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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셀에서 만난 다케바야시 후미코를 실마리로 하여 살펴 본

조정희 (최승희 연구가, 2023210, 낙성대 살롱 발표문)

 

최승희의 유럽 데뷔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1939131일 파리 최대 극장 <살플레옐>24백의 객석은 거의 만석이었다. 관객석에는 화가 살바토레 달리와 패션 디자이너 엘사 스키파렐리도 앉아 있었다. 파리의 비평가들은 10여개의 신문에 공연평을 실었는데, 대부분이 호평이었다. 이 소식은 일본과 조선에도 전해져서 일본인들과 조선인들이 모두 자랑스러워했다.

 

프랑스의 다른 도시에서도 공연 요청이 밀려들어서, (2/26)과 마르세이유(3/1), 비아리츠(9/14)의 공연이 예약되었다. 프랑스만이 아니라 벨기에와 네덜란드, 독일과 이탈리아 등에서도 봄 시즌 공연이 기획되었고, 가을 시즌에는 북유럽과 동유럽 순회공연도 계획이 잡히기 시작했다. 유럽 첫 공연의 성공은 그만큼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살 플레옐>에서 성공한 데에 힘입어 최승희는 자신감을 가지고 유럽 순회 두 번째 공연을 준비했다. 유럽에서의 두 번째 공연은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렸다. 다음 공연은 일주일 후인 26일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서였다. 공연장은 브뤼셀 최대 극장 <팔레 드 보자르(Palais de Beaux Art)>였다. 1929년에 완공된 <팔레 드 보자르>의 주공연장 <앙리 르뵈프 홀(Salle Henry Le Bœuf)>은 수용인원 2,200명의 대형극장이었다. 수용인원 2,400명이었던 파리의 <살 플레옐> 극장 못지않았다.

 

어째서 브뤼셀이 두 번째 공연지로 선택되었는지는 알 수없지만, 아마도 흥행사 <국제 예술 기구>의 결정이었을 것이다. 이 흥행사는 유럽 최대 흥행사였고, 아마도 유럽 순회공연을 위해 관행으로 정해진 일정이었을 수 있다. 1930년대나 지금이나 브뤼셀은 파리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이자 예술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화요일(1/31)<살 플레옐> 공연을 마친 최승희는 주말 이전에 벨기에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26, 월요일 저녁에 브뤼셀 공연이 잡혔기 때문이다. 브뤼셀은 파리 북동쪽 약 3백킬로미터 떨어진 도시로 벨기에의 수도이다.

 

최승희 일행은 아마도 기차로 이동했을 것이다. 요즘 파리 북역에서 브뤼셀 중앙역까지 고속철도 탈리스(Thalys)로 약 1시간30분 정도 걸린다. 자동차나 고속버스를 타더라도 3시간 반 정도면 갈 수 있다. 1930년대의 기차들도 최고속도가 시속 160킬로미터였다고 하므로, 대략 2시간 정도면 브뤼셀에 도착했을 것이다.

 

브뤼셀 공연 하루 전인 25일 최승희는 벨기에 제2의 도시 안트워프를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벨기에의 겐트 대학에 유학 중이던 고고학자 김재원이 후일 <조선일보(1939314)>에 게재한 기고문에서 최씨가 25일 오후 이곳 안트워프시에 왔을 때도 이 시내 세 신문사의 기자가 인터뷰를를 했다고 전했기 때문이다.

 

한편 193926일자 브뤼셀판 <르 마탱>는 최승희는 안트워프에 간 것은 단지 언론 인터뷰 때문이 아님이었음을 보여준다. 최승희는 토요일(2/5) 저녁 안트워프에 거주하던 일본인 친구 무용가를 방문했다고 전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이번 <최승희 트레일> 취재에서 처음으로 밝혀진 것이다.

 

이 기사가 필자의 관심을 끌었다. 거기에는 내가 전혀 몰랐던 일본인 무용가 다케바야시 후미꼬(武林文子, 1888-1966)가 최승희(崔承喜, 1911-1968)의 친구로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인물이었기에 브뤼셀 공연을 앞둔 최승희를 초청해 리셉션을 열어 주었던 것일까?

 

우선 이 기사의 원문과 번역문은 다음과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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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Matin> 1939년 2월6일, 월요일, 6면

한국 무용가 최승희 인터뷰

후미꼬 타케바야시(Foumiko Takebayashi)의 일본 무용을 기억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녀는 미야타 부인(Mme Miyata)이 되고 난후 무용을 그만 두었고, 적어도 무대에서의 공연은 하지 않고 있다.

그녀(미야타 부인)의 집 내부는 현대적이지 않다. <일본 이야기>의 저자로서 이 무용가는 순수한 동양 전통을 담은 세련된 예의로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 저는 지금 내 친구 최승희씨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녀는 처음으로 벨기에에 옵니다. 최승희씨는 월요일 저녁에 팔레 드 보자르(Palais des Beaux-Arts)에서 무용발표회를 합니다.

- 그렇습니다. 그녀가 왜....

경보기 울리는 소리. 발자국 소리.

최승희와 그녀의 남편이다.

최승희는 그녀의 일본인 친구보다 키가 더 크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첫눈에 보아도 영락없는 한국 사람이다. 부드럽지만 잘 정돈된 느낌을 주는 눈을 가진 그녀는 마치 먼 여행, 예를 들면 몽골 여행에서 막 도착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여우가죽 코트와 모자, 벨벳 치마를 입었다. 벨벳과 금색 장식을 한 보디스 치마는 동양적인 특징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손이 곱다. 매우 훌륭하다. 가느다란 손가락들과 피처럼 붉은색으로 굽어진 손톱은 부처의 춤에서 손목을 사용하는 작품을 연상시킨다.

- (그렇다. 최승희씨가 영어를 할 줄 안다.) 불교는 제 작품 해석의 일부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다른 작품들은 모두 고대 민속 무용으로 거슬러 올라가지요. 기교적으로 말입니다. 게다가 마침내 저는 궁전 무용의 한국적인 주제로부터 영감을 받았습니다.

-음악은요?

- 제 무용의 반주에는 레코드판을 씁니다. 조선의 왕궁 음악가들이 취입한 음악들이지요. 거기에는 약 50여 가지의 악기들이 사용되었습니다. 그중에는 고토와 거문고, 피리 등이 포함되지요. 레코드 말고도 두 명의 음악가들이 저와 함께 와서 징과 타악기를 연주할 것입니다.

-무용 예술은 한국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최승희는 그것을 ‘재창조’해 내었습니다. (오늘 모임을 주선한 미야키 부인의 말이다.) 최승희가 어린 시절에 무용를 공부하겠다고 했을 때 가족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토쿄에 있는 저명한 이시이 무용학교에서 최승희는 20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을 공부했습니다. 여러분이 보다시피 최승희씨는 몸과 영혼을 무용 예술에 헌신한 것이지요. 그런 열정을 가졌던 겁니다. 그리고 나서 파리로 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잘 압니다. 의상은 어떻습니까?

-각각의 작품들에 맞도록 최승희씨가 직접 제작한 것들입니다. 약간 고전적이면서도 절반 정도는 미래주의적인 냄새가 나도록 만들었어요... 무용은...

그때 최승희가 웃으면서 나무 상자에 담아서 제공된 ‘사케’를 집어들기 위해 그녀의 부드러운 손목을 뻗었다.

전축 레코드판의 표지에는 “사케와 사랑”이라고 씌여 있었다.

갑자기 우리를 사로잡은 이 우아한 분위기가 일본식인지 한국식인지를 구별할 수 없었다.

소파에는 일본식 가운이 걸쳐져 있었는데 금색으로 새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수집가들이 탐낼 만한 경이적인 가치를 가진 것이다.

사케는 논의 들판처럼 달콤하다. (Ra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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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바야시 후미코에 대한 궁금증이 일기는 했지만, 이어지는 취재에서 새로운 자료가 자꾸 나오는 바람에 곧 잊혀졌다. 그러나 모나코 취재에서 그의 이름이 다시 등장했다. 모나코 <루이 노타리 도서관(la Bibliothèque Louis Notari)>에서는 최승희 관련 기사를 한 건도 발견하지 못했고, 따라서 최승희의 모나코 공연은 없었던 것으로 결론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일본인무용등의 키워드를 사용해 기사를 다시 검색하자 192618일자 니스판 <르 쁘띠 주날>에서 다음과 같은 단신 기사가 발견됐다.

 

“(제목) 일본 여자 무용수의 출연 거부에 감독이 얼굴에 권총을 발사. (니스, 1월7일) 몬테카를로의 한 댄스홀에서 공연 중이던 일본 무용단의 감독이 여자단원의 얼굴에 권총을 쏘았다. 그 여자 무용수가 출연횟수 채우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총격자는 체포됐고, 피해자의 얼굴 부상은 심각하지 않다.”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무용단장은 왜 권총을 가지고 다녔을까? 무용단원이 어째서 출연을 거부했을까? 출연거부가 총부림을 할 만큼 심각한 사안이었을까? 가해자가 체포된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얼굴에 총상을 입었는데도 용태가 심각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더구나 이 기사에는 몬테카를로라는 도시 이름을 제외하고는 밝혀진 이름이 없었다. 사건이 발생한 댄스홀의 이름도 없었고, 일본인이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름도 밝혀져 있지 않았다. 한 문단에 불과한 단신이지만 의문점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 당시 파리의 신문들도 이 사건을 흥미롭게 여겼던 모양이다. 후속 기사들이 나왔다. 19일자 <르 주날>110일자 <르에코 드알제(L'Echo d'Alger)>의 기사가 그것이다. <르에코 드알제>일본 언론인의 모험이라는 평범한 제목으로 4면에 배치했지만, <르 주날>일본 여무용가의 소설 같은 이야기라는 다소 극적인 제목으로 1면에 보도했다.

 

 

이 두 기사는 똑같이 ‘18일 니스(Nice)기사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아 같은 통신사의 기사를 받아 쓴 것으로 보였다. 내용도 대동소이하다. 두 신문은 이 총격 사건의 팩트(事實)와 함께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름을 밝혔다.

 

“(1926년) 1월4일 목요일 밤, 일본인 무용가 타케바야시는 옥스퍼드 호텔을 나서던 중, 같은 국적의 무용가가 쏜 권총에 피격되었다. 총탄은 그녀의 입에 맞았다. ... 범인 무용가 카와무라(Kawamura)는 도주했으나, 타케바야시 여사의 남편에게 보상금을 제공하고 난 후에, 체포되었다. 피해자의 부상은 심각하지는 않다.” 기사는 범인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이 없었지만 피해자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이 자그마한 무용가는 3주전 (파리의) <페미나 극장(Théâtre Femina)>에서 공연한 바 있다. 결혼하고, 이혼하고, 재혼한 그는 도쿄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했고, 요시와라(Yoshiwara)의 하녀와 웨이트리스, 무용가 등의 다양한 직업을 가진 바 있다. 기자 시절에는 사회적 의문점들을 파헤쳐 선정적으로 보도하곤 했다.”

 

<페미나 극장> 공연은 파리 일간지를 통해 확인되었다. 19251219일에 열렸던 공연이었다. 하지만 타케바야시 후미코가 주인공은 아니었다. 무용가 코모리 토시(Komori Toshi)의 공연에 타케바야시가 찬조 출연한 것이다. 이 공연의 광고문과 안내문에는 타케바야시 후미코가 일본 무용가로 소개되었으나, 사실 그가 정식으로 무용을 배우거나 전공한 적은 없었다.

 

이어서 기사는 그녀가 5년 전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 딸을 낳았는데 그 아이를 소재로 <일본 소녀의 유럽 여행(Le voyage d'un bébé japonais en Europe)>이라는 책을 썼다고 소개했다. 이 책은 일본어로 저술되었지만 후일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다. 그밖에도 다케바야시 후미코는 1933<일본 이야기(Contes japonais racontés)>라는 단행본을 출판한 바 있다.

 

 

뒤이어 두 신문 기사는 (1923) 일본에서 끔찍한 지진이 일어나자 그녀는 중국으로 건너갔고, 거기서 정치 요원의 역할을 담당했다고 서술했다. 중국에서 일본 스파이로 활동했다는 말로 들렸다. 그랬다면 타케바야시 후미코는 일본판 마타 하리였던 셈이다.

 

또 타케바야시 후미코는 유곽의 하녀와 식당의 웨이트리스로도 일한 바 있다고 서술됐다. 기사에는 요시와라(Yoshiwara)의 하녀로 일했다고 했다. 요시와라(吉原)17세기 이래 에도(江戸), 즉 오늘날의 도쿄에서 영업하던 정부 공인 유곽(遊廓), 즉 집창촌이다. 후미코는 잡지기자 시절인 1915년 이곳에 하녀로 잠입해 취재한 후 르뽀 기사를 쓴 바 있었다.

 

후미코가 웨이트리스로 일했던 것은 자신의 식당에서였다. 작가 타케바야시 무소안(武林無想庵, 1880-1962)과 결혼한 후 프랑스로 건너간 후미코는 192411월 파리의 케플러가 8번지(8 rue Kepler)일본식당 <고게츠(湖月)>를 개업했었다. 런던에 본점을 두고 있는 <고게츠>의 파리 지점이었다.

 

후미코가 춤을 추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정식 무용 교육을 받은 바 없었던 후미코는 기억과 눈썰미로 일본 춤을 추면서 식당을 홍보했다. 식당보다 춤이 호평받자 후미코는 무용가를 자처했고 급기야 192512월에는 샹젤리제 거리의 <페미나 극장>에서 정식 무용 공연에 찬조 출연하기에 이르렀다.

 

 

<르 주날><르에코 드알제>는 총격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몇 가지 제시했으나 의문점이 아주 가신 것은 아니었다. 우선 기사에서 몬테카를로라는 지명이 사라졌다. 그래서 이 기사만 보면 이 사건이 니스에서 발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위키피디어 백과사전은 이 사건의 발생지를 니스로 명시했다.

 

사건 발생장소도 한 댄스홀에서 ‘<옥스퍼드 호텔>의 현관 계단으로 바뀌었는데 몬테카를로에는 <옥스포드 호텔>의 기록이 없다. 같은 이름의 호텔이 오늘날까지 영업 중인 도시는 칸느뿐이다. 물론 1920년대에 몬테카를로나 니스에도 <옥스포드 호텔>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지난 90년 동안 폐업했거나 상호를 변경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의문은 범인 카와무라였다. 위키 백과사전은 범인이 카와무라 이즈미(川村泉)라고 서술했지만, 그는 무용가가 아니라 사업가였다. 더구나 범인이 체포되기 전에 피해자의 남편에게 보상금을 제공했다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일까?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문을 안은 채, 필자는 유럽 취재를 마치고 귀국한 후, 이 인물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이번에는 일본 자료를 찾아보았다. 짐작대로 이 사건은 일본에서도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당시 아사히신문의 특파원이 파리에 주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모나코 총격 사건은 일본에도 자세히 전해졌다.

 

필자가 접한 자료 중에서는 잡지 <후후세이카츠(夫婦生活)> 19503월호 기사가 이 사건을 가장 포괄적이고 심층적으로 서술한 것으로 보였다. 기사 제목은 모나코의 요녀 다케바야시 무소안 부인(モナコの妖姫 武林夢想庵夫人)”이었다.

 

사건 발생 후 25년이나 지난 후에 기억과 회상으로 작성된 기사지만, 기고자 스기하라 히로유키(杉原啓之介)는 사건 당사자들과도 가까운 사람이었으므로 소문과 오류를 걸러내고 사실 중심으로 서술한 것으로 보였다. 적어도 이 기고문은 프랑스 신문 기사들이 남겨놓은 공백을 메꾸기에는 충분했다.

 

우선 스기하라 히로유키는 총격 사건이 일어난 곳이 프랑스의 니스가 아니라 모나코의 몬테카를로라고 못 박았. 기사 제목부터 모나코의 요희였다.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의 이름도 카와무라 이즈미(川村泉)가 아니라 카와무라 소레가시(川村某)라고 서술했다. (위키 백과사전이즈미()’는 익명을 가리키는 소레가시()’를 잘못 읽은 것으로 보인다.)

 

이 카와무라는 런던의 일본 식당 <고게츠(湖月)>의 경영자였고 1925년의 파리 박람회에서 일본 요리 부문을 담당했다. 파리 박람회에서 후미코를 만난 카와무라는 후미코의 미색(美色)에 반해 <고게츠>의 파리 지점을 내자고 제안했고. 카와무라의 재력(財力)에 반한 후미코는 이를 수락했다.

 

불륜을 위해 급조된 <고게츠> 식당이 제대로 경영되었을 리 없었다. 두 사람은 이내 언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식당의 경영난과 후미코의 낭비벽 때문이었다. 후미코와 카와무라의 불륜은 남편 무소안의 면전에서 벌어졌다는 점에서 더욱 엽기적이었다. 스기하라 히로유키는 후미코가 무소안과 결혼한 것은 그를 사랑했거나 그의 문학을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파리로 오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192512월 프랑스 공연을 위해 파리를 방문한 코모리 토시(小森敏, Toshi Komori) 때문에 후미코의 남성편력은 한층 복잡해졌다. 코모리 토시의 <페미나 극장> 공연에 후미코가 찬조 출연하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졌고, 19261월 코모리가 남부 프랑스로 공연 여행을 떠나자 후미코도 이에 동행했다. 후미코로서는 공연을 빙자한 애정 행각이었던 셈이다.

 

이 무렵 식당 경영과 돈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고 있었다. 파리를 떠나면서 후미코는 <고게츠>식당의 채권자들에게 부도 수표를 발행했다. 화가 난 카와무라는 후미코를 찾으려 몬테카를로 따라갔고, 그를 찾은 후 권총으로 쏘아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 총격 사건은 최초의 보도처럼 공연 계약이나 출연 횟수때문이 아니라 질투와 돈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후미코의 총격 상처는 심각해 보였다. 총알이 오른쪽 뺨으로 들어가서 구강을 지나 왼쪽 뺨으로 관통해 나갔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빨이나 혀를 포함해 구강 안팎에 다른 상처가 전혀 없었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더구나 치료를 끝낸 후에는 후미코의 뺨에 보조개 같은 자국을 제외하고는 흉터가 없었다고 했다. 이를 두고 스기하라 히로유키는 세계에서 미용 기술이 가장 발달한 나라에서 치료를 받았던 덕분일까?”라고 언급했었다. 그는 또 의문이 드는 독자가 있다면 게이오 근처에서 술집을 경영하는 후미코 부인의 얼굴을 보러가도 좋다고 덧붙였다.

 

한편 기고자 스기하라 히로유키는 범인 카와무라가 무소안에게 거액의 보상금을 제공한 것은 선처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무소안은 파리에서도 지속적으로 작품 활동을 했으나 일본으로부터 원고료를 제때에 전달받지 못해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고 있었다. 카와무라가 제공한 보상금은 무소안의 경제난을 크게 완화시켜 주었던 것 같다.

 

한편 카와무라는 여러 증인을 동원해 살의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여자에게 배신당한 남자의 질투에 의한 범행이라는 점을 인정받았다고 했다. 파리에서는 카와무라의 친구이자 신문기자인 르 블랑제(LeBoulanger)가 변호사를 물색하는 등 그를 구제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정상 참작과 친구의 도움으로 카와무라는 6개월 금고형을 선고받았으나 3개월 만에 출옥했다.

 

한편 후미코도 총격 상처를 치료받고 파리로 귀환한 직후 경찰에 체포되었다. 부도수표를 발행한 경제사범으로 수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후미코는 이내 방면되었고 일본 교민 사회뿐 아니라 파리 전체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

 

타케바야시 후미코의 몬테카를로 총격 사건은 프랑스와 일본에 센세이션을 일으켰지만 이는 후미코의 자유분방한 삶의 한 단면일 뿐이다. 그는 요사스런 여인(妖姬)’을 자처했고 그것을 당당하게 내세웠다. 그는 욕망에 충실했고,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성적 매력을 십분 활용했다. 그의 자유분방은 당대의 상식 수준을 훨씬 뛰어 넘었으므로 오히려 경이의 대상이었다.

 

타케바야시 후미코는 다재다능한 사람이기도 했다. 역량 있는 기자이자 파리 무대에서 공연한 무용가였고, 아동과 여성 의류업에 뛰어든 사업가이자 여러 저서를 출판한 작가였다. 이같이 재능이 아니었더라면 후미코의 자유분방함은 그저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했을 지도 모른다.

 

후미코의 재능을 일별하기 위해서는 그의 인생을 세 시기로 나눠보는 것이 좋다. 그는 평생을 세 개의 이름으로 살았다. 그의 출생 시 이름은 나카히라 후미꼬(中平文子)였다. 시코쿠의 마쓰야마에서 태어난 그가 교토(京都)의 제일고등여학교(第一高女)를 졸업할 때까지의 기록은 남은 것이 별로 없다.

 

하지만 제일고녀를 졸업한 직후부터 후미코의 자유분방함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는 당시 교토대학교 의대생과 사랑의 도피를 계획했으나 실천에 옮기기 전에 붙잡혀 저지됐다. 집안의 강권으로 18세에 중매결혼을 했는데 이것이 후미코의 첫 번째 결혼이었다. 첫 결혼의 상대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고 후미코는 자신의 성을 바꾸지 않았다. 이 결혼은 약 6년간 지속되었고 그동안 3명의 자녀를 낳았다.

