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737건

무용시 소곡 <법열(法悅호에츠, 1916, 도쿄)>은 이시이 바쿠가 창작한 최초의 작품이자, 일본 신무용의 첫 작품으로 꼽힌다. <법열>의 초연은 191662일부터 4일까지 제국극장에서 열렸던 <신극장> 1회 발표회였다.

 

<신극장>은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오사나이 카오루(小山内薫, 1881-1928)가 창단한 극단으로, 연극뿐 아니라 음악과 무용을 함께 상연했던 종합예술극단이었다. 연극은 오사나이 카오루가 주도했던 반면, 음악은 야마다 코사쿠(山田耕莋, 1886-1965), 무용은 이시이 바쿠(石井漠, 1886-1962)가 주도했다.

 

그런데 이 최초의 <신극장> 발표회에서 상연된 이시이 바쿠의 무용작품은 모두 야마다 코사쿠와의 협력을 통해 완성된 것이었다. 특히 <법열>이 그랬다. 이 작품이 <신극장> 1회 발표회에서 발표되었을 때의 첫 제목은 <일기의 한쪽(日記一頁)>이었다. 이 제목은 당시 야마다 코사쿠가 글이 아니라 작곡으로 일기를 써나가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 어느 하루의 일기로 쓴 곡을 바탕으로 이시이 바쿠가 안무를 한 곳이 바로 <일기의 한쪽>이었고, 후일 이 작품의 제목이 <법열>로 개칭되었던 것이다.

 

 

이시이 바쿠의 초기작품은 야마다 코사쿠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 1886년 도쿄에서 태어난 야마다 코사쿠는 1908년 도쿄 음악학교(현 도쿄 예술대학) 성악과를 졸업했고, 재벌 미츠비시(三菱)의 총수 이와사키 코야타(岩崎小弥太)의 원조를 받아 1910년부터 1913년까지 베를린 왕립 아카데미 고등음악원(·베를린 예술 대학 음악학부)에 유학, 막스 부르크에게서 작곡을 배웠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좋아해 그의 제자가 되기를 자청하기도 했다.

 

한편 야마다 코사쿠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 1914년 일본으로 돌아올 때에 러시아를 경유하면서 접하게 된 스르리아빈의 음악을 접하고 자신의 음악에 스크리아빈의 양식을 다수 도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19141월 일본으로 돌아온 야마다 코사쿠는 이와사키 코야타의 재정지원으로 조직된 도쿄 필하모닉 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를 맡았다. 그러나 야마다 코사쿠의 불륜 문제가 불거지면서 이와사키 코야타는 지원을 끊었고, 이후 야마다 코사쿠는 1918년 미국으로 건너갈 때까지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운데 창작에 집중했다.

 

 

야마다 코사쿠가 음악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1915년경부터 야마다 코사쿠는 <쁘띠 포엠>, <단시곡(短詩曲)>라는 제목과 날짜를 붙인 피아노 소품곡들을 작곡했는데, 이를 발표할 때에는 <일기의 한쪽>이라고 불렀다. 후일 이 단시곡들이 출판되었을 때에는 스크랴빈풍의 작풍에서 배우고, 사적인 표제를 가지는 소품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1916년 야마다 코사쿠가 작곡한 피아노 작품에 이시이 바쿠가 안무한 <일기의 한쪽>이라는 무용작품이 <신극장> 1회 발표회에서 발표되었는데, <이시이바쿠 팜플렛 제1>에는 이 작품을 우리가 만든 최초의 무용시라고 서술했고, “대정4년경(=1915) 야마다 코사쿠씨가 지휘한 음악에 맞추어 제국극장에서 상연했던 작품 중의 하나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 서술에서 우리가 만든 최초의 무용시라고 한 것은 이 작품 창작에 야마다 코사쿠와 이시이 바쿠의 협력으로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안무 과정에서도 음악과 춤동작을 서로 맞추기 위해 두 사람이 긴밀하게 협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발표시기를 1915(=다이쇼4)이라고 한 것은 1916년의 잘못이다. <일본양무사연표>에 따르면 <신극장>의 제1회 발표회가 제국극장에서 열렸던 것은 191662일부터 4일까지 3일간이었기 때문이다.

 

 

미도리카와 준(綠川潤)<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생애(2006)>에 따르면 <법열>한 청년이 미혹의 세계로부터 근심을 버리고 평안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것으로, 이는 작곡자 야마다 코사쿠와 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삶의 목표이기도 했다.

 

특히 이시이 바쿠는 가난과 예술적 난관에서 생기는 미혹에서 벗어나 근심 없는 평화를 얻고 싶어 했는데, 그가 자신의 이름을 타다즈미(忠純)에서 바쿠()으로 바꾼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당시 그는 앞날이 망막(茫漠)하다고 해서 그중 막()자를 선택해 그의 예명으로 쓰기 시작했다. (*)

,

이시이 바쿠의 부산공연 레퍼토리에서 3번째 곡은 <꿈꾸다(みる유메미루)>였다. <이시이바쿠 팜플렛 제1>에서는 <꿈꾸다>1922(=다이쇼12)에 베를린에서 창작된 작품이라고 밝혔고, <이시이바쿠 팜플렛 제4>에서도 이 작품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Georg Strauss, 1864-1949)의 음악에 맞춰 안무된 작품이며, “우아한 처녀의 성스럽고 순수한 즐거움에의 욕구에 대한 차분하고 서정적인 고백이라고 서술되어 있었다.

 

부산공연의 1번째곡 <멜랑콜리>은 이시이 바쿠와 이시이 코나미의 이중무였고, 2번째곡 <법열>은 이시이 바쿠의 독무였던 반면, 3번째 곡인 <꿈꾸다>는 이시이 코나미의 독무로 발표되었다. 따라서 <꿈꾸다>는 여성적인 분위기의 무용작품이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꿈꾸다>1922년 베를린에서 창작되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정확히 어느 시기에 안무되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이시이 바쿠가 마르세유에 도착한 것인 1922114일이었고, 파리를 경유해 베를린에 도착했을 때는 1월말이었을 것이다. 겨울 동안 베를린 거주 일본인들이 모인 가운데 호텔 연회장에서 한차례 공연을 가졌던 것을 제외하면 다른 공연 활동은 없었다.

 

베를린에 도착한지 2개월쯤 지났을 때 한 미술 전람회에서 이시이 코나미가 <멜랑콜리><비통한 그림자>를 발표했는데, 이것이 신문에 보도되면서 <일본인 무용가>의 존재를 알릴 수 있었다. 그 덕분에 1922424, 브리츠너짤 콘서트홀에서 독일 첫 공연을 열어 <젊은 판과 님프>, <멜랑콜리>, <명암> 등의 창작품을 발표했다. 이 공연의 성공에 힘입어 독일의 여러지역에서 공연을 가졌고, 독일의 정상급 무용가 안나 파블로바와 함께 <힘과 미의 길(Wege zu Kraft und Schönheit, 1925)>이라는 문화영화에도 출연했다.

 

 

이시이 바쿠의 공연은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등의 동유럽 지역으로 이어졌다가 9월초 베를린으로 돌아왔을 때 관동대지진 소식을 전해 들었다. 10월 초에야 아내 야에코의 편지를 통해 가족들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었고, 유럽 공연을 계속했다. 10월말부터 다시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스코틀랜드와 글래스고, 런던과 파리, 벨기에 등지에서 발표회를 가졌는데, 벨기에에서 뉴욕 공연 계약이 성사되어 10월말 파리와 르아브르를 경유해 뉴욕으로 향했다.

 

따라서 이시이 바쿠가 <꿈꾸다>를 창작할 시간이 있었다면, 그것은 19221월말 베를린에 도착해서 424일 첫 베를린 공연을 가질 때까지의 비교적 한가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에는 연이은 공연 때문에 차분하게 창작에 전념할 시간적, 정신적 여유를 갖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창작된 <꿈꾸다>424일의 베를린 공연 이후 유럽 각지에서도 발표되었을 것인데, 특히 <꿈꾸다>의 배경음악은 베를린에서 활동했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악곡이었으므로 베를린의 관객들에게는 친근감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꿈꾸다>의 배경음악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어떤 작품인지는 문헌에 밝혀져 있지 않다. 널리 알려진 슈트라우스의 작품 중 을 소재로 한 것으로 대략 2개를 꼽을 수 있다. 하나는 슈트라우스의 작품번호 9번 피아노곡 <Stimmungsbilder(1884)>4번째 곡 <몽환(Trauimerei)>인데, 오늘날 널리 알려진 슈만의 <트로이메라이>와는 다른 곡이다.

 

 

다른 하나는 세 개의 가곡으로 이루어진 작품번호 29번의 첫 번째 곡인 <황혼의 꿈(Traum durch Dämmerung(1895)>이다. <몽환><황혼의 꿈>은 모두 230초 안팎의 짧은 곡이지만, 편곡을 통해 조정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꿈꾸다>의 영상이나 사진은 남아 있지 않으므로 음악과 동작에 대한 더 자세한 사항은 밝히기 어려운 상태이다.)

 

이시이 바쿠의 안무에 적합했을 음악은 <황혼의 꿈>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황혼의 꿈>은 오토 비어바움(Otto Bierbaum)이 지은 같은 제목의 시(1897)에 곡을 붙인 가곡으로, 노랫말은 대체로 차분하고 서정적일뿐 아니라 아름다운 여인도 등장하기 때문이다. 2절로 되어 있는 <황혼의 꿈>의 노랫말 1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두운 황혼의 너른 초원에/ 해는 저물고 별들이 떨고 있다./ 나는 지금 아름다운 여인을 찾아간다./ 검붉은 황혼 속, 초원의 저 높은 곳,/ 재스민 깊은 덤불 속에 사는 그녀를.” (*)

,

이시이 바쿠의 첫 부산공연의 첫 발표작품은 <멜랑콜리(メランコリイ, 1922)>였다. 19277월에 발간된 <이시이 바쿠 팜플렛1(1927)>에는 이 작품이 이시이 바쿠가 유럽행 여객선 키타노마루(北野丸) 선상에서 안무한 작품이라고 서술되어 있다.

 

이시이 바쿠는 1922124, 그의 처제(=아내의 여동생) 이시이 코나미(石井小浪)와 함께 고베에서 기타노마루(北野丸)에 승선해 프랑스로 향했다. 그의 첫 해외 순회공연이었다. 이 즈음 이시이 바쿠는 오랜 무명 시절 끝에 대중적 성공을 이뤄냈고, 마침내 무명의 설움을 벗어나 돈도 벌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 그러나 이시이 바쿠는 아사쿠사 오페라의 대중적 인기보다 순수예술무용을 추구하기로 하고 유럽으로 떠났다.

 

 

이시이 바쿠가 고향 아키타(秋田)을 떠나 도쿄로 상경한 것은 19093, 그의 나이 24세 때였다. 평론가 오마치 케이게츠(大町桂月, 1869-1925), 음악가 코마츠 코츠케(小松耕輔, 1884-1966) 등을 찾아가 문학수업과 음악수업을 시작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대중소설 작가 코츠기 텐가이(小杉天外, 1865-1952)의 문하에서 잠시 문학수업을 했으나 만족하지 못했다.

 

19112<제국극장>이 모집한 관현악 단원 모집에 응모한 이시이 바쿠는 25명의 한 명으로 합격, 바이얼린 주자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이시이 바쿠는 입단 2달 만에 무단결근을 이유로 해고됐다. 딱한 사정의 친구를 위해 관현악단에서 대여 받은 바이올린을 전당포에 맡겼다가 되찾아오지 못했고, 악기가 없어 연습에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118월 이시이 바쿠는 제국극장에 다시 채용되었다. 이번에는 관현악부가 아니라 가극부였다. 제국극장은 극장 건물이 완성되기 전부터 여배우 양성소를 설치했고, 1기생 모리 리츠코 등의 활약으로 흥행에 성공한 데 힘입어, 이번에는 가극부, 즉 오페라단을 창단한 것이다.

 

 

4백여명이 응모해 15명이 채용된 가극부 1기생 중에 이시이 바쿠가 포함되었고, 이후 4년 동안 성악과 무용, 연기 등을 연습하면서 공연에 출연했다. 재정난을 이유로 가극부가 관현악부와 병합되어 양극부로 개칭된 후, 발레 교사로 초빙된 로지와의 갈등으로 이시이 바쿠는 1915년 양극부를 자퇴했다.

 

이후 이시이 바쿠는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음악가 야마다 코사쿠(山田耕莋, 1886-1965)와 극작가 오사나이 카오루(小山内薫, 1881-1928)와 교류하면서 일본의 신무용을 개척했다. 두 사람은 제국극장에서 실망과 실패를 경험한 이시이 바쿠를 격려하고 용기를 주었고, 이들의 우정은 평생 계속되었다.

 

이시이 바쿠의 신무용 첫 발표는 191662-4일 제국극장에서였다. 오사나이 카오루가 창단한 극단 <신극장>의 제1회 발표회에서였다. 이시이 바쿠는 야마다 코사쿠의 음악에 자신의 안무를 곁들인 신무용 작품 <일기의 한쪽(日記一頁)><이야기(ものがたり)>를 발표했다. 관객과 언론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관객은 29명에 불과했고 그나마 대부분 초청인사들이었다. 언론의 반응도 냉담했다.

 

 

이시이 바쿠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곧이어 626일부터 3일간, 혼고자(本郷座)에서 열린 <신극장> 2회 공연에서 <명암(明闇)>을 발표했고, 9월에는 우치노마루의 보험협회강당에서 열린 <신극장> 3회 공연에서 창작무용 <유모레스크(ユーモレスク)>, <젊은 판과 님프(きパンとニンフ)>, <파란 불꽃()> 등을 발표했다. 관객과 언론의 반응은 여전히 싸늘했다. 일본 전통무용도 아니고 서양식 발레도 아닌 새로운 양식의 무용 공연이 관객들이나 평론가들에게 생소하게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연이은 실패 후 191610월 이시이 바쿠는 생활을 위해 다카라즈카 소녀가극단의 무용 강사로 부임했다. 그러나 다카라즈카의 오락무용에 만족하지 못했던 이시이 바쿠는 1917224일 오사카의 긴마츠자(近松座)에서 <근대성악무용대회>를 열고 도쿄에서는 실패했던 자신의 작품들을 다시 상연했다. 이번에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오사카의 성공에 힘입은 이시이 바쿠는 도쿄로 돌아와 카마쿠라(鎌倉)와 쇼난(湘南), 오이소(大磯)와 히라쓰카(平塚)와 요코하마(横浜) 등지에서 <납량음악무용대회>를 성공으로 이끈 후 19171023일 도쿄가극좌(東京歌劇座)공연에서 도쿄의 관객과 평론가들의 인정을 받았다.

 

 

1917년 교토 <미나미자(南座)> 공연 중에 오바 야에코(大場八重子)를 만났고 도쿄에 돌아와 결혼했다. 혼인신고는 그로부터 2년 뒤인 191921일로 되어 있다.

 

<도쿄가극좌> 좌장으로 흥행에 성공한 후 이시이 바쿠는 19189<도쿄가극좌>를 떠나 <도쿄오페라좌>를 새로 결성, 활동을 계속했다. 이때 아내 야에코의 여섯 살 연하의 여동생 코나미(小浪)가 입단해 재능을 발휘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도쿄오페라좌>가 인기를 구가하기 시작할 무렵 이시이 바쿠는 폐침윤(肺浸潤)을 진단받아 치바현립병원에 입원해 1년 동안 폐렴 치료를 받았다. 1920년 봄에 치바(千葉) 현립병원을 퇴원한 이시이 바쿠는 <도쿄오페라좌>에 복귀했지만 그때부터는 도쿄 공연보다 지방 순회공연에 주력하기로 결정하고 홋카이도로 떠났다.

 

 

홋카이도 첫 공연은 하코다테(函館) 공연이었다. 입원 중에 구상한 돌도라(ドルドラ)<추억>, 세자르크이(セザールクイ)<오리엔탈>, 사이토 주산(斉藤住三)<도성사의 환상>, 야마다 코사쿠 곡 <포엠> 등 예술성 높은 신작 무용을 선보였다. 닷새에 걸친 하코다테 공연은 연일 대만원이었고, 구시로(釧路)에서도 성황을 이뤘다. 홋카이도 공연 후 이시이 바쿠는 도호쿠(東北), 호쿠리쿠(北陸), 간사이(關西) 등의 순회공연을 계속했고, 어디에서나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고된 순회공연 때문인지 이시이 바쿠는 다시금 건강을 해쳤다. 오사카 공연 중 숙소에서 빈혈로 쓰러져 아베노(安倍野)의 조사(鳥瀉)병원에 실려 갔는데 유문협착증(幽門狭窄症) 진단을 받았다. 재기 불능일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에 즉각 수술을 받았는데 집도한 조사 박사는 강한 정신력 덕분인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고 치하했다.

