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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이무용단의 대구 공연은 1926326일 저녁7시였다. 공연 준비는 전날 이미 끝마쳤으므로 이날 오후까지는 따로 할 일이 없었다. 이들은 공연 시간까지 어떻게 시간을 보냈을까?

 

1928616일자 <매일신보>에는 이시이무용단이 일본 큐슈(九州)지역 순회공연 중에 배를 타고 관광하러 갔다가 조난당했던 소식이 보도되었다. 최승희에 뒤이어 이시이무용단에 가입했던 조택원의 기고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지루한 여행에 곤한 몸을 2-3일 쉬는 동안에 일행 15명은 무참히 죽을 뻔 하였습니다. ... 발동선을 타고 나고야(名護屋)의 고성(古城)을 구경 차로 부는 바람도 돌보지 않고 전진하다가 다카시마(高島)에서 약 1리쯤 되는 곳에서 발동선에 고장이 생겨 다시 고칠 희망이 없이 노한 물결에 쓸려 금방 전복될 듯 하기를 4시간이나 되었습니다. 남자는 혹 살 희망이 있었는지 몰랐겠으나 바쿠()선생 부인과 최승희 외 여자들은 어찌나 되었겠습니까? 모두 울며 토하여 그 광경은 참아보지 못하였습니다. ... 나도 아주 죽을 줄 알고 기도까지 하였었습니다.”

 

다행히 지나가던 어선의 도움으로 이시이무용단은 구조되었지만, 이 기사를 통해 우리는 이시이무용단이 순회공연 중에도 시간이 나는 대로 관광도 했었음을 알 수 있다.

1920년대 대구 동성정통-지금의 동성로

 

이시이무용단은 1926321일 아침7시에 경성에 도착했고, 그날 저녁부터 3일 연속 경성공회당에서 공연했다. 24일에는 인천공연을 했고 경인선 막차로 경성에 돌아왔을 때는 12시가 넘었다. 25일 아침 9시 경성역에서 최승희를 맞아 곧바로 대구로 출발했다. 4일 동안 강행군을 했던 셈이다. 다행히 25일과 26일 오후까지는 쉴 수 있었다.

 

이시이무용단이 대구 관광을 했다면 어디를 방문했을까? 1920년대 중반 대구의 명소로 꼽힌 곳은 골프장과 경마장, 화상대(花賞台)와 달성공원과 도수원(刀水園) 등이었다.

 

1백 년 전 대구에 골프장이 있었던 것이 뜻밖일 수 있겠지만, 당시 조선 원정 골프를 즐기는 부유한 일본인들이 많았고, 대구 골프장은 일본인들이 선호하던 프리미엄 골프장의 하나였다.

 

대구에 경마장이 생긴 것은 1924년 대구경마구락부가 창립되었을 때다. 1925년 봄에는 제1회 경마회가 개최되었고, 1929년에는 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조선의 6대 공인 경마장의 하나였다.

 

1920년대 대구 달성공원

 

이시이무용단이 골프나 경마를 즐겼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아마도 대구부가 직영하던 화상대 유원지나 대구신사가 있었던 달성공원, 혹은 시내의 정원 도수원을 방문했을 가능성이 높다.

 

화상대는 지금의 화원 유원지이다. 낙동강변 사문진에 자리 잡은 이 유원지는 꽃으로 유명했는데, 신라 경덕왕이 원래의 지명 설화현(舌火縣)’화원현(花園縣)’으로 바꾼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재위 중 아홉 차례나 이곳을 방문했다고 한다.

 

달성공원은 삼한시대의 토성 달불성 자리로 선조26(1596)까지 경상감영이 있던 곳이다. 1905년 공원으로 지정되었고 합병 직후 일본인들이 이곳에 대구 신사를 세웠다. <대구안내(1934)>에는 공원이 울창한 삼림에 둘러싸여 사계절의 조망이 아름답다고 기록되어 있다.

 

도수원은 행정(杏町=지금의 칠성동118번지)에 자리 잡았던 유원지이다. 조선시대에는 대구향교가 운영하던 영귀원이었고, 후에 달성판관(=대구시장) 윤성원(尹成垣)의 저택이 되었는데, 1920년 일본인 기오노이에(靑乃家)가 이를 사들여 낮에는 공원, 밤에는 요정으로 꾸몄다.

 

1920년대 대구 도수원

 

19261119일자 <동아일보>는 도수원에 광활한 저수지에 정자가 있고 버드나무와 꽃 등이 울창하고 연목에 배가 십여 척 넘게 있으며 영귀정이 고색창연하게 서 있다고 서술했다. 도수원 입장료는 1전이었고, 배삯은 5전이었다.

 

최승희와 이시이 무용단이 반나절의 한가한 시간을 가졌다면 도수원을 방문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화원유원지는 대구역에서 서쪽으로 약 1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데다가 교통편도 적었고, 부영버스 요금이 편도 1인당 5전이었다. 달성공원은 대구역 서남쪽으로 약 2킬로미터 지점이어서 가깝지만, 대구역 동북쪽으로 1킬로미터 이내에 있었던 도수원이 가장 가까웠다.

 

최승희가 이시이무용단의 신입 단원으로 도수원에서 첫 소풍을 가졌다면, 4년 후 대구 출생의 민족시인 이상화는 193010월호 <별건곤>에 발표한 대구행진곡이라는 시 작품에서 달구성과 도수원을 빗대어 나라 잃은 설움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반 남아 무너진 달구성(達句城) 옛터에나

숲 그늘 우거진 도수원(刀水園) 놀이터에

오고가는 사람이 많기야 하여도

방천(防川)둑 고목(古木)처럼 여윈 이 얼마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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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325일 오후 3시경, 최승희는 대구에 도착했다. 경성에서 나서 자란 그녀가 다른 도시에 발을 디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당시 최승희의 나이는 16, 숙명여학교를 졸업한지 3일만이었고, 무용 입문 첫날이었다.

 

이후 40년 동안 최승희는 조선의 20여개 도시와 일본의 40여 도시,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 유럽과 남북미의 40개 이상의 도시에서 무용 공연을 했다. 1969년 사망할 때까지 세계 각지의 1백 개가 넘는 도시를 누볐지만 최승희의 생애 첫 방문지는 대구였다.

 

대구 방문 3일 전인 323일 최승희는 경성의 명문 여학교 숙명을 졸업했다. 최승희의 4학년 성적은 평점 90.5점으로 17회 졸업생 76명 중 8등이었다. 턱걸이로 90점을 넘긴 덕분에 9명의 우등졸업생 명단에 올랐는데, 그해 수석 졸업생은 평점 99.9점을 기록한 박경순이었다. 필명 박화성으로 이미 등단해 있었던 박경순의 졸업 성적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최승희가 숙명여학교 졸업직후 일본 유학을 출발했을 당시의 사진

 

명문 숙명여학교를 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최승희는 우울했다. 76명의 졸업생 중에서 진로가 막막한 유일한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날 저녁 오빠 최승일의 졸업 선물이 그녀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이시이 바쿠의 무용 공연을 관람한 것이다.

 

일본 근대무용의 선구자 이시이의 공연을 본 최승희는 그 자리에서 무용 입문을 결심했다. 공연 후 대기실로 찾아간 최승희는 이시이 바쿠로부터 입문 허락을 받았다. 다음날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냈고, 일본으로 건너가기 위한 도항증도 발급받았다.

 

번갯불에 콩 볶듯 도일 준비를 마친 최승희는 25일 아침 9시 경성역 2층 식당에서 가족과 이시이무용단이 모인 가운데 입단 계약을 맺었다. 3년간의 일본 무용 유학이 시작된 것이다.

 

경성역 플랫폼에서 벌어진 어머니와의 이별은 다음날 아침 <매일신보>에 보도될 정도로 요란했지만, 그녀의 슬픔은 이내 잦아들었다. 첫 기차여행의 흥분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앞날에 대한 기대와 불안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시이 바쿠는 자서전 <춤추는 바보>에서 기차가 용산역을 지날 무렵 최승희는 차창을 바라보며 학교에서 배운 창가를 부르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대구역에 도착하는 급행열차를 묘사한 그림엽서.

 

 

오전10시 경부선 2등칸에 올라 경성을 출발한 이시이 무용단은 오후 3시경 대구역에서 하차했다. 다음날인 26일 저녁 7시에 <대구극장>에서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시이무용단의 조선 순회공연 일정은 경성(321-23)과 인천(24), 대구(26)와 부산(27-28)으로 잡혀 있었다.

 

그날 이시이무용단의 대구 숙소가 어디였는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아마도 대구역과 대구극장에서 가까운 일본식 여관이었을 것이다. 경성에서도 역과 공회당의 중간 지점에 있는 일본식 하라카네(原金)여관에 묵었었다.

 

1923년 대구여관조합에서 발간한 안내책자에 따르면 당시 대구역 근처에는 11개의 여관이 밀집해 있었다. 덴야(天屋), 하나야(花屋), 카야케(栢家), 요시다(吉田), 타다야(唯屋), 다나카(田中), 츠타야(ツタ), 시라누이(不知火), 고야마(小山), 모리타(森田)여관 등이 그것이었다. 이중 타다야 여관이 최고급이었고 다른 여관들은 중소규모로 값이 저렴했다. 2등칸 기차로 여행하던 이시이 무용단으로서는 타다야 여관을 제외한 다른 여관 중에서 숙소를 선택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대구역

 

무용단원들은 숙소에 짐을 풀고 저녁식사를 마친 후, 다음날 공연을 위한 음향과 조명을 설치하기 위해 <대구극장>으로 향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할 일이 있었겠지만, 입단 첫날인 최승희는 어쩔 줄 모르고 따라만 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무용 수업에는 엄격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자상했다는 이시이 바쿠가 최승희에게도 무언가 역할을 맡겼을 것임에 틀림없다.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을 때 최승희는 그날 이른 아침 체부동 집을 나서 대구의 여관방에 눕기까지를 곰곰 되새겨 보았을 것이다. 돈이 없어 수학여행을 가지 못했던 그녀로서는 그날 밤이야말로 집을 떠나 여관 잠을 자게 된 첫날이었다. 이후 최승희는 숱한 여관과 호텔 잠을 자야 했지만, 아마도 대구에서의 그 첫 밤을 평생 잊지 못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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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강변의 <왈츠와 닥터만> 방문 이후 우리는 그 웹사이트에 게재된 <카카듀> 에세이를 텍스트로 한국의 커피사를 되짚기 시작했다. 경성 최초의 조선인 커피전문점이었다는 <카카듀>가 있던 곳을 찾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고, 노다객 이헌구의 경성 다방 성쇠기는 훌륭한 첫 번째 나침반이 되어 주었다.

 

 

<카카듀>에 대한 경성 다방 성쇠기의 실마리는 유용했기 때문에 우리는 리서치를 시작한 지 몇 달 만에 <카카듀>의 주소를 찾을 수 있었다. 자축의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인사동으로 몰려가 그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카카듀>는 아직도 대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다. 우리가 <카카듀>에 대해 조금씩 알아갈수록, 오히려 새로운 의문이 늘어났다.

 

영화에 미쳐 있었던 이경손 감독이 어째서 갑자기 끽다점을 개업하게 되었는지, 공동 경영했다는 하와이 출신의 묘령의미스 현은 누구였는지, <카카듀>에는 왜 간판을 달지 않았는지, 그리고 어째서 그리 급하게 폐업을 했고, 이경손과 미스 현이 경성에서 사라졌는지...

 

이같은 의문들에 대한 대답은 아직도 발굴되지 않았지만, 다행히 우리는 시간이 있었고, 서두르지 않고 <카카듀>에 대한 사실들을 하나씩 찾아 나가 보기로 했다.

 

 

우리가 경성 다방 성쇠기를 섭렵한 것은 아니다. <카카듀>를 소개한 첫 부분에 집중했고, 일부의 기록을 다른 문헌과 비교하면서 제대로 해석하려고 노력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경성 다방 성쇠기는 앞으로도 경성의 끽다점을 서술한 다른 글들과 함께 중요한 참고문헌으로 조사하게 될 것이다.

 

이번 리서치 경험을 통해서 경성 다방 성쇠기가 소중한 텍스트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읽고 해석할 때에 주의할 점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선 사실을 찾기 위해 필요한 육하(六何)가 갖춰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점이었다. ‘누가무엇을이 생략된 경우는 별로 없었지만, ‘언제어디서는 자주 누락되어 있곤 했다.

 

언제어디서가 뚜렷하지 않은 것은 비단 노다객 이헌구의 글뿐 아니라 80여 년 전의 글들에 공통된 특징인 것 같았다. 물론 그 글들이 논문이 아니라 에세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고, 그 공백을 메우는 것은 연구자들이 해야할 일이라는 점은 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글쓴이들의 기억과 회상이 항상 정확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짧은 리서치를 통해서도 저자들이 당연한 것처럼 서술한 사항이 반드시 사실에 부합되는 것이 아니었던 점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카카듀(1928)><후타미(1926)>의 개업시기에 대한 노다객 이헌구의 기록은 정확하지 않았고, 각각의 위치도 대략적으로만 서술되어 있었다. 다행히 우리는 이헌구의 기록을 가지고 <카카듀>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후타미>의 위치는 아직도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저자가 <카카듀><후타미>보다 더 이른 시기에 개업했던 <백림관>에 대해 몰랐거나 알았더라도 서술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가 <백림관> 이야기를 고의적으로 누락시킨 것은 아니겠지만, <후타미><카카듀>를 경성 다방의 원조라고 단정한 것은 확실히 성급한 주장이었다. 그 결과로 80년 후에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문헌들이 그 잘못된 정보로 감염되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계속할 <카카듀><백림관>에 대한 조사는 의심에 바탕을 두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에 대한 실마리를 남겨준 저자들에게 감사하면서도 그들이 말한 것을 전적으로 믿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의심이 악의적인 것이 아님은 분명히 밝혀둘 수 있다. 우리는 다만 사실을 알고 싶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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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다객 이헌구의 경성 다방 성쇠기다방문화의 개척자들이 공유한 다방 경험을 써내려간 주관적 문화사라면, 그 내용은 시대적, 지리적, 문화적 조건 속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우선, 다방문화의 개척자들은 대체로 1900년대 중반에서 1910년대 초반에 걸쳐 태어난 사람들이다. 이들은 1920년대 중반에야 청년기에 도달했으므로, 그 이전의 끽다점과 끽다문화를 경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들이 <손탁호텔>이나 정동의 다른 호텔에서 커피나 홍차를 마셔보지 못한 것은, 그때 그들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호텔>의 초기 끽다 서비스를 누려보지 못한 것도 그들이 아직 십대이거나 그보다 더 어린 청소년이었기 때문이다.

 

1914년 6월7일자 <매일신보>에는 탑골공원내에 개업한 <탑동 카페> 사진을 실었다. 이 카페는 커피와 차뿐 아니라 식사와 맥주도 제공했다.

 

그와 같은 이유로 더 이전의 끽다점들, <홍릉앞 끽다점(1889)>이나 <청향원(1900)>, <남대문역 끽다점(1909)>이나 <청향다원(1910)>, <탑다원(1914)> 등을 이들이 경험해 볼 수 없었고, 따라서 노다객 이헌구의 경성 다방 성쇠기에 포함될 수 없었다.

 

둘째, 초기 다방문화의 개척자들이 대체로 경성에 거주했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이들이 인천의 <대불호텔(1888)>이나 <스튜어드호텔(1888)>, 혹은 <꼬레호텔(1890)>을 경험하기 어려웠던 것은,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개업된 호텔들이기도 했지만, 설사 그 호텔들이 오래 유지되었거나 다른 끽다점들이 생겼더라도 이들이 인천까지 자주 여행할 용의는 없었을 것이다.

 

이들이 끽다문화를 향유한 것은 경성에서도 좁은 지역, <카카듀(1928)><멕시코(1929)><제비(1933)>가 있었던 종로와, <후타미><금강산><명치제과> 등이 있었던 충무로에 한정되어 있었다.

 

경성 다방 성쇠기는 또 하나의 지리적 배경을 안고 있었다. 도쿄였다. <청색지> 동인의 절반이 일본 유학을 경험했고, 해외문학파의 거의 전부가 일본 유학생 출신이었다. 그들이 유학했던 도시는 십중팔구 도쿄였다.

 

일본 최초의 끽다점으로 알려진 <카히사칸(可否茶館)>의 내부를 묘사한 스케치

이들은 도쿄 시절에 끽다경험을 습득한 이들이 근대적이고 선진적으로 보이는 그 문화습관을 이어나가려 한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도쿄에서 자신들이 즐기던 분위기의 끽다점을 선호했으리라는 것은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후타미>도쿄식 끽다점을 표방한 것도 그런 의도가 깔려 있었을 것이다.

 

셋째 경성 다방 성쇠사1920년대말과 1930년대 초의 도쿄와 경성이라는 시공이 연결되면서도 뒤틀리는 문화적 맥락을 반영할 수 밖에 없었다. 카페 문화와 끽다점 문화가 그것이다.

 

일본에서는 1910년대에 끽다점이 먼저 시작되고, 1920년대에 주류와 여급 서비스가 부가된 카페가 생겼다. 일본의 카페는 서양의 카페와 그 함의가 달랐다. 그것은 서양의 카페 개념에 알콜과 에로 서비스를 가미해 이뤄진 일본 독특의 문화였다.

 

그런데 경성에서는 1920년대 일본으로부터 카페 문화가 먼저 들어와 번성했고, 끽다점 문화는 1920년대 후반에 가서야 뒤늦게 도입되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도쿄와 경성의 두 도시에서 카페와 끽다점은 모두 넌센스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강조점은 달랐다. 카페는 에로()’라는 평가였고 끽다점은 그로(테스크)’라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경성의 끽다점 내부를 묘사한 박태원의 스케치

 

에로의 카페와 그로의 끽다점은 둘 다 사회적 용인 범위 안에 있었지만 끽다 문화를 직업없는 젊은이들의 비생산적인 소일거리로 비난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끽다객들은 끽다점을 시대적 고뇌를 털어놓고 창작의 계기를 마련하는 아지트로 활용하곤 했다. 노다객 이헌구가 경성 다방 성쇠기에서 전달하려고 했던 메시지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경성의 카페문화와 끽다점 문화의 생명은 그다지 길지 못했다. 이헌구의 경성 다방 성쇠기가 출판된 지 석달 후인 19387월 중일 전쟁이 발발하고 이것이 1941년의 태평양 전쟁으로까지 이어지면서 경성의 카페와 끽다점들은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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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다객 이헌구가 <청색지> 창간호에 기고한 경성 다방 성쇠기를 중심으로 1920년대와 그 이전의 끽다 관행과 끽다점에 대해 정리해 보았다. 이헌구의 글은 조선 근대 끽다객들이 향유하던 끽다 문화에 대해 귀중한 정보를 전해 준다. 그러나 이 글은 몇 가지 오해의 여지를 남기도 했고, 그 중 일부는 이글을 통해 바로 잡을 수 있었다.

 

노다객 이헌구가 서술하지 않은 중요한 사실은 조선인들의 끽다 관행과 끽다점 문화가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연원이 깊다는 것이다. 이헌구는 한국의 끽다문화가 1923년 진고개에 개업한 <후타미>1927년 관훈동에 문을 연 <카카듀>에서 시작되었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이번 조사 결과 <후타미>의 개업 시기는 1923년이 아니라 1926822일이었고, <카카듀>의 창업도 1927년이 아니라 19289월초였다. 또 노다객 이헌구는 <후타미>가 이른바 순끽다점이었다고 단정했지만 근거는 희박했다. <후타미>가 과자와 식사, 그리고 주류까지 판매했다는 광고문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왈츠와 닥터만>에서 마셨던 이 커피가 <카카듀>를 찾아나서는 출발점이었다.