 

미인인데다 머리도 좋다고 자부한 후미코는 24세에 배우가 되려는 욕망을 품었다. 배우의 꿈을 이루기 위해 그는 세 자녀를 버리고 남편과 이혼했다. 배우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저널리스트의 길에 들어섰다. 이 분야에서 그는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후미코는 잡지사에서 기자 경력을 시작했는데, 특히 잠입 취재에 뛰어난 역량을 보였다. 1913년에는 카나가와겐(神奈川県) 후지사와시(藤沢市)의 쿠게누마(鵠沼) 소재 불교 산사 지쿄안(慈敎庵)에 잠입해 취재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 사찰에 수행 중이던 미남 청년에 반해 버려 취재를 내버린 채 그를 유혹해 두 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연하의 남편이 질투가 심한 것에 식상한 후미코는 중국 상하이로 도망가 버렸다. 후미코는 이 두 번째 남편의 성도 따르지 않았다.

 

상하이에서도 기자 생활을 계속하면서 현지 언론사 사장과 정치가들에 대한 폭로기사를 잇달아 터뜨려 유명인이 되었다. 상하이에서 얻은 명성에 힘입어 일본으로 귀국한 후에는 1916년부터 정우회의 기관지 <쥬오신분(中央新聞, 1891-1940, 도쿄)>에 정식으로 입사했다.

 

후미코는 <쥬오신분>에서도 잠입 취재를 계속해 르뽀기사 <오메미에 니츠기(目見得日記)>를 연재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그의 연재 르뽀 기사는 1916년 말 <여성기자의 잠입취재기(婦人記者 化み お目見得廻)>로 출판됐고, 이 책은 첫 두 달 동안 17판이 인쇄될 만큼 인기를 끌었다.

 

<잠입 취재기>에서 가장 주목을 끈 것은 마지막 장()에 서술된 <요시와라의 꽃(新吉原)>이었다. 이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후미코는 요시와라 유곽에 하녀로 변장해 잠입했다. 이 취재기에서 후미코는 자신이 직접 목격한 요시와라의 어린 창녀들의 생활을 자세히 서술했다. 겉으로 보이는 그들의 화려한 모습과 외롭고 쓸쓸한 숨겨진 모습, 그리고 그들의 소소한 일상생활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이 글은 독자들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밖에도 그가 나카히로 후미코의 이름으로 출판한 저서로는 <접대부 이야기(やとな物語)><여자인 주제에(のくせに)> 등이 있다. 이 저서들은 당대 화제작이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일본 여성 문학과 페미니즘의 태동을 보여주는 중요한 저작으로 인정된다.

 

1920쿠게누마로 돌아간 후미코는 소설가 나이토 치요코(内藤千代子, 1893-1925)의 소개로 다다이스트 작가 타케바야시 무소안(武林無想庵)을 만났다. 무소안은 후미코에게 반했다. 후미코는 무소안이 프랑스에 갈 계획이라는 말을 듣고 위장결혼을 결심했다. 이는 후미코의 세 번째 결혼이었는데, 이때 후미코는 비로소 자신의 성을 타케바야시로 바꿨다.

 

타케바야시 시절에 후미코는 가장 화려한 남성 편력을 보였다. 앞글에서 본 것처럼 무소안과 살면서도 식당 경영자 카와무라와 무용가 코모리 토시와 동시에 불륜을 자행했다. 후미코는 친구에게 무소안에 대한 성적 불만을 털어놓곤 했다. 무소안은 후미코의 남성 편력을 묵인하면서 저술 작업에만 집중했던 것 같다.

 

무소안은 1925년 잡지 <카이조(改造)><코쿠의 비애(Cocuのなげき)>라는 소설을 발표했다. 아내가 옆방에서 벌이는 불륜 행각을 들어야 하는 남편의 비통한 심정을 묘사한 작품이다. 자신의 고통을 소설로 형상화한 것이다. 하지만 무소안은 후미코의 남성 편력을 제지하지 않았다. 훗날 후미코가 미야타 코우조우와 결혼하겠다며 이혼해 줄 것을 요구했을 때는 거절했다.

 

이 시기에도 후미코는 <일본 소녀의 유럽 여행><일본 이야기> 등의 저서를 출판하고 이를 프랑스어로 번역하는가 하면, <페미나 극장>에서 무용 공연을 하고, 파리에서 일본 식당을 경영하거나, 시세이도사의 아동복과 모자 제조업에 뛰어드는 등 매우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후미코의 남성편력은 네 번째 남편 미야타 코우조우(宮田耕三, 1895-1984)를 만나면서 끝났다. 벨기에 안트베르펜에 거주하면서 무역업을 하던 코우조우를 만난 것은 후미코가 이디오피아 황태자와 결혼하겠다는 황당한 계획을 꾸미다가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디오피아 황태자와 만날 기회를 얻기 위해 벨기에를 방문했다가 미야타 코우조우를 만난 것이었다.

 

미야타의 재력에 혹한 후미코는 이내 그와 결혼하겠다고 나섰다. 후미코보다 여섯살 연하였던 미야타는 후미코가 타케바야시 무소안과 이혼할 것을 전제로 결혼을 수락했는데, 이것이 세간에는 계약 결혼으로 알려졌다. 후미코는 마침내 1934년 타케바야시 무소안의 이혼 허락을 받아내고 미야타와 완전히 결혼하게 되는데, 이것이 후미코의 네 번째 결혼이자 마지막 결혼이었고, 이때 후미코는 자신의 성을 미야타로 변경한다.

 

후미코는 1934년 이후의 미야타 시절에도 사업과 저술을 쉬지 않았다. 유태인 문제를 다룬 <게슈타포: 세기의 짐승과 싸운 유태인의 비화(ゲシュタポ : 世紀野獣った猶太人秘話)><풍뎅이(スカラベ)> <문신과 할례와 식인종의 나라(刺青割礼食人種)>, <73세의 청춘(73青春)>등의 저서와 자사전 <나의 백서: 행복한 요부의 고백>등이 바로 이시기의 저작들이다.

 

후미코가 자유분방하면서도 다재다능했던 여성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의 세 번째 남편 타케바야시 무소안도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특히 그의 저작능력은 탁월했다. 그는 끊임없이 소설과 평론, 번역물을 집필해 내었다. 특히 양 눈을 실명한 1943년부터 1962년 사망하기까지 자신의 기억력과 만년의 아내 하타 아사코(波多朝子)의 대필에 의지해 44권에 달하는 회원제 개인잡지 <무사우안 이야기(むさうあん物語)>을 집필했다.

 

사고와 행동의 자유분방함에 있어서 무소안도 후미코 못지않았다. 당대 대표적인 다다이스트였던 무소안은 친 여동생과 첫 번째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았을 만큼(재확인 필요) 사회적 관습과 도덕, 윤리와 관행 등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무소안의 친구들도 비슷한 부류였다. 그의 친구 쓰지 준(辻潤, 1884-1944)1909년부터 우에노 고등여학교(上野高等女学校) 영어교사로 재직하던 중 1912년에 제자 이토 노에(伊藤野枝, 1895-1923)와의 연애로 교직에서 사퇴한 후 평생 다른 직업이 없이 글을 쓰며 살았다.

 

쓰지 준과 이토 노에 부부는 1914년경 무정부주의자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1985-1923)와 친분을 갖기 시작했으나, 1916년에는 이토 노에가 쓰지 준과 결별하고 오스기 사카에와 결합했다. 이때부터 쓰지 준은 한 곳에 정착하기를 그만두고 평생 방랑하며 살았다.

 

이시이 바쿠는 쓰지 준의 평생 친구였다. 오페라 매니아였던 쓰지 준은 이시이 바쿠가 무용을 시작하기도 전, 1911년 데이코쿠극장(帝国劇場) 가극부와 1917년 아사쿠사 오페라(浅草オペラ, 1917-1923)에 출연하던 시절부터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쓰지 준의 아내 이토 노에가 오스기 사카에에게 달아났을 때 어린 딸 마코토를 이시이 바쿠에게 맡겼다. 1932년 봄에 아예 집을 처분하고 재차 방랑길을 떠날 때에도 작은 고리짝 하나에 불과한 전 재산을 이시이 바쿠에게 맡겼다. 이렇듯 이시이 바쿠는 쓰지가 가장 소중한 것을 맡길 수 있는 상대였다.

 

당시 오스기 사카에는 아내 하리 야스코(堀保子, 1883-1924)와 애인 카미치카 이치코(神近市子, 1888-1981)와 함께 지내고 있었으므로 이토 노에의 합류로 4각 관계를 이루게 된다.

 

이 불편한 4각 관계는 <히카게 차야 사건(日蔭茶屋事件, 1916)>으로 끝났다. 카미치카 이치코가 카나가와켄(神奈川県) 미우라군(三浦郡) 하야마 마을(葉山村) 소재 히카게 차야(日蔭茶屋)에서 오스기 사카에를 칼로 찌른 것이다. 이치코는 살인 미수죄로 기소되어 일심에서 징역4년을 선고 받았으나 항소하여 2년으로 감형되어 복역했다.

 

이 사건 이후에도 오스기 사카에와 이토 노에는 부부로서 활발하게 무정부주의 사회운동과 저작활동을 계속했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 직후인 91일 헌병대에 끌려가 구타당한 후 살해되어 우물에 던져지는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다른 친구들의 삶도 순탄하지 않았고, 죽음도 편안한 편이 아니었다. 무소안은 1933년에 녹내장으로 오른쪽 눈을 실명하여 외눈이 되고, 1943 년에는 왼쪽 눈마저 실명해 시각장애자로 여생을 살다가 196982세로 사망했다.

 

무소안의 친구 쓰지 준은 평생 방랑 생활로 일본 전역을 떠돌며 살다가 1944년 도쿄로 돌아와 다시 정착하려 했으나 한 달도 되지 않아 집안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검시결과 그의 사인은 아사, 즉 굶어죽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쓰지 준의 친구 이시이 바쿠도 1928년부터 시력이 약화되어 상시적인 실명 위기를 겪었다. 이후 평생 실명 위기에 시달렸지만 다행히 죽는 날까지 시력을 잃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병인 만성 갑상선염으로 고생하던 중 196275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하지만 후미코만은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과 화려한 남성 편력에도 불구하고 1934년 이후에는 미야타 코우조우와가 제공한 돈과 사랑에 힘입어 순탄한 만년을 보내다가 77세의 나이로 비교적 편안한 죽음을 맞았다. 일설에는 수세미 건강법이라는 그만의 독특한 건강 유지 비법이 주효했다는 설명도 있다.

 

후미꼬가 타케바야시에서 미야타로 변신한 것은 남편을 바꾼 것에 불과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천황과 일본의 앞날을 바라보는 두 적대적 진영의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건너간 사건이었다. 타케바야시와 그의 친구들은 다다, 사회주의, 무정부주의로 천황제를 폐지하고 일본의 방향을 뒤바꾸려 했다. 그러나 미야타 코오조우는 전쟁 중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했고 전후에는 일본의 자본주의적 경제재건을 위해 애쓴 사람이었다.

 

미야타 코우조우는 이차대전 직전에 일본 군부가 전함을 제작할 때 유럽의 고철을 사모아 일본에 공급했다. 이차대전 후에는 한국 전쟁을 이용해 일본의 경제 재건을 돕기 위해 유럽의 아마를 일본에 수입해 한국에 되파는 수완을 발휘했다. 하지만 미야타 코우조우는 후미코에게 많은 돈과 조건 없는 사랑을 쏟아부었고 이를 통해 후미코의 마음과 생활을 안정시켜주었다.

 

후미코와 그의 친구들은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삶을 살면서 고뇌와 고통을 겪으면서도 후대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 정부에 대항하여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 여성해방운동 등으로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들은 또 일반인들이 생각 없이 지켜오던 전통과 관습과 사회적 통념을 깨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사상과 행동을 글로 남겨 오늘날에도 그들의 노력을 재평가할 수 있는 기회를 남겼다.

 

후미코와 친구들은 조선의 문인과 예술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징검다리 역할을 한 사람 중에 고한용(高漢容, 1903-1983)이 있다. 고한용은 고한승의 다른 이름이다. 아동 운동을 할 때에는 고한승으로, 다다이스트로 자처할 때에는 고한용으로 자처했다. 자신의 니혼 대학 인맥과 자신이 심취했던 다다이즘을 바탕으로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의 사상과 작품을 한국에 소개했다.

 

고한용은 19214월부터 니혼 대학 미학과에서 2년간 수학했으나 1923년의 관동 대지진으로 니혼 대학 캠퍼스가 크게 훼손된 데다가 조선인 학대가 시작되자 학업을 중단한 채 귀국했다. 니혼 대학 재학 시절 고한용은 아키야마 기요시 등의 일본인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했을 뿐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같은 대학에 다녔던 마해송과 최승일 등의 한국인들과도 교분을 쌓았다. 특히 귀국 이후 고한용은 최승일과 같은 동네(경성 체부동)에 살았고, 연극운동과 방송극운동을 함께 하면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한편 고한용은 1923년 다다이즘에 눈을 뜨고 <개벽> 9월호에 최초로 다다이즘을 소개하는 글을 발표했다. 같은 해 고한용은 쓰지 준과 다카하시 신키치를 경성으로 초대해 한국의 문인들에게 일본 다다이즘을 직접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고한용의 다다이즘은 불과 2년밖에 지속되지 못한채 사그러들었지만, 그가 쓰지 준과 다카하시 신키치를 경성에 초대한 것은 조선의 근대 문인과 지식인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일본인으로서 한국 문학을 연구해 온 요시카와 나기(吉川 凪)는 그의 저서 <경성의 다다, 도쿄의 다다(2015)>에서 고한용의 다다이즘은 쓰지 준과 다카하시 신키치, 아키야마 기요시와 가네코 후미코 등의 일본인 다다이스트와 아나키스트들과 마해송과 임화, 최승일과 최승희 등을 연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서술했다.

 

<별건곤> 192611월호에는 최승일(崔承一, 1901-?)이 그해 8월 일본을 방문했던 여행기가 실렸다. 아마도 3월말에 도쿄로 유학간 동생 최승희의 안부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여행에서 최승일은 최승희가 참여한 이시이 바쿠 무용단의 카마쿠라 공연까지 동행한 바 있고, 이시이 바쿠(石井漠, 1887-1962, 무용가)와 밤마다 깊숙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이 여행기에서 최승일은 지인 타케히사 유메지(竹久夢二, 1884-1934, 화가), 쿠메 마사오(久米正雄, 1891-1952, 소설가, 극작가, 하이쿠 시인)를 만났지만, 나카니스 이노스케(中西伊之助, 1887-1958, 작가, 노동운동가, 정치가)와 일본의 인기남아 쓰지 준(辻潤, 1884-1944, 방랑문인, 다다이스트)를 만나고 오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고 서술했다.

 

이들을 자신의 우인(友人)이라고 하기에는 10세 이상의 연상들이지만, 그가 일본대학 미학과에서 유학하던 시절, 당시 젊은이들의 정신세계를 이끌던 사람들이었다. 특히 최승일이 쓰지 준을 만나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이미 고한용의 주선으로 경성 체부동에서 쓰지 준을 만나 교분을 시작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최승희가 벨기에의 안트베르펜에서 만난 다케바야시 후미꼬(武林文子, 1888-1966)에서 시작하여, 그의 교분관계를 따라오다 보니까, 한때 그의 남편이었던 타케바야시 무소안(武林無想庵, 1880-1962)이 다다이스트 쓰지 준(辻潤, 1884-1944, 방랑문인, 다다이스트)과 그의 절친 이시이 바쿠(石井漠, 1887-1962)와 연결되었고, 일본대학 유학시절 쓰지 준에 대한 이시이 바쿠의 의리를 알고 있었던 최승일은 안심하고 자신의 막내여동생 최승희를 이시이 바쿠의 문하에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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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承喜(チェ·スンヒ)公式誕生日19111124とされている朝鮮戸籍日本外務省パスポート発給記録などの公文書にはこの日付誕生日記録されている韓国淑明女子学校学籍簿北朝鮮愛国烈士陵てられた墓碑にも生年月日はこの日付

 

しかしこの誕生日崔承喜本当誕生日ではなかったかもしれないという疑問きたこの誕生日基準にした崔承喜自身直接明らかにした年齢正確でない場合かったためだ

 

崔承喜、「自叙伝1936)」崔承喜自叙伝1937)」19263自分舞踊めた年齢朝鮮式える年齢15だったとべているしかし誕生日新暦19111124だったとすれば1926316で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また崔承喜自叙伝結婚当時自分年齢20だとらかにしたが公式誕生日基準にすれば21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崔承喜誕生日年齢不一致外国でもよく発生した1938111サンフランシスコ作成した米国入国書類崔承喜自分年齢25記録したが公式誕生日基準にすれば年齢26で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19401010崔承喜がメキシコに入国する提出した入国申告書にも崔承喜年齢28かれていたが公式誕生日である19111124基準にすれば彼女満年齢29で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だしくは崔承喜自身生年1911ではなく1912だと直接明らかにした記録もある崔承喜1939510日付発給されたベルギー労働許可書19401010日付提出したメキシコ入国記録にも生年1912記録されていた

 

 

このような公式誕生日年齢不一致解消する方法があった19111124という誕生日旧暦日付として考慮これを新暦日付である1912112変換すれば誕生日年齢完全一致することになる

 

当時朝鮮人誕生日旧暦(太陰太陽歷)日付記憶実際誕生日太陽暦(グレゴリオ)日付換算してうのが慣行だったこのような慣行1960年代やそのもかなりっており韓国人には住民登録上誕生日本当誕生日ではない場合なくない崔承喜もまさにそのようなケースだった

 

崔承喜誕生日旧暦19111124すなわち太陽暦1912112だったとすればサンフランシスコに到着した1938111崔承喜年齢25であるこの誕生日前日だったのでもし米国入国1日遅れたら崔承喜入国記録年齢26いたはずだ

 

19401010崔承喜がメキシコに入国した年齢1912112基準にすれば28であることがしいこれとにメキシコ入国申告書には生年1912記録したこととブリュッセルで発給された労働許可証生年1912記入したことも正確記録ただしブリュッセル労働許可証生月5記録したことは1りだったとられる

 

 

これまで崔承喜誕生日としてられてきた19111124った日付とはえないそれが公式文書記録された誕生日であり崔承喜彼女家族もこれを意識的っていたためだ実際崔承喜公式記録すなわち戸籍科学籍簿渡航証やパスポート引越しの移転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住民登録にはすべてこの公式誕生日記録したはずだからだ

 

19111124公式誕生日ではあるがそれが本当誕生日ではなくこの旧暦日付太陽暦換算した1912112本当誕生日だったはずだおそらく崔承喜ヒの誕生日パーティーはこのわせてわれただろうし家族誕生日もこのわせられただろう

 

崔承喜本当誕生日公式誕生日うからといって人生研究したりのダンスを保存して発展させることの邪魔にはならないだろうしかしなくとも彼女誕生記念日ることには影響えかねないえば崔承喜誕生100周年記念行事2011われたが彼女本当誕生日基準にすれば2012で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ためだ(わ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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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극장의 초기역사 시론 (by 조정희, 최승희 연구가, 예술사회학)

 

I. 서론

 

나주극장은 건물이 현존하는 나주시 유일의 근대극장이다. 1930년대에 설립되어 1950년대에 개축된 나주극장은 약 1세기 동안 영화와 공연, 그리고 각종 지역 행사를 유치해 나주시와 인근 지역 주민들에게 연예와 유흥과 예술을 제공하던 극장이다.

 

특히 일제강점기를 통하여 나주극장은 나주 유일의 상설관이었고, 더구나 설립자가 조선인이었기 때문에 시민사회와 학계, 문화예술 행정당국의 관심을 끌었다. 지금은 나주시가 나주극장 건물을 매입해 문화재생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재활용하는 방안을 강구 중이다.

 

나주극장은 역사적, 문화적 의미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그 초기 역사는 밝혀진 것이 거의 없다. 그 설립자가 변사 출신의 성방명(成邦明)이라는 점은 알려져 있지만, 그가 나주극장을 언제 설립했는지, 그가 처음 설립한 극장의 위치와 크기가 어떠했으며, 어떤 영화를 상영하고 어떤 공연을 상연했는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는 일차적으로 나주극장에 대한 조사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계의 연구는 단행본 <호남의 극장문화사(위경혜, 2007)>5쪽 남짓 서술된 것이 전부이고, 연구논문으로는 최근에 발표된 나주(羅州)지역 극장의 생성과 역사적 전개에 관한 연구(김남석, 2022, <인문학연구 32>)”가 유일하다.

 

나주극장에 대한 연구가 희소한 것은 일차 자료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한 자리 수를 넘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신문기사가 문헌 증거의 전부이고, 그밖에는 2000년대 이후에 이루어진 구술자료가 약간 있을 뿐이다. 더구나 이 구술 자료조차 너무 뒤늦게 수집된 것이어서 1950년대 이전의 나주극장에 대한 회고 내용은 거의 없다.

