今年舞踊靴キャンペーンは兵庫県西宮コッキリの京都ララン舞踊教室後援しますおそらく韓国同胞にはコッキリのはもちろん西宮をよくらないいでしょう

 

西宮は大阪と神戸の間、そして宝塚の南に面した都市です。 京都はよくられていますが、「ララン舞踊教室がどんなまりなのかはよくからないといます

 

 

まず、「コッキリのがどのようななのか2代会長める西宮具実先生いました具実先生日本<チームアイ>会員でありながら同時<コッキリの>会長職担当していらっしゃいます

 

コッキリの紹介してほしいとおいしたところ下記のようなお便りをいただきました。 『コッキリの紹介するパンフレットにまとめてある内容だそうです

 

コッキリ韓国朝鮮語という意味です西宮外国人どもたちがしくまれる民族子どもコッキリのです

 

 

1988、『西宮在日外国人児童生徒保護者結成されました保護者同士みとえを本音いながら活動していく子供たちがきと活動できるりたいというえがまれましたそして1991コッキリの誕生しました

 

つまり西宮同胞学生保護者々がまったということです子供たちが日本公立学校ってはいますが韓国人/朝鮮人のアイデンティティをって勉強生活することをんでいたからですまたらずらずのうちに行使される偏見差別適切対応していけるよう知恵めるためでした

 

そのように保護者まった1991子供たちのいをったのが<コッキリの>です名前学生たちが直接つけたそうです子供たちにどうしてるの?」いたら、「まあねかっこいいじゃないですかわれました"ただです"というえは韓国日本在日朝鮮人/韓国人もみんなじですね

 

 

<コッキリの>年中一番大きな行事夏休みの12合宿だそうです一種のサマーキャンプなんですよねこのキャンプでは民族楽器練習民族衣装試着花火船遊韓国·朝鮮民話紙芝居などの活動をすることになるということです。 「民話とは昔話口演、「紙芝居とは物語数枚いて説明するものです

 

 

"民族衣装試着"日本学校いながらなかなか試着する機会のない韓服/朝鮮服試着する体験"民族楽器練習"とは太鼓やチャングソンブクやケンガリなどの風物楽器えてうことだそうです

 

 

このように練習した民族楽器では演奏会くそうですコッキリの生徒たちは関西学院大学西宮聖和キャンパスでかれる多文化共生イベントワルド虹祭(~るど·にじいろ·まつり)毎年参加しながら韓服風物演奏するそうです

 

 

2013年度からは西宮市教育委員会委託料理教室やハングル教室チャング教室いており2017年度からは「「コッキリの」」をさらにきくいて韓国/朝鮮だけでなく他国にルーツをどもや保護者参加できるそうです名実共多文化共生発展しているのです

 

 

具実会長「『「コッキリの」』韓国/朝鮮だけでなく々にざしたくの児童学生そして保護者がそれぞれの文化伝統認識しながらいにつながりをっていくになることを期待している説明してくれます(jc, 2024/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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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무용신 캠페인은 효고현 니시노미야의 <코끼리 모임>과 교토의 <라랑 무용교실>을 후원합니다. 아마도 한국동포들에게는 <코끼리 모임>은 물론 니시노미야를 잘 모르시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니시노미야는 오사카와 고베 사이, 그리고 다카라즈카 남쪽에 면한 도시입니다. 또 교토는 잘 알려져 있지만 <라랑 무용교실>이 어떤 모임인지는 잘 모르실 겁니다.

 

 

우선 구실(具実) 선생님께  <코끼리 모임>이 어떤 모임인지 여쭤보았습니다. 구실 선생님은 일본 <팀아이>의 회원이시면서, 동시에 <코끼리 모임(「コッキリの会」)>의 회장을 맡고 계십니다

구실 선생님은 아래와 같은 자료를 보내오셨습니다. <코끼리 모임>을 소개하는 팜플렛에 정리해 놓은 내용이라고 하십니다.

 

“'コッキリ'는 한국, 조선어로 '코끼리'라는 뜻입니다. 니시노미야(西宮)에 사는 외국인 어린이들이 즐겁게 모일 수 있는 민족 어린이회가 '코끼리 모임'입니다.

 

 

“1988, 니시노미야 재일 외국인 아동 학생 보호자의 모임이 결성되었습니다. 학부모들끼리 고민과 생각을 속마음으로 이야기 나누며 활동해 나가는 가운데 아이들이 생생하게 활동할 수 있는 장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1991년에 '코끼리 모임'이 탄생했습니다.”

 

, 니시노미야에 사는 동포 학생들의 학부모님들이 먼저 모이셨다고 합니다. 자녀들이 일본 공립학교에 다니기는 하지만 한국인/조선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공부하고 생활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또 알게 모르게 행사되는 편견이나 차별에 적절하게 대응해 나갈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모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학부모가 모이던 중에, 1991년 자녀들의 모임을 만든 것이 <코끼리 모임>입니다. 모임의 이름은 학생들이 직접 지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에게 어째서 코끼리지?”하고 물었더니, “그냥요, 멋있잖아요.” 하더라고 합니다. “그냥요하는 대답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재일동포들도 다 마찬가지네요.

