夕食では今後<舞踊靴><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交流協力する方法われました民族学校直面しているしい現実をどう打開するかがわれました

 

 

<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状況楽観的ではありません1930年代まで沿海州のあちこちには340高麗人学校てられ次世代民族教育万全すことができましたが<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沿海州つだけの政府公認学校です

 

 

民族学校高麗民族後援設立され維持さ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が1930年代とは今日高麗人社会人口なく財政不足していますかつては沿海州人口41高麗人だったほど同胞農業商業きな財産いた高麗人なくありませんでしたしかもらは民族教育のために土地人材しみなく寄付したりしました

 

 

しかし沿海州事情います高麗人人口5万人沿海州全人口2百万人2010年国勢調査3%しませんまたそのくが中央アジアから最近移住された々なので高麗人社会民族資本形成されていない段階です

 

したがって民族教育文化芸術基盤用意されるためには韓国同胞支援重要時期です2010年代末までは韓国人旅行客年間100万人韓国自治体現地公館高麗人社会後援するためにくの努力けたということです

 

 

しかし2020からまったコロナ2022から本格化したロシア·ウクライナ戦争韓国·ロシアの交流急激りました仁川-ウラジオストクの航空便東海/束草-ウラジオストクの旅客船運航中断され韓国同胞沿海州旅行りつきました

 

韓国支援交流途絶沿海州高麗人社会全般低迷しましたがにロシア唯一高麗人民族学校である<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きな打撃けましたついに2023年末には校舎賃貸費用用意できず廃校危機直面しました

 

 

このニュースをいた<舞踊靴>李高恩先生主導民族学校緊急救済のための募金運動展開13百万ウォンの後援金しましたこれにより<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廃校危機して一息つきながら1年間猶予期間ることになったといいます

 

キム·ヴァレリア-キム·バレンチン先生夫妻この機会さないために民族学校中長期発展計画樹立めました。 「舞踊靴訪問団ウスリスクをしたのもその発展計画についてしく実質的方法模索するためでした

 

 

この中長期発展計画核心はの高麗劇場(仮称)設立です民族学校教師賃貸建物なので維持しく<アリラン歌舞団><花郎太鼓チーム>練習公演ちません。「高麗劇場設立劇場一部学校として使用することが合理的だという結論でした

 

 

また劇場つことになれば民族学校のすべての行事費用なしでうことができ<アリラン><ファラン>公演のたびに費用をかけて劇場りなければならないわしさをけることができるうえさらにこの劇場公演団体貸与できるようになれば学校財政役立つといいます

 

 

はこの方面専門家ではありませんのでこの計画適正性実現可能性評価する立場にはありませんしかしキム·バレリア先生芸術経営学専攻されまで30年余りその方面いてこられたのでその眼目企画尊重したいというえです

 

 

したがって韓国<舞踊靴>とその姉妹団体キム·ヴァレリア先生<高麗劇場>プロジェクトが実現するように協力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ますそれが<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安定発展機会とし沿海州韓国語教育民族芸術教育使命動揺せずに担当していけるようにけるだとっています(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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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식사 자리에서는 <무용신><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가 교류하고 협력할 방법도 의논되었습니다. 주로 민족학교가 처한 어려운 현실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가 논의됐지요.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의 상황은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1930년대까지 연해주 곳곳에는 약 340개의 고려인 학교가 세워져서 다음 세대의 민족교육에 만전을 기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우수리스크의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가 유일한 정부 공인 학교입니다.

 

 

민족학교는 고려민족의 후원으로 설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는데, 1930년대와는 달리 오늘날의 고려인 사회는 인구도 적고 재정도 부족합니다. 과거에는 연해주 인구의 4분의1이 고려인이었을 만큼 동포들이 많았고, 농업과 상업으로 큰 재산을 모은 고려인도 적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민족교육을 위해 땅과 돈과 인력을 아낌없이 기부하곤 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연해주의 사정이 다릅니다. 고려인 인구가 약 5만명으로 연해주 전체인구(2백만명, 2010년 센서스)3%에 미치지 못합니다. 또 그중 많은 수가 중앙아시아에서 최근에 이주하신 분들이기 때문에, 고려인 사회에 민족자본이 형성되지 못한 단계입니다.

 

따라서 민족교육과 문화예술의 기반이 마련되려면 한국동포의 지원이 중요한 시기입니다. 다행히 2010년대 말까지는 한국인 여행객이 연간 1백만명에 이르렀고, 한국 지자체와 현지 공관들도 고려인 사회를 후원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2020년부터 시작된 코로나 사태와 2022년부터 본격화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한국-러시아의 교류가 급격하게 줄었습니다. 인천-블라디보스톡의 항공편과 동해/속초-블라디보스톡의 여객선의 운항이 중단되어, 한국 동포들의 연해주 여행은 얼어붙었습니다.

