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はまず4新聞記事みました事故報道する記事通常被害者身元をある程度報道するからです最近個人情報保護のために犯罪事故被害者身元報道自制するですが100年前新聞はそのような概念がなかったので年齢住所までも報道したりしました

 

ところが各記事ごとに被害者名前年齢しずついました。 『神戸新聞朝鮮慶尚南道出身尹吉文(ユン·ギルムン, 21)同尹日善(ユン·イルソン, 25)吳伊根(·イグン, 25)余時善(·シソン, 19)吳伊目(·イモク)5がダイナマイト爆発事故被害尹吉文即死吳伊根病院移送中死亡したと報道しました

 

 

神戸又新日報朝鮮慶尚南道高城郡高城面出身朝鮮人尹吉文(21)尹日善(25)金時善(キム·シソン, 19)4がダイナマイト爆発事故被害けたとこのうち尹吉文吳伊根さんが死亡したとじました

 

大阪朝日新聞朝鮮人土工3がダイナマイト爆発事故、「土工尹吉文一(21)吳伊根(25)2死亡、「土工である伊日善(·イルソン, 25)重傷... 揚時善19顔面ったじました

 

朝日新聞東京版土工伊吉文(21)、呉伊根(25220んで身体々になる惨事、「土工である伊日善(25重傷って卒倒くの小屋食事準備をしていた伊日善揚時春(19いけがをったじています

 

 

神戸新聞神戸又新日報明示した被害者54いましたが報道した被害者名前はほぼ一致しましたただ女性被害者名前だけ余時善金時善いましたおそらく漢字ていることからじたりだとわれます余氏金氏って表記したのはているうえ朝鮮人金氏がより一般的だったため勘違いしたものとわれます

 

また大阪版東京版朝日新聞記事では、『神戸新聞神戸又新日報らかにした尹吉文尹日善名前伊吉文伊日善報道しましたがこれもやはり漢字ていることからじたりだとわれます

 

 

しかも韓国には伊氏姓がないので神戸新聞報道正確だとみられ鄭鴻永先生神戸新聞記録いましたしたがって鄭鴻永先生先例死亡者名前尹吉文呉伊根断定調査めることにしました

 

朝日新聞尹日善氏妻余時善氏揚時善大阪版)、揚時春東京版などと々に報道しましたがこれもやはり余時善しいようです余氏揚氏って表記したのは揚氏日本語音読ようであるためでしょうまた余時善揚時春表記したのはその二文字ているからでもあり日本式音読がシュンで韓国式音読善ていたからでしょう

 

 

4のダイナマイト爆発事故犠牲者名前表記しずついますが調査研究目的上そのようないはにとってあまり重要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なくとも死亡者2その名前尹吉文氏吳伊根氏一致するのでらの縁故地すだけです

 

朝日新聞はこの2朝鮮ゆかりのじませんでしたが、『神戸新聞死者朝鮮慶尚南道出身、『神戸又新日報はさらに具体的朝鮮慶尚南道高城郡高城面出身明示しましたこの程度情報であれば90年前犠牲者本拠地調べるための非常具体的出発点になってくれると期待されてい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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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우선 4건의 신문기사를 읽었습니다. 사고를 보도하는 기사는 보통 피해자의 신상을 어느정도 보도하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범죄나 사고 피해자의 신상 보도를 자제하는 편이지만, 1백년 전의 신문들은 그런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나이와 주소까지도 보도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각 기사마다 피해자의 이름과 나이가 조금씩 달랐습니다. <고베신문>조선 경상남도 출신 윤길문(尹吉文, 21), () 윤일선(尹日善, 25), 오이근(吳伊根, 25), 여시선(余時善, 19), 오이목(吳伊目)의 다섯명이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로 피해를 입었고, 윤길문은 즉사, 오이근은 병원으로 이송중에 사망했다고 보도했습니다.

 

 

<고베유신일보>조선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면 출신의 조선인 윤길문(21), 윤일선(25), 김시선(金時善19) 4이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로 피해를 입었다고 보도했고, 이중 윤길문과 오이근씨가 사망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오사카아사히신문>조선인 토공 3이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를 당했고 토공 윤길문일(尹吉文一, 21), 오이근(吳伊根, 25)의 두명은사망했고 토공의 우두머리 이일선(伊日善, 25)는 중상... 양시선(揚時善, 19)은 안면에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고 보도했습니다.

 

<아사히신문 도쿄판>토공 이길문(伊吉文, 21) 오이근(吳伊根, 25)의 두명은 약 20칸을 날아가 신체가 산산조각이 나는 참사를 당했고, “토공의 우두머리 이일선(伊日善, 25)은 크게 중상을 입고 졸도했으며, 인근 오두막에서 식사준비 중이던 이일선의 아내 양시춘(揚時春, 19)은 얼굴에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고 보도했습니다.

 

 

<고베신문><고베유신일보>가 명시한 피해자의 수는 5명과 4명으로 조금 달랐지만, 보도한 피해자 이름은 거의 일치했습니다. 다만 여성 피해자의 이름만 여시선과 김시선으로 달랐습니다. 아마도 한자 여()자와 김()자가 비슷해서 생긴 오류로 생각됩니다. ()씨를 김()씨로 잘못 표기한 것은 글자의 모양이 서로 비슷한 데다가, 조선인들의 성으로 김씨가 더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착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 오사카판과 도쿄판 <아사히신문>의 기사는 <고베신문><고베유신일보>이 밝힌 윤길문과 윤일선의 이름을 이()길문과 이()일선으로 보도했는데, 이것도 역시 한자 윤()자와 이()자가 비슷하게 보여서 생긴 잘못으로 보입니다.

 

 

더구나 한국에는 이()씨 성이 없으므로, 고베의 신문들의 보도가 정확할 것으로 보이며, 정홍영 선생도 고베 신문들의 기록을 따랐습니다. 따라서 정홍영 선생님의 선례를 따라서 사망자의 이름을 윤길문(尹吉文)과 오이근(吳伊根)으로 단정하고 조사를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아사히신문>은 윤일선씨의 아내 여시선(余時善)씨를 양시선(揚時善, 오사카판), 양시춘(揚時春, 도쿄판) 등으로 서로 달리 보도했지만, 이 역시 여시선이 맞는 것으로 보입니다. ()시선씨를 양()시선씨로 잘못 표기한 것은 양()자의 일본어 음독이 (よう)’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여시선()을 양시춘()으로 표기한 것은 두 글자가 비슷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의 일본식 음독이 슌(しゆん으로 한국식 음독 선()과 비슷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4개 신문의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 희생자의 수와 이름 표기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조사연구의 목적상 그런 차이는 제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사망자가 2명이며 그 이름이 윤길문(尹吉文)씨와 오이근(吳伊根)씨로 일치하므로 이들의 연고지를 찾기만 하면 됩니다.

 

<아사히신문>은 이 두 사람의 조선 연고지를 보도하지 않았지만 <고베신문>은 사망자들이 조선 경상남도 출신이라고 보도했고 <고베유신일보>는 더 구체적으로 조선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면 출신이라고 명시했습니다. 이 정도의 정보라면 90년 전 희생자의 연고지를 조사하기 위한 매우 구체적인 출발점이 되어 줄 것으로 기대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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宝塚朝鮮人追悼碑まれた記録几帳面んだ鄭鴻永先生歌劇のもうひとつの歴史:宝塚朝鮮人みました1部第1神戸水道公社についての調査報告書2にはダイナマイト爆発事故べられていましたこの研究報告書えることがないほど徹底的完璧だったので背景知識ました

 

いて近藤富男先生えてくださったむくげ通信文章もじっくりみました鄭鴻永先生行跡とともにそのがどんなだったのかもじることができましたまたきになった飛田雄一先生堀内稔先生そして近藤富男先生人品じました

 

 

この々ははどのようにれても自分たちの信念またその信念かちえる同僚たちとやかで愉快自分仕事をしていく々でしたこのたちが兵庫朝鮮関係研究会むくげの活動しながらめた信頼友情切実じられました

 

近藤富男先生1983鄭鴻永先生めてった、「わたしは鄭鴻永さんの金魚したとおっしゃっていましたはそのみながら二人友情ましかったです

 

宝塚朝鮮人追悼碑建立された近藤富男先生はその鄭鴻永先生墓所追悼碑建立について報告したそうです1985二人めたことが2020くのんだ感激鄭鴻永先生らせるためだったのでしょう

 

 

一度生きる人生このような仲間つことができるのはせなことでしょう。 「金魚がこういうものならかの金魚になりたいといました

 

しかし二人友情同志愛感歎しているわけにはいきませんでしたはそのうちの一人のおいで追悼碑犠牲者々の縁故課題遂行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からです

 

背景知識つようになりましたが準備運動ぎませんでした仕事めるには出発点必要でしたその出発点もチョン·ホンヨン先生著書提供しましたこのには3 埋葬である虚証写真2 新聞記事のコピーが収録されていました

 

 

埋葬認許證鄭鴻永先生1985、「宝塚市史編纂室編集担当主事若林泰さんから入手したものですこれを根拠神戸水道工事(1914-15)死亡した朝鮮人労働者3(金炳順南益三張長守氏)調査まりました

 

しかし付録収録されている埋葬認許證写真さすぎる3扇形なって撮影されたもので記録をきちんとむ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近藤富男先生はすぐにそれぞれの埋葬認許證画質写真ってくれましたそのはどうやってこの写真近藤富男先生所蔵していたのかからず理由れませんでした

 

一方鄭鴻永先生著書3部資料編には2新聞記事収録されていましたそのうち神戸又新日報記事1985325堀内稔先生からいただきましたそして翌日チョン·ホンヨン先生近藤富雄先生一緒現場踏査きました

 

 

さて3資料編には神戸又新日報神戸新聞記事だけが収録されていましたが本文には「『神戸』、『朝日』、『毎日新聞などがそれぞれかなりしい記事じたされていました。 『朝日新聞毎日新聞もこの事故じたという意味です

 

早速鄭世和先生神戸市立図書館調査をおいし東京国立記録院勤務する恵那功刀直儀先生にも朝日毎日記事してほしいとみました鄭世和先生大阪朝日新聞記事つけられ惠那功刀先生朝日新聞-東京版記事してってくださいましたそこで4新聞記事確保されました

 

 

毎日新聞記事つかりませんでしたが追慕碑犠牲者たちの縁故調べるためのしっかりとした出発点られたわけ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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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새겨진 기록을 꼼꼼히 읽은 후에, 정홍영 선생님의 <가극의 거리의 또 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를 읽었습니다. 1부 제1장은 고베수도공사에 대한 조사 보고서였고, 2장에는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가 서술되어 있었습니다. 이 연구보고서는 덧붙일 것이 없을 만큼 철저하고 완벽했기 때문에 저는 좋은 배경지식을 얻었습니다.

 

이어서 콘도 도미오 선생님이 전해 주신 <무쿠게통신>의 글들도 찬찬히 읽었습니다. 정홍영 선생님의 행적과 함께 그분이 어떤 분이셨는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 글을 쓰신 히다 유이치 선생님과 호리우치 미노루 선생님, 그리고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성품도 느껴졌습니다.

 

 

이분들은, 세상이야 어떻게 흘러가든, 자신들의 신념을 지키고, 또 그 신념을 나눌 수 있는 동료들과 함께 잔잔하고 유쾌하게 자기 일을 해 나가시는 분들이었습니다. 이분들이 <효고조선관계연구회><무쿠게회>에서 활동하시면서 다진 신뢰와 우정이 절절히 느껴졌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이 1983년 정홍영 선생님을 처음 만난 후 나는 정홍영 선생의 금붕어 똥(金魚)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두 사람의 우정이 부러웠습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건립되던 날,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그길로 정홍영 선생의 묘소에 찾아가 추도비 건립을 보고드렸다고 합니다. 1985년에 두 사람이 시작한 일이 2020년에 많은 사람들과 함께 열매를 맺은 감격을 정홍영 선생께 알리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한 번 사는 인생에서 이런 동료들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일 것입니다. 저는 금붕어 똥이 이런 것이라면 나도 누군가의 금붕어 똥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두 분의 우정과 동지애에 감격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그중 한 분의 부탁으로 추도비 희생자분들의 연고를 찾는 과제를 수행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배경지식은 갖게 되었지만 준비운동에 불과했습니다. 일을 시작하려면 출발점이 필요했습니다. 그 출발점도 정홍영 선생님의 저서가 제공했습니다. 이 책에는 3장의 매장인허증 사진과 2건의 신문기사 사본이 수록되어 있었습니다.

 

매장인허증은 정홍영 선생이 1985년 봄, “다카라즈카 시사(市史) 편찬실의 편집담당주사 와카바야시 야스시(若林泰)씨로부터입수한 것입니다. 이를 근거로 고베수도공사(1914-15) 중에 사망한 조선인 노동자 3(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의 조사가 시작됐습니다.

 

그러나 부록에 수록된 매장인허증의 사진은 너무 작은데다가, 세 장이 부채꼴 모양으로 겹쳐져 촬영된 것이어서, 기록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즉시 각각의 매장인허증을 화질 좋은 사진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때는 어떻게 이 사진을 콘도 도미오 선생님이 소장하고 계셨는지 몰랐고, 이유도 묻지 못했습니다.

 

한편 정홍영 선생님의 저서의 3부 자료편에는 2건의 신문기사가 수록되어 있었습니다. 그중 <고베유신일보>의 기사는 1985325일 호리우치 미노루 선생님으로부터 건네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바로 다음날 콘도 도미오 선생님과 현장 답사를 가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3부 자료편에는 <고베유신일보><고베신문>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었지만, 본문에는 “<고베>, <아사히>, <마이니치> 신문 등이 각각 상당히 자세한 기사를 보도했다고 서술되어 있었습니다. <아사히신문><마이니치신문>도 이 사고를 보도했다는 뜻입니다.