 

 

<코끼리 모임>의 연중 제일 큰 행사는 여름방학 동안 12일의 합숙이라고 합니다. 일종의 여름캠프인 것이지요. 이 캠프에서는 민족악기 연습, 민족의상 입어보기, 불꽃놀이, 뱃놀이, 한국·조선의 민화, 종이연극등의 활동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민화(民話)”란 옛날이야기 구연을 가리키고, “종이연극(紙芝居)”이란 이야기를 여러 장의 그림으로 그려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민족의상 입어보기는 일본학교에 다니면서 좀처럼 입어볼 기회가 없는 한복을 입어보는 체험을 가리키고, “민족악기 연습이란 북과 장구, 손북이나 꽹과리 등의 풍물악기를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라고 하네요.

 

 

이렇게 연습한 민족악기로는 연주회도 가진다고 합니다. 특히 코끼리 모임의 학생들은 칸사이학원대학 니시노미야 세이와 캠퍼스(関西学院大学西宮聖和キャンパス)에서 열리는 다문화 공생 이벤트 <왈도 무지개 축제(~るど・にじいろ・まつり)>에 매년 참가하면서, 한복을 입고 풍물을 연주한다고 합니다.

 

 

2013년도부터는 니시노미야시 교육위원회의 위탁을 받아 요리교실과 한글교실, 장구교실도 열고 있고, 2017년도부터는 <코끼리 모임>의 문을 더 활짝 열어서 한국/조선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 뿌리를 둔 어린이와 학부모도 참가할 수 있다고 합니다. 명실공히 다문화 공생 모임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지요.

 

 

구실 회장님은 “<코끼리 모임>이 한국/조선뿐 아니라 다른 여러 나라에 뿌리를 둔 많은 아동과 학생, 그리고 학부모들이 각각의 문화와 전통을 인식하면서, 서로 연결고리를 만들어가는 장이 도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설명해 주십니다. (jc, 2024/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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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回目<舞踊靴>キャンペーンがまります今回のキャンペーンは兵庫県西宮コッキリ京都ララン舞踊教室支援することになります<コッキリ>には風物衣装<ララン舞踊教室>には舞踊シーンをプレゼントしようといます衣装舞踊靴のプレゼントのために皆様のご関心とご参加をおちしております

 

一人様1ウォン(以上^^)でご参加くださいってくださる口座

カカオバンク: 3333-23-1600864 (舞踊靴キャンペーン趙正熙)

8回舞踊靴キャンペーンは2024712まできます

 

 

<舞踊靴>最初のキャンペーンは20201でしたが2週間のキャンペーンをじて30人余りがめてくださった93ウォンで35舞踊靴ることができました

 

その後続いた7のキャンペーンをじて1千人以上一度以上舞踊靴のプレゼントをしました非公式統計によると(公式統計があるはずがありませんから在日朝鮮人舞踊部学生たちは一人残らず韓国同胞からられた舞踊シーンをプレゼントされたということです

 

 

上級学校進学したり地域転校したりしたせいで2もらった学生たちが話題になったりしたそうですから韓国同胞たちの真心のこもった学生たちに意味深れられているようです

 

在日朝鮮人学生たちに舞踊靴るのは学生たちが舞踊靴うおがないからではありません生徒たちも大部分かで保護者々も教育費んで負担することができます

 

 

それでも韓国同胞名前舞踊靴るということは在日同胞韓国同胞がおいにおうという意味ですそして韓国同胞在日同胞舞踊手たちを応援するためです

 

さらに舞踊靴はそれほど高価でもありません朝鮮舞踊舞踊靴西洋式バレエシューズのようにトウtowがありません朝鮮舞踊につま先立ちの動作がないからです

 

 

崔承喜先生舞踊しさとともに健康追求する芸術だという認識ちましたからつま先立ちをするとめてしまいます大人じです世界的なバレリーナのるとだらけで筋肉間違っていることがいです崔承喜先生舞踊收健康理由朝鮮舞踊からつま先立ちの動作いたのです

 

 

ですからトウ装置のない舞踊靴最高級であっても35百円えません百人学生たちに舞踊靴をプレゼントしても350ウォンで十分ですということで韓国同胞負担なくける在日同胞学生たちもありがたくれるわけですよね

 

問題があるとすれば学生たちの練習量です13-4時間ずつ練習をするので134舞踊靴必要だそうです革製舞踊靴でも3-4けたりいたりするそうですから舞踊靴いからではなく練習量絶対的いからです気持ちとしては何度もおりしたいのですがいろいろな事情一人1ずつもらえるほど舞踊靴のプレゼントをめてきました