 

과자점이나 식당, 주점에 병설된 끽다점은 <후타미> 이전에도 다수 존재했다. 과자점을 겸했던 <쇼카코오키나(1921)><다리야(1917)><후타미>보다 5-6년 전에 개업했고, 식사 제공을 했던 끽다점으로는 <탑동 카페(1914)><청향다원(1910)>, <남대문역 끽다점(1909)><청향원(1900)>, <홍릉앞 끽다점(1899)> 등이 존재했었다.

 

식사와 스낵 뿐 아니라 숙박과 함께 커피와 차를 제공한 호텔도 있었다. <조선호텔(1924)><손탁호텔(1902)>, <대불호텔(1888)>이 그것이다. <손탁호텔>과 동시대에 정동 인근에서 영업했던 임페이얼호텔(1903년 이전)과 팔레호텔(1901), 스테이션호텔(1901)과 서울호텔(1898)도 끽다 서비스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있고, <대불호텔>과 동시대의 <스튜어드호텔(1888)><꼬레호텔(1890)>에서도 서양인 고객들에게 커피와 차를 판매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본다면 조선의 끽다문화의 시작을 1923년의 <후타미>1927년의 <카카듀>로 규정한 노다객 이헌구는, ‘경성 다방의 역사에서 첫 40년을 생략해 버린 셈이다.

 

노다객 이헌구는 어째서 이 같은 실수를 한 것일까? 그 이유는 경성 다방 성쇠기의 첫 부분에 제시되어 있다. 그는 서울서 맨 처음 우리가 다점(茶店)이라고 드나든 곳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다. , 그는 경성 다방의 성쇠사()’를 서술한다고 했지만 그 역사는 우리들,’ 즉 이헌구와 그의 동료들이 경험했던 다방들을 중심으로 삼은 주관적 역사였던 것이다.

 

<청색지> 창간호에 실린 노다객의 기고문 "경성다방성쇠기"는 우리가 <카카듀>를 찾아나서는 열쇠가 되어 주었다.

 

<조선호텔(1914)>의 로비 라운지나 <팜코트 썬룸(1924)>은 이들이 편하게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듣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이 아니었을 것이다. 커피와 찻값이 비싸기도 했지만, 그런 곳에서는 벽화금붕어처럼 오래 머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노다객 이헌구의 경성 다방사에서 호텔들이 제외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남대문역 끽다점(1909)>이나 <경성역 티룸(1925)>은 왜 생략되었을까? 일본 유학 경험이 있는 그들은 경성역을 이용해야 했고, 거기에 끽다점과 티룸이 있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게다가 노다객 이헌구의 동료인 이상과 박태원도 작품 속에서 경성역의 끽다점과 티룸을 묘사하지 않았던가?

 

 

<왈츠와 닥터만> 커피 박물관에서는 <남대문역 끽다점(1909)>을 조선 최초의 끽다점이라고 서술했다.

 

하지만 이헌구와 그의 동료들에게는 <남대문역 끽다점><경성역 티룸>도 호텔의 끽다점들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그곳은 사람들이 시계바늘에 맞춰 움직이는 곳이지, 시간을 붙들어 매고 음악과 대화를 즐길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이상과 박태원이 그곳을 형상화했을 때에도 언제나 혼자서방문했던 곳으로 묘사되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노다객 이헌구의 경성 다방 성쇠기1920년대와 1930년대 서울의 다방에 대한 객관적 역사가 아니었던 것 같다. 따라서 그들이 경험하지 않은 끽다점들은 생략될 수 밖에 없었다. “경성 다방 성쇠기는 이헌구와 그의 문화예술계 동료들이 집단적으로 공유했던 주관적 문화사였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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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다방 성쇠기의 저자 노다객이 다방 보헤미안의 수기의 저자 이헌구와 동일 인물임을 짐작하게 하는 또 다른 문헌 방증도 있다. 우선 노다객이 <카카듀>를 서술한 것을 읽어 보면 그가 이 끽다점에 대해 시시콜콜한 사항까지 잘 알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다.

 

조선사람 손으로 조선인 가()에 맨 처음 났던 다방은 9년 전 관훈동 초() 3층 벽돌집(현재는 식당 기타가 되어 있다.) 아래층 일우(一偶=한 구석)에 이경손씨가 포왜(布哇=하와이)에선가 온 묘령 여인과 더불어 경영하던 카카듀.

이 집은 이씨의 떼카(데카당스의 줄임말=퇴폐적) 취미를 반영하야 촛불을 켜고 인도 모직마포 테이블 크로스에다 조선가면을 걸어 놓고 간판 대신에 붉은 칠한 바가지 세 쪽을 달아 놓아 한때 경성 가두에 이채를 발하였다.”

 

영화 <밀정(2016)>에 재현된 <카카듀> 끽다점. 영화에서는 <카카듀>가 임시정부 요원들과 독립군들의 연락처로 활용되었다.

 

이 한 문단에 <카카듀>(1) 개업시기(9년 전), (2) 위치(관훈동 초입), (3) 건물(3층 벽돌집), (4) 경영자(이경손과 하와이 출신의 묘령 여인), (5) 조명(촛불), (6) 내부 장식(모직마포 테이블보와 조선 가면), (7) 간판(붉은 바가지 세 쪽) 등이 빼곡히 서술되어 있다.

 

경성 다방 성쇠기에 언급된 23개 다방 중에서 이만큼 자세하게 서술된 것은 없었다. 22개의 다방이 서술된 다방 보헤미안의 수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저자가 <카카듀>를 매우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친근감이나 애착심까지도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한편 1969819일의 <대한일보>에 실린 연재물 <문단교유기>에는 나와 해외문학 시대라는 이하윤의 기고문이 실렸는데, 이 글에도 <카카듀>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서술이 나온다.

 

해외문학파의 주창자의 한사람이었던 이하윤은 1928년 여름 회원들이 <카카듀>를 아지트로 활용했다고 회고했다.

 

그 무렵(=1928년 여름)에 북촌에는 다방이 하나도 없다가 안국동 네거리 가까운 관훈동의 돌집 아래층에 <까카듀>라는 이름의 끽다실(喫茶室)이 신장개업을 했는데 이선근의 아이디어가 많이 반영되었을 뿐더러 정인섭의 탈(가면)을 비롯한 실내의 장치와 조명이 주효하여 김진섭의 명명(命名)으로 <까카듀>는 문을 열게 된 것이다. 마담은 상해에서 돌아온 현여사, 영화감독 이경손이 턱시도를 입고 차를 나르기도 했다.

 

신문기자와 예술가들이 들러 가는, 아직도 상업화되지 않은 휴식처의 구실밖엔 못하던 오아시스, 여기가 우리 '해외문학' 동인들의 공적 집회소이기도 하였다. 밤 시간에는 가끔 촛불 밑에서 우리들만의 조용한 파티를 열고 즈불로브카로 젊은 기분을 돋우었다.” (이하윤, <연인>, 통권 30, 2016년 여름, 132-158.)

 

<카카듀>에 대한 이하윤의 회상도 상당히 구체적이다. 이 글은 <카카듀>가 개업한지 거의 40년 후에 쓴 회고문이지만 그 내용은 노다객 이헌구의 회상만큼이나 자세하다. 물론 이하윤의 서술에는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나 오류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 점은 나중에 다시 보기로 하고, 지금은 그의 회상이 노다객 이헌구의 회상과 내용상 얼마나 겹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해외문학파 동인 이헌구는 1928년 여름 <카카듀>를 중심으로 활동한 경험을 <청색지> 창간호에 기고했다.

 

대략의 비교만으로도 두 사람의 회상은 <카카듀>(1)개업 시기, (2)위치, (3)건물, (4)주인, (5)조명, (6)장식() 등에 대해 내용이 일치함을 알 수 있다. 노다객이 언급했으나 이하윤이 누락한 것은 마포 테이블 클로스간판을 대신했던 붉은 박 세 개뿐이다. 30년의 터울을 둔 두 회상이 이만큼 일치한 것은 그들이 함께 <카카듀>를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이하윤과 이헌구는 해외문학파 동인이다. 해외문학파의 전신 외국문학연구회는 1926년 가을 도쿄에서 7명의 동인으로 결성되었고 1927년 초 <해외문학> 창간호를 발간했다. <해외문학> 2호를 낼 즈음 8명의 회원이 더 가입했는데, 이때 이헌구가 해외문학파 동인이 되었다.

 

이들은 유학을 마치고 속속 귀국해서 1928년 여름 <카카듀>를 아지트 삼아 동인지 발간과 문학 행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1928913일의 <동아일보>에는 해외문학파의 젊은 문인들이 <카카듀>에서 톨스토이 탄생 1백주년을 기념하는 문학 모임을 열었다는 소식도 보도되었다.

 

 

, 이하윤과 노다객이 <카카듀>에 대해 거의 같은 회상을 한 것은 그들이 같은 시기에 <카카듀>에서 함께 활동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을 고려할 때 경성 다방 성쇠기의 저자 노다객이 해외문학파의 동인 이헌구와 동일인물이라고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론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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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색지> 창간호(19385월호)경성다방 성쇠기를 기고한 저자 노다객은 결과적으로 몇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특히 <후타미><카카듀>의 개업시기에 대한 실수는 결정적이었다.

 

그 실수 때문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1923년에 개업한 <후타미>를 경성의 첫 커피 전문점으로, 1927년에 창업된 <카카듀>가 조선인 최초의 커피 전문점이라고 믿게 된 것이다.

 

문예동인지 <청색지> 1938년 5월호(창간호)에 실린 "경성 다방 성쇠기"는 1920년대와 30년대의 경성 끽다점들에 대한 흥미있는 정보를 많이 전해 주고 있지만, 적어도 <후타미>와 <카카듀>의 개업시기에 대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이 글의 저자 '노다객'은 누구일까? 

 

그런데 노다객은 누구였을까? “경성 다방 성쇠기의 첫 문단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서울서 맨 처음 우리가 다점(茶店)이라고 드나든 곳은 본정(本町, 혼마치=충무로) 3정목 현재 <> 근처에 있던 <이견(二見, 후다미)>이란 곳으로 이곳이 아마 경성 다방의 원조일 것이다. 그 다음이 현재 본정 2정목 식료품점 구옥(龜屋) 안에 있는 <금강산>으로 우리들과 같이 동경서 새 풍습을 익혀 가지고 돌아온 문학자나 화가나 그 밖에 지극히 소수의 내지인(內地人) 청년이 있을 뿐이었다.

 

아마 그 시절 다방 손님은 현재 적어도 나이가 30을 훨씬 넘은 중년으로 지금엔 대부분이 다방출입을 그만둔 이들이나 지금에 융성한 다방문화의 개척자들도 선공(先功)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글에 우리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우리동경서 새 풍습을 익혀 가지고 돌아온 문학자나 화가이며 현재 나이가 30을 넘었고 지금은 대부분 다방출입을 그만둔 이들이지만 다방 문화의 개척자들이라고 했다. 노다객도 그런 우리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당시 동인잡지의 관행에 따르면 작품이 아닌 잡문으로 여겨지던 세평이나 회고의 글은 동인들이 돌아가면서 집필하되 본명이 아니라 필명을 쓰곤 했다. 노다객이 <청색지> 동인의 한 사람일 것이라는 가정 아래 우선 창간호의 저자들을 모두 꼽아 보았다.

월간 문예동인지 <청색지> 1938년 5월호(창간호)에 실린 "경성 다방 성쇠기"의 저자는 '노다객'이라는 필명으로만 알려져 왔다. 그는 누구였을까? 그가 <청색지>의 동인이라면 아마도 '이헌구'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는 한달 전 <삼천리> 1938년 4월호에 "다방 보헤미안의 수기"라는 글을 기고했는데, 이 글은 소재와 주제의 양면에서 "경성 다방 성쇠기"와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글을 기고한 사람은 박종화, 김남천, 임화, 이원조, 윤태영, 청구자, 이헌구, 노다객, 안회남, 이상 등 10명이었고 편집자 구본웅까지 합치면 11명이었다. 임화는 2편의 글을 냈고, 전 해(=1937)에 사망한 이상의 글도 2편이 실렸다. 익명은 청구자노다객2명이었다.

 

이중 도쿄 유학 경험이 있는 사람은 김남천, 이원조, 이시우, 이헌구와 구본웅의 5명이었고, 30세가 넘은 사람은 이헌구(李軒求, 1905-1982)와 구본웅(具本雄, 1906-1952)이었다. 이헌구는 와세다대 불문과(1931)를 졸업했고, 구본웅은 니혼대 미학과(1929)와 다이헤이요(太平洋) 미술학교(1933)를 졸업했다. 두 사람 중 누가 노다객이었을까?

 

아마도 이헌구였을 것이다. 구본웅은 화가였고 글쓰기보다는 그림에 익숙했었음에 틀림없었을 뿐 아니라 당시 <청색지> 창간호의 편집을 맡고 있었으므로 따로 원고를 준비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노다객이 이헌구였을 것으로 단정하는 결정적 증거는 그가 한 달 전, 잡지 <삼천리> 19385월호에 다방 보헤미안의 수기라는 글을 기고했었다는 사실이다.

 

<청색지>에 실린 "경성 다방 성쇠기"의 저자 '노다객'은 <청색지>의 동인이자 해외문학파의 한 사람이었던 이헌구(왼쪽)로 추정된다. 오른쪽은 그의 와세다 대학 동창이자 해외문학파 동인이었던 절친 김광섭.  

 

다방 보헤미안의 수기는 당시 조선의 지식인과 문화예술인들이 다방 문화를 향유하는 방식을 서술하면서 각 다방들의 특징도 묘사했다. 따라서 다방 보헤미안의 수기경성 다방 성쇠기는 소재뿐 아니라 주제까지 거의 겹치는 글이다.

 

예컨대 다방 보헤미안의 수기에는 경성의 22개 다방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고, “경성 다방 성쇠기에도 23개의 다방이 언급되었는데, 그중 10개 이상이 공통된다. 따라서 경성 다방 성쇠기의 저자가 다방 보헤미안의 수기의 저자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은 대단히 높다.

 

물론 두 글이 각기 따로 언급한 다방들도 12(이헌구)13(노다객)에 이르기 때문에 두 글이 완전히 같은 글, 즉 재탕은 아니었다. 아마도 이헌구는 경성 다방 성쇠기다방 보헤미안의 수기의 속편 정도로 여겼을 것이다.

 

요컨대 경성 다방 성쇠기의 저자 노다객은 <삼천리>다방 보헤미안의 수기를 기고했던 이헌구와 동일 인물임에 틀림없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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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다방 성쇠기의 저자 노다객은 경성 최초의 끽다점이 <후타미>, 조선인 최초의 끽다점은 <카카듀>라고 회상했었다. 문예잡지 <청색지> 19385월호에 실렸던 기고문에서였다. 그러나 경성의 초기 다방을 기록한 다른 문헌들을 통해 검증해 본 결과 노다객의 회상이나 서술에서 착오가 발견되었다.

 

영화 <밀정(2016)>에 등장한 끽다점 <카카듀>. 그동안 <카카듀>는 1927년 영화감독 이경손이 개업한 것으로, 조선인이 세운 최초의 커피전문점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최근 조사에서 <카카듀>보다 먼저 생긴 다점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우선 <후타미>의 개업 시기는 1923년이 아니라 1926822일이었다. <후타미>는 노다객 등이 생각했던 것처럼 음악과 함께 커피와 차만 팔던 순끽다점이 아니었다. <후타미>는 커피와 함께 양과자와 샌드위치에 더해 칵테일까지 팔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타미>는 이전에 존재했던 <다리야(1917)><남대문역 끽다점(1909)>, <청향다관(1910), <오자와 신타로의 끽다점(1908)>과 송교(=신문로)<청향관(1908)>, 그리고 윤용주의 <홍릉앞 끽다점(1899)>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이 같은 조사결과를 종합하면 <후타미>뿐 아니라 <카카듀>에 대한 노다객의 서술도 근거가 허물어지게 된다. 일제 강점(19108) 이전에 개업됐던 <청향다관(19103)><청향관(1908)>, 그리고 <홍릉앞 끽다점(1899)>의 주인은 모두 조선인이었기 때문이다.

 

<청향다관(1910)>의 개업자는 윤진학(尹進學)이었고, <홍릉앞 끽다점(1899)>의 주인은 대한 사람윤용주(Yun Yong Ju)였다. 따라서 조선인 최초의 끽다점을 개업한 사람은 영화감독 이경손이 아니라 윤용주라고 해야할 것이다.

 

1928년 9월5일의 <동아일보>에는 <카카듀>의 개점 피로 행사 소식이 보도되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카카듀>의 개업시기는 1928년 9월초인 것을 알 수 있다.

 

호텔이나 식당과는 독립적으로 커피와 차만 판매하는 순끽다점만 고려한다면 <카카듀(1928)>가 여전히 최초의 조선인 다방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는 문헌 증거가 발견되었다. 종합 문예지 <개벽> 19265월호(통권69호)에는 첨구생(尖口生)이라는 필명으로 기고된 경성잡화(京城雜話)”라는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성용(李星鎔), 이관용(李灌鎔) 양 박사와 기독교 청년학관의 독일어 교사 낭승익(浪承翼)군은 남대문통 소광교 부근에 경성 초유의 <백림관(伯林館)>이라는 독일식 다점을 열고 영업을 개시하였다 한다. 아무 영업이라도 아니하는 것보다는 좋지마는 독일 유학생으로 다년간 연구의 결과가 그 뿐일까. 아마 그들의 전공한 학과는 다과(茶料)요 또 박사시험 논문에도 다점 설계서를 제출하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풍문에는 독일미인의 뽀이까지 있다고 하야 호기심으로 가는 사람이 많았었는데 실제에 가본즉 독일미인은 그림자(影子)도 업고 독신의 총각놈 뽀이만 쑥쑥 나와서 모두 실패하였다고.”

 

월간 종합시사문예잡지 <개벽> 1926년 5월호는 "경성 초유의 독일식 다점 <백림관>이 개업"되었음을 보도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경성 최초의 근대식 끽다점, 즉, 커피전문점은 <카카듀(1928년 9월개업)>이나 <후타미(1926년 8월개업)>가 아니라 <백림관>이 된다.

 

백림(伯林)’베를린의 한자식 음차어이므로 <백림관><베를린 끽다점> 정도로 번역될 수 있겠다. 기사에도 언급되었듯이 <백림관>독일식 다점이었다.

 

기사 후반부의 독일미인의 뽀이에 대한 풍문은 이성용의 <백림관> 경영을 돕던 그의 아내 마리 하우프트만을 여급으로 오해한 것이다. 이성용은 프라이부르크 유학 시절에 만난 체코 국적의 보헤미아 출신의 마리 하우프트만과 결혼, 192511월 함께 귀국했다.

 

<백림관(19265)>에 대한 다른 문헌이 추가적으로 발견되지 않아 더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백림관>은 이경손이 개업했던 <카카듀(19289)>보다 적어도 2년 이상 앞선 끽다점, 즉 커피 전문점이었던 것이다.

 

1926년 8월22일의 <경성일보>는 본정(=충무로) 3가에 '도쿄식 끽다점'을 지향하는 <후타미>가 개업했음을 알리는 광고가 실렸다. 이 광고는 22일부터 24일까지 열리는 개업 피로연 기간에 방문하는 고객에게 사은품을 증정하겠다고 홍보했다.

 

<백림관>의 발견은 경성 다방사를 근본적으로 뒤집어 놓을 예정이다. 그동안 경성 최초의 순끽다점으로 (잘못) 알려진 <후타미(19268)>보다 <백림관>의 개업이 넉 달 이상 앞섰기 때문이다.

