ハサン湖号戦闘高麗人とは関係がないというのが一般的見方ですがロシアや中国日本記録には断片的ではありますが朝鮮人する内容まれています

 

 

この戦闘今日延辺朝鮮族自治州琿春発生したことです張鼓峰満州国最東端防川からにわずか1.5キロれた地域日本とロシアの領土紛争地域でしたのでこの地域には1937中央アジア強制移住れてかれなかった高麗人がかなりんでいたようです

 

 

これらはハサンいが勃発する直前日本軍満州軍によって琿春かそれよりもさらに西紹介されましたロシアの高麗人北満州移住朝鮮族分類される状況でしたので高麗人もハサン戦闘犠牲者分類されるでしょう

 

 

もう指摘されるのは戦闘われた張鼓峰という野山名前朝鮮族のチャングのようなをしているとしてついた名前だという証言があります防川張鼓峰事件記念館劉聡志館長記念館れる観覧客張鼓峰という名前由来のように説明します

 

 

のようにであることから、「刀山ばれていましたが水泡があって朝鮮族のチャングのようなをしていることから長鼓峰ばれていた朝鮮語発音じなので張鼓峰ばれました

 

 

またハサン戦闘しかった82-6までの満州軍作戦日誌、「五家子山設置された満州軍警戒所ある朝鮮族兵士火鉢筒警戒所付近設置しておいて連軍砲兵発覚これが新式兵器なのか誤認して宇佐津山猛烈爆撃したという記録があります満州軍朝鮮族兵士まれていたという意味です

 

 

また日本軍満州軍国境挑発がハサン戦闘発端となりましたがこの日本軍朝鮮族服装変装したりしましたえば1938715日本軍3張鼓峰付近偵察みたのがロシアによって発見されましたがらはみな朝鮮族服装をしていました

 

この日本軍松島伍長伊藤軍曹3防川村住民秦海南高雲波案内員として張鼓峰付近のソ連側軍事施設偵察しましたが秦海南高雲波歩哨日本軍3軍事施設地図いている途中ロシアの守備隊発見されそのうちの1である松島伍長射殺され2逃走しました

 

 

軍人民間人服装国境挑発したのはスパイ行為ですが朝鮮族服装をしたのはロシアの軍人にとって朝鮮人日本人同一視する偏見えたことでしょう1937スターリンが高麗人中央アジアに強制移住させた理由高麗人日本のスパイとして活動することを憂慮したためだとしましたがこのような誤解日本けたり強化させた可能性いです.

 

 

一方ロシアの記録にはハサン号戦闘最高指揮官ヴァシリ·ブリュヘル(Василий Блю́хер, 18891938元帥、「朝鮮系住民被害懸念日本軍攻撃飛行機使用躊躇したという内容がありますこれにしてスターリンは辛辣批判ハサン湖戦闘不振はすでにスターリンのるブリュヘルを粛清することをめる口実となりました

 

 

ブリュヘルはすでに自分管轄地域リュシコフ(Генрих Люшков, 1900-1945)日本亡命した事件苦境たされリュシコフがスターリンだと証言したことがスパイのリヒャルト·ゾルゲによってスターリンにえられたため粛清対象になりましたついにはハサン湖戦闘不振理由逮捕されクーデター陰謀までせられ残酷拷問死亡しましたはスターリンの死後1956 にフルシチョフの復権しました

 

 

日本軍爆撃朝鮮人保護しようとしたブリューヘルの意図不振戦果するだったかもしれませんがなくとも日本軍朝鮮人区分いをしようとしたという肯定的評価する必要があります(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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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호 전투가 고려인과는 관련된 바가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지만, 러시아와 중국, 일본의 기록에는 단편적으로나마 조선인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전투는 오늘날의 옌벤조선족자치주의 훈춘에서 발생한 일입니다. 장고봉은 만주국 최동단의 팡촨에서 북쪽으로 불과 1.5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으로,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영토분쟁지역이었기 때문에, 이 지역에는 1937년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에 끌려가지 않은 고려인들이 꽤 많이 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하산호 전투가 발발하기 직전, 일본군과 만주군에 의해 훈춘이나 그보다 더 서쪽으로 소개되었습니다. 러시아의 고려인들이 북만주로 이주당하면서 조선족으로 분류되는 상황이었으므로, 고려인들도 하산호 전투의 희생자로 분류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지적될 것은 전투가 벌어진 장고봉이라는 야산의 이름이 조선족의 장구처럼 생겼다고 하여붙은 이름이라는 증언이 있습니다. 팡촨의 <장구봉사건기념관>의 류총즈(劉丛志) 관장은 기념관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장구봉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옛날에는 남쪽 산이 칼처럼 가파르다 하여 칼산(刀山)이라 하였으나, 봉우리 아래에 물거품이 있어 조선족 장구처럼 생겼다고 하여 장구봉(長鼓峰)이라 하였는데, 조선말 '()''()'이 동음이라 하여 장구봉(張鼓峰)이라 불렀습니다."

