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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人沿海州移住2段階であり沿海州独立運動1段階1904日露戦争から1917のロシア革命直前時期までとえられます

 

 

この時期朝鮮乙巳勒約(1905)精米7条約(1907)庚戌国恥(1910)るまで段階的日本強制占領され暴圧的無断政治えられましたロシアも日露戦争(1904)敗北した第一次世界大戦(1914)とロシア革命(1917)につながる激動経験していました

 

 

しかしこの時期沿海州高麗人たちは生活安定独立運動人的物的土台強固まりました移住して定着した高麗人はロシア国籍取得して身分安定農業事業頭角しました一方日本乙巳勒約(1905)軍隊解散(1907)った朝鮮人沿海州亡命沿海州高麗人社会のリーダーシップを担当しました

 

高麗人勤勉団結いた安定印象的です代表的成功事例崔在亨先生でした素手をかけて国境えてからわずか2世代後のことでした1908、「同義会義兵募集した3千人兵士3ルブルの軍資金まったのがその証拠です

 

 

軍資金李瑋鍾先生父親李範珍駐露公使した1ルブルと崔在亨先生私財じて出演した13ルブルそして水清(のパルティザンスク)高麗人募金した6ルブルをめて3ルブルにしましたこれは今日10ウォンに相当します

 

水清地域寄付金かされます19327月号<三千里>によると、「水清村農民40戸余りにぎず人口300え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ということですが、「かにらすだったそうです40世帯3006ルブルの義兵軍資金募金されたのです

 

 

19086ルブルは201517ドル(金価格基準)たり現在韓国ウォンで24千万ウォンにたりますこれは1世帯平均6百万ウォン1人平均80ウォンずつ寄付したという意味です当時沿海州高麗人農民裕福独立への熱望かったという意味です

 

この時期には沿海州高麗人人口増加しました190634,399だった高麗人人口19105965非公式移住民まで6万人したと推定されています

 

 

高麗人人口増加豊富物産とともに抗日闘争根拠となりましたよく定着裕福基層農民この時期亡命してきた安重根柳麟錫洪範圖李相卨李種浩申采浩などの指導者結合日本朝鮮侵略対抗して闘争めました

 

19088、「同義会主軸義兵構成されすぐに国内への進出りました6万人人口から3千人義兵募集されました1900年代移住2世代えた高麗人年齢構成正常分布めたはずなので201割合義兵志願したということは男性農作業人力負担までいて皆義兵としてたという意味です

 

 

しかし<同義会>義兵(1908)国内進撃失敗いて構成された<13道義軍>日帝干渉でロシア政府によって解散されると抗日武装闘争熱気えました

 

その啓蒙運動外交運動きました延秋とニコルスク(=ウスリスク)とウラジオストクを中心学校新聞社設立され高麗人代表団体として聲明会(1910)勧業会(1911)大韓光復軍政府(1914)全露韓族中央会(1917)などが構成され活動しました

 

 

これと海朝新聞(1908)大同公報(1908)大洋報(1911)勧業新聞(1911)大韓人正敎報(1912)韓人新報(1917)靑丘新報(1917)韓族公報(1918)などのハングル新聞雑誌相次いで発行され高麗人社会国内外情勢らせ活動方向提示しました

 

 

この時期沿海州独立運動安定した民衆情熱的なエリートのびつきで活発展開されましたが日本外交的干渉高麗人独立運動団体はしばしばロシア政府弾圧独立運動家獄苦をなめたりしました(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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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연해주 이주의 2번째 단계이자 독립운동의 첫 단계는 1904년 러일전쟁부터 1917년의 러시아 혁명 직전시기까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조선은 을사늑약(1905)과 정미7조약(1907)을 거쳐 경술국치(1910)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으로 일제에 강점당했고, 폭압적인 무단정치에 억눌렸습니다. 러시아도 러일전쟁(1904)에서 패배한 후 일차대전(1914)과 러시아혁명(1917)으로 이어지는 격동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연해주 고려인들은 생활이 안정됐고, 독립운동의 인적, 물적 토대가 든든하게 다져졌습니다. 일찍 이주해 정착한 고려인들은 러시아 국적을 취득해 신분이 안정됐고, 농업와 사업에서 두각을 냈습니다. 한편, 일제의 을사늑약(1905)과 군대해산(1907)에 분노한 조선인들이 연해주로 망명해 들어와 연해주 고려인 사회의 리더십을 담당했습니다.

 

고려인들이 근면과 단결로 일군 안정과 부는 인상적입니다. 대표적 성공 사례가 최재형 선생이었지요. 맨손으로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은지 불과 2세대만의 일이었습니다. 1908<동의회>가 의병을 모집했을 때 3천명의 병사와 3만루불의 군자금이 모인 것이 그 증거입니다.

 

 

군자금은 이위종 선생의 부친 이범진(李範晉) 주러공사가 남긴 1만루불과 최재형 선생이 사재를 털어 출연한 13천루불, 그리고 수청(지금의 파르티잔스크)의 한인들이 모금한 6천루불을 포함해 약 3만루불에 달했습니다. 이는 오늘날의 약 10억원에 해당합니다.

 

특히 수청지역의 기부금이 놀랍습니다. 19327월호 <삼천리>에 따르면 수청마을의 농민은 약 40여호에 불과하고 인구는 300명을 넘지 못했지만, “남부럽지 않게 부유하게 사는 촌이었다고 합니다. 40가구 300인의 마을에서 6천루불의 의병 군자금이 모금된 것입니다.

 

 

1908년의 6천루불은 2015년의 17만달러(금값기준)에 해당하고, 오늘날 한국 원화로 약 24천만원에 해당합니다. 이는 한 가구 평균 6백만원, 1인 평균 80만원씩 기부했다는 뜻입니다. 당시 연해주 고려인 농민들이 부유했고, 독립 열망도 높았다는 뜻입니다.

 

이 시기에는 연해주의 고려인 인구도 증가했습니다. 190634399명이었던 고려인 인구는 1910년에 5965명으로 늘었고 비공식 이주민까지 6만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됐습니다.

 

 

고려인의 인구 증가는 풍부한 물산과 함께 항일투쟁의 근거가 됐습니다. 특히 잘 정착되고 부유한 기층 농민과 이 시기에 망명해 온 안중근, 유인석, 홍범도, 이상설, 이종호, 신채호 등의 지도자들이 결합해, 일제의 조선 침략에 맞서 투쟁하기 시작했습니다.

 

19088<동의회>를 주축으로 의병이 구성되고, 바로 국내진공을 단행했습니다. 6만명의 인구에서 3천명의 의병이 모집됐습니다. 1900년대 이주 2세대를 맞은 고려인의 연령 구성은 정상분포를 이루기 시작했을 것이므로, 20명에 한명 꼴로 의병에 자원했다는 것은 젊은 남성들이 농사 인력의 부담까지 제치고 모두 의병으로 나섰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동의회> 의병(1908)이 국내진격에 실패하고, 뒤이어 구성된 <13도의군>도 일제의 간섭으로 러시아 정부에 의해 해산되자, 항일 무장 투쟁의 열기는 사그라졌습니다.

 

그 뒤를 계몽운동과 외교운동이 뒤를 이었습니다. 옌치허(연추)와 니콜스크(=우수리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학교와 신문사가 설립되었고, 고려인 대표단체로 성명회(1910)와 권업회(1911), 대한광복군정부(1914), 전로한족중앙회(1917) 등이 구성되어 활동했습니다.

 

 

이와 함께 해조신문(1908)과 대동공보(1908), 대양보(1911), 권업신문(1911), 대한인정교보(1912), 한인신보(1917), 청구신보(1917), 한족공보(1918) 등의 한글 신문과 잡지가 잇달아 발행되어 고려인 사회에 국내외 정세를 알리고 활동의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이 시기의 연해주 독립운동은 안정된 민중과 열정적인 엘리트의 결합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나, 일제의 외교적 간섭으로 고려인 독립운동 단체들은 자주 러시아 정부의 탄압을 받았고, 독립운동가들이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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訪問団一行はクラスキーノで安重根義士斷指同盟記念碑とハサン湖戦闘勝利記念碑観覧したウスリスクに出発しました北東200キロを2時間半走ら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ので一行はバスの黃光石(ファン·グァンソク)先生司会本格的自己紹介をしました

 

 

今回訪問準備された黃光石朴美賢李高恩先生はすでに沿海州訪問めてではなく鄭聖勳李黃徽先生もウラジオストクに事業体運営していらっしゃった々なのできな感興はなかった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柳建柱林尙澤羅聖洙先生はもちろん朴漢龍キム·サモ朴仁浩全宰云金燦友先生沿海州訪問なのでめてるロシアの風光とあちこちに高麗人たちの辛酸人生熾烈いのにとても感動していました

 

 

紹介えた黃光石先生朴漢龍先生にマイクを高麗人沿海州移住史独立運動史概括的説明してくれるよう要請しました民族問題研究所研究室長歴任した朴漢龍先生クラスキーノ戦勝記念碑でもハサンいをリアルに説明してくださいました

 

 

事前準備くなかったにもかかわらず朴漢龍先生1860沿海州のロシア割譲から1937高麗人強制移住るまで青山流水講演30けました朴漢龍先生講義はどんどんってくる説明要点整理定評がありましたがこのじでした

 

朴漢龍先生1864最初移住から1937強制移住70年余りの歴史4段階移住史種縄独立運動史縦糸にしてドラマのような講演けました

 

 

最初のステップは初期定着時期です1860にロシアが沿海州占領してからわずか4年後18641咸鏡道景興出身14世帯65がノヴゴルド国境警戒所から15キロれた地新墟チシンホてました移住民次第シディミとヤンチヘ川流域にもができ1867この3つの高麗人人口1,801しました

 

1869しい洪水凶作韓国人大規模移住敢行しましたその9月末~10月初めだけで1,850地新墟村移住11月末~12月初めには4,500国境えました

 

 

ロシア当局高麗人国境地帯からスイプンシュパンレプダウビヘ川沿いなどの内陸移住させ1870年代末沿海州とアムールには216,766高麗人んでいました

 

ロシアは1884朝露修好通商条約締結以前ロシアに移住した高麗人にロシア国籍付与定住権られなかった移住民はロシア居住証ロシアの領土生活しましたそんな1900にはすべての高麗人移住者にロシア国籍付与されました

 

移住民1世帯当たり50デサチナ(=50ヘクタール)土地分配されそれによって租税義務わされました1895沿海州統計によると高麗人人口18400このうち16700沿海州スイフーンとポシエット地域600人余りはハバロフスク近郊1,100はアムールブラゴスロベンノイェんでいました

 

 

この時期朝鮮人沿海州移住したのは空腹のためだったというのが一般的説明です朝鮮朝廷政争暴政富国強兵養民には無能でした自然災害発生すると飢餓しみ未知土地である沿海州をかけて移住したのです

 

 

高麗人移住民にもうつの動機があったという主張もあります1861にロシアが断行した農労制廃止(Отмена крепостного)です農奴身分から解放された農民農地購入して自作農になったり土地りて農作業をする小作農になりました高麗人自由農業ができるという希望って国境えたのです

 

 

したがって朝鮮人沿海州への移住朝鮮暴政自然災害という排出要因とともに農労制廃止されたロシアの吸引要因同時作用してきた現象ることができます(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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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단 일행은 크라스키노에서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 기념비와 하산호 전투 승전 기념비를 관람한 후, 우수리스크로 출발했습니다. 북동쪽으로 약 2백킬로미터를 2시간 반 동안 달려야 했으므로, 일행은 버스 안에서 황광석 선생의 사회로 본격적으로 자기소개를 했습니다.

 

 

이번 방문을 준비하신 황광석, 박미현, 이고은 선생은 이미 연해주 방문이 처음이 아니었고, 정성훈, 이황휘 선생도 블라디보스톡에 사업체를 운영해 오시던 분들이어서 큰 감흥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류건주, 임상택, 나성수 선생님은 물론, 박한용, 김사모, 박인호, 전재운, 김찬우 선생과 저는 첫 연해주 방문이므로 처음 보는 러시아 풍광과 곳곳에 어린 고려인들의 신산한 삶과 치열한 싸움의 흔적에 자못 감동하고 있었습니다.

 

 

소개를 마친 후 황광석 선생은 박한용 선생께 마이크를 넘겨, 한인들의 연해주 이주사와 독립운동사를 개괄적으로 설명해 주시기를 청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연구실장을 역임하신 박한용 선생은 크라스키노 승전 기념상 앞에서도 하산호 전투를 실감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사전 준비가 전혀 없었는데도 박한용 선생은 1860년 연해주의 러시아 할양으로부터 1937년의 고려인 강제 이주에 이르기까지 청산유수의 강연을 30분이나 이어가셨습니다. 박한용 선생의 강의는 쏙쏙 들어오는 설명과 요점 정리로 정평이 났는데, 이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박한용 선생은 1864년의 첫 이주에서 1937년의 강제이주에 이르는 70여년의 역사를 4단계로 나누고, 이주사를 씨줄로, 독립운동사를 날줄로 삼아 드라마 같은 강연을 이어가셨습니다.

 

 

첫 단계는 초기 정착 시기입니다. 18641, 함경도 경흥 출신의 14가구 65명의 조선인들이 노브고로드(Но́вгород.) 국경초소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지신허(地新墟) 마을을 일궜습니다. 이주민은 점점 늘어서 시디미강과 얀치혜(연추)강 유역에도 마을이 생겼고, 1867년 이 세 마을의 한인 인구가 1,801명에 달했습니다.

 

1869년 극심한 홍수와 흉작으로 한인들이 대규모 이주를 감행했습니다. 그해 9월말-10월초에만 1,850명이 지신허 마을로 이주했고, 11월말~12월초에는 4,500명이 국경을 넘었습니다.

 

 

러시아 당국은 한인들을 국경지대에서 수이푼, 슈판, 레푸, 다우비헤 강변 등 내륙으로 이주시켰고, 1870년대말 연해주와 아무르주에는 21개의 마을에 6,766명의 고려인이 살았습니다.

 

러시아는 1884년 조러수호통상조약 체결 이전 러시아로 이주한 한인들에게 러시아 국적을 부여했고, 정주권을 받지 못한 이주민은 러시아 거주증을 받아 러시아 영토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러던 중 1900년에는 모든 한인 이주자에게 러시아 국적이 부여됐습니다.