 

경성의 첫 커피 전문점은 일본인 요시카와(吉川)가 개업한 <후타미>가 아니라 조선인 이성용(李星鎔)과 이관용(李灌鎔)과 낭승익(浪承翼)이 공동 창업했던 <백림관>이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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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최초의 순끽다점1923년에 개업한 진고개의 <후타미>이며 조선인이 개업한 최초의 다방은 1927년 관훈동에 개업한 <카카듀>라는 주장은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일부 연구서들도 별다른 인용없이 서술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후타미>의 개업시기는 1923년이 아니라 1926년이며, 그것이 순끽다점이었다고 볼 근거는 그다지 튼튼하지 않았음을 앞글에서 보았다. 그렇다면 <카카듀>에 대한 주장은 확실한 것일까?

 

우선 <카카듀>의 개업 시기는 1927년이라는 주장이 사실인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노다객은 경성 다방 성쇠기에서 이렇게 서술했다.

 

2019년 3월10일, <카카듀를 찾아서> 멤버들은 마침내 찾아낸 <카카듀>의 옛자리를 마주보고 섰다. 검은벽돌 건물과 붉은벽돌 건물을 합친 것이 <카카듀>가 있던 곳이다. (이 사진은 주환중 선생이 촬영한 것을 빌어온 것이다.^^)

 

“... 조선사람 손으로 조선인 가()에 맨 처음 났던 다방은 9년 전 관훈동 초() 3층 벽돌집(현재는 식당 기타가 되어 있다.) 아래층 일우(一偶=한 구석)에 이경손씨가 포왜(布哇=하와이)에선가 온 묘령 여인과 더불어 경영하던 카카듀.”

 

이 글이 실린 <청색지> 창간호가 발행된 것이 19385월호였으므로, 그보다 “9년 전이라면 1929년이다. 그런데 어째서 <카카듀>의 개업연도가 1927년으로 굳어졌던 것일까? 그것은 명동백작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이봉구(李鳳九. 1916-1983)의 다음과 같은 회상때문이다.

 

우리사람 손으로 우리들이 사는 곳에 처음으로 문을 연 다방은 1927년 봄 서울 종로구 관훈동 초입 3층 벽돌집 아래층에 영화감독 이경손씨가 하와이에선가 온 묘령여인과 더불어 경영하던 <카카듀>.”

 

19644월호 <세대>지에 실린 이봉구의 카카듀에서 엘리제까지라는 글의 도입부는 약간의 윤문을 제외하면 노다객의 경성다방 성쇠기를 거의 그대로 인용한 것이었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노다객이 “9년 전이라고 한 것을 이봉구는 “1927년 봄이라고 명시한 것뿐이다.

 

명동백작으로 불리던 이봉구는 1964년 4월호 <세대>에 기고한 "카카듀에서 에리자까지"라는 글에서 <카카듀>가 개업한 것은 1927년 봄이라고 서술했다. 그러나 정작 <카카듀>가 관훈동에 문을 연 것은 1928년 가을이었다.  

 

이봉구가 “9년 전1929년을 “1927년 봄이라고 바꾼 까닭은 무엇일까?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이를 명시했을 것이다. 아마도 단순한 계산 실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이봉구의 말대로 <카카듀>1927년에 개업했다면 그는 11세에 <카카듀>를 방문한 셈이다. <카카듀> 개업이 1929년이더라도 그는 13세 소년이었다. 그래서 이봉구는 사촌형을 따라 이 다방을 찾아올 때는 홍안소년이었다고 했다. “사춘기였기 때문에 이집 마담인 여인의 눈동자 때문에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설레었고 한동안 나대로의 고민이 있었다고 썼다.

 

여전히 의문이다. 11살이면 사춘기인가? 멋진 여인을 이성으로 보면서 설레고 고민할 나이치고는 너무 빠른 게 아닐까? 요즘으로 치면 초등학교 5학년 나이이기 때문이다.

 

1928년 9월5일의 <동아일보>는 <카카듀>가 이미 시내 관훈동에 "새로난" 끽다점이라고 전하고, 개점 피로 행사를 소개했다.

 

그렇다면 카카듀의 개업연도가 이봉구의 회상이 아니라 노다객의 서술대로 1938년의 “9년전1929년이었을까? 그것도 올바른 연도는 안니다. 192895일의 <동아일보> 3면에는 다음과 같은 단신이 실렸다.

 

시내 관훈동에 새로난 끽다점 <카카듀>에서는 개점 피로(披露) 예술 포스터 전람회를 오는 이십칠일부터 이틀 동안 열고 무료로 관람케 한다더라.”

 

192895일의 기사에 새로 난 끽다점이라고 한 것은 <카카듀>가 이미 최근에 개점했다는 뜻이다. “개점 피로행사로 예술 포스터 전람회를 무료로 개최한 것은 막 개업한 <카카듀>에 고객을 끌기 위한 행사였을 것이다. 이 기사의 정황으로 미루어, <카카듀>의 개업일은 192891일이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1938년 6월호 <청색지>에 실린 "경성 다방 성쇠기"에서 저자 노다객은 <카카듀>가 "9년전(=1929년)"에 개업했다고 서술했다. 

 

노다객과 이봉구의 글에서는 <후타미><카카듀>의 개업 시기가 모두 잘못되어 있었다. 여러 문헌 자료를 종합해 보면 보면 <후타미>1926822일 개업했고 <카카듀>192891일이 개업일이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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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다방 성쇠기의 저자 노다객은 서울서 맨 처음 우리가 다점(茶店)이라고 드나든 곳은 본정 3정목(=충무로 3), 현재(=1938) ‘근처에 있던 이견(二見, 후타미)’이란 곳으로 이곳이 아마 경성 다방의 원조일 것이라고 서술했다. 그의 기억은 사실이었을까?

 

우선 <후타미>원조여부를 살피기 전에 그 개업연도를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 노다객은 경성 다방 성쇠기에서 <후타미>의 개업연대를 밝히지 않았지만 많은 저자들이 이를 1923년으로 명시했다.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서울6백사년(1996, 31251)>“1923년에 명치정에는 이견(二見), 일본말로 후타미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다방이 문을 열었다고 기술했다. 다만 이같은 주장에 대한 출처는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후타미>1923년 개업설을 확인하기 위해 여러 문헌을 조사했으나 이를 명시적으로 밝힌 것은 없었다. 1966419일의 <동아일보>에 실린 김소운(金素雲, 1907-1981)다방 엘레지라는 글에 “40년전 서울에서 커피나 홍차를 내는 끽다점이 진고개에 단 한집 있었을 뿐이라는 회상이 전부였다. 1966년으로부터 “40년 전이라면 1923년이 아니라 1926년이다.

 

1926년 8월22일의 <경성일보> 2면 하단에는 <후타미>의 개업광고가 실렸다. 혼마치(=충무로) 3가에 "도쿄식 끽다점"을 개업했으니 한번씩 방문해서 그 진가를 맛보시기 바란다는 말과 함께 22-24일까지 방문하는 고객에게 사은품을 증정한다는 내용도 부가되어 있다.  

 

과연 1926822일의 <경성일보>는 그날이 <후타미>의 개업일임을 알리는 광고를 게재했다. 22일부터 24일까지 사흘간 개업 피로 행사에 방문하는 고객에게 소정의 사은품을 증정한다고 했다. , <후타미>의 개업일은 1923년이 아니라 1926822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노다객이 <후타미(1926)>경성 다방의 원조라고 했을 때 그것이 경성 최초의 다방이라는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1926년 이전에도 다방이나 끽다점은 많았기 때문이다.

 

잡지 <조선공론><쇼카코오키나(1921)><다리야(1917)><후타미>보다 5-6년 전에 개업했다고 서술했고, 그 이전에도 <탑동 카페(1914)><남대문역 끽다점(1909)>가 영업 중이었다. 조선인들도 <청향다원(1910)>, <청향원(1900)>, <홍릉앞 끽다점(1899)> 등을 개업했었다.

 

1936년 3월24일의 <동아일보> 7면에는 정우상의 수필 <홍차한잔의 윤리>가 게재되었다. 이 수필에서 저자는 "6,7년 전만해도 서울에는 순끽다점으로 변변한 것"이 없었다고 함으로써 <후타미>도 "순끽다점"으로 볼 수 없다는 뜻을 비쳤다.

 

노다객이 <후타미>원조로 기억한 것은 호텔이나 식당, 제과점으로부터 독립되어 커피와 차를 ()’로 파는 다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기준에서 보더라도 <후타미>경성 다방의 원조라고 보기 어렵다는 인상을 주는 문헌들이 있다.

 

1936324일의 <동아일보>에 실린 홍차 한잔의 윤리라는 수필에서 정우상은 “6,7년 전만해도 서울에는 순끽다점으로 변변한 것이 있는 것 같지 않아 동경서 끽다 취미를 알고 온 학생들에게 여간 큰 불만이 아니었다고 했다.

 

1936년으로부터 6,7년 전이라면 1930년 전후이다. 그때도 순끽다점으로 변변한 것이 없었다면, <후타미>1930년경 이미 폐업했거나 영업 방식을 바꾸었던 것일까? 혹은 정우상의 눈에는 <후타미>조차도 순끽다점이 아니었던 것이리라. 실제로 19271218일의 <조선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1927년 12월18일의 <조선신문>에는 "순끽다점" <후타미>에서는 "독특한 커피와 양과자, 샌드위치와 함께 칵테일" 등을 제공한다고 서술되어 있다.

순끽다점: 시내 혼마치 3정목의 유명한 순끽다점 <후타미 티룸>은 주인 요시카와(吉川)씨가 세이요칸(精養軒) 호텔 출신으로 독특한 커피와 양과자, 샌드위치와 함께 칵테일 등을 손쉽게 제공하고 있어 부인모임으로부터 단체모임에 이르기까지 최적의 장소라고 하여 비상한 인기를 얻고 있지만, 특히 세모를 맞아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 크게 힘쓰고 있다.”

 

이 기사에 따르면 <후타미>는 커피와 차뿐 아니라 양과자와 샌드위치, 칵테일까지 팔고 있었다. <후타미>는 혼자 혹은 소수의 친구들이 음악과 대화를 즐기는 곳이 아니라 단체모임 중심으로 영업이 이뤄지고 있었다. <후타미>는 과자점에 병설되었던 <다리야(1917)>나 샌드위치를 판매했던 <남대문역 끽다점(1909)>과 별반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경성역 인근에 <후타미 여관(1912)>이 영업 중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후타미 끽다점><후타미 여관>의 상관관계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후타미>가 커피와 차뿐 아니라, 스낵과 주류를 판매하고, 숙박업과도 연계되었던 끽다점이라면, <후타미(1926)>를 경성 다방의 원조라고 한 노다객의 회상을 여전히 존중해야 할까? (*)

 

1912년에 설립된 경성역 앞의 <후타미 여관>. 이 여관은 1926년에 설립된 <후타미 끽다점>과 관련이 있는 숙박업소인지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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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탁호텔(1902-1917)>은 한동안 조선 최초의, 최고급 호텔로 알려졌지만, 제물포의 <대불호텔(1888-1907)>이 발굴되면서 조선 최초라는 호칭을 잃었고, <조선호텔(1914-1945)>이 개업하면서 최고급이라는 수식어도 잃게 되었다.

 

<조선호텔>의 첫 이름은 <경성철도호텔>이었고,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주요 도시에 건설한 철도호텔 체인의 하나였다. <부산철도호텔(1912715)>이 가장 먼저 문을 열었고, 이어서 신의주(1912815)와 경성(19141010), 금강산의 온정리(1915810)와 장안사(191871), 평양(19221030)에도 철도호텔이 세워졌다.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직접 운영했던 철도호텔들 중에서 <경성철도호텔>은 특별대우를 받았다. 1914224일의 <매일신보>는 이 호텔이 완공되기도 전에 그 이름이 당국에 의해 <조선호텔>로 개칭되었다고 보도했다. <경성철도호텔><조선호텔>이 된 것은 그것이 조선 전체를 대표하는 호텔이 될 것이라는 암시였다.

 

1937년 2울19일 오후, 최승희가 <조선호텔>의 프랑스식 식당 <팜코트>의 썬룸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

 

과연 <조선호텔>은 대지 6,750, 건평 583평으로 건축됨으로써 약 1,200평의 대지에 세워졌던 <손탁호텔>보다 5배 이상 큰 호텔이 되었다. <조선호텔>을 짓기 위해 대한제국이 출발을 선언했던 원구단의 일부를 헐어내기까지 했다.

 

<손탁호텔>은 지상 2층에 불과했으나 <조선호텔>은 지하1층 지상4층의 건물이었다. 객실 수에서도 <손탁호텔>은 귀빈용을 포함해 25개에 머물렀으나, <조선호텔>2층부터 4층까지 69개의 객실을 구비해 최대 108명의 투숙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당시로서는 최대였다.

 

조선 황실이 <손탁호텔>을 영빈관으로 사용했듯이 <조선호텔>은 총독부의 영빈관이었다. 이는 일본제국의 영빈관으로 사용되던 도쿄의 <데이고쿠(帝國)호텔>과 맞먹는 위상이었다. <조선호텔>조선 최초는 아니었지만, ‘최대이자 최고급호텔로 자리 잡은 것이다.

 

 

<조선호텔>1층에는 식당과 로비 라운지, 끽다점과 바, 당구실과 댄스홀, 연회실과 도서실 등이 갖추어져 있었다. 이중 세간의 주목을 가장 많이 받았던 곳이 식당과 라운지였다. 일반인의 접근 가능성이 가장 높고 잦았기 때문이다.

 

1924년에 개업한 프랑스 식당 <팜코트(Palm Court)>는 경성 시민들에게 가장 사랑받았다. <팜코트> 식당에는 <선룸(Sun Room)>이라는 일광실이 있었다. 이는 호텔 건물 뒤편의 1층 베란다 부분을 유리로 둘러싸서 매우 밝고 따뜻하게 만든 곳이다. 선룸의 내부에는 야자나무 등의 열대 식물로 장식을 했으므로 이국적인 분위기까지 풍겼다.

 

<팜코트>에서는 플랑베르 스테이크와 푸아그라, 달팽이 요리 등의 정통 프랑스 요리를 주문할 수 있었고, 캐비어와 샴페인도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일반 시민들이 가장 즐겨한 <팜코트>의 메뉴는 프랑스식 양파수프커피였다고 한다. <팜코트>의 커피와 양파수프를 먹어보지 않았다면 경성에서 모던보이나 모던걸 대접을 받기 어려웠다고 한다.

 

 

환구단쪽에서 바라본 조선호텔 후면. 호텔 1층의 유리창문이 즐비한 곳이 프렌치 레스토랑 <팜코트의 썬룸>이다.

<조선호텔>이 양식당을 개설하면서 미국식독일식러시아식도 아닌 프랑스식식당을 개업한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조선호텔>을 최고급 호텔로 운영하려는 총독부 철도국의 의사결정권자들이 프랑스 요리의 세계적 명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 더해 <손탁호텔>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조선호텔>이 개업할 무렵 손탁은 이미 조선을 떠났지만, 조선 황실과 <한성빈관>의 서양식 요리를 주도했던 손탁의 전공이 프랑스 요리였다. 손탁이 한성을 떠난 후 <한성빈관>을 인수한 사람은 프랑스인 보에르가 <손탁호텔>의 식당을 프랑스식 요리를 중심으로 이어갔었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의 상류층 인사들과 경성 주재 외교관들은 <손탁호텔>의 프랑스식 요리에 친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팜코트 썬룸>의 커피는 프랑스식 커피가 아니었던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20년대 프랑스식 커피는 이미 에스프레소가 주류였다. 압착식으로 추출한 진한 커피를 작은 잔에 담아 마시는 것이 보통이었고, 이는 이탈리아나 스페인 등의 로만 문화에서도 유사했다.

 

<팜코트 썬룸>의 커피 제조 방식은 압착식이 아니라 여과식이었다. ‘에스프레소가 아니라 드립 커피였던 것이다. <조선호텔(1914)>이 문을 열었을 때나 <팜코트(1924)>가 개업했을 때까지도 일본이나 조선에는 압착식 커피 제조법이 도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01년 밀라노의 루이지 베체라가 발명한 에스프레소 머신 설계도와 최초의 시제품.

 

압착식 커피 제조기가 일반에 선보인 것은 이탈리아 밀라노의 루이지 베체라(Luigi Bezzera)즉석커피 제조기(1901)”였다. 증기압을 이용해 순간적으로 커피를 추출하는 이 기계는 1902년 특허를 얻었고, 1903년 데시데리오 파보니(Desiderio Pavoni)에 의해 상품화되었다.

 

베체라와 파보니의 에스프레소 머신은 커피 한 잔을 만드는데 채 1분도 걸리지 않았고, 주문을 받아가며 1시간에 1천 잔 이상의 커피를 만들 수 있었다. 이 에스프레소 머신은 1906년 밀라노 산업박람회에 출품되었고, 참가자들에게 즉석 카페 에스프레소만들어 나눠주었다.

 

에스프레소 머신은 즉각 유럽에 확산됐지만, 미국에는 1925년에야 도착했고, <팜코트>가 개업한 1924년까지도 도쿄나 경성에 전해지지 않았다. 최승희의 <팜코트 썬룸> 사진을 보면 그녀의 손에 들려진 커피 잔은 에스프레소 잔이 아니라 드립커피를 마시는 보통의 커피 잔이다.

 

1906년 밀라노 산업박람회에 선보인 베체라-파보니의 <에스프레소 머신>

최승희의 커피 사진 중에는 경부선 기차 <아카츠키>의 식당차에서 찍은 사진도 있다. 이 사진에서도 최승희의 커피 잔은 <선룸> 사진의 커피 잔과 같다. 당시 기차의 식당차와 <조선호텔>의 식당은 철도국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사용하던 식기가 모두 같았다.

 

<팜코트>1924년에 개업한 것은 경성 커피사에서도 중요하다. 이때부터 끽다점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경성 다방 성쇠기(<청색지>, 19385월호)”<후타미(1926)><백합원(1926)><금강산(1928)>, <나카무라(1928)><메이지제과(1930)> 등의 일본인 끽다점들이 잇달아 문을 열었다고 했다. 조선인들도 <카카듀(1928)><멕시코(1929)><낙랑파라(1931)>, <플라타누(1932)><비너스(1932)><제비(1933)> 등을 개업했다.

 

1940년경 경성의 끽다점은 105개에 달했다. 주류를 파는 와 여급 서비스를 제공하는 카페’ 287개를 더하면 경성에서 커피를 파는 집이 4백개에 달했다. 이들 소규모 민영 끽다점들은 <조선호텔>의 커피 서비스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모방할 것은 모방하면서 차별화를 시도해야 했기 때문이다.

 

특급열차 <아카츠키>의 식당차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최승희.

 

<조선호텔>처럼 시내 끽다점들도 여과식으로 커피를 만들었고 아마도 <조선호텔>에 못지않은 양질의 커피를 제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팜코트 썬룸>은 실내에 야자나무를 배치해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는데, 경성의 다른 끽다점들도 그 이국성을 모방했다. <카카듀>는 간판대신 하와이식 바가지를 3개 걸었고, <멕시코>는 옥외에 커다란 쇠 주전자를 걸었는가 하면, <비너스>는 실내 한가운데에 밀로의 비너스 상을 세웠고, <낙랑파라>는 실내의 널마루 위에 톱밥을 깔아 사막을 연출했었다.

