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셀에서 만난 다케바야시 후미코를 실마리로 하여 살펴 본
조정희 (최승희 연구가, 2023년 2월10일, 낙성대 살롱 발표문)
최승희의 유럽 데뷔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1939년 1월31일 파리 최대 극장 <살플레옐>의 2천4백의 객석은 거의 만석이었다. 관객석에는 화가 살바토레 달리와 패션 디자이너 엘사 스키파렐리도 앉아 있었다. 파리의 비평가들은 10여개의 신문에 공연평을 실었는데, 대부분이 호평이었다. 이 소식은 일본과 조선에도 전해져서 일본인들과 조선인들이 모두 자랑스러워했다.
프랑스의 다른 도시에서도 공연 요청이 밀려들어서, 칸(2/26)과 마르세이유(3/1), 비아리츠(9/14)의 공연이 예약되었다. 프랑스만이 아니라 벨기에와 네덜란드, 독일과 이탈리아 등에서도 봄 시즌 공연이 기획되었고, 가을 시즌에는 북유럽과 동유럽 순회공연도 계획이 잡히기 시작했다. 유럽 첫 공연의 성공은 그만큼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살 플레옐>에서 성공한 데에 힘입어 최승희는 자신감을 가지고 유럽 순회 두 번째 공연을 준비했다. 유럽에서의 두 번째 공연은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렸다. 다음 공연은 일주일 후인 2월6일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서였다. 공연장은 브뤼셀 최대 극장 <팔레 드 보자르(Palais de Beaux Art)>였다. 1929년에 완공된 <팔레 드 보자르>의 주공연장 <앙리 르뵈프 홀(Salle Henry Le Bœuf)>은 수용인원 2,200명의 대형극장이었다. 수용인원 2,400명이었던 파리의 <살 플레옐> 극장 못지않았다.
어째서 브뤼셀이 두 번째 공연지로 선택되었는지는 알 수없지만, 아마도 흥행사 <국제 예술 기구>의 결정이었을 것이다. 이 흥행사는 유럽 최대 흥행사였고, 아마도 유럽 순회공연을 위해 관행으로 정해진 일정이었을 수 있다. 1930년대나 지금이나 브뤼셀은 파리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이자 예술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화요일(1/31)에 <살 플레옐> 공연을 마친 최승희는 주말 이전에 벨기에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2월6일, 월요일 저녁에 브뤼셀 공연이 잡혔기 때문이다. 브뤼셀은 파리 북동쪽 약 3백킬로미터 떨어진 도시로 벨기에의 수도이다.
최승희 일행은 아마도 기차로 이동했을 것이다. 요즘 파리 북역에서 브뤼셀 중앙역까지 고속철도 탈리스(Thalys)로 약 1시간30분 정도 걸린다. 자동차나 고속버스를 타더라도 3시간 반 정도면 갈 수 있다. 1930년대의 기차들도 최고속도가 시속 160킬로미터였다고 하므로, 대략 2시간 정도면 브뤼셀에 도착했을 것이다.
브뤼셀 공연 하루 전인 2월5일 최승희는 벨기에 제2의 도시 안트워프를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벨기에의 겐트 대학에 유학 중이던 고고학자 김재원이 후일 <조선일보(1939년 3월14일)>에 게재한 기고문에서 “최씨가 2월5일 오후 이곳 안트워프시에 왔을 때도 이 시내 세 신문사의 기자가 인터뷰를”를 했다고 전했기 때문이다.
한편 1939년 2월6일자 브뤼셀판 <르 마탱>는 최승희는 안트워프에 간 것은 단지 언론 인터뷰 때문이 아님이었음을 보여준다. 최승희는 토요일(2/5) 저녁 안트워프에 거주하던 일본인 친구 무용가를 방문했다고 전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이번 <최승희 트레일> 취재에서 처음으로 밝혀진 것이다.
이 기사가 필자의 관심을 끌었다. 거기에는 내가 전혀 몰랐던 일본인 무용가 다케바야시 후미꼬(武林文子, 1888-1966)가 최승희(崔承喜, 1911-1968)의 친구로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인물이었기에 브뤼셀 공연을 앞둔 최승희를 초청해 리셉션을 열어 주었던 것일까?
우선 이 기사의 원문과 번역문은 다음과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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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Matin> 1939년 2월6일, 월요일, 6면
한국 무용가 최승희 인터뷰
후미꼬 타케바야시(Foumiko Takebayashi)의 일본 무용을 기억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녀는 미야타 부인(Mme Miyata)이 되고 난후 무용을 그만 두었고, 적어도 무대에서의 공연은 하지 않고 있다.