 

 

ところで今年舞踊靴キャンペーンは對象えることにしました朝鮮学校舞踊部ではなく日本公立学校朝鮮人学生活動支援することにしたのです舞踊とともに風物クラスの生徒たちも対象めました

 

このように方向転換したのは情勢のためです学生たちの芸術活動なのに国際情勢南北関係れの影響けます。 「舞踊靴状況情勢らうというよりはこれまでえてはいたものの力量りなくて先延ばしにしてきた公立学校朝鮮人学生支援することにしたのです

 

 

最初後援對象として兵庫県西宮市コッキリ京都市ララン舞踊教室選定しました<コッキリ>生徒たちには風物衣装<ララン舞踊教室>生徒たちには舞踊靴をプレゼントしようといますらに衣装舞踊靴のプレゼントをするためにさんの関心参加をおちしておりますどうも

 

一人様1ウォン(以上^^)でご参加くださいってくださる口座

カカオバンク: 3333-23-1600864 (舞踊靴神キャンペーン趙正熙)

8回舞踊靴キャンペーンは2024712まできます(jc, 2024/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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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번째 <무용신> 캠페인이 시작됩니다. 이번 캠페인은 효고현 니시노미야의 <코끼리회>와 교토의 <라랑 무용교실>을 지원하게 됩니다. <코끼리회>에는 풍물의상을, <라랑 무용교실>에는 무용신을 선물하려고 합니다. 의상과 무용신 선물을 위해 여러분의 관심과 참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11만원(이상^^)으로 참여해 주세요. 보내주실 계좌는,

카카오뱅크: 3333-23-1600864 (무용신 캠페인, 조정희)

8차 무용신 캠페인은 2024 712일까지 계속됩니다.

 

 

<무용신>의 첫 캠페인은 2020 1월이었는데, 2주일의 캠페인을 통해 30여분이 모아주신 93만원으로 35켤레의 무용신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 뒤로 계속된 일곱 차례의 캠페인을 통해 약 1천명 이상에게 한번 이상 무용신 선물을 전했습니다. 비공식 통계에 의하면 (공식 통계가 있을 리 없으니까요.^^) 재일동포 무용부 학생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한국 동포가 보낸 무용신을 선물 받았다고 합니다.

 

 

상급학교로 진학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전학하는 바람에 일 년에 두 번 받은 학생들이 화제가 되곤 했다니까, 한국 동포들의 정성어린 선물이 학생들에게 뜻깊게 받아들여지는 듯합니다.

 

재일동포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보내는 것은 그 학생들이 무용신 살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학생들도 대부분 넉넉하고, 학부모님들도 교육비를 기꺼이 부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한국동포의 이름으로 무용신을 보내는 것은, 재일동포와 한국동포들이 서로 알고 지내자는 뜻입니다. 그리고 한국동포들이 재일동포 어린 무용수들을 응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심지어 무용신은 그리 비싸지도 않습니다. 조선무용의 무용신은 서양식 발레슈즈처럼 토우(tow)가 없습니다. 조선무용에 꼿발 동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일찍이 조선무용을 창시하신 최승희 선생의 배려였습니다.

 

 

최승희 선생은 무용이 아름다움과 함께 건강을 추구하는 예술이라는 인식을 가지셨습니다. 어려서부터 꼿발 동작을 하면 발가락과 발톱을 다치게 됩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적인 발레리나들의 발을 보면 상처투성이이고, 뼈나 근육이 잘못된 경우가 많습니다. 최승희 선생은 무용수의 건강을 이유로 조선무용에서 꼿발 동작을 제거하신 겁니다.

 

 

그래서 토우 장치가 없는 무용신은 최고급 가죽신이라고 하더라도 35백엔을 넘지 않습니다. 백명의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선물해도 350만원이면 충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내는 한국 동포도 부담이 적고, 받는 재일 동포 학생들도 감사히 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학생들의 연습량입니다. 하루 3-4시간씩 연습을 하기 때문에 일 년에 서너 켤레의 무용신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가죽으로 된 무용신도 3-4개월이면 올이 풀리거나 구멍이 난다고 하니까요. 무용신이 약해서가 아니라, 연습량이 절대적으로 많기 때문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몇 차례고 보내주고 싶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일 년에 한 사람이 한 켤레씩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무용신 선물을 진행해 왔습니다.

 

 

그런데 올해의 무용신 캠페인은 대상을 좀 달리 하기로 했습니다. 조선학교 무용부가 아니라 일본 공립학교에 다니는 조선인 학생들의 활동을 지원하기로 한 것입니다. 무용과 함께 풍물반 학생들도 대상에 포함했습니다.

 

이렇게 방향을 전환한 것은 정세 때문입니다. 어린 학생들의 예술 활동인데도 국제정세와 남북관계 흐름의 영향을 받습니다. <무용신>은 상황과 정세를 거스르기 보다는, 그동안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역량이 모자라서 미뤄오던 공립학교 조선인 학생을 지원하기로 한 것이지요.

