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重根義士斷指同盟記念碑到着するといつのにか昼食時間でした図們から8出発したのですがクラスキーノに到着せず12記念碑到着したら午後12時半です

 

 

まだ4時間しかっていないのすると図們とクラスキーノの時差2時間あります図們韓国より1時間早クラスキーノは韓国より1時間遅いですですから中国図們ウィーンホテルからロシアのクラスキーノの安重根記念碑到着するまで100キロ移動するのに6時間半かかったわけですよねになったのです

 

 

記念碑到着した訪問団一行まず訪問団長黃光石(ファン·グァンソク)先生指揮でまず黙祷そのすぐに昼食をとりました朝食をバスでとったので昼食いんじゃないかというもしましたが旅行くときはおしっこのおいています

 

 

昼食はキム·ヴァレリアキム·バレンチン先生夫婦用意してきましたクラスキーノには適当食堂もなくもしロシア食堂わないかもしれないということを心配して韓国料理昼食準備してバスにせてられたそうですヴァレリアの先生直接準備されたのかいてみたらいいえいながら友人経営する食堂注文されたそうです

 

 

一行記念碑公園のあちこちにってって野外昼食べましたキム·ヴァレリア先生だけでなく一行各自使座布団まで準備してこられたのでどれほど細心配慮されたのかじることができました

 

 

きめの透明豚肉キムチと各種ナムルがいっぱいっていたのであのたくさんのたちが全部食べられないいました延辺朝鮮族同胞たちとじようにロシアの高麗人同胞たちもしてはすごくきいんだなといました

 

 

たちがあたふたとごべているキム·バレリア先生はナムルやきながらもっとけてくれたりするので本人食事をされたのかかりませんはいつもえられたものをべるのでそしてには食事調節しなければならない朴仁浩(パク·インホ)先生食事までしてもらったので私一人2.5人分べたようでした

 

 

金剛山食後景という言葉のように昼食後たちはもう一度記念碑のそばでバスキングがかれました朴仁浩先生のサックスや大笒(テグム)演奏があり最後には記念碑のための行進曲記念撮影いました

 

 

朴仁浩先生はサックスで汽車はその夜明けにった演奏これを伴奏黃光石先生歌唱えました。 「ヤン·チヘの野原無名指てた/大韓国人安重根せて/汽車はその夜明けをったという歌詞きながら安重根義士がウラジオストクから汽車ってハルビンにかう姿連想されましたこの記念碑公園この々とえる場所つでしょう

 

 

いて朴仁浩先生大琴天香千年鶴演奏しましたが千年鶴同時えてくれた映画西便制(1993)場面連想させます

 

 

記念碑記念撮影をするたちはわせてのための行進曲合唱しましたりながら名前さず/一生出ようというった々の記念碑だったので意味がより一層はっきりしました

歳月れても山川大切にしてきた斷指同盟員いと実践ここをしでもれる韓国人わるようになりました

 

 

ふとこの々のいといはったのかといういがかびました日本による植民地支配わったのでそうともえるでしょうが韓国北韓対峙状況えるとこの々におにかかるのがずかしいです

 

 

のための行進曲一緒いながら今私たちはどんないをてるべきかえてみる時間になりました(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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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단지동맹 기념비에 도착해 둘러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었습니다. 투먼에서 아침 8시에 출발했는데, 크라스키노에 도착하지 낮12, 기념비에 도착하니 오후12시반입니다.

 

 

아직 4시간 밖에 안 지났는가? 했더니, 투먼과 크라스키노의 시차가 2시간 있습니다. 투먼은 한국보다 1시간이 빠르고, 크라스키노는 한국보다 1시간이 느립니다. 그러니까 중국 투먼 비엔나 호텔에서 러시아 크라스키노의 고려인 기념비에 도착할 때까지 약 1백킬로미터 이동하는 데에 6시간 반이 걸린 것이지요배가 고플 때도 된 것입니다. 

 



기념비에 도착한 방문단 일행은 우선 방문단장 황광석 선생의 지휘로 먼저 묵념을 올린 후 바로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아침식사를 버스에서 했기 때문에 점심식사가 이르지 않은가 싶기도 했지만, 여행 다닐 때는 쉬 배가 고픕니다.

 

 

점심식사는 김발레리아, 김발렌친 선생 부부께서 준비해 오셨습니다. 크라스키노에는 마땅한 식당도 없고, 혹시 러시아식당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을 염려하셔서, 한식으로 점심을 준비해 버스에 싣고 오셨다고 합니다. 발레리아 선생께서 직접 준비하셨는가, 하고 여쭤봤더니, 아니예요, 하시면서 친구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주문하셨다고 합니다.

 

 

일행은 기념비 공원의 이곳저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약간 늦은 야외 점심을 먹었습니다. 김발레리아 선생께서는 음식뿐 아니라 일행이 각자 사용할 방석까지 준비해오셨으니 얼마나 세심하게 배려하셨는지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큼직큼직한 투명 그릇에 돼지고기와 닭찜, 김치와 각종 나물이 가득가득 들어 있었기 때문에, 저는 속으로 저 많은 음식을 우리가 다 못 먹지싶었습니다. 연변의 조선족 동포들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고려인 동포들도 음식에 관한한 엄청 손이 크신가 보다 했습니다.

 

 

우리가 허겁지겁 밥을 먹는 동안에도 나물이며 고기를 가지고 다니시면서 더 나눠주시곤 하시느라 정작 본인은 식사를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보통 주시는 대로 먹기 때문에, 그리고 때때로 식사의 양을 조절해야 하는 박인호 선생의 식사까지 대부분 넘겨받는 바람에, 저는 2.5인분은 먹은 것 같았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하더니, 다시 한 번 버스킹이 열렸습니다. 박인호 선생의 색소폰과 대금 연주가 있었고, 마지막에는 기념비 앞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노래를 부르고 기념 촬영도 했습니다.