 

이주민은 한 가구당 50데샤치나(=50헥타르)의 토지를 분배받았고 그에 따라 조세 의무도 지기 시작했습니다. 1895년의 연해주 통계에 따르면 고려인 인구는 18400명이었고 이중 16700명이 연해주 수이푼과 포시예트 지역에, 600여명은 하바로브스크 근교에, 1,100명은 아무르주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에 살았습니다.

 

 

이 시기에 조선인들이 연해주로 이주한 것은 배고픔 때문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입니다. 조선의 조정은 정쟁과 폭정을 일삼았고, 부국, 강병, 양민에는 무능했습니다.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백성은 기아에 시달렸고, 조선에서 살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백성들이 미지의 땅인 연해주로 목숨을 걸고 이주한 것이지요.

 

 

고려인 이주민들에게 또 하나의 동기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1861년 러시아가 단행한 농노제 폐지(Отмена крепостного)입니다. 농노의 신분에서 해방된 농민들은 농토를 구입해 자작농이 되거나, 토지를 빌어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 됐습니다. 조선인들도 조선의 신분적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국경을 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조선인들의 연해주 이주는 폭정과 자연재해라는 배출요인과 함께 농노제가 폐지된 러시아의 흡인요인이 동시에 작용해 가속된 현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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ハサン湖号戦闘高麗人とは関係がないというのが一般的見方ですがロシアや中国日本記録には断片的ではありますが朝鮮人する内容まれています

 

 

この戦闘今日延辺朝鮮族自治州琿春発生したことです張鼓峰満州国最東端防川からにわずか1.5キロれた地域日本とロシアの領土紛争地域でしたのでこの地域には1937中央アジア強制移住れてかれなかった高麗人がかなりんでいたようです

 

 

これらはハサンいが勃発する直前日本軍満州軍によって琿春かそれよりもさらに西紹介されましたロシアの高麗人北満州移住朝鮮族分類される状況でしたので高麗人もハサン戦闘犠牲者分類されるでしょう

 

 

もう指摘されるのは戦闘われた張鼓峰という野山名前朝鮮族のチャングのようなをしているとしてついた名前だという証言があります防川張鼓峰事件記念館劉聡志館長記念館れる観覧客張鼓峰という名前由来のように説明します

 

 

のようにであることから、「刀山ばれていましたが水泡があって朝鮮族のチャングのようなをしていることから長鼓峰ばれていた朝鮮語発音じなので張鼓峰ばれました

 

 

またハサン戦闘しかった82-6までの満州軍作戦日誌、「五家子山設置された満州軍警戒所ある朝鮮族兵士火鉢筒警戒所付近設置しておいて連軍砲兵発覚これが新式兵器なのか誤認して宇佐津山猛烈爆撃したという記録があります満州軍朝鮮族兵士まれていたという意味です

 

 

また日本軍満州軍国境挑発がハサン戦闘発端となりましたがこの日本軍朝鮮族服装変装したりしましたえば1938715日本軍3張鼓峰付近偵察みたのがロシアによって発見されましたがらはみな朝鮮族服装をしていました

 

この日本軍松島伍長伊藤軍曹3防川村住民秦海南高雲波案内員として張鼓峰付近のソ連側軍事施設偵察しましたが秦海南高雲波歩哨日本軍3軍事施設地図いている途中ロシアの守備隊発見されそのうちの1である松島伍長射殺され2逃走しました

 

 

軍人民間人服装国境挑発したのはスパイ行為ですが朝鮮族服装をしたのはロシアの軍人にとって朝鮮人日本人同一視する偏見えたことでしょう1937スターリンが高麗人中央アジアに強制移住させた理由高麗人日本のスパイとして活動することを憂慮したためだとしましたがこのような誤解日本けたり強化させた可能性いです.

 

 

一方ロシアの記録にはハサン号戦闘最高指揮官ヴァシリ·ブリュヘル(Василий Блю́хер, 18891938元帥、「朝鮮系住民被害懸念日本軍攻撃飛行機使用躊躇したという内容がありますこれにしてスターリンは辛辣批判ハサン湖戦闘不振はすでにスターリンのるブリュヘルを粛清することをめる口実となりました

 

 

ブリュヘルはすでに自分管轄地域リュシコフ(Генрих Люшков, 1900-1945)日本亡命した事件苦境たされリュシコフがスターリンだと証言したことがスパイのリヒャルト·ゾルゲによってスターリンにえられたため粛清対象になりましたついにはハサン湖戦闘不振理由逮捕されクーデター陰謀までせられ残酷拷問死亡しましたはスターリンの死後1956 にフルシチョフの復権しました

 

 

日本軍爆撃朝鮮人保護しようとしたブリューヘルの意図不振戦果するだったかもしれませんがなくとも日本軍朝鮮人区分いをしようとしたという肯定的評価する必要があります(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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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호 전투가 고려인과는 관련된 바가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지만, 러시아와 중국, 일본의 기록에는 단편적으로나마 조선인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전투는 오늘날의 옌벤조선족자치주의 훈춘에서 발생한 일입니다. 장고봉은 만주국 최동단의 팡촨에서 북쪽으로 불과 1.5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으로,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영토분쟁지역이었기 때문에, 이 지역에는 1937년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에 끌려가지 않은 고려인들이 꽤 많이 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하산호 전투가 발발하기 직전, 일본군과 만주군에 의해 훈춘이나 그보다 더 서쪽으로 소개되었습니다. 러시아의 고려인들이 북만주로 이주당하면서 조선족으로 분류되는 상황이었으므로, 고려인들도 하산호 전투의 희생자로 분류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지적될 것은 전투가 벌어진 장고봉이라는 야산의 이름이 조선족의 장구처럼 생겼다고 하여붙은 이름이라는 증언이 있습니다. 팡촨의 <장구봉사건기념관>의 류총즈(劉丛志) 관장은 기념관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장구봉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옛날에는 남쪽 산이 칼처럼 가파르다 하여 칼산(刀山)이라 하였으나, 봉우리 아래에 물거품이 있어 조선족 장구처럼 생겼다고 하여 장구봉(長鼓峰)이라 하였는데, 조선말 '()''()'이 동음이라 하여 장구봉(張鼓峰)이라 불렀습니다."

 

 

또한 하산호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82-6일까지의 만주군 작전일지에 우자쯔산(五家子山)에 설치된 만주군 초소에서 한 조선족 병사(朝鲜族士兵)가 화로통을 초소 부근에 설치해 놓았다가 소련군 포병에게 발각되어 이것이 무슨 신식무기인가 오인하여 우자츠산을 맹렬하게 폭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만주군에 조선족 병사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또 일본군과 만주군의 국경 도발이 하산호 전투의 발단이 되었는데, 이때 일본군들은 조선족 복장으로 변장하곤 했습니다. 예컨대 1938715일 일본군 3명이 장고봉 부근에서 정탐을 시도한 것이 러시아군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조선족의 복장을 했습니다.

 

이날 일본군 마츠시마 오장과 이토 군조 등 3명은 팡촨 마을 주민 진하이난과 가오윈바를 안내원으로 삼아 장구봉 부근의 소련 측 군사시설을 정찰했는데, 진하이난과 가오윈바가 보초를 서고 일본군 3명이 군사시설 지도를 그리던 중 러시아 수비대에 발견되었고, 그중 한명인 마츠시마 오장이 사살되고 두 명은 도주했습니다.

 

 

군인이 민간인 복장으로 국경을 도발한 것은 스파이 행위지만, 조선족 복장을 한 것은 러시아군인들에게 조선인을 일본인과 동일시하는 편견을 심어 주었을 것입니다. 1937년 스탈린이 고려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던 이유도 고려인이 일본의 간첩으로 활동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이 같은 오해는 일본이 심어주거나 강화시켰을 가능성이 큽니다..

 

 

한편, 러시아 기록에는 하산호 전투의 최고 지휘관 바실리 브류헤르(Василий Блю́хер, 18891938) 원수가 조선계 주민들의 피해를 우려해 일본군 공격에 비행기 사용을 주저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신랄하게 비판했고, 하산호 전투의 부진은 이미 스탈린의 눈 밖에 난 브류헤르를 숙청하기로 결정하는 빌미가 되었습니다.

 

 

브루헤르는 이미 자기 관할지역에서 겐리흐 류시코프(Генрих Люшков, 1900-1945)가 일본으로 망명한 사건으로 곤경에 처했고, 류시코프가 그를 반스탈린파라고 증언한 것이 간첩 리하르트 조르게에 의해 스탈린에게 전달되는 바람에 숙청 대상에 올랐습니다. 마침내 그는 하산호 전투의 부진을 이유로 체포되었고, 쿠데타 음모의 누명까지 쓰고 잔혹한 고문 끝에 사망했습니다. 그는 스탈린 사망 이후 1956년 흐루시초프 치하에서 복권됐습니다.

 

 

일본군을 폭격하면서 조선인을 보호하려던 브루헤르의 의도는 부진한 전과에 대한 변명이었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일본군과 조선인을 구분하고 다른 대접을 하려고 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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ロシアはハサン戦闘勝利2次大戦戦略きな利点ましたが中国東海への進出げられこれまでその不利益けていますでは中国ではハサンいをどう評価しているのかになりました

 

 

予想通中国中央地方政府レベルでハサン戦闘評価したりえることはありません歴史書にも登録されていないのか中国人はこの戦闘をよくりませんロシアとは中国には張鼓峰事件記念碑造成されていません敗北したのが満州国=日本ではありましたが東海まった戦争結果だけをても中国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

 

 

またロシアではハサン戦闘ばれていますが中国では張鼓峰事件ばれています戦闘なら挑発したのかそして勝利したのかをめることになりますそのため勝利したロシアはんで戦闘びますしかしこの戦闘当事者でもなく不利益だけをえた中国この戦闘事件格下げしました

 

 

一行朴漢龍先生説明によりますと日本もこの戦闘事件んでいますが理由中国とはいます。 「戦闘ぶなら挑発敗北責任自認しなければならないからですめて日本がロシアにれたハンヒゴールのじですモンゴル(байлдаан)とロシア(Бои)では戦闘」、中国では戦役びますが日本ではこれを事件びます

 

 

中国にも張鼓峰事件博物館があります張鼓峰西側2キロメートルに位置する防川村張鼓峰事件記念館がそれですこれは国営でも公立博物館でもなく劉聡志(リュ·チョンジ)という民間人てた私設博物館です

 

劉聡志館長実業家でした1991吉林省琿春市中央政府める対外開放都市として承認されると劉聡志館長1992琿春防川村移住ホテルをオープンしましたホテルは盛業でありくのおぎましたが2005にホテルを記念館改造しました

 

 

偶然90年前くの張鼓峰しい日露軍事衝突があったことにづきしだけ地面ると当時戦争遺物出土するという事実ったからですはまたこの戦争結果中国国益なわれたこともこの歴史くのらせるとともに戦争反人倫性広報めました

 

 

この記念館裏門には戦争から人間保護せよかれた墓碑けられています張鼓峰事件現場発掘収拾したソ連軍遺骸記念館移葬しててた墓碑でした記念館建物からこの墓碑めると裏門裏手80年前戦場だった張鼓峰えます記念館墓地られるとロシア人学者一般その戦闘死亡したロシア人兵士英霊追悼する慣行い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

 

 

ファシスト戦争=世界第2次世界大戦終戦60周年2005815わせて開館した張鼓峰事件記念館には400平方メートルの展示場張鼓峰事件展示館豆満江歴史展示館けましたが展示された遺物はほとんどが劉聡志館長近隣張鼓峰地域発掘した砲弾弾皮軍帽びた機関銃大砲などの遺物展示されていて収集した広範囲文献写真映像資料展示さ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

 

 

開館20づくたとえ公共博物館ではありませんが張鼓峰事件記念館展示物とその教訓充実してましいという評価<新華社通信><中国軍>のインターネットでも紹介され公共博物館機能向上しているだけでなく最近では朝中露三国境界都市·防川れる観光客もこの記念館れているそうです

 

 

ただ中国人観光客くは張鼓峰事件のために中国東北地域東海進出阻止されたという事実する民族主義的りが頻繁反応ですが反戦のメッセージを納得するいということです(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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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하산호 전투에서 승리해 2차 대전 전략에 큰 이점을 얻었지만, 중국은 동해 진출이 가로막혀 지금까지 그 불이익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중국에서는 하산호 전투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예상대로 중국은 중앙이나 지방정부 차원에서 하산호 전투를 높이 평가하거나 기리는 분위기가 아닙니다. 역사책에도 등재되지 않은지, 중국인들은 이 전투를 잘 알지 못합니다. 러시아와는 달리 중국에는 장고봉사건 기념비나 거리도 조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패배한 것이 만주국=일제이기는 했으나, 동해길이 가로 막힌 전쟁 결과만 보더라도 중국이 축하할 일은 아니지요.

 

 

또 러시아에서는 하산호 전투라고 부르지만 중국에서는 장고봉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전투라면, 누가 도발했는지, 그리고 누가 승리했는지 따지게 됩니다. 그래서 승리한 러시아는 기꺼이 전투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전투의 당사자도 아니었고 불이익만 떠안은 중국은 이 전투를 사건으로 격하시켰습니다.

 

 

박한용 선생에 따르면, 일본도 이 전투를 사건이라고 부르지만 이유는 중국과 다릅니다. ‘전투라고 부른다면 도발과 패배의 책임을 자인해야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일본이 러시아에게 패했던 한힌골 전투도 마찬가지입니다. 몽골(байлдаан)과 러시아(Бои)에서는 전투,’ 중국에서는 전역(戰役)’이라고 부르지만, 일본에서는 이를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중국에도 장고봉 사건의 박물관이 있습니다. 장고봉 서쪽 2킬로미터에 위치한 팡촨(防川) 마을의 <장고봉사건기념관(张鼓峰事件纪念馆)>이 그것입니다. 이는 국영이거나 공립 박물관은 아니고, 류총즈(刘丛志)라는 민간인이 세운 사설 박물관입니다.