그녀(미야타 부인)의 집 내부는 현대적이지 않다. <일본 이야기>의 저자로서 이 무용가는 순수한 동양 전통을 담은 세련된 예의로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 저는 지금 내 친구 최승희씨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녀는 처음으로 벨기에에 옵니다. 최승희씨는 월요일 저녁에 팔레 드 보자르(Palais des Beaux-Arts)에서 무용발표회를 합니다.
- 그렇습니다. 그녀가 왜....
경보기 울리는 소리. 발자국 소리.
최승희와 그녀의 남편이다.
최승희는 그녀의 일본인 친구보다 키가 더 크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첫눈에 보아도 영락없는 한국 사람이다. 부드럽지만 잘 정돈된 느낌을 주는 눈을 가진 그녀는 마치 먼 여행, 예를 들면 몽골 여행에서 막 도착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여우가죽 코트와 모자, 벨벳 치마를 입었다. 벨벳과 금색 장식을 한 보디스 치마는 동양적인 특징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손이 곱다. 매우 훌륭하다. 가느다란 손가락들과 피처럼 붉은색으로 굽어진 손톱은 부처의 춤에서 손목을 사용하는 작품을 연상시킨다.
- (그렇다. 최승희씨가 영어를 할 줄 안다.) 불교는 제 작품 해석의 일부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다른 작품들은 모두 고대 민속 무용으로 거슬러 올라가지요. 기교적으로 말입니다. 게다가 마침내 저는 궁전 무용의 한국적인 주제로부터 영감을 받았습니다.
-음악은요?
- 제 무용의 반주에는 레코드판을 씁니다. 조선의 왕궁 음악가들이 취입한 음악들이지요. 거기에는 약 50여 가지의 악기들이 사용되었습니다. 그중에는 고토와 거문고, 피리 등이 포함되지요. 레코드 말고도 두 명의 음악가들이 저와 함께 와서 징과 타악기를 연주할 것입니다.
-무용 예술은 한국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최승희는 그것을 ‘재창조’해 내었습니다. (오늘 모임을 주선한 미야키 부인의 말이다.) 최승희가 어린 시절에 무용를 공부하겠다고 했을 때 가족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토쿄에 있는 저명한 이시이 무용학교에서 최승희는 20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을 공부했습니다. 여러분이 보다시피 최승희씨는 몸과 영혼을 무용 예술에 헌신한 것이지요. 그런 열정을 가졌던 겁니다. 그리고 나서 파리로 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잘 압니다. 의상은 어떻습니까?
-각각의 작품들에 맞도록 최승희씨가 직접 제작한 것들입니다. 약간 고전적이면서도 절반 정도는 미래주의적인 냄새가 나도록 만들었어요... 무용은...
그때 최승희가 웃으면서 나무 상자에 담아서 제공된 ‘사케’를 집어들기 위해 그녀의 부드러운 손목을 뻗었다.
전축 레코드판의 표지에는 “사케와 사랑”이라고 씌여 있었다.
갑자기 우리를 사로잡은 이 우아한 분위기가 일본식인지 한국식인지를 구별할 수 없었다.
소파에는 일본식 가운이 걸쳐져 있었는데 금색으로 새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수집가들이 탐낼 만한 경이적인 가치를 가진 것이다.
사케는 논의 들판처럼 달콤하다. (Ra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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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바야시 후미코에 대한 궁금증이 일기는 했지만, 이어지는 취재에서 새로운 자료가 자꾸 나오는 바람에 곧 잊혀졌다. 그러나 모나코 취재에서 그의 이름이 다시 등장했다. 모나코 <루이 노타리 도서관(la Bibliothèque Louis Notari)>에서는 최승희 관련 기사를 한 건도 발견하지 못했고, 따라서 최승희의 모나코 공연은 없었던 것으로 결론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일본인”과 “무용” 등의 키워드를 사용해 기사를 다시 검색하자 1926년 1월8일자 니스판 <르 쁘띠 주날>에서 다음과 같은 단신 기사가 발견됐다.
“(제목) 일본 여자 무용수의 출연 거부에 감독이 얼굴에 권총을 발사. (니스, 1월7일) 몬테카를로의 한 댄스홀에서 공연 중이던 일본 무용단의 감독이 여자단원의 얼굴에 권총을 쏘았다. 그 여자 무용수가 출연횟수 채우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총격자는 체포됐고, 피해자의 얼굴 부상은 심각하지 않다.”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무용단장은 왜 권총을 가지고 다녔을까? 무용단원이 어째서 출연을 거부했을까? 출연거부가 총부림을 할 만큼 심각한 사안이었을까? 가해자가 체포된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얼굴에 총상을 입었는데도 용태가 심각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더구나 이 기사에는 몬테카를로라는 도시 이름을 제외하고는 밝혀진 이름이 없었다. 사건이 발생한 댄스홀의 이름도 없었고, 일본인이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름도 밝혀져 있지 않았다. 한 문단에 불과한 단신이지만 의문점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 당시 파리의 신문들도 이 사건을 흥미롭게 여겼던 모양이다. 후속 기사들이 나왔다. 1월9일자 <르 주날>과 1월10일자 <르에코 드알제(L'Echo d'Alger)>의 기사가 그것이다. <르에코 드알제>는 “일본 언론인의 모험”이라는 평범한 제목으로 4면에 배치했지만, <르 주날>은 “일본 여무용가의 소설 같은 이야기”라는 다소 극적인 제목으로 1면에 보도했다.