 

저는 즉시 정세화 선생님께 고베도서관 조사를 부탁드렸고, 도쿄의 국립기록원에 근무하는 에나 크누기(功刀恵那) 선생께도 <아사히><마이니치> 기사를 찾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정세화 선생님은 <오사카아사히신문>의 기사를 찾아내셨고, 에나 크누기 선생도 <아시히신문-도쿄판>의 기사를 찾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4건의 신문기사가 확보되었습니다.

 

 

<마이니치신문> 기사는 찾아내지 못했지만, 추도비 희생자들의 연고를 조사하기 위한 탄탄한 출발점이 만들어진 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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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鴻永先生著書むくげ通信文章とともに、『宝塚朝鮮人追悼碑まれた記録重要資料だという事実えるようになりましたしかしはこの追悼碑一度直接見たことがありませんコロナが猛威るっていて日本けなかったからです

 

それで鄭世和先生追悼碑写真ってほしいとおいしました多様方向角度からった写真必要まれた文字模様しくえるように近接撮影もおいしました鄭世和先生はさっそく追悼碑写真ってくださいました

 

 

追悼碑前面下段には旧国鉄福知山線改修工事犠牲者尹吉文呉伊根氏神戸水道導水トンネル工事犠牲者金炳順南益三張長守氏名前まれており裏面には追悼碑てた理由されていました

 

1914から15年間おこなわれた神戸市水道導水トンネル工事現在分かっているだけでも三人朝鮮半島出身労働者事故くなりましたこれは千苅水源地から神戸市まで淨水るための難工事であったとえられています

 

また旧国鉄福知山線敷設後ここ武庫川のほとりで氾濫土石流から鉄道改修工事のさなか19293262朝鮮半島出身者爆発事故としました

 

地域生活重要役割たしている水道鉄道建設現場犠牲になった5々を事故れず後世えてゆくためにこの追悼碑建立しました2020326」。

 

それによります、『宝塚朝鮮人追悼碑』の建設目的は2つです。 「犠牲になった5人の方々を悼」とし「事故を忘れず後世に伝えてゆくために」ということです。 犠牲者を悼むのは「地域生活に重要な基盤施設を建設する中で殉職した方々だから」です。 覚えて伝えようとする理由は「そんな事故が二度と起こら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いてこの追悼碑建立した3団体名前まれています。 「追悼碑建立する宝塚市外国人市民文化交流協会」、そしてもくれんのがそれでした

 

追悼碑には建立当時宝塚市長中川智子さんのまれています日本全土朝鮮人慰霊碑追悼碑200もありますがそこに現職市長哀悼文字まれたのは宝塚朝鮮人追悼碑唯一だといています

 

 

最後追悼碑には「『福知山線敷設工事殉職者切畑立合新田にあるというえられています西谷青年会1979切畑建立したこの殉職者福知山線敷設工事1891-1912犠牲になった殉職者える追悼碑ですこれには20日本人犠牲者名前まれています

 

宝塚朝鮮人追悼碑にこの殉職者言及した理由、「宝塚近代化のためにとした犠牲者国籍関係なくいに連携して追悼されるのが当然というえからでしょう追悼碑建立者たちの細心配慮じられました

 

 

宝塚朝鮮人追悼碑洗練されたデザインは大阪彫刻家玉野勢三先生作品です玉野勢三先生追悼碑前面男女2子供姿飛天のイメージを形象化したもの、「飛天韓半島から仏教伝来とともにわったモチーフなので韓半島日本文化交流歴史暗示するものだと説明していますはまた5つのさな木蓮つぼみで犠牲になった5象徴するっていました

 

 

近藤富男先生にこの追悼碑名前いたことがあります越鳥南枝碑慰霊碑追慕碑追悼碑などを検討した近藤富男先生追悼碑適切だとおっしゃいましたそのたちはこの追悼碑宝塚朝鮮人追悼碑んで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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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영 선생님의 저서와 <무쿠게통신>의 글들과 함께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새겨진 기록이 중요한 자료라는 데에도 생각이 미쳤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추도비를 한번도 직접 본적이 없었습니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고 있어서 일본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세화 선생님께 추도비의 사진을 보내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다양한 방향과 각도에서 찍은 사진이 필요했고, 특히 새겨진 글과 문양들이 자세히 보이도록 근접 촬영도 부탁드렸습니다. 정세화 선생님은 즉각 추도비의 사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추도비의 전면 하단에는 구국철 후쿠치야마선 개수공사 희생자 윤길문(尹吉文)과 오이근(吳伊根), 고베수도도수터널공사 희생자 김병순(金炳順), 남익삼(南益三), 장장수(張長守)씨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고, 뒷면에는 추도비를 세운 이유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1914년부터 약 15년간 진행된 <고베시 수도터널공사> 중에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도 3명의 조선반도 출신 노동자가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이는 센가리 수원지에서 고베시까지 깨끗한 물을 보내기 위한 어려운 공사였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옛 국철 후쿠치야마선 부설 후, 이곳 무코강변에서 자주 일어나는 범람과 토석류로부터 철도를 지키기 위한 개수공사 중, 1929326일에 두 명의 조선반도 출신자가 폭발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역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수도와 철도 건설현장에서 희생된 다섯 분을 애도하면서, 사고를 잊지 않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 이 추모비를 건립합니다. 2020326.”

 

이에 따르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건립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희생된 다섯 분을 애도하고 사고를 잊지 않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것은 지역생활에 중요한 기반시설을 건설하는 중에 순직한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기억하고 전하려는 까닭은 그런 사고가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어서 이 추도비를 건립한 세 단체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추도비를 건립하는 모임><다카라즈카시 외국인시민 문화교류협회>, 그리고 <목련회>가 그것이었습니다.

 

추도비에는 건립 당시의 다카라즈카 시장 나카가와 도모코씨의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일본 전역에 조선인 위령비나 추도비가 2백개나 되지만, 거기에 현직 시장의 애도의 글씨가 새겨진 것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유일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끝으로 추도비에는 “<후쿠치야마선 부설공사 순직자의 비>는 키리하타 다치아이신덴에 있다는 글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니시타니 청년회가 1979년 키리하타에 건립한 이 <순직자의 비>는 후쿠치야마선 부설공사(1891-1912)에서 희생된 순직자들을 기리는 추도비입니다. 여기에는 20명의 일본인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이 <순직자의 비>를 언급한 까닭은 다카라즈카 근대화를 위해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은 국적에 상관없이 서로 연계되어 추도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추도비 건립자들의 세심한 배려가 느껴졌습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세련된 디자인은 오사카의 조각가 타마노 세이조 선생의 작품입니다. 타마노 세이조 선생님은 추도비 전면의 남녀 2명의 아이의 모습은 비천(飛天)’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으로 비천은 한반도에서 불교 전래와 함께 전해진 모티브이기 때문에 한반도와 일본의 문화 교류의 역사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는 또 “5개의 작은 꽃은 목련꽃봉오리로, 희생된 다섯 분의 영혼을 상징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콘도 도미오 선생님께 이 추도비의 이름을 여쭤본 적이 있습니다. 월조남지비, 위령비, 추모비, 추도비 등을 검토하신 끝에,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추도비>가 적절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로 우리는 이 추도비를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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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回舞踊靴キャンペーンがわった近藤富男先生宝塚朝鮮人追悼碑犠牲者5韓国内縁故してほしいとんできました犠牲者たちの家族親戚たちにこの5たちがよくえているというをしたいとおっしゃいました

 

鄭世和先生から近藤富男先生2犠牲者縁故すために韓国れたことがあるというきましたそれだけ追悼碑主人公たちの縁故すことが近藤富男先生切実課題だといました

 

 

近藤富男先生直接会ったことはありませんしかしその寡黙普段はあまりしゃべらないのですが一旦切したらそのことが大切だという意味であり一度決心したことはいくら時間がかかってもげられるだということはよくっていました

 

しかし最初疑問いましたはこの分野専門家でもないのになぜこの仕事んだのだろうかになじみのある社会学分野でもないだけでなくしくなっている朝鮮舞踊朝鮮学校問題でもないので追悼碑にとってしい分野でした初心者同然にこんなおいをされたのが疑問でした

 

近藤富男先生日本語ができなくても日本全域りながら8~90年前崔承喜先生記録すのが不思議だったといましたですから韓国での調査にはもっと上手なのではないかと推察されたようです

 

 

研究調査れているのは事実です生涯研究所学校めながら調査研究執筆えられたというかしかしもっと正直うとそれしかにできることがあまりないという意味でもあります

 

それでも心配でした崔承喜先生当代最高芸術家だったので彼女公演はどこでも新聞雑誌のニュースでした日本大都市だけでなく中小都市図書館記録保管所でも崔承喜先生関連した記録すのはそれほどしくありませんでした

 

一方追悼碑主人公たちはられていることがほとんどない々です土木工事荒労働者身上生活記録素材になることはしかったでしょう新聞記事になるのはらがとした場合唯一でしたそれでも事故記事てであるだけで事故犠牲者死後がどうだったかをらせる後続報道があるはずがありませんでした

 

 

それにもかかわらず一応調査かりました5とも事故くなっているのでなくとも事故記録つかると期待していましたしかも舞踊靴キャンペーンと崔承喜研究手伝ってくれたことにするさな恩返しでもできればという気持ちで調査めました

 

とりあえずまで収集された基礎資料ってほしいとおいしましたライングループトークがられたのでコミュニケーションはリアルタイムでわれすぐにえがました鄭世和先生はたった一部残った父親鄭鴻永先生著書特急郵便郵送してくださり近藤富男先生むくげ通信掲載されていた文章えてくださいました

 

 

鄭鴻永先生著書歌劇のもうつの歴史:宝塚朝鮮人3部構成そのうち1123資料編つものとみられます

 

近藤富男先生えてくれたむくげ通信文章全部5つでした信長正義先生サラム:鄭弘永インタビュー115)」、堀内稔先生新聞記事武庫川改修工事朝鮮人153)」、飛田雄一先生鄭鴻永さんの178)」兵庫在日朝鮮人史研究スタートさせましよう256)」、そして近藤富男先生鄭鴻永さんとのこと300)」などでした

 

これらの資料宝塚朝鮮人追悼碑主人公たちを調査する出発点となり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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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무용신 캠페인이 끝났을 무렵 콘도 도미오 선생님께서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희생자 다섯 사람의 한국내 연고를 찾아달라고 부탁해 오셨습니다. 희생자들의 가족과 친척들에게 이 다섯 분을 우리가 잘 모셔왔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정세화 선생님으로부터 콘도 도미오 선생님이 두 차례나 희생자들의 연고를 찾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신 적이 있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만큼 추도비 주인공들의 연고를 찾는 일이 콘도 도미오 선생님께 절실한 과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콘도 도미오 선생님을 직접 만난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과묵하신 분이고, 평소에는 말씀이 별로 없으시지만, 일단 말씀을 꺼내셨다면 그 일이 중요하다는 뜻이며, 한번 마음먹은 일은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꼭 이루어내시는 분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의아했습니다. 나는 이 분야의 전문가도 아닌데 어째서 이 일을 내게 부탁하신 것일까? 내게 익숙한 사회학 분야도 아닐 뿐 아니라, 이제 막 친숙해져 가는 조선무용이나 조선학교의 문제도 아니어서, 추도비는 제게 완전히 새로운 분야였습니다. 초심자나 다름없는 내게 이런 부탁을 하신 것이 의문이었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제가 일본말을 못하면서도 일본 전역을 다니면서 8-90년 전의 최승희 선생의 기록을 찾아내는 것이 신기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한국에서의 조사에는 더 능숙하지 않겠느냐고 짐작하셨던 것 같습니다.

 

 

제가 연구와 조사에 익숙해져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평생 연구소와 학교에 근무하면서 조사연구와 집필로 단련되었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 일밖에는 다른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걱정은 되었습니다. 최승희 선생은 당대 최고의 예술가였기 때문에 그의 공연은 어디에서나 신문과 잡지의 뉴스거리였습니다. 일본의 대도시뿐 아니라 중소도시의 도서관이나 기록보관소에서도 최승희 선생과 관련된 기록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반면 추도비의 주인공들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분들입니다. 토목공사 막노동자들의 신상이나 생활이 기록의 소재가 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신문에 기사화되는 것은 그들이 목숨을 잃은 경우가 유일했습니다. 그나마 사고 기사가 전부일 뿐, 사고 희생자들의 사후가 어떠했는지 알리는 후속보도가 있을 리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다섯 분이 모두 사고로 사망하셨기 때문에 적어도 사고 기록은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더구나 무용신 캠페인과 최승희 연구를 도와주신 것에 대한 작은 보답이라도 된다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일단 지금까지 수집된 기초자료를 보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라인 단톡방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의사소통은 실시간으로 이뤄질 수 있었고, 바로 답이 왔습니다. 정세화 선생님은 딱 한부 남은 부친 정홍영 선생님의 저서를 특급우편으로 우송해 주셨고, 콘도 도미오 선생님도 <무쿠게통신>에 게재되었던 글들을 전해 주셨습니다.

 

 

정홍영 선생님의 저서 <가극의 거리의 또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3부로 구성되었는데, 그중 1부의 1,2장과 3부의 자료편이 도움이 될 것으로 보였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이 알려주신 <무쿠게통신(むくげ通信)>의 글은 모두 다섯 개였습니다. 노무나가 마사요시 선생님의 <사람사람: 정홍영 인터뷰(115)>, 호리우치 미노루 선생님의 <신문기사로 보는 무코강 개수공사와 조선인(153)>, 히다 유이치 선생님의 <정홍영 선생의 죽음을 애도하며(178)><효고의 재일조선인사 연구를 다시 시작하자(256)>, 그리고 곤도 도미오 선생님의 <정홍영씨와의 일(300)> 등이었습니다.