 

이 기념관의 류총지 관장은 사업가였습니다. 1991년 지린성 훈춘시가 중앙정부가 인정하는 대외개방도시로 승인되자, 류총지 관장은 1992년 훈춘의 팡촨 마을로 이주, 호텔을 열었습니다. 호텔은 성업이었고 많은 돈을 벌었지만, 그는 2005년 호텔을 기념관으로 개조했습니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약 90년전 인근 장구봉에서 격렬한 러일 군사충돌이 있었다는 점을 알게 됐고, 조금만 땅을 파면 당시의 전쟁 유물이 출토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또 이 전쟁의 결과로 중국의 국익이 손상되었다는 점도 알게 되었고, 이 역사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동시에 전쟁이 반인륜성도 홍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기념관의 후문에는 전쟁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라라고 쓰인 묘비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장구펑사건 현장에서 발굴, 수습한 소련군의 유해를 기념관 마당에 이장하고 세운 묘비였습니다. 기념관 건물에서 이 묘비를 바라보면 후문 뒤편으로 80년 전의 전쟁터였던 장구봉이 보입니다. 기념관의 묘지가 알려지자 러시아인 학자와 일반인들이 찾아와 그 전투에서 사망한 러시아인 병사의 영령을 추모하는 관행도 계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반파시스트전쟁(=세계2차대전) 종전 60주년인 2005815일에 맞춰 개관된 장고봉사건기념관에는 약 400제곱미터의 전시장을 장구펑 사건 전시관과 두만강 역사 전시관으로 나누었는데, 전시된 유물은 대부분 류총즈 관장이 인근 장고봉 지역에서 발굴한 포탄과 탄피, 군도와 군모, 녹슨 기관총이나 대포 등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그가 수집한 광범위한 문헌과 사진, 영상 자료들도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개관 20년이 다가오는 가운데, 비록 공공박물관은 아니지만, 장고봉사건기념관의 전시물과 그 교훈이 충실하고 바람직하다는 평가아래, <신화사통신><중국군>의 인터넷에도 소개되면서 공공박물관의 기능이 제고되고 있을뿐 아니라, 최근에는 조--러의 삼국의 경계도시 팡촨을 찾는 관광객들도 이 기념관을 많이 찾고 있다고 합니다.

 

 

다만 중국인 관광객들의 대부분은 장고봉사건 때문에 중국동북지역의 동해진출이 저지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민족주의적 분노가 가장 빈번한 반응이지만, 반전의 메시지를 납득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합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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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回訪問団<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訪問目的ですが160高麗人沿海州移住史日本による植民地時代独立運動展開過程ることにしましたそれでクラスキーノの安重根義士斷指同盟記念碑ハサン勝利記念像ることになったのです

 

 

ところで<ハサンの英雄たち>記念像観覧しながら日程準備した黃光石先生案内してくれたキム·バレリア先生がなぜクラスキーノ展望台日程ませたのかになりました19387~8われたハサンいは高麗人とはほとんど関連性のない事件だったからです一年前19379スターリンの命令高麗人指導者たちが逮捕殺害され18万人した高麗人たちは汽車せられ中央アジアに強制移住させられただったからです

 

 

それでもハサンいは朝鮮中国ロシアの三国近代史において非常重要出来事でしたこの戦闘でロシアが勝利したことで日本1傀儡国満州国領土防川村まり東海への進出げられ、(2機動力航空力れたロシアの軍事力れなくなったことで戦争をしないことをめたからです

 

 

1860北京条約沿海州がロシアに割譲された張鼓峰むハサン湖地域国境曖昧状態でしたこの問題解決するため18865~7中国とロシアは渾春東地域境界線測量確定して碑石これを中俄珲春东界约文書化しました

 

 

このつの条約総合するとハサン位置する張鼓峰沙草峰中国当時日本傀儡国だった満州国しましたがロシアは満州語条約文をロシア翻訳国境線張鼓峰頂上通過することに変調これが後日国境紛争口実となりました

 

 

琿春東界条約締結されて50った結局国境紛争発生ハサンいに勝利したことでロシアは張鼓峰地域獲得しましたがその結果つとして中国とロシアの国境豆満江河口から17キロ地点防川村まりました

 

 

琿春東界条約締結当時中国東海への進出ができなくなったことを懸念条約第4中国船舶がロシアの干渉なしに豆満江河口じて東海出入りできるという内容みましたしかしその通行権限はまともに行使されませんでしたロシアのハサン地域地方官裁量いつでも中国船舶出入りを制限することができ実際1990中国船舶豆満江利用交渉再開されるまでロシアは中国船舶豆満江への出入りを制限していました

 

 

ハサンいのより重要結果日本帝国主義膨張方向がユーラシアではなく太平洋旋回したということです1931満州事変こして大陸進出した日本軍国主義膨張方向をユーラシアでえようとする陸軍勢力海洋え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海軍勢力対立しましたが1938のハサンいと1939のハルヒゴルの日本名ノモンハン事件でロシア敗北した日本軍今後よりもアメリカと対決することをめましたそれから2年後194112真珠湾奇襲攻撃したのはハサンいで敗北した可視的結果だったのです

 

 

当時日本イタリアとともに枢軸国形成侵攻したドイツは日本がユーラシアのからソ攻撃することをんでいましたが張鼓峰とノモンハンでソ連軍敗北した日本軍連侵攻をあきらめ東南アジアの海洋進出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

 

 

立場からると沿海州ハサン地域とモンゴルのハルヒンゴール地域日本軍制圧した結果戦線二分されないままヨーロッパでドイツ戦争軍事力集中することでナチスを敗退させベルリンを占領することができました

 

 

つまりハサン戦闘日本帝国主義がアメリカ海軍にぶつかって敗北するように誘導する一方中国北東部地域から東海進出できないようにげるきな効果こした非常重要戦闘だったのです(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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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방문단은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 방문이 주목적이지만, 160년에 달하는 고려인의 연해주 이주사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전개과정도 살피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크라스키노의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 기념비도 방문했고, 하산호 승전기념상도 돌아보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하산의 영웅들> 기념상을 관람하면서, 일정을 준비하신 황광석 선생과 안내해 주신 김발레리아 선생께서 왜 크라스키노 전망대를 일정에 포함시키셨는지 궁금했습니다. 19387-8월에 진행된 하산호 전투는 고려인과는 관련성이 거의 없는 사건이었기 때문이죠. 한해 전인 19379월 스탈린의 명령으로 고려인 사회의 지도자들이 대대적으로 체포, 살해됐고, 18만명에 달했던 고려인들은 기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한 후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하산호 전투는 조선과 중국, 러시아의 삼국의 근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가 승리함으로써 일제는 (1) 괴뢰국 만주국의 영토가 팡촨(防川) 마을에 멈추어 동해 진출이 막혔고, (2) 기동력과 항공력이 뛰어난 러시아의 군사력을 얕보지 못하게 됨으로써 소련과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1860년의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가 러시아에 할양되었을 때 장고봉을 포함한 하산호 지역의 국경은 모호한 상태였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8865-7월에 중국과 러시아는 훈춘(渾春) 동쪽 지역의 경계선을 측량하고 확정해 비석을 세우고, 이를 <훈춘동계조약(中俄珲春东界约)>으로 문서화 했습니다.

 

 

이 두 조약을 종합하면 하산 호수 동쪽에 위치한 장고봉과 사초봉은 중국(당시 일본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에 속했습니다만, 러시아는 만주어 조약문을 러시아어로 번역하면서 국경선이 장고봉의 정상을 통과하는 것으로 변조했고, 이것이 후일 국경분쟁의 빌미가 됐습니다.

 

 

<훈춘동계조약>이 체결된 지 50년이 흐른 뒤 결국 국경분쟁이 발생했고, 하산호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러시아는 장고봉 지역을 얻었는데, 그 결과의 하나로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은 두만강 하구로부터 17킬로미터 지점의 팡촨 마을에서 멈췄습니다.

 

 

<훈춘동계조약> 체결 당시 만주국은 동해 진출이 막히게 된 것을 우려해 조약 제4조에 만주국 선박이 러시아의 간섭 없이 두만강 하구를 통해 동해로 드나들 수 있다는 내용을 포함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통행 권한은 제대로 행사되지 못했습니다. 러시아의 하산지역 지방관의 재량으로 언제든지 만주국=중국 선박의 출입을 제한할 수 있었고, 실제로 1990년의 중국 선박의 두만강 이용 협상이 재개되기 전까지 러시아는 중국 선박의 두만강 출입을 제한했습니다.

 

 

하산호 전투의 더 중요한 결과는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 방향이 유라시아가 아니라 태평양으로 선회했다는 것입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대륙으로 진출한 일제 군국주의는 팽창의 방향을 유라시아로 잡자는 육군세력과 해양으로 잡아야 한다는 해군세력이 대립했는데, 1938년의 하산호 전투와 1939년의 할힌골 전투(일본명 노몬한 사건)에서 러시아군에게 패배한 일본군은 향후 소련보다는 미국과 대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4112월 진주만을 기습공격한 것은 결국 하산호 전투에서 패배한 가시적인 결과였던 것이지요.

 

 

당시 일본, 이탈리아와 함께 추축국을 형성하고 소련을 침공한 독일은 일본이 유라시아의 동쪽에서 소련을 공격해 주기를 바랐지만, 장고봉과 노몬한에서 소련군에게 패배한 일본군은 소련 침공을 포기하고 중국 해안 지역과 동남아시아의 해양으로 진출해야 했습니다.

 

 

소련의 입장에서 보면, 연해주 하산 지역과 몽골 할힌골 지역에서 일본군을 제압한 결과, 전선이 양분되지 않은 채 유럽에서 대독일 전쟁에 군사력을 집중함으로써 나치를 패퇴시키고 베를린을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 하산호 전투는 일본 제국주의가 미국 해군과 맞닥뜨려 패배하도록 유도하는 한편, 중국이 북동부 지역에서 동해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큰 효과를 야기했던 매우 중요했던 전투였던 것입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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クラスキーノ展望台勝戦記念像ハサンの英雄たち1938729から811までハサン湖近くの張鼓峰(ロシア:сопка Заозёрная/Zaozyornaya)われた日本軍とのいでロシアが勝利したことをえる彫刻像です

 

 

海抜155メートルの張鼓峰日本とロシアの領土紛争地域でした張鼓峰北側にはさらに2つの高地がありました将軍峰沙草峰(ロシア: сопка Безымянная/Bezymyannaya)がそれです

 

 

1931満州事変こし1932傀儡国満州国建国した日本張鼓峰満州国領土だと主張ロシアは沿海州割譲された北京条約1860によって張鼓峰頂上国境設定されたのでなくとも張鼓峰東斜面はロシアの領土だと主張しました

 

 

日本軍記録によりますとハサン戦闘直接的口実提供したのがロシアでした76ロシア張鼓峰沙草峰陣地工事めたからです日本関東軍朝鮮軍日本大本営参謀部にこれを報告1938720朝鮮軍第19師団第75連隊攻撃敢行将軍峰(20)沙草峰(29)張鼓峰(30日夜)々と占領しました

 

 

しかしロシア記録によると国境地域挑発けたのは日本でした日本軍19342最初挑発めて以来193434にも越境その7には68には209には47挑発敢行国境挑発頻度くなりました

 

 

1935にも1-7までに日本航空機がソ連領空24回侵入連領土への砲撃33満州国日本船舶がアムール境界違反したのが44りました1936から19387にハサン戦闘まるまで日本軍満州軍合計231のソ連国境侵犯しましたが陸上侵犯124領空侵入40そのうち35交戦発生しましたロシア張鼓峰沙草峰陣地構築したのは日本軍挑発対抗するためでした

 

 

張鼓峰日本軍すとポシエットとウラジオストクがかされることになりますがこの地域掌握すれば満州中国北部進出する橋頭堡ることになるという評価ロシア81から極東軍40師団3千人兵力とタンクを機械化部隊動員して張鼓峰攻撃82からは極東軍司令官ブリューヘル元帥直接戦闘指揮めました

 

 

連軍86から1個軍団1個機械化旅団沿海州航空隊動員して大反撃開始しましたが日本軍休戦交渉まった811まで張鼓峰沙草峰ることができました

 

 

戦争拡大まなかった日露両国811モスクワで停戦合意しました合意内容811日正午戦闘中止主張どおり国境線確定するというものでした日本軍甚大被害いた張鼓峰沙草峰をソ返還しました

 

 

当時はこの戦闘非常重要視していたようです日本沿海州進出阻止にソ中国北部進出がかりにしようとするスターリンの思惑があったからです

 

 

そのうえハサン戦闘日露戦争1904屈辱的敗北以来日本対決しためての戦闘だったためとうとする復讐心理作用したものとられます張鼓峰返還されたソ莫大被害けましたがんでいた結果達成これをうことができました

 

 

しかし初期戦闘日本軍張鼓峰沙草峰われたうえ初期消極的放漫作戦戦闘んだ責任スターリンは極東軍司令官のヴァシリ·ブリュヘル元帥逮捕しましたブリュッセルはモスクワに押送され拷問18日後獄死しました

 

 

当時軍部しても大粛清っていたスターリンはこの重要対日前哨戦自分自尊心つけた指揮官っておくことはできなかったのです(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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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스키노 전망대의 승전기념상 <하산의 영웅들>1938729일부터 811일까지 하산 호수 인근의 장고봉(張鼓峰, 러시아명 сопка Заозёрная/Zaozyornaya)에서 벌어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러시아가 승리한 것을 기리는 조각상입니다.

 

 

하산호에서 호수 해발 155미터의 장고봉은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영토분쟁지역이었습니다. 장고봉의 북쪽에는 두 개의 고지가 더 있었습니다. 장군봉과 사초봉(沙草峰, 러시아명 сопка Безымянная/Bezymyannaya)이 그것입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1932년 괴뢰국 만주국을 세운 일제는 장고봉이 만주국 영토라고 주장했고, 러시아는 연해주를 할양받은 베이징 조약(1860)과 에 따라 장고봉의 정상을 경계로 국경이 설정됐으므로 적어도 장고봉의 동쪽 사면은 러시아의 영토라고 주장했습니다.

