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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일의 제보와 테라다 토시오의 보도로 <경성일보>에서 시작된 ‘16세 최승희신화는, ‘16세 춘향이의 후광에 편승해 위력을 발휘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그리 큰 영향력도 없었고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조선의 민족지들은 최승희의 초기 무용 활동에 침묵했었고, 최승희가 자서전을 통해 당시 나이를 ‘15로 바로잡은 후 ‘16세 최승희신화는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16세 최승희신화는 조선에서 시작되었지만 이내 일본으로 옮겨졌고 오래 지속되었다. ‘16세 최승희신화를 가장 먼저 보도한 것이 조선의 일본어 신문 <경성일보>였지만, 같은 해 615일자 일본의 일간지 <도쿄니치니치(東京日日)신문>730일자 <야마토(やまと신문>에 의해 반복되었다.

 

192999일자 <도쿄니치니치신문>‘16세 최승희신화를 바탕으로 당시 최승희의 나이를 19세로 보도했고, 이는 일본의 대표적 문예지 <문예(文藝)> 193411월호에서도 반복되었다. 1935년에는 잡지 <실업의 세계(實業世界, 10월호)><부인구락부(婦人俱樂部, 3월호)‘16세 최승희신화를 이어갔고, 1937년에는 일본과 조선에서 널리 읽혔던 잡지 <조선행정(朝鮮行政, 4월호)>에서도 최승희가 16세에 무용을 시작했다는 서술이 계속되었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일본의 여성잡지 <부인공론(婦人公論)> 19358월호가 무용 시작 당시 최승희의 나이가 14세였다고 서술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기사 제목은 나의 자서전(自敍傳)”으로 최승희가 직접 집필해 기고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최승희는 당시 나는 (만으로) 14세였다고 밝혔는데도 일본 매체들은 “16세 최승희의 신화를 이어간 것이다.

 

또 다른 예외는 있었다면 최승희의 일본어 단행본 자서전 <나의 자서전(1936)>이었다. 도쿄에서 출판된 이 자서전에서 최승희는 무용 시작 당시 자신의 나이가 15세였다고 서술했다. <부인구락부>나의 자서전과 단행본 <나의 자서전>에서 같은 시기의 나이를 다르게 서술한 것은 만 나이(14)’연 나이(15)’의 차이였을 것으로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다른 문헌, 예컨대 경성에서 조선어로 출판된 <최승희 자서전(1937)>에 따르면 최승희는 자신이 19263월에 15세였다고 서술하면서, 이 나이가 조선식 세는 나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따라서, 최승희 자신의 기록에 착오가 없다면, 최승희의 생일은 이미 알려진 것과는 다른 날짜였을 가능성도 제기될 수 있다. 이 점은 후에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만 나이가 표준이었던 일본에서 사실과 다른 ‘16세 최승희신화가 이렇게 오래 계속된 것은 이상한 일이다. 최승희가 19264월 이시이 바쿠 무용단에 입단하면서 그의 생년월일을 제대로 보고했다면, 그것이 음력 19111124일이든 양력 1912112일이었든, 그의 나이는 ‘14로 수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16세 최승희신화가 계속되었다. 최승희의 스승 이시이 바쿠는 1940년에 발행한 그의 자전적 에세이집에서 그 무렵의 최승희는 숙명여학교를 졸업했다고는 하나 아직 열여섯 살의 작은 소녀에 지나지 않았다.”고 기술했고 (<나의 얼굴>, 1940:30), 이는 1955년에 출판된 다른 자서전 <춤추는 바보(1955:116)>에서도 반복되었다.

 

다카시마 유자부로는 1959년에 최초의 최승희 단행본 평전을 발간하면서 이시이 바쿠의 회상을 그대로 인용했고(다카시마 유자부로, <최승희>, 1981(1959):19), 이는 재일동포 평전자 김찬정의 평전 <춤꾼 최승희(2003:34)>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최근에는 미도리카와 준의 평전 <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생애(2006:74)>에서도 서울공회당에서 공연할 때 최승희라는 여학교를 갓 졸업한 16세의 조선소녀가 입문했다고 서술했고, 이현준의 저서 <동양을 춤추는 최승희(2019:407)><경성일보>와 이시이 바쿠의 회상을 인용해, 최승희가 이시이 바쿠를 처음 만났을 때의 나이가 16세였다고 서술했다.

 

일본에서는 최승희 본인이 자서전과 기고문을 통해 당시 나는 16세가 아니었다고 거듭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16세 최승희의 신화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왜 그랬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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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일의 제보와 테라다 토시오의 보도로 시작된 ‘16세 최승희신화는 효과가 있었을까? 아마도 그러한 효과는 없었던 것 같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 지속 기간은 길지 않았던 것 같다.

 

우선 <동아일보><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시대일보> 등의 민족 일간지들에는 최승희에 대한 초기 보도가 없었다. 그의 무용유학을 보도한 것은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매일신보>뿐이었다. 일본어 신문 <조선신문><부산일보>에도 최승희 기사는 없었다.

 

 

민족지 <동아일보>가 처음 최승희의 무용 공연을 보도한 것은 지난 19271026일이었는데, 이는 최승희가 19263월말 일본 무용유학을 떠난 이후 1년 반만이었다. 그동안 <동아일보>는 최승희에 관한 기사를 단 1건도 보도하지 않았다. <조선일보>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일보>가 최승희를 처음 보도한 것은 19271027일이었다.

 

특히 <조선일보>는 그보다 2달 전인 1927814일 이시이 바쿠의 제자였던 강홍식(姜弘植)과 한병룡(韓炳龍)을 언급한 기사를 냈지만, 그 당시에 이시이 바쿠의 제자로 연수 중이던 최승희를 언급하지 않았다. 1027일의 기사도 최승희 관련 기사가 아니라 숙명-진명-양정학교의 연합 동창회인 양명회 간친회 행사의 공짖 기사였다. 최승희가 그 행사에 출연한다는 내용이 단 한 줄이 맨 끝에 덧붙여져 있을 뿐이었다.

 

, 최승희의 초기 무용 유학에 대해 민족지들은 전혀 보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경성일보><매일신보>19266월의 최승희 초무대, 19269월의 가을 공연과 이후 홋카이도 순회공연, 1927년의 봄 공연과 규슈 및 오키나와 지방공연 등을 보도했을 때에도 조선어 민족지들은 이를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조선어 민족지들이 192710월에 이시이 바쿠 경성 공연을 보도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최승희의 나이를 보도한 적이 없었다. 이는 총독부 기관지들과 다른 일본어 신문들 때문에 최승희가 이미 경성 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 <경성일보><매일신보>, 라디오 방송인 <경성방송>, 그리고 <조선신문><부산일보>의 보도로 최승희는 이미 조선에서는 일정한 유명세를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최승희의 나이가 처음 보도된 것은 192999일자 <중외일보>였다. 귀국 직후 옥천동 소재 자택에서 가진 인터뷰 기사 말미에 그의 당시 나이가 19세라고 덧붙여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기사에도 무용 유학 시작 당시 ‘16세 최승희신화는 언급되지 않았다. 다만 19299월의 나이가 19세였다면, 19263월의 나이가 16세였을 것으로 추론할 수는 있게 했다.

 

최승희가 두 번째 일본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했을 때 조선의 매체들도 덩달아 최승희에 대한 전기적 기사들을 내기 시작했다. 그 첫 기사는 조선의 여성잡지 <여성>19343월호(24)에 실린 인터뷰 기사였는데, 그 첫머리에 “16세 최승희가 언급됐다.

 

 

열여섯 살에 숙명여고를 졸업하고 오빠가 동경 가서 무용을 공부하라고 하시길래, 무용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 불안과 공포에 떠는 가슴을 안고 현해탄을 건너던 일이 어제 같은데 벌써 12년이 되었습니다.” (<여성>, 19343월호, 75)

 

하지만, 같은 시기에 발행된 종합잡지 <조선중앙(19343월호)>는 무용 시작 당시 최승희의 나이는 15세였다고 보도했다.

 

“1926년 이른 봄 최양의 나이 겨우 열다섯이 되어서 숙명여고를 마치던 해이다. 졸업식을 며칠 앞두고 그는 좁은 가슴을 태워가며 졸업 후의 일을 걱정하였다.” (<조선중앙> 19343월호, 101)

 

<조선중앙>은 최승희의 여학교 졸업 및 무용 시작 시기의 나이가 16세가 아니라 15세였음을 밝혔는데, 이는 최승희로부터 직접 취재한 결과였음에 틀림없다. 이 같은 사정으로 보아 조선에서는 최승일의 의도와는 달리 ‘16세 최승희의 신화가 그다지 작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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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큰 오빠 최승일이 여동생의 나이를 1살 올려서 <경성일보> 취재에 응한 것은 고의적인 것으로 보인다. 세는 나이로 15세였던 최승희를 16세라고 전했던 것은 실수나 착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01년에 태어난 최승일은 최승희가 태어났을 때 이미 10세 내외의 나이로 보통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그 나이면 막내 동생이 태어난 시기를 정확히 기억할 수 있었음에 틀림없다. 더구나 최승일은 남동생 최승오나 다른 여동생 최영희보다 막내 최승희와 가장 가까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승희도 큰 오빠 최승일을 마치 제2의 아버지처럼 따랐다고 했다. 그렇게 가까운 사이에 생일이나 나이를 잘못 기억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최승일은 최승희를 이시이 바쿠에게 소개하기 위해 <경성일보> 학예부장 테라다 토시오와 처음 만났을 때 무용가로 나서려는 여동생의 나이를 ‘16라고 말했다. 왜 그랬을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문학적 패러디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다.

 

 

최승일은 문인이었다. 19246월호 <신여성>에 단편 아내떠나가는 날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고, “김첨지의 죽음”(<매일신보>, 1924127일자), “바둑이”(<개벽>, 19262월호), “봉희(鳳姬)”(<개벽>, 19264월호) 등의 작가였고, 사회주의 계열의 문학예술인 단체에서 활동했다. 당시 조선의 문화예술인 써클에서는 여성의 가장 꽃다운 나이16세로 정형화되어 있었다. 16세 여성에게 그런 수식어가 붙었던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전통적으로 여성의 16세는 성년으로 인식되었다. 남성은 15세에 상투를 틀고 갓을 쓰는 관례(冠禮)를 치렀고, 여성도 땋은 머리를 쪽지고 비녀를 꽂는 계례(筓禮)를 행했다. 그래서 16세의 여성은 소녀티를 벗은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뜻으로 이해되었다.

 

고전 국문학과 한문학에서도 여성의 16세를 과년(瓜年)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여성이 혼기에 이르렀다는 말이었다. ‘오이 과()’자를 쓴 데에는 해학과 퍼즐이 담겨 있다. 오이 과()자를 파자(破字)하면 여덟 팔()자가 2개 나오는데, 이를 합치면 16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의 16세를 파과지년(破瓜之年)이라고 불렀다. (한편 파과지년은 64세의 남성에게도 쓰이곤 했는데, 이는 팔을 두 번 곱하면 64세가 되기 때문이다.)

 

 

둘째, 조선 민중문학의 대표작의 하나였던 판소리 <열녀춘향수절가>의 주인공 춘향의 작중 나이가 16세였다. 조선 문학에서 가장 아름답고, 재주가 출중하고, 정절이 높은 최고의 여성상으로서 그려진 춘향이 이몽룡을 만났을 때의 나이가 16세였던 것이다. 완판본 <열녀춘향수절가>에 따르면 춘향과 몽룡은 합방 첫날밤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도령 하는 말이, ‘성현(聖賢)도 불취동성(不取同姓)이라 일렀으니 네 성은 무엇이며 나이는 몇 살이뇨?’ ‘성은 성()가옵고 연세(年歲)는 십육 세로소이다.’ 이도령 거동 보소. ‘허허 그 말 반갑도다. 네 연세 들어보니 나와 동갑 이팔이라.’”

 

춘향이 나이가 16세라고 대답하자 몽룡은 나와 동갑 이팔(二八)”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이팔이란 두()개의 팔(), 16세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나온 말이 이팔청춘(二八靑春)이다. 두 사람 모두 파과지년이자 이팔청춘이었던 것이다.

 

이몽룡이 16세였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만, 춘향이 16세였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날 밤 두 사람이 벌인 춘사는 요즘의 포르노 영화에 못지않은데, 조선 시대의 16세 여성은 그런 성적 자세와 입담이 가능하도록 무르익은 나이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때마침 <춘향전>은 이광수에 의해 현대소설로 개작되어 <일설춘향전(一說春香傳)>이라는 제목으로 1925930일부터 192613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고, 이내 단행본으로도 출판되었다. 최승희가 숙명여학교를 졸업할 무렵 이광수의 <일설춘향전>이 경성에서 인구에 회자되고 있었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최승일이 여동생 최승희의 나이를 묻는 테라다 토시오에게 ‘16라고 대답했던 것은 아마도 문사 최승일의 뇌리에 박혀있던, 춘향을 전형으로 하는 16세 여성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이는 또 무엇을 해도 충분한 성숙한 나이라는 뜻이기도 해서 무용을 시작하는 최승희의 나이로 묘사되기에 적합하다고 여겨졌을 것이다. 이렇게 보도된 ‘16세 최승희‘16세 춘향이의 이미지와 함께 조선 사회에 손쉽고 빠르게 퍼질 수 있었던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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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을 시작했을 당시의 최승희 나이가 세는 나이15세였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오빠 최승일은 어째서 16세였다고 말했던 것일까? 최승희의 나이가 최초로 언론에 공개된 것은 1926325일의 <경성일보>였다.

 

조선 예찬자 이시이 바쿠씨가 이번 조선 방문을 기회로 조선 소녀를 제자로 얻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중, 일행이 경성 제3회 공연을 끝낸 23일 밤10시경 공회당의 이시이씨 일행의 대기실을 찾아와 제자가 되고 싶다고 부탁한 아름다운 조선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경성)부내 체부동 137번지 최준현씨의 영양(令孃) 최승희(崔承喜, 16)였다.”

 

<경성일보>는 최승희의 나이가 16세였던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 취재원은 최승희의 큰오빠 최승일이었다. 최승일은 1926321일 경성도서관에서 막 배달된 <경성일보>를 읽으면서 3면에 실린 이시이 인터뷰를 읽었다. 이 기사에는 이시이 바쿠가 “12-15세 사이의 조선인 여성 제자를 찾아내고 싶다고 말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자신의 여동생을 무용가로 키워야겠다고 마음먹은 최승일은 다음날 (아마도) 오전에 <경성일보>를 찾아가 학예부장 테라다 토시오를 만났다. 당시 최승일은 <경성방송국>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성일보를 방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당시 <경성일보><경성방송국>은 같은 건물에 자리잡고 있었다.

 

최승일이 테라다 토시오를 찾아가 만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같은 언론계 종사자일 뿐 아니라 당시 최승일은 일본대학 유학을 다녀온 인텔리로서 소설 작품도 여러 편 발표한 청년 문사였기 때문이다. 문인과 학자와 예술가들을 잘 알고 있어야 했던 학예부장으로서 테라다 토시오는 이미 최승일과 아는 사이였을 가능성도 높다.

 

이 만남의 자리에서 최승일은 자신의 여동생이 이시이 바쿠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다고 부탁했을 것이고, 테라다 토시오에게 그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이미 이시이 바쿠를 아는 사이였고, 이시이 바쿠의 첫 경성공연을 후원한 것이 바로 <경성일보> 학예부였기 때문이다. 최승일은 최승희를 이시이 바쿠에게 소개하기 위한 최적임자를 찾아갔던 것이다. 최승일의 요청에 따라 테라다 토시오는 이시이 바쿠에게 보내는 소개장을 써주었다.

 

 

최승일이 최승희를 대동하고 이시이 바쿠를 찾아갔던 323일 밤, 테라다 토시오는 이시이 바쿠의 부탁으로 최승희를 직접 면접하기도 했다. 경성공회당 지하층에 마련된 식당에서 두 남매와 자리를 마주한 테라다 토시오는 최승희의 가족과 성장배경에서 여학교를 졸업한 사정, 그리고 무용을 시작하려는 이유와 포부에 이르기까지 자세한 면접을 했었고, 이시이 바쿠에게 긍정적인 보고를 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시이 바쿠가 최승희를 제자로 받아들이기로 한 결정을 가장 먼저 안 것도 테라다 토시오였다. 그는 이시이 바쿠와 최승희의 소개자였을 뿐 아니라 <경성일보>의 학예부장이었다. 따라서 그는 이시이 바쿠가 조선인 제자를 받아들였다는 새로운 뉴스를 보도하기로 결정했고, 결국 그 기사가 325일자 <경성일보>에 실린 것이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당시 최승희가 16세였다는 점을 처음 보도한 사람은 테라다 토시오였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 최초의 정보를 제공한 사람은 오빠 최승일이었음에도 틀림없다. 그리고 ‘16세 최승희의 정보가 최승일로부터 테라다 토시오에게로 건너간 것은 소개장이 전달된 322일이거나 혹은 테라다 토시오가 이시이 바쿠를 대신해 최승희를 면접했던 323일 밤이었을 것이다.