 

한편 경성의 끽다점들은 <조선호텔>이 제공하지 못하는 것을 제공했다. 음악과 지적 대화였다. 커피와 음악과 대화 속에서 떠오른 생각들은 글과 그림이 되었고, 노래와 영화가 되었다.

 

일제 당국은 경성의 끽다점들을 룸펜 집합소로 몰아가곤 했다. 신문과 잡지도 끽다점을 직업 없는 젊은이들이 시간을 낭비하는 곳정도로 폄하했고, 하루종일 의자에 붙박여서 커피를 마셔대는 끽다족을 벽에 걸린 그림이라거나 물만 먹는 금붕어라고 비아냥거렸다. 1937218일의 <조선일보>마작 구락부,’ ‘당구장과 함께 티룸건전한 시민이라면 가지 말아야할 곳으로 꼽았다.

 

<조선호텔>의 썬룸... 실내에 야자나무와 열대식물 화분을 배치해 '이국적 분위기'를 연출했다.

 

하지만 끽다점을 배경으로 하여 태어난 문학과 예술은 암울한 식민지 시기의 증언이었다. 조선의 지식인들과 문화예술인들은 <조선호텔>25전짜리 커피대신 시내 끽다점의 10전짜리 커피를 마셔가며 글과 그림, 사진과 노래와 영화를 남겼다. 이 작품들에는 침략자에 대한 저항의 숨결과 생존을 위한 체념의 한숨이 함께 녹아들어 있었다.

 

그같은 체념과 저항의식은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서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조선 지식인과 문화예술인들의 삶의 흔적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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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한성 정동에서 <손탁호텔>이 문을 열었다. 정식이름은 <한성빈관(漢城賓館)>이었지만, 이곳을 드나들던 경성의 인사들은 경영자의 이름을 따서 <손탁호텔>이라고 불렀고, 1909년부터는 그것이 정식 명칭이 되었다.

 

마리 앙투와네트 존탁(Marie Antoinette Sontag, 1854-1922)은 프랑스 알자스로렌의 독일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프로이센이 보불전쟁(1870)으로 알자스로렌을 점령한 뒤에 그녀의 국적은 독일이 되었지만, 일차대전(1914-1918) 종전 후 알자스로렌이 프랑스로 반환되었을 때 존탁은 프랑스 국적을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마리 존탁은 18854, 주조선 러시아 초대공사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Карл Ива́нович Ве́бер, 1841-1910)가 한성에 부임할 때 그의 수행원으로 함께 입국했다. 당시 존탁은 30세의 미혼이었고 19099월 프랑스 칸으로 돌아갈 때까지 24년 동안 조선에 체류했다.

 

 

독일 국적의 존탁이 러시아공사와 동행한 것은, 베베르의 처남이 존탁의 제부였던 인척관계 덕분이었다. 윤치호는 그의 일기에서 “‘미스 손택은 베베르 처남의 처형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녀의 이름은 독일어 발음으로 존탁이었으나 조선 체류 시절에는 손탁(孫鐸), 손택(孫澤), 혹은 송다기(宋多寄) 등으로 표기되었다. 독일어 발음에 더 가까운 존탁(存鐸 혹은 尊鐸)으로 불리지 않은 것은 당시 그녀의 이름이 영어나 프랑스어 등의 다른 유럽어로 잘못 발음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베베르 공사의 한자 이름이 위패(韋貝)’였던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손탁은 미모와 교양을 갖추었고, 사교성이 뛰어난데다, 영어·프랑스어·독일어·러시아어와 조선어에도 능통해서 조선 왕실과 외교관들 사이에서 지명도가 높았다. 특히 프랑스 요리 실력이 탁월했던 손탁은 1886년 베베르 공사의 추천으로 경복궁의 양식 조리사로 임명되었고, 이후 조선 왕실의 서양식 연회를 주관했다. 그의 정식 직함은 조선 황실 서양 전례관이었다.

 

 

조선 체류 초기에 러시아공사관에 기거했던 손탁은 조선 왕실을 오가며 중요한 연락 업무를 담당했다. 특히 청일전쟁 후 노골적인 침략 야욕을 드러낸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민비가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이려 했을 때 그 다리를 놓았던 것도 손탁이었다.

 

<경성부사(京城府史, 1934)>에 따르면, 고종은 1895년 손탁에게 경운궁과 도로를 마주보는 서방 지소(地所)의 가옥을 하사했다. 정동 1번지1호의 이 한옥(대지 73)은 당시 고종이 기거했던 중명전 바로 옆이었으므로 손탁이 러시아 공사관에 기거할 때보다 더 쉽게 고종과 민비를 알현할 수 있었다.

 

특히 1894년 베베르 공사의 멕시코 전임이 결정되고 신임 공사 시페이예르가 한성에 부임하자 손탁은 더 이상 러시아 공사관에 기거하기 어렵게 되었는데, 이같은 사정을 헤아린 고종이 손탁에게 집을 마련해 준 것으로 보인다.

 

<경성부사><손탁양 저택(孫鐸孃邸)>외국인들의 집회소가 되었고 청일전쟁 후 친미파 일당이 조직했던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 18956월 결성)도 그 회관을 지금의 법원 앞에 건설하기까지 손탁의 집을 집회소로 삼았다고 서술했다. 미국공사 실(J.M.B Sill)과 프랑스 영사 플랑시(C de Plancy),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등이 정동구락부의 외국인 회원이었고, 조선인으로는 민영환, 윤치호, 이상재, 서재필 등이 가입해 있었다.

 

일제가 민비를 살해하자 (을미사변, 1895108) 상시적으로 독살 공포에 시달리던 고종은 한식 식사를 피하고 손탁의 서양 요리에 의존할 만큼 그녀는 고종의 전속 요리사로서 큰 신임을 받았다. 고종이 일제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을 때(1896211-1897220, 아관파천)에도 손탁의 도움이 컸음은 물론이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환궁한 후 고종은 1898316일 손탁에게 정동 16번지의 저택(418)을 하사했다. 이를 증명하는 <러시아공관 좌변양관 하사증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황성의 정동에 위치한 러시아 공사관 대문 왼편의 황실 소유 벽돌 건물(塼屋) 한 채(5)를 독일처녀(德國閨女) 손탁(宋多寄)에게 상사(償賜)하여 그녀의 노고를 치하하는 바이다.”

 

정동 러시아 공사관 대문 왼편은 정동 16번지로 지금의 캐나다 대사관 부지이다. 이 집은 <손탁빈관(孫澤賓館)>이라고 불렸는데, 여분의 방을 이용해 고위급 외국인들에게 숙박을 제공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영빈관의 투숙객들은 왕실과 손탁에 의해 엄격히 선별되었다.

 

 

<손탁빈관>은 정동구락부의 집회소 역할을 계속했다. 정동구락부에는 일본 외교관이나 친일파 인사가 전혀 없었는데, 이는 조선 정부와 왕실이 일제의 침략에 극도의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동구락부는 한성 주재 외교관 모임인 외교관구락부(Cercle Diplomatique et Consularire, 1892년 결성)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고종의 반일 정책을 뒷받침했다. 다시 말해 고종이 손관에게 <손탁빈관>을 하사한 것은 그의 정치적 포석이기도 했던 것이다.

 

외국인 방문이 늘고 <손탁빈관>이 협소해지자 고종은 190210월 정동 29번지(대지 1,184)2층 건물을 신축해 <한성빈관(漢城賓館)>이라고 명명했다. 이 건물은 왕실 내탕금으로 건축되었고, 조선 왕실의 영빈관으로 사용되었지만, 소유와 경영은 모두 손탁에게 맡겨졌다.

 

<경성부관내 지적목록(1917)>에 따르면 손탁은 정동에 3필지의 부동산을 소유했다. 정동 1번지1호의 <손탁양 저택>, 정동 16번지의 <손탁빈관>, 그리고 정동 29번지 <한성빈관>였다. 따라서 고종이 그녀에게 땅과 가옥을 하사한 것이 모두 세 차례였음을 알 수 있다.

 

 

<한성빈관>에는 욕실이 딸린 25개의 객실이 마련되었고, 2층에는 귀빈용 객실, 아래층에는 일반 객실과 주방, 식당, 연회장, 끽다점 등이 있었다. <한성빈관>은 정동 공사관 거리에 위치했기 때문에 많은 외교관 및 외국인들이 찾아와 손탁의 요리와 커피를 즐기며 친교를 나눴다.

 

1층에 식당과 커피숍이 있었다는 기록을 제외하면 <한성빈관>의 끽다점에 대한 더 자세한 기록은 발굴된 바 없다. <왈츠와 닥터만>의 에세이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손탁호텔에서 커피를 판매했다는 명확한 기록이나 유물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대한제국 정치외교의 중심공간인 정동에 위치했다는 지리적 특성과 서양인과 외교관, 정치인들이 주로 드나들었던 상황을 볼 때 손탁호텔에서 커피를 판매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손탁호텔이 경성 최초의 근대식 호텔이었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시 한성에는 경운궁 인근에서 영업 중이던 호텔이 4개나 더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호텔(1898)과 팔레호텔(1901), 스테이션호텔(1901)과 임페이얼호텔(1903년 이전)이 그것이다.

 

손탁호텔이 투숙객과 방문객들에게 끽다점 서비스를 제공했다면 다른 호텔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만 왕실 영빈관이었던 손탁호텔의 시설이 탁월했던 것은 사실인데, 다른 호텔들에는 목욕시설이 없어 장기 투숙객들에게 불편을 주었던 것이 그 단적인 예이다.

 

러일전쟁(190428-190595)에서 러시아가 일본에 패한 뒤에도 손탁은 한동안 한성에 체류했으나, 결국 190995일 일제의 압력으로 조선을 떠났다. <한성빈관><팔레호텔>의 주인 보에르에게 매각되어 <손탁호텔>이라는 이름으로 영업을 계속했으나, 1917년에 이화학당에 매각되었다가, 1922년 완전히 헐리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손탁의 만년에 대한 서술은 엇갈린다. <조선잡기(朝鮮雜記, 1931)>의 저자 키쿠치 켄조(菊池謙讓)는 손탁이 1925년 러시아에서 객사(客死)했다고 주장한 반면, <외국인이 본 조선외교비화(外人たる 朝鮮外交秘話, 1931)>의 저자 코사카 사다오(小坂貞雄)는 손탁이 호텔을 프랑스인 보에르씨에게 양도하고 막대한 돈을 쥐어 프랑스로 귀국하여 남방 '니스' 지방에 별장을 사들여 살다가 13년 전(=1918)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위키피디어>의 다음과 같은 서술이 맞다면 1930년대 두 일본인의 주장은 모두 틀렸다고 해야 할 것이다.

 

“(손탁은) 1909년에 프랑스 칸으로 돌아갔다. 192277일 오전 8시 프랑스 칸에 있는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현재 프랑스 칸의 시립천주교 묘지에 '조선황실의 서양 전례관 마리 앙트와네트 손탁'이라는 이름으로 묻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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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5월호 <청색지>에 실린 경성 다방 성쇠기<후타미(1926)>를 끽다점의 원조라고 서술했다. 그 이전의 끽다점들은 대개 제과점이나 식당을 겸했기 때문이다. <다리야(1917)><금강산(1928)> 등은 양과자와 함께 차를 팔았고, <탑다원(1914)><청향다원(1910)>, <남대문역 끽다점(1909)>, <청향원(1900)>, <홍릉앞 끽다점(1899)> 등은 식당을 겸했다.

 

그런데 당시에는 커피식사뿐 아니라 숙박까지 제공하던 끽다점들이 있었다. 인천의 <대불호텔(1888)>, 경성의 <손탁호텔(1902)><조선호텔(1914)> 등의 호텔들이었다.

 

조선 최초의 호텔로 알려진 <대불호텔>은 나가사키 출신의 일본인 무역상이자 해운업자인 호리 히사타로(堀久太郞:?~1898)1888년 건립해 1907년까지 운영한 서양식 호텔로 알려져 있다. <인천부사(仁川府史, 1933)><대불호텔>의 건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1888년 신축되기 이전의 <대불호텔>. 오른쪽 아래 <호텔 다이부츠>라고 쓰인 건물이다. 

 

 

인천개항 당시, 즉 메이지 16(=1883) 4, 부산에서 인천으로 함께 이주해 온 호리 히사타로(堀久太郞)과 호리 리키타로(堀力太郞) 부자는 가업인 해운업을 하기 위해 함선 매입을 시작하고, 같은 해 말에는 일본거류지 제12호지, 지금의 본정통 1-1번지에 건물을 건축했다.

 

이어 내외국인 숙박에 적당한 시설을 갖춘 여관이 없음을 파악하고, 메이지20(=1887)부터 이듬해에 걸쳐 벽돌조의 서양식 3층 가옥(본정통 1-18번지의 중화루 자리)을 새로 지었다. 상호는 호리 히사타로의 풍모를 고려하여 대불호텔(大佛ホテル)이라는 상호를 붙였다.”

 

일본어 다이부츠(大佛)”큰 부처라는 뜻이지만 창업자 호리 히사타로의 별명이기도 했다. 그는 청일전쟁 기간 중 일본 해군을 힘껏 지원했고, 전후에는 그 대가로 조선연안 해운업을 장악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그밖에도 호리 히사타로는 <호리 상회><호리 음료회사> 등의 제조업과 도소매업까지 경영하면서 인천 일본인 사회의 다이부츠, ‘거물이 되었다.

 

제물포 개항 이후 외국인들의 인천 상륙이 늘어났으나 당시의 교통수단이라고는 우마차가 고작이었기 때문에 서울까지는 12시간이 걸렸다. 여행객들은 인천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아침 일찍 출발해야 했으나 외국인들이 묵을 숙소가 부족했다. 이를 알아챈 호리 히사타로는 아들 호리 리키타로(堀力太郞, 1870~?)와 함께 <대불호텔>을 개업한 것이다.

 

1888년 <대불호텔> 완공 직후에 촬영된 제물포 포구. 정면에 보이는 굴뚝을 가진 3층 건물이 <대불호텔>이다.

 

<인천부사><대불호텔> 개업이 1888년이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일부 서양인들의 기행문에는 1887년 이전에도 <대불호텔>이 영업 중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18854월에 인천에 도착한 선교사 아펜젤러(H.G. Underwood)와 언더우드(G.H. Appenzella), 18855월에 한국에 부임한 영국영사 칼스(W.R. Carles)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당시 제물포는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이 세운 극히 소수의 오두막집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우리는 소위고급이라는 다이부츠(大佛)나 해리스(Harris)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다이부츠의 침대들은 평평한 침상에 모포 한 장을 펴 놓은 것이 고작이었고, 해리스 호텔에서는 한 쪽 구멍에서 물이 새들어 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물동이를 달아 매 두는 지경이었다.” (언더우드, 188545)

 

끝없이 지껄이고 고함치는 일본인, 중국인 그리고 한국인들 한복판에 짐들이 옮겨져 있었다. 다이부츠 호텔로 향했다. 놀랍게도 호텔에서는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손님을 편하게 모시고 있었다.” (아펜젤러, 188545)

 

나의 숙소는 일본인 거류지에서 단 한 채밖에 없는 2층집의 위층이었다. 앞의 창문을 통해서 바다의 전경이 내다보이며 마루 건너에 집주인과 그의 친구가 살고 있었다.” (칼스, 18855)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기행문을 통해 18854월에도 제물포에 <대불호텔>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펜젤러는 <대불호텔>에서 영어가 사용되고 있어 편안했다고 서술했지만, 언더우드는 해리스 호텔이나 <대불호텔>의 시설이 보잘 것 없었다고 했다.

 

1896년에 촬영된 제물포 일본인 거류지 모습. 왼쪽 3층짜리 굴뚝 건물이 <대불 호텔>, 정면의 3층 건물이 중국인 소유의 <스튜어드 호텔>이다.  

 

주목을 끈 것은 칼스의 기록이었다. 그는 18855월의 <대불호텔>일본인 거류지에서 단 한 채밖에 없는 2층집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1884113일 인천의 일본 영사 고바야시(小林)가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도 호리 히사타로의 2층집이 언급되어 있었다.

 

올해(=1884)는 인천 개항 이후 인가가 점차로 늘어나 거류지 체제가 이루어진 첫해로 거류민들은 집집마다 일장기를 내걸고 인천에서 처음 맞는 천장절을 축하했습니다. 정오 12시부터 무역상들 가운데 수십 인이 뜻을 모아 제12호지 호리 히사타로의 누각 위에서(第十二號地堀久太郞樓上)’ 입식 연회를 열고 세관 관리를 비롯한 내외 동업자들을 초대하였는데, 참석한 사람이 수십 명에 달했습니다.”

 

일본 건축에서 누각이란 목조 2층집을 가리키므로 고바야시 영사가 언급한 호리 히사타로의 누각은 칼스 공사가 숙박했던 일본인 거류지에서 단 한 채 밖에 없는 2층집이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호리 히사타로는 1887<대불호텔>을 신축하기 전에도 같은 상호의 호텔을 운영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같은 사실은 미해군 장교에 의해 확인된 바도 있다. 미국군함 주니아타호(USS Juniata)의 군의관 조지 우즈(George W. Woods, 1838-1932)188439일 제물포에 도착했을 때 막 준공된 2층 목조주택의 일본식 여관 <대불호텔>을 보았다고 일기에 기록해 놓은 것이다.

 

또 고바야시 영사의 보고서(1884113)에 따르더라도 1884년의 <대불호텔>은 누각(목조 2층 건물)이었지만,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대불호텔>의 사진을 보면 새로운 <대불호텔>3층 벽돌 건물이었다.

 

신축 <대불호텔>은 서양식 침대방 11, 일본식 다다미방 24개를 구비했는데, 침구는 훌륭했으나 식사에 대한 의견은 엇갈렸다. 아놀드 새비지-랜도어(Arnold Henry Savage-Landor, 1865-1924)<코리아 또는 조선, 조용한 아침의 나라(Corea or Cho-se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1895)>에서 대불호텔의 식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불평했다.

 

일주일의 대부분을 대불호텔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는 로스비프, 다음날은 무틴숍(mutinshops, 양고기로 추정됨-필자 주)이라는 정체 모를 고기 조각을 이따금 볼 수 있을 뿐이었으나, 불행하게도 너무 질겨서 셰필드(Sheffield)()의 칼로도 거의 자를 수가 없었으며, 사람의 치아나 턱이 아무리 날카롭고 강할지라도 그 고기를 씹어 먹을 수가 없었다.”

 

프랑스인 이뽈리트 프랑탱도 <프랑스 외교관이 본 개화기 조선(2002)>에서 그 호텔의 시설들은 겉보기엔 그럴싸하게 보였으나 내부를 들여다보면 실로 비참할 정도로 초라했다. 한국의 다른 여관들보다는 훨씬 뛰어났지만, 호텔 지붕은 비가 줄줄 샐 정도였다. ... 침대는 훌륭했으나, 요리에 대해서는 차마 여기에 기록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라고 평했다.

 

그러나 <온땅에 복음(Gospel in All Lands)>이라는 기독교 잡지에 게재된 한국에서 우리의 사명(Our Mission in Korea, 1885)”이라는 기고문에서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대불)호텔의 객실은 넓고 편안했지만 추웠다. 테이블에 앉자 잘 조리된 맛있는 외국음식이 차려졌다.”고 기록했다.

 

<대불호텔>은 1907년경 폐업한 뒤 10년 가까이 방치되었다가, 1918년 중국인 상인들에게 매각되어 중국 요리점 <중화루>가 되었다.

