関紙役割たしましたが高麗人文学作品発表できる唯一紙面でもありました

 

全盛期レーニン旗幟職員60人余りで発行部数12千部しましたタシケントクジルオルダドゥシャンベプロルゼなどにレーニン旗幟支社もできました。 『レーニン旗幟1988にソ連民族友好勲章けるほど経営内容優秀でしたが1991高麗日報名前高麗人強制移住とその苦難する手記などを報道しました

 

 

カザフスタンのアルマアタには高麗劇場があります洪範圖将軍守衛をしていた劇場カザフスタンの国立劇場です1937強制移住とともに高麗劇場大多数団員がクジルオルダに定着数回移住1969にアルマアタに定着今日ります

 

高麗劇場創立50周年1982まで180える創作品公演しましたがその芸術活動功労められ連政府名誉勲章受章しましたこれまでこの劇場公演された作品には高麗人たちが経験してきた社会的政治的状況がよくれています

 

 

<高麗劇場>韓国人集団農場農村巡回しながら250回以上公演ったということです5ずつ公演したという意味このような強盗公演日程一年中続いたという意味ですそんな理由がありました地方農村巡回しながらのたいまつを照明にして公演していた高麗劇場強制移住され苦痛生活する高麗人にとって唯一しみだったからです俳優観衆ってくことが一度二度ではなかったそうです

 

 

高麗劇場ではすべての公演韓国語われるため各地域同胞世代韓国文化韓国語民族的りをめることにも貢献しました

 

中央アジアに強制移住された高麗人韓国語韓国文化芸術命脈いだ高麗日報高麗劇場どちらも沿海州時代にそのルーツをっています

 

 

レーニン旗幟前身、「先鋒(ソンボン1923)でした1937編集長をはじめとする<先鋒>全職員強制移住直前粛清されましたが農業部長だったファン·ドンフンが強制移住定着したクジル·オルダで<レーニン旗幟>創刊<先鋒>いだ

 

高麗劇場1930にウラジオストクで設立された労働者青年劇場から出発しました1920年代末沿海州高麗人社会には自発的まれた芸術団体そのうち新韓村素人芸術団労働者青年劇場(1930)につながり193299連政府承認職業的専門劇場として<極東地域高麗劇場>出発しました

 

 

このように沿海州まった新聞劇場強制移住後中央アジアで活発活動高麗人言語文化っていくことができました

 

1991年以来くの高麗人祖父故郷である沿海州ってきており沿海州高麗人人口5万人しましたらは沿海州中央アジア時代民族アイデンティティを維持させてくれた高麗人学校新聞劇場再建しようと努力しています

 

 

植民地時代冷戦時代には国際情勢国内状況のためにけることはできませんでしたが21世紀には韓国同胞高麗人同胞努力けることが義務でしょう(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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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과 마찬가지로 카자흐스탄에서도 고려인들의 사정은 비슷했습니다. 고려인들의 공민권은 제한되었고 한국어를 배울 수도 없었고, 군복무나 거주이전의 자유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스탈린이 한국어를 소수민족 언어에서 제외하고, 고려인 학교를 폐지하면서 한국어 교육을 중지시켰을 때, 카자흐스탄은 고려인들의 신문 <레닌기치(Ленин киӌи)><고려극장(Корейский Театр)>을 유지하도록 배려했습니다.

 

 

<레닌기치>는 구소련에서 한글로 간행되었던 유일한 전국 일간지였습니다. 국가에서 허용한 신문이기에 정부의 법령과 당의 강령을 게재하고 해설하는 기관지의 역할도 했지만, 한인들의 문학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유일한 지면이기도 했습니다.

 

<레닌기치>는 전성기 때 직원이 60여 명에 이르렀고, 발행부수도 12천부에 달했습니다. 타슈켄트, 크질오르다, 두샨베, 프롤제 등에 <레닌기치>의 지사도 생겼습니다. <레닌기치>1988년 소련민족우호훈장을 받을 만큼 경영과 내용이 우수했는데, 1991<고려일보>로 이름을 바꾸고, 고려인들의 강제 이주와 이후의 고난에 대한 수기 등을 대대적으로 보도했습니다.

 

 

카자흐스탄의 알마아타에는 <고려극장>이 있습니다. 홍범도 장군이 수위를 했던 극장인데, 카자흐스탄의 국립극장입니다. 1937년 강제 이주와 함께 고려극장의 대다수 단원들이 크질오르다에 정착했고, 몇 번의 이주 끝에 1969년 알마아타에 자리를 잡아서 오늘에 이릅니다.