 

최승희가 당시 조선식 세는 나이15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최승일이 테라다 토시오에게 16세라고 전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 점은 아직도 의문이다. 특히 321일자 <경성일보>의 인터뷰 기사에 이시이 바쿠가 “12-15세 사이의 조선인 여성 제자를 찾아내고 싶다고 한 나이 조건을 읽고도 최승일이 최승희의 나이를 16세로 한 살 올린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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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는 자서전에서 여학교 졸업 당시 자신의 나이가 15세였다고 말했다. 그는 두 권의 자서전에서 5회 이상 일관적으로 자신의 나이가 15세였다고 서술했으므로 그것은 사실일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때의 15세가 만 나이연 나이세는 나이중에서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는지는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문제는 결혼 당시 최승희와 안막의 나이가 동시에 언급된 같은 자서전의 서술을 검토하면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나의 자서전(1936)>의 해당 기록은 다음과 같다.

 

번잡하지 않게 세비루를 입은 신랑과 간단한 스포츠복을 입은 신부는 트렁크를 하나씩 든 간단한 차림으로 석왕사로 밀월의 여행을 떠났습니다. ... 그것이 쇼와7(=1932), 내가 스무 살, 안막이 스물두 살 되던 봄의 일이었습니다.” (<나의 자서전>, 1936:99-100).

 

 

우선 1932년은 1931년의 잘못이라는 점은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이 기록에는 결혼 당시 최승희가 20, 안막이 22세였다고 되어 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193159일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생일이 언제였는지에 따라 각 나이는 다음의 6가지로 계산될 수 있다.

 

우선 안막의 경우, 그의 공식 생일(1910418)이 양력 날짜였을 경우 그의 만 나이21(+20), ‘연 나이21, ‘세는 나이22세이다. 그러나 만일 안막의 공식 생일 날짜가 음력이어서 양력날짜로 환산해야 했다면 실제 생일은 1910526일이 되어, 그의 만 나이20(+11개월), ‘연 나이21, ‘세는 나이22세가 된다.

 

최승희의 나이도 비슷한 방법으로 6가지로 정리된다. 최승희의 생일 19111124일이 양력 날짜일 경우 결혼 당시의 만 나이19(+5개월반), ‘연 나이20, ‘세는 나이21세이다. 만일 최승희의 생일 날짜가 음력 날짜였다면 이를 양력 날짜로 환산하면 1912112일이 되고, 최승희의 만 나이19(+4개월), ‘연 나이19, ‘세는 나이20세이다.

 

이상의 각각의 경우에 따른 안막과 최승희의 나이는 다음과 같이 간단한 표로 정리될 수 있다. 이 표에 따르면 최승희의 나이가 20세였던 경우는 19111124일이라는 생일날짜가 양력으로 연 나이이었을 때와 음력으로 세는 나이였을 때였고, 안막의 나이가 22세였던 경우는 191048일이라는 생일날짜가 양력이든 음력이든 세는 나이였을 때였다.

 


공식생일 생일 날짜가 양력인 경우 생일 날짜가 음력인 경우
만 나이 연 나이 세는나이 만 나이 연 나이 세는나이
최승희 1911/11/24 19 20 21 19 19 20
안막 1910/4/18 21 21 22 20 21 22

 

따라서 최승희가 20세인 경우가 두 경우이고 안막의 나이가 22세인 경우가 두 경우이므로, “최승희 20세와 안막 22의 조합은 4가지로 정리된다. (1) 두 사람의 생일이 모두 음력이고 모두 세는 나이를 계산했을 때, (2) 최승희와 안막의 생일 날짜가 모두 양력이지만 최승희는 연 나이,’ 안막은 세는 나이를 계산했을 때, (3) 최승희의 생일은 양력으로 연 나이를 계산하고, 안막의 생일은 음력으로 세는 나이를 계산했을 때, 그리고 (4) 최승희의 생일은 음력으로 세는 나이를 계산하고 안막의 생일은 양력으로 세는 나이를 계산했을 때이다.

 

4가지 경우 중에서 첫 번째(1)의 경우가 가장 사실에 가까웠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인들은 일상생활에서 음력’, 실제로는 태음태양력을 사용했고, 나이계산에는 세는 나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최승희와 안막이 그같은 관습을 따른 것이라면 공식 기록에 나타나는 그들의 실제 생일은 각각 191212(최승희)1910526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승희가 같은 자서전에서 여학교를 졸업하고 무용유학을 떠났던 시기의 나이 15세였도 역시 세는 나이였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19263월말에 세는 나이로 15세였다면 그의 생년은 1911년이 아니라 1912년이었을 것임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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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두 자서전은 각각 150쪽 안팎의 분량이지만 거기에는 최승희의 나이가 10회 이상 언급되었다. 더구나 그중에는 상충되는 서술도 등장한다.

 

최승희가 여학교를 졸업하고 무용 유학을 시작했던 당시의 나이에 대한 서술이 특히 그렇다. <나의 자서전(1936)>에서는 당시 나이를 15세로 일관되게 서술했지만, <최승희 자서전(1937)>에는 당시 15세였다는 서술과 함께 16세였다는 기술도 여러 군데 등장했다.

 

그렇지, 그래, 올해 들어가서 2년 후 을종 교원으로 임명이 된다하더라도 나이가 열여덟 살이니 열여덟 먹은 처녀가 어떻게 남의 집 아이들을 가르치니? 다 그만두어라, 승희야.” (<최승희 자서전>, 1937:34)

 

 

이는 오빠 최승일의 말이었다. 최승희가 1926319일 경성사범학교의 면접시험에서 낙방하고 귀가하자 최승일이 여동생을 위로하려고 한 말이다. “2년 후에 18가 된다는 것은 지금 16세라는 뜻이다. 같은 책에서 최승희가 자신은 15세의 어린 소녀였다는 서술과는 다르다. 여학교 졸업 당시 최승희가 15세가 아니라 16세였다는 기술은 같은 책에 2번 더 나온다.

 

경성의 여학생인 최승희는 성악가로서 출세코자 하였었다. 동경음악학교에 입학코자 하였다. 그러나 4년제의 여학교를 졸업하면 16세인 까닭에 음악학교의 수험에는 연령이 어렸던 까닭도 있었다. 그때에 공교롭게 석정막씨의 일행이 경성에서 공연하였다.” (<최승희 자서전>, 1937:78-79).

 

“‘흑백의 조선 여학생복을 입은’ 16세의 그는, 곧 석정씨와 한가지로 출발하게 되었는데기차의 창에서 어머니와 서로 붙들고 얼굴을 창에 내놓고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최승희 자서전>, 1937:79-80).

 

최승희가 직접 자신이 15세였다고 서술한 자서전에 당시 나이가 16세였다는 내용이 3번이나 더 실렸다는 것은 일견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16세 언급의 화자들을 살펴보면 그 의문이 어느 정도 풀릴 수 있다.

 

 

‘2년 후에 18세가 된다는 말한 것은 오빠 최승일이고, ‘16세인 까닭에 음악학교 수험에 연령이 어렸으며 ‘16세의 그녀가 이시이 바쿠씨와 함께 경성을 출발하게 되었다고 한 것은 일본의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였다. , ‘16세 발언을 한 것은 최승희 본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중 최승일의 발언이 특히 주목을 끈다. 그는 본인과 부모와 함께 자기 여동생의 나이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런데 어째서 여동생의 나이를 16세로 언급했던 것일까? 어째서 본인이 언급한 나이와 오빠가 언급한 나이에 차이가 생겼던 것일까?

 

<경성일보><매일신보>에 보도된 최승희의 나이도 16세였다. 그런데 이 두 신문 기사의 취재원은 최승일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최승일이 동생 최승희를 이시이 바쿠에게 소개하기 위한 소개장을 받은 것이 <경성일보>의 당시 학예부장 테라다 토시오(사전)였기 때문이다. 조선어로 발행되던 <매일신보>는 일본어로 발행되던 <경성일보>와 같은 사옥을 사용하는 자매지였으므로, <경성일보>의 취재 내용은 손쉽게 <매일신보>에도 보도되곤 했었다.

 

 

따라서 숙명여학교를 졸업한 16세의 최승희라는 최초의 신상정보는 맨 처음 최승일로부터 테라다 토시오에게 전해졌고, 그 내용이 <경성일보><매일신보>에 보도된 이후, 모든 일본어권 미디어에서는 최승희의 여학교 졸업 당시의 나이가 16세로 전해졌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그것이 결국 일본에서 활동하던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까지 전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최승희는 왜 자신의 나이가 15세였다고 한 것일까? 그리고 최승일은 어째서 동생의 나이가 16세였다고 한 것일까? 두 사람은 가족이므로 서로의 생일이나 나이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이같은 차이가 나타난 까닭은 무엇일까? 그리고 어째서 나중에라도 바로잡히지 않았던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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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서전(1936)><최승희 자서전(1937)>에서 최승희는 19263월 숙명여학교를 졸업하고 무용유학을 시작했을 때 나이가 15, 유학을 마치고 경성에 돌아와 192911월 무용연구소를 개설했을 때의 나이가 18세였다고 서술했다. 이 나이들은 각 자서전에 한 군데 이상에서 일관적으로 서술되었다.

 

같은 방법으로 두 자서전에 나타난 결혼 시기의 나이 서술을 찾아보았다. 결혼 당시의 나이에 대해서는 <나의 자서전><최승희 자서전>에 각 1번씩 명시적으로 서술되어 있었다. 우선 <나의 자서전>의 기록을 보자.

 

번잡하지 않게 세비루를 입은 신랑과 간단한 스포츠복을 입은 신부는 트렁크를 하나씩 든 간단한 차림으로 석왕사로 밀월의 여행을 떠났습니다. ... 그것이 쇼와7(=1932), 내가 스무 살, 안막이 스물두 살 되던 봄의 일이었습니다.” (<나의 자서전>, 1936:99-100).

 

 

우선 바로잡을 것은 최승희의 결혼연도는 1932년이 아니라 1931(쇼와6)이다. 안막과 최승희의 결혼식을 보도한 당시 신문들을 조사하면, 결혼일시는 193159일 오전11시였고 장소는 동대문밖 흥릉 옆의 청량관이라는 연회장이었다.

 

따라서 최승희의 생일 19111124일이 양력 날짜가 맞다면 결혼 당시 최승희의 만 나이19(+5개월반), ‘연 나이20, ‘세는 나이21세였다. 그러나 만일 최승희의 공식 생일 날짜가 실제로는 음력 날짜였다면, 이를 양력 날짜로 환산하면 1912112일이 되고, 그랬을 경우 최승희의 결혼 당시 나이는 만 나이19(+4개월), ‘연 나이19, ‘세는 나이20세가 된다.

 

생일이 1910418일로 알려져 있는 안막의 만 나이21(+20), ‘연 나이21, ‘세는 나이22세였다. 그러나 만일 안막의 생일날짜가 음력이어서 양력날짜(1910526)로 환산해서 나이를 다시 계산하면, ‘만 나이20(+11개월), ‘연 나이21, ‘세는 나이22세가 된다.

 

 

따라서 안막의 나이가 22, 최승희의 나이가 20세였다는 것은 나이 계산방식이 세는 나이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나이 서술은 <최승희 자서전>에도 똑같이 나타났다.

 

내가 결혼을 하면 인기가 줄어질 것이라고 걱정하고, 나의 결혼을 반대한 사람들도 많았으나, 나는 가령 인기가 떨어지더라도 여자로서, 아내로서, 또는 무용가로서, 어디까지든지 참되게 살아갈 생각을 하고 소화7(=1932) 봄 나는 스무 살 때에 결혼하였다.” (<최승희 자서전>, 1937:26).

 

여기에서도 최승희는 결혼연도가 1932년으로 기술됐다. 여성이 자신의 결혼시기를 잘못 기억하는 것은 드문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나중에 보겠지만 최승희의 회상에는 자주 오류나 착오가 발견되곤 한다. 그의 나이에 대한 서술을 이렇게 자세히 살피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실제로 <나의 자서전>에는 최승희가 결혼 즈음에 19세였다고 서술한 부분도 등장한다. 나이 서술에 일관성이 결여되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기에 조금 자세히 살펴봤다.

 

 

그러는 동안에 나도 열아홉의 봄을 맞이했습니다. 경제적인 고통, 예술상의 번민, 인력 부족, 금전에 의한 유혹, 더러운 유혹의 마수……어느덧 옳고 진지한 결혼으로 기울어졌던 것이 그 무렵의 나의 심정이었습니다.” (<나의 자서전>, 1936:89-90).

 

이 서술이 무용연구소를 개설한 192911월부터 1930년 대부분의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맞는 기술이다. 그러나 결혼 직전인 1931년 초를 포함하는 기술이라면 최승희의 나이를 19세라고 한 것은 착오를 일으킨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최승희가 결혼식을 가졌던 193159일 기준으로 그의 세는 나이20세였다면, 그보다 5년 전 여학교 졸업당시인 19263월의 세는 나이15세였음에 틀림없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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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자서전에는 졸업 당시 혹은 무용 유학을 떠나던 시기 외에도 군데군데 자신의 나이를 밝힌 부분이 있다. <나의 자서전(1936)>에는 최승희가 도쿄에 도착해 이시이무용단에서 배우고 연습하던 초기 상황이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아무리 강철 같은 결의를 가지고, 무슨 일이 있어도 한사람 몫을 하는 어엿한 무용가가 되겠다며 필사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나라고 해도, 결국은 열대여섯 살의 소녀가 아닌가요?” (<나의 자서전>, 1936:57)

 

 

최승희가 경성을 떠나 도쿄에 처음 도착한 것이 19264월초였으므로, 위의 서술은 그 직후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 당시에 자신이 열대여섯 살의 소녀라고 했으므로 여학교 졸업과 무용 유학 시작 시점의 나이는 15세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또 최승희가 무용 유학을 끝내고 19297월 경성으로 귀국했을 당시에도 최승희의 나이가 등장한다.

 

마침내 경성에 자신의 무용연구소를 설립하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저는 18, 마침 경성 하늘에는 흰 구름이 반짝이는 한여름의 일이었습니다.” (<나의 자서전>, 1936:78-79)

 

최승희가 경성의 고시정 19번지에 자신의 무용연구소를 처음 설립했던 것은 1929111일이었다. 최승희의 생일이 양력 19111124일이라면 경성 무용연구소 설립 당시의 최승희의 만 나이17(+11개월), ‘연 나이18, ‘세는 나이19세였다. 최승희는 이때 자신이 18세라고 했으므로 이는 연 나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만일 공공기록의 생일 19111124일이 음력 날짜였다면, 이를 양력으로 환산한 날짜는 1912112일이므로, 최승희의 무용연구소 설립 당시의 만 나이는 여전히 17(+9개월), ‘연 나이17, ‘세는 나이로는 18세가 된다. 이 경우 최승희가 자신의 나이가 18살이라고 했던 것은 세는 나이였던 셈이 된다.

 

 

따라서 19111124일이 원래 양력 날짜인지 혹은 음력 생일을 양력 날짜로 기록한 것인지에 따라 이 18세는 연 나이일 수도 있고 세는 나이가 될 수도 있었다. 어느 경우에나 19263월의 나이는 15세였던 것으로 역산할 수 있다.

 

<나의 자서전>에 나타난 이 서술은 <최승희 자서전(1937)>과 비교해 보아도 일치된다. 이 조선어 자서전에도 무용연구소 설립 당시 상황이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계획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더 이상의 진전이 없었다. 나는 하는 수없이 경성에 조그마한 연구소를 설립하고새로운 예술분야에 있어 향토 개척의 첫 번째 발걸음을 떼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부터 본격적인 고난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돌아보건대 내 나이 열여덟 살 되는 해였다.” (<최승희 자서전>, 1937:23)

 

, 최승일이 편집한 자서전에도 경성 고시정 무용연구소 설립 시절의 최승희 나이는 18세로 되어 있었다. 더 나아가 <최승희 자서전>에 첨가된 최승일 자신의 회상에도 비슷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이리하여 몇 달이 못 되어 너는 집으로 돌아와서 열여덟 살 된 몸으로 러시아에 가려고 러시아 영사관에 있던 김온 군을 통하여 러시아행을 실현하려고 운동을 하였었지. 그러나 그것도 뜻과 같지 아니하여 고시정(古市町) 언덕에 연구소 문패를 붙이고 대담하게 안무를 하여 보았었지.” (<최승희 자서전>, 1937:53)

 

최승희가 무용 유학을 마치고 경성에 돌아와 1929111일 무용연구소를 개설했을 때의 나이는 18세였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27개월 전이었던 19263월의 나이는 15세라고 보아야 한다. 192911월의 나이가 세는 나이이든, 연 나이이든, 19263월의 나이는 역시 세는 나이이든, 연 나이이든 15세였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문헌들을 볼 때 최승희나 그 오빠 최승일이 만 나이를 단 한 번도 쓰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냥 관습적으로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일제 강점에 동조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심지어 나이 계산에까지 반영되었던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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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최승희는 자신의 생일과 나이에 대해 뭐라고 했을까? 지금까지는 신문이나 잡지의 보도, 학적부와 출입국 기록 등의 문헌을 중심으로 최승희의 생일과 나이를 정리해 왔지만, 정작 본인은 자서전에서 자신의 나이에 대해서 뭐라고 서술했는지 살펴봤다.

