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ウリ學校舞踊靴訪問団大阪朝鮮中高級学校<創立70周年記念公演>観覧だけでなく兵庫県宝塚市朝鮮人追悼碑参拝その地域住民たちとさな音楽会くことにしました宝塚行事日程まれたのはくはこの2年間この地域きたことのためですがくはこの108年間歴史たに発見されたからです

 

2020326宝塚市武田尾園入口親水広場5朝鮮人労働者える追悼碑てられました前面には越鳥南枝漢字かれておりその5犠牲者名前まれています神戸水道工事中死亡した金炳順(キム·ビョンスン)南益三(ナム·イクサム)張長守(チャン·ジャンス)福知山線鉄道工事事故くなった尹吉文(ユン·ギルムン)吳伊根(·イグン)さんがらです

 

 

日本全域には170りの朝鮮人追悼碑/慰霊碑てられており写真家安海龍先生にも30りの追悼碑つけました<宝塚朝鮮人追悼碑>日本国内200朝鮮人追悼碑最近建てられたものであるだけでなく韓日両国市民在日朝鮮人同胞長年努力結果としててられたものだという特徴的です

 

追悼碑裏面説明によりますと金炳順南益三張長守さんは1914~1915神戸水道改修工事中くなりましたが玉瀬住民はその遺骸共同墓地埋葬仏教寺院滿福寺位牌った108年間無縁故者祭祀ってきました

 

一方在日朝鮮人地域史家鄭鴻永先生日本人教師近藤富男先生1929鉄道工事くなった尹吉文吳伊根さんの死亡経緯結果発掘鄭鴻永先生著書歌劇のもうつの歴史:宝塚朝鮮人1997)』記録しました

 

 

鄭鴻永先生死去後近藤富男先生はこの々のための追悼碑てるために20年間努力した大阪神戸そして阪神地域日本人活動家在日朝鮮人協力<宝塚朝鮮人追悼碑>建設しました

 

このことをった韓国<チームアイ><舞踊靴>会員たちは殉難者たちの韓国内縁故地調査した金炳順さんの故郷江原道江陵であることを確認江陵市追悼碑建立者たちに感謝牌贈呈してほしいという請願書しましたこの請願れられ2022326追悼碑てられて2ぶりに江陵市わって東京所在江原道本部のカン·ビョンジク本部長宝塚訪問8追悼碑建立貢献者感謝牌しました

 

江陵市江原道感謝表示鼓舞された玉瀬住民今後殉難者祭祀けることにする一方らの参拝墓りにムクゲやツツジをえて追悼公園にすることをめましたこの公園来年326わせて造成され開場するとされています

 

 

殉難者死後100年余鄭鴻永-近藤富男先生調査発掘および記録から20年余そして追悼碑建立されてから2年間<宝塚朝鮮人追悼碑>はこの地域くの注目韓国でもら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

 

今回<ウリ學校舞踊靴>訪問団宝塚朝鮮人追悼碑訪問参拝することにしたのもこの一連事件結果結果ですまた追悼碑参拝にとどまらずさいながらも音楽会くことにしたのは朝鮮人殉難者面倒てくださった日本人住民在日同胞感謝するためです

 

20世紀前半韓国日本不幸歴史きてきましたが両国市民冷酷外交政治でも人類愛れませんでしたそしておいにする人之常情表現配慮してきました

 

訪問団宝塚訪問じて韓日両国不幸過去れずにそれを両国市民友好善隣昇華させるきっかけになることをっ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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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학교 무용신 방문단은 오사카조선중고급학교의 <창립70주년 기념공연> 관람 뿐 아니라, 효고현 다카라즈카시의 조선인 추도비를 참배하고, 그 지역 주민들과 작은 음악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다카라즈카 행사가 일정에 포함된 것은 짧게는 지난 2년 동안 이 지역에서 일어난 일 때문이지만, 길게는 지난 18년 동안의 역사가 새롭게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2020326일 다카라즈카(寶塚)시 다케다오(武田尾)에서 가까운 사쿠라공원() 입구의 신스이광장(親水広場)5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을 기리는 추도비가 세워졌습니다. 앞면에는 월조남지(越鳥南枝)’라고 한자로 씌여 있고, 그 아래 다섯 희생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고베수도공사 중에 사망한 김병순(金炳順), 남익삼(南益三), 장장수(張長守)씨와 후쿠치야마선 철도공사에서 사고로 숨진 윤길문(尹吉文), 오이근(吳伊根)씨가 바로 그들입니다.

 

 

일본 전역에는 약 170여개의 조선인 추도비/위령비가 세워져 있고, 사진작가 안해룡 선생은 그밖에도 30여개의 추도비를 더 찾아냈습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는 일본내 약 2백여개의 조선인 추도비 중에서 가장 최근에 건립된 것일 뿐 아니라, 한일 양국 시민들과 재일조선인 동포들의 오랜 노력의 결과로 세워진 것이라는 점에서 특징적입니다.

 

추도비 뒷면의 설명에 따르면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는 1914-1915년의 고베수도 개수공사 중에 사망했는데, 타마세 주민들은 그 유해를 마을 공동묘지에 안장하고, 불교사찰 만푸쿠지(滿福寺)에 위패를 모신 후 108년 동안 무연고자 제사를 드려 왔습니다.

 

한편, 재일조선인 지역사가 정홍영(鄭鴻永) 선생과 일본인 교사 콘도 도미오(近藤富男) 선생은 1929년 철도공사에서 사망한 윤길문, 오이근씨의 사망 경위와 결과를 발굴해 <가극의 거리의 또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에 기록했습니다.

 

 

정홍영 선생의 타계 후 콘도 도미오 선생은 이분들을 위한 추도비를 세우기 위해 약 20여년간 노력한 끝에 오사카와 고베, 그리고 한신 지역의 일본인 활동가와 재일조선인들의 협력을 얻어 20여년만에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건립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한국의 <팀아이><무용신> 회원들은 순난자들의 한국내 연고지를 조사한 끝에, 김병순씨의 고향이 강원도 강릉임을 확인하고, 강릉시에 추도비 건립자들에게 감사패를 증정해 달라는 청원서를 냈습니다. 이 청원은 받아들여졌고, 2022326, 추도비가 세워진 지 2년 만에 강릉시를 대신해 도쿄 소재 강원도본부의 강병직 본부장이 다카라즈카를 방문해 8분의 추도비 건립 공헌자들에게 감사패를 전달했습니다.

 

강릉시와 강원도의 감사표시에 고무된 타마세 마을 주민들은 향후에도 순난자들의 제사를 계속하기로 하는 한편, 이들의 참배묘 주위에 무궁화와 진달래를 심어 추도공원으로 꾸미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공원은 내년 326일에 맞춰 조성되고 개장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순난자들의 사망 이후 1백여년, 정홍영-콘도 도미오 선생의 조사와 발굴 및 기록 이후 20여년, 그리고 추도비가 건립된 후 2년 동안,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는 이 지역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고, 한국에도 널리 알려지게 됐습니다.

 

이번 <우리학교 무용신> 방문단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방문하고 참배하기로 한 것도 이 일련의 사건들이 좋은 결과를 맺은 결과입니다. 또 추도비 참배에 그치지 않고 작으나마 음악회를 열기로 한 것은 조선인 순난자들을 잘 보살펴주신 일본인 주민들과 재일동포들에게 감사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20세기 한국과 일본은 불행한 역사 속에 살았지만, 양국의 시민들은 냉혹한 외교와 정치 속에서도 인류애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인지상정을 표현하고 배려해 왔습니다.

 

방문단의 다카라즈카 방문을 통해, ,일 양국의 불행한 과거를 잊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두 나라 시민들 사이의 우호와 선린으로 승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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がるじです朝鮮舞踊家崔承喜(チェ·スンヒ)先生人生とダンスを研究していてウリ学校(=在日朝鮮学校)舞踊生徒たちの舞踊作品してみるととてもきれいでありがたくて舞踊靴キャンペーンをめました舞踊部学生たちに舞踊靴めたのです

 

キャンペーンの規模きくなるのでえないのでさんに参加をおいしましたがいにもくの々が参加してくださいましたそしてついに<舞踊靴>後援会朝鮮学校公演くにりました

 

 

朝鮮学校めてったのは201910月初めの京都ででした崔承喜先生1935年京都公演調べるために図書館資料調査をしましたが時間くの銀閣寺きましたもともとは境内かなところですが修学旅行生徒たちでわっていたので観覧をあきらめててきててられた朝鮮学校案内板たのです

 

その沿ってると京都朝鮮中高級学校がありました位置した学校正門ったら生徒たちが体育大会練習をしていました遮日進行担当していた教師けで舞踊部指導教師ユン·ギョンスク教員とチョ·ミョンホ校長先生いました二人朝鮮舞踊るためには11月初めに大阪かれる中央芸術競演大會るようめられました

 

それで1月後にまた大阪って新鮮衝撃けました85年前崔承喜先生日本めた朝鮮舞踊再現されていたからです文章だけで想像していた崔承喜先生のダンス動作生徒たちのダンスをながら理解されめました崔承喜先生解放以前作品った映像っていないので学生たちの公演研究けるためにからかったのようにじました

 

 

競演会場鄭世和(チョン·セファ)先生ったのもきな幸運でした以後たちは朝鮮舞踊研究とウリ學校後援のために協力しながら成果してきました舞踊靴追悼碑沿海州キャンペーンなどがそれですそしてついに今回日本訪問団構成するにったのです

 

日本訪問団来年128土曜日には宝塚市朝鮮人参拝墓新水公園内朝鮮人追悼碑訪問して参拝地域住民いてさな音楽会開催します翌日129(日曜日)には大阪朝鮮中高級学校開校70周年記念公演観覧することになります

 

大阪朝鮮中高級学校2018年大阪朝鮮高級学校(=大阪朝高)東大阪朝鮮中級学校統合日本全体じて最大規模朝鮮学校となりましたが統合以前大阪朝高開校日大阪朝鮮中高級学校開校日としています

 

 

大阪朝高1952410日大阪市生野区田島開校1957810日河内市(=現在東大阪市)玉串本町1973年現在東大阪市菱江校舎新築して移転しました

 

日本高等学校にあたる朝鮮学校高級学校ぶのは朝鮮学校日本正規教育機関としてめられない各種学校分類されるからです朝鮮学校日本政府規定した教科一部いませんえば朝鮮学校国語国史朝鮮語朝鮮史であり日本語1外国語日本史世界史一部としてえます

 

 

大阪朝高朝鮮学校同様学生たちの活発小組(=サークル)活動をおめします公演芸術部としては舞踊部声楽部民族器楽部吹奏楽部代表的美術部活動活発です体育部では鬪球(=ラグビー)とサッカー成績しておりそのにもボクシングとバスケットボール卓球部などが活動しています

 

今回訪問団観覧することになる大阪朝高創立70周年記念公演希望のナレたちのという主題公演芸術部学生たちが総出演して大阪朝鮮中高級学校過去現在そして今後繰げられる未来紹介することになります公演大阪から南西4キロれた東大阪市文化創造館われ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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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번지는 느낌입니다. 최승희 선생의 삶과 춤을 연구하다가 우리학교(=재일조선학교)의 무용을 알게 됐고, 학생들의 무용 작품들을 접하고 보니까 너무 이쁘고 고마워서 무용신 캠페인을 시작했었습니다. 무용부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보내기 시작한 것이지요.