이 두 기사는 똑같이 ‘1월8일 니스(Nice)발’ 기사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아 같은 통신사의 기사를 받아 쓴 것으로 보였다. 내용도 대동소이하다. 두 신문은 이 총격 사건의 팩트(事實)와 함께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름을 밝혔다.
“(1926년) 1월4일 목요일 밤, 일본인 무용가 타케바야시는 옥스퍼드 호텔을 나서던 중, 같은 국적의 무용가가 쏜 권총에 피격되었다. 총탄은 그녀의 입에 맞았다. ... 범인 무용가 카와무라(Kawamura)는 도주했으나, 타케바야시 여사의 남편에게 보상금을 제공하고 난 후에, 체포되었다. 피해자의 부상은 심각하지는 않다.” 기사는 범인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이 없었지만 피해자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이 자그마한 무용가는 3주전 (파리의) <페미나 극장(Théâtre Femina)>에서 공연한 바 있다. 결혼하고, 이혼하고, 재혼한 그는 도쿄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했고, 요시와라(Yoshiwara)의 하녀와 웨이트리스, 무용가 등의 다양한 직업을 가진 바 있다. 기자 시절에는 사회적 의문점들을 파헤쳐 선정적으로 보도하곤 했다.”
<페미나 극장> 공연은 파리 일간지를 통해 확인되었다. 1925년 12월19일에 열렸던 공연이었다. 하지만 타케바야시 후미코가 주인공은 아니었다. 무용가 코모리 토시(Komori Toshi)의 공연에 타케바야시가 찬조 출연한 것이다. 이 공연의 광고문과 안내문에는 타케바야시 후미코가 ‘일본 무용가’로 소개되었으나, 사실 그가 정식으로 무용을 배우거나 전공한 적은 없었다.
이어서 기사는 “그녀가 5년 전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 딸을 낳았는데 그 아이를 소재로 <일본 소녀의 유럽 여행(Le voyage d'un bébé japonais en Europe)>이라는 책을 썼다”고 소개했다. 이 책은 일본어로 저술되었지만 후일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다. 그밖에도 다케바야시 후미코는 1933년 <일본 이야기(Contes japonais racontés)>라는 단행본을 출판한 바 있다.
뒤이어 두 신문 기사는 “(1923년) 일본에서 끔찍한 지진이 일어나자 그녀는 중국으로 건너갔고, 거기서 정치 요원의 역할을 담당했다”고 서술했다. 중국에서 일본 스파이로 활동했다는 말로 들렸다. 그랬다면 타케바야시 후미코는 ‘일본판 마타 하리’였던 셈이다.
또 타케바야시 후미코는 유곽의 하녀와 식당의 웨이트리스로도 일한 바 있다고 서술됐다. 기사에는 “요시와라(Yoshiwara)의 하녀”로 일했다고 했다. 요시와라(吉原)는 17세기 이래 에도(江戸), 즉 오늘날의 도쿄에서 영업하던 정부 공인 유곽(遊廓), 즉 집창촌이다. 후미코는 잡지기자 시절인 1915년 이곳에 하녀로 잠입해 취재한 후 르뽀 기사를 쓴 바 있었다.
후미코가 웨이트리스로 일했던 것은 자신의 식당에서였다. 작가 타케바야시 무소안(武林無想庵, 1880-1962)과 결혼한 후 프랑스로 건너간 후미코는 1924년 11월 파리의 케플러가 8번지(8 rue Kepler)에 일본식당 <고게츠(湖月)>를 개업했었다. 런던에 본점을 두고 있는 <고게츠>의 파리 지점이었다.
후미코가 춤을 추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정식 무용 교육을 받은 바 없었던 후미코는 기억과 눈썰미로 일본 춤을 추면서 식당을 홍보했다. 식당보다 춤이 호평받자 후미코는 무용가를 자처했고 급기야 1925년 12월에는 샹젤리제 거리의 <페미나 극장>에서 정식 무용 공연에 찬조 출연하기에 이르렀다.
<르 주날>과 <르에코 드알제>는 총격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몇 가지 제시했으나 의문점이 아주 가신 것은 아니었다. 우선 기사에서 ‘몬테카를로’라는 지명이 사라졌다. 그래서 이 기사만 보면 이 사건이 니스에서 발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위키피디어 백과사전은 이 사건의 발생지를 니스로 명시했다.