 

 

바쿠는 수술 후에도 한 달 동안 입원치료를 해야 했지만, 퇴원하자마자 <도쿄 오페라좌>로 돌아와 큐슈(九州)와 산요(山陽)지방 공연을 계속했다. 순회공연 도중 아내 야에코는 도쿄에 돌아가 1921330일 장남 이시이 칸(石井歓, 1921-2009)을 출산했다. 당시 이시이 바쿠는 36, 야에코가 25세였다.

 

신작 구상을 위한 시간을 절실히 필요로 했던 이시이 바쿠는 19215월 고베의 취락좌(聚楽座) 공연을 마지막으로 <도쿄 오페라좌>를 해산하고, 도쿄 아사쿠사 마츠바쵸(松葉町)의 집에 돌아와 처제 이시이 코나미(石井小浪)를 상대로 창작무용에 전념했다.

 

 

그는 이때부터 무용의 본고장 유럽으로 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선배이자 스승인 야마다 코사쿠는 바쿠씨의 창작 무용은 유럽의 일류 극장에서도 통용될 것이라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시이 바쿠는 1922124일 이시이 코나미를 대동하고 고베항에서 기타노마루(北野丸)에 승선해 프랑스로 향했다.

 

여행 중에도 이시이 바쿠는 창작을 쉬지 않았고, 그 항해 중에 창작한 작품이 부산공연의 첫 작품이었던 <멜랑콜리>였던 것이다. 이시이 바쿠의 키타노마루 항해는 1922124일 고베항에서 시작되어 1922114일 마르세유에 도착했으므로, 42일간의 어느 시점이 <멜랑콜리>의 창작시기일 것이다.

 

 

<이시이 바쿠 팜플렛 1>에는 이 작품이 에드워드 그리크(Edvard Grieg, 1843-1907)의 피아노 독주 작품 <멜랑콜리(Melankoli)>을 배경음악으로 하여 안무된 작품이며, 그 정조는 우울하고, 눈 내리는 무거운 하늘 아래에 웅크리고 있는 그림자와도 같은, 북방적인 분위기 속에서 포착하기 어려운 흔들리는 허무한 환상을 묘사한 작품이라고 서술되었고, “미키 로후(三木露風, 1889-1964)의 시 <황야(荒野)>에서 힌트를 얻은 무용시라는 주석도 달려 있다.

 

그러나 <멜랑콜리>의 영상이나 사진, 추가적인 작품설명 등이 오늘날까지 전해진 것이 없으므로 이 작품의 모습을 짐작하거나 재현할 방법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

 

,

1926328일 개최되었던 이시이무용단 부산공연 발표곡 12작품은 321-23일의 경성공연 레퍼토리와 거의 같았다. 그런데 이 작품들은 또 대부분 일 년 전인 1925428일부터 51일까지 도쿄 아사쿠사(浅草)의 쓰키지(築地)소극장에서 열렸던 이시이 바쿠와 이시이 코나미의 <귀조(歸朝)1회무용시공연>에서 발표된 작품들이었던 것이었다. 1926328일의 <부산일보>에 보도된 부산공연 발표곡은 다음의 12곡이었다.

 

 

1: (1) 무용시 <멜랑콜리(メランコリイ, 1922, 北野丸키타노마루)>, (2) 무용시소곡 <법열(法悅호에츠, 1913, 도쿄)>, (3) 무용시 <꿈꾸다(みる유메미루, 1922, 베를린)>, (4) 극적무용 <갇힌 사람(はれたる토라와레타루히토, 1922, 베를린)>, (5) 어린이무용(童踊) <개구장이(わんぱく小僧완파쿠고조, 1926)>, (6) 무용시 <산을 오르다(야마오노보루, 1925, 무사시사카이)>.

 

2: (7) 무용극 <명암(明闇민야미, 1913, 도쿄)>, (8) 무용시 <솔베이지의 노래(ソルヴエーヂの, 1924, 뉴욕)>, (9) 표현파풍의 무용시 <마스크(マスク, 1924, 뉴욕)>, (10) 무용시 <고뇌하는 그림자(ましき나야마시키카게, 1921, 도쿄)>, (11) 무용시극 <젊은 판과 님프(きパンとニンフ와카키판토닌후, 1913, 도쿄)>, (12) 번외 <일본무용(1926)>.

 

이중 <개구장이(1926)><산을 오르다(1925)>, 번외의 <일본무용(1926)>을 제외한 모든 작품은 이시이 바쿠와 이시이 코나미의 <귀조제1회무용시공연>에서 발표된 작품들이었다. 이중 <법열(1913)><명암(1913)>, <젊은 판과 님프(1913)>3작품은 이시이 바쿠가 야마다 코사쿠와 협력해 무용시 운동을 시작하면서 창작한 작품들이었고, <고뇌하는 그림자(1921)>는 이시이 바쿠가 구미순회공연을 떠나기 직전에 만든 작품이었다.

 

 

한편 <멜랑콜리(1922)><꿈꾸다(1922)>, <갇힌 사람(1922)><솔베이지의 노래(1924)>, <마스크(1924)> 등의 5작품은 이시이 바쿠가 구미 순회공연 중에 창작한 작품들이다. 따라서 부산 공연 12개 작품 중 8개는 구미 순회공연까지 창작된 작품들이었던 것이다.

 

반면, <산을 오르다(1925)>1925109일부터 11일까지 3일간 같은 쓰키지 소극장에서 개최되었던 <2회 신작무용시발표회>의 발표곡이었다. 이는 구미 순회공연에서 돌아와 무사시사카이(武蔵境)에 무용연구소를 개소한 다음에 창작한 것으로, 이후 이시이 바쿠의 전 무용경력을 통해 가장 유명한 대표작의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다.

 

1926년에 초연된 <개구장이>는 만주와 조선 순회공연에 참가한 이시이 에이코(石井榮子)가 공연할 수 있도록 창작한 작품으로 보이며, 이시이 코나미(石井小浪)<일본무용>은 만주와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관객들을 위해 창작한 일본색 짙은 작품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시이 바쿠의 부산공연에서는 입단 3일차의 최승희가 맡을 역할은 없었을 것이다. 공연 준비에 참가하거나, 공연 중 대기실에서 의상과 소품 등을 위한 심부름을 하는 것 외에는 다른 직접적인 참가방법이 없었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최승희가 부산공연을 선용하는 최적의 방법은 공연을 관찰하면서 무용과 무용공연에 대해 생각하고 배우는 것이었을 것이다.

 

최승희는 부산공연 레퍼토리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최승희와 이시이 바쿠는 이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이 없지만, 최승희가 배운 점이 많았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이 무용 작품들이 스승에 의해 창작된 것임을 알게 된 것이 가장 큰 깨달음이었을 것이다. 당시 이시이무용단에서 안무가는 이시이 바쿠뿐이었고, 나머지 3명은 그가 창작한 작품을 익혀 공연하는 무용수였다. 심지어 구미 순회공연에 동행했던 코나미조차도 안무가가 아니라 무용수에 머물렀다.

 

대구와 부산에서의 초기 공연 관람을 통해 최승희는 무용가 중에서도 안무가와 무용수가 구별된다는 사실, 그리고 안무가를 겸한 무용가야말로 자신이 지향하는 진정한 무용가라는 점을 깨달았을 것으로 보인다. 최승희가 비교적 초기부터 안무가가 되려고 결심하게 된 것은 입단 직후부터 공연을 내부에서 관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

이시이 무용단의 첫 부산공연은 1926328-29일 오후6시에서 부산 국제관에서 열렸다. 325일 아침 이시이 무용단에 입단했던 최승희는 이날이 입단 3일째였으므로 실제 공연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신입단원으로서 공연을 참관한 것은 326일의 대구공연에 이어 두 번째였다.

 

이 공연에서 발표된 작품은 모두 12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926328일의 <부산일보>11개 작품이 2부로 나뉘어 공연되었다고 보도했다. 1부는 (1) 무용시 <멜랑콜리(メランコリイ)>, (2) 무용시소곡 <법열(法悅)>, (3) 무용시 <꿈꾸다(みる)>, (4) 극적무용 <갇힌 사람(はれたる)>, (5) 어린이무용(童踊) <완바쿠고조(わんばく小僧)>, (6) 무용시 <산을 오르다()> 등으로 구성되었고, 휴식(休憩) 후에 재개된 2부에서는 (7) 무용극 <명암(明闇)>, (8) 무용시 <솔베이지의 노래(ソルヴエーヂの)>, (9) 표현파풍의 무용시 <마스크(マスク)>, (10) 무용시 <고뇌하는 그림자(ましき)>, (11) 무용시극 <젊은 판과 님프(きパンとニンフ)>가 상연되었다.

 

 

이 목록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관객의 앵콜 요청에 대비해 (12) <일본무용>이 한 작품 더 준비되었다. , <부산일보>의 같은 기사에 공연 종목은 유럽과 미국의 각국 무용은 물론 이시이 코나미의 특기인 야마다 고사쿠 씨 작곡의 <일본무용>을 번외로 더한 것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일본무용>에 대하여 자세하게 서술한 문헌은 없지만, 아마도 경성이나 부산 공연의 관객이 대부분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이들에게 친숙한 일본식 작품을 레퍼토리에 추가한 것으로 추측된다.

 

<일본무용>은 경성공연에서도 발표된 바 있었다. 따라서 이시이 무용단의 부산공연 레퍼토리는 321-23일의 경성공연 레퍼토리와 거의 같았다. 경성공연에서 발표된 11작품에다가 22번째 작품으로 <법열>이 하나 더 추가되었을 뿐이다.

 

부산공연의 12개 발표작품은 대부분은 무용시로 분류되었다. 무용시는 야마다 코사쿠와 함께 이시이 바쿠가 개발한 형식과 내용의 창작 신무용으로, 일본 전통의 무용과는 전적으로 다른 형식의 신무용이었다. , 의상이나 음악, 동작 등의 거의 모든 면에서 서양식 무용을 도입하는 한편, 내용의 면에서는 일본인들의 감성을 표현한 작품들이었다. 특히 내용의 면에서 서사(敍事) 전달이 목적인 일본식 가부키나 서양식 고전발레와는 달리, 무용시는 서정(抒情)을 전달하는 데에 역점을 둔 무용작품이다.

 

 

부산공연의 12개 작품 중에서 무용시라고 소개된 작품이 5(<멜랑콜리>, <꿈꾸다>, <등산>, <솔베이지의 노래>, <고뇌의 그림자> )였고, ‘무용시 소곡으로 소개된 <명암>, ‘표현파 무용시라고 표현된 <마스크>, ‘무용시극으로 서술된 <젊은 판과 님프>를 합치면 모두 8개 작품이 무용시로 묘사되었다.

 

그밖에 <갇힌 사람>극적무용’, <완바쿠고조>어린이 무용’, <명암>무용극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이들이 무용시와는 다른 무용종목으로 서술된 것은 그 작품들에서는 일정한 서사가 전개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무용시로 서술된 <등산><솔베이지의 노래>, ‘무용시극으로 표현된 <젊은 판과 님프>에도 일정한 이야기가 전개되었던 것을 고려하면, 무용시 작품과 다른 작품들 사이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명백히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

 

 

부산공연의 12개 작품을 발표한 무용수는 모두 4명이었다. 이시이 바쿠(石井漠)와 그의 처제 이시이 코나미(石井小浪), 이시이 바쿠의 여동생 이시이 에이코(石井榮子)와 아사쿠사 오페라 시절부터 이시이 바쿠와 함께 활동 했던 마츠우라 다비토(松浦旅人)였다.

 

<법열><갇힌 사람>은 이시이 바쿠의 독무, <꿈꾸다><솔베이지의 노래>, <마스크><고뇌하는 그림자><일본무용>은 이시이 코나미의 독무였고, <멜랑콜리><산을 오르다><젊은 판과 님프>는 이시이 바쿠와 이시이 코나미의 듀엣이었다. 마츠우라 다비토는 이시이 바쿠와 함께 <명암>, 이시이 에이코는 어린이 무용 <완바쿠고조>을 발표했다. (*)

,

일제강점기 부산에서 무용 공연은 주로 세 극장에서 이뤄졌던 것으로 보인다. <국제관(1920-1929)><부산공회당(1928-1945)><부산극장(1934-1945)>이 그것이다.

 

<국제관>에서 공연했던 일본인 무용가로는 후지마 시즈에(藤間靜枝)와 이시이 바쿠(石井漠)가 있다. 후지마 시즈에는 1925114<국제관>에서 조선에서는 최초로 신무용 공연을 열었고, 이시이 바쿠무용단도 19263월에 경성과 인천, 대구 공연에 이어 부산공연(3/27-8)을 국제관에서 가졌다. 그밖에도 19281020일의 <부산일보><도쿄무용연구소>의 신인 무용가들이 <국제관>에서 공연한다고 보도한 바 있다.

 

최승희는 <국제관>에서 무용공연을 가진 적이 없다. 최승희가 무용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했던 1929년 말에는 <국제관>이 이미 화재로 소실되어 없어졌기 때문이다.

 

 

19284월 개관한 <부산공회당>15백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공연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무대와 조명 시설이 좋았기 때문에 정상급 무용가들의 공연이 주로 부산공회당에서 열렸다. 특히 <국제관(1920-1928)>이 화재로 소실된 직후에는 무용공연이 대부분 부산공회당에서 열렸다.

 

특히 1930년에는 배구자와 최승희, 이시이 바쿠와 조택원 등이 부산공회당에서 무용공연을 열었다. 111일에는 배구자가, 1930524일에는 최승희, 112일에는 이시이 바쿠가 부산공회당에서 공연회를 가졌다. 이후에도 1931217-18일과 193641, 1941425일에는 최승희가, 1932715일에는 이시이 바쿠가, 193451일과 193678일에는 조택원이 <부산공회당>에서 공연을 가진 바 있었다. 1934111일 이시이무용단에 복귀한 최승희와 이시이 바쿠가 함께 공연한 것도 <부산공회당>이었다. 최승희가 <부산공회당>에서 공연한 것은 5회로 다른 무용가들에 비해 가장 많았다.

 

 

이 같은 정상급 무용가들 외에도 1931418일에는 <일본음악과 무용의밤><부산공회당>에서 열렸고, 193235일에도 아트협회 주최로 조선호 모금을 위한 <음악무용의 밤>이 개최되었다. 1934224일에는 일본의 천재무용가로 불리던 카와바타 후미코(川畑文子, 1916-2007)의 공연이 <부산공회당>에서 열렸고, 1939112일에도 대구소녀들의 무용발표회가 <부산공회당>에서 개최되었다.

 

1934년에 부산부 서정1정목 9번지에 개관한 <부산극장(釜山劇場후산게키조, 1934-1945)>은 당초 일본 가부키 공연 전용의 대극장으로 문을 열었기 때문에 주로 일본식 연극과 무용 공연이 열렸다.

 

1936919일에는 후지마 시즈에가 <부산극장>에서 공연했고, 같은 해 1221일에도 <일본음악과 무용의밤>이 열렸다. 1939326일에는 <상이군인 위안 무용대회><부산극장>에서 열렸고, 19391122일에는 연예보국(演藝保國)”이라는 기치아래 <청원소패무용 합동의 헌금대회><부산극장>에서 열리기도 했다. 1941118일에도 <상이군인 유가족위안 연극과 무용의 밤>이 열렸고, 19411129일에는 <백의용사를 위한 연극과 무용의 밤><부산극장>에서 열렸다. 1942519일에도 <소패와 무용의 밤><부산극장>에서 열렸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부산의 무용 공연은 <국제관><부산공회당><부산극장>에서 열렸고, 1929<국제관>이 폐관된 이후 1930년대와 40년대에는 주로 <부산공회당><부산극장>이 무용공연을 개최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두 극장의 무용공연에도 차이가 있었다. <부산공회당>은 대체로 서양식의 신무용이나 최승희와 조택원의 조선무용 공연이 열렸고, <부산극장>에서는 일본 전통 악기를 사용하는 일본 무용이 주로 공연되었던 것이다. 후지마 시즈에의 무용은 일본무용계에서는 신무용으로 분류되기는 했지만, 이시이 바쿠의 평을 빌자면, 일본 전통 무용의 색깔이 진하게 유지된 신무용이었기 때문에 일본 전통식 <부산극장>에서 주로 공연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

,

일제강점기 부산지역에 설립, 운영되었던 24개 극장을 정리했다. 부산에 극장이 처음 설립된 것은 1900년대 초부터였다. 행좌(1903-1915)와 송정좌(1907-1911), 부귀자(1905-1907)와 부산좌(1907-1923)4개 극장이 이 시기에 문을 열었지만, 부귀자가 이내 폐관됨으로써 1910년대로 넘어가면서도 유지된 극장은 행좌와 송정좌와 부산좌의 3개소였다.