 

 

일본군 기록에 따르면 하산호 전투의 직접적인 빌미를 제공한 것이 러시아였습니다. 76일 러시아군이 장고봉과 사초봉에서 진지 공사를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일제 관동군과 조선군은 일본 대본영 참모부에 이를 보고했고, 1938720일 조선군 19사단 75연대가 공격을 감행 장군봉(20), 사초봉(29), 장고봉(30일밤)을 차례로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군 기록에 따르면 국경지역을 지속적으로 도발한 것은 일본이었습니다. 일본군은 19342, 첫 도발을 시작한 이래, 19343월과 4월에도 월경을 시도했고, 그해 7월에는 6, 8월에는 20, 9월에는 47회의 도발을 감행해, 국경 도발의 빈도가 높아졌습니다.

 

 

1935년에도 1-7월까지 일본 항공기가 소련 영공을 24회 침입했고, 소련 영토에 대한 포격이 33, 만주국과 일본 선박이 아무르강 경계를 위반한 것이 44건에 달했습니다. 1936년부터 19387월 하산호 전투가 시작되기까지 일본군과 만주군은 총 231건의 소련 국경을 침범했는데, 육상 침범이 124, 영공 침입이 40건이었고, 그중 35건에서 교전이 발생했습니다. 러시아군이 장고봉과 사초봉에 진지를 구축한 것은 일본군의 도발에 대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장고봉을 일본군에 내어주면 포시에트와 블라디보스톡이 위협받게 되지만, 이 지역을 장악하면 만주와 중국 북부로 진출할 교두보를 얻게 된다는 평가 아래, 러시아군은 81일부터 극동군 40사단의 3천명의 병력과 탱크를 포함한 기계화부대를 동원해 장고봉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82일부터는 극동군 사령관 블류헤르 원수가 직접 전투를 지휘하기 시작했습니다.

 

 

소련군은 86일부터 1개 군단과 1개 기계화여단, 연해주 항공대를 동원해서 대반격을 개시했지만, 일본군은 휴전협상이 시작된 811일까지 장고봉과 사초봉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확전을 바라지 않았던 러일 양국은 주러 일본대사 시게미츠 마모루와 소련의 외무인민위원 막심 리트비노프의 회담으로 811, 모스크바에서 정전 합의에 도달했습니다. 합의 내용은 811일 정오로 전투를 중지하고 소련의 주장대로 국경선을 확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지켜낸 장고봉과 사초봉을 소련에 반환했습니다.

 

 

당시 소련은 이 전투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제의 연해주 진출을 저지하고, 거꾸로 소련의 중국 북부 진출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스탈린의 계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하산호 전투는 러일 전쟁(1904)의 굴욕적인 패배 이래 일본과 맞붙은 첫 전투였기 때문에 반드시 이기려는 복수심리가 작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장고봉을 돌려받은 소련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원하던 결과를 성취했고, 이를 대대적으로 자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초기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장고봉과 사초봉을 빼앗긴데다가, 초기의 소극적이고 방만한 작전으로 전투에 임했던 책임을 물어 스탈린은 극동군 사령관 바실리 블류헤르 원수를 체포했습니다. 블류헤르는 모스크바로 압송되어 고문당하다가 18일 후에 옥사했습니다.

 

 

당시 군부에 대해서도 대숙청을 벌이고 있었던 스탈린은, 이 중요한 대일 전초전에서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낸 지휘관을 그냥 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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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重根義士斷指同盟記念碑>公園昼食とバスキングそして<のための行進曲>合唱えた訪問団一行はバスにってびクラスキノにかいました市内中心反対側にあるクラスキーノ展望台ねるためでした

 

 

この展望台はクラスキーノ北東側外郭のクレストバヤ(Крестовая)けられていましたあまりではありませんが近隣地域がすべて平地四方けていてめがいいですには記念像てられていますが銅像台座上段にはハサンの英雄たち(Героев Хасана)という献辞まれた銘牌られています

 

 

張鼓峰事件いともばれるハサン湖戦鬪いは1938朝鮮中国とロシアの国境するハサン地域150メートルの高地張鼓峰われたロシアと日本きた国境紛争ロシア日本軍撃退した戦闘しますロシアがこの戦闘をハサン戦闘ぶのは張鼓峰(сопке Заозерной)がハサン(озера Хасан)のすぐそばに位置するからです

 

 

ハサン·張鼓峰クラスキーノのクレストバヤから南西30キロメートルれていますところでどうしてそのいの記念像がクラスキーノにてられたのだろう疑問いましたグーグルをじてこの戦闘記念像はもともとハサンてられる予定でしたがこれにして異議えた中国刺激しないためにクラスキーノにてたとされています

 

 

この記念像196884ハサン戦闘勝利30周年記念してここにてられましたがコンクリートの台座てられた17メートル40トンの巨大彫刻像はピンディッシュ·クランディエフスキー(А.В. Файндыш-Крандиевский)作品記念像建築はバリーズ(М.О. Бариз)とコルピナ(А.Я. Колпина)担当したそうです

 

 

彫像両手げた軍人姿ですがこの彫像はレニングラードで製作されここにされ彫像移動させるのに2のトラクターが動員されこれをてるためにウラジオストクからポシエット空輸した特殊クレーンを使用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ロシアがこの記念像建立することに非常れていたことがかります

 

 

ハサンいで勝利したことをえる記念碑沿海州はもちろんロシア各地てられていてクラスキーノの記念碑はそのつにぎないこともわかりましたハサン湖戦闘記念碑沿海州のポシエット(Посьет)とスラビヤンカ(Славянка)ラズドルノイェ(Раздольное)にもありウラジーボストク(Владивосток)とハサン高速道路(Хасанской трассе)入口にもてられています

 

 

またスラビヤンカとウラジオストクにはハサンの英雄路(Улица Героев Хасана)というけられておりモスクワ南側のボロネーシュ(Воронеж)のペルム(Пермь)にもじですイルクーツク·スビルスク(Свирск, Иркутская)にはハサンの戦闘距離(Улица Хасановских боёв)」、サント·ペッツェルブルク(Санкт-Петербурге)にもハサンスカヤ(Улица Хасанская)がありますがこれらはすべてハサンいとこれを勝利いた英雄えるために名付けられたりです

 

 

ロシア領土西端のウラジオストクをはじめとする沿海州のあちこちにハサン湖戦闘記念碑とハサンの英雄設立されイルクチュクとモスクワ近隣のボロネシュとペルムそしてサント·ペッツェルブルクにるまでハサン戦闘えられているところからこの戦闘での勝利がロシアにとって非常重要だったという意味です

 

 

人口33百人さな韓国人大切にしている独立運動家安重根義士斷指同盟記念碑てられているだけでなく、「ロシア連邦レベルの重要性(памятник федерального значения)んだ記念像もここにあるのは偶然ではないかもしれないというえとともにこの記念像とハサンいにする好奇心いてきました(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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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단지동맹 기념비> 공원에서 점심식사와 버스킹, 그리고 <님을 위한 행진곡> 합창을 마친 방문단 일행은 버스에 올라 다시 크라스키노로 향했습니다. 시내를 중심으로 반대편에 위치한 크라스키노 전망대를 방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전망대는 크라스키노 북동쪽 외곽의 크레스토바야(Крестовая) 언덕 위에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다지 높은 언덕은 아니지만 인근지역이 모두 평지이거나 바다이고, 사방이 탁 트여있어서 조망이 좋습니다. 언덕 위에는 기념상이 세워져 있는데, 동상 받침대의 상단에는 하산의 영웅들(Героев Хасана)”이라는 헌사가 새겨진 명패가 붙어 있습니다.

 

 

장고봉 전투라고도 알려진 하산호 전투는 1938년 오늘날 조선과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이 맞닿은 하산지역의 높이 150미터의 고지 장고봉에서 벌어진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벌어진 국경분쟁에서 러시아군이 일본군을 격퇴한 전투를 가리킵니다. 러시아가 이 전투를 하산호 전투라고 부르는 것은 장고봉(сопке Заозерной)이 하산 호수(озера Хасан) 바로 옆에 위치하기 때문입니다.

 

 

하산 장고봉은 크라스키노의 크레스토바야 언덕에서 남서쪽으로 약 30킬로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 전투의 기념상이 크라스키노에 세워진 것일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구글링을 통해 이 전투 기념비는 원래 하산에 세워질 예정이었으나,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중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크라스키노에 세웠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기념상은 196884일 하산호 전투 승전 30주년을 기념해 이곳에 세워졌는데, 콘크리트 받침대 위에 세워진 높이 17미터, 무게 40톤의 거대한 조각상은 핀디쉬-크란디에프스키(А.В. Файндыш-Крандиевский)의 작품이고, 기념상의 건축은 바리즈(М.О. Бариз)와 콜피나(А.Я. Колпина)가 담당했다고 합니다.

 

 

조각상은 두 손으로 깃발을 치켜든 군인의 모습인데, 이 조각상은 레닌그라드에서 제작되어 이곳으로 옮겨졌고, 조각상을 이동시키는 데에 두 대의 트랙터가 동원되었고, 이를 받침대에 세우기 위해서 블라디보스톡에서 포시예트 항구로 공수한 특수 크레인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러시아가 이 기념상을 건립하는 데에 매우 정성을 기울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산호 전투의 승전을 기리는 기념비는 연해주는 물론 러시아 곳곳에 세워져 있고, 크라스키노의 기념비는 그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점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산호 전투 기념비는 연해주의 포시예트(Посьет)와 슬라비얀카(Славянка), 라즈돌노예(Раздольное)에도 있고, 블라디보스톡(Владивосток)과 하산고속도로(Хасанской трассе) 입구에도 세워져 있습니다.

 

 

또 슬라비얀카와 블라디보스톡에는 하산의 영웅로(Улица Героев Хасана)”라는 거리가 마련되어 있고, 모스크바 남쪽의 보로네슈(Воронеж)와 동쪽의 페름(Перм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르쿠츠크 스비르스크(Свирск, Иркутская)에는 하산 전투 거리(Улица Хасановских боёв), 상트 페쩨르부르크(Санкт-Петербурге)에도 하산스카야 거리(Улица Хасанская)“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하산호 전투와 이를 승리로 이끈 영웅들을 기리기 위해 이름이 붙여진 거리입니다.

 

 

러시아 영토 서단의 블라디보스톡을 비롯한 연해주 곳곳에 하산호 전투 기념비와 하산의 영웅의 거리가 설립되었고, 이루크추크와 모스크바 인근의 보로네슈와 페름, 그리고 상트 페쩨르부르크에 이르기까지 하산호의 전투가 기려지고 있는 곳으로 보아, 이 전투에서의 승리가 러시아에게는 대단히 중요했다는 뜻입니다.

 

 

인구 33백명의 작은 마을에 한국이 가장 중요한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 기념비가 세워져 있을 뿐 아니라, “러시아 연방 차원의 중요성(памятник федерального значения)”을 담은 기념상도 이곳에 있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이 기념상과 하산호 전투에 대한 호기심이 일더군요.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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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重根義士斷指同盟記念碑到着するといつのにか昼食時間でした図們から8出発したのですがクラスキーノに到着せず12記念碑到着したら午後12時半です

 

 

まだ4時間しかっていないのすると図們とクラスキーノの時差2時間あります図們韓国より1時間早クラスキーノは韓国より1時間遅いですですから中国図們ウィーンホテルからロシアのクラスキーノの安重根記念碑到着するまで100キロ移動するのに6時間半かかったわけですよねになったのです

 

 

記念碑到着した訪問団一行まず訪問団長黃光石(ファン·グァンソク)先生指揮でまず黙祷そのすぐに昼食をとりました朝食をバスでとったので昼食いんじゃないかというもしましたが旅行くときはおしっこのおいています

 

 

昼食はキム·ヴァレリアキム·バレンチン先生夫婦用意してきましたクラスキーノには適当食堂もなくもしロシア食堂わないかもしれないということを心配して韓国料理昼食準備してバスにせてられたそうですヴァレリアの先生直接準備されたのかいてみたらいいえいながら友人経営する食堂注文されたそうです

 

 

一行記念碑公園のあちこちにってって野外昼食べましたキム·ヴァレリア先生だけでなく一行各自使座布団まで準備してこられたのでどれほど細心配慮されたのかじることができました

 

 

きめの透明豚肉キムチと各種ナムルがいっぱいっていたのであのたくさんのたちが全部食べられないいました延辺朝鮮族同胞たちとじようにロシアの高麗人同胞たちもしてはすごくきいんだなといました

 

 

たちがあたふたとごべているキム·バレリア先生はナムルやきながらもっとけてくれたりするので本人食事をされたのかかりませんはいつもえられたものをべるのでそしてには食事調節しなければならない朴仁浩(パク·インホ)先生食事までしてもらったので私一人2.5人分べたようでした

 

 

金剛山食後景という言葉のように昼食後たちはもう一度記念碑のそばでバスキングがかれました朴仁浩先生のサックスや大笒(テグム)演奏があり最後には記念碑のための行進曲記念撮影いました

 

 

朴仁浩先生はサックスで汽車はその夜明けにった演奏これを伴奏黃光石先生歌唱えました。 「ヤン·チヘの野原無名指てた/大韓国人安重根せて/汽車はその夜明けをったという歌詞きながら安重根義士がウラジオストクから汽車ってハルビンにかう姿連想されましたこの記念碑公園この々とえる場所つでしょう

 

 

いて朴仁浩先生大琴天香千年鶴演奏しましたが千年鶴同時えてくれた映画西便制(1993)場面連想させます

 

 

記念碑記念撮影をするたちはわせてのための行進曲合唱しましたりながら名前さず/一生出ようというった々の記念碑だったので意味がより一層はっきりしました

歳月れても山川大切にしてきた斷指同盟員いと実践ここをしでもれる韓国人わるようになりました

 

 

ふとこの々のいといはったのかといういがかびました日本による植民地支配わったのでそうともえるでしょうが韓国北韓対峙状況えるとこの々におにかかるのがずかしいです

 

 

のための行進曲一緒いながら今私たちはどんないをてるべきかえてみる時間になりました(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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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단지동맹 기념비에 도착해 둘러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었습니다. 투먼에서 아침 8시에 출발했는데, 크라스키노에 도착하지 낮12, 기념비에 도착하니 오후12시반입니다.

 

 

아직 4시간 밖에 안 지났는가? 했더니, 투먼과 크라스키노의 시차가 2시간 있습니다. 투먼은 한국보다 1시간이 빠르고, 크라스키노는 한국보다 1시간이 느립니다. 그러니까 중국 투먼 비엔나 호텔에서 러시아 크라스키노의 고려인 기념비에 도착할 때까지 약 1백킬로미터 이동하는 데에 6시간 반이 걸린 것이지요배가 고플 때도 된 것입니다. 