 

캠페인의 규모가 커지니까 버거워서 여러 분들에게 동참을 부탁드렸는데, 다행히도 많은 분들이 참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무용신> 후원모임이 조선학교의 공연을 보러 가기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조선학교를 처음 만난 것은 201910월초 교토에서였습니다. 최승희 선생의 1935년 교토 공연을 조사하느라 도서관에서 자료를 뒤지다가, 쉬는 시간에 인근 긴가쿠지(銀閣寺)에 갔습니다. 원래는 경내가 조용한 곳이지만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로 번잡했기 때문에, 관람을 포기하고 나오다가 옆길 입구에 세워진 조선학교 안내판을 보게 된 겁니다.

 

그 길을 따라 올라가니 교토조선중고급학교가 있었습니다. 숲속에 자리 잡은 학교의 정문을 들어섰더니 학생들이 체육대회 연습을 하고 있더군요. 차일 밑에서 진행을 담당하시던 교사 분의 도움으로 조명호 교장 선생님과 무용부 지도교사 윤경숙 교원을 만났습니다. 두 분은 조선무용을 직접 보려면 11월초 오사카에서 열리는 중앙예술경연대회에 오라고 권하셨습니다.

 

그래서 한 달 후에 다시 오사카에 갔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85년 전 최승희 선생이 시작했던 조선무용이 눈앞에서 재현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글을 통해서만 상상했던 최승희 선생의 춤 동작들이 학생들의 춤을 보면서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최승희 선생의 해방 이전 작품을 담은 영상이 전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학생들의 공연은 내 연구를 돕기 위해 하늘이 내려주신 선물처럼 느껴졌습니다.

 

 

경연대회장에서 사진가 정세화 선생을 만난 것도 큰 행운이었습니다. 이후 우리는 조선무용 연구와 우리학교 후원을 위해 협력하면서 성과를 내어왔습니다. 무용신과 추도비, 연해주 캠페인 등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번에 일본 방문단을 꾸리기에 이른 것이지요.

 

일본 방문단은 내년 128(토요일) 다카라즈카시의 조선인 참배묘와 신수이광장의 조선인 추도비를 방문해 참배하고, 지역 주민들을 초청해 작은 음악회를 개최합니다. 다음날인 129(일요일)에는 히가시오사카시 문화창조관(東大阪市文化創造館)에서 열리는 오사카조선중고급학교의 개교 70주년 기념공연을 관람하게 됩니다.

 

오사카조선중고급학교는 2018년 오사카조선고급학교(=오사카조고)와 히가시오사카조선중급학교와 통합하여 일본 전체를 통해 가장 규모가 큰 조선학교가 되었는데, 통합 이전의 오사카조고의 개교일을 오사카조선중고급학교의 개교일로 삼고 있습니다.

 

 

오사카조고는 1952410일 오사카시 이쿠노(生野)구 타지마(田島)에서 개교, 1957810일 카와치(河内)(=현재의 히가시오사카(東大阪)) 타마쿠시모토마치(玉串元町)로 옮겼다가, 1973년 현재의 위치인 히가시오사카시 히시에(菱江)에 교사를 신축해 이전했습니다.

 

일본의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조선학교를 고급학교라고 부르는 것은 조선학교가 일본의 정규교육기관으로 인정되지 않는 각종학교로 분류되기 때문입니다. 조선학교는 일본 정부가 규정한 교과목의 일부를 따르지 않습니다. 예컨대 조선학교의 국어국사는 조선어와 조선사이며, 일본어는 제1외국어, 일본사는 세계사의 일부로 가르칩니다.

 

 

오사카조고는 다른 조선학교들과 마찬가지로 학생들의 활발한 소조(=동아리) 활동을 권장합니다. 공연예술부로는 무용부와 성악부, 민족기악부와 취주악부가 대표적이며, 미술부의 활동도 활발합니다. 오사카조고의 체육부로는 투구부(=럭비부)와 축구부가 좋은 성적을 내고 있고, 그밖에도 권투부와 농구부, 탁구부 등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번 방문단이 관람하게 될 <오사카조고 창립70주년 기념공연>희망의 나래, 우리의 노래라는 주제아래, 공연예술부 학생들이 총출연해서 오사카조선중고급학교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소개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공연장인 히가시오사카시 문화창조관은 오사카조고에서 서남쪽으로 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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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12日大阪到着した20203関西空港れて帰国してから2年半ぶりのことだ飛行機着陸したのが5時頃だったがターミナルをくなったそれで今回大阪がくれた最初じは突拍子もなく、「ここはむんだなだった緯度なく経度数度違うだけなのに太陽じられるのが不思議だった

 

 

2年半前日本たのは舞踊靴えるためだった李仁珩·インヒョン先生一緒だった同年31神戸朝鮮学校卒業式直後李仁珩先生舞踊部練習室まった学生たちに韓国同胞たちがめての舞踊靴えた

 

鄭世和(チョン·セファ)先生がそばで伝達手伝ってくれて写真った李仁珩先生神戸城高校舞踊部のリ·ジュソン指導教師舞踊靴写真以後2年半続いた舞踊靴キャンペーンの象徴となった

 

 

今回訪日一人だった李仁珩先生家族日程のため同行できなかったイム·サンテク先輩同行することになっていたが航空便都合2日後到着することになっていた

 

日本往来めたのは朝鮮舞踊家崔承喜(チェ·スンヒ)先生日本公演調査するためだった20185安海龍(アン·ヘリョン)先生恵那クヌギさんと一緒った東京調査めてだったその後約2年間日本くの都市図書館記録保管所崔承喜先生朝鮮舞踊公演調査したえてみると北海道から沖縄まで42都市訪問した

 

そんな201910月初めに偶然機会京都朝鮮学校のチョ·ミョンホ校長先生とユン·ギョンスク舞踊教員中央芸術競演大會紹介された11月初めに大阪朝鮮学校かれた舞踊競演大會参観朝鮮舞踊する関心急速拡大した1930年代崔承喜先生めた朝鮮舞踊80年余りがぎた日本全域公演されているのが不思議だった

 

 

舞踊競演大會映像撮影担当された鄭世和先生ったのがには幸運だった鄭世和先生から在日朝鮮学校在日同胞する事情具体的くことができ崔承喜先生するをすることができた

 

神戸朝高のための舞踊靴キャンペーンをめたのも鄭世和先生とのいをじてまったものだったそのたちはおいにえなくても2年半6のキャンペーンをじて11百人在日朝鮮学校舞踊部学生たちに舞踊靴えることができた

 

往来途絶えたのはコロナ防疫のためだった韓日間貿易紛争外交的対立一役買った往来はなかったがたちは在日朝鮮学校舞踊神キャンペーンと宝塚朝鮮人追悼碑プロジェクトそして沿海州高麗人舞踊衣装後援事業推進した仕事結果すほど玄海灘こう一緒いてくださった鄭世和先生信頼つようになった

 

 

関西空港から南海線って大阪市内進入大阪駅環状線えて天満駅かい期待ちていた鄭世和先生天満駅えにくとらせてきたためだはすっかりくなり駅周辺飲食店街かりがともった天満駅入口たちは再会した2年半ぶりだったが不慣れではなかったたちはおいに両手をつないでしくりながらいのつめたいできてしいです

 

ホテルのチェックインをえてたちはまた天満駅前夕食にし間懐かしがっていたビールを注文することができた約束場所到着すでに食堂調査をしておいた鄭世和先生めでたちはてんぷら専門店いた

 

 

鄭世和先生はあれこれ説明しながらぷらと串焼きを相次いで注文したがその時何べたのかよくせないただがつまずいた乘用車いてられた鄭世和先生電車時間のためにれなければならないまでわしたがわしたのかも曖昧

 

しかしその日天満駅鄭世和先生った場面よくれたスチール写真のようにまれたいできてしいです本当しいです(jc, 202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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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12일 오사카에 도착했다. 20203월 간사이공항을 떠나 귀국한 지 약 2년 반 만이었다. 비행기가 착륙한 것이 5시경이었는데 터미널을 빠져 나오는 동안 날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그래서 이번에 오사카가 준 첫 느낌은 생뚱맞게도, ‘여기는 해가 빨리 지는구나였다. 위도 차이 없이 경도가 몇 도 다를 뿐인데 빨리 지는 해가 느껴지는 게 신기했다.

 

 

2년 반 전에 일본에 왔던 것은 무용신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이인형 선생과 함께였다. 그해 31일 고베조선학교의 졸업식 직후, 이인형 선생이 무용부 연습실에 둥그렇게 모여선 학생들에게 한국 동포들이 보내는 첫 무용신을 전달했다.

 

정세화 선생께서 옆에서 전달을 도왔고, 나는 사진을 찍었다. 이인형 선생이 고베조고 무용부의 리주선 지도교사에게 무용신을 전달하는 사진은 이후 2년 반 동안 계속된 무용신 캠페인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이번 방일은 혼자였다. 이인형 선생은 가족 일정 때문에 동행할 수 없었다. 임상택 선배님이 동행하시기로 하셨지만 항공편 사정으로 이틀 후에 도착하시게 되어 있었다.