 

 

또한 하산호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82-6일까지의 만주군 작전일지에 우자쯔산(五家子山)에 설치된 만주군 초소에서 한 조선족 병사(朝鲜族士兵)가 화로통을 초소 부근에 설치해 놓았다가 소련군 포병에게 발각되어 이것이 무슨 신식무기인가 오인하여 우자츠산을 맹렬하게 폭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만주군에 조선족 병사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또 일본군과 만주군의 국경 도발이 하산호 전투의 발단이 되었는데, 이때 일본군들은 조선족 복장으로 변장하곤 했습니다. 예컨대 1938715일 일본군 3명이 장고봉 부근에서 정탐을 시도한 것이 러시아군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조선족의 복장을 했습니다.

 

이날 일본군 마츠시마 오장과 이토 군조 등 3명은 팡촨 마을 주민 진하이난과 가오윈바를 안내원으로 삼아 장구봉 부근의 소련 측 군사시설을 정찰했는데, 진하이난과 가오윈바가 보초를 서고 일본군 3명이 군사시설 지도를 그리던 중 러시아 수비대에 발견되었고, 그중 한명인 마츠시마 오장이 사살되고 두 명은 도주했습니다.

 

 

군인이 민간인 복장으로 국경을 도발한 것은 스파이 행위지만, 조선족 복장을 한 것은 러시아군인들에게 조선인을 일본인과 동일시하는 편견을 심어 주었을 것입니다. 1937년 스탈린이 고려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던 이유도 고려인이 일본의 간첩으로 활동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이 같은 오해는 일본이 심어주거나 강화시켰을 가능성이 큽니다..

 

 

한편, 러시아 기록에는 하산호 전투의 최고 지휘관 바실리 브류헤르(Василий Блю́хер, 18891938) 원수가 조선계 주민들의 피해를 우려해 일본군 공격에 비행기 사용을 주저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신랄하게 비판했고, 하산호 전투의 부진은 이미 스탈린의 눈 밖에 난 브류헤르를 숙청하기로 결정하는 빌미가 되었습니다.

 

 

브루헤르는 이미 자기 관할지역에서 겐리흐 류시코프(Генрих Люшков, 1900-1945)가 일본으로 망명한 사건으로 곤경에 처했고, 류시코프가 그를 반스탈린파라고 증언한 것이 간첩 리하르트 조르게에 의해 스탈린에게 전달되는 바람에 숙청 대상에 올랐습니다. 마침내 그는 하산호 전투의 부진을 이유로 체포되었고, 쿠데타 음모의 누명까지 쓰고 잔혹한 고문 끝에 사망했습니다. 그는 스탈린 사망 이후 1956년 흐루시초프 치하에서 복권됐습니다.

 

 

일본군을 폭격하면서 조선인을 보호하려던 브루헤르의 의도는 부진한 전과에 대한 변명이었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일본군과 조선인을 구분하고 다른 대접을 하려고 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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ロシアはハサン戦闘勝利2次大戦戦略きな利点ましたが中国東海への進出げられこれまでその不利益けていますでは中国ではハサンいをどう評価しているのかになりました

 

 

予想通中国中央地方政府レベルでハサン戦闘評価したりえることはありません歴史書にも登録されていないのか中国人はこの戦闘をよくりませんロシアとは中国には張鼓峰事件記念碑造成されていません敗北したのが満州国=日本ではありましたが東海まった戦争結果だけをても中国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

 

 

またロシアではハサン戦闘ばれていますが中国では張鼓峰事件ばれています戦闘なら挑発したのかそして勝利したのかをめることになりますそのため勝利したロシアはんで戦闘びますしかしこの戦闘当事者でもなく不利益だけをえた中国この戦闘事件格下げしました

 

 

一行朴漢龍先生説明によりますと日本もこの戦闘事件んでいますが理由中国とはいます。 「戦闘ぶなら挑発敗北責任自認しなければならないからですめて日本がロシアにれたハンヒゴールのじですモンゴル(байлдаан)とロシア(Бои)では戦闘」、中国では戦役びますが日本ではこれを事件びます

 

 

中国にも張鼓峰事件博物館があります張鼓峰西側2キロメートルに位置する防川村張鼓峰事件記念館がそれですこれは国営でも公立博物館でもなく劉聡志(リュ·チョンジ)という民間人てた私設博物館です

 

劉聡志館長実業家でした1991吉林省琿春市中央政府める対外開放都市として承認されると劉聡志館長1992琿春防川村移住ホテルをオープンしましたホテルは盛業でありくのおぎましたが2005にホテルを記念館改造しました

 

 

