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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세계일 정체성>: ‘조선일일본일을 넘어서

 

19333월 최승희는 두 번째 도일 후 다시 이시이바쿠 무용단의 일원으로 무용 활동을 재개했다. 이 시기는 최승희가 조선무용을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평전들은 19335월의 <여류무용가대회>에서 발표된 <에헤야 노아라>를 그 효시로 보고 있다.

 

이후 최승희의 신작무용작품들 중에서 조선무용이 차지하는 비중은 급속히 높아졌고 <승무(1934)><검무(1934)>, <가면춤(1935)><조선풍의 듀엣(1935)> 등은 최승희의 대표작이 되었다. <서정시(리릭포엠, 1934)><희망을 안고서(1934)>, <길을 잃은 사람(1935)><마음의 흐름(1935)> 등의 현대무용 작품들도 일본 관객들의 찬사를 받았으나 압도적인 찬사는 조선무용에 쏟아졌다.

 

19341월 카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938:210)최승희가 일본일(日本一)”이라고 선언한 이래 최승희는 자타가 공인하는 일본 최고의 서양식 예술무용가로 떠올랐고, 막 결성되어 활동을 시작한 대규모의 화려한 소녀가극단에 못지않은 높은 인기를 누리는 무용가로 꼽혔다.

 

일본의 문호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일찌감치 최승희를 '일본일'의 신무용가로 선언했었다.

 

그러나 최승희의 목표는 일본일이 아니라 세계일(世界一)이었다. 1926년 이시이 바쿠의 제자 시절부터 최승희의 목표는 인도의 우다이 샹카르와 스페인의 아르헨티나와 같은 세계적인 무용가”(서만일, 1957(10):71)였고, 도쿄를 방문한 안나 파브로바, 이사도라 던컨, 마리 비크만 등의 정상급 무용가들이 추는 춤을 보고 무용적 움직임과 표현의 특색을 연구했다. (정병호, 1995:38). 1927년 경성공연에 참가했을 때도 일본에서 더 많은 실력을 쌓아 세계적인 무용가가 될 결심을 굳혔다(김찬정, 2003:50).

 

최승희는 19315월 안막과 결혼할 때도 세계 제일의 무용가가 되고 싶다고 자신의 포부를 털어놓았고(다카시마 유자부로, 1981:35; 강이향, 1993:87), 19333월 자존심을 접고 다시 이시이바쿠 문하로 들어간 것도 세계적 무용가가 되려면 도쿄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인식 때문이었다(정병호, 1995:72). 최승희는 19354월 자전적 영화 <반도의 무희(1936)>의 대본작가 유아사 가츠에(湯淺克衛)에게 저는 반드시 세계 제일의 무용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유아사 가츠에, 1952: 175). 최승희는 자신이 세계일이 되고 싶었을 뿐 아니라 딸 안승자가 엄마보다 더 훌륭한 무용가가 되어 세계를 돌아다니며 세계 제일의 무용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까지 가졌다(다카시마 유자부로, 1981:71).

 

 

1930년대 중반, 최승희는 예술과 예능의 부문을 통틀어 가장 인기있는 일본일의 예술가였다.

 

최승희의 세계일 열망은 다른 사람들도 인정했다. 최승희의 <1회무용발표회>를 취재한 <신동아>기자는 최승희가 일본의 무용가로서만이 아니라 머지않아 세계의 무용가로서 활동할 것을 확신한다고 보도했고, 잡지 <개조>의 사장 야마모토 사네히코(山本實彦)19353월 대학을 졸업한 안막에게 최승희는 세계적인 무용가가 될 소질을 가지고 있으니 당신은 소설가가 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최승희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하면서 최승희를 후원하기 위해서는 사상운동에서도 손을 씻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설득했다(김찬정, 2003:137). 잡지 <백광(19374월호)>의 기자도 최승희여사 신문기라는 인터뷰 기사에서 최승희를 세계의 무희라고 불렀고, 야마모토 사네히코도 <삼천리(193512월호)>세계적 무희 최승희에게 전하는 말이라는 글을 기고했었다.

 

최승희의 세계일(世界一) 열망은 그가 가진 <조선인 신여성 예술가>라는 정체성에 바탕을 두었다. 그가 조선무용에 매진하고, 신무용의 요소를 가미한 것도, 오락과 연예로 빠지지 않고 예술무용에 정진한 것도 세계일열망을 실현하기 위한 토대가 되어 주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은 일본을 이기는 방법으로 세계일을 추구하곤 했다. 조선인들이 마라톤의 손기정과 남승룡, 권투의 서정권 등에 열광한 것도 세계일에 도전했거나 이뤄냈기 때문이었다. 최승희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세계일의 무용가가 되는 것이 일제의 차별을 보란 듯이 비웃어줄 유일한 방법이었다. 최승희가 자타가 공인하는 일본일의 무용가로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면서도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 순회공연을 시도한 것도 바로 이같은 민족정신이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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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취적인 <신여성 정체성>

 

가족과 관객과 평론가들에 의해 벌거벗고 춤춘다고 요약된 신무용이 발전은커녕 제대로 전개되기도 어려웠으므로 이는 최승희의 공연 활동에 난관이었고 그의 창작활동을 위축시켰다.

 

193110월호 <삼천리>에서 최승희는 민요의 예술화를 추구하고 싶지만 재정이 없어 스튜디오 유지조차 어렵다고 고백했다. “그만치 명성이 높은 터에 7-8백원의 돈도 최승희양을 위해 던지는 분이 없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최승희는 대답했다. “있다면 있다고도 하겠지요. 그러나 그런 분들은 어디 예술무용을 잘 자래우기 위하여 주어야 말이지요. 그런 분들은 대개 딴 목적이 있대요. 저는 싫어요.” 딴 목적이란 <신여성 예술가>의 성적 대상화였다.

 

귀국 직후인 192911월 최승희는 고시정 19번지의 일본인의 저택을 빌어 첫 무용연구소를 설립했지만, 반년도 안 되어 19304월에 옥천동 65번지로, 19306월 필운동(번지 미상)으로, 19309월에는 적선동 195번지로, 19315월에는 서빙고로(정병호, 1995:59) 무용연구소를 옮겨야 했다.

 

1929년 11월28일의 <동아일보>에 실린 적선동 소재 무용연구소를 소개한 기사.

 

스승 이시이 바쿠가 1924년 무사시사카이에 무용연구소를 설립, 1928년 지유가오카로 확대 이전한 후 약 30년 동안 한 곳에서 신무용의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경성의 최승희 무용연구소는 약 3년 동안 5군데나 옮겨 다녀야 했던 것이다.

 

최승희에게도 패트론을 자처한 부호들이 있었지만 재정지원의 댓가로 신여성 예술가 최승희를 애인이나 첩으로 삼고자 했고, 최승희는 그런 제안을 수락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과 자신의 예술에 대한 성적 대상화를 중단시키는 유일한 방법으로 최승희는 안막과의 결혼을 단행했다. 남편 안막은 최승희의 무용 활동을 재정으로 지원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미혼 신여성 무용가의 성적 대상화를 저지시켜 주었다.

 

안막과의 결혼 후에도 최승희는 무용가로서의 직업 활동을 중단하지 않았고, 딸 안승자의 출산 이후 남녀평등에 대한 확실한 견해를 갖게 되었다. 이는 또 1930년대 새로 대두된 현모양처라는 여성의 역할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다. 가부장제의 남존여비와 여필종부가 설득력을 잃었지만 신여성의 사회활동과 자유연애도 역시 부정되는 가운데 제기된 현모양처의 역할은 가부장제가 신여성을 포섭하려는 어정쩡한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최승희와 딸 안승자. 최승희는 딸에게 '남자를 이기라'는 뜻의 이름을 직접 지어 주었다.

최승희는 결혼과 출산, 그리고 지속적인 무용 활동을 통해 그의 <신여성 정체성>을 독특하게 확립했음을 알 수 있다. 봉건적인 가부장제의 여필종부와 신여성의 자유연애를 모두 거부했고, 여성을 가정에 가두려는 현모양처 요구에도 머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승희는 자신과 신무용을 성적 대상으로 이해하는 가부장제 관행도 거부했지만, 가부장제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성적 방종을 채택한 자유주의적 신여성도 비판했다.

 

딸을 출산했을 때 최승희는 아들보다 낳은 딸이라는 뜻으로 승자(勝子)라는 이름을 지었는가 하면, 예술 활동을 중단해야할 경우 시부모를 모시는 평범한 여성으로 돌아갈 각오도 내비쳤다. 남녀평등, 나아가 여성우월의 태도는 전통적 여성상과 구별되었지만, 시부모를 모시는 며느리가 되려는 결심은 신여성과 매우 다른 태도였다.

 

최승희가 독특한 <신여성 정체성>을 갖게 된 것은 자신의 가부장들로부터 받았던 전폭적인 지원 덕분일 것이다. 부친 최준현은 딸인 최승희에게 신교육을 받을 수 있게 했고, 큰오빠 최승일은 최승희에게 신사상의 정신적 자양분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를 예술가의 길로 이끌어 주었다. 스승 이시이 바쿠는 남녀 차별과 민족 차별 없이 최승희를 예술가로 교육시켰고, 자유연애가 아니라 중매결혼을 통해 맺어진 남편 안막은 자신의 경력을 희생하면서 최승희의 무용 활동을 지원했다.

 

가부장들로부터 이같은 특별한 지원을 받은 최승희의 <신여성 정체성>은 가부장제에 대한 저항과 대결의식이 특징이었던 일반적 <신여성 정체성>과 달랐다. 최승희의 <신여성 정체성>은 가부장들의 지원에 힘입어 자신감과 진취성을 가졌던 것이 특징이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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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여성 정체성>: 선망과 경멸의 대상

 

유학을 끝낸 최승희는 19298월 조선으로 돌아왔다. 18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조선인 정체성><예술가 정체성>으로 무장되어 있었고 자신의 이름이 걸린 무용단을 설립한 최승희에게는 또 하나의 정체성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여성 정체성>이었다.

 

조선의 신여성 현상은 1910년대에 여성교육운동에서 시작되어 1920년대 일제의 문화통치정책으로 조성된 자유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 여성의 사회 활동 참여로 활발해 지고 있었다. 신여성들은 신학문, 단발과 양장 등의 외양으로 나타난 신문화와 가부장제에 대항하는 남녀평등과 자유연애 등의 신사상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이들은 일본의 관행을 따라 흔히 모던걸이라고 불렸다.

 

새로운 능동적 주체를 지향한 신여성은 <신여자>, <신여성> 1920년대의 여성 잡지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펴는 한편, 학문과 교육,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선구적 신여성으로 김일엽, 김활란, 나혜석, 박인덕, 유각경, 허영숙 등이 꼽힌다. 최승희는 이들의 뒤를 이어 1920년대 말부터 신여성의 대열에 합류한 셈이다.

 

 

신여성은 젊은 세대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기성세대에게는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위험요소였다. ‘신여성에 대한 반발은 부정적 낙인찍기로부터 시작되었다. 신여성은 (1) 허영과 사치에 물든 반사회적존재이자 (2) 육아와 가사 노동을 부정하는 반가정적존재로 묘사되었다. 전자는 신여성들이 단발과 양장, 하이힐과 화장품으로 대표되는 서구문물을 수용했기 때문이었고, 후자는 남녀평등을 주장하며 직업 활동에 뛰어드는 한편 자유연애와 연애결혼을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신여성에 대한 부정적 편견은 학문과 문필에 종사하는 신여성에게도 부여되었으나, 신여성 예술가, 특히 공연예술가들에게는 가혹했다. 여성 연극인과 영화배우, 무용가는 과거 봉건적 사회질서 속에서 기생과 재인 등 천민들이 담당했던 직종이었기 때문이었다.

 

최승희의 유학기간이었던 1920년대 후반 일본에서는 여학생이나 여성 예술가, 특히 여성 무용가에 대한 낯선 눈길은 거의 사라졌다. 일본의 개국(1858)과 메이지유신(1868)으로 신문명을 받아들인 지 이미 두 세대가 지났고, 여성교육과 신예술이 보편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선 사회는 신여성을 대하는 태도가 사뭇 부정적이었다. 개국과 근대화가 강제적이었던 만큼 반외세, 반일감정과 결합된 봉건적 가부장제의 저항이 심했기 때문이다. 특히 신여성의 자유연애와 연애결혼은 정조관념 부재와 성적 타락으로 강한 비난을 받았다.

 

 

이같은 사회분위기 속에서 여성 무용가는 신여성으로 범주화되어 젊은 세대와 일부 인텔리계층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기성세대에게는 비난의 대상이었다. 젊은 세대의 선망은 무용 활동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기성세대의 비난은 큰 방해가 되었다.

 

유학시절 딸을 기생으로 팔아먹었다는 비난을 견디며 훌륭한 무용가가 되어 돌아오라는 편지를 보낼 만큼 인식의 변화를 보였던 최승희의 모친조차 정작 최승희의 경성 공연을 관람하고 무대에서 내가 반라의 모습으로 공중 앞에 나타나 춤추는 것을 심한 굴욕으로 여기시고, 부끄럽고 체면이 구겨진다고 느끼곤 했을 정도였다.

 

가족의 인식이 이 정도였으니 일반 관객들은 두말할 나위 없었다. 19309월호의 <별건곤>에 실린 기고문에서 최승희는 무용 여하보다 반나체로 뛰어 나오는 최승희를 보고자 모이는 분이 많다고 했고, 193119일의 <매일신보>도 최승희의 무용이 관심을 끄는 것이 예술을 찬미함이 아니라 벌거벗고 춤춘다는 것때문이라고 서술했다.

 

무용에 대한 이정도의 사회 인식이 팽배한 가운데 신무용 활동을 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처음 몇 번의 공연은 일본인들과 일본을 통해 개화의 물을 먹은 인텔리들의 후원으로 제법 성황을 이루었으나, 시간이 가면서 일반 대중의 관람은 줄어들었다. ‘반나체로 뛰어 나오는공연을 자기들의 예술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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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무용과 예능무용 사이에서

 

최승희가 새롭게 내면화한 <예술가 정체성>은 이내 도전에 직면했다. 한 가지 도전은 조선에서 날아왔다. 조선의 관행에 따르면 이란 기생의 할 일이었다. 최승희는 근대도시 도쿄에서 신무용에 정진하고 있었으나 경성의 조선인들의 눈에는 그저 기생의 일뿐이었다. 유학시절 최승희가 받은 모친의 편지가 그 점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여기(=경성) 사람들은 최씨 가문의 살림이 곤란하게 된 끝에 소중한 딸을 기생으로 팔아 버린 것이라는 말들을 하고 있단다. 그런 말들은 살을 베는 것처럼 나를 괴롭힌단다. 하지만 언젠가 사람들의 소문이 터무니없는 것임을 알게 될 날이 오겠지. 너는 꼭 훌륭한 무용가가 되어서 이 더러운 소문을 내는 사람들이 후회하도록 해주기 바란다.

 

모친의 기대는 어그러지지 않았다. 최승희의 예술에 대한 이해는 깊어졌고 자신을 예술가로 동일시하는 수준은 대단히 높아졌다. 3년 반이 지나 무용수업이 끝나갈 무렵의 최승희의 눈에는 그의 스승 이시이 바쿠의 예술조차 정체된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은 무용을 시작한 지 3년이 지난 어느 날나는 너에게서 이런 편지를 받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면서 <나의 자서전(1937)>에 이렇게 썼다.

 

1927년경 무사시사카이의 이시이바쿠무용연구소에서 최승희는 스승 이시이 바쿠의 지도아래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해 가고 있었다.

 

오빠, 저는 요사이 무용예술이란 어떤 것인가와 예술가의 양심이라는 것을 깨달아갑니다. 그것은 이런 데서 발견됩니다. 석정 선생님이 처음 독일에서 돌아와 야마다 코사쿠(山田殺作)씨의 반주로 안무된 작품과 요사이 만드는 작품의 차이가 왜 그다지도 정신과 감홍이 다릅니까? 저는 차차 석정 선생님에게 환멸을 느껴갑니다. 요사이 그의 예술에는 시가 없어요. 그것도 결코 무리는 아닙니다. 그는 춤을 추어서 수십 명의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합니다. 집이 없으니 집을 지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는 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요즘 제 마음은 마치 관솔불처럼 활활 타오릅니다.”

 

새로 접한 예술에의 열의에 사로잡힌 최승희의 관찰은 옳았을 것이다. 분주한 생활 속에서 이시이 바쿠 작품의 예술성은 저하되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최승희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이시이 바쿠의 예술성이 일시적으로나마 저하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였다.