 

한국의 지원과 교류가 끊기면서 고려인 사회 전반이 침체되었는데, 특히 러시아 유일의 고려인 민족학교인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도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급기야 2023년 말에는 학교 건물의 임대비용을 마련하지 못해 폐교 위기에 봉착했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무용신>은 이고은 선생의 주도로 민족학교 긴급 구제를 위한 모금운동을 전개, 13백만원의 후원금을 전달할 수 있었고, 이로써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는 폐교의 위기를 벗어나 한숨 돌리면서, 1년간의 유예기간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발레리아-김발렌친 선생 부부께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민족학교 중장기 발전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무용신> 방문단이 우수리스크를 찾은 것도 그 발전계획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서였지요.

 

 

이 중장기 발전계획의 핵심은 민족학교 부설 <고려극장(가칭)>의 설립으로 모아집니다. 지금의 민족학교 교사는 임대건물이어서 유지가 어렵고, 민족학교 부설 <아리랑 가무단><화랑 모듬북 팀>의 연습과 공연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합니다. <고려극장>을 설립하고, 극장의 일부를 학교로 사용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신 것이지요.

 

 

또 극장을 가지게 되면 민족학교의 모든 행사를 비용없이 치를 수 있고, <아리랑><화랑>의 공연 때마다 비용을 들여 극장을 빌려야 하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는데다가, 나아가 이 극장을 다른 공연 단체에 대여할 수 있게 되면, 학교 재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나는 이 방면의 전문가가 아니므로 이 계획의 적실성이나 실현가능성을 평가할 위치는 아닙니다. 그러나 김발레리아 선생은 예술경영학을 전공하셨고, 지금까지 30여 년 동안 그 방면에서 일해 오셨기 때문에 그분의 안목과 기획을 존중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한국의 <무용신>과 그 자매단체들은 김발레리아 선생의 <고려극장> 프로젝트가 실현되도록 협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가 안정을 찾고 발전의 기회로 삼아, 연해주의 한국어 교육과 민족예술 교육의 사명을 흔들림없이 계속 담당해 나갈 수 있게 돕는 길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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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学生たちが準備した舞踊太鼓公演観覧してから訪問団宿所<ウスリスクホテル(Гостиница Уссурийск)>ってチェックインからしました

 

 

ウスリスクの中央路であるネクラソバ(Некрасова, д. 64大通沿いに位置するこのホテルはウスリスクでいホテルであり130客室つウスリスク最大のホテルだそうです

 

 

ホテルのチェックインはしましたが客室までがる時間はありませんでした夕食予約した時間がすでにぎていたからですホテルのスタッフの協力てロビーの片隅一行のスーツケースをめておくことにし一行びバスに食堂かいました

 

 

夕食場所きな中華料理店だったのですがその社長がキム·ヴァレリア-キム·バレンチン先生夫婦友人だとおっしゃっていました二人がタシケントからウスリスクに移住されて35にもなりますので主要食堂との関係緊密だといますが高麗人同胞ならもっとしくなれるといますこの食堂いてからりましたが一行がクラスキーノの安重根義士斷指同盟記念碑べた昼食もこの食堂注文されたものだそうです

 

 

たちは20人余りがゆったりれる大型円形テーブルをんでターンテーブルのがりめました中華料理店だとっていましたが料理のほとんどは韓国式でしたキムチはもちろんいろんなナムルがてきました

 

 

この夕食ではめて本格ウォッカをわうことができました食堂社長推薦によって<ベルーガ(белу́га)>ブランドのウォッカが数本テーブルにがったのですが食事とともにみんなベルーガを数本先輩としてみました李黃徽先生"理想"乾杯音頭本当魅力的でしたね

 

 

もちろんこの食事だけではなく<舞踊靴><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にしためての公式晩餐でしたそこで訪問準備団(黃光石朴美賢李高恩)はキム·ヴァレリア先生夫婦招請する感謝準備夕食伝達しました

 

 

準備団特別公演準備してくれた学生教員にもプレゼントを用意しました学生たちがどんなプレゼントがしいかいたら韓国のフードTシャツがしかったそうですそれでフードTシャツを準備してしました準備団がどれほど細心注意っていたかがわかります

 

 

食事をほとんどえてみんなベルーガでれがらいだ林尙澤先生誕生日いました生徒たちがプレゼントしたケーキを食堂ってきたので誕生日って林尙澤先生がケーキをって一切れずつりましたはおがいっぱいでしたがロシアのバースデーケーキはどういうなのかになってしだけわってみようとったのですが意外くて二切れもべました