 



기념비에 도착한 방문단 일행은 우선 방문단장 황광석 선생의 지휘로 먼저 묵념을 올린 후 바로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아침식사를 버스에서 했기 때문에 점심식사가 이르지 않은가 싶기도 했지만, 여행 다닐 때는 쉬 배가 고픕니다.

 

 

점심식사는 김발레리아, 김발렌친 선생 부부께서 준비해 오셨습니다. 크라스키노에는 마땅한 식당도 없고, 혹시 러시아식당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을 염려하셔서, 한식으로 점심을 준비해 버스에 싣고 오셨다고 합니다. 발레리아 선생께서 직접 준비하셨는가, 하고 여쭤봤더니, 아니예요, 하시면서 친구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주문하셨다고 합니다.

 

 

일행은 기념비 공원의 이곳저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약간 늦은 야외 점심을 먹었습니다. 김발레리아 선생께서는 음식뿐 아니라 일행이 각자 사용할 방석까지 준비해오셨으니 얼마나 세심하게 배려하셨는지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큼직큼직한 투명 그릇에 돼지고기와 닭찜, 김치와 각종 나물이 가득가득 들어 있었기 때문에, 저는 속으로 저 많은 음식을 우리가 다 못 먹지싶었습니다. 연변의 조선족 동포들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고려인 동포들도 음식에 관한한 엄청 손이 크신가 보다 했습니다.

 

 

우리가 허겁지겁 밥을 먹는 동안에도 나물이며 고기를 가지고 다니시면서 더 나눠주시곤 하시느라 정작 본인은 식사를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보통 주시는 대로 먹기 때문에, 그리고 때때로 식사의 양을 조절해야 하는 박인호 선생의 식사까지 대부분 넘겨받는 바람에, 저는 2.5인분은 먹은 것 같았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하더니, 다시 한 번 버스킹이 열렸습니다. 박인호 선생의 색소폰과 대금 연주가 있었고, 마지막에는 기념비 앞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노래를 부르고 기념 촬영도 했습니다.

 

 

박인호 선생은 색소폰으로 <기차는 그 새벽에 떠났다>를 연주했고, 이를 반주로 황광석 선생이 가창을 더했습니다. “얀치혜 들판에 무명지를 버린/ 대한국인 안중근을 태우고/ 기차는 그 새벽을 떠났다는 가사를 들으면서, 안중근 의사가 블라디보스톡 역에서 기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향하는 모습이 연상되더군요. 이 기념비 공원은 이 노래를 가장 절절하게 부를 수 있는 장소의 하나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박인호 선생은 대금으로 <천향><천년학>을 연주했는데, 특히 <천년학>은 한과 흥을 동시에 안겨주던 <서편제>의 장면들을 연상시키더군요.

 

 

기념비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기 전에, 목소리를 합쳐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했습니다. 손가락을 끊어가면서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를 다짐했던 분들의 기념비 아래였기 때문인지 이 노래의 의미가 더욱 또렷해지는 것 같더군요.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이 잘 간직해 온 단지동맹원들의 다짐과 실천은 이곳을 잠시나마 방문하는 한국인들에게 사무치게 전달되었습니다.

 

 

문득, 이들의 소원은 이뤄졌는가, 하는 물음이 떠올랐습니다. 일제강점이 종식되었으니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남북으로 나뉘어 대치하고 있는 상황을 생각하면, 이분들을 뵙거나 생각하는 것이 부끄럽기도 합니다.

 

 

<님을 위한 행진곡>과 함께 우리는 또 어떤 다짐을 해야 할 것인지, 잠시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됐습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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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重根義士斷指同盟記念碑にはされていませんが安重根義士11同志んだ斷指同盟には名前がありました。 「同義斷指会ですこれはった同義会同志たちのまりという意味ですったのはをかけたという意味ですそのため、「東義斷指会同義会決死隊という意味でもあります

 

 

同義会19084沿海州結成された朝鮮義兵組織です。 「同義会結成にはいながらも前史があります日本大韓帝国軍隊解散した1907愛国啓蒙運動をあきらめて沿海州亡命した安重根1879-1910平安道警務官出身金起龍(?-?)咸鏡道景興出身でロシア軍服務経歴っていた厳仁燮1875-1936義兄弟抗日義兵こすために沿海州各地同胞社会訪問有意義青年87銃器資金確保しましたらは自分たちを<87兄弟>びました

 

 

翌年(1908)4<87兄弟>団員たちは延秋下里崔在亨(1860-1920)先生まり義兵団体<同義会>組織しましたこの沿海州高麗人指導者崔在亨先生同義会総長邊界警務署(=国境守備隊)出身間島管理士歴任沿海州亡命した李範允(1856-1940)副総長ハーグ万国平和会議高宗特使として派遣された李瑋鍾(1884-?)会長嚴仁燮副会長そして白圭三(?-?)書記選任されました

 

 

同義会迅速沿海州義兵組織武装19087国内進攻作戦敢行しました同義会義兵3千人総司令官都営将全帝翼左営将嚴仁燮(日本密偵変節)右営将安重根めましたそのにも武器調達担当した兵器部金大連日本密偵変節崔英基軍備調達担当した経理部姜議官白圭三担当しました

 

 

同義会創立43千人する義兵組織することができたのは軍資金十分募集できたからです同義軍初期軍資金李瑋鍾父親駐露公使李範晉命令した1ルブルと崔在亨私財として出演した13ルブルそして水清(現在のパルティザンスク)地域高麗人募金した6ルブルを3ルブルにしました19083ルブルは2015年基準ドルで86ドル金価格基準)、韓国ウォンでは10ウォンにする金額でした

 

 

<同義会>義兵部隊50人単位小隊別国内真空作戦開始しました安重根右營軍司令官として小隊4個隊約200同義軍指揮77にポシェット出発して豆満江総司令官全濟益指揮数字同義軍がそのいました時期李範允創軍した<彰義軍>国内進攻作戦参加しましたが指揮官禹德淳12個小隊約600指揮したといいますしたがって当時国内進攻作戦参加した義兵<同義軍>400<彰義軍>6001千人軍隊作戦投入されたのでした

 

 

およそ2國內進攻作戦初期成功していましたが日本軍大規模反撃により失敗、「同義軍はほとんどの兵士8月末延秋帰還しました安重根人道レベルで日本軍捕虜放免したことが敗戦原因指摘され苦境たされ国内進攻作戦失敗わると沿海州武装独立闘争熱気急速めました

 

 

大規模義兵組織国内進攻難関にぶつかると安重根提案結成されたのが東義斷指会だったのです全面戦争やゲリラしくなると暗殺団組織したのです安重根とともに斷指同盟参加した金起龍白圭三嚴仁燮などが<同義会>幹部だったという斷指同盟<同義会>小規模核心団体だったことを推察させますそして同義会同義斷指会すべて崔在亨先生延秋下里設立され財政支援けたのです(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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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단지동맹 기념비>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안중근 의사와 11명의 동지가 맺은 단지동맹에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입니다. 이는 손가락을 자른 <동의회(同義會)>의 동지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손가락을 자른 것은 목숨을 걸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동의단지회>는 곧 <동의회>의 결사대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동의회>19084월 연해주에서 결성된 조선의 의병조직입니다. <동의회> 결성에는 짧으나마 전사(前史)가 있습니다. 일제가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한 1907년 겨울, 애국계몽운동을 포기하고 연해주로 망명한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은 평안도 경무관(=대한제국의 경찰관) 출신의 김기룡(金起龍, ?-?), 함경북도 경흥 출신으로 러시아군 복무경력을 가졌던 엄인섭(嚴仁燮, 1875-1936)과 의형제를 맺고, 함께 항일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연해주 각지의 동포사회를 방문, 뜻있는 청년 87명을 모으고, 총기와 자금도 확보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87형제>라고 불렀습니다.

 

 

이듬해(1908) 4, <87형제>단원들은 연추 하리의 최재형(崔在亨, 1860-1920) 선생의 집에 모여 의병단체 <동의회>를 조직했습니다. 이때 연해주 고려인의 지도자 최재형 선생이 동의회의 총장, 변계경무서(邊界警務所=국경수비대) 출신으로 간도(間島)관리사를 역임했다가 연해주로 망명한 이범윤(李範允, 1856-1940)이 부총장,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파견됐던 이위종(李瑋鍾, 1884-?)이 회장, 엄인섭이 부회장, 그리고 백규삼(白圭三, ?-?)이 서기로 선임됐습니다.

 

 

<동의회>는 신속하게 연해주에서 의병을 조직하고 무장을 갖춰 19087월 국내진공작전을 감행했습니다. 동의회 의병은 3천명에 이르렀고, 총사령관인 도영장(都營將)은 전제익(全濟益), 좌영장(左營將)은 엄인섭(후에 일본 밀정으로 변절), 우영장(右營將) 안중근이 맡았습니다. 그밖에도 무기조달을 담당한 병기부는 김대련(金大連, 후에 일본 밀정으로 변절)과 최영기(崔英基), 군비마련을 담당한 경리부는 강의관(姜議官)과 백규삼이 담당했습니다.

 

 

<동의회>가 창립 4개월 만에 3천명에 달하는 의병을 조직할 수 있었던 것은 군자금을 넉넉하게 모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동의군의 초기 군자금은 이위종이 부친인 주러공사 이범진(李範晉)의 명령으로 전달한 1만루불과 최재형이 사재로 출연한 13천루불, 그리고 수청(지금의 파르티잔스크) 지역의 한인들이 모금한 6천루불을 포함 약 3만루불에 달했습니다. 1908년의 3만루불은 2015년 기준 미달러화로 86만달러(금값 기준), 한국 원화로는 약 10억원에 달하는 액수였습니다.

 

 

<동의회>의 의병부대는 50명 단위의 소대별로 국내진공작전을 개시했습니다. 안중근은 우영군 사령관으로 4개 소대 약 200명의 <동의군>을 지휘하고 77일 포시에트항을 떠나 두만강을 건넜고, 총사령관 전제익의 지휘 아래 같은 숫자의 <동의군>이 이를 뒤따랐습니다. 같은 시기에 이범윤이 창군한 <창의군>도 국내진공작전에 참여했는데, 지휘관 우덕순이 12개 소대 약 6백명을 지휘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당시 국내진공작전에 참여한 의병은 <동의군>이 약 4백명, <창의군>이 약 6백명으로 총 1천여병의 군대가 작전에 투입된 것이었습니다.

 

 

2개월의 국내진공작전은 초기에는 성공적이었으나 일본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실패했고, <동의군>은 대부분의 병사를 잃고 8월말에 연추로 귀환했습니다. 안중근은 인도적 차원에서 일본군 포로를 방면한 것이 패전의 원인으로 지적되어 곤경에 처했고, 국내진공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연해주의 무장독립투쟁의 열기는 급속히 냉각되었습니다.

 

 

대규모 의병 조직과 국내진공이 난관에 부딪히자, 안중근의 제의로 결성된 것이 <동의단지회>입니다. 전면전과 게릴라전이 어렵게 되자 암살단을 조직한 것이지요. 안중근과 함께 단지동맹에 참가한 김기룡, 백규삼, 엄인섭 등이 <동의회>의 간부였다는 점도 단지동맹이 <동의회>의 소규모 핵심단체였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리고 <동의회><동의단지회>는 모두 최재형 선생의 연추하리 집에서 설립되었고, 그의 재정지원을 받았던 것이지요.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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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重根義士斷指同盟記念碑公園整然配置された15もしかしたら斷指同盟員すかもしれないというもしました金九先生のエピソードをしたからです

 

 

金九先生<白凡日誌>"ムンウリドル(=無隅石)"てきます日本700人余りの愛国者検挙さまざまな拷問105事件操作したことをして金九先生倭寇しくった=朝鮮でムンウリ=独立運動家をすべてそうとしているべていますそして自分けて無隅石としてきていけと決心したえました

 

 

ムンウリとはのないきな言葉ですが日本植民地時代には独立運動家言葉でもありました安重根義士斷指同盟記念碑公園15金九先生言葉通朝鮮独立運動家しているのかもしれません

 

 

斷指同盟員12われてきました安重根義士伊藤博文砲殺事件6回公判自身めて白南奎金基龍姜基淳曹順應黄吉炳姜斗瓚金天化8核心組織員とし、「客員としては鄭元植朴鳳錫柳致弘金白春4がった資料には嚴仁燮ペク·ウォンボハン·ジョンホ同盟員だったという記録があります全部15です

 

 

これらの名前実名ではなくほとんど仮名虚名です安重根義士拷問とともにわれた審問過程同盟員名前をまともに陳述しなかったためです

 

核心組織員8のうち本人いた7名前えたり漢字えたりした仮名です白南奎白圭三金基龍金起龍姜起順姜舜璣曹順應趙應順黃吉秉黃炳吉姜斗瓚姜昌斗金天化はカ葛化天名前変形させたものです

 

 

客員として言及した4のうち柳致弘実名推定されますが鄭元植朴鳳錫金白春鄭元柱朴錫鳳金乙嶺虚名推定されますこれらがであるかは把握されていません

 

また資料には嚴仁燮ペク·ウォンボハン·ジョンホなども斷指同盟員として記録されましたペク·ウォンボとハン·ジョンホはなのからされていませんが嚴仁燮する陳述っています

 

安重根予備審問嚴仁燮金起龍斷指同盟員ではないと否定しましたが実際金起龍斷指同盟員であり嚴仁燮もそうだった可能性いですただ厳仁燮庚戌国恥直後変節日本密偵変身独立運動きな害悪ぼしましたイエスの12弟子たちのでも裏切のガリョット·ユダがてきたのとじです

 

 

しかし同盟員独立運動けました白圭三先生抗日武装闘争中戦死黃炳吉先生沿海州中国独立運動琿春病死しました趙應順先生臨時政府軍資金していたところを逮捕され獄中生活りました

 

ただ同盟記念碑公園には安重根義士名前強調されていますが同盟員じように記憶されるべきでしょうしかしらの身元はおろからの名前さえらかにされていないのは残念なことですらの身元がすべてらかになるまでは同盟員としてげられてきた15をすべて記憶尊重する必要があるといます

 

 

そういうこの記念碑公園けられた15のムンウリこの15同盟員すものとみてもいいでしょう裏切のオ嚴仁燮までめてですね

 

 

最後斷指同盟正式名称同義斷指会であったこともえておく必要があります崔在亨(チェ·ジェヒョン)先生主導結成された同義会決死隊だったのです

 

 

崔在亨先生安重根義士伊藤博文狙撃支援しただけでなく安重根義士殉国したはその家族沿海州れて世話をしたとされています(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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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단지동맹 기념비 공원에 가지런히 배치된 묵직한 15개의 돌이 혹시 단지동맹원들을 가리킬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김구 선생의 일화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뭉우리돌이야기가 나옵니다. 일제가 7백여명의 애국자를 검거해 갖은 고문으로 105인 사건을 조작한 것을 가리켜 김구 선생은 왜놈들은 새로 산 밭(=조선)에서 뭉우리돌(=독립운동가)을 다 골라 버리고야 말려는 것이라고 서술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계속해서 뭉우리돌로 살아가리라 하고 굳게 결심했다고 덧붙였습니다.