 

 

박인호 선생은 색소폰으로 <기차는 그 새벽에 떠났다>를 연주했고, 이를 반주로 황광석 선생이 가창을 더했습니다. “얀치혜 들판에 무명지를 버린/ 대한국인 안중근을 태우고/ 기차는 그 새벽을 떠났다는 가사를 들으면서, 안중근 의사가 블라디보스톡 역에서 기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향하는 모습이 연상되더군요. 이 기념비 공원은 이 노래를 가장 절절하게 부를 수 있는 장소의 하나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박인호 선생은 대금으로 <천향><천년학>을 연주했는데, 특히 <천년학>은 한과 흥을 동시에 안겨주던 <서편제>의 장면들을 연상시키더군요.

 

 

기념비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기 전에, 목소리를 합쳐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했습니다. 손가락을 끊어가면서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를 다짐했던 분들의 기념비 아래였기 때문인지 이 노래의 의미가 더욱 또렷해지는 것 같더군요.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이 잘 간직해 온 단지동맹원들의 다짐과 실천은 이곳을 잠시나마 방문하는 한국인들에게 사무치게 전달되었습니다.

 

 

문득, 이들의 소원은 이뤄졌는가, 하는 물음이 떠올랐습니다. 일제강점이 종식되었으니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남북으로 나뉘어 대치하고 있는 상황을 생각하면, 이분들을 뵙거나 생각하는 것이 부끄럽기도 합니다.

 

 

<님을 위한 행진곡>과 함께 우리는 또 어떤 다짐을 해야 할 것인지, 잠시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됐습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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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重根義士斷指同盟記念碑にはされていませんが安重根義士11同志んだ斷指同盟には名前がありました。 「同義斷指会ですこれはった同義会同志たちのまりという意味ですったのはをかけたという意味ですそのため、「東義斷指会同義会決死隊という意味でもあります

 

 

同義会19084沿海州結成された朝鮮義兵組織です。 「同義会結成にはいながらも前史があります日本大韓帝国軍隊解散した1907愛国啓蒙運動をあきらめて沿海州亡命した安重根1879-1910平安道警務官出身金起龍(?-?)咸鏡道景興出身でロシア軍服務経歴っていた厳仁燮1875-1936義兄弟抗日義兵こすために沿海州各地同胞社会訪問有意義青年87銃器資金確保しましたらは自分たちを<87兄弟>びました

 

 

翌年(1908)4<87兄弟>団員たちは延秋下里崔在亨(1860-1920)先生まり義兵団体<同義会>組織しましたこの沿海州高麗人指導者崔在亨先生同義会総長邊界警務署(=国境守備隊)出身間島管理士歴任沿海州亡命した李範允(1856-1940)副総長ハーグ万国平和会議高宗特使として派遣された李瑋鍾(1884-?)会長嚴仁燮副会長そして白圭三(?-?)書記選任されました

 

 

同義会迅速沿海州義兵組織武装19087国内進攻作戦敢行しました同義会義兵3千人総司令官都営将全帝翼左営将嚴仁燮(日本密偵変節)右営将安重根めましたそのにも武器調達担当した兵器部金大連日本密偵変節崔英基軍備調達担当した経理部姜議官白圭三担当しました

 

 

同義会創立43千人する義兵組織することができたのは軍資金十分募集できたからです同義軍初期軍資金李瑋鍾父親駐露公使李範晉命令した1ルブルと崔在亨私財として出演した13ルブルそして水清(現在のパルティザンスク)地域高麗人募金した6ルブルを3ルブルにしました19083ルブルは2015年基準ドルで86ドル金価格基準)、韓国ウォンでは10ウォンにする金額でした

 

 

<同義会>義兵部隊50人単位小隊別国内真空作戦開始しました安重根右營軍司令官として小隊4個隊約200同義軍指揮77にポシェット出発して豆満江総司令官全濟益指揮数字同義軍がそのいました時期李範允創軍した<彰義軍>国内進攻作戦参加しましたが指揮官禹德淳12個小隊約600指揮したといいますしたがって当時国内進攻作戦参加した義兵<同義軍>400<彰義軍>6001千人軍隊作戦投入されたのでした

 

 

およそ2國內進攻作戦初期成功していましたが日本軍大規模反撃により失敗、「同義軍はほとんどの兵士8月末延秋帰還しました安重根人道レベルで日本軍捕虜放免したことが敗戦原因指摘され苦境たされ国内進攻作戦失敗わると沿海州武装独立闘争熱気急速めました

 

 

大規模義兵組織国内進攻難関にぶつかると安重根提案結成されたのが東義斷指会だったのです全面戦争やゲリラしくなると暗殺団組織したのです安重根とともに斷指同盟参加した金起龍白圭三嚴仁燮などが<同義会>幹部だったという斷指同盟<同義会>小規模核心団体だったことを推察させますそして同義会同義斷指会すべて崔在亨先生延秋下里設立され財政支援けたのです(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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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단지동맹 기념비>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안중근 의사와 11명의 동지가 맺은 단지동맹에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입니다. 이는 손가락을 자른 <동의회(同義會)>의 동지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손가락을 자른 것은 목숨을 걸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동의단지회>는 곧 <동의회>의 결사대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동의회>19084월 연해주에서 결성된 조선의 의병조직입니다. <동의회> 결성에는 짧으나마 전사(前史)가 있습니다. 일제가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한 1907년 겨울, 애국계몽운동을 포기하고 연해주로 망명한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은 평안도 경무관(=대한제국의 경찰관) 출신의 김기룡(金起龍, ?-?), 함경북도 경흥 출신으로 러시아군 복무경력을 가졌던 엄인섭(嚴仁燮, 1875-1936)과 의형제를 맺고, 함께 항일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연해주 각지의 동포사회를 방문, 뜻있는 청년 87명을 모으고, 총기와 자금도 확보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87형제>라고 불렀습니다.