 

 

食事わってテーブルがおおよそ片付くと余興まりました朴仁浩先生がサックスの演奏雰囲気宴会場けられたカラオケの機械まで動員してったりわせてったりしました

 

 

キム·ヴァレリア先生ロシアの夕食外食はだいたい音楽とダンスがえられるものだとっていましたこの晩餐会料理韓国式演奏韓国がほとんどでしたがりだけはロシアぐようになりましたとお音楽そして物語相次いだしい時間でした

 

 

食事わって一行宿舎りましたがそれで一日わることはありませんでした中国てロシアにってきた初日目的地ウスリスクに無事到着したうえに学生たちのかい歓迎けたためいムードがくなり時間まで飲酒歌舞きました

 

 

残念ながらおがとても食事一緒んだウォッカ何杯かでそのままれてたのでその幻想的りに参加することはできませんでした(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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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에서 학생들이 준비한 무용과 모듬북 공연을 관람하고 나서, 방문단은 숙소 <우수리스크 호텔(Гостиница Уссурийск)>로 가서 체크인부터 했습니다.

 

 

우수리스크의 중앙로인 네크라소바(Некрасова, д. 64) 대로변에 위치한 이 호텔은 우수리스크에서 가장 오래된 호텔이면서, 130개의 객실을 가진 우수리스크의 최대 호텔이라고 합니다.

 

 

호텔 체크인은 했지만, 배정된 객실까지 올라갈 시간은 없었습니다. 저녁식사를 예약한 시간이 이미 지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호텔 직원의 협조를 얻어 로비 한 켠에 일행의 가방을 한데 모아두기로 하고, 일행은 다시 버스에 올라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저녁식사 장소는 커다란 중국식 식당이었는데, 그 사장님이 김발레리아-김발렌친 선생 부부의 친구라고 하시더군요. 두 분이 타슈켄트에서 우수리스크로 이주하신지 35년이나 되었으니 주요 식당과의 관계가 긴밀할텐데, 특히 고려인들끼리라면 더욱 가깝게 지내실 것입니다. 이 식당에 도착해서 알게 됐지만, 일행이 크라스키노의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 기념비에서 먹었던 점심 식사도 이 식당에서 주문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20여명이 넉넉히 앉을 수 있는 대형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았고, 턴테이블 위에 음식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식 식당이라고 했지만 요리의 대부분은 한국식이었습니다. 김치는 당연한 메뉴였고, 여러 나물이 골고루 나왔는데, 심지어 깻잎무침까지 있었습니다.

 

 

이날 저녁식사에서는 처음으로 본격 보드카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식당 사장님의 추천에 따라 <벨루가> 브랜드의 보드카가 여러 병 테이블에 올랐는데, 식사와 함께 다들 벨루가를 여러 순배 마셨습니다. 특히 돌아가면서 건배사를 하면서 보드카를 마셨는데, 이황휘 선생의 이상은 높게, 사랑은 깊게의 건배사는 정말 매력적이더군요.

 

 

물론 이 자리는 식사 자리만은 아니었고, <무용신><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가 자리를 함께한 첫 공식만찬이었습니다. 그래서 방문 준비단(황광석, 박미현, 이고은)은 김발레리아 선생 부부께 초청에 대한 감사의 선물을 준비하셨고, 저녁식사 자리에서 전달하셨습니다.

 

 

또 준비단은 특별 공연을 준비해 준 학생들과 교원들에게도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학생들이 어떤 선물을 원하는지 물었더니 한국 후드티를 원했다는군요. 그래서 인원수대로 후드티를 전달했습니다. 이번 방문을 위해 준비단이 얼마나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식사를 거의 마치고 다들 벨루가로 여독이 누그러졌을 때, 임상택 선생님의 생일을 축하했습니다. 학생들이 선물한 케익을 식당으로 가져왔기 때문에, 다함께 생일 축하노래를 부르고, 임상택 선생께서 케익을 잘라서 모두에게 한 조각씩 돌렸습니다. 저는 배가 불렀지만 러시아의 생일 케익은 어떤 식인가 궁금해서 조금만 맛보려고 했는데, 뜻밖에 맛이 좋아서 두 조각이나 먹었습니다.

 

 

식사가 끝나고 테이블이 대략 치워지자 여흥이 시작됐습니다. 박인호 선생이 색소폰 연주로 분위기를 띄웠고, 연회장에 마련된 노래방 기계까지 동원해서 노래도 하고, 노래에 맞춰서 춤을 추기도 했습니다.