偶然90年前くの張鼓峰しい日露軍事衝突があったことにづきしだけ地面ると当時戦争遺物出土するという事実ったからですはまたこの戦争結果中国国益なわれたこともこの歴史くのらせるとともに戦争反人倫性広報めました

 

 

この記念館裏門には戦争から人間保護せよかれた墓碑けられています張鼓峰事件現場発掘収拾したソ連軍遺骸記念館移葬しててた墓碑でした記念館建物からこの墓碑めると裏門裏手80年前戦場だった張鼓峰えます記念館墓地られるとロシア人学者一般その戦闘死亡したロシア人兵士英霊追悼する慣行い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

 

 

ファシスト戦争=世界第2次世界大戦終戦60周年2005815わせて開館した張鼓峰事件記念館には400平方メートルの展示場張鼓峰事件展示館豆満江歴史展示館けましたが展示された遺物はほとんどが劉聡志館長近隣張鼓峰地域発掘した砲弾弾皮軍帽びた機関銃大砲などの遺物展示されていて収集した広範囲文献写真映像資料展示さ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

 

 

開館20づくたとえ公共博物館ではありませんが張鼓峰事件記念館展示物とその教訓充実してましいという評価<新華社通信><中国軍>のインターネットでも紹介され公共博物館機能向上しているだけでなく最近では朝中露三国境界都市·防川れる観光客もこの記念館れているそうです

 

 

ただ中国人観光客くは張鼓峰事件のために中国東北地域東海進出阻止されたという事実する民族主義的りが頻繁反応ですが反戦のメッセージを納得するいということです(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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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하산호 전투에서 승리해 2차 대전 전략에 큰 이점을 얻었지만, 중국은 동해 진출이 가로막혀 지금까지 그 불이익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중국에서는 하산호 전투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예상대로 중국은 중앙이나 지방정부 차원에서 하산호 전투를 높이 평가하거나 기리는 분위기가 아닙니다. 역사책에도 등재되지 않은지, 중국인들은 이 전투를 잘 알지 못합니다. 러시아와는 달리 중국에는 장고봉사건 기념비나 거리도 조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패배한 것이 만주국=일제이기는 했으나, 동해길이 가로 막힌 전쟁 결과만 보더라도 중국이 축하할 일은 아니지요.

 

 

또 러시아에서는 하산호 전투라고 부르지만 중국에서는 장고봉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전투라면, 누가 도발했는지, 그리고 누가 승리했는지 따지게 됩니다. 그래서 승리한 러시아는 기꺼이 전투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전투의 당사자도 아니었고 불이익만 떠안은 중국은 이 전투를 사건으로 격하시켰습니다.

 

 

박한용 선생에 따르면, 일본도 이 전투를 사건이라고 부르지만 이유는 중국과 다릅니다. ‘전투라고 부른다면 도발과 패배의 책임을 자인해야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일본이 러시아에게 패했던 한힌골 전투도 마찬가지입니다. 몽골(байлдаан)과 러시아(Бои)에서는 전투,’ 중국에서는 전역(戰役)’이라고 부르지만, 일본에서는 이를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중국에도 장고봉 사건의 박물관이 있습니다. 장고봉 서쪽 2킬로미터에 위치한 팡촨(防川) 마을의 <장고봉사건기념관(张鼓峰事件纪念馆)>이 그것입니다. 이는 국영이거나 공립 박물관은 아니고, 류총즈(刘丛志)라는 민간인이 세운 사설 박물관입니다.

 

이 기념관의 류총지 관장은 사업가였습니다. 1991년 지린성 훈춘시가 중앙정부가 인정하는 대외개방도시로 승인되자, 류총지 관장은 1992년 훈춘의 팡촨 마을로 이주, 호텔을 열었습니다. 호텔은 성업이었고 많은 돈을 벌었지만, 그는 2005년 호텔을 기념관으로 개조했습니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약 90년전 인근 장구봉에서 격렬한 러일 군사충돌이 있었다는 점을 알게 됐고, 조금만 땅을 파면 당시의 전쟁 유물이 출토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또 이 전쟁의 결과로 중국의 국익이 손상되었다는 점도 알게 되었고, 이 역사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동시에 전쟁이 반인륜성도 홍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기념관의 후문에는 전쟁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라라고 쓰인 묘비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장구펑사건 현장에서 발굴, 수습한 소련군의 유해를 기념관 마당에 이장하고 세운 묘비였습니다. 기념관 건물에서 이 묘비를 바라보면 후문 뒤편으로 80년 전의 전쟁터였던 장구봉이 보입니다. 기념관의 묘지가 알려지자 러시아인 학자와 일반인들이 찾아와 그 전투에서 사망한 러시아인 병사의 영령을 추모하는 관행도 계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반파시스트전쟁(=세계2차대전) 종전 60주년인 2005815일에 맞춰 개관된 장고봉사건기념관에는 약 400제곱미터의 전시장을 장구펑 사건 전시관과 두만강 역사 전시관으로 나누었는데, 전시된 유물은 대부분 류총즈 관장이 인근 장고봉 지역에서 발굴한 포탄과 탄피, 군도와 군모, 녹슨 기관총이나 대포 등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그가 수집한 광범위한 문헌과 사진, 영상 자료들도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개관 20년이 다가오는 가운데, 비록 공공박물관은 아니지만, 장고봉사건기념관의 전시물과 그 교훈이 충실하고 바람직하다는 평가아래, <신화사통신><중국군>의 인터넷에도 소개되면서 공공박물관의 기능이 제고되고 있을뿐 아니라, 최근에는 조--러의 삼국의 경계도시 팡촨을 찾는 관광객들도 이 기념관을 많이 찾고 있다고 합니다.