 

이 자료들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주인공들을 조사하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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最初舞踊靴キャンペーンがわった20203鄭世和先生宝塚朝鮮人追悼碑をまたされました3月末追悼碑がついに建設されるということでした。 「ついにとおっしゃったのが不思議でしたこの追慕碑がどれほど準備されどれほどくの困難経験したになってようやくてられるにったのかをらなかったには当然そのような疑問がありました

 

そしてめて日本にある朝鮮人追悼碑について真剣めました専門家にも追悼碑慰霊碑についてわせました間専攻社会学犯罪学だったので歴史学韓日間近代史についてよくりませんでしたし追悼碑についてはなおさらりませんでした

 

 

ある図録から日本全土170朝鮮人追悼碑てられていることがかりましたまた20年間日本取材をしてきた写真家安海龍(アン·ヘリョン)先生から自分たにれた追悼碑30るので日本には朝鮮人追悼碑200ほどあることもかりました。 『宝塚朝鮮人追悼碑201回目追悼碑になるわけだないながら熱心調査しました

 

日本でもけは答志しました鄭世和先生だけでなく近藤富男先生真銅敏之先生積極的手伝ってくれました鄭世和先生鄭鴻永先生息子さんであることをったのもこのでしたこの々は舞踊靴キャンペーンにも積極的参加してくださり崔承喜研究にもきなになってくださったのでその々にいつも感謝気持ちをっていました

 

2回目舞踊靴キャンペーンの日本チームあい結成されました近藤富男先生鄭世和先生そして真銅敏之先生主軸になり在日朝鮮学校学生青年たちを後援することを目標にしました

 

 

近藤富男先生チームあいという名前子供(아이)たちを見守(eye)主体(I)たちのまりという意味めたとえてくれましたこのような趣旨同調する々が<チームあい>々と参加されました

 

日本<チームあい>結成刺激韓国でも在日朝鮮学校後援するためのられました名前日本<チームあい>わせるために韓国<チームあい>めました李仁珩先生めて9在日朝鮮学校後援者がこのまりをめました

 

日本韓国<チームあい>2020102回舞踊靴キャンペーンをじて160舞踊靴用意しましたこれらの舞踊靴2020近畿地域朝鮮学生芸術競演大會学生たちにされましたが近藤富男先生直接競演会場学生たちに舞踊靴えました

 

 

この近藤富男先生鄭世和先生一緒競演大會をすべて参観されたそうですそして準備した挨拶をする自分直接観覧した舞踊作品する感想えたそうですまた近藤富男先生挨拶にこんな言葉がありました

 

日本人としてこの=韓国後援者たちかされ韓国とアメリカの々にもえながらわせて在日朝鮮学校生徒たちにする支援めることにしました

 

この言葉いたという表現さりましたけばくことができます舞踊靴キャンペーンをめたのも90年前崔承喜先生朝鮮舞踊朝鮮学校生徒たちがいでいるという事実感動したからでした

 

 

感動したまれば意味深いことができます近藤富男先生1983鄭鴻永先生めてったいたようです。 「一目ぼれしたということですそのように一度動いた35年後宝塚朝鮮人追悼碑舞踊靴キャンペーンというんだのです

 

鄭鴻永先生近藤富男先生友情感動しましたあんな友情同志愛一生大事にしていた々ならんでいながら一緒仕事ができるとい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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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무용신 캠페인이 끝난 20203월 정세화 선생님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이야기를 또 하셨습니다. 3월말에 추도비가 마침내 건립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마침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 의아했습니다. 이 추도비가 얼마나 오래 준비되었고,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은 후에 비로소 건립되기에 이르렀는지 몰랐던 저로서는 당연히 그런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일본에 있는 조선인 추도비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전문가들에게도 추도비와 위령비에 대해 문의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전공이 사회학, 범죄학이었기 때문에 역사학, 특히 한일간 근대사에 대해서 잘 몰랐고, 추도비에 대해서는 더더욱 몰랐습니다.

 

 

한 도록을 통해 일본 전역에 170개의 조선인 추도비가 세워져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20년 동안 일본 취재를 해온 사진작가 안해룡 선생으로부터 자신이 새로 찾은 추도비도 30개에 달하기 때문에, 일본에는 조선인 추도비가 2백개쯤 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201번째 추도비가 되는 셈이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조사했습니다.

 

일본에서도 도움은 답지했습니다. 정세화 선생님뿐 아니라 콘도 도미오 선생님과 신도 도시유키 선생님께서 적극적으로 도와 주셨습니다. 정세화 선생님이 정홍영 선생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안 것도 이때였습니다. 이분들은 무용신 캠페인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셨고, 최승희 연구에도 큰 힘이 되어 주셨기 때문에, 그분들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특히 2차 무용신 캠페인 즈음에 일본에서 <팀아이>가 결성되었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과 정세화 선생님, 그리고 신도 도시유키 선생님께서 주축이 되셨고, 재일 조선학교를 포함해 젊은 학생청년들을 후원하는 것을 목표로 삼으셨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팀아이>라는 이름도 “‘아이들을 사랑()으로 지켜보는(eye) 주체(I)들의 모임이라는 뜻으로 정하셨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이같은 취지에 동조하는 분들이 <팀아이>에 잇달아 참여하셨습니다.

 

일본 <팀아이>의 결성에 자극을 받아 한국에서도 재일조선학교를 후원하기 위한 모임이 만들어졌습니다. 모임의 이름도 일본 <팀아이>에 맞추기 위해 한국 <팀아이>로 정했습니다. 이인형 선생과 저를 포함해 9명의 재일조선학교 후원자들이 이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일본과 한국의 <팀아이>202010월 제2차 무용신 캠페인을 통해 170켤레의 무용신을 마련했습니다. 이 무용신들은 2020년 깅키지역 조선학생 예술경연대회에서 학생들에게 전달되었는데, 콘도 도미오 선생님께서 직접 경연대회장에 가셔서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전하셨습니다.

 

 

이날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정세화 선생님과 함께 경연대회를 모두 참관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준비하신 인사말을 하시기 전에 자신이 직접 관람한 무용작품들에 대한 감상도 전하셨다고 했습니다. 또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인사말 중에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나는 일본인으로서 이분들(=한국의 후원자들)에게 마음이 움직여서 한국과 미국 사람들에게도 호소하면서 힘을 모아 재일 조선학교 학생들에 대한 지원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이 말씀 중 마음이 움직였다는 표현이 제 마음에 꽂혔습니다. 마음이 움직이면 일할 수 있습니다. 제가 무용신 캠페인을 시작한 것도, 90년 전 최승희 선생의 조선무용을 조선학교 학생들이 지금도 이어받고 있다는 사실에 감동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음이 움직이고, 감동한 마음들이 모아지면 뜻 깊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1983년 정홍영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도 마음이 움직이셨던 것 같습니다. “나는 그의 말투에 한 눈에 끌렸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번 움직인 마음이 35년 후에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무용신 캠페인>이라는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저는 특히 정홍영 선생님과 콘도 도미오 선생님 사이의 우정에 감동했습니다. 저런 우정과 동지애를 평생 간직하셨던 분들이라면 기꺼이 따르면서 함께 일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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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世和先生がその昼食宝塚朝鮮人追悼碑をおっしゃっていましたがはあまりけませんでしたそれだけ朝鮮舞踊でいっぱいでした

 

舞踊競演大會わり韓国ってきましたが鄭世和先生202015神戸朝鮮高級学校吹奏楽部年例演奏会るよう招待されましたおそらくがあまりにも舞踊だけに執着していることをそうとしたのでしょうそれではまた大阪きました神戸朝高吹奏楽部年次演奏会素晴らしかったです

 

 

その朝鮮学校部活のレベルがいことがわかりました吹奏楽部演奏非常素晴らしくプロフェッショナル ミュージシャンの演奏りませんでしたどうやって高校生たちが部活練習したことがあんなに素晴らしい演奏につながるのだろうかきました朝鮮学校舞踊部学生たちの公演もとても素晴らしかったというえがよみがえりました

 

韓国でもアメリカの生活でも音楽公演芸術展示会によくっていましたメトロポリタン美術館やニューヨークフィルハーモニー管弦楽団演奏会年間会員権更新しながら定期的参加ニューヨークバレエやオペラもよくましたそうだったので芸術作品公演水準だと自負しています

 

しかし朝鮮学校生徒たちの舞踊公演吹奏楽演奏会にまったくくも邪魔でもありませんでしたそれだけレベルがかったです放課後しずつ練習して學父母々をしませる学芸会のレベル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国際舞台しても遜色ないほど素晴らしかったです

 

 

神戸朝高吹奏楽演奏会でも舞踊部生徒たちが賛助出演をしましたはもう一度朝鮮舞踊ながら2月前競演大會作品感興ることができました

 

そうするうちにふと崔承喜先生朝鮮舞踊をこんなにも立派伝授してきている生徒たちにかしてあげたいといましたそしてそんなえをチョン·セファ先生えました

 

ということで<舞踊靴キャンペーン>まりました20201韓国ってすぐに"朝鮮学校舞踊部学生たちに舞踊靴ろう"というキャンペーンをめました最初目標として神戸朝高舞踊部学生たちの練習公演のために舞踊靴ることにしました

 

 

募金額予想よりくなり神戸朝高生徒たちだけでなく四国朝鮮学校にも舞踊靴えることができました最初舞踊靴キャンペーンに積極的参加してくださった李仁珩(·インヒョン)先生31神戸朝高卒業式参観卒業式舞踊部学生たちがまった舞踊靴しました四国朝鮮学校直接訪舞踊靴手渡しました

 

この舞踊靴意外事件だったのか朝鮮学生がったそうですにはなぜ神戸朝高だけなのか?」というがあったということでたちはさっそく二次武勇靴キャンペーンをめました近畿地域朝鮮高級学校舞踊部生徒たちに舞踊靴されましたところで東京広島学生たちと中級および初級学生たちにもこのらせがえられたことをりました

 

鄭世和先生舞踊靴キャンペーンをけましたそれで2年半にわたって日本全土朝鮮学校舞踊部生徒たちにみんな舞踊靴えることができましたこのキャンペーンに参加してくださった々は韓国日本400この々が寄付した2700ウォンの基金1100舞踊靴えることができました

 

 

後日がある朝鮮学校訪問した、「先生舞踊靴2けました中級学校にももらって高級学校進学したにまたもらいましたという生徒がいました

 

その学生言葉舞踊部学生たちが練習をとても熱心にするそうですそれで舞踊靴月行けず舞踊靴2ずつれたりするそうです

 

それをいてからどうしてもたちが舞踊化キャンペーンをもっと頑張らないといけないうようになり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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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화 선생님이 그날 점식식사 자리에서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말씀하셨지만 저는 그리 귀담아 듣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제 머리 속은 조선무용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무용경연대회가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정세화 선생님은 202015일의 고베조선고급학교 취주악부 연주회에 오라고 초대하셨습니다. 아마도 제가 너무 무용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을 바로잡아 주시려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또 오사카에 갔습니다. 고베조고 취주악부의 연례 연주회는 훌륭했습니다.

 

 

그때 저는 조선학교의 동아리활동 수준이 높은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취주악단의 연주는 매우 훌륭했고 프로페셔널 음악가들의 연주에 못지않았습니다. 어떻게 고등학생들이 동아리 활동으로 연습한 것이 저렇게 훌륭한 연주로 이어지는 것일까? 놀라웠습니다. 조선학교 무용부 학생들의 공연도 매우 훌륭했었다는 생각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저는 한국에서나 미국 생활 중에도 음악 공연이나 예술 전시회를 자주 다녔습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나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회는 연간 회원권을 갱신해 가면서 정기적으로 참석했고, 뉴욕 발레와 오페라도 자주 보았습니다. 그 때문에라도 저는 예술 작품이나 공연을 보는 수준이 높은 편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학교 학생들의 무용공연이나 취주악콘서트는 제 눈이나 귀에 전혀 거슬리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수준이 높았습니다. 방과 후에 조금씩 연습해서 학부모님들을 즐겁게 하는 학예회 수준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국제무대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했습니다.

 

 

고베조고 취주악 연주회에서도 무용부 학생들이 찬조출연을 했습니다. 저는 다시 한 번 조선무용을 보면서, 두 달 전에 보았던 경연대회의 작품들의 감흥을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최승희 선생의 조선무용을 이렇게도 훌륭히 전수해 오고 있는 학생들에게 무언가 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정세화 선생님께 전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무용신 캠페인>이 시작되었습니다. 20201월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저는 조선학교 무용부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보내자는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첫 목표로 고베조고 무용부 학생들의 연습과 공연을 위해 무용신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모금액이 예상보다 많아져서 고베조고 학생들에게뿐 아니라 시코쿠조선학교에도 무용신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무용신 캠페인에 적극 동참해 주신 이인형 선생과 함께 저는 31일의 고베조고 졸업식을 참관했고, 졸업식 후에 무용부 학생들이 모인 자리에서 무용신을 전달했습니다. 시코쿠조선학교도 직접 방문해서 무용신을 전달했습니다.

 

이 무용신 선물이 뜻밖의 사건이었는지 조선학생들 사이에 소문이 퍼졌다고 합니다. 소문 중에는 왜 고베조고뿐인가?”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해서, 우리는 바로 2차 무용신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깅키지역 고급학교 무용부 학생들에게 무용신이 전달되었습니다. 그런데 도쿄와 히로시마의 학생들과 중급 및 초급학생들에게도 이 소식이 전해진 것을 알았습니다.