 

 

김발레리아 선생은 러시아의 저녁식사, 특히 외식은 대체로 음악과 춤이 곁들여지게 마련이라고 하시더군요. 이날 만찬의 음식은 한국식이고, 연주와 노래도 한국 노래가 대부분이었지만, 술과 춤만은 러시아식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음식과 술, 음악과 노래, 그리고 이야기가 꼬리를 물었던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식사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왔지만, 그것으로 하루가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중국을 거쳐 러시아로 넘어온 첫날이었고, 목적지 우수리스크에 무사히 도착한데다, 학생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기 때문에, 자축 분위기가 길어졌고, 늦은 시간까지 음주와 가무가 이어졌습니다.

 

 

안타깝게도 술이 매우 약한 저는 식사와 함께 마신 보드카 몇 잔으로 그냥 쓰러져 잤기 때문에, 그날 밤의 환상적인 축제에 동참하지는 못했습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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ウスリスクの<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2019にオープンしました設立当時<高麗人民族学校>という名前でしたが翌年学校名<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改名しました沿海州高麗人指導者崔在亨先生えるためでした

 

 

<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はハングル教育高麗人文化芸術教育目標にしていますキム·ヴァレリア校長先生<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設立理念紹介しながら高麗人言語文化ってこそ差別疎外環境でもアイデンティティをって々とした社会一員としてよりきな役割たせる<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設立理念たちの子孫がハングルと文化伝統教育使命感って最善くそうとすること>らかにしました

 

 

このような設立理念わせて<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はハングル学校芸術学校けて教育プログラムを運用します202310月現在ハングル学校在学生140芸術学校登録学生80これとは30園児幼稚園運営しています

 

 

<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のキム·ヴァレリア校長先生韓国語独学につけたくから高麗人韓国語教育がれるというえをっていました

 

 

キムヴァレリア校長先生1982ウズベキスタンの国立文化芸術大学(O'zbekiston Davlat San'at va Madaniyat Instituti)卒業タシケントで芸術文化プログラムのマネージャーとしていていたところ解体される直前1990にウスリスクで移住しました

 

 

ウスリスク移住当時30だったキム·バレリア先生韓国語必要性痛感しましたウズベキスタンでは家族との会話いては韓国語使うことはほとんどありませんでしたがウスリスクの高麗人社会活動するためには韓国語必要だったからです

 

 

2年間韓国語独学勉強したキム·バレリア先生すぐにウスリスク高麗人社会主導的役割たしました1994から1998までは遠東新聞編集長歴任2004から2019までの15年間ウスリスク高麗新聞編集長めました

 

 

ハングル教育重要性痛感したキム·バレリア先生2000高麗民族自治会にハングル学校設立彼自身教師となり生徒成人韓国語めましたその20年近韓国語教育活動をもとに結局2019高麗人民族学校設立するにったのです

 

 

<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芸術教育朝鮮舞踊からまりましたキム·ヴァレリア先生1996ウスリスクの高麗民族自治会アリラン歌舞団設立韓国舞踊えながら公演めました自分専攻分野だったのですぐに成果ることができ朝鮮から派遣された舞踊家指導けることができたので<アリラン歌舞団>組織公演力急速向上しました

 

 

35団員構成された<アリラン歌舞団>ウスリスクと沿海州主要都市公演はもちろん20032にはモスクワの青少年芸術祝典沿海州代表として参加1等賞受賞していますまた19998韓国公演としてまり朝鮮中国アメリカでの公演ったことがありこのように活発公演活動理由2005にはウラジオストク市政府から功勲舞踊団称号けました

 

 

アリラン歌舞団組織活動軌道るとキム·バレリヤ先生2008花郎太鼓チーム設立しましたがこれも活発公演活動けています2012高麗人強制移住75周年記念公演をはじめ2015のウラジオストク極東コンサートやモスクワ国際コンサートで1等賞受賞しており2021には崔在亨先生えて追悼公演にも出演しました

 

 

<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とその付設<アリラン歌舞団><花郞太鼓チーム>沿海州民族教育民族芸術教育のための丈夫として成長しています(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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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리스크의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2019년에 문을 열었습니다. 설립당시에는 <고려인 민족학교>라는 이름이었지만, 이듬해에 학교 이름을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로 개명했습니다. 연해주 고려인의 지도자 최재형 선생을 기리기 위해서였지요.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는 한글 교육과 고려인 문화예술 교육을 목표로 합니다. 김발레리아 교장 선생은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의 설립 이념을 소개하면서 고려인들이 언어와 문화를 잃지 않아야 차별과 소외의 환경 속에서도 정체성을 가지고 당당한 사회일원으로 더 큰 몫을 다할 수 있다고 말하고,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의 설립 이념은 우리 후손들이 한글과 문화전통 교육에 사명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같은 설립 이념에 맞춰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는 한글학교와 예술학교로 나누어 교육 프로그램을 운용합니다. 202310월 현재 한글학교의 재학생은 총140, 예술학교의 등록학생은 총80명이고, 이와는 별도로 30명 원아의 유치원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의 김발레리아 교장 선생은 한국어를 독학으로 익힌 분으로, 일찍부터 고려인들의 한국어 교육이 시급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김발레리아 교장선생은 1982년 우즈베키스탄의 국립문화예술대학교(O'zbekiston Davlat San'at va Madaniyat Instituti)를 졸업하고 타슈켄트에서 예술문화 프로그램 매니저로 일하던 중, 소련이 해체되기 직전인 1990년 우수리스크로 가족과 함께 이주했습니다.