 

 

필자가 나주극장의 초기역사에 관심 갖게 된 것은 최승희 무용공연 조사 때문이었다. 조선무용가 최승희의 공연을 조사해 온 필자는 2017년의 유럽공연 조사, 2018년의 미국공연 조사, 2019-2020년의 일본공연 조사에 뒤이어 20203월부터 국내공연을 조사했다. 코로나 때문에 남미공연 조사를 단행하지 못한 채, 일단 국내 조사를 시작했던 것이다.

 

전남지역의 최승희 공연을 조사하던 중, 필자는 목포와 광주, 벌교와 순천과 여수에서 최승희의 무용공연이 이뤄졌다는 점을 발굴하거나 확인했다. 벌교공연은 과거에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 발견된 공연이었기에 그 발견의 의의는 사뭇 컸다.

 

벌교공연을 발굴한 직후 필자는 1930년대에 더 큰 도시였던 나주에서도 최승희의 무용공연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조사를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나주극장의 존재도 알게 되었다. 조사 결과 최승희의 나주극장 공연은 없었던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려야했지만, 나주 조사를 도와주신 분들의 요청으로 나주극장에 대한 조사는 계속했다.

 

 

3개월의 조사를 결산하는 이 글에서는 그동안 취약했던 나주극장의 초기역사, 즉 해방 이전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발굴하는 데에 일차적 관심을 두었다. 이글을 위해서는 기존 문헌이 재검토되고, 관련 문헌이 새로 발굴되기도 했지만, 현지 원로와 전문가들의 면접이 가장 중요한 자료를 제공했다.

 

특히 1백세를 넘어 장수하시는 이학동 화백과 나주 문화원장을 오래 역임하신 박경중 원장님을 각각 두 차례씩 면접할 수 있었고, 나주극장의 설립자이신 성방명씨의 4남 성순재씨를 만나 면접하고 수시로 연락을 주고 받으며 질문을 드릴 수 있었던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자리를 빌어 세 분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또 나주극장의 문헌 조사와 면접 조사를 위해 나주 실학강독회와 나주학회가 큰 도움을 주었다. 특히 실학강독회의 임재택, 김순희, 최현삼 선생, 그리고 나주학회의 정찬용 선생의 참여와 도움에 감사드린다. 또 문헌자료를 자문해 주신 나주시청의 김종순 과장과 나주 문화계 원로 면접을 주선해 주신 윤지향 팀장께도 감사드린다. (2022/10/3, 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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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헤야 노아라>는 최승희 선생의 최초이자 최고 히트 작품이었다. 조선 노인을 희화화한 이시이 바쿠의 작품 <캐리커처(1926)>를 불쾌하게 여겨 <우리의 캐리커처(1931)>를 따로 안무했던 것이 발단이었다. 이 작품은 조선에서도 인기를 끌었지만, 제목을 <에헤야 노아라>로 바꾸어 1933520일 도쿄 일본청년관에서 일본 초연된 이후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에헤야 노아라>는 최승희가 <나의 자서전(1936)>에서 부친으로부터 배운 굿거리 춤이라고 서술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부친 최준현의 <굿거리 춤>과 스승의 <캐리커처>를 비판하기 위해 안무한 <우리의 캐리커처>가 합쳐진 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에헤야 노아라>는 곧 일본에서 유명해졌고, 최승희 조선무용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시이 바쿠 무용단에서 독립하기 전인 19331022일 최승희는 <이시이바쿠 무용단 가을공연>에서도 <에헤야 노아라>를 상연했고, 1934920일 도쿄에서 개최한 첫 개인 발표회 <1회 도쿄공연>에서도 상연됐다. 19351025-27일의 간사이(오사카, 고베, 오카야마) 공연과 19351119일의 다카라즈카(寶塚) 공연, 1129일의 후쿠이(福井) 공연에서도 상연됐다.

 

이 작품의 상연은 일본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193673일의 타이완 타이페이 공연, 1937329일의 숙명여전 건립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경성 부민관 공연, 1938116일의 미국 뉴욕 길드극장 공연에서도 <에헤야 노아라>가 상연됐다.

 

그러나 의아한 점이 있었다. <에헤야 노아라>1937년까지는 활발하게 공연되었지만 세계 순회공연이 시작되자 그의 공연 레퍼토리에서 거의 사라진 것이다. 이후 이 작품이 다시 공연된 것은 최승희가 자신의 무용 경력을 총결산하는 1942126일의 도쿄 독무공연에서였다. 그렇게 인기 있는 대표작품을 어째서 더 이상 공연하지 않았을까?

 

 

사실 <에헤야 노아라>의 공연이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세계 순회공연을 준비하면서 최승희는 이 작품을 다시 한 번 개량해 이름을 바꾸었는데, 새 제목은 <신노심불로(身老心不老)>였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는 뜻이다.

 

<신노심불로>가 초연된 것은 193727일의 오사카 공연이었다. 이어서 211일 후쿠이 공연, 216일 교토 공연, 227일 나고야 공연 등에서도 시험 삼아 공연되었고, 331일에는 이왕직 본청이 주최한 경성의 윤황후 위로 공연에서도 상연되었다.

 

<신노심불로>는 해외에서 본격적으로 상연되었다. 19381월의 샌프란시스코 공연과 2월의 LA 공연에서는 <신노심불로>가 발표되지 않았지만, 116일 뉴욕 길드극장 공연, 1939131일의 파리 살플레옐 극장 공연, 26일 브뤼셀의 팔레드보자르 극장 공연, 42일 독일 뒤스부르크 공연, 417일 네덜란드 덴하크 공연, 510일 브뤼셀 2차 공연, 615일 파리 샤이오 극장 공연, 627일 덴하크 쿠어짤 극장 공연에서 잇달아 공연되었다.

 

 

이후 미국 공연과 남미 공연에서도 <신노심불로>는 빠지지 않는 레퍼토리였고, 마침내 세계 순회공연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온 후 처음 가졌던 1941222일의 도쿄 가부키좌 귀조공연에서도 상연되었다.

 

<신노심불로>의 주인공은 <우리의 캐리커쳐><에헤야 노아라>에서처럼 흰 조선 의상을 입은 조선 노인이다. 파리 살플레옐 공연 프로그램에는 <신노심불로>한국 노인이 앉아 담배를 피우며 책을 읽다가 갑자기 청년처럼 춤추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내 야위고 힘없는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실망하여 다시 노인으로 되돌아온다고 해설되어 있다. 이 짧은 서술로 미루어 볼 때 <신노심불로><우리의 캐리커처><에헤야 노아라>로 이어졌던 우스꽝스런 몸짓의 무용에다가 새로운 스토리를 가미해 구성력을 높인 차원 높은 작품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캐리커처(1931)><에헤야 노아라(1933)>, <신노심불로(1937)>를 발전의 연속선에 놓인 동일한 작품으로 본다면, 이는 최승희가 무용유학을 끝내고 공연 활동을 시작한 이래 10년 이상 쉬지 않고 지속적으로 공연된 유일한 레퍼토리였던 셈이다. (2022/8/28,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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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이 바쿠의 <캐리커처>1926년에 창작된 직후 제목을 <실념>으로 바꾸었고, 적어도 1940년까지는 계속 공연되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스승의 작품 <캐리커처>에 불만을 가졌던 최승희는 19315<우리의 캐리커처>를 창작해 경성에서 발표했는데, 오빠 최승일의 서술에 따르면 조선 공연에서 이 작품에 대한 호응이 높았다고 한다.

 

19333, 최승희는 다시 도쿄로 건너가 이시이 바쿠 문하에 들어갔고, 불과 2달 만에 무대 출연의 기회가 왔다. 520일의 <근대여류무용가대회>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원래 이시이무용단을 대표해 이시이 미도리가 참가할 예정이었으나, 그가 급성 늑막염 진단을 받는 바람에, 이시이 바쿠는 최승희를 대타로 지명해 대회에 참가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발표할 작품이었다. 대회를 불과 수 일 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새 작품을 안무할 시간은 없었다. 최승희는 이미 창작한 작품 중에서 한 곡을 선정해야 했고, 이때는 이시이 바쿠 문하생 신분이었으므로 스승과 작품 선정을 의논해야 했을 것이다.

 

이시이 바쿠는 최승희의 <우리의 캐리커처>의 작품성이 뛰어남을 알아보았고, 이를 출품작품으로 선정하면서, 다만 그 제목을 변경하도록 권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자전적 에세이집 <나의 얼굴(1940, 33)>에서 이시이 바쿠는 이때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 후 3년이 지나 나의 권고로 도쿄에서 제1회 발표를 하게 되었다. 승희의 무용에 특징을 주자는 의미에서, 그 때 빅터(=레코드사)의 용건으로 도쿄에 와 있던 조선무용의 대가 한(성준)씨 밑에서 조선무용의 수법을 속성으로 연습시켰고, 본인이 싫다는 것을 내가 억지로 정리해서, 제목도 <에헤야 노아라>로 명명해 상연한 것인데 예상치 못한 큰 평판이 났고, 그 후 스스로도 자주 조선풍의 무용을 상연하게 되었다. 정말로 본인에게도 경사스러운 일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이시이 바쿠의 이 회상에는 몇 가지 착오가 있다. <에헤야 노아라>를 발표한 <근대여류무용가대회>1933520일에 열렸으므로, 이는 최승희가 한성준 선생에게서 조선무용을 배우기(19346) 1년쯤 전이고, 최승희의 제1회 발표회(19349)보다도 1년반 전의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캐리커처>의 제목을 <에헤야 노아라>로 바꾸도록 권고한 것은 이시이 바쿠였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최승희의 작품 제목이 자신의 <캐리커처(1926)>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당시 스승 이시이 바쿠와 제자 최승희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갔을 것이다.

 

<캐리커처>는 이미 제목을 <실념>으로 바꿨지만, 기억하는 관객이나 평론가도 있을지 모르니, 모작 시비를 피하기 위해서 네 <우리의 캐리커처>의 제목을 바꾸는 것이 어떠냐?”

그럼 조선에서 흥을 돋우는 감탄사로 쓰이는 <에헤야 노아라>라고 할까요?”

그게 좋겠다. 앞으로 이 조선무용 제목은 <에헤야 노아라>로 하도록 해라.”

 

 

일본인 이시이 바쿠가 에헤야 노아라라는 조선식 감탄사를 알고 있었을 리 없다. 따라서 이 제목은 최승희가 제안했던 것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엄격한 도제식의 스승-제자 사이에서 최종 결정은 스승이 내린 것으로 기록되는 법이다. 이시이 바쿠가 <에헤야 노아라>의 제목을 자신이 결정한 것이라고 서술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시이 바쿠의 <캐리커처(1926)>와 최승희의 <우리의 캐리커처(1931)>은 둘 다 제목이 바뀌었다. <캐리커처><실념(1926)>으로, <우리의 캐리커처><에헤야 노아라(1933)>로 바뀐 것이다.

 

이후 이시이 바쿠의 <실념>은 조선 의상 대신 일본식 의상을 사용하면서도 노인의 모습을 희화화한 작품으로 계속 상연되었다. 최승희의 <에헤야 노아라>도 조선 남성을 주인공으로 하되, 반주 장단을 중모리에서 굿거리로 바꾸어 더 흥겹고 유쾌한 작품으로 바꾸었는데, 덕분에 조선과 일본, 유럽과 미주에서 공연되면서 큰 인기를 얻었다. (2022/8/28,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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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캐리커처(1931)>는 이시이 바쿠의 <캐리커처(カリカチュア, 1926)>에 불쾌감을 느꼈던 최승희가 이를 수정하고 보완하려는 의도로 창작한 작품이었고, 이것이 후일 <에헤야 노아라(1933)>로 개칭되었던 것이라고 필자는 추론했다.

 

이 추론은 <신여성(19345월호)>과 최승일의 <최승희 자서전(1937)>, 그리고 다카시마 유자부로의 평전 <최승희(1981[1959])> 등의 문헌으로 뒷받침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시이 바쿠의 <캐리커처>가 공연에서 발표된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1926년 이래 1940년대에 이르는 이시이 무용단의 숱한 공연 프로그램을 조사했으나, 그 모든 프로그램에 이시이 바쿠의 독무 <캐리커처>는 실려 있지 않았다. 이는 <캐리커처>가 창작은 되었으나 발표되지 않았거나, 혹은 다른 이름으로 발표되었다는 뜻이다.

 

 

<이시이바쿠 팜플렛(1, 1927)>에 실린 이시이 바쿠의 무용작품 목록에도 <캐리커처>라는 작품은 없었다. 다만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내용으로 창작된 <실념(失念)>이 있을 뿐이다.

 

<캐리커처>19263월 이시이 바쿠가 처음 경성을 방문했을 때 창작되었다. 이 경성 공연을 위해 이시이 바쿠는 그의 처제 이시이 코나미와 함께 경성역(=지금의 서울역)에 도착, 여관과 요정이 즐비하던 수정 2번지(=지금의 중구 필동)의 하라카네(原金) 여관에 숙소를 정했고, 경성일보 사옥(=지금의 태평로1가의 프레스센터)에서 인터뷰를 하고, 하세카와초(=지금의 소공동)의 경성공회당에서 321일부터 23일까지 공연을 열었다.

 

 

이때 이시이 바쿠는 경성역 앞을 배회하는 한 조선 노인의 모습과 그의 넋이 나간 듯한 표정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공연을 마치고 도쿄의 무사시사카이(武藏境)로 돌아가, 이 조선 노인을 희화화한 작품을 안무했다. 강이향(1993, 52)은 당시 상황을 이같이 서술했다.

 

(=이시이 바쿠)가 서울에서 맨 처음 본 것은 흰옷의 조선인들이 밧줄에 묶인 채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는 모습이었다. 그야말로 수인들의 무리였다. 그는 그곳에서 빼앗는 것들의 뿌리는 하나라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고 한다.

 

그러나 반드시 어두운 인상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 속에서도 활기찬 사람의 모습, 흰옷을 입은 노인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거리의 그늘 밑에 앉아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한가함을 즐기는 모습. 그는 그 모습 속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기도 했다.

 

그는 동경으로 돌아가자마자 그곳에서 본 노인의 인상을 테마로 하여 <실념(失念)>이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푸근한 사랑과 잔잔한 웃음이 흐르는 가운데 조선 남자의 백의를 상징하는 의상으로 춤추고 있는 그의 무대 사진은 지금도 남아있다.”

 

강이향의 서술과는 달리 이 작품이 노인의 푸근한 사랑과 잔잔한 웃음을 표현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흰옷 입은 조선 노인의 정신 나간 듯한 멍한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 이시이 바쿠는 조선 노인을 풍자적으로 희화화한 것인데, 그래서 그 제목을 <캐리커처(=희화, 풍자)>라고 붙였다가 나중에 <실념(失念=망각, 멍함)>으로 바꿨다. 최승일과 최승희가 이 작품을 불쾌하게 여겼던 것도 바로 이런 희화화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시이 바쿠의 <실념>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코믹한 작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공연에서 그다지 많은 인기를 누리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일부 남겨진 공연 사진을 보면 일본에서 <실념>을 공연할 때에는 조선 의상이 아니라 일본식 의상이 사용되기도 했었다.

 

예컨대 이시이 무용단이 19401215일 도쿄의 칸다(神田) 소재 공립강당에서 개최한 보호아동의 밤공연의 프로그램에, <실념>10개 작품 중 4번째 작품으로 실려 있었다.

 

프로그램의 작품 설명 난에는 자기 자신의 생활의 캐리커처라고만 간단히 서술되어 있어, <실념>이 조선에서 만난 조선인을 소재로 창작되었다는 연원도 밝히지 않았는데, 이로 보아 이 작품의 공연 의상도 조선식 한복이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2022/8/27,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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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헤야 노아라>의 초연이 1931년 경성에서 이뤄졌던 것은 사실일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 최승희 선생의 1931년 공연을 모두 찾아 봤다. 1931년에 이뤄진 공연은 모두 6회였는데, 그 각 공연에서 초연된 신작 무용작품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110-12일 단성사에서 열렸던 <3회 발표회>의 신작: <그들의 로맨스>, <향토무용, 농촌소녀>, <광상곡>, <그들의 행진> 4개 작품.

(2) 27일 경성공회당에서 개최된 <2회 무용 발표회>의 신작: <방랑인의 설움>.

(3) 193138일 예산극장에서 신명유치원 후원을 위한 예산공연의 신작: <가비(歌悲)>, <어린 용자(勇者)>, <유희>, <흙을 그리워하는 무리들> 4개 작품.

(4) 51-3일 단성사에서 열렸던 <3회 신작무용 발표회>의 신작: <어린이무용, 나는?>, <우리의 캐리커처>, <찌고이넬와이젠>, <남양의 밤>, <비가(悲歌)>, <봄을 타고 가는 시악씨들>, <, 약동>, <황야에 서서>, <어린이무용, 앞으로 앞으로>, <겁내지 말자> 10개 작품.

(5) 91-3일 단성사에서 열린 <신작무용 발표회>의 신작: <세계의 노래>, <자유인의 춤>, <토인 애사>, <미래는 청년의 것이다>, <인조인간>, <영혼의 절규>, <철과같은 사랑>, <고난의 길>, <이국의 밤>, <폭풍우>, <십자가>, <건설자> 12개 작품.

(6) 1023일 경성공회당에서 열렸던 양현여학교 후원공연의 신작: <번외, 향토무용>.

 

이상과 같이 1931년 최승희 선생이 새로 창작한 무용작품은 32개였다. 여기에 <에헤야 노아라>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에헤야 노아라>를 다른 제목으로 발표했다는 뜻이다. 위의 32개 작품 중 어떤 것이 <에헤야 노아라>였을까?

 

 

<에헤야 노아라>조선무용이자 독무였으므로, ‘현대무용중무군무를 제외하면 단 1개의 작품이 남는다. 그것은 193151-3일 단성사 공연에서 최승희의 독무로 초연되었던 <우리의 캐리커처>이다. 이 작품은 어떤 작품이었을까?

 

최승일은 <최승희 자서전(1937, 56-57)>에 실린 누이에게 주는 편지에서 최승희가 <우리의 캐리커처>라는 작품을 창작할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 언제인가 나와 너는 석정막씨의 <캐리커처>라는 제목으로 조선 옷을 입고 추는 춤을 보고서 대단히 불유쾌하게 생각하여, 곧 이기세(李基世)씨와 의논하야 가야금 산조 진양 중모리에다가 안무하야 <우리들의 캐리커처>라는 제목으로 너로서는 처음으로 <조선리듬>에 춤을 추지 아니하였느냐. 그때 일반의 평판도 좋았지마는 나는 그때 너는 조선의 딸이다하고 마음속으로 기뻐하였다.”

 

이시이 바쿠는 19263월 첫 조선공연을 위해 경성을 방문했을 때 경성역에서 보았던 조선 노인의 모습을 소재로 <캐리커처>라는 작품을 안무했다. 이 작품에서 이시이 바쿠는 한복 두루마기 의상으로 춤을 추었는데, 최승일과 최승희는 그것을 불쾌하게 생각할 만큼 조선인의 정서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최승희는 조선 남성의 의상은 유지하되 음악을 진양중모리 리듬의 가야금산조로 바꾸고, 무용 동작을 모두 새롭게 안무해서 제목을 <우리의 캐리커처>라고 한 것이다. 이는 <(이시이 바쿠가 본 조선의> 캐리커처>가 아니라 <우리의 캐리커처>라는 뜻이다.

 

갓을 쓴 두루마기 의상의 중년 남성의 춤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캐리커처><에헤야 노아라>와 같다. 다만 <에헤야 노아라>의 반주가 굿거리장단이었지만, <우리의 캐리커처>의 음악은 진양중모리 장단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우리의 캐리커처><에헤야 노아라>로 개명하면서 장단을 더 흥겨운 굿거리장단으로 바꾸었을 가능성이 있다.

 

, 193151일 서울 단성사에 초연된 <우리의 캐리커처><에헤야 노아라>의 원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2022/8/27,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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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선생의 첫 조선무용 작품이 <에헤야 노아라(1933)>가 아니라 <영산무(1930)>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많은 저자들이 1930년 경성에서 초연된 <영산무(1930)>의 존재를 알면서도 <에헤야 노아라>를 첫 조선무용 작품이라고 서술하곤 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일본 문헌을 답습한 때문일 것이다.

 

일본에서는 <영산무>보다 <에헤야 노아라>보다 먼저 발표됐던 것은 사실이다. <영산무>1934920일 일본청년관에서 최승희 선생의 <1회 무용발표회>에서 처음 공연되었던 반면, <에헤야 노아라>는 그보다 약 1년반 전인 1933520<레이조카이(令女界)> 주최의 <근대여류무용대회>에서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1933년 일본청년관에서 발표된 것이 <에헤야 노아라>의 초연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이 작품은 1931년 조선의 경성에서 초연되었음을 보여주는 문헌들이 있다.

 

먼저 조선의 여성지 <신여성(19345월호)>이다. 이 기사는 <에헤야 노아라>의 창작연대가 1931년이라고 서술했다. 필자는 처음에 이 서술에 의문을 가졌다. <신여성> 기사는 작품 제목을 <에헤노아라>라고 잘못 기록한 바 있다. 또 최승희 선생의 <에헤야 노아라> 공연 사진이 “193311월 도쿄 히비야 공회당에서 재발표할 때 촬영한 것이라고 밝혔는데, 실은 19331022일의 <이시이바쿠 무용단 가을공연>이었다. 날짜를 잘못 서술한 것이다.