 

1920년대 일본의 대중문화는 꽃피었다. 인쇄발달로 책과 잡지, 축음기의 발달로 노래와 음악이 발달하면서 통속화되기 시작했다.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무르익고, 경제가 여유로워지는 가운데, 문화는 에로그로난센스의 통속화 경향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무용도 예외가 아니었다. 예술무용의 시대가 가고 예능무용의 시대가 온 것이다.

 

예능무용은 1913년 다카라즈카 창가대의 발족으로 시작되었지만, 1919년 다카라즈카소녀가극단(寶塚少女歌劇団)이 결성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24년에는 다카라즈카 대극장이 완성되면서 쇼 비즈니스는 본격 궤도에 올랐고, 1927년에는 일본 최초의 레뷔(Revue)로 꼽히는 <몬파리(モン・パリ)>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예능무용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다카라즈카소녀가극단(1919)과 쇼치쿠소녀가극단(1928)은 1920년대와 30년대의 쇼비지니스의 양상을 바꿔놓았고, 예술무용은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사진은 1930년 8월 다카라즈카 대극장에서 열린 다카라즈카소녀가극단 츠키구미(월조)의 공연 파리세테(Paris-Sette).

 

1928년에는 쇼치쿠소녀가극단(松竹少女歌劇団)이 결성되어 다카라즈카소녀가극단과 함께 경쟁적으로 1930년대의 쇼 비즈니스를 주도했다. 예능무용이 성행할수록 예술무용은 위축되었고, 소녀가극단이 성행할수록 예술무용단의 흥행은 저조해졌다. 이시이 바쿠는 무용단을 유지하고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수입을 유지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도쿄에서뿐 아니라 지방 공연을 늘려야 했고, 그럴수록 창작을 위한 시간과 열정은 줄어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최승희는 조선 기생의 길을 피하며 예술의 길을 걸었으나, 예술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무렵 예능의 거센 물결에 직면해야 했다. 그러나 1929년 당시만 해도 최승희는 이같은 대중문화계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했고, 이를 단지 이시이 바쿠의 예술성이 시들고 있다고 판단해 무용 유학의 계약기간 만료를 기회로 이시이 바쿠의 문하를 떠나 조선으로 돌아왔다.

 

비록 현실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이때의 최승희는 <조선인 정체성>과 함께 <예술가 정체성>으로 단단히 무장되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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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술가 정체성: 기생과 가극단 사이에서

이시이 야에코의 증언

 

최승희는 19263월 숙명여학교 졸업과 동시에 무용에 입문, 3년 반의 일본 무용유학을 시작했다. 이 시기에 최승희는 처음으로 식민 모국 일본 사회와 조우했고, 조선인에 대한 제도적, 일상적 차별을 받았고, 그로 인해 숙명여학생으로서 다져왔던 <조선인 정체성>에 상처를 받았다. 자존심이 강한 최승희는 그 같은 상처를 글로 남긴 적이 없지만, 스승 이시이 바쿠의 아내 이시이 야에코(石井八重子)생각날수록 보고 싶은 최승희라는 제목의 회고록에서 최승희가 상처받았던 세 사건을 기록해 놓았다.

 

첫 사건은 최승희가 일본 유학을 위해 필요한 도항허가증을 받기 위해 <경성일보>의 마츠오카 사장 저택을 방문했을 때 일어났다. 이시이 야에코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 무렵 마츠오카 요코씨의 아버지가 <경성일보>의 사장을 맡았는데 그분이 (최승희의) 보증인이 되어주어서 그 댁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최승희씨도 오빠(=최승일)와 함께 방문했습니다. ... 요코 씨는 그 당시에 일곱 살짜리 소녀였는데, 아버지가 '요코야, 서울의 조선인 생활에 대해 말해 보아라'고 하니까, 그녀는 어린 마음에 느낀 대로 조선인들에 대한 나쁜 말을 했습니다. 최승희씨가 굉장히 불쾌했던 것 같고, 저도 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시이 야에코, “생각날수록 보고 싶은 최승희”)

 

스승 이시이 바쿠의 부인 이시이 야에코는 일본 유학 기간 최승희가 민족적 자존심을 상했던 경우가 여러번 있었다고 기술했다. 

 

최승희의 민족의식이 관찰되었던 두 번째 사건은 도쿄에서 이시이 무용단 학생들이 모리나가 제과공장을 방문했을 때 발생했다. 이에 대해 이시이 야에코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것은 최승희씨가 여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이므로 다이쇼 15(=1926) 봄이었습니다. 당시 유행 중 하나가 명사 일행을 모리나가 제과 공장에 초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있던 곳에서도 최승희 씨 등을 데리고 간 적이 있습니다. 모리나가 공장은 시나가와 쪽에 있었고, 그 때 여기저기 비스킷을 만드는 곳으로 우리를 안내해 주었습니다. 한 방으로 들어갔을 때 안내원이 이건 중국이나 조선쪽으로 가는 비스킷이고, 대놓고 말할 수는 없지만 집을 만들 때 쓰는 벽돌가루를 섞어서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최승희씨는 굉장히 싫은 얼굴을 했고, 당연히 나도 마 아이야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리나가 제과 안내인의 말은 농담이었거나 적어도 사실은 아니었을 것이다. 조선으로 보내는 비스킷을 사먹는 사람도 대부분 일본인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중국 수출품에 벽돌가루를 섞는다는 것은 모리나가 같은 대기업이 취할 영업 관행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공장 견학의 안내인이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일본 사회에는 조선과 중국을 얕잡아보는 인식이 퍼져 있었고, 일본인들끼리는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승희가 부정적인 감정을 보였던 것은 모리나가 제과의 관행 때문이라기보다 일본인들의 차별의식에 대한 것이었을 것이다.

 

도쿄유학(1926년) 초기 모리나가제과의 비스킷 공장에서 민족차별 언사를 들은 적이 있었으나, 1934년 모리나가 제과의 모델로 활동했다.

 

세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사건은 최승희가 다이쇼 천왕의 영구열차에 절하기를 거부했던 사건이다. 이때의 일에 대해 이시이 야에코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 후 점점 연습에 익숙해져서 반년도 지나지 않았을 무렵, 다이쇼 천황이 서거했습니다. 우리 집은 무사시사카이 역 바로 옆이었기 때문에, 다이쇼 천황의 장례식 열차가 지나갈 때 우리는 모두 나가 절을 했습니다. 그런데 최승희 씨만은 고개를 뒤로 돌리고 절을 안 해요. 집에 돌아왔을 때 이시이가 말했습니다. ‘왜 승희는 절을 안 했느냐고 했더니, 최승희는 우리나라를 괴롭힌 가장 높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뜻으로 말했습니다.

 

"우리는 깜짝 놀랐지만, 이시이가 눈시울을 닦는 모습을 저는 보았습니다. 그때도 최승희 씨는 일본이 자기 나라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지 못했고 그만큼 강한 민족적인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최승희 씨에게 특히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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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녀회와 양명회

 

숙명여학교가 대한제국 고종의 황귀비 엄씨(皇貴妃嚴氏, 1854-1911)가 설립한 학교로, 교원과 학생들의 조선인으로서의 자존심과 자부심이 높다는 점은 조선 합병 전부터 일본 통감부의 염려사항이었던 것 같다.

 

1907318일의 <황성신문>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1850-1924) 조선군 사령관이 명신귀족여학교의 조황(條況)을 친찰(視察)하고 학도의 성적이 극히 양호함을 대찬(大讚)하고, 15원금을 보조하여 장학하면서 엄귀비 전하께서 근학(勤學)하시는 성의를 찬양했다고 보도했다. 조선군 사령관이 여학교를 시찰한 목적이 장학일 리 없었고, 합병 저해세력을 정탐한 것이리라.

 

실제로 대한제국 황실과 숙명여학교는 매우 가까웠다. 엄귀비는 학교 이름이 명신에서 숙명으로 바뀔 때 친필 휘호를 써주었고, 1907년 퇴위한 고종이 덕수궁에 머무를 때도 숙명학생들은 수동남문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고종과 엄귀비는 수시로 숙명여학교 학생들에게 학용품과 과자를 선물했고 교사 위로 연회를 열었다. 졸업식과 운동회와 원족 때마다 금일봉과 선물을 내렸는데, 날이 덥다며 부채 1백 개를 하사한 적도 있었다. 고종과 엄귀비의 생일이면 숙명학생들이 손으로 만든 조화나 자수 작품을 진상했다.

 

숙명여학교를 설립한 고종의 황후 엄귀비(가운데)와 그의 아들 이왕세자(오른쪽), 그리고 숙명여학교 졸업생 최승희(왼쪽)

 

대한제국 황실이 숙명여학교에 내린 최대의 선물은 학교를 사립재단으로 독립시켜준 것이다. 망국의 기운이 짙어지자 엄귀비는 경기도와 황해도의 황실 전답 중에서 2백만 평을 숙명여학교에 귀속시키고 그 소출로 학교를 운영하게 했다. 그 덕분에 대한제국의 관립학교들이 일제강점과 함께 총독부 산하의 공립학교체계 안에 편입되어 사라지는 동안 진명, 양정, 숙명의 세 학교는 사립학교로 전환, 총독부 학교체제에 흡수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일제 강점 후에도 황실과 숙명여학교는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일본에 억류되었던 이왕세자(懿愍皇太子李垠, 1897-1970)는 모친이 세운 학교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고, 조선을 방문할 때는 이 학교들을 방문했다. 1918123일의 <매일신보>에는 이왕세자가 숙명여학교를 방문한 사진이 실렸다. 세 학교는 일본 수학여행 일정에 이왕 저택 방문을 꼭 포함시켰다.

 

이 세 학교 학생들은 졸업 후에도 양명회라는 연합 동창회를 결성해 활동했는데 황실학교였다는 공통점 때문에 결속력이 좋았다. 양명회는 1927년 최승희의 경성 공연때에 간친회를 열었고, 숙명여학교 동맹휴학 발생시와 1929년의 진명여고보 학생들의 대규모 교통사고가 발생했을 때 공동대처하는 단결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1927년 10월30일자 <조선일보>는 <양명회>가 최승희의 경성 공연을 맞아 숙명여학교 교정에서 간친회를 개최했다고 보도했다.숙명여자보통학교에 입학해 1926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8년간 숙명여학교에 재학하면서 조선인, 특히 엘리트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가정형편상 1925년의 수학여행에 참가하지 못했고, 따라서 그해 도쿄에서 이왕을 만나지 못했지만, 세계 순회공연을 떠나기 직전인 1937년 12월 자신의 두 번째 영화 <대금강산보>가 완성되었을 때 그 시사회에 이왕을 초청했다.

 

최승희가 숙명여학교와 이시이무용연구소를 졸업한 후 본격적인 무용 활동을 벌일 때에도 숙명 동창생들의 도움이 컸다. 숙명여학교 졸업생들은 황실학교 연합동창회 양명회와는 별도로 숙녀회라는 숙명동창회를 구성했다. 1927년 최승희의 첫 공연 때 숙녀회는 재학생들과 함께 단체관람을 했고 공연 중간에 꽃다발 증정식도 마련했었다.

 

또 최승희가 지방 순회공연을 다닐 때는 전국 각지의 숙녀회 회원들이 그를 맞아 침식이나 편의를 제공했고, 무용공연이 성공하도록 응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193711월 최승희가 전남 광주에서 공연을 가졌을 때 숙명 동창생들과 찍은 기념사진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상의 몇 가지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최승희가 강한 <조선인 정체성>을 가졌던 것은 숙명여학교 재학시절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조선인 정체성>은 대한제국 황실학교 학생으로서의 자존심과 자부심을 그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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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 17회 졸업생 4

 

19263월에 졸업장을 받은 숙명17회 졸업생들은 <조선인 정체성>이 확실했던 것을 알 수 있다. 76명의 졸업생들이 모두 그랬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이름이 알려진 졸업생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들의 자존심과 자부심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박화성(朴花城, 1903-1998)은 숙명17회 수석졸업생이었다. 본명이 박경순인 박화성은 어린 시절부터 글쓰기에 천재성을 보였고, 17회 졸업생이 되기 전에 이미 문단에 등단했다. 한 상태였다. 일본유학까지 마친 오빠 박제민이 노동쟁의 끝에 사망한 후 박화성은 고향인 목포에서 꾸준히 작품을 썼다. 1932년 단편 <하수도공사>와 장편 신문소설 <백화>를 발표했고, 이어서 일제 강점기의 고통 받는 도시노동자, 서민, 농민들을 그린 장,단편 20여편을 발표했다. <논 갈 때(1934), <한귀(1935)>, <홍수전후(1935)>, <고향 없는 사람들(1936)> 등은 자연재해로 고통 받는 극한 상황을 그렸고, <비탈(1933)>, <헐어진 청년회관(1934)>, <불가사리(1936)>는 일제 치하에서도 자본주의적 향락에 젖어 사는 부친과 형제 사이에서 고뇌하는 민족주의자의 모습을 그렸다. <온천장의 봄(1934)>, <중굿날(1935)>은 돈에 팔려가는 여인들의 행로를 담아냈다. 해방전 박화성의 작품세계는 조선인들의 삶에 밀착되어 있었다.

 

1932년 6월3일의 <동아일보>에 실린 박화성의 연재소설 소식(왼쪽)과 1936년 3월11일에 실린 노남교의 2년6개월 복역후 출감 소식 (오른쪽). 

 

노동운동가 노남교(盧南橋, 1907-2006)는 최승희와 입학동기였지만 사회주의 독립운동과 관련되어 3학년이던 1924년에 퇴학당했다. 이후 일본 유학 중에는 근우회 활동을 했고, 고향인 김해에 돌아와서도 경남지역 여성운동과 노동운동을 이끌었다. 1931년의 <김해 메이데이사건>으로 시위를 주도하다가 처음으로 투옥됐고, 도쿄 유학시절 지하 노동운동을 주도했던 것이 발각되어 오사카와 사가 형무소에서 2년반을 추가로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북한 인민군의 도쿄 주재 스파이로 일하던 중 맥아더 사령부의 상륙작전 최종 목표지가 인천임을 탐지해 북한 인민군 사령부에 타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공훈을 인정받아 노남교는 영웅 혁명가라는 칭호롤 받고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이정희(李貞喜, 1910-?)는 권기옥(權基玉, 1901-1988), 박경원(朴敬元, 1897-1933)과 함께 조선의 초기 3인의 여류비행사였다. 이정희도 최승희와 입학동기였으나 졸업하지는 않았다. 그는 가난한 집안 형편에도 불구하고 비행사의 꿈을 가졌고, 거의 혼자의 힘으로 천신만고의 도쿄 비행학교 유학 끝에 3등과 2등 비행사 자격증을 받았다. 그러나 1등 비행사가 되지 않는한 항공사 취업이 불가능했고 여성에게는 1등비행사 응시자격이 없었으므로 자기 자신의 비행기를 갖지 못하면 하늘을 날지 못했다. 이 때문에 박경원은 일본 체신성 대신 고이즈미 마타지로의 후원으로 비행기 <청연>을 불하받아 조선으로 비행하려다가 추락사했다. 이정희는 그 길을 가지 않았고 해방될 때가지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그러나 1949917일의 <동광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정희는 대한민국 현역 공군대위로 임관되어 전투기를 운전했다. 식민지 조선의 하늘을 날지는 못했지만, 해방된 대한민국 공군의 조종사가 된 것이다. 그는 195040세의 나이로 여자항공대 대장으로 임명되어 근무하던 중 한국전쟁 중에 실종되었다.

 

1928년 7월16일의 <매일신보>의 이정희 항공대회 입상 소식(왼쪽)과 1929년 11월28일 <동아일보>의 최승희의 무용연구소 개소 소식(오른쪽)

 

최승희(崔承喜, 1911-1968)의 무용 활동은 널리 알려져 있었고, 1930년대에는 조선은 물론 일본에서도 조선무용가 최승희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따라서 주요한 무용 관련 프로젝트가 있었다면 우선 최승희가 거명되곤 했다. 하지만 최승희는 일본 국책 사업에 지원하거나 요구에 응한 적이 없었다. 유일하게 수락한 것이 영화 <대금강산보(1938)>의 주연을 맡은 것이었는데, 이것도 금강산을 해외에 홍보한다는 대의와 자신의 세계 순회공연에 활용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백제가 일본의 식민지였음을 내용으로 하는 국책 무용작품 <부여회상곡(1941)>과 조선청년의 일본군 지원을 부추키는 국책영화 <그대와 나(1941)>에 출연하기는 거부했다. 거액의 예산이 책정된 <부여회상곡>은 조택원(趙澤元, 1907-1976)이 맡았고, <그대와 나>의 주연은 문예봉(文藝峰, 1917-1999)에게 돌아갔다.