 

 

뭉우리돌이란 모나지 않은 둥글둥글한 큰 돌을 가리키는 말인데,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들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 기념비 공원에서 본 15개의 돌들은 김구 선생의 말마따나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을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단지동맹원은 12명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 척살 사건의 6회 공판에서 자신을 포함해 백남규(白南奎), 김기룡(金基龍), 강기순(姜起順), 조순응(曹順應), 황길병(黃吉秉), 강두찬(姜斗瓚), 김천화(金天化) 8명이 핵심조직원이며 객원으로는 정원식(鄭元柱), 박봉석(朴鳳錫), 유치홍(柳致弘), 김백춘(金伯春) 4을 거명했습니다. 다른 자료에는 엄인섭(嚴仁燮), 백원보, 한종호도 동맹원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모두 15명입니다.

 

 

이 이름들은 실명이 아니라 대부분 가명이거나 허명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고문과 함께 진행된 심문과정에서 동맹원들의 이름을 제대로 진술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핵심조직원 8명 중에서 본인을 제외한 7명의 이름은 성이나 이름을 바꾸거나 한자를 바꾼 가명입니다. 백남규(白南奎)는 백규삼(白圭三), 김기룡(金基龍)은 김기룡(金起龍), 강기순(姜起順)은 강순기(姜舜璣), 조순응(曹順應)은 조응순(趙應順), 황길병(黃吉秉)은 황병길(黃炳吉), 강두찬(姜斗瓚)은 강창두(姜昌斗), 김천화(金天化)는 갈화천(葛化天)의 이름을 변형시킨 것입니다.

 

 

객원으로 언급한 4명 중에서 유치홍(柳致弘)은 실명으로 추정되지만, 정원식(鄭元柱), 박봉석(朴鳳錫), 김백춘(金伯春)은 정원주(鄭元柱), 박석봉(朴錫鳳), 김을령(?)의 허명으로 추정됩니다. 이들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또 다른 자료에는 엄인섭(嚴仁燮), 백원보(?), 한종호(?)” 등도 단지동맹원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백원보와 한종호는 누구인지 알려진 바 없지만, 엄인섭에 대한 진술은 엇갈립니다.

 

안중근은 예비심문에서 엄인섭과 김기룡은 단지동맹원이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실제로 김기룡은 단지동맹원이었고, 엄인섭도 그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엄인섭은 경술국치 직후 변절해 일제의 밀정으로 변신, 독립운동에 큰 해악을 끼쳤습니다. 예수의 12제자들 중에서도 배신자 가룟유다가 나왔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동맹원들은 독립운동을 이어갔습니다. 백규삼 선생은 항일 무장투쟁 중에 전사했고, 황병길 선생은 연해주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훈춘에서 병사했습니다. 조응순 선생은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전달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습니다.

 

단지동맹 기념비 공원에는 안중근 의사의 이름이 강조되어 있지만, 다른 동맹원들도 기억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들의 신원이 충분히 밝혀지지 않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때까지는 동맹원으로 거론되어온 15분을 모두 기억하고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기념비 공원에 마련된 15개의 뭉우리돌은 이 15명의 동맹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배신자 엄인섭까지 포함해서 말이지요.

 

 

끝으로 단지동맹(斷指同盟)의 정식 이름은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이었던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최재형 선생의 주도로 결성된 동의회(同義會)의 결사대였던 것이지요.

 

 

최재형 선생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지원했을 뿐 아니라,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후에는 그 가족들을 연해주로 모셔다가 돌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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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重根義士斷指同盟記念碑公園には説明碑記念碑のほか15ころが配列されています3行縦5べられたこの15ころは安重根義士らかにした伊藤博文殺害理由すそうです伊藤博文罪状りです

 

 

1.明成皇后殺害した; 2.高宗皇帝廃位した; 3.乙巳5条約丁未7条約強要した; 4.無罪韓国人虐殺した; 5.政権強奪した; 6.鉄道鉱山山林川沢強奪した; 7.日帝紙幣使用強要した; 8.軍隊解散した; 9.教育妨害された; 10.韓国人外国留学じた; 11.教科書押収してやした; 12.韓国人日本人保護けようと世界めた; 13.韓国日本争闘いており殺戮えないが太平無事であるかのように天皇をだました; 14.東洋平和った; 15.日本天皇·光明天皇した

 

 

安重根義士斷指同盟記念碑公園にこのようなころをべたのはいアイデアです伊藤博文されて当然理由説明する機会えるからですこれらのころをると伊藤博文罪状十五種類もあったのか?」というきとともにインターネットをさせてくれるからです

 

伊藤罪状安重根義士19091026伊藤砲殺して逮捕されたハルビンの日本総領事館関東都督府溝淵孝雄尋問けたらかにしたものだそうですこの目録韓國国史編纂委員会韓国独立運動史資料集63-4収録されていますがおそらく安重根審問調書直接参考にしたか朝鮮史編修会朝鮮史収録されているものでしょう

 

 

ところが当時世界各国新聞伊藤博文暗殺砲殺理由15記事にしましたシンガポールの英文新聞ストレーツ·タイムズ(The Straits Times)19091225掲載したハルビンの悲劇(The Harbin Tragedy)というタイトルの記事最近死亡した伊藤伯爵狙撃者する予備審問1116わりまもなく非公開裁判回付されるとし狙撃者予備審問らかにした伊藤した15理由のように報道しました

 

 

1.明成皇后殺害した; 2.190511韓国日本保護国にした; 3.1907丁未7条約強制的締結した; 4.高宗皇帝廃位した; 5.軍隊解散した; 6.のない々を虐殺した; 7.韓国人権利剥奪した; 8.韓国教科書やした犯罪; 9.韓国人新聞寄与させなかった; 10.日本紙幣強制的使用した; 11.韓国300ポンドの借金わせた; 12.東洋平和った; 13.韓国する日本保護政策糊塗した; 14.日本天皇光明天皇した; 15.日本世界をだました

 

 

ロシアの沿海州新聞辺境(Далекая окраина)掲載された伊藤博文罪状目録ストレーツタイムズ目録じですところが国史編纂委員会資料集目録当時外信目録にはいがあります順番うし内容います

 

外信目録には韓国られた目録5.政権強奪した」、「6.鉄道鉱山山林川沢強奪した」、「9.教育妨害した」、「10.韓国人外国留学禁止した」、「13.韓国日本争闘殺戮えないのに太平無事であるように天皇をだましたなどがけており、「7.韓国人権利剥奪した」、「9.韓国人新聞寄与できないようにした」、「11.韓国300ポンドの借金わせた」、「15.日本世界をだましたまれました

 

 

史料(1)いほど(2)現場事件いほど(3)客観的であるほど価値いです日帝審問調書日帝朝鮮史編修会議資料よりは外信報道価値のある史料でしょう

 

安重根義士斷指同盟伊藤博文砲殺100年以上前のことでクラスキーノ記念碑公園15ころが配置されてから10年以上ちましたところがこの15ころがすところがなのか確定していないというのは不幸なことです

 

 

韓国歴史学近代史研究はまだまだいようです(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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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단지동맹 기념비 공원에는 설명비와 기념비 외에도 15개의 돌덩이가 배열되어 있습니다. 가로 3행 세로 5열로 가지런히 배치된 이 15개의 돌덩이는 안중근 의사가 밝힌 이토 히로부미 척살 이유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고종 황제를 폐위한 죄; 3. 을사 5조약과 정미 7조약을 강요한 죄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5. 정권을 강탈한 죄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탈한 죄 7. 일제 지폐 사용을 강요한 죄 8. 군대를 해산한 죄 9. 교육을 방해한 죄 10. 한국인 외국유학을 금지한 죄;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운 죄; 12.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쟁투가 계속되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무사한 것처럼 텐노를 속인 죄; 14.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 15. 일본 텐노의 부친 코메이 텐노를 죽인 죄.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 기념비 공원에 이런 돌덩이를 나열한 것은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척살되어 마땅한 이유를 설명할 기회를 주기 때문입니다. 이 돌덩이들을 보면 열다섯 가지나 되었던가?” 하는 놀라움과 함께 인터넷을 찾아보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토의 죄상은, 안중근 의사가 19091026일 이토를 포살하고 체포된 뒤, 하얼빈의 일본총영사관에서 관동도독부 미조부치 타카오(溝淵孝雄)의 심문을 받을 때 밝힌 것이라고 합니다. 이 목록은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독립운동사 자료집> 63-4쪽에 수록되었는데, 아마도 안중근 신문조서를 직접 참고했거나,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에 수록된 것이겠습니다.

 

 

그런데 당시 세계 각국의 신문들도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보도했고, 척살 이유 15가지도 기사화 했습니다. 싱가폴의 영자신문 <스트레이츠 타임스(The Straits Times)>19091225면에 게재한 <하얼빈의 비극(The Harbin Tragedy)>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최근 사망한 이토 백작의 저격자에 대한 예비심문1116일 끝났고 곧 비공개 재판에 회부될 것이라면서, 저격자가 예비심문에서 밝힌 이토를 죽인 15가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보도했습니다.

 

 

“1.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190511월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죄; 3. 1907년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4. 고종황제를 폐위한 죄; 5. 군대를 해산한 죄; 6.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죄; 7. 한국인의 권리를 박탈한 죄; 8. 한국의 교과서를 불태운 죄; 9. 한국인들을 신문에 기여하지 못하게 한 죄; 10. 일본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11. 한국이 300만파운드의 빚을 지운 죄; 12.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13.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정책을 호도한 죄; 14. 일본텐노의 부친 고메이 텐노를 죽인 죄; 15. 일본과 세계를 속인 죄.”

 

 

러시아의 연해주의 신문 <머나먼 변방(Далекая окраина)>에 실린 목록도 <스트레이츠 타임스>의 목록과 같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집의 목록과 당시 외신의 목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순서도 다르고 내용도 조금 다릅니다.

 

외신의 목록에는 한국에 알려진 목록 중에서 ‘5. 정권을 강탈한 죄’,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탈한 죄’, ‘9. 교육을 방해한 죄, ‘10. 한국인의 외국유학을 금지한 죄’, ‘13. 한국과 일본 사이에 쟁투가 계속되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무사한 것처럼 텐노를 속인 죄등이 빠져있고, “7. 한국인의 권리를 박탈한 죄’, ‘9. 한국인들을 신문에 기여하지 못하게 한 죄’, ‘11. 한국에 300만 파운드의 빚을 지운 죄’, ‘15. 일본과 세계를 속인 죄가 포함되었습니다.

 

 

사료는 (1) 많을수록, (2) 현장과 사건에 가까울수록, (3) 객관적일수록 가치가 높습니다. 일제의 심문조서나, 일제 조선사편수회의 자료보다는 외신 보도가 더 가치 있는 사료일 것입니다.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과 이토 히로부미 척살이 1백년도 더 전의 일이고, 크라스키노 기념비 공원에 15개의 돌덩이가 배치된 지도 10년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이 15개의 돌덩이가 가리키는 바가 무엇인지 확정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한국의 역사학, 특히 근대사 연구는 갈 길이 아주 먼 것 같습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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グーグルの地図にはこの記念碑韓国語<安重根斷指同盟碑>説明されておりいてロシアでも<韓国歴史的記念物(Исторический памятник Кореи)>えました安重根義士名前はありませんが、「高麗歴史的記念物明示されたのはありがたいことです

 

 

グーグル地図には安重根斷指同盟碑中心半径5キロ以内韓国関連史跡3つもさらにありますには渤海土城には延秋下里クラスキノのには地新墟村がありますこの地域高麗人歴史的痕跡地域安重根義士団地同盟碑しくないようにえます

 

 

しかも189番国道沿ってもうハサンると道路鉄道交差する地点てきますがグーグル地図はこの交差点平壌鉄道表記しました豆満江鉄橋えて朝鮮行きの鉄道という意味でしょうが平壌ければソウルまでもけるし木浦釜山までもけるという意味です

 

 

安重根義士斷指同盟記念碑10メートル20メートルほどの長方形公園てられましたがユニベラ農場入口道路した公園枕元にはこの記念碑沿革した石碑てられていますこの碑石には韓国語ろにはロシア記念碑沿革叙述していますが内容じでした

 

 

190927安重根義士をはじめとする決死同志金起龍キム·ギリョン)、白圭三ペク·ギュサム)、黄炳吉ファン·ビョンギル)、趙応順チョ·ウンスン)、姜昌斗カン·チャンドゥ)、鄭元柱チョン·ウォンジュ)、朴鳳錫パク·ボンソク)、柳致弘(·チホン)金伯春(キム·ベクチュン)など12はここクラスキーノ(延秋下里)祖国独立東洋平和のためにただ同盟するらは太極旗げておいてそれぞれ左手無名指って生動する鮮血大韓獨立、「大韓国万歳三唱する光復会高麗学術文化財団20011018ロシア政府協力てこのてる

 

 

この説明碑てられた20011018だとったのをると記念碑めて建立された一緒てられた説明碑です記念碑てられた場所クラスキーノとしたのは事実とはなりますが括弧延秋下里明示することでしました

 

石板青銅板製作された説明碑外形輪郭きな水滴模様だがこれは12斷指同盟員ったにぽたぽたとちていた象徴するものとられますそして石板青銅12なったのをると同盟員12つにまとめて表現しました

 

 

説明碑から見下ろすと長方形公園かい中央記念碑えます記念碑つの部分構成されていますが主記念碑広開土大王碑えられた4メートルの大理石副記念碑説明碑主記念碑中間いててられたさな石碑です

 

 

主記念碑正面中央には安重根義士首印陰刻まれており前面下段には190935日頃/12まる二列まれていますところがただ同盟旗揚190935日頃ったのは疑問です

 

 

万古義士安重根伝桂奉禹(·ボンウ)1914923日付<勧業新聞>)』斷指同盟檀紀424227だとべていますがこれをグレゴリオ換算すると1909226帝政ロシアが使用していたユリウスでは1909213です説明碑擧事日27としたのは正確旧暦日付ですがいざ主記念碑日付はやや突飛です

 

 

副記念碑さとさがともに1メートルほどの大理石ですがその上段にも安重根義士手印陰刻されていて裏面下段には201184/102ぎた今日/12記憶するまれていましたこの日付記念碑2回目移転した除幕式った日付です

 

 

注記念碑副記念碑登場する"12"という表現意外です碑文をすべてハングルでいたのに12だけ漢文いた理由になりました(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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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지도에는 이 기념비가 한국어로 <안중근 단지 동맹비>로 설명되어 있고, 이어서 러시아어로도 <한국의 역사적 기념물(Исторический памятник Кореи)>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이름은 없지만 고려(Кореи)’의 역사적 기념물이라고 명시되었습니다.

