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年代初めから日本学界阪神間モダニズム地道研究してきましたが時期的には明治維新1868から敗戦1945まで地理的には神戸東灘から芦屋西宮宝塚集中する傾向がありましたつまり武庫川西側地域研究られていたのです

 

 

しかしたようにこの時期武庫川尼崎でもしいダンス文化きました高級住宅街だった西宮とは尼崎大阪郊外工業都市でしたが1926阪神国道開通1927大阪風俗れを理由にダンスホールを事実上禁止すると鉄道道路交通便利になった尼崎がダンスホールのメッカとして浮上したのです

 

 

1927-1930尼崎から杭瀬まで4つのダンスホールが開業盛業、『ダンス時代ダンスファン社交雑誌2発行されるにりましたまた毎年11には尼崎4つのダンスホールが合同尼崎ダンスフェスティバル開催しています関東大震災直後東京った良質のバンドが関西まり尼崎のダンスホールブームは量的質的にもくなりました

 

 

尼崎のダンスホールにはモダンボーイとモダンガールがまって盛市作家谷崎潤一郎画家藤田嗣治などの著名人もダンスホールの常連客になったりしました一言えば尼崎社交ダンスのメッカとして浮上したのでしょう

 

 

尼崎社交ダンスの熱意がどれほどかったかを写真一枚ありますこの写真朝鮮舞踊家崔承喜調査研究過程ゲッティイメージズ(gettyimages)アーカイブの1920年代日本写真という範疇調査していてめて発見されましたゲッティアーカイブの写真説明には写真女性映画俳優マサコ·ウネ(Masako Une)であることがらかになっているだけで情報はまったくありませんでした

 

 

唯一追加情報この写真がドイツの新聞しか使用できないという使用権制限でした100年以上時間ったので著作権消滅したでしょうがおそらくゲッティイメージズがこれをらせたようですねこの写真高画質プリントを購入するには500ドルをわなければならないんですよ

 

 

この写真をはじめてみたときは"よくれた写真だな"いました人物いも写真構図印画やかでした写真背景もかなり高級なインテリアがされた建物内部でしたしかし崔承喜関連して調査けるがかりはありませんでした

 

 

ところが20175この写真をドイツ·ケルンの舞踊博物館(Tanzmuseum des Deutschen Tanzarchiv Köln)びおいしました19301213日付日刊紙ケルナーシュタットアンザイガー(Kölner Stadt-Anzeiger)掲載された写真原本保管されていました

 

 

写真裏側には英語とドイツ写真説明がタイピングされていました人物名前マサコウネゲッティイメージズじでしたが職業映画俳優ではなく尼崎ダンスホールのダンサーとなっていました写真出所AP通信社でした

 

 

ダンスホールの舞踊手AP通信社注目びて撮影されドイツの新聞掲載された理由のウネ·マサコが自分2万円=2ポンド保険加入したからでした写真説明には欧米芸能人保険にかけることはよくあったが日本人女性保険にかけたのはめてされていました

 

 

19302万円現在77ドル2015賃金ベース)、11ウォンに相当します畝雅子怪我してダンサーとしてけなくなると保険金として11ウォンをるという意味です当時尼崎のダンサーの人気金銭的価値がどれだけかったかがわかります

 

 

ウネ·マサコの写真一枚社交ダンスの姿尼崎席巻した阪神間モダニズムの狂風がどれほど強烈だったかを象徴的しているのです(jc, 2024/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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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부터 일본학계는 <한신칸 모더니즘>을 꾸준히 연구해 왔으나, 시기적으로는 메이지유신(1868)부터 패전(1945)까지, 지리적으로는 고베의 히가시나다에서 아시야와 니시노미야, 다카라즈카까지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즉 무코카와 서쪽지역으로 연구가 국한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앞글에서 보았듯이 이 시기에 무코카와 동쪽의 아마가사키에서도 새로운 춤 문화가 일어났습니다. 고급주택가였던 니시노미야와는 달리 아마가사키는 오사카 외곽의 공업도시였지만, 1926년 한신 국도가 개통되고 1927년 오사카가 풍속 문란을 이유로 댄스홀을 사실상 금지하자, 철도와 도로로 교통이 편리해진 아마가사키가 댄스홀의 메카로 떠올랐던 것입니다.