 

 

첫 번째 후원 모임으로 효고현 니시노미야의 <코끼리회>와 교토의 <라랑 무용교실>을 선정했습니다. <코끼리회> 학생들에게는 풍물의상을, <라랑 무용교실> 학생들에게는 무용신을 선물하려고 합니다. 이들에게 의상과 무용신 선물을 하기 위해 여러분의 관심과 참여를 기다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11만원(이상^^)으로 참여해 주세요. 보내주실 계좌는,

카카오뱅크: 3333-23-1600864 (무용신 캠페인, 조정희)

8차 무용신 캠페인은 2024712일까지 계속됩니다.

 

(jc, 2024/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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ウスリスク高麗人文化センター訪問えた一行バスにって市立公園(городском парке)かいました公園石像崔在亨先生古宅観覧するためでした

 

 

グーグルの地図ると文化センターから市立公園までは2キロウスリスクホテルからは1キロしかありません団体旅行でなければホテルから皆歩いてけるですウスリスクホテルが韓国人にとって本当便利宿だという意味でもあります

 

 

公園正門には市立公園かれていますが地図るとドラ公園(Парк ДОРА)となっていますドーラ(ДОРА)"ロシア軍将校官舎(дома офицеров Российской армии)"ですねかつてここにあった将校官舎地域市立公園わったようです

 

 

キム·ヴァレリア先生がわざわざここに案内したのは石像せるためでしたこの石像のためドーラ公園亀公園(парк черепах)ともばれています

 

 

なるほど石像巨大でどっしりしているだけでなく単純ながらも威厳があるようにえます直径2メートルを背中には石碑てられるほどきなられていましたしかし碑石はまいます一目でも古代遺物であることがかります

 

 

この石像市立公園保管していること屋根のある亭子てて石像露天放置されないようにしたことそしてゴマのような説明文2つもてられたことからウスリスク市当局がこの石像大切管理していることがかります

 

 

キム·ヴァレリア先生はこの石像渤海遺物とみているので訪問団にぜひご紹介したかったそうです韓国近代史だけでなく韓国史全般しい知識った朴漢龍先生甲羅まれた文様韓民族文様いと同意しましたこの分野にあまりらないただ石像きながら千年近歳月じるだけでした

 

 

しかしウスリスク当局極東学術界ではこの亀石像女眞(Черепаха чжурчжэней̆)びます女真族といえば靺鞨族末裔渤海国民だったのですからこの石像渤海関連しているという信念がそれほど間違っているわけではないでしょう

 

 

この石像1864にロシアの地理学者イノセンティ·ロパチン(Инокент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Лопатин, 1839-1909)がニコルスコイエ(=今日のウスリスク)めて発掘されました発掘当時石像2つありましたが1つは1896にハバロスクのグロデコブ(Гродеков)歴史博物館されもう1つはウスリスクにされてドラ公園安着しました

 

 

つの石像はいずれも直径2メートルさが6トンほどですが背中には石碑てるられていますハバロフスクの石像にはれた石碑根元一部残っていますがウスリスクの石像には発掘当時もすでに石碑がなかったそうです

 

 

ハバロフスクの亀石像石碑には文字痕跡っていますが毀損磨耗む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その考古学者研究により石像中国石像特徴くないことからこれを女真族13世紀石像推定しました

 

 

1960年代考古学者ビタリー·ラリチェフ(Виталий Ларичев, 1932-2014)碑文石像金國4代皇帝ワン·アンリャン(完顔亮)墓碑石像であることを推定しました

 

 

女真名はディグナイ(迪古乃)太祖完顏阿骨打(1068-1123)庶子である遼王宗幹次男3代皇帝熙宗完顔亶(1119-1150)して王位いたが彼自身反乱軍によって殺害され死後廃位されたです

 

 

面白いのはこの亀石像主人公推定されるディグナイの母親渤海王孫大氏だったというですしたがってロシア学界研究結果によるとしてもこの亀石像主人公渤海子孫だとえます(jc, 2024/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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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센터 방문을 마친 일행은 버스를 타고 시립공원(городском парке)으로 향했습니다. 공원 안의 거북 석상과 최재형 선생의 고택을 관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구글 지도를 보니까 문화센터에서 시립공원까지는 약 2킬로미터, 우스리스크 호텔에서는 1킬로미터밖에 되지 않습니다. 단체여행이 아니었다면, 호텔에서 모두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곳들입니다. 한국인들에게 우수리스크 호텔이 참 편리한 숙소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공원 정문에는 <시립공원>이라고 씌여 있지만, 지도를 보면 <도라 공원(Парк ДОРА)>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도라(ДОРА)러시아군 장교관사(дома офицеров Российской армии)”의 약자더군요. 한때 이곳에 있던 장교 관사 지역이 시립 공원으로 바뀌었나 봅니다.