 

 

이듬해(1908) 4, <87형제>단원들은 연추 하리의 최재형(崔在亨, 1860-1920) 선생의 집에 모여 의병단체 <동의회>를 조직했습니다. 이때 연해주 고려인의 지도자 최재형 선생이 동의회의 총장, 변계경무서(邊界警務所=국경수비대) 출신으로 간도(間島)관리사를 역임했다가 연해주로 망명한 이범윤(李範允, 1856-1940)이 부총장,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파견됐던 이위종(李瑋鍾, 1884-?)이 회장, 엄인섭이 부회장, 그리고 백규삼(白圭三, ?-?)이 서기로 선임됐습니다.

 

 

<동의회>는 신속하게 연해주에서 의병을 조직하고 무장을 갖춰 19087월 국내진공작전을 감행했습니다. 동의회 의병은 3천명에 이르렀고, 총사령관인 도영장(都營將)은 전제익(全濟益), 좌영장(左營將)은 엄인섭(후에 일본 밀정으로 변절), 우영장(右營將) 안중근이 맡았습니다. 그밖에도 무기조달을 담당한 병기부는 김대련(金大連, 후에 일본 밀정으로 변절)과 최영기(崔英基), 군비마련을 담당한 경리부는 강의관(姜議官)과 백규삼이 담당했습니다.

 

 

<동의회>가 창립 4개월 만에 3천명에 달하는 의병을 조직할 수 있었던 것은 군자금을 넉넉하게 모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동의군의 초기 군자금은 이위종이 부친인 주러공사 이범진(李範晉)의 명령으로 전달한 1만루불과 최재형이 사재로 출연한 13천루불, 그리고 수청(지금의 파르티잔스크) 지역의 한인들이 모금한 6천루불을 포함 약 3만루불에 달했습니다. 1908년의 3만루불은 2015년 기준 미달러화로 86만달러(금값 기준), 한국 원화로는 약 10억원에 달하는 액수였습니다.

 

 

<동의회>의 의병부대는 50명 단위의 소대별로 국내진공작전을 개시했습니다. 안중근은 우영군 사령관으로 4개 소대 약 200명의 <동의군>을 지휘하고 77일 포시에트항을 떠나 두만강을 건넜고, 총사령관 전제익의 지휘 아래 같은 숫자의 <동의군>이 이를 뒤따랐습니다. 같은 시기에 이범윤이 창군한 <창의군>도 국내진공작전에 참여했는데, 지휘관 우덕순이 12개 소대 약 6백명을 지휘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당시 국내진공작전에 참여한 의병은 <동의군>이 약 4백명, <창의군>이 약 6백명으로 총 1천여병의 군대가 작전에 투입된 것이었습니다.

 

 

2개월의 국내진공작전은 초기에는 성공적이었으나 일본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실패했고, <동의군>은 대부분의 병사를 잃고 8월말에 연추로 귀환했습니다. 안중근은 인도적 차원에서 일본군 포로를 방면한 것이 패전의 원인으로 지적되어 곤경에 처했고, 국내진공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연해주의 무장독립투쟁의 열기는 급속히 냉각되었습니다.

 

 

대규모 의병 조직과 국내진공이 난관에 부딪히자, 안중근의 제의로 결성된 것이 <동의단지회>입니다. 전면전과 게릴라전이 어렵게 되자 암살단을 조직한 것이지요. 안중근과 함께 단지동맹에 참가한 김기룡, 백규삼, 엄인섭 등이 <동의회>의 간부였다는 점도 단지동맹이 <동의회>의 소규모 핵심단체였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리고 <동의회><동의단지회>는 모두 최재형 선생의 연추하리 집에서 설립되었고, 그의 재정지원을 받았던 것이지요.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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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重根義士斷指同盟記念碑公園整然配置された15もしかしたら斷指同盟員すかもしれないというもしました金九先生のエピソードをしたからです

 

 

金九先生<白凡日誌>"ムンウリドル(=無隅石)"てきます日本700人余りの愛国者検挙さまざまな拷問105事件操作したことをして金九先生倭寇しくった=朝鮮でムンウリ=独立運動家をすべてそうとしているべていますそして自分けて無隅石としてきていけと決心したえました

 

 

ムンウリとはのないきな言葉ですが日本植民地時代には独立運動家言葉でもありました安重根義士斷指同盟記念碑公園15金九先生言葉通朝鮮独立運動家しているのかもしれません

 

 

斷指同盟員12われてきました安重根義士伊藤博文砲殺事件6回公判自身めて白南奎金基龍姜基淳曹順應黄吉炳姜斗瓚金天化8核心組織員とし、「客員としては鄭元植朴鳳錫柳致弘金白春4がった資料には嚴仁燮ペク·ウォンボハン·ジョンホ同盟員だったという記録があります全部15です

 

 

これらの名前実名ではなくほとんど仮名虚名です安重根義士拷問とともにわれた審問過程同盟員名前をまともに陳述しなかったためです

 

核心組織員8のうち本人いた7名前えたり漢字えたりした仮名です白南奎白圭三金基龍金起龍姜起順姜舜璣曹順應趙應順黃吉秉黃炳吉姜斗瓚姜昌斗金天化はカ葛化天名前変形させたものです

 

 

客員として言及した4のうち柳致弘実名推定されますが鄭元植朴鳳錫金白春鄭元柱朴錫鳳金乙嶺虚名推定されますこれらがであるかは把握されていません

 

また資料には嚴仁燮ペク·ウォンボハン·ジョンホなども斷指同盟員として記録されましたペク·ウォンボとハン·ジョンホはなのからされていませんが嚴仁燮する陳述っています