 

<신여성> 기사의 이같은 오류들 때문에 필자는 <에헤야 노아라>의 창작연대가 1931년이라는 서술도 오류일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이 기사의 서술대로라면 <에헤야 노아라>의 창작은 <근대여류무용대회(1933520)>보다 약 2년이나 앞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사의 서술을 뒷받침하는 다른 문헌이 있다. 다카시마 유자부로(高嶋雄三郞)의 평전 <최승희(1981[1959])>이다. 이 책의 118쪽에서 저자는 <에헤야 노아라>1931년 서울에서 초연되었다고 기록했다. <에헤야 노아라>의 창작연대가 1931년이라고 서술한 <신여성>의 기사와 일치된 주장이다.

 

그러나 다카시마 유자부로의 서술에도 문제가 있었다. 같은 책 41-49쪽에서 저자는 <에헤야 노아라>1933년 작품이며, 여성잡지 <레이조카이(令女界)>가 일본청년관에서 주최한 <근대여류무용대회(1933520)>에서 초연되었다고 서술했다. 같은 책에서 같은 작품의 초연시기와 장소에 대해 전혀 다른 서술을 제공한 까닭이 무엇일까?

 

언론인(=신문기자)이자 안막-최승희 부부와 개인적 친분이 있었던 다카시마 유자부로가 이같은 사실을 서술할 때 추측이나 자의적 판단을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저자가 같은 사실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언급을 기록했을 때에는, 그 각각을 뒷받침하는 문헌, 혹은 증언 자료가 존재했었음에 틀림없다.

 

 

필자는 다카시마 유자부로의 ‘1933년 도쿄 초연설이 다른 언론사들의 기사가 근거였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근대여류무용대회>가 끝난 후 도쿄의 신문들은 최승희의 <에헤야 노아라>가 그의 첫 조선무용 작품이며 그날 일본청년관에서 발표된 것이 초연이라고 서술했기 때문이다.

 

반면, ‘1931년 서울 초연설은 최승희의 증언을 직접 듣고 기록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1931년 최승희는 경성에서 활동했고, 재차 도쿄에 가기 전이었으므로, 일본에서 활동했던 다카시마 유자부로는, 최승희의 증언이 아니었다면, 그 사실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혹은 다카시마 유자부로가 안막에게서 들었을 수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안막과 최승희의 결혼은 193159일이므로 안막은 최승희의 <에헤야 노아라>에 대해 직접 알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어떤 면으로 보나 ‘1931년 서울 초연설의 근거는 최승희가 다카시마 유자부로에게 직접 전했거나 혹은 안막의 증언을 통해 건네졌을 가능성이 크다.

 

어느 경우이든, 다카시마 유자부로는 같은 사건에 대한 상이한 서술을 기록하면서 어떤 것이 사실에 더 부합하는지 검토하지 않은 실수를 저질렀던 것은 사실이다. (2022/8/26,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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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선생의 첫 조선춤, 즉 최승희류 조선무용의 첫 작품은 그동안 <에헤야 노아라(1933)>로 널리 알려져 왔다. 그러나 필자는 <에헤야 노아라>에 앞서 적어도 8개의 조선무용 작품이 창작되어 공연된 적이 있었음을 알아 낼 수 있었다.

 

193021일의 <1회 무용발표회(경성공회당)>에서 <영산무(음악 조선고곡 영산회상)>가 초연되었고, 1930330일에 열린 <1회 창작무용 발표회(단성사)>에서는 <농촌소녀의 춤(음악 조선민요)>가 발표됐다. 19301021일의 <2회 신작무용 발표회(단성사)>에서도 <장춘불로지곡(長春不老之曲, 음악 보허자)><정토의 무희(음악 조선정악)>가 초연되었다.

 

 

<향토무용: 농부(음악 조선민요)>193127<2회 최승희 무용발표회(단성사)>에서 초연됐고, 193151일의 <3회 최승희신작무용 발표회(단성사)>에서도 <우리의 캐리카추어(음악 가야금산조)>, <봄을 타고 가는 시악씨들>, <향토무용(음악 대취타)>가 초연됐다.

 

, 1933520일 도쿄 일본청년관에서 열린 <근대여류무용가대회>에서 <에헤야 노아라>가 발표되기 전에도 이미 적어도 8개의 조선무용 작품이 창작, 공연된 바 있었고, 그중 가장 먼저 발표됐던 <영산무(1930)>야말로 최승희 선생의 첫 조선무용 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에헤야 노아라>가 최승희 선생의 첫 조선춤이라고 알려져 왔었던 것일까? 그것은 그런 이름붙이기를 시도했던 것이 일본의 평론가들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최초로 공연된 최승희 조선무용 작품은 <에헤야 노아라>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보다 먼저 창작된 8개의 조선무용 작품들은 모두 경성에서 초연되었다. 그중 <영산무>1934920일 도쿄 일본청년관에서 열린 <1회 최승희 무용발표회>에서 <에헤야 노아라>, <승무>, <검무>와 함께 발표되었지만, 이미 돌풍을 일으킨 <에헤야 노아라>와 새로운 관심을 얻은 <승무><검무>에 눌려 <영산무>는 그다지 호의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다.

 

<영산무>가 호평을 받지 못한 것은 조선 공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공연 전에는 <영산무>가 주목을 끌었다. 예컨대 1930131일의 <매일신보(2)>조선정조를 가득 실은 가지가지의 무용이라는 제목 아래 영산회상의 고악과 영산무라는 부제를 사용할 만큼, <영산무>는 이 공연의 대표곡으로 소개됐다.

 

기사의 본문에서도 그 무용은 모두 조선의 정조를 가득히 실은 최양 독특의 무용들이며, “그중에도 <영산무><영산회상>이라는 조선고악에 맞추어 추는 춤으로 더 한층 조선의 향내를 발산하는 것이라고 특별한 설명을 곁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공연이 끝난 후에 신문과 잡지에 보도된 평론들은 <인도인의 비애><사랑의 춤>, <오리엔탈><마주르카> 등의 현대무용에 대한 감상이나 평론이 있었지만 <영산무>에 대해 언급한 글은 단 한편도 없었다. 관객과 평론가들의 이같은 무관심 때문인지 이후 최승희는 19333월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영산무>를 조선에서 다시 공연하지 않았다.

 

 

기대를 받았던 <영산무>가 조선에서 외면 받았던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최승희의 조선무용이 조선의 관객들에게 충분한 호소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일본유학을 통해 연마한 것은 서양식 근대무용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소재와 의상을 조선의 전통에서 찾기는 했으나 그것이 조선무용 작품으로 충분히 다듬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혹은 <영산무>에 최승희 선생이 직접 출연하지 않고 그의 제자 2-3명이 출연했던 것도 이 작품이 널리 알려지거나 호평을 받지 못했던 원인이었을 수 있다. 193021<영산무>가 경성공회당에서 조선 초연되었을 때에는 조영애(趙英愛)와 노갑순(盧甲順)에 의해 발표되었고, 1934920일 도쿄 일본청년관에서 일본 초연되었을 때에도 카이 후지코(甲斐富士子), 김민자(金敏子), 가토 에미토(加土惠美子)에 의해 공연되었다.

 

최승희 무용 공연, 특히 그의 초기 공연에서는 모든 시선이 최승희 본인에게 집중되었으므로, 그가 직접 출연하지 않은 작품에는 세간의 관심이 적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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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최승희 선생의 <에헤야 노아라>한량의 술 취한 모습을 묘사한 춤이라고 서술했다. 작품의 의상에 대해서도 전통적인 한량 복장에 갓을 쓰고 경쾌하게 추는 춤이라고 했고, 결정적으로 한성준에게서 배운 태평무와 한량무를 기초로 새롭게 해석한 춤이라고 서술했다.

 

그러나 과연 <에헤야 노아라>가 한량의 모습을 묘사한 춤이었을까? 조선시대의 한량이란 하는 일 없이 노는 부잣집 젊은이를 가리켰다. 학문이나 수양에 힘쓰는 넉넉한 집안의 자제를 한량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없었다. 주색잡기에 빠진 젊은이, 혹은 난잡성이나 퇴폐성은 그보다 덜하더라도 풍류와 노름에 빠진 부잣집 젊은이를 한량이라고 불렀던 것이 보통이다.

 

 

한량이란 특정신분이나 직업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기 때문에 복식이 별달랐을 리 없다. 한량이라면 보통 양반 자제이었으므로 그들의 복장은 양반 복장이었고, 집안이 부유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므로 좋은 옷감의 바지저고리에 쾌자와 가죽신 등을 곁들인 호화로운 복장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한량 복장이라는 특별한 복식이 따로 있었을 리는 없다.

 

또 최승희가 이 춤을 한성준에게서 배운 태평무와 한량무를 기초로 창작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시기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에헤야 노아라>의 초연은 1933520일인데, 최승희가 한성준으로부터 조선무용을 사사받은 것은 19346월경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승희가 창작한 작품 중에 <한량무(1938)>가 따로 있다. “한성준에게서 배운 태평무와 한량무를 재해석해 창작했다는 작품은 바로 이 <한량무>일 가능성이 크다. 정병호(1985)에 따르면 이 <한량무>의 창작연대는 1939년이었는데, 필자의 조사에 따르면 193822LA 이젤극장 공연이 그 초연이었다. 어떤 경우이든 이 작품은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1937.12-1940.12) 중에 창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춤(=<에헤야 노아라>)1933년에 창작되었지만 춤을 무대에 올린 것은 19345월 동경의 일본청년회관에서 열린 여류무용발표회라고 밝혔던 것을 보면, 이 작품이 <한량무(1938)>가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그보다 5년이나 이른 시기에 창작된 <에헤야 노아라(1933)>는 한량을 묘사한 춤이라고 보기 매우 어렵다.

 

<에헤야 노아라>가 한량을 소재로 한 춤일 수 없다는 사실은 최승희 자신의 증언에서도 잘 드러났다. 그는 <나의 자서전(1936)>에서 <에헤야 노아라>는 자신의 부친 최준현씨가 추던 <굿거리춤>을 배워서 작품화한 것이라고 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술에 취한 자신의 아버지가 추었던 굿거리춤에서 영감을 얻어낸 작품이라고 서술했다. <나의 자서전(1936, 7-8)>에 서술된 내용을 직접 인용해 보자.

 

도련님으로 자라신 아버지는 대단한 미남이셨고, 게다가 술자리도 좋아하셨던 분이기 때문에 예능에도 능하셨는데, 그중에서도 <굿거리춤>을 가장 잘 추셨습니다. 흥에 겨워 아버지가 추시던 굿거리춤을 재미있게 바라보면서 어린 나도 어느새 이 춤을 외워버렸습니다.

 

나중에 이시이 바쿠 선생님의 작품 발표회에서 네 작품도 하나 발표하지 않겠느냐?’ 하시는 선생님의 말씀에 가장 먼저 아버지의 <굿거리춤>을 떠올렸습니다. 쇠퇴한 조선무용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어 예술적으로 소생시키고 싶었던 나에게, 조선에서 태어난 무용가인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새로운 예술작품 창작의 기회가 왔을 때 바로 그 춤을 소재로 삼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나의 중요한 레퍼토리 중의 하나인 <굿거리춤>은 결국 아버지가 추셨던 <굿거리춤>을 바라보면서 자연스럽게 외워버렸던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생겨난 것입니다.”

 

 

, 이 작품의 주인공은 중년 이상의 조선인 양반 남성이다. 그리고 중년 혹은 노년의 남성을 한량이라고 부르는 것은 조선시대의 관행이 아니었다.

 

이상의 여러 문헌 증거와 상황 추론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에헤야 노아라>의 소재를 술 취한 젊은 한량으로 보는 것은 무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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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동 선생 인터뷰 때문에, 박경중 선생 인터뷰의 후속조사가 지체됐었다. 정병호 선생이 중학생 시절에 최승희 공연을 관람했다는 박경중 선생의 증언에 따라, 그 공연이 언제 어디서 열렸던 공연이며, 그 공연의 레퍼토리가 무엇이었는지 조사하던 중이다.

 

그런데 정병호 선생이 언급한 3개의 연제 중에서 <초립동><보살춤>은 쉽게 공연 레퍼토리에서 찾아지고 정리되었지만 <에헤야 노아라>는 약간 복잡했다. 이 작품은 해당 공연 레퍼토리에 등재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제목과 창작 및 초연시기 등에 대해 모호한 점이 있다. 또 이 작품은 최승희 선생의 첫 조선무용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 점도 확실하지 않다.

 

 

우선 제목. 조선의 여성지 <신여성> 19345월호는 이 작품을 <에헤노아라>라고 불렀다. 이는 <에헤야 노아라>의 잘못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이 잘못된 제목이 지금까지 전해진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작품의 제목구성 및 형식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제목) 에헤라노아라; (정의) 최승희가 조선의 춤을 바탕으로 창작한 최초의 작품; (구성 및 형식) 이 작품은 조선의 고전음악을 관현악곡으로 편곡한 음악을 사용하며, 전통적인 한량 복장에 갓을 쓰고 경쾌하게 추는 춤이다. 최승희는 한성준에게서 배운 태평무와 한량무를 기초로 새롭게 해석하여 애수와 즉흥성이 강한 춤으로 재창작하였다.”

 

이 두 문장 한 문단짜리 짧은 서술에 오류가 5개나 포함돼 있다. 첫째가 제목, 둘째가 반주음악을 관현악 편곡이었다고 한 점, 셋째는 한량 복장이라는 표현, 넷째는 <에헤야 노아라>가 한성준에게서 배운 태평무와 한량무를 기초로 창작했다고 서술한 점, 다섯 번째는, 이 작품이 조선의 춤을 바탕으로 창작한 최초의 작품이라고 소개한 것이다.

 

 

우선 제목을 <에헤라노아라>라고 한 것은 <에헤야 노아라>의 잘못이다. 이 제목이 처음 활자로 인쇄된 것은 1933520일의 <근대여류무용대회> 공연 직후의 언론보도였을 것이다. 이 공연의 프로그램은 발굴되지 않았고, 또 발굴된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이름(아마도 이시이 미도리)과 그의 연제가 인쇄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시이 미도리가 급성 늑막염에 걸렸기 때문에 최승희 선생이 불과 대회 이틀 전에 핀치히터로 이 대회에 출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반년후인 1933922일의 <이시이무용단 가을공연>1934920일의 <최승희 제1회 발표회>의 공연 프로그램에는 분명히 <에헤야 노아라(エヘヤ・ノアラ)>로 표기되어 있다. 이것이 어떤 경위로 <에헤노아라>로 전해졌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오류는 어법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 한국의 감탄사에서 에야는 정조 상승의 감탄사이고, ‘에라는 정조 하강의 감탄사이다. 에야는 흥을 돋우는 감탄사인 반면, ‘에라는 탄식이 밴 감탄사이다. 여기에 음절이 가운데 끼어들면 각각의 감탄사를 강조하게 된다. 에헤야는 흥을 더욱 돋우는 감탄사이고, ‘에헤라는 더욱 깊은 탄식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군밤타령>이나 <호미타령>같은 빠르고 흥겨운 민요곡에서 감탄사 에헤야를 자주 사용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반면 <성주풀이>같은 느리고 탄식조의 민요풍 노래에서 에라 만수를 추임새로 사용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에라에야의 구별이 자주 혼동된다. 그래서 정태춘 선생의 <에헤라 친구야(1978)>는 가사의 내용상 <에헤야 친구야>로 바꾸는 것이 어법에 맞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을 들은 한 평자는 정태춘 선생의 목소리의 톤이 낮고 우수적이며, 가사가 체념성 평화(요즘 말로 하면 소확행)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에헤라 친구야>가 더 맞을 수 있다고 평가했다. 어떤 경우이든 에라에야를 구별한 필자의 주장을 인정한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최승희 선생의 <에헤야 노아라>한량이 술에 얼큰하게 취한 상태로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배를 볼록하게 내민 채 팔자걸음을 걸으며 추어,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춤이라고 설명했다. 흥겨운 모습을 묘사한 코믹한 춤의 제목에 탄식과 체념의 감탄사 에헤라를 쓸 수는 없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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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는 1920년대에 태동해 30년대에 꽃을 피우기 시작하다가 40년대 들어서는 일제의 군국주의적 문화 압살 정책에 짓눌려버렸다. 그래서 일제에 부역하는 일부 국책영화를 제외하고는 예술영화가 설 자리는 없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내내 예술 장르이자 계몽의 수단이었던 연극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사실상 호남지역의 연극은 다른 지역에 비해 그 뿌리도 깊고 저변도 넓은 편이었다.

 

호남 연극이 태동한 것은 1909년경이었다. 판소리가 서구 연극적 형태로 이행돼 만들어진 창극이 우리나라 연극의 시작인데, 김창환이 정학진, 유성준, 김정길 등 이 지역 명창 50여 명을 규합하고 <김창환협률사>를 조직, 그해(1909) 가을 광주천변(현 양림교 부근)에 가설무대를 설치해 공연한 것이 그 시초였다.

 

 

호남 연극사를 보면, <김창환협률사> 이후 1910년대에는 신파극이 유입되었고, 1920년대에는 근대극이 형성되었다. 1930년대에는 연극이 항일운동의 수단으로 활용되었으나, 1940년대에는 일제관헌의 검열을 받아야하게 되면서 잠복기에 들어갔다.

 

해방 후 호남인들의 연극 욕구는 다시 폭발했다. 19489월 창립된 조선대 연극회가 그 신호탄이었다. 그리고 이같은 연극 붐은 195611월 광주극장에서 첫 막을 열었던 <전국학생연극제>에서 절정에 달했다. 이번 조사에 중요한 것은 조선대 연극회가 창립된 것이 호남 연극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과 이학동 선생님이 그 연극회의 창단 멤버이셨다는 점이다.

 

정식 이름이 <조선대 극예술연구회>인 조선대 연극회는 현지에서는 <조대극회>라고 줄여 부른다. 이 대학의 연극 동아리인 조대극회는 오늘날까지도 그 위용이 대단하다. 20101111일자 <경향신문>은 조대극회의 1백회 정기공연을 보도하면서 조대극회가 (201011) 17~18일 두 차례 펼칠 연극 <철종 13년의 셰익스피어> 연습 무대를 소개했다.

 

 

이 연극은 인간의 탐욕, 권력욕, 성적 일탈 등을 꼬집은 셰익스피어 작품 37개를 각색해, 저물어가던 조선말의 현실을 풍자하는 블랙 코미디였다고 한다. ‘철종 13은 진주민란이 일어난 1862년을 가리킨다. 유교사회 기득권에 대한 민중봉기의 물꼬를 튼 대사건이다.

 

조대극회의 100번째 정기 공연은 연극의 뿌리가 깊은 광주전남의 연극사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진기록이다. 이 작품의 러닝타임은 3시간인데 어떤 기성극단도 해내지 못한 일이었다. 출연 배우가 57, 연출, 조명 등 스태프가 20명에 이르렀다. 이 공연의 총기획자인 김영윤씨(81학번)는 직접 참여하지 못한 선배들은 약 2달 사이에 제작비 1억원을 모금했다고 전했다.

 

정기공연 1백회만 하더라도 대학 연극부가 해낸 것은 조대극회가 유일하다. 그만큼 조대극회의 저변이 넓고 깊이가 깊다는 뜻이다. 조대극회로부터 시작된 전남 광주 지역의 연극 붐은 1956<전국학생연극제>로 절정에 달했고, 이후 연극협회 전남지부 발족(1962), 전대극회 창립(1965) 등으로 이어졌다. 전남 광주 지역의 연극 붐은 7-80년대에 전국적인 침체기를 거쳤으나 광주연극제 시작(1987), 광주학생연극제의 부활(1991), 광주지역 여배우들의 모임인 여우회창립(1996), 소극장연극축제의 시작(1998) 등으로 이어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광주 전남 지역의 연극이 융성하게 된 계기가 1948년의 조대극회 창립이었다는 점은 지금도 높이 평가되고 있는데, 당시 조대 미대 3학년이었던 이학동 선생이 그 창단 멤버 중의 한 분이셨던 것이다. 그해 9월 현 무등시네마 자리인 동방극장에서 <무의도 기행>이 상연되었던 것이 조대극회의 첫 정기공연이었고, 1952년 한국전쟁 와중에도 <귀촉도>를 들고 목포, 군산 등을 누빌 만큼 조대극회의 활동은 왕성했다.

 

이학동 선생님의 작품 <남매>가 나주극장에서 상연되었던 것도 전남 연극 붐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이 작품의 기획과 연출, 상연과 반응 등을 조사하여 잘 정리하는 것은 전남 연극 운동을 이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학동 선생님 2차 인터뷰에서는 나주극장에서 1달간 상연되었던 <남매>가 중요 사안으로 조사되어야 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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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동 선생님은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1회 졸업생이라고 하셨다. 1946929일 조선대학교가 개교할 때에는 4개 학부, 12개 학과에 모두 1,194명의 학생들이 등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4개학부에 미술대학이 있었을까? 혹은 12개 학과에 회회학과가 있었던 것일까?