사건 발생장소도 ‘한 댄스홀’에서 ‘<옥스퍼드 호텔>의 현관 계단’으로 바뀌었는데 몬테카를로에는 <옥스포드 호텔>의 기록이 없다. 같은 이름의 호텔이 오늘날까지 영업 중인 도시는 칸느뿐이다. 물론 1920년대에 몬테카를로나 니스에도 <옥스포드 호텔>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지난 90년 동안 폐업했거나 상호를 변경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의문은 범인 카와무라였다. 위키 백과사전은 범인이 카와무라 이즈미(川村泉)라고 서술했지만, 그는 무용가가 아니라 사업가였다. 더구나 범인이 체포되기 전에 피해자의 남편에게 보상금을 제공했다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일까?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문을 안은 채, 필자는 유럽 취재를 마치고 귀국한 후, 이 인물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이번에는 일본 자료를 찾아보았다. 짐작대로 이 사건은 일본에서도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당시 아사히신문의 특파원이 파리에 주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모나코 총격 사건은 일본에도 자세히 전해졌다.
필자가 접한 자료 중에서는 잡지 <후후세이카츠(夫婦生活)> 1950년 3월호 기사가 이 사건을 가장 포괄적이고 심층적으로 서술한 것으로 보였다. 기사 제목은 “모나코의 요녀 다케바야시 무소안 부인(モナコの妖姫 武林夢想庵夫人)”이었다.
사건 발생 후 25년이나 지난 후에 기억과 회상으로 작성된 기사지만, 기고자 스기하라 히로유키(杉原啓之介)는 사건 당사자들과도 가까운 사람이었으므로 소문과 오류를 걸러내고 사실 중심으로 서술한 것으로 보였다. 적어도 이 기고문은 프랑스 신문 기사들이 남겨놓은 공백을 메꾸기에는 충분했다.
우선 스기하라 히로유키는 총격 사건이 일어난 곳이 프랑스의 니스가 아니라 모나코의 몬테카를로라고 못 박았다. 기사 제목부터 “모나코의 요희”였다.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의 이름도 카와무라 이즈미(川村泉)가 아니라 카와무라 소레가시(川村某)라고 서술했다. (위키 백과사전의 ‘이즈미(泉)’는 익명을 가리키는 ‘소레가시(某)’를 잘못 읽은 것으로 보인다.)
이 카와무라는 런던의 일본 식당 <고게츠(湖月)>의 경영자였고 1925년의 파리 박람회에서 일본 요리 부문을 담당했다. 파리 박람회에서 후미코를 만난 카와무라는 후미코의 미색(美色)에 반해 <고게츠>의 파리 지점을 내자고 제안했고. 카와무라의 재력(財力)에 반한 후미코는 이를 수락했다.
불륜을 위해 급조된 <고게츠> 식당이 제대로 경영되었을 리 없었다. 두 사람은 이내 언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식당의 경영난과 후미코의 낭비벽 때문이었다. 후미코와 카와무라의 불륜은 남편 무소안의 면전에서 벌어졌다는 점에서 더욱 엽기적이었다. 스기하라 히로유키는 후미코가 무소안과 결혼한 것은 그를 사랑했거나 그의 문학을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파리로 오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1925년 12월 프랑스 공연을 위해 파리를 방문한 코모리 토시(小森敏, Toshi Komori) 때문에 후미코의 남성편력은 한층 복잡해졌다. 코모리 토시의 <페미나 극장> 공연에 후미코가 찬조 출연하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졌고, 1926년 1월 코모리가 남부 프랑스로 공연 여행을 떠나자 후미코도 이에 동행했다. 후미코로서는 공연을 빙자한 애정 행각이었던 셈이다.
이 무렵 식당 경영과 돈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고 있었다. 파리를 떠나면서 후미코는 <고게츠>식당의 채권자들에게 부도 수표를 발행했다. 화가 난 카와무라는 후미코를 찾으려 몬테카를로 따라갔고, 그를 찾은 후 권총으로 쏘아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 총격 사건은 최초의 보도처럼 ‘공연 계약’이나 ‘출연 횟수’ 때문이 아니라 질투와 돈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후미코의 총격 상처는 심각해 보였다. 총알이 “오른쪽 뺨으로 들어가서 구강을 지나 왼쪽 뺨으로 관통해 나갔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빨이나 혀를 포함해 구강 안팎에 다른 상처가 전혀 없었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더구나 치료를 끝낸 후에는 후미코의 뺨에 보조개 같은 자국을 제외하고는 흉터가 없었다고 했다. 이를 두고 스기하라 히로유키는 “세계에서 미용 기술이 가장 발달한 나라에서 치료를 받았던 덕분일까?”라고 언급했었다. 그는 또 “의문이 드는 독자가 있다면 게이오 근처에서 술집을 경영하는 후미코 부인의 얼굴을 보러가도 좋다”고 덧붙였다.