 

이 호텔들이 끽다점을 구비했다거나 커피를 팔았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이들이 근대식 호텔이었고, 주 고객이 서양인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끽다점을 운영했거나 적어도 식사와 함께 커피를 제공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왈츠와 닥터만>의 에세이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메뉴판 등 유물이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대불호텔에서 커피가 판매되었다는 사실을 밝히지 못하고 있는 점은 아쉽지만 서양식 식사가 제공된 호텔인 만큼 커피가 판매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대불호텔은 개업 후 10여 년간 호황을 누렸으나 경인철도가 개통(1899918)되자 서울까지 이동시간이 2시간 이내로 줄어들면서 경영난을 겪다가 1907년경 문을 닫았다. 호텔 건물은 1918년 중국 상인들에게 매각되어 중국 요리점 중화루(中華樓)로 바뀌었다. (*)

 

<대불호텔> 건물은 인천시 중구 중앙동에 재현되어, 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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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츠와 닥터만> 홈페이지의 <카카듀> 에세이가 인용한 경성 다방 성쇠기에서 저자 노다객은 경성 최초의 끽다점이 <후타미>, 조선인 최초의 끽다점은 <카카듀>’라고 회상했었다. 문예잡지 <청색지> 19385월호에 실렸던 글에서였다. 그러나 노다객의 회상이 잘못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문헌 기록들이 나왔다.

 

<후타미(1926)>에 앞서 <다리야(1917)>가 있었고, <다리야>보다 앞서 <남대문역 끽다점(1909)>이 영업 중이었으며, 그 이전에도 <오자와 신타로의 끽다점(1908)>과 송교(=신문로)<청향관(1908)>, 그리고 윤용주가 주인이었던 <홍릉앞 끽다점(1899)>이 개업한 바 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191035일자 <대한매일신보> 2면에는 <청향다관>이라는 요리점 겸 끽다점이 새로 개업한다는 다음과 같은 광고문이 실렸다.

 

청향관 신설. 윤진학(尹進學)씨가 광교 북천변에 <청향다관(淸香茶館)>이라는 요리점을 신설하고 각색 요리를 신선히 설비하고 명일부터 개시한다더라.”

 

더구나 이 <청향다관>은 관공서나 민간단체의 모임이 열리는 요리점 겸 끽다점이었음을 보여주는 신문 보도가 2개나 있었다. 191038일과 15일의 <대한매일신보> 기사였다.

 

실업가 조병택씨 등 10여인이 재작일 하오2시에 종로 <청량다관>에 모여서 목공조합소 확장할 사건을 협의하였다더라.” (38일자)

재작일 하오3시에 각부대신이 광통관에서 서화를 구경하고 인하여 <청량다관>에 회동하여 만찬회를 하였는데 그 연회 경비는 농상공부 대신 주중응씨가 담당하였다더라.” (315)

 

1910년 3월5일의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청향다관> 개업 광고. 광고 내용에는 커피나 차에 대한 서술이 없지만, 요리점의 이름을 '다관'이라고 지은 것으로 보아 끽다점을 함께 운영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같은 조사결과를 종합하면 경성 최초의 끽다점은 <후타미>’였다는 노다객의 회상은 물론, ‘조선인 최초의 끽다점이 <카카듀>’라고 했던 주장까지 흔들리게 된다. 일제 강점기 이전에 개업했던 <청향다관(1910)><청향관(1908)>, 그리고 <홍릉앞 끽다점(1899)>의 주인들은 모두 조선인이었기 때문이다. <청향관>의 광고문은 그 주인이 대한 사람임을 명시적으로 밝히기까지 했다.

 

한편, 요리부와 완전히 분리된 끽다점, 즉 커피전문점만 고려한다고 해도 <카카듀(1928)>이전에 다른 끽다점이 개업된 바 있음이 확인되었다. 종합 문예지 <개벽> 19265월호에 첨구생(尖口生)이 기고한 <경성잡화(京城雜話)>라는 글 중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이성용(李星鎔), 이양용(李瀼鎔) 양 박사와 기독교 청년학관의 독일어 교사 양승익(浪承翼)군은 남대문통 소광교 부근에 경성 초유의 <백림관(伯林館)>이라는 독일식 다점을 열고 영업을 개시하였다 한다. 아무 영업이라도 아니하는 것보다는 좋지마는 독일 유학생으로 다년간 연구의 결과가 그 뿐일까. 아마 그들의 전공한 학과는 다과(茶料)요 또 박사시험 논문에도 다점 설계서를 제출하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풍문에는 독일미인의 뽀이까지 있다고 하야 호기심으로 가는 사람이 많았었는데 실제에 가본즉 독일미인은 그림자(影子)도 업고 독신의 총각놈 뽀이만 쑥쑥 나와서 모두 실패하였다고.”

 

 

이성용(왼쪽 위)이 독일 프라이부르크 의과대학 유학시에 만나 결혼한 체코 국적의 보헤미아 출신 마리 와이스 하웁트만.

백림(伯林)’이란 베를린의 한자식 음차어이므로 <백림관><베를린 끽다점> 정도로 번역될 수 있겠다. 기사 마지막의 독일미인의 뽀이에 대한 풍문은 이성용의 아내 마리 와이스 하우프트만을 오해한 것으로 보인다. 이성용은 프라이부르크 유학 시절에 만난 체코 국적의 보헤미아 출신의 간호학과 학생 마리 하우프트만과 결혼해, 192511월 함께 귀국했었다.

 

<백림관(1926)>에 대한 다른 기록이 발견되지 않아 더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이 끽다점은 이경손이 문을 열었던 <카카듀(1928)>보다 2년이나 앞서 개업했던 커피 전문점이었음에 틀림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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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역 끽다점(1909-1922)>은 요리부(=식당)와 끽다부(=카페)를 함께 운영했다. 즉 커피와 홍차 등의 차 종류뿐 아니라 샌드위치나 경양식 혹은 정식을 제공했다. 상호를 끽다점이라고 한 것을 보아 끽다부를 강조한 것이지만 식사도 할 수 있는 곳이었던 것이다.

 

끽다부와 식사부가 통합된 식당 시설이라면 <남대문역 끽다점>보다 앞선 시기에 문을 열었던 곳이 있었음을 보이는 문헌들이 다수 발견된다.

 

<남대문역 끽다점>이 개업하기 1년쯤 전, 19081025일의 <황성신문>은 대한의료원 낙성식 소식을 전하면서 이 낙성식을 축하하여 물품을 기증한 사람의 명단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조금 길지만 기사 전체를 인용해 본다.

 

 

어제 대한의원 낙성식에 물품 기증인원이 아래와 같으니 곧 청주 사쿠라마사무네(櫻正宗)는 타루타카다(樽高田)상회에서, 오뎅(關東煮) 1천 인분은 계동상회(計仝商會)에서, 그림엽서첩(繪端書) 2천권은 일한도서인쇄회사에서, 양주는 대서조모의점(模疑店大西組?)과 천산안(天山岸?)과 천우당(天祐堂=약방)에서,

 

과일은 우키야마 카키치(內山嘉吉), 시모베 키타로(下部喜太郞), 카도야나 오지로(門屋直次郞), 끽다점의 오자와 신타로(小澤愼太郞), 불꽃놀이용 화약 26본은 고바야시 후지우(小林藤右) 형문(衡門), 축하행사용 아치(緣門)는 후지와라 쿠마타로(藤原熊太郞)가 각각 기증했다.”

 

이 기증자 명단에 과일은 ... 끽다점의 오자와 신타로(가 기증)”이라는 말이 나온다. , 190810월 경성에는 오자와 신타로라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끽다점이 있었다는 말이다. 아쉽게도 오자와 신타로와 그의 끽다점에 대한 다른 기록은 아직까지 더 발견된 것이 없다.

 

 

한편, 19001124일의 <황성신문> 2면에는 <청향관(淸香館)>의 광고가 실려 있다.

 

송교 청향관(淸香館) 가피차 파는 집에서 진요리(眞料理)를 염가로 정결하게 하오니 첨군자(僉君子=여러분)는 왕림 시상(試嘗)하시오. 송교 청향관 고백(告白)"

 

송교(松橋)는 지금의 신문로1(=일제강점기의 서대문1정목)에 있던 다리 이름이자 그 인근지역의 동리 이름이었다. 따라서 이 광고문은 서대문1정목에 위치한 <청향관>이 원래 가피차 파는 집이지만 새롭게 진요리를 염가로 정결하게제공하기 시작했으므로 여러분이 오셔서 맛보아 달라는 뜻이다.

 

가피차(加皮茶)”란 커피의 다른 표기이므로 신문로의 <청향관(1900)>은 원래 끽다점이었다는 뜻이다. <남대문역 끽다점(1909)>이나 <오자와 신타로의 끽다점(1908)>보다 8년 이상 앞선 시기에 이미 <청향관(1900)>이 끽다점으로 영업 중이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 1899830일의 <독립신문> 4면 하단에는 다음과 같은 요리점 광고가 실렸다.

 

홍릉 앞 전기철로 정거장에 대한사람이 새로 서양요리를 만들어 파는데, 집도 정결하고 음식도 구비하오니, 내외국 손님들은 많이 오시면 소정대로 하여 드리이다. 윤룡쥬 고백.”

 

이 국문 광고문에 커피를 판다는 말은 나오지 않지만, 다음날인 831일자 <독립신문> 영문판에는 같은 요리점의 영문 광고에 커피 등의 음료를 판매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REFRESHMENTS! Yun Yong Ju has opened Refreshment Rooms at the Queen's Tomb Terminus, close to the line, where refreshments of all kinds may be obtained including, Tea, Coffee, and Cocoa, etc. Special attention given to the needs of foreigners.”

 

이 영문 광고에서는 요리나 식사에 대한 말이 없이 “Refreshment Rooms,” 즉 음료를 파는 곳으로만 되어 있다. 내국인들에게는 요리점으로, 외국인들에게는 끽다점으로 광고한 것이다.

 

따라서 <홍릉앞 끽다점(1899)>이야말로 지금까지 기록으로 발견된 경성의 첫 끽다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 끽다점의 역사가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순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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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역 2층의 구내식당은 최승희의 무용 경력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1926325일 아침 9, 최승희의 부친 최준현씨와 큰오빠 최승일, 그리고 이시이 바쿠 부부와 무용단원들이 한데 모여 경부선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시이 바쿠는 그의 자서전 <춤추는 바보(1955)>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출발 직전이었지만 경성역 2층 레스토랑에서 관계자 일동과 간단히 이별의 잔을 교환하게 되었을 때, 거기 모인 사람은 데라다 학예부장, 승희의 아버지, 오빠 승일, 조선 학생복을 입은 승희, 그리고 우리 무용단원들이었다.”

 

이시이 바쿠는 이별의 잔(れの)’을 교환했다고 했지만 아침부터 술잔을 돌렸을 리는 없었고, 아마도 커피나 차를 나누었을 것이다. 이날 아침 경성역 2층 식당 모임에 대해 최승희도 잡지 <신여성> 19331월호에 기고한 석정막과 나와의 관계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떠나는 날 경성역 식당에서 석정 씨들과 우리 가족 사이에 다시 구체적으로 계약이 되어 수학연한을 2, 의무연한을 1년으로 하였습니다.”

 

 

최승희가 이시이 바쿠를 처음 만난 것은 그로부터 이틀 전인 323일 저녁, 경성공회당에서 열렸던 이시이 바쿠의 공연이었다. 공연이 끝나자 최승일은 감동에 젖은 동생을 데리고 대기실로 찾아가 이시이 바쿠를 만났고, 그에게 동생을 제자로 입문시켜 주기를 부탁했다. 325일의 <경성일보> 기사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보도했다.

 

“... 경성 제3회 공연을 끝낸 23일 밤10시경 공회당의 이시이씨 일행의 대기실을 찾아와 제자가 되고 싶다고 부탁한 아름다운 조선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경성)부내 체부동 137번지 최준현씨의 영양(令孃) 최승희(16)였다.”

 

그날은 최승희가 숙명여학교를 졸업한 날이기도 했다. 최승희는 23일 오전10시에 숙명여학교 대강당에서 열린 졸업식에 참석했다. 이날 졸업한 숙명 17회 졸업생은 모두 76명이었고, 최승희는 그중 8등의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37일의 <시대일보>는 숙명 17회 졸업생들의 진로를 유형별로 보도했는데, 사범학교 진학생이 39, 일본 유학이 13, 국내 전문학교에 진학자가 5, 교원 취업자가 2, 그리고 졸업과 함께 혼인하는 학생이 16명이었다. 그런데 진로가 결정된 학생들의 수를 합해 보면 75명밖에 되지 않는다. 진로가 정해지지 않은 졸업생이 1명 있었다는 말이다. 최승희였다.

 

 

그러나 최승희의 진로는 이내 결정되었다. 졸업식 날 저녁 이시이 바쿠를 만났고, 제자 입문을 허락받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이틀 후에 최승희는 가족과 무용단과 기자들이 모인 가운데 경성역 2층 식당에서 계약을 맺고 도쿄로 출발했다.

 

최승희가 출발한 다음날인 326일자 <매일신보>는 최승희가 무용 유학을 떠난 사실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특히 무용시가 남매(=이시이 바쿠와 이시이 코나미)의 눈에 띤 가련한 흰옷 입은 조선 소녀의 아담한 자태가 매우 흥미를 끌어 ... 청년 문사 최승일(崔承日)씨의 영매로 올해 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최승희양이 다행히 부모의 승낙과 이시이씨 남매의 눈에 들어 이십오일 아침 경성을 떠나게 된 것이다.”

 

최승희가 무용계에 투신하게 된 계기로 323일 밤의 이시이 바쿠 경성공연을 들곤 한다. 맞는 말이다. 그날 난생 처음 신무용을 관람했던 최승희는 이시이 바쿠의 무용시에 감명을 받았고 자신의 운명을 바꿀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그 운명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한 출발점은 <경성역 2층식당>이었다. 그날 이시이 무용단과 최승희 가족이 함께 마셨던 모닝커피는 이시이 바쿠의 표현대로 이별의 잔이기도 했지만, 스타 탄생을 알리는 축하의 잔이기도 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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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역 끽다점(1909-1922)><경성역 그릴 및 끽다점(1925-1945)>은 경성시민들의 여행공간이자 생활공간이었지만,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공간이기도 했다. 그중 하나가 강우규 의사가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1858-1936) 조선총독 암살을 시도한 사건이다.

 

강우규(姜宇奎1855-1920)54세였던 191992일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를 폭탄으로 저격했으나 폭탄이 다른 데로 떨어져 터지는 바람에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평안도 덕천 출생인 강우규 의사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기울자 만주 북간도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시작했고, 1910년 조선이 강점되자 가족들을 노령으로 이주시켰고, 1915년부터는 요동과 블라디보스톡을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이 시기 강우규 의사는 요동반도 요하 주변에 농토를 개간하여 신흥촌(新興村)이라는 한인 정착촌을 건설했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강우규는 총독 암살을 결심하고, 러시아인으로부터 수류탄을 구입해 원산부를 거쳐 경성에 잠입했다. 거사일인 92일 아침, 일찍부터 남대문역에 나와 기다리다가 2층 귀빈실을 나서는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빗나갔다. 폭탄은 일제 관헌과 일본인, 친일파 조선인 환영객 37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강우규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되지는 않았으나, 경성 시내에서 도피하던 중 독립운동 탄압으로 악명 높은 총독부 고등계 형사였던 친일파 김태석(金泰錫)에게 체포되어 917일 수감되었다. 이후 총독부 고등법원 재판에서 총독 암살미수혐의와 민간인 사상 혐의로 사형을 언도받아, 19201129일 서대문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그는 거사, 체포, 재판, 교수형을 당하기까지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고 시종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강우규 의사의 생애와 의거에 대한 기록과 평가는 송상도(宋相燾, 1871-1947)<기려수필(騎驢隨筆)>에 기록되어 있다. <기려수필>에는 1866년 병인양요 때에 자결 순국한 이시원부터 개항기 의병전쟁, 안중근, 김지섭, 윤봉길 등 독립운동가 239명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 책은 강우규 의사의 거사일 아침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9)2일 아침에 나와 보니 남대문역에는 구경군들이 이미 차 있었다. 강우규는 들어가 끽다점 앞에서 기다렸다. 사이토가 귀빈실을 나서 마차에 올라타려고 하자 강우규는 (폭탄의) 안전판을 뽑아내고 그것을 멀리 던졌다. (二日朝出, 南門驛觀者已塞塡, 宇奎入喫茶店前以待之, 於是齋藤出貴賓室, 方乘馬車, 宇奎拔安全栓, 大投之).”

 

<기려수필>에 따르면 아침 일찍 남대문 역에 도착한 강우규 의사는 역사 2층으로 올라가 <끽다점> 앞에서 사이토 마코토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사이토 마코토가 기차에서 내린 후 잠시 머물렀던 귀빈실이 2층이었고, 또 끽다점이야말로 일제 관헌의 주목을 끌지 않으면서도 거사 시간을 기다리기 좋은 장소였을 것이다.

 

 

끽다점이 일제 요인 암살에 활용된 것은 안중근 의사 때도 마찬가지였다. 안중근 의사는 거사일인 190992일 아침, 하얼빈 역의 끽다점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당시의 공판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검사: 이토 공작이 승차한 열차는 몇 시에 도착하였는가?

안중근: 나는 7시경부터 기다리며 끽다점(喫茶店)에서 차를 마시고 있은즉 9시경에 공작의 열차가 도착했다.

 

검사: 이토 공작이 승차한 열차가 도착했을 때 그대는 어떠한 행동을 하였는지 진술하라.

안중근: 내가 끽다점에서 차를 마시고 있을 때 열차가 도착했다. 주악이 있었고 병대가 경례하는 것을 보았으므로 나는 차를 마시면서 이토가 하차하는 것을 저격할까 또는 마차에 타는 것을 저격할까 하고 생각했다.

 

안중근 의사와 강우규 의사는 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역사적 순간을 기다리면서 침착하게 한 잔의 커피를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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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를 통해 살핀 <남대문역 끽다점>끽다부보다는 식사부에 치우친 경향이 있었다. 이곳의 요리가 비싸고 고급이라는 사실이 일반인과 미디어의 주목을 끌었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작가들의 작품 속에는 <경성역 끽다점> 장면들이 자주 등장한다. 우선 박태원의 중편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에는 경성역 끽다실 에피소드를 보자.

 

그는 눈앞에 경성역을 본다. 그곳에는 마땅히 인생이 있을게다. ... 문득 한 사내가 ... 구보 앞에 그의 모양 없는 손을 내민다 ... 이거 얼마만이야. 어디, 가나? , 자네는... 저기 가서 차라도 안 먹으려나. ... 그는 주문 들으러 온 소녀에게, 나는 가루삐스(칼피스), 그리고 구보를 향하여, 자네도 그걸루 하지. 그러나 구보는 거의 황급하게 고개를 흔들고, 나는 홍차나 커피로 하지.”

 

 

이 작품을 통해 일제강점기의 소시민적 지식인의 무기력한 일상과 정신적인 방황을 읽을 수 있다고 하지만, 적어도 이 장면을 통해서는 당시 <경성역 끽다점>의 위치와 메뉴, 그리고 종업원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 <경성역 끽다점>1층의 복잡한 3등 대합실에서 뚝 떨어진 ‘2등과 1등 대합실곁에 위치해 있었고, 종업원은 소녀였으며, 메뉴로는 커피와 홍차뿐 아니라 칼피스 등의 주스 종류도 구비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상의 <날개(1935)>에는 주인공이 경성역을 두 번 방문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첫 번째는 커피를 마시러 갔으나 가진 돈이 없어 돌아서는 장면이었다.