 

 

김발레리아 선생께서 애써 이곳으로 안내하신 것은 거북석상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거북석상 때문에 도라 공원은 거북이 공원(парк черепах)으로 불리기도 한답니다.

 

 

과연 거북 석상은 거대하고 육중할 뿐 아니라 단순하면서도 위엄이 있어 보입니다. 직경이 2미터가 넘고, 등에는 비석이 세워질 수 있을만큼 큰 홈이 파여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석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한 눈에도 고대의 유물이라는 점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 거북석상을 시립공원에 보관하고 있는 점, 지붕있는 정자를 지어 석상이 노천에 방치되지 않게 한 점, 그리고 깨알 같은 설명문이 두 개나 세워진 것으로 미루어, 우수리스크 시당국이 이 거북석상을 소중하게 관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김발레리아 선생은 이 거북석상이 발해 시기의 것이라고 보시기 때문에 방문단에 꼭 소개하고 싶으셨다고 합니다. 한국 근대사뿐 아니라 한국사 전반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신 박한용 선생도 거북 석상의 등에 새겨진 문양이 한민족 문양에 가깝다며 동의하셨습니다. 아는 게 별로 없는 저는 그저 거북석상을 손으로 쓸어보면서 1천년이 넘는 세월을 느껴볼 뿐이었습니다.

 

 

정작 우수리스크 당국과 극동 학술계에서는 이 거북석상을 여진 거북이(Черепаха чжурчжэней)라고 부릅니다. 여진족이라면 말갈족의 후예이고, 발해의 국민이었으므로, 이 석상이 발해와 관련되어 있다는 믿음이 그리 틀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 거북 석상은 1864년 러시아 지리학자 이노센티 로파틴(Инокент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Лопатин, 1839-1909)이 니콜스코예(=오늘날의 우수리스크)에서 처음 발굴했습니다. 발굴 당시 거북석상이 2개였는데 하나는 1896년 하바로스크의 그로데코브(Гродеков) 역사박물관으로 옮겨졌고, 하나는 우수리스크에 남겨져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도라 공원에 안착되었습니다.

 

 

두 개의 거북석상은 모두 직경이 2미터, 무게가 6톤쯤인데, 거북의 등에는 비석을 세울 홈이 파여 있습니다. 하바롭스크의 거북석상에는 깨진 비석의 밑둥이 일부 남아 있지만, 우수리스크의 석상에는 발굴 당시에도 이미 비석이 없었다고 합니다.

 

 

하바롭스크의 거북석상 비석에는 글씨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훼손과 마모로 읽을 수 없었습니다. 이후 고고학자들의 계속된 연구에 의해 거북석상에 중국 석상의 특징이 전혀 없다는 점으로 미루어, 이를 여진족의 무덤을 지키는 13세기의 석상으로 추정했습니다.

 

 

마침내 1960년대 러시아 고고학자 비탈리 라리체프(Виталий Ларичев, 1932-2014)가 비문을 읽어내어, 거북석상이 금()나라 4대 황제 완안량(完顔亮)의 묘비석상임을 추정했습니다.

 

 

그의 여진 이름은 디구나이(迪古乃), 태조 완안아골타(完顏阿骨打, 1068-1123)의 서자인 요왕종간(遼王宗幹)의 차남으로, 3대황제 희종(熙宗) 완안단(完顔亶, 1119-1150)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는데, 그 자신도 반란군에게 시해당하고 사후 폐위된 사람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거북석상의 주인공으로 추정되는 디구나이의 모친이 발해의 왕손 대씨(大氏)였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러시아 학계의 연구 결과에 따르더라도 이 거북석상의 주인공이 발해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jc, 2024/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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ウスリスク高麗人文化センターの建物には碑石てられています沿海州事業家であり体育人社会運動家でもあったキム·ミハイル·イクノコビチャ(Ким Михаила Пяк-Ноковича, 1952-1998)える碑石です

 

 

訪問団一行碑石りをんで黃光石先生説明きました事業成功させた沿海州とロシア極東地域高麗人ディアスポラ社会発展貢献されただといましたはまたこの崔在亨先生のようなだったとえました

 

 

碑石もうとしましたがロシアからないので内容かりませんでした右上まれたミハイル先生のしっかりした姿左下にムクゲがまれていることから意志であり大韓民国連帯感っていただったのだ推測しただけです

 

 

わりに写真何枚っておきましたがでグーグルリングをしてみるためでした高麗人文化センター訪問えて移動するバスのでグーグル翻訳機碑文翻訳しました

 

 

Мне всегда хотелось жить по Н. Островскому - чтобы не было мучительно больно за бесцельно прожитые годы..." (はいつもオストロップスキーの言葉のようにきることをった。「目的もなくきてしまった歳月する苦痛しまないように...)