 

安重根予備審問嚴仁燮金起龍斷指同盟員ではないと否定しましたが実際金起龍斷指同盟員であり嚴仁燮もそうだった可能性いですただ厳仁燮庚戌国恥直後変節日本密偵変身独立運動きな害悪ぼしましたイエスの12弟子たちのでも裏切のガリョット·ユダがてきたのとじです

 

 

しかし同盟員独立運動けました白圭三先生抗日武装闘争中戦死黃炳吉先生沿海州中国独立運動琿春病死しました趙應順先生臨時政府軍資金していたところを逮捕され獄中生活りました

 

ただ同盟記念碑公園には安重根義士名前強調されていますが同盟員じように記憶されるべきでしょうしかしらの身元はおろからの名前さえらかにされていないのは残念なことですらの身元がすべてらかになるまでは同盟員としてげられてきた15をすべて記憶尊重する必要があるといます

 

 

そういうこの記念碑公園けられた15のムンウリこの15同盟員すものとみてもいいでしょう裏切のオ嚴仁燮までめてですね

 

 

最後斷指同盟正式名称同義斷指会であったこともえておく必要があります崔在亨(チェ·ジェヒョン)先生主導結成された同義会決死隊だったのです

 

 

崔在亨先生安重根義士伊藤博文狙撃支援しただけでなく安重根義士殉国したはその家族沿海州れて世話をしたとされています(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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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단지동맹 기념비 공원에 가지런히 배치된 묵직한 15개의 돌이 혹시 단지동맹원들을 가리킬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김구 선생의 일화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뭉우리돌이야기가 나옵니다. 일제가 7백여명의 애국자를 검거해 갖은 고문으로 105인 사건을 조작한 것을 가리켜 김구 선생은 왜놈들은 새로 산 밭(=조선)에서 뭉우리돌(=독립운동가)을 다 골라 버리고야 말려는 것이라고 서술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계속해서 뭉우리돌로 살아가리라 하고 굳게 결심했다고 덧붙였습니다.

 

 

뭉우리돌이란 모나지 않은 둥글둥글한 큰 돌을 가리키는 말인데,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들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 기념비 공원에서 본 15개의 돌들은 김구 선생의 말마따나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을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단지동맹원은 12명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 척살 사건의 6회 공판에서 자신을 포함해 백남규(白南奎), 김기룡(金基龍), 강기순(姜起順), 조순응(曹順應), 황길병(黃吉秉), 강두찬(姜斗瓚), 김천화(金天化) 8명이 핵심조직원이며 객원으로는 정원식(鄭元柱), 박봉석(朴鳳錫), 유치홍(柳致弘), 김백춘(金伯春) 4을 거명했습니다. 다른 자료에는 엄인섭(嚴仁燮), 백원보, 한종호도 동맹원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모두 15명입니다.

 

 

이 이름들은 실명이 아니라 대부분 가명이거나 허명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고문과 함께 진행된 심문과정에서 동맹원들의 이름을 제대로 진술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핵심조직원 8명 중에서 본인을 제외한 7명의 이름은 성이나 이름을 바꾸거나 한자를 바꾼 가명입니다. 백남규(白南奎)는 백규삼(白圭三), 김기룡(金基龍)은 김기룡(金起龍), 강기순(姜起順)은 강순기(姜舜璣), 조순응(曹順應)은 조응순(趙應順), 황길병(黃吉秉)은 황병길(黃炳吉), 강두찬(姜斗瓚)은 강창두(姜昌斗), 김천화(金天化)는 갈화천(葛化天)의 이름을 변형시킨 것입니다.

 

 

객원으로 언급한 4명 중에서 유치홍(柳致弘)은 실명으로 추정되지만, 정원식(鄭元柱), 박봉석(朴鳳錫), 김백춘(金伯春)은 정원주(鄭元柱), 박석봉(朴錫鳳), 김을령(?)의 허명으로 추정됩니다. 이들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또 다른 자료에는 엄인섭(嚴仁燮), 백원보(?), 한종호(?)” 등도 단지동맹원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백원보와 한종호는 누구인지 알려진 바 없지만, 엄인섭에 대한 진술은 엇갈립니다.

 

안중근은 예비심문에서 엄인섭과 김기룡은 단지동맹원이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실제로 김기룡은 단지동맹원이었고, 엄인섭도 그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엄인섭은 경술국치 직후 변절해 일제의 밀정으로 변신, 독립운동에 큰 해악을 끼쳤습니다. 예수의 12제자들 중에서도 배신자 가룟유다가 나왔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동맹원들은 독립운동을 이어갔습니다. 백규삼 선생은 항일 무장투쟁 중에 전사했고, 황병길 선생은 연해주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훈춘에서 병사했습니다. 조응순 선생은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전달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습니다.

 

단지동맹 기념비 공원에는 안중근 의사의 이름이 강조되어 있지만, 다른 동맹원들도 기억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들의 신원이 충분히 밝혀지지 않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때까지는 동맹원으로 거론되어온 15분을 모두 기억하고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기념비 공원에 마련된 15개의 뭉우리돌은 이 15명의 동맹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배신자 엄인섭까지 포함해서 말이지요.

 

 

끝으로 단지동맹(斷指同盟)의 정식 이름은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이었던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최재형 선생의 주도로 결성된 동의회(同義會)의 결사대였던 것이지요.