 

여러 번 자동차에 치일 뻔 하면서 나는 그래도 경성역으로 찾아갔다. 빈자리와 마주 앉아서 이 쓰디쓴 입맛을 거두기 위하여 무엇으로나 입가심을 하고 싶었다. 커피! 좋다. 그러나 경성역 홀에 한 걸음 들여 놓았을 때 나는 내 주머니에는 돈이 한 푼도 없는 것을, 그것을 깜박 잊었던 것을 깨달았다. 또 아뜩하였다.”

 

이 장면은 끽다실에 이르기도 전이므로 커피를 판다는 점을 제외하면 끽다점에 대해 더 알려주는 것이 거의 없다. 다만 경성역 끽다점이 왠만한 액수의 돈이 필요한 비싼 곳임을 암시해 주기는 한다. 두 번째 방문에서 주인공 는 경성역 끽다점의 한 박스 좌석을 차지하고 영업이 종료될 때까지 머무른다.

 

경성역 일,이등 대합실 한켵 티이루움에를 들렀다. 그것은 내게는 큰 발견이었다. ... 나는 한 복스에 아무것도 없는 것과 마주 앉아서 잘 끓은 커피를 마셨다. ... 서글프다. 그러나 내게는 이 서글픈 분위기가 거리의 티이루움들의 그 거추장스러운 분위기보다는 절실하고 마음에 들었다. 이따금 들리는 날카로운 혹은 우렁찬 기적 소리가 모오짜르트보다도 더 가깝다.

 

나는 메뉴에 적힌 몇 가지 안 되는 음식 이름을 치읽고 내리읽고 여러 번 읽었다. ... 거기서 얼마나 내가 오래 앉았는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중에 객이 슬며시 뜸해지면서 이 구석 저 구석 걷어치우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 아마 닫는 시간이 된 모양이다. 열 한 시가 좀 지났구나, 여기도 결코 내 안주의 곳은 아니구나, 두루 걱정을 하면서 나는 밖으로 나섰다. 비가 온다.”

 

 

이 장면에서 이상은 끽다점이라는 일본식 한자어 대산 티룸이라는 서양식 외래어를 반복해서 사용했다. 또 앉은 좌석을 복스라고 한 것을 보니 이 끽다점에는 홀의 오픈 테이블뿐 아니라 주변으로부터 다소 격리된 박스 좌석도 마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곳은 주인공이 서글픔을 느낄 정도로 손님이 자주 바뀌는 곳이며, 모차르트 등의 서양식 고전 음악을 틀어주고 있었고, ‘치읽고 내리읽을 수 있을 만큼 제법 긴 목록의 메뉴판이 구비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11시면 영업을 종료한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이상의 <날개>를 통해 경성역 끽다실의 분위기를 전부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신문과 잡지가 대체로 복잡하고 화려하고 비싸고 고급진 곳으로 묘사하곤 했던 <경성역 끽다점>이 작가들의 눈에는 쓸쓸하고 서글프고 상실감을 안기는 곳으로 비쳐졌던 것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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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역(1900-1922)과 경성역(1923-1945)은 경성의 최고 명소였다.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여행안내서에는 조선호텔과 함께 경성역의 사진이 빠진 적이 없었다. 또 경성역은 신문과 잡지, 방송 등의 미디어는 물론,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화제였다. 새로운 문물이 모두 이 역을 통해 경성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남대문역은 19226월부터 신축공사가 시작되어 19259월에 완공되었고, 공사 중이던 192311일부터 경성역으로 개칭되었다. 신청사 완공 후에는 식당업무가 크게 증가했다. 2층 구내식당에는 5백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연회장이 구비되었고, 1층에는 1등 승객 대합실 옆에 <티룸>이 생겼다. 지하1층에도 일식당과 양식당, 그리고 중식당이 영업을 개시했다.

 

 

남대문역 시절과 경성역 시절을 막론하고 이곳의 식사비는 비싸기로 유명했다. 앞서 소개한 19161020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기행문 철원행에는 홍차 값이 바가지요금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에피소드가 소개되어 있다.

 

남는 30분을 이용하여 정거장 끽다점에서 양식 2-3품을 먹으려고 들어간즉 뽀이가 말하기를, ‘시간이 절박하여 조달치 못하니, 산도우잇지(=샌드위치) 같으면 된다하는 고로 부득이 산도우잇지를 주문하고 (동행) 김군과 함께 홍차 1잔씩을 마시는데, 5분 남았다는 종소리가 발차를 재촉하므로 계산한즉 산도우잇지 3개와 홍차 2잔에 그 값이 140전이라고 했다.

 

무심히 지불하고 승차 후 생각해 보니 그 값이 지나치게 높았다. 산도우잇지 1개는 25전이나 30전으로 기억하는데 30전으로 하여도 3개에 90전이다. 그러므로 홍차 2잔의 가격이 50전이라면 이는 매우 높았던 것이다. 질문해 보고자 했으나 시간이 절박하니 어찌하겠는가. 이는 필시 뽀이의 계산 착오인 듯하다.”

 

글쓴이가 지불한 샌드위치와 홍차 두잔 값 50전은 종업원의 계산 착오가 아니었을 것이다. 1930년대까지도 경성 시내의 커피 값은 10전이거나 그 이하였다. <남대문역 끽다점>에서 그보다 2.5배 비싸게 받는 것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도 스타벅스 커피는 그랑데 사이즈가 5천원으로 결코 싼 편이 아니지만, 유수 호텔의 커피 값은 2만원 이상이다.

 

<조선급만주> 19346월호의 식당순례에 따르면 경성역 구내식당의 일식 아침식사는 60, 점심과 만찬은 1원이었고, 양식의 경우는 아침이 80, 점심과 만찬은 125전이었다. 1936년에 조사된 활판식자공의 평균 일당이 121, 이발공의 일당이 123전이었다. 숙련노동자의 하루 일당이 한 끼 식사비였던 것이다.

 

 

오늘날 대리석 석공의 하루 일당은 숙련도에 따라 12-20만원이다. 한끼 식사비가 15만원이라면 철원행저자의 말마따나 지나치게 비싼 것(太高)’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남대문역 끽다점>이나 <경성역 구내식당>은 그처럼 높은 가격이 용인될 만큼 고급 시설이었던 것이다.

 

음식값이 높은 만큼 식재료와 요리 솜씨가 좋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특히 신선한 고급 식재료 공급에 수완을 가진 사람들이 선발되어 식료품 및 잡화의 공급 계약을 맺곤 했다. 경성의 명사들의 이름을 수록한 <경성시민명감(1921)>에는 <남대문역 끽다점>에 식자재를 공급하면서 부자가 된 마츠이 카이치로(松井嘉一郞, 1877-?)의 이름도 올라있다.

 

히로시마현 출신인 마츠이 카이치로는 19042, 27세의 나이로 조선에 건너와 경성의 식료잡화상점인 무라타(村田)상점에서 종업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2년 후인 19063월 그는 무라타 상점을 인수해 조선주차군 사령관 관저와 군사령부에 식료품과 잡화를 공급했다. 군납 계약을 따낸 것이다.

 

이후로도 그의 사업은 번창해서 1910년부터 조선총독부 관저, 1911년부터 리왕직 선무실에 식료품을 납품했다. 19134월부터는 철도국 남대문역 끽다점과 식당차용 물품을, 191410월부터는 철도국 호텔(=조선호텔)에 식료품을 납품했다.

 

마츠이 카이치로는 경성 주요기관의 식료품 공급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남촌의 최부촌 욱정(旭町) 3-199번지 저택에서 살면서, 경성의 명사 인명부에까지 올랐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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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역사는 19002층 목조 건물로 완공되어 재건축이 시작된 19226월까지 사용되었다. 공사기간 중이었던 192311일부터 남대문역은 경성역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19259월에 완공된 3층의 석조 신역사는 19251012일부터 개관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다.

 

남대문역이 경성역으로 개축되고 개칭됨에 따라 그 내부의 식당 시설도 변화를 겪었다. 1909년 개업 이래 1922년까지 사용되었던 <남대문역 끽다점>은 문을 닫았지만, 192510월부터 문을 연 신역사에서는 식당부와 끽다부가 분리되어 문을 열었다.

 

신축중인 경성역, 1924년 10월경, 오늘날의 서울역

 

잡지 <조선과만주(朝鮮及滿洲)> 19346월호에 실린 식당순례(食堂めぐり)”라는 기사는 경성역의 <구내식당><끽다실>에 대해 이렇게 보도했다.

 

“(제목) 경성역 2층식당 (본문) 경성역의 구내식당은 2층의 대식당과 1,2등 대합실 옆에 있는 끽다실, 그리고 열차식당도 경영하고 있다. 조선호텔과 마찬가지로 41일부터 철도국의 손으로 돌아와 관영하게 되었다. 양식, 일식, 중국요리가 주문에 따라 가능하다.

 

식당의 설비는 나무랄 데 없는 곳이다. 위층 대식당은 동시에 200명을 수용할 수 있고, 연회장으로도 이용할 수 있다. 근대식 설비의 건물인 만큼 공기가 매우 맑고, 요리도 상위권이다. 따로 소식당이 있어서 30명까지 테이블을 마련할 수 있다.”

 

<남대문역 끽다점>에 합쳐져 있던 식당부와 끽다부가 <경성역 구내식당><경성역 끽다실>로 분리된 것이다. 2층의 <경성역 구내식당>은 한꺼번에 2백명을 수용하는 연회장으로 사용될 수 있었으므로 각종 단체의 총회나 연례 모임에 대관되었다. 이 기사는 또 2층의 대식당과 1층의 끽다실의 종업원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2층의 접객 뽀이는 전부 남자로 20명이다. 조리사는 약 40명이다. 이곳 식당에도 여자 뽀이가 있으면 부드러운 맛을 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주문이 많다. 아래층의 접객 뽀이는 15살부터 20살까지의 여자로 7명이다. 모두 모던한 그레이 유니폼을 입고 있다. 명랑하고 애교가 좋아서 인기를 얻고 있다.”

 

 

2백명을 접객할 수 있는 <구내식당>의 종업원이 20명인데, <끽다실>의 종업원이 7명이라고 한 것을 보면 끽다실의 규모도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적어도 50-70명을 한꺼번에 접대할 수 있는 정도의 규모가 되었을 것이다.

 

종업원을 뽀이라고 한 것이 이색적이다. ‘뽀이는 영어단어 보이(boy)’에서 전화된 말일 것임에 틀림없다. 일본이나 서양에서 들어온 신문물을 일찍부터 누리던 남성을 모던 뽀이라고 불렀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모던 뽀이는 흔히 모뽀(モポ)’라는 줄임말로 통용되었다.

 

그런데 이 기사에서는 여성 종업원도 뽀이라고 불렀다. 왜 여성을 뽀이라고 불렀을까? ‘모던 뽀이와 마찬가지로 모던 껄도 있었고, ‘모가르(モガール)라는 줄임말도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그런데도 당시 경성사회는 여자 종업원을 뽀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여종업원을 뽀이(ポーイ)라고 부른 것은 일본어 잡지 <조선급만주(19346월호)>의 실수가 아니다. 한국어로 발행되던 <동아일보(1927615)>에도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제목) 카페 엄중단속, 본정서의 철퇴, (본문) 시내에 있는 카페의 내용개선에 대하여 당국에서는 ... 뽀이고용관계에 여러 가지로 불미한 점이 많아서 ... 지난 십사일 오전 열시부터 관내 카페영업자 오십삼명을 동서루상으로 모아가지고 ... 작부나 여뽀이들을 카페문간에 내어보내어 손님을 끄는 등의 일은 절대로 하지 못한다...”

 

이 기사에는 아예 뽀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직역하면 여자소년이라는 형용 모순의 비어인데도 당시에는 신문에 쓸 정도로 정상적인 어법이었다. 아마도 식당과 끽다점 등의 신문물 서비스업의 종업원이 대부분 남성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뽀이라고 불렀던 관행이 그 직종에 여성들이 진출한 후에도 그대로 사용되었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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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야(1917)>보다 먼저 개업된 끽다점은 1909111일에 개업한 <남대문역 끽다점>이었다. 남대문역이란 지금의 서울역(1947-지금)이지만, 한동안 경성역(1923-1947)이라고 불렸고, 그 전의 명칭이 남대문역’(1900-1923) 혹은 남대문 정거장이었다.

 

일제 강점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던 1909년 한성에는 중구 순화동 1번지부근, 즉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자리 서남쪽에 서대문역이 있었고, 이것이 경인선(190078일 개통)의 시발점이었다.

 

경인선은 1899918일 개통되었지만 당시의 시발역과 종착역은 노량진역과 인천역이었다. 까지였다. 이때 경인선이 한성까지 닿지 못한 것은 한강을 건널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강 철교 공사는 1897329일 시작되었으나 인력난과 재정난으로 지연되다가 19007월에야 완공되었고, 이에 따라 용산역과 남대문역을 거쳐 서대문역까지 연결된 것이 190078일이었다. 일제 강점 후에는 서대문역이 경성역이라고 불렸다.

 

1910년경의 남대문 정거장

 

한편 서대문역과는 별도로 1900년 남대문역이 2층의 목조건물로 신축되었고, 1919년 서대문역이 폐쇄된 후에는 남대문역이 서울로 통하는 모든 철도의 관문 역할을 했다.

 

이 남대문 역사 2층에 끽다점이 생긴 것이다. 1909113일의 <황성신문> 2면에는 다음과 같은 한 문장짜리 단신이 보도되었다.

 

“(제목) 다방개설, (본문) 남대문 정거장에는 1일부터 끽다점을 개설하였다더라.”

 

<남대문역 끽다점>은 역사 2층에 마련되었고 식당부와 끽다부가 합쳐진 형태였다. , 일식과 양식, 중식뿐 아니라 커피와 홍차를 주문할 수 있었다. 1915년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출판한 여행 안내책자 <조선철도여행안내(1915)>에는 <남대문역 끽다점>의 내부 사진이 2장 실려 있다.

 

끽다점의 현관문을 찍은 사진에는 유리창에는 리프레쉬먼트 룸(Refreshment Room)”이라고 영문으로 쓰인 밑에 끽다점(喫茶店)이라고 한자로도 표기되어 있었다. 이 유리현관문의 윗편과 양 옆에는 꽃무늬의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이 되어 있었고, 그 위에는 부채꼴 모양으로 다시 한 번 <끽다점>이라고 씌여 있었다.

 

 

끽다점 내부를 촬영한 사진에는 2인용과 4인용 테이블들이 희고 긴 테이블보에 덮여 있었고, 각 테이블 위에는 두어 개의 양념통과 함께 꽃이 꽂혀 있어 미관에도 매우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했다. 테이블 뒤편, 현관문 바로 앞에 서 있는 남자 종업원은 흰색의 상의제복에 짙은색 바지를 갖춰 입고서 예의를 갖춰 접객할 준비를 갖춘 것으로 보여, 오늘날의 고급 레스토랑을 연상시킨다.

 

<다리야(1917)> 이전에 <남대문역 끽다점(1909)>이 영업 중이었던 사실을 보여주는 또 다른 문헌도 있다. 19161020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철원행이라는 기행문에는 승객이 남대문역을 출발하기 전에 끽다점을 방문했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14일 오후 6시발 열차를 탑승하여 철원으로 향하고저 남대문 정거장에 도착한즉 ... 시각이 정확히 530분이므로 발차까지 30분의 여유가 있었다. ... 남은 30분을 이용해 정거장 끽다점에서 양식 2-3품을 먹으려고 들어가...”

 

<조선철도여행안내(1915)>의 사진과 <매일신보(19161020)>의 기사는 <다리야 끽다점(1917)>이 생기기 8년 전에 <남대문역 끽다점(1909)>이 영업 중이었음을 확인해 준다. 따라서 <청색지>의 노다객이 <후타미(1926)>를 경성의 첫 끽다점이라고 한 것은 오류였던 것이다.

 

<남대문역 끽다점> 이전에도 일반인에게 커피를 판매하던 끽다점이 있었을 가능성은 높다.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그같은 사실을 암시하는 기록도 몇 가지 남아 있다. 하지만 우선 <남대문역 끽다점>에 대한 기록들을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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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다객의 경성다방 성쇠기는 경성다방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한 글이다. 따라서 최초의 끽다점이 무엇이었는지가 그에게 중요했다. 노다객은 경성에 개업된 최초의 일본인 끽다점은 <후타미>, 조선인 최초의 끽다점은 <카카듀>이었다고 서술했다.

 

우선 <후타미>가 과연 경성 최초의 끽다점이었는지 검토했는데 새로운 사실이 다수 발견됐다. 노다객을 포함하여 많은 저자들이 경성최초의 끽다점은 1923년 본정 3정목에 개업한 <후타미>라고 서술했다. 서울시의 공식문건인 <서울정도 600>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서울에 지금과 같은 형태와 기능을 갖춘 다방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3.1운동 후였다 ... 1923년에 명치정에는 <이견(二見)>, 일본말로 <후타미>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다방이 문을 열었고, 이어서 본정, 즉 진고개 2정목에는 식료품점 <귀옥(龜屋)> <가메야> 안에 <금강산>이란 이름의 다방이 문을 열었다. 이 두 다방은 모두 일본사람들의 경영으로 문을 열었지만 우리나라 그것도 서울의 다방으로서는 첫 테이프를 끊은 셈이었다.”

 

그러나 <후타미>가 개업한 것은 1923년이 아니라 1926년이었다. 1926822일의 <경성일보>에 따르면 바로 그날, 1926822일이 <후타미>의 개업일이었다. 광고문은 22일부터 24일까지 개업 피로 행사기간에 참여하는 고객에게 '사은품(粗品)을 증정한다고 했다.

 

 

<후타미>의 개업년도가 1926년이라면 1927년에 개업되었다는 조선인 끽다점 <카카듀>와는 1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으며, 그것이 경성 최초의 끽다점일 가능성은 현저하게 줄어든다.

 

한편 <나카무라상회 끽다부>가 경성의 첫 끽다점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1963220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개화초기-차와 다방이라는 글에서 화가 김용진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1910(융희4) 8월 망국의 칙서가 내리기가 무섭게 서울 진고개에는 다방이 생기기 시작했다. 왜인 나카무라(中村)’란 자의 다방이 제일 먼저 생겼으나 잇달아 <메이지(明治)>, <공고산(金剛山)>, <모리나가(森永)> 등의 찻집이 생겨났다.”

 

김용진이 경성 최초의 다방이라고 서술한 <나카무라><나카무라상회 끽다부(中村商會喫茶部)>를 가리킨다. 1928629일자 <경성일보> 1면에 <나카무라상회 끽다부>개시된다는 광고가 실렸다. <나카무라(1928)><후타미(1926)>보다 뒤에 생겼으므로 그것이 경성 최초의 끽다점이었을 리 없다. 김용진의 기억에 착오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다른 한편, 일본어 잡지 <조선공론> 19322월호에 실린 빨간 꽃도 피는 경성의 단 곳이라는 기사에는 1920<다리야 끽다점>이 개업했다는 내용이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

 

저 멀리 10년 전, 1920년 가을에는 단 것을 파는 가계로서 현재의 끽다점을 경영하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으나, ... 카미요시옹(神吉翁)이 본정 2정목에 다리야 끽다점을 경영하고 있던 정도가 나의 기억에 있다. ... 그리고 나서 5,6년 지나고 나서 요시카와군(吉川君)이 본정 3정목 우편국의 건너편에 끽다점 <후타미(二見)>를 개업했다.”

 

 

<조선공론>의 이 기사에 따르면 경성 최초의 끽다점은 1920년 카미요시 나가사쿠(神吉長作, 1874-?)가 본정 2정목에 개업한 <다리야 끽다점>이다. 효고현 고베 출생의 카미요시 나가사쿠는 고베에서도 과자가게를 경영했던 사람으로, 191510월 조선으로 건너와 경성 본정 2정목 81번지에 과자점을 개업해 다리야 일본과자를 제조해 판매했다.