 

 

다만 중국인 관광객들의 대부분은 장고봉사건 때문에 중국동북지역의 동해진출이 저지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민족주의적 분노가 가장 빈번한 반응이지만, 반전의 메시지를 납득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합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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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回訪問団<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訪問目的ですが160高麗人沿海州移住史日本による植民地時代独立運動展開過程ることにしましたそれでクラスキーノの安重根義士斷指同盟記念碑ハサン勝利記念像ることになったのです

 

 

ところで<ハサンの英雄たち>記念像観覧しながら日程準備した黃光石先生案内してくれたキム·バレリア先生がなぜクラスキーノ展望台日程ませたのかになりました19387~8われたハサンいは高麗人とはほとんど関連性のない事件だったからです一年前19379スターリンの命令高麗人指導者たちが逮捕殺害され18万人した高麗人たちは汽車せられ中央アジアに強制移住させられただったからです

 

 

それでもハサンいは朝鮮中国ロシアの三国近代史において非常重要出来事でしたこの戦闘でロシアが勝利したことで日本1傀儡国満州国領土防川村まり東海への進出げられ、(2機動力航空力れたロシアの軍事力れなくなったことで戦争をしないことをめたからです

 

 

1860北京条約沿海州がロシアに割譲された張鼓峰むハサン湖地域国境曖昧状態でしたこの問題解決するため18865~7中国とロシアは渾春東地域境界線測量確定して碑石これを中俄珲春东界约文書化しました

 

 

このつの条約総合するとハサン位置する張鼓峰沙草峰中国当時日本傀儡国だった満州国しましたがロシアは満州語条約文をロシア翻訳国境線張鼓峰頂上通過することに変調これが後日国境紛争口実となりました

 

 

琿春東界条約締結されて50った結局国境紛争発生ハサンいに勝利したことでロシアは張鼓峰地域獲得しましたがその結果つとして中国とロシアの国境豆満江河口から17キロ地点防川村まりました

 

 

琿春東界条約締結当時中国東海への進出ができなくなったことを懸念条約第4中国船舶がロシアの干渉なしに豆満江河口じて東海出入りできるという内容みましたしかしその通行権限はまともに行使されませんでしたロシアのハサン地域地方官裁量いつでも中国船舶出入りを制限することができ実際1990中国船舶豆満江利用交渉再開されるまでロシアは中国船舶豆満江への出入りを制限していました

 

 

ハサンいのより重要結果日本帝国主義膨張方向がユーラシアではなく太平洋旋回したということです1931満州事変こして大陸進出した日本軍国主義膨張方向をユーラシアでえようとする陸軍勢力海洋え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海軍勢力対立しましたが1938のハサンいと1939のハルヒゴルの日本名ノモンハン事件でロシア敗北した日本軍今後よりもアメリカと対決することをめましたそれから2年後194112真珠湾奇襲攻撃したのはハサンいで敗北した可視的結果だったのです

 

 

当時日本イタリアとともに枢軸国形成侵攻したドイツは日本がユーラシアのからソ攻撃することをんでいましたが張鼓峰とノモンハンでソ連軍敗北した日本軍連侵攻をあきらめ東南アジアの海洋進出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

 

 

立場からると沿海州ハサン地域とモンゴルのハルヒンゴール地域日本軍制圧した結果戦線二分されないままヨーロッパでドイツ戦争軍事力集中することでナチスを敗退させベルリンを占領することができました

 

 