 

<고려극장>은 창립 50주년인 1982년까지 180편이 넘는 창작품을 공연했는데, 그 예술 활동의 공로가 인정되어 소련정부의 명예훈장을 받았습니다. 그 동안 이 극장에서 공연된 작품에는 재소한인들이 겪어 온 사회적, 정치적 상황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고려극장>은 한인들의 집단농장이나 농촌지역을 순회하면서 1년에 250회 이상의 공연을 가졌다고 합니다. 일주일에 5일씩 공연했다는 뜻이고, 이런 강도의 공연 일정이 일 년 내내 계속됐다는 뜻입니다. 그럴 이유가 있었습니다. 지방과 농촌을 순회하면서 마당의 횃불을 조명삼아 공연하던 <고려극장>은 강제 이주당해 고통 속에 생활하는 고려인들에게 유일한 낙이었기 때문입니다. 배우와 관중이 부둥켜안고 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합니다.

 

 

<고려극장>에서는 모든 공연이 한국어로 진행되기 때문에 각 지역의 동포들,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한국 문화와 한국어를 알려 주고 민족적 긍지를 높이는 데에도 공헌했습니다.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에게 한국어와 한국 문화예술의 명맥을 이어준 <고려일보><고려극장>은 둘 다 연해주 시절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레닌기치>의 전신은 연해주 고려공산당의 기관지 <선봉(1923)>이었습니다. 1937년 편집장을 비롯한 <선봉>의 전 직원들이 강제이주 직전에 숙청되었으나, 농업부장이던 황동훈이 살아남았고, 강제이주로 정착한 크질오르다에서 <레닌기치>를 창간해 <선봉>의 맥을 이었습니다.

 

<고려극장>1930년 블라디보스톡에서 설립된 노동자청년극장에서 출발했습니다. 1920년대말 연해주 고려인 사회에는 자발적으로 생겨난 예술단체들이 많았고, 그중 신한촌의 소인(素人=아마추어)예술단이 노동자청년극장(1930)으로 이어졌고, 193299일 소련 정부의 승인을 받아 직업적인 전문극장으로서 <극동지역 고려극장>이 출발했습니다.

 

 

이렇게 연해주에서 시작된 신문과 극장이 강제 이주 후에도 중앙아시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고려인들의 언어와 문화를 지켜나갈 수 있었습니다.

 

1991년 이래 많은 고려인들이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고향 연해주로 돌아오고 있고, 연해주의 고려인 인구가 5만명에 이르렀습니다. 이들은 연해주와 중앙아시아 시절에 민족 정체성을 유지시켜 주었던 고려인 학교와 신문과 극장을 재건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식민지 시기와 냉전 시절에는 국제 정세와 국내 상황 때문에 돕지 못했지만, 21세기에는 한국 동포들이 고려인 동포들의 노력을 돕는 것이 의무일 것입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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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1レーニンが死亡するとしい権力闘争政府軍部権力掌握したスターリンの時代まりましたレーニンは少数民族土地分配自治権約束しましたがスターリンはこれをすべて廃棄集団農場工業化推進しました

 

自治権土地約束じてロシア革命支持した沿海州高麗人はスターリンの裏切りにきく落胆しましたが方法がなくむしろ先頭って集団農場建設協力しました

 

 

1923沿海州居住する高麗人12982このうち9万人がウラジオストクポシイエットスチャンニコルスク-ウスリにんでおり3万人がスパスクハバロフスクイマンオルガなど沿海州のあちこちにらばってんでいましたらは192454韓国人農村ソビエトを結成しました

 

それから5年後1929沿海州高麗人15795沿海州全体人口24.3%1930年代半ばには20万人しましたこのうち80%以上強制的われた全面的集団化経験しましたそれでもスターリンは依然として高麗人不信していました

 

 

1937日本中国侵略するとスターリンはソがまもなく日本戦争をすることになり戦場日本沿海州になると予測しましたスターリンの予測通1938にハサン戦闘発生スターリンは日本軍すために総力げて勝利しました

 

スターリンはソ日本戦争をすれば高麗人日本つと判断しましたこれは朝鮮侵略した日本抵抗した高麗人する深刻誤解でしたがスターリンは自分判断通りに19379日本のスパイという口実高麗人指導者級2,000処刑した18万人する韓国人中央アジアに強制移住させました

 

 

制限された手荷物だけを所持したまま高麗人家畜運送貨物車せられ中央アジアの砂漠地帯のようにばれましたさと飢餓によりかなりの高齢者乳児死亡しました19371025連内務人民委員会のイェゾフ委員長36,442世帯171781高麗人がカザフスタンとウズベキスタンに移送された発表しました

 

中央アジアの砂漠地帯到着した高麗人さにえるためにモグラのようにトンネルをってらし水辺にいるたちは穴蔵ってらしていましたになると高麗人めてんぼをってっていったをまいて稲作めました初年度から豊作3ぶりに安定したということです

 

 

スターリンの弾圧きました1938スターリンは韓国語をソ少数民族言語から除外韓国語学科廃止して韓国語ばないようにしましたまた高麗人敵性民族烙印して軍服務から除外居住共和国れる旅行禁止しました