 

내가 일본을 왕래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무용가 최승희 선생의 일본공연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20185월 안해룡 선생과 에나 크누기씨와 함께 했던 도쿄 조사가 처음이었다. 이후 약 2년 동안 일본 여러 도시의 도서관과 기록보관소를 찾아 최승희 선생의 조선무용 공연을 조사했다. 세어 보니 홋카이도에서 오키나와까지 42개 도시를 방문했다.

 

그러던 중 201910월초 우연한 기회에 교토 조선학교의 조명호 교장선생과 윤경숙 무용교원을 만났고, 중앙예술경연대회를 소개받았다. 나는 11월초 오사카 조선학교에서 열린 무용경연대회를 참관했고, 조선무용에 대한 관심이 급속히 확대됐다. 1930년대에 최승희 선생이 시작한 조선무용이 80여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 전역에서 공연되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무용경연대회에서 영상 촬영을 담당하신 정세화 선생을 만난 것이 내게는 행운이었다. 정세화 선생으로부터 재일조선학교와 재일동포들에 대한 사정을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었고, 나는 최승희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해 드릴 수 있었다.

 

고베 조고를 위한 무용신 캠페인을 시작한 것도 정세화 선생과의 의논을 통해서 시작된 것이었다. 이후 우리는 서로 만나지 못하면서도 2년 반 동안 6차례의 캠페인을 통해 11백 명의 재일 조선학교 무용부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전달할 수 있었다.

 

왕래가 끊어진 것은 코로나 방역 때문이었다. 한일간 교역 분쟁과 외교적 대립도 한 몫을 했다. 왕래는 없었지만 우리는 <재일조선학교 무용신> 캠페인과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프로젝트, 그리고 <연해주 고려인 동포 무용의상 후원> 사업을 추진했다. 일이 결과를 내어갈수록 현해탄 건너편에서 함께 일해 주신 정세화 선생에게 깊은 신뢰를 갖게 되었다.

 

 

간사이공항에서 난카이선을 타고 오사카 시내에 진입, 오사카역에서 순환선으로 갈아타고 텐마역으로 향하면서 나는 기대에 찼다. 정세화 선생께서 텐마역에서 마중하겠다고 알려 오셨기 때문이다. 날은 완전히 어두워져서 역 주변 먹자골목에 불이 환하게 밝혀진 텐마역 입구에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3년반 만이었는데 전혀 낯설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 두 손을 붙잡고 마구 흔들면서 서로 얼굴을 한참씩 바라보았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호텔 체크인을 마치고 우리는 다시 텐마역전으로 나와서 저녁식사를 함께 했고, 나는 오래 그리워하던 일본식 생맥주, 나마비루를 주문할 수 있었다.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해 이미 식당 조사를 해 놓으신 정세화 선생의 권유로 우리는 튀김 전문집에 자리를 잡았다.

 

 

정세화 선생은 이것저것 설명하시면서 튀김과 꼬치를 연달아 주문하셨지만, 그때 뭘 먹었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냥 이야기가 꼬리를 물었다. 차를 두고 오신 정세화 선생의 전철 시간 때문에 헤어져야 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는데,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도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그날 텐마역에서 정세화 선생과 만났던 장면은 잘 찍힌 스틸 사진처럼 내 마음에 새겨졌다. 반갑습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jc, 202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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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에 김혜정 장편소설이라고 되어 있지만 나는 이 작가가 누군지 모릅니다. 물론 내 탓입니다. 오랜 외국생활로 한국 출판계의 흐름을 놓쳤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게 내게는 좋은 점이기도 합니다. 거품 낀 유명세나 기획된 유행에 휘둘리지 않고 내 시점을 유지한 채 작품을 대할 수 있기 때문이죠.

 

<하이킹 걸즈>의 첫 인상은 좋지 않았습니다. 제목 때문입니다. 씨바, 왜 제목조차 제나라 말을 못 쓸까? 한국어 작가 맞아?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게다가 걸즈라니... 최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서는 하이킹이라는 말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라고 인정했습니다. 어원이 영어 방언인 하이크(hike)’에는 멀리 떠나다와 함께 올리다라는 뜻이 있기 때문이죠. 고양과 성숙을 위해 먼 길을 걷는 전통이 없는 한국에는 하이킹에 해당하는 말이 없습니다. 기껏해야 방랑이라는 말이 있을 뿐인데, 그건 하이킹과는 전혀 다른 말이니까요.

 

굳이 말하자면 <하이킹 걸즈>는 청소년 소설이자 성장 소설입니다. 나도 아들이 대학 준비할 때 읽어보라고 사준 책인데, 일차언어가 한국어가 아닌 아들은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당시 아들의 절친은 책보다는 리그 오브 레전드였으니까요. 이후에도 애들 책이라고 생각해서 꽂아만 두고 있다가 이번에 버리기 전에 읽자는 심정으로 지금 막 다 읽었습니다.

 

두 소녀가 비단길을 걷는 이야기입니다. 우루무치에서 둔황까지 약 12백킬로미터를 걸으면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한 이야기죠. 카미노와 올레를 다녀오고, 기회 있을 때마다 둘레길이나 자락길을 걷는 저에게는 당연히 혹할 만한 소재입니다.

 

 

그렇다고 비단길의 풍광이나 역사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책은 아닙니다. 나온다고 해야 사막길의 신기루와 오아시스, 그리고 명사산 정도가 나오고, 스파게티가 비단길에서 시작된 음식이라는 설명 정도일까요? 그보다는 어두운 경험과 격렬한 갈등으로 얼룩진 두 소녀의 내면이 정화되면서 인생의 방향이 생기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실 그게 도보여행의 목적이고, 도보여행 소설의 주제이기도 하죠.

 

이 소설의 주인공은 소년원에 가는 대신 비단길 하이킹을 택한 거짓말쟁이 상습절도범보라와 욱하는 성격의 상습폭력범은성이지만, 10대 소녀 말고도 두 명의 여자가 더 등장합니다. 두 소녀의 하이킹을 이끌어주는 20대의 마귀할멈미림과 이 책을 쓴 (아마도 당시) 30대의 김혜정씨입니다. 김혜정씨의 인생여정과 하이킹 경험은 미림에게 전수되고, 미림의 인내어린 잔소리가 은성과 보라의 마음을 잡아주는 이야기입니다.

 

 

청소년 성장소설이라고만 생각했으면 이 책을 읽거나 독후감까지 쓸 생각은 안했을 겁니다. 은성이와 보라의 과거 비행이 서술된 것을 읽으면서, 모든 개인의 문제에는 원인, 특히 사회적 원인이 있다는 데에 다시 한 번 생각이 미쳤고, 그것은 개인의 힘으로 극복하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주변 사람과 사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죠.

 

그러면서 오늘날 한국 사회의 태극기/일베/메갈의 문제가 겹쳐졌습니다. 일탈사회학 측면에서 보면 이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그냥 개인이나 소집단의 일탈 문제가 아닙니다. 해방 후 7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독립군과 친일파의 싸움이 전개되는 기형적인 현대사가 낳은 결과일 수 있습니다. 한 때 이 문제는 시간만이 치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시간도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미 세대를 건너 고착되기 시작했으니까요.

 

 

한국 사회의 이 고질병을 치료할 한 가지 방법을 <하이킹 걸즈>가 제시합니다. 하이킹입니다. 자기 자리를 떠나볼 수 있어야 하고, 거기서 자기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모습이 객관화되고, 자리와 조건이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마귀할멈 역할을 해 주어야 할 종교와 학문, 언론이 무너진 한국사회는 명사산 꼭대기에서 세상을 내려다 볼 수 있었던 은성과 보라의 경험을 제공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러다보니 얼척 없는 윤석열 정부가 탄생한 거죠. 아이고~ (jc, 2022/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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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극장의 초기역사 시론 (by 조정희, 최승희 연구가, 예술사회학)

 

I. 서론

 

나주극장은 건물이 현존하는 나주시 유일의 근대극장이다. 1930년대에 설립되어 1950년대에 개축된 나주극장은 약 1세기 동안 영화와 공연, 그리고 각종 지역 행사를 유치해 나주시와 인근 지역 주민들에게 연예와 유흥과 예술을 제공하던 극장이다.

 

특히 일제강점기를 통하여 나주극장은 나주 유일의 상설관이었고, 더구나 설립자가 조선인이었기 때문에 시민사회와 학계, 문화예술 행정당국의 관심을 끌었다. 지금은 나주시가 나주극장 건물을 매입해 문화재생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재활용하는 방안을 강구 중이다.

 

나주극장은 역사적, 문화적 의미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그 초기 역사는 밝혀진 것이 거의 없다. 그 설립자가 변사 출신의 성방명(成邦明)이라는 점은 알려져 있지만, 그가 나주극장을 언제 설립했는지, 그가 처음 설립한 극장의 위치와 크기가 어떠했으며, 어떤 영화를 상영하고 어떤 공연을 상연했는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는 일차적으로 나주극장에 대한 조사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계의 연구는 단행본 <호남의 극장문화사(위경혜, 2007)>5쪽 남짓 서술된 것이 전부이고, 연구논문으로는 최근에 발표된 나주(羅州)지역 극장의 생성과 역사적 전개에 관한 연구(김남석, 2022, <인문학연구 32>)”가 유일하다.

 

나주극장에 대한 연구가 희소한 것은 일차 자료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한 자리 수를 넘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신문기사가 문헌 증거의 전부이고, 그밖에는 2000년대 이후에 이루어진 구술자료가 약간 있을 뿐이다. 더구나 이 구술 자료조차 너무 뒤늦게 수집된 것이어서 1950년대 이전의 나주극장에 대한 회고 내용은 거의 없다.