 

 

또 구글 지도에는 <안중근 단지동맹비>를 중심으로 반경 5킬로미터 안에 한국 관련 사적이 3개나 더 있습니다. 남쪽에는 발해 토성, 북쪽에는 연추 하리가 있고, 카리스키노의 동쪽에는 지신허 마을이 있습니다. 이 지역이 고려인의 역사적 흔적이 많은 지역으로,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비가 외롭지 않아 보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189번 국도를 따라 조금 더 하산 쪽으로 내려가면 철도와 교차하는 지점이 나오는데, 구글 지도는 이 교차점에 평양으로 가는 철도라고 표기했습니다. 두만강 철교를 넘어 조선행 철도라는 뜻이겠는데, 평양에 갈 수 있으면 서울까지도 갈 수 있고, 목포와 부산까지도 갈 수 있다는 뜻이겠습니다.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 기념비는 가로 10미터 세로 20미터쯤의 장방형으로 조성된 공원에 건립되었는데, 유니베라 농장 입구의 도로에 면한 공원의 머리맡에는 이 기념비의 연혁을 서술한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 비석의 앞쪽에는 한국어, 뒤쪽에는 러시아어로 기념비의 연혁을 서술했는데, 내용은 같았습니다.

 

 

“190927일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결사동지 김기룡, 백규삼, 황병길, 조응순, 강순기, 강창두, 정원주, 박봉석, 유치홍, 김백춘, 김천화 등 12인은 이곳 크라스키노(연추하리) 마을에서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단지동맹하다. 이들은 태극기를 펼쳐놓고 각기 왼손 무명지를 잘라 생동하는 선혈로 대한독립이라 쓰고 대한국 만세를 삼창하다.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은 20011018일 러시아 정부의 협조를 얻어 이 비를 세우다.”

 

 

이 설명비가 세워진 날이 20011018일이라고 한 것을 보면 기념비가 처음 건립되었을 때 함께 세워진 설명비입니다. 기념비가 세워진 곳을 크라스키노라고 한 것은 사실과 다르지만 괄호 속에 연추하리라고 명시함으로써 바로잡았습니다.

 

돌판과 청동판으로 제작된 설명비의 외형 윤곽이 커다란 물방울 모양인데, 이는 12인의 단지동맹원들이 손가락을 잘랐을 때 뚝뚝 떨어지던 핏방울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돌판과 청동판 12개가 겹쳐진 것을 보면 동맹원 12명의 핏방울을 한데 모아 표현했습니다.

 

 

설명비에서 내려다보면 장방형의 공원 맞은편 중앙에 기념비가 보입니다. 기념비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 기념비는 광개토대왕비 모양으로 다듬어진 높이 4미터의 검은 대리석이고, () 기념비는 설명비와 주 기념비의 중간에 왼쪽으로 비껴 세운 작은 비석입니다.

 

 

주 기념비의 정면 중앙에는 안중근 의사의 수인(手印)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고, 전면 하단에는 “190935일경/ 12()이 모이다라고 두 줄로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단지동맹 거사일을 190935일경이라고 한 것은 의문입니다.

 

 

<만고의사 안중근전(계봉우, 1914923일자 권업신문)>은 단지동맹일이 단기 424227일이라고 서술했는데, 이를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면 1909226, 제정 러시아가 사용하던 율리우스력으로는 1909213일입니다. 설명비에 거사일을 27일이라고 한 것은 정확한 음력 날짜이지만, 정작 주 기념비의 날짜는 다소 엉뚱합니다.

 

 

한편 부()기념비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모두 1미터 쯤의 검은 대리석인데, 부기념비의 상단에도 안중근 의사의 수인이 음각되어 있고, 뒷면 하단에는 “201184/ 102년이 지난 오늘/ 12을 기억하다라고 세 줄로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날짜는 기념비를 두 번째 이전한 후 제막식을 가진 날짜입니다.

 

 

주기념비와 부기념비에 등장하는 “12이라는 표현도 뜻밖입니다. 비문을 모두 한글로 썼으면서도 12인의 인()자만 한문으로 쓴 까닭이 궁금했습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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キム·ヴァレリアキム·バレンチン先生夫妻一緒貸切バスに乗車した一行ウスリスクで出発する独立運動史跡地訪問しました安重根義士斷指同盟記念碑です

 

 

この記念碑はクラスキーノから朝鮮-ロシアの国境地帯であるハサンに189番国道沿って西3キロほどに位置しましたが韓国企業ユニベラの農場にあります

 

この記念碑200110光復会高麗学術文化財団共同クラスキノ5キロ地点のツカノヴォ(Цуканово)入口てられましたが近隣れる延秋河(Янчхэ)頻繁氾濫記念碑損傷流失すると200711ウラジオストク総領事館韓国企業ナムヤンアロエが協力してクラスキノ外郭記念碑しました

 

 

しかしこの地域もロシア国境守備隊作戦区域編入され事前許諾なしに記念碑訪問できなくなると20118記念碑拡大補修現在位置移転しました

 

安重根アン·ジュングン記念碑めて設置されたツカノヴォは清朝期から1937高麗人強制移住以前イェンチウ延秋)」ばれていましたこの地域れる延秋河んだ名前だそうですが延秋河延秋んでいる可能性もあるでしょう

 

 

イェンチウの漢字表記延秋, 烟秋, 煙秋などといますが発音はすべてじです1860北京条約沿海州がロシアに割譲されたイェンチウはシモノヴォ(Симоново)というロシアの名前わりましたが(Сим-)しく(-ново)土地という意味だったといます

 

1864地新墟移住めた高麗人人口えると1868からシモノヴォ地域移動定着村をつくり高麗人はこれを延秋めました現在名称がロシアでもヤンチヘ(Янчихe)として定着したのは高麗人慣行のおかげだったといます

 

 

高麗人増加延秋3つの拡張され上延秋中延秋下延秋ばれましたが1937強制移住以降·中延秋閉鎖されのツカノヴォは下延秋にロシアけながら維持されたです下延秋延秋下里ばれることもありました

 

安重根義士斷指同盟記念碑最初にツカノヴォにてられたのはそこが斷指同盟現場だからです1905乙巳勒約日本侵略露骨化すると安重根義士愛国啓蒙運動1907大韓帝国軍隊解散した江原道黄海道義兵活動展開しましたが限界結局沿海州延秋村亡命そこで義兵運動じました

 

 

沿海州義兵長·全帝翼右営将地位にあり19087100人余りの部隊員いて豆満江咸鏡北道景興郡蘆面進撃日本軍守備隊全滅させましたいて景興郡新牙山付近日本軍交戦戦果げたりもしましたがらえた日本軍捕虜国際公法により釈放したためこの捕虜たちの情報提供安重根部隊位置発覚義兵部隊全滅沿海州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

 

 

その安重根はブラゴスロベンノイェ(四萬里)からスチャン(水清パルティザンスク)るまであまねくりながら義兵運動こそうとしましたが失敗しました捕虜解放事件彼自身信任国内進撃失敗沿海州武装闘争熱気めたためです

 

このような雰囲気一新するためにみたのがただの斷指同盟です190927陽暦226)、安重根をはじめとする熱血独立運動家12延秋下里村まり左手薬指一緒って独立運動げることをったのです

 

 

当時盟員たちは3年以内伊藤博文李完用殺害できなければ自分たちが自決するという覚悟って太極旗大韓獨立だといていました

 

 

この太極旗でもわっていてたちがれたクラスキーノの斷指同盟記念碑まさにその歴史記念するために建立されたものでした(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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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레리아, 김발렌친 선생 부부와 함께 전세버스에 승차한 일행은 우수리스크로 출발하기 전에 독립운동 사적지를 먼저 방문했습니다.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 기념비입니다.

 

 

이 기념비는 크라스키노에서 조선-러시아 국경지대인 하산으로 가는 189번 국도를 따라 서쪽으로 3킬로미터쯤에 위치했는데, 한국 기업 유니베라의 농장 앞에 있습니다.

 

이 기념비는 200110월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공동으로, 크라스키노 북쪽 5킬로미터 지점의 츠카노보(Цуканово) 마을 입구에 세워졌으나, 인근을 흐르는 옌치허(Янчихэ) 강의 잦은 범람으로 기념비가 손상되고 유실되자, 200711월 블라디보스톡 총영사관과 한국 기업 남양알로에가 협력하여 크라스키노 시의 북쪽 외곽으로 기념비를 옮겼습니다.

 

 

그러나 이 지역도 러시아 국경수비대의 작전구역에 편입되어, 군의 사전 허락 없이 기념비를 방문할 수 없게 되자, 20118월 기념비를 확대 보수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습니다.

 

안중근 기념비가 처음 설치됐던 츠카노보는, 중국 청나라 시기부터 1937년의 고려인 강제이주 이전에는 옌치우(延秋, 연추)라고 불렸습니다. 이 지역을 흐르는 강, 옌치허(延秋河)를 딴 이름이라고 하지만, 옌치허가 옌치우를 따랐을 수도 있겠지요.

 

 

옌치우의 한자 표기가 延秋, 烟秋, 煙秋 등으로 다르기는 한데, 발음은 모두 옌치우입니다. 1860년의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가 러시아에 할당된 뒤 옌치우는 시모노보(Симоново)라는 러시아 이름으로 바뀌었는데, 지금(Сим-) 새로(-ново) 얻은 땅이라는 뜻이었을 겁니다.

 

1864년 지신허로 이주하기 시작한 고려인들의 인구가 늘자 1868년부터 시모노보 지역으로 이동해 정착촌을 만들면서 고려인들은 이를 다시 연추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의 이름이 러시아어로도 얀치헤(Янчихe)로 굳어진 것은 고려인들의 관행 덕분이었을 것입니다.

 

 

고려인이 더 증가하면서 연추는 3개 마을로 확장되어, 상연추, 중연후, 하연추라고 불렸는데, 1937년의 강제이주 이후 상, 중연후는 폐쇄되고, 지금의 츠카노보는 하연추에 러시아인들이 계속 거주하면서 유지된 마을입니다. 하연추는 연추 하리(下里)라고 불리기도 했더군요.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 기념비가 처음에 츠카노보에 세워진 것은 그곳이 단지동맹의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안중근 의사는 애국계몽운동에 뛰어들었고,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후에는 강원도와 황해도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했으나 한계를 느끼고 결국 연해주 연추 마을로 망명, 그곳에서 의병운동에 투신했습니다.

 

 

그는 연해주의 의병장 전제익(全濟益)의 휘하에서 우영장(右營將)의 지위로 19087월 휘하 1백여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으로 진격, 일본군 수비대를 전멸시켰습니다. 이어서 경흥군 신아산 부근에서 일본군과 교전해 전과를 올리기도 했으나,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를 국제공법에 따라 석방하는 바람에, 이 포로들의 제보로 안중근 부대의 위치가 발각되어 의병 부대가 전멸, 그는 다시 연해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이후 안중근은 블라고슬로벤노예(四萬里, 사말리)에서 수찬(水淸, 파르티잔스크)에 이르기까지 두루 다니면서 다시 의병운동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포로 석방 사건으로 그 자신도 신임을 잃었고, 국내 진격의 실패로 연해주의 무장투쟁 열기가 식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 시도한 것이 단지동맹(斷指同盟)입니다. 190927(양력 226) 안중근을 비롯한 열혈 독립운동가 12명이 연추 하리 마을에 모여 왼손 약지 손가락의 끝마디를 함께 자르면서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한 것이지요.

 

 

당시 맹원들은 3년 내에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을 척살하지 못하면, 자신들이 자결한다는 각오를 다졌고, 손가락을 잘라 솟구치는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이라고 썼습니다.