 

최승희의 자서전에도 두 권이 있다. 하나는 도쿄에서 일본어로 발행된 <나의 자서전(自敍傳, 1936)>이고, 다른 하나는 경성에서 조선어로 출판된 <최승희 자서전(1937)>이다. <나의 자서전>의 저자는 최승희이고, <최승희 자서전>의 저자는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로 되어 있다.

 

17장으로 구성된 <나의 자서전>은 전부 최승희가 직접 서술한 것이지만, <최승희 자서전>150쪽 중 약 70쪽은 최승희의 글이고 나머지 80여 쪽은 오빠 최승일을 비롯 조선과 일본의 저명 문화예술인들의 평론이다. 두 자서전의 최승희 글에 겹치는 내용이 전혀 없고, 한 책이 다른 책을 번역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 두 권의 자서전은 별개의 책이다.

 

 

<최승희 자서전>2006년 한국에서 <세기의 춤꾼 최승희 자서전: 불꽃>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판된 바 있지만, 일본어 <나의 자서전>은 한국어로 번역된 적이 없고, 조선어판 <최승희 자서전>도 일본어를 비롯한 외국어로 번역 소개된 바 없다.

 

<최승희 자서전>에는 최승희가 자신의 나이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9번쯤 나오는데, 그중 첫 번째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그때는. 1926, 꽂이 흐드러지게 피던 시절이었는데, 그해에 서울에 있는 숙명여학교를 막 졸업했으니, 내가 열다섯 살 되던 해 봄이었다.” (<최승희 자서전>, 1937:6)

 

최승희는 자신이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것이 15세라고 명시적으로 말했다. 이때의 15세라는 나이가 어떤 나이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양력 19111124일이 그의 생일이었다면 이때의 15세는 연 나이가 되지만, 19111124일이 음력 날짜였고 이를 양력으로 환산한 1912112일이 실제의 생일이었다면, 졸업 당시의 15세는 세는 나이가 된다. 어느 경우에나 만 나이로는 14(+4개월, 혹은 +2개월반)이었던 셈이다. 같은 책에는 숙명여학교 졸업 즈음의 나이에 대한 서술이 한 번 더 나온다.

 

 

그 사범학교의 입학시험에 나는 쉽게 합격이 되었다. 이만하면 좋다, 하고 모두 나의 손을 잡고 즐거워했다. 그러나 나는 나이가 너무 어려서 입학이 허락되지 않았다. 문득 어두워지는 나의 운명! 추운 삼한사온의 계절이 지나가고 북한산에 덮였던 눈이 녹아 흐르며 벚꽃과 살구꽃이 웃는 듯이 피는 봄이 우리들을 찾아왔으나, 암담한 가정에 불행한 나는 다만 고요한 침묵 속에서 오빠가 빌려준 소설과 시를 읽기에 그날그날을 보냈다. 그중에도 석천탁목 선생님의 시와 노래는 내 안의 피가 끓어오를 만큼 나에게 생생한 감동을 전해 주었다. 겨우 열다섯 살밖에 안 된 어린 계집애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인생에 관한 문제에 푹 빠져 있었다. (<최승희 자서전>, 1937:13-14)

 

최승희가 치렀던 경성사범 입학시험은 192636일부터 3일간이었고, 면접시험은 마지막날인 38일이었을 것이므로, 숙명여학교 졸업 직전이었고, 최승희는 이때의 자신은 열다섯 살밖에 안 된 어린 계집애라고 서술했던 것이다. 당시 최승희의 나이가 15세였다는 점은 일본어판 <나의 자서전>에도 서술되어 있다.

 

모교의 교원회의 결과, 나를 학교 급비생(=장학생)으로 동경음악학교에 입학시키기로 하였다. 그런데 나이가 어린 까닭에 하는 수 없이 열여섯 살이 되는 봄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집에서 일 년 동안 있다가 동경에 가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나의 자서전>, 1936:22-23)

 

사범학교 입학에 실패한 후 숙명여학교에서 최승희를 동경음악학교에 유학시킬 계획을 세웠던 것인데, 이 역시 연령 제한으로 1년 더 기다렸다가 16세가 되는 봄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으므로, 졸업 당시의 나이는 15세였음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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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는 졸업식날이었던 1926323일 저녁에 오빠 최승일과 함께 이시이 바쿠의 무용공연을 관람했다. 아마도 여동생을 위한 오빠의 졸업 선물이었겠지만, 이 선물은 여동생을 무용의 길로 이끌기 위해 최승일이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것이었다. 오빠의 의도는 성공했다. 이틀 후인 325일 최승희는 이시이 무용단에 입단해 경성을 출발해 도쿄로 향했다.

 

<경성일보><매일신보>가 당시 최승희의 나이가 16세였다고 보도했지만, 이는 세는 나이였고, 연 나이로는 15, 만 나이로는 14세였던 시기였음은 이미 앞에서 보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시간이 지나서 최승희의 생년월일이 알려지고 실제 나이가 밝혀졌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최승희가 16세에 무용을 시작했다는 보도가 계속되었다. 특히 세는 나이를 전혀 쓰지 않고 만 나이만 사용하던 일본에서도 그런 관행이 이어졌다.

 

 

1926615일자 <도쿄니치니치(東京日日)신문>무용계에 싹트는 조선의 꽃 한송이-최승자양이라는 기사에서 최승희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기사 중의 최승자는 스승 이시이 바쿠가 고쳐준 최승희의 일본 이름이었다.)

 

새로운 제자의 이름은 최승자(崔承子, 샤이 쇼코)씨로, 올해 16세이며, 조선에서는 상당히 존경을 받는 양반 가문 출신이며, 그의 오빠는 와세다 대학에서 수학했다. 그는 자신이 다녔던 경성의 여고,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올 3월에 졸업했다.”

 

19266월에도 최승희의 나이는 여전히 만14(+7개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쿄의 일간신문은 여전히 최승희의 나이를 16세라고 보도했다. 그로부터 한 달반이 더 지난 1926730일자 <야마토(やまと)신문>유일의 조선문용가 최승희, 눈물의 정진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도 같은 서술을 반복했다. (이 기사에서는 최승자라는 이름이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는데, 이는 최승희가 본명을 유지하고 싶다는 뜻을 스승에게 전달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기사에서는 조선이 낳은 유일한 무용가, 올해 16세의 아가씨 최승희, 최근 이 소녀로 하여금 더욱 예술의 길에 몰두하게 한 에피소드가 있다면서 무용을 천한 기생의 일로 여기는 가족과 친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도쿄 유학을 오게된 경위를 소개했다.

 

 

이때에도 최승희의 실제 나이는 여전히 만14(+8개월)이었지만 <야마토신문>은 그의 나이를 16세라고 서술했다. 이러한 경향은 시간이 더 지나서도 변하지 않았다. 최승희가 무용을 시작할 당시 <경성일보>의 학예부장으로서 오빠 최승일에게 이시이 바쿠를 만날 수 있도록 소개장을 써주었던 테라다 토시오(寺田壽夫, 1892-?)<조선행정> 19374월호에 기고한 무희 최승희론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최승희는 올해 26세이다. 그러니까 벌써 11년이나 전의 이야기다. 그녀가 16세의 젊은 나이에 숙명여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 봄, 이시이 바쿠가 경성에서 첫 번째 공연을 가졌다. 당시 나는 경성일보에 있으면서 연예계 일을 맡고 있었고, 또 이시이 바쿠의 매니저와도 알고 지내는 사이였기 때문에 이시이 바쿠의 공연에도 후원자의 마음으로 구경을 갔다.”

 

테라타 토시오가 1937년의 최승희가 26세라고 한 것은 맞게 계산한 것이다. 당시 최승희가 일본 언론이 사용하던 연 나이26세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937년 보다 11년 전이었던 1926년의 나이는 15세가 되어야 맞는 계산이다. 그런데 테라다 토시오는 최승희가 “11년 전에 ... 16세의 젊은 나이였다고 서술했다. 산수가 엉터리였는데도 버젓이 활자화되었고, 그 뒤로도 바로잡히지 않았다.

 

 

혹시 최승희 자신이 당시 나는 16세였다고 발표한 적이 있었는지 조사해 봤지만, 그런 사실도 없었다. 예컨대, 최승희는 조선어판 <나의 자서전(1936: 6)>에서 당시 자신은 15세였다고 밝혔다. “그때는 1926, 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시절이었는데 그 해에 서울에 있는 숙명여학교를 막 졸업했으니, 내가 열다섯 되던 해 봄이었다고 생각한다고 썼던 것이다.

 

최승희가 16세였다는 보도는 어째서 이렇게 끈질기게 계속되었던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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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323, 최승희가 숙명여학교를 졸업하고, 325일 아침 이시이 무용단에 입단해 도쿄 유학길에 올랐을 때 그의 나이가 16세라고 보도되었다. 325일자 <경성일보>는 최승희와 이시이 바쿠의 첫 만남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조선 예찬자 바쿠씨가 이번 조선 방문을 기회로 조선 소녀를 제자로 얻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중, 일행이 경성 제3회 공연을 끝낸 23일 밤10시경 공회당의 이시이씨 일행의 대기실을 찾아와 제자가 되고 싶다고 부탁한 아름다운 조선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경성)부내 체부동 137번지 최준현씨의 영양(令孃) 최승희(崔承喜, 16)였다.”

 

 

326일자 <매일신보>는 최승희가 문사 최승일의 여동생이라는 점, 숙명여고보의 우등 졸업자라는 점, 그리고 325일 아침에 이미 도쿄를 향해 출발했다는 점 등을 보강하며 후속 기사를 게재했다.

 

유럽 순회공연의 길을 가는 중에 경성(서울)에 이르러 공회당에서 공연을 하자, 특히 무용시가 남매의 눈에 띤 가련한 흰옷 입은 조선 소녀의 아담한 자태가 매우 흥미를 끌어 결국은 조선 소녀를 몇 명 제자로 쓰겠다는 말까지 나왔는데, 이에 대하여 청년 문사 최승일(崔承日)씨의 영매로 올해 봄 숙명(淑明)여자고등보통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최승희(崔承喜, 16)양이 다행히 부모의 승낙과 이시이씨 남매의 눈에 들어 이십오일 아침 경성을 떠나게 된 것이다.”

 

<매일신보>327일의 보도에서도 숙명여학교 고등과 우등 졸업생 최승희(崔承喜, 16)양이 세계적 무용가 석정막(石井漠) 석정소랑(石井小浪)의 남매에게 제자가 되어 이십오일 아침 경성 역을 떠나 스승을 좇아 세계만유의 길을 떠났다함은 직보한 바 있다고 거듭 밝혔다.

 

 

이 두 매체의 보도에 나타난 최승희의 당시 나이는 16세였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19111124일생으로 알려진 최승희는 19263월말 현재 만 나이14(+4개월)이었고, 언론에서 흔히 쓰는 연 나이로도 15세였기 때문이다. 최승희의 나이를 16세라고 보도한 것은 조선식 세는 나이였던 것이다.

 

최승희의 여학교 졸업 당시 나이가 만14세밖에 되지 않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조기입학이다. 최승희는 19184월 숙명여자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그때 나이가 만6세로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정한 취학연령 만8세에서 2살이나 모자랐다. 부친 최준현의 교육열과 최승희 자신의 영민함 때문에 세는 나이만 나이로 여기며 일찍 입학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이유는 2년의 이른바 월반때문이었다. 조선총독부는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을 발표했는데, 보통학교(=초등학교)의 교육연한을 4년에서 6년으로, 고등보통학교(=중학교)의 교육연한을 3년에서 4년으로 늘리는 것이 골자였다.

 

이 때문에 1922년에 보통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에게 혼란이 생겼는데, 2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보통학교 졸업 후 바로 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고등보통학교 입학지원 자격이 ‘6년의 소학교(일본인) 혹은 보통학교(조선인) 교육과정을 이수한 자로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총독부 학무국은 1922년 보통학교 졸업자들이 2년의 보습과를 이수한 후 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도록 지침을 정했지만, 그 시행은 학교장의 재량에 맡겼다. 숙명여고보의 이정숙(李貞淑) 교장은 이 재량권을 활용해서 보통학교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은 보습과를 건너뛰고 바로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도록 허용했는데, 최승희가 그 혜택을 입은 것이다.

 

이런 이유로 최승희는 동급생들보다 최대 4살 어린 나이에 숙명여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졸업한 것이 최승희에게 도움만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도쿄음악학교와 경성사범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최승희는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연령 제한을 벗어나기까지 기다리기 보다는 오빠 최승일의 권고에 따라 이시이 무용단에 입단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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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의 조선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나이 산정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생일을 정하는 데 사용하는 달력으로 음력양력의 두 가지가 있고, 그 각각을 기준으로 나이를 세는 방법이 세는 나이’, ‘연 나이’, ‘만 나이의 세 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양력이란 흔히 말하는 그레고리력이다. 한국에서는 1895년 김홍집 내각에 의해서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그레고리오력 채택을 추진했고, 고종은 김홍집의 의견을 받아들여 음력 18951115일에 공식적으로 개력을 반포, 음력 18951117일을 양력 189611일로 정하고, 태양력 채택을 기념하며 왕의 연호를 건양(建陽)으로 변경하기까지 했다.

 

책력을 관장하던 기관도 이름을 관상감에서 관상소로 바꾸고 양력 달력을 발행, 배포했으나, 갑작스런 양력 채택으로 일반 백성뿐 아니라 궁궐 행사에도 혼란이 초래됐고, 음력에 맞춰 농사를 짓던 농촌에서는 새 달력에 반발했다. 책력을 양력으로 바꾸고 왕의 연호까지 건양으로 정한 것은 중국에서 독립하려는 의지로 보였지만, 사실은 일본에 종속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양력과 친일파에 대한 반발로 양력 시행은 저항에 부딪혔고, 시행 1년 만에 과거의 시헌력(時憲曆)으로 돌아갔으나, 일제의 강점(1910)으로 조선은 재차 양력을 사용해야 했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의 일환으로 1873년에 음력을 완전히 폐지하고 그레고리력을 채택했었다.

 

조선에서 사용하던 시헌력(時憲曆)은 순수 음력이 아니라 양력과 음력을 합친 태음태양력이었다. 태음태양력은 한 달의 날짜를 정하는 데에는 달의 움직임을, 하루의 시간과 일 년의 계절을 정하는 데에는 태양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삼은 달력이다.

 

삼국시대 이후 한국에서 쓰인 책력은 모두 태음태양력이다. 신라와 고구려는 인덕력(麟德曆), 백제는 원가력(元嘉曆)을 쓰다가 통일신라에서는 대연력(大衍曆), 후기에 선명력(宣明曆)을 사용했다. 고려에서도 통일신라의 선명력(宣明曆)을 그대로 썼으나 충선왕 때에 수시력(授時曆)을 채택했고, 공민왕19(=1370)에 수시력의 이름을 바꾼 대통력(大統曆)을 사용했다. 조선에서는 <칠정산내편>에 의해 수시력을 수정하여 사용하다가 효종4(=1653)에 마테오리치가 개발한 서양식 계산법을 사용한 시헌력(時憲曆)을 채택해 대한제국 시기까지 이르렀었다.

 

 

한편 20세기 초반 조선인들의 나이를 세는 방법은 세 가지였다. 가장 널리 쓰이던 것이 세는 나이였다. 태어나자마자 1살로 정하고, 이후 새해를 맞을 때마다 1살을 더하는 방식이다. 이는 생일이 언제인가와 상관없이 새해를 맞을 때 1살을 먹는 방식인데, 이때의 새해는 음력상의 새해, 즉 설을 가리켰다.

 

만 나이는 양력의 도입과 함께 본격화되었고, 특히 일제 강점 이후에는 공식 기록에 남기는 유일한 나이가 되었다. 태어났을 때를 0세로 보고, 출생 후 첫 번 생일을 맞으면 1세가 되는 것으로 계산하는 방법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관공서 기록에 반드시 만 나이를 써야 했고, 그에 준하는 학교와 회사에서도 만 나이를 사용했다.

 

연 나이는 현재 연도에서 태어난 연도를 빼는 가장 간단한 나이 산정 방식이다. 당사자의 생일을 모를 때 사용하며, 신문이나 방송 등의 언론매체에서 주로 사용하던 방식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세는 나이가 음력(사실은 태음태양력) 및 대한제국과 연결되고, ‘만 나이가 양력 및 일제침략과 연관되어서 관공서나 교육기관에서는 만 나이를 써야하더라도 일상생활에서는 세는 나이에 집착하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와 30년대까지도 세는 나이(일상)와 만 나이(관공서), 연 나이(언론)의 적용이 이상과 같이 엄격하게 분야별로 지켜진 것도 아니다.