 

 

최재형 선생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지원했을 뿐 아니라,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후에는 그 가족들을 연해주로 모셔다가 돌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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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重根義士斷指同盟記念碑公園には説明碑記念碑のほか15ころが配列されています3行縦5べられたこの15ころは安重根義士らかにした伊藤博文殺害理由すそうです伊藤博文罪状りです

 

 

1.明成皇后殺害した; 2.高宗皇帝廃位した; 3.乙巳5条約丁未7条約強要した; 4.無罪韓国人虐殺した; 5.政権強奪した; 6.鉄道鉱山山林川沢強奪した; 7.日帝紙幣使用強要した; 8.軍隊解散した; 9.教育妨害された; 10.韓国人外国留学じた; 11.教科書押収してやした; 12.韓国人日本人保護けようと世界めた; 13.韓国日本争闘いており殺戮えないが太平無事であるかのように天皇をだました; 14.東洋平和った; 15.日本天皇·光明天皇した

 

 

安重根義士斷指同盟記念碑公園にこのようなころをべたのはいアイデアです伊藤博文されて当然理由説明する機会えるからですこれらのころをると伊藤博文罪状十五種類もあったのか?」というきとともにインターネットをさせてくれるからです

 

伊藤罪状安重根義士19091026伊藤砲殺して逮捕されたハルビンの日本総領事館関東都督府溝淵孝雄尋問けたらかにしたものだそうですこの目録韓國国史編纂委員会韓国独立運動史資料集63-4収録されていますがおそらく安重根審問調書直接参考にしたか朝鮮史編修会朝鮮史収録されているものでしょう

 

 

ところが当時世界各国新聞伊藤博文暗殺砲殺理由15記事にしましたシンガポールの英文新聞ストレーツ·タイムズ(The Straits Times)19091225掲載したハルビンの悲劇(The Harbin Tragedy)というタイトルの記事最近死亡した伊藤伯爵狙撃者する予備審問1116わりまもなく非公開裁判回付されるとし狙撃者予備審問らかにした伊藤した15理由のように報道しました

 

 

1.明成皇后殺害した; 2.190511韓国日本保護国にした; 3.1907丁未7条約強制的締結した; 4.高宗皇帝廃位した; 5.軍隊解散した; 6.のない々を虐殺した; 7.韓国人権利剥奪した; 8.韓国教科書やした犯罪; 9.韓国人新聞寄与させなかった; 10.日本紙幣強制的使用した; 11.韓国300ポンドの借金わせた; 12.東洋平和った; 13.韓国する日本保護政策糊塗した; 14.日本天皇光明天皇した; 15.日本世界をだました

 

 

ロシアの沿海州新聞辺境(Далекая окраина)掲載された伊藤博文罪状目録ストレーツタイムズ目録じですところが国史編纂委員会資料集目録当時外信目録にはいがあります順番うし内容います

 

外信目録には韓国られた目録5.政権強奪した」、「6.鉄道鉱山山林川沢強奪した」、「9.教育妨害した」、「10.韓国人外国留学禁止した」、「13.韓国日本争闘殺戮えないのに太平無事であるように天皇をだましたなどがけており、「7.韓国人権利剥奪した」、「9.韓国人新聞寄与できないようにした」、「11.韓国300ポンドの借金わせた」、「15.日本世界をだましたまれました

 

 

史料(1)いほど(2)現場事件いほど(3)客観的であるほど価値いです日帝審問調書日帝朝鮮史編修会議資料よりは外信報道価値のある史料でしょう

 

安重根義士斷指同盟伊藤博文砲殺100年以上前のことでクラスキーノ記念碑公園15ころが配置されてから10年以上ちましたところがこの15ころがすところがなのか確定していないというのは不幸なことです

 

 

韓国歴史学近代史研究はまだまだいようです(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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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단지동맹 기념비 공원에는 설명비와 기념비 외에도 15개의 돌덩이가 배열되어 있습니다. 가로 3행 세로 5열로 가지런히 배치된 이 15개의 돌덩이는 안중근 의사가 밝힌 이토 히로부미 척살 이유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고종 황제를 폐위한 죄; 3. 을사 5조약과 정미 7조약을 강요한 죄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5. 정권을 강탈한 죄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탈한 죄 7. 일제 지폐 사용을 강요한 죄 8. 군대를 해산한 죄 9. 교육을 방해한 죄 10. 한국인 외국유학을 금지한 죄;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운 죄; 12.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쟁투가 계속되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무사한 것처럼 텐노를 속인 죄; 14.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 15. 일본 텐노의 부친 코메이 텐노를 죽인 죄.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 기념비 공원에 이런 돌덩이를 나열한 것은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척살되어 마땅한 이유를 설명할 기회를 주기 때문입니다. 이 돌덩이들을 보면 열다섯 가지나 되었던가?” 하는 놀라움과 함께 인터넷을 찾아보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토의 죄상은, 안중근 의사가 19091026일 이토를 포살하고 체포된 뒤, 하얼빈의 일본총영사관에서 관동도독부 미조부치 타카오(溝淵孝雄)의 심문을 받을 때 밝힌 것이라고 합니다. 이 목록은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독립운동사 자료집> 63-4쪽에 수록되었는데, 아마도 안중근 신문조서를 직접 참고했거나,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에 수록된 것이겠습니다.

 

 

그런데 당시 세계 각국의 신문들도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보도했고, 척살 이유 15가지도 기사화 했습니다. 싱가폴의 영자신문 <스트레이츠 타임스(The Straits Times)>19091225면에 게재한 <하얼빈의 비극(The Harbin Tragedy)>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최근 사망한 이토 백작의 저격자에 대한 예비심문1116일 끝났고 곧 비공개 재판에 회부될 것이라면서, 저격자가 예비심문에서 밝힌 이토를 죽인 15가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보도했습니다.

 

 

“1.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190511월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죄; 3. 1907년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4. 고종황제를 폐위한 죄; 5. 군대를 해산한 죄; 6.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죄; 7. 한국인의 권리를 박탈한 죄; 8. 한국의 교과서를 불태운 죄; 9. 한국인들을 신문에 기여하지 못하게 한 죄; 10. 일본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11. 한국이 300만파운드의 빚을 지운 죄; 12.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13.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정책을 호도한 죄; 14. 일본텐노의 부친 고메이 텐노를 죽인 죄; 15. 일본과 세계를 속인 죄.”

