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이무용단의 대구 공연은 1926년 3월26일 저녁7시였다. 공연 준비는 전날 이미 끝마쳤으므로 이날 오후까지는 따로 할 일이 없었다. 이들은 공연 시간까지 어떻게 시간을 보냈을까?
1928년 6월16일자 <매일신보>에는 이시이무용단이 일본 큐슈(九州)지역 순회공연 중에 배를 타고 관광하러 갔다가 조난당했던 소식이 보도되었다. 최승희에 뒤이어 이시이무용단에 가입했던 조택원의 기고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지루한 여행에 곤한 몸을 2-3일 쉬는 동안에 일행 15명은 무참히 죽을 뻔 하였습니다. ... 발동선을 타고 나고야(名護屋)의 고성(古城)을 구경 차로 부는 바람도 돌보지 않고 전진하다가 다카시마(高島)에서 약 1리쯤 되는 곳에서 발동선에 고장이 생겨 다시 고칠 희망이 없이 노한 물결에 쓸려 금방 전복될 듯 하기를 4시간이나 되었습니다. 남자는 혹 살 희망이 있었는지 몰랐겠으나 바쿠(漠)선생 부인과 최승희 외 여자들은 어찌나 되었겠습니까? 모두 울며 토하여 그 광경은 참아보지 못하였습니다. ... 나도 아주 죽을 줄 알고 기도까지 하였었습니다.”
다행히 지나가던 어선의 도움으로 이시이무용단은 구조되었지만, 이 기사를 통해 우리는 이시이무용단이 순회공연 중에도 시간이 나는 대로 관광도 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시이무용단은 1926년 3월21일 아침7시에 경성에 도착했고, 그날 저녁부터 3일 연속 경성공회당에서 공연했다. 24일에는 인천공연을 했고 경인선 막차로 경성에 돌아왔을 때는 12시가 넘었다. 25일 아침 9시 경성역에서 최승희를 맞아 곧바로 대구로 출발했다. 4일 동안 강행군을 했던 셈이다. 다행히 25일과 26일 오후까지는 쉴 수 있었다.
이시이무용단이 대구 관광을 했다면 어디를 방문했을까? 1920년대 중반 대구의 명소로 꼽힌 곳은 골프장과 경마장, 화상대(花賞台)와 달성공원과 도수원(刀水園) 등이었다.
1백 년 전 대구에 골프장이 있었던 것이 뜻밖일 수 있겠지만, 당시 조선 원정 골프를 즐기는 부유한 일본인들이 많았고, 대구 골프장은 일본인들이 선호하던 프리미엄 골프장의 하나였다.
대구에 경마장이 생긴 것은 1924년 대구경마구락부가 창립되었을 때다. 1925년 봄에는 제1회 경마회가 개최되었고, 1929년에는 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조선의 6대 공인 경마장의 하나였다.
이시이무용단이 골프나 경마를 즐겼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아마도 대구부가 직영하던 화상대 유원지나 대구신사가 있었던 달성공원, 혹은 시내의 정원 도수원을 방문했을 가능성이 높다.
‘화상대’는 지금의 화원 유원지이다. 낙동강변 사문진에 자리 잡은 이 유원지는 꽃으로 유명했는데, 신라 경덕왕이 원래의 지명 ‘설화현(舌火縣)’을 ‘화원현(花園縣)’으로 바꾼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재위 중 아홉 차례나 이곳을 방문했다고 한다.
달성공원은 삼한시대의 토성 달불성 자리로 선조26년(1596년)까지 경상감영이 있던 곳이다. 1905년 공원으로 지정되었고 합병 직후 일본인들이 이곳에 대구 신사를 세웠다. <대구안내(1934)>에는 “공원이 울창한 삼림에 둘러싸여 사계절의 조망이 아름답다”고 기록되어 있다.
도수원은 행정(杏町=지금의 칠성동1가 18번지)에 자리 잡았던 유원지이다. 조선시대에는 대구향교가 운영하던 영귀원이었고, 후에 달성판관(=대구시장) 윤성원(尹成垣)의 저택이 되었는데, 1920년 일본인 기오노이에(靑乃家)가 이를 사들여 낮에는 공원, 밤에는 요정으로 꾸몄다.
1926년 11월19일자 <동아일보>는 도수원에 “광활한 저수지에 정자가 있고 버드나무와 꽃 등이 울창하고 연목에 배가 십여 척 넘게 있으며 영귀정이 고색창연하게 서 있다”고 서술했다. 도수원 입장료는 1전이었고, 배삯은 5전이었다.
최승희와 이시이 무용단이 반나절의 한가한 시간을 가졌다면 도수원을 방문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화원유원지는 대구역에서 서쪽으로 약 1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데다가 교통편도 적었고, 부영버스 요금이 편도 1인당 5전이었다. 달성공원은 대구역 서남쪽으로 약 2킬로미터 지점이어서 가깝지만, 대구역 동북쪽으로 1킬로미터 이내에 있었던 도수원이 가장 가까웠다.
최승희가 이시이무용단의 신입 단원으로 도수원에서 첫 소풍을 가졌다면, 그 4년 후 대구 출생의 민족시인 이상화는 1930년 10월호 <별건곤>에 발표한 “대구행진곡”이라는 시 작품에서 달구성과 도수원을 빗대어 나라 잃은 설움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반 남아 무너진 달구성(達句城) 옛터에나
숲 그늘 우거진 도수원(刀水園) 놀이터에
오고가는 사람이 많기야 하여도
방천(防川)둑 고목(古木)처럼 여윈 이 얼마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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