 

このような状況でも高麗人たちは自分たちがした集団農場模範農場にし労働英雄称号けた模範民族げられました

 

 

ウジュベキスタンのキム·ビョンファ農場ポリトゼル農場がその代表的ですキム·ビョンファ(Ким Пен Хва, 1905-1974)農場長自身した農場最優秀農場いて労働英雄称号2死後農場名前キム·ビョンファ農場わりましたタシケントにはキム·ビョンファもできました

 

 

黃萬金農場長めたポリトゼル農場唯一観光公社登録されました模範農場外国人観覧許可された農場という意味ですには3万余りの集団農場がありましたが観光公社登録された農場はポリトゼル農場一つだけだということです

 

 

1953にスターリンが死去したフルシチョフは1955高麗人公民権回復させ19934にはロシア連邦最高会議議長名義決定文(No.4721-1)発表1937高麗人強制移住政治的弾圧不法だったと規定被害けた高麗人とその家族子孫全面的名誉回復補償計画発表しました(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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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1월 레닌이 사망하자 극심한 권력투쟁을 거쳐 정부와 군부 권력을 장악한 스탈린의 시대가 시작됐습니다. 레닌은 소수민족에게 토지분배와 자치권을 약속했지만, 스탈린은 이를 모두 폐기하고 집단농장과 공업화를 추진했습니다.

 

자치권과 토지 약속을 믿고 러시아 혁명을 지지했던 연해주의 고려인들은 스탈린의 배신에 크게 낙망했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고, 오히려 앞장서서 집단농장 건설에 협력했습니다.

 

 

1923년 연해주에 거주 고려인은 12982명에 달했고, 이중 9만명이 블라디보스톡, 포시예트, 수찬, 니콜스크-우수리에 살았고, 3만명이 스파스크, 하바로브스크, 이만, 올가 등 연해주 곳곳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이들은 192454개의 한인 농촌 소비에트를 결성했습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929년 연해주의 고려인은 15795명으로 연해주 전체 인구의 24.3퍼센트를 차지했고, 1930년대 중반에는 20만명에 달했습니다. 이중 80퍼센트 이상이 강제적으로 진행된 전면적 집단화를 경험했습니다. 그런데도 스탈린은 여전히 고려인들을 불신했습니다.

 

 

1937년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자, 스탈린은 소련이 곧 일본과 전쟁을 벌이게 될 것이고, 전쟁터는 일본에 가까운 연해주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스탈린의 예측대로 1938년 하산호 전투가 발생했고, 스탈린은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고 승리했습니다.

 

스탈린은 소련이 일본과 전쟁을 벌이면 고려인들은 일본 편을 들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는 조선을 침략한 일제에 항거하던 고려인들에 대한 심각한 오해였지만, 스탈린은 자신의 판단대로 밀어붙였고, 19379월 일본의 첩자라는 구실로 고려인 지도자급 인사 약 2,000명을 처형한 후, 18만 명에 달하는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제한된 수하물만 소지한 채 고려인들은 가축 운송 화물차에 실려 중앙아시아의 사막지대로 짐승처럼 운반됐습니다. 추위와 기아로 상당수의 노인과 영아들이 사망했습니다. 19371025일 소련내무인민위원회 예조프 위원장은 “36,442가구 171,781명의 고려인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송됐다고 발표했습니다.

 

겨울에 중앙아시아의 사막지대에 도착한 고려인들은 추위를 견디기 위해 두더지처럼 땅굴을 파고 살았고, 물가에 있는 사람들은 갈대로 움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봄이 되자 고려인들은 물을 찾아 논을 만들어 가져간 볍씨를 뿌려 벼농사를 시작했습니다. 첫해부터 풍년이었고 3년 만에 안정을 회복했다고 합니다.

 

 

스탈린의 탄압은 계속됐습니다. 1938, 스탈린은 한국어를 소련의 소수민족 언어에서 제외시키고 한국어학과를 폐지하여 한국어를 배우지 못하게 했습니다. 또 고려인을 적성민족으로 낙인찍어 군복무에서 제외했고, 거주 공화국을 벗어나는 여행도 금지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고려인들은 자신들이 속한 집단농장을 모범농장들로 만들었고, 노동 영웅 칭호를 가장 많이 받은 모범민족으로 꼽혔습니다.

 

 

우주베키스탄의 김병화 농장포리토젤 농장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김병화 농장장은 자신이 속한 농장을 최우수 농장으로 이끌어 노동 영웅 칭호를 두 개나 받았고, 그의 사후 농장의 이름이 김병화 농장으로 바뀌었습니다. 타슈켄트에는 김병화 거리도 생겼습니다.