 

 

러시아의 연해주의 신문 <머나먼 변방(Далекая окраина)>에 실린 목록도 <스트레이츠 타임스>의 목록과 같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집의 목록과 당시 외신의 목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순서도 다르고 내용도 조금 다릅니다.

 

외신의 목록에는 한국에 알려진 목록 중에서 ‘5. 정권을 강탈한 죄’,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탈한 죄’, ‘9. 교육을 방해한 죄, ‘10. 한국인의 외국유학을 금지한 죄’, ‘13. 한국과 일본 사이에 쟁투가 계속되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무사한 것처럼 텐노를 속인 죄등이 빠져있고, “7. 한국인의 권리를 박탈한 죄’, ‘9. 한국인들을 신문에 기여하지 못하게 한 죄’, ‘11. 한국에 300만 파운드의 빚을 지운 죄’, ‘15. 일본과 세계를 속인 죄가 포함되었습니다.

 

 

사료는 (1) 많을수록, (2) 현장과 사건에 가까울수록, (3) 객관적일수록 가치가 높습니다. 일제의 심문조서나, 일제 조선사편수회의 자료보다는 외신 보도가 더 가치 있는 사료일 것입니다.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과 이토 히로부미 척살이 1백년도 더 전의 일이고, 크라스키노 기념비 공원에 15개의 돌덩이가 배치된 지도 10년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이 15개의 돌덩이가 가리키는 바가 무엇인지 확정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한국의 역사학, 특히 근대사 연구는 갈 길이 아주 먼 것 같습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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グーグルの地図にはこの記念碑韓国語<安重根斷指同盟碑>説明されておりいてロシアでも<韓国歴史的記念物(Исторический памятник Кореи)>えました安重根義士名前はありませんが、「高麗歴史的記念物明示されたのはありがたいことです

 

 

グーグル地図には安重根斷指同盟碑中心半径5キロ以内韓国関連史跡3つもさらにありますには渤海土城には延秋下里クラスキノのには地新墟村がありますこの地域高麗人歴史的痕跡地域安重根義士団地同盟碑しくないようにえます

 

 

しかも189番国道沿ってもうハサンると道路鉄道交差する地点てきますがグーグル地図はこの交差点平壌鉄道表記しました豆満江鉄橋えて朝鮮行きの鉄道という意味でしょうが平壌ければソウルまでもけるし木浦釜山までもけるという意味です

 

 

安重根義士斷指同盟記念碑10メートル20メートルほどの長方形公園てられましたがユニベラ農場入口道路した公園枕元にはこの記念碑沿革した石碑てられていますこの碑石には韓国語ろにはロシア記念碑沿革叙述していますが内容じでした

 

 

190927安重根義士をはじめとする決死同志金起龍キム·ギリョン)、白圭三ペク·ギュサム)、黄炳吉ファン·ビョンギル)、趙応順チョ·ウンスン)、姜昌斗カン·チャンドゥ)、鄭元柱チョン·ウォンジュ)、朴鳳錫パク·ボンソク)、柳致弘(·チホン)金伯春(キム·ベクチュン)など12はここクラスキーノ(延秋下里)祖国独立東洋平和のためにただ同盟するらは太極旗げておいてそれぞれ左手無名指って生動する鮮血大韓獨立、「大韓国万歳三唱する光復会高麗学術文化財団20011018ロシア政府協力てこのてる

 

 

この説明碑てられた20011018だとったのをると記念碑めて建立された一緒てられた説明碑です記念碑てられた場所クラスキーノとしたのは事実とはなりますが括弧延秋下里明示することでしました

 

石板青銅板製作された説明碑外形輪郭きな水滴模様だがこれは12斷指同盟員ったにぽたぽたとちていた象徴するものとられますそして石板青銅12なったのをると同盟員12つにまとめて表現しました

 

 

説明碑から見下ろすと長方形公園かい中央記念碑えます記念碑つの部分構成されていますが主記念碑広開土大王碑えられた4メートルの大理石副記念碑説明碑主記念碑中間いててられたさな石碑です

 

 

主記念碑正面中央には安重根義士首印陰刻まれており前面下段には190935日頃/12まる二列まれていますところがただ同盟旗揚190935日頃ったのは疑問です

 

 

万古義士安重根伝桂奉禹(·ボンウ)1914923日付<勧業新聞>)』斷指同盟檀紀424227だとべていますがこれをグレゴリオ換算すると1909226帝政ロシアが使用していたユリウスでは1909213です説明碑擧事日27としたのは正確旧暦日付ですがいざ主記念碑日付はやや突飛です

 

 

副記念碑さとさがともに1メートルほどの大理石ですがその上段にも安重根義士手印陰刻されていて裏面下段には201184/102ぎた今日/12記憶するまれていましたこの日付記念碑2回目移転した除幕式った日付です

 

 

注記念碑副記念碑登場する"12"という表現意外です碑文をすべてハングルでいたのに12だけ漢文いた理由になりました(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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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지도에는 이 기념비가 한국어로 <안중근 단지 동맹비>로 설명되어 있고, 이어서 러시아어로도 <한국의 역사적 기념물(Исторический памятник Кореи)>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이름은 없지만 고려(Кореи)’의 역사적 기념물이라고 명시되었습니다.