 

 

ニコライ·オストロフスキー(Николай Островский, 1904-1936)大学時代んだ小説鋼鉄はどのようにえられたか(Как закалялась сталь, 1932)著者です。「目的もなくきてきた歳月する苦痛まされないように…」<鋼鉄>23てくるフレーズですこのフレーズの前後をもうすとこうなります

 

 

人間にとって大切なものがはたった一度与えられるしたがって目的もなくきてしまった歳月する苦痛しめないように些細過去歴史にしがみついたずかしさにまれないようにそしてぬまですべての生命大切なことすなわち人類解放のための闘争がれるようにそうきなければならない結局生命滑稽病気悲劇的事故わってしまうこともありうるのではないかこのえにふけってコルチャギンは同志れた

 

 

ウスリスクの高麗人金ミハイル先生がオストロプスキーのこの言葉大事にしながらきてきたということにきます。 『鋼鉄自伝的小説なのでこれはすなわちオストロプスキーの人生要約した言葉でもあります。 『鋼鉄出版された過程容易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

 

ウクライナまれの12学校めた食堂従業員発電所見習などで労働者人生ロシア革命内戦参戦して脊椎負傷いました共産主義運動けましたが健康悪化してけなくなると自分経験にしました

 

 

1924、『鋼鉄草稿完成出版社りましたがこの原稿紛失しました1930 健康悪化ほぼ失明りましたがオストロフスキーは鋼鉄しました15までは自分きましたが以後口述代筆しました

 

 

1931101完成した原稿19筆跡ざっていたため自分著者であることを証明するために文献学的調査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19322完成して出版されるとオストロプスキーは人生無駄ではなかったったそうです

 

 

オストロプスキーを典範としてきたミハイル記念碑死後20ぶりの2018518(陰曆55端午)除幕されましたところがまだつやつの疑問っています

 

 

キム·ミハイル·イコノコビチャとなっていますが々はキム·ミハイル·ペトロヴィッチぶこともあります名前でしょうかそしてミハイル先生がどうして46さで他界したのかもになりますがいつかかることになるでしょう(jc, 2024/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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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20미터쯤 되는 지붕을 씌운 진입로가 있고, 그 초입에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연해주의 사업가이자 체육인, 사회운동가였던 김 미하일 이크노코비챠(Ким Михаила Пяк-Ноковича, 1952-1998)를 기리는 비석입니다.

 

 

방문단 일행은 비석 주위에 둘러서 황광석 선생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성공적으로 사업을 일군 후에 연해주와 러시아 극동지역의 고려인 디아스포라 사회의 발전에 공헌하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또 이분이 최재형 선생 같은 분이었다고 덧붙이셨습니다.

 

 

저는 비석의 글을 읽어보려 했으나 러시아어를 모르기 때문에 내용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오른쪽 위에 새겨진 김 미하일 선생의 다부진 모습과 왼쪽 아래에 무궁화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의지가 강한 분이며 대한민국에 연대감을 가지셨던 분이었구나, 짐작했을 뿐입니다.

 

 

대신 사진을 여러 장 찍어 두었는데, 나중에 구글링을 해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고려인 문화센터 방문을 마치고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구글 번역기로 비문을 번역했습니다.

 

 

"Мне всегда хотелось жить по Н. Островскому - чтобы не было мучительно больно за бесцельно прожитые годы..." М. Ким. (나는 언제나 오스트롭스키의 말처럼 살기를 원했다. “목적 없이 살아버린 세월에 대한 고통에 시달리지 않도록...” 미하일 김.)

 

 

눈을 번쩍 뜨게 하는 이름이 나옵니다. 니콜라이 오스트롭스키(Николай Алексеевич Островский, 1904-1936)는 저도 대학시절에 읽었던 소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Как закалялась сталь, 1930-1934)의 저자입니다. 이 사람이 그 사람인가 확인하려고 인용문을 찾아봤습니다. 역시 맞습니다. “목적없이 살아버린 세월에 대한 고통에 시달리지 않도록...”<강철>의 제23장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의 앞뒤를 조금 더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생명이다. 생명은 단 한번 주어진다. 그러므로 목적 없이 살아버린 세월에 대한 고통에 시달리지 않도록, 사소한 과거사에 매달렸던 부끄러움에 휩싸이지 않도록, 그리고 죽을 때에 모든 생명과 모든 힘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 즉 인류의 해방을 위한 투쟁에 쏟아지도록, 그렇게 살아야 한다. 결국 생명은 우스꽝스런 질병이나 비극적인 사고로 끝나버릴 수도 있지 않은가. 이러한 생각에 잠겨서 코르챠긴은 동지의 무덤을 떠났다.“

 

 

우수리스크의 고려인 김 미하일 선생이 오스트롭스키의 이 말을 간직하며 살았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강철>은 자전적 소설이기 때문에 이는 곧 오스트롭스키의 삶을 요약한 말이기도 합니다. 그의 생애도 그랬지만, <강철>이 출판된 과정도 쉽지 않았습니다.