 

1910년대에는 변천좌(1912-1916), 동양좌(1912-1918), 질자죄(1912-1918), 욱관(1912-1916), 보래관(1914-1945), 초량관(1914-1917), 행관(1916-1930), 상생관(1916-1945) 8개 극장이 개관됐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1900년대부터 유지되던 행좌와 송정좌가 폐관되고, 1910년대에 설립된 8개 극장 중에서도 5개가 폐관되었다. 12개 극장 중 8개가 폐관되는 격동기였던 것이다. 1920년대에도 살아남은 극장은 부산좌와 보래관, 행관과 상생관의 4개뿐이었다.

 

1920년대에는 국제관(1920-1929)과 유락관(1921-1932), 태평관(1922-1943)과 수좌(1924-1945), 부산공회당(1928-1945)5개 극장이 새로 개관되어 이 시기에 경영된 극장은 총 9개였지만, 부산좌와 국제관이 폐관되어 1930년대까지 유지된 극장은 보래관과 행관, 상생관과 유락관, 태평관과 수좌와 공회당의 7개였다.

 

 

1930년대에는 중앙극장(1930-1945)과 소화관(1931-1945), 부산극장(1934-1945)과 구포극장(1939-1945)4개 극장이 개관하여 총 11개 극장이 영업했으나, 이 시기에 행관과 유락관이 폐관되어 1940년대에 들어서는 보래관과 상생관, 태평관과 수좌, 공회당과 소화관, 중앙극장과 부산극장과 구포극장의 9개가 존속했다.

 

1940년부터 1945년의 광복까지는 대화관(1942-1945)과 삼일극장(1944-2006), 동래극장(1944-1992)3개소가 개관되어 총 12개 극장이 운영됐으며, 1943년에 폐관된 태평관을 제외한 11개 극장은 해방 후에도 계속 극장으로 이어져 사용되었다.

 

이 극장들의 시기적 구별은 이들이 제공하던 공연물들의 종류에 따른 분류와도 거의 일치한다. 1900년대와 1910년대 초에 설립된 극장들(1903-1912)은 대부분 일본식 구극과 신극을 상연하던 가부키 극장이었다. 행좌와 송정좌, 부귀좌와 부산좌, 변천좌와 동양좌, 질자좌와 욱관이 여기에 속한다.

 

 

 

 

이후 1910년대 중반부터 1920년대 말까지는 활동사진 상설관 시기(1914-1928), 이 시기에 설립된 보래관과 초량좌, 행관과 상생관, 국제관과 유락관, 태평관과 수장 등의 8개 극장은 연쇄활극과 무성영화 상영을 주요한 서비스로 삼았다.

1920년대 말부터 시작된 발성영화의 시대(1929-1945)에는 중앙극장과 소화관, 부산극장과 구포극장, 대화관과 삼일극장과 동래극장의 7개 극장이 설립, 경영되었다.

 

이상을 종합하면 일제강점기 부산지역에서 명멸했던 극장들은 모두 24개였다. 일부 문헌은 일제강점기 부산 극장을 23개로 집계하기도 했는데, 이는 공공기관이었던 부산공회당을 제외한 숫자였다. 설립 주체가 관청인가 민간인가의 구별을 빼면 영화상영과 공연 및 행사개최라는 기능면에서 그다지 차이가 없었으므로, 필자는 부산공회당을 포함해 일제강점기 부산의 극장을 24개로 집계했다.

 

 

끝으로, 부산지역 지도를 조사하던 중 <부산부전도(1914)>에서 <융좌(戎座)>라는 새로운 극장 이름이 발견되었다. 기존 문헌에 없던 극장이름이었으나, 추가 조사를 통해 <융좌><질자좌>의 다른 이름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에비스로 발음되는 융()은 어부와 상인들이 숭배하는 일본의 칠복신(七福神)의 하나이며, “오른손에 낚싯대, 왼손에 도미를 든 모습으로 형상화되곤 한다.

 

일설에는 에비스가 이자나기(伊耶那岐命)와 이자나미(伊耶那美命)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히루코(蛭子命)라는 다름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는 것이다. 결국 <질자좌(蛭子座)><에비스좌(戎座)>는 같은 극장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

해방 직전인 1944년 부산부 법일정에는 삼일극장(三一劇場산이치게키조, 1944-2006), 수안정에는 동래극장(東萊劇場토라이게키조, 1944-1992)가 새로 개관했다. 동구 범일동 117번지에 개관한 <삼일극장>은 범일동 지역 최초의 극장으로 극장주가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개관 당시부터 재상영관으로 출발한 <삼일극장>은 해방 후 시간이 가면서 3, 4번관으로 운영되던 연극과 영화 공용극장으로 광복 직후 창고로 사용되기도 했는가 하면, 한국전쟁 때는 피난민을 위한 수용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삼일극장의 일제강점기 영업기간은 1년 남짓이었으나, 해방 후 폐관까지 60여년동안 범일동 주민과 인근의 신발공장 근로자들의 문화 욕구를 해소해주던 공간이었다.

 

 

개관 당시 단층이었던 삼일극장은 1969년 철근 콘크리트 3층 건물로 개축되어 1025일 재개관했다. 이 신축 삼일극장은 무대면적은 15평으로 협소한 편이었으나 좌석수가 929(1570, 2179, 입석 180)의 대형 극장이었다.

 

해방 후 <삼일극장(1944)><조일영화극장(1946)>, <삼일극장(1947)>, <제일극장(1949)> 등으로 여러번 개칭되다가 1953<삼일극장(1953)>으로 되돌아가서 정착되었고, 2006년 폐관될 때까지 원래의 명칭으로 운영되었다.

 

<삼일극장>이 유명해 진 것은 영화촬영 장소로 이용되면서 부터였다. 우선 나운규의 일생을 그린 <아리랑(1966, 최무룡 감독)>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는데, 이는 <삼일극장>의 외관이 일제강점기 경성의 <단성사>와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이후에도 삼일극장은 <친구(2001, 곽경택 감독)><소년 천국에 가다(2005, 윤태용 감독)>, <삼거리극장(2006, 전계수 감독)> 등의 배경이 되었다. 특히 영화 <친구(2001)>의 관람자 수가 8백만을 넘어서자 부산광역시는 범일동 구름다리에서 삼일극장까지를 <친구의 거리>로 선포하기도 했다.

 

동래극장(東萊劇場토라이게키조, 1944-1992)은 극장주 다까다 쥬이찌(高田壽一)1944102일 설립 허가를 받고 부산부 수안정(=동래구 수안동 200번지)”에 설립한 동래 지역 최초의 영화 극장이자, 일제강점기에 개관한 마지막 극장이었다.

 

동래극장은 2층짜리 콘크리트 석조건물로 건축되었고, 무대는 15평으로 좁은 편이었으나 객석은 총 6백석(1400, 2100, 입석 100)의 중형극장이었다. 동래극장 개관 이전에는 동래여자고등학교 앞 붉은 벽돌 양옥 건물이었던 <동래청년회관>을 비롯해 동래구락부, 동래보통학교, 동래염불암, 일성관, 동래공회당 등이 영화와 연극공연 장소로 활용되어 왔으나, 마침내 <동래극장>이 동래구민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하게 된 것이다.

 

 

<동래극장>이 개관됨으로써 부산부 지역의 극장은 중구에 15개가 밀집되기는 했으나 동구에 5, 영도구에 2, 북구에 1개에 더하여 마침내 동래구에도 <동래극장>이 개관되어, 어느정도 지역적 안배가 이루어진 셈이었다.

 

해방후 <동래극장(1944)><동래영화극장(1947)>으로 개칭되어 경영되다가 1950년에는 <동래극장(1950)>으로 재개칭되어 2,3번관으로 운영되던 중 1984910일 폐관되었다.

 

이후에도 <동래극장>1985525동래구 수안동 378번지로 주소지를 변경해 재건축되면서 명맥이 유지되었으나 19921017일 최종 폐관되었다. 개관 당시의 <동래극장> 자리에는 대한투자신탁증권 동래점이 자리하고 있다. (*)

 

,

조선이 일제강점에서 해방됐을 때 부산지역의 일본인 소유 사설 영화극장은 보래관과 상생관, 수좌와 대생좌, 소화관과 부산영화극장, 삼일극장과 대화관과 동래극장 등 총 9개였고, 여기에 부영 극장인 부산공회당을 더하면 모두 10개였다.

 

하라구치 키요미(原口淸見)가 개업한 <구포극장(龜浦劇場, 1939-1945)>은 당시 경상남도 동래군에 속했으므로 부산부 극장에서 제외되었지만, 1963년 부산직할시 승격과 함께 극장 주소지가 부산에 편입되었다. 부산직할시에 편입된 뒤의 주소는 부산진구 구포동 193번지, 구포역 앞 간선도로를 따라 구포 장터로 들어가는 300미터 지점에 위치했었다.

 

 

 

잡지 <삼천리> 19416월호 209쪽에 실린 전 조선극장 총수 139주요 극장사진 대부요금 일람표에는 <구포극장>1939-40년 자료가 등재되었으므로, <구포극장>은 적어도 1939년부터 영업 중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42-43년의 영화연감><구포극장>의 극장주 이름과 함께 객석의 수가 293석임을 밝혔다. 부산극장협회의 극장실태조사표에 따르면 <구포극장>은 대지 102평에 건축된 목조 2층 건물이었고, 좌석 수는 1층에 168, 2층에 17, 입석 135석으로 총 320석의 소규모 극장이었다.

 

<구포극장>은 일제강점기부터 구포읍 유일의 대중 문화공간이었으나, 19605백석의 신영극장과 1963285석의 동영극장이 주변에 들어서자 시설이 낙후된 구포극장은 경영난을 겪던 중 1966323일 휴관에 들어갔다가 1967413일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구포극장> 자리는 도로에 편입되어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대화관(大和館야마토칸, 1942-1945)>은 부산부 수정정(=동구 수정동1) 1번지에 개관된 연극·영화 공용 극장으로 초량좌(1914?~1917?)와 유락관(1921~1932), 중앙극장(1930~1945)에 이어 부산 동구 지역에 세워진 네 번째 극장이었다. 위치는 부산진역 바로 앞이었다.

 

극장주 사이조 사다도시(西條貞利)19411111일 경남 당국으로부터 신축허가를 받았고 1942<대화관>을 완공, 개관했다. 대화관의 영화 상영 기록은 194251일의 <부산일보>에 처음으로 보도되었다.

 

<대화관><소화관>의 영화 배급업체 사쿠라바상사()로부터 주로 <도호(東寶)>영화를 배급받아 상영했다. 조선영화는 1944<어화>(1939, 안철영)<조선해협>(1943, 박기채)2편을 상영됐을 뿐 <소화관>이나 <수좌>, <대생좌>처럼 조선영화를 자주 상영하지는 않았다.

 

 

<대화관>이 개관되던 1942, 초량정(=초량동) 207번지에 있던 이웃의 극장 <중앙극장><대생좌>로 개명해 경영되고 있었고, 중구에는 <보래관><상생관>, <소화관>3대 활동사진 상설관과 <부산극장><태평관> 등의 연극장, 그리고 영도의 <수좌>와 동래읍의 <구포극장> , 모두 8개 극장이 부산에 개업하고 있었다.

 

해방공간의 대화극장에서는 악극단 공연이 주류를 이루었고, 영화 상영은 창고에 쌓여 있던 조선영화 <아리랑>(1926, 나운규)을 비롯해 <금붕어>(1927, 나운규), <사나이>(1928, 홍개명), <숙영낭자전>(1928, 이경손), <승방비곡>(1930, 이구영), <무지개>(1936, 이규환), <애련송>(1939, 김유영) 등이 재상영됐다.

 

 

해방후, <대화관(1942)><대화극장(19469)>, <부산진극장(194611)>, <은영극장(19496)>, <동양극장(19549)>로 개칭되어 운영되던 중, 1958년 극장주 이명조(李命祚)가 대지 300평에 2층 콘크리트 건물로 개축하여 69일 재개관했다. 개축된 <동양극장>은 좌석수 546(1353, 256)과 무대면적 28평을 갖춘 중형극장이었다.

 

이후에도 옛 <대화관><미성극장(1959)>, <동서극장(1974)> 등으로 이름과 극장주가 바뀌다가 1976611일 폐관되었다. 이 시기에 <수정극장><시민관(=옛 상생관)>과 <국제극장>도 <동서극장(=옛 대화관)>과 함께 폐관되었다. (*)

,

<소화관(昭和館쇼와칸, 1931-1945)>19311231일 남빈정에 개관된 활동사진 상설관이었다. 극장주 사쿠라바 후지오(櫻庭藤夫)는 조선과 만주까지 배급망을 갖춘 영화업체 <사쿠라바상회>의 대표로, <사쿠라바상회>의 모관으로 <행관(幸館, 1915-1930)>을 경영하고 있었다.

 

1930<행관>이 화재로 전소되자, 사쿠라바 후지오는 막대한 피해에 굴하지 않고 자본금 10만원의 주식회사 <사쿠라바상사>를 다시 세우고, 지상 3층 규모의 최신 활동사진 상설관인 <소화관>을 건축해 사업을 확장했다. <소화관> 개관 당시 극장주는 오가와 요시조(小川好藏)였으나, 1943년에는 극장주 사쿠라바 후지오, 지배인은 사쿠라바 토시오(櫻庭敏雄)로 기록되어 있다.

 

화재를 견딜 수 있는 철근 콘크리트 현대식 공법으로 부산부 남빈정 2정목 22번지(=중구 창선동 247번지)”3층건물로 신축된 소화관은, 대지가 164, 연건평이 344, 무대면적 25평으로 규모 면에서 기존의 극장들과 차별화되었고, 금새 부산의 명소가 되었다.

 

 

1932년의 <부산상공안내>에 따르면 <소화관>의 주소는 부산부 남빈정 2정목 22번지에서 부산부 행정 2정목47-1번지로 변경되었고, 해방 후인 19451225일의 <민주중보>에 따르면 194611일부터 부산부 서대신정 3정목 55번지로 바뀌었다가, 1949년에는 중구 창선동 247번지로 다시 변경되었다.

 

1932에 발행된 <부산상공안내>에 따르면 소화관의 관객 수용 능력은 1층에 2등석 475(남자 135, 여자 65, 가족 275), 2층에 1등석 226(남자 71, 여자 35, 가족 120), 33등석 160(남자 48, 여자 48, 가족 64)으로 총 좌석 861석이었다. 1934년의 자료에는 총 좌석수가 1천석으로 기록되어 있었고, 1942-43년에는 150석으로 집계되었다.

 

새 영화관 <소화관>은 기존의 <행관>터를 떠나 일본인 상권의 중심지였던 행정에 인접한 남빈정에 세워졌는데, 인근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부산의 주요 극장으로 경영되어 오던 <보래관><태평관>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 거리가 부산의 영화거리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소화관>은 해방후 <조선극장><동아극장>등으로 명맥이 이어지다가 1968722일 영화상영관을 폐관했으나, 개관 당시의 건축물은 아직까지 그 자리에 남아 있다.

 

<부산극장(釜山劇場후산게키조, 1934-1945)>1934115, “부산부 서정1정목 9번지에 세워졌다. 지금의 중구 남포동518번지자리이다. 부산극장은 당초 일본 가부키 공연 전용의 대극장으로 문을 열었으나, 이따금씩 영화도 상영되었다.

 

<부산극장>1937<보래관>에 공급되던 영화를 대신 상영하면서부터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완전히 전환되었다. <보래관>1937<상생관>과 함께 건물이 화재에 취약하다는 이유로 부산부 당국으로부터 신축을 명령받았는데, 신축된 보래관은 193810월에 재개관되었다.

 

 

해방후 <부산극장><부산영화극장>, <항도극장>, <부산극장>, <도립부산극장> 등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같은 터에서 극장으로 기능하던 중, 19821224일 노후된 극장을 철거 후 신축 개관 이후 <부산극장>으로 재개관했고, 1993814일 부산 최초로 복합영화관(3개관)으로 변신해 부산 극장계의 선두주자로 나섰다. 경영난이 계속되면서 2009년에는 <씨너스 부산극장>, 2013년에 <메가박스 부산극장>으로 경영이 바뀌었다.

 

1934년 개관한 이래 같은 자리에서 지금까지 극장이 영업 중인 <부산극장>, 1907년 개관해 지금까지 영업을 계속하고 있는 서울의 <단성사>를 제외하고는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극장으로 기록되어 있다. (*)

 

,

<중앙극장(中央劇場쥬오게키조, 1930-1936)>은 지금의 부산 동구에 개관된 세 번째 극장이었다. 초량정(=초량동) 207번지에 중앙극장을 개관한 극장주는 오이케 겐지(大池源二)<부산좌(1907-1923)><유락관(1921-1932)> 설립을 주도했던 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 1856-1930)의 아들이다.