つまりハサン戦闘日本帝国主義がアメリカ海軍にぶつかって敗北するように誘導する一方中国北東部地域から東海進出できないようにげるきな効果こした非常重要戦闘だったのです(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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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방문단은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 방문이 주목적이지만, 160년에 달하는 고려인의 연해주 이주사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전개과정도 살피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크라스키노의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 기념비도 방문했고, 하산호 승전기념상도 돌아보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하산의 영웅들> 기념상을 관람하면서, 일정을 준비하신 황광석 선생과 안내해 주신 김발레리아 선생께서 왜 크라스키노 전망대를 일정에 포함시키셨는지 궁금했습니다. 19387-8월에 진행된 하산호 전투는 고려인과는 관련성이 거의 없는 사건이었기 때문이죠. 한해 전인 19379월 스탈린의 명령으로 고려인 사회의 지도자들이 대대적으로 체포, 살해됐고, 18만명에 달했던 고려인들은 기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한 후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하산호 전투는 조선과 중국, 러시아의 삼국의 근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가 승리함으로써 일제는 (1) 괴뢰국 만주국의 영토가 팡촨(防川) 마을에 멈추어 동해 진출이 막혔고, (2) 기동력과 항공력이 뛰어난 러시아의 군사력을 얕보지 못하게 됨으로써 소련과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1860년의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가 러시아에 할양되었을 때 장고봉을 포함한 하산호 지역의 국경은 모호한 상태였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8865-7월에 중국과 러시아는 훈춘(渾春) 동쪽 지역의 경계선을 측량하고 확정해 비석을 세우고, 이를 <훈춘동계조약(中俄珲春东界约)>으로 문서화 했습니다.

 

 

이 두 조약을 종합하면 하산 호수 동쪽에 위치한 장고봉과 사초봉은 중국(당시 일본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에 속했습니다만, 러시아는 만주어 조약문을 러시아어로 번역하면서 국경선이 장고봉의 정상을 통과하는 것으로 변조했고, 이것이 후일 국경분쟁의 빌미가 됐습니다.

 

 

<훈춘동계조약>이 체결된 지 50년이 흐른 뒤 결국 국경분쟁이 발생했고, 하산호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러시아는 장고봉 지역을 얻었는데, 그 결과의 하나로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은 두만강 하구로부터 17킬로미터 지점의 팡촨 마을에서 멈췄습니다.

 

 

<훈춘동계조약> 체결 당시 만주국은 동해 진출이 막히게 된 것을 우려해 조약 제4조에 만주국 선박이 러시아의 간섭 없이 두만강 하구를 통해 동해로 드나들 수 있다는 내용을 포함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통행 권한은 제대로 행사되지 못했습니다. 러시아의 하산지역 지방관의 재량으로 언제든지 만주국=중국 선박의 출입을 제한할 수 있었고, 실제로 1990년의 중국 선박의 두만강 이용 협상이 재개되기 전까지 러시아는 중국 선박의 두만강 출입을 제한했습니다.

 

 

하산호 전투의 더 중요한 결과는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 방향이 유라시아가 아니라 태평양으로 선회했다는 것입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대륙으로 진출한 일제 군국주의는 팽창의 방향을 유라시아로 잡자는 육군세력과 해양으로 잡아야 한다는 해군세력이 대립했는데, 1938년의 하산호 전투와 1939년의 할힌골 전투(일본명 노몬한 사건)에서 러시아군에게 패배한 일본군은 향후 소련보다는 미국과 대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4112월 진주만을 기습공격한 것은 결국 하산호 전투에서 패배한 가시적인 결과였던 것이지요.

 

 

당시 일본, 이탈리아와 함께 추축국을 형성하고 소련을 침공한 독일은 일본이 유라시아의 동쪽에서 소련을 공격해 주기를 바랐지만, 장고봉과 노몬한에서 소련군에게 패배한 일본군은 소련 침공을 포기하고 중국 해안 지역과 동남아시아의 해양으로 진출해야 했습니다.

 

 

소련의 입장에서 보면, 연해주 하산 지역과 몽골 할힌골 지역에서 일본군을 제압한 결과, 전선이 양분되지 않은 채 유럽에서 대독일 전쟁에 군사력을 집중함으로써 나치를 패퇴시키고 베를린을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 하산호 전투는 일본 제국주의가 미국 해군과 맞닥뜨려 패배하도록 유도하는 한편, 중국이 북동부 지역에서 동해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큰 효과를 야기했던 매우 중요했던 전투였던 것입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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クラスキーノ展望台勝戦記念像ハサンの英雄たち1938729から811までハサン湖近くの張鼓峰(ロシア:сопка Заозёрная/Zaozyornaya)われた日本軍とのいでロシアが勝利したことをえる彫刻像です

 

 

海抜155メートルの張鼓峰日本とロシアの領土紛争地域でした張鼓峰北側にはさらに2つの高地がありました将軍峰沙草峰(ロシア: сопка Безымянная/Bezymyannaya)がそれです

 

 

1931満州事変こし1932傀儡国満州国建国した日本張鼓峰満州国領土だと主張ロシアは沿海州割譲された北京条約1860によって張鼓峰頂上国境設定されたのでなくとも張鼓峰東斜面はロシアの領土だと主張しました

 

 

日本軍記録によりますとハサン戦闘直接的口実提供したのがロシアでした76ロシア張鼓峰沙草峰陣地工事めたからです日本関東軍朝鮮軍日本大本営参謀部にこれを報告1938720朝鮮軍第19師団第75連隊攻撃敢行将軍峰(20)沙草峰(29)張鼓峰(30日夜)々と占領しました