 

조사 결과 조선대 개교할 때는 미술대학이 단과대학으로 독립되어 있지 않았지만 회화과는 설치되었다. 이 회화과는 문리대에 속해 있었고, 그 안에는 서양화 전공과 한국화 전공이 분리되어 있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학동 선생은 오지호 선생으로부터 서양화를, 허백련 선생으로부터 한국화를 사사했다고 한다.

 

(지금은 조선대에 미술체육대학이 단과대학으로 독립되어 있고, 회화학부와 공연예술무용과를 포함한 10개 학과가 개설되어 있다. 회화학부에 서양화 전공과 한국화 전공이 분리되어 있는 것은 개교 초기와 같다.)

 

 

2019510일 조선대학교 미술관은 <김보현과 실비아올드 미술관(조선대 본관 소재)>에서 개관 30주년기념 <찰나의 빛, 영원한 색채, 남도>전을 개최, 조선대 미대와 인연이 있는 원로, 중견작가들의 소장품을 중심으로 남도 미술을 이끌어온 작품들을 전시했다. 이 전시회는 조선대 미술대학의 역사를 반영해 3부로 구성되었다.

 

1부는 해방직후 개교 초기(40년대말-50년대초)에 강단에 섰던 김보현, 백명수, 윤재우, 천경자의 작품이 전시됐고, 2부는 조선대학교가 인상파 화풍의 산실이었던 1950년부터 1980년대 전반까지 활약했던 오지호, 임직순, 김영태, 오승우, 조규일, 국용현 등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3부는 남도 화풍의 토대 위에서 독자적 화풍을 탐구한 진양욱, 황영성, 최영훈, 진원장, 이강하, 한희원, 김유섭, 박구환 등의 작품이 걸렸다.

 

이 전시회에서 필자가 주목한 것은 이학동 선생님이 (1) 전남 고흥 출신의 천경자(千鏡子, 1924-2015) 선생과 동년배였지만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림을 배웠다는 사실과 (2) 전남 화순 동복면 출신의 오지호(吳之湖, 1905-1982) 선생의 제자였다는 사실이었다.

 

 

2016923일자 <중앙일보>호남 화맥의 산실로 69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한조선대 미대가 <조선대학교 미술 70> 전시회를 열었다고 보도하면서 조선대 미대 동문과 전,현직 교수 320여명이 총 4개 분야로 나뉘어 전시에 참여했다고 전했다.

 

1부의 창립시기(1946-1970)에서는 개교 초기의 김보현, 윤재우, 천경자, 오지호 교수의 지도 아래 조선대 학파가 탄생하는 과정을 보여주었고, 이후 (2) 격동의 시기(1980), (3) 현대미술의 다양성과 대중화를 시도하던 시기(1990), 그리고 (4) 명예교수 및 타대학 출신교수인 김보현, 조복순, 김영태, 오지호의 작품이 전시되었다고 한다.

 

특히 이 전시회 기간 중에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가졌던 조선대 미대 1회 졸업생 김영태 선생은 소감을 묻는 질문에 조선대 미술인이라면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면서, “지금이야 홍익대나 서울대가 더 높다고 인식되지만 당시에는 중앙에서도 조선대를 알아줬다고 회상했다고 한다. 조선대가 한국 최초의 민립대학으로 태동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대 미대는 한국 최초이자 최고의 화풍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 두 전시회 소개 기사에 따르면 조선대 미대의 초기 주요 인물은 김보현, 오지호, 윤재우, 천경자 등의 교수진과 이학동, 김영태, 나점석 등의 1회 졸업생들이다. 이들에 대해 후속조사가 필요하고, 이학동 선생님 2차 인터뷰에서도 자세히 질문드릴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학동 선생이 한국화를 사사했다는 허백련(許百鍊, 1891-1977, 진도 출신) 선생은 조선대 미대의 창설과 초기 활동 문헌에 등장하지 않는 것이 특이하다. 조대 미대 70주년 기념전이나 조대 미술관 30주년 기념전에도 허백련 화백의 작품은 출품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학동 선생이 허백련 선생과 어떤 방식으로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었는지 후속조사 및 인터뷰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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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동 선생님이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제1회 졸업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조선대학이 개교한 것은 1946929일이므로 그는 19469월에 입학해, 19506월에 졸업한 셈이 된다.

 

광주 소재 조선대학교는 흔히 대한민국 최초의 민립대학이라고 불린다. 조선대학교의 역사를 살펴보니 그 서술은 반만 맞다. 조선대학교 설립운동은 해방 직후 19465월 조선대학설립동지회(=동지회)와 창립준비위원회가 결성되면서 시작되었다.

 

194685일 동지회는 광주서중학교에서 발족식을 열었다. “개성교육생산교육영재교육이라는 건학 이념과 민족국가 수립에 기여할 지역사회의 인재를 양성이라는 설립 이념을 채택했다. 같은 해 99<광주야간대학원>의 설립이 인가되었고, 9294개 학부, 12개 학과, 1,194명의 학생이 등록한 <광주야간대학원>이 마침내 개교, 수업에 들어갔다.

 

 

동지회원들은 그해 12월부터 트럭을 타고 전라도 각 지역을 샅샅이 돌면서 모금운동을 벌였다. 군수와 면장, 이장과 경찰서장부터 기생에 이르기까지 당시 쌀 2말 값에 해당하는 100원짜리 설립동지회권을 구매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깨, , 미역, 장작 등의 현물을 기부했다.

 

당시 광주시장 서민호와 광주법과대학을 세우려던 이규정 등이 주축이 되어 모집된 동지회 가입회원은 194772,195명에 달했다. 가입 회원들의 거주 지역도 호남권은 물론 충청권과 제주도까지 포함할 만큼 광범위했다. 명실공이 민립대학이라고 불리는 것도 당연했다.

 

19461123<조선대학>으로 명칭을 변경했는데, 여기에는 광주시장에서 전남도지사로 영전한 서민호의 역할이 컸다. 그는 광주 지역에 국한된 대학이 아닌 전국의 인재를 키우는 대학을 목표로 제시했고, “정부수립 전에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민족과 국가의 미래를 이끄는 초석이라고 주장했다. 1948526일 재단법인 <조선대학>이 미군정청의 설립 인가를 받게 되었고 박철웅 초대 총장이 취임했다.

 

 

조선대학교의 설립은 지역적 견지에서 이례적이었다.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연세대(1885), 고려대(1905), 숭실대(1906), 이화여대(1927), 숙명여대(1938), 한양대(1941)는 모두 경성에 있었다. 해방 이후 정부 수립 전에 설립된 홍익대(19464)와 서울대(19468), 성균관대(19469)와 단국대(194711)도 마찬가지였다.

 

지방에서 설립된 종합대학은 조선대(19465)와 부산대(19465)가 유이(唯二)했다. 그런데 부산대는 정부 주도로 설립된 국립대학이었던 반면, 조선대는 전남 민중의 힘으로 설립한 민립대학이었다. 그만큼 전남인의 교육열이 서울 못지않게 높았다는 뜻이다.

 

전남인이 민중의 힘으로 돈을 모아 조선대학교를 설립한 것은 요즘식으로 말하면 크라우드 펀딩으로 대학을 세운 것이다. 1946년의 전남인들이 조선대학교를 설립한 것은 1988년 한국인들이 <한겨레신문>을 창간한 것에 비견될 수 있다.

 

그러나 규모는 <조선대학교>가 훨씬 컸다. <한겨레신문>4천만명의 국민 중 61천여명이 주주로 참여했지만, <조선대학교>는 전국 인구가 19백만명(1948), 전라남도 인구가 3백만명(1949)이던 시절 72천명의 동지회원이 모은 돈으로 설립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민립으로 설립된 조선대학교는 초대총장 박철웅의 비리로 엉망이 되고 말았다. 박철웅은 기부된 현물을 현금화하는 일에 수완을 발휘하는 등 조선대 설립과정에서 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총장 취임과 함께 동지회의 중심인물들을 제거하고, 동지회원 72천명의 기부내역을 은폐하면서 조선대학교를 사유화했기 때문이다. 그는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정권의 비호 아래 조선대학교를 사유화하고 세 차례 총장직을 차지하면서 30여년간 전횡을 일삼다가 1987년에야 물러났다.

 

따라서 조선대학교는 설립운동과 개교까지는 민립대학이었으나, 개교 후에는 박철웅의 사립대학으로 변질되었고, 그 후유증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박철웅이 자행한 비리로 인해 오늘날 조선대학교의 교육의 질은 초기 민중의 교육열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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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동 선생님의 별명은 무궁화 화가이다. 조선대 미대 1회 졸업생이고, 허백련 선생과 오지호 선생으로부터 한국화와 서양화를 사사, 지금까지 연 1-2회의 전시회를 꾸준히 열어, 통산 40여회의 개인전을 여신 분이니 화가라는 타이틀은 당연하다. 또 동,서양화를 넘나들면서 무궁화 소재의 작품을 꾸준히 제작하셨으니 무궁화의 화가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 이번 인터뷰에서는 그가 연극인으로도 활동했었던 뜻밖의 경력이 드러났다. 이학동 선생님과의 첫 인터뷰에서 필자는 그의 출생 및 가족 배경과 학력과 경력을 되도록 자세히 알아내려고 했다. 그중에서도 그분의 배경이나 경력 중에서 <나주극장>과 관련된 사항이 있는지 찾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의 연극인으로서의 경력이 새롭게 드러났고, 그의 작품이 <나주극장>에서 상연된 사실이 발견됐다. 이 작품의 제목은 <남매>였고, <나주극장>에서 약 한달 가량 장기 상연됐다고 했다.

 

 

그동안 언론이나 학계는 이학동 선생님의 연극인경력에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주 언론과 전남의 언론, 나아가 전국지들이 무궁화 화가에 대한 기사를 많이 보도했지만, 그를 연극인으로 소개한 기사는 없었다. 유일한 예외는 201513일자 나주 신문 <빛가람타임스>의 기사였다.

 

천년고도 목사고을 예향 나주에서 예술을 논하는 자리가 마련되면 어김없이 9순의 팔방미인 청운 이학동(李學童 91) 화백(畵伯)이 거론되곤 한다. 그는 나주를 대표할 수 있는 화단의 거목으로 동서양의 미술세계를 오가는 화가이자 연극인이며 연주자로서도 결코 프로에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 기사도 이학동 선생을 화가이자 연극인이며 연주자라고 소개하면서도 그가 연극인으로 활동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이 없었다. 다시 말해 이학동 선생의 화가이자 연주자로서의 활동상은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했지만, 그가 왜 연극인이기도 한 것인지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날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이학동 선생님은 내가 각본을 쓰고 연출했던 <남매>라는 연극이 <나주극장>에서 한 달 동안 상연되었다고 증언하셨다. 자신의 연극 경력에 대해 최초로 구체적인 사실을 밝히신 것이다. 이 작품이 <나주극장>에서 초연되었을 뿐 아니라, 한 달 동안이나 장기상연 되었다고 하니 필자로서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이학동 선생님은 이 연극 상연을 위해 각본과 연출뿐 아니라 무대 장치를 직접 제작했고, 배우가 모자라서 자신이 직접 일부 배역을 담당해 출연하기도 했다고 하셨다. 이같은 사실이 밝혀진 것은 언론 보도 영역에서라면 이른바 단독혹은 특종이라고 불릴 만한 내용이다.

 

그러나 필자는 <남매>의 상연 시기와 배역, 출연진과 스탭진, 이 작품이 <나주극장>에서 상연된 사정과 경과가 어떠했는지 자세히 묻지 못했다. 인터뷰가 이미 1시간 가까이 길어졌기 때문에 이학동 선생님께서 피곤해 하셨기 때문이다. 다만, <남매>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라고 하셨던 것으로 미루어, 아마도 1950년대 중,후반이나 1960년대 초의 작품이었을 것으로 짐작했을 뿐, 더 구체적인 사항은 후속 인터뷰로 미루기로 했다.

 

 

이학동 선생님은 또 자신의 연극인 경력이 조선대 미술대학 재학 시기에 시작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자신은 조대 연극부의 창단 멤버였고, 당시 여러 학생들과 협력해 정기 공연을 시작했으며, 자신은 미대 학생으로서의 특기를 살려서 무대장치를 도맡아 제작했다고도 하셨다.

 

또 여수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던 동안에는 학생들을 조직해 <교우>라는 제목의 연극을 상연한 적이 있다고도 하셨다. 이학동 선생님의 답변을 종합하면서, 필자는 그의 연극인 경력에 호기심이 급중했다. 그래서 당시의 전국 및 전남 지역의 연극계 상황을 미리 공부하면서 이학동 선생님의 2차 인터뷰를 준비하기로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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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동 선생님 인터뷰는 나주시청 문화예술과의 주선으로 이뤄졌다. 윤지향 팀장이 손수 나서서 도움을 제공한 것은 현재 진행 중인 <나주극장> 문화재생사업에도 도움이 되기를 바랬기 때문일 것이다. 지역극장 조사는 내 <최승희의 삶과 춤> 조사연구의 일부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학동 선생님께 <나주극장>에 관한 질문을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학동 선생님도 <나주극장>에 몰래 들어가다가 덜미 잡히곤 했던 이야기를 가장 먼저 꺼내셨다. 극장주 성방명 선생은 보고 싶은 게 있으면 그냥 와서 얘기하라고 하셨다고 한다. 성방명 선생의 부인과 이학동 선생님의 자당께서 가까우셨기에 베풀어진 호의였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같은 <도둑 극장>형 에피소드는 사실 매우 보편적이어서 진부할 정도다. 내용도 다들 비슷하다. “몰래 영화/쇼를 보려고 극장의 뒷담/개구멍/화장실/창문 등으로 들어가다가 붙잡혀 매를 맞거나, 손들고 무릎을 꿇거나, 부모님한테 알려져서 야단맞은 이야기. 조사연구서에서 인터넷 블로그의 포스팅까지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식상할 정도로 많다.

 

 

그에 못지않게 많은 극장의 추억이 <횡령 극장>형이다. 심부름 돈으로 영화를 보고 나중에 야단을 맞는 것이 골자다. 영화 <씨네마 천국(Cinema Paradisso)>에서 페페는 엄마한테 받은 심부름 돈으로 영화를 보고, 극장으로 쫓아온 엄마한테 귀를 잡혀 끌려간다. 5리라 지폐는 길에서 잃어버렸다고 거짓말을 해 보지만, 그런 거짓말을 꿰뚫어보지 못할 엄마는 없다. 알프레도의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모면한 페페의 영화사랑은 더욱 열렬해졌고, 그는 극장의 영사기사를 거쳐 마침내 영화감독이 된다.

 

세 번째 유형의 극장 추억은 <극장 푸념>형이다. 극장을 너무 뻔질나게 드나들다가 집안일이나 공부를 게을리 했거나, 혹은 무언가 사고를 쳐서,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는 이야기들이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정병호 선생의 최승희 평전 서문에서도 읽었고, 벌교의 염색 장인 한광석 선생님한테서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극장 푸념>형 에피소드의 결말로 등장하는 이 모양 이 꼴은 대체로 문화예술계를 가리키는 게 보통이다. 한국 교육의 특징인 추상적 암기식 공부가 재미있을 리 없는 청소년 시기에, 시청각 포함 오감을 자극하는 연극과 노래와 춤, 그리고 종합예술로서의 영화에 흠씬 빠지게 되는 것 자체가 많은 청소년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함정이다.

 

 

그래서 정병호 선생님은 무용가를 거쳐 무용학자가 되셨고, 한광석 선생님도 편집과 염색의 장인이 되셨고, 이학동 선생님도 화가가 되신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극장은 청소년들의 앞날을 예술가와 비예술가로 구분하는 리트머스 시험지 역할을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학동 선생님에게는 어린 시절의 짙은 추억이겠지만 듣는 이들에게는 진부할 수밖에 없는 <도둑 극장> 에피소드에 궁금한 점이 있다. 도대체 <나주극장>의 어디에 개구멍이 있었을까?

 

나는 오늘날 나주로 129번지소재 옛 <나주극장> 건물을 여러 차례 답사했고 사진도 많이 찍었다. 맞은편 5층 건물에 올라가서 극장의 지붕 사진까지도 찍었고, 그 사진들을 꼼꼼히 살폈다. 이 건물의 전면은 크게 개축되었지만, 그 기본구조는 변함이 없었다. 나주로 쪽에서 바라본 건물의 양쪽 끝에 출입구가 마련된 외에는 다른 입구가 없어 보였다. 몰래 관람실로 들어갈 수 있는 담장이나 창문이나 화장실이 어디에 있었을까? 다음 번 인터뷰 때에는 그 점을 꼭 질문 드려보기로 했다. 이야기가 진부함을 벗으려면 디테일을 첨가해야 하는 법이다.

 

 

또 그렇게 개구멍을 드나들면서 이학동 선생님이 보셨던 영화나 연극, 혹은 쇼가 어떤 것이었는지도 궁금하다. 물론 그것이 어떤 영화나 쇼였는지가 그리 중요하지 않았을 수는 있다. 볼거리가 드물었던 시절이니, <도둑 극장> 자체가 청소년들에게 흥미진진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인터뷰의 목적이 <나주극장>인 만큼, 이학동 선생님이 경험했던 <도둑 극장>은 어떤 것이었는지 더 구체적으로 더 알아낼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학동 선생님의 기억을 조금 더 자세히 자극해 수집해 드릴 필요가 있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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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손은 나주에서 이연년의 반란을 진압한 후 추밀원 지주사(樞密院知奏事)로 임명됐다. 그러나 그의 공과 승진을 시기하는 사람이 많아서 자주 모함을 받았다. 어떤 자가 최이(崔怡)에게 김경손 부자가 상공(相公)을 해하려 하며 반역을 음모하고 있다라고 참소했다가, 최이가 조사 끝에 근거 없는 모함임을 밝혀내고 참소한 자를 강물에 던져 죽였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의 추밀원은 국사책에 흔히 왕명출납,’ ‘궁중 숙위와 군기를 담당한 기관으로 설명된다. 아직도 이런 한자어로 한국사를 가르친다면 문제라고 생각한다. 요즘말로 하면 대통령의 의사결정을 돕는 비서실과 경호를 맡은 경호실, 그리고 수도를 지키는 수도방위사령부를 겸한 곳이다. 즉 추밀원은 권력과 무력이 집중된 통치기구였던 것이다.

 

김경손의 추밀원 첫 관직인 지주사(知奏事)는 정3품의 고위 관직이었다. 그의 직전 관직은 전라도 지휘사로, 도지휘사의 지시를 받는 하급 관직이었다. 지방으로 파견되었던 하급 무관이 내관직의 지주사로 임명됐으므로 크게 승진한 것이었다. 지주사 아래로는 좌,우승선과 부승선, 당후관이 있었고, 위로는 직학사와 부사와 원사, 그리고 추밀원의 수장 판원사가 있었다.

 

 

그의 초고속 승진을 시기한 누군가가 상공(相公)에게 반역을 꾀한다고 참소했는데, 상공이란 최이(崔怡)를 가리킨다. 최이는 최우(崔瑀, 1166-1249)가 집권한 이후 개명한 이름이다.

 

1170년 정중부(鄭仲夫, 1106-1179)가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뒤, 피바람과 함께 이의방(李義方, 1121-1175), 경대승(慶大升, 1154-1183), 이의민(李義旼, ?-1196)으로 무신 권력이 이어지던 중, 1196년 최충헌(崔忠獻, 1149-1219)은 이의민을 죽이고 권력을 차지했다. 최충헌은 1219년까지 23년동안 실권을 행사했고, 아들 최우에게 권력을 물려주었다. 최우는 1249년까지 30년동안 고려를 통치해, 최충헌-최우 부자는 반세기 넘도록 고려왕조를 좌우했다.

 

김경손은 아버지 김태서(金台瑞, ?-1257)의 장남, 즉 김경손의 큰 형 김약선(金若先)이 최이의 사위였고 고려 원종의 후비 순경태후 김씨가 그의 딸이기 때문에 왕실과 정방에서 모두 위세를 떨쳤다. 김경손이 모함을 받았을 때에도 최고권력자 최이는 자신을 죽이려했다는 심각한 모함에도 불구하고 자세한 조사를 통해 김경손의 무죄를 밝혀주는 성의를 보였다.

 

 

최이(=최우) 집권 시기 김경손은 부친과 큰형의 후광으로 주변의 질시와 모함을 이겨낼 수 있었지만, 1249년 최이의 서자 최항(崔沆, 1209-1257)이 집권하자 사정이 바뀌었다. 서출이자 천출이라는 핸디캡으로 불안감과 시기심이 짙었던 최항은 근거 없는 무고에도 제대로 된 조사도 없이 피모함자를 살해하거나 유배 보냈다. 아버지 최이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이 무렵 김경손은 추밀원 부사(副使)로 승진해 있었으나, 집권 직후부터 김경손의 인망을 꺼린 최항은 그를 백령도(白翎島)로 귀양 보냈다. 그뿐 아니라 1250년에는 추밀원부사 주숙(周肅)을 살해하고, 1251년에는 자신의 계모 대씨(大氏)를 독살했다. 실권을 강화하기 위한 숙청작업이었다. 후환이 두려웠던 최항은 독살당한 대씨와 연관된 모든 사람들을 살해했는데, 여기에는 대씨의 전 남편의 아들인 오승적(吳承績)도 포함되었다. 오승적은 강물에 던져져 익사했다.