 

오이케 츄스케는 카나모리 신기치(金森新吉)와 공동 경영하는 조건으로 중앙극장을 신축하던 중 사망해, 그의 장남인 오이케 겐지가 중앙극장을 승계 받아 완공한 후 1930722일 개관을 보았다. 개관 당시 중앙극장은 연극공연 극장으로 출발했으나 1936년 상생관의 대표 미츠오 미네지로(滿生峰次郞)가 인수하면서 극장명을 <대생좌(大生座다이세이자)로 바꾸면서 상설영화관으로 전환되었다. <1942-1943년의 영화연감(일본영화잡지협회 발간)>에 따르면 <대생좌>의 대표는 스기시타 스에지로(杉下末治郞)였다.

 

 

일제강점기 부산지역의 극장은 대체로 3시기로 구분되는데, 1(1885-1918)는 가부키 극장 시기, 2(1918-1928)는 활동사진 상설관 시기, 3(1929-1945)는 발성영화 상영관 시기이다. 오이케 츄스케는 각 시기에 맞춰서 극장을 개업한 것인데, 부산좌(1907-1923)가 제1, 유락관(1921-1932)이 제2, 중앙극장(1930-1945)이 제3기에 속하는 셈이다. 특히 중앙극장은 발성영화 시대가 열린 후 처음으로 개관한 극장이기도 하다.

 

1932년 발간된 <부산상공안내>에 따르면, 중앙극장의 수용인원은 상층 190, 하층 310, 500명이었는데, <1942-1943년의 영화연감(일본영화잡지협회 발간)>에는 각각 498명으로 기록되어 있어 일관성을 보인다. , 중앙극장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던 셈이다. 중앙극장의 입장료는 특등석 150, 1등석 120, 2등석 80전으로 책정되어 있었다.

 

필름 배급은 근거리에 있었던 상생관과 동시 개봉 시스템으로 운영되었으며, 뒤이어 소화관, 보래관과도 연계하여 동시에 영화를 개봉했다. 일본 영화는 쇼치쿠, 대도(大都), 키네마, 일본PCL, 신흥키네마, 닛카츠 계열사의 작품이 상영됐다. 중앙극장이 소재했던 초량 지역은 조선 사람이 밀집 주거했던 탓으로 홀대 받던 조선 영화가 자주 상영되었다.

 

 

이는 <중앙극장>을 뒤이은 <대생좌>도 마찬가지여서 조선인의 참여로 분위기가 한껏 달아오르곤 했다. 1962915일의 <국제신문>에 실린 부산, 어제와 오늘, 극장이라는 기고문에서는 <대생좌>의 흥행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대생좌 꼭대기에서 나팔소리가 울린다. 구성진 가락으로 유행가가 흐른다. 분칠에 연지를 바른 극단패들이 꽹과리와 나팔을 앞장세우고 동네를 한 바퀴 돈다. 극장에 극단이 들어왔다는 선전인 것이다. 극장 문 앞에는 화려한 포스터가 나붙는다. <명창 이화중선(李花中仙)>, <줄타기광대 임상문>. 극장이 터져 나간다. 좌석제고 뭐고 없다. 이층은 신을 벗어 맡기고 올라간다. 다다미에 앉아서 구경한다.”

 

 

한편, <중앙극장(1930-1936)>에서 상영되었던 조선영화로는, 1932<방아타령>(31, 김상진), <금강한>(31, 나운규)을 시작으로 1934<아리랑>(26, 나운규), <아리랑2>(30, 이구영), 1936<홍길동전>(34, 김소봉), <춘향전>(35, 이명우), <장화홍련전>(36, 홍개명), <수일과 순애>(31, 이구영), <아리랑3>(36, 나운규) 등이 있었다.

 

이어서 개관한 <대생좌>의 조선영화 프로그램에는, 1937<홍길동전>(34, 김소봉), <홍길동전 후편>(36, 이명우), <나그네>(37, 이규환), <미몽>(36, 양주남), <풍운아>(26, 나운규), <무화과>(35, 나운규), <그림자>(35,나운규), 1938<무지개>(36, 나운규), <인생항로>(37, 안종화), <청춘의 십자로>(34, 안종화), <임자없는 나룻배>(32, 안종화), 1939<세동무>(28, 김영환), <개화당이문>(32, 나운규), <낙화유수>(27, 이구영), <청춘부대>(38, 홍개명), <국경>(최인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이명우), <무정>(박기채), <나의 친구여>(28,유장안), 1940<철인도>(30, 나운규), <큰무덤>(31, 윤봉춘), <회심곡>(30, 왕덕성), 1941<사나이>(28, 홍개명), <처의 모습>(39, 이창근), 1943<망루의 결사대>(이마이) 등이 있다. (*)

,

1922년에는 부산부 행정1정목(=중구 창선동) 9번지에 태평관(太平館타이헤이칸, 1922-1943)이 개관했다. 일본인 상권과 주거지 중심인 행정에 요시다 겐조(吉田元藏)가 문을 연 태평관은 일본 거류민 관객들을 주요 고객으로 일본의 신극과 구극, 연쇄극 공연 위주로 경영되었던 연극 전용 극장이다.

 

1917-18년도에 부산의 극장들은 대부분 활동사진(=영화) 상설관으로 거듭나고 있었고, 새로 개업하는 극장들도 일본식 연극장이 아니라 영화 상영을 위한 시설로 건축되고 있었다. 유일한 예외가 부산좌(1907-1923)였는데, 당시 일본인 유수 사업가인 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가 주식회사 형태로 설립한 부산좌도 일본식 가부키 극장으로 개관했으나, 점차 연극과 음악 공연이나 부정기적으로이기는 하지만 영화 상영도 실시하고 있었다.

 

태평관은 활동사진으로 옮겨가는 부산 극장계의 경향에 역행하여 구일본식 극장으로 건축되었는데, 아마도 극장주 요시다 겐조가 부산의 가부키 관람 인구가 충분하다고 계산했기 때문일 것이다. 때마침 태평관이 개관한지 1년 후인 1923322일 동종의 경쟁극장이었던 부산좌가 화재로 전소되자 마츠모토류타로극단, 산유 데이에이유극단, 시사극단 등 내로라하는 일본 공연물들을 독식하다시피 상연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태평관은 이웃한 활동사진 상설관 보래관과 행관과 함께 부산의 대표극장의 하나로 꼽히게 되었으나, 1934년 가까운 곳에 연극전용극장인 부산극장이 개관되면서 다시 경쟁 관계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19431119일에 발생한 화재로 태평관도 전소되었고 다시 재건되지 못했다.

 

수좌(壽座: 코토부키자, 1924-1945)1924년 부산부 목도(牧島=영도)에 세워졌다. 영도 최초의 극장이었던 <질자좌(蛭子座히루코자, 1912?~1918?)가 경영난으로 폐관된 지 6년 만에 세워진 영도의 두 번째 극장이었다. 1924년 목도 유지들이 중심이 되어 극장설립을 추진하여 192436일 덴도(田頭孝一)를 조합장으로 하는 수좌경영조합이 설립했다.

 

목도 영선정 195번지(=영도구 남항동151번지)에 위치했던 수좌는 1등석 165, 2등석 115, 3등석 57명 총 337명을 수용할 수 있는 소규모 활동사진 상설관이었다.

 

 

개관 당시 수좌의 외형은 서양일본 절충식 건물이었다. 이형재 건축사의 고증에 따르면, 수좌는 일본 전통 목구조에다 외벽체 부문만 벽돌에 미장을 한 건물로 르네상스식 정면에 일본전환기 신건축의 절충식 구조였던 것이다. 그러나 수좌는 해방 후 이름도 <항구극장>으로 바뀌고 건물도 전면 개,보수되어서 과거의 모습이 사라졌는데, <항구극장>은 건평 351, 무대면적 26.8, 수용인원은 682명이었던 목조 2층 건물이었다.

 

수좌도 질자좌와 마찬가지로 경영난을 겪었으나 1934년 영도대교가 개통되고 이듬해(=1935) 2월에는 구덕운동장이 세워지고 서면으로부터 전차노선이 개통되면서 활기를 띄었다. 수좌는 영선정(=남항동)의 전차 종착지에 위치했던 까닭에 접근성이 좋아졌기 때문에 영도 주민들뿐 아니라 부산 시가지의 주민들도 수좌를 찾기 편리해졌던 것이다.

 

1924년 개관 당시 <수좌>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던 이 극장은 1926년 사쿠라바 후지오(櫻庭藤夫, 1892-)가 임대해 <2행관(第二幸館)>으로 개명되었다. 그러나 1932년에는 극장이름이 <수좌>로 되돌려졌고, 해방된 후인 1946년에는 <항구극장>으로 개명되었다. <항구극장>1990년에 폐관되었다.

 

수좌의 극장주도 자주 바뀌었다. 수좌를 건축한 최초의 건축주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1926년부터는 사쿠라바 후지오(櫻庭藤夫)가 경영했고, 1932년에는 이케다 다다오(池田忠夫), 19351월부터는 부산부 회의원이던 시라이시 마타로(白石馬太郞), 1942년부터는 토가 토미오(富賀四郞)가 경영하던 중에 조선은 해방을 맞았다. (*)

,

1920822일 안본정에 부산의 13번째 극장으로 개관된 국제관(1920-1929)17번째 공연장으로 개관한 부산공회당(1928-1945)을 정리했다. 이 두 극장은 무용공연이 자주 개최된 극장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국제관과 부산공회당 개관 사이에 3개의 극장이 더 개관되었다. 유락관(遊樂館)과 태평관(太平館)과 수좌(壽座)가 그것이다.

 

유락관(遊樂館유라쿠칸, 1921-1932), 19211211, 부산의 일본인 거류민 1세대 사업가이자 이미 부산좌(釜山座, 1907-1923)를 경영하던 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 1856-1930)가 좌천정(=동구 좌천동) 206번지에 개관한 다목적 극장이었다. 오이케 츄스케는 자본금 15만원, 불입금 35백원의 출자로 설립한 부산흥산(釜山興産)주식회사를 통해 유락관을 건축했는데, 주주 115명이 3천주를 보유해 설립된 부산흥산주식회사의 최대주주 오이케 타다스케는 1280주를 보유한 최대주주였다.

 

유락관은 초량좌(草梁座소오리오자, 1914-1917)에 이어 부산 동구지역에 세워진 두 번째 극장으로 연극상연과 영화상영뿐 아니라 각종 지역 및 사회단체 행사를 개최하곤 했다.

 

 

조선인 관객과 공연에 배타적이던 대부분의 부산 극장들과는 달리 유락관은 조선인들의 공연과 관람에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유락관에서는 조선영화와 연극, 음악회와 각종 조선인단체 행사가 자주 열렸다. 특히 유락관 개관 직후인 1922년과 1923년에는 조선인 연극과 조선영화 등의 프로그램이 자주 소개되었다.

 

19221229일 부산청년회 주최로 변사 최천택을 초청해 <구미대모험사진> 상영회를 가졌고(조선일보, 192312), 192336일에는 부산여자청년회의 연극 공연이 있었다. (동아일보, 1923317). 192355일에는 부산지방 배경의 위생선전활동사진이 상영되었고 (조선일보, 192356), 192383일에는 부산청년회, 부산진기독청년회 주최로 교남학우회 순회연극이 상연되었고 (조선일보, 192387), 19231217일에는 조선여자교육협회 순회극단이 신극, 무도, 합창 등을 공연했다. (동아일보, 19231222).

 

한편 박원표의 <향토부산(1967)>에 게재된 부산의 흥행가라는 글에서 개화기에 있던 서울의 연극단들이 부산에 진출, ... 토월회가 이곳 무대(=초량좌)에서 그 연기를 자랑하였다고 기술했으나, 여기에는 오류가 있어 보인다. 토월회 창립은 1922년이므로 1917년경에 폐관된 초량좌에서 공연할 수 있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토월회가 공연을 가졌던 것은 1921년 초량지역에 두 번째로 세워진 극장 유락관이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1926년에는 <아리랑(1926)>의 여주인공으로 유명해진 신일선의 가극이 공연되었는가 하면, 연속활극 <명금(1915)>이 유락관에서 재상영되었을 때는 서울에서 활동 중이던 동래 출신의 변사 서상호를 초빙해 대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유락관의 극장주 오이케 츄스케가 1930년 사망하자 경응의숙 이재과에 재학 중이던 장남 오이케 겐지(大池源二, 1892~?)가 부친의 사업을 승계 받아 유락관을 경영했고, 유락관 외에도 오이케 츄스케가 건축하기 시작한 부산 동구의 3번째 극장인 중앙극장(中央劇場주오게키조, 1930-1936)을 완공해 병행해 경영했다.

 

1936년 유락관은 상생관 극장주 미츠오 미네지로(滿生峰次郞)가 유락관을 인수해 대생좌(大生座다이세이자, 1936-1945)로 이름을 바꾸면서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전환됐다.

 

 

유락관(1921-1930)은 기존의 부산좌(釜山座후산자, 1907-1923)와 보래관(寶來館호라이칸, 1914-1973), 행관(幸館, 1916-1930), 상생관(相生館아이오이칸, 1916-1945), 국제관(國際館고쿠사이칸, 1920-1929)과 함께 영업을 한 바 있고, 유락관을 뒤이어 개관된 태평관(太平館 타이헤이칸, 1922-1943), 수좌(壽座고도부키자, 1924-1945), 중앙극장(中央劇場주오게키조, 1930-1936), 소화관(昭和館쇼와칸, 1931-1945) 등과도 함께 존재했다.

 

유락관은 개관 10년만인 193212일 발생한 화재로 극장이 전소된 후 폐관되었지만, 몇차례 유락관을 재건하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복구되지 못했다.(*)

,

일제강점기 23개 극장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부산의 주요한 문화 공간이었던 곳으로 부산공회당(1928-1945)이 있다. 1925417일 경상남도 도청 소재지가 진주에서 부산으로 이전해 오면서 부산부를 대표할 문화공간으로서 부산공회당 건립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1926년 행관의 극장주 하자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 1860-1942)10만원의 기부금을 내는 등 17만여원의 공사비가 조성됐고, 만주철도()가 부지를 무상으로 제공하면서 19268월 공사가 시작됐다. 이후 연인원 25천명이 공사에 투입되어 1년반의 공사 끝에 19283월 준공되었고, 192849일 정식으로 개관되었다.

 

부산공회당의 규모는 건평이 194, 총건평이 640(1194, 2192, 3180, 456, 지하 17)으로 벽돌 및 철근 콘크리트 병용으로 근대식 4층 건물로 건축되었다. 조선총독부 건축과장 岩井이 공회당의 설계 및 공사 감독을 맡았고, 시공은 국제관의 극장주이기도 했던 조선토목협회의 기노시타 모토지로(木下元次郞)가 담당했다.

 

 

수용인원은 대집회실이 1천석, 소집회실이 40-80석이었지만, 2층과 3층의 계단식 관람석까지 합치면 15백명의 관람객 혹은 6백명의 연회객을 수용할 수 있다는 기록도 있다. 강연회나 연예 및 예술 공연은 대집회실에서 이뤄졌으며, 부산 시민들의 문화 활동의 거점이었다.

 

부대시설로는1층에 소집회실, 이발관, 일식당과 양식당, 오락실, 당구장, 창고 등이 설치되었고, 2층에는 대집회실과 끽연실, 3,4층에는 계단식 관람석, 지하층에는 창고가 마련되어 있었다. 공회당에 식당이 마련된 것은 그다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이발관과 당구장, 끽연실이 마련되었다는 것은 이 공간을 대민 문화공간이자 봉사공간으로 활용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물론 이때의 주민이란 이 공간을 주로 사용했던 내지인, 즉 일본인을 가리켰다.

 

부산공회당 공연의 중심은 활동사진, 즉 영화 상영이었다. 19283월에 공회당이 완공되고 49일로 낙성식이 계획되었지만 부산공회당은 그보다 일주일 전인 42일부터 영화상영을 시작했다. 첫 상영작품은 미국의 종교영화 <신을 잊어버린 거리><다비데 대왕>이었다. 이후에도 부산공회당에서는 <엠텐>, <지구의 진화>, <어미에게 맹세해서>, <골고다의 언덕>, <영웅의 흔적>, <폭군 네로>, <천국의 사람>, <여자는 마침내>, <킹 오브 킹>, <노를 잡는 손>, <맹수국 횡단>, <맹수국 세계횡단> 등의 서양영화가 주로 상영됐다.

 

 

이와 함께 부산공회당은 간간이 조선영화도 상영했는데, 김영환 감독의 <장화홍련전(1924)>, 이경손 감독의 <숙영낭자전(1928) 등이 대구 만경관의 주임변사 손병두의 해설로 상영됐고, 나운규의 <아리랑(1926), 이구영의 <아리랑후편(1930)> 등도 부산공회당에서 상영됐다.