 

이 네 사람의 숙명17회 졸업생의 공통점은 강한 <조선인 정체성>을 지녔고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특히 자신의 활동분야에서 조선인의 자부심을 잃지 않았고 일제의 도움을 받거나 정책에 동원되어 조선인과 조선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으려 했다는 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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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인 정체성: 자존심과 자부심

삼일만세운동과 숙명17

 

일제강점 직후인 1911년에 태어난 최승희는 총독부 치하에서 양육되고 교육받았다. 어린 시절 최승희의 집안은 유복했기에 일제 제도적, 일상적 조선인 차별을 심각하게 경험하지 않아도 되었고, 엘리트 교육기관 숙명여학교에서 수학하면서 <조선인 정체성>의 근간을 형성했다.

 

최승희의 숙명여학교 재학 중 등하교 길은 광화문통을 가로질렀다. 보통학교(=초등학교) 때는 수창동-수송동이었고, 고등보통학교(=중학교) 때에는 체부동-수송동의 왕복 길이었다. 이 등하교 길은 대한제국의 황궁 정문이었던 광화문 앞을 지나도록 되어 있었다.

 

당시 광화문 안쪽의 경복궁에서는 조선왕조의 전각들이 헐리고 조선총독부의 신청사가 건축되고 있었다. 경복궁내 건물들이 철거되기 시작한 것은 1915년의 조선물산공진회의 전시장을 조성하기 위해서였다. 이후에도 왕궁의 전각들이 줄줄이 헐렸고, 총독부 청사는 흥례문 자리에 1916710일에 착공, 192614일에 완공되었다.

 

1925년 10월20일의 <동아일보>에 실린, 광화문과 거의 완성된 총독부 신청사. 최승희는 최승희는 8년동안 숙명여학교 등하교길에 경복궁의 우아한 전각들이 헐리고 그 자리에 육중한 총독부 신청사가 건축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총독부 신청사는 1926년 1월4일, 최승희가 숙명여고보를 졸업하기 2달 전에 완공되었다.

 

최승희의 숙명여학교 재학기간이 19184월부터 19263월까지였으므로, 그녀는 등하교 때마다 조선 왕궁의 전각이 헐리고 육중한 총독부 건물이 올라가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모교의 모태인 대한제국의 경복궁은 자부심의 근거였지만, 그 왕궁이 헐리고 일제의 총독부 청사가 건축되어가는 것은 자존심이 짓밟히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19193월의 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최승희는 8살의 나이로 숙명보교 2학년 재학 중이었다. 최승희는 광화문통에서 만세운동의 규모와 처절함을 직접 목격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배재고보 재학 중이던 큰 오빠 최승일은 만세운동 이후 퇴학, 유학길에 올랐다. 그의 배재 중퇴가 삼일운동에 참가한 결과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개연성은 충분하다. 최승희는 거리에서 목격한 만세운동의 격렬함 못지않게 큰오빠의 거취를 통해 삼일운동을 실감했을 것이다.

 

최승희가 인식하고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삼일 만세운동은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의 운명도 결정했다. 군 출신으로서 무단정치를 자행하다 삼일운동을 촉발시켰던 그는 조선인들의 만세운동을 총칼로 가혹하게 진압했으나 결국 경질되고 말았고, 수년 간의 자괴심과 병고를 겪다가 쓸쓸하게 죽었다. 삼일 만세운동에 대한 일제의 보복은 가혹했지만 상처받았던 조선인들의 자존심을 다시 세워준 거국적 운동이었다.

 

숙명여학교도 최승희의 자부심의 근거였다. 최승희가 숙명여자보통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할 당시 조선 아동 취학률은 3.8퍼센트였고, 그나마 남학생 취학률이 6.4퍼센트였으므로 여학생 취학률은 1.0퍼센트 남짓이었다. 학령(=8)에 도달한 여자아이 1백 명 중 보통학교에 입학한 사람은 1명에 불과했다.

 

1926년 3월7일의 <조선일보>에 실린 숙명여고보 졸업자 사진과 졸업후 진로상황.

 

고등보통학교(=중학교)는 더 심했다. 최승희가 숙명여고보에 입학했던 1922년의 남녀 고등보통학교 재학생은 28개교에 918명이었다. 여학생 수는 남학생의 절반 이하였으므로 여고보 취학률은 0.2퍼센트, 1천 명 중 2명꼴이었다. 일제의 조선인 교육 억제와 조선 사회의 여성교육 기피 관행이 중첩된 결과였다. 그 때문에 1920년대의 조선 여성은 보통학교만 졸업해도 식자층이었고 여고보를 졸업하면 최고 인텔리였다.

 

1926년 숙명여고보를 졸업한 최승희는 이미 조선사회의 엘리트였고, 이른바 최고의 신여성 신부감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숙명여학교 졸업자들은 엘리트 지위를 개인적으로 활용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192637일의 <시대일보>에 따르면 숙명17회 졸업생 76명 중에서 졸업과 함께 혼인한 학생은 16명에 불과했고, 사범학교 진학생이 39, 일본 유학이 13, 국내 전문학교 진학자 5, 교원 취업자가 2명이었다. 고등교육 진학자가 많았을 뿐 아니라 직업 혹은 사회활동을 시작한 졸업생들이 많았던 것이다.

 

숙명17회 졸업생들 중에서 사회활동에 두각을 나타낸 인물로는 무용가 최승희를 비롯해 소설가 박화성, 혁명가 노남교, 비행사 이정희, 약사 장금산, 영화배우 김현정 등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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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존 연구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은 근대사 혹은 예술사의 연구 주제로 떠오른 적이 없다. 자료 부족 때문이다. 유럽이나 미주, 남미 공연 소식이 더러 평전에 인용되었지만, 대부분 최승희가 순회공연 중 현지에서 스크랩한 것을 발췌 번역한 것이었고, 이후 다른 연구자가 별도의 조사를 벌인 적은 없어 보였다. 필자가 2017년 여름의 유럽 취재를 통해 발굴한 신문과 잡지 기사와 사진, 공연 팜플렛 자료는 평전들이 소개한 자료의 수백 배에 달했다.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은 여전히 전인미답의 연구 분야이다.

 

평전들은 최승희 세계 순회공연의 일정과 각 공연의 레퍼토리를 파악하지 못했다. 서만일(1958)의 세계 순회공연 서술은 한쪽의 5분의1에 불과했고, 다카시마 유사부로(1959)160쪽 중에서 9(81-89)을 할애했을 뿐이다. 정병호(1995)에서도 유럽순회공연 서술은 평전 전체 362쪽 중에서 13(151-163), 강준식(2012)에서도 424쪽 중에서 16쪽에 머물렀다. 세계 순회공연에 포함된 30개 도시 150개 공연의 서술로는 턱없이 부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세계 순회공연에 임했던 최승희의 민족 정체성과 그것이 현지 언론에 반영되었던 양상에 대한 연구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이 연구는 세계 순회공연에 임했던 최승희의 민족정체성에 관련된 자료를 발굴하고 연구부문의 지형을 살피는 탐색적 성격을 가진다. 그리고 일정한 한계 속에서나마 평전들이 제시한 최승희의 민족정체성 주장을 가설로 다듬어 문헌분석을 통해 검증하게 될 것이다.

 

 

이글에서 사용하는 정체성이라는 용어는 풍부한 역사적 준거나 엄밀한 개념적 분석을 거친 정치한 용어는 아니다. 가장 간단한 의미에서 정체성은 개인이 처한 환경 속에서 스스로 내면화한 지위와 역할에 대한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은 다양한 사회에 처할 수 있고, 또 각 사회 속에서의 지위와 역할이 다양할 수 있으므로 개인의 정체성은 다중적일 수 있으며 시간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인들이 식민모국 일본에 합병된 조선사회에 살면서 조선인이자 일본인이라는 이중적 정체성을 가져야 했던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이 있었던 시기(1937-1940)는 조선이 일본에 병합된 지 거의 한 세대가 지난 시기였고, 일본의 군국주의가 극단으로 치닫기 시작했던 시기이다. 따라서 조선인이나 조선무용이라는 표현은 내선일체황국신민화정책에 위배되는 처벌 대상이었다. 따라서 나는 조선인이다는 선언은 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의 조선인이라는 뜻일 때만 허용되었고, ‘조선무용이라는 장르도 일본무용의 일부임을 인정하는 한에서만 통용되었다.

 

 

이글에서는 1930년대말 최승희가 세계 순회공연을 단행할 즈음에 가졌던 정체성을 여러 문헌을 통해 정리하고, 특히 최승희의 민족정체성이 미주와 유럽 공연 중에 어떻게 표현되었으며, 현지 언론이 그것을 어떻게 보도했는지 살폈다. 조사연구의 단순화를 위해 최승희가 세계무대에서 자신을 조선인 무용가, 자신의 무용작품을 조선무용으로 소개한 것을 민족정체성의 지표로 삼았고, 이 민족정체성이 현지 언론에서 어떻게 보도되었는지를 조사했다.

 

여덟 권의 평전에 서술된 단편적인 언급을 종합하면 최승희의 정체성은 그녀의 성장 과정, 그가 직면했던 상황, 그리고 그에 대한 반응에 따라 대체로 네 시기로 나누어 고찰될 수 있다.

 

1기는 최승희가 경성에서 태어나 숙명여학교를 마칠 때까지의 시기이고, 2기는 도쿄 무용유학 시기, 3기는 3년 반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무용연구소를 개설하고 안막과 결혼한 시기, 4기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무용의 창작과 공연 활동에 몰두하다가 해방을 맞을 때까지의 시기이다.

 

이 연구의 초점은 제4, 그중에서도 유럽 순회공연 시기에 맞춰져 있지만, 최승희가 다중의 정체성을 갖게된 과정을 보기 위해 앞선 시기의 상황을 개략적이나마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초기의 조선인 정체성과 유학기의 예술가 정체성,’ 조선활동기의 신여성 정체성과 일본과 세계활동기의 세계일 정체성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각각의 정체성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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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유럽 공연에서 드러난 최승희의 민족 정체성

-현지 매체에 보도된 파리공연 기사를 중심으로-

조정희, PD/최승희연구가

 

1. 서론

최승희(崔承喜, 1911-1969)193712월부터 194012월까지 만 3년의 세계 순회공연을 가졌다. 미국과 유럽, 중남미의 30여개 도시에서 150여회의 조선무용 공연을 열었다. 조선과 일본공연을 제외한 첫 해외 공연이었던 이 순회공연에서 최승희는 (1) 조선무용을 세계에 알리고, (2) 자신도 세계 정상급 무용가로 인정받겠다는 두 가지 목표를 세웠다.

 

조선과 일본의 언론 보도에 따르면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은 성공 일색이었다.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고, 공연마다 만석을 이뤘고, 현지 관객과 비평가들의 극찬을 받았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그러나 조선과 일본 매체의 보도가 사실의 전부는 아니었다. 최승희의 무용공연은 때로 보이콧 당했고, 계획한 공연이 취소되기도 했다. 만석은커녕 비평가 몇 명만 객석에 앉힌 채 관객 없는 공연을 며칠씩 계속해야 했던 때도 있었다.

 

그 같은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최승희는 자신의 두 가지 목표를 달성했다. 조선무용을 유럽과 남,북 미주에 알렸고 자신도 세계 정상급 무용가로 인정받았다. 이 같은 예술적 성과는 근본적으로 조선무용의 미학적 잠재력 덕분이었겠지만, 이 잠재력이 현실화된 것은 최승희의 예술적 재능과 치열한 노력의 결과이었음에 틀림없다.

 

1939년 1월31일, 최승희의 유럽 데뷔 공연이 열렸던 파리 시내 <살 플레옐> 극장

 

최승희의 예술적 성취의 궁극적 수혜자가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당시 조선 매체들과 오늘날의 다수 연구자는 최승희의 예술적 성공을 조선인의 건재함과 조선예술의 우수함의 증거로 보았지만, 일부 연구자들은 최승희가 식민모국 일본제국의 문화적 선전대 역할을 수행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이렇게 상반된 주장이 나온 것은 최승희가 세계 순회공연을 통해 시도한 민족정체성 주장이 얼마나 성공했는지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대다수의 평전과 평전을 인용한 연구서들은 최승희가 세계 순회공연을 통해 자신이 조선인이며 자신의 무용은 조선무용임을 지속적으로 주장했고 그 주장이 관철되었다고 서술했다.

 

반면에 최승희의 민족정체성 추구가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고 평가한 연구자들도 있다. 일본의 중국침략이 시작되었고 히틀러의 유럽침략을 눈앞에 둔 전운 속에서 진행된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은 일제의 호전성을 숨기고 무마하기 위한 제스처에 불과했다고 해석되곤 했다. , 최승희의 민족정체성 주장은 실패했고, 최승희는 일본제국의 아이돌이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이 글은 최승희가 세계 순회공연을 자신과 자기 무용예술의 민족적 정체성이 국제무대에서 인정받을 기회로 삼았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 같은 의도가 1938년 미국에서는 실패했지만 1939년 유럽에서는 성공했다고 평가한다.

 

1939년 6월15일, 최승희의 2번째 파리 공연이 열렸던 <팔레 드 샤이오> 극장. 

 

이글의 목적은 최승희의 민족정체성 주장이 미국에서는 실패했지만 유럽에서 성공했던 요인이 무엇이었는지, 환경적 조건과 주체적 노력의 양면에서 살피는 것이다. 유럽에서의 민족 정체성 주장이 성공한 것은 최승희-안막 부부와 일제 당국, 그리고 현지 언론 사이의 미묘하고 복잡한 상호작용의 결과임을 보이게 될 것이다.

 

이글의 논의와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일본 외무성의 최승희 관련 문건과 유럽 현지 매체의 보도문들이 사용되었다. 현지 언론 자료는 필자가 20175월부터 6월까지 유럽 7개국 14개 도시를 방문해 수집했고, 이후 각지의 도서관과 기록보관소와의 사후연락을 통해 보강되었다. 최승희 관련 일본 외교 문건은 2018<일본 외무성 역사자료 아카이브>에서 얻어진 것이다.

 

2017년의 유럽 취재와 2018년의 일본 취재는 사단법인 <후아이엠(당시 회장 차길진)>의 일부 재정지원으로 이뤄진 것임을 밝히며, 지금은 타계하신 차길진 회장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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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川公演はどうして211かれたのだろうか春川公演する疑問はほとんどけたがまだ2つがっていた。 「いつなぜだった事実上この2つはいに関連していた

 

崔承喜1931年上半期地方公演慶尚キョンサン-全羅チョンラ-忠清チュンチョン地域だったところが釜山217-18大邱224-25公演春川公演221まったことで日程動線異常じた

 

春川公演春川報道機関有志招聘崔承喜舞踊団犠牲的譲歩実現したという報道があったことから春川招聘者公演日指定して公演要請したはずだ崔承喜はその日程わせるため日程調整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なぜ221だったのか

 

第1回春川世界花火大会(2018)。 1931年2月21日も春川で花火大会が行われた。 当時は日本の<紀元節>を祝うためだった。

 

春川公演関連新聞7調べても公演日221でなければならない理由れなかった221東亜日報新春事業として崔承喜さんを招聘したとじたが江原道2うにはまだまだもり気温氷点下だからだ

 

217朝鮮新聞「(崔承喜一行犠牲的譲歩によってやっと公演できたじたがその犠牲かはらかにしなかった219毎日申報220京城日報読者慰労のため崔承喜公演誘致することになったと説明した

 

毎日申報殺人的不景気々の感情ヨンが明太のようにしおれたことをしでも活気ごう、『京城日報記事内容だったが、「明太のカクテキわりにヘチマのかけらという表現使った

 

公演当日の1931年2月21日付の<朝鮮新聞>は、崔承喜舞踊公演に先立ち、1時間にわたって花火大会が行われたと報じた。

 

この2つの記事った不景気1929のニューヨーク証券市場暴落からまった大恐慌影響すだろうしかし米国大恐慌はすでに1年半以上全世界猛威るっていたため市民慰安行事がちょうどその221われ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理由にはならなかった

 

一方公演当日221発行された朝鮮新聞公演7時半まるが1時間前から花火まるじたどうして花火だったんだろう室内行事である舞踊公演事前行事花火大会をすることはなく行事のために用意されたにいない

 

ふと211日本建国記念日だという事実かんだ1873紀元節として制定され1948廃止されたがその後名前日本節句である春川招聘者たちは新設された春川公会堂紀元節おうと崔承喜舞踊団招待したのではないだろうか

 

1931年2月21日の春川公演は春川の日本人や親日朝鮮人士らが<紀元節>を祝うために崔承喜舞踊団を招いて行われたものと見られる。 しかし、この日のレパートリーは日帝の圧制に希望を失わないという内容がほとんどで、内容と形式が相反するおかしな公演となった。

 

しかし問題があった崔承喜27-8京城公会堂公演予定されており217-18には韓国旧正月連休わせて釜山プサン公演計画されていたその大邱テグをはじめ三南サムナム地方主要都市公演日程々とてられていた

 

崔承喜日程った春川人次善としてその週末214-15公演をしたかっただろうが朝鮮人芸術家紀元節公演をしたかったはずがないおそらく京城公会堂での公演から3日間春川公演強行するのは日程もぎりぎりでダンサーらに無理だというをしたのだろうしかもその週末春川公演をすることになれば旧正月公演わせて釜山到着することも不可能だった

 

崔承喜結局釜山公演日付17-18はそのまま維持するものの春川有力者らのロビーで拒否できなかった春川公演その翌週末21うことをめただろうそのため釜山公演計画通りできたが大邱公演とその地方公演3~4ずつ日程調整されたり順番わら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だろうこれが1931217<朝鮮新聞>じた崔承喜一行犠牲的譲歩だったのだ

 

春川紀元節祝賀舞踊公演211から2110日延期されたことで、「紀元節祝賀意味あせ新聞紀元節公演という表現使わなかったしかし春川招聘者花火祈願節雰囲気げようとしただろう公演日211からざかったため崔承喜春川公演をしながらも紀元節祝賀公演けられたものとられる(jc2021/8/27秒高; 2024/2/18修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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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공연은 어째서 2월21일에 열렸던 것일까? 춘천공연에 대한 의문은 거의 풀렸지만 아직 2가지가 남아 있었다. ‘언제였다. 사실상 이 두가지는 서로 연관되어 있었다.