 

정세화 선생님과 저는 무용신 캠페인을 계속했습니다. 그래서 약 2년 반에 걸쳐서 일본 전역의 조선학교 무용부 학생들에게 모두 무용신을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캠페인에 참여해 주신 분들은 한국과 일본에서 4백명에 이르렀고, 이분들이 기부하신 약 27백만원의 기금으로 11백 켤레의 무용신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후일 제가 어떤 조선학교를 방문했을 때, “선생님, 저는 무용신을 두 번이나 받았어요. 중급학교 때에도 받았고, 고급학교 진학한 뒤에 또 받았어요하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의 말이 무용부 학생들이 연습을 아주 열심히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헝겊 무용신은 몇 달 가지 못하고, 가죽 무용신도 일 년에 두어 켤레씩 망가지곤 한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우리가 무용신 캠페인을 더 열심히 벌여야 할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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はソウル国立大学社会学ニューヨーク州立大学院犯罪学勉強した研究者です20年間アメリカの大学勤務した韓国2017から独立研究者として朝鮮舞踊家崔承喜(チェ·スンヒ)先生研究めました研究分野犯罪から芸術えてせでした

 

2017年夏崔承喜先生のヨーロッパ公演調査しながらそののダンスと人生魅了されましたヨーロッパの取材記執筆すぐにアメリカと日本公演調べましたアメリカ公演くなかったのですぐわらせることができましたが崔承喜先生日本公演調査にはくの時間がかかりました日本崔承喜先生舞台活動期間一番長かったからです

 

 

日本調査2018年夏からまりました北海道名寄から沖縄那覇まで日本42都市崔承喜先生公演調べました3年間収集された新聞雑誌記事数百件撮影された都市劇場写真数千枚しました

 

くの資料収集しましたが依然として崔承喜先生りを推測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ほとんどの舞踊資料写真であり映像資料一件もなかったからです朝鮮解放された北韓った崔承喜先生映像資料はたまにありましたが1930年代風靡した彼女代表作品映像としてっていませんでした

 

崔承喜朝鮮舞踊特徴ともいえるきときをしくせる映像はほとんどありませんでした日本とヨーロッパとアメリカの公演評論記事みながらてくるダンス動作する叙述じて崔承喜先生舞踊姿想像してみるだけでした

 

 

201910京都大阪神戸岡山いながら崔承喜先生関西公演調べていました京都調査中偶然朝鮮学校そこでチョ·ミョンホ校長先生とユン·ギョンスク舞踊教員うことができましたらは1031から112まで大阪在日朝鮮学生中央芸術競演大會かれそのコンテストの舞踊コンテストもまれるとえてくれました

 

月後大阪大阪朝鮮高級学校講堂かれた舞踊競演大會3日間ずっと参観しましたそれは研究起爆剤になりました文章写真だけで朝鮮武勇りを実際たからです生徒たちのダンスの動作これまで研究してきた崔承喜先生のダンスにいないとはっきりとじることができました

 

 

自分研究目的のために写真映像撮影しましたが今振ってみるとそのほとんどはちませんっているほどえてえるだけじられるものですが当時朝鮮舞踊実際をよくりませんでした写真映像すことはできませんでしたが生徒たちの競演大會じて崔承喜先生のダンスにする貴重糸口たことはらかでした

 

この舞踊競演大會はもうつの運命的出会いました鄭世和先生ったのです競演大會初日20191031でしたまれつき社交性鄭世和先生をかけてきてはなぜこの競演大會参観しているのかをおしましたそうして二人対話まりたちの出会いは共助協力につながりました

 

在日同胞社会しい鄭世和先生から朝鮮学校朝鮮舞踊についておその情報はこれまでばらばらにまれていた資料秩序生命力みました崔承喜朝鮮舞踊研究にもみがつきれないように熱心いていきました

 

 

その鄭世和先生昼食をとりながらめて宝塚朝鮮人追悼碑建立されるときましたそのはそれがどういうことなのかもからず朝鮮舞踊夢中になったになぜそんなことをおっしゃったのかも理解できませんでした

 

ところでそのおっしゃったその言葉4ぎた今日宝塚朝鮮人追悼碑についてこのかせるきっかけになり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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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서울국립대학교에서 사회학, 뉴욕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범죄학을 공부한 연구자입니다. 20년간 미국 대학에서 근무한 후에 한국에 돌아와, 2017년부터 독립연구자로 조선무용가 최승희 선생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연구 분야를 범죄에서 예술로 바꾸니 행복했습니다.

 

2017년 여름, 최승희 선생의 유럽공연들을 조사하면서 그분의 춤과 삶에 매료되었습니다. 유럽 취재기 집필을 마치고, 곧바로 미국과 일본 공연을 조사했습니다. 미국 공연은 많지 않았으므로 금방 끝낼 수 있었지만, 최승희 선생의 일본 공연 조사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일본은 최승희 선생의 주요 무대였고 활동 기간도 가장 길었기 때문입니다.

 

 

일본 조사는 2018년 여름부터 시작됐습니다. 저는 홋카이도 나요로에서 오키나와의 나하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42개 도시를 방문해 최승희 선생의 공연을 조사했습니다. 3년 동안 수집된 신문잡지의 기사가 수백 건, 촬영된 도시와 극장의 사진들이 수천 장에 이르렀습니다.

 

많은 자료를 수집했지만 저는 여전히 최승희 선생의 춤사위를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무용 자료는 글과 사진이었고 영상 자료는 한 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이 해방된 후 북한으로 간 최승희 선생의 영상 자료는 더러 있었지만, 1930년대에 풍미했던 그의 대표작품들은 영상으로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특히 최승희 조선무용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발동작과 어깨동작을 자세히 보여주는 영상이 거의 없었습니다. 저는 일본과 유럽과 미국 공연의 평론기사들을 읽으면서 이따금씩 나오는 춤 동작에 대한 서술을 통해 최승희 선생의 무용 자태를 상상해 볼 뿐이었습니다.

 

 

201910, 저는 교토와 오사카, 고베와 오카야마를 다니면서 최승희 선생의 간사이 공연을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교토 조사 중에 우연히 조선학교를 방문했고, 거기에서 조명호 교장선생님과 윤경숙 무용교원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1031일부터 112일까지 오사카에서 <재일조선학생 중앙예술경연대회>가 열리며, 그 경연대회 중에 무용경연대회도 포함된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한 달 후에 저는 다시 오사카에 갔고, 오사카조선고급학교 강당에서 열린 무용경연대회를 3일 동안 내내 참관했습니다. 그것은 제 연구에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글과 사진으로만 보던 조선무용의 춤사위를 실제로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의 춤동작이 그동안 내가 연구해 오던 최승희 선생의 춤사위임에 틀림없다고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제 연구목적을 위해서 사진과 영상을 촬영했습니다만, 지금 돌아보면 그 대부분은 유용하지 않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낄 수 있는 법인데, 당시에 저는 조선무용의 실제를 잘 몰랐습니다. 쓸모 있는 사진이나 영상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학생들의 경연대회를 통해서 최승희 선생의 춤에 대한 귀중한 실마리를 얻은 것은 분명했습니다.

 

이 무용경연대회에서 저는 또 하나의 운명적인 인연을 만났습니다. 정세화 선생님을 만난 것입니다. 경연대회의 첫날인 20191031일이었습니다. 천성적으로 사교성이 좋으신 정세화 선생님이 말씀을 걸어오셨고, 저는 왜 이 경연대회를 참관하고 있는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가 시작되었고, 우리의 만남은 공조와 협력으로 이어졌습니다.

 

재일동포 사회를 잘 아시는 정세화 선생님으로부터 조선학교와 조선무용에 대한 말씀을 들었고, 그 정보는 그동안 중구난방으로 쌓여있기만 했던 나의 자료에 질서와 생명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최승희의 조선무용 연구도 탄력을 받기 시작했고, 저는 잊어버리지 않도록 부지런히 글을 써 나갔습니다.

 

 

그날 정세화 선생님과 점심을 먹으면서 저는 처음으로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건립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때는 그게 무슨 말씀인지도 몰랐고, 조선무용에 푹 빠진 저에게 그런 말씀을 왜 하셨는지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신 그 말씀이 4년 뒤인 오늘 제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대한 이 글을 쓰게 만드는 계기가 됐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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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8ウリ學校舞踊靴日本訪問団宝塚訪問しますこの宝塚訪問われたのにはいお便りがあります100年以上時間われることでもありくの々の配慮友愛努力んだ結果だからです

 

これは20世紀前半韓日間不幸歴史橫絲貫通しているでも両国市民いにせてくれた尊重感謝人間愛縱絲でしっかりとまれてられた物語でもあります

 

 

この1914朝鮮人労働者金炳順(キム·ビョンスン)さんが宝塚くなったことからまります金炳順さんは故郷江陵宝塚移住神戸水道工事参加したところトンネル落盤事故くなりました1915南益三(ナム·イクサム)張長守(チャン·ジャンス)さんも同様事故くなり19293には福知山線改修工事中にダイナマイト爆発事故尹吉文(ユン·ギルムン)吳伊根(·イグン)さんがくなりました

 

この々のはすぐにられました類似事故日本人朝鮮人わず死者かったからです鉄道工事くなったお二人遺体火葬されらないところにかれました水道公社くなった3遺体事故現場から玉瀬村められて葬儀われ参拝墓けられましたがこうした事情玉瀬世界にはられていませんでした

 

5世間られたのは半世紀ぎたでした宝塚郷土歴史家鄭鴻永(チョン·ホンヨン)先生近藤富男先生1983からこの地域朝鮮人痕跡めました新聞記事調べて尹吉文,吳伊根さんの死亡ニュースをつけられ宝塚踏査しながら金炳順南益三張長守さんの死亡事実らかにしました

 

 

それは簡単なこと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当時はキーワードで検索できるデータベースもなかったのでいちいち新聞をめくりながら調べるか記事のスクラップに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県立アーカイブがなかったときなので各地域官庁保管されている記録すために公務員にお世話にな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さな糸口でもてきたら現地訪問して調住民たちに探問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

 

苦労してめられた資料証言鄭鴻永先生著書歌劇のもうつの歴史:宝塚朝鮮人1997)』にまとめられましたこのには3くなった神戸水道工事2くなった旧国鉄福知山線改修工事しくされています

 

神戸水道工事犠牲者については死亡後事情つけられませんでしたが福知山線鉄道工事死亡者記録事故現場確認することができ二人はそのから毎年尹吉文吳伊根ンさんの命日326わせて慰霊祭ってきました時間つにつれこの慰霊祭にはますますくの日本人活動家在日朝鮮人参加しました

 

20001鄭鴻永先生他界された近藤富男先生慰霊祭ける一方、「犠牲者のための追悼碑ててほしいという鄭鴻永先生遺志地域々のけをりて宝塚朝鮮人追悼碑建設するために努力しました

 

 

追悼碑建設2月後えた2020223近藤富男先生教師時代同僚であり宝塚地域社会活動家として一緒いていた大黑澄枝先生じてくべきニュースをりました神戸水道工事くなった3朝鮮人位牌玉瀬滿福寺られていて毎年824地元婦人会とともに無縁故者参拝をしてきたというニュースでした

 

そこで近藤富男先生大黑澄枝先生滿福寺足立泰敎足立智敎僧侶5朝鮮人犠牲者一緒える追悼碑てることになりついに2020326切畑園前親水広場追悼碑建立されました鄭鴻永-近藤富男研究チームが調査めて35鄭鴻永先生他界されてから20ぶりのことでした

 

宝塚朝鮮人追悼碑について特別関心つようになったのはこの追悼碑建立するためにくの々がどれほど努力したかにづき感動したから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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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8[우리학교 무용신] 일본 방문단은 다카라즈카를 방문합니다. 이 다카라즈카 방문이 이루어지게 된 데에는 긴 사연이 있습니다. 1백년이 넘는 시간 끝에 이루어지는 일이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의 배려와 우애의 노력이 낳은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20세기 전반 한일간의 불행했던 역사가 씨줄로 관통하는 중에도, 양국 시민들이 서로에게 보여준 존중과 감사의 인간애가 날줄로 단단하게 짜여서 만들어진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는 1914년 조선인 노동자 김병순씨가 다카라즈카에서 사망하신 것으로 시작됩니다. 김병순씨는 고향 강릉을 떠나 다카라즈카로 이주, 고베수도공사에 참가했다가 터널 낙반사고로 사망하셨습니다. 1915년 남익삼, 장장수씨도 비슷한 사고로 사망하셨고, 19293월에는 후쿠치야마선 개수공사 중에 다이너마이트 폭발 사고로 윤길문, 오이근씨가 사망하셨습니다.

 

이분들의 죽음은 이내 잊혀졌습니다. 유사한 사고는 많았고, 일본인과 조선인을 가리지 않고 사망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철도공사에서 사망하신 두 분의 주검은 화장되었고 유해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뿌려졌습니다. 수도공사에서 사망하신 세 분의 유해는 사고 현장에서 가까운 타마세 마을에 거두어져서 장례도 치러지고 참배묘도 마련되었지만, 이런 사정은 타마세의 바깥 세계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다섯 분의 죽음이 다시 세상에 알려진 것은 반세기가 지난 후였습니다. 다카라즈카의 향토역사가 정홍영 선생님과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1983년부터 이 지역의 조선인들의 흔적을 찾기 시작하셨습니다. 신문기사를 뒤져서 윤길문, 오이근씨의 사망 소식을 찾아내셨고, 다카라즈카를 방방곡곡 답사하시면서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의 사망 사실도 밝혀내셨습니다.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는 키워드로 검색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도 없었으니 일일이 종이신문을 넘겨가며 조사하시거나 기사 스크랩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현립 아카이브가 없었을 때이므로 각 지역 관청에 보관된 기록을 찾기 위해 공무원들에게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조그만 실마리라도 나오면 현지를 방문해서 살펴보고, 주민들에게 탐문해야 했습니다.

 

어렵게 모아진 자료와 증언들은 정홍영 선생님의 저서 <가극의 거리의 또 하나의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에 정리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세 분이 사망하신 고베수도공사와 두 분이 사망하신 구국철 후쿠치야마선 개수공사가 자세히 서술되어 있습니다.

 

고베수도공사 희생자에 대해서는 사망 이후의 사정을 찾아내지 못하셨지만, 후쿠치야마선 철도공사 사망자에 대한 기록과 사고현장을 확인하실 수 있었고, 두 분은 그때부터 매년 윤길문, 오이근씨의 기일(326)에 맞춰 위령 제사를 드려오셨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이 위령제사에는 점점 더 많은 일본인 활동가들과 재일동포들이 참여하셨습니다.