 

우크라이나 태생인 그는 12살 때 학교를 그만 둔 뒤, 식당 종업원과 발전소 견습공 등으로 노동자의 삶을 시작했고, 러시아 혁명과 내전에 참전해 척추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는 공산주의 운동을 계속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일할 수 없게 되자, 자신의 경험을 책으로 썼습니다.

 

 

1924<강철> 초고를 완성해 출판사에 보냈으나, 이 원고는 분실됐습니다. 1930년 그의 건강은 악화되고 거의 실명에 이르렀지만, 오스트롭스키는 <강철>을 다시 쓰기 시작했습니다. 1권의 5장까지는 자신의 손으로 썼지만, 이후에는 다른 사람이 그의 구술을 대필했습니다.

 

 

1931101권이 완성됐을 때, 원고에는 19명의 필체가 섞여있었으므로, 오스트롭스키가 저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문헌학적 조사를 거쳐야 했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1932년에 제2권이 완성되어 출판되자, 오스트롭스키는 내 삶이 헛되지 않았다고 했다는 군요.

 

 

오스트롭스키를 전범으로 살았던 김 미하일 기념비는 그의 사후 20년만인 2018518(음력 55일 단오)에 맞춰 제막됐습니다. 그런데 아직 한두 의문이 더 남아 있습니다.

 

 

비문에는 그의 이름이 김 미하일 이코노코비챠로 되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를 김 미하일 페트로비치라고 부르더군요. 같은 이름일까요? 그리고 김 미하일 선생이 어째서 46세의 젊은 나이에 타계했는지도 궁금합니다만, 언젠가 알게 되겠지요. (jc, 2024/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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ウスリスク高麗人文化センターの庭園には3つの独立運動家記念碑てられています文化センターののキロバ(Улица Кирова)んでけられた洪範圖安重根柳麟錫先生記念碑がそれです3とも抗日義兵としてまったという共通点があります

 

 

柳麟錫先生乙未事変いて断髪令ると18951224(陰曆)義兵活動開始洪範圖将軍1906砲手組織である砲連隊義兵隊再編抗日鬪爭めました安重根義士1907国債補償運動など愛国啓蒙運動展開その7正味7条約締結されると沿海州亡命ノブキエフスクとウラジオストクで義兵組織しました

 

 

安重根義士についてはただ同盟記念碑紹介しながら比較的詳しく調べたことがありますが洪範道将軍柳仁錫先生についてはしずつもっと調べる必要があります

 

 

洪範圖将軍19079日本銃砲及火薬類取締法公布砲手銃器回収しようとすると同年11砲手70山砲隊組織北清後置嶺日本軍撃破その甲山三水恵山豊山などで遊撃戦日本軍守備隊撃破しました

 

 

190810鴨緑江吉林省沿海州ウラジオストクの新韓村根拠地とし豆満江しながら日本軍攻撃しました庚戌国恥(19108)以降長白山鳳梧洞(19206)青山里(192010)きな戦果げました

 

 

間島惨事(1920-21)でロシア自由市移動ロシア革命内戦後共産党入党(1927)して活動しましたが強制移住(1937)でカザフスタンのキジラルダに定着高麗劇場管理人などとして勤務194376他界キジラルダの共同墓地埋葬されました

 

 

朝鮮1993洪範圖将軍平壌出身だということを根拠遺骨奉還みましたが高麗人社会反対霧散2021815韓国奉還され大田顕忠院埋葬されました

 

 

洪範圖将軍生涯後期共産主義者として活動したという韓国ではきちんと評価されませんでしたが1980年代愼鏞廈(シン·ヨンハ)先生研究本格的関心研究いています

 

 

一方柳麟錫先生義兵活動として1962建国功労勲章光復章(=大統領章)追叙されウスリスクの高麗人文化センターにも記念碑てられていますしかし柳麟錫先生活動たして大韓民国建国勲章叙勲根拠になるのかについては個人的疑問じました

 

 

柳麟錫先生まで儒学者中国皇帝朝鮮旧秩序回復主張しました義兵活動目的尊華攘夷つまり中国じて西洋蛮族排斥するということでした大韓帝国建国された朝鮮皇帝国僭称するのは道理するとして高宗年号光武使用せずくからびた中国年号使いました

 

 

実際義兵活動でも柳麟錫先生提川郡守金益珍忠州観察士金奎植天安郡守金炳塾などを殺害したが断髪令施行したというのが理由でした日本軍との戦闘では毎回敗堤川敗北(1896)には西間島中国軍閥によって武装解除されました

 

 

沿海州義兵再結集した19106柳麟錫13道義軍都総裁推戴されましたが武力抗争開始前庚戌国恥13道義軍日帝干渉けたロシア政府によって解散しました

 