 

최항은 김경손도 오승적과 인척 관계라 하여 그가 귀양 간 곳으로 사람을 보내 김경손에게 독주를 먹인 후 바닷물에 던져 죽였다. <고려사>에서는 김경손은 여러 번 큰 공을 세웠으며 조정이나 민간에서 모두 그를 믿고 소중히 여겼는데 갑자기 간적(姦賊)에게 살해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애통하게 여겼다고 기록했다.

 

 

실제로 김경손은 외적을 막고 내란을 진압하는 등 탁월한 공을 세운 고려 충신이다. 특히 김경손 장군이 정주성에서 12명의 병력으로 몽골군을 격퇴한 것은, 12척의 함선으로 왜수군을 격멸한 이순신 장군의 업적에 비겨질 만하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김경손 장군의 인지도가 높지 않고 추앙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은 그의 친일파 후손과 공산주의자 후손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지독한 친일부역자 김동인-김동원 형제와 북한의 백두혈통이라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이 김경손 장군의 직계 후손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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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동 선생님을 인터뷰하던 중 생가가 북성터에 있었다는 답변 때문에 나주성곽과 성문에 대해 후속 조사를 하던 중, 김경손 장군이 전라도 지휘사 시절에 나주성을 근거로 이연년(李延年) 형제의 반란을 진압했다는 기록을 읽었다.

 

이는 필자가 전혀 몰랐던 사실(史實)이었으므로 호기심에 <고려사(103)> 열전16권에 실린 김경손의 기록을 찾아 읽었다. 특히 김경손 장군이 이연년 형제의 반란을 토벌하기 위해 나주 성문을 나서는 장면을 서술하면서 사용된 현문(懸門)’이라는 표현에 관심이 집중됐다.

 

김경손의 원래 이름은 김운래(雲來), 평장사 김태서(金台瑞)의 아들이다. 문음(門蔭, 음서제도)으로 벼슬하다가 고종18(1231) 정주(靜州) 분도장군으로 임명됐다. 몽골군이 압록강을 건너 철주(鐵州)를 함락하고 정주까지 침입하자 김경손은 12명의 병력으로 몽골병을 물리쳤다.

 

 

재차 대군이 몰려오자 귀주(龜州)로 퇴각, 귀주성 남문을 수비하던 중 적장을 활로 쓰러뜨리고 적군을 물리쳤다. 이어 귀주성 수비 책임자로 20여 일간의 전투 끝에 몽골군을 격퇴했다. 이 공으로 대장군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승진, 고종24(1237) 전라도 지휘사로 임명됐다.

 

나주에 부임한 김경손은 백제부흥을 목표로 원율(原栗=담양)에서 봉기한 이연년 형제의 난을 진압했다. 이연년 형제가 해양(海陽=광주)을 함락하고 나주성을 포위하자, 김경손은 별초(別抄=특공대) 30명을 선발, “너희 고을은 어향(御鄕=왕의 고향)이므로 적에게 항복해서는 안 된다고 독전하고, 금성산신에게 제사한 후 출정했다. 이 부분의 원문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성문을 열고 나가는데 현문(懸門)을 속히 내리지 않으므로 수문장을 불러 죽이려 하니 곧 현문(懸門)을 내렸다. 이때 이연년이 그의 부하들을 경계하여 지휘사는 귀주 싸움에서 성공한 대장이다. 인망이 높은 사람이니 내가 이 사람을 생포하여 도통(都統)으로 삼을 작정인즉 활을 쏘지 말라고 하고 ... 단병 접전으로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이연년은 자기의 용맹을 믿고 곧바로 앞으로 내달아 김경손의 말고삐를 잡아끌고 생포하려 했다. 김경손이 검을 뽑아 들고 싸움을 독려하니 별초들이 몸을 생각지 않고 싸워서 이연년을 죽이고 높아진 기세를 내몰아 적들을 패멸시켰다. 되었다. 그래서 그 지방이 다시 평정되었다.”

 

 

이 기록에서 당시의 나주성이 현문식 성문을 가진 석축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문이란 바닥에서가 아니라 성체(成體=성벽)의 일정한 높이에서 만들어진 문이다. 출입을 위해서는 사다리 형식의 내리는() ()’을 사용하는 구조였다. 이는 사다리를 내리고 올려야 하는 출입의 불편을 감수하는 대신 적군의 침입으로부터 성문 수비를 강화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현문 구조는 5-6세기 신라시기부터 산성을 중심으로 널리 사용됐고, 남북조 시대를 통해 한반도에 광범위하게 분포했을 뿐 아니라, 그 형식을 발전시켜 고려시대에도 사용되었다.

 

이상한 점은 국립문화재연구원의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이 김경손 장군 시기의 나주성이 토축(土築), 즉 흙으로 지은 토성(土城)이었다고 서술한 점이다. 이 자료는 나주성이 석축으로 재건된 것이 조선 태종4(1404) 10월이거나, 문종1(1451) 8월이었고, 그 완성은 김계희(金係熙)의 나주목사 재임(14578-145911월 사이) 시기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현문이 설치된 성벽은 대부분 석축(石築)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 13세기 김경손이 이연년 형제의 반란을 진압할 시기의 나주성은 석축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 시대에 들어 나주성을 석축성으로 개축 또는 증축했던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것이 신축이었다고 보기 어려운 대목이다.

 

13세기 김경손 장군 시기의 나주성이 석축성이었다는 필자의 주장은 아직 추정이지만, 15세기 중반에 나주목사 김계희가 증축한 나주성은 옹성을 부가한 홍예식 성문 구조였다. 이후 나주성은 임진왜란 직후를 비롯해 2차례 개축되면서 대한제국 시기에도 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세기 초 일제에 의해 성벽과 성문이 대부분 철거된 후, 그 헐린 북문에 이학동 선생님의 생가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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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동 선생님께서 첫 인터뷰에서 자신의 생가가 북문터에 있었다고 답변하신 것을 계기로 당시 나주성과 북문터가 어떤 상태였는지 궁금했다. 일제강점기 나주 사진이나 지도를 찾아내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1913년의 <지적원도>를 기준으로 삼기로 했다. 이 지도는 일제 조선총독부가 토지조사사업(1910-1918)을 시행한 결과로 작성된 것으로 <토지조사부>와 함께 20세기 초 한국의 토지소유 및 사용 현황을 그나마 제대로 보여주는 자료이다.

 

한 가지 미리 지적할 것은 전남지역, 특히 나주지역의 지적원도가 매우 이른 시기에 작성되었다는 점이다. 경성 중앙부인 광화문통의 측량이 191210월부터 1127일까지 끝났고, 1912년에 지적원도가 제작되었다. 1914315일부터 추가측량이 이뤄졌다는 기록이 부기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는 이미 완성된 지적원도를 부분적으로 수정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전남 나주군 나주면의 측량이 1913224일부터 38일까지였고, 지적원도가 완성된 것도 바로 그해(1913)였다. 경성 중심부와 나주면의 측량 시기 차이가 불과 4개월에 불과하다. 나주면의 측량은 당시 조선 제2의 도시였던 평양(191351-531)보다 약 3개월이나 빨랐고, 제주도(1914)나 강원도(916)에 비해서는 훨씬 빨랐다. 아마도 호남의 곡창지대에 위치한 나주의 토지 측량에 우선순위를 두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913년 발행의 나주군 나주면(지금의 나주시 읍성권)의 지적원도에서도 나주성 4대문의 위치를 식별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이 지도에는 토지 구획과 함께 용도 및 번지수만 기재되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문터를 짐작할 방법은 있었다. 지적원도에서 (1) 성벽()(2) 주요도로()가 만나는 지점에 (3) 국유지()로 표시된 주소지를 찾으면 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지적원도에 나타난 나주면 남문정 59-2번지는 성벽에 접해있고, 간선도로에 면해 있는 택지()로 표시되어 있는데 괄호 안에 국유지()라고 되어 있다. 이를 오늘날의 지도와 비교해 보면 남고문(南顧門)의 위치와 일치한다. 즉 오늘날 남고문의 주소 나주시 남내동 2-20번지는 일제강점기의 나주면 남문정 59-2번지였던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오늘날 나주성의 동문인 동점문(東漸門)의 주소인 나주시 중앙동 126-8번지1913년 지적원도에서는 나주면 북문정 130번지였으며, 이 지점이 앞서 말한 세 조건, 성벽과 간선도로가 교차하는 국유지였다. 또 오늘날 나주성의 북문인 북망문(北望門)은 오늘날 주소가 나주시 금남동 1번지이지만, 1913년의 지적원도 상의 주소는 나주면 북문정 30번지였고, 바로 이곳이 성벽과 간선도로가 만나는 국유지인 택지였다.

 

그러나 나주성의 서문인 영금문(映錦門)은 위의 규칙에서 약간 벗어나 있었다. 영금문의 오늘날의 주소는 나주시 서내동 108-2번지이다. 하지만 1913년의 지적원도에는 성벽과 간선도로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국유지 택지가 없었다. , 이 지역에 몰려있는 나주시 서문정 77, 78, 79번지와 105, 106번지와 107번지등의 6개 주소지가 성과 간선도로가 만나는 주소들이었는데, 이중 어느 것도 국유지가 아니었다.

 

 

서문 인근의 국유지인 택지는 그보다 다소 동쪽으로 떨어진 나주시 서문정 103번지였다. 그러나 103번지가 성문이 있던 곳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성문은 원래 성벽과 도로가 만나는 곳에 소재해야 제 기능을 발휘하는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서문이 가장 이른 시기에 헐린 후 일찌감치 개인들에 의해 주택지로 점유, 또는 사유화되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한편 나주성의 북문터로 파악된 북문정 30번지는 이학동 선생님의 생가 주소임이 거의 확실하다. 왜냐하면 이 주소를 제외하면 인근의 다른 주소들은 모두 논이나 밭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북문정의 길 건너편의 박정리 1-7번지주택들이 이학동 선생님의 생가였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다만 이 주거지들은 국유택지가 아니었는데, 어쩌면 나주성의 서문과 비슷하게 일찌감치 철거된 성문터를 주민들이 점유 혹은 사유한 상태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좀 더 구체적인 지도 및 주소 자료가 필요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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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중에 나는 이학동 선생님께 출생지를 여쭈어 보았다. 그분의 출생지에 대한 궁금증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인터뷰의 모든 질문은 육하(六何)를 파악하는 데에 집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중 언제어디서는 사건의 배경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며, 그런 배경에서 누가무엇을의 좌표가 찍힐 수 있기 때문이다.

 

출생지를 묻는 질문에 이학동 선생님은 북문터라고 답변하셨다. 이 대답에 나는 의아했다. 북문은 지금의 북망문(北望門)을 가리킬 터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북망문은 국유지였을 것이다. 생가가 북문에 있었다니 이학동 선생님은 어떻게 국유지에서 태어나셨던 것일까?

 

추가 조사를 통해서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알 수 있었다. 이학동 선생님의 출생 당시인 1923년경 나주성곽의 북문은 헐리고 없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북문이 헐린 자리에는 주택들이 들어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중 한 집이 이학동 선생의 생가였을 것이다.

 

 

일제강점 하에서 나주 성곽과 성문들은 모두 철거되었다. 특히 성문들은 도로망 건설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모두 헐렸거나 제 모습을 유지하지 못했다. 1913723일자 <매일신보(2)>는 나주읍민들이 간신히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남문을 허물지 말고 이를 개수하여 보수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제목) 나주남문(羅州南門) 보존희망(保存希望), (본문) 나주는 구일(舊日) 전남의 수도(首都)되었던 역사가 유()하여 성문 누각이 구시(舊時)의 성황(盛況)을 상기할 자가 불소(不少)한 바 현금에는 불편한 성벽은 태반(太半) 철거되고 광주가도에 과재(跨在)한 동대문은 왕년에 자연 후폐(朽廢)되어 일야풍우에 전부 도괴(倒壞)하고 지금은 기영(基影)을 지()할 뿐이오, 금우(今又) 시중에서 나주 정거장에 통하는 대도(大道)의 성벽을 실()하여 고성낙일(孤城落日)의 자(姿)를 정()하여 아직 도괴(倒壞)의 액()을 면하였으나 일조풍우(一朝風雨)에 제회(際會)할 시()는 자연 동문의 예를 불면(不免)하리라는 우려가 유()한데, 기보존법(基保存法)을 강구(講究)하여 고적(古蹟) 보존하기로 나주의 일반 인민이 희망한다더라.”

 

이 기사에는 나주의 북문(北門)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그러나 나주의 동문은 이미 무너져 있고, 남문조차 그 파괴된 상황이 심각하다고 서술한 것으로 보아, 서문과 북문은 1913년경 이미 그 유적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상태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원의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에 따르면 나주성에 대한 최초의 문헌기록은 <고려사(高麗史, 103)> 열전(16) ‘김경손(金慶孫)이다. 이연년의 난을 토벌할 때 나주에는 문루와 현문 형식의 성문을 갖춘 토축의 읍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태종실록(太宗實錄)> 410월의 기사는 전라도에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성나주급보성(城羅州及寶城)’을 축성했다고 기록했다. 이후 문종 1(1451) 8월 병술조에도 나주읍성의 개축작업이 필요하다는 서술이 있고, 이 공사는 나주목사 김계희(金係熙, 재임, 14578-145911)이 완성했다.

 

이렇게 토성으로 축성되고 석축성으로 개축과 증축을 거듭한 나주성벽과 성문들은 일제강점기에 모두 헐렸다. 왜구를 막으려고 축성된 나주성이 결국 일제에 의해 철거되고 만 것이다.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인 1920년경에 남고문을 마지막으로 읍성 및 4대문이 철거되고, 대부분의 읍성터는 대지나 밭, 그 밖의 지목으로 등록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위에 인용한 <매일신보(2)>의 기사에 따르면 그보다 7년 전인 1913년에 나주성의 동,,북문은 이미 일제에 의해 철거되고 남문만 남았다. 따라서 북문은 일제가 국권을 침탈한 19108월과 남문만 남았다고 보도된 19137월 사이에 헐렸던 것으로 추론된다.

 

성문과 성벽이 철거된 후에 그 터가 대지로 등록되었다는 것은 주민들이 거기에 집을 짓고 살았다는 뜻인데, 이학동 선생의 생가가 바로 그 북문이 헐린 터, 혹은 그 일부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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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백년을 살면서 같은 일을 한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자연에서야 거의 모든 게 그렇지만 인간에는 그런 게 거의 없기 때문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지만 강과 산 그 자체가 변한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이 손을 댄 것은 무엇이나 10년 정도의 세월로 변하게 마련이다. 요즘 문화적 세대 단위가 30년에서 10년으로 줄어든 것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런데 강산이 10번쯤 바뀌는 동안에도 한결같이 그림을 그려온 분이 나주에 계신다. 청운(靑雲) 이학동(李學童, 1924-) 선생님이다. 해방 직후부터 서양화와 한국화를 넘나들며 작품 활동을 해 오신 분이다. ‘까치를 잘 그리는 화가로 충남 연기 출신의 장욱진(1917-1990) 선생이 있지만, ‘무궁화를 잘 그리는 화가이학동 선생님은 전남 나주 출생이다.

 

 

84일 오후3시경 이학동 선생님을 인터뷰했다. 나주 과원동 16-1번지(영산로 6366번지) 소재 <청운 아틀리에>, 이학동 선생님의 화실에서였다. 인터뷰는 나주 시청 문화예술과의 윤지향 팀장이 마련했고 나주극장 문화재생 프로젝트 담당자 3사람이 동석했다. 또 인터뷰 후에 봉황면 욱실마을 숙소로 돌아갈 차편을 제공하기로 하신 김순희 선생도 참석했다.

 

인사를 나누고 소파에 앉으신 이학동 선생님은 허리가 굽으셨기 때문에 맞은편에 앉은 나를 올려다보셔야 했다. 그래서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나는 티테이블 아래로 내려가 바닥에 앉았는데, 그렇게 해서 이학동 선생님과 자연스레 시선을 맞출 수 있었다. 소파와 테이블 사이가 너무 좁아서 가슴에 압박이 약간 느껴지긴 했지만, 인터뷰를 시작하자 금방 이학동 선생님과의 대화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날 인터뷰의 주제는 <나주극장>이기는 했으나 그에 앞서 선생님의 기초 인적 사항과 교우 범위에 대한 질문을 먼저 드렸다. 이학동 선생님은 자신이 1924년생이라고 하셨고, 태어나신 곳은 나주 북문터라고 하셨다.

 

 

증언을 확인하기 위해 추가 조사를 해보니, 이학동 선생님의 실제 생년은 1924년이 아니라 1923년이었다. 당시에는 영아 출생 후 1-2년을 기다렸다가 출생 신고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영아 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에 생존이 확실해 진 다음에야 호적에 등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로써 이학동 선생님의 올해 연세를 백세라고 하는 이유도 분명해졌다. 1923년생이시라면 올해 세는 나이로 1백세가 되신 것이 맞다.

 

이학동 선생님의 공식 생년이 1924년이어서 손해 보신 일이 있었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일제는 만20세가 된 갑자년(1924)생의 조선 청년들을 심각한 신체적 결함만 없으면 무조건 징병대상으로 삼았다. 이것이 묻지 마라 갑자생이라는 말이 생긴 이유였다.

 

국가기록원의 <강제동원자명부>에 이학동 선생님에 대한 기록이 남았는지 조사해 보았다. 일제는 중국침략과 함께 1938<국가총동원법>을 제정,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조선인을 강제 동원했다. 2004<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특별법> 제정을 위한 국회청원자료에 의하면, 7,879,708(국내 6,126,180, 국외 1,390,063, 군인·군속 363,465)의 조선인이 강제 동원되었다.

 

 

조선인들은 어떤 역할로 강제 동원되었는지에 따라 노무동원(노동자, 군속, 근로보국대, 근로정신대 등), 병력동원(군인), 성동원(일본군위안부’, 10만 명 이상 동원)으로 구분되었는데, 이학동 선생님은 병력동원의 경우로 분류될 수 있다.

국가기록원의 <강제동원자명부>에는 14명의 이학동씨 이름이 등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1924년생 나주 출신의 이학동 선생님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이 <강제동원자명부> 작성에 사용되었던 <일정(日政)시 피징용자명부(전남 지역편, 57, 143, 229)>에는 3명의 이학동씨가 등재되어 있다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청운 이학동 선생님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기록의 원본에는 본적이나 주소가 없더라도 이름은 한자로 씌였을 것이므로 이학동 선생님의 기록인지의 여부를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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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중 선생 인터뷰를 계기로, 정병호 선생이 관람했던 최승희 공연이 언제(19414월 혹은 19422), 어디서(경성 또는 광주) 열렸던 것이었는지, 최승희 선생의 1940년대 공연들을 중심으로 추론해 가는 중이다.

 

(정병호 선생이 최승희 공연을 처음 보았던 것이 중학 시절이라고 했으므로, 정병호 선생이 재학했던 중학교가 어느 중학교였는지 알아낸다면 추론의 범위는 훨씬 좁혀질 테지만, 아직 그 점을 조사해 내지는 못했다. 정병호 선생이 경성에서 중학교를 다녔다면 그가 보았던 최승희 공연은 19414월의 경성공연이나 1942년의 경성공연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만일 그의 중학교가 광주에 있었던 것이라면 19414월말이나 19422월말의 광주공연이었을 것이다.

 

정병호 선생의 중학교를 알아내면 훨씬 간단할 수 있을 추론을 이처럼 복잡하게 진전시키는 데에는 개인적인 이유가 있다. 그동안 최승희 선생의 공연활동을 조사해 오면서 가장 취약했던 것이 1940년대의 공연들이었다. 따라서 박경중 선생이 언급하신 정병호 선생의 공연관람 에피소드를 계기로 아예 1940년대의 공연 전체, 특히 1941-1942년의 일본과 경성의 공연활동을 조사해 보는 것이 최승희 연구 전체를 위해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공연의 레퍼토리를 중심으로 정병호 선생이 관람한 최승희 무용공연을 추론해 보기로 하자. 정병호 선생은 자신이 처음 관람한 최승희 공연에서 <에헤야 노아라><초립동><보살춤>을 관람했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보살춤>은 어린 중학생의 눈에도 선정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작품으로 보였다고 했다. 그 때문에 공연 관람 후에는 최승희 공연 때마다 판매되었던 최승희 무용사진 브로마이드를 사가지고 돌아왔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병호 선생이 보았던 공연의 레퍼토리에 대한 서술을 조사하면서 한 가지 난점이 떠올랐다. 그것은 1941-1942년의 공연에서 <초립동><보살춤>은 레퍼토리의 일부였음이 확인되었지만, <에헤야 노아라>가 공연된 사실은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19412월의 도쿄공연(귀조 제1회 공연)과 그 이후의 후속공연들의 레퍼토리는 모두 13작품으로 그중 전통작품이 2, 동양작품이 3, 조선작품이 8개였다. 이 레퍼토리는 4월초의 경성공연과 4월말의 광주공연에서도 거의 그대로 발표되었을 것이다.