한편 기고자 스기하라 히로유키는 범인 카와무라가 무소안에게 거액의 보상금을 제공한 것은 선처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무소안은 파리에서도 지속적으로 작품 활동을 했으나 일본으로부터 원고료를 제때에 전달받지 못해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고 있었다. 카와무라가 제공한 보상금은 무소안의 경제난을 크게 완화시켜 주었던 것 같다.
한편 카와무라는 여러 증인을 동원해 “살의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여자에게 배신당한 남자의 질투에 의한 범행”이라는 점을 인정받았다고 했다. 파리에서는 카와무라의 친구이자 신문기자인 르 블랑제(LeBoulanger)가 변호사를 물색하는 등 그를 구제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정상 참작과 친구의 도움으로 카와무라는 6개월 금고형을 선고받았으나 3개월 만에 출옥했다.
한편 후미코도 총격 상처를 치료받고 파리로 귀환한 직후 경찰에 체포되었다. 부도수표를 발행한 경제사범으로 수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후미코는 이내 방면되었고 일본 교민 사회뿐 아니라 파리 전체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
타케바야시 후미코의 몬테카를로 총격 사건은 프랑스와 일본에 센세이션을 일으켰지만 이는 후미코의 자유분방한 삶의 한 단면일 뿐이다. 그는 ‘요사스런 여인(妖姬)’을 자처했고 그것을 당당하게 내세웠다. 그는 욕망에 충실했고,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성적 매력을 십분 활용했다. 그의 자유분방은 당대의 상식 수준을 훨씬 뛰어 넘었으므로 오히려 경이의 대상이었다.
타케바야시 후미코는 다재다능한 사람이기도 했다. 역량 있는 기자이자 파리 무대에서 공연한 무용가였고, 아동과 여성 의류업에 뛰어든 사업가이자 여러 저서를 출판한 작가였다. 이같이 재능이 아니었더라면 후미코의 자유분방함은 그저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했을 지도 모른다.
후미코의 재능을 일별하기 위해서는 그의 인생을 세 시기로 나눠보는 것이 좋다. 그는 평생을 세 개의 이름으로 살았다. 그의 출생 시 이름은 나카히라 후미꼬(中平文子)였다. 시코쿠의 마쓰야마에서 태어난 그가 교토(京都)의 제일고등여학교(第一高女)를 졸업할 때까지의 기록은 남은 것이 별로 없다.
하지만 제일고녀를 졸업한 직후부터 후미코의 자유분방함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는 당시 교토대학교 의대생과 사랑의 도피를 계획했으나 실천에 옮기기 전에 붙잡혀 저지됐다. 집안의 강권으로 18세에 중매결혼을 했는데 이것이 후미코의 첫 번째 결혼이었다. 첫 결혼의 상대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고 후미코는 자신의 성을 바꾸지 않았다. 이 결혼은 약 6년간 지속되었고 그동안 3명의 자녀를 낳았다.
미인인데다 머리도 좋다고 자부한 후미코는 24세에 배우가 되려는 욕망을 품었다. 배우의 꿈을 이루기 위해 그는 세 자녀를 버리고 남편과 이혼했다. 배우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저널리스트의 길에 들어섰다. 이 분야에서 그는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후미코는 잡지사에서 기자 경력을 시작했는데, 특히 잠입 취재에 뛰어난 역량을 보였다. 1913년에는 카나가와겐(神奈川県) 후지사와시(藤沢市)의 쿠게누마(鵠沼) 소재 불교 산사 지쿄안(慈敎庵)에 잠입해 취재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 사찰에 수행 중이던 미남 청년에 반해 버려 취재를 내버린 채 그를 유혹해 두 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연하의 남편이 질투가 심한 것에 식상한 후미코는 중국 상하이로 도망가 버렸다. 후미코는 이 두 번째 남편의 성도 따르지 않았다.
상하이에서도 기자 생활을 계속하면서 현지 언론사 사장과 정치가들에 대한 폭로기사를 잇달아 터뜨려 유명인이 되었다. 상하이에서 얻은 명성에 힘입어 일본으로 귀국한 후에는 1916년부터 정우회의 기관지 <쥬오신분(中央新聞, 1891-1940, 도쿄)>에 정식으로 입사했다.
후미코는 <쥬오신분>에서도 잠입 취재를 계속해 르뽀기사 <오메미에 니츠기(お目見得日記)>를 연재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그의 연재 르뽀 기사는 1916년 말 <여성기자의 잠입취재기(婦人記者 化け込み お目見得廻り)>로 출판됐고, 이 책은 첫 두 달 동안 17판이 인쇄될 만큼 인기를 끌었다.