 

20001월 정홍영 선생님께서 타계하신 후에도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위령 제사를 계속하시는 한편, “이 두 분을 위한 추도비를 세웠으면 좋겠다는 정홍영 선생님의 유지를 받들어, 지역 인사들의 도움을 얻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건립하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추도비 건립을 두 달 앞둔 2020223일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교사 시절 동료이자 다카라즈카지역 사회활동가로 함께 일하시던 다이꼬꾸 스미애 선생님을 통해 놀라운 소식을 전해 받았습니다. 고베수도공사에서 사망한 세 조선인의 위패가 타마세 만푸쿠지에 모셔져 있고, 매년 824일 지역 부녀회와 함께 무연고자 참배를 드려왔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에 콘도 도미오 선생님과 다이꼬꾸 스미애 선생님, 만푸쿠지의 아다치 타이쿄-아다치 치쿄 스님은 다섯 명의 조선인 희생자를 함께 기리는 추도비를 세우기로 하셨고, 마침내 2020326일 키리하타 사쿠라공원 앞, 신수이광장에 추도비를 건립하셨습니다. 정홍영-콘도 도미오 연구팀이 조사를 시작한 지 35, 정홍영 선생님이 타계하신지 20년만의 일이었습니다.

 

제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 추도비를 건립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분들이 끈질긴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깨닫고 감동했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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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初のコーヒー1555年頃オスマン帝国首都コンスタンティノープル現在のテュルキイェイスタンブール開業したカフベハネkahvehane=cofee houseだったそうですヨーロッパ初期のコーヒー1645にイタリア1652のイギリスのオックスフォードコーヒーハウスでアメリカ最初のコーヒー1676にボストンに開業したロンドンコーヒーハウス(London Coffee House)だそうです

 

 

日本初のコーヒー可否茶館(1888-1892)あるいは放香堂(1874-?)であることはこれまでてきたようですが自然韓国初のコーヒーいつどこでオープンしたのか疑問うようになりますもう一度リサーチをみました

 

しばらく1923京城本町3丁目(=ソウル忠武路3)開店した二見京城茶房元祖われていましたがこれは雑誌青色紙(19385月号)掲載された京城茶房盛衰記著者老茶客(筆名)がそのようにべているからです

 

しかし最近調査によりますと<二見>開業1923ではなく1926822それより9年前1917京城本町2丁目90番地<ダリヤ>という喫茶店開業していました

 

 

また1909113皇城新聞によりますと1909111南大門停車場喫茶店開業しました<南大門停車場喫茶店(1909-1922)>はその<京城駅グリルおよび喫茶店(1925-1945)>わっていましたが解放後<ソウルグリル>という名前営業けます

 

南大門停車場喫茶店191992姜宇奎カン·ウギュ1855~1920義士新任朝鮮総督斎藤実1858~1936暗殺するために待機していた場所ですところが19091026安重根(1879-1910)義士伊藤博文暗殺しようとハルビン待期していたのも駅内喫茶店でした姜宇奎義士京城駅でコーヒーをんだという記録はありませんが安重根義士挙死直前にコーヒーをんでいたと裁判記録ていましたね

 

 

ところが1899831独立新聞英文版)』には1899洪陵料理店喫茶部開業したという記事掲載されています宿泊食事とともにコーヒーを販売していたところで<ソンタクホテル(1902)もありすでに15年前済物浦開業した<大仏ホテル(1887)>喫茶店ねたホテルでした

 

宿泊食堂兼業していない純喫茶店だけをえると<二見(1926)>京城茶房嚆矢青色紙記事しい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二見>日本人開店したものです

 

明洞伯爵李鳳九(·ボング, 1916-1983)雑誌世代(19644月号)寄稿したカカデュからエリーゼまでというたちのたちがんでいるところにめてオープンした喫茶店1927年春ソウル鍾路区寛勲洞3のレンガ階下映画監督李慶孫(·ギョンソン, 1905-1977)さんがハワイから妙齢女性経営していた<カカデュ>べています

 

 

しかし<カカデュー>開業1927ではなく192891でしたその95<東亜日報(3)"市内寛勲洞しくできた喫茶店<カカデュ>"という記事たからです

 

もう調べたところ総合文芸誌開闢(19265月号)掲載された京城雑貨という寄稿文のような内容まれていました

 

 

李星鎔(·ソンヨン)李灌鎔(·グァンヨン)両博士とキリスト教青年学館のドイツ語教師浪承翼(ナン·スンイク)南大門通小広橋付近京城初伯林館というドイツ式茶店をオープンし営業開始したという

 

京城初のドイツ式茶店白林館(19265)李慶孫開業したカカデュー(19289)より2日本人吉川二見(19268)より3月先開業した朝鮮初純喫茶店で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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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커피점은 1555년경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오늘날 튀르키예 이스탄불)에 개업한 카흐베하네(kahvehane=cofee house)이었다고 합니다. 유럽 초기 커피점은 1645년에 이탈리아, 1652년의 영국의 옥스퍼드 커피하우스였고, 미국 최초의 커피점은 1676년 보스턴에 개업한 런던 커피하우스(London Coffee House)라고 합니다.

 

 

일본 최초의 커피점은 가히사칸(可否茶館, 1888-1892) 혹은 호코도(放香堂, 1874-?)인 것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지만, 자연스럽게 한국 최초의 커피점은 무엇이었으며, 언제 어디에서 문을 열었는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다시 한 번 리서치를 시도했습니다.

 

한동안 1923년 경성 본정 3정목(=서울 충무로3)에 개점한 <후타미(二見)>경성 다방의 원조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이는 잡지 <청색지> 19385월호에 실린 경성다방 성쇠기의 저자 노다객이 그렇게 서술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최근 조사에 따르면 <후타미>의 개업은 1923년이 아니라 1926822이었고, 그보다 9년 전인 1917년 경성 본정 2정목 90번지에 <다리야>라는 끽다점도 개업된 바 있었습니다.

 

 

1909113일의 <황성신문>에 따르면 1909111<남대문 정거장 끽다점>이 개업했습니다. <남대문 정거장 끽다점(1909-1922)>은 이후 <경성역 그릴 및 끽다점(1925-1945)>으로 바뀌었다가, 해방 후에는 <서울역 그릴>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영업을 계속합니다.

 

<남대문 정거장 끽다점>191992일 강우규姜宇奎, 1855-1920) 의사가 신임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1858-1936)를 암살하기 위해 대기하던 곳입니다. 그런데 19091026일 안중근 의사가 히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려고 하얼빈역에서 대기하던 곳도 역내 끽다점이었습니다. 그때 강우큐 의사가 경성역에서 커피를 마셨다는 기록은 없지만, 안중근 의사는 거사 직전에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고 재판기록에 나와 있더군요.

 

 

그런데 1899831일의 <독립신문(영문판)>에는 1899<홍릉 요리점 끽다부>가 개업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숙박 및 식사와 함께 커피를 판매하던 곳으로 <손탁호텔(1902)도 있었고, 이미 15년 전 제물포에 개업한 <대불호텔(1887)>도 끽다점을 겸한 호텔이었습니다.

 

숙박이나 식당을 겸업하지 않은 순끽다점만 따진다면 <후타미(1926)>을 경성 다방의 효시로 본 <청색지> 기사가 옳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후타미>는 일본인이 개점한 것입니다.

 

명동백작 이봉구는 잡지 <세대(19644월호)>에 기고한 카카듀에서 엘리제까지라는 글에서 우리사람 손으로 우리들이 사는 곳에 처음으로 문을 연 다방은 1927년 봄 서울 종로구 관훈동 초입 3층 벽돌집 아래층에 영화감독 이경손씨가 하와이에선가 온 묘령여인과 더불어 경영하던 <카카듀>”라고 서술했습니다.

 

 

그러나 <카카듀>의 개업은 1927년이 아니라 192891일이었습니다. 그해 95일의 <동아일보(3)시내 관훈동에 새로난 끽다점 <카카듀>”라는 기사가 났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조사해 보니 종합 문예지 <개벽> 19265월호에 실린 경성잡화(京城雜話)”라는 기고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성용(李星鎔), 이관용(李灌鎔) 양 박사와 기독교 청년학관의 독일어 교사 낭승익(浪承翼)군은 남대문통 소광교 부근에 경성 초유의 <백림관(伯林館)>이라는 독일식 다점을 열고 영업을 개시하였다 한다.”

 

경성 초유의 독일식 다점 <백림관(19265)>은 영화감독 이경손이 개업했던 <카카듀(19289)>보다 2, 일본인 요시카와(吉川)<후타미(19268)>보다 석 달 앞서 개업한 조선 최초의 순끽다점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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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最古のコーヒー東京可否茶館であったというのが定説ですが神戸放香堂最初のキッサテンだったという主張もあります

 

日本にコーヒーが最初紹介されたのは1700 年頃長崎出島でしたここに出入許可貿易従事していたオランダの商人たちがコーヒーをんだという記録っています

 

 

また大田南畝(1749-1823)随筆集瓊浦又綴(1804)(コーヒーが)くしてふるにえず言及されていましたしかしこれは日本人ではなくオランダ風習紹介したものですので日本のコーヒー歴史というよりは前史るべきでしょう

 

日本開港1853以後横浜居留地にもコーヒーハウスが営業中でした1864開業した<ビクトリア·コーヒーハウス(Victoria Coffee House)><カフェ·デュ·ジャポン(Cafe du Japon)><アリエカフェ(Allier Cafe)>1870開店した<カフェ·デュ·コメックス(Cafe du Commerce)>がそれですしかし外国名前からこれらのカフェも外国人アメリカイギリスフランス出入であり日本人コーヒーとはえにくいです

 

 

しかし1874神戸元町開店した放香堂」、1876東京浅草観音堂境内開業した御安見所コーヒー茶店」、1886東京·日本橋にオープンした洗愁亭その場所名前から日本人のコーヒーでした

 

この一番早時期開店した放香堂記録った最初日本コーヒーとしてめられています。 「放香堂存在証明する文献全部3つあります

 

放香堂歴史です。 「芳香堂天正年間1573~1591)、京都相楽郡和束町宇治茶農場天保年間1830~1843)、東源兵衛宇治茶江戸販売めたといいます1858松平家茶菓子商人指定され、「放香堂という商号授与されました

 

 

1868神戸港開港、「放香堂神戸市栄町通宇治茶輸出商館=貿易会社開業インドと東南アジアに設置された日本人茶貿易1874には神戸市元町京都から生産した宇治茶とインドから輸入したコーヒーを販売する小売店放香堂開店しました当時、「放香堂宇治茶やコーヒーの販売だけでなく九谷焼という陶器おそらく茶器っており郵便物っている店舗だったそうです

 

218781226読売新聞掲載された放香堂営業広告ですこの広告文では、「焦製飲料コフィ―:弊店にて御飲用或にて御求共御自由というフレーズがあります。「焦製飲料とは、「めてったということですのでつまりコーヒーのことです。 「放香堂コーヒーを販売しただけでなく店内でコーヒーを注文してむこともできたコーヒーだったのです

 

 

3当時神戸主要商店版画としていた豪商神兵湊(1882)というですでも神戸市立博物館所蔵されているこの店舗風景画版画集には、「放香堂かれていますが、「宇治製銘茶という看板印度産加琲という看板んでげられており、「兵庫県下神戸元町通3丁目という住所かれています

 

神戸放香堂1880からは貿易業務中断宇治茶やコーヒー紅茶販売専念していたということでなくとも6年以上開業しているので東京可否茶館1888-1892)」より開業期間いです。 「放香堂廃業時期られていませんが2015神戸元町同名のコーヒー専門店開業歷史いでいます

 

 

一方今日まで開業している最古のコーヒー専門店19198開業105年間営業している東京人形町喫茶去快生軒であることがられ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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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고의 커피점이 도쿄의 가히사칸(可否茶館)이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고베의 호코도(放香堂)가 첫 깃사텐(喫茶店=커피점)이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일본에 커피가 처음 소개된 것은 1700년경 나가사키(長崎)의 테지마(出島)였습니다. 이곳에 출입 허가를 받고 무역에 종사하던 네덜란드 상인들이 커피를 마셨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또 오다 난파(大田南畝, 1749-1823)의 수필집 <케이호유데츠(瓊浦又綴, 1804)>“(커피가) 탄내가 나서 맛을 참을 수 없다(くしてふるにえず)”고 언급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일본인이 아닌 네덜란드인들의 풍습을 소개한 것이므로, 일본 커피점의 역사라기보다는 전사(前史)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일본 개항(1853) 이후 요코하마 거류지에도 커피하우스가 영업 중이었습니다. 1864년에 개업한 빅토리아 <커피하우스(Victoria Coffee House)><카페 뒤 자폰(Cafe du Japon)><알리예 카페(Allier Cafe)>, 1870년에 개점한 <카페 뒤 코멕스(Cafe du Commerce)>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외국 이름으로 보아 이 카페들도 외국인(미국인, 영국인, 프랑스인)의 출입처였고 일본인 커피점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1874년 고베 모토마치(元町)에 개점한 <호코도(放香堂)>, 1876년 도쿄 아사쿠사 관음당 경내에 개업한 <오야스미도코로 커피차점(御安見所コーヒー茶館)>, 1886년 도쿄 니혼바시에 문을 연 <세수정(洗愁亭)>은 그 장소와 이름으로 보아 일본인들의 커피점이었습니다.

 

이중 가장 이른 시기에 개점한 <호코도>는 기록에 남은 최초의 일본 커피점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호코도>의 존재를 증명하는 문헌증거는 모두 3개입니다.

 

첫째는 <호코도>의 역사입니다. <호코도>는 덴쇼 연간(天正, 1573-1591) 교토 사가라(相楽)군 와츠카초(和束町)에 우지차(宇治茶) 농장을 시작했고, 덴포 연간(天保, 1830~1843) 히가시 겐베(東源兵衛)가 우지차를 에도(=도쿄)에 판매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1858년 마츠다이라(松平) 가문의 다과 상인으로 지정되면서 <호코도(放香堂)>라는 상호를 하사받았습니다.