 

그 외 연극, 무용, 음악 등의 다양한 문화 공연이 부산공회당에서 열렸는데, 특히 <국제관(1920-1928)>이 화재로 소실된 후에는 정상급 무용가들의 무용공연이 대부분 부산공회당에서 열렸다. 특히 1930년에는 배구자와 최승희, 이시이 바쿠가 모두 부산공회당에서 무용공연을 열었다. 111일에는 배구자가, 1930524일에는 최승희, 112일에는 이시이 바쿠를 부산공회당에서 공연회를 가졌다.

 

이후에도 1931217-18일과 193641일에는 최승희가, 1932715일에는 이시이 바쿠가, 193451일과 193678일에는 조택원이 <부산공회당>에서 공연을 가진 바 있었다.

 

 

그러나 1940년대에 들어서는 군국주의 일제의 선전장으로 완전히 전환되었다. 특히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던 1942년 이후에는 일본 육군성이 만든 <비상시 일본>, 부산 재향군인연합분회 후원으로 공개된 <대공군>, 독일대사관 특별 제공의 <독일, 폴란드 진격>, 조선 방공협회 경남도연합지부의 순회강연 및 영화가 주로 상영되었다.

 

, 일제 말기 부산공회당은 일제가 전쟁을 정당화하고 모든 부산 시민들의 황국신민화로 내몰아 가기 위한 문화적 기지로 악용되는 공간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

,

1914년 부산에 활동사진 상설관 시대가 시작된 이후 1920년대는 영화관이 주도권을 잡은 시기였다. 국제관에서도 12권짜리 장편영화 <! 무정(=레미제라블)>14권짜리 <십계>(1923, 파라마운트사, 세실 B. 데밀 감독)를 상영해 주목을 끌었으나 보래관이나 상생관 등의 영화 상설관에 비하면 상영영화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보래관과 상생관은 일본 유수 영화제작사와 특약을 통해 일본 영화를 확보했고, 보래관과 행관은 미국과 유럽의 영화배급사와의 계약으로 다양한 필름을 확보했다. 특히 행관은 사쿠라바상회가 보유한 3천개 이상의 필름을 활용해 매일 주야 2회 상영을 경영전략으로 구사했다.

 

 

상영 영화 확보에 열세였던 국제관은 눈을 국내로 돌렸다. 일본영화와 서양영화의 열세를 조선영화로 만회하고자 한 것인데, 조선영화란 조선에서 제작된 영화를 가리킨다. 1920년대 초기의 조선영화들은 일본인들의 자본과 기술, 조선인들의 연기 인력의 합작인 경우가 많았다. 1920년대 중반에야 조선의 자본이 동원되곤 했지만, 촬영기법은 여전히 일본식이었다. 조선식의 새로운 촬영기법은 나운규의 <아리랑> 이후에야 도입되었다.

 

1924711일 부산 최초이자 조선 최초의 영화제작사 <조선키네마>가 설립되었다. <조선키네마>는 일본인들이 설립한 영화제작사이지만, 연기와 감독 등의 제작진에는 조선인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1924년 초 조선의 연극인 안종화와 김정원, 유수준과 엄진영, 이경손과 이채전 등 <무대예술연구회>의 회원들이 국제관 무대에서 톨스토이의 <부활>, <월광곡> 등의 연극작품을 공연해 갈채를 받았는데, 이들의 연기를 눈여겨 본 부산의 일본 실업인들이 조선인 배우들을 영입해 <조선키네마()>를 설립한 것이다.

 

조선인 배우와 일본인 자본/기술이 결합해 출범한 <조선키네마()><해의 비곡(秘曲, 1924)>, <총희의 연(寵姬, 1925), 일명 <운영전(雲英傳)>, <신의 장(, 1925)>, <동리의 호걸(洞里豪傑, 1925)> 4편의 영화를 제작해, 모두 국제관에서 상영했다. 이 영화들이 국제관에서 상영된 것은 <무대예술연구회>에 속한 조선인 연극배우들이 국제관과 맺은 인연 때문이었을 것이다.

 

 

국제관은 <조선키네마>의 조선-일본 합작의 조선영화뿐 아니라 조선인이 제작한 조선영화도 다수 상영했다. 김영환 감독의 <장화홍련전(1924)>, 이경손 감독의 <심청전(1925)><개척자(1925)><장한몽(1926)>, 이구영 감독의 <쌍옥루 전,후편(1925)>, 김수로 감독의 <괴인의 정체(1927)> 등이 모두 부산에서는 국제관에서 상영되었다.

 

<조선키네마>는 설립 1년만인 1925년에 경영난과 내부 분열로 해산되었지만, <조선키네마>의 시도는 부산에서 영화의 제작과 배급, 흥행을 모두 담당했던 경험을 남겼고, 이는 훗날 부산이 영화의 도시로 떠오르는 역사적 자산이 되었다.

 

국제관은 영화 상영 외에 다양한 공연을 유치했는데, 무용공연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인 무용가로서 최초로 조선공연을 가졌던 후지마 시즈에(藤間靜枝)의 부산 공연도 1925114일 국제관에서 열렸고, 1926327일 이시이바쿠 무용단의 공연이 열린 곳도 국제관이었다.

 

 

다만 최승희는 국제관에서 무용공연을 가진 적이 없는데, 이는 최승희가 무용유학을 마치고 독자적인 활동을 벌이던 1930년대 초에는 국제관이 이미 화재로 소실되었기 때문이었다. 19284월에는 국제관보다 규모가 크고 시설이 좋은 부산공회당이 개관했으므로 무용공연이 대개 부산공회당에서 열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국제관은 19251월 자본금 20만원이 10만원으로 감자(減資)되는 등 경영의 어려움을 겪던 중, 1929227일의 화재로 전소되었다. 이 화재로 공연 중이던 사와다(澤田) 극단의 출연배우 4명이 사망하고 9명이 중경상을 입었고, 피해액도 109천원에 달했다. 이후 국제관을 재건하려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고, 국제관은 설립 10년 만에 폐관되었다. 화재 당시 국제관의 위치는 대창정 4정목 40번지(1929228일 부산일보)로 기록되어 있다. (*)

 

,

1920822일 국제관(國際館고쿠사이칸, 1920-1929)이 안본정 5번지(=중구 중앙동)에 개관했다. 국제관은 옛 부산역(=1953년 부산 대화재로 소실) 앞에 르네상스식과 일본식의 절충적 건축양식으로 건축되었다. 이형재 건축사의 고증에 따르면 건물 전면 한 칸 기둥까지는 근대식이지만 나머지 부분은 동서양 절충식으로 구성되었고, “건물 상부에 마련한 지붕 내밀기 디자인은 당시로서는 꽤 획기적인 디자인 발상이라고 조사했다.

 

국제관은 4천주를 나눠 투자한 194명의 주주들이 설립했는데, 설립 자본금은 20만 원, 불입금 13만 원이 출자되었다. 가장 많은 주식을 보유한 대주주 4명 중 기노시다 모도지로(木下元次郞)가 대표, 야마무라 마사오(山村正夫)가 전무, 요시오카 시게도미(吉岡重實)와 시게도미 이하치(重富伊八)가 각각 취체역으로 참여하여 공동 경영되었다. 경영진 참여자들은 모두 일본에서 조선으로 건너와 부산에서 경제인으로 성공한 사람들이었다.

 

국제관은 상설 활동사진 영업을 주목적으로 하되, 활동사진 필름의 제조, 판매, 임대, 위탁 매매업도 할 수 있었고, 연극 및 제흥행 경영 중개업, 그리고 극장임대업도 가능하도록 허가되었다.

 

 

국제관 개관 시기는 부산 극장사의 초기가 마무리된 시기였다. 부산의 초기 극장은 8개로, 행좌(杏座사이와이자, 1903-1916)와 송정좌(松井座마츠이자, 1903-1911), 부귀좌(富貴座후키자, 1905-1907)와 부산좌(釜山座후산자, 1907-1923), 변천좌(辨天座벤텐자, 1912-1916), 동양좌(東洋座도요자, 1912?-1918?), 질자좌(蛭子座히루고자, 1912-1918), 욱관(旭館아사히칸, 1912-1916) 등이 그것이다.

 

이 극장들은 모두 일본의 구극과 신극을 주로 상연하던 연극장이었고, 각 극장의 존속 연대에도 보이듯이 이중 부산좌를 제외한 7개 극장이 폐관되거나 영화상설관으로 전환되었다. 송정좌와 부귀자, 질자좌와 욱관은 폐관되었고, 동양좌는 1916년 대흑관으로 바뀌었다가 1918년경 폐관되었다. 다만 행좌는 행관(1916-1930)으로, 변천좌는 상생관(1916-1945)으로 개칭되었다, 이중 욱관은 폐관되기 2년 전인 1914312일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전환해 부산에 활동사진 상영관 시대를 처음 열었다.

 

 

따라서 1918년경에는 부산좌와 보래관, 행관과 상생관의 4곳만 남았고, 부산좌만 연극과 영화 공용상영관으로 남았을 뿐, 나머지 3곳은 모두 새롭게 개관, 혹은 재개관된 활동사진 상설관이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영화관람 수요가 다시 늘어나자 1920년대에 새로운 극장이 세워졌는데, 1920년의 국제관(國際館고쿠사이칸, 1920-1929), 1921년의 유락관(遊樂館유라쿠칸, 1921-1932), 1922년의 태평관(太平館타이헤이간, 1922-1943) 1924년의 수좌(壽座고도부키자, 1924-1945)가 개관해 총 8개의 극장과 공존하면서 다시 관객 경쟁이 재개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앞선 일본식 연극장 시기(1903-1914)와는 달리 활동사진 상설관 시기(1914-1928)로 이미 활동사진, 즉 영화의 공급이 확대되고 이를 관람하는 관객의 층도 두터워졌기 때문에 부산좌가 화재로 폐관된 것을 제외하고는 7개의 극장이 모두 상존(相存)하면서 극장계를 이끌어 나갔다.

 

 

8개 극장도 부산 초기극장 시기부터 보이던 역할 분담이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태평관은 일본전통의 가부키 극장이었고, 보래관과 행관, 상생관은 봇물 터지듯 시작된 활동사진 상설관이었다. 한편 부산좌와 국제관, 유락관과 수좌는 전통적인 일본의 구극과 신극은 물론 새로운 활동사진도 상영했을 뿐 아니라, 부산부 내의 각종 사회단체와 연예행사 등도 개최하는 전천후 극장이었다.

 

그러나 영화관으로서의 국제관은 당시 부산의 3대 상설 영화관인 보래관, 행관, 상생관에 비해 경영 실적이 뒤쳐졌고, 상영된 영화도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연극 공연장으로서는 부산좌와 함께 명성을 얻고 있었다. (*)

,

1916년 상생관(相生館아이오이칸, 1916-1945)이 본정1정목 16번지(중구 동광동116번지)에 문을 열었다. 상생관의 극장주 미츠오 미네지로(滿生峰次郞, 1884~?)는 교야마 하나마루(京山花丸)로부터 인수받은 연극장 변천좌(1912-1916)를 대대적으로 개축하여 19161031일에 활동사진 상설관 상생관을 개관한 것이다. 대지 95, 1,2층 총건평 165평으로 관람석은 1350, 2307, 입석 148, 805석이었다.

 

상생관의 외형장식은 매우 독특했다. 이형재 건축사무소 대표의 고증에 따르면 인조석으로 조각을 부각시켜 석조건물과 같은 느낌을 주도록 표현했으며 2층 열주는 이오닉형에 가까운 주두로 적은 공사비를 투입, 석조집의 모양을 낸 당대 제일의 미장공 솜씨를 뽐낸 건물이다. 로코코와 바로크, 르네상스풍이 가미된 절충식 건물이라고 할 수 있어 이런 유형은 대청동의 근대 역사관에서 조금 찾아볼 수 있다.

 

 

상생관은 1918년부터 닛카츠(日活), 1923년부터는 쇼치쿠(松竹) 영화사로부터 영화를 배급받아 오던 중 닛카츠 영화가 보래관으로 넘어가버리기는 했으나 파테사를 비롯하여 키스튼, 메트로 등의 외국영화를 상영하여 인기를 끌었다.

 

특히 상생관은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가장 먼저 소개하면서 인기를 끌자 독식하다시피 상영했다. 1917428, 1권짜리 <채플린의 장난>을 시작으로 <권투>, <빵집>, <신문기자>, <괴잠정>, <사랑의 도피>, <연극>, 1918년 들어 <악우>, <남의 일에 질투>, <백작>, <가짜>, <지배인>, <칼멘>이 상영됐으며 그 후 <전선의 채플린>, <황금광시대>,<나무망치>, <키드>, <방랑시대>, <스케이트>, <전당포>, <데파트 성금>, <거리의 등불>, <거리의 대장>이 상영됐다.

 

상생관의 외관은 19251115일 개축공사에 의해 새롭게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보래관, 행관과 함께 부산을 대표했던 3대 극장의 하나였던 상생관은 1932212일 쇼치쿠 가마다(蒲田) 촬영소가 만든 발성영화 제1회 작품 <마담과 마누라>를 상영하면서 부산의 세 번째 발성영화 상영관이 되었다.

 

 

이후 상생관은 1934년 부산대교(영도다리) 개통에 이어 1936년에는 극장 건너편에 부산부청(시청)이 들어서면서 주변 환경의 변화로 시민들과 더욱 가깝게 근접할 수 있는 대중 문화공간으로 융성기를 맞이했다.

 

한편 상생관의 극장주 미츠오 미네지로는 1936년 오이케 겐지(大池)로부터 초량동 소재 중앙극장을 인수하여 극장 이름을 대생좌(大生座)로 바꾸고 모관 상생관에서 가까운 잇점을 살려 한 영화를 두 극장에서 동시에 개봉하는 방식으로 경영의 내실을 기했다. 그는 사업 영역을 대구와 서울 지역까지 넓혀 대구 신흥관과 서울 용산극장도 경영했다.

 

그러나 시설과 관객 수용에서 보래관, 행관보다 열세였기 때문에 상생관은 소화통 2정목에 부지를 확보하고 극장 신축을 시도했지만 실현되지 못한 채 광복을 맞았다. 1942년의 <조선의 영화상설관목록(소화17년 영화연감)>에는 대표가 미츠오(滿生忠雄)으로 교체되어 있다.

 

 

해방 후인 194611일 새로운 이름을 현상 공모하여 <대중극장(大衆劇場)>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194812월에는 <부민관(府民館)>으로, 한국전쟁기에는 임시수도 부산의 대표적인 개봉관으로 신작영화가 모두 이곳에서 상영, 2의 전성기를 누렸으나, 19538월에는 <시민관(市民館)>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후 현대극장, 국제극장, 제일극장, 대영극장, 동명극장 등이 차례로 세워지면서 극장 시설의 노후로 2,3번관으로 전락했다가 결국 197661일 개관 60년 만에 문을 닫았다. (*)

 

,

1914년 보래관과 욱관이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전환한 이후 많은 연극장들이 차례로 그 뒤를 따랐다. 19151219일 행좌의 극장주 하사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는 시설이 노후된 연극장을 폐관하고, 주변의 땅을 더 사들여 총 120평의 대지 위에 르네상스 러시아풍과 일본풍의 절충양식으로 2층짜리 현대식 행관(幸館, 1916-1930)을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개관했다.

 

1922년 홋카이도 하코다테 출신의 사쿠라바 후지오(櫻庭藤夫, 1892-)는 행관을 인수하는 한편 영화배급회사 <사쿠라바상회(サクラバ商會)>를 설립해 부산 지역을 포함하여 전 조선과 만주까지 영화 배급망을 구축했다. 그는 행관을 <1행관>, 영도의 수좌(壽座, 1924-1945)를 임대해 <2행관>으로 직영하면서, 일본의 도호영화제작소, 연합영화예술가협회, 동아키네마주식회사 등과 특약을 맺어 경성, 안동, 대련 등에도 출장소를 두어 영화 배급업무를 확대했다.

 

 

극장도 부산 <행관> 외에 경성의 <중앙관>, 평양의 <평양키네마>, 안동의 <전기관> 등은 임대 계약관으로, 울산의 <상반좌>, 대구의 <대송관>, 대전의 <대전관>, 목포의 <희락관>, 군산의 <희소관>, 이리의 <이리좌>, 원산의 <원산극장>, 해주의 <해주좌>, 청도의 <낙락관>, 대련의 <제국관>, 무순의 <보관>을 직영순업부로 운영했다.

 

사쿠라바 후지오는 영화 상영을 극장에만 국한하지 않고, 부산호텔이나 초량의 철도클럽, 신문사와 도청 등의 각 관청과 회사에까지 출장하여 영화 영사업을 개시하여 영업 전략을 다변화해 나갔다.

 

1929718일 행관은 부산 최초로 발성영화 상영시설을 갖추고 마키노 영화사가 제작한 발성영화 제1회작 <돌아오는 다리>를 상영하여 발성영화 상영관 시대를 열었다. 1927년 최초의 발성영화 미국의 <재즈싱어>가 나온 이후 2년만의 일이었으며, 조선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이 만들어지기 6년 전의 일이었다.