 

 

필자가 나주극장의 초기역사에 관심 갖게 된 것은 최승희 무용공연 조사 때문이었다. 조선무용가 최승희의 공연을 조사해 온 필자는 2017년의 유럽공연 조사, 2018년의 미국공연 조사, 2019-2020년의 일본공연 조사에 뒤이어 20203월부터 국내공연을 조사했다. 코로나 때문에 남미공연 조사를 단행하지 못한 채, 일단 국내 조사를 시작했던 것이다.

 

전남지역의 최승희 공연을 조사하던 중, 필자는 목포와 광주, 벌교와 순천과 여수에서 최승희의 무용공연이 이뤄졌다는 점을 발굴하거나 확인했다. 벌교공연은 과거에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 발견된 공연이었기에 그 발견의 의의는 사뭇 컸다.

 

벌교공연을 발굴한 직후 필자는 1930년대에 더 큰 도시였던 나주에서도 최승희의 무용공연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조사를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나주극장의 존재도 알게 되었다. 조사 결과 최승희의 나주극장 공연은 없었던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려야했지만, 나주 조사를 도와주신 분들의 요청으로 나주극장에 대한 조사는 계속했다.

 

 

3개월의 조사를 결산하는 이 글에서는 그동안 취약했던 나주극장의 초기역사, 즉 해방 이전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발굴하는 데에 일차적 관심을 두었다. 이글을 위해서는 기존 문헌이 재검토되고, 관련 문헌이 새로 발굴되기도 했지만, 현지 원로와 전문가들의 면접이 가장 중요한 자료를 제공했다.

 

특히 1백세를 넘어 장수하시는 이학동 화백과 나주 문화원장을 오래 역임하신 박경중 원장님을 각각 두 차례씩 면접할 수 있었고, 나주극장의 설립자이신 성방명씨의 4남 성순재씨를 만나 면접하고 수시로 연락을 주고 받으며 질문을 드릴 수 있었던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자리를 빌어 세 분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또 나주극장의 문헌 조사와 면접 조사를 위해 나주 실학강독회와 나주학회가 큰 도움을 주었다. 특히 실학강독회의 임재택, 김순희, 최현삼 선생, 그리고 나주학회의 정찬용 선생의 참여와 도움에 감사드린다. 또 문헌자료를 자문해 주신 나주시청의 김종순 과장과 나주 문화계 원로 면접을 주선해 주신 윤지향 팀장께도 감사드린다. (2022/10/3, 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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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承喜(チェ·スンヒ)先生人生りを研究しながら崔承喜憑依されたといういたりもした研究ノートをジャーナルと学術誌発表するきながら崔承喜心情意図推測した内容えたりもしたためだ。 「巫俗という皮肉ではなくても客観的ではないという批判だったのだろう

 

<社会学概論>では社会学つの流派があると要約したりもする経験主義empiricism記録して解釈学hermeneutics記録意味理解しようとし批判criticism記録れた意味そうとする実際その3つは背馳されていない事件総体的理解するためには3つとも渉猟しなければならないためだ

 

それで憑依という巫俗用語社会学解釈批判のための方法論になる心理学自己開発書愛用する感情移入共感もグッドパン憑依言葉日常使立場えるswitching shoes)」きくわらない言葉だからだ

 

 

近藤富男先生憑依みた南益三氏参拝墓発見されたという連絡けたどんなじだったのだろうか

 

2020223近藤先生宝塚市立中学校教員時代同僚だった大黑澄枝先生から電話けた。 「朝鮮人労働者3参拝墓玉瀬満福寺けられており婦女会寺院100年以上祭祀ってきたということだった大黒先生教員時代だった足立有里さんのメッセージを近藤先生えたのだ

 

足立有里さん満福寺5代住職足立泰教氏夫人であり自身足立智教という僧名4代住職歴任したことがある歴代住職じて自分えてきた大黒先生近藤先生えたのだ

 

 

参拝墓玉瀬満福寺にあるというニュースは近藤富男先生にとってくべき衝撃だっただろう鄭鴻永-近藤富男調査チームは1986年秋玉瀬3朝鮮人犠牲者埋葬墓地発見しているいてらの参拝墓すために西谷墓地寺院々まで調査したがつからなかったという

 

これは多少疑問埋葬墓玉瀬にあったとすれば参拝墓もそのくにあるということはしくなく推論できるところでどうして二人玉瀬参拝墓発見できなかったのだろうか満福寺調査かられていたのだろうかあるいは調べたが発見できなかったのだろうか

 

いかなる場合でも残念なことだったおそらく近藤富男先生そのなぜ満福寺をさらにしく調べなかったのかという悔恨ったのだろうその参拝墓発見していたら追悼碑はもっとてられることもできたし鄭鴻永先生いだった追悼碑建立他界しただろう

 

 

他方近藤富男先生ればせながら参拝墓発見されたことをいとえたにいない鄭鴻永先生他界してから20年以上探った参拝墓偶然発見されたことはどれほどしいことだっただろうかしかも追悼碑建立直前だったのでかった5犠牲者名前一度追悼碑むことができたからだ

 

それから2年後近藤富男先生他界したことをえるとこの発見はさらに意味のあることだったこの発見のおかげで鄭鴻永-近藤富男調査チームは自分たちが選択した使命35ぶりにたしこのったことになった

 

 

また近藤先生満福寺足立泰教さんと足立智教さんそして同僚大黒澄愛先生感謝気持ちをったのだろう鄭鴻永先生自分埋葬墓跡らかにするにまったがらのけで参拝墓まで発見することになったのだから感謝せざるをなかっただろう

 

2020223満福寺参拝墓らせをいた近藤富男先生このように悔恨安堵感謝複合的感情まれ感慨無量だったことを推察するのはそれほどしくなかった。 (2022/9/13趙正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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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선생의 삶과 춤을 연구하면서 최승희에 빙의됐다는 말을 듣곤 했다. 연구노트를 쓸 때나, 저널과 학술지에 발표할 글을 쓰면서 최승희의 심정이나 의도를 추측한 내용을 덧붙이곤 했기 때문이다. ‘무속이라는 비아냥은 아니더라도 객관적이지 않다는 비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
사회학개론>에서는 사회학에 세 유파가 있다고 요약하곤 한다. 경험주의(empiricism)기록을 찾아 읽고, 해석학(hermeneutics)기록의 뜻을 이해하려 하고, 비판(criticism)기록의 숨은 뜻을 드러내려고 한다. 사실 그 셋은 배치되지 않는다. 사건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면 세 가지를 다 섭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빙의라는 무속 용어는 사회학에서 해석비판을 위한 방법론이 된다. 심리학과 자기개발서들이 애용하는 감정이입이나 공감도 굿판의 빙의와 비슷한 말이다. 일상에서 쓰는 입장 바꾸기(switching shoes)”와 크게 다르지 않은 말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콘도 도미오 선생에게 빙의를 시도했다. 그는 남익삼씨의 참배묘가 발견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어떤 느낌, 어떤 생각이었을까?

 

2020223일 콘도 선생은 다카라즈카 시립중학교 교원 시절 동료였던 다이꼬꾸 스미애(大黑澄枝) 선생의 전화를 받았다. “조선인 노동자 3명의 참배묘가 타마세의 만푸쿠지(滿福寺)에 마련되어 있고, 부녀회와 사찰이 1백년 넘게 제사를 드려왔다는 것이었다. 다이꼬꾸 선생이 교원 시절의 제자였던 아다치 유리(足立有里)씨의 메시지를 콘도 선생에게 전달한 것이다.

 

아다치 유리씨는 만푸쿠지의 5대 주지 아다치 타이쿄(足立泰敎)씨의 부인이고, 자신도 아다치 치쿄(足立智敎)라는 승명(僧名)으로 4대 주지를 역임한 바 있다. 그는 역대 주지 스님들을 통해 자신에게 전해 내려온 이야기를 다이꼬꾸 선생을 거쳐 콘도 선생에게 전달한 것이다.

 

 

참배묘가 타마세의 만푸쿠지에 있다는 소식은 콘도 도미오 선생에게 놀라운 충격이었을 것이다. 정홍영-콘도 도미오 조사팀은 1986년 가을 타마세에서 세 조선인 희생자의 매장묘터를 발견한 바 있었다. 이어서 이들의 참배묘를 찾기 위해 니시타니의 묘지와 사찰을 샅샅이 조사했으나 찾아내지 못했다고 했다.

 

이것은 다소 의문이다. 매장묘가 타마세에 있었다면, 참배묘도 그 인근에 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추론될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 두 사람은 타마세에서 참배묘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일까? 만푸쿠지가 조사에서 누락되었던 것일까? 혹은 조사했지만 발견하지 못했던 것일까?

 

어떤 경우라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아마도 콘도 도미오 선생은 그때 왜 만푸쿠지를 더 세밀히 조사하지 않았던가하는 회한을 가졌을 법하다. 그때 참배묘를 발견했더라면 추도비는 더 일찍 세워질 수도 있었고, 정홍영 선생도 소원이던 추도비 건립을 본 후 타계하셨을 것이다.

 

 

다른 한편, 콘도 도미오 선생은 뒤늦게나마 참배묘가 발견된 것을 다행으로 여겼음에 틀림없다. 정홍영 선생이 타계하신 뒤로 20년이나 더 찾았던 참배묘가 우연한 기회로나마 발견된 것은 얼마나 반가운 일이었겠는가. 더구나 추도비 건립 직전이어서 때가 좋았다. 다섯 명의 희생자의 이름을 한꺼번에 추도비에 새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년 후 콘도 도미오 선생이 타계하신 것을 생각하면 이때의 발견은 더욱 의미 있는 일이었다. 이 발견 덕분에 정홍영-콘도 도미오 조사팀은 자신들이 스스로 선택한 사명을 35년 만에 완수하고 세상을 떠난 셈이 되었다.