 

 

황만금이 농장장을 맡은 포리토젤 농장은 소련에서 유일하게 관광공사에 등록됐습니다. 소련의 모범농장으로 외국인의 관람이 허용된 농장이라는 뜻입니다. 소련에는 3만여 개의 집단농장이 있었으나 관광공사에 등록된 농장은 포리토젤 농장 하나 뿐이라고 합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후 흐루시초프는 1955년 고려인들의 공민권을 회복시켰고, 19934월에는 러시아 연방 최고회의가 의장 명의의 결정문(No.4721-1)을 발표해,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와 정치적 탄압은 불법이었다고 규정하고, 피해 고려인들과 그 가족, 후손들의 전면적인 명예회복과 보상계획을 발표했습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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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人のロシア移住3であり独立運動2はロシアのボルシェビキ革命(1917)以後内戦てソ連政府権力沿海州までんだ1923年頃までつまりレーニンの執権時期です

 

 

ロシア革命3段階けられます1日曜日事件ばれる19051民衆蜂起2次革命19172制定崩壊3次革命はその10共産革命です

 

1905民衆蜂起失敗わりましたがロシア社会きく動揺しました1907年頃安定産業化みましたが1次世界大戦1914参戦状況悪化しました皇帝ニコライ21915から直接戦闘指揮国政皇后せましたが皇后背負ったラスプーチンの失政国政破綻ります

 

 

19172月革命帝政ロシアが崩壊ブルジョア臨時政府樹立されその10月革命でケレンスキー臨時政府がボルセビキの高麗人社会急激変化えます沿海州はロシアの辺境でしたので革命伝播速度進行一律ではなかったので高麗人社会一貫して対処するのは困難でした

 

全露韓族中央会19172月革命樹立されたケレンスキー臨時政府ちに祝賀電文りましたが10月革命しては生半可反応しにくいでしたロシア全土革命赤軍反革命白軍対決沿海州では赤軍勝利する見通しがかったからです

 

 

にたたり日本がシベリア出兵19184すと全露韓族中央会敵軍白軍では政治的中立宣言19185する一方抗日闘争けることにしました

 

10月革命直前ロシアの高麗人10万人沿海州だけで81,825高麗人んでいましたがこれは沿海州全体人口31たりました10月革命政権ったレーニンは高麗人少数民族自治権土地分配約束したためほとんどの高麗人革命支持しましたレーニンの約束じて高麗共産党1922コミンテルンに高麗人自治めましたがまだ時期尚早だという理由られました

 

 

一方朝鮮三一運動19193こると沿海州でも大韓国民議会名義独立宣言書発表万歳運動国内進攻じて国権回復する計画めましたが沿海州進駐した日本軍高麗人独立運動弾圧日本軍沿海州から撤退させるための交渉したロシア政府弾圧実現できませんでした

 

 

鳳梧洞戰鬪(19206洪範圖崔振東)青山里戦闘(192010金佐鎭羅仲昭李範奭洪範圖)大勝利した独立軍日本軍反撃けてロシアに移動沿海州白軍日本軍相手った高麗人パルチザン部隊もアムールのスバボドニー(Свободный=自由)集結しました自由市集結した独立軍規模3千人りました

 

日本軍圧力ロシア赤軍高麗人独立軍とパルチザンを赤軍吸収するかあるいは武装解除しなければならずこの過程自由市惨事(1921)発生しましたそのロシアのパルチザンと独立軍敵軍編入されこれを拒否した独立軍武装解除されたり満州ったりしました

 

 

この時期高麗人はロシア革命支持パルチザンが敵軍協力して白軍日本軍いましたが結局独自性敵軍編入されたり弾圧武装解除されました

 

これは日本軍圧力のためでもありましたがレーニンの高麗人政策のためでもありましたレーニンは沿海州高麗人反革命勢力日本軍抵抗してくれることをんでいましたが連軍統制からして独自武装勢力成長することを憂慮したのです

 

 

結局ロシア革命内戦時期(1917-1923)高麗人日本軍による新韓村事件(19204)とソ連軍による自由市惨事(19216)などの被害けました(jc, 2025/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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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의 러시아 이주 3기이자 독립운동 2기는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1917) 이후 내전을 거쳐 소련 정부의 권력이 연해주까지 미치게 된 1923년경까지, 즉 레닌의 집권 시기입니다.

 

 

러시아 혁명은 3단계로 구분됩니다. 1차는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불리는 19051월의 민중 봉기, 2차 혁명은 19172월의 제정 붕괴, 3차 혁명은 그해 10월의 공산 혁명입니다.

 

1905년의 민중봉기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러시아 사회는 크게 동요했습니다. 1907년경 안정을 되찾아 산업화가 진행됐지만 제1차 세계대전(1914)에 참전하면서 상황은 악화됐습니다. 황제 니콜라이2세는 1915년부터 직접 전투를 지휘하면서 국정을 황후에게 맡겼지만, 황후를 등에 업은 라스푸틴의 실정으로 국정은 파탄에 이르렀습니다.