 

최승희의 1931년 상반기 지방공연은 경상-전라-충청지역이었다. 그런데 부산(217-18)과 대구(224-25)공연 사이에 춘천 공연(221)이 낌으로써 일정과 동선에 이상이 생겼다.

 

춘천 공연이 춘천 언론사와 유지들의 초빙과 최승희무용단의 희생적 양보로 성사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춘천의 초빙자들이 공연일로 지정해서 공연을 요청했을 것이다. 최승희는 그 일정에 맞추기 위해 다른 일정을 조정해야 했다. 221일이었을까?

 

제1회 춘천 세계 불꽃놀이(2018). 1931년 2월21일도 춘천에서 불꽃놀이가 있었다. 당시는 일본의 <기원절> 축하를 위해서였다.

 

춘천공연 관련 7개의 신문기사를 살펴도 공연 날짜가 221일이어야 했던 이유는 나타나지 않았다. 221일의 <동아일보>신춘사업으로 최승희양을 초빙했다고 보도했지만, 강원도의 2월을 봄이라고 하기에는 이르다. 아직 눈이 쌓이고 기온도 영하이기 때문이다.

 

217일의 <조선신문>“(최승희) 일행의 희생적 양보에 의해 겨우 공연할 수 있었다고 보도했지만, 희생이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219일의 <매일신보>220일의 <경성일보>는 독자 위안을 위해 최승희 공연을 유치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매일신보>살인적 불경기로 사람들의 감정이 거칠어졌고 영()이 북어깍두기같이 시들어 진 것을 위안하며 약간이나마 활기를 부어 주고자최승희 공연이 마련되었다고 보도했고, <경성일보> 기사도 같은 내용이었지만 북어깍두기대신 수세미 조각이라는 표현을 썼다.

 

공연당일인 1931년 2월21일의 <조선신문>은 최승희 무용공연에 앞서 1시간동안 불꽃놀이가 이루어졌다고 보도했다.

 

이 두 기사가 말한 불경기는 1929년 뉴욕증시 폭락으로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를 가리킬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대공황은 이미 1년 반 이상 전 세계에 맹위를 떨치고 있었으므로, 시민 위안 행사가 꼭 그날(221) 열려야했던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공연 당일(221) 아침에 발행된 <조선신문>공연은 7시 반에 시작되지만 한 시간 전부터 불꽃놀이(煙火)가 시작된다고 보도했다. 왠 불꽃놀이였을까? 실내행사인 무용공연의 사전행사로 불꽃놀이를 하는 경우는 없으므로 무언가 다른 행사를 위해 마련된 것임에 틀림없다.

 

문득 211일이 일본의 건국기념일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1873기원절(紀元節)’로 제정되었다가 1948년에 폐지되었지만 이후 이름을 바꿔 지금도 지키는 일본 명절이다. 춘천의 초빙자들은 신설된 춘천공회당에서 기원절을 축하하려고 최승희무용단을 초청했던 것이 아닐까?

 

1931년 2월21일의 춘천공연은 춘천의 일본인들과 친일 조선인 인사들이 <기원절> 축하를 위해 최승희무용단을 초빙하여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날의 레퍼토리는 일제의 압제에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내용이 대부분이어서, 내용과 형식이 상반되는 이상한 공연이 되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최승희는 27-8일의 경성공회당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고, 217-18일에는 한국의 설 연휴에 맞추어 부산공연이 계획되어 있었다. 그 후에도 대구를 비롯한 삼남지방의 주요도시 공연 일정이 줄줄이 세워져 있었다.

 

최승희의 일정을 알게 된 춘천인들은 차선책으로 그 주말인 214-15일에 공연을 갖고 싶었겠지만, 조선인 예술가가 기원절 공연을 하고 싶었을 리 없다. 아마도 경성공회당 공연 3일 만에 춘천공연을 강행하는 것은 일정도 빠듯하고 무용수들에게 무리라는 핑계를 대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 주말에 춘천 공연을 하게되면 설 공연에 맞춰 부산에 도착하기도 불가능했다.

 

최승희는 결국 부산공연 날짜(17-18)는 그대로 유지하되, 춘천 유력인사들의 로비로 거부할 수 없었던 춘천공연은 그 다음 주말인 21일에 하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그에 따라 부산공연은 계획대로 할 수 있었지만 대구공연과 그 이후의 지방 공연들은 3-4일씩 일정이 조정되거나 순서가 바뀌어야 했을 것이다. 이것이 1931217일의 <조선신문>가 보도했던 최승희 일행의 희생적 양보였던 것이다.

 

춘천의 기원절 축하 무용공연이 211일에서 21일로 열흘 미뤄짐에 따라 기원절 축하의 의미는 퇴색했고, 신문들도 기원절 공연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춘천의 초빙자들은 불꽃놀이로 기원절 축하분위기를 살리려 했을 것이다. 공연일이 211일에서 멀어짐으로써 최승희도 춘천공연을 하면서도 기원절 축하공연은 피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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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221崔承喜春川公演われたのは春川公会堂だったすべての新聞記事がそのように報道したしかしその公会堂がどこにあったのかについては記録がないまるでまあそんなものを記録必要があるかな春川たらそれがどこかかるはずなのに…」というようなものだ

 

はそうだったはずだしかしわずか80歳月れただけなのに春川公会堂建物えたのはもちろんそのあった位置する記録さえっていない地域同様本来はいろいろな記録があっただろうが日本敗退後こった韓国戦争春川廃墟過去する記録大半えてしまったのだ

 

1929年12月20日の『毎日申報』は春川公会堂が完成し、12月15日に落成式を行ったと報じた。

 

19291218朝鮮新聞によると春川公会堂完成落成式ったのは19291215だった道庁所在地としては公会堂つのが非常いわけだ<三五会><春川繁栄会>など日本人中心春川市発展のための各種団体19278から公会堂新築のための期成会設立募金運動った1928910東亜日報京城閔泳輝ミン·ヨンヒ2千圓春川崔良鎬チェ·ヤンホ1千圓寄付したとじたのをると春川公会堂設立のため日本人だけでなく朝鮮人積極的参加したものとられる

 

192944朝鮮新聞公会堂位置する最初糸口提供した。 「公会堂敷地1候補地だった面事務所まり43地鎮祭ったじたからだ49毎日新報公会堂場所役場右側だと525朝鮮新聞春川面事務所東側まった公会堂場所ならし工事まったじたつまり春川公会堂春川面事務所のすぐ東側だったのだ

 

「土地調査地籍院図」(1916)によると、京城公会堂の住所は「春川郡府内面假淵里67-1番地」(青い円)だった。 赤い円は府内面事務所の位置。

 

一方陸軍歩兵学校卒業して任官され春川配属された李大用·デヨン1925-2017将軍回顧録には1950625回想には春川公会堂する記録されていた

 

下宿竹林洞稜線にあった傾斜した道路沿って300メートルほどくと東西たわる出会この交差点西南春川公会堂というきな建物があった600収容できるこの建物当時大衆集会音楽演奏会その他何特別公演がある利用する公共施設だった」。

 

この回顧によると春川公会堂1950625まで健在だったこの証言てくる竹林洞峠稜線とは六林峠六林峠からるとたわる現在明洞路したがって春川公会堂位置陸林峠道明洞路交差点西南角そこは明洞路中央市場入口<文化劇場(1961)>場所だったのだ

 

今日のネイバー地図に表示した春川面事務所(赤い円)と春川公会堂(パランウォン)の位置。

 

確認のために1916作成された土地調査地籍原図調査した当時住所として江原道春川郡府内面假淵里66番地国有地表示された春川面事務所場所確認されたがその場所現在ブラウン5番街という雑居ビルの東京寿司がある建物場所だった

 

その東側富内面假淵里67-1番地春川公会堂当時住所だった住所江原道春川市竹林洞7-1番地この住所地<文化劇場>されそこにてられた<春川明洞SRタワー>今日住所一致する

 

かつて<春川公会堂(1929-1950年代初め)>と<文化劇場(1961-2004)>があった今日の<春川明洞SRタワー>ビル。

 

つまり<春川公会堂><文化劇場1961)>があった場所であることが確認された<文化劇場><昭陽劇場(1956)><陸林劇場(1967)>とともに春川3大公開館として春川市民されたが1970年代のテレビ1980年代のカラーテレビの普及経営難2005には6つの上映館<プリマス春川>2008には12上映館<春川CGV>開業すると廃業した

 

<文化劇場>はしばらく<ブロードウェイ劇場>改名して変身みたが結局劇場廃業してくの土地追加購入5百坪敷地10階建<明洞SRタワー>建設したが現在はある法的訴訟進行中建物使われていないようだ。 (jc、2021/8/27秒高; 2024/2/18修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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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221일의 최승희 춘천공연이 열린 곳은 <춘천공회당>이었다. 모든 신문기사들이 그렇게 보도했다. 그러나 그 공회당이 어디에 있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마치 , 그런 걸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있을까? 춘천에 오면 그게 어딘지 다 알텐데...’하는 투이다.

 

옛날에는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불과 80년의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지금은 춘천공회당의 건물이 사라진 것은 물론, 그것이 있었던 위치에 대한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원래는 이런저런 기록이 있었겠지만 일본의 패퇴 이후 벌어진 한국전쟁 통에 춘천은 쑥대밭이 되어버렸고, 과거에 대한 기록들이 대부분 불타버렸던 것이다.

 

1929년 12월20일의 <매일신보>는 춘천공회당이 완성되어 12월15일 낙성식을 가졌다고 보도했다.

 

19291218일의 <조선신문>에 따르면 춘천공회당이 완성되고 낙성식을 가진 것은 19291215일이었다. 도청소재지치고는 공회당을 가진 것이 매우 늦은 셈이다. <삼오회><춘천번영회> , 일본인 중심의 춘천시 발전을 위한 각종 단체들은 19278월부터 공회당 신축을 위한 기성회를 설립하고 모금운동에 들어갔다. 1928910일의 <동아일보>는 경성의 민영휘가 2천원, 춘천의 최양호가 1천원을 기부했다고 보도한 것을 보면 춘천공회당 설립을 위해 일본인들뿐 아니라 조선인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192944일의 <조선신문>이 공회당 위치에 대한 첫 실마리를 제공했다. “공회당 부지는 제1후보지였던 면사무소 옆으로 결정되었고 43일 지진제(地鎭祭)를 올렸다고 보도했기 때문이다. 49일의 <매일신보>는 공회당 자리가 면사무소 우측이라고 보도했고, 525일의 <조선신문>춘천면사무소 동편 옆으로 정해진 공회당 자리에서 땅을 고르는 지균(地均)공사가 시작됐다고 보도했다. 즉 춘천공회당은 춘천면사무소의 바로 동쪽 옆이었던 것이다.

 

일제의 <토지조사 지적원도(1916)>에 따르면 경성공회당의 주소는 <춘천군 부내면 가연리 67-1번지(파란원)>였다. 붉은원은 부내면사무소 자리.

 

한편 육군보병학교를 졸업하고 임관되어 춘천에 배속되었던 이대용(李大鎔, 1925-2017) 장군의 회고록에는 1950625일의 회상 중에는 춘천공회당에 대한 기록도 나타나 있었다.

 

하숙집은 죽림동 고개 능선 위에 있었다. 경사진 도로를 따라 약 300미터쯤 북쪽으로 내려가면 동서로 가로놓인 넓은 길과 만나게 된다. 바로 이 교차로 서남모퉁이에 춘천공회당이라는 큰 건물이 있었다. 6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 건물은 당시 대중 집회나 음악연주회, 기타 무슨 특별 공연이 있을 때 이용하는 공공시설이었다.”

 

이 회고에 따르면 춘천공회당은 1950625일까지 건재했다. 이 증언에 나오는 죽림동 고개 능선이란 육림고개를 가리키며, 육림고개에서 북쪽으로 내려가면 가로놓인 넓은 길은 지금의 명동로이다. 따라서 춘천공회당의 위치는 육림고갯길과 명동로 교차로 서남모퉁이였고, 그곳은 명동로쪽 중앙시장 입구에 가까운 <문화극장(1961)> 자리였던 것이다.

 

오늘날의 네이버지도에 표시한 춘천면사무소(붉은원)과 춘천공회당(파란원) 위치.

 

확인을 위해 1916년에 작성된 토지조사 원적도를 조사했다. 당시 주소로 <강원도 춘천군 부내면 가연리 66번지>국유지로 표시된 춘천면사무소 자리로 확인되었는데, 그 자리는 지금의 <브라운 5번가>라는 상가복합건물 중에서 <도쿄스시>가 있는 건물자리였다.

 

그 동쪽 옆인 <부내면 가연리 67-1번지>가 춘천공회당의 당시 주소였다. 지금의 주소는 <강원도 춘천시 죽림동 7-1번지>이다. 이 주소지는 <문화극장>이 헐리고 그 자리에 들어선 <춘천 명동 SR타워>의 오늘날 주소와 일치한다.

 

과거 <춘천공회당(1929-1950년대초)>와 <문화극장(1961-2004)>이 있었던 <춘천 명동 SR타워> 빌딩.

 

<춘천공회당(1929)> 자리는 <문화극장(1961)>이 있던 자리로 확인됐다. <문화극장><소양극장(1956)>, <육림극장(1967)>과 함께 춘천의 3대 개봉관으로 1980년대 초까지도 춘천시민들의 사랑을 받았으나, 1970년대의 티비, 1980년대의 칼라티비의 보급으로 경영난을 겪기 시작했고, 20056개상영관을 가진 <플리머스 춘천>, 200812개 상영관을 가진 <춘천CGV>이 개업하자 극장을 계속하기 어려웠다.