 

 

1927-1930년 사이에 아마가사키에서 나루세까지 4개의 댄스홀이 개업해 성업했, <댄스 시대><댄스 팬>의 사교잡지 2개가 발행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 매년 11월에는 아마가사키의 4개 댄스홀이 합동으로 <아마가사키 댄스 축제>를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간토 대지진 직후에 도쿄에서 일자리를 잃은 양질의 밴드가 간사이로 모여들면서 아마가사키의 댄스홀 붐은 양적으로 많아지고 질적으로도 높아졌습니다.

 

 

아마가사키의 댄스홀에는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이 모여들어 성시를 이루었고, 작가 다나자키 준이치로, 화가 후지타 츠구하루 등의 저명인사들도 댄스홀의 단골손님이 되곤 했습니다. 한마디로 아마가사키는 사교댄스의 메카로 떠올랐던 것이지요.

 

 

아마가사키의 사교댄스 열품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주는 사진 한 장이 있습니다. 이 사진은 최승희 조사연구 과정에서 <게티이미지스> 아카이브의 1920년대 일본의 사진이라는 범주를 조사하다가 처음 발견됐습니다. 게티 아카이브의 사진 설명에는 사진 속 여성이 영화배우 마사코 우네(Masako Une)라고 밝혀져 있을 뿐 다른 정보가 전혀 없었습니다.

 

 

유일한 추가 정보는 이 사진이 독일의 신문만 사용할 수 있다는 사용권 제한이었습니다. 100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으니 저작권은 소멸되었겠지만 아마도 <게티이미지스>가 이를 되살려 놓은 것 같네요. 이 사진의 고화질 프린트를 구입하려면 약 5백달러를 내야 한다니까요.

 

 

이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는 잘 찍은 사진이네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인물 단장도 좋았고, 사진의 구도도 좋고, 인화도 선명했습니다. 사진의 배경도 상당히 고급스런 인테리어로 꾸며진 건물 내부였습니다. 하지만 최승희와 관련해서 조사를 계속할 단서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20175월 이 사진을 독일 쾰른의 무용박물관(Tanzmuseum des Deutschen Tanzarchiv Köln)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19301213일자 일간지 쾰르너 슈타트 안자이거(Kölner Stadt-Anzeiger)에 실린 사진의 원본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사진의 뒷면에는 영어와 독일어로 사진설명이 타이핑 되어 있었습니다. 인물의 이름은 우네 마사코(Une Masako)<게티 이미지스>와 같았지만, 그의 직업은 영화배우가 아니라 아마가사키 댄스홀(Amagasaki Danse Hall)의 무용수(danseuse)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사진의 출처는 AP통신사였습니다.

 

 

댄스홀의 무용수가 AP통신사의 주목을 받아 촬영되고, 독일 신문에 게재된 까닭은 무용수 우네 마사코가 자신의 다리를 2만엔(=2천 파운드)의 보험에 가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진 설명에는 미국과 유럽의 연예인이 다리를 보험드는 일은 자주 있었으나, 일본 여성이 다리 보험을 든 것은 처음이라고 서술되어 있었습니다.

 

 

1930년의 2만엔이면 오늘날의 77만달러(2015년 임금 기준), 한화 약 11억원에 해당합니다. 우네 마사코가 다리를 다쳐서 무용수로 일할 수 없게 되면 보험금으로 11억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당시 아마가사키의 무용수의 인기와 금전적 가치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네 마사코의 사진 한 장이, 사교댄스의 모습으로 아마가사키를 휩쓸었던 한신칸 모더니즘의 광풍이 얼마나 강렬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jc, 2024/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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