 

 

1917년의 2월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고 부르조아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그해 10월 혁명으로 케렌스키 임시정부가 볼세비키의 손으로 넘어가면서 고려인 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맞습니다. 연해주는 러시아의 변방이었으므로 혁명의 전파 속도가 느렸고, 진행도 일률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고려인 사회가 일관성 있게 대처하기 어려웠습니다.

 

전로한족중앙회(1917)2월 혁명으로 수립된 케렌스키 임시정부에 즉각 축하전문을 보냈지만, 10월 혁명에 대해서는 섣불리 반응하기 어려웠습니다. 러시아 전역에서 혁명 적군과 반혁명 백군의 대결이 계속됐고, 연해주에서는 적군이 승리할 전망이 어두웠기 때문입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제가 시베리아에 거주하는 일본인 보호를 이유로 시베리아 출병(19184)에 나서자 전로한족중앙회는 적군과 백군 사이에서는 정치적 중립을 선언(19185)하는 한편, 항일 투쟁은 계속하기로 했습니다.

 

10월혁명 직전 러시아의 고려인은 약 10만명에 달했고, 연해주에만 81,825명의 고려인이 살았는데 이는 연해주 전체 인구의 3분의1에 해당했습니다. 10월 혁명으로 집권한 레닌은 고려인을 포함한 소수민족들에게 자치권과 토지분배를 약속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고려인은 혁명을 지지했습니다. 레닌의 약속을 믿고 고려공산당은 1922년 코민테른에 고려인의 자치를 요구했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거절당했습니다.

 

 

한편 한국에서 삼일운동(19193)이 일어나자 연해주에서도 대한국민의회 명의의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만세운동을 벌였고 국내진공을 통해 국권을 회복할 계획을 진행시켰지만, 연해주에 진주한 일본군의 고려인 독립운동 탄압과 일본군을 연해주에서 철수시키기 위한 협상에 나선 러시아 정부의 탄압으로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봉오동 전투(19206, 홍범도, 최진동)와 청산리 전투(192010, 김좌진, 나중소, 이범석, 홍범도)에서 크게 승리한 독립군은 일본군의 반격을 피해 러시아로 이동했고, 연해주에서 백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싸우던 고려인 빨치산 부대들도 아무르주의 스바보드니(Свободный=자유)로 집결했습니다. 자유시에 집결된 독립군의 규모는 약 3천명에 이르렀습니다.

 

일본군의 압력 아래 러시아 적군은 독립군과 빨치산들을 적군에 흡수하거나 아니면 무장을 해제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자유시참변(1921)이 발생했습니다. 이후 러시아내 빨치산과 독립군은 적군에 편입되었고, 이를 거부한 독립군은 무장해제를 당하거나 만주로 돌아갔습니다.

 

 

이 시기의 고려인들은 러시아 혁명을 지지했고, 빨치산들이 적군과 협력해 백군 및 일본군과 싸웠지만, 결국 독자성을 잃고 적군에 편입되거나, 탄압을 받고 무장해제를 당했습니다.

 

이는 일본군의 압력 때문이기도 했지만, 레닌의 한인 정책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레닌은 연해주의 한인들이 반혁명 세력과 일본군에 저항해 주기를 바랐지만, 소련군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무장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우려했던 것입니다.

 

 

결국 러시아 혁명과 내전의 시기(1917-1923)에 고려인들은 일본군에 의한 신한촌 사건(19204)과 소련군에 의한 자유시 참변(19216) 등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jc, 2025/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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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人沿海州移住2段階であり沿海州独立運動1段階1904日露戦争から1917のロシア革命直前時期までとえられます

 

 

この時期朝鮮乙巳勒約(1905)精米7条約(1907)庚戌国恥(1910)るまで段階的日本強制占領され暴圧的無断政治えられましたロシアも日露戦争(1904)敗北した第一次世界大戦(1914)とロシア革命(1917)につながる激動経験していました

 

 

しかしこの時期沿海州高麗人たちは生活安定独立運動人的物的土台強固まりました移住して定着した高麗人はロシア国籍取得して身分安定農業事業頭角しました一方日本乙巳勒約(1905)軍隊解散(1907)った朝鮮人沿海州亡命沿海州高麗人社会のリーダーシップを担当しました

 

高麗人勤勉団結いた安定印象的です代表的成功事例崔在亨先生でした素手をかけて国境えてからわずか2世代後のことでした1908、「同義会義兵募集した3千人兵士3ルブルの軍資金まったのがその証拠です

 

 

軍資金李瑋鍾先生父親李範珍駐露公使した1ルブルと崔在亨先生私財じて出演した13ルブルそして水清(のパルティザンスク)高麗人募金した6ルブルをめて3ルブルにしましたこれは今日10ウォンに相当します

 

水清地域寄付金かされます19327月号<三千里>によると、「水清村農民40戸余りにぎず人口300え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ということですが、「かにらすだったそうです40世帯3006ルブルの義兵軍資金募金されたのです