 

행관은 행좌(1903-1915) 시기부터 소화관(1931-1945) 시기에 이르기까지 부산지역 극장사의 등뼈와 같은 존재였다. 가장 먼저 세워진 극장이면서, 대형극장화(1916)에 성공했고, 발성영화 상영(1929)의 선두주자 역할을 담당했을 뿐 아니라, 배급망을 확대함으로써 전조선과 만주까지 영업했던 극장이기 때문이다.

 

 

행관은 19301110일의 화재로 소실됐다. <사쿠라바상회>의 지하실 영화필름 저장소에서 발생한 화재는 극장까지 전부 태웠고, 3천권의 필름을 포함, 30여만원의 피해를 입혔다. 부산부 당국으로부터 같은 장소의 극장 재건축을 허가받지 못한 사쿠라바 후지오(櫻庭藤夫)19311231일 남빈정2정목 22번지(지금의 중구 창선동247번지)에 새로운 활동사진 상설관 소화관(昭和館쇼와칸, 1931-1945)을 개관했다.

 

대지 164평에 3층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지어진 소화관은 연건평이 344, 무대만도 25평의 널찍한 극장이었다. 관람석도 861(1932, 부산상공안내)으로, 층별로 등급석을 구별해 1층에는 2등석 475(남자 135, 여자 65, 가족 275), 2층에는 1등석 226(남자 71, 여자 35, 가족 120), 3층에는 3등석 160(남자 48, 여자 48, 가족 64)을 배치했다.

 

 

행관(1916-1930)과 함께 부산 극장가를 모양지었던 극장들은 13개를 헤아렸다. 행관의 개관 당시에는 이미 부산좌(1907-1923)와 변천좌(1912-1916), 동양좌(1912-1918)와 질자좌(1912-1918), 욱관(1912-1916)과 보래관(1914-1945)와 초량좌(1914-1917) 등의 7개 극장이 영업 중이었고, 행관 이후에 개관되어 동시에 존재했던 극장들로는 상생관(1916-1945)과 국제관(1920-1929), 유락관(1921-1932)과 태평관(1922-1943), 수좌(1924-1945)와 중앙극장(1930-1945) 등의 6개관이 있었다.

 

부산 최초의 극장인 행좌(1903-1915)와 최초의 발성영화 상연관 행관(1916-1930), 그리고 부산 최대극장 소화관(1931-1945)의 역사를 합친다면 이는 부산극장사의 등뼈를 형성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

초량좌(草梁座소오리오자, 1914-1917)는 부산 동구 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극장이었다. 일제강점기의 부산 극장들은 대부분 일본인이 밀집 거주 지역이자 상업 지구였던 중구 지역에 집중되었으나 초량좌와 유락관(遊樂館유라쿠칸, 1921-1932)과 중앙극장(中央劇場주오게키조, 1930-1945)3개 극장은 동구지역에서 문을 열었다.

 

초량좌는 1910년에 개관되었다는 설도 있었으나 문헌으로 확인된 것은 191424일자 <매일신보>의 보도가 처음이었다. 이 기사는 이기세 대표가 이끄는 신파극 유일단(唯一團) 일행인 문수성, 이웅수, 윤상희의 지방순회 공연이 초량좌의 무대에 올라 성황을 이루었다고 보도했다.

 

1914111일 조선시보사가 발행한 <경상남도 안내> 11장의 부산의 극장 및 기석을 서술한 글에서도 부산좌, 행좌, 동양좌, 질자좌, 욱관, 보래관, 변천좌 등과 함께 초량좌가 개관되어 있었던 사실을 서술했고, 부산일보(1916621, 1917220)와 조선시보(1916827), 191741일 부산부청이 발행한 <부산부전도>에도 부산좌, 보래관, 대흑좌(동양좌가 개명된 극장), 행관, 상생관과 함께 초량좌가 수록되어 있었다.

 

 

초량좌의 위치는 경부선의 부산 종착지인 초량역 인근 초량천 하구 옆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량좌는 행좌(1903-1915)와 송정좌(1903-1911) 이래 개관된 총 10개의 극장 중에서 영도의 질자좌(1912-1918)와 함께 일본인 거류 및 상업 중심지였던 오늘날의 중구 지역에서 벗어나 설립된 유이의 극장이었다. 초량좌는 일본인들 외에도 조선인들이 자유스럽게 출입할 수 있었던 극장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박원표가 저술한 <향토부산(1967)>부산의 흥행가라는 글에서는 초량좌의 위치에 대하여 초량천을 사이에 두고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에 초량좌가 있었다고 기술했다. 이어 박원표는 초량좌가 “... 개화기에 있던 서울의 연극단들이 부산에 진출, ... 토월회가 이 곳 무대에서 그 연기를 자랑하였다고 기술했으나, 여기에는 오류가 있다. 토월회가 창립된 것은 1922년이므로 1917년경 폐관된 초량좌에서 공연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1921년 초량지역에 두 번째로 세워진 극장 유락관에서 공연되었다고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한편 박노홍은 <한국극장사5(1979)>에서 철로가 생긴 후(1905) 초량 너머에 있는 철도역 근변에 1912년 철도영관이라는 극장이 있었던 것만 가려내었다.”고 기술했다.

 

 

유락관은 부산의 일본인 거류민 1세대 사업가 오이케 타다스케(大池忠助)가 설립한 부산흥산(釜山興産) 주식회사가 자본금 15만원, 불입금 35백원을 출자하여 건축되었는데, 115명의 주주가 소유한 총주식 3천주 중에서 오이케 타다스케가 1280주를 보유한 대주주였다.

 

조선인 연극과 영화 및 연예공연에 배타적이던 대부분의 부산 극장들과는 달리 유락관은 조선인들의 공연과 관람에 개방적이었다. 최천택(조선일보, 192312), 부산여자청년회의 연극(동아일보, 192336), 교남학우회 순회연극(조선일보, 192387), 조선여자교육협회 순회극단(동아일보, 19231222) 등이 유락관에서 공연한 바 있었다. 유락관은 193212일 발생한 화재로 전소된 후 복구되지 못했다.

 

부산좌(1907-1923)와 유락관의 극장주 오이케 타다스케가 1930년 사망하자 장남 오이케 겐지(大池源二, 1892~?)가 이를 승계했고, 건축 중이던 중앙극장(1930-1936)도 완공해 경영했다. 중앙극장은 연극장으로 출발했으나 1936년 상생관 극장주 미츠오 미네지로(滿生峰次郞)가 인수하면서 대생좌(大生座다이세이자, 1936-1945)로 개칭,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전환되었다.

 

중앙극장과 대생좌는 조선인 영화를 상영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1932년에는 <방아타령>(31, 김상진)<금강한>(31, 나운규)을 시작으로 1934년에는 <아리랑>(26, 나운규), <아리랑2>(30, 이구영), 1936년에도 <홍길동전>(34, 김소봉), <춘향전>(35, 이명우), <장화홍련전>(36, 홍개명), <수일과 순애>(31, 이구영), <아리랑3>(36, 나운규) 등의 조선영화가 상영되었다. (*)

,

보래관(寶來館호라이칸, 1914-1973)1914년에 행정1정목 15번지(=중구 창선동115번지, 현 국민은행 광복동점 자리)에 문을 열었다. 극장주 오노하이루(小野入)는 보래관을 연극전용 극장으로 개관해 일본 신극과 가부끼 등을 주로 상연하였다. 개관 당시의 입장료는 1등석 25, 2등석 20,3등석 10전이었다.

 

보래관은 개관 4개월만인 191539일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재개관했다. 이는 욱관이 19143월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전환한 것에 자극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보래관은 욱관에 이어 부산의 활동사진 상설관 2호로 기록된 셈이다.

 

 

19141219일에는 행관(幸館)이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전환함으로써 욱관, 보래관과 함께 부산의 초기 3대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꼽혔다. 1916111월에는 동양좌가 대흑좌로 이름을 바꾸면서 활동사진 상설관 4호가 되었고, 19161031일에는 변천좌가 헐린 자리에 상생관(1916-1945)이 활동사진 상설관 5호관으로 들어섰다. 욱관이 1916, 대흑좌가 1918년에 폐관된 이후부터 보래관은 행관, 상생관과 함께 부산의 3대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꼽혔다.

 

보래관은 부산에서 가장 먼저 연속활극 시리즈물을 선보인 극장이었다. 191678일 길이가 124,000척으로 2550권짜리 대작 영화 <하트3!!>을 상영한 이래 바이타그라프사, 유니버셜사, 파테사, 워너사, 메트로사 등이 만든 미국의 연속활극이 대부분 상영되었다. 초기에는 동경천연색활동사진주식회사와 특약을 맺고 경성의 황금관과 동시에 활동사진을 개봉했고, 후에는 일본의 데이코쿠키네마주식회사와 닛카츠, 미국의 유니버셜영화사, 폭스사, 바이타그라프사, 워너사,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사, 그리고 프랑스, 독일 등의 유럽 영화까지 상영했다.

 

보래관은 행관에서 1929년 처음으로 발성영화를 상영한지 1년 후인 1930726일 닛카츠(日活)의 제1회 작품인 <고향>을 상영하면서 발성영화 상영관 시대의 대중화를 열어 나갔다.

 

보래관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은 이바라키현 출신의 이와사키 다케지(岩崎武二)였다. 그는 도쿄의 영화사에서 근무하다가 1914년에 조선으로 건너왔고, 한동안 경성에서 일하다가 부산에 와서 보래관에서 지배인으로 오래 근무한 후, 경영을 승계했다.

 

 

1928년 보래관은 재건축되었다. 상층 250, 하층 450, 700석 수용의 2층 목조 건물로 재건축된 보래관은 같은 해에 행관, 상생관과 함께 키네마협회를 결성함으로써 경쟁을 줄이고 협력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키네마협회는 1930년 행관이 화재로 폐관된 후 행관의 뒤를 이은 소화관을 받아들여 부산활동사진상설관동업조합으로 바뀌었고, 1944년에는 부산영화극장이 가입해 부산영화연예조합을 개칭하면서 4개 극장 담합체제를 유지했다.

 

193792일 당시 극장주 이와사키 다케지는 극장 노후화를 이유로 재신축을 결정, 상영 중인 영화 프로를 부산극장으로 이동해 상영해 가면서 11개월 동안 건축비 30만원을 투입한 끝에 1938105일 새로운 보래관을 개관했다. 이는 140평 대지 위에 3층 석조건물(총 건평 341)을 갖춘 현대식 극장으로 수용인원은 952석이었다.

 

보래관은 일제에 앞장서서 협조했던 대표적인 친일 극장 중의 하나였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에 협조하기 위해 영화광고(1941525일자 부산일보)에서도 국민 모두가 방첩 전사라는 구호를 싣는가 하면 만주 사변 기념흥행식의 표현으로 자국전쟁을 미화 홍보하는 상영광고를 서슴지 않았다.

 

보래관은 조선인이 제작한 조선영화를 철저하게 외면한 극장이었다. 개관한 전 기간 조선영화를 단 1편도 상영하지 않았으나, 1944년 제작된 친일 어용영화 <거경전>이 유일하게 개봉된 바 있었다.

 

8·15 광복 후에는 194611<국제영화극장>으로 명칭을 변경했고, 한때 미군 전용 극장으로 운영되다가 1949118<국립 극장>, 1950618<문화극장>으로 명칭을 바꾸었다가 1973827일 폐관하였다. (*)

,

한국 최초의 국제영화제가 부산에서 열리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부산이 오래 전부터 극장과 영화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이는 영화관의 역사와 그 수가 말해 준다.

 

부산지역에서는 1903년에 첫 극장이 개관한 이래, 대한제국 말과 일제강점기(1903-1945)23개 영화관이 존재했다. 해방 후(1947-2014)에도 단관극장이 78개소, 소극장(1982-1999)48개소, 복합영화관(1993-2014) 27개소가 개관과 폐관을 거듭하면서 부산 영화인들과 관객들에게 영화를 가까이 하게해 왔다. 여기서는 일제강점기의 주요 극장들에 대해서만 일별해 보기로 하자.

 

부산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연 극장은 행좌(幸座, 1903-1915, 사이와이자)였다. 190312(추정), 부산의 사업가 하자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 1860-1942)가 남빈정 2정목 14번지(=중구 남포동245-1번지)에 개관한 행좌는 일본인들을 위한 연극장, 즉 가부키 극장이었다.

 

 

부산에서 두 번째로 개관한 극장은 송정좌(松井座마츠이자, 1903-1911), 행정 2정목(=중구 남포동, 또는 중구 광복동?)의 사안교(思案橋) 앞에 세워졌다. 부산의 여관업자 마츠이 고지로(松井幸次郎)가 설립한 이 극장은 연극장이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행좌와 송정좌에 이어 부귀좌(富貴座후키자, 1905-1907)가 부평정(=중구 부평동)에서 문을 열었으나 190781일 발행된 지도 <부산항시가 명세도>에 부귀좌가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 전에 폐관된 것으로 보인다. 1906315일 발행된 <조선실업> 10호가 “(행좌와 송정좌와 부귀좌의) 세 극장이 모두 비좁다고 서술한 것을 보면 부산의 초기 3대극장은 규모가 크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부산 최초의 대형극장은 부산좌(釜山座후산자, 1907-1923)이다. 부산의 일본인 거류민 1세대 실업가 오이케 타다스케(大池忠助)를 중심으로 야마모토 준이치(山本純一), 나까무라 토시마츠(中村俊松), 고지마 진기찌(五島甚吉)등이 공동 합자, 19074월 자본금 총액 3만원, 불입자본금 2만원을 출자하여 부산연극합명회사를 창립 후 부산좌를 건축, 그해 715일 개관했다.

 

부산좌 건물은 끽다점과 정원을 설치하는 등 부대시설과 조경에도 신경을 쓴 근대식 건축물이었다. 내부 관람석은 의자가 아니라 방석을 깔고 앉는 구조였다. 관람석 수는 무대 정면에 990, 좌우측이 각각 225석으로 총 1,540석으로 당시 조선과 만주를 통틀어 최대 규모였다. 연극 전용극장이었으나 연쇄극과 영화 상영도 계속되었고, 음악회, 무용발표회, 투견대회, 권투시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행사가 개최되었던 극장이었다. 특히 부산좌는 19151016<짝사랑>을 상영하면서 한국 최초의 연쇄극 상영극장으로 기록되었다.

 

 

1912년에는 4개의 극장이 추가로 개관했다. 변천좌(辨天座벤텐자1912-1916, 본정1정목, 중구 동광동116번지), 동양좌(東洋座도요자, 1912?-1918?, 부평정1정목, 중구 부평동), 질자좌(蛭子座히루고자, 1912-1918, 목도牧島, 영도), 욱관(旭館아사히칸, 1912-1916, 행정1정목, 중구 창선동)이 그것이었다.

 

변천좌는 극장주 교야마 하나마루(京山花丸)1916년 활동사진 상설관인 상생관(相生館아이오이칸)으로 전환하기 위한 개축공사에 들어가면서 5년 만에 폐관되었다.

 

동양좌는 부산좌와 함께 드물게 회전무대까지 갖춘 연극 전용 극장이었으나 1916년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전환하면서 대흑좌(大黑座다이고쿠자)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8년 발행된 <부산시가전도> 이후의 문헌에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대흑좌는 그 무렵 폐관된 것으로 보인다.

 

영도 지역에 처음 세워진 질자좌의 극장주나 폐관 이유 등이 밝혀져 있지 않으나, 아마도 일본인 거류지 중심가에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흥행이 부진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욱관은 기석식(奇蓆式) 연극 공연장이었으나 활동사진 상영 시설을 확충하고 일본활동사진주식회사와 천연색활동사진주식회사와 영화공급 계약을 맺은 후 1914312일부터 연중무휴로 활동사진을 상영하기 시작했다. 욱관은 부산에서 활동사진 상영관 시대를 열었다. (*)

,

2주전 일본 고베(神戶)시에서 열린 깅키(近畿)지방 <재일조선학생 예술경연대회>에서 발표된 <장고무>입니다. <아마가사키(尼崎)조선학교>의 무용부 학생이 이 <장고무> 발표로 금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장고무> 혹은 <장구춤>은 1937년 2월4일부터 6일까지 열렸던 최승희 선생의 오사카 공연에서 초연되었고, 2월14-15일의 교토공연에서 재연된 작품입니다. 1939년 1월31일 <파리 살플레옐> 공연과 2월6일의 <브뤼셀 팔레드 보자르>공연에서는 <기생무>라는 제목으로 상연되기도 했습니다. 배운성 화백의 목판화로도 제작되었던 바로 그 작품이지요.