 

과자점이 자리 잡자 카미요시 나가사쿠는 본정 2정목 90번지에 별도의 끽다점을 개업했다. <조선공론>은 그 시점이 1920년 경이었다고 서술했으나, 더 자세한 인명기록에 따르면 <다리야 끽다점>의 개업은 191712월이었다. 카미요시 나가사쿠는 1930년 미츠코시 백화점이 개점되자 그 3층에 <다리야 백과점>을 입점시키기도 했다.

 

그렇다면 <후타미(1926)>보다 9년이나 일찍 개업한 <다리야(1917)>가 경성의 첫 끽다점이었을까? 아니었다. <다리야>보다 11년 전인 1909년에 개업된 끽다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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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듀> 조사의 출발점은 <왈츠와 닥터만>의 에세이였다. 그 에세이에는 3개의 문헌이 언급되었다. 잡지 <청색지> 19385월호에 실린 경성다방 성쇠기,’ 1940214일의 <조선일보>에 실린 안석영의 은막 천일야화,’ 그리고 잡지 <세대> 19644월호에 실린 이봉구의 한국 최초의 다방: 카카듀에서 에리자까지가 그것이었다.

 

우선 경성다방 성쇠기에 주목했다. 세 문헌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자료였고 <카카듀>의 개업에 가장 가까운 글이었기 때문이다. <왈츠와 닥터만>의 에세이에는 이 글의 일부만 인용되어 있었으므로 나는 중앙도서관에 가서 <청색지> 창간호를 찾아 글 전체를 복사했다.

 

 

경성다방 성쇠기3부분으로 나뉘어 서술되었는데, 노다객(老茶客)2부를 <낙랑파라(1932)>부터 서술하면서 이때부터가 경성다방문화사의 제2기라고 했다. 그 이전의 끽다점인 <카카듀><멕시코><뽄아미>는 경성다방 문화사의 초기에 해당한다고 분류한 셈이다. 경성다방 문화사 1부분을 통짜로 인용해 보자.

 

“(제목) 경성 다방 성쇠기, (글쓴이) 노다객(老茶客=필명), (본문) 서울서 맨 처음 우리가 다점(茶店)이라고 드나든 곳은 본정(本町=충무로) 3정목(=3), 현재 근처에 있던 이견(二見, 후타미)’이란 곳으로 이곳이 아마 경성 다방의 원조일 것이다. 그 다음이 현재 본정 2정목에 식료품점 구옥(龜屋=카메야쇼텐의 줄임말) 안에 있는 금강산으로 우리들과 같이 동경서 새 풍습을 익혀 가지고 돌아온 문학자나 화가나 그 밖에 지극히 소수의 내지인(內地人=일본인) 청년이 있을 뿐이었다. 아마 그 시절 다방 손님은 현재 적어도 나이가 30을 훨씬 넘은 중년으로 지금엔 대부분이 다방출입을 그만둔 이들이나 지금에 융성한 다방문화의 개척자들도 선공(先功)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뒤 조선사람 손으로 조선인 가()에 맨 처음 났던 다방은 9년 전 관훈동 초() 3층 벽돌집(현재는 식당 기타가 되어 있다.) 아래층 일우(一偶=한 구석)에 이경손씨가 포왜(布哇=하와이)에선가 온 묘령 여인과 더불어 경영하던 카카듀. 이 집은 이씨의 떼카(데카당스의 줄임말=퇴폐적) 취미를 반영하야 촛불을 켜고 인도 모직마포 테이블 크로스에다 조선가면을 걸어 놓고 간판 대신에 붉은 칠한 바가지 세 쪽을 달아 놓아 한때 경성 가두에 이채를 발()하였다. 그러나 경영에 능치 못한 이씨이고 다방도 그리 흔치 못한 때라 불과 수수(數數) 월에 문을 닫고 이씨는 상해로 가고 여주인의 행방도 알 길이 없었다.

 

 

그 뒤 2년인가 지나 본정에 명과(明果=메이지제과의 줄임말, 1930)가 개점을 하여 정말 맛있는 가배(珈琲=커피)를 먹여 이후 차 맛을 따라 모이는 손들을 끌거니와 역시 전문적 다점으로 종로대로에 근대적 장식을 갖춰 나타난 것은 8년 전 일미(日美=일본미술학교)의 도안과를 나와 현재 영화배우 노릇을 하는 김인규(金寅圭)씨와 심영(沈影)씨가 차려 놓았던 <멕시코(1929)>. 지금은 <뽀나미(1932)>와 더불어 가 되어 주객(酒客)의 모양밖에 찾을 길 없으나 당대엔 문사, 음악가, 배우, 신문기자들을 위시하야 문화인이 모여드는 양대 중심이었다.”

 

이어서 노다객은 제2기의 끽다점으로 김연실의 <낙랑파라(1931)>, 이상의 <69>, <제비(1933)>, <무기(, 1935)>, 유치진의 <플라타느(1932)>를 들었고, 이상의 <무기>가 북촌의 조선인 끽다점이 처음으로 남촌의 명치정으로 진출한 효시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어서 노다객은 제3기에 해당하는 끽다점으로 김관의 <에리자>, <하리우드>, <노아노아>, <미야지마>, <백룡>, <따이나>, 당시 신설의 <오리온>과 경성 역전의 <돌체>, 본정 3정목의 독일풍 다점 <>등을 들면서, 이 시기에는 명동이 끽다점의 중심이 되었다고 덧붙였다.

 

노다객의 경성다방 성쇠기는 경성의 조선인 끽다점 문화가 인사동과 종로에서 시작하여 소공동과 명동으로 이동했던 과정을 잘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가 당시의 끽다점을 망라한 것 같지는 않다.

 

예컨대 일본인이 개업했다는 <다리야(ダリヤ, 1920)>과 쇼카코오키나(小構子おきな, 1921)를 언급하지 않았고, 조선인이 개업한 <비너스(1928 혹은 1932)>도 누락되었다.

 

그보다 조금 더 심각한 것은 저자가 서술한 내용에도 몇 가지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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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츠와 닥터만><카카듀> 자료는 내용은 사뭇 미흡했지만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왈츠와 닥터만>의 창립자 박종만 선생의 열정에 감탄했다. 얼마나 커피를 좋아했으면 카페를 여는 데에 그치지 않고, 서울 중심가에서 뚝 떨어진 북한강가로 옮겨 박물관까지 세운단 말인가.

 

게다가 그는 커피 탐험대라는 조사단을 꾸려서 몇 년째 커피와 관련 지역을 탐방하고 있었고, 한국뿐 아니라 해외 원정까지 다니고 있다는 홍보문을 읽으면서 우리는 경탄했다. 홍보문에 다소 과장이 섞여 있더라도 그런 사업이 시도되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이맹수 선생과 주환중 선생은, 우리가 박물관의 <카카듀> 자료를 보충해서 박종만 사장의 노력을 도와주자고 했다. 나도 찬성했다. 우리가 이런 호기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은 그 무렵 우리가 무용가 최승희 선생의 집 주소를 두 개나 밝혀낸 바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찾아낸 것은 최승희 선생이 학창시절 거주지였던 체부동의 초가집 주소와 그의 생가였던 수창동의 기와집 주소였다. 리서치를 주로 담당했던 것은 나였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건축가인 주환중 선생이나 은행가인 이맹수 선생이 이런 종류의 자료 조사와 해석 작업에 익숙할 리 없었고, 그것은 문헌 조사와 자료 분석이 생업이었던 나의 일이었다.

 

새로운 결과가 나올 때마다 나는 이맹수 선생과 주환중 선생에게 보고했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우리는 다회를 열고 함께 의논해 나갔다. 나의 보고에 대한 이맹수 선생과 주환중 선생의 피드백은 유용했고, 때로는 신선하리만큼 창의적이어서 내가 조사를 계속하는 데에 새로운 방향을 열어주기도 했다.

 

최승희 선생의 학창시절 주소를 찾아냈을 때 우리는 구글맵에서 그 위치를 찾아내어 나란히 서촌 어귀의 <토속촌 삼계탕>집을 방문했다. 그 삼계탕 식당의 주차장으로 변해 버린 최승희 선생의 집터를 둘러보고 나서 우리는 한방 삼계탕을 한 그릇씩 먹었다. 성업 중인 <토속촌 삼계탕>의 내부는 시끄러운 편이어서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눈에 보이는 현상을 바꾸는 세월의 힘에 대해 잠깐이나마 이야기했던 것 같다.

 

 

최승희 선생의 생가 주소를 발견했을 때도 우리는 세종문화회관 뒤편에 모였다. 커피 한잔씩을 사들고 주시경 공원에서 경희궁 자이 아파트단지 사이를 거닐면서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최승희 선생의 생가를 머리속으로나마 그려보곤 했다.

 

최승희 선생의 두 주소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토지조사부><지적원도>를 열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자료를 보려면 복잡한 신청과 대기의 과정을 겪어야 했겠지만, 지금은 모두 인터넷 검색으로 가능하다. 이 자료에 대한 기초지식이 필요하고, 범위를 좁혀 들어가기 위해서 다소 지루한 시행착오 과정을 거쳐야 했지만, 어쨌든 그 자료는 공개되어 있고 어디서나 가용했다. 내 연구실의 책상 앞을 떠나지 않고도 80여년 전의 자료를 검색해서 참조할 수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임에 틀림없다.

 

법원의 <등기부>도 도움이 되었다. 이 자료를 보기 위해서는 해당 법원에 가서 자료 신청을 해야 했지만,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1910년대와 1920년대의 경성 주소지를 찾아낼 수 있다는데, 그 정도의 수고를 지불하는 것은 오히려 싼 편이었다.

 

 

<카카듀>를 추가로 조사해 박용만 사장의 노력을 돕기로 우리끼리 결정한 그날이 우리 모임 <카카듀를 찾아서>가 시작된 날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1920년대와 30년대의 커피 관련 자료를 찾아다녔다. 인터넷 검색은 기본이었고 수시로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을 방문했다. 한국의 커피사를 다룬 책이면 닥치는 대로 사서 읽었다. 영화감독 이경손을 조사하기 위해 방콕을 세 차례나 방문하기도 했다.

 

새로운 사실이 나올 때마다 나는 <카카듀를 찾아서>를 소집했고, 우리는 소박한 식사와 긴 다회를 통해 새로 발견된 사실을 이모저모로 곱씹으며 뿌듯해 하곤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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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내가 주환중, 이맹수 두 선생을 졸라서 <왈츠와 닥터만>에 가자고 한 것은 커피 박물관의 이 <카카듀> 설명문을 보기 위해서였다. 기대와는 달리 <카카듀>에 대한 설명은 지나치게 간략했다. “카카듀, 조선인이 운영한 최초의 다방이라는 제목의 패널 한 장과 유리 액자에 끼워진 인사동 일대의 지도 사진 한 장이 전부였다. 패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조선인이 운영하는 최초의 다방은 영화감독 이경손이 3층으로 된 병원 건물의 1층에 문을 연 카카듀였다. 1927년 개점하였다는 기록과 28년 개점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운영은 영화감독 이경손과 하와이 출신의 미스 현이라는 여인이 함께 했다. 전시회, 문학 좌담회 등 의욕적으로 문화행사를 개최했으나 경영상의 문제로 얼마 못 가 문을 닫았다.”

 

기록에 의하면 카카듀는 관훈동 초입 안국동 네거리 나가기 전 3층 벽돌집 병원건물의 1층에 위치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관훈동 지도를 통해 대략의 위치를 추정할 수는 있으나 아직까지 정확한 소재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왈츠와 닥터만 커피 박물관은 카카듀가 있었던 위치를 찾기 위해 조사를 수년째 계속 진행하고 있다.”

 

 

이 두 문단 사이에 사진 두 장이 나란히 끼워져 있었는데, 한 장은 <혜정박물관>이 제공했다는 1929년의 인사동 지도였고, 다른 한 장은 1917년의 경성부 관내 지적 목록이었다. 지도는 적절한 시기의 것을 제시했으나 <카카듀>의 정확한 위치를 표시하지 못했고, 지적 목록은 <카카듀>가 생기기 10년도 더 전인 1917년의 것이어서 <카카듀>와는 상관없는 자료였다.

 

그밖에 이 커피 박물관 전시물 중에는 <카카듀>에 대한 자료가 하나 더 있었지만 패널과 같은 내용이었다. 1929년의 인사동 지도가 다시 게재되었고 거기에 조선인이 운영한 최초의 다방 <카카듀>는 지금의 인사동, 안국동 네거리 나가는 곳에 위치했다.”고 설명되어 있었다.

 

커피 박물관을 방문하기 전, 나는 <왈츠와 닥터만> 웹사이트를 검색해 거기 포스팅된 20편 이상의 에세이들을 미리 읽었다. 그중에는 <카카듀>에 대한 글도 한 편 있었다. 박물관의 전시물은 이 <카카듀> 에세이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에 더해진 내용은 없었다.

 

<카카듀> 에세이가 밝혀내지 못한 사실도 있었다. 첫째는 <카카듀>의 개업시기였다. 전시물과 마찬가지로 에세이도 개업년도에 대한 견해도 분분해 사람에 따라 1927년 혹은 1928년이라 제각기 주장하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했다.

 

 

둘째는 <카카듀>의 소재지였다. 에세이는 <카카듀>현재의 인사동, 안국동 네 거리 나가는 길 못 미쳐 3층 병원의 1층 건물에 위치하였다고 하면서도 그러나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고 썼다.

 

셋째는 <카카듀>의 경영자였다. 에세이가 인용한 잡지 <청색지>경성다방성쇠기라는 기사는 <카카듀>이경손씨가 하와이에선가 온 묘령여인과 더불어 경영했다고 썼다. 에세이는 이 하와이에서 온 묘령의 여인미스 현이라고 밝혔지만 이름이 무엇이며 그가 누구였는지는 밝히지 못했다. 더구나 영화감독 이경손도 한국 커피사와 영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인물이지만 그에 대해 밝혀진 사실은 많지 않다고 했다.

 

넷째는 <카카듀>라는 이름의 의미다. 에세이는 이봉구를 인용하면서 국적조차 알 수 없는 이름을 둘러싸고 당시 사람들은 노서아어라느니 서반아어라느니 투우사의 애인이름이라느니 각종 추측을 쏟아 내었지만 (경손)씨에게 직접 들었다는 사람의 입에서 카카듀는 불란서 혁명 때 경찰의 눈을 피해 모이는 비밀아지트인 술집 이름이었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이 설명은 신뢰하기 어려웠다. 우선 카카듀라는 말은 프랑스어 단어가 아니다. 프랑스인들이 성이나 이름으로 쓰던 말도 아니다. 프랑스어에서도 외국어나 외래어임에 틀림없을 이 말을 근거로 그것이 프랑스의 술집 이름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커피 박물관을 둘러보고 다시 카페로 향하면서 이맹수 선생이 내게 말했다. “<카카듀> 소재지를 자네가 한번 찾아보면 어떨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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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개업한 최초의 커피전문점으로 알려진 <카카듀>를 찾아 나선 것은 20181229일이었다. 그날 우리는 서울 동북부 30킬로미터쯤에 위치한 남양주의 커피전문점 <왈츠와 닥터만>을 찾았다. 그날의 우리란 이맹수 선생과 주환중 선생,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었다. 이후 여러 명이 더 참여하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카카듀를 찾아서>의 첫모임이었다.

 

한 겨울이었고 강변도로 건너로 보이는 얼음 덮인 북한강은 차갑고 을씨년스러웠다. 하지만 유럽의 성채 같은 <왈츠와 닥터만>은 단단하고 믿음직스러운 외양으로 차가운 겨울 강바람을 완벽하게 차단해주고 있었다. 현관 옆 외벽에 걸린 청동 명패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커피 캐슬, <왈츠와 닥터만>100년 가는 커피 명가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북한강가에 세운 아름다운 커피 왕국입니다. 1989년 홍대앞 커피하우스 <왈츠>의 문을 연 것으로 시작해 우리나라 노지에서의 커피재배 연구(1998), 한국 최초의 커피 박물관 개관(2009), 닥터만 금요음악회(2006), 그리고 커피 역사 탐험대 출정(2007) 등 한국 커피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겨오고 있습니다.”

 

남양주 북한강가에 세워진 왈츠와 닥터만. 레스토랑과 카페, 커피 박물관을 함께 운영할뿐 아니라 금요음악회가 3백회를 넘긴 '커피 왕국'이다.

 

이 명패에 따르면 <왈츠와 닥터만>의 역사는 30년이 넘었고, 차와 식사를 제공하는 카페 겸 레스토랑이자 한국 커피사를 전시한 박물관이고, 커피 재배까지 시도한 커피 캐슬이다. 게다가 매주 금요일 밤에 열리는 음악회가 이미 3백회를 넘겼다는 것으로 보아 <왈츠와 닥터만>커피와 음악의 왕국을 자처한다 해도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현관 옆에 다양한 크기의 항아리와 크고 작은 선인장 화분들이 배열되어 있어서 입장객의 시선을 잠시나마 머물게 했고, 현관 오른편으로는 야외 테이블이 몇 개 놓여 있었다. 겨울철에야 차가운 날씨로 야외에 자리 잡는 손님이 없겠지만 봄가을이나 한여름에는 시원한 강바람을 즐기면서 커피를 마실 수 있게 준비해 놓았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쪽에는 바가 마련되어 있고 왼편이 카페 겸 레스토랑이다. 원목 테이블과 짙은 갈색 소파들이 가지런히 배열된 모습은 전체적으로 중후하고 차분한 옛 유럽풍이다. 크고 두터운 유리창들이 오후 햇살을 충분히 투과시켜 실내는 밝고 따뜻하고 아늑했다.

 

<왈츠와 닥터만>에서 내가 주문한 커피. 내가 그때 뭘 주문했는지는 잊었다. 아마도 쓸지언정 시지 않은 브랜드로 달라고 했을 것이다.^^ 이곳의 커피는 향과 맛도 좋지만 커피 잔이 아주 매력적이다.

 

우리는 가장 안쪽의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정장 차림의 주문 받으시는 분으로부터 메뉴판에 빼곡히 수록된 커피에 대한 설명을 경청한 후, 우리는 각자 마음에 드는 커피를 한잔씩 주문했다. 점심을 걸렀다는 주환중 선생은 크림소스 새우 파스타도 하나 주문했는데 배만 부르지 않았다면 나도 하나 주문하고 싶을 정도로 맛깔져 보였다.

 

다른 손님이 없는 틈을 타서 우리는 실내에 전시된 장식물들도 찬찬히 돌아보았다. 고풍스런 오르간을 중심으로 한 성탄 장식이 섬세했고, 우리 테이블과 통로를 사이에 두고 가드레일 저편에 마련된 한 테이블에는 수필가 피천득 선생이 즐겨 앉던 자리라고 쓰인 안내판이 있었다. 그 테이블 옆의 작은 서가에는 피천득 선생의 수필집 <대화><인연>, <어린 벗에게> 등이 꽂혀 있었다.

 

제공된 초콜릿 쿠키와 함께 커피 맛을 충분히 즐긴 우리는 박물관 구경에 나섰다. 같은 건물의 반을 박물관으로 꾸민 것이지만, 입구는 건물 바깥쪽에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입장권을 구입하고 들어서자 고즈넉한 박물관 특유의 냄새에 커피향이 섞여서 밀려왔다.

 

커피 박물관 중앙 전시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곳의 커피 관련 전시물들은 그 수와 종류가 많은데도 번잡하지 않게 잘 정리되어 있다.