 

일제강점기 총독부 학무국이 정한 취학연령은 만8세였지만 최승희는 19184, 즉 세는 나이로 8세 때에 숙명여자보통학교에 입학했고, 1926325일의 <경성일보>와 326일 <매일신보>는 이시이 무용단에 입단해 무용 유학을 떠나는 최승희가 16세라고 보도했지만, 당시 최승희의 만나이는 14세였고, 16세는 세는 나이였다. 말하자면 일제강점 이후 10년 이상이 지나고 나서도 조선에서는 세 가지 나이 중에서 세는 나이가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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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428, 미이민국의 뉴욕 입국자 명단에 나타난 최승희의 나이(27)가 의구심을 던졌다면, 그보다 1년 전, 1939420일자로 발행된 벨기에의 노동허가서는 그 의구심을 증폭시킨다. 이 문서에는 최승희의 생일이 19125월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승희는 1939430일부터 514일까지 약 2주일 동안 열린 제2회 국제무용경연대회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했고, 경연대회 중간인 510일에는 조선무용 갈라 공연도 개최했었다.

 

그런데 이 공연을 위해서는 최승희에게 노동허가서가 필요했다. 예술가들이 외국에서 공연을 하려면 노동허가를 얻어야 했다. 공연은 입장료를 받는 경제행위이기 때문이다. 80년 전의 일본은 벨기에의 노동 허가 면제국이 아니었으므로 일본 여권으로 순회공연을 하던 최승희도 벨기에에서 공연을 하려면 노동허가를 받아야 했다.

 

 

예술가가 타국에서 예술 행사를 할 때 노동허가는 주관사나 흥행사가 서류 작업을 담당한다. 최승희의 유럽 순회공연 흥행사는 <국제예술기구>였고, 벨기에 국제무용대회의 주관사는 <필하모닉협회>였다. 따라서 이 두 단체가 최승희의 노동 허가 문제를 해결해야 했을 것이다.

 

브뤼셀 시립기록보관소의 공문서 서고에서 발견된 최승희의 노동허가서에 따르면 과연 그의 흥행사 <필하모닉협회>가 후원자(sponsor)로서 최승희의 노동허가를 신청했고, 벨기에 노동 및 사회복지부(Ministere du Travail et de la Prevoyance Sociale)가 이를 승인해, 법무부 장관에게 고지하는 형식을 취했다. 외국인의 출입국 관리는 법무부 소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노동 허가서에 기록된 최승희의 인적사항이 이례적이다. 최승희가 “19125월에(en mai 1912) 서울에서 태어났고(né a Seoul), 파리에 거주(demeurant à Paris)”하는 것으로 기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최승희가 파리에 거주하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유럽 순회공연 동안에는 파리 샹젤리제의 스튜디오를 근거지로 삼았기 때문이다. 최승희의 출생지를 서울이라고 기입한 것도 맞는 기록이다. 최승희는 서울의 수창동에서 태어나 체부동에서 숙명여학교를 마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서울경성(京城)’이라고 쓰고 일본어로는 케이조라고 불렀다. 그런데도 이 노동허가서에는 최승희의 출생지를 게이조(Keijo)’가 아니라 서울(Seoul)’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서울이라는 이름은 조선의 한양에서 시작되어 대한제국 시기에는 한성으로 변경되었다가 일제 강점기에 경성으로 재차 변경되었고,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에야 서울로 개칭되었다. 그런데 1939년에 발행된 벨기에 노동허가서에서 한성경성도 아닌 서울이라는 이름을 쓴 것이다.

 

벨기에 노동허가서의 서울표기가 이례적이라는 점은 다른 나라 입국기록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최승희가 1938111일 샌프란시스코에 입국했을 때나 19401010일 멕시코에 입국했을 때, 그리고 1940428일 뉴욕에 입항했을 때, 그의 입국 서류에는 출생지가 모두 게이조(Keijo 혹은 Keiyo)’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유독 벨기에 노동허가서에 최승희의 출생지가 서울이라고 표기된 것은 아마도 18세기부터 조선에서 활동했었던 프랑스 선교사들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조선과 대한제국 시기에 한반도에서 포교활동을 하면서 조선을 꼬레(Coree)’, 그 수도 한양을 서울(Seoul)이라고 불렀다. 이들이 남긴 기록이 굳어져서 프랑스어권에서는 한양=한성=경성서울이라고 불렀다. 프랑스어가 공용어의 하나인 벨기에도 이 관행을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최승희의 벨기에 노동허가서에 기입된 또 하나의 특이한 점은 최승희의 국적을 한국인(de nationalité Coréenne)으로 기재한 것이다. 최승희가 일본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적을 한국인(coréenne)으로 기입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194010월의 멕시코 입국기록에는 최승희의 국적이 일본인(japonesa)으로 되어 있다. 모국어도 일본어(japonas), 출생지도 일본 경성(Keijo, Japan)’, 거주지도 일본 도쿄(Tokyo, Japan)’으로 기록되어 있었으므로, 이 기록에 따르면 최승희는 전적으로 일본인이었다.

 

한편 19381월의 미국 입국기록에는 최승희의 국적(Nationality)은 일본(Japan), 민족(Race or People)은 한국인(Korean)이다. 최근 거주지는 일본의 도쿄(Tokio, Japan), 출생지는 일본의 한국(Korean, Japan)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미국 입국 기록에 따르면 최승희는 일본인이며, 일본의 속방인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종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19394월의 벨기에 노동허가서는 전혀 다르다. 최승희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서울에서 태어난 한국인으로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벨기에 노동허가서가 작성된 프랑스어에서는 나쇼날리티(nationalité)국적뿐 아니라 민족이나 인종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국적난이 따로 없이 코레안느 나쇼날리티라고 썼다면 이는 최승희를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고 인지했다는 뜻이다.

 

 

이 노동허가서에 기입된 최승희의 인적사항 중에서 가장 이상한 것은 “19125이라는 최승희의 출생연도이다. 그의 생일은 흔히 19111124일이라고 알려져 왔고, 19401010일의 멕시코 출입국 기록에 그의 출생연도가 1912년으로 기재된 적이 있지만, 생월이 19125월로 명기된 것은 벨기에의 노동허가서가 유일하다.

 

최승희의 생년이 1912년으로 기록된 공식 문서가 1건 이상이라는 점은 중요하다. 일회성 실수가 아님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앞에서 최승희의 생일 19111124일이 음력날짜였다면 그의 실제 생년월일은 1912112일임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벨기에 노동허가서는 최승희의 생월이 19121월이 아니라 5월이라고 기록했다. 프랑스어에서 1(janvier, 쟈비에)5(mai, )은 표기나 발음이 다르기 때문에 이를 기록상의 실수라고 보기 어렵다.

 

또 이것을 의도적 오기라고 보기도 어렵다. 이것이 오기라면 그 의도는 나이를 줄이려는 것이었을 텐데, 이 기록으로 최승희의 나이가 변하지는 않는다. 최승희의 실제 생일이 19111124일이라면 이 노동허가서 발급이 신청되었던 1939420일 현재 최승희는 만27(+5개월)이다. 실제 생일이 19121월이었더라도 만27(+3개월10)임에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의 생일이 19125월이라면 최승희는 만26(+11개월)가 되지만 만27세를 만26세로 줄이는 것이 어떤 필요 때문이었을지 짐작할 수 없다. 더구나 이 노동허가서는 1939510일에 발효되기 때문에, 그때는 최승희의 나이는 다시 만27세가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최승희의 생일이 19125월로 기록된 것은 기록상의 실수이거나 의도적인 오기라고 보기 어렵다. 더구나 생년월일처럼 금방 확인이 될 수 있는 신상정보를 실수나 왜곡할 가능성도 없고, 아무리 건망증이 심하거나 기억력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도 자신의 생년월일을 잊거나 잘못 기억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최승희의 벨기에 노동허가서에 나타난 ‘19125이라는 생일 정보는 무언가 사실에 닿아있었음에 틀림없다. 어떤 사실이었을까? 당시 조선의 상황을 고려하면 유일한 설명은 그것이 최승희의 공문서 기록이거나, 최승희의 실제 생일일 수 있다는 것이다.

 

 

최승희의 학적부에는 그의 생일이 19111124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날짜가 음력날짜였다면 최승희의 실제 생일은 1912112일로 환산되고, 이는 그의 미국과 멕시코 입국기록에 나타난 나이를 잘 설명할 수 있다. 이에 더해 벨기에 노동허가서가 기록한 생일 19125월은 출생신고일이 아니었을까?

 

출생신고는 원래 아이가 태어난 직후에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영아 사망률이 높았던 20세기 초 한국에서는 아이가 출생한 이후 몇 달씩 기다렸다가 출생신고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출생신고가 늦었을 경우 원래의 생일대로 신고를 하면 대개 벌과금을 내야하기 때문에 이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는 보통 출생신고일을 생일로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같은 관행으로 보아 최승희가 노동허가서에 생일을 ‘19125이라고 쓴 것은, 실수나 왜곡이 아니라면, 출생일이라기보다는 출생신고일이었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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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학적부와 샌프란시스코 입국서류, 멕시코 입국서류 등을 조사한 결과, 일반적으로 알려진 최승희의 생일 19111124일은 아마도 음력 날짜였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관공서 기록에는 음력 생일을 양력 생일인 것처럼 신고했지만, 실제 생일은 1912112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다른 자료를 보면 최승희 생일의 비밀은 약간 더 복잡해 진다. 예컨대 최승희와 안막은 1940425일 푸에르토리코 산후앙(Ssan Juan)에서 여객선 코아모(Coamo)호를 타고 당일로 뉴욕항에 입항했는데, 이때도 입국신청서와 함께 승객명단이 제출되었다.

 

코아모호가 제출한 선객명단 4쪽에 안막과 최승희의 이름이 보이는데, 기재내용은 두 사람의 샌프란시스코 입항 때와 거의 비슷하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출생지 정보였다.

 

 

안막과 최승희가 국적을 일본(Japan), 인종을 코리안(Korean)으로 기록한 것은 샌프란시스코 때와 같았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샌프란시스코 입항 시에는 인종이 일본인(Japanese)로 타이핑된 것을 연필로 지우고 그 위에 코리안이라고 수정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뉴욕 입항 때에는 처음부터 코리안으로 깨끗하게 타이핑되어 있었던 것이다.

 

가장 큰 차이는 출생지 정보였다. 샌프란시스코 입항 때에는 두 사람의 출생지가 일본의 경성(Keijo, Japan)이라고 되어 있었으나, 뉴욕 입항 시에는 출생국이 코리아(Korea), 출생지는 조선(Chosen)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모두 타이핑된 기록이었다.

 

엄격히 말하면 조선과 코리아는 둘 다 나라 이름이다. 코리아는 대한제국(Korean Empire, 1897-1910)에서 유래한 이름이고, 조선(Chosen, 1392-1897)은 그 이전 518년동안 지속되었던 나라 이름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뉴욕 입국기록에 코리아와 조선을 나란히 기입했다.

 

 

안막의 경우에는 이같은 출생지 정보가 더 정확한 기록일 수 있다. 그의 출생일인 1910418일에는 조선이 대한제국으로서 아직 독립국이었으므로, 출생지를 당시의 국호와 지명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조선강점 이후에 태어난 최승희까지 출생지를 조선, 코리아라고 쓴 것은 형식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 기록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승희와 안막이 자신의 출생지를 한국과 조선이라고 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이는 안막과 최승희가 외국 순회공연을 다니면서도 가는 곳마다 자신들이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며 조선인이라는 점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된다. 일본 여권으로 여행하는 중이었으므로 공식기록이나 문헌에는 어쩔 수 없이 국적을 일본이라고 써야 했지만, 인종이나 출생지 정보 난에는 악착같이 조선과 한국이라는 이름을 남기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40425일의 뉴욕 입국자 명단에는 안막의 나이는 30, 최승희의 나이는 27세로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안막의 정확한 생일은 추정하는 데에 특히 중요한 정보이다. 그의 생일은 일반적으로 1910418일로 알려져 있으므로 이 생일날짜가 양력이라면 그의 나이는 만30(+1주일)가 된다. 그러나 만일 그의 생일날짜가 음력이었다면 이를 양력으로 환산했을 경우 1910526일이 되며, 따라서 그의 나이는 만29(+11)가 된다. 그런데 이 입국기록에 만30세로 기입했으므로, 그의 생일날짜는 양력생일이었다는 점이 확실해 지는 것이다.

 

 

그러나 최승희의 나이는 복잡해 진다. 그의 생일 19111124일이 양력날짜라면 1940425일 현재 만 28(+5개월)이다. 만일 생일날짜가 음력이라면 실제 생일은 1912112일이므로 그의 나이는 여전히 28(+3개월반)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최승희는 이 서류에 자신의 나이를 27세로 기록했다. 왜 그랬을까?

 

지금까지의 논의에서는 생일이나 나이를 기록으로 남길 때에는 그 정확성을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이 기록만은 예외로 두어야 하는 것일까? 최승희는 실수나 혹은 고의로 자신의 나이를 한 살 줄였던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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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1010일 최승희와 안막은 멕시코에 입국했다. 유럽과 미국과 남미 공연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오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길에 멕시코를 경유했던 것이다.

 

최승희와 안막이 멕시코에 입국했을 때 작성한 입국서류 겸 신분증서에는 두 사람에 대한 인적 사항이 세세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인적 사항은 <신체특징><보충자료>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여기에 기재된 개인정보가 요즘 기준으로 거의 신상털이 수준이다.

 

우선 최승희의 <신체특징>을 보면 체형이 마른 편(delgado)’이며 키는 ‘164센티미터이고, 피부색깔은 노랑(amarillo)’, 머리카락은 짙은 밤색(castañoo obscuro)’이라고 기재되었다. 눈썹은 반쯤 무성(semi pobladas)’하고 눈동자는 커피색(cafés)’이며, 코는 뭉툭납작(roma)’하고, 턱 끝은 정상(normal)’이라고 되어 있다. 이어서 콧수염이 고 턱수염도 으며, 기타 다른 특징적인 사항도 없다고 되어 있다.

 

 

<보충정보>난에는 최승희의 결혼상태가 기혼(casado)’, 직업은 클래식 발레리나(bailarina clásica)’, 모국어는 일본어(japonés)’, 2외국어는 영어(inglés)’라고 되어 있다. 현재의 국적은 일본(japonesa)’, 출생지는 일본의 경성(Keiyo, Japón)’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경성(京城)의 일본어 발음은 케이조(Keijo)'인데 스페인으로 Keiyo라고 쓴 것이 생소했다. 하지만 이걸 스페인사람에게 읽어보라고 하니까 케이조에 가깝게 발음했다. 한편, 최승희의 종교는 불교도(budista)’, 인종은 황인종(amarilla)’, 거주지는 일본 도쿄(Tokio, Japón)'라고 되어 있었다. 이 입국서류는 신분증명서를 겸했기 때문에 이처럼 자세한 신체적 특징과 인적사항을 기입해 작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서류의 <보충자료>난에는 최승희의 나이(28)와 생년(1912)도 기록되어 있다. 우선 최승희의 나이에는 별반 이상한 점이 없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최승희의 생일은 19111124일이므로, 이 신분증명서를 발급받은 19401010일 현재 만28(+11)였기 때문이다.

 

이상한 점은 최승희가 자신의 생년을 1912년이라고 적은 것이다. 생년만 기재하고 생월일을 생략한 것은 이 서류의 질문이 태어난 해(ano en que nacio)”만 물었기 때문이다. 최승희는 왜 자신의 생년을 1911년이 아니라 1912년으로 기입했을까?

 

 

아무리 건망증이 심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생년을 잊어버리거나 헷갈리는 경우는 없다. 어린 시절부터 나이 계산에 꼭 필요할 뿐 아니라,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출생연도가 학업성취도보다는 친구를 사귀는 데에 중요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최승희의 숙명여학교 학적부에는 그의 생년이 1911(=메이지44)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멕시코 입국 기록에는 1912년이라고 기입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앞에서 보았듯이, 만일 학적부에 기재되었던 최승희의 생일 19111124일이 실제로는 음력 날짜였다면 최승희가 외국에서 생년을 1912년이라고 쓴 것이 설명될 수 있다. 음력 19111124일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1912112일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도 최승희의 나이는 여전히 만28(+10)인 것에는 변함이 없다.

 

 

남편 안막도 같은 신분증서를 발급받았는데, 그의 나이는 30, 생년월일은 1910418일로 기록되어 있었다. 안막이 자신의 생년월일을 다 기입한 까닭이 궁금해서 양식의 질문을 읽어보니, 두 사람이 사용한 양식의 포맷이 약간 달랐다. 최승희에게는 태어난 해는(ano)?”만 물었는데, 안막에게는 태어난 생년월일(fecha)?”을 물었던 것이다. 안막의 생일(1910418)이 음력날짜이든, 양력날짜이든 그의 나이는 만30(양력이라면 +6개월, 음력이라면 +5개월)가 된다.