 

 

그 <장구춤>이 84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재일 조선학교의 어린 무용수들에 의해 공연되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 아닙니까? 한 무용 작품이 80년 넘도록 계속 공연되고 있다는 것이... 게다가 이 학생들이 지금과 같은 열정을 가지고 최승희 선생이 창안하신 조선무용을 이어간다면, 1백년이고 2백년이고 계속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진짜 고마운 일입니다.

 

 

4차 <무용신> 캠페인이 진행 중입니다. 1인1만원 이상의 후원으로 우리가 보내는 <무용신>은 이처럼 장한 학생들에게 작은 기쁨과 큰 보람을 줄 수 있습니다. 관심 가져주시고, 참여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카카오뱅크: 7979-20-34510 우리학교 후원모임 아이(이인형)

 

 

한국<팀아이>: 조성무(회장, 문의: 010-5037-1244), 정회선, 황웅길(고문), 강충호, 권홍우, 이인형, 이원영, 정철훈, 조정희. 그리고 강욱천, 최명철 선생께서 함께 하십니다.

,

京都朝鮮学校運動場ですれって質問した教員でした道具箱ぶのでだとっていましたが運動会づくとみんなが練習準備んだのです

 

在日朝鮮学校において毎年運動会非常重要行事です生徒教職員父兄まる行事だからです学校のバザーや展示会音楽会種目別体育競技なども学校構成員たちがまる行事ではありましたが年例運動会こそ父母めて全学校構成員一堂まる最大行事です

 

このような学校運動会70年代まで韓国でもんだったようですまたその地方さな学校命脈いてきたようですがある時点から韓国では挙校的年例運動会姿したのですしかし在日朝鮮学校ではそれが伝統としてまでいています

 

2019年9月末、筆者は京都朝鮮中高級学校を訪問しました。 学生たちが体操服姿で運動場で年次運動会の練習を準備していました。

 

銀閣寺近くの喫茶店でコーヒーをみながら時間十二時半頃また京都朝鮮学校きました正門るとすでに学生たちが運動場まっていました昼食ませてから運動会練習までまだ30ほど時間があったのでみんな自由運動場いたりをしたりしていました

 

運動場号令台とそのでは教員らしき大人たちがあわただしくあれこれ準備をしていましたすでにおわしたなじみの教員してまたってきたとげるとその教員はすぐに女性教員一人へおれしましたたちは挨拶わしました

 

舞踊部指導教員はユン·ギョンソン先生いというよりいとうべき年輩でした韓国式でいえば師範大学えて最初学校赴任されたのような印象でした丁寧挨拶をしこれまでってきた崔承喜(チェ·スンヒ)研究について簡単紹介しましたそして朝鮮学校舞踊部活動作品についてえていただけないかと丁寧においしました

 

ユン·ギョンソン教員いけれど気品があって意志力じられる表情でしたをしている途中何人かの学生たちがりすがりに挨拶をしたりづいてきてをかけたりしたのですがそのたびにユン·ギョンソン教員やかで権威ある身振りや言葉遣いで学生たちから挨拶けたり指示をしましたいわばかのカリスマをっているようでした

 

京都朝鮮中高級学校の生徒たちが2019年の運動会を練習している場面。

 

ユン·ギョンソン教員崔承喜先生京都でも何度公演をしたことがあるという事実いたようでしたそして崔承喜先生公演資料調べているうちに京都朝鮮学校にまでったという事実にも興味ったようでした

 

前日までに京都市立図書館つけた資料によると崔承喜先生終戦前まで京都なくとも5公演いました1935118京都朝日会館公演初公演その19361131937127京都宝塚劇場194136京都朝日会館朝鮮舞踊上演されましたまた一部記録では19431にも関西公演ったとありますのでおそらくここに京都公演まれているはずです

 

このようなをすべておきになったユン·ギョンソン教員崔承喜先生朝鮮学校舞踊部する関心一度きりの関係常軌したものではないことをご存知のようでしたはちょっとってくれとった校長先生れてきました

 

年輩える校長先生謹厳姿でしたがるい表情でした再度挨拶わしたはユン·ギョンソン教員にした説明要約してびおしましたしかしもなく運動会練習まる予定でしたので継続してえないとおえになったのか校長先生からご提案いただきました

 

10月末大阪<中央芸術競演大會>かれますそこにると趙正熙先生朝鮮舞踊直接見ることができるはずです言葉うよりそのがはるかにいいといます(*)

,

교토조선학교 운동장에서 마주쳐 질문을 드렸던 분도 알고 보니 교원이셨습니다. 연장 상자를 옮기시기에 일꾼일 줄 알았지만, 운동회가 임박하자 모두가 연습 준비에 뛰어든 것이지요.

 

재일 조선학교에서 연례 운동회는 아주 중요한 행사입니다. 학생과 교직원과 학부모가 모두 모이는 행사이기 때문입니다. 학교의 바자나 전시회, 음악회나 종목별 체육경기 등도 학교의 구성원들이 모이는 행사이기는 했지만 연례 운동회야말로 학부모를 포함하여 전 학교 구성원이 한데 모이는 가장 큰 행사입니다.

 

이 같은 학교 운동회는 아마도 70년대까지 한국에서도 성행했던 것 같습니다. 또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지방의 작은 학교들에 명맥이 이어져 왔던 것 같지만, 어느 시점부터 한국에서는 거교적 연례 운동회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하지만 재일 조선학교에서는 그것이 전통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2019년 9월말, 필자는 교토조선중고급학교를 방문했습니다. 학생들이 체육복 차림으로 운동장에서 연례 운동회 연습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긴카쿠지(銀閣寺) 인근의 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시간을 기다렸다가 12시 반쯤 다시 교토조선학교로 갔습니다. 정문에 들어서자 이미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여 있었습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운동회 연습까지 아직 30분쯤 시간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다들 자유롭게 운동장을 거닐거나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운동장의 구령대와 그 옆의 차일 안에서는 교원으로 보이는 어른들이 분주하게 이런저런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말씀을 나눴던 낯익은 교원을 찾아서 다시 돌아왔다고 말씀을 드리자, 그 교원은 금방 여성 교원 한분을 차일 쪽으로 모셔왔습니다. 우리는 인사를 나눴습니다.

 

무용부 지도교원은 윤경선 선생이셨고, 젊다기보다는 어리다고 해야 할 연배이셨습니다. 한국식으로라면 사범대학을 마치고 첫 학교에 부임하신 분 같은 인상이었습니다. 저는 깍듯이 인사를 드리면서 내 소개를 했고, 그동안 해 온 최승희 연구에 대해 간략히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학교 무용부의 활동과 작품에 대해 배울 수 있겠느냐고 정중하게 부탁을 드렸습니다.

 

윤경선 교원은 젊기는 했으나 기품 있어 보였고, 얼굴도 의지력이 엿보이는 표정이었습니다. 저와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몇몇 학생들이 지나가면서 인사를 하거나 다가와서 말을 걸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온화한 것 같으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권위가 실린 몸짓이나 말투로 학생들의 인사를 받거나 지시를 했습니다. 말하자면, 어떤 카리스마를 지닌 것 같았습니다.

 

교토조선중고급학교 학생들이 2019년 운동회를 연습하고 있는 장면.

 

윤경선 교원은 최승희 선생이 교토에서도 여러 차례 공연을 하셨던 적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최승희 선생의 공연 자료를 조사하다가 교토조선학교에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에도 흥미를 느끼신 것 같았습니다.

 

전날까지 교토시립도서관에서 찾은 자료에 따르면 최승희 선생은 해방 전까지 교토에서 적어도 5회의 공연을 가졌습니다. 1935118일의 교토 아사히 회관 공연이 첫 공연이었고, 그 뒤로도 1936113일과 1937127일 교토 다카라즈카극장, 194136일 교토 아사히 회관에서 조선무용을 공연했습니다. 또 일부 기록에는 19431월에도 간사이 공연을 가졌다고 되어 있으므로 아마도 여기에 교토 공연도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다 들으신 윤경선 교원은 내가 가진 최승희 선생과 조선학교 무용부에 대한 관심이 일회적이거나 범상하지 않은 것을 아신 것 같았습니다. 그는 잠깐 기다려달라고 말한 후 교장 선생님을 모셔왔습니다.

 

저와 연배가 비슷해 보이는 교장선생님은 다소 근엄한 모습이었지만 명랑한 표정이셨습니다. 재차 인사를 나눈 후, 나는 윤경선 교원에게 했던 설명을 요약해서 다시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곧 운동회 연습이 시작될 예정이었으므로 마냥 대화할 수 없겠다고 생각하셨는지, 교장 선생님께서 제안하셨습니다.

 

“10월말 오사카에서 <중앙예술경연대회>가 열립니다. 거기에 오시면 조선무용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말로 하는 것보다 그게 훨씬 나을 것 같습니다.” (*)

,

李仁珩(·インヒョン)先生一緒<舞踊靴キャンペーン>めたのは20202ですが淵源4月前20199月末にさかのぼります当時私崔承喜(チェ·スンヒ)先生日本公演調べていました

 

20185からスタートした日本調査1年半続北海道釧路から沖縄那覇まで日本国内42都市訪問しました崔承喜先生公演われた場所です都市ごとに府立県立市立図書館記録保管所新聞社博物館調公演われた劇場見学しました

 

日本調査中朝鮮学校めてしたのは京都でした20199京都市立図書館調べていたら友人から京都素敵なおがあるからぜひてくださいわれました銀閣寺でしたかでいていてよかったです

 

京都東山近くの銀閣寺の隣に位置する京都朝鮮中高級学校正門

 

銀閣寺周辺小川沿いにられた遊歩道、「哲学名付けられたのはちょっと突拍子もありませんが遊歩道そのものはしいです9月末でしたので遊歩道沿いにえられたはまだ々としていましたが紅葉満開になると壮観ですね

 

実際<哲学>案内板ではこの紅葉雪景色としてしいと紹介されています案内板日本語英語中国語一緒韓国語説明えられたのはいいんですがただ翻訳りがありましたこの1986<日本100>ばれたという説明ですが韓国語説明には<日本100>間違って翻訳されています関心のある当局連絡して修正するようにしていただいてもいません^^

 

世界遺産登録されたおだけあって銀閣寺はきれいでいた管理がなされていましたマニキュアがよくできたのように清潔じでしたしかし朝早入場したにもかかわらず団体観覧学生くて篆刻庭園より裏山散策路だけ見物してなければいけませんでした

 

銀閣寺近くの川辺に設けられた遊歩道<哲学の道>、なぜそのような名前が付けられたのかは分かりませんが、遊歩道はとても良い場所です。

 

ところで銀閣寺入口あたりにはるときにかけた京都朝鮮中高級学校進入路という標識つけました好奇心られて銀閣寺左手にあるってきました左右鬱蒼としたはセメント舗装道沿ってがれば学校正門てきました

 

正門両側には京都朝鮮中高級学校とハングルと漢字かれていました日本調査期間漢字仮名だけせっかくハングルをしかったですしかも両側かれる鉄門中央にはサンペンとばれる校標けられていました

 

ペンとハンマーがになって三角形配列されたサムペンのマークは1948東京朝鮮学校校標採択されて以来日本全国朝鮮学校まったといわれていますペンとつになったものはきながら勉強しようという意味3配列したものは韓国北朝鮮在日韓国人のために3ずつきながら勉強しようという意味だという説明けたようです

 

京都朝鮮中高級学校正門に付けられたサンペン校標。 ペンと槌が三つずつ配列されているのは"働きながら勉強"するとしても、南北と在日韓国人のために3倍も頑張ら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意味だといいます。

 

正門いていて運動場いていました授業時間でしたどうしようしばらくえてからわれるまで校庭教師見学しましたそのまますのは残念だったからです運動場横切って本館付属建物んでてられた校舎歳月がありましたが清潔掃除されて整理されていました

 

付属建物掲示板<2018427日板門店宣言>らせる写真掲示されていてきました文在寅(ムン·ジェイン)大統領金正恩キム·ジョンウン総書記握手する場面ってげる場面でしたテレビ画面感激がりながらしみをじました

 

ハングルで掲示された掲示物みながら校舎内部をもっとりたかったのですが、「それは礼儀正しくないだろう?」運動場りました運動場には学校名前かれた遮日てられていたがちょうど道具箱ってぎるをつかまえて韓国からたのに舞踊部指導教師においできますかねました(*)

,

이인형 선생과 함께 <무용신 캠페인>을 시작한 것은 20202월이지만, 연원은 넉 달 전, 20199월 말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저는 최승희 선생의 일본공연을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20185월부터 시작한 일본 조사는 1년 반 계속되었고 홋카이도 쿠시로(釧路)에서 오키나와 나하(那覇)까지 일본 내 42개 도시를 방문했습니다. 물론 모두 최승희 선생의 공연이 열렸던 곳입니다. 가는 도시마다 부립, 현립, 시립 도서관과 기록보관소, 신문사와 박물관을 조사했고, 공연이 열렸던 극장과 공회당들을 답사했습니다.

 

일본 조사 중에 조선학교를 처음 접한 곳이 교토(京都)에서였습니다. 20199월 교토시립도서관을 조사하던 중, 친구 한 명이 교토에 멋진 사찰이 하나 있으니까 꼭 구경하고 와라는 문자를 보냈습니다. 긴카쿠지(銀閣寺)였습니다. 고즈넉하고 차분해서 좋더군요.

 

 

교토 히가시야마 인근 은각사 옆에 위치한 교토조선중고급학교 정문

긴카쿠지 주변에 개울 따라 만들어진 산책길에 철학의 길(哲學)’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약간 생뚱맞지만 산책로 자체는 아름답습니다. 9월말이었으므로 산책길을 따라 심어진 벚나무 잎은 아직 푸르렀지만, 가을 단풍이 들거나 봄에 벚꽃이 만발하면 장관이겠더군요.

 

실제로 <철학의길> 안내판에는 이 길이 봄의 사쿠라, 여름 반딧불, 가을 단풍, 겨울 설경으로 아름답다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안내판에 일본어, 영어, 중국어와 함께 한국어 설명이 곁들여진 것은 좋은데, 다만, 번역에 잘못된 것이 있더군요. 이 길이 1986년에 <일본의 길 100>에 뽑혔다는 설명인데, 한국어 설명에는 <일본의 다리 100>으로 잘못 번역되어 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은 당국에 연락해 수정하도록 해 주셔도 좋겠습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명성답게 긴카쿠지는 깨끗하고 차분하게 잘 관리되어 있었습니다. 매니큐어가 잘 된 손처럼 정갈한 느낌이었지요. 하지만 아침 일찍 입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체관람 학생들이 많아서 전각이나 정원보다 뒷산 산책로만 구경하고 나와야 했습니다.

 

은각사 근처 천변에 마련된 산책로 <철학의길>,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산책로는 아주 좋습니다.

 

그런데 긴카쿠지 입구 근처에서 들어갈 때 보지 못했던 <교토조선중고급학교 진입로>라는 표지판을 발견했습니다. 호기심에 이끌려 긴카쿠지 왼쪽으로 난 오르막길을 따라 갔습니다. 좌우의 울창한 숲 사이로 난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올라가니까 학교 정문이 나왔습니다.

 

정문 양쪽 기둥에는 <교토조선중고급학교>라고 한글과 한문으로 쓰여져 있었습니다. 일본 조사기간 한자와 가나만 보다가 모처럼 한글을 보니 반갑더군요. 더구나 양쪽으로 열리는 철문 중앙에는 삼펜(サンペン이라고 불리는 교표가 부착되어 있었습니다.

 

펜과 망치가 짝을 이루어 삼각형 모양으로 배열된 삼펜 마크는 1948년 도쿄조선학교의 교표로 채택된 이후 일본 전역의 조선학교로 퍼져나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펜과 망치가 한데 묶인 것은 일하며 공부하자는 뜻이고 세 쌍을 배열한 것은 남한과 북한과 재일동포를 위해 세 배씩 일하며 공부하자는 뜻이라는 설명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교토조선중고급학교 정문에 부착된 삼펜 교표. 펜과 망치가 세개씩 배열되어 있는 것은 "일하면서 공부"하되 남북한과 재일동포를 위해 3배나 열심히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정문은 열려 있었고 널찍한 운동장은 비어 있었습니다. 수업시간이었습니다. 어떡하나, 잠시 생각하다가 누군가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교정과 교사 구경을 했습니다. 그냥 발길을 돌리기는 아쉬웠기 때문입니다. 운동장 가로질러 본관과 부속 건물로 나란히 세워진 교사는 세월의 흔적이 있기는 했지만 정갈하게 청소되고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부속 건물 입구의 게시판에 <2018427일 판문점선언>을 알리는 사진이 게시되어 있어서 눈길을 끌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악수하는 장면과 손을 맞잡고 치켜든 장면이었습니다. 티비 화면으로 보았을 때의 감격이 떠오르면서 친숙함이 밀려왔습니다.