이 <잠입 취재기>에서 가장 주목을 끈 것은 마지막 장(章)에 서술된 <요시와라의 꽃(花の廓の新吉原へ)>이었다. 이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후미코는 요시와라 유곽에 하녀로 변장해 잠입했다. 이 취재기에서 후미코는 자신이 직접 목격한 요시와라의 어린 창녀들의 생활을 자세히 서술했다. 겉으로 보이는 그들의 화려한 모습과 외롭고 쓸쓸한 숨겨진 모습, 그리고 그들의 소소한 일상생활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이 글은 독자들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밖에도 그가 나카히로 후미코의 이름으로 출판한 저서로는 <접대부 이야기(やとな物語)>와 <여자인 주제에(女のくせに)> 등이 있다. 이 저서들은 당대 화제작이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일본 여성 문학과 페미니즘의 태동을 보여주는 중요한 저작으로 인정된다.
1920년 쿠게누마로 돌아간 후미코는 소설가 나이토 치요코(内藤千代子, 1893-1925)의 소개로 다다이스트 작가 타케바야시 무소안(武林無想庵)을 만났다. 무소안은 후미코에게 반했다. 후미코는 무소안이 프랑스에 갈 계획이라는 말을 듣고 위장결혼을 결심했다. 이는 후미코의 세 번째 결혼이었는데, 이때 후미코는 비로소 자신의 성을 ‘타케바야시’로 바꿨다.
‘타케바야시 시절’에 후미코는 가장 화려한 남성 편력을 보였다. 앞글에서 본 것처럼 무소안과 살면서도 식당 경영자 카와무라와 무용가 코모리 토시와 동시에 불륜을 자행했다. 후미코는 친구에게 무소안에 대한 성적 불만을 털어놓곤 했다. 무소안은 후미코의 남성 편력을 묵인하면서 저술 작업에만 집중했던 것 같다.
무소안은 1925년 잡지 <카이조(改造)>에 <코쿠의 비애(Cocuのなげき)>라는 소설을 발표했다. 아내가 옆방에서 벌이는 불륜 행각을 들어야 하는 남편의 비통한 심정을 묘사한 작품이다. 자신의 고통을 소설로 형상화한 것이다. 하지만 무소안은 후미코의 남성 편력을 제지하지 않았다. 훗날 후미코가 미야타 코우조우와 결혼하겠다며 이혼해 줄 것을 요구했을 때는 거절했다.
이 시기에도 후미코는 <일본 소녀의 유럽 여행>과 <일본 이야기> 등의 저서를 출판하고 이를 프랑스어로 번역하는가 하면, <페미나 극장>에서 무용 공연을 하고, 파리에서 일본 식당을 경영하거나, 시세이도사의 아동복과 모자 제조업에 뛰어드는 등 매우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후미코의 남성편력은 네 번째 남편 미야타 코우조우(宮田耕三, 1895-1984)를 만나면서 끝났다. 벨기에 안트베르펜에 거주하면서 무역업을 하던 코우조우를 만난 것은 후미코가 이디오피아 황태자와 결혼하겠다는 황당한 계획을 꾸미다가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디오피아 황태자와 만날 기회를 얻기 위해 벨기에를 방문했다가 미야타 코우조우를 만난 것이었다.
미야타의 재력에 혹한 후미코는 이내 그와 결혼하겠다고 나섰다. 후미코보다 여섯살 연하였던 미야타는 후미코가 타케바야시 무소안과 이혼할 것을 전제로 결혼을 수락했는데, 이것이 세간에는 ‘계약 결혼’으로 알려졌다. 후미코는 마침내 1934년 타케바야시 무소안의 이혼 허락을 받아내고 미야타와 완전히 결혼하게 되는데, 이것이 후미코의 네 번째 결혼이자 마지막 결혼이었고, 이때 후미코는 자신의 성을 ‘미야타’로 변경한다.
후미코는 1934년 이후의 ‘미야타 시절’에도 사업과 저술을 쉬지 않았다. 유태인 문제를 다룬 <게슈타포: 세기의 짐승과 싸운 유태인의 비화(ゲシュタポ : 世紀の野獣と闘った猶太人秘話)>와 <풍뎅이(スカラベ)> <문신과 할례와 식인종의 나라(刺青と割礼と食人種の国)>, <73세의 청춘(73歳の青春)>등의 저서와 자사전 <나의 백서: 행복한 요부의 고백>등이 바로 이시기의 저작들이다.
후미코가 자유분방하면서도 다재다능했던 여성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의 세 번째 남편 타케바야시 무소안도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특히 그의 저작능력은 탁월했다. 그는 끊임없이 소설과 평론, 번역물을 집필해 내었다. 특히 양 눈을 실명한 1943년부터 1962년 사망하기까지 자신의 기억력과 만년의 아내 하타 아사코(波多朝子)의 대필에 의지해 44권에 달하는 회원제 개인잡지 <무사우안 이야기(むさうあん物語)>을 집필했다.