 

 

우수리스크 이주 당시 30세였던 김발레리아 선생은 한국어를 익혀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에 거주할 때는 가족과의 소통을 제외하고는 한국어를 쓸 일이 거의 없었지만, 우수리스크의 고려인 사회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한국어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2년간 한국어를 독학으로 익힌 김발레리아 선생은 이내 우수리스크 고려인 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습니다. 1994년부터 1998년까지는 원동신문의 편집장을 역임했고, 2004년부터 2019년까지 15년 동안 우수리스크 고려신문의 편집장도 맡았습니다.

 

 

한글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한 김발레리아 선생은 2000년 고려민족자치회 안에 한글학교를 설립하고, 그 자신이 교사가 되어 학생과 성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20년에 가까운 한국어 교육 활동을 바탕으로 결국 2019년 고려인 민족학교를 설립하기에 이른 것이지요.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의 예술교육은 조선무용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김발레리아 선생은 1996년 우수리스크의 고려민족자치회 안에 <아리랑 가무단>을 설립하고 한국무용을 가르치면서 공연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전공분야였기 때문에 금방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었고, 특히 조선에서 파견된 무용가의 지도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아리랑 가무단>의 조직과 공연력은 빠르게 향상됐습니다.

 

 

35명의 단원으로 구성된 <아리랑 가무단>은 우수리스크와 연해주 주요도시 공연은 물론, 20032월에는 모스크바의 청소년 예술축전에서 연해주 대표로 참가해 1등상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19998월의 한국공연으로 시작해 북한과 중국, 미국 공연을 진행한 바 있고, 이같이 활발한 공연 활동을 이유로 2005년에는 블라디보스톡 시정부로부터 공훈무용단 칭호를 받았습니다.

 

 

<아리랑 예술단>의 조직과 활동이 궤도에 오르자 김발레리야 선생은 2008<화랑 모듬북팀>을 설립했는데, 이 역시 활발한 공연활동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2012년 고려인 강제이주 75주년 기념공연을 비롯해 2015년 블라디보스톡 극동콘서트와 모스크바 국제 콘서트에서 1등상을 수상한 바 있고, 2021년에는 <최재형 선생님을 기리며> 추모공연에도 출연했습니다.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와 그 부설 <아리랑 가무단><화랑 북팀>은 연해주 민족 교육과 민족예술 교육을 위한 튼튼한 발판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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訪問団がウスリスクに到着したときはほぼ7でした韓国時間としてはすでにくなりめる時間ですがウスリスクはまだまだるかったです韓国沿海州時差1時間あることもありますが沿海州位置するので昼間がずっといようですね

 

 

一行はウスリスクにるやいなやすぐに<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かいました今回訪問団目的地民族学校であるためでもありキム·ヴァレリア先生民族学校付設<アリラン歌舞団><花郞太鼓チーム>訪問団歓迎する準備えているとおっしゃったためです

 

 

民族学校到着するとさすがに舞踊衣装太鼓演奏服装えた生徒たちが学校って訪問団えました二人教員10学生訪問団のために特別公演準備しましたこの行事のために時間学校てくれた学生たちにないながらもありがたかったです

 

 

たちは民族学校正門建物背景学生たちと一緒記念撮影をしすぐに民族学校小講堂って学生たちの公演まることをちました全体公演40ほどきましたが(1)生徒たちと教員4中務(2)ウスリスクの高麗人歴史映像舞踊表現した舞踊劇そして(3)花郎太鼓チームの演奏につながりました

 

 

映像舞踊劇最後公演作品稲舞でしたが中央アジアに強制移住された高麗人初期苦難克服稲作豊作げたことを表現したものとられます小物として使ったきな稲穂印象的かいじの黄色舞踊衣装ともとてもよく似合っていました

 

 

公演最後、「花郎太鼓チーム演奏でした5学生10分間続けた太鼓演奏強弱とリズムがあまりにもわず足拍子わさったものでしたったのすぐ3つの太鼓にしてがかりのように演奏していた中学生技量れていてびっくりしました