 

가장 먼저 눈길을 잡아끈 것은 박물관 중앙 바닥에 놓인 전시물이었다. 커피 물을 끓이는 화로와 함께 다구 세트가 놓여있고, 그 주위를 빙 둘러 고급스런 천으로 장식된 방속이 장방형으로 마련되어 있었다.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가 커피를 즐기던 자리를 복원한 것이라고 했다.

 

박물관은 그리 넓지 않았지만 한국 커피사를 잘 정리해 전시하고 있었다. 특히 3면의 벽에는 한국에 커피가 들어온 이래로 있었던 여러 사실과 에피소드들을 보여주는 8개의 설명 패널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중 우리의 눈길을 끈 것은 한국 최초의 커피전문점으로 알려진 <카카듀>의 안내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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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1937217일의 경성 조선호텔에서 열렸던 관광협회 간담회에서 처음 제안되어, 1939217일의 파리 시사회를 끝으로 기록에서 사라졌다.

 

이후 50년 동안 <대금강산보>는 잊혀졌다. 초기의 평전 저자들도 <대금강산보>를 몰랐다. 서만일의 <조선을 빛내고저(1958)>와 다카시마 유사부로의 <최승희(1959)>에도 이 영화는 언급되지 않았고, 다카시마 유사부로가 <최승희(1981)>의 재판을 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10여년이 더 지나서 출판된 강이향의 <생명의춤 사랑의춤(1993)>도 자전적 영화 <반도의 무희(1936)>에 대해서는 비교적 길게 서술했지만, 불과 2년 후에 개봉된 <대금강산보(1938)>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1939년 2월17일 <대금강산보>가 상영되었던 파리의 살드예나 극장. 이후 이 영화에 대한 기록은 발견된 바 없다.

 

평전 중 처음으로 <대금강산보>를 언급한 것은 정병호(1995)이다. 파리 시사회 이후 이 영화가 기록에서 사라진 지 56년만의 일이었고, 정병호의 가장 큰 공헌이다. 정병호는 다카시마 유사부로와 공동 편집한 사진집 <세기의 미인무용가 최승희(1994)>에서도 <대금강산보> 로케이션 기간에 촬영한 최승희의 사진 5장을 수록했다. 이 사진들에 붙여진 설명은 불충분하거나 잘못된 것도 있지만, <대금강산보> 촬영 과정과 경로를 추적할 수 있는 단서가 되었다.

 

김찬정(2002)도 정병호(1995)를 인용하지 않고서 독자적으로 <대금강산보>를 서술했지만, 그는 일본 신문기사 하나에 지나치게 의존한 단점이 있다. 이후 정수웅(2004)과 강준식(2012)<대금강산보>를 언급하기는 했지만, 정병호와 김찬정의 서술을 인용한 것이 대부분이다.

 

강준식(2012)의 평전이 출간된 지 5년 후인 20175, 필자는 유럽취재를 통해 <대금강산보>가 파리에서 상영되었던 사실을 찾아낼 수 있었다. <대금강산보>8개의 최승희 무용작품이 삽입되어 있다는 점도 밝혀냈다. 그밖에도 <대금강산보>의 줄거리와 배역, 각 배역을 담당한 배우들을 밝힐 수 있었다. 이같은 사실은 2018년에 연재한 필자의 취재기에 언급되었고, 이 글에서도 좀 더 자세히 서술되었다.

 

최근의 조사로 최승희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에 대한 많은 것이 알려졌으나, 그 필름의 소재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필자의 조사에서 발견된 가장 중요한 점은 <대금강산보>의 제작 의도를 밝혀낸 것이었다. 최승희가 이 영화를 자신의 세계 순회공연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려고 했던 점은 기존의 평전 저자들이 잘 지적하고 있다. , 최승희는 해외 공연 전에 이 영화를 미리 상영함으로써 관객들이 조선무용에 대한 선이해를 갖기를 바랐고, 평론가들도 조선무용의 아름다움을 이국적이라는 관점 뿐 아니라 미학적관점에서 감상하고 비평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와 함께 필자는 조선 총독부가 최승희와 전혀 다른 관점에서 <대금강산보> 제작에 나섰던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다. 총독부의 강조점은 금강산에 있었다. 해외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것이 근본 의도였던 것이다. <대금강산보>는 조선총독부의 상시적인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한 방편으로 고안되었고, 1940년 도쿄 올림픽을 찾는 구미의 관광객들을 조선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홍보물로 사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최승희와 총독부는 <대금강산보>를 둘러싸고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었지만, 이 영화의 제작에 최선을 다했다. 최승희는 바쁜 공연 일정에도 불구하고 영화 촬영을 위해 일본과 조선을 여러 차례 오가면서 음악과 안무, 촬영과 편집과 시사회에 참여했다. 총독부도 철도국과 외사과를 동원해 최승희의 영화제작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총독부와 최승희의 의도는 둘 다 실현되지 못했다. 19377월에 터진 중일전쟁 때문이었고, 그 여파로 1940년 도쿄 올림픽이 취소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대형 악재가 터지자 <대금강산보>에 대한 총독부와 영화사의 관심은 퇴조했지만, 최승희는 끝까지 이 영화를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파리에서 시사회를 갖기에 이르렀다.

 

이 글은 <대금강산보>에 대한 희소하게나마 남아 있는 문헌을 중심으로 사실을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 앞으로 이 영화에 대한 자료가 더 발견되면 더 구체적인 사실들이 서술될 수 있을 것이다. <대금강산보>에 대한 연구는 이제부터 시작일 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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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는 1939년 2월17일의 파리 시사회를 끝으로 문헌에서 사라졌다. 이후 이 영화가 다시 상영되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세계 순회공연 기간뿐 아니라, 순회공연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파리 살드예나 극장 시사회 이후 <대금강산보>의 필름은 의상과 악기, 소품과 축음기 등과 함께 샹젤리제의 스튜디오에 보관되었음에 틀림없다. 전운이 감돌자 최승희는 8월 말경 파리 외곽의 바노성으로 숙소를 옮겼지만 스튜디오는 그대로 유지했다.

9월1일 전쟁이 터지고 일본 대사관으로부터 대피령을 받자 최승희는 숙소와 스튜디오를 철수해 보르도로 갔다. 제2피난선 카지마마루(鹿島丸)는 9월7일 보르도에 입항했지만, 순회공연을 이어가고 싶었던 최승희는 승선을 포기하고 기차 편으로 로마로 향했다. 

 

무용영화 <대금강산보>의 필름은 1939년 2월17일 시사회 이후 샹젤리제에 위치한 최승희 무용 스튜디오에 보관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환승을 위해 마르세유에 내린 최승희는 일본 영사관으로부터 이탈리아도 참전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더 이상 순회공연을 계속할 수 없음을 깨달은 최승희는 마르세유에서 제3피난선 하코네마루에 승선했다. 이 배는 9월18일 마르세유를 출발, 10월25일에 뉴욕에 도착했다.

최승희는 1939년 말부터 미국 공연을 재개했고, 1940년의 남미공연으로 이어졌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와 칠레, 페루와 콜롬비아, 에콰도르와 멕시코 공연을 마치고, 1940년 11월2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다츠타마루(龍田丸)에 승선했고, 12월5일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이상의 여정을 고려하면 1939년 2월17일 이후 <대금강산보> 필름의 소재는 4시기로 나눌 수 있다. (1) 9월7일까지는 상젤리제의 스튜디오에 보관되었을 것이다. (2) 파리를 출발해 보르도와 마르세유를 거쳐 10월25일 뉴욕에 도착할 때까지는 다른 짐과 함께 기차나 배의 화물칸에 적재되었을 것이다. (3) 미국과 남미 순회공연 시기에도 최승희는 이를 소지했을 것이다. (4) 일본에 돌아온 이후에는 에이후쿠초의 자택에 보관되었을 것이다.

순회공연 전 기간 동안 최승희가 필름을 분실하지 않았다면, <대금강산보>는 에이후쿠초의 자택에 보관되었다가 1944년 최승희가 도쿄를 떠나 베이징에 정착할 때 소지했을 것이다. 혹시 수하물 제한 등의 이유로 자택에 남겨두었다면 도쿄 대공습으로 저택이 파괴되었을 때 사라졌을 것이다. 약 2년의 베이징 체재 기간에도 <대금강산보>가 중국에서 상영되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이 필름은 도쿄에서 파괴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는 하다.

 

최승희는 1939년 9월18일 마르세유에서 피난선 하코네마루를 타고 유럽을 떠났다.


그러나 이 필름이 다른 곳에서 분실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파리를 떠날 때 스튜디오에 남겨두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소중한 필름이었으므로 일부러 남겨두었을 리는 없지만 실수로 분실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래서 필자는 유럽 취재 동안에 최승희의 대행사였던 <발말레트>와 시사회를 주최했던 <프랑코 야폰 위원회>를 조사했다. <프랑코 야폰 위원회>는 없어졌고 관련 자료는 패전과 함께 일본으로 이관되었다고 했다. <발말레트>는 독자적인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지만 목록상으로는 최승희와 관련된 어떤 자료도 소장하고 있지 않았다.

최승희가 파리를 떠나 보르도를 거쳐 마르세유로 이동하는 동안에 분실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피난민들이 한꺼번에 이동하던 시기였으므로 분실도 잦았고 분실물을 되찾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때 분실되었다면 <대금강산보>의 소재를 조사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미국과 남미 순회공연 기간에 필름을 분실했을 가능성은 낮다. 최승희가 비교적 안정적인 환경에서 공연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다만 1940년 10월 최승희가 칠레에서 스파이 혐의를 받고 황급히 보고타를 떠났을 때, <대금강산보>의 필름을 분실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는 없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대금강산보>의 필름은 도쿄의 에이후쿠초 저택에서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고, 혹은 남미 순회공연 시기에 칠레에서 분실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밖에 최승희가 이 필름을 중국으로까지 가져갔다면 그의 중국 체류시절을 조사해 볼 필요도 있다. 그러나 80여년이 지난 지금, <대금강산보>의 필름 소재를 찾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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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에 대한 조사를 계속하면서 어쩌면 이 영화가 칸 영화제에 출품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런 주장을 담은 문헌이나 증언을 접한 적은 없다. 그렇지만 조사를 진행할수록 그 생각이 떠나지 않았던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정황 때문이다.

첫째, 최승희는 프랑스의 새로운 영화제가 조직되던 시기에 프랑스에 체재했고, 1938년에 개봉된 극영화 <대금강산보>의 필름을 수중에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그는 조선과 일본을 제외한 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이 영화를 상영할 권리도 보유하고 있었다.

최승희는 또 파리 시사회를 통해 <대금강산보>를 유럽에서 상영한 바 있다. 어쩌면 이 시사회는 유럽 상영을 증명하기 위한 행사로 조직되었을 수도 있다. 이로써 <대금강산보>는 프랑스에서 조직되는 새로운 영화제에 출품할 수 있는 기본적인 여건을 갖춘 것이다.

 

1939년 9월 제1회 칸영화제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던 <카지노 뮈니시팔> 극장. 그해 2월26일 최승희는 이 극장에서 조선무용을 공연한바 있다.



둘째, 최승희가 칸과 비아리츠에서 공연을 기획했다는 점이다. 칸 공연은 1939년 2월26일, <카지노 뮈니시팔> 극장에서 열렸다. 1939년 상반기의 칸은 새로운 영화제 열풍에 휩싸여 있었다. 경쟁도시인 비아리츠를 제치고 영화제를 칸으로 끌어오기 위한 치열한 로비도 전개 중이었다. 새로운 영화제가 한창 화제가 되고 있었던 칸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최승희는 조선무용을 공연했던 것이다. 

한편 최승희는 비아리츠에서도 공연을 열기로 되어 있었다. 6월28일자 <바이온, 비아리츠, 바스크 가제트(Gazette de Bayonne, de Biarritz et du Pays basque)>는 최승희의 비아리츠 공연이 9월14일로 예정되었다고 발표했다. 

1936년 센서스에 따르면 프랑스 도시 인구는 파리(3백만명), 마르세유(90만명), 리용(57만명)의 순서였고, 보르도(26만명)와 니스(24만명), 툴루즈와 비아리츠(각 21만명), 낭트와 릴레(각 20만명), 스트라스부르(19만명)과 르아브르(16만명)가 뒤를 이었다. 칸의 인구는 5만명이었다.

최승희가 파리(1월31일)와 마르세유(3월1일)에서 공연을 가진 후, 인구가 더 많은 다른 도시들을 제치고 칸(2월26일)과 비아리츠(9월14일)에서 공연을 기획했던 것은 흥행 이외에 다른 고려가 있었다는 뜻이다. 칸과 비아리츠는 둘 다 새로운 영화제의 최종 후보지였다.  

특히 비아리츠 공연일은 9월14일이었는데, 이는 9월1일부터 20일까지로 결정된 새로운 영화제 개최기간에 포함되어 있었다. 당초 결정대로 비아리츠가 개최지로 확정되었다면, 영화제가 한창 무르익을 때 최승희의 무용공연이 열렸을 것이다. 그와 함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가 영화제의 출품작으로 상영되었다면 이는 흥행이나 홍보의 면에서 최상의 상황이었을 것이다. 

 

1939년 8월까지 유럽에 체재했던 최승희는 수중에 <대금강산보> 필름을 지니고 있었고, 해외 개봉권도 확보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프랑스에서 막 조직되고 있던 제1회 칸영화제에 <대금강산보>를 출품하려고 시도하지 않았을까?


최승희가 <대금강산보>를 유럽 영화제에 출품하려고 노력했다면, 베니치아 영화제보다는 칸영화제를 선호했을 것이다. 일본의 동맹국인 이탈리아와 독일이 주도권을 잡은 베네치아 영화제가 유리했을 수는 있다. 정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던 베네치아 영화제에 일본 정부의 도움을 받았다면 더욱 손쉬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최승희와 안막은 전체주의 국가의 예술 관행과 거리를 두었다. 최승희가 이탈리아와 독일, 그리고 독일의 영향아래 있던 오스트리아에서 공연하지 않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제1회 칸영화제의 출품작 40개의 명단에는 <대금강산보>가 포함되지 않았다. 또 1939년의 베니스 영화제에 출품된 13개 외국영화 출품작 명단에도 <대금강산보>는 없었다. <대금강산보>가 베네치아와 칸 영화제에 초청받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유럽 상영이 단 한차례 시사회에 그쳤기 때문에 영화제 조직위의 주목을 받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대금강산보>에 유럽어 자막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중일전쟁 발발로 <대금강산보> 제작이 4개월 지연되는 바람에 해외 상영용 필름에 자막을 달지 못한 결과는 이렇게 길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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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국이 프랑스의 새로운 영화제를 지원하고 나선 것은 이탈리아에 대한 정치적 항의였을 뿐 아니라, 경제적 대결이기도 했다. 이탈리아가 베네치아 영화제를 빌미로 할리우드 영화 수입을 독점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아의 할리우드 영화 독점을 막으려면 미국 영화산업이 유럽 시장에 진출할 새로운 창구를 마련해야 했다. 프랑스도 이탈리아를 제치고 할리우드 영화를 수입할 기회를 잡고 싶었다. 할리우드 영화의 유럽 판로를 둘러싸고 미국과 프랑스의 이해가 일치한 것이다.

새로운 영화제 창설이 호소력을 가지게 된 데에는 영화 종주국으로서의 프랑스인들의 자부심도 한 몫을 했다. 프랑스인들이 영화 종주국을 자처한 것은 뤼미에르 형제 때문이다. 

 

1939년 제1회 칸영화제 전야제 포스터, 그러나 성대한 전야제까지 마친 끝에 칸영화제는 이차대전 발발로 취소되었다.


오귀스트 뤼미에르(Auguste Marie Louis Nicholas Lumière, 1862-1954)와 루이 장 뤼미에르(Louis Jean Lumière, 1864-1948) 형제는 1895년 12월28일 파리의 그랑 카페 앵지앵 살롱(Le Salon Indien du Grand Café)에서 4-50초짜리 초단편 필름 10개를 상영했는데, 프랑스인들은 이것이 세계 최초의 일반 관객 영화 상영이라고 믿고 있었다.

새로운 영화제가 정부의 승인을 얻자 조직위원회는 장소 물색에 나섰다. 5-6개 도시가 영화제 개최를 신청했고, 최종적으로 대서양 연안의 비아리츠(Biarritz)와 지중해 연안의 칸(Cannes)과 니스(Nice)가 경합했다. 조직위원회는 1939년 5월9일 비아리츠를 영화제 개최지로 결정했지만, 공식 문헌에는 5월15일까지도 최종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기간에 칸 시정부와 시민 단체들은 영화제의 도시로 지정받기 위해 공격적인 로비를 계속했다. 칸 시정부와 시민들은 60만 프랑의 재원을 조성해 영화제 조직위원회를 지원하기로 결의했고, 니스를 포함한 주변 도시들과 협력해 숙박시설을 충분하게 준비하겠다고 약속했다. 이같은 로비 덕분으로 1939년 5월31일 영화제 개최지가 칸으로 변경되었고 최종 결정되었다. 

제1회 칸 영화제는 1939년 9월1일부터 20일까지로 결정되었다. 베네치아 영화제(8월8일-9월1일)가 끝나는 날 칸 영화제가 시작되게 일정을 조정함으로써, 베네치아 영화제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 조직위원회는 영화제의 명예 회장으로 뤼미에르 형제의 동생인 루이 뤼미에르로 추대했고, 루이 뤼미에르는 6월2일 이 제안을 정식으로 수락하고 취임했다.

조직위는 곧바로 참가국과 참가작품 물색에 나섰다. 독일과 이탈리아를 포함한 모든 영화 생산국에게 참가를 권유했고 약 2천명의 영화계 명사들에게도 초청장을 보냈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참가를 거부했지만 미국과 영국을 포함한 9개국이 참가하겠다고 통보했다. 참가한 영화 편수는 프랑스(11개)와 미국(9편)과 소련(8개)이 가장 많았고, 네덜란드(3편), 폴란드(3편), 스웨덴(2편), 영국(2편), 룩셈부르크와 체코슬로바키아가 각 1편씩이었다. 

 

 

1939년 제1회 칸 영화제에 출품되었던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 1939)>. 아카데미 6개부문에 지명되고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에 밀려 1개의 수상하지 못한 이 영화는, 칸영화제에서도 호평이 예상되었으나 영화제 자체가 취소되어 버렸다. 


칸 영화제 조직위원회는 교통편과 숙박시설도 점검했다. 1천여명이상이 참가의사를 밝혀왔기 때문에 이들을 수송하기 위한 기차 편을 증설하고, 숙박을 위한 호텔도 마련해야 했다. 대서양을 건너오는 미국 참가자들을 위한 전세 여객선도 마련되었다.

제1회 칸영화제는 <카지노 뮈니시팔> 극장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그해 2월26일 최승희가 조선무용 공연을 가졌던 바로 그 극장이었다. 이 극장은 1천 객석을 구비한 대형극장이었으므로 영화제를 열기에는 부족함은 없어 보였다.

마침내 1939년 8월31일, 제1회 칸 영화제의 전야제가 시작되었다. 전야제 상영작품은 <노틀담의 꼽추(The Hunchback of Notre Dame, 1939)>였고, 유럽과 미국의 영화인들은 흥분과 함께 기꺼이 참여했다. 모든 일이 순조로워 보였다. 

 



하지만 개막일인 9월1일, 조직위원회는 영화제를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곧이어 프랑스도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영화제는 취소되었다. 

전야제까지 치르고 취소된 칸영화제가 다시 열린 것은 이차대전이 끝난 이듬해였다. 1939년의 전야제는 까맣게 잊혀 졌고, 지금은 1946년에 열린 칸 영화제가 제1회로 간주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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