사고와 행동의 자유분방함에 있어서 무소안도 후미코 못지않았다. 당대 대표적인 다다이스트였던 무소안은 친 여동생과 첫 번째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았을 만큼(재확인 필요) 사회적 관습과 도덕, 윤리와 관행 등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무소안의 친구들도 비슷한 부류였다. 그의 친구 쓰지 준(辻潤, 1884-1944)은 1909년부터 우에노 고등여학교(上野高等女学校) 영어교사로 재직하던 중 1912년에 제자 이토 노에(伊藤野枝, 1895-1923)와의 연애로 교직에서 사퇴한 후 평생 다른 직업이 없이 글을 쓰며 살았다.
쓰지 준과 이토 노에 부부는 1914년경 무정부주의자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1985-1923)와 친분을 갖기 시작했으나, 1916년에는 이토 노에가 쓰지 준과 결별하고 오스기 사카에와 결합했다. 이때부터 쓰지 준은 한 곳에 정착하기를 그만두고 평생 방랑하며 살았다.
이시이 바쿠는 쓰지 준의 평생 친구였다. 오페라 매니아였던 쓰지 준은 이시이 바쿠가 무용을 시작하기도 전, 1911년 데이코쿠극장(帝国劇場) 가극부와 1917년 아사쿠사 오페라(浅草オペラ, 1917-1923)에 출연하던 시절부터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쓰지 준의 아내 이토 노에가 오스기 사카에에게 달아났을 때 어린 딸 마코토를 이시이 바쿠에게 맡겼다. 1932년 봄에 아예 집을 처분하고 재차 방랑길을 떠날 때에도 작은 고리짝 하나에 불과한 전 재산을 이시이 바쿠에게 맡겼다. 이렇듯 이시이 바쿠는 쓰지가 가장 소중한 것을 맡길 수 있는 상대였다.
당시 오스기 사카에는 아내 하리 야스코(堀保子, 1883-1924)와 애인 카미치카 이치코(神近市子, 1888-1981)와 함께 지내고 있었으므로 이토 노에의 합류로 4각 관계를 이루게 된다.
이 불편한 4각 관계는 <히카게 차야 사건(日蔭茶屋事件, 1916)>으로 끝났다. 카미치카 이치코가 카나가와켄(神奈川県) 미우라군(三浦郡) 하야마 마을(葉山村) 소재 히카게 차야(日蔭茶屋)에서 오스기 사카에를 칼로 찌른 것이다. 이치코는 살인 미수죄로 기소되어 일심에서 징역4년을 선고 받았으나 항소하여 2년으로 감형되어 복역했다.
이 사건 이후에도 오스기 사카에와 이토 노에는 부부로서 활발하게 무정부주의 사회운동과 저작활동을 계속했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 직후인 9월1일 헌병대에 끌려가 구타당한 후 살해되어 우물에 던져지는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다른 친구들의 삶도 순탄하지 않았고, 죽음도 편안한 편이 아니었다. 무소안은 1933년에 녹내장으로 오른쪽 눈을 실명하여 외눈이 되고, 1943 년에는 왼쪽 눈마저 실명해 시각장애자로 여생을 살다가 1969년 82세로 사망했다.
무소안의 친구 쓰지 준은 평생 방랑 생활로 일본 전역을 떠돌며 살다가 1944년 도쿄로 돌아와 다시 정착하려 했으나 한 달도 되지 않아 집안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검시결과 그의 사인은 아사, 즉 굶어죽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쓰지 준의 친구 이시이 바쿠도 1928년부터 시력이 약화되어 상시적인 실명 위기를 겪었다. 이후 평생 실명 위기에 시달렸지만 다행히 죽는 날까지 시력을 잃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병인 만성 갑상선염으로 고생하던 중 1962년 75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하지만 후미코만은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과 화려한 남성 편력에도 불구하고 1934년 이후에는 미야타 코우조우와가 제공한 돈과 사랑에 힘입어 순탄한 만년을 보내다가 77세의 나이로 비교적 편안한 죽음을 맞았다. 일설에는 ‘수세미 건강법’이라는 그만의 독특한 건강 유지 비법이 주효했다는 설명도 있다.
후미꼬가 타케바야시에서 미야타로 변신한 것은 남편을 바꾼 것에 불과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천황과 일본의 앞날을 바라보는 두 적대적 진영의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건너간 사건이었다. 타케바야시와 그의 친구들은 다다, 사회주의, 무정부주의로 천황제를 폐지하고 일본의 방향을 뒤바꾸려 했다. 그러나 미야타 코오조우는 전쟁 중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했고 전후에는 일본의 자본주의적 경제재건을 위해 애쓴 사람이었다.