 

 

公演講堂展示された賞牌とトロフィーと感謝牌などをりましたがそのにはナホトカから花郞太鼓チーム特別された感謝がありました

 

 

ナホトカ(Нахо́дка)高麗人都市ウスリスク南東約200キロメートル地点海岸都市ですウスリスクから3時間ほどかかりますナホトカ特別感謝牌ったことから、「花郞太鼓チーム都市にもよく遠征演奏をしているようです

 

 

4にキム·バレリア先生ってくれた映像<アリラン歌舞団>ウスリスク公演観覧しましたこの小公演その作品縮約して再構成したようでした

 

演出者であれば共感できるように縮約本でも新作同様練習必要です訪問団のためにんで時間って苦労してくださった教員学生たちが本当に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

 

 

公演わって最後挨拶をしながら学生教員たちがもう一度私たちをびっくりさせてくれましたこの日誕生日林尙澤先生のためにバースデーケーキを用意したからですウスリスクにるバスのたちはこの林尙澤先生誕生日であることをりましたがおそらくキム·バレリア先生電話生徒たちにケーキを準備するようにおいされたようでした

 

 

生徒たちから誕生日のおいをけながらケーキのロウソクを林尙澤先生姿ながらおそらく今年誕生日一生忘れられないといましたまた誕生日にケーキを準備ろうそくのしながらをする慣行はアメリカと韓国はもちろんロシアでもじだということがわかりました訪問団学生たちにささやかなプレゼントをりました

 

 

歓迎公演じて意味深時間にしもやりとりしながら今後<アリラン歌舞団><花郎太鼓チーム>活躍をより一層期待するようになり<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舞踊靴>交流協力がより一層強固になるとじるようになりました(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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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단이 우수리스크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저녁 7시였습니다. 한국 시간으로는 이미 어둡기 시작할 시간이지만, 우수리스크는 아직도 환했습니다. 한국과 연해주 사이에 시차가 1시간 있기도 하지만, 연해주가 더 북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낮이 훨씬 긴 것 같더군요.

 

 

일행은 우수리스크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로 향했습니다. 이번 방문단의 목적지가 민족학교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김발레리아 선생께서 민족학교 부설 <아리랑 가무단><화랑 북팀>이 방문단을 환영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민족학교 앞에 도착하자 과연 무용의상과 북연주 복장을 갖춘 학생들이 학교 앞에 도열해서 방문단을 맞았습니다. 두 분의 교원과 10여명의 학생들이 방문단을 위해 특별 공연을 준비했습니다. 이 행사를 위해 늦은 시간에 학교에 나와 준 학생들에게 미안하면서도 고마웠습니다.

 

 

우리는 민족학교 정문에서 건물을 배경으로 학생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바로 민족학교 소강당으로 들어가 학생들의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렸습니다. 전체 공연은 약 40분쯤 계속됐는데, (1) 학생들과 교원의 4인 중무와 (2) 우수리스크의 고려인 역사를 영상과 무용으로 표현한 무용극, 그리고 (3) 화랑 모듬북 팀의 연주로 이어졌습니다.

 

 

영상 무용극의 마지막 공연 작품이 <벼춤>이었는데,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고려인 동포들이 초기의 고난을 극복하고 벼농사의 풍작을 이뤄낸 것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소품으로 사용한 커다란 벼이삭이 인상적이었고, 넉넉하고 따뜻한 느낌의 노란색 무용의상과도 아주 잘 어울렸습니다.

 

 

공연의 마지막 순서는 <화랑 모듬북팀>의 연주였습니다. 5명의 학생들이 약 10분 동안 계속한 북 연주는 강약과 리듬이 너무도 좋아서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흔들리고, 발장단이 맞춰지곤 했습니다. 특히 제가 앉은 자리 바로 앞에서 3개의 북을 앞에 놓고 신들린 듯 연주하던 중학생은 기량이 탁월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강당에 전시된 상패와 트로피, 여기저기에서 보내온 감사패 등을 둘러보았는데, 그중에는 나홋카 시에서 <화랑 북팀>에게 특별히 전달된 감사패가 있었습니다.

 

 

나홋카(Нахо́дка)도 고려인이 많이 사는 도시로, 우수리스크 남동쪽 약 200킬로미터 지점의 해안도시입니다. 우수리스크에서 차로 3시간쯤 걸리지요. 나홋카 시의 특별 감사패를 전달 받은 것으로 보아, <화랑 북팀>은 다른 도시들에도 자주 원정 연주를 다니나 봅니다.