 

 

또 구글 지도에는 <안중근 단지동맹비>를 중심으로 반경 5킬로미터 안에 한국 관련 사적이 3개나 더 있습니다. 남쪽에는 발해 토성, 북쪽에는 연추 하리가 있고, 카리스키노의 동쪽에는 지신허 마을이 있습니다. 이 지역이 고려인의 역사적 흔적이 많은 지역으로,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비가 외롭지 않아 보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189번 국도를 따라 조금 더 하산 쪽으로 내려가면 철도와 교차하는 지점이 나오는데, 구글 지도는 이 교차점에 평양으로 가는 철도라고 표기했습니다. 두만강 철교를 넘어 조선행 철도라는 뜻이겠는데, 평양에 갈 수 있으면 서울까지도 갈 수 있고, 목포와 부산까지도 갈 수 있다는 뜻이겠습니다.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 기념비는 가로 10미터 세로 20미터쯤의 장방형으로 조성된 공원에 건립되었는데, 유니베라 농장 입구의 도로에 면한 공원의 머리맡에는 이 기념비의 연혁을 서술한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 비석의 앞쪽에는 한국어, 뒤쪽에는 러시아어로 기념비의 연혁을 서술했는데, 내용은 같았습니다.

 

 

“190927일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결사동지 김기룡, 백규삼, 황병길, 조응순, 강순기, 강창두, 정원주, 박봉석, 유치홍, 김백춘, 김천화 등 12인은 이곳 크라스키노(연추하리) 마을에서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단지동맹하다. 이들은 태극기를 펼쳐놓고 각기 왼손 무명지를 잘라 생동하는 선혈로 대한독립이라 쓰고 대한국 만세를 삼창하다.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은 20011018일 러시아 정부의 협조를 얻어 이 비를 세우다.”

 

 

이 설명비가 세워진 날이 20011018일이라고 한 것을 보면 기념비가 처음 건립되었을 때 함께 세워진 설명비입니다. 기념비가 세워진 곳을 크라스키노라고 한 것은 사실과 다르지만 괄호 속에 연추하리라고 명시함으로써 바로잡았습니다.

 

돌판과 청동판으로 제작된 설명비의 외형 윤곽이 커다란 물방울 모양인데, 이는 12인의 단지동맹원들이 손가락을 잘랐을 때 뚝뚝 떨어지던 핏방울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돌판과 청동판 12개가 겹쳐진 것을 보면 동맹원 12명의 핏방울을 한데 모아 표현했습니다.

 

 

설명비에서 내려다보면 장방형의 공원 맞은편 중앙에 기념비가 보입니다. 기념비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 기념비는 광개토대왕비 모양으로 다듬어진 높이 4미터의 검은 대리석이고, () 기념비는 설명비와 주 기념비의 중간에 왼쪽으로 비껴 세운 작은 비석입니다.

 

 

주 기념비의 정면 중앙에는 안중근 의사의 수인(手印)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고, 전면 하단에는 “190935일경/ 12()이 모이다라고 두 줄로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단지동맹 거사일을 190935일경이라고 한 것은 의문입니다.

 

 

<만고의사 안중근전(계봉우, 1914923일자 권업신문)>은 단지동맹일이 단기 424227일이라고 서술했는데, 이를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면 1909226, 제정 러시아가 사용하던 율리우스력으로는 1909213일입니다. 설명비에 거사일을 27일이라고 한 것은 정확한 음력 날짜이지만, 정작 주 기념비의 날짜는 다소 엉뚱합니다.

 

 

한편 부()기념비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모두 1미터 쯤의 검은 대리석인데, 부기념비의 상단에도 안중근 의사의 수인이 음각되어 있고, 뒷면 하단에는 “201184/ 102년이 지난 오늘/ 12을 기억하다라고 세 줄로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날짜는 기념비를 두 번째 이전한 후 제막식을 가진 날짜입니다.

 

 

주기념비와 부기념비에 등장하는 “12이라는 표현도 뜻밖입니다. 비문을 모두 한글로 썼으면서도 12인의 인()자만 한문으로 쓴 까닭이 궁금했습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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キム·ヴァレリアキム·バレンチン先生夫妻一緒貸切バスに乗車した一行ウスリスクで出発する独立運動史跡地訪問しました安重根義士斷指同盟記念碑です

 

 

この記念碑はクラスキーノから朝鮮-ロシアの国境地帯であるハサンに189番国道沿って西3キロほどに位置しましたが韓国企業ユニベラの農場にあります

 

この記念碑200110光復会高麗学術文化財団共同クラスキノ5キロ地点のツカノヴォ(Цуканово)入口てられましたが近隣れる延秋河(Янчхэ)頻繁氾濫記念碑損傷流失すると200711ウラジオストク総領事館韓国企業ナムヤンアロエが協力してクラスキノ外郭記念碑しました

 

 

しかしこの地域もロシア国境守備隊作戦区域編入され事前許諾なしに記念碑訪問できなくなると20118記念碑拡大補修現在位置移転しました

 

安重根アン·ジュングン記念碑めて設置されたツカノヴォは清朝期から1937高麗人強制移住以前イェンチウ延秋)」ばれていましたこの地域れる延秋河んだ名前だそうですが延秋河延秋んでいる可能性もあるでしょう

 

 

イェンチウの漢字表記延秋, 烟秋, 煙秋などといますが発音はすべてじです1860北京条約沿海州がロシアに割譲されたイェンチウはシモノヴォ(Симоново)というロシアの名前わりましたが(Сим-)しく(-ново)土地という意味だったといます

 

1864地新墟移住めた高麗人人口えると1868からシモノヴォ地域移動定着村をつくり高麗人はこれを延秋めました現在名称がロシアでもヤンチヘ(Янчихe)として定着したのは高麗人慣行のおかげだったといます

 

 

高麗人増加延秋3つの拡張され上延秋中延秋下延秋ばれましたが1937強制移住以降·中延秋閉鎖されのツカノヴォは下延秋にロシアけながら維持されたです下延秋延秋下里ばれることもありました

 