 

 

しかしロシア記録によると国境地域挑発けたのは日本でした日本軍19342最初挑発めて以来193434にも越境その7には68には209には47挑発敢行国境挑発頻度くなりました

 

 

1935にも1-7までに日本航空機がソ連領空24回侵入連領土への砲撃33満州国日本船舶がアムール境界違反したのが44りました1936から19387にハサン戦闘まるまで日本軍満州軍合計231のソ連国境侵犯しましたが陸上侵犯124領空侵入40そのうち35交戦発生しましたロシア張鼓峰沙草峰陣地構築したのは日本軍挑発対抗するためでした

 

 

張鼓峰日本軍すとポシエットとウラジオストクがかされることになりますがこの地域掌握すれば満州中国北部進出する橋頭堡ることになるという評価ロシア81から極東軍40師団3千人兵力とタンクを機械化部隊動員して張鼓峰攻撃82からは極東軍司令官ブリューヘル元帥直接戦闘指揮めました

 

 

連軍86から1個軍団1個機械化旅団沿海州航空隊動員して大反撃開始しましたが日本軍休戦交渉まった811まで張鼓峰沙草峰ることができました

 

 

戦争拡大まなかった日露両国811モスクワで停戦合意しました合意内容811日正午戦闘中止主張どおり国境線確定するというものでした日本軍甚大被害いた張鼓峰沙草峰をソ返還しました

 

 

当時はこの戦闘非常重要視していたようです日本沿海州進出阻止にソ中国北部進出がかりにしようとするスターリンの思惑があったからです

 

 

そのうえハサン戦闘日露戦争1904屈辱的敗北以来日本対決しためての戦闘だったためとうとする復讐心理作用したものとられます張鼓峰返還されたソ莫大被害けましたがんでいた結果達成これをうことができました

 

 

しかし初期戦闘日本軍張鼓峰沙草峰われたうえ初期消極的放漫作戦戦闘んだ責任スターリンは極東軍司令官のヴァシリ·ブリュヘル元帥逮捕しましたブリュッセルはモスクワに押送され拷問18日後獄死しました

 

 

当時軍部しても大粛清っていたスターリンはこの重要対日前哨戦自分自尊心つけた指揮官っておくことはできなかったのです(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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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스키노 전망대의 승전기념상 <하산의 영웅들>1938729일부터 811일까지 하산 호수 인근의 장고봉(張鼓峰, 러시아명 сопка Заозёрная/Zaozyornaya)에서 벌어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러시아가 승리한 것을 기리는 조각상입니다.

 

 

하산호에서 호수 해발 155미터의 장고봉은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영토분쟁지역이었습니다. 장고봉의 북쪽에는 두 개의 고지가 더 있었습니다. 장군봉과 사초봉(沙草峰, 러시아명 сопка Безымянная/Bezymyannaya)이 그것입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1932년 괴뢰국 만주국을 세운 일제는 장고봉이 만주국 영토라고 주장했고, 러시아는 연해주를 할양받은 베이징 조약(1860)과 에 따라 장고봉의 정상을 경계로 국경이 설정됐으므로 적어도 장고봉의 동쪽 사면은 러시아의 영토라고 주장했습니다.

 

 

일본군 기록에 따르면 하산호 전투의 직접적인 빌미를 제공한 것이 러시아였습니다. 76일 러시아군이 장고봉과 사초봉에서 진지 공사를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일제 관동군과 조선군은 일본 대본영 참모부에 이를 보고했고, 1938720일 조선군 19사단 75연대가 공격을 감행 장군봉(20), 사초봉(29), 장고봉(30일밤)을 차례로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군 기록에 따르면 국경지역을 지속적으로 도발한 것은 일본이었습니다. 일본군은 19342, 첫 도발을 시작한 이래, 19343월과 4월에도 월경을 시도했고, 그해 7월에는 6, 8월에는 20, 9월에는 47회의 도발을 감행해, 국경 도발의 빈도가 높아졌습니다.

 

 

1935년에도 1-7월까지 일본 항공기가 소련 영공을 24회 침입했고, 소련 영토에 대한 포격이 33, 만주국과 일본 선박이 아무르강 경계를 위반한 것이 44건에 달했습니다. 1936년부터 19387월 하산호 전투가 시작되기까지 일본군과 만주군은 총 231건의 소련 국경을 침범했는데, 육상 침범이 124, 영공 침입이 40건이었고, 그중 35건에서 교전이 발생했습니다. 러시아군이 장고봉과 사초봉에 진지를 구축한 것은 일본군의 도발에 대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장고봉을 일본군에 내어주면 포시에트와 블라디보스톡이 위협받게 되지만, 이 지역을 장악하면 만주와 중국 북부로 진출할 교두보를 얻게 된다는 평가 아래, 러시아군은 81일부터 극동군 40사단의 3천명의 병력과 탱크를 포함한 기계화부대를 동원해 장고봉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82일부터는 극동군 사령관 블류헤르 원수가 직접 전투를 지휘하기 시작했습니다.