 

한글로 게시된 다른 게시물들을 읽으면서 교사 내부를 더 둘러보고 싶었지만 그건 예의가 아니지?’하는 생각에 다시 운동장으로 나왔습니다. 운동장에는 학교 이름이 쓰인 차일이 세워져 있었는데, 마침 연장 상자를 들고 지나가는 분을 붙잡고 한국에서 왔는데 무용부 지도교사를 만나 뵐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

,

フェイスブックののポスティングをしてみたら、「舞踊靴キャンペーンめたのは2020221でした李仁珩(·インヒョン)先生各自のフェイスブックといくつかのグループトークにけをめました李仁珩先生当時のポスティングをんでみると、「在日朝鮮学校神戸朝高卒業式参観しますが舞踊部学生たちにバレーシューズをプレゼントしたいのでのあるたちは同参してくださいとあります

 

神戸朝校卒業式出席できたのは鄭世和チョン·セファ先生めのおかげでした伊丹みながら関西写真家としていている鄭世和先生朝鮮舞踊りたいなら朝鮮学校についてら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朝鮮学校主要行事参加するようにめましたその15かれた神戸朝高吹奏楽部新年音楽会参加したのもその勧告のおかげでした

 

2020年1月5日、神戸市東灘区の区民会館で開かれた第21回神戸朝高吹奏楽部新年音楽会

 

神戸朝高吹奏楽部毎年新年音楽会きます校内行事ではなく一般人対象にした対外行事です出席した演奏会神戸市東灘区区民センターでかれ出席した観客在日韓国人だけでなく日本人観客かったです

 

はどうかかりませんが7~80年代には韓国にも高校がほとんど吹奏楽部設置していました。 「バンドとよくびました中高校部活活発日本同様です日本高校吹奏楽部はずっと体系的参加人数演奏力いので校内行事だけでなく対外行事をよくっているようですユーチューブに各地域主要高校吹奏楽部街頭行進演奏をしている動画いです

 

神戸朝高吹奏楽部街頭行進ではなさそうですが毎年新年音楽会いています2020演奏会21ということで神戸市のメジャーな音楽行事として定着したのですね演奏曲にも既成曲だけでなく創作曲まれており演奏実力水準がかなりかったです

 

日本全国高校生コンクールで3になったという3年生のプロット独奏があり<希望>という木管重奏印象的でしたしかしよりも自分感動えてくれたのは、「ホン()オル」、「思鄕などの合奏曲でした

 

この演奏会プログラムでは1999年神戸朝高創立50周年記念してノク()という創作され10年後2009にはオル」、そしてこの演奏初演されたいずれも異国しい環境においてもがれてきたその価値決心世界中りたい気持ちで創作されたとなっていました

 

2020年1月5日、神戸操高吹奏楽部の新年音楽会で会った鄭世和先生(中央)と筆者(右)。

 

レパートリーは全般的深刻でしたが高校生のイベントだけにとても自由でした司会者女学生があらかじめ準備した言葉思慮深いながらもウィットがあり演奏合間にコントを演出したりもしました最後には<アリラン>一緒順番もありますが韓国語らない日本人観客のために発音解釈映像せてくれました

 

当時ほとんどすべての関心朝鮮舞踊いていたにも印象的順序がありました吹奏楽演奏りが調和したいつでもらはいつでもらは)」というでしたが神戸朝高舞踊部学生たちが賛助出演した作品として記憶されています

 

2月前中央芸術競演大会参観してこの日神戸朝高吹奏楽演奏会鑑賞した鄭世和先生がもうつのイベントを推薦しました3われる朝鮮学校卒業式出席してみるようにとのことでしたそうして鄭世和先生母校である神戸朝高卒業式推薦してくださったのですが便宜りやすかったからだといます

 

この卒業式にも参観すると約束してりにめて舞踊靴プレゼントのアイデアがかびました。 「日本朝鮮人として一生懸命きて勉強する学生たちのためにかをしたいといましたソウルにっててからそんないを李仁珩鄭世和先生かちいながらやがて神戸朝高舞踊部舞踊靴をプレゼントする計画てるにりました(*)

,

페이스북의 옛 포스팅을 찾아보니 <무용신 캠페인>을 처음 시작한 날은 2020221일이었습니다. 이인형 선생과 저는 각자의 페이스북과 몇몇 단톡방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인형 선생의 당시 포스팅을 찾아 읽어보니 재일 조선학교 고베조고 졸업식을 참관하는데 무용부 학생들에게 발레슈즈를 선물하고자 하니 뜻있는 분들은 동참해 달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베조고 졸업식에 참석하게 된 것은 정세화 선생의 권고 덕분이었습니다. 이타미에 거주하시면서 간사이 지역에서 사진가로 일하시는 정세화 선생께서는 조선무용을 알고 싶다면 조선학교를 알아야 하니, 조선학교의 주요 행사에 참석해 보라고 권하셨습니다. 그해 15일 열렸던 고베조고 취주악부의 신년음악회에 참석한 것도 그 권고 덕분이었습니다.

 

2020년 1월5일, 고베시 히가시나다구의 구민회관에서 열린 제21회 고베조고 취주악부 신년 음악회

 

고베조고 취주악부는 매년 신년음악회를 엽니다. 교내 행사가 아니라 일반인을 대상으로 대외행사입니다. 내가 참석한 연주회도 고베시 히가시나다구(東灘区)의 구민센터에서 열렸고, 참석 관객은 재일동포뿐 아니라 일본인 관객도 많았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몰라도 7-80년대에는 한국에서도 고등학교들이 대부분 취주악부를 두고 있었습니다. 흔히 밴드부라고 불렀지요. 중고등학교의 동아리 활동이 활발한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 고등학교의 취주악부들은 훨씬 체계적이고 참가인원도 많고 연주 실력도 좋아서, 교내 행사뿐 아니라 대외 행사를 자주 갖는 것 같습니다. 유튜브에 각 지역 주요 고등학교 취주악부가 거리 행진 연주하는 동영상이 많습니다.

 

고베조고 취주악부는 거리 행진 연주를 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매년 신년음악회를 엽니다. 2020년의 연주회가 제21회라고 하니까 고베시의 주요 음악 행사로 완전히 자리 잡은 것이지요. 연주곡에서도 기성곡뿐 아니라 창작곡이 포함되어 있었고, 연주 실력도 수준이 상당히 높았습니다.

 

일본 전국 고교생 콩쿨에서 3위를 했다는 3학년생의 플롯 독주가 있었고, <희망의 날개>라는 목관중주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게 감동을 주었던 것은 <><>, <사향> 등의 합주곡이었습니다.

 

이날 연주회 프로그램의 설명을 보면 1999년 고베조고 창립50주년을 기념해 <>이라는 곡이 창작되었고, 10년 후인 2009년에는 <>, 그리고 이날 연주에서 초연된 <>은 모두 이역 땅 어려운 환경에서도 이어온 넋과 얼, 그 가치와 힘과 결심을 온 세계에 자랑하고 싶은 마음으로 창작된 곡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2020년 1월5일, 고베조고 취주악부 신년음악회에서 만난 정세화 선생(가운데)과 필자(오른쪽).

 

레퍼토리는 전반적으로 심각했지만 고등학생들의 행사였던 만큼 형식은 퍽 자유로웠습니다. 사회자 여학생이 미리 준비한 멘트는 사려 깊으면서도 위트가 있었고, 연주 중간 중간에 상황극을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맨 마지막 순서로 <아리랑>을 함께 부르는 순서도 마련됐는데, 한국말을 모르는 일본인 관객들을 위해 발음과 해석을 영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거의 모든 관심이 조선무용에 기울어져 있던 내게도 인상적인 순서가 있었습니다. 취주악 연주와 노래와 춤이 어우러졌던 <언제라도 우리는(いつだつてらは)>이라는 순서였는데, 고베조고 무용부 학생들이 찬조 출연했던 작품으로 기억됩니다.

 

두 달 전에 중앙예술경연대회를 참관했고, 이날 고베조고의 취주악 연주회를 감상한 나에게, 정세화 선생께서 한 가지 행사를 더 추천하셨습니다. 3월에 있을 조선학교 졸업식에 참석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정세화 선생의 모교인 고베조고 졸업식을 추천하셨는데 아무래도 편의를 보아 주시기가 쉬워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 졸업식에도 참관하기로 약속하고 돌아오는 길에 처음 무용신 선물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일본땅에서 조선인으로 열심히 살아가며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해 무언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울로 돌아온 후 그런 생각을 이인형, 정세화 선생과 나누면서, 마침내 고베조고 무용부에 무용신을 선물하는 계획을 세우기에 이르렀습니다. (*)

,

202110四回目<舞踊靴>キャンペーンを進行中です3までの3キャンペーンをじて183個人後援者5つの後援団体支援により1,288万圓寄付まり506在日朝鮮学校舞踊部学生指導敎員々に舞踊靴されました

 

4キャンペーンは3舞踊靴キャンペーンをじても舞踊靴をプレゼントしてもらえなかった13在日朝鮮初中級学校76中学生舞踊部員13舞踊部指導敎員追加舞踊靴伝達するためです舞踊靴わりでれていた学校のように把握されています

 

東京朝鮮第1初中級学校以下いずれも朝鮮初中級学校13)、東京第45)、東京第55)、西東京第112)、西東京第21)、埼玉12)、千葉1)、群馬6)、東北1)、長野8)、静岡1)、四日市2)、岡山6各舞踊部指導敎員1389)。

 

韓国<チームアイ>の李仁珩(イ·インヒョン)先生が2020年3月、神戸朝鮮高級学校舞踊部の教員に舞踊の神様をお届けする姿です。

 

地域的東京とその近隣地域初中級学校いですが大部分小規模学校初級学校=小学校中級学校=中学校統合されている学校です3回目のキャンペーンでは舞踊靴キプレゼントの対象中学生以上めていたのですが小学校併設されている中学校舞踊部生徒除外されていたといます学校小学生違和感えることを心配して善処されたのだといます

 

それで今回4キャンペーンでは中学生からけていた生徒たちに舞踊靴すぐに小学校舞踊部にも舞踊靴るキャンペーンをげ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ます朝鮮学校では小学生たちが4年生から舞踊部サークルにって活動できるというから次回舞踊靴プレゼント対象4-6年生になるべきではないかといます

 

舞踊靴キャンペーンがまったこんなにそしてこれほどの規模発展するとはいませんでした舞踊靴キャンペーンがまったのは20203でしたがその李仁珩先生訪問した神戸朝鮮高級学校舞踊部生徒たちにだけプレゼントするつもりでしたその仕事きくなり関西東京朝鮮学校になり高校生だけでなく中学生対象まれました

 

中学生めることにしたのは朝鮮学校には·高級学校つまり中学校高等学校併設されていた学校かったからです学校中学生いて高校舞踊部員にだけプレゼントするのがずかしくて自然でないようにえたからです

 

第1次舞踊神キャンペーンを成功的に終えた後、日本<チームアイ>の鄭世和(チョン·セファ)先生が感謝の気持ちとして韓国<チームアイ>の李仁珩(イ·インヒョン)先生に朝鮮学校学生たちの文集<花房>をプレゼントしました。

 

ところで今回はそれと問題中学校小学校併設されている初中級学校発生したのですねこの問題解決方法舞踊部であれば小学生むすべての舞踊部員教員々に韓国同胞たちが舞踊靴をプレゼントするしかないといます

 

小学生から舞踊部活動する学生では朝鮮学校卒業まで10ずつ舞踊活動をするのが普通だといますそれなら朝鮮舞踊第一歩から韓国同胞がプレゼントした舞踊靴いてまる姿るのは非常意味があることではないでしょうか

 

4次舞踊靴キャンペーンをうにった理由とこれからのキャンペーンの方向まで概略的整理してみましたがもちろんこれは一人二人でできることではありません在日朝鮮学校舞踊靴プロジェクトのためにすでにくの々が苦労しています

 

韓国では李仁珩先生偶然舞踊靴キャンペーンをめましたが2019年末には10のボランティアが<チームアイ>という団体構成舞踊靴運動けています日本でも<チームアイ>構成され朝鮮学校をはじめとする日本内外国人学生機会均等のために努力しています

 

日本<チームアイ>には在日韓国人だけでなく日本人先生たちも加入しており朝鮮学校困難理解改善するために努力しています最近韓日政府間市民社会間不便さがしていますが韓国日本<チームアイ>会員たちは、「しい仕事をすること連帯げています関心のある参加がもっとかったらいいといます(*)

,

202110, 네 번째 <무용신> 캠페인이 진행 중입니다. 지난 3월까지 3차 캠페인을 통해 183명의 개인 후원자와 5개 후원 단체의 도움으로 1,288만원의 성금이 모아져, 506명의 재일 조선학교 무용부 학생들과 지도교사 분들에게 무용신이 전달되었습니다.

 

4차 캠페인은 세 번의 무용신 캠페인을 통해서도 무용신을 선물 받지 못한 13개 재일조선초중급학교 76명의 중학생 무용부원들과 13분의 무용부 지도교사들에게 추가로 무용신을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무용신 전달에서 누락되었던 학교는 다음과 같이 파악되었습니다.

 

도쿄조선제1초중급학교(이하 모두 조선초중급학교, 13), 도쿄제4(5), 도쿄제5(5), 니시도쿄제1(12), 니시도쿄제2(1), 사이타마(12), 치바(1), 군마(6), 도호쿠(1), 나가노(8), 시즈오카(1), 욕가이치(2), 오카야마(6)와 각 무용부 지도교사 13. (89)

 

한국 <팀아이>의 이인형 선생께서 2020년 3월, 고베조선고급학교 무용부 교원에게 무용신을 전달하는 모습입니다.

 

지역적으로 도쿄와 그 인근지역의 초중급학교가 많은데 대부분 소규모 학교이고 초급학교(=초등학교)와 중급학교(=중학교)가 통합되어 있는 학교들입니다. 아마도 3차 캠페인까지 무용신 선물 대상을 중학생 이상으로 정했는데, 초등학교와 병설된 중학교의 무용부 학생들이 제외되었던 것 같습니다. 같은 학교의 초등학생들에게 위화감을 줄까봐 선처된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래서 이번 4차 캠페인에서는 중학생 중에서 누락되었던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먼저 전달하고, 곧이어 신속하게 초등학교 무용부에도 무용신 보내기 캠페인을 벌여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학교에서는 초등학생들이 4학년부터 무용부 동아리에 가입해서 활동할 수 있다고 하니까, 다음번 무용신 선물 대상은 4-6학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무용신 캠페인이 처음 시작될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 그리고 이정도 규모로 발전될 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무용신 캠페인이 시작된 것은 20203월이었는데, 그때는 이인형 선생과 제가 방문했던 고베조선고급학교의 무용부 학생들에게만 선물할 생각이었습니다. 그 이후 일이 조금씩 커지면서 간사이 지역과 도쿄 지역의 조선학교로 확대되었고, 고등학생뿐 아니라 중학생까지도 대상으로 포함되었습니다.

 

중학생을 포함하기로 했던 것은 조선학교 중에 중고급학교,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병설된 학교가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학교의 중학생들을 빼고 고등학교 무용부원들에게만 선물하는 것이 민망하고 자연스럽지 않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제1차 무용신 캠페인을 성공적으로 마친후, 일본 <팀아이>의 정세화 선생께서 감사의 표시로 한국 <팀아이>의 이인형 선생에게 조선학교 학생들의 글모음집 <꽃송이>를 선물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와 똑같은 문제가 중학교와 초등학교가 병설된 초중급학교에서 발생한 것이지요. 이 문제의 해결 방법은 무용부이기만 하면 초등학생을 포함한 모든 무용부원 학생들과 교사분들에게 한국의 무용신을 선물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초등학생 때부터 무용부에서 활동하는 학생들 중에는 조선학교를 다니는 한 졸업할 때까지 10년씩 무용 활동을 하는 것이 보통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조선무용의 첫발걸음부터 한국 동포들이 선물한 무용신을 신고 시작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꽤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4차 무용신 캠페인을 벌이게 된 이유와 앞으로의 캠페인 방향까지 개략적인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만, 물론 이는 한두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재일 조선학교 무용신 프로젝트를 위해서 이미 많은 분들이 수고하고 계십니다.

 

한국에서는 이인형 선생과 제가 우연히 무용신 캠페인을 시작했지만, 2019년 말에는 10명의 자원자들이 <팀아이>라는 단체를 구성, 무용신 운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팀아이>가 구성되어 조선학교를 비롯한 일본 내 외국인 학생들의 기회균등을 위해 노력합니다.

 

일본 <팀아이>에는 재일동포들뿐 아니라 일본인 선생님들도 다수 가입해 계시며, 조선학교가 겪는 어려움을 이해하고 개선하는 데에 애쓰고 계십니다. 요즘 한일 정부간은 물론 시민사회 사이에도 불편함이 증가하고 있지만, 한국과 일본의 <팀아이> 회원들은 옳은 일 하기연대를 넓혀가고 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의 참여가 더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