 

 

19086ルブルは201517ドル(金価格基準)たり現在韓国ウォンで24千万ウォンにたりますこれは1世帯平均6百万ウォン1人平均80ウォンずつ寄付したという意味です当時沿海州高麗人農民裕福独立への熱望かったという意味です

 

この時期には沿海州高麗人人口増加しました190634,399だった高麗人人口19105965非公式移住民まで6万人したと推定されています

 

 

高麗人人口増加豊富物産とともに抗日闘争根拠となりましたよく定着裕福基層農民この時期亡命してきた安重根柳麟錫洪範圖李相卨李種浩申采浩などの指導者結合日本朝鮮侵略対抗して闘争めました

 

19088、「同義会主軸義兵構成されすぐに国内への進出りました6万人人口から3千人義兵募集されました1900年代移住2世代えた高麗人年齢構成正常分布めたはずなので201割合義兵志願したということは男性農作業人力負担までいて皆義兵としてたという意味です

 

 

しかし<同義会>義兵(1908)国内進撃失敗いて構成された<13道義軍>日帝干渉でロシア政府によって解散されると抗日武装闘争熱気えました

 

その啓蒙運動外交運動きました延秋とニコルスク(=ウスリスク)とウラジオストクを中心学校新聞社設立され高麗人代表団体として聲明会(1910)勧業会(1911)大韓光復軍政府(1914)全露韓族中央会(1917)などが構成され活動しました

 

 

これと海朝新聞(1908)大同公報(1908)大洋報(1911)勧業新聞(1911)大韓人正敎報(1912)韓人新報(1917)靑丘新報(1917)韓族公報(1918)などのハングル新聞雑誌相次いで発行され高麗人社会国内外情勢らせ活動方向提示しました

 

 

この時期沿海州独立運動安定した民衆情熱的なエリートのびつきで活発展開されましたが日本外交的干渉高麗人独立運動団体はしばしばロシア政府弾圧独立運動家獄苦をなめたりしました(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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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연해주 이주의 2번째 단계이자 독립운동의 첫 단계는 1904년 러일전쟁부터 1917년의 러시아 혁명 직전시기까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조선은 을사늑약(1905)과 정미7조약(1907)을 거쳐 경술국치(1910)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으로 일제에 강점당했고, 폭압적인 무단정치에 억눌렸습니다. 러시아도 러일전쟁(1904)에서 패배한 후 일차대전(1914)과 러시아혁명(1917)으로 이어지는 격동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연해주 고려인들은 생활이 안정됐고, 독립운동의 인적, 물적 토대가 든든하게 다져졌습니다. 일찍 이주해 정착한 고려인들은 러시아 국적을 취득해 신분이 안정됐고, 농업와 사업에서 두각을 냈습니다. 한편, 일제의 을사늑약(1905)과 군대해산(1907)에 분노한 조선인들이 연해주로 망명해 들어와 연해주 고려인 사회의 리더십을 담당했습니다.

 

고려인들이 근면과 단결로 일군 안정과 부는 인상적입니다. 대표적 성공 사례가 최재형 선생이었지요. 맨손으로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은지 불과 2세대만의 일이었습니다. 1908<동의회>가 의병을 모집했을 때 3천명의 병사와 3만루불의 군자금이 모인 것이 그 증거입니다.

 

 

군자금은 이위종 선생의 부친 이범진(李範晉) 주러공사가 남긴 1만루불과 최재형 선생이 사재를 털어 출연한 13천루불, 그리고 수청(지금의 파르티잔스크)의 한인들이 모금한 6천루불을 포함해 약 3만루불에 달했습니다. 이는 오늘날의 약 10억원에 해당합니다.

 

특히 수청지역의 기부금이 놀랍습니다. 19327월호 <삼천리>에 따르면 수청마을의 농민은 약 40여호에 불과하고 인구는 300명을 넘지 못했지만, “남부럽지 않게 부유하게 사는 촌이었다고 합니다. 40가구 300인의 마을에서 6천루불의 의병 군자금이 모금된 것입니다.

 

 

1908년의 6천루불은 2015년의 17만달러(금값기준)에 해당하고, 오늘날 한국 원화로 약 24천만원에 해당합니다. 이는 한 가구 평균 6백만원, 1인 평균 80만원씩 기부했다는 뜻입니다. 당시 연해주 고려인 농민들이 부유했고, 독립 열망도 높았다는 뜻입니다.

 

이 시기에는 연해주의 고려인 인구도 증가했습니다. 190634399명이었던 고려인 인구는 1910년에 5965명으로 늘었고 비공식 이주민까지 6만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됐습니다.