 

1(1) 두 개의 속무(조선), (2) 검무(전통), (3) 옥적조(조선), (4) 화랑무(조선), (5) 신노심불로(조선), (6) 보현보살(동양), (7) 두 개의 전통적 리듬(전통), 2(1) 긴 소매의 형식(조선), (2) 꼬마신랑(조선), (3) 관음보살(동양), (4) 가면무(조선), (5) 동양적 선율(동양), (6) 즉흥무(조선).”

 

 

한편 194111월의 도쿄공연(이른바 귀조 제2회 공연)과 그 이후의 후속 지방공연들의 레퍼토리는 모두 12작품이었고, 그중 일본무용이 6, 국적을 밝히지 않은 조선무용이 5, 중국무용이 1개였다. 이 레퍼토리를 공연순서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신전의 춤 (일본), 2. 화랑의 춤 (조선), 3. 옥피리의 곡 (일본), 4. 천하대장군 (일본), 5. 칠석의 밤(일본), 6. 즉흥무(고곡), 7. 무혼(일본), 8. 보살도(가무보살과 보현보살, 일본), 9. 초립동(조선), 11. 당궁의 무희(중국), 10. 옥중춘향(조선), 12. 세 가지 전통 리듬(조선).

 

 

두 레퍼토리에 모두 <초립동><보살춤>이 들어있으므로 정병호 선생이 관람했던 공연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에헤야 노아라>는 두 작품 모두에 들어 있지 않다. 사실 <에헤야 노아라>는 최승희 조선무용의 데뷔작이자 최고인기를 끌었던 작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과 미주 순회공연의 레퍼토리에는 그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만일 <에헤야 노아라>라는 제목이 변경되었다면, 그 작품은 <신노심불로>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최승희의 유럽순회공연 취재기에서도 어느 정도 밝혔지만, <신노심불로><에헤야 노아라>에 스토리를 강화한 작품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두 제목의 작품이 모두 노년의 조선인 남성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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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호 선생(1995: 201)은 최승희의 공연 내용이 바뀐 것은 일제의 직접적인 개입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안제승의 증언을 바탕으로 최승희 선생이 가부키좌 공연이 끝나고 경시청에 불려갔앞으로 공연할 때는 일본의 춤을 늘려서 조선춤과 일본춤을 반반 구성하여 공연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공연을 허가하지 않겠다는 경고도 받았다고 서술했다.

 

레퍼토리에 일본무용 작품을 반반 구성하라는 식의 지시가 있었는지는 다른 자료로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그런 지시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면 최승희 선생는 그 지시를 액면 그대로 지켰음을 알 수 있다. 그해 11월에 있었던 도쿄 다카라즈카극장 공연의 팜플렛을 보면 공연된 12작품 중의 6작품(신전무, 칠석의 밤, 무혼, 천하대장군, 가무보살, 보현보살)이 일본무용으로 소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중 신전무와 무혼은 이 공연을 위해 일본무용으로 새로 창작한 것으로 보이고, 칠석의 밤과 가무보살도 이 시기에 창작된 작품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딱히 일본무용이라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우선 <칠석의 밤>은 견우와 직녀 전설을 작품화한 것인데, 그 전설이 일본 고유의 전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 전설의 기원은 기원전 5세기의 중국이며 한국에서도 약 4세기 고구려 시대부터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의상과 음악에 따라서 중국무용이나 조선무용도 될 수 있다.

 

또 최승희 선생은 유럽과 미주에서 절찬리에 공연했던 <보살춤>의 제목을 도쿄 다카라즈카 공연에서는 <보현보살>고 바꾸었는데, 이는 새로 창작한 <가무보살>과 짝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공연 팜플렛의 작품 해설에 따르면 <가무보살>은 지금은 일본 교토국립박물관에 소장된 불화 <이십오보살래영도(二十五菩薩來迎圖)>를 보고 떠오른 영감을 작품화한 것이라고 한다.

 

 

일본 카마쿠라(鎌倉)시기에 제작된 <25보살내영도>는 생전에 불법을 지켜 사후에 왕생자로 극락에 들어오는 사람을 스물다섯 보살이 환영하는 모습을 그린 것인데, 그림 중에는 북이나 장구와 비슷한 모양의 악기를 연주하거나 춤을 추는 보살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최승희 선생은 노래를 연주하고 춤을 추는 보살들의 모습을 상상해 무용 작품화하고 이를 <가무보살>이라고 이름 붙였다.

 

공연 팜플렛은 무용작품 <보현보살>을 헤이안(平安)시기의 불화 <보현보살>을 보고 그 인상을 작품화한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이는 아마도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된 회화 작품 <보현보살기상상(普賢菩薩騎象像)>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에서는 보현보살이 연화좌(蓮華坐)를 얹은 흰 코끼리 위에 결가부좌하여 합장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더 나아가 <천하대장군>을 일본 무용 작품으로 분류하는 것은 견강부회에 가까운 일이다. 도쿄 공연 팜플렛은 이 작품을 일본 무악의 수법에서 받는 느낌을 주로 하여 창작한 것이라고 서술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일본무용으로 분류하는 데에는 어폐가 있다.

 

 

이 작품이 초연되었을 당시에는 조선 전래의 장승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표정만 무서울 뿐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존재를 풍자하기 위한 무용작품이라고 설명되었던 것이다. 소재와 주제가 모두 조선적인 대표적인 조선무용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천하대장군>을 일본 무용으로 분류한 것은 잘못된 일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도쿄 공연 후에 열린 경성 공연에서는 <천하대장군>이 레퍼토리에서 누락되었다.

 

이처럼 최승희 선생이 신작 일본무용 작품을 창작하고, 기존의 조선무용을 일본무용인 것처럼 서술해 프로그램에 소개했던 것은, ‘조선무용과 일본무용을 반반이 되게 하라는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 짜낸 고육지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승희 선생은 이런 식의 강요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일제가 진주만을 기습공격함으로써 시작된 태평양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일제 군국주의의 요구는 점점 심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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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군국주의 하에서도 최승희 선생은 조선무용공연을 멈추지 않았고, 이를 계속 공연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국방헌금을 내고 신사참배를 할지언정, 자신의 무용만은 조선음악 반주의 조선무용 독무 공연으로 이어간 것이다. 이른바 살을 내주되 뼈는 지키는 전략인 셈이다.

 

최승희 선생의 이러한 결단과 고집은 조선에서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한동안 계속됐다. 19417월의 요코하마(橫浜) 공연에서도 그대로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1941717일자 일본의 영자신문 <재팬타임스(Japan Times)>의 보도에 따르면 요코하마 공연이 “721-22일 오후 7시 요코하마 타카라즈카 극장에서 특별 공연으로 열렸다. 이 공연의 프로그램에는 10개의 무용이 포함되었고, 그 대부분은 동양무용(Oriental Dance), 동양의 리듬(Oriental Rhythm), 그리고 초립동 무용(Dance of Grass Helm)”이 포함되어 있다고 전했다. , 최승희의 요코하마 공연 레퍼토리도 2월의 도쿄공연에서처럼 조선무용 독무작품으로 이뤄졌던 셈이다.

 

그러나 이 기사는 두 가지 면에서 이전과 달라진 면을 보였다. 첫째는 19412월의 도쿄 공연에서 발표됐던 13작품 중에서 10개 작품만이 요코하마에서 공연되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조선무용이라는 말이 동양무용이라는 말로 대체되었다는 점이다. 최승희 선생의 조선무용 작품을 동양무용동양의 리듬이라고 소개한 것은, “조선음악으로 조선무용을 공연하려는 최승희 선생의 의도와 배치되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기사는 최승희 선생을 조선인(Chosunese)’으로 소개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4개월 후 1128-30일의 도쿄 다카라즈카극장 공연은 매우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다. 발표작품 12개 중에서 6개가 일본무용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공연 팜플렛은 <신전무(神前)>일본 의식무용의 장중한 형식미를 드러낸 작품이라고 소개했고, <천하대장군>일본 무악의 수법에서 받는 느낌을 주로 하여 창작한 것이라고 했다. <칠석의 밤>일본의 가장 아름다운 전설의 하나인 견우직녀 이야기를 소재로 한 작품이며, <무혼(武魂)>일본 능악(能樂)의 무용적 수법을 도입해 ... 옛 무사의 영혼을 드러내고자 한 작품이라고 소개됐다. <보살도(菩薩圖)>라는 제목 아래 <가무보살>카마쿠라(鎌倉)시대의 그림 ‘25보살래영도가 소재이며, <보현보살>은 일본 헤이안(平安)시대의 그림 보현보살을 소재로 창작된 작품이라고 소개되었다.

 

이중 <신전무><칠석의밤><무혼>은 이 공연을 위해 새로 창작한 작품이다. 즉 명시적으로 일본적 소재를 무용화한 첫 번째 시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천하대장군>은 한국의 장승을 소재로 한 작품이었지만 도쿄 공연에서는 이를 일본 무악(舞樂)’의 수법을 바탕으로 창작한 것이라고 설명을 바꿨다.

 

또 최승희의 대표작인 <보살춤>은 동양 공통의 불교적 소재로 창작된 동양무용이었지만, 이름을 <보현보살>로 바꾸고 일본 헤이안시대의 그림을 소재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고, 이를 카마쿠라시대의 불화를 소재로 창작되었다는 <가무보살>과 짝을 이루게 했다.

 

 

 

또 명백하게 조선무용 작품인 <화랑의 춤><옥적곡>, <즉흥무><초립동>, 그리고 <옥중춘향>에 대한 설명에서는 조선무용이라는 언급이 완전히 배제되었고, <세 개의 전통리듬>은 유일하게 조선 고전무용의 세 가지 기본 리듬(염불과 타령, 굿거리)”을 소재로 한 것이라고 밝히면서도 결국 이를 동양 무용이라고 소개했다.

 

요컨대, 194111월의 도쿄 공연 작품은 일본무용이거나(신전무, 칠석의밤, 무혼) 조선무용을 일본무용(천하대장군, 보현보살, 가무보살) 혹은 동양무용(세 개의 전통리듬)으로 둔갑시킨 것이거나, 혹은 조선 국적을 배제(화랑의춤, 옥적곡, 즉흥무, 초립동, 옥중춘향)한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이는 최승희 선생이 추구하겠다고 밝혔던 것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방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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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경중 선생님 인터뷰를 계기로 (2) 정병호 선생이 관람했던 (3) 최승희 공연이 어떤 공연이었는지 살펴보다가, (4) 적어도 1941년의 4월의 최승희 경성공연은 조선음악으로 반주되는 독무 중심의 조선무용작품들이 발표되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즈음 일제 군국주의는 강경해 지기 시작했고 그 여파는 일본 열도뿐 아니라 식민지 조선반도에까지 밀어닥쳤다. 일제 군국주의는 1931년 만주침략으로부터 시작되어 1937년 중국침략과 함께 강성화되던 중 1941127일의 미국 진주만 공습 이후 극단으로 치달았다.

 

 

일제 군국주의가 극단화되면서 조선의 정치, 산업, 사회 부문은 물론 문화 분야에까지 그 영향이 미쳤다. 심지어 일제가 미국과 전쟁을 시작한 194112월부터는 다방에서 영국과 미국 등의 적국(敵國)의 노래를 틀어서는 안 된다고 금지하기 시작했다. 19411230일자 <매일신보(4)>는 이 소식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다방가에 흐르는 레코드의 멜로디에도 대동아 전쟁 체제를 갖추지 않으면 안되기로 되었다. 레코드와 차를 가지고 손님을 끄는 다방가에는 얼마 전부터 오후 다섯시가 되기 전에는 절대로 레코드를 걸어서는 안된다고 경성식당업조합으로부터 통첩을 띄워서 현재 그대로 낮 동안에는 음향 없는 다방으로 실행하여 오는 터인데,

 

"대동아 전쟁의 발발과 함께 다시 이를 강화하여 다섯시 이전에라도 총후의 사기를 돋구는 우리나라의 군가만은 걸어도 좋으나 다섯시 이후라도 영국, 미국등 적국의 레코드 및 그 나라에서 취입한 것 또는 그 나라 작곡의 것은 일체로 걸어서는 안되기로 되었다. 그리고 독일, 이태리 등 추축국가에서 취입한 것 또는 작곡한 것이라도 시국에 알맞지 않는 경조부박한 것은 또한 걸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것이라 할지라도 회상적이요 감상적인 유행가 따위는 걸어서 안되기로 되었는데 다방이나 식당, , 카페 업자는 현재 가지고 있는 레코드 중에 미심한 것이 있다면 이런 것은 어떨까 하고 한번 소관 경찰서로 가지고 가서 알아본 연후에 걸어야 한다고 동조합에서는 업자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다방의 음악까지 간섭하기 시작했으니 무대예술 공연이나 영화 상영이 검열의 대상이 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고, 이는 최승희의 무용 공연도 마찬가지였다.

 

 

최승희 선생은 경성 공연을 위해 1941327일 특급열차 아카츠키 편으로 오후 25분 경성역에 도착했는데, 그 길로 남산의 조선신궁에 참배를 해야 했고, 29일 오전에는 조선군사령부를 방문했다. 예술가가 군사령부를 방문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지만, 당시 조선의 공연 허가권을 군사령부가 갖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공연 허가를 얻기 위해 최승희는 2천원의 국방헌금을 납부해야 했다. 1941년의 일본돈 2천원은 오늘날 약 3만달러(임금 기준), 즉 약 4천만원에 해당하는 거금이다. 당시 2천석 규모의 부민관 공연이 만석일 경우, 1회 공연의 경비를 제외한 수익이 대략 2천원 내외였다. 따라서 5일동안의 공연 허가를 받기 위해 하루 공연 수익을 미리 상납해야 했던 것이다. 이 헌금이 표면상으로는 강제되지 않았는지 몰라도, 이런 기름칠을 하지 않았다면 최승희의 경성공연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지도 몰랐다.

 

 

기름칠의 효과는 컸다. 1941329일자 <조선신문(4)>에 따르면 이 2천원의 국방헌금의 댓가로 전조선 17개 도시에서의 공연 허가를 얻어낸 것이다. 42-6일 경성 공연, 46-15일 사이의 북선(北鮮)지역 5개도시(함흥, 청진, 성진, 흥남, 원산) 공연, 15-20일 사이의 신의주를 비롯한 서선(西鮮)지역 4개 도시와 인천 공연, 그리고 20-30일 사이의 부산을 비롯한 남선(南鮮)지역 6개도시의 공연 허가가 바로 그것이다.

 

결과적으로 최승희는 조선신사를 참배하고 조선군사령부를 방문해 거액의 국방헌금을 납부한 댓가로 경성을 시작으로 전조선의 17개 도시에서 조선음악을 반주로 하는 조선무용 공연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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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중 선생 인터뷰를 계기로, 정병호 선생이 관람한 최승희 공연이 어떤 공연이었는지 추정하면서, 1940년대 초의 최승희 무용작품의 성격을 살피기에 이르렀다.

 

1941년 초에 열렸던 <조광><춘추>의 좌담회에서 최승희는 조선음악으로 반주되는 독무 중심의 조선무용을 공연해 나갈 것이라면서, 그의 조선무용은 (1) 전통작품과 (2) 조선작품, 그리고 (3) 동양작품으로 구성될 것이며, 향후 동양작품의 비중을 높여가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와 유사한 작품 분류는 그보다 5년 전에 출판된 <나의 자서전(自敍傳, 1936)>에서도 제시된 바 있었다. 자서전 15장의 내 무용의 방향에 대하여(舞踊方向いて)”에서 최승희는 자신의 무용작품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사실 나는 나의 조선무용을 근대무용의 기초 위에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에헤야 노아라><승무> 등의 작품은 비교적 순수한 조선적 기법만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검무><조선풍의 듀엣> 등의 작품은 어느 정도까지는 근대 무용의 기법을 포함하고 있고, <세 개의 코리안 멜로디>에 이르면 서양식 무용 기법이 주를 이루고 단지 거기에 조선적인 색깔과 향기를 입히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이때(1935년경) 최승희 선생은 조선무용과 서양무용을 결합해 작품화하는 문제를 고민 중이었다. 그는 도쿄 유학기간(1926-1929)에 전적으로 서양의 근대무용을 익혔고, 경성 활동시기(1930-1933)에는 서양기법 위에서 조선의 현실을 주제로 한 작품을 창작했지만, 두 번째 도일 후 첫 조선무용 작품 <에헤야 노아라(1933)>이 폭발적 인기를 끌자 <검무(1934)><승무(1934)>를 잇달아 발표했다. 바로 이 즈음 최승희 선생은 서양 근대무용 기법과 조선의 전통무용 기법 사이에서 충돌을 느꼈고, 이를 어떻게든 정리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태어난 분류법이 바로 <나의 자서전>에 기록된 무용 기법상의 분류이다. 각 부류에 상응하는 용어를 만들지 않고 그냥 비교적 순수한 조선적 기법이라든가, “어느 정도 근대 무용의 기법을 활용한 작품이라든가, “서양식 무용 기법이 주를 이룬작품이라는 식으로 느슨하게 서술한 것을 보면, 이때만 해도 정교한 분류를 시도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이러한 서술에서나마 최승희 선생이 예로 든 작품들은 주제와 소재와 정조에 있어서 모두 조선무용이었던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때쯤 최승희 선생의 무용은 전적으로 조선무용으로 방향이 결정되었다는 뜻이겠다. 그리고 이시기에 최승희 선생은 이미 조선무용을 넘어 동양무용의 개념화를 시도했다. <나의 자서전>의 같은 장에서 최승희 선생은 이렇게 썼다.

 

적당한 말은 아니겠으나, ‘무용의 오리엔탈리즘을 발견하여, 그것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 보고 싶다고 항상 생각해 왔습니다. 이것이 지금 내 무용의 가장 중심적인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 내 자신의 서양 무용에서도 나는 가능한 한 동양적인 색깔과 향기를 갖도록 하고 있습니다. 또 쇼팽과 드뷔시의 곡에 의한 춤이라도 가능한 범위 안에서 동양적 기법을 도입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승희 선생이 조선무용에 머무르지 않고 무용의 오리엔탈리즘을 발견하고, ‘동양적인 색깔과 향기를추구할 뿐만 아니라 동양적 기법을 도입해보려고 노력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첫째는 조선무용의 소재와 기법이 제한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인 것 같다. 같은 글에서 그는 나의 조선무용을 보다 풍부하고 복잡한 것으로 만들어 나가고 싶그것을 국제적인 수준까지 높이려고 한다고 썼다. 뒤집어 말하면, 당시의 조선무용은 풍부하거나 복잡하지도 못하고, 국제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는, 서양무용이 발레라는 이름으로 통일되었듯이, 그에 상응하는 동양무용이 가능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동양 각국의 무용이 가진 특수성은 일시적이거나 우연적인 것이며 모든 동양무용을 관통하는 공통요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내 이 방향이 생각처럼 단순하지는 않겠훨씬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일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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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순회공연(1937-1940)에서 돌아온 최승희 선생은 경성공연(194142-6) 직전에 문예잡지 <조광>과의 좌담회(330)에 참석, “조선음악과 조선무용으로 독무 중심의 공연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유럽과 남북미공연에서 조선무용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조광> 좌담회 다음날(41) 최승희는 또 다른 잡지 <춘추>가 개최한 좌담회에도 참석했다. 두 좌담회에서 밝힌 최승희 선생의 향후 계획은 비슷했지만 <춘추> 좌담회에서는 자신의 조선무용 작품들을 3가지로 명료하게 분류한 것이 눈에 띈다. 최승희 선생의 말이다.

 

 

내 프로그람 속에는 세 가지가 있어요. 첫째, 승무같이 종래 있는 전통 것을 보고 배우고 해서 발표하는 것, 둘째는 내가 상상해서, 전설 같은 데서 힌트를 얻어가지고 창작해서 하는 것, 예를 들면 조선 생활에서 테마를 만들어서, 활량이나 초립동이, 천하대장군 같은데서 말이죠. 그런데서 힌트를 얻어서 춤으로 만들어내는 것 하고요. 셋째는 전동양적인 것, 일테면 보살이라든가 -광범위의 동양적인 것, 아세아적인 것을 무용화하자는- 이렇게 세 가지 플랜이 세워 있어요.

 

이는 세계 순회공연에서 어떤 작품을 공연했느냐는 질문에 대한 최승희의 대답이었다. 그가 분류한 세 가지 작품에 거칠게 이름을 붙이자면 (1) 전통작품과 (2) 조선작품, 그리고 (3) 동양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이 분류는 전날의 <조광> 좌담회에서도 제기한 바 있다.

 

프로그램을 세 종목으로 나누었어요. ... 첫째는 현재에도 남아 있고 제대로 해오던 향토무용, 민간무용 등을 다시 무대화시킨 것이고요, 둘째는 테-마는 조선 것인데 현재에는 무용화되지 않은 것을 제 상상력으로 이렇겠다 하고 만든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전동양적인 것, 즉 내지, 지나, 조선, 인도에 있는 얻은 인상이나 감상을 가지고 만든 것, 대개 그렇습니다.”