 

<문화극장>은 한동안 <브로드웨이 극장>으로 개명하면서 변신을 시도했으나 결국 극장을 폐업하고 인근 땅을 추가 매입, 5백평 부지에 10층짜리 <명동 SR타워>를 건립했으나, 지금은 모종의 법적 소송이 진행 중이어서 건물이 사용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jc, 2021/8/27초고; 2024/2/18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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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221春川公演参加した崔承喜舞踊団員何人ぐらいになっただろうか公演プログラムも発見されておらず各新聞もこれを報道していないため確認する方法はないがレパートリーを把握すれば推論することはできる

 

1931226毎日申報29東亜日報らかにした春川公演(2/21)釜山公演(2/17-18)のレパートリーを総合すると春川公演発表作品1931110-12団成社公演発表された14作品一致するものと推定される

 

ここに春川公演初演作品としてエレジーの独舞わり全部15作品だったその15作品のタイトルと3回発表会各作品発表したダンサーをべるとのようになる

 

1: 1.<らは太陽(崔承喜, 研究生一同)>2.<らのロマンス>(崔承喜, 李玉熙, 安貞玉)3.<浄土舞姫>(張桂星, 安貞玉)4.<らのロマンス>(崔承喜)5.<愛級風景>(崔承喜, 研究生數名),

2: 1.印度人悲哀」(崔承喜)、2.西班牙少女舞踊」(金銀波, 李玉熙, 張桂星)、3.布哇·セレナーデ」(崔承喜金銀波)、4.郷土舞踊」(盧載信, 張桂星李貞子;

3: 1.<印度人恋歌>崔承喜李玉熙)2.<ジプシーの>研究生一同)3.<狂想曲>崔承喜)4.<この兵隊ブサイク>張桂星)5.<らの行進>(崔承喜研究生一同)>;その:春川公演初演作品<エレジーの独舞>

 

1930年10月15日の『朝鮮日報』に掲載された崔承喜の第2回新作舞踊発表会プログラム。 春川公演のレパートリーは概してこの公演の発表作品で構成されていることが確認された。

 

作品出演者ると崔承喜のほかに名前登場した舞踊家李玉熙, 安貞玉, 張桂星, 金銀波, 盧載信, 李貞子6しかし各種メディアに掲載された作品写真ると群舞らは太陽には7出演、「らの行進には6、「埃及風景にも6登場する春川公演出演したダンサーは崔承喜なくとも7人以上だった

 

にも音楽担当者とスタッフがいた1931110東亜日報によると崔承喜1931公演からピアノ伴奏李光俊(·グァンジュン)バイオリン伴奏崔又隱(チェ·ウウン)参加にも蓄音機音楽担当者がいたため伴奏および音楽部員なくとも3いた

 

19301015朝鮮日報によると照明舞台監督元雨田(ウォン·ウチョン)金正煥(キム·ジョンファン)同時あるいは公演別崔承喜公演舞台装置照明担当めた照明には1~2助手がもっと必要だったはずなので衣装小物担当者までえるとなくとも3~4のスタッフが参加したはずだ

 

1929年12月19日の『朝鮮日報』に掲載された12月15日に落成した<春川公会堂>の写真。

 

ここにマネージャー遂行してくれたのチェ·スンイルをめれば地方巡業時崔承喜舞踊団規模はおよそ15人前後だったことがかる

 

春川公演当時20ぎなかった崔承喜15人前後舞踊団いるのに困難はなかっただろうかしかも地方巡業には作品公演することだけでなく生活一部まで統制でき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だろう対外交渉会計問題までなったら研究所いることは容易でない問題だっただろう

 

1927年ごろ、崔承喜の舞踊留学時代、武蔵境の石井漠舞踊研究所で撮った写真。 石井舞踊団は大半が家族によって経営された。

 

師匠石井漠舞踊団内部問題大部分家族関係解決した初期石井舞踊団のダンサーは石井小浪石井英子らの家族内部マネージャーや会計担当石井漠石井八重子担当した

 

かった崔承喜場合作品活動以外舞踊団いることがきな負担だったのかもしれない京城舞踊研究所経営には長男崔承一(チェ·スンイル)がマネージャー父親崔濬鉉(チェ·ジュンヒョン)次男崔承五(チェ·スンオ)まで総動員されたしかしらのけを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地方巡業崔承喜くの困難経験したと推測される(jc2021/8/27秒高; 2024/2/18修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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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221일의 춘천 공연에 참가한 최승희 무용단원은 몇 명이나 되었을까? 공연 프로그램도 발견된 바 없고, 신문들도 이를 보도하지 않았으니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레퍼토리를 파악된다면 거꾸로 추론해 볼 수는 있다.

 

1931226일의 <매일신보>29일의 <동아일보>가 밝힌 춘천공연(2/21)과 부산공연(2/17-18)의 레퍼토리를 종합해 볼 때 춘천공연의 발표작품은 1931110-12일의 단성사 공연에서 발표된 14개 작품과 일치할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춘천공연 초연작품으로 <엘레지의 독무>가 추가되어 모두 15작품이었다. 15개 작품의 제목과 <3회발표회>에서 각 작품을 발표한 무용수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1. <그들은 태양을 구한다>(최승희, 연구생 일동), 2. <방랑인의 비애>(최승희, 이옥희, 안정옥)>, 3. <정토의 무희>(장계성, 안정옥), 4. <그들의 로맨스>(최승희), 5. <이집트 풍경>(최승희, 연구생 수명);

2: 1. <인도인의 비애>(최승희), 2. <스페인 소녀의 무용>(김은파, 이옥희, 장계성), 3. <하와이 세레나데>(최승희, 김은파), 4. <향토무용>(장계성, 노재신, 이정자);

3: 1. <인도인의 연가>(최승희, 이옥희), 2. <집시의 무리>(연구생 일동), 3. <광상곡>(최승희), 4. <이 병정 못났다>(장계성), 5. <그들의 행진>(최승희, 연구생 일동); 기타: 춘천공연 초연작품 <엘레지의 독무>(최승희).

 

1930년 10월15일의 <조선일보>에 게재된 최승희의 제2회 신작무용발표회 프로그램. 그의 춘천공연 레퍼토리는 대체로 이 공연의 발표작품으로 구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작품 출연자들을 살펴보면 최승희 외에 이름이 등장한 무용수는 이옥희, 안정옥, 장계성, 김은파, 노재신, 이정자의 6명이다. 하지만 각종 매체에 실린 작품 사진을 보면, 군무 <그들은 태양을 구한다>에는 7명이 출연했고, <그들의 행진>에는 6, <이집트 풍경>에도 6명이 등장한다. 따라서 춘천공연에 출연한 무용수는 최승희를 포함하여 최소한 7명이상이었다.

 

그밖에도 음악반주 담당자와 스탭이 있었다. 1931110일의 <동아일보>에 따르면 최승희의 1931년 공연부터 피아노 반주에 이광준(李光俊), 바이얼린 반주에 최우은(崔又隱)이 참여하기 시작했고, 그밖에도 축음기를 다루는 음악담당자가 있었을 것이므로 반주 및 음악부원은 적어도 3명이었다.

 

19301015일의 <조선일보>에 따르면 조명과 무대감독 원우전(元雨田)과 김정환(金正桓)이 동시에, 혹은 공연별로 각각 최승희 공연의 무대장치와 조명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조명에는 1-2인의 조수가 더 필요했을 것이므로, 의상과 소품 담당자까지 더한다면 적어도 3-4명의 스탭이 참여했을 것이다.

 

1929년 12월19일의 <조선일보>에 실린 12월15일 낙성된 <춘천공회당> 사진.

 

여기에 매니저 역할을 맡은 큰오빠 최승일을 포함하면, 지방 순회공연 때의 최승희 무용단 규모는 대략 15명 내외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춘천공연 당시 20세에 불과했던 최승희가 15명 내외의 무용단을 이끄는데 어려움은 없었을까? 더구나 지방 순회공연 때에는 때는 작품과 공연에 관한 것뿐 아니라 생활의 일부까지 통제할 수 있어야 했을 것이다. 대외교섭이나 회계의 문제까지 겹친다면 연구소를 인솔하는 일은 녹녹치 않은 문제였음에 틀림없다.

 

1927년경, 최승희의 무용유학 시절, 무사시사카이의 이시이바쿠무용연구소에서 찍은 사진. 이시이무용단은 대부분 가족에 의해 경영됐다.

 

스승 이시이 바쿠는 무용단 내부의 문제를 대부분 가족관계로 해결했었다. 초기 이시이무용단의 무용수들은 이시이 코나미와 이시이 에이코 등의 가족이었고, 내부 매니저와 회계담당은 부인 이시이 야에코가 담당했었다.

 

나이가 어렸던 최승희의 경우 작품 활동 이외에 무용단을 인솔하는 일이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경성의 무용연구소 경영에는 큰오빠 최승일이 매니저 역할을 맡고, 부친 최준현과 작은오빠 최승오까지 총동원되었다. 그러나 이들도 각기 직장인이었으므로, 가족의 도움을 얻을 수 없었을 지방 순회공연 때에는 최승희가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jc, 2021/8/27초고; 2024/2/18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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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承喜春川公演のレパートリーはつからなかった公演プログラムもなく公演報道した新聞もそののレパートリーを全体的報道しなかったただ1931226毎日申報がその発表作品内容といくつかののようにじた

 

舞踊<らは太陽>,<浄土舞姬>,<放浪人悲哀>,<エレジーの独舞>,<愛級風景>,<布哇セレナ->3けて15演舞して... 完全観衆全精神<キャッチー>あちこち勝手きずりいっきりせてしまった」。

 

この日公演された作品3かれて15という以前発表会ていた19301114京城公会堂われた京城女子高学生慈善公演でも314作品発表され1931110團成社崔承喜第3回舞踊発表会発表曲314作品だった

 

1931年1月11日の『東亜日報』に掲載された崔承喜の現代舞踊『彼らの行進』、この作品は1931年2月21日の春川公演でも発表された。

 

新聞記事報道されたレパートリーは6作品だけだが29東亜日報によると217-18釜山公演発表作品には<らは太陽><らのロマンス><埃及風景><郷土舞踊><印度人悲哀><放浪人悲哀>などまれていることが報道された地方公演のレパートリーはじだったはずなので春川釜山公演のレパートリーをわせると9つの作品らかになったわけだ

 

この9作品はいずれも1931110-12<崔承喜第3回発表会>のレパートリーだ<3回発表会>発表作品14作品であったがここに<エレジーの独舞>わせると15作品になる

 

崔承喜19301021朝鮮日報寄稿した舞踊についてという自身初期作品印度人悲哀1929)」についてのように説明した

 

みんな人類としてじる共通不平感興表現する舞踊それは世界共有物でしょうえば振付した1回作品印度人悲哀などはその悲哀印度人にだけあるのではなくそのような悲哀った民族ならみんなじにな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1930年1月30日『毎日申報』に掲載されたチェ&middot;スンヒの創作舞踊「印度人の悲哀」。 この作品も春川公演のレパートリーだった。

 

崔承喜はまた、『印度人悲哀種類作品らは太陽げながらそれと正祖作品についてこのようにべている

 

2回新作<らは太陽>のようなものは虐待けながら光明している々の心情表現したものでそれはそのような感情ったであればもがじることができるものでありそのにも<印度人恋歌><月夜><放浪人悲哀><この兵隊ブサイク>がすべてそのであり…。」

 

その作品なくても朝鮮人独特表現した作品外国異国的紹介する作品についてものようにべている

 

そのでも<浄土舞姬>のようなものはかつての朝鮮人っていた独特壮漢太平時代ったあの時代芸術若干現代化してけしたものであり... 南陽情景布哇小夜曲みたいなものと··· <埃及風景>のようなものはその情緒表現するためのものです」。

 

1930年10月22日の『朝鮮日報』に報道された崔承喜の群舞作品『彼らは太陽を探す』。 春川公演で発表された1部の最初の作品だった。

 

しかし<エレジーの独舞>春川公演以前発表されたという記録はなかった従来のリストではエレジーの独舞創作年代1932記録しているが1931226毎日申報』」によると、「エレジーの独舞春川公演初演だった

 

崔承喜1933520東京·日本青年館かれた近代女流舞踊家大会参加した彼女エヘヤ·ノアラ1933)」とともにエレジー1931)」んで発表した<エヘヤ·ノアラ>崔承喜朝鮮舞踊めた最初作品であり代表作とされる

 

したがって<エヘヤノアラ>共選した<エレジー>崔承喜自らその完成度自信った現代舞踊代表作品であったことがかるがその初演春川公演だったのだ。 (jc、2021/8/27秒高; 2024/2/18修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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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춘천공연 레퍼토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공연 프로그램도 없고, 공연을 보도한 신문들도 그날의 레퍼토리를 전체적으로 보도하지 않았다. 다만 1931226일의 <매일신보>가 그날 발표작품의 내용과 몇 가지 예를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무용은 <그들은 태양을 구한다>, <정토의 무희>, <방랑인의 비애>, <엘레지의 독무>, <애급풍경>, <하와이 세레나-> 3부로 나누어 15종을 연무하여 ... 완전히 관중의 온 정신을 <캣취>하여 이리저리 마음대로 줄줄 끌고 다니며 여지없이 매혹하여 버렸었다.”

 

이날 공연된 작품이 ‘3부로 나뉘어 15이라는 점은 이전의 발표회와 유사했다. 19301114일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경성여자고학생 자선공연>에서도 314작품이 발표되었고, 1931110일 단성사의 <최승희제3회무용발표회>의 발표곡도 3부의 14작품이었다.

 

1931년 1월11일의 <동아일보>에 실린 최승희의 현대무용 <그들의 행진>, 이 작품은 1931년 2월21일 춘천공연에서도 발표됐다.

 

신문 기사에 보도된 레퍼토리는 6개 작품뿐이지만 29일의 <동아일보>에 따르면 217-18일의 부산공연의 발표 작품 중에는 “<그들은 태양을 찾는다>, <그들의 로맨스>, <애급풍경>, <향토무용>, <인도인의 비애>, <방랑인의 설움> 이 포함되어 있음이 보도되었다. 지방 공연의 레퍼토리는 같았을 것이므로 춘천과 부산 공연의 레퍼토리를 합치면 9개 작품이 밝혀진 셈이다.

 

9개 작품은 모두 1931110-12일의 <최승희 제3회발표회>의 레퍼토리이다. <3회발표회> 발표 작품이 14작품이었는데 여기에 <엘레지의 독무>를 합치면 15작품이 된다.

 

최승희는 19301021일의 <조선일보>에 기고한 무용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자신의 초기 작품 <인도인의 비애(1929)>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930년 1월30일 <매일신보>에 실린 최승희의 창작무용 <인도인의 비애>. 이 작품도 춘천 공연의 레퍼토리였다.

 

다 같은 인류로서 느끼는 공통되는 불평이나 감흥을 표현하는 무용, 그것은 세계의 공유물일 것입니다. 가령 내가 안무한 제1회 작품 <인도인의 비애>같은 것은 그 비애가 인도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비애를 가진 민족이면 다 같은 그러한 느낌을 가질 것이 아닙니까?”

 

최승희는 또 <인도인의 비애>와 비슷한 종류의 작품으로 <그들은 태양을 찾는다>을 들면서 그와 유사한 정조의 작품들에 대해 이렇게 서술했다.

 

2회 신작 중에서 <그들은 태양을 찾는다> 같은 것은 학대를 받으면서 캄캄한 속에서 광명을 찾고 있는 사람들의 심정을 표현한 것이니, 그것은 그러한 감정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다 느낄 수 있는 것이며, 그 외에도 <인도인의 연가>, <달밤에>, <방랑인의 설움>, <이 병정 못났다>가 다 그러한 종류이며...”

 

그밖에 작품의 수는 적더라도 조선 사람의 독특한 미를 표현한 작품과 외국의 이국적인 미를 소개하는 작품들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서술한 바 있다.

 

1930년 10월22일의 <조선일보>에 보도된 최승희의 군무작품 <그들은 태양을 찾는다>. 춘천공연에서 발표된 1부 첫번째 작품이었다.

 

그중에도 <정토의 무희>같은 것은 과거의 우리 조선 사람이 가지고 있던 독특한 미와 장한의 태평시대를 노래하던 그때 그 시절의 예술을 약간 현대화하여 안무한 것이며... <남양의 정경, 하와이 소야곡> 같은 것과 ... <이집트 풍경> 같은 것은 그 나라의 정서와 미를 표현하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엘레지의 독무>는 춘천 공연 이전에 발표되었다는 기록이 없었다. 기존의 연대표들에서는 <엘레지의 독무>의 창작연대를 1932년으로 기록했지만, 1931226일의 <매일신보>에 따르면 <엘레지의 독무>는 춘천 공연이 초연이었던 것이다.