 

 

또 콘도 도미오 선생은 만푸쿠지의 아다치 타이쿄와 아다치 치쿄 부처, 그리고 동료 다이꼬꾸 스미애 선생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정홍영 선생과 자신은 매장묘터를 밝히는 데 그쳤지만, 이들의 도움으로 참배묘까지 찾은 것이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2020223일 만푸쿠지의 참배묘 소식을 들은 콘도 도미오 선생이 이렇게 회한안도감사의 복합적인 감정에 휩싸여 감개무량했었을 것임을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2022/9/13,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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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鴻永-近藤富男研究チームが神戸水道工事朝鮮人殉難者3埋葬墓地発見したのは1986年初秋のことだった1914-1915金炳順(キム·ビョンスン)南益三(ナム·イクサム)張長守(チャン·チャンス)がトンネル落盤事故犠牲になって70ぎただったしかし調査はそこで袋小路にぶつかりこれ以上進められなかった

 

参拝墓用意されたと推定した2地元のお過去帳調べたり墓地をまわつて墓石無縁仏してみたりしたがどうしてもそれらしい場所確認す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たが3参拝墓つからなかった

 

らの参拝墓発見されたのはそれから35ぎた2020223だった1929年福知山線鉄道工事死亡した尹吉文(ユン·ギルムン)吳伊根(·イグン)える追悼碑建立準備大詰めをえた玉瀬仏教寺院満福寺から連絡これについて近藤富男先生、『むくげ通信3002020531)』寄稿した文章以下のようにべた

 

 

今年2020223このにもかかれていない重大なはなしがもたらされた西谷玉瀬にある満福寺のかたからだったおそらく100 年以上にわたって地域婦人会朝鮮慰霊をしているが婦人会高齢化人数なくなってそろそろおしまいにしたいとおもっているついてはこのたちはどういうだったのかりたいというものであった電話であらましをきいてすぐ訪問約束をし26にうかがってくわしくおはなしをきいた

 

毎年824、『無縁さんをつづけてきた住職婦人会会員無縁仏さんと三界萬霊手向盆菓子々お線香めてきたおそらく100ぐらいがれてきているうちにその意味合いがただしくつたわらなくなっていた以前先住職さんは武田尾のトンネル爆破工事くなった朝鮮人っているとおっしゃっていたということであった

 

おはなしのあと現場案内してくださり菓子をそなえておをあげてくださったわたしが今年3 26 追悼する建立しますとつたえるとこれまで自分たちがつづけてきた慰霊気持ちをうけついでいただけると大変よろこんでくださったそしてなんと完成するわたしたちよりもはやく住職夫婦現地法要をおこなってくださった」。

 

 

近藤富男先生満福寺から重大なはなしっただけでがどのような方法連絡してきたのかはべなかったところがこれは大黑澄枝先生じてであったことが最近明らかになった大黑澄枝先生ってくださったカカオトークのメールでこうった

 

20202、教え子満福寺足立有里さんから玉瀬婦人会100年以上期間ったのですがもう中断したいという提案があります相談したらいいですか?」という電話近藤富男先生連絡しました326建設予定だった追悼碑神戸水道工事犠牲になった3えることになりましたとても劇的記念すべきことでした」。

 

大黑澄枝先生近藤富男先生とともに宝塚市立中学校教師満福寺足立有里さんは大黑澄枝先生だった僧侶となった足立有里さんは僧命足立智教めた満福寺4代住職として足立智教さんが婚姻した足立泰教さんが5代住職として在職中

 

 

3朝鮮人参拝墓100年以上維持しながら祭祀してきた満福寺事情しくなると足立智教さんは師匠大黑澄枝先生相談大黑澄枝先生はこのらせを宝塚同僚活動家近藤富男先生らせたのだ

 

1986年秋鄭鴻永先生とともに3朝鮮人埋葬墓跡した近藤富男先生ついに足立智教さんと大黑澄枝先生けでらの参拝墓再発見されたのだ埋葬墓跡発見されて35ぶりの再発見だった。 (2022/9/12趙正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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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영-콘도 도미오 연구팀이 고베 수도공사의 조선인 순난자 3인의 매장묘터를 찾아낸 것은 1986년 초가을이었다. 1914-1915년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가 터널 낙반 사고로 희생된 지 약 70년이 지난 후였다. 그러나 조사는 거기서 막다른 골목에 부딪혀 더 진행되지 못했다.

 

참배묘가 따로 마련되었을 것으로 추정한 두 사람은 지역 사찰의 과거 기록을 뒤지고 묘지를 돌아보면서 묘비나 무연고 묘소를 찾아보았지만 세 사람의 참배묘는 찾을 수 없었다.

 

 

이들의 참배묘가 발견된 것은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2020223일이었다. 1929년 후쿠치야마선 철도공사에서 사망한 윤길문, 오이근씨를 기리는 추도비 건립 준비가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때, 타마세의 불교사찰 만푸쿠지(満福寺)에서 연락이 왔다. 이에 대해 콘도 도미오 선생은 <무쿠게 통신(300, 2020531)>에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올해 2020223일 아침, 정홍영 선생의 책에도 서술되지 않은 중대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니시타니의 타마세(玉瀬)에 있는 만푸쿠지(満福寺)에서 온 소식이다. 100년 이상 사찰과 지역 부인회에서 조선인들을 위령하고 있는데, 부인회도 고령화되고 인원수도 줄어들어 이제 그만 마무리를 지으려 한다는 말씀이었다. 다만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 전화로 대략 방문 약속을 하고 26일에 절에 찾아가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만푸쿠지에서는 매년 824일 아침 무연고 참배를 계속해 왔다. 주지 스님과 부녀회원이 무연불(無縁仏)씨와 삼계만령(三界萬霊)에게 꽃과 쟁반 과자를 바치고 각각 향을 피우며 영혼을 위로해 왔다. 아마도 100년 정도 계승되어 오는 동안에 그 의미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선대 주지 스님이 옛날 타케다오의 터널 폭파 공사로 사망한 조선인들을 추도하고 있다는 말씀이 계셨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나눈 후에 (주지 스님이) 현장을 안내해 주시고, 꽃과 과자를 갖추어 불경을 외워 주셨다. 금년 326일에 다카라즈카의 조선인을 추도하는 비를 건립한다고 전하자, 지금까지 자신들이 계속해 온 위령의 마음도 이어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면서 몹시 기뻐해 주셨다. 그리고 놀랍게도 추도비가 완성되는 날 아침 만푸쿠지의 주지 내외분이 우리보다 일찍 현지를 찾아 추도비 앞에서 법요(法要)를 지내 주셨다.”

 

 

콘도 도미오 선생은 만푸쿠지에서 온 중대한 소식이라고 하셨을 뿐, 누가 어떤 방법으로 연락해 왔는지는 서술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는 다이꼬꾸 스미애(大黑澄枝) 선생을 통해서였음이 최근에 밝혀졌다. 다이꼬꾸 스미애 선생은 내게 보내신 카톡 문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20202월 제 제자인 만푸쿠지의 아다치 유리(足立有里)씨로부터 저에게 타마세 부인회에서 100년이 넘는 기간을 제사했는데 이제 중단그만하고 싶다는 제의가 있습니다. 누구에게 상담하면 좋습니까?’라는 전화가 와서 콘도 도미오 선생님에게 연락했습니다. 326일 건립 예정이었던 추도비에 고베 수도공사에서 희생된 3명의 이름을 더해 새기게 되었습니다. 굉장히 극적이고 기념할만한 일이었습니다.”

 

다이꼬꾸 스미애 선생은 콘도 도미오 선생과 함께 다카라즈카 시립중학교의 교사로 근무하셨고, 만푸쿠지의 아다치 유리씨는 다이꼬꾸 스미애 선생의 제자였다. 졸업 후 승려가 되신 아다치 유리씨는 승명(僧名)을 아다치 치쿄(足立智教)로 정하셨고, 아다치 다이쿄(足立泰教)와 결혼해 만푸쿠지의 3대 주지부부로 재직 중이셨다.

 

 

세 조선인의 참배묘를 1백년 이상 유지하며 제사해 오던 만푸쿠지의 사정이 어려워지자 아다치 치쿄씨는 스승인 다이꼬꾸 스미애 선생님께 상의해 왔고, 다이꼬꾸 스미애 선생님은 이 소식을 다카라즈카의 동료 활동가 콘도 도미오 선생님에게 알려주셨던 것이다.

 

1986년 가을 정홍영 선생님과 함께 세 조선인의 매장묘터를 찾아내셨던 콘도 도미오 선생은 마침내 아다치 치쿄씨와 다이꼬꾸 스미애 선생님의 도움으로 그들의 참배묘도 재발견하신 것이다. 매장묘터가 발견된 지 35년 만의 재발견이었다. (2022/9/12,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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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1915年神戸水道工事犠牲になった3朝鮮人労働者する鄭鴻永(チョン·ホンヨン)先生記録玉瀬埋葬墓確認してわった

 

鄭鴻永先生らが間違いなく西谷のどこかにめられているはずであつた確信しながら地元のお過去帳調べたり墓地をまわつて墓石無縁仏してみたりしたがどうしてもそれらしい場所確認す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たが以後朝鮮人労働者行跡つからなかったとした

 

その鄭鴻永-近藤富男先生兵庫県在日朝鮮人歴史再構成するための研究邁進10にわたる研究結果歌劇のもうひとつの歴史:宝塚朝鮮人(1997)という出版された

 

 

宝塚朝鮮人3部構成となっている112研究結果報告書215鄭鴻永先生がインタビューした在日朝鮮人115証言3には調査過程確保した資料年表収録した西谷朝鮮人労働者11収録されたことからこれが鄭鴻永-近藤富男調査研究チームの最初調査研究だったとられる

 

この関西在日朝鮮人史研究者歓迎された力著だが一般にはあまり注目されないままれられ初版発行後絶版となった筆者絶版になったこのむことができたのは幸運だった鄭鴻永先生長男である伊丹居住写真家鄭世和先生自分所蔵本特送郵便ってくれたためだ

 

筆者鄭世和先生ったのは2019年崔承喜(チェ·スンヒ)先生日本公演調査するために関西地域訪問しただったちょうど大阪かれた<在日朝鮮学校中央芸術競演大会>参観したがその会場行事記録担当していた鄭世和先生った

 

すぐしくなったたちはあらゆるわした. 崔承喜先生調査研究をし鄭世和先生朝鮮学校をしてくれた。 「宝塚朝鮮人追悼碑がまもなく建立されるというめていたのもその鄭世和先生からだった

 

 