 

 

1868년 고베항이 개항되면서 <호코도>는 고베시의 에이마치도리(栄町通)에 우지차 수출상관(=무역회사)를 개업해 인도와 동남아시아에 설치된 일본인 마을과 차 무역을 시작했고, 1874년에는 고베시 모토마치에 교토에서 생산한 우지차와 인도에서 수입한 커피를 판매하는 소매상점 <호코도>를 개점했습니다. 당시 <호코도>는 우지차와 커피 판매 뿐 아니라 쿠타니야키(九谷焼)라는 사기그릇(아마도 다기)도 팔았고, 우편물도 취급하는 점포였다고 합니다.

 

둘째는 18781226일의 요미우리(讀賣)신문에 게재된 <호코도>의 영업 광고입니다. 이 광고문에서는 초제음료 커피: 본점에서 음용하거나 가루로 구입하는 것은 자유(焦製飲料コフィ―:弊店にて御飲用或にて御求共御自由)”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초제음료볶아서 만든 음료라는 말이니, 곧 커피를 가리킵니다. <호코도>는 가루커피를 판매했을 뿐 아니라 점포 안에서 커피를 주문해 마실 수도 있었던 커피점이었던 것입니다.

셋째는 당시 고베의 주요 상점들을 판화로 묘사한 <고쇼신페이 미나도노사키가케(豪商神兵湊, 1882)>라는 책입니다. 지금도 고베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점포 풍경화 판화집에는 <호코도>도 묘사되어 있는데, “宇治製銘茶라는 간판과 印度産加琲라는 간판이 나란히 걸려 있고, “효고현 고베 모토마치도리 3라는 주소도 적혀 있습니다.

 

고베의 <호코도>1880년부터는 무역업무를 중단, 우지차와 커피, 홍차 판매에 전담했다고 하니, 적어도 6년 이상 개업했으므로, 도쿄의 <가이사칸(1888-1892)>보다 개업기간이 깁니다. <호코도>의 폐업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2015년 고베 모토마치에 같은 이름의 커피전문집이 다시 개업해 역사를 잇고 있습니다.

 

 

한편, 오늘날까지 개업해 있는 가장 오랜 커피전문점은 19198월 개업해 105년째 영업 중인 도쿄 닌교초(人形町)의 커피점 케이세켄(喫茶去 快生軒)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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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日朝鮮学校舞踊部舞踊神をプレゼントしてきた韓国<チームあい(会長趙誠武)><舞踊靴>会員302023127-30日本大阪宝塚訪問しますこの訪問日本<チームあい(会長近藤卓海事務局長鄭世和)>主管します

 

日本<チームあい>韓国訪問(2022123-8)する答礼訪問としてけられた今回訪日では大阪朝鮮中高級学校開校70周年記念公演観覧(129東大阪市文化創造館)宝塚玉瀬さな音楽会開催(128滿福寺)日程です

 

 

玉瀬滿福寺音楽会20世紀前半韓日両国間不幸過去にもかかわらず100年以上友好善隣けてきた両国市民感謝するためにけられました

 

20世紀初頭朝鮮人労働者5宝塚玉瀬近くの土木工事中事故死亡しました金炳順(キム·ビョンスン, 1914314日死亡)南益三(ナム·イクサム, 1915121日死亡)張長守(チャン·ジャンス, 1915324日死亡)さんは神戸水道改修工事中にトンネル内落盤事故死亡尹吉文(ユン·ギルムン)吳伊根(·イグン)さんは1929326日旧国鉄福知山線鉄道改修工事でダイナマイト爆発事故くなりました

 

 

玉瀬婦人会滿福寺住職金炳順, 南益三, 張長守さんの遺体めて共同墓地埋葬滿福寺こう参拝墓けました滿福寺婦人会1914から3世代れる108年間毎年824無縁故朝鮮人労働者のための慰霊祭ってきました

 

このニュースは2020年2尹吉文吳伊根さんの追悼碑建立準備中だった近藤富男先生わり二人のために準備されていた追悼碑5朝鮮人労働者のための追悼碑拡大2020326武田尾近くの切畑所在長尾山麓園入口親水広場建設されました

 

 

韓国<チームあい><舞踊靴>近藤富男先生要請朝鮮人犠牲者韓国内縁故調査しました5犠牲者のうち金炳順さんの故郷江原道江陵であることが確認された追悼碑建設者慰霊祭事ってきた々に感謝牌贈呈することを江陵市庁請願しました

 

この請願承認され江陵市長名義用意された感謝牌東京所在江原道本部(カン·ビョンジク本部長)けを追悼碑建設2周年えた20223262在日朝鮮人6日本人活動家されました江陵市感謝牌をもらった8です

 

 

鄭鴻永(チョン·ホンヨン、1929-2000、寶塚郷土歴史家)、近藤富男(1950-2020、教師、市民活動家)、金礼坤(キム·レゴン、事業家)、堀内稔(在日朝鮮人史研究家)、飛田雄一(神戸学生青年センター代表)、玉野勢三(彫刻家)、足立泰教と足立智教(万福寺住職)。

 

玉瀬滿福寺音楽会韓国伝統楽器演奏構成されますが李壽哲(·スチョル, 牙箏アジェン)、金賢淑(キム·ヒョンスク, 大笒テグム)、姜惠晟(カン·ヘソン, 伽倻琴カヤグム)、朴寅浩(パク·インホ, 大笒などの演奏者出演しますそのにも, 朴正煥(パク·ジョンファン)先生歌唱徐香淑(·ヒャンスク)さんもオカリナ演奏(ピアノ伴奏尾崎友里音響境 雅彦)として参加する予定です

 

慰霊祭事追悼碑建立感謝牌贈呈韓日両国市民訪問答礼訪問などで宝塚江陵兵庫県江原道交流頻繁になり具体的協力策じられている一方朝鮮人犠牲者のゆかりもさらに調査中です

 

 

尹吉文吳伊根さんの故郷慶尚南道高城南益三さんの故郷慶尚南道統営調査され文献確認作業められていますが90ぎたことなので調査確認困難があります

 

一方韓日<チームあい><舞踊靴>20203から在日朝鮮学校舞踊部舞踊靴えてきましたが20228までに6にわたって在日朝鮮学校ての舞踊部生徒約1100舞踊靴手渡しました<チームあい><舞踊靴>今後毎年5舞踊部新入生舞踊靴える予定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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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조선학교 무용부에 무용신을 선물해 온 한국의 <팀아이(회장 조성무)><무용신모임> 회원 30명이 2023127-30일 일본 오사카와 다카라즈카를 방문합니다. 이 방문은 일본의 <팀아이(회장 콘도 타쿠미, 사무국장 정세화)>가 주관합니다.

 

일본 <팀아이>의 한국방문(2022123-8)에 대한 답방으로 마련된 이번 방일에서는 오사카조선중고급학교의 개교 70주년 기념공연 관람(129, 창조관)과 다카라즈카 타마세에서 작은 음악회 개최(128, 만푸쿠지)가 주요 일정입니다.

 

 

타마세 만푸쿠지 음악회는 20세기 전반 한일 양국 사이의 불행했던 과거에도 불구하고 1백년 이상의 우호와 선린을 이어온 양국 시민들에게 감사하기 위해서 마련되었습니다.

 

20세기초 조선인 노동자 5명이 다카라즈카 타마세 인근의 토목공사 중에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김병순(1914314일 사망), 남익삼(1915121일 사망), 장장수(1915324일 사망)씨는 고베수도 개수공사 중에 터널 내 낙반 사고로 사망했고, 윤길문, 오이근씨는 1929326일 구국철 후쿠치야마선 철도개수공사에서 다이너마이트 폭발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타마세 부녀회와 만푸쿠지의 주지스님은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의 시신을 거두어 마을 공동묘지에 매장하고 만푸쿠지 건너편 언덕에 참배묘를 마련했습니다. 만푸쿠지와 부녀회는 1914년부터 3세대가 흐르는 108년 동안 매년 824일 무연고 조선인 노동자들을 위한 위령 제사를 지내왔습니다.

 

이 소식은 2020년 2, 윤길문, 오이근씨의 추도비 건립을 준비 중이던 콘도 도미오(1950-2022) 선생에게 알려졌고, 두 사람을 위해 준비되던 추도비는 다섯 조선인 노동자를 위한 추도비로 확대되어, 2020326일 다케다오 인근 기리하타 소재 나가오산 기슭의 사쿠라공원 입구 신수이광장에 건립되었습니다.

 

 

한국 <팀아이><무용신모임>은 콘도 도미오 선생의 요청으로 조선인 희생자들의 한국내 연고를 조사했습니다. 5명의 희생자 중 김병순씨의 고향이 강원도 강릉임이 확인된 후, 추도비 건립자들과 위령제사를 지내온 분들에게 감사패를 증정해 줄 것을 강릉시청에 청원했습니다.

 

이 청원은 승인되어 강릉시장 명의로 준비된 감사패가 도쿄 소재 강원도 본부(강병직 본부장)의 도움을 얻어, 추도비 건립 2주년을 맞은 2022326, 2명의 재일조선인과 6명의 일본인 활동가들에게 전달됐습니다. 강릉시의 감사패를 받게 되신 분들은 다음의 8분입니다.

 

 

정홍영(1929-2000, 향토역사가), 콘도 도미오(1950-2020, 교사, 시민활동가), 김례곤(사업가), 호리우치 미노루(재일조선인사 연구가), 히다 유이치(고베학생청년센터 대표), 타마노 세이조(조각가), 아다치 타이쿄와 아다치 치쿄(만푸쿠지 주지).

 

타마세 만푸쿠지 음악회는 한국의 전통악기 연주로 구성되는데, 이수철(아쟁, 생황), 김현숙(대금), 강혜성(가야금), 박인호(대금) 4명의 연주자들이 출연하게 됩니다. 그밖에도 박정환 선생님은 가창으로, 서향숙 선생님도 오카리나 연주로 참여하실 예정입니다.

 

위령제사와 추도비 건립, 감사패 증정과 한일 양국 시민들의 방문과 답방 등으로 다카라즈카와 강릉, 효고현과 강원도 사이의 교류가 빈번해지고, 구체적인 협력 방안도 강구되고 있는 한편, 다른 조선인 희생자들의 연고도 추가로 조사 중에 있습니다.

 

 

윤길문, 오이근씨의 고향은 경상남도 고성, 남익삼씨의 고향은 경상남도 통영으로 조사되었고, 문헌 확인 작업이 진행 중이지만, 90년이 지난 일이어서 조사와 확인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한편, 한일 <팀아이><무용신모임>20203월부터 재일조선학교의 무용부에 무용신을 전달해 왔는데, 20228월까지 6차례에 걸쳐 재일조선학교의 모든 무용부 학생 약 1,100명에게 무용신을 전달한 바 있습니다. <팀아이><무용신모임>은 앞으로도 매년 5월 무용부 신입생들에게 무용신을 전달할 예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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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阪丸福三和神戸上島西村コーヒーをおすすめしたらそれが日本初期のカフェなのかとかれたがいらっしゃいましたがいます上島1933丸福1934開業したそうなのでそんながしたようですが検索してみるとわかるように日本のコーヒー延元いです

 

記録されている日本最古のコーヒー専門店鄭永慶(ていえいけい, 1858-1894)1888423東京·上野西黒門町開業した可否茶館というのが定説です鄭永慶中国びるとけて日本げた鄭成功(ていせいこう, 1624-1662)子孫アメリカのイェール教育けた通訳士英語教師事業家として活動した人物です

 

 

コーヒー(coffee)またはカフェ(cafe)漢字可否茶きましたが、「かいさんだりカツヒとも発音したという記録もあります意味めるかどうか曖昧なおであったことをると西洋新聞物んでその成功自信がなかったことが推察できそのような商品名前をつけるために苦心した形跡もうかがえます

 

<可否茶館>開業5年後1895経営難廃業創業主鄭永慶自殺ったのをますと当時はコーヒーがめそうにない評価されていたようです。 「可否茶館開業した場所つまり今日東京都台東区上野一丁目可否茶館跡地という名札てられています

 

 

1910にはベルギー公使館のシェフだった奥田駒蔵1882-1925数年間のヨーロッパ生活えた東京·日本橋小網町にコーヒー専門店メイゾン鴻之巣開業しましたメイゾン(maison)(House)というフランス、「ガンノスという意味ですが文学家芸術家まるコーヒー専門店でした

 

191112日本1世代ブラジル移民だった水野龍(1859-1951)東京銀座6丁目にオープンしたカフェパウリスタ上島丸福より20年以上進んだコーヒーです。 「パウリスタとはポルトガルサンパウロという意味ですが水野龍がブラジルにんでいたところがサンパウロだったことからけられた名前でした

 

 

1909ブラジルのコーヒー価格暴落すると水野龍はブラジル政府から年間コーヒー1千俵=500トン無償提供され日本普及、「カフェパウリスタ開業しました<カフェパウリスタ>名古屋神戸横須賀などと中国上海にも支店した日本初のフランチャイズコーヒーショップとして盛業中でしたが1923関東大震災破壊されコーヒー無償提供中断されるとカフェは廃業事業をコーヒーの輸入やコーヒーのローストに縮小しました

 

1970銀座8カフェパウリスタ開店しましたが1978にジョン·レノンと小野洋子がここをれたため世界的名前ら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

 

 

1910年以前にも東京カフェがありました旧制一高(東京大学前身)本郷カツフエがあり早稲田大学にも<早稲田カツフエ>がありましたしかしこれらのカフェはコーヒーではなく洋食屋だったそうです

 

そして1911にはパウリスタ以外にもカフェプランタン(3)カフェライオン(8)開業しましたがパウリスタはコーヒー専門店でしたがプランタンとライオンは美人女級接待けながらおむところでしたこのからカフェとキッサテンが区別されめましたがカフェは女給酒場キッサテンはコーヒー専門店でした

 

 

その大正民主主義時代(1912~1926)蔓延したエログロナンセンスの風潮とともに少女歌劇団各種雑誌全盛時代まりそれとともにカフェという享楽産業やキッサテンというのコーヒー産業成長した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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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의 마루후쿠와 산와, 고베의 우에시마와 니시무라 커피점을 추천 드렸더니, 그게 일본의 초기 카페들인가고 물어오신 분이 계셨습니다만, 아닙니다. 우에시마가 1933, 마루후쿠가 1934년에 개업했다고 하니 그런 생각이 드셨던 것 같은데, 조금만 검색해 보면 알 수 있듯이, 일본 커피점은 연원이 더 오랩니다.