 

여담이지만, 안막-최승희 결혼 사진을 보면 두 사람의 키가 거의 같아 보이길래 안막이 단신인 줄 알았으나, 이 서류에 나타난 안막의 키는 173센티미터였다. 일제강점기 1910년생 조선인 남성의 평균 신장이 162센티미터였던 것을 고려하면 안막의 키는 평균보다 10센티미터 이상 더 컸을 뿐 아니라 아내 최승희보다도 9센티미터나 더 컸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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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111일 최승희와 안막은 세계 순회공연 첫 목적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19371229일 요코하마를 출발한 여객선 치치부마루(秩父丸)를 타고 2주일 항해 끝에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도착한 것이다. 치치부마루 선장은 여객 명단을 미이민국에 제출했는데, 이 명단이 지금까지 미이민국 아카이브에 남아 있다.

 

한 면에 30명씩 8면으로 작성된 이 명단의 마지막 면(8)에 안막과 최승희의 이름이 있었다. 안막의 이름은 안 히츠쇼(An Hitsusho), 최승희의 이름은 사이 쇼키(Sai Shoki)라고 표기되어 있다. 안 히츠쇼는 안막의 본명 안필승(安弼承)의 한자를 일본식으로 읽은 것이고, 사이 쇼키도 최승희(崔承喜)의 한자 이름의 일본식 발음을 영문으로 표기한 것이다.

 

두 사람의 인적 사항에는 결혼여부와 직업, 국적과 인종, 비자번호 및 발급일 등의 정보가 기입되어 있었다. 두 사람의 국적은 일본(Japan)이지만 인종은 한국인(Korean)으로 되어 있었고, 최승희의 직업은 직업 무용가(Professional Dancer)”, 안막의 직업은 최승희의 매니저로 명시되었다. 또 두 사람이 부부라는 사실도 부기되어 있었다.

 

 

이 명단에는 생년월일을 기입하는 난은 없었지만 나이를 기입하게 되어 있었다. 안막은 27, 최승희는 25세였다. 1910418일 출생의 안막이 1938111일 현재 27세인 것은 맞다. 당시 그는 만으로 27(+8개월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승희의 나이가 25세로 기록된 것은 의외였다. 최승희는 19111124일생이었으므로 19381월 현재 만나이26(+2), ‘연나이27, ‘세는 나이로는 28세여야 했다. 안막이 만나이를 기입했으므로 최승희의 나이도 만나이였을텐데, 어째서 26세가 아니라 25세라고 기재된 것일까?

 

이 명단이 승객명단이나 여권정보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라면 담당자의 착오나 실수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어느 나라나 출입국 기록 관리는 정확하고 엄격한 것이 보통이므로, 실수나 착오의 가능성은 배제하자. 그럼 최승희의 나이 25세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여권에 기입된 최승희의 생년월일이 19111124일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 최승희의 생일이 음력이었다면 그에 상응하는 양력 날짜는 1912112일이다. 바로 이 날짜가 최승희의 여권과 입국신고서에 기재되었다면 최승희의 나이는 하루 차이로 만25(+355)가 된다.

 

안막의 경우는 어땠을까? 그의 생일 1910418일이 음력 날짜였다면 그의 양력 생일은 1910526일이 되어, 그의 나이는 여전히 만27(+7개월)이다. , 샌프란시스코 이민국에 제출된 입국자 명단에 나타난 안막과 최승희의 나이는 모두 정확한 기록이 되는 것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두 사람의 생일이 음력 날짜였음을 전제로 한 것인데, 당시 이같은 상황은 빈번했다. 20세기 전반 조선인들은 음력을 주로 사용했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양력만 사용하던 일본의 관행을 따라야했기 때문에 혼란이 생기곤 했다. 조선인들은 생일을 음력으로 기억하고 축하했지만, 그것을 관공서에 제출할 때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첫째는 음력 생일 날짜를 양력으로 환산해 관공서 기록에 등재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공식 기록의 생년월일은 실제의 생일과 달라진다. 음력 생일의 양력 날짜가 매년 달라지기 때문이다. 둘째 방법은 음력 날짜를 그대로 관공서에 제출하는 것이다. 그러면 관공서 기록의 생일과 실제 생일이 다른 것은 마찬가지더라도, 적어도 그 날짜를 매년 양력으로 환산해 실제 생일을 챙길 수 있었던 것이다.

 

최승희와 안막이 첫 번째 방식을 택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의 진짜 생일은 음력 19111124(최승희)1910418(안막)이었지만, 관공서의 기록에는 1912112(최승희)1910526(안필승)로 기재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에 따르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의 나이는 각각 만27세와 만25세이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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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근교 애국열사릉에 세워진 묘비에는 최승희가 19111124일 출생해 196988일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최승희의 공식 생몰일이다. 하지만 여기에 새겨진 날짜들이 그 석비처럼 단단하고 확실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우선 최승희의 사망일과 사망 경위 및 원인에 대해서는 많은 주장이 있지만, 어떤 것도 정설로 인정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최승희의 사망일에 대한 확정은 분명한 자료 혹은 결정적 증언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

 

반면 최승희의 탄생일에 대해서는 그동안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남북한과 중국, 일본에서 개최되었던 최승희 탄생 1백주년 행사들도 모두 19111124일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최승희가 활동하면서 제자를 키웠던 모든 지역에서 이날은 최승희의 출생일로 인정되었던 것이다.

 

 

최승희의 생년월일이 19111124일로 확정된 것은 숙명여학교 학적부 덕분이다. 거기에 명치44(=1911) 1124일 경성 출생이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호적이나 여권 기록, 북한 시절의 주민등록이나 가족관계 기록이 있다면 더 확실해 지겠지만, 학적부의 기록만으로도 그의 생년월일을 특정하는 데에 그다지 어려움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필자는 최근 최승희의 생년월일에 대해서도 의문의 여지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세계 각처에 흩어진 최승희의 삶과 춤에 대한 기록을 수집, 검토하는 과정에서, 그의 출생연도가 1912년이며, 출생일이 1224일 혹은 1227일이라는 문헌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최승희와 안막이 세계 순회공연 중이던 1940, 멕시코에 입국하면서 제출한 입국신고서에는 최승희의 생년이 1912, 나이가 28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외국에 입국할 때에 제출하는 입국신고서는 출입국 관리에 의해 여권 정보와 대조되고 확인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1912년생의 28라는 기록은 최승희의 여권 기록과도 일치했을 것이다. 따라서 최승희의 여권에는 그의 출생년도가 1912년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합리적 추론에 이르게 된다.

 

 

최승희가 스스로 1912년생이라고 밝힌 기록은 더 있었다. 19395월 브뤼셀에서 두 번째 공연을 준비하면서 최승희는 벨기에 당국으로부터 노동허가서를 발급받은 적이 있었다. 바로 이 노동허가서에 나타난 최승희의 생년월일이 “19125이었다. 이 역시 최승희의 여권기록과 대조되었을 것이므로, 최승희의 여권에 나타난 출생연도는 “1912이었을 것이라는 추론은 조금 더 확실해 진다.

 

한편 출생연도와는 별도로 출생일이 1124일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도 나타났다. 192999일자 <중외일보>의 인터뷰 기사에는 섯달 수무일햇날(=섣달 스무 이렛날)이 생일이라는 최양은 열아홉이라는 나이보다 훨씬 어리고 순진하게 보였다는 내용이 있다. 섣달은 음력 12월이므로 최승희의 생일이 음력 1227일이었을 가능성도 제기한 것이다.

 

<중외일보>의 기자는 192998일 아침 최승희의 옥천동 자택을 찾아가 그를 인터뷰한 다음, 이를 다음날(9) 기사로 보도했다. 따라서 생일이 1227이라는 말은 최승희 본인이 직접 밝힌 것임에 틀림없고, 인터뷰한 기자의 기억이나 메모가 왜곡될 만큼 시간이 지체된 것도 아니었으므로 그 정확성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 기사는 최승희가 인터뷰 당시의 나이를 밝힘으로써 그의 출생연도를 추론할 근거도 제공했다. 최승희가 192998일 현재 19세였다는 말은 이 나이가 한국식 세는 나이였음을 고려할 때 최승희의 생년월일은 19111227일로 역산될 수 있다. 19291127일이 음력 날짜였다면 양력으로는 1912214일이 된다.

 

따라서 최승희의 생년월일은 학적부의 19111124일뿐 아니라, <중외일보> 인터뷰 기사와 외국 기록에 따르면 19111227, 혹은 1912214일일 수도 있다. 어떤 것이 진짜 생일이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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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도리카와 준(綠川潤)<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생애(2006)>에 따르면 1926년의 부산 공연에 참가한 이시이무용단원은 모두 16명이었다.

 

“1926년 봄부터 지방 공연에 주력했습니다. 이시이 바쿠 무용단 일행은 16명으로 우선 중국에 건너가 만주일일신문의 후원으로 대련(大連) 공회당에서 첫 공연을 한 후 뤼순(旅順), 봉천(奉天), 장춘(長春), 지린(吉林) 등을 2개월 동안 순회 공연했습니다. 당시 만주에는 일본인이 다수 이주해 있어서 어느 공연이나 대만원의 성황이었습니다. 그 후 조선으로 돌아갔습니다.”

 

경성과 대구 공연 조사를 통해 16명의 무용단원 중에서 7명의 이름이 확인되었다. 단장 이시이 바쿠(石井漠)와 그의 아내 이시이 야예코(石井八重子), 야예코의 동생이자 바쿠의 파트너 이시이 코나미(石井小浪), 그리고 바쿠의 여동생 이시이 에이코(石井榮子)는 모두 가족이었다.

 

 

이시이 야예코(石井八重子)는 무용단의 매니저이자 작품 해설가, 무용단 대변인 역할이었다. 경성 공연 때는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말을 심하게 더듬던 남편의 인터뷰를 대언하기도 했다.

 

이시이 코나미(石井小浪)는 이시이 야에코의 여동생으로, 이시이 바쿠의 지도로 14세에 니혼칸(日本館)에서 데뷔, 192212월부터 약 2년 반 동안 이시이 바쿠와 함께 유럽과 미주 순회공연에 동행했다. 일본에 돌아온 후에도 이시이 바쿠의 무용 파트너였다.

 

이시이 에이코(石井榮子, 1911-1936)는 바쿠의 막내 동생으로 나이 차이가 25년이었다. 에이코는 교사나 간호사가 되려 했으나 이시이 바쿠가 무용을 가르쳐 내제자로 삼았다. 1926년의 만주-조선 순회공연에서 에이코는 독무 <개구쟁이(わんぱく小僧)>의 상연을 담당했다.

 

이시이 히로시(石井博志)는 무용단의 무대주임(舞臺主任)이었다. 히로시가 이시이의 가족이나 친척이었는지, 혹은 우연히 성이 같은 사람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이시이 바쿠의 전기 <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생애(2006)>에도 그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마츠우라 다비토(松浦旅人, 1899-1927)는 가족 단원은 아니지만 무용단의 무용수였다. 오사카의 이와마 사쿠라코(岩間櫻子) 무용단에서 무용을 시작했던 그는 1920<도쿄오페라좌>에 가입하면서 이시이 바쿠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마츠우라 다비토는 1920년 여름의 홋카이도, 도호쿠, 호쿠리쿠 순회공연과 1921년 봄의 간사이, 산요, 큐슈 순회공연, 그리고 19262월의 만주와 조선 순회공연에 동참했다. 조선 공연에서 마츠우라 다비토는 독무 아동무용 <오늘밤은(今晩)>과 이시이 바쿠와 함께 추는 듀엣 작품 <명암(明闇)>의 상연을 담당했다.

 

호시나 테루오(保科輝雄)는 무용단의 피아니스트였다. 1926325일의 <경성일보>는 이시이무용단의 단원 4명의 이름을 명시했는데, 그중 한 명이 피아니스트 호시나 테루오였다.

 

본사 후원으로 경성에서 열린 3일간의 신작무용시회에서 충분히 천재를 발휘한 이시이 바쿠(石井漠), 야에코(八重子)부인, 그 여동생 코나미(小浪), 피아니스트 호시나 테루오(保科輝雄)씨 등 일행은 23일 아침 경성에 이별을 아쉬워하면서 인천으로 향했다.”

 

 

1926328일의 <부산일보>는 무용단의 스탭과 임원 명단을 좀 더 자세하게 보도했는데, 이에 따라 무대조명(舞臺照明) 담당자 이토 다츠지(伊藤辰次) 석정무용시연구소의 대표자 키무라 센고(木村仙吾), 그리고 고문 무라오카 라쿠도(村岡楽童)의 이름이 밝혀졌다.

 

키무라 센고는 이시이 바쿠와 함께 제국극장 양악부 동창생이었다. 19126월 제국극장에서 상연된 <가극석가(歌劇釋迦)> 프로그램에 따르면, 이시이 바쿠는 정판왕의 시신(浄阪王侍臣)의 한 사람으로 출연했고, 키무라 센고는 오케스트라에서 트럼본을 연주했다.

 

무라오카 라쿠도는 대련(大連)에서 활동하면서 만주국 국가를 작곡하는데 참여했던 작곡가였다. 키무라 센고와 무라오카 라쿠도가 어떤 경로로 이시이무용단의 단장과 고문을 맡게 되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조명담당 이토 다츠지에 대한 문헌도 아직 발견된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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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시극 <젊은 판과 님프(きパンとニンフ)>는 이시이바쿠 무용단의 부산공연(1926328, <국제관>)에서 발표된 열한번째(25번째) 작품이자 마지막 작품이었다. 피날레에 해당하는 이 작품은 이시이 바쿠의 가장 널리 알려진 초기의 대표작의 하나이며, <이시이바쿠 팜플렛 제1>에서는 이 작품이 1924년 도쿄에서 야마다 코사쿠(山田耕筰)의 음악을 배경으로 창작한 작품으로 서술되어 있다.

 

(Πάν, Pan)’은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목양의 신이다. 염소의 하반신과 사람의 상반신, 그리고 뿔이 돋은 머리를 가진 사람의 모습을 가졌다. 신화에서는 자주 물의 신 님프와 어울리는 장면이 나오고, 주로 판이 님프를 쫓아다니며 희롱하는 모습이 자주 묘사되었다. 그래서 판과 님프는 자주 남녀간의 사랑과 섹스와 자주 연관되었다. 그리스 신화의 판은 로마 신화의 파우누스(Faunus)나 사튀르(Satyr)로 이어지는데, 이들은 그 자유분방한 성격과 행동 때문에 18세기 낭만주의 예술 사조의 상징적인 존재로 내세워졌다.

 

 

한편 님프(νύμφη, nymph)는 고대 그리스 민요에 등장하는 여성신이다. 자연이 신격화된 존재로서 인간보다는 오래 살지만 불사의 존재는 아니며, 자연이 여러 모습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님프도 다양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됐다. , 회나무 님프와 참나무 님프, 강물 님프와 바다 님프 등으로 그들이 거주하는 곳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야마다 코사쿠의 악곡 <젊은 판과 님프(1915)>과 이시이 바쿠의 무용작품 <젊은 판과 님프(1916)>은 모두 고대 그리스 신화의 판과 님프의 개념을 따르고 있다. 이는 야마다 코사쿠가 <젊은 판과 님프>를 작곡한 것은 그의 베를린 유학시절 클로드 드뷔시(Claude Debussy, 1862-1918)<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Prélude à l'après-midi d'un faune, 1894)>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191212월 니진스키가 안무한 무대를 여러 번 관람하면서 큰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야마다 코사쿠가 변경한 것이 있다면 드뷔시가 (faune)’이라고 불렀던 목신이라고 한 것을 (パン)’이라고 표기한 것이다.

 

야마다 코사쿠가 19157월에 <젊은 판과 님프>의 작곡을 마치고 악보에 제목을 썼을 때는 <젊은 켄타우로스-5개의 포엠(きケンタウル5つのポエム)>라고 되어 있었다. , 이 곡은 5개의 소곡으로 이뤄진 모음곡이었고, 분위기면에서 드뷔시의 곡과 유사한 곡들이었다.

 

 

<젊은 켄타우로스-5개의 포엠>1번곡이 126, 2번곡이 39, 3번곡이 47, 4번곡이 49, 5번곡의 51초의 길이다. 따라서 전곡은 432초이므로 이시이 바쿠의 초기 무용시들보다 약간 긴 편이다. 이시이 바쿠가 5곡을 모두 사용했다면 다소 긴 작품이 되었을 것이고, 혹은 5곡 중 몇 곡만 선택해서 편곡한 음악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시이 바쿠의 <젊은 판과 님프>가 초연된 것은 19169, 도쿄 마루노우치 소재 보험협회 강당에서 열렸던 <신극장 제3회 공연>이었다는 기록도 있고, 191868일 개명좌(開明座)에서 열렸던 <도쿄가극장공연>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초연이 이루어진 공연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더 조사가 필요하지만, 적어도 초연 당시의 제목이 <젊은 목신과 물의 요정(牧神)>이었으며, 이 제목이 후일 <젊은 판과 님프(きパンとニムフ)>로 바뀐 것이 분명하며, 제목이 바뀐 뒤의 초연은 이시이 바쿠와 코나미가 세계 순회공연을 출발하기 직전인 1922105일 제국극장에서 열렸던 <석정막도구기념무용공연>이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젊은 판과 님프>의 안무과정에 대해 이시이 바쿠는 그의 자서전 <나의 얼굴(1940)>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긴바 있었다.