鄭世和先生紹介真銅敏之先生にも近藤富男先生にもったこの々は鄭世和先生父親鄭鴻永先生とともに兵庫在日朝鮮人調査研究踏査旅行参加した々だった

 

近藤富男先生20001鄭鴻永先生他界した朝鮮関係研究けた韓国有機農学校給食とハングル用例研究した<むくげ通信>長期連載されたりもしたしかしよりも宝塚水道鉄道工事犠牲になった朝鮮人労働者のための追悼碑てたいという鄭鴻永先生遺志れなかった

 

近藤富男先生20にわたり兵庫県大阪府知識人在日同胞活動家たちの努力糾合したついに20203宝塚朝鮮人追悼碑てた神戸水道工事福知山線鉄道工事犠牲になった5朝鮮人労働者のための追悼碑だった<むくげ通信>20205月号寄稿した近藤富男先生追悼碑建立するやいなやその鄭鴻永先生けつけ追悼碑建立報告をしたいた

 

 

本来追悼碑福知山線鉄道工事死亡した2朝鮮人労働者のために建設される予定だったところが追悼碑建立直前20202近藤富男先生宝塚玉瀬仏教寺院滿福寺大京足立住職から電話けた3朝鮮人労働者参拝墓滿福寺境内けられており玉瀬婦女会とともに100年以上彼らに無縁故者として祭祀ってきたというだった

 

これに近藤富男先生追悼碑建立関係者たちと当初2のために建立しようとした追悼碑5人追悼碑変更同年326日追悼碑建立えた鄭鴻永先生他界して20鄭鴻永-近藤富男調査研究チームが神戸水道工事殉難者たちを調査めて35ぶりのことだった。 (2022/9/7趙正熙(チョウ·ジョン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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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1915년 고베수도 공사에서 희생된 3인의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정홍영 선생의 기록은 타마세의 매장묘를 확인하면서 끝났다. 정홍영 선생님은 이들이 틀림없이 니시타니 어딘가에 묻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이 지역 사찰의 과거 기록을 뒤지고 묘지를 돌아보면서 묘비나 무연고 묘소를 찾아보았지만 이후 조선인 노동자들의 행적은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이후 정홍영-콘도 도미오 선생은 효고현의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한 다른 연구에 매진했고, 10여년에 걸친 연구 결과는 정홍영 선생의 <가극의 거리의 또 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다카라즈카와 조선인>3부로 구성되었다. 1부의 12개 장()은 연구 결과 보고서, 2부의 15개 장은 정홍영 선생이 인터뷰한 재일 조선인 115명의 증언이다. 3부에는 조사과정에서 확보한 자료들과 연표를 수록했다. 니시타니의 조선인 노동자 이야기가 11장에 수록된 것으로 보아, 이것이 정홍영-콘도 도미오 조사연구팀의 첫 번째 조사연구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간사이 지역의 재일조선인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환영을 받은 역저이지만, 일반에는 큰 주목을 끌지 못한 채 잊혀 졌고, 책도 초판을 발행한 후 절판되었다. 필자가 절판된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정홍영 선생님의 장남이신 이타미 거주 사진가 정세화 선생이 자신의 소장본을 특송 우편으로 보내 주셨기 때문이다.

 

필자가 정세화 선생을 만난 것은 2019년 최승희 선생의 일본 공연을 조사하기 위해 간사이 지역을 방문했을 때였다. 때마침 오사카에서 열린 <재일조선학교 중앙예술경연대회>를 참관했는데, 그 대회장에서 행사 기록을 담당하셨던 정세화 선생을 만났다.

 

빠르게 친해진 우리는 온갖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주로 최승희 선생 조사연구 이야기를 했고 정세화 선생은 조선학교 이야기를 해 주셨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곧 건립된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것도 그때 정세화 선생님으로부터였다.

 

 

정세화 선생의 소개로 신도 도시유키(真銅敏之) 선생도 만났고 콘도 도미오(近藤富男) 선생님도 알게 되었다. 이분들은 정세화 선생의 부친 정홍영 선생님과 함께 효고현의 재일조선인사 조사연구나 답사여행에 동참하신 분들이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20001월 정홍영 선생님이 타계하신 후에도 조선관계 연구를 계속하셨다. 한국의 유기농 학교 급식과 한글 용례를 연구하신 글은 <무쿠게 통신>에 장기 연재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도 다카라즈카의 수도, 철도공사에서 희생된 조선인 노동자들을 위한 추도비를 세우고 싶다는 정홍영 선생님의 유지를 잊지 않으셨다.

 

콘도 도미오 선생은 약 20년에 걸쳐 효고현과 오사카부의 지식인과 재일동포 활동가들의 노력을 규합한 끝에 마침내 20203<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세웠다. 고베수도공사와 후쿠치야마선 철도공사에서 희생된 5인의 조선인 노동자를 위한 추도비였다. <무쿠게 통신> 20205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콘도 도미오 선생은, 추도비를 건립하자마자 그길로 정홍영 선생의 묘소로 달려가 추도비 건립을 보고드렸다고 썼다.

 

 

원래 추도비는 후쿠치야마선 철도공사에서 사망한 2인의 조선인 노동자를 위해 건립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추도비 건립 직전인 20202,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다카라즈카 타마세의 불교 사찰 만푸쿠지(滿福寺)의 주지 타이쿄 아다치 스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3인의 조선인 노동자의 참배묘가 만푸쿠지 경내에 마련되어 있고, 타마세 부녀회와 함께 1백년이 넘게 이들에게 무연고자 제사를 드려왔다는 말씀이었다.

 

이에 콘도 도미오 선생은 추도비 건립 관계자들과 의논해 당초 2명을 위해 건립하려던 추도비를 5인 추도비로 변경했고, 그해 326일 추도비 건립을 마쳤다. 정홍영 선생님이 타계하신지 20, 정홍영-콘도 도미오 조사연구팀이 고베수도공사 희생자들을 조사하기 시작한지 35년만의 일이었다. (2022/9/7,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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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弘永チョン·ホンヨン1929-2000985から2年余りの文献調査現地踏査じて南益三(ナム·イクサム)居住していた合宿所位置いていた作業場推論のレベルでも特定することができたしかし南益三氏がどのトンネル工事でどんな事故死亡したのか確認できなかった記録もないからだ

 

鄭鴻永さんは紅葉館女将である松本文美さん當時78からトンネル工事事故する簡単証言ることができただけだった松本彩美さんはトンネルで発破事故負傷者がかなりかったとし被害者たちは全身さって今日3明日5というふうにまみれになって医師ばれるした

 

 

鄭鴻永さんはトンネル事故調査する同時3朝鮮人犠牲者埋葬地調査したらの死亡後についても記録もなかったので西谷地域元老たちをねてみをけた長年調査過程鄭弘永氏のようにべている

 

西谷何度んだのは隧道工事現地調査りのにもう目的があつたそれは埋葬地すことであつた西谷にはから」、「のいわゆる両墓制風習近年までつていてぬとまず土葬しててるのである西谷村役場発行した認許証もまた火葬でなく埋葬である以上間違いなく西谷のどこかにめられているはずであつた地元のお過去帳調べたり墓地をまわつて墓石無縁仏してみたりしたがどうしてもそれらしい場所確認す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

 

このみながら筆者無念にあった朝鮮人労働者埋葬地そのくてしい西谷山間地域った鄭鴻永先生姿がったどれだけ漠然としていただろうか

 

しかしえてみるとめになるもあった鄭鴻永先生はおそらく近藤富男(1950-2022)同行しただろう二人はいつも一緒調査一緒研究していたパートナーだったからだ20001鄭鴻永先生くなった追慕する近藤富男先生金魚になったいたことがあるほどだった

 

 

1986年秋ついに鄭鴻永先生近藤富男先生南益三氏3朝鮮人埋葬した埋葬地発見した西谷大原野んでいた郷土史学者光国光氏けで西谷共同墓地跡つけることができたのだ

 

一九八六年初秋のある光国さんから電話埋葬地がわかつたという連絡けた翌日私光国さんといつしょにらせて埋葬地つた玉瀬墓地かられた小高るとまだ一面えてあつてどうてもめられた埋葬地にはえなかつた

 

光国さんの説明によるとこのから共有地であり農家つていたんだめた馬墓であつためは玉瀬墓地下手にある空地められたがそのうちに場所くなつてこの馬墓々とめられたことが地元古老々とえられているというのである。」

 

 

鄭鴻永先生はついに3朝鮮人労働者まっているところをねたが数十万人神戸市民生命水工事自身げた々の埋葬地とはられないほどみすぼらしいわれたところに風化したがむやみにかれていることからそこがてられてしい墓地だということがかった鄭鴻永先生自分感想をこのようにえた

 

しばらくのそのくすのみであつたもの歳月らはいつたいどんないでこのけているのだろうか遠方から出稼ぎに生命とした人達はるばるつて異郷められた朝鮮人たちの無念気持ちがわるようであつたわせてらの冥福るのみであつた。」 2022/9/6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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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영(1997)씨는 2년여의 문헌조사와 현지답사를 통해 남익삼씨가 거주했던 합숙소의 위치와 그가 일했던 작업장을 추론의 수준에서나마 특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익삼씨가 구체적으로 어느 터널 공사에서 어떤 사고로 사망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아무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정홍영씨는 코요칸(紅葉館)>의 안주인 마츠모토 아야미(松本文美, 78)씨로부터 터널공사 사고에 대한 간략한 증언을 얻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마츠모토 아야미씨는 터널에서 발파 사고로 부상자가 꽤 많았다면서, 피해자들은 온 몸에 돌이 박혀서 오늘은 세 명, 내일은 다섯 명이라는 식으로 피투성이가 되어 의사에게 실려 가곤 했다고 말했다.

 

 

정홍영씨는 터널 사고를 조사하면서 동시에 3명의 조선인 희생자들의 매장지를 찾았다. 이들의 사망 후에 대해서도 아무 기록이 없었으므로 주로 니티타니 지역의 원로들을 찾아 탐문을 계속했다. 오랜 탐문 조사의 과정을 정홍영씨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내가 니시타니에 몇 번이나 발길을 옮긴 것은, 터널 공사의 현지조사나 증언 청취 말고도 또 하나의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매장지를 찾는 일이었다. 니시타니에는 예로부터 '참배묘()''매장묘()'의 두 가지 묘제를 유지하는 풍습이 최근까지 남아 있다. 사람이 죽으면 먼저 '매장묘'에 토장을 하고 (참배하는) 묘는 다른 곳에 세우는 것이다.