 

기록에 나타난 일본 최고(最古)의 커피 전문점은 테이 에이케이(鄭永慶, 1858-1894)1888423일 도쿄 우에노 니시쿠로몬초(西黒門町)에 개업한 <가히사칸(可否茶館)>이라는 게 정설입니다. 테이 에이케이는 중국 명나라가 망하자 청나라를 피해 일본으로 도망한 테이 세이코(鄭成功, 1624-1662)의 후손으로, 미국 예일 교육을 받은 후 통역사와 영어교사, 사업가로 활동했던 인물입니다.

 

 

커피(coffee) 혹은 카페(cafe)를 간지(漢字)가히차(可否茶)’라고 썼는데, ‘가히사(かいさ)’라고 읽거나 가츠히(カツヒ)’라고도 발음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뜻도 먹을 만한지() 그렇지 않은지() 애매한 차()”이었던 것을 보면, 서양 신문물을 들여오면서 그 성공 여부에 자신을 갖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고, 그런 상품의 이름을 짓기 위해 고심한 흔적도 엿보입니다.

 

<가히사칸>은 개업 5년만인 1895년에 경영난으로 폐업했고, 창업주 테이 에이케이도 자살을 기도했던 것을 보면 당시에는 커피가 먹을 만하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모양입니다. <가히사칸>이 개업했던 자리, 즉 오늘날의 도쿄 다이토구 우에노 1초메에 <가히사칸 유적지>라는 명패가 세워져 있습니다.

 

 

1910년에는 벨기에 공사관의 요리사였던 오쿠다 고마조(奥田駒蔵, 1882-1925)가 수년간의 유럽 생활을 마친 후, 도쿄 니혼바시(日本橋) 고아미쵸(小網町)에 커피전문점 <메이종 간노스(メイゾン鴻之巣)>를 개업했습니다. 메이종(maison)(House)’이라는 프랑스 말이고 간노스기러기 둥지라는 뜻인데, 젊은 문학가와 예술인들이 모이는 커피전문점이었습니다.

 

191112월 일본 1세대 브라질 이민자였던 미즈노 류(水野龍, 1859-1951)가 도쿄 긴자6가에 문을 연 <카페 파울리스타(カフェーパウリスタ)>도 우에시마나 마루후쿠보다 20년 이상 앞선 커피점입니다. ‘파울리스타란 포루투갈 말로 상파울로 사람이라는 뜻인데, 미즈노 류가 브라질에서 살았던 곳이 상파울로였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었습니다.

 

 

1909년 브라질의 커피가격이 폭락하자 미즈노 류는 브라질 정부로부터 커피원두 1천섬(=5백톤)을 무상으로 제공받아 일본에 보급하면서 <카페 파울리스타>를 개업했습니다. <카페 파울리스타>는 나고야와 고베, 요코스카 등과 중국 상하이에도 지점을 내었던 일본 최초의 프랜차이즈 커피숍으로 성업 중이었으나, 1923년 간토 대지진으로 업소들이 파괴되고 커피 무상 제공이 중단되자 카페는 폐업하고 사업을 커피 수입과 원두 로스팅으로 축소했습니다.

 

1970년 긴자8가에 <카페 파울리스타>가 다시 개점되었는데, 1978년 존 레논과 오노 요코가 이곳을 방문하는 바람에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1910년 이전에도 도쿄에 다른 카페가 있었습니다. 구제일고(旧制一高, 도쿄대학교 전신) 앞에 <혼고 카츠후에(本郷カツフエ>가 있었고, 와세다대학교 앞에도 <와세다 카츠후에(早稲田カツフエ)>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카페들은 커피점이 아니라 양식당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11년에는 파울리스타 말고도 <카페 플란탄(カフェー・プランタン, 3)><카페 라이온(カフェー・ライオン, 8)>이 개업했는데, 파울리스타는 커피전문점이었으나 플란탄과 라이온은 미인 여급의 시중을 받으며 술 마시는 곳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카페와 깃사텐(喫茶店)이 구별되기 시작했는데, 카페는 여급 주점이었고, 깃사텐은 커피 전문점이었습니다.

 

 

이후 다이쇼 민주주의 시대(1912~1926)에 만연한 에로그로난센스의 풍조와 함께 소녀가극단과 각종 잡지의 전성시대가 시작되었고, 그와 함께 카페라는 이름의 향락산업과 깃사텐이라는 이름의 커피산업도 덩달아 성장했던 것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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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7, 화요일, <무용신 포럼>으로 예정된 날입니다. 박인호 선생의 발표와 이성섭 선생의 토론이 있게 됩니다. 주제는 사법 개혁인데, 현 정부의 구성과 행정 방향을 볼 때 그 어느 때보다 사법개혁의 필요성이 절실히 느껴지는 시점입니다.

 

이같은 시기에 한국과 일본, 유럽과 미국의 형사사법 제도를 열심히 비교 검토해 오신 박인호 선생은 사법개혁의 필요성 뿐 아니라 그 타당성과 방법론까지 천착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박인호 선생이 뿌리는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서 열매가 맺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첫 번째 <무용신 포럼>에서는 제가 한달 반의 일본 취재 결과를 보고 드렸습니다. 3년 만에 둘러본 조선학교, 특히 무용부의 현황과 무용경연대회를 참관한 소감을 말씀드렸습니다.

 

그에 더해 <다카라즈카 조선인추도비>가 건립되고, 강원도와 강릉시가 건립에 수고하신 분들에게 감사패를 전하게 된 과정, 그리고 이후 현지 상황도 간략히나마 보고를 드렸습니다.

 

<무용신 포럼>은 그 자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무용신> 회원이시라면 무슨 주제이든 자신의 생각과 조사한 결과를 정리해서 발표할 수 있는 장을 만든 것이지요. 그래서 2회 포럼에서는 박인호 선생의 사법개혁이 포럼 주제로 선택된 것이지요.

 

2월에 있을 세 번째 포럼에서는 이원영 선생께서 자연치유에 대한 발표와 토론을 이끌어 주실 예정입니다. 한국과 미주에서 오랜 기자생활을 하셨고, 그 바쁜 와중에 한의학에 조예를 가지시게 된 것은 우리의 웰빙과 웰다잉을 위해 건강한 생활습관과 질병에 대한 자연치유 접근이 필요하다고 느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밖에도 <무용신> 회원분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간과 장소, 발표 방식과 매체 등을 잘 준비해서, 메시지가 잘 전달되는 노력하겠습니다.

 

포럼이라고 해서 항상 딱딱하고 재미없어야 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우리가 다같이 알면 좋을 주제가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떤 주제와 어떤 방법이라도 구사해 볼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많은 신청과 참여를 부탁드려요.

 

오늘(1/17) 포럼 후에는 방문단 예비모임이 이어집니다만, 사실 준비는 이미 거의 다 되어 있습니다. 이번에 실무를 맡아주신 준비위원들께서 워낙 꼼꼼하고 깔끔하게 자기 맡은 일을 잘 준비해 주시는 바람에, 우리의 출발 준비는 거의 완벽에 가깝습니다.

 

특히 일본 <팀아이> 선생님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한국의 준비사항이 현저하게 줄어들었고, 이제 저희는 가기만 하면 될 정도로 잘 예비된 방문이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따라서 오늘의 예비모임은 서로 만나 인사를 나누고, 궁금한 점을 의논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오늘은 또 이번 방문단에 적극 참여해 주실뿐 아니라 준비 실무에도 진짜 애써 주신 <대륙학교> 회원 분들도 참여하시게 되며, <무용신> 회원들에게 <대륙학교>의 연혁과 활동, 목표와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 등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부탁했습니다. 이 순서는 <희망래일>의 상임이사이시자 <대륙학교>의 교감선생님이신 황광석 선생께서 담당해 주실 것입니다.

 

끝으로, <무용신>의 올해 목표와 계획에 대해서도 발표드리려고 합니다. 이것은 제가 말씀드리게 되는데,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올해(2023) <무용신>(1) 재일조선학교의 무용부 신입생 약 1백명에게 무용신 선물을 보내고, (2) 연해주 우수리스크의 최재형 민족학교를 지원하는 후원행사도 계속 하고, (3) 상반기의 일본방문에 이어 하반기에는 연해주 방문단을 조직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4) 이 모든 행사를 통해 <무용신> 후원회원이 3백명에 이르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려고 합니다.

 

이런 활동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1) 국내 유관단체 및 해외동포와 연대하면서 (2) 각지의 민족학교와 민족교육을 지원하고, 특히 (3) 민족문화와 예술 활동을 후원하면서, (4) 한민족 교류와 협력, 그리고 궁극적으로 통일운동에 기여하기 위해서입니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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はコーヒーがきですコーヒーにする繊細味覚つマニアではありませんただその一般的りとそしてコーヒーを時間きなだけです一人でも何人でもインスタントコーヒーでもグアメイドリップコーヒーでもどれもきです

 

そのためあちこちりながらいという食堂さなくてもカフェはたまにんでったりします雰囲気ですからずしも専門店でなくてもいいですし古典的でも現代的でもコーヒーさんの室内ったらはただのいいコーヒーショップだといます

 

日本にもよくったので当然いくつかのコーヒーショップをしてみましたったことはかなりありますが日本訪問団大阪宿りましたので古典的雰囲気のコーヒーショップ2はぜひご紹介したいといます

 

 

つはたちの宿からもとても<丸福珈琲店>です珈琲店はコーヒーショップを昔風日本語ですそれよりも喫茶店ばれていましたとは1930年代もっととは19世紀末から1920年代までです

 

丸福珈琲店日本全土29あるそうですが大阪中央区千日前にあるのが1934めて開業した本店です大阪ファイブホテルからは2.5キロれていて電車でわずか2鶴橋-谷町9丁目-日本橋だけくとB26出口のすぐにあります(リトルプリンスの小惑星B612間違えないでください^^)

 

 

千日前丸福本店ですがファイブホテルからもっと上本町にも丸福珈琲店がもうつありますホテルからはいても10分以内距離ですここはまだったことがないので今回行ってみたいです

 

丸福コーヒーががいいかはからげにくいですネイバーやグーグルで検索してみるとレビューがいといますので参考にしてみてくださいはコーヒーの素晴らしさはよくわかりませんが昔風雰囲気かった記憶ですコーヒー以外にも各種ペストリーやデザートもいいときましたがはコーヒー以外のものをべたことはありませんそしてかなりいです^^

 

丸福珈琲店薔薇(2010)という小説登場してもっと有名になったそうです田辺聖子短編つで年下男性5年間恋愛している女性れを準備する過程をとてもよくいた作品だそうです日本語ではバラノアメとびます

 

 

きなのコーヒーショップは上島珈琲店です上島コーヒー本店神戸市西宮市南越木岩町にありますよく上島珈琲店苦楽園本店ばれています

 

上島丸福より1年前1933開店した珈琲店です支店やフランチャイズすのに非常しい丸福とはなり上島珈琲店はいたるところにあります

 

本店とフランチャイズのコーヒーのうかどうかはよく区別できませんでしたですからまあぜひ西宮までかれる必要はありませんし大阪市内のいろいろなところに点在する上島珈琲店れてみてください焙煎したいたコーヒーをったりします

 

 

そのったことのある現代的なコーヒーショップには神戸西村(にしむら)コーヒーと大阪三和(サンワ)コーヒーワークスがあります

 

これらのお丸福上島のように歴史くはありませんがコーヒーのいことでかなり評判場所です三和コーヒーワークスはさなおですが西村コーヒー7ほどの建物全体がコーヒーショップの大型店です

 

 

西村コーヒーくなら2をおめしますコーヒーのですが写真るのに最適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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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커피를 좋아합니다. 커피에 대한 섬세한 미각을 가진 매니아는 아닙니다. 그저 그 일반적인 향과 맛, 그리고 커피를 마시는 시간이 좋을 뿐입니다. 혼자건 여럿이서건, 봉지커피이건 구어메이 드립커피이건 다 좋아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여기저기 다니면서 식당은 찾아다니지 않아도 카페는 더러 골라 다니곤 합니다. 분위기를 타는 편이니까 꼭 전문점이 아니어도 좋고, 고전적이든 현대적이든 커피집 실내가 마음에 들면 저는 그냥 좋은 커피숍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에도 자주 갔으므로 당연히 몇몇 커피가게를 시도해 봤습니다. 다녀본 데는 꽤 많지만, 이번 우리 방문단이 오사카에 숙소를 잡았으므로, 고전적인 분위기의 커피가게 두 군데는 꼭 소개드려 볼까 합니다.

 

 

하나는 우리 숙소에서도 아주 가까운 <마루후쿠(丸福) 고히텐>입니다. 고히텐(珈琲店)은 커피가게를 옛날식으로 부르는 일본말입니다. 그보다 더 옛날에는 기사텐(喫茶店)이라고 부르기도 했었습니다. 옛날이란 1930년대를 가리키고, 더 옛날이란 19세기말에서 1920년대까지입니다.