 

어느 날 너무 배가 고파서, 2층 선생님의 서재에 가보니, 놀랍게도 선생님은 작곡이 한창이었고, 나를 보시자 여기는 아무래도 오보에를 써야겠군'이라면서 어젯밤 의논했던 <젊은 판과 님프>의 음악을 들려주셨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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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이무용단의 부산공연에서 10번째(2부의 4번째)로 상연된 <고뇌하는 그림자(ましき)>는 이날 발표된 12개 무용작품 중에서 가장 덜 알려진 작품이었다. 번외작품으로 부가된 <일본무용>의 실재를 짐작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면, 그 바로 다음이 바로 이 <고뇌하는 그림자>였다. 적어도 한국에 알려진 문헌에는 이 작품을 서술하거나 평론한 것은 거의 없었다.

 

19277월에 출판된 <석정막 팜플렛 1>의 이시이 바쿠 작품 목록에는 <고뇌하는 그림자>가 없고, <쓸쓸한 그림자(しき)라는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야마다 코사쿠의 악곡을 배경음악으로 사용해 1921년 도쿄에서 안무된 작품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192773, 도쿄 아사히강당 공연에서도 <고뇌하는 그림자>는 발표되지 않았고, 1928518일의 춘계공연과 10월일의 추계공연, 그리고 1025-26일의 경성 공연에서도 <고뇌하는 그림자><쓸쓸한 그림자>는 발표 작품에 포함되지 않았다. 19307월에 출판된 <석정막 팜플렛 4>에도 <쓸쓸한 그림자><고뇌하는 그림자>가 빠져있었다. 즉 이 두 작품은 192773일 이후에는 이시이 바쿠의 작품 목록에 수록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상으로 미루어 보아, 1921년에 창작되어 1926년까지 공연되었던 <고뇌하는 그림자>는 약간의 수정을 거쳐 1927년부터는 <쓸쓸한 그림자>로 개칭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1927년의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쓸쓸한 그림자>의 창작연도를 1921년으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는 <고뇌하는 그림자>가 창작된 연도이기도 하다.

 

이렇게 개칭된 <쓸쓸한 그림자>나마 19277월부터는 상연되지 않았는데, 아마도 이 작품이 안무자 이시이 바쿠의 성에 차지 않았거나, 관객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한 작품으로 판단되었거나, 1927년경에는 이미 발표할 수 있는 레퍼토리가 상당히 축적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 세 가지 이유가 모두 중첩되었기 때문에 <고뇌하는 그림자><쓸쓸한 그림자>가 모두 이시이무용단의 레퍼토리에서 누락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시이 바쿠가 <고뇌하는 그림자>를 안무할 때 사용했던 배경음악은 어떤 악곡이었을까? 이시이 바쿠의 작품 목록에는 <고뇌하는 그림자><쓸쓸한 그림자>가 모두 야마다 코사쿠의 음악을 사용한 작품이라고 서술되어 있지만, 야마다 코사쿠의 작품 목록을 보면 그림자라는 말이 들어있는 제목의 작품은 없었다.

 

<고뇌하는 그림자>의 음악에 대한 유일한 힌트는 1926320일의 <경성일보>가 제공한다. 이 기사에서는 <고뇌하는 그림자>를 설명하면서 신앙과 유혹(信仰誘惑), 계율의 빛(戒律), 처녀의 달빛 고뇌(處女月光), 고결한 마음에서 벌어지는 영과 육의 싸움(心高きものゝ)”을 묘사한 작품이라고 했다. ‘신앙이나 유혹’, ‘계율이라든가 영과 육의 싸움등의 표현은 종교적 용어들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야마다 코사쿠의 작품 중에 종교적 소재를 작품화한 것으로 교향곡 <막달라마리아(マグダラのマリア, 1916)>가 있다. 이 작품은 야마다 코사쿠 본인에 의해 무도교향(舞踏交響曲)이라고 서술되었으므로 무용작품과도 관련될 가능성이 충분했다.

 

 

야마다 코사쿠의 무도교향곡 <막달라 마리아>는 벨기에 극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Maurice Maeterlinck, 1862-1949)의 희곡 <막달라 마리아(Marie-Magdeleine, 1910)>의 제2막을 교향악으로 작곡한 것이다. 191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마테를링크의 <막달라 마리아> 2막은 창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십자가 처형 전날 밤 로마군 장군 베루스(Lucius Verus)에게 예수 처형 중지를 요청하지만, 질투심에 휩싸인 베루스는 이를 거절한다는 내용이다.

 

이 같은 내용을 잘 알고 있던 이시이 바쿠는 야마다 코사쿠의 <막달라 마리아>를 사용하여, 예수 처형 전날 밤, 예수의 가르침과 베루스의 질투 사이에서 고뇌하던 막달라 마리아, 결국 예수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던 그의 쓸쓸한심경을 그림자로 형상화하여 무용작품으로 형상화했던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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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マスク, 1924)>는 이시이무용단의 부산공연(1926328, <국제관>)에서 9번째(2부의 3번째)로 상연된 작품이다. <마스크>는 이시이 바쿠가 미국 순회공연 시기에 뉴욕에서 안무해 초연했던 작품으로, 귀국 후에도 일본에서 자주 공연되었던 독무 작품이다.

 

이시이 바쿠는 세계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에 두 차례에 걸쳐서 쓰키지 소극장에서 가졌던 귀국공연에서도 <마스크>를 발표했고, 1926103일 미츠코시(三越) 백화점 옥상에서 열렸던 이시이무용단 공연 및 촬영회에서도 <마스크>를 상연했다. 또 이듬 해인 192773일 도쿄 아사히강당(東京朝日講堂)에서 가졌던 공연에서도 이 작품을 공연한 바 있다.

 

이 작품은 또 이시이 바쿠의 상연 모습이 영상으로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1926103일 미츠코시 백화점 옥상에서 열린 야외공연 및 촬영회 당시의 <마스크> 공연 모습이 <그로테스크>와 함께 촬영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상은 시즈오카(静岡)현의 시마다(島田) 시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었다. 시마다시 명예시민 시미즈 신이치(故清水眞一, 1889-1986)씨가 촬영회 당일 현장에서 직접 촬영한 것으로, 1986년 그가 타계하면서 다른 소장 자료와 함께 시마다 시립도서관에 기증되었다.

 

20143월 시미즈 소장품 중에 이 영상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고, 321일 세타가야(世田谷) 미술관의 분관인 미야모토 사부로(宮本三郎) 기념미술관에서 처음으로 전시회를 개최해 일본 전역의 관심을 끌었다.

 

그로부터 약 10개월 후인 20151월 이 영상의 존재가 한국에도 알려져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는데, 이는 이 영상에 불세출의 조선무용가 최승희의 공연 모습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승희의 해방 이전 공연 모습을 담은 영상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영상에 나타난 이시이 바쿠의 <마스크> 공연 모습은 그의 다른 작품들과 다른 점이 있다. 이시이 바쿠는 긴 치마 형태의 의상으로 감싼 하반신을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상반신, 특히 얼굴 표정과 팔 동작만으로 작품을 공연했다는 점이다. 이는 훗날 최승희의 <보살춤>을 연상시키는 공연 형태였던 것이다.

 

그런데 <마스크>를 관람하면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이시이 바쿠는 이 작품을 상연하면서 가면을 쓰지도 않고, 손에 마스크를 들고 있지도 않다. 그런데 왜 제목이 <마스크>일까?

 

 

그것은 음악 때문이었다. 이 작품의 배경음악은 알렉산드르 스크리아빈(Alexander Scriabin, 1872-1915)<마스크(1912)>이다. 그의 피아노곡 <두 개의 시(2 Poèmes, Op.63, 1912)> 중의 첫 번째 곡이 <마스크>이고, 두 번째 곡이 <이상함(Étrangeté)>이다. 이 두 짧은 피아노곡은 코드 구성도 생소하고, 따라서 익숙하지 않은 화음이 이어지는데도 그 멜로디와 화음이 이상하게도 청자의 뇌리에 남는다.

 

스크리아빈은 이 같은 화성과 멜로디가 주는 느낌을 특이하지만(bizarre) 달콤함이 숨어있고(avec une douceur cachée),” “미궁에 빠진 듯하면서도(enigmatique) 거짓 달콤함(avec une fausse douceur)과 일견 이상한(avec une étrangeté subite)” 느낌이라고 서술했다.

 

 

사실 스크리아빈의 음악 철학 자체에 모순된 요소를 포함하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의 음악은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고(visible-not visible),” “있으면서도 없는(real-not real)” 것을 표현하고 있어서, 아름다운 하모니가 추상적인 멜로디를 감싸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스크리아빈 음악의 매력이라고 한다.

 

스크리아빈의 음악에 먼저 반한 것은 야마다 코사쿠(山田耕莋)였다. 그가 독일 유학을 마치고 1914년 일본으로 돌아올 때 러시아를 경유했는데, 이때 스크리아빈의 음악을 처음 접했다. 깊은 인상을 받은 야마다 코사쿠는 귀국 일정을 늦추면서까지 스크리아빈의 음악을 섭렵했다. 귀국한 후에도 야마다 코사쿠는 자신의 음악에 스크리아빈의 양식을 도입했는데, 이같이 야마사 코사쿠를 통해 이시이 바쿠의 무용 안무에도 스크리아빈의 영향이 이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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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328, <국제관>에서 열린 이시이 바쿠의 부산 공연에서 발표된 8번째 작품은 무용시 <솔베이지의 노래(ソルヴエーヂの)>였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헨리크 입센(Henrik Ibsen, 1828-1906)의 희곡 <페르 귄트(Peer Gynt, 1867)>의 마지막 장면을 무용화한 작품이다. 배경 음악은 에드바르 그리그(Edvard Grieg, 1843-1907)<페르 귄트(1875)> 19번째 곡이다.

 

입센의 <페르 귄트>는 노르웨이 오슬로 북쪽 2백킬로미터 지점의 릴레함메르(Lillehammer) 중심의 구드브란스달(Gudbrandsdalen) 지방 민담을 바탕으로 집필된 희곡이다. 페르 귄트(Peer Gynt, 1732-1788)는 실제인물이며, 입센은 구드브란스달 지방을 여행하면서 신화나 전설처럼 채색되어 내려오던 그의 다양한 여행 편력과 기이한 행동을 채집, 538장의 희곡으로 집필했다.

 

<페르 귄트>는 운문 희곡이지만 상연에는 적합하지 않았던 독서용 희곡이었는데, 그 상연 요구가 높아지자 입센은 1875년 그리그에게 반주음악 작곡을 의뢰했고, 1876224일 오슬로에서 초연되었다.

 

 

민담에 따르면 페르 귄트는 사격의 명사수이자 뛰어난 스키어였고 최고의 낚시꾼이었지만, 허풍쟁이이면서도 매력이 넘치는 희대의 바람둥이였다. 페르 귄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고, 노르웨이를 주유하다가 사라진 방랑객이었다.

 

입센은 <페르 귄트>를 집필하면서 실제인물의 편력 중에서 두 가지를 수정했다. 그의 노르웨이 여행 편력을 전 유럽 편력으로 넓혔고,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던 것으로 묘사한 것이다. 그 여인이 바로 솔베이지였다.

 

페르 귄트는 솔베이지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돈을 벌어오겠다며 집을 떠나 세상을 주유했으나, 결국 재산과 세월을 다 보내고 병들고 나이 들어 집으로 돌아와 보니,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솔베이지의 무릎을 베고 세상을 떠난다는 이야기이다. 이때 솔베이지가 불렀다는 노래가 바로 <솔베이지의 노래>이다. 이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겨울이 지나고 또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세월이 갑니다./ 그러나 그대는 내 사랑이에요./ 내 정성을 다해 늘 그대를 기다립니다.”

 

 

입센의 의뢰로 1875년 작곡된 그리그의 <페르 귄트(Op.23)>는 전주곡과 전5막의 26곡으로 구성되었다. 요즘 널리 알려진 것은 2개의 <페르 귄트 모음곡(Op46 & 55)>인데, 1모음곡(Op46)은 원곡에서 4(8, 14, 15, 18)을 골라 편곡해서 1891년 관현악곡으로 완성했고, 2모음곡(Op55)은 원곡의 5(4, 13, 21, 19, 17)을 선정, 편곡해서 1892년에 완성했다.

 

1모음곡의 4번째 곡, <산마왕의 동굴(In the Hall of Mountain King)>은 이시이 바쿠의 <산을 오르다(야마오노보루, 1925)>의 반주음악으로 채택되었고, 2모음곡의 4번째 곡인 <솔베이지의 노래>는 같은 제목의 이시이 바쿠 무용의 반주음악으로 사용됐다.

 

 

<이시이 바쿠 팜플렛 1>에 따르면 <솔베이지의 노래>는 이시이 바쿠가 유럽-미주 순회공연 중이던 1924년 뉴욕에 체재할 때에 안무된 작품이라고 서술되어 있으므로, 베를린에서 안무되고 초연되었던 <갇힌 사람(われたる토라와레타루히토, 1922)>과 함께, 이시이 바쿠가 순회공연 중에도 창작을 쉬지 않았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힐 수 있다.

 

한편, 이시이 바쿠는 야마다 코사쿠의 영향을 받아 에드바르 그리그의 음악에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그리그의 악곡을 반주음악으로 사용하여 창작된 초기 무용작품만도 <솔베이지의 노래(1924)>를 포함해 6개나 된다. <멜랑콜리(メランコリィ, 1922)>, <산을 오르다(야마오노보구, 1925)>, <체념(あきらめ아키라메, 1925)>, <그로테스크(グロテスク, 1926)>, <황혼의 산들(黄昏ゆく타소가레유쿠야마야마, 1927)> 등이 그것이다.

 

이시이 바쿠가 안무한 무용시 <솔베이지의 노래>1926328일의 부산 공연에서 이시이 코나미(石井小浪)의 독무로 공연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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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이 무용단의 부산공연(1926328일 오후6, <국제관>)에서 발표된 7번째 작품(또는, 2부 첫 번째 작품)2인 무용극 <명암(明暗묘안, 1916)>이었다. 원작은 오치아이 나미오(落合浪雄, 1879-1938)의 희곡, 음악은 야마다 코사쿠(山田耕莋, 1886-1965)의 악곡이었다.

 

이 작품은 1916926일 도쿄 혼고자(本鄕座)에서 열린 <신극장>2회 공연에서 이시이 바쿠(=장님 법사)와 코모리 사토시(小森敏=파계승) 주연으로 초연됐고, 62-4일 제국극장에서 발표된 <법열(法悅, 1916)>, <젊은 판과 님프(1916)>와 함께 이시이 바쿠 최초 3대 무용시다.

 

 

이시이 바쿠는 자신의 초기 작품들을 (1) 의태무용, (2) 무용극 혹은 극적무용, (3) 무용시 혹은 순무용의 세 가지로 분류했는데, <명암>무용극에 속한다. <이시이바쿠 팜플렛 1>에 따르면 무용극혹은 극적 무용이란 과장이 포함된 드라마틱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라든가 줄거리라든가, 그러한 것이 전해지는 무용이라고 서술되어 있다.

 

의태무용이란 사물의 모습이나 움직임을 흉내 내는 작품으로 <금붕어><그로테스크>가 이 범주에 포함되었다. ‘무용시는 이시이 바쿠가 야마다 코사쿠와 함께 시작한 신무용으로 1926328일의 <부산일보>에서 이시이 바쿠는 자신의 무용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인간이 어떤 종류의 감각을 예술적으로 표현하고자 할 때 이를 글로써 하는 경우에는 시()가 되고, 화필로 표현하면 그림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 신체를 통하여 인간의 감정 혹은 사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나의 무용시입니다.”

 

 

<명암>의 줄거리는 그 제목에 상징적으로 시사되어 있다. 한자어 명암(明暗)을 직역하면 밝음과 어두움이지만 이는 흔히 삶과 죽음혹은 이승과 저승이라고 의역되는 말이다. 극작가 오치아이 나미오(落合浪雄, 1879-1938)가 발표한 같은 이름의 희곡이 무용극으로 안무된 <명암>의 줄거리는 <이시이바쿠 팜플렛 제4>에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장님인 피리법사(笛法師)가 벼슬을 얻기 위해 상경하던 중 청수사(清水寺키요미즈데라, 798년 건립)의 경내에서 하룻밤을 지새운다. 거기에 쓰러져 자고 있던 파계승이 깨어나 잠든 법사의 지갑을 훔쳐 도망가려는 순간 넘어져 눈이 멀고, 반대로 법사의 눈이 떠진다.