 

 

저는 김발레리아 선생께서 보내주신 영상으로 지난 4<아리랑 가무단>의 우수리스크 공연을 관람했었습니다. 이날의 소공연은 그 작품을 축약해서 재구성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연출자라면 모두 공감할 수 있듯이, 축약본이라도 신작이나 다름없이 연습이 필요합니다. 방문단을 위해 기꺼이 시간 내고 수고해 주신 교원과 학생들이 참 고마웠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 학생과 교원들이 또 한 번 우리를 깜짝 놀래주었습니다. 이날 생일이신 임상택 선생을 위해 생일 케익을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우수리스크로 오는 버스 안에서 우리는 이날이 임상택 선생님의 생신임을 알게 되었는데, 아마도 김 발레리아 선생께서 전화로 학생들에게 케익을 준비하도록 부탁하셨던 것 같았습니다.

 

 

학생들로부터 생일 축하를 받으시면서 케잌의 촛불을 불어 끄시는 임상택 선생님의 모습을 보면서, 아마도 올해 생일을 평생 잊지 못하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생일에 케익을 준비하고 촛불을 불어 끄면서 소원을 비는 관행은 유럽이나 미국과 한국은 물론 러시아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방문단도 학생들에게 작은 선물을 전했습니다.

 

 

환영공연을 매개로 뜻 깊은 시간을 함께 하고 선물도 주고받으면서 우리는 앞으로도 <아리랑 가무단><화랑 북팀>의 활약을 더욱 기대하게 되었고,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무용신>의 교류와 협력이 더 끈끈해 질 것이라고 믿게 됐습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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訪問団はついに目的地ウスリスク(Уссурийск)到着しました都市入口からきれいでよく整理された都市という印象けましたほどれたさなクラスキノやバラバシュラズドルノイエにべると20万人人口のウスリスクは江陵のようにきな都市なのです

 

 

ウスリスクはウラジオストク(人口60万人)いで沿海州2番目きい都市です高麗人人口はウスリスク(15千人)がウラジオストク(1万人)よりいですつまり高麗人にとっては沿海州最大都市ウラジオストクよりウスリスクの故郷のようなところです

 

 

これは歴史的にもそうです沿海州はもともと靺鞨でしたが高句麗がここを支配しました618高句麗びたその遺民698にここに渤海建国しましたが渤海15つである率賓府(ソルビンブ)現在のウスリスク地域推定されます

 

 

926渤海滅亡した12世紀女真族金王朝17世紀満州族清王朝いてここを支配しましたはここをジュルホトン満州語:Juru hoton漢語:双城子双子都市という意味またはプルダンホトンFurdan hoton漢語:富爾丹城ばれました

 

 

1860沿海州がロシアに割譲されたニコライ11866にここに軍隊派遣自分名前ってニコリスクイェ(Никольское)びました大連-ハルビンと綏芬河-滿洲里をつなぐ東清鉄道連結するためにここに鉄道開通するとニコリスクイェは交通要地となり1898ニコリスク-ウスリスク(Никольск-Уссурийский̆̆)という昇格しました

 

 

1935スターリンの側近クリメント·ボロシロフ(Климе́нт Вороши́лов, 1881-1969)ってボロシロフ名前わったがスターリンの死後ボロシロフも失脚1957から現在であるウスリスク改称されました

ウスリスクは高句麗人渤海人んでいた場所1860年代朝鮮人豆満江って農業んでいただけでなく1900年代から義兵独立軍活躍していた場所でした

 

 

ウスリスクのラズドルナヤ(Раздольная=旧名スイフォン河綏芬河)江邊には独立運動家李相卨遺墟碑があり高麗人指導者崔在亨先生活動していた1920日本軍によって殺害されたところなので最後らした住宅博物館として造成されていますまたウスリスクには義兵隊長柳麟錫独立軍洪範圖将軍とともに安重根義士記念碑てられています

 

 

ウスリスクは20世紀初沿海州高麗人中心地であり192219272にわたって高麗人自治区請願する自治区中心都市として想定されました

 

しかし1937強制移住80年間3世代にわたる高麗人いてきた生活基盤こそぎってしまいました高麗人った廃墟となったり白人または人種のロシアってきてんでいましたウスリスクも同様でした

 

 

1991にソビエト連邦解体され独立国家連合(CIS)結成されると中央アジアに移住された高麗人沿海州今日沿海州高麗人人口5万人しましたウスリスクは高麗人らしと活動中心地となっています

 

 

もちろん1930年代水準回復することはできませんでした2010国勢調査によると16万人のウスリスク人口高麗人5千人全体3%をわずかに上回るだけです全人口31した過去べるとまだその101回復していない状態です

 

 

しかしウスリスクの高麗人着実成長発展しています定着村友情村造成され沿海州移住140周年民族文化センターも建設されましたまた<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設立されましたがこれはロシア連邦政府公認した唯一高麗人民族学校です

 

 

今回訪問団目的ウスリスク高麗人同胞強制移住以前歴史伝統いでいく躍動的姿直接目確認するためだともえます(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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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단 일행은 마침내 목적지 우수리스크(Уссурийск)에 도착했습니다. 도시 초입부터 깨끗하고 잘 정리된 도시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날 앞서 방문했던 작은 마을, 크라스키노와 바라바쉬, 라즈돌노예에 비하면 약 20만명 인구의 우수리스크는 강릉만한 큰 도시인 것이지요.