 

 

소련군은 86일부터 1개 군단과 1개 기계화여단, 연해주 항공대를 동원해서 대반격을 개시했지만, 일본군은 휴전협상이 시작된 811일까지 장고봉과 사초봉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확전을 바라지 않았던 러일 양국은 주러 일본대사 시게미츠 마모루와 소련의 외무인민위원 막심 리트비노프의 회담으로 811, 모스크바에서 정전 합의에 도달했습니다. 합의 내용은 811일 정오로 전투를 중지하고 소련의 주장대로 국경선을 확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지켜낸 장고봉과 사초봉을 소련에 반환했습니다.

 

 

당시 소련은 이 전투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제의 연해주 진출을 저지하고, 거꾸로 소련의 중국 북부 진출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스탈린의 계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하산호 전투는 러일 전쟁(1904)의 굴욕적인 패배 이래 일본과 맞붙은 첫 전투였기 때문에 반드시 이기려는 복수심리가 작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장고봉을 돌려받은 소련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원하던 결과를 성취했고, 이를 대대적으로 자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초기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장고봉과 사초봉을 빼앗긴데다가, 초기의 소극적이고 방만한 작전으로 전투에 임했던 책임을 물어 스탈린은 극동군 사령관 바실리 블류헤르 원수를 체포했습니다. 블류헤르는 모스크바로 압송되어 고문당하다가 18일 후에 옥사했습니다.

 

 

당시 군부에 대해서도 대숙청을 벌이고 있었던 스탈린은, 이 중요한 대일 전초전에서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낸 지휘관을 그냥 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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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重根義士斷指同盟記念碑>公園昼食とバスキングそして<のための行進曲>合唱えた訪問団一行はバスにってびクラスキノにかいました市内中心反対側にあるクラスキーノ展望台ねるためでした

 

 

この展望台はクラスキーノ北東側外郭のクレストバヤ(Крестовая)けられていましたあまりではありませんが近隣地域がすべて平地四方けていてめがいいですには記念像てられていますが銅像台座上段にはハサンの英雄たち(Героев Хасана)という献辞まれた銘牌られています

 

 

張鼓峰事件いともばれるハサン湖戦鬪いは1938朝鮮中国とロシアの国境するハサン地域150メートルの高地張鼓峰われたロシアと日本きた国境紛争ロシア日本軍撃退した戦闘しますロシアがこの戦闘をハサン戦闘ぶのは張鼓峰(сопке Заозерной)がハサン(озера Хасан)のすぐそばに位置するからです

 

 

ハサン·張鼓峰クラスキーノのクレストバヤから南西30キロメートルれていますところでどうしてそのいの記念像がクラスキーノにてられたのだろう疑問いましたグーグルをじてこの戦闘記念像はもともとハサンてられる予定でしたがこれにして異議えた中国刺激しないためにクラスキーノにてたとされています

 

 

この記念像196884ハサン戦闘勝利30周年記念してここにてられましたがコンクリートの台座てられた17メートル40トンの巨大彫刻像はピンディッシュ·クランディエフスキー(А.В. Файндыш-Крандиевский)作品記念像建築はバリーズ(М.О. Бариз)とコルピナ(А.Я. Колпина)担当したそうです

 

 

彫像両手げた軍人姿ですがこの彫像はレニングラードで製作されここにされ彫像移動させるのに2のトラクターが動員されこれをてるためにウラジオストクからポシエット空輸した特殊クレーンを使用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ロシアがこの記念像建立することに非常れていたことがかります

 

 

ハサンいで勝利したことをえる記念碑沿海州はもちろんロシア各地てられていてクラスキーノの記念碑はそのつにぎないこともわかりましたハサン湖戦闘記念碑沿海州のポシエット(Посьет)とスラビヤンカ(Славянка)ラズドルノイェ(Раздольное)にもありウラジーボストク(Владивосток)とハサン高速道路(Хасанской трассе)入口にもてられています

 

 

またスラビヤンカとウラジオストクにはハサンの英雄路(Улица Героев Хасана)というけられておりモスクワ南側のボロネーシュ(Воронеж)のペルム(Пермь)にもじですイルクーツク·スビルスク(Свирск, Иркутская)にはハサンの戦闘距離(Улица Хасановских боёв)」、サント·ペッツェルブルク(Санкт-Петербурге)にもハサンスカヤ(Улица Хасанская)がありますがこれらはすべてハサンいとこれを勝利いた英雄えるために名付けられたりです

 

 