 

최승희가 1933520일 도쿄 일본 청년관에서 열린 <근대여류무용가대회>에 참가했을 때, 그는 <에헤야 노아라(1933)>와 함께 <엘레지(1931)>를 골라 발표했었다. <에헤야 노아라>는 최승희가 조선무용을 시작한 최초의 작품이자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따라서 <에헤야노아라>와 함께 가려 뽑은 <엘레지>는 최승희 스스로 그 완성도에 자신감을 가졌던 현대무용의 대표작품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초연은 춘천공연이었다. (jc, 2021/8/27초고; 2024/2/18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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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221崔承喜春川公演主催4春川支局連合だった。 『東亜日報朝鮮新聞』、『京城日報毎日申報だった。 『東亜日報まれたのは意外3日本語新聞総督府機関紙だったためだ

 

広告文けば春川公演する記事6つだったいずれも春川発記事中央紙地方版掲載された春川にも独自新聞があったなら報道がよりしくなっただろうが中央紙春川発記事して簡略だったそれにもかかわらずこれらの記事じて崔承喜春川公演面貌ることができた公演終了後226毎日申報はこの公演についてのようにじた

 

1931年2月26日の『毎日申報』は、崔承喜の春川公演が盛況を呈したと報じた。

 

崔承喜さんの新作舞踊公演会11日夕方春川公会堂かれたが開会定刻1時間前にすでに四方からまった観衆によってそのようなきな公会堂文字通立錐余地なくいっぱいになったその々とせる観衆はまだドアの波打っていたがやむを満員入場をさせ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ためたせなかった数百人観衆あるいはドアをってあるいはけてんだこれに春川警察署からは十数人正私服警官出動らを慰撫してすことに努力するなど空前絶後大盛況めた··· 10時半大盛況のうちに舞踊会まった

 

この記事崔承喜春川公演観客動員大盛況したと叙述した公会堂定員500ほどだったがそのほかにも数百人入場できないままドアをってんだりけてというがいたというらを帰宅させるために警官10あまりが出動したほどだった

 

公演盛況したのは崔承喜名声とともにマスコミ報道のためだったはずだ219京城日報毎日新報崔承喜朝鮮'ベストワン'天才的乙女舞踊家紹介211東亜日報春川にとってめてのことだ意味づけた

 

1931年2月17日の『 朝鮮新聞 』は崔承喜舞踊団の春川公演は「崔承喜一行の犠牲的譲歩」として開かれることができたと報じた。

 

217朝鮮新聞もこの春川公演崔承喜一行犠牲的譲歩によってやっと公演できるようになったので今後数年また公会機会ることがしいとし公演当日にも朝鮮新聞今後数年間春川崔承喜さんの芸術ることができないとし、「舞踊公演開幕7時半だがその1時間前から幕前行事まるはずだ

 

これは公演良質性希少性広報であったがそれにえて効用性戦略駆使された219毎日申報殺人的不景気々の感情"明太のカクテキ"のようにえたことをしでも活気もうとするというのが公演目的なのでこのさずにけつけしと生活潤沢存分満喫することをめた

 

1929米国証券市場まった大恐慌余波日本朝鮮ったなので殺人的不景気としこれによって明太カクテキのようにんでしまった々の感情活気むとったのだ。 「明太カクテキしているのかからないがそれがどういう意味なのか見当しくない

 

1931年2月20日の<京城日報>はチェ&middot;スンヒの春川公演が「殺人的な不景気で疲弊した春川市民を慰めるために開かれた」と報じた。

 

4つの中央紙多角的広報戦略効果発揮したようだ春川公会堂500をすべてめたにもかかわらず数百人公演ないまま帰宅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通常ならこのように予想外くの観客まった場合崔承喜公演日数延長したり公演回数やしたりして観客不満じないように配慮したりした

 

しかし春川ではそれができなかった224大邱公演日程まっていたためだった21春川公演22日朝早春川出発その午後京城到着しても23日朝には大邱出発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ためだ。 『朝鮮新聞予告通崔承喜春川公演実現しなかった(jc2021/8/25秒高; 2024/2/18修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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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221일의 최승희 춘천공연 주최는 4개 신문 춘천지국 연합이었다. <동아일보><조선신문>, <경성일보><매일신보>였다. <동아일보>가 포함된 것이 뜻밖이다. 다른 세 신문은 일본어 신문이거나 총독부 기관지였기 때문이다.

 

광고문을 빼면 춘천공연에 대한 기사는 모두 6개였다. 모두 춘천발 기사로 중앙지의 지방판에 실렸다. 춘천에도 독자적인 신문이 있었다면 보도가 더 자세했겠지만, 중앙지의 춘천발 기사는 대체로 간략했다. 그럼에도 이 기사들을 통해 최승희 춘천공연의 면모를 짐작해 볼 수는 있었다. 공연이 끝난 후인 226일의 <매일신보>는 이 공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1931년 2월26일의 <매일신보>는 최승희의 춘천공연이 성황을 이루었다고 보도했다.

 

최승희양 신작무용공연회는 지난 11일 저녁 춘천공회당에서 열렸는데 개회 정각한 시간 전에 벌써 사방에서 운집한 관중으로 인하여 그처럼 큰 공회당도 문자 그대로 입추의 여지없이 메어버려서, 그 후로 속속 밀려드는 광중은 아직도 문밖에서 물결치고 있었으나 부득이 만원으로 입장을 시키지 못하였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 수백 관중은 혹은 문을 차고 들이밀며 혹은 창문을 열고 뛰어드는 판에 춘천경찰서로부터는 십여 명 정사복 경관이 출동하여 그들을 위무하여 돌려보내기에 노력하는 등 실로 공전절후의 대성황을 극하였다. ... 밤 열시 반 대성황리에 무용회의 막이 닫히었다.”

 

이 기사는 최승희 춘천공연이 관객 동원의 면에서 대성황을 이루었다고 서술했다. 공회당의 정원은 5백명 정도였으나, 그 외에도 수백명이 더 몰려와 입장하지 못한 채 문을 차고 들이밀거나 창문을 열고 뛰어드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했다. 이들을 귀가시키기 위해 경관 10여명이 출동했을 정도였다.

 

공연이 성황을 이룬 것은 최승희의 명성과 함께 언론보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219일의 <경성일보><매일신보>최승희는 조선이 가진 베스트원의 천재적 처녀무용가라고 소개했고, 211일의 <동아일보>춘천에 있어서는 처음 되는 일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1931년 2월17일의 <조선신문>은 최승희무용단의 춘천공연은 "최승희 일행의 희생적 양보"로 열릴 수 있었다고 보도했다.

 

217일의 <조선신문>도 이 춘천 공연이 최승희 일행의 희생적 양보에 의해 겨우 공연할 수 있게 된 것이어서, 향후 몇 년 다시 공회의 기회를 얻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 했고, 공연당일에도 <조선신문>앞으로 수년간은 춘천에서 최승희양의 예술을 볼 수 없을 것이라면서, “무용공연의 개막은 7시 반이지만 그 1시간 전부터 막전 행사가 시작되기 때문에 공회당에 일찍 도착해야할 것이라고도 했다.

 

이는 공연의 양질성과 희소성의 홍보였지만, 그에 더해 효용성 전략도 구사되었다. 219일의 <매일신보>살인적 불경기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감정이 북어깍두기같이 시들어진 것을 위안하며 약간이나마 활기를 부어주고자 함이 공연의 목적이므로 이날을 놓치지 말고 달려와 영혼의 위안과 생활의 윤택을 마음껏 만끽하기를 권했다.

 

1929년 미국 증시에서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가 일본과 조선을 덮쳤을 때이므로 살인적 불경기라고 했고, 이로 인해 북어깍두기같이 시들어버린 사람들의 감정을 위안하고 활기를 불어넣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북어깍두기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 짐작하기가 어렵지는 않다.

 

1931년 2월20일의 <경성일보>는 최승희의 춘천공연이 "살인적인 불경기로 피폐해진 춘천시민들을 위안하기 위해 열렸다"고 보도했다.

 

4개 중앙지의 다각적인 홍보 전략은 효과를 발휘했던 것 같다. 춘천공회당의 5백석을 모두 채우고도 수백 명이 공연을 보지 못한 채 귀가해야했다. 보통의 경우라면, 이렇게 예상 밖으로 많은 관객이 몰렸을 경우 최승희는 공연 날수를 연장하거나 공연 횟수를 늘려서 관객들이 불만을 갖지 않도록 배려하곤 했었다.

 

그러나 춘천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224일 대구공연의 일정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21일 춘천 공연을 마치고 22일 아침에 일찍 춘천을 출발해 그날 오후에 경성에 도착하더라도 23일 아침에는 다시 대구로 출발해야했기 때문이다. <조선신문>의 예고대로 최승희의 춘천공연은 다시 이뤄지지 못했다. (jc, 2021/8/27초고; 2024/2/18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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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原道民日報>咸光福(ハム·グァンボク)記者李鮮吉(·ソンギル)李英一(·ヨンイル)父親日本植民地時代初代江原道長官めた李圭完(·ギュワン, 1862-1946崔承喜春川公演をあっ周旋した可能性主張した立証資料提示されていないためまだ仮説であるしかし蓋然性排除できないため咸光福記者仮説検証する準備必要

 

まず李圭完崔承喜春川公演っていたならそれは可能なことだっただろう当時春川では日本人朝鮮人李圭完ほど影響力のあるがいなかったからだ江原道長官1908-1918咸鏡南道長官1918-1924歴任した62春川引退したが依然として全国的有名人だった

 

退任後李圭完中枢院参議職などの政務職ったが経済産業社会活動継続した東洋拓殖会社顧問(1924-1933)朝鮮山林協会理事(1925-1937)物産奨励会理事(1927)朝鮮農業会顧問(1927)京城商工協会相談(1930)漢城柴炭株式会社設立(1936)朝鮮新聞社取替役(1936-1941)として新刊会(1927-1931)にも参加した

 

日本による植民地時代 江原道と咸鏡南道の道長官を歴任した李圭完(右)と夫人の中村梅子(韓国名=李梅子)。 中村梅子は日本人外交官とスペイン貴族の間に生まれたハーフで、李圭完との間に5男4女をもうけた。 次男が李鮮吉、三男が李英一だ。

 

退任後いた李圭完影響力両者のエピソードで確認できるまず19397京春線開通式出席した水島謙春川旅行記旅行雑誌朝鮮観光19398月号掲載した著者特別李圭完氏ねてインタビューした内容記事めた日本朝鮮言論界によくられた内鮮一体先駆的人物だったからだ

 

第二1942李圭完80えると日本江原道庁産業部一生をまとめた李圭完翁逸話集出版したこの1956大韓民国江原道庁内務局によって李圭完翁逸史というタイトルで再刊行され1994には春川文化院がその再版した植民地時代道長官歴任した李圭完当然親日派リストにったが日本帝国大韓民国官吏たちは共通して非凡清廉人生記録として後世えるにすると判断したのである

 

これらのエピソードは1930年代末1940年代初めのことだから崔承喜春川公演があった1931には影響力がよりやかだったはずだところで李圭完崔承喜公演誘致関心があったのだろうか

 

1939年8月号の『朝鮮観光』には、李圭完のインタビュー記事が載っている。

 

李圭完一生武芸軍隊行政政務そして晩年農作業もれていたので芸術分野関心ったとはえないしかしりの々から春川崔承喜公演必要とか公演成事くしてほしいという要請けたとしたらどうだったのだろうか

 

さらに道庁官僚地域有志からしくてた公会堂崔承喜舞踊公演されれば春川発展様子られるといういていたなら春川への愛着かった李圭完興味っていただろう

 

そのような要請春川発展のために努力していた三五会春川繁栄会役員、「春川自動車社崔白洵春川公会堂建設した崔養浩またはその息子李英一李鮮吉からけたものである当時春川発展雰囲気かららは崔承喜招聘わせたのだろうそうしていたら春川政官財界有力者李圭完影響力りたいとっただろう

 

李圭完(左)は甲申政変居士日(1884年12月4日)、朴泳孝の行動隊員として郵政局に出動し、閔泳翊(右)の右耳を切ったが、閔泳翊は命拾いした。

 

むろんこれは推定。 「春川公演李圭完った可能性もあるという咸光福記者仮説もう極端めば達成できる結論ただしこの仮説証明できる文献証拠はまだなく今後発見されることを期待している

 

しかしこれまでの文献だけで1930年代初めに春川有力者一般市民団結春川近代化めたおかげで交通改善され公会堂新設されるなどえる成果げたことがかった

 

このような成果広報するためには全国的名声ていた崔承喜舞踊公演開催することよりも効果的方法がなかったというかだ。 (jc 2021/8/25秒高; 2024/2/18修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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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민일보>의 고 함광복 기자는 이선길과 이영일의 부친이자 일제하 초대 강원도장관이었던 이규완(李圭完, 1862-1946)이 최승희의 춘천공연을 주선했을 가능성을 주장했다. 입증자료가 제시되지 없으므로 아직은 가설이다. 하지만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으므로 함광복 기자의 가설을 검증할 수 있는 형태로 정리해 볼 필요는 있다.

 

우선 이규완이 최승희의 춘천공연을 주선했더라도 그것은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 춘천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을 통틀어 이규완 만큼 영향력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강원도장관(1908-1918)과 함경남도장관(1918-1924)을 역임한 후 62세의 나이로 춘천에 은퇴했지만 여전히 전국적 유명 인사였다.

 

퇴임 후 이규완은 중추원 참의직 등의 정무직은 거절했지만, 경제와 산업, 사회 활동은 계속했다. 그는 동양척식회사 고문(1924-1933), 조선산림협회 이사(1925-1937), 물산장려회 이사(1927-), 조선농업회 고문(1927-), 경성상공협회 상담(1930-), 한성시탄주식회사 설립(1936), 조선신문사 취체역(1936-1941)으로 근무했고, 신간회(1927-1931)에도 참여했다.

 

일제강점기 강원도와 함경남도 도장관을 역임한 이규완(오른쪽)과 그의 부인 나카무라 우메코(한국 이름 이매자). 나카무라 우메코는 일본인 외교관과 스페인 귀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으로, 이규완과의 사이에 5남4녀를 두었다. 둘째아들이 이선길, 세째아들이 이영일이다.

 

퇴임 후에도 유지되었던 이규완의 영향력은 두 일화로 확인된다. 첫째, 19397월 경춘선 개통식에 참석한 미즈시마 겐(水島謙)이 춘천 여행기를 여행잡지 <조선관광> 19398월호에 실었다. 저자는 특별히 이규완씨를 찾아가 인터뷰한 내용을 기사에 포함시켰다. 그는 일본과 조선의 언론계에 잘 알려진 내선일체의 선구적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1942년 이규완이 80세를 맞자 일제의 강원도청 산업부는 그의 일생을 정리한 책 <이규완옹 일화집>을 출판했다. 이 책은 1956년 대한민국의 강원도청 내무국에 의해 <이규완옹 일사>라는 제목으로 재간행했고, 1994년에는 춘천문화원이 그 재판을 냈다. 일제강점기에 도장관을 역임한 이규완는 당연히 친일파 명단에 올랐지만, 일제와 대한민국의 관리들은 공통적으로 그의 비범하고 청렴한 삶을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할 만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 일화들은 1930년대 말과 1940년대 초의 일이니, 최승희의 춘천공연이 있었던 1931년에는 그의 영향력이 더욱 생생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규완은 최승희 공연 유치에 관심이 있었을까?

 

1939년 8월호 <조선관광>에는 이규완의 인터뷰 기사가 실려있다.

 

이규완은 일생을 무예와 군대, 행정과 정무, 그리고 만년에는 농사일에 묻혀 지냈으므로 예술 분야에 관심을 가졌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주위의 인사들로부터 춘천에 최승희 공연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거나 공연 성사에 힘써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면 어땠을까?

 

더구나 도청의 관료 혹은 지역 유지들로부터 새로 지은 공회당에서 최승희 무용이 공연되면 춘천의 발전상을 널리 알릴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을 들었다면, 강원도와 춘천에 애착이 강했던 이규완로서도 흥미를 가졌을 법하다.

 

그런 요청이나 설명은 당시 춘천 발전을 위해 노력하던 <삼오회><춘천번영회>의 임원들로부터 들었을 수도 있고, <춘천자동차사>를 설립한 최백순이나 춘천공회당 건립에 앞장섰던 최양호, 혹은 그의 아들 이영일이나 이선길로부터 들었을 수 있다. 혹은 당시 춘천의 분위기로 보아서는 이들이 모두 최승희 무용공연을 초청하는 일에 함께 힘을 모았을 수 있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춘천 정관재계의 최고 유력인사 이규완의 영향력을 빌고 싶었을 것이다.

 

이규완(왼쪽)은 갑신정변 거사일(1884년 12월4일) 박영효의 행동대원으로 우정국에 출동 민영익(오른쪽)의 오른쪽 귀를 베었지만 목숨을 건졌다.