 

마루후쿠 커피점은 일본 전역에 29개가 있다고 합니다만, 오사카 주오구(中央区)의 센니치마에(千日前)에 있는 것이 1934년에 처음 개업한 본점입니다. 오사카 파이브 호텔에서는 2.5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전철역으로 불과 2(쓰루하시-다니마치9초메-니폰바시)만 가면 B26 출구 바로 앞에 있습니다. (어린왕자의 소행성 B612와 헷갈리지 마시기 바래요.^^)

 

 

센니치마에의 마루후쿠가 본점이지만, 파이브 호텔에서 더 가까운 우에혼마치(上本町)에도 마루후쿠 커피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호텔에서는 걸어가도 10분 이내의 거리입니다. 여기는 제가 아직 가보지 못했고, 이번에 가보고 싶습니다.

 

마루후쿠 커피가 뭐가 좋은 지는 제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네이버나 구글에서 검색해 보시면 후기들이 많을테니까 참고해 보시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커피맛의 탁월함은 잘 모르겠는데, 옛날식 분위기가 좋았던 기억입니다. 커피 말고도 각종 패스트리와 디저트도 좋다고들 하던데, 저는 커피 외에 다른 걸 먹어본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상당히 비쌉니다.^^

 

그리고 이 마루후쿠 커피점은 <장미의 비(薔薇. 2010)>라는 소설에 등장해서 더 유명해졌다고 합니다. 타나베 세이코(田辺聖子)의 대표단편 중의 하나인데, 연하남과 5년째 연애 중인 여성이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을 아주 잘 그린 작품이라고 합니다. 일본말로는 <바라노아메(バラノアメ)>라고 부릅니다.

 

 

제가 나름 좋아하는 커피가게는 <우에시마(上島) 고히텐>입니다. 우에시마 커피점의 본점은 고베시에 가까운 니시노미아(西宮)시의 미나미고시키이와초(南越木岩町)에 있습니다. 흔히 <우에시마 고히텐, 쿠라쿠엔 본점(苦楽園本店)>이라고 불립니다.

 

우에시마 커피점은 마루후쿠보다 1933년에 개점한 커피가게입니다. 그러나 지점이나 프랜차이즈점을 내는 데에 매우 엄격한 마루후쿠와는 달리 우에시마 커피점은 도처에 있습니다.

 

저는 본점의 커피와 프랜차이점의 커피 맛이 다른 지는 잘 구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뭐, 꼭 니시노미아까지 가보실 필요는 없고, 오사카 시내 여러 곳에 산재한 우에시마 고히텐을 방문해 보시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볶은 콩이나 갈은 커피를 팔기도 합니다.

 

 

그밖에 제가 가본 적이 있는 현대적인 커피가게로는 고베의 <니시무라(にしむら) 커피>와 오사카의 <산와 커피웍스(サンワコーヒーワークス)>가 있습니다.

 

이 가게들은 마루후쿠나 우에시마처럼 연원이 오래지는 않지만, 커피 맛이 좋기로 꽤 소문이 난 곳입니다. 산와 커피웍스는 작은 가게지만, 니시무라 커피점은 7층쯤 되는 건물 전체가 커피가게인 대형가게입니다.

 

 

니시무라 커피점에 가신다면 2층을 권합니다. 커피 맛도 맛이지만 사진 찍기 아주 좋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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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ウリ學校舞踊靴]1次日本訪問団(127-30)大阪朝鮮中高級学校70周年記念公演観覧尼崎朝鮮初中級学校訪問することになります

 

在日朝鮮学校名前しずつくなっていますがこれは初級/中級/高級単独学校初中級中高級あるいは初中高級えるからです学校がどんどん統廃合されるからです6-70年代統廃合学校経営効率性のためだったとすれば90年代以降統廃合生徒数減少財政難のためだといいます

 

えば1946設立された尼崎朝連初等學院大島朝鮮初級1967)、尼崎朝鮮中級1975)、立花朝鮮初級1976)、阪神朝鮮初級2001)、尼崎東朝鮮初級2008學校統合今日尼崎朝鮮初級学校となりましたことし2023には境界えて伊丹朝鮮初級学校まで統合する計画だということです

 

 

大阪朝鮮高級学校2018東大阪朝鮮中級学校併合現在大阪朝鮮中高級学校となりました東大阪中級学校19619西金里中学校過密化解消のために創立されましたが1994西大阪初中級学校中級部1999奈良朝鮮初中級学校中級部統合した今回彼自身大阪朝高併合されたものです

 

朝鮮学校設立統廃合日本行政単位都道府県わせて設立された学校法人朝鮮学園めるようですそこで大阪朝鮮中高級学校統合学校法人大阪朝鮮学園伊丹朝鮮初級学校尼崎朝鮮中高級学校併合学校法人兵庫朝鮮学園決定しました

 

学校法人大阪朝鮮学園2022年現在大阪朝鮮中高級学校9つの朝鮮学校管掌兵庫朝鮮学園神戸朝鮮高級学校6つの朝鮮学校管掌しますこれらの朝鮮学院学校敷地建物管理しているようですこれと関連して大阪兵庫朝鮮学院日本のメディアで報道されたことがあります

 

 

201588日付産経新聞には大阪市朝鮮学校市有地5千平方メートルを売却したという記事掲載されました大阪市大阪地裁仲裁のもと中大阪朝鮮初級学校敷地大阪朝鮮学院売却することで合意したという内容です

 

この記事はまた中大阪朝鮮初級学校学校敷地半世紀にわたり無償占有してきており大阪市がこれを返還するため訴訟こしたが大阪地裁朝鮮学院市有地売却するよう仲裁したと説明売却額相場半分だと推定しました

 

また2016525日付産経新聞市有地賃貸している尼崎朝鮮学校賃貸料年間28万円だったが尼崎市兵庫朝鮮学院賃貸料280万円げるというたな賃貸借契約締結したとじましたこの記事はまたこの市有地標準賃貸料年間約2600万円だが今後10年間その101水準維持される見通えました

 

 

中大阪朝鮮初級学校市有地50年間無償使用相場半額れたことや尼崎朝鮮学校敷地賃貸料相場1001から101げられたというのは異例のことです日本右翼はこれを在日特権非難しています

 

日本各地方自治体朝鮮学校譲歩惠澤提供してきたのは事実のようでそれにはさまざまな理由があるでしょう尼崎市政府突然標準賃貸料要求すれば学校経営しいので協議結果今回金額まったとしました市政部公務員在日朝鮮人日本経験した歴史的苦難考慮するという意味理解されますそしてこうした惠澤たのには学校法人朝鮮学園交渉力きな役割たしたはずです

 

しかしこれらの譲歩惠澤終息していきます10年後尼崎朝鮮中高級学校賃貸料きくがるでしょうし高校無償化対象から朝鮮高級学校日本中央政府政策撤回されるのはしいものとみられます朝鮮学校危機四方からっ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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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학교무용신]의 제1차 일본방문단(127-30)은 오사카조선중고급학교의 70주년 기념공연을 관람하고, 아마가사키조선초중급학교도 방문하게 됩니다.

 

재일조선학교의 이름이 조금씩 길어지고 있는데, 이는 초급/중급/고급의 단독 학교가 줄고, 초중급, 중고급, 혹은 초중고급학교가 늘기 때문입니다. 학교들이 자꾸 통폐합되기 때문입니다. 6-70년대의 통폐합이 학교 경영의 효율성을 위해서였다면, 90년대 이후의 통폐합은 학생 수 감소와 재정난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컨대 1946년에 설립된 아마가사키 조련초등학원은 오지마조선초급(1967), 아마가사키조선중급(1975), 다치바나조선초급(1976), 한신조선초급(2001), 아마가사키히가시조선초급(2008)을 차례로 통합하여 오늘날의 아마가사키 조선초중급학교가 되었습니다. 올해(2023)에는 시의 경계를 넘어 이타미 조선초급학교까지 통합하게 될 계획이라고 합니다.

 

 

오사카조선고급학교도 2018년 히가시오사카 조선중급학교를 병합해 지금의 오사카조선중고급학교가 되었습니다. 히가시오사카 중급학교는 19619월 서금리중학교의 과밀화 해소를 위해 창립되었는데, 1994년 니시오사카 초중급학교의 중급부, 1999년 나라조선초중급학교의 중급부를 통합한 다음, 이번에는 그 자신이 오사카조고에 병합된 것입니다.

 

조선학교의 설립과 통폐합은 일본의 행정단위(도도부현)에 맞춰 설립된 학교법인 조선학원이 결정하는 듯합니다. 그래서 오사카조선중고급학교의 통합은 학교법인 오사카조선학원, 이타미조선초급학교의 아마가사키조선중고급학교 병합은 학교법인 효고조선학원이 결정했습니다.

 

학교법인 오사카조선학원은 2022년 현재 오사카조선중고급학교를 포함해 9개 조선학교를 관장하며, 효고조선학원은 고베조선고급학교를 포함 6개 조선학교를 관장합니다. 이 조선학원들은 학교 부지와 건물도 관리하는 듯합니다. 이와 관련 오사카와 효고의 조선학원이 일본 언론에 보도된 일이 있습니다.

 

 

201588일자 산케이신문에는 오사카시가 조선학교에 시유지 5천평방미터를 매각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오사카 시가 오사카 지방법원의 중재 아래 나카오사카 조선초급학교의 부지를 오사카 조선학원에 매각하기로 합의했다는 내용입니다.

 

이 기사는 또, 나카오사카 조선초급학교가 학교 부지를 반세기동안 무상 점유해 왔으며, 오사카시가 이를 반환받기 위해 소송을 제기했으나, 오사카 지방법원이 시가 조선학원에 시유지를 매각하도록 중재했다고 설명하고, 매각액은 시세의 절반이라고 추정했습니다.

 

2016525일자 산케이신문은 시유지를 임대하고 있는 아마가사키 조선학교의 임대료는 연간 28만엔이었으나 아마가사키 시와 효고 조선학원은 임대료를 “280만엔으로 인상하는 새로운 임대차 계약을 체결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 기사는 또 이 시유지의 표준임대료는 연간 약 2600만엔이지만 향후 10년간 그 10분의1 수준으로 유지될 전망이라고 전했습니다.

 

 

나카오사카 조선초급학교가 시유지를 50년 동안 무상으로 사용하다가 시세의 절반 값으로 매입한 일이나 아마가사키 조선학교의 부지 임대료가 시세의 100분의1에서 10분의1로 인상됐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입니다. 일본의 우익은 이를 자이니치특권(在日特權)”이라고 비난합니다.

 

일본의 각 지방정부가 조선학교에게 양보와 혜택을 제공해 온 것은 사실인 듯하고, 거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아마가사키 시정부는 "갑자기 표준임대료를 요구하면 학교 경영이 어렵기 때문에 협의 결과 이번 금액으로 결정됐다"고 했습니다. 시정부의 공무원들도 재일조선인들이 일본에서 겪은 역사적 경험을 고려한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혜택을 얻어낸 데에는 학교법인 조선학원의 협상력도 큰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혜택은 종식되어 갑니다. 10년 후 아마가사키 조선중고급학교의 임대료는 다시 크게 오를 것이고, 고교무상화 대상에서 조선고급학교를 제외한 일본 중앙정부의 정책도 철회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학교의 위기는 사방에서 닥쳐오는 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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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解放された直後兵庫県尼崎でも国語講習所かれました在日朝鮮人雑誌イオ(201511月号)によると1946大庄浜田大島武庫常松立花園田長州8地域3年制初等學院朝連によって設立されました統廃合過程初等學院8だったことからなくともその倍数以上国語講習所があったことが推察できます

 

 

1946424生徒350教員14開校した大庄初等學院今日尼崎朝鮮初中級学校前身です194885改編されましたが大庄初等學院本校守部園田立花大島初等學院分校統合されました

 

朝連大庄初等學院日本植民地時代末期強制連行されてきた朝鮮人宿舎として使用していた古河電気工業会社校舎として使用しました

 

 

194910連合軍最高司令部GHQ:General Headquarters日本政府<朝鮮人学校措置方針>発表朝鮮人義務教育日本公立学校実施すべきであり無認可朝鮮人学校めないことを決定兵庫県内朝鮮人学校40閉鎖命令しました

 

学校閉鎖とともに朝鮮人生徒たちは各日本人小学校強制的てられましたが朝鮮人たちはこれにしく抗議しましたらは既存学校寝食にしながら当局学校強制受付一方既存朝鮮人学校日本公立学校分校指定するよう要求しました

 

 

市当局のガイドラインに違反しないために教員たちは授業中止しましたが高学年生徒たちが低学年生徒たちをえるやり授業けながら学校座みをけました

 

日本人学校武庫小学校仮収容された283朝鮮人学生素直授業ける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教室りなくて2部制授業を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がえた学生たちで日本人教師たちも困難経験しました

 

 

1949122問題爆発しました日本人教員から日本語授業けていた朝鮮人学生たちは運動場けつけ、「日本語からない朝鮮語えろ」「日本語はもうわった」「たちの先生をなぜいたのか」「日本式教育けないなどのびながらスクラムをんで運動場独立歌のような提唱したりもしました

 

2日後124市当局朝鮮人保護者代表会談かれ朝鮮人側要求大幅れられ(1)市長責任守部朝鮮人学校分校開設(2)分校では朝鮮人教員採用することで合意しました

 

 

4.24阪神教育闘争-民族教育った々の記録(1988)によりますと朝鮮学校日本公立学校分校認可たのはめてでその後尼崎先例東京神奈川大阪愛知などでも朝鮮学校日本学校分校として設立するえました

 

 

1950年代後半帰国事業=北送事業活発になり、「朝鮮語んで祖国ろうという標語生徒数急速えると大庄分校には<尼崎朝鮮中級学校>併設されました中級学校初年度生徒48教員6でした尼崎朝鮮中級学校1958新校舎工事開始195932階建木造建物新校舎完成しました

 

 

一方分校形態朝鮮初等學校1965から自主学校移転しようという運動めました日本市民保守層支持1965718大庄大島守部各分校統合され西立花町所在市有地新校舎建設196641から大島朝鮮初級学校発足させました

 

その19674には幼稚班(教員2園児50)新設され同年10には尼崎朝鮮中級学校統合今日尼崎朝鮮初中級学校となり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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