ロシア領土西端のウラジオストクをはじめとする沿海州のあちこちにハサン湖戦闘記念碑とハサンの英雄設立されイルクチュクとモスクワ近隣のボロネシュとペルムそしてサント·ペッツェルブルクにるまでハサン戦闘えられているところからこの戦闘での勝利がロシアにとって非常重要だったという意味です

 

 

人口33百人さな韓国人大切にしている独立運動家安重根義士斷指同盟記念碑てられているだけでなく、「ロシア連邦レベルの重要性(памятник федерального значения)んだ記念像もここにあるのは偶然ではないかもしれないというえとともにこの記念像とハサンいにする好奇心いてきました(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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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단지동맹 기념비> 공원에서 점심식사와 버스킹, 그리고 <님을 위한 행진곡> 합창을 마친 방문단 일행은 버스에 올라 다시 크라스키노로 향했습니다. 시내를 중심으로 반대편에 위치한 크라스키노 전망대를 방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전망대는 크라스키노 북동쪽 외곽의 크레스토바야(Крестовая) 언덕 위에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다지 높은 언덕은 아니지만 인근지역이 모두 평지이거나 바다이고, 사방이 탁 트여있어서 조망이 좋습니다. 언덕 위에는 기념상이 세워져 있는데, 동상 받침대의 상단에는 하산의 영웅들(Героев Хасана)”이라는 헌사가 새겨진 명패가 붙어 있습니다.

 

 

장고봉 전투라고도 알려진 하산호 전투는 1938년 오늘날 조선과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이 맞닿은 하산지역의 높이 150미터의 고지 장고봉에서 벌어진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벌어진 국경분쟁에서 러시아군이 일본군을 격퇴한 전투를 가리킵니다. 러시아가 이 전투를 하산호 전투라고 부르는 것은 장고봉(сопке Заозерной)이 하산 호수(озера Хасан) 바로 옆에 위치하기 때문입니다.

 

 

하산 장고봉은 크라스키노의 크레스토바야 언덕에서 남서쪽으로 약 30킬로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 전투의 기념상이 크라스키노에 세워진 것일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구글링을 통해 이 전투 기념비는 원래 하산에 세워질 예정이었으나,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중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크라스키노에 세웠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기념상은 196884일 하산호 전투 승전 30주년을 기념해 이곳에 세워졌는데, 콘크리트 받침대 위에 세워진 높이 17미터, 무게 40톤의 거대한 조각상은 핀디쉬-크란디에프스키(А.В. Файндыш-Крандиевский)의 작품이고, 기념상의 건축은 바리즈(М.О. Бариз)와 콜피나(А.Я. Колпина)가 담당했다고 합니다.

 

 

조각상은 두 손으로 깃발을 치켜든 군인의 모습인데, 이 조각상은 레닌그라드에서 제작되어 이곳으로 옮겨졌고, 조각상을 이동시키는 데에 두 대의 트랙터가 동원되었고, 이를 받침대에 세우기 위해서 블라디보스톡에서 포시예트 항구로 공수한 특수 크레인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러시아가 이 기념상을 건립하는 데에 매우 정성을 기울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산호 전투의 승전을 기리는 기념비는 연해주는 물론 러시아 곳곳에 세워져 있고, 크라스키노의 기념비는 그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점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산호 전투 기념비는 연해주의 포시예트(Посьет)와 슬라비얀카(Славянка), 라즈돌노예(Раздольное)에도 있고, 블라디보스톡(Владивосток)과 하산고속도로(Хасанской трассе) 입구에도 세워져 있습니다.

 

 

또 슬라비얀카와 블라디보스톡에는 하산의 영웅로(Улица Героев Хасана)”라는 거리가 마련되어 있고, 모스크바 남쪽의 보로네슈(Воронеж)와 동쪽의 페름(Перм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르쿠츠크 스비르스크(Свирск, Иркутская)에는 하산 전투 거리(Улица Хасановских боёв), 상트 페쩨르부르크(Санкт-Петербурге)에도 하산스카야 거리(Улица Хасанская)“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하산호 전투와 이를 승리로 이끈 영웅들을 기리기 위해 이름이 붙여진 거리입니다.

 

 

러시아 영토 서단의 블라디보스톡을 비롯한 연해주 곳곳에 하산호 전투 기념비와 하산의 영웅의 거리가 설립되었고, 이루크추크와 모스크바 인근의 보로네슈와 페름, 그리고 상트 페쩨르부르크에 이르기까지 하산호의 전투가 기려지고 있는 곳으로 보아, 이 전투에서의 승리가 러시아에게는 대단히 중요했다는 뜻입니다.

 

 

인구 33백명의 작은 마을에 한국이 가장 중요한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 기념비가 세워져 있을 뿐 아니라, “러시아 연방 차원의 중요성(памятник федерального значения)”을 담은 기념상도 이곳에 있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이 기념상과 하산호 전투에 대한 호기심이 일더군요.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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