 

 

우수리스크는 블라디보스톡(인구 60만명)에 이어 연해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그런데 고려인 인구는 우수리스크(15천명)가 블라디보스톡(1만명)보다 더 많습니다. , 고려인들에게는 연해주 최대도시 블라디보스톡보다 우수리스크가 더 고향 같은 곳입니다.

 

 

이는 역사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연해주는 원래 말갈의 땅이었으나 고구려가 이곳을 지배했습니다. 618년 고구려가 망한 후에는 그 유민이 698년 이곳에 발해를 건국했는데, 발해 15부의 하나인 솔빈부(率賓府)가 지금의 우수리스크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926년 발해가 멸망한 뒤에는 12세기 여진족의 금() 왕조와 17세기 만주족의 청() 왕조가 이어서 이곳을 지배했습니다. 청나라는 이곳을 주루호톤(만주어Juru hoton, 한어双城子, 쌍둥이 도시라는 뜻) 또는 푸르단호톤(Furdan hoton, 한어富爾丹城)으로 불렸습니다.

 

 

1860년 러시아가 연해주를 할양받은 후 니콜라이 1세는 1866년 이곳에 군대를 파견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라 니콜리스크예(Никольское)라고 불렀습니다. 다롄-하르빈 철도와 수이펀허-만저우리 철도를 포함하는 동청철도(東清鉄道)와 연결하기 위해 이곳에 철도가 개통되자, 니콜리스크예는 교통의 요지가 되었고, 1898년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Никольск-Уссурийский)라는 이름의 시로 승격됐습니다.

 

 

1935, 스탈린의 측근 클리멘트 보로실로프(Климе́нт Вороши́лов, 1881-1969)의 이름을 따서 보로실로프 시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스탈린 사후 보로실로프도 실각하면서 1957년부터 지금의 이름인 우수리스크 시로 개칭되었습니다.

우수리스크는 고구려인과 발해인이 살았던 곳이고, 1860년대 조선인들이 두만강을 건너와 농사를 지었을 뿐 아니라, 1900년대부터 의병과 독립군이 활약하던 곳이었습니다.

 

 

우수리스크의 라즈돌나야(Раздольная=옛이름 수이펀허綏芬河) 강변에는 독립운동가 이상설 유허비가 있고, 고려인 지도자 최재형 선생이 활동하던 중 1920년 일본군에게 살해된 곳이어서, 그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주택은 박물관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또 우수리스크에는 의병대장 류인석, 독립군 홍범도 장군과 함께 안중근 의사의 기념비도 세워져 있습니다.

 

 

우수리스크는 20세기 초 연해주 고려인의 중심지였고, 1922년과 1927년 두 차례에 걸쳐 고려인 자치구를 청원할 때 자치구의 중심도시로 상정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37년의 강제이주는 약 80년 동안 3세대의 고려인이 일궈온 삶의 기반을 뿌리 채 뽑아버렸습니다. 고려인이 떠난 마을은 폐허가 되거나 백인 혹은 다른 인종의 러시아인들이 들어와 살았습니다. 우수리스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고 독립국가연합이 결성되자 중앙아시아로 이주 당했던 고려인들이 연해주로 돌아오기 시작했고, 오늘날 연해주의 고려인의 인구는 다시 5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우수리스크는 다시 한 번 고려인 삶과 활동의 중심지가 되고 있습니다.

 

 

물론 1930년대의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2010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16만명의 우수리스크 인구 중에서 고려인은 약 5천명으로 전체의 3%를 약간 상회할 뿐입니다. 전체인구의 3분의1에 이르렀던 과거에 비하면 아직 그 10분의 1도 회복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우수리스크의 고려인들도 꾸준히 성장, 발전하고 있습니다. 정착촌 우정마을이 조성되고, 연해주 이주 140주년을 맞아 민족문화센터도 건립됐습니다.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도 설립되었는데, 이는 러시아 연방정부가 공인한 유일한 고려인 민족학교입니다.

 

 

이번 방문단의 목적은 우수리스크 고려인 동포들이 강제이주 이전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는 역동적인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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