 

물론 이는 추정이다. ‘최승희 춘천공연은 이규완이 주선했을 수도 있다는 함광복 기자의 가설을 조금 더 극단으로 몰아가면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이기도 하다. 함광복 기자와 나의 이 가설이을 증명할 수 있는 문헌 증거는 아직 없으며, 한국에서는 앞으로도 발견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동안의 문헌 기록만으로도, 1930년대 초 춘천시민들이 조선인과 일본인의 구별 없이 유력인사들과 일반 시민들이 일치단결해 춘천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고, 그 덕분에 교통이 개선되고 공회당이 신설되는 등의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음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같은 성과를 대내외에 홍보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전국적 명성의 최승희의 무용 공연을 개최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일은 없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jc, 2021/8/25초고; 2024/2/18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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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光福(ハム·グァンボク)記者崔承喜犠牲的譲歩って春川公演ったのは、「一人後援者っていたからだと暗示したその後援者=崔承喜にとってれられない恩師…。当時淑明女學校訓育主任教師画家春泉·李英一·ヨンイルだというこれはくから月刊太白19894月号掲載された事実であると注釈もつけている

 

月刊太白記事そうと努力したがソウルの主要図書館(国立中央国会)には雑誌もなく春川市立図書館もそれを所蔵していなかったそのためその記事内容根拠はもちろんタイトルと文章執筆者さえ確認できていない状態

 

咸光福記者言葉通李英一1903-194「初代江原道長官めた李圭完·ギュワン三男先述した春川江原道警察局所属柔道選手李鮮吉だった李英一氏画家淑明女学校教員として在職したことがあるが、「訓育主任だったという叙述にはれていない記録には李英一氏淑明女子学校図画担当教員だったということだ

 

1928年、朝鮮美術展示会に入選した李英一の作品『田舎の少女』

 

李英一崔承喜指導したことはなかった淑明女学校教員として在職したのは1934から1943までで崔承喜李英一教員赴任する8年前19263淑明女学校卒業したためだ崔承喜春川公演断行した19312には李英一がまだ淑明女子学校赴任するだった

 

したがって崔承喜女学校恩師李英一後援けて春川公演をすることになったという主張納得しかも李英一春川ではなく京城んでいた1930年頃李英一鍾路チョンノ5画室鮮展出品作品制作していた

 

しかし李英一崔承喜春川公演成事方法貢献したかもれないそれは李英一崔承喜長兄崔承一(チェ·スンイル)とののためだ

 

1928年5月10日の『東亜日報』に掲載された李英一の鮮展特選作品『鷹追雉圖』

 

 

1928510東亜日報、「池上秀畝1874-1944画伯門下5年間研究したという記録から李英一東京留学したが美術学校にはわなかった池上秀畝当代日本画大家だった李英一1924帰国したので留学期間1919-1924であった日本大学美学科在学した崔承一留学期間1919-1923なる

 

当時東京留学生かった時代ではなかった1926東京留学卒業者数専門学校卒業生めて1301928卒業者数100であったから1924やそれ以前はもっとなかっただろう崔承一李英逸東京時代いに顔見知りか通声名程度だったにいない

 

しかも崔承一美学科在学中だったので勉強していた李英一とは格別交感があったはずだただし崔承一社会主義性向だった反面李英一日本植民地時代道長官父親親日性向家系だったため関心分野活動領域なっていたはずだ

 

 

1930年5月7日の『毎日申報』に掲載された李英一インタビュー記事。 記者が李英一の鍾路5街の画室で交わした対談を写真と共に記事にした。

 

李英一帰国して鮮展初入賞したのは1925だった東洋画部門出品作<>3入選したのであるこの崔承喜淑明女子学校4年生だった李英一翌年1926宣伝でも春光入選したが崔承喜はすでに日本舞踊留学だった

 

したがってこの時期崔承喜李英一いにうのはしかっただろう李英一氏親交っているがいたならそれは崔承喜ではなく兄崔承一だっただろう

 

もし李英一1931年初崔承喜舞踊公演春川誘致しようと決心していたならこれは崔承一との連絡じて可能だっただろう当時崔承一崔承喜公演活動のマネージャーをしていたからだ

 

李英一氏春川有志知人要請崔承喜舞踊公演春川誘致しようという提案けたなら李鮮吉よりも李英一氏崔承一氏じてこのメッセージをえる適任者だっただろう(jc2021/8/25秒高; 2024/2/18修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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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광복 기자는 최승희가 희생적 양보를 무릅쓰고 춘천 공연을 단행한 것은 한 사람의 후원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암시했다. 그 후원자는 (=최승희)에게 잊을 수 없는 은사 ... 당시 숙명여고 훈육주임교사이자 화가 춘천(春泉) 이영일(李英一)”이라고 했다. 이는 일찍이 <월간 태백> 19894월호가 밝혀 놓은 사실이라고 주석도 달았다.

 

<월간 태백>의 기사를 찾으려 노력했으나 서울의 주요도서관(국립중앙, 국회)에는 그 잡지가 없었고, 춘천의 시립도서관도 이를 소장하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그 기사의 내용과 근거는 물론 제목과 글쓴이조차 확인하지 못한 상태이다.

 

함광복 기자의 말대로 이영일(李英一, 1903-194)초대 강원도장관을 지낸 이규완(李圭完)3이었고, 앞서 서술한 춘천의 강원도 경찰국 소속의 유도선수 이선길의 동생이었다. 이영일은 화가였고 숙명여학교의 교원으로 재직한 바 있었지만 훈육주임이었다는 서술은 생소하다. 다른 기록에는 이영일이 숙명여학교의 도화(=미술)담당 교원이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1928년 조선미술전시회에 입선한 이영일의 작품 <시골소녀>

 

이영일이 최승희에게 그림을 지도한 적은 없었다. 그가 숙명여학교 교원으로 재직한 것은 1934년부터 1943년까지고, 최승희는 이영일이 교원으로 부임하기 8년 전인 19263월에 숙명여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이다. 특히 최승희가 춘천 공연을 단행했던 19312월에는 이영일이 아직 숙명여학교에 부임하기 전이었다.

 

따라서 최승희가 여학교 은사이영일의 후원을 받아 춘천 공연을 하게 되었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더구나 이영일은 춘천이 아니라 경성에 살았다. 1930년경 이영일은 종로5가에 화실을 내고 선전 출품 작품을 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영일은 최승희의 춘천 공연을 성사시키는 데에 다른 방식으로 기여했을 수는 있다. 그것은 이영일과 최승희의 큰오빠 최승일과의 인연 때문이다.

 

1928년 5월10일의 <동아일보>에 실린 이영일의 선전 특선작품 <꿩을 쫓는 매>

 

1928510일의 <동아일보>이케가미 슈호(池上秀畝, 1874-1944) 화백 문하에서 5개년 동안을 연구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영일이 도쿄 유학을 했지만 미술학교를 다니지는 않았다. 이케가미 슈호는 당대 일본화의 대가였다. 이영일은 1924년에 귀국했으므로 유학기간은 1919-1924년이었다. 니혼대학 미학과에 재학했던 최승일의 유학기간(1919-1923)과 겹친다.

 

당시에는 도쿄 유학생이 많던 시절이 아니었다. 1926년의 도쿄유학 졸업자수가 전문학교 졸업생 포함 130, 1928년의 졸업자수가 1백명이었으므로 1924년이나 그 이전에는 더 적었을 것이다. 최승일과 이영일은 도쿄시절 서로 안면식이나 통성명쯤은 했을 사이였음에 틀림없다.

 

더구나 최승일은 미학과 재학 중 소설수업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림 공부 중이던 이영일과는 각별한 교감이 있었을 수 있다. 다만 최승일이 사회주의 성향이었다면 이영일은 일제하 초대 강원도장관을 아버지로 둔 친일성향의 집안이었으므로 관심분야나 활동영역은 달랐을 것이다.

 

1930년 5월7일의 <매일신보>에 실린 이영일 인터뷰 기사. 기자가 이영일의 종로5가 화실에서 나눈 대담을 사진과 함께 기사화했다.

 

이영일이 귀국해 선전(鮮展)에 첫 입상한 것은 1925년이었다. 동양화 부문 출품작 <매화와 비둘기>3등으로 입선한 것이다. 이때 최승희는 숙명여학교 4학년이었다. 이영일은 이듬해인 1926년의 선전에서도 <춘광>으로 입선했지만, 최승희는 이미 일본 무용유학을 떠난 뒤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 최승희와 이영일이 서로 알고 지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영일이 교분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최승희가 아니라 그의 오빠 최승일이었을 것이다.

 

만일 이영일이 1931년초 최승희의 무용공연을 춘천에 유치하려고 마음먹었다면 이는 최승일과의 연락을 통해 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최승일이 최승희 공연활동의 매니저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영일이 춘천의 유지들과 지인들의 부탁으로 최승희 무용공연을 춘천에 유치하자는 제안을 받았다면, 형 이선길보다는 동생인 이영일이 최승일을 통해 이 메시지를 전달하는 적임자였을 것이다.(jc, 2021/8/25초고; 2024/2/18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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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川チュンチョン劣悪交通劇場そして収益性にもかかわらず崔承喜春川公演断行した理由について咸光福(ハム·グァンボク)記者のようにべた

 

春川では一人後援者彼女(=崔承喜)っていた崔承喜れられない恩師がいれば当時淑明女子高校訓育主任教師であり画家春泉李英一·ヨンイルげることができるだろう。(『月刊太白19894月号長兄覚一全日本柔道選手権大会した鮮吉直上

 

ちょうど李英一氏鮮吉朝鮮柔道英雄として登場したころだ1931はまだ柔聖ばれたではないしかし日本舞踊界新星として浮上した崔承喜名声っていたように崔承喜李鮮吉名声っていただろう2はダンスと柔道日本さぶった江原道んだ朝鮮英雄だった李圭完春川公演主催した可能性をうかがわせる」。

 

1937年全日本柔道選手権大会の<選士権大会>優勝者たちの団体写真。 右から2番目のメガネをかけた人が李鮮吉。

 

春川崔承喜後援者咸光福記者李英一李鮮吉兄弟父親李圭完氏げた。 「李英一崔承喜後援者だったという叙述客観的証拠提示されていないため推論にとどまったが検証してみる価値があるとじたまず咸光福記者叙述事実でないものはける必要があった

 

李鮮吉(1898-1971)柔道英雄ばれたのも事実である李鮮吉朝鮮人めて熱狂させたのは193211全日本柔道選手権大会選士権大会優勝したときだった。 『東亜日報号外発行報道したのは事実だがこれは崔承喜春川公演2年後のことだった

 

193110にも李鮮吉全朝鮮柔道選手権大会出場して準優勝したことがありこれが主要大会めての成績だった朝鮮総督賞授与される優勝日本人られ李鮮吉今日国務総理賞たる政務総監賞受賞したしかし李鮮吉政務総監賞受賞したのも崔承喜春川公演から半年ぎただった

 

 

すなわち19312月頃李鮮吉柔道界浮上する新星だったにいなく新聞には柔道試合戦績報道されめたがまだ朝鮮熱狂させる状況ではなかったこのため李鮮吉柔道人資格崔承喜舞踊団誘致できたとは

 

李鮮吉朝鮮人柔道英雄として浮上したのは193211日比谷音楽堂かれた3選士権大会壮年後期30-37部門優勝したときだった李鮮吉19341936にも同部門準優勝19371938には成年前期38-43部門相次いで優勝した柔聖ばれたのはこのだった李鮮吉選士権大会本選5回入賞する8かれてわれる予選戦パスした朝鮮人一人もいなかった

 

一方李鮮吉柔道選手だけでなく警察官経歴としても記憶される必要がある李鮮吉直接警察業務担当したかどうかはからないが春川所在江原道警察局所属柔道選手だった

 

 

当時江原道警察には朝鮮人がもう1いた崔白洵チェ·ベクスン, 1897-?)である江陵生まれの1921巡査部長任命され1923普通文官試験合格して警部補昇進1925まで江陵警察署勤務した1926から春川道警察局警務警部保安警備業務担当していた19289朝鮮弁護士試験合格19291春川弁護士開業した担当した事件としては19339間島カンド共産党事件裁判がある

 

春川弁護士事務所開業した直後崔白洵6春川有志たちとともに<春川自動車運送株式会社>設立京春街道自動車運送業にも参入した当時<春川繁栄会>組織春川発展させようという地域住民いを実践していたのである

 

年配じで江原道警察局勤務経験共有した李鮮吉崔白洵には親交があったはずだ(jc2021/8/25秒高; 2024/2/18修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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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의 열악한 교통과 협소한 극장, 그리고 낮은 수익성에도 불구하고 최승희가 춘천공연을 단행한 이유에 대해 함광복 기자는 다음과 같은 서술했다.

 

춘천에서는 한 사람의 후원자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 잊을 수 없는 은사가 있다면 당시 숙명여고 훈육주임교사이자 화가 춘천(春泉) 이영일(李英一)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월간 太白'19894월호) 이영일은 초대 강원도장관을 지낸 이규완(李圭完)3남이다. 맏형은 각일(覺一), 전일본유도선수권대회를 휩쓴 선길(鮮吉)은 바로 위형이다.

 

마침 이영일의 형 이선길은 조선 유도의 영웅으로 등장하던 무렵이다. 1931년은 아직 '유성(柔聖)'이라고 불리던 때는 아니다. 그러나 일본 무용계의 샛별로 떠오르던 최승희의 명성을 그가 알고 있었던 것처럼, 최승희도 이선길의 명성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춤과 유도로 일본을 흔든 강원도가 낳은 조선의 영웅이었다. 이규완이 그의 춘천공연을 주선했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1937년 전일본유도선수권대회인 <선사권대회> 우승자들의 단체사진. 오른쪽에서 두번째 안경쓴 사람이 이선길.

 

춘천에 거주하는 최승희의 후원자로 함광복 기자는 이영일, 이선길 형제와 그의 부친 이규완씨를 지목했다. ‘이영일이 최승희의 후원자였다는 서술은 객관적인 증거가 제시되어 있지 않아 추론에 머물렀지만, 검증해볼 가치가 있다고 느껴졌다. 먼저 함광복 기자의 서술 중에서 사실이 아닌 것은 가려낼 필요가 있었다.

 

이선길(李鮮吉, 1898-1971)이 유도 영웅으로 불렸던 것은 사실이다. 이선길이 조선인을 처음으로 열광시켰던 것은 193211월의 전일본유도선수권대회인 <선사권(選士權)대회>에서 우승했을 때였다. <동아일보>가 호외를 발행하며 대대적으로 보도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최승희의 춘천공연 2년 후의 일이었다.

 

193110월에도 이선길은 전조선유도선수권대회에 출전해 준우승을 차지한 바 있었고, 이것이 그가 주요 대회에서 처음 거둔 높은 성적이었다. 조선총독상이 수여되는 우승은 일본인에게 돌아갔고, 이선길은 오늘날의 국무총리상에 해당하는 정무총감상을 받았다. 하지만 이선길이 정무총감상을 받은 것도 최승희의 춘천 공연 이후 반년이 지난 후였다.

 

 

, 19312월경 이선길이 유도계에서 떠오르는 샛별이었음에 틀림없었고, 신문에는 그의 유도경기 전적이 보도되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조선을 열광시킬 상황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선길이 유도인의 자격으로 최승희 무용단을 유치할 수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선길이 조선인의 유도 영웅으로 떠오른 것은 193211월 히비야 음악당에서 열렸던 제3회 선사권(選士權)대회 장년후기(30-37) 부문에서 우승했을 때였다. 이선길은 1934년과 1936년에도 같은 부문에서 준우승했고, 1937년과 1938년에는 성년전기(38-43) 부문에서 연달아 우승했다. 그가 유성이라고 불린 것은 이때였다. 이선길이 선사권 대회 본선에서 5회 입상하는 동안 8개조로 나뉘어 진행되는 예선전이나마 통과한 다른 조선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한편 이선길은 유도 선수뿐 아니라 경찰관 경력으로도 기억될 필요가 있다. 이선길이 직접 경찰업무를 담당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춘천 소재 강원도 경찰국 소속 유도선수였다.

 

 

당시 강원도 경찰에는 조선인이 또 한명 있었다. 최백순(崔白洵, 1897-?)이다. 강릉 출생인 그는 1921년 순사에 임명되었고, 1923년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해 경부보로 승진, 1925년까지 강릉경찰서에서 근무했다. 1926년부터 춘천 도경찰국으로 옮겨와 경무와 경부, 보안과 경비업무를 담당하던 중 19289월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 19291월 춘천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다. 그가 담당한 사건으로는 19339월 간도공산당사건 재판이 있다.