 

법사는 부처의 가호에 감사하면서 파계승에게 그 돈을 보시하려고 하였지만, 파계승은 비록 장님이 되었지만 그 때문에 최초 출가했을 때에 목표로 삼았던 깨달음을 얻었고 청정한 신앙의 마음으로 돌아갔다. 이에 반해 법사는 눈을 뜨기는 했으나 오히려 물욕이 일어나고, 벼슬도 할 수 없게 되어 무한한 괴로움이 뒤따르는 세상으로 쏜살같이 빠져들고 만다.”

 

, 이 작품에서 3중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1) 밤의 어두움과 달빛의 환함, (2) 보는 눈과 보지 못하는 눈, (2) 마음의 깨달음과 혼미한 마음이 그것이다. 맹인이었던 법사가 눈을 뜨면서 오히려 물욕에 눈을 뜨는 반면, 초심을 잃고 방황하던 파계승은 맹인이 되면서 오히려 깨달음을 얻는다는 반전은 문학적 아이러니를 내포한다.

 

 

<명암>의 부산 공연에서는 이시이 바쿠가 파계승 역을 맡았고, 피리법사는 마츠우라 다비토(松浦旅人, 1901-1927)가 연기했다. 마츠우라 다비토는 오사카 출신의 무용수로 <도쿄 오페라좌> 시기(1918-1921)에 이시이 바쿠를 처음 만나 인연을 맺었다.

 

이시이 바쿠가 아사쿠사 오페라의 오락성 무용공연을 떠나 예술무용을 지향하면서 1920-21년 일본 지방 공연을 단행했을 때 마츠우라 다비토는 이시이 바쿠 무용단의 일원으로 동행했다.

 

이시이 바쿠가 유럽과 미주 순회공연(1922-1925)을 했던 기간에 마츠우라 다비토는 간사이로 돌아가 독자적으로 활동했으나, 이시이 바쿠가 귀국하자 다시 합류해 1926년의 만주-조선 순회공연에 동행했다.

 

조선 순회공연에서 마츠우라 다비토는 경성(1926321-23)과 인천(324), 대구(326)와 부산(328-29)에서 무용극 <명암>과 아동무용 <오늘밤은(今夜)>을 발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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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이 바쿠는 1926328일 부산 <국제관>에서 가졌던 공연에서 16번째 작품으로 <산을 오르다(, 1925)>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듀엣 작품이었고 부산공연에서는 이시이 바쿠와 이시이 코나미가 출연했다.

 

<이시이바쿠 팜플렛 제1>의 설명에 따르면 <산을 오르다>1925년 무사시사카이(武蔵境)의 이시이바쿠 무용연구소 시절에 창작된 작품이며, “극적 무용과 순무용의 중간 형태(劇的舞踊純舞踊との中間にあるもの)”라고 분류되어 있다.

 

 

이시이 바쿠의 극적무용이란 반드시 (과장이 섞인) 드라마틱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라든가 줄거리가 있는 무용작품을 가리키고, ‘순무용이란 무용시를 가리킨다. ‘무용시라는 용어는 이시이 바쿠가 함께 협력했던 야마다 코사쿠가 만든 말이었다. 두 사람은 1916년부터 1918년까지 협력해서 무용시를 안무했으나, 야마다 코사쿠는 1918년 월 뉴욕으로 떠나면서 무용 활동을 중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야마다 코사쿠가 미국으로 떠난 후 이시이 바쿠는 <도쿄가극좌><도쿄오페라좌>를 차례로 설립해 이른바 <아사쿠사 오페라>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가극단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기고 오락무용의 경향이 짙어지자, 이시이 바쿠는 <도쿄오페라좌>를 해단하고 예술무용으로서의 무용시창작을 계속했다.

 

이어 이시이 바쿠는 유럽과 미국 순회공연(1922-1925)을 통해 자신의 신무용이 유럽에서도 환영을 받는 등 보편성을 가진 것을 확인하고, 귀국한 후에는 무사시사카이(1925)와 지유가오카(1929)에 무용연구소를 개설해 창작과 제자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시기에 이시이 바쿠는 야마다 코사쿠와 공유했던 무용시라는 용어를 접고, 자신이 만든 용어인 순무용으로 대체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시이바쿠 팜플렛 제1(19277)>에서 이시이 바쿠는 자신의 순무용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시적 감흥이 인간의 머릿속에 생겨났을 때, 그것을 말이나 글자의 힘을 빌려서 표현하면 시가 되고, 색채나 선의 힘을 빌려서 표현하면 그림이 되고, 소리를 통해서 나타낸 경우에는 음악이 된다. 그리고 이 감흥을 전적으로 신체 운동의 힘으로 표현된 것, 그것이 즉 진정한 무용이다.”

 

이시이 바쿠의 순무용은 용어는 다르지만 내용은 야마다 코사쿠의 무용시와 다르지 않다. 더구나 19307월에 발행된 <이시이 바쿠 팜플렛 제4>에는 순무용이라는 말이 사라지고 무용시라는 말이 다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시이 바쿠는 순무용이라는 말보다 무용시라는 말을 계속 사용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시이 바쿠가 <산을 오르다>극적무용과 순무용의 중간형태라고 분류한 것은 남녀 두 사람이 함께 등산하는 이야기를 표현하되 산을 오르는 과정에서 느끼는 다양한 서정적 감성 표현을 강조했기 때문일 것이다.

 

 

<산을 오르다>는 에드바르 그리그(Edvard Hagerup Grieg, 1843-1907)의 악곡을 배경음악으로 사용했지만, 이시이 바쿠는 그것이 그리그의 어떤 곡인지 명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무용작품이 <솔베이지의 노래(1924)> 직후에 창작되었다는 점, 그리고 아마도 두 작품 모두에 그리그의 <페르 퀸트(1875)> 삽입곡을 사용했을 것임을 고려하면, <산을 오르다>의 음악은 그리그의 <산왕의 동굴(In the Hall of Mountain King)>일 것임이 거의 확실하다.

 

 

이 음악은 입센의 희곡 <페르 퀸트(1867)>2막에서 페르가 잉그리드를 납치하려고 산속을 헤매는 장면을 위해 작곡 되었는데, 이시이 바쿠는 이를 남녀가 등산하는 장면으로 변형시켰다.

 

<산왕의 동굴>은 원래 오케스트라 음악으로 작곡되었지만 피아노로 자주 연주되어 관객들에게 매우 친숙한 곡이다. 또 악곡의 길이도 약 240초 정도여서 무용시작품 <산을 오르다>에도 적절했을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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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이 바쿠의 부산공연 1부의 다섯 번째 발표 작품은 어린이무용(童踊) <개구장이(わんぱく小僧완파쿠고조, 1926)>였다.

 

이시이 무용단이 19263월에 가졌던 만주와 조선 순회공연의 레퍼토리 중에는 동용(童踊), 즉 어린이 무용이라고 분류된 작품이 2개 포함되어 있었다. 부산에서 공연된 <개구쟁이>와 경성 공연에서 발표된 <오늘밤은(今晩)>이었다. <개구장이>는 이시이 에이코(石井榮子, 1911-1936), <오늘밤은>마츠우라 다비토(松浦旅人, 1901-1927)가 공연했다.

 

 

이시이 바쿠가 어린이 무용에 관심을 갖고 창작하게 된 것은 두 가지 자극이 있었다. 하나는 야마다 코사쿠(山田耕莋)였다. 1914년 독일유학에서 돌아은 야마다 코사쿠는 한동안 이와사키 코야타(岩崎小弥太)의 후원으로 도쿄 필하모닉 교향악단을 지휘하며 활발하게 활동했으나 19155월 후원이 끊기고, 그해 9월에 결혼했던 나가이 이쿠코(永井郁子)와의 관계가 파국으로 끝나면서 시련의 시기를 맞았다.

 

이 시기에 야마다 코사쿠는 음악일기를 쓰면서 창작을 계속했고, 이시이 바쿠와 협력해 무용시 작품을 안무했다. 또 야마다 코사쿠는 이 시기에 함께 기거하던 누님의 두 자녀, 즉 자기 조카와 조카딸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19167월에 어린이를 소재로 한 피아노 소품 10곡을 집중 작곡해 <아이들과 삼촌(子供とおったん, 1917)>라는 피아노곡집으로 출판했다.

 

191611월에는 무라카미 키쿠오(村上菊尾, 후에 河合磯代카와이 이소시로, 1893-1982)와 결혼, 19174월에 장녀 미사(美沙)가 탄생하면서 어린이에 대한 야마다 코사쿠의 애정과 관심은 더욱 높아졌고, 그의 작품 중에 어린이를 소재로 하거나 어린이를 위한 음악이 많아졌다. 이 시기에 야마다 코사쿠와 함께 작업했던 이시이 바쿠는 그의 어린이 곡으로 어린이 무용(童踊)을 안무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린이에 대한 이시이 바쿠의 관심을 제고시킨 또 한 사람은 교육가 데즈카 기시에이(手塚岸衛, 1880-1936)였다. 192212월 이시이 바쿠는 유럽으로 가는 여객선 키타노마루(北野丸) 안에서 일본 자유교육의 창시자로 꼽히는 데즈카 기시에이를 만났다. 선실을 마주한 두 사람은 40일간의 항해 기간 동안 매일 얼굴을 맞대고 몇 시간씩 담론을 나누면서 자유교육에 협력하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데즈카 기시에이는 이시이 바쿠의 베를린 체류 기간에 그를 찾아오기도 했다.

 

1924년 이시이 바쿠가 도쿄에 돌아오자 데즈카 기시에이는 무사시사카이의 무용연구소로 찾아와 두 사람이 선상에서 토론한 이론의 실천을 위해 자신은 초등학교를, 이시이 바쿠는 그에 이웃해서 무용 연구소를 세우자고 제안했다. 두 사람이 선상 약속을 실천하기 위해 학교와 무용연구소를 나란히 설립한 곳이 바로 오늘날의 지유가오카(自由)였다.

 

데즈카 기시에이와 협력하면서 이시이 바쿠는 학생들의 건강을 위한 무용체조에 관심을 가졌고, 결국 전국의 소학교(=초등학교)에 무용체조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최승희는 때로 이시이 바쿠의 보조강사로서 전국에서 모여든 무용체조 교사들을 교육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1926년 만주와 조선공연을 가졌을 때도 이시이 바쿠는 15개 내외의 레퍼토리 중에 2개의 아동무용을 포함시켰다. 경성 공연에서는 야마다 코사쿠의 음악을 배경으로 한 어린이 무용 <오늘밤은>을 발표했고, 부산 공연에서는 무음악 어린이 무용 <개구장이>를 발표했다.

 

<오늘밤은>을 공연한 마츠우라 다비토는 이시이 바쿠가 1920<도쿄오페라좌>를 창립, 운영했을 때 입단한 오사카 출신의 남성 무용수로, 이시이무용단의 1920-21년 일본 지방 공연과 1926년의 만주-조선 순회공연에 동행했다.

 

부산공연에서 <개구장이>는 이시이 바쿠의 막내 여동생 이시이 에이코가 공연했는데, 당시 최승희는 이시이 에이코의 무대 공연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최승희와 이시이 에이코는 둘 다 1911년생으로 동갑이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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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이 바쿠는 그의 <팜플렛 제1>에서 <갇힌 사람>의 악상이 나폴레옹군이 모스크바 전투에서 패배한 것에서 떠오른 것이지만 정작 무용작품의 핵심은 나폴레옹이 아니라, 인간... 외로운 인간... 수탈받고... 자유를 잃어버린... 삶을 표현한 것이라고 서술했다.

 

인간의 속박과 자유에 대한 실존적 모습을 표현한 <갇힌 사람>은 경성공회당에서 이시이 바쿠의 공연을 관람했던 최승희에게도 깊은 감명을 준 작품 중의 하나였다. 그는 <나의 자서전(1936:)>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용을 천하고 낮은 것으로만 생각하던 나는, 오빠의 말도 있었지만 나 자신이 열심히 무대를 바라보던 중에 내 모든 것이 강력한 매력에 이끌려 무대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 물 흐르는 듯 아름답게 그려지는 육체의 선의 율동과 즐거운 꿈과 같은 멜로디의 울림에 나는 술 취한 사람처럼 황홀한 세계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첫눈에 현혹되었던 것보다 더욱 강한 것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시이 선생님의 유명한 작품 <갇힌 사람>이나 <멜랑콜리>, <솔베지이의 노래>와 같은 무용에 흐르는 힘찬 정신이 내 작은 가슴 속에 꿈틀거리던 영혼을 불러일으키면서 끝없는 공감을 느끼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최승희가 잡지 <삼천리(19361월호, 108)에 기고한 나의 무용 10년기라는 글에는 <갇힌 사람>을 보면서 느꼈던 감상을 다음과 같이 더욱 생생하게 서술했다. (이 글은 <나의 자서전(1937:37)에도 전재되어 있다.)

 

석정막(石井漠=이시이 바쿠) 무용회의 밤! 이 밤은 나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인상 깊은 밤이었다. 동라(銅鑼)의 소리가 나자 불이 꺼지고 젤라틴을을 통하여 코발트빛과 그린의 빛이 교차하는 가운데 무슨 곡조인지 장중한 피아노의 멜로디가 시작되면서 석정막씨의 독무 <수인>이 시작된다. 쇠사슬에 얽히어 무거운 걸음으로 무대를 밟는 그의 한 발자국 두 발자욱!

 

 

! 나는 그때 저것은 춤이 아니라 무엇을 표현하는 것이로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나는 여태껏 춤이란 기쁘고 즐거운 때만 추는 것이라고 믿었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의 무거운 괴로운 것을 표현하면서 있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 그는 그 굵은 쇠사슬을 끊고 하늘을 우러러 고개를 들고 두 팔을 들어 환희를 표현하면서 무대에 거꾸러지고 만다. 다시금 동라는 울리면서 스포트 광선은 꺼지며 장내의 전기는 켜진다.”

 

최승희가 이시이 바쿠의 <갇힌 사람>을 처음 관람하면서 느꼈던 충격은 유아사 가츠에()<성난파도의 외침(怒濤)>에도 서술되어 있다. <성난파도의 외침>은 최승희와 안막의 친구인 유아사 가츠에가 최승희의 반생을 소설형식으로 서술한 전기이다.

 

“‘가슴이 마치 전율을 하듯 벅차오르면서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어요. 그래서 숨을 멈추고 두 손으로 가슴을 끌어안고 덜덜 떨리는 무릎을 필사적으로 꼬면서 그 충동을 억제할 정도였지요. ... 그 때까지 무용이라고 하면 기생의 요염한 춤이나 일본인 무희들이 박람회에서 선보이는 손동작을 중시하는 춤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

 

 

그런데 이시이의 무용을 통해서 그런 기존의 개념이 깨어져 버렸다. <붙잡힌 사람들(=갇힌 사람)... 자유를 빼앗긴 사람들이 자유를 빼앗은 사람에 대한 격렬한 분노와 번민을 상징적으로 연출한 무용인데, 최승희는 15세의 나이에 그 무용의 내용에서 가슴이 벅차오르는 전율과 무릎이 떨리는 감동을 받을 정도의 감성을 이미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갇힌 사람>을 처음 관람하면서 최승희가 받은 충격은 대단했던 것으로 묘사되었다. “가슴이 전율하듯 벅차오르고, 고함을 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고, 이 충동을 억제하기 위해 두 손으로 가슴을 끌어안고 덜덜 떨리는 무릎을 필사적으로 꼬아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충동과 감격은 가라앉지 않았고, 오히려 증폭되어서 결국 그로 하여금 이시이 바쿠를 따라 무용가의 길을 걷게 만들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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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갇힌 사람(1922)>은 그 안무자 이시이 바쿠가 직접 공연한 모습이 지금까지 전해지는 유일한 작품이다. 그가 공연한 이 작품의 영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시이 바쿠와 이시이 코나미가 베를린에 도착한 것은 19221월말이었고, 10월말까지 그곳을 중심으로 유럽 순회공연을 단행했다. <이시이바쿠 팜플렛 제1(1927)><갇힌 사람>이 베를린에 도착하자마자 완성되었고, 424일의 유럽 제1회 공연에서 발표되었으며, “작년 가을 일본에서도 개봉된 우파(Ufa) 영화사의 <미와 힘의 길> 무용편에 추가되었다고 서술했다.

 

 

유럽 각 도시에서 공연되면서 호평을 받은 이 작품은 마리 비그만(Mary Wigman)의 권유로 다큐멘터리 영화에 삽입된 것인데, 이시이 바쿠는 영화 제목을 <미와 힘의 길>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힘과 미의 길(Wege zu Kraft und Schönheit)>이다. <이시이바쿠 팜플렛 1>의 출판이 1927년이므로, 이 영화의 일본 개봉은 1926년 가을이었던 것인데, 독일 개봉이 1925316일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당시로서는 비교적 신속하게 일본 개봉이 이뤄진 셈이다.