 

その柳麟錫すべての士人間島中国する義理ってという意味守華終身主張彼自身19143中国西間島奉天省西豊県亡命その後関電県方取区そこで死亡しました率先して手話終信をしたのです

 

 

柳麟錫先生沿海州時代高麗人同胞たちの内的葛藤縫合13道義軍結成寄与した肯定的なのでウスリスクの文化センターに記念碑てられたのはそれなりに意味がないわけではありませんが行跡大韓民国光復のために神名げた安重根義士洪範圖将軍匹敵するとは見難いというじをうことができません(jc, 2024/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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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 정원에는 세 개의 독립운동가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문화센터 옆의 키로바 거리(Улица Кирова) 쪽 담장 앞에 나란히 마련된 홍범도, 안중근, 유인석 선생의 기념비가 그것입니다. 세 사람은 모두 항일 의병으로 시작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유인석 선생은 을미사변에 이어 단발령이 내리자 18951224(음력) 의병활동을 개시했고, 홍범도 장군은 1906년 포수 조직인 포연대를 의병대로 재편, 의병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1907년 국채보상운동 등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다가, 그해 7월 정미7조약이 체결되자 연해주로 망명, 노브키에프스크와 블라디보스톡에서 의병을 조직했습니다.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는 단지동맹 기념비를 소개하면서 비교적 자세히 살핀 적이 있지만, 홍범도 장군과 유인석 선생에 대해서는 조금씩만 더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19079월 일제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고 포수들의 총기를 회수하려하자 그해 11월 포수 70명으로 산포대(山砲隊)를 조직, 북청 후치령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이후 갑산, 삼수, 혜산, 풍산 등지에서 유격전으로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했습니다.

 

 

190810월 압록강을 건너 길림성을 거쳐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을 근거지로 삼아, 두만강을 넘나들며 일본군을 공격했습니다. 경술국치(19108) 이후에는 장백산으로 옮겨 봉오동 전투(19206)와 청산리 전투(192010)에서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간도참변(1920-21)으로 러시아 자유시로 이동, 러시아혁명과 내전 후에는 공산당에 입당(1927)해 활동했으나, 강제이주(1937)로 카자흐스탄 키질로르다에 정착, 고려극장의 관리인 등으로 근무하다가 194376세로 타계, 키질로르다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조선은 1993년 홍범도 장군이 평양 출신이라는 점을 근거로 유해 봉환을 시도했으나 고려인 사회의 반대로 무산, 2021815일 한국으로 유해가 봉환되어 대전현충원에 안장됐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생애 후기에 공산주의자로 활동했다는 점 때문에 한국에서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으나, 1980년대 신용하 선생의 연구로 본격적인 관심과 연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편, 유인석 선생은 의병활동으로 1962년 건국공로훈장 광복장(=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우수리스크의 고려인문화센터에도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유인석 선생의 활동이 과연 대한민국의 건국훈장 서훈의 근거가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의문이 생겼습니다.

 

 

유인석 선생은 뼛속까지 유학자였고, 중국 황제를 받들고, 조선 왕을 모시면서, 구질서 회복을 주장했습니다. 의병활동의 목적도 존화양이(尊華攘夷), 즉 중국을 받들고 서양오랑캐를 배척한다는 것이었지요. 대한제국이 건국된 다음에도 조선이 황제국을 참칭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며, 고종의 연호 광무를 사용하지 않았고, 오래전에 망한 중국 명나라 연호를 썼습니다.

 

 

실제 의병활동에서도 유인석 선생은 제천군수 김익진, 충주 관찰사 김규식, 천안군수 김병숙 등을 살해했는데 단발령을 시행했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일본군과의 전투에서는 매번 패했고, 제천 패배(1896) 후에는 서간도로 건너갔다가 중국 군벌에 무장해제를 당했습니다.

 

 

연해주 의병이 결집되었던 19106, 13도의군의 도총재로 추대되었으나, 무력항쟁 개시하기 전에 경술국치를 맞았고, 13도의군도 일제 간섭을 받은 러시아 정부에 의해 해산됐습니다.

 

 

이후 유인석은 모든 선비들은 간도로 건너와 중국에 대한 의리를 지키다가 죽어라는 뜻의 수화종신(守華終身)을 주장했고, 그 자신도 19143월 중국 서간도 봉천성 서풍현으로 망명, 이후 관전현 방취구로 옮겼다가 그곳에서 사망했습니다. 솔선해서 수화종신을 한 것이지요.

 

 

유인석 선생이 연해주 시절, 고려인 동포들의 내적 갈등을 봉합하고 13도의군 결성에 기여했던 점은 긍정적이므로, 우수리스크의 문화센터에 그의 기념비가 세워진 것은 나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그의 행적이 대한민국의 광복을 위해 신명을 바친 안중근 의사와 홍범도 장군에 필적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습니다. (jc, 2024/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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