 

춘천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 직후, 최백순은 6명의 춘천 유지들과 함께 <춘천자동사운송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경춘가도를 달리는 자동차 운송업에도 뛰어들었다. 당시 <춘천번영회>를 조직해가며 춘천을 발전시키자는 지역 주민들의 염원을 실천에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연배도 같고 강원도 경찰국 근무경험을 공유한 이선길과 최백순은 교분이 있었을 것이다. (jc, 2021/8/25초고; 2024/2/18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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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承喜巡業日程動線修正する犠牲的譲歩甘受しながら春川公演断行した理由だろうか一般的にそうしたことは影響力こる公演収益十分補てんしてもらえたらんでそんな犠牲甘受したはずだまた招聘じなかった場合らかの不利益ることになれば譲歩したかもしれない

 

ところが江原道民日報咸光福(ハム·グァンボク)記者影響力仮説提示したことがあった崔承喜評伝8のうち崔承喜春川公演について一文段以上叙述したはないが咸光福記者崔承喜江原道カンウォンドについて原稿用紙130枚書いた20069ごろあるインターネットサイトに投稿したわれわれはなぜ"崔承喜洪川"さなければならないのかという内容

 

 

この目的崔承喜出生地江原道洪川であることを立証することだったしかしその簡単命題立証するために130か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ということ自体その立証容易ではないことを反証する崔承喜出生地京城キョンソン=ソウルこれは戸籍学籍簿とパスポート土地台帳地籍原図記録マスコミインタビューそしてヨーロッパとアメリカの々で作成した入国書類証明している

 

一方咸光福記者がこのような文献記録反論するために提示した資料方法でも解釈できる新韓民報記事1つと崔承喜出生後7-80ぎて発行された雑誌記事2そして3世代ぎたてきた親戚村人証言だったしたがって資料信憑性重視する評伝著者たちは洪川出生説れていない

 

1938年2月3日の『新韓民報』の崔承喜米州公演関連記事。 これに崔承喜が「江原道洪川郡の崔濬鉉氏の霊愛」という叙述がある。 しかし、これは崔濬鉉氏が洪川出身であることを示しており、崔承喜の出生地が洪川であることを物語っているわけではない。

 

しかし咸光福記者貢献もある洪川出生説立証しようと提示した付随的叙述には崔承喜研究重要糸口えるものもあるためだ。 「崔承喜春川公演春泉李英一というタイトルの咸光福記者崔承喜春川公演についてのようにべている

 

全国巡回公演地春川んだ理由おかしなものにならざるをない大長征第一歩春川めたとすれば崔承喜しい舞踊芸術運動出発地故郷にしたかったのだろうか

 

もそうだがエンターテイメントと江原道密接ではないての巡回公演江原道はやむを参加させるようにいつも後回しだったしかも当時春川には舞踊公演消化できる環境っていなかった8年前開設された京春道路には8人乗りのワゴン10がソウルと春川しており京春線はまだ開通前

 

崔承喜舞踊芸術運動発祥地として春川んだとすれば春川には強力吸引力いているからだろう。 『毎日新報春川公演数百人群衆公演場のドアをしのけて乱入する事態発生した報道している現在文化劇場裏側にあった春川公会堂150坪余りのきさだという春川々が江原道出身舞踊家だったため熱狂したのではないかと推測できる」。

 

 

咸光福記者崔承喜全国巡回公演のという大長征第一歩春川めたのは江原道崔承喜故郷という強力吸引力のためだろうと主張したがこれは事実符合しない春川全国巡回初公演地ではなく洪川崔承喜出生地でもないためだ

 

崔承喜原跡江原道洪川うならしいかもしれない崔承喜父親崔濬鉉氏故郷洪川だからだだが崔濬鉉氏1902から1905京城移住戸籍上本籍まで京城変更した1902まれた長男崔承一洪川生まれだったが1912年生まれの崔承喜京城移住後需昌洞198番地まれた

 

それにもかかわらず咸光福記者叙述つの春川公演疑問くための提供した第一1931年当時春川舞踊公演のための条件っていないという確認第二そこには重要理由えば春川市民強力勧誘招待があったという推論むことができるようにしたのだ(jc2021/8/24秒高; 2024/2/18修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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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가 순회공연의 일정과 동선을 수정하는 희생적 양보를 감수하면서 춘천공연을 단행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일반적으로 그런 일은 영향력으로 일어난다. 공연 수익을 충분히 보전 받았다면 기꺼이 그런 희생을 감수했을 것이다. 또 초빙에 응하지 않았을 경우 모종의 불이익을 겪게 되면 양보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강원도민일보>의 함광복 기자가 영향력 가설을 제시한 바 있었다. 최승희의 평전 8권 중에서 최승희의 춘천공연에 대해 한 문단 이상 서술한 책은 없지만, 함광복 기자는 최승희와 강원도의 인연에 대해 원고지로 130매를 썼다. 20069월경 한 인터넷 사이트에 포스팅한 우린 왜 최승희의 홍천을 찾아야 하는가라는 글이다.

 

 

이 글의 목적은 최승희의 출생지가 강원도 홍천임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간단한 명제를 입증하려고 130매를 써야했다는 것 자체가 그 입증이 쉽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최승희의 출생지는 경성(=서울)이다. 이는 호적과 학적부와 여권 기록, 토지대장과 지적원도의 기록, 언론 인터뷰, 그리고 유럽과 미주의 여러 나라들에서 작성한 입국서류들이 증명하고 있다.

 

반면 함광복 기자가 이같은 문헌 기록을 반박하기 위해 제시한 자료는, 다른 방법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신한민보>의 기사 1개와 최승희 출생 후 7-80년이 지나서 발행된 잡지 기사, 그리고 3세대가 지난 후에 나온 먼 친척이나 마을 사람의 증언들이었다. 따라서 자료의 신빙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평전 저자들은 홍천 출생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1938년 2월3일의 <신한민보>의 최승희 미주공연 관련 기사. 여기에 최승희가 "그는 강원도 홍천군의 최준현씨의 영애"라는 서술이 나온다. 하지만 이는 최준현씨가 홍천 출신임을 가리키는 것은 확실하지만 최승희의 출생지가 홍천임을 가리킨다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함광복 기자의 공헌도 있다. 그가 홍천 출생설을 입증하려고 제시한 부수적 서술들 중에는 최승희 연구에 중요한 실마리를 주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최승희의 춘천공연과 춘천 이영일>이라는 소제목 아래 함광복 기자는 최승희의 춘천 공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가 전국 순회의 첫 공연지를 춘천으로 택한 이유가 이상하지 않을 수 없다. 대장정의 첫 걸음을 춘천에서 시작했다면 최승희는 새로운 무용예술운동의 시발지를 고향 땅으로 잡고 싶었던 것일까.

 

지금도 그렇지만 엔터테인먼트와 강원도는 밀접하지 않다. 모든 순회공연에서 강원도는 마지못해 끼워주는 것처럼 늘 뒷전이었다. 더구나 당시 춘천은 무용공연을 소화할 만한 여건도 변변히 되어있지 않았다. 8년 전 개설된 경춘 도로에는 8인승 승합차 10대가 서울과 춘천을 오가고 있었고, 경춘선은 아직 개통되기 전이다.

 

최승희가 무용예술운동의 시발지를 춘천으로 택했다면, 춘천에는 무언가 강력한 흡인력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매일신보>는 춘천 공연에서 '수백 명 군중들이 공연장 문을 밀치고 난입하는 사태가 발생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현 문화극장 자리 뒤편에 있었던 춘천공회당은 150평 남짓한 크기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춘천 사람들이 강원도 출신 무용가였기 때문에 열광했던 것은 아닌지를 짐작하게 하고 있다.”

 

 

함광복 기자는 최승희가 전국 순회공연의 이라는 대장정의 첫걸음을 춘천에서 시작한 것은 강원도가 최승희의 고향이라는 강력한 흡인력때문일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에 부합되지는 않는다. 춘천이 전국 순회의 첫 공연지도 아니었고, 홍천이 최승희의 출생지라는 주장도 아직은 사실로 확정된 상태가 아니다. 문헌증거가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최승희의 원적’이 강원도 홍천임은 확실하다. 최승희의 아버지 최준현씨의 고향이 홍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준현씨는 1902년에서 1905년 사이에 경성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되고, 호적상의 본적을 경성으로 변경했다. 1902년에 태어난 큰아들 최승일은 홍천 태생이었지만, 1912년생인 최승희는 경성 이주 후 수창동 198번지에서 태어났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이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이는 아직 단정할 수 있는 팩트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광복 기자의 서술은 두 가지 점에서 춘천공연의 궁금증을 풀기 위한 열쇠를 제공했다. 첫째는, 1931년 당시 춘천은 무용공연을 위한 여건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해 주었고, 둘째, 거기에는 뭔가 중요한 다른 이유, 예컨대 춘천시민들의 강력한 권유나 초대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준 것이다. (jc, 2021/8/24초고; 2024/2/18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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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川チュンチョン公演前後崔承喜舞踊団日程るとおかしな発見される1931221春川公演4日前217-18には釜山プサン公会堂公演がありその3日後224-25には大邱テグ劇場公演われた

 

釜山公演月半前1931110-12には京城キョンソン団成寺新春舞踊公演という名前3回崔承喜新作舞踊発表会があり10日前27-9には京城公会堂2回崔承喜舞踊公演会かれたこの2つの公演発表された新作をもとにチェ·スンヒ舞踊団地方公演ったのだがその初公演釜山公演だったのだ

 

釜山公演普通大邱公演うのが慣行にもじだった大邱公演ほとんど例外なく釜山公演いたこれは京釜線鉄道簡単移動できるためだ釜山から大邱までは鉄道3時間距離だった217-18釜山公演をしたなら191だけんで20-21には大邱公演をすることもいくらでも可能だった

 

1931年2月21日に決まった崔承喜舞踊団の春川公演は、4紙の春川支局が共同主催した行事だった。

 

ところが今回釜山大邱公演春川公演んできたそのため移動動線複雑になってしまった釜山-春川間には鉄道だけでなく自動車便もなかったしたがって釜山から春川くには汽車京城自動車春川か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春川公演わってもじだった自動車京城列車大邱かわ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それで17から21まで5日間十分だった釜山大邱公演だったがその春川公演んで釜山-春川-大邱公演をするのに17から25までほぼ10かかった大邱公演えた崔承喜舞踊団馬山マサン26-27)、裡里イリ31)、全州チョンジュ2-3)、群山グンサン4-5)、金堤キムジェ6)、礼山イェサン7公演けた

 

えれば慶尚道キョンサンドから全羅道チョンラド忠清道チュンチョンド京城ってくる南側地方公演途中春川公演突然入ったことがかるなぜこんなことがきたのだろうか

 

1931211東亜日報今回本紙春川支局では新春事業として崔承喜さんを招聘221から(旧暦正月5)市内公会堂舞踊公演会開催する報道したつまり崔承喜春川公演東亜日報春川支局崔承喜招聘したためにわれたということである

 

1931年2月11日の<東亜日報>は、崔承喜の春川公演が春川新聞社の「招聘」によって行われたと報じた。

 

春川公演東亜日報だけでなく朝鮮日報』、『京城日報』、『毎日新報4つの新聞社春川支局共同主催したものなので事実上春川マスコミ連合招聘われたことがかる

 

さらに217朝鮮新聞春川では崔承喜舞踊団一行犠牲的譲歩によりかろうじて公演できるようになったじた舞踊団甘受した犠牲的譲歩とはだろうか

 

上述崔承喜舞踊団巡回公演日程によると慶尚-全羅-忠清地域公演がすでにてられてから春川公演招聘われ崔承喜はこの招聘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ので釜山大邱公演春川公演まれていたことがかる

 

1931年2月17日の『朝鮮新聞』も崔承喜の春川公演を報じた。 <朝鮮新聞>はこの公演の主催側ではなかったが春川公演を持続的に報道した。

 

日程調整崔承喜舞踊団釜山-大邱汽車)」移動経路釜山-京城汽車-春川(自動車-京城自動車-大邱汽車)」変更数時間しかなかった釜山-大邱移動経路34えた春川公演予想された収益がほとんどなかったため春川公演れたのは崔承喜舞踊団犠牲的譲歩わざるをないだろう

 

春川公演むことになったため、崔承喜地方公演日程全体的再調整されるべきだったのだろう地方公演まりであった釜山公演日程をこれ以上繰げ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り春川公演わった大邱公演とそののすべての公演日程再調整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はずだ

 

収益可能性さえかったにもかかわらず崔承喜犠牲的譲歩をしながら春川公演断行した理由だろうか春川公演招聘れなかった理由だろうか。 (jc、2021/8/23草稿; 2024/2/18修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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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공연 전후의 최승희무용단 일정을 보면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1931221일의 춘천 공연 4일전인 217-18일에는 부산공회당에서 공연이 있었고, 그 사흘 뒤인 224-25일에는 대구극장에서 공연이 열렸다.

 

부산 공연의 한달 반 전인 1931110-12일에는 경성의 단성사에서 신춘무용공연이라는 이름으로 <3회최승희신작무용발표회>가 있었고, 열흘 전인 27-9일에는 경성공회당에서 <2회최승희무용공연회>가 열렸다. 이 두 공연에서 발표된 신작을 가지고 최승희무용단이 지방공연에 나섰던 것인데, 그 첫 공연이 부산공연이었던 것이다.

 

부산공연 다음에는 보통 대구에서 공연을 가지는 것이 관행이다. 거꾸로도 마찬가지였다. 대구 공연을 가진 다음에는 거의 예외 없이 부산공연이 이어졌다. 이는 경부선 철도로 쉽게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대구까지는 철도로 3시간 거리였다. 217-18일에 부산공연을 했다면, 19일 하루만 쉬고 20-21일에는 대구공연을 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1931년 2월21일로 정해진 최승희 무용단의 춘천공연은 4개 신문의 춘천지국들이 공동으로 주최한 행사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부산과 대구 공연 사이에 춘천 공연이 끼어들었다. 그 때문에 이동 동선이 복잡해지고 말았다. 부산-춘천 사이에는 철도뿐 아니라 자동차편도 없었다. 따라서 부산에서 춘천에 가려면 기차로 경성으로 돌아왔다가 자동차로 춘천에 가야했다. 춘천 공연이 끝나고도 마찬가지였다. 자동차로 경성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기차로 대구로 향해야 했다.

 

그래서 17일부터 21일까지 5일이면 충분했을 부산과 대구 공연이었지만, 그 중간에 춘천공연이 끼어드는 바람에 부산-춘천-대구 공연을 하는데 17일부터 25일까지 거의 열흘이 걸렸다. 대구 공연을 마친 후 최승희 무용단은 마산(26-27), 이리(31), 전주(2-3), 군산(4-5), 김제(6), 예산(7) 공연을 이어나갔다.

 

다시 말해 경상도에서 전라도를 거쳐 충청도를 돌아 경성으로 돌아오는 남쪽 지방공연 중에 춘천 공연이 느닷없이 끼어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1931211일의 <동아일보>금번 본보 춘천지국에서는 신춘사업으로 최승희양을 초빙하여 221일부터(음력 정월5) 시내 공회당에서 무용공연회를 개최하리라고 보도했다. 즉 최승희 춘천공연은 초빙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밝힌 것이다.

 

1931년 2월11일의 <동아일보>는 최승희의 춘천공연이 춘천 신문사의 "초빙"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보도했다.

 

춘천공연은 <동아일보>뿐 아니라 <조선일보>, <경성일보>, <매일신보> 4개 언론사의 춘천지국들이 공동 주최했으므로 사실상 춘천 언론사들의 연합초빙으로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더해 217일의 <조선신문>춘천에서는 최승희무용단 일행의 희생적 양보에 의해 겨우 공연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보도했다. 최승희 무용단이 감수한 희생적 양보란 무엇일까?

 

위에 서술한 최승희 무용단 순회공연 일정에 따르면 경상-전라-충청 지역 공연이 이미 세워진 후에 춘천 공연 초빙이 이뤄졌고, 최승희는 이 초빙을 거절할 수 없었으므로 부산과 대구 공연 사이에 춘천공연을 끼워 넣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1931년 2월17일의 <조선신문>도 최승희의 춘천공연을 보도했다. <조선신문>은 이 공연의 주최측이 아니었지만 춘천공연을 지속적으로 보도했다.

 

이 같은 일정조정으로 최승희 무용단은 부산-대구(기차)’의 이동경로를 부산-경성(기차)-춘천(자동차)-경성(자동차)-대구(기차)’로 변경해야했고, 기차로 수 시간에 불과했을 부산-대구사이의 이동경로가 34일로 늘어났다. 춘천공연의 예상 수익이 거의 없었던 수준이었으므로, 춘천 공연을 수용한 것은 최승희 무용단의 희생적 양보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춘천 공연이 끼어들게 되자 최승희 지방공연 일정은 전체적으로 재조정되어야 했을 것이다. 지방공연의 시작이었던 부산 공연의 일정을 더 앞으로 당겨야 했거나, 춘천 공연이 끝난 후의 대구공연과 그 이후의 모든 공연 일정을 다시 조정해야했을 것이다.

 

수익 가능성조차 낮았는데도 최승희가 희생적 양보를 하면서 춘천 공연 초빙을 단행한 까닭은 무엇일까? 춘천 공연 초빙을 거절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jc, 2021/8/23초고; 2024/2/18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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