 

 

고려인의 인구 증가는 풍부한 물산과 함께 항일투쟁의 근거가 됐습니다. 특히 잘 정착되고 부유한 기층 농민과 이 시기에 망명해 온 안중근, 유인석, 홍범도, 이상설, 이종호, 신채호 등의 지도자들이 결합해, 일제의 조선 침략에 맞서 투쟁하기 시작했습니다.

 

19088<동의회>를 주축으로 의병이 구성되고, 바로 국내진공을 단행했습니다. 6만명의 인구에서 3천명의 의병이 모집됐습니다. 1900년대 이주 2세대를 맞은 고려인의 연령 구성은 정상분포를 이루기 시작했을 것이므로, 20명에 한명 꼴로 의병에 자원했다는 것은 젊은 남성들이 농사 인력의 부담까지 제치고 모두 의병으로 나섰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동의회> 의병(1908)이 국내진격에 실패하고, 뒤이어 구성된 <13도의군>도 일제의 간섭으로 러시아 정부에 의해 해산되자, 항일 무장 투쟁의 열기는 사그라졌습니다.

 

그 뒤를 계몽운동과 외교운동이 뒤를 이었습니다. 옌치허(연추)와 니콜스크(=우수리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학교와 신문사가 설립되었고, 고려인 대표단체로 성명회(1910)와 권업회(1911), 대한광복군정부(1914), 전로한족중앙회(1917) 등이 구성되어 활동했습니다.

 

 

이와 함께 해조신문(1908)과 대동공보(1908), 대양보(1911), 권업신문(1911), 대한인정교보(1912), 한인신보(1917), 청구신보(1917), 한족공보(1918) 등의 한글 신문과 잡지가 잇달아 발행되어 고려인 사회에 국내외 정세를 알리고 활동의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이 시기의 연해주 독립운동은 안정된 민중과 열정적인 엘리트의 결합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나, 일제의 외교적 간섭으로 고려인 독립운동 단체들은 자주 러시아 정부의 탄압을 받았고, 독립운동가들이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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訪問団一行はクラスキーノで安重根義士斷指同盟記念碑とハサン湖戦闘勝利記念碑観覧したウスリスクに出発しました北東200キロを2時間半走ら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ので一行はバスの黃光石(ファン·グァンソク)先生司会本格的自己紹介をしました

 

 

今回訪問準備された黃光石朴美賢李高恩先生はすでに沿海州訪問めてではなく鄭聖勳李黃徽先生もウラジオストクに事業体運営していらっしゃった々なのできな感興はなかった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柳建柱林尙澤羅聖洙先生はもちろん朴漢龍キム·サモ朴仁浩全宰云金燦友先生沿海州訪問なのでめてるロシアの風光とあちこちに高麗人たちの辛酸人生熾烈いのにとても感動していました

 

 

紹介えた黃光石先生朴漢龍先生にマイクを高麗人沿海州移住史独立運動史概括的説明してくれるよう要請しました民族問題研究所研究室長歴任した朴漢龍先生クラスキーノ戦勝記念碑でもハサンいをリアルに説明してくださいました

 

 

事前準備くなかったにもかかわらず朴漢龍先生1860沿海州のロシア割譲から1937高麗人強制移住るまで青山流水講演30けました朴漢龍先生講義はどんどんってくる説明要点整理定評がありましたがこのじでした

 

朴漢龍先生1864最初移住から1937強制移住70年余りの歴史4段階移住史種縄独立運動史縦糸にしてドラマのような講演けました

 

 

最初のステップは初期定着時期です1860にロシアが沿海州占領してからわずか4年後18641咸鏡道景興出身14世帯65がノヴゴルド国境警戒所から15キロれた地新墟チシンホてました移住民次第シディミとヤンチヘ川流域にもができ1867この3つの高麗人人口1,801しました

 

1869しい洪水凶作韓国人大規模移住敢行しましたその9月末~10月初めだけで1,850地新墟村移住11月末~12月初めには4,500国境えました

 

 

ロシア当局高麗人国境地帯からスイプンシュパンレプダウビヘ川沿いなどの内陸移住させ1870年代末沿海州とアムールには216,766高麗人んでいました

 

ロシアは1884朝露修好通商条約締結以前ロシアに移住した高麗人にロシア国籍付与定住権られなかった移住民はロシア居住証ロシアの領土生活しましたそんな1900にはすべての高麗人移住者にロシア国籍付与されました

 

移住民1世帯当たり50デサチナ(=50ヘクタール)土地分配されそれによって租税義務わされました1895沿海州統計によると高麗人人口18400このうち16700沿海州スイフーンとポシエット地域600人余りはハバロフスク近郊1,100はアムールブラゴスロベンノイェんでいました

 

 

この時期朝鮮人沿海州移住したのは空腹のためだったというのが一般的説明です朝鮮朝廷政争暴政富国強兵養民には無能でした自然災害発生すると飢餓しみ未知土地である沿海州をかけて移住したのです

 

 