安重根義士斷指同盟記念碑最初にツカノヴォにてられたのはそこが斷指同盟現場だからです1905乙巳勒約日本侵略露骨化すると安重根義士愛国啓蒙運動1907大韓帝国軍隊解散した江原道黄海道義兵活動展開しましたが限界結局沿海州延秋村亡命そこで義兵運動じました

 

 

沿海州義兵長·全帝翼右営将地位にあり19087100人余りの部隊員いて豆満江咸鏡北道景興郡蘆面進撃日本軍守備隊全滅させましたいて景興郡新牙山付近日本軍交戦戦果げたりもしましたがらえた日本軍捕虜国際公法により釈放したためこの捕虜たちの情報提供安重根部隊位置発覚義兵部隊全滅沿海州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

 

 

その安重根はブラゴスロベンノイェ(四萬里)からスチャン(水清パルティザンスク)るまであまねくりながら義兵運動こそうとしましたが失敗しました捕虜解放事件彼自身信任国内進撃失敗沿海州武装闘争熱気めたためです

 

このような雰囲気一新するためにみたのがただの斷指同盟です190927陽暦226)、安重根をはじめとする熱血独立運動家12延秋下里村まり左手薬指一緒って独立運動げることをったのです

 

 

当時盟員たちは3年以内伊藤博文李完用殺害できなければ自分たちが自決するという覚悟って太極旗大韓獨立だといていました

 

 

この太極旗でもわっていてたちがれたクラスキーノの斷指同盟記念碑まさにその歴史記念するために建立されたものでした(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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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레리아, 김발렌친 선생 부부와 함께 전세버스에 승차한 일행은 우수리스크로 출발하기 전에 독립운동 사적지를 먼저 방문했습니다.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 기념비입니다.

 

 

이 기념비는 크라스키노에서 조선-러시아 국경지대인 하산으로 가는 189번 국도를 따라 서쪽으로 3킬로미터쯤에 위치했는데, 한국 기업 유니베라의 농장 앞에 있습니다.

 

이 기념비는 200110월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공동으로, 크라스키노 북쪽 5킬로미터 지점의 츠카노보(Цуканово) 마을 입구에 세워졌으나, 인근을 흐르는 옌치허(Янчихэ) 강의 잦은 범람으로 기념비가 손상되고 유실되자, 200711월 블라디보스톡 총영사관과 한국 기업 남양알로에가 협력하여 크라스키노 시의 북쪽 외곽으로 기념비를 옮겼습니다.

 

 

그러나 이 지역도 러시아 국경수비대의 작전구역에 편입되어, 군의 사전 허락 없이 기념비를 방문할 수 없게 되자, 20118월 기념비를 확대 보수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습니다.

 

안중근 기념비가 처음 설치됐던 츠카노보는, 중국 청나라 시기부터 1937년의 고려인 강제이주 이전에는 옌치우(延秋, 연추)라고 불렸습니다. 이 지역을 흐르는 강, 옌치허(延秋河)를 딴 이름이라고 하지만, 옌치허가 옌치우를 따랐을 수도 있겠지요.

 

 

옌치우의 한자 표기가 延秋, 烟秋, 煙秋 등으로 다르기는 한데, 발음은 모두 옌치우입니다. 1860년의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가 러시아에 할당된 뒤 옌치우는 시모노보(Симоново)라는 러시아 이름으로 바뀌었는데, 지금(Сим-) 새로(-ново) 얻은 땅이라는 뜻이었을 겁니다.

 

1864년 지신허로 이주하기 시작한 고려인들의 인구가 늘자 1868년부터 시모노보 지역으로 이동해 정착촌을 만들면서 고려인들은 이를 다시 연추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의 이름이 러시아어로도 얀치헤(Янчихe)로 굳어진 것은 고려인들의 관행 덕분이었을 것입니다.

 

 

고려인이 더 증가하면서 연추는 3개 마을로 확장되어, 상연추, 중연후, 하연추라고 불렸는데, 1937년의 강제이주 이후 상, 중연후는 폐쇄되고, 지금의 츠카노보는 하연추에 러시아인들이 계속 거주하면서 유지된 마을입니다. 하연추는 연추 하리(下里)라고 불리기도 했더군요.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 기념비가 처음에 츠카노보에 세워진 것은 그곳이 단지동맹의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안중근 의사는 애국계몽운동에 뛰어들었고,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후에는 강원도와 황해도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했으나 한계를 느끼고 결국 연해주 연추 마을로 망명, 그곳에서 의병운동에 투신했습니다.

 

 

그는 연해주의 의병장 전제익(全濟益)의 휘하에서 우영장(右營將)의 지위로 19087월 휘하 1백여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으로 진격, 일본군 수비대를 전멸시켰습니다. 이어서 경흥군 신아산 부근에서 일본군과 교전해 전과를 올리기도 했으나,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를 국제공법에 따라 석방하는 바람에, 이 포로들의 제보로 안중근 부대의 위치가 발각되어 의병 부대가 전멸, 그는 다시 연해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이후 안중근은 블라고슬로벤노예(四萬里, 사말리)에서 수찬(水淸, 파르티잔스크)에 이르기까지 두루 다니면서 다시 의병운동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포로 석방 사건으로 그 자신도 신임을 잃었고, 국내 진격의 실패로 연해주의 무장투쟁 열기가 식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 시도한 것이 단지동맹(斷指同盟)입니다. 190927(양력 226) 안중근을 비롯한 열혈 독립운동가 12명이 연추 하리 마을에 모여 왼손 약지 손가락의 끝마디를 함께 자르면서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한 것이지요.

 

 

당시 맹원들은 3년 내에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을 척살하지 못하면, 자신들이 자결한다는 각오를 다졌고, 손가락을 잘라 솟구치는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이라고 썼습니다.

 

 

이 태극기는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고, 우리가 방문한 크라스키노의 단지동맹 기념비는 바로 그날의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것이었습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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