 

 

이 태극기는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고, 우리가 방문한 크라스키노의 단지동맹 기념비는 바로 그날의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것이었습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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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国とロシアの国境通過した訪問団国際バスにみました舗装状態があまりくない地方道路30ほどって最初都市クラスキノ(Крскион)到着しましたきているうちにがロシアにもれるようになったのです

 

 

中国での戸惑いがロシアでもきました中国では簡字体漢字からなくてっていましたがロシアのクリリックアルファベットもごわいです中国ではハングルが併記されているところがくてなんとかごしていましたがロシアめませんでした

 

 

クラスキーノは沿海州(Приморского края、プリモルスキー·クライのハサンスキー(Хасанского района)都市定着地人口33百人2010年国勢調査ほどだそうです以前44百人(1989)35百人(2002)だったということでここも人口っていますね

 

クラスキノエは1867定着最初名前はノヴォキエフスコエ(Новокиевское)でした1869から越境犯罪防止のために守備隊派遣され1880にはウスリスク騎兵隊駐屯めましたつまりここは国境守備するための軍事都市だったわけです

 

 

1936510ノヴォキエフスコエはクラスキノと改名されましたが1936325この地域侵略する圧倒的日本·満州軍一個小隊兵力撃退戦死した赤軍將校のミハイル·クラシキン(Михаиле Краскине)中尉えるためだったといいます

 

 

ロシア語版ウィキペディアは1880年代中半にこの地域有力実業家であり在露高麗人非公式指導者崔在亨(チェ·ジェヒョン, Чхвэ Джэхен,, 洗礼名, ピョートルチェ, Петр Цой, 1860-1920)先生がここで活動めたとべています非公式というのは公務員ではなかったという意味のようで崔先生主導最初6年制高麗人学校がここに設立されたそうです

 

 

<崔在亨高麗人民族学校>訪問団がロシア入国後めて到着したところが崔在亨先生独立運動めて高麗人学校設立したクラスキノということが意味深じられました

 

意味いのはそれだけではありません国際バスがクラスキーノに到着すると一行荷物って全員下車したのですがここからは貸切バスでウスリスクまで移動することが計画されたからです荷物をまとめておいて貸切バスをっているのですがすぐに到着したバスからキム·ヴァレリア先生がご男便のキム·バレンチン先生一緒りるのでした

 

 

キムヴァレリア先生一行一人ずつまえて抱擁挨拶してくれました黃光石(ファン·グァンソク)先生はコロナ事態とウクライナ戦争4ぶりに沿海州訪問したのですがキム·ヴァレリア先生しぶりにってしくって抱擁する姿本当素敵でしたしかも黃光石先生はご南便のキム·バレンチン先生アニキびながらっていました

 

 

沿海州をよく訪問していたチョン·ソンフン李黃徽(·ファンフィ)先生もキム·バレリア先生しく昨年大陸横断自動車ラリーをめながらウスリスクを訪問キム·バレリア先生ったことがある李高恩(·ゴウン)先生じでした

 

はキムヴァレリア先生直接会うのがめてでしたしかしこの2年間一緒きながらオンラインで交換した写真音声メッセージですでにおなじみでした拝見していたらすぐ昨日会ったようながしましたキム·ヴァレリア先生もハグでえてくださり沿海州めて訪問するリュ·ゴンジュイム·サンテク·ソンスキム·サモキム·チャヌパク·ハンヨンパク·ミヒョンチョン·ジェウンパク·インホ先生などもじでした

 

 

バスにってグーグルマップでウリスクまでの距離てみました200キロをえましたソウルから江陵まで2時間40分走ってえにてくださったのです訪問団がクラスキーノに到着することをりながらウスリスクでっていられなかったそうです

 

 

めてたロシアでこんなからのもてなしをけるとは予想していませんでした(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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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러시아 국경을 통과한 방문단은 다시 국제버스에 올라탔습니다. 포장상태가 그리 좋지 않은 지방도로를 30분쯤 달려서 첫 도시 크라스키노(Краскино)에 도착했습니다. 살다보니까 제가 러시아에도 발을 디뎌보게 된 것입니다.

 

 

중국에서의 당황스러움이 러시아에서도 계속됐습니다. 중국에서는 간자체 한자를 몰라서 애를 먹었는데, 러시아의 크릴릭 알파벳도 만만치 않습니다. 중국에서는 한글이 병기되어 있는 곳이 많아서 그럭저럭 지냈지만, 러시아어는 아예 읽지도 못하겠더군요.

 

 

크라스키노는 연해주(Приморского края, 프리모르스키 크라이)의 하산스키군(Хасанского района)의 도시정착지로 인구는 33백명(2010년 센서스) 정도라고 합니다. 전에는 44백명(1989), 35백명(2002)이었다고 하니까 여기도 인구가 줄고 있네요.

 

크라스키노에는 1867년에 사람이 정착하기 시작했고 첫 이름은 노보키에프스코에(Новокиевское)였습니다. 1869년부터 월경과 범죄방지를 위해 수비대가 파견됐고, 1880년 우수리스크 기병대가 주둔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이곳은 국경을 수비하기 위한 군사도시였던 셈입니다.

 

 

1936510일 노보키에프스코예는 크라스키노로 개명되었는데, 1936325일 이 지역을 침략하는 압도적인 일본-만주군을 일개 소대 병력으로 격퇴하고 전사한 적군(赤軍) 장교 미하일 크라시킨(Михаиле Краскине) 중위를 기리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러시아어 위키피디어는 1880년대 중반에 이 지역의 유력 사업가이자 재러 고려인들의 비공식 지도자 최재형(Чхвэ Джэхён, 세례명 뾰뜨르 최 Петр Цой, 1860-1920) 선생이 이곳에서 활동을 시작했다고 서술했습니다. 비공식이라고 한 것은 공무원은 아니었다는 뜻인 것 같고, 최재형 선생의 주도로 최초의 6년제 고려인 학교가 이곳에 설립됐다고 합니다.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 방문단이 러시아 입국 후에 처음 도착한 곳이 최재형 선생께서 독립운동을 시작하시고 첫 고려인 학교를 설립하신 크라스키노라는 것이 뜻 깊게 느껴졌습니다.

 

뜻이 깊은 것은 그뿐이 아닙니다. 국제버스가 크라스키노에 도착하자 일행은 짐을 가지고 모두 하차했는데, 여기서부터는 전세버스로 우수리스크까지 이동하기로 계획되었기 때문입니다. 짐을 한데 모아놓고서 전세버스를 기다리는데, 이내 도착한 버스에서 김 발레리아 선생이 남편이신 김 발렌친 선생과 함께 내리시는 것이었습니다.

 

 

김발레리아 선생은 다짜고짜 일행을 한 사람씩 붙잡고 포옹으로 인사해 주셨습니다. 황광석 선생은 코로나 사태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4년 만에 연해주를 방문한 것인데, 김발레리아 선생을 오랜만에 만나 반갑게 만나 포옹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더구나 황선생은 남편이신 김발렌친 선생도 형님이라고 부르면서 오래 포옹하시더군요.

 

 

연해주를 자주 방문하셨던 정성훈, 이황휘 선생도 김발레리아 선생을 반갑게 맞았고, 작년 대륙횡단 자동차 랠리를 시작하면서 우수리스크를 방문, 김발레리아 선생을 만난 적이 있는 이고은 선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김발레리아 선생을 직접 만나는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2년 동안 함께 일하면서 온라인으로 교환한 사진과 음성메시지로 이미 친숙했습니다. 얼굴을 뵙고 목소리를 들으니 바로 어제 만났던 것 같았습니다. 김발레리아 선생은 저도 포옹으로 맞아 주셨고, 연해주를 처음 방문하는 류건주, 임상택, 나성수, 김사모, 김찬우, 박한용, 박미현, 전재운, 박인호 선생 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버스에 올라 자리를 잡고 구글맵으로 우수리스크까지의 거리를 살펴보았습니다. 200킬로미터가 넘었습니다. 서울에서 강릉까지 2시간40분을 달려 마중을 나오신 것입니다. 방문단이 크라스키노에 도착하는 것을 알면서 우수리스크에서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고 하십니다.

 

 

처음 온 러시아에서 이런 진심어린 환대를 받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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琿春海関ぎてロシアに入国すると包装状態があまりくないクラスキノ-国境国道(а/д Крскин-госг)沿って30ほどってクラスキノに到着します

 

グーグルの地図琿春海関をローマ表記するフィチュンポート(Huichun Port)表記したのが若干疑問です。 「琿春という意味満州語發音huncun音叉した名前だそうですが中国語のや満州語琿春をロシアではHuichun発音するのでしょうか

 

 

琿春海関えると国道両側にコンテナトラックや天然ガスを輸送するタンカートラックがんでいます琿春海関から国境まではもちろん国境ってロシアにってもトラックの行列きました琿春海関通関つトラックだそうです

 

 

ロシア国境地帯には大規模建築工事進行中です道路沿ってとても地域整地していてその巨大鋼鉄のビームがてられ連結されて3-4階建てのさの建物がっています国境地帯でなぜこのような大規模開発進行中なのか疑問いました

 

 

グーグルリングによりこの地域開発潜在力きい地域でありその潜在力中国主導実現していることがかりました昨日今日のことではなく10数年前から開発ブームがまったということですね

 

える成果琿春市発展です中国琿春中国東北地域観光中心地であり朝鮮羅津-先鋒とロシアの沿海州国際交易中心地にしようとしています

 

 

観光都市琿春470キロの長春-琿春高速鉄道開通本格化しましたこれで長春から琿春まで3時間けます2015920開通したこの高速鉄道利用客開通1100万人突破したということです

 

にその101国慶節中華人民共和国政府樹立記念日まった7日連休22万人琿春駅到着したということですね琿春人口24万人ですからそれに観光客1週間集まったわけです

 

 

観光都市よりも野心的計画琿春東北出海しい通路にするということです渾春集散された商品天然資源陸路羅津-先鋒港んで船積みしたり琿春から船積みして豆満江沿って東海るようにするということですここには韓国物流会社琿春ポスコ現代参加することで南北中露4国際交易発展する可能性かれています

 

 

琿春東北出海のためには朝鮮とロシアの協力必要です中国東北地域していません豆満江下流最後17キロが朝鮮とロシアの国境だからです中国東北領土びていて防川村まっています

 

中国物流東海かうには朝鮮とロシアの協力必要中国反対給付提供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朝鮮とロシアが関税恩恵けながら薫天利用させるのでしょう

 

 

この計画過去 4 ~ 5 年間中断されたようですコロナ朝鮮国境閉鎖ウクライナ戦争でロシアがこれを推進する余力がなかったからです

 

しかし最近三国による国際交易努力再開されたもようです20232には羅先-琿春間のトラック通行再開2024には中国豆満江使用権をめぐる朝鮮中国交渉まったということですただ最近北韓韓国への敵対宣言この地域での韓国役割縮小する見通しです

 

 

ロシアは琿春中心とした三国国際交易消極的ですが琿春経由してシベリアや沿海州天然資源中国北韓輸出する問題深刻考慮しています

 

 

韓国訪問団国境地帯目撃したロシアのトレーラーとタンカートラックはそのようなきがすでにまっていることをえる証拠だといます(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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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춘해관을 지나 러시아에 입국하면 포장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 크라스키노-국경 국도(а/д Краскино-госграница)”를 따라 30분쯤 달려 크라스키노에 도착하게 됩니다.

 

구글 지도에서 훈춘해관(渾春海關)을 로마자로 표기할 때 휘춘포트(Huichun Port)라고 표기한 것이 약간 의문입니다. ‘훈춘(渾春)’꼬리라는 뜻의 만주어 훈춘(huncun)’을 음차한 이름입니다. 중국어 훈춘을 러시아어로는 휘춘이라고 발음하는 것일까요?

 

 

훈춘해관을 넘으니 국도의 양쪽에 컨테이너 트럭들과 천연가스를 수송하는 탱커 트럭들이 줄지어 세워져 있습니다. 훈춘해관에서 국경까지는 물론, 국경을 지나 러시아에 들어서도 트럭의 행렬은 계속되었습니다. 훈춘해관의 통관을 기다리는 트럭들이라고 합니다.

 

 

러시아측 국경지대에는 대규모의 건축공사도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도로를 따라 굉장히 넓은 지역이 정지되어 있었고 그 위에 거대한 강철 빔들이 세워지고 연결되어 3-4층 높이의 건물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국경지대에 어째서 이같은 대규모 개발이 진행 중인지 궁금했습니다.

 

 

구글링을 통해, 이 지역이 개발 잠재력이 큰 지역이고, 그 잠재력은 중국 주도로 실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10여년 전부터 개발 붐이 시작됐다는군요.

 

가시적인 성과가 훈춘시의 발전입니다. 중국은 훈춘을 중국 동북지역의 관광 중심지이자, 조선의 나진-선봉과 러시아의 연해주를 연결하는 국제교역 중심지로 삼으려고 합니다.

 

 

관광도시 훈춘은 470킬로미터의 창춘-훈춘 고속철도가 개통되면서 본격화됐습니다. 이제 창춘에서 훈춘까지 3시간에 갈 수 있습니다. 2015920일 개통된 이 고속철도의 이용객은 개통 한 달 만에 1백만명을 돌파했다고 합니다.

 

특히 101일 궈칭제(国庆节, 국경절,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수립 기념일)에 시작된 7일 연휴 동안 22만명이 훈춘역에 도착했다는군요. 훈춘 인구가 24만명이니 그에 버금가는 관광객이 일주일 동안 몰린 것이지요.

 

 

관광도시보다 더 야심찬 계획이 훈춘을 동북출해(東北出海)의 새통로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훈천에 집산된 상품과 천연자원을 육로로 나진-선봉항으로 운반해 선적하거나, 아예 훈춘에서 선적해 두만강을 따라 동해로 나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한국의 물류회사 훈춘포스코현대가 참여함으로써, 남북중러의 4개국 국제교역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열려 있습니다.

 

 

훈춘의 동북출해를 위해서는 조선과 러시아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중국 동북지역은 바다에 접해있지 않습니다. 두만강 하류의 마지막 17킬로미터가 조선과 러시아의 국경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동북 영토는 가는 꼬리모양으로 뻗다가 끄트머리의 팡촨(防川)에 멈춰있습니다.

 

중국의 물류가 동해로 나가려면 조선과 러시아의 협조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중국이 이들에게 반대급부를 제공해야 합니다. 물류 중심지 훈춘을 조선과 러시아가 관세 혜택을 받아가면서 자유롭게 이용하도록 하는 것이겠지요.

 

 

이 계획은 지난 4-5년간 중단된 것으로 보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조선이 국경을 닫았고,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가 이를 추진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최근 삼국의 국제교역 노력이 재개된 것으로 보입니다. 20232월에는 나선-훈춘 사이의 트럭 통행을 재개됐고, 2024년에는 중국의 두만강 사용권에 대한 조선과 중국 사이의 협상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다만 최근 북한의 대남 적대 선언으로 이 지역에서 한국의 역할은 축소될 전망입니다.

 

 

러시아는 훈춘을 중심으로 한 삼국의 국제교역에 가장 소극적이지만, 훈춘을 경유해 시베리아와 연해주의 천연자원을 중국과 북한에 수출하는 문제는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습니다.

 

 

우리 방문단이 중러 국경지대에서 목격한 러시아의 트레일러와 탱커트럭들은 그런 움직임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가시적인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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