高麗人移住民にもうつの動機があったという主張もあります1861にロシアが断行した農労制廃止(Отмена крепостного)です農奴身分から解放された農民農地購入して自作農になったり土地りて農作業をする小作農になりました高麗人自由農業ができるという希望って国境えたのです

 

 

したがって朝鮮人沿海州への移住朝鮮暴政自然災害という排出要因とともに農労制廃止されたロシアの吸引要因同時作用してきた現象ることができます(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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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단 일행은 크라스키노에서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 기념비와 하산호 전투 승전 기념비를 관람한 후, 우수리스크로 출발했습니다. 북동쪽으로 약 2백킬로미터를 2시간 반 동안 달려야 했으므로, 일행은 버스 안에서 황광석 선생의 사회로 본격적으로 자기소개를 했습니다.

 

 

이번 방문을 준비하신 황광석, 박미현, 이고은 선생은 이미 연해주 방문이 처음이 아니었고, 정성훈, 이황휘 선생도 블라디보스톡에 사업체를 운영해 오시던 분들이어서 큰 감흥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류건주, 임상택, 나성수 선생님은 물론, 박한용, 김사모, 박인호, 전재운, 김찬우 선생과 저는 첫 연해주 방문이므로 처음 보는 러시아 풍광과 곳곳에 어린 고려인들의 신산한 삶과 치열한 싸움의 흔적에 자못 감동하고 있었습니다.

 

 

소개를 마친 후 황광석 선생은 박한용 선생께 마이크를 넘겨, 한인들의 연해주 이주사와 독립운동사를 개괄적으로 설명해 주시기를 청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연구실장을 역임하신 박한용 선생은 크라스키노 승전 기념상 앞에서도 하산호 전투를 실감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사전 준비가 전혀 없었는데도 박한용 선생은 1860년 연해주의 러시아 할양으로부터 1937년의 고려인 강제 이주에 이르기까지 청산유수의 강연을 30분이나 이어가셨습니다. 박한용 선생의 강의는 쏙쏙 들어오는 설명과 요점 정리로 정평이 났는데, 이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박한용 선생은 1864년의 첫 이주에서 1937년의 강제이주에 이르는 70여년의 역사를 4단계로 나누고, 이주사를 씨줄로, 독립운동사를 날줄로 삼아 드라마 같은 강연을 이어가셨습니다.

 

 

첫 단계는 초기 정착 시기입니다. 18641, 함경도 경흥 출신의 14가구 65명의 조선인들이 노브고로드(Но́вгород.) 국경초소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지신허(地新墟) 마을을 일궜습니다. 이주민은 점점 늘어서 시디미강과 얀치혜(연추)강 유역에도 마을이 생겼고, 1867년 이 세 마을의 한인 인구가 1,801명에 달했습니다.

 

1869년 극심한 홍수와 흉작으로 한인들이 대규모 이주를 감행했습니다. 그해 9월말-10월초에만 1,850명이 지신허 마을로 이주했고, 11월말~12월초에는 4,500명이 국경을 넘었습니다.

 

 

러시아 당국은 한인들을 국경지대에서 수이푼, 슈판, 레푸, 다우비헤 강변 등 내륙으로 이주시켰고, 1870년대말 연해주와 아무르주에는 21개의 마을에 6,766명의 고려인이 살았습니다.

 

러시아는 1884년 조러수호통상조약 체결 이전 러시아로 이주한 한인들에게 러시아 국적을 부여했고, 정주권을 받지 못한 이주민은 러시아 거주증을 받아 러시아 영토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러던 중 1900년에는 모든 한인 이주자에게 러시아 국적이 부여됐습니다.

 

이주민은 한 가구당 50데샤치나(=50헥타르)의 토지를 분배받았고 그에 따라 조세 의무도 지기 시작했습니다. 1895년의 연해주 통계에 따르면 고려인 인구는 18400명이었고 이중 16700명이 연해주 수이푼과 포시예트 지역에, 600여명은 하바로브스크 근교에, 1,100명은 아무르주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에 살았습니다.

 

 

이 시기에 조선인들이 연해주로 이주한 것은 배고픔 때문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입니다. 조선의 조정은 정쟁과 폭정을 일삼았고, 부국, 강병, 양민에는 무능했습니다.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백성은 기아에 시달렸고, 조선에서 살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백성들이 미지의 땅인 연해주로 목숨을 걸고 이주한 것이지요.

 

 

고려인 이주민들에게 또 하나의 동기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1861년 러시아가 단행한 농노제 폐지(Отмена крепостного)입니다. 농노의 신분에서 해방된 농민들은 농토를 구입해 자작농이 되거나, 토지를 빌어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 됐습니다. 조선인들도 조선의 신분적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국경을 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조선인들의 연해주 이주는 폭정과 자연재해라는 배출요인과 함께 농노제가 폐지된 러시아의 흡인요인이 동시에 작용해 가속된 현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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