 

 

(1) 전통작품이란 이미 조선에 있던 작품이다. ‘종래 있던 전통 춤을 보고 배워서 다시 무대화한 것이다. ‘승무검무가 그 예이다. (2) 조선작품이란 조선 소재와 테마로 창작한 작품이다. 조선 소재란 조선의 생활이나 조선의 전설 등이라고 했다. ‘활량춤초립동,’ ‘천하대장군등을 예로 들었다. (3) 동양작품은 전동양적인 것, 즉 일본과 중국, 인도와 조선 등에서 얻은 소재에 대한 인상이나 감상을 무용화한 작품들이다. 최승희 스스로 보살춤을 예로 들었다. 이 분류법을 최승희 선생의 도쿄 가부키자 공연(1941221-25) 작품들에 적용해 보았다. 13작품 중에서 전통작품이 2, 동양작품이 3, 조선작품이 8개였다.

 

1(1) 두 개의 속무(조선), (2) 검무(전통), (3) 옥적조(조선), (4) 화랑무(조선), (5) 신노심불로(조선), (6) 보현보살(동양), (7) 두 개의 전통적 리듬(전통), 2(1) 긴 소매의 형식(조선), (2) 꼬마신랑(조선), (3) 관음보살(동양), (4) 가면무(조선), (5) 동양적 선율(동양), (6) 즉흥무(조선).”

 

유념할 것은 전통작품이라고 하더라도 최승희 선생은 이를 전해진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최승희의 승무(1934)’는 전통에 더 가깝다는 한성준의 승무(1939)’와 다르다. 한성준의 승무를 전수받았다는 그의 손녀 한영숙의 승무는 공연시간이 26분에 달하지만, 최승희의 승무는 5분을 넘지 않았다.

 

 

검무도 마찬가지였다. 이 작품의 기원은 삼국시대 신라 화랑 황창(黄昌)의 힘차고 웅장했던 춤이라고 한다. 하지만 조선시대 말기의 검무는 기생들이 연회장에서 공연하는 부드럽고 유약한작품이 되고 말았다. 최승희 선생은 기생 검무를 답습한 것이 아니라 이 작품 본래의 강함역동성을 되살렸다고 한다. 최승희의 검무가 화랑 황창의 검무와 얼마나 유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조선말 기생들의 검무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 전통작품이라 하더라도 최승희는 이를 (1) 짧은 길이(5분 이내)와 기승전결의 구성이라는 근대적 기준에 따라 재구성하거나 (2) 문헌 고증에 따라 원래의 모습을 재현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따라서 최승희의 작품은 전통작품이라 하더라도 창작무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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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선생은 세계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 미야코신문(都新聞)과 가진 인터뷰에서 조선악기를 사용하는 조선음악을 반주로 독무 중심의 조선무용을 계속 공연하겠다는 포부와 계획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그 계획은 곧 좌절된 것으로 보인다. 그해(1941) 1128일부터 3일간 열린 귀조(歸朝) 2번째 도쿄 공연이었던 다카라즈카(寶塚)극장 공연 레퍼토리의 성격이 최승희 선생의 의도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최승희 선생은 자신의 결심을 관철시켰다. 도쿄 가부키자 공연(1941221-25)에 이어 열린 오사카공연(31-3, 아사히칸)과 교토공연(35-6)의 발표 작품들이 모두 조선무용 일색이었고, 이는 조선 경성공연(42-6, 부민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41228일자 <아사히신문(오사카판, 2)>에 따르면 오사카공연(31-3)과 교토공연(5-6) 레퍼토리는 도쿄 가부키자에서 발표된 13개 작품이 순서까지 똑같이 반복되었고, 194141일자 <조선신문(4)>에 따르면 42-6일의 경성 부민관 공연에서도 도쿄공연 레퍼토리서 <검무>만 제외한 나머지 12개 작품이 그대로 상연되었다.

 

 

최승희 선생의 결심과 계획은 1941330일 경성의 문예 월간지 <조광>최승희의 무용과 포부를 듣는 간담회라는 제목으로 주최한 좌담회에서 다시 한 번 천명되었다. 함화진(咸和鎭)과 송석하(宋錫夏), 이갑섭(李甲燮) 등이 질문자로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 좌담회의 내용은 <조광> 19415월호에 실렸는데, “서양 가셔서 민속무용과 향토무용을 주로 하셨겠지요?”하고 묻는 함화진의 질문에 최승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프로그람을 세 종목으로 나누었어요. ... 첫째는 현재에도 남아 있고 제대로 해오던 향토무용 민간무용 등을 다시 무대화시킨 것이고요, 둘째는 테-마는 조선 것인데 현재에는 무용화되지 않은 것을 제 상상력으로 이렇겠다 하고 만든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전동양적인 것, 즉 내지, 지나, 조선, 인도에 있는 것에서 얻은 인상이나 감상을 가지고 만든 것, 대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전동양적인 무용, 향토무용, 궁정무용, 민속무용 그런 것을 기초로 하고 창작한 것, 또 한 가지는 예를 들면 초립동이니 천하대장군이니 하는 것이면 초립동이는 초립동이의 까부는 느낌이라든지 천하대장군의 <감지(>를 이메지네이숀으로 현표하는 것이지요. 이런 것으로 이번에 서양에서 했는데 그 사람들은 처음 보는데도 불구하고 잘 알아요. 인도춤보다 조선춤을 그 사람들에게 알기가 쉬운 모양이에요. 조선 춤이라는 것이 대개가 흥에 겨워서- 다시 말하면 감정적이 아니예요? 희노애락의 감은 코스모폴리탄한 것이니까요. 국제적으로 공통되죠?”

 

이 대답에서 보듯이 최승희의 유럽과 미주공연에서는 대부분의 조선무용과 일부 동양적 무용작품이 포함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또 유럽과 미주에서 호평을 받았던 자신의 작품이 <보살춤><전통적 리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해설하기도 했다.

 

 

“<보살춤>이라든지 <전통적 리듬>이라든지 퍽 평판이 좋았어요. 보살춤이라는 것은 하체는 그대로 두고 주로 손과 상체를 놀리는 것인데요, 상체만 가지고 하는 것에는 서양 사람은 동양 사람보다 훨씬 못합니다. 그래서 보살춤이 문제도 됐고 평판도 좋았어요.”

 

춤에는 민족마다 버릇이 있다면서 민족마다 ... 무풍(舞風)이라는 것이 있지 않느냐는 송석하의 지적에 대해서도 최승희는 이렇게 대답했다.

 

민속무용이라는 것은 그 나라 사람이 아니면 자연스럽지가 않아요. 서반아 무용은 세계에 유명한 것이지만 아무가 해도 서반아 무용의 미묘하고 델리케-트한 곳은 표현하지 못한대요. 그렇지만 서반아 여자가 하면 설사 춤은 서툴러도 잘 표현한다니까요. 그런 점으로 봐서 동양사람이 서양무용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닌가 해요. 지금까지 저도 서양 무용을 해왔는데요, 인제부터는 동양무용에 전력을 할 생각입니다.”

 

 

그는 또 향후의 계획을 묻는 사회자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무용한 지 십오년째 됩니다마는 외국 가서 제 밟아나갈 사명을 깨달았어요. 이후의 이상으로는 조선무용을 토대로 하고 힘이 자라는 대로 전동양적인 것도 해보려고 합니다. 불교예술도 좀 더 연구하고 인도무용, 일본 향토무용, 유구(流球)무용 같은 것도 손을 대 보겠습니다.”

 

피아노를 포기하고 조선무용을 조선악기의 조선음악으로 반주하겠다는 생각은 이 <조광> 좌담회에서도 다시 한 번 피력되었다. 도쿄 가부키자 공연의 경험과 후기를 되새기면서 최승희는 이렇게 말했다.

 

가무기좌(歌舞伎座)에서 조선악으로 반주를 했더니 어떤 사람은 귀에 익지 않아서 서투르다고 양악으로 해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또 조선악의 몇 가지를 가지고 반주를 하는 것이 씸포니 오케스트라로 한 것보다도 몇 배 낫다고, 단순한 속에 미묘한 하모니는 여하한 오케스트라의 비()할 바가 아니라고 극찬을 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음악이 춤을 따라간다고 해요.”

 

 

이와 관련하여 반주자에 적당한 사람만 있으면 전속으로 두실 의향이 계시느냐는 송석하의 질문에 대해서도 최승희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무용생활을 할 때까지 손을 맞잡고 할 만한 사람이 있으면 하겠어요. 조선음악을 세계적으로 진출시키고 싶다는 야심도 있으니까요. (웃는다). 조선 음악을 위해서 일신을 바치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언제까지든지 함께 연구하겠습니다.”

 

이어서 이갑섭이 최여사의 예술을 맡길 만한 제자를 발견하셨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어요? 제자도 양성하고 계십니까?”라고 물었는데, 이에 대해 최승희 선생은 부정적으로 답변했다.

 

제자 양성보다 제가 연구할 것이 택산(澤山) 같아서요. 무어 그럴 여유가 있어야지요. ... 전에는 (문하생을) 사오십 명 두어 봤었죠. 후계자를 양성하겠다는 의미로 가르쳐봤는데... 여러 가지 지장이 많아요. 그러나 유망한 아이만 있으면 이후라도 후계자를 양성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제 딸이나 조카딸 속에서도 뽑아가지고 가르쳐 보려고 합니다. 저이들도 좋아하니까...”

 

 

딸과 조카딸을 거론하는 최승희에게 세습을 생각하는 것 아니냐는 농담의 질문을 던진 함화진에게 최승희는 제자 양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남의 애는 열심히 가르쳐도 중간에 튕겨지면 대성되기 전에 아무것도 안되니까요. 그러니까 제 딸이나 조카딸들에게 가르치려고까지 하는 생각이 나지요. 물론 끝까지 해보겠다는 희망자가 있다면 얼마든지 양성해 보고자 합니다. ... 제 자신이 미숙하나마 십오년 이상 걸어온 무용가로서의 노력의 결과를 후배에게 가르쳐주려고 노력은 합니다만은 어디 여의하게 아니되느면요. ... 저는 사적으로 무용생활을 비결로써 미공개시킨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게 친척이거나 타인이거나 대성하는 희망이 있는 후배에게 전하려 합니다. 그러나 무용가로서 대성하기 위한 장시일의 노력을 끝끝내 갖는 사람이 드물어 걱정입니다.”

 

요컨대 희망있는 후배가 나타나기만 하면 얼마든지 자신의 경험을 전수하겠다면서도 그런 자질과 끈기를 가진 지원자를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에 제자 양성에 한계를 느낀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후에도 최승희는 일본식으로 자신의 이름을 물려주는 수제자들을 양성하지 않았는데, 그의 딸 안성희가 결국 그의 뒤를 이었다.

 

 

최승희가 제자 양성에 비관적인 생각을 가졌던 것은 경성시절과 도쿄시절을 통해 그의 수제자로 성장했던 김민자(金敏子)가 해외 순회공연 동안에 자신의 허락 없이 조택원의 파트너가 되어 무대에 오르는 외도를 했었기 때문이다. 이에 분노한 최승희는 곧 김민자와 결별했고, 김민자는 독립했지만 이후 그다지 뚜렷한 성취를 일구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후 최승희는 조선무용을 독무 중심으로 진행하되 제자 양성에는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요컨대 최승희 선생은 세계 순회공연 이후 (1) 조선음악으로 반주하는 조선무용을 (2) 제자들의 도움없이 독무 중심으로 창작, 공연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는 19412월에 가졌던 도쿄의 미야코신문(都新聞)과의 인터뷰에서도 밝혔고, 그해 3월말 조선순회공연을 위해 경성을 방문했을 때에도 문예지 <조광>과 가졌던 좌담회에서도 재천명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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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중 선생님의 증언을 통해 정병호 선생이 관람했던 최승희 공연이 언제 어디서 열렸던 것인지를 찾아가는 중인데, 시기는 19414월 혹은 19422월이었던 것으로 범위를 좁힐 수 있었다. 장소도 경성공연과 광주공연 중의 하나였던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최종 결론은 아직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최승희의 무용공연과 작품에 변화가 있었다. 1941년과 1942년 사이에 최승희 무용작품과 공연의 경향성에 큰 변화가 생겼음을 알 수 있었는데, 이는 아마도 일제가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시작한 태평양 전쟁의 여파 때문인 것으로 짐작되었다.

 

최승희는 세계 순회공연(19371219-1940125)을 마치고 요코하마에 귀항한 직후, 1941221-25일까지 5일간 도쿄 가부키자(歌舞技座)에서 귀조(歸朝) 첫 공연을 가졌다. 1941215일자 <미야코신문(都新聞, 6)>에 실린 인터뷰 기사에서 최승희는 세계순회공연 이후의 무용활동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이 기사 전문은 다음과 같다.

 

 

“(제목) 민족무용은 민족음악으로, (부제) 피아노 없이 춤추는 최승희, (본문) 외유 3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무용수 최승희는 21일부터 가부키자(歌舞技座)에서 귀조공연을 열게 되었는데, 이 발표회에 앞서 그녀는 선항성명을 한 끝에 어디까지나 동양 향토무용의 독자성을 발표하고 싶다는 염원에서 종래 사용해 온 반주악기에 피아노 사용을 금지하게 되었다. 이는 그녀가 민족무용은 역시 민족음악과 분리해서는 성립될 수 없다는 생각에 응한 것으로, 이를 위해 작년 말 경성에서 일류 악사 4명을 불러 목하 그 반주를 바탕으로 최승희는 민족무용으로의 재출발을 꾀하고 있다.

 

이번 공연은 가부키자에서 5일간 혼자서 춤을 추겠다는 것이지만, 이러한 독무발표회는 앞으로도 지속해 나갈 것이며, 그녀는 제자도 가능한 한 취하지 않을 방침이며, 현재는 그녀의 외유 중에도 그녀의 연습장을 지키고 있는 몇 명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나는 나의 창작발표회는 그것대로 개최하고, 만약 제자들의 모이게 된다면 그것은 별개의 것으로서 할 생각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그녀는 종래 무용계에 이쪽저쪽에서 일석을 던지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공연은 유럽과 미주 순회공연 중에 발표한 것만을 선정해서 춤추게 되어 있다. (사진은 춤추는 최승희)

 

이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세계 순회공연 이후 최승희 무용의 방향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1) 민족무용을 계속하되 피아노 대신 민족 악기로 반주하겠다는 것과 (2) 중무와 군무보다 독무 중심으로 공연활동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최승희는 조선의 악사들을 채용했고 제자들을 더 모집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이는 세계 순회공연에서 얻어진 경험의 결과였을 것이다. 매니저역을 맡은 남편 안막과 단 둘이서 별도의 악단이 없이 축음기로 반주를 대신하면서 독무 중심의 조선무용 작품으로 세계 순회공연을 완수하면서도 상당한 성공을 거뒀기 때문이다.

 

이 같은 성공에 힘입어 최승희는 가부키자 귀조공연에서도 유럽과 미주 순회공연 중에 발표한 것만을 선정해서 춤추겠다고 기획한 것인데, 실제로 그의 세계 순회공연 작품들은 모두 조선무용 작품들이었다. 가부키자 공연의 팜플렛에 따르면 19412월의 도쿄공연 발표작품도 다음과 같이 모두 조선무용 독무 작품들이었다.

 

 

1(1) 두개의속무(속곡), (2) 검무(타악기), (3) 옥적조(고곡), (4) 화랑무(속곡), (5) 신노심불로(고곡), (6) 보현보살(고곡), (7) 두개의전통적리듬(고곡), 2(1) 긴소매의형식(고곡), (2) 꼬마신랑(속곡), (3) 관음보살(고곡), (4) 가면무(속곡), (5) 동양적선율(속곡), (6) 즉흥무(고곡).”

 

도쿄 가부키자 공연 레퍼토리에는 구미 공연 팜플렛에 등장하지 않았던 제목도 눈에 띈다. “두개의 속무긴 소매의 형식,” “동양선 선율즉흥무가 그것이다. 그러나 두개의 속무가 독일 뒤스브르크 공연에서 초연됐던 두 개의 기생춤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아마도 다른 작품들도 구미공연 작품들의 제목을 조금씩 바꾼 것으로 생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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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중 선생님 인터뷰를 계기로, 정병호 선생이 관람했던 최승희 공연이 어떤 것이었는지 찾아가는 중이다. 지난 글에서는 19414월의 경성공연 레퍼토리를 살폈다. 이는 만3년의 세계 순회공연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온 최승희 선생이, 19412월 도쿄의 가부키자(歌舞技座)에서 일본 첫 공연을 가진 후, 그해 4월 조선을 방문해 가졌던 조선 첫 공연이었다.

 

그러나 그해(1941) 4월의 경성 부민관 공연의 레퍼토리에서는 정병호 선생이 관람했다는 3개의 작품이 제목 그대로 발견되지 않았다. 작품의 제목과 내용이 다른 경우도 있고, 또 같은 작품이 다른 제목으로 소개된 경우도 있으므로 더 자세한 조사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19422월 경성공연의 레퍼토리를 먼저 살피기로 하자. 1942218일자 <매일신보(4)>는 최승희의 경성공연을 소개하면서 레퍼토리도 함께 보도했다. 다소 길지만 기록을 위해서 기사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제목) 신면목이 약여(躍如)한 최승희의 동양무, (부제) 다채한 프로로 매일밤(連夜) 성황, (내용) 일본의 고전음악을 중심으로 하고 동양적인 무용으로 일대 전환을 하여 새방향을 보인 최승희 여사는 동경 중앙공연에서 절찬과 지지를 얻었거니와 다시 몇 가지 향토의 춤을 가()하여 기보(旣報)한 바와 같이 이번 군사보급협회의 주최로서 전선공연을 가지게 된바 예정대로 경성공연이 16일부터 부민관에서 초야의 공연이 개막이 되었다.

 

감격에 사무친 xxxx의 기쁨으로 전 시가는 축하행사로 물 끓듯 하는 이날 밤 장내는 승전의 엄숙한 분위기에 휩싸여 춤추는 최여사의 포즈의 연결은 힘과 미와 건설에의 약동하는 동양무용의 진가를 살리었다. 이번 무용의 특색은 이전의 구미(歐米)적인 리즘이 전연 자취를 감추고 동양적인 전아한 리즘이 최여사의 원숙한 무기(舞技)의 조화를 얻어 일반 동호자와 관중에게 배가의 호평과 절찬을 받았다. 이제 당야(當夜)의 프로그람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1) 신전의 무(神殿, 일본의 의식무용의 장중한 형식미를 표현한 것.), (2) 화랑의 춤(화려하고 명랑한 청춘무), (3) 동양적 리즘(근대적 리즘과 동작), (4) 추심(追心, 능악(能樂)의 모성애 작품 중에서 취재, 죽은 내 자식의 모양을 추억하여 슬퍼하며 원통해하는 그 마음과 자태...), (5) 세 가지 전통 리즘 (조선의 고전무용의 세 가지 기본적 동작을 체계화해서 창작한 것.), (6) 칠석(七夕)춤형식(내지의 칠석춤의 전형적 수법을 취하여 무용화한 것.)

 

2. (1) 무혼(武魂, 우리 충?에 바치는 춤, 고래(古來)의 무사혼을 표현한 것.), (2) (8)보살의도(菩薩, () 가무보살(歌舞菩薩, 겸창鎌倉시대의 <25보살래영도>에서 취재한 것), () 보현보살(普賢菩薩, 헤이안시대(平安朝)의 명화 <보현보살(普賢菩薩)>에서 취재, 무용화한 것), (3) 화립(花笠)의 춤(鄕土舞踊), (4) 칠석야(七夕夜, <牽牛織女>傳物에서 취재), (5) 초립동(草笠童, 소년 신랑의 희희낙락한 모양), (6) 인도풍의 춤(인도무용의 수법), (7) 사죽(四竹)(류큐琉球무용의 대표적인 것), (8) 즉훙무(卽興舞, 가야금 산조의 변화에 주제를 취한 것). (사진은 최승희).”

 

이 공연의 발표작품 목록에는 <초립동>이 등장했다. <보살춤>이라는 제목은 없지만 <보살도(菩薩圖)>라는 제목 아래 <가무보살><보현보살>이라는 소제목이 나온다. 아마도 정병호 선생이 이 공연을 보았다면, 이 두 작품 모두, 혹은 그 중의 하나를 <보살춤>이라고 기억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에헤야 노아라>는 이 작품목록에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이 작품목록이 중요한 것은 경성 부민관 공연 이후에 이어진 전조선 순회공연에서도 이 작품들이 상연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승희 선생은 그의 스승 이시이 바쿠의 선례를 따라서, 먼저 수도 경성에서 공연을 가진 이후 그 레퍼토리를 가지고 지방 순회공연을 단행하곤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1부의 6작품, 2부의 8작품, 14작품으로 이뤄진 이 레퍼토리는 4월말부터 5말까지 약2개월에 걸쳐서 조선의 18개 도시 순회공연에서도 상연되었을 것이다. 다만 모든 지방 공연에서 이 14개 작품을 전부 공연했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현지 사정에 맞추어 작품의 숫자와 순서를 조정했을 가능성은 있다.

 

따라서 만일 정병호 선생이 이 공연을 관람했던 것이라면, 경성에서나 혹은 광주에서 이 공연을 보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시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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