미야타 코우조우는 이차대전 직전에 일본 군부가 전함을 제작할 때 유럽의 고철을 사모아 일본에 공급했다. 이차대전 후에는 한국 전쟁을 이용해 일본의 경제 재건을 돕기 위해 유럽의 아마를 일본에 수입해 한국에 되파는 수완을 발휘했다. 하지만 미야타 코우조우는 후미코에게 많은 돈과 조건 없는 사랑을 쏟아부었고 이를 통해 후미코의 마음과 생활을 안정시켜주었다.
후미코와 그의 친구들은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삶을 살면서 고뇌와 고통을 겪으면서도 후대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 정부에 대항하여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 여성해방운동 등으로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들은 또 일반인들이 생각 없이 지켜오던 전통과 관습과 사회적 통념을 깨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사상과 행동을 글로 남겨 오늘날에도 그들의 노력을 재평가할 수 있는 기회를 남겼다.
후미코와 친구들은 조선의 문인과 예술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징검다리 역할을 한 사람 중에 고한용(高漢容, 1903-1983)이 있다. 고한용은 고한승의 다른 이름이다. 아동 운동을 할 때에는 고한승으로, 다다이스트로 자처할 때에는 고한용으로 자처했다. 자신의 니혼 대학 인맥과 자신이 심취했던 다다이즘을 바탕으로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의 사상과 작품을 한국에 소개했다.
고한용은 1921년 4월부터 니혼 대학 미학과에서 2년간 수학했으나 1923년의 관동 대지진으로 니혼 대학 캠퍼스가 크게 훼손된 데다가 조선인 학대가 시작되자 학업을 중단한 채 귀국했다. 니혼 대학 재학 시절 고한용은 아키야마 기요시 등의 일본인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했을 뿐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같은 대학에 다녔던 마해송과 최승일 등의 한국인들과도 교분을 쌓았다. 특히 귀국 이후 고한용은 최승일과 같은 동네(경성 체부동)에 살았고, 연극운동과 방송극운동을 함께 하면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한편 고한용은 1923년 다다이즘에 눈을 뜨고 <개벽> 9월호에 최초로 다다이즘을 소개하는 글을 발표했다. 같은 해 고한용은 쓰지 준과 다카하시 신키치를 경성으로 초대해 한국의 문인들에게 일본 다다이즘을 직접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고한용의 다다이즘은 불과 2년밖에 지속되지 못한채 사그러들었지만, 그가 쓰지 준과 다카하시 신키치를 경성에 초대한 것은 조선의 근대 문인과 지식인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일본인으로서 한국 문학을 연구해 온 요시카와 나기(吉川 凪)는 그의 저서 <경성의 다다, 도쿄의 다다(2015)>에서 고한용의 다다이즘은 쓰지 준과 다카하시 신키치, 아키야마 기요시와 가네코 후미코 등의 일본인 다다이스트와 아나키스트들과 마해송과 임화, 최승일과 최승희 등을 연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서술했다.
<별건곤> 1926년 11월호에는 최승일(崔承一, 1901-?)이 그해 8월 일본을 방문했던 여행기가 실렸다. 아마도 3월말에 도쿄로 유학간 동생 최승희의 안부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여행에서 최승일은 최승희가 참여한 이시이 바쿠 무용단의 카마쿠라 공연까지 동행한 바 있고, 이시이 바쿠(石井漠, 1887-1962, 무용가)와 밤마다 깊숙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이 여행기에서 최승일은 지인 타케히사 유메지(竹久夢二, 1884-1934, 화가), 쿠메 마사오(久米正雄, 1891-1952, 소설가, 극작가, 하이쿠 시인)를 만났지만, 나카니스 이노스케(中西伊之助, 1887-1958, 작가, 노동운동가, 정치가)와 일본의 인기남아 쓰지 준(辻潤, 1884-1944, 방랑문인, 다다이스트)를 만나고 오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고 서술했다.
이들을 자신의 우인(友人)이라고 하기에는 10세 이상의 연상들이지만, 그가 일본대학 미학과에서 유학하던 시절, 당시 젊은이들의 정신세계를 이끌던 사람들이었다. 특히 최승일이 쓰지 준을 만나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이미 고한용의 주선으로 경성 체부동에서 쓰지 준을 만나 교분을 시작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최승희가 벨기에의 안트베르펜에서 만난 다케바야시 후미꼬(武林文子, 1888-1966)에서 시작하여, 그의 교분관계를 따라오다 보니까, 한때 그의 남편이었던 타케바야시 무소안(武林無想庵, 1880-1962)이 다다이스트 쓰지 준(辻潤, 1884-1944, 방랑문인, 다다이스트)과 그의 절친 이시이 바쿠(石井漠, 1887-1962)와 연결되었고, 일본대학 유학시절 쓰지 준에 대한 이시이 바쿠의 의리를 알고 있었던 최승일은 안심하고 자신의 막내여동생 최승희를 이시이 바쿠의 문하에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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