 

빌헬름 프라거(Wilhelm Prager) 감독, 니콜라스 카우프만(Nicholas Kaufmann) 각본으로 제작된 이 다큐멘터리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인체문화(Körperkultur) 진작을 위한 홍보의 일환으로 제작되었는데, 주로 인체의 심미성과 역동성을 보여주는 다양한 영상을 편집해 완성되었다. 러닝타임 104분인 이 다큐멘터리는 총6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무용편은 제4부였다.

 

이 다큐멘터리의 1부는 고대 그리스에서 인체가 찬양되는 모습을 담은 영상들이 포함되었고, 그러한 모습이 어떻게 현재(=1920년대 당시)에 재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2부에서는 인체의 힘과 미를 유지하기 위한 체육활동과 위생관리에 대한 내용을 담았고, 3부에서는 음악적 리듬에 맞춘 체육활동의 예시 장면들을 포함시켰다. 4부는 무용편, 5부는 스포츠편이었고, 6부는 휴양과 공기, 태양과 물 등의 인체 건강과 미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조건을 서술했다.

 

 

4부 무용편은 다시 6개의 소부분으로 나뉘어 16편의 무용작품들이 소개되었다. (1) 6개 민속무용(흑인, 하와이, 일본, 버마, 바이에른, 스페인)이 소개됐고, (2) 라반 무용학파(Laban Schule fur Tanze)의 무용극 <생생한 환상(das lebende Idol)>과 여성 독무 <난초(die Orchidee)>가 포함되었다. (3) 니디 임페코벤(Niddy Impekoven)<꽃의 삶(Das Lebens der Blume)><차주전자(Teewarmer)가 상연되었다.

 

(4) 일본의 이시이 바쿠의 현대무용 독무 <갇힌 사람>과 스톡홀롬 출신의 제니 하셀키스트(Jenny Hasselquist)의 독무 <흰장미>가 공연되었고, (5) 발레 루소의 개인 연습장면과 무용극 <실비아(Sylvia)> 중 남녀 듀엣 장면, 그리고 여성 독무 장면이 포함되었다. (6) 마지막으로 마리 비그만 무용학파(Mary Wigman Schule fur Tanze)의 무용단이 <엑소더스>의 마지막 장면을 공연하는 모습이 길게 이어지면서 무용편은 마무리되었다.

 

이시이 바쿠의 <갇힌 사람> 영상은 <힘과 미의 길>에 남은 것이 유일하다. 일본에서는 이시이 바쿠의 무용작품이 제대로 촬영되지 않았던 데다가, 설사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촬영한 것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2차대전 중의 미군 폭격으로 거의 다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이 영상에 포함된 <갇힌 사람>은 러닝타임이 약 218초 정도의 짧은 작품이었지만, 이미 독창적 스토리라인과 정감이 충분히 표현된 무용시의 형식으로 안무된 것임에 틀림없다. 이시이 바쿠의 <갇힌 사람> 공연 모습은 매우 생생하다. 이는 무용수의 움직임이 무대 전면에 꽉 차도록 거리와 각도를 조정한 카메라 촬영술 덕분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5부의 스포츠 부문에는 올림픽 경기를 포함해 유럽 각지에서 열린 스포츠 행사들의 영상들이 편집되었는데, 그중에는 1912(스톡홀름), 1920(안트베르펜), 1924(파리) 올림픽 영상들이 많이 발굴되어 편집되었고, 권투선수 잭 뎀시(Jack Dempsey), 야구선수 베이브 루스(Babe Ruth), 체조선수 베스 멘센디크(Bess Mensendieck), 수영선수 조니 와이스뮐러(Johnny Weissmüller) 등 유럽 선수들 이외의 미국선수들의 경기 모습도 삽입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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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갇힌 사람(1922)>의 배경음악은 라흐마니노프의 곡()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이 공연되는 발표회의 프로그램마다 그렇게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라흐마니노프(Серге́й Васи́льевич Рахма́нинов, 1873-1943)가 작곡한 숱한 음악 중에서 어떤 악곡이 사용되었는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이시이 바쿠의 다른 작품들의 경우에는 배경음악의 작곡가 이름을 밝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특히 그의 초기 작품들은 대개 무용작품의 제목이 음악의 제목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시이 바쿠가 대체로 음악을 먼저 선곡하고 그에 따라 무용동작을 안무했기 때문이다.

 

부산공연에서 상연된 무용시 작품 <멜랑콜리(1916)>는 에드워드 그리크(Edvard Grieg, 1843-1907)의 피아노 독주곡 <멜랑콜리(Melankoli)>을 배경음악으로 사용했고, <일기의 한쪽(日記一頁)>은 야마다 코사쿠의 피아노 소품 <일기의 한쪽>이 배경음악이었다. 이 작품은 후일 그 내용을 반영하기 위해 <법열(法悅)>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었는데, 초연시의 제목은 야마다 코사쿠의 피아노곡 <일기의 한쪽>과 제목이 같았다.

 

 

무용곡의 제목이 항상 음악의 제목과 같지 않은 경우도 있었지만, 그럴 경우에도 적어도 원제목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축약된 이름을 제목으로 삼곤 했다. 예컨대 <꿈꾸다>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Georg Strauss, 1864-1949) 작품번호 29번의 첫 번째 곡인 <황혼의 꿈(Traum durch Dämmerung(1895)>을 배경음악으로 삼았는데, 음악곡 제목에 나오는 꿈(Traum)이라는 말이 무용곡 제목 <꿈꾸다(みる유메미루)>에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갇힌 사람>은 달랐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곡 중에는 갇힌 사람에 대한 곡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시이 바쿠의 무용을 관람했던 관객들 중에는 이 무용작품의 배경음악이 라흐마니노프의 <갇힌 사람>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이시이 바쿠는 19277월에 발행한 <이시이바쿠 팜플렛 제1>에서 이 작품을 소개하면서 이 작품의 배경음악 제목이 <갇힌 사람>이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있으나, 원곡 제목은 라흐마니노프의 <프렐류드>”라고 밝혀 놓았다.

 

그러나 이렇게 음악의 원제목을 밝혀놓았더라도 이 악곡이 어떤 것이었는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곡 중에는 <프렐류드>라는 제목이 붙은 것이 24개나 되기 때문이다. 작품번호 3(Op.3)의 두 번째 곡은 흔히 <올림다단조 프렐류드(Prelude in C-sharp minor)라고 불리고, 작품번호 23(Op.23)에 포함된 10개의 피아노곡과 그리고 작품번호 32(Op.32)에 포함된 13개의 피아노곡에 모두 <프렐류드>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라흐마니노프가 작곡한 24개의 피아노곡 <프렐류드>는 모두 조(調)가 다르게 작곡되었기 때문에 서로 구별될 수는 있다.

 

라흐마니노프의 24곡의 <프렐류드> 피아노곡 중에서 일반에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은 작품번호 3번의 두 번째 곡(Op.3, No.2)<올림다단조 프렐류드(1892)>와 작품번호 23번 작품집의 다섯 번째 곡(Op.23, No.5,)<사단조 프렐류드(Prelude in G minor, 1901)이다. <올림다단조 프렐류드(1892)>는 라흐마니노프가 모스크바 음악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19세 때 작곡된 최초의 피아노 전주곡으로, 5개 작품(비가, 전주곡, 멜로디, 폴리키넬리, 세레나드)을 한데 모아서 흔히 <환상적 소품집(Morceaux de fantaisie)>이라고 부르는 모음집의 2번째곡이다.

 

 

<사단조 프렐류드(1901)>1903년에 작곡된 9개의 다른 피아노 전주곡들과 함께 묶여서 작품번호 23번의 모음집에 포함되어 발표되었다. 이 작품의 초연은 1903210일 모스크바에서 열렸는데, 이 연주회에서는 작품번호 23번의 10곡 중에서 전주곡 1, 2번과 함께 5번곡인 <올림다단조 전주곡>이 연주되었다.

 

<사단조 프렐류드>는 시작이 행진곡풍으로 빠른 반면, <올림다단조 프렐류드>의 시작은 장중하고 느린 곡이기 때문에, <갇힌 사람>의 배경음악은 아마도 후자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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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갇힌 사람>의 창작시기에는 이견이 있다. 이 작품이 1923년에 창작되었다고 서술한 문헌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 학술잡지 <무용학(199013)>에 실린 근대무용의 출발라는 글에서 카타오카 야스코(片岡康子)갇힌 사람의 창작연대를 1923년으로 명시했고, 홋카이도대학 문학박사 논문의 저자 방 타오(龐涛)<갇힌 사람>의 창작연대를 1923년이라고 서술했다.

 

그러나 <이시이바쿠 팜플렛 제1(19277월 발행)>에서 이시이 바쿠는 <갇힌 사람>베를린에 도착하자마자 안무해 유럽 제1회 공연 때부터 각지에서 발표했다고 밝혔다. 이시이 바쿠는 1922114일 마르세이유에 도착하여 파리를 경유해 베를린에 도착했으므로 <갇힌 사람>의 창작 시기는 빠르면 19221월말, 늦어도 19222월이라고 할 수 있다.

 

 

미도리카와 준(綠川潤)<무용가 이시이바쿠의 생애(2006)>에서 이시이 바쿠의 뉴욕 공연을 서술하면서 유럽에서 호평을 받은 <명암>, <갇힌 사람>, <젊은 판과 님프> 등을 (뉴욕에서) 공연했다고 서술했다. <갇힌 사람>은 이미 유럽에서 공연되었다는 뜻이다.

 

<갇힌 사람>은 독일 다큐멘터리 영화 <힘과 미의 길(Wege zu Kraft und Schönheit, 1925)>에도 삽입되었다. 이 영화의 개봉연도는 1925년이지만, 이시이 바쿠가 촬영에 응한 것은 베를린에 체재기간이었다. 이시이 바쿠가 베를린에 체재했던 것은 19221월말부터 10월말까지이므로, <갇힌 사람>의 창작연도는 1922년였음에 틀림없다.

 

이시이 바쿠는 그의 <팜플렛 제1>에서 <갇힌 사람>의 악상이 나폴레옹군이 모스크바 전투에서 패배한 것에서 떠오른 것이지만 정작 무용작품의 핵심은 나폴레옹이 아니라, 인간... 외로운 인간... 수탈받고... 자유를 잃어버린... 삶을 표현한 것이라고 서술했다.

 

 

이같은 창작 의도는 관객들에게 비교적 잘 전달되어온 것으로 보인다. 방 타오는 그의 문학박사 학위논문 <신중국영화, 신중국문예에 대한 만영(満映)의 영향(2014:141)>에서 <갇힌 사람>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그의 작품 <갇힌 사람>을 보자. 이 작품에서, 이시이 바쿠는 무대 안쪽에서 양손이 뒤로 묶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는 무릎을 깊이 꺾인 채 몸부림치며 비척비척 전진한다. 어깨를 세게 움직여도, 땅바닥에서 몇 번 뒹굴어도, 묶인 양손은 끈에서 빠져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고 같은 동작을 반복하면서, 어깨를 강하게 움직이며 발버둥치고 속박당한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마침내 끈의 속박에서 벗어났지만 그 끈을 손에 쥔 이시이 바쿠는 힘껏 두 손을 하늘로 뻗어 자신의 운명을 하늘에 맡기는 듯한 자세로 땅에 쓰러지고 만다. 이 작품은 끈에 묶인 절망과 몸부림치며 자유로워지려는 강렬한 감정을 육체의 움직임을 통해 힘차게 표현하고 있다.”

 

 

카타오카 야스코도 맨몸에 맨발, 허리에 천만 감고, 두 손을 뒷짐지고 묶인 채, 쇠사슬을 연상시키는 밧줄이 바닥까지 늘어져 있다. 인간의 잃어버린 자유,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표현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작품이며, “이시이 바쿠가 이상으로 삼았던 '육체의 움직임에 의한 시'로서 새로운 순수무용의 세계가 창조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카타오카 야스코는 이시이 바쿠의 <갇힌 사람>을 마리 비그만의 <마녀의 춤(Witch Dance, 1926)과 마사 그라함의 <비통(Lamentation, 1930)>과 비교하면서 현대무용의 특징적 공통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즉 카타오카 야스코는 “비그만의 <마녀의 춤>에서는 바닥에 걸터앉아 무릎을 껴안은 자세를 취했고, 그라함의 <비통>에서도 늘어진 통모양의 천에 몸을 감싸고 받침대 위에 걸터앉은 채 춤을 추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 세 작품은 종래의 춤에서처럼 다리를 들어 올리거나 회전을 하는 기술을 이용하지 않고, 가능한 한 쓸데없는 동작을 버리고, 자기의 의도를 표현하기 위해 독자적인 표현 방법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내면의 세계를 몸의 동작으로 표현하면서도, 동작을 간소화함으로써 작품의 깊이를 심화하는 현대무용의 특징이라고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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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328일 부산의 극장 <국제관>에서 열렸던 이시이바쿠무용단의 부산 제1회공연에서 발표된 4번째 작품은 <갇힌 사람(われたる슈와레타루히토, 1922, 베를린)>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일본어 제목도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다른 형태로 전해졌다.

 

최초의 제목은 <슈와레타루히토(はれたる)>였다. 이시이 바쿠의 첫 경성공연의 레퍼토리를 보도한 <조선신문(1926318)><경성일보(1926320)><슈와레타루히토(はれたる)>라고 보도했고, 최승희의 <나의 자서전(1936:39)>에서도 그와 똑같이 표기되었다.

 

 

그러나 다카시마 유사부로(高嶋雄三郎)의 평전 <최승희(1981(1959):18):>에서는 <슈와레타히토(われた)>라고 표기했고, 미도리카와 준(綠川潤)의 평전 <무용가 이시이바쿠의 생애(2006:47-48)>에서도 그와 똑같이 표기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표기가 또 달라졌다. 카타오카 야스코(片岡康子)<이시이바쿠의 무용시와 전개(<무용학>, 199949)>에서는 <슈와레타루히토(われたる)>로 표기됐고, 아키타(秋田)고교동창생 시바야마 요시타카(柴山芳隆)의 글 <창작무용의 대천재 이시이 바쿠(2014:233)>에서도 <슈와레타루히토(われたる)>로 서술됐다. <일본양무사연표(2003:9)>에도 <슈와레타루히토(われたる)>로 정리된 것을 보면 이것이 최종판 제목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작품의 제목은 발표 당시 <슈와레타루히토(はれたる)>였으나 <슈와레타히토(われた)>를 거쳐 <슈와레타루히토(われたる)>로 정착된 셈이다. 고어 일본어와 한국어에 정통한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는 고어 일본어가 현대화되면서 생긴 변화라고 한다.

 

 

그런데 이 작품의 제목은 한국어 번역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최승일 편저의 <최승희의 나의 자서전(1937:37)>에 실린 글 <출발전야>에서는 해당 작품을 <수인(囚人)>이라고 불렀다. 이를 따라 강이향(1993:40, 51-52)과 정수웅(2004:14, 173)과 강준식(2012:15)<수인(囚人)>으로 번역했고, 김경애, 김채현 이종호가 펴낸 <우리무용 100(2001: 55-56)>과 고정일의 소설 <매혹된 혼(2011: 76)>에서도 <수인>으로 서술했다.

 

그러나 다른 번역도 있다. 정병호(1995:28)<사로잡힌 사람>, 김찬정(2003:32-33)<붙잡힌 사람들>이라고 번역했고, 조택원(2015:22-23)<사로잡힌 영혼>이라고 번역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에서 통용되는 이 작품의 이름은 <수인(囚人)>이 가장 보편적이기는 하지만 <사로잡힌 사람>, <붙잡힌 사람들>, <사로잡힌 영혼>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일본어 제목에 차이가 난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진 표기법을 반영하거나, 현대문법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수정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어 제목들은 대체적인 뜻은 비슷하더라도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시이 바쿠가 처음 이 작품을 안무할 때에는 나폴레옹이 헬레나 섬에 갇힌 모습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따라서 섬에 갇힌 나폴레옹을 묘사하기 위해 사로잡히다붙잡히다는 말도 사용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은 ‘(섬에) 갇히다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이시이 바쿠가 제목을 지으면서 가둘 수()’자를 사용한 것도 바로 그런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또한 조택원이 이 제목을 사로잡힌 영혼이라고 번역한 것도 일리가 있다. 비록 창작의 계기는 헬레나 섬에 갇힌 나폴레옹이었지만, 예술로서의 무용작품은 구체적 소재 상태를 벗어나 비유적인 뜻을 가지고 확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리적으로 갇힌 나폴레옹의 처지를 묘사한 작품에 머무르지 않고, 심리적, 정신적 곤경에 갇힌 개인을 묘사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로잡힌 사람은 곧 사로잡힌 영혼으로 승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창작자의 의도를 존중하고, 한자어보다는 고유어 번역이 바람직하다면, 이시이 바쿠의 <슈와레타루히토(われたる)><갇힌 사람>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이시이 바쿠의 <슈와레타루히토><갇힌 사람>으로 번역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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