 

니시타니 사무소에서 발급한 허가증도 화장이 아닌 매장인 이상 틀림없이 니시타니 어딘가에 묻혀 있을 것이었다. 이 지역 사찰의 과거 기록을 뒤지고 묘지를 돌아보면서 묘비나 무연고 묘소를 찾아보기도 했지만 그럴듯한 장소를 확인할 수 없었다.”

 

이 글을 읽으면서 필자는 억울한 죽음을 당한 조선인 노동자들의 매장지를 찾아 그 넓고 험한 니시타니 산간지역을 찾아 헤매던 정홍영 선생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얼마나 막막하셨을까?

 

 

그러나 생각해 보니 위안되는 점도 있었다. 정홍영 선생님은 아마도 콘도 도미오(近藤富男, 1950-2022) 선생과 동행하셨을 것이다. 두 분은 항상 같이 조사하고 같이 연구하시던 단짝 파트너이셨기 때문이다. 20001월 정홍영 선생이 돌아가신 후 그를 추모하는 글에서 콘도 도미오 선생은 나는 그의 금붕어 똥이 되었다고 쓰신 적이 있을 정도였다.

 

1986년 가을, 마침내 정홍영 선생과 콘도 도미오 선생은 남익삼씨를 포함한 3명의 조선인들이 묻힌 매장지를 찾아냈다. 니시타니(西谷)의 오하라노(大原野)에 거주하던 향토사학자 미쓰쿠니 히카리(光国光) 씨의 도움으로 니시타니의 공동묘지 터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1986년 초가을의 어느 날, 미쓰쿠니 씨로부터 매장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전화 연락을 받았다. 다음날 나는 미쓰쿠니 씨와 함께 차를 몰아 그 매장지로 향했다. 타마세의 묘지에서 조금 떨어진 나지막한 산속으로 들어가니 아직 어린 밤나무가 가득 심어져 있어 아무리 봐도 사람이 묻힌 매장지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미쓰쿠니 씨의 설명에 따르면 이 산은 옛날부터 마을의 공유지였으며 농가에서 기르던 소나 말이 죽었을 때 묻는 '말 무덤(馬墓)'이었다고 한다. 사람이 죽으면 처음에는 타마세의 묘지 아래쪽 공터에 묻었지만, 장소가 좁아지자 이 말 무덤 옆에 차례차례 묻었던 일이 지역 원로들 사이에 자세히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홍영 선생은 마침내 3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묻혀 있는 곳을 찾았으나, 수십 만 명의 고베 시민에게 생명수를 보내는 공사에 자신의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매장지라고 볼 수 없을 만큼 초라했다. 흙이 덮인 곳에 풍화된 돌들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그곳이 버려진 지 오래된 묘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홍영 선생은 자신의 소회를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말없이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80년의 긴 세월을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이 땅에 잠들어 있는 것일까. 돈을 벌려고 먼 곳에서 왔다가 목숨을 잃은 (일본) 사람들과 멀리서 바다를 건너와 타향에서 죽어 소와 말의 무덤에 묻힌 조선인들의 억울한 마음이 가슴 속에 전해지는 듯했다. 나는 그저 마음속으로 손을 모으고 그들의 명복을 빌 뿐이었다.” (2022/9/6, 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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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益三氏参加した1次改修工事1914-1921では武庫川上流千刈にダムをいでしい貯水池浄水場発電所導水路建設工事同時われたその危険工事導水管通過させるためのトンネル掘削工事だった

 

千刈から生瀬まで12のトンネルがられたがトンネルは1.8m1.8m馬蹄形でありトンネル工事導水管水圧によって破損したり漏水することをぐためにコンクリートライニングと防水工事同時われた

 

このトンネル工事設計図面工程についてはくの文献資料っているが工事参加した作業員する記録はほとんどなかった。 「神戸市水道70年史にトンネル工事進行するのような記録っているだけだった

 

掘削さともメートルの導坑げをなう普通順序であつたがらかいところは手掘いところは爆薬使用した坑内のズリしはトロッコ二台一組としていトロッコー人夫二名積込手伝二名がつき土捨場整理一名掘方三名配置昼夜三交替とした坑内では当時のこととてもちろんカンテラやカーバイトランプの使用大部分であつたがただ宇塚付近では電力使用できたので電灯照明掘削した

 

この記録から推測してトンネル掘削作業はカンデラやカーバイトのわれ岩壁爆破のためにダイナマイトを使用したため危険常在した鄭鴻永氏のインタビューにじた波豆在住測量技師福本實二さん当時75はこう証言した

 

在職中先輩職員からよく大正時代第一回拡張工事きましたがいていたのはみな遠方から出稼ぎにきていた人達朝鮮人達ばかりでその当時朝鮮人日本人よりかつたそうです事故何人死人たといういたことがありますよ

 

 

しかし死亡者負傷者する記録くないため南益三氏3朝鮮人がどの工事犠牲になったのか把握するのはしかった南益三氏埋葬認許証には日本現地住所記載されておらずがどの地域居住したのかさえ推定できなかった

 

鄭鴻永氏方向えて西谷村役場発行した埋葬認許証全数調査した同氏西谷8地域つである玉瀬死亡者数注目したこの地域死亡者数年平均1-5だったが神戸水道第1次拡張工事があった1914-1916死亡者数年間6-15異例的かった

 

この3年間死亡者本籍地調査した結果現地人死亡者年間2-5例年とほぼじだったが外地人死亡者数3年間20だった死亡者推移1914101915819162減少傾向だったこの20外地人死亡者のうち1418から45までのりの男性でありそのうち朝鮮人3まれていた

 

 

鄭鴻永氏はまた武田尾飲食店兼旅館紅葉館のおかみさんである松本文美さん当時78から労働者合宿所工事事故する証言ることができた

 

子供でしたのでハッキリしたことはかりませんけども朝鮮らしいもいたようにいます。… トンネルエ工事発破事故怪我人がずいぶん沢山でました身体じゅうにさつて今日三人明日五人というぐあいにだらけになつて医者まれるのを何回たことがありますよ」。

 

2にわたる調査鄭鴻永氏朝鮮人労働者居住した合宿所(飯場)住所イズリハ1-45番地でありこの合宿所4トンネルと5トンネルからかったことをらかにしたしたがってイズリア合宿所居住した朝鮮人労働者4トンネル工事(1914/8/18-1916/7/13)5トンネル工事(1914/2/18-1916/1/11)投入されたと推定され南益三氏もこの工事参加して1915220事故にあったと推論された。 (2022/9/4趙正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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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익삼씨가 참가한 제1차 개수공사(1914-1921)에서는 무코카와(武庫川)의 상류 센가리(千刈)에 댐을 막아 새 저수지를 만들고, 정수장, 발전소, 도수로 건설 공사가 동시에 진행했다. 그중 가장 위험한 공사가 도수관을 통과시키기 위한 터널 굴착 공사였다.

 

센가리에서 나마제(生瀬)까지 12개의 터널이 만들어졌는데, 터널은 높이 1.8m, 너비 1.8m의 말굽모양이었고, 터널공사와 함께 도수관이 수압에 의해 파손되거나 누수되는 것을 막기 위해 콘크리트 라이닝과 방수공사가 동시에 이뤄졌다.

 

 

이 터널 공사의 설계도면과 공정에 대해서는 많은 문헌 자료가 남아 있지만 공사에 참여한 인부들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었다. <고베시 수도 70년사>에 터널공사 진행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굴착은 폭과 높이 모두 1.8m의 도갱을 파서 넓혀 나가는 것이 일반적인 순서였다. 부드러운 곳은 손으로 파고 단단한 곳은 폭약을 사용했다. 갱내에서 파낸 흙을 운반하기 위해 광차 2대를 1조로 하여 광차 1대에 인부 2, 그 밖에 흙을 부리는 것을 돕는 인부 2, 토사장 정리에 1, 굴착공 3명을 배치하여 주야 3교대로 작업했다. 갱내에서는 당시의 사정에 따라 칸델라나 카바이트 램프를 사용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우즈카(宇塚) 부근에서는 전력을 사용할 수 있어 전등 조명으로 굴착작업을 했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터널 굴착 작업은 칸델라나 카바이트의 어두침침한 불빛 아래서 이뤄졌고, 암벽 폭파를 위해 다이나마이트를 사용했기 때문에 위험이 상존했다. 정홍영의 인터뷰에 응한 하즈(波豆) 거주 측량기사 후쿠모토 지츠지(福本實二, 당시 75)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재직 중에 선배 직원들로부터 자주 다이쇼시대 제1차 확장공사 때의 얘기를 들었는데, 인부들은 모두 먼 곳에서 돈 벌러 온 사람들이거나 조선 사람들뿐이었고, 그 당시에는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많았다고 합니다. 사고로 사망자가 여러 명 났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어요.”

 

 

그러나 사망자나 부상자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에 남익삼씨를 포함한 3명의 조선인이 어느 공사에서 희생되었는지 알아내기는 어려웠다. 특히 남익삼씨의 매장인허증에는 일본 현지 주소가 기재되지 않아 그가 어느 지역에서 거주했는지조차 추정하기 어려웠다.

 

정홍영은 방향을 바꾸어 니시타니(西谷) 촌사무소가 발행한 매장인허증을 전수 조사했다. 그는 니시타니 8개 지역의 하나인 타마세(玉瀬)의 사망자수에 주목했다. 이 지역 사망자 수는 연평균 1-5명이었는데, 고베수도 제1차 확장공사가 있었던 1914-1916년의 사망자 수는 연간 6-15명으로 이례적으로 많았다.

 

3년간 사망자들의 본적지를 조사하니 현지인 사망자는 연간 2-5명으로 예년과 비슷했으나, 외지인 사망자 수는 3년간 총 20명이었다. 사망자 추이도 191410명으로 가장 많았고, 19158, 19162명으로 감소추세였다. 20명의 외지인 사망자 중 14명이 18세에서 45세까지의 한창 일할 나이의 남성이었고, 그 중에 조선인 3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정홍영은 또 타케다오(武田尾)의 오래된 음식점 겸 여관 코요칸(紅葉館)의 안주인 마츠모토 아야미(松本文美, 78)씨로부터 노동자 합숙소와 공사 사고에 대한 증언을 얻을 수 있었다.

 

어려서 확실한 건 모르겠지만 조선 사람도 있었던 것 같아요. ... 터널에서 발파 사고로 부상자가 꽤 많았습니다. 온 몸에 돌이 박혀서 오늘은 세 명, 내일은 다섯 명이라는 식으로 피투성이가 되어 의사에게 실려 가는 것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어요.”

 

2년에 걸친 조사 끝에 정홍영은 조선인 노동자가 거주했던 합숙소(飯場=함바)의 주소가 '이즈리하 1-45번지'이며 이 합숙소는 제4호 터널과 제5호 터널에서 가까웠음을 밝혀냈다. 따라서 이즈리아 합숙소에 거주했던 조선인 노동자들은 제4호 터널공사(1914/8/18-1916/7/13)와 제5호 터널공사(1914/2/18-1916/1/11)에 투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될 수 있었고, 남익삼씨도 이 공사에 참가했다가 1915220일 사고를 당했던 것으로 추론되었다. (2022/9/4,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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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益三氏埋葬認許証参考にして故郷今日慶尚南道統営市光道面だったと推定そのでも安井里黄里地域あるいは竹林里地域だったと範囲めることができたやこの地域調査して南益三氏がここ出身だという文献証拠証言確保すれば期待していた目的達成することになるだろう

 

南益三氏縁故地確認のための実際調査宝塚発生した死亡事故整理しておこうまず南益三氏死亡したのは1915220推定される埋葬認許証発給日221埋葬日221であることをると南益三氏はその前日220死亡翌日やかに埋葬されたものとみられるからだ水道改修工事参加して事故死った肉体労働者のために3日葬5日葬った可能性はほとんどなさそうだ

 

神戸水道工事朝鮮人労働者大挙参加したという事実らかにしたのは在日朝鮮人歴史家鄭鴻永(チョン·ホンヨン, 1929-2000)だった1985年春宝塚朝鮮人たちを調査めた西谷地域市史編集担当した若林泰氏から3埋葬認許証入手した金炳順(キム·ビョンスン)張長守(チャン·ジャンス)南益三(ナム·イクサム)埋葬認許証だった

 

 

鄭鴻永氏らの死亡時期1914-1915だったといういた日帝朝鮮強占実現してからわずか4~5時期日本宝塚山岳地帯である西谷玉瀬朝鮮人3死亡したというのが意外だったためだ

 

内務省警保局発行した統計報告書朝鮮人概況によると1915日本国内朝鮮人全国3,986兵庫県218だけだったこれは公式統計だから実際仕事めて日本渡航した朝鮮人はもっとかっただろうが大阪神戸東京などの大都市ではなく兵庫県奧地西谷朝鮮人3死亡したことはらかに不思議なことだった

 

以後鄭鴻永氏2年間調査じて朝鮮人労働者参加した工事神戸水道工事でありらが導水館のトンネル掘削工事事故った事実らかにした

 

 

神戸水道めて開通したのは1905だった横浜とともに日本代表的国際貿易港だった神戸には水道問題深刻だったえる市民だけでなく神戸港入港する船舶良質供給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ためだ1890には神戸にコレラががり1千人余りが死亡したがその原因つがきれいな用水不備だった

 

これに神戸市水道建設したが1893年神戸市議会水道建設計画承認したが日清戦争きたため1897になって工事まりついに神戸水道水給水まったのは1905だった

 

神戸水道開通したものの神戸市人口予想よりはるかに増加した水道工事着工当時189319万人だった人口完工時1905には32万人人口増加傾向依然としてだった神戸水道工事計画当時給水人口目標25万人だったが完工時にすでに人口目標値えてしまったため神戸水道拡張工事けられなくなった

 

 

神戸市政府武庫川上流千刈たな水源2にわたって拡張工事った日本語文献にはこれを改修工事記述したが水源やし導水路たに架設するなどの拡張工事であった

 

1次拡張工事1914まり1921完工2次拡張工事1926着工1931完成したが人口80万人神戸水道水供給することが目標だった

 

鄭鴻永氏埋蔵認許証れた金炳順(191413)南益三(1915121)張長守(1915324)埋葬日神戸水道工事進捗日程比較3朝鮮人労働者参加した神戸水道工事1914からまった神戸水道第1次改修工事(1914-1921)であったと断定することができた。 (2022/9/2趙正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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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익삼씨의 매장인허증을 참고하여 그의 고향이 오늘날의 경상남도 통영시 광도면이었던 것으로 추정했고, 그중에서도 지금의 안정리황리지역, 혹은 죽림리지역이었을 것으로 범위를 좁힐 수 있었다. 이제 이 지역을 조사해서 남익삼씨가 이곳 출신이라는 문헌증거나 증언을 확보한다면 기대하던 목적을 달성하게 될 것이다.

 

남익삼씨의 연고지 확인을 위한 실제 조사에 나서기 전에 그가 다카라즈카에서 맞았던 사망사고를 정리해 두자. 우선 남익삼씨가 사망한 것은 1915220일로 추정된다. 매장인허증 발급일이 221일이고 매장일도 221일인 것을 보면 남익삼씨는 그 전날(220) 사망했고, 하루 만에 신속하게 매장됐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수도 개수공사에 참가했다가 사고사를 당한 막노동자를 위해 3일장이나 5일장을 치렀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고베수도공사에 조선인 노동자들이 대거 참여했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은 재일동포 역사가 정홍영(鄭鴻永, 1929-2000)이었다. 1985년 봄 다카라즈카의 조선인들을 조사하기 시작한 그는 니시타니 지역의 시사(市史) 편집을 담당했던 와카바야시 야스시(若林泰)씨로부터 3장의 매장인허증을 입수했다. 김병순, 장장수, 남익삼씨의 매장인허증이었다.

 

 

정홍영씨는 이들의 사망시기가 1914-1915년이었다는 점에 놀랐다. 일제의 조선강점이 이뤄진지 불고 4-5년밖에 안되었던 시기에 일본 다카라즈카의 깊은 산악지대인 니시타니의 타마세에서 조선인이 3명이나 사망했다는 것이 의외였기 때문이다.

 

일본 내무성 경보국(警保局)이 발행한 통계보고서 <조선인개황(朝鮮人概況)>에 따르면, 1915년의 일본내 조선인은 전국에 3986, 효고현에 218명뿐이었다. 이는 공식통계니까 실제로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도항한 조선인은 더 많았겠지만, 오사카나 고베, 도쿄 등의 대도시가 아니라 효고현의 오지 니시타니에서 조선인이 3명이나 사망한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이후 정홍영은 약 2년간의 조사를 통해 조선인 노동자들이 참가했던 공사가 고베수도공사였으며, 이들이 도수관의 터널 굴착공사에서 사고를 당했던 사실도 밝혀냈다.

 

고베에 수도가 처음 개통된 것은 1905년이었다. 요코하마와 함께 일본의 대표적인 국제무역항이었던 고베에는 수도 문제가 심각했다. 날로 늘어나는 시민들뿐 아니라 고베항에 입항하는 선박에 양질의 물을 공급해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1890년에는 고베에 콜레라가 번져서 1천여명이 사망했는데, 그 원인의 하나가 용수 미비였다.

 

이에 고베시는 수도 건설에 나섰는데, 1893년 고베 시의회가 수도 건설계획을 승인했지만, 청일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1897년에야 공사가 시작되었고, 마침내 고베에 수돗물 급수가 시작한 것은 1905년이었다.

 

고베 수도가 개통되기는 했으나 고베시 인구가 예상보다 훨씬 빨리 증가했다. 수도공사 착공 당시(1893) 19만 명이던 인구가 완공 시(1905)에는 32만 명으로 불어났고, 인구 증가세는 여전히 가파랐다. 고베 수도공사 계획 당시 급수 인구 목표가 25만 명이었는데, 완공 시에 이미 인구가 목표치를 넘어버렸기 때문에, 고베수도의 확장 공사가 불가피해졌다.

 

 

고베 시정부는 무코가와(武庫川) 상류의 센가리(千刈)를 새로운 수원으로 결정, 두 차례에 걸쳐 확장공사를 단행했다. 일본어 문헌에는 이를 개수(改修)공사라고 서술했지만, 수원을 늘리고 도수로(導水路)를 새로 가설하는 등의 대대적인 확장 공사였다.

 

1차 확장공사는 1914년에 시작되어 1921년에 완공되었고, 2차 확장공사는 1926년에 착공하여 1931년에 완성되었는데, 인구 80만 명의 고베에 수돗물을 공급하는 것이 목표였다.

 

정홍영은 매장인허증에 나타난 김병순(191413), 남익삼(1915121), 장장수(1915324)씨의 매장일과 고베수도공사의 진척 일정을 비교하여, 3인의 조선인 노동자가 참가했던 고베수도공사는 1914년부터 시작된 고베수도 제1차 개수공사(1914-1921)였던 것으로 단정할 수 있었다. (2022/9/2,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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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에서 정병례 선생의 <수세거부운동 기념비>를 보면서, 수세거부운동에 대한 궁금증도 되살아났다. 수세거부운동이 시작된 것은 전남 해남이었다. 해남 농민회의 회지 <해남농어민의 소리(1987920일 특집1)>“<농지개량조합>은 무엇하는 곳인가라는 글이 실리면서 수세 거부를 위한 선전활동이 시작됐다.

 

1111일 해남군 부락대표 150명이 <해남 부당수세거부 추진위원회>를 결성했고, 1126일에는 해남읍 농민 3천명이 수세거부 결의대회를 개최했다. 126일부터 <부당수세거부 및 농지개량조합 해체를 주장하는 해남 서명운동>이 시작됐고 수세납부고지서도 반납되었다.

 

수세<농지개량조합>이 농민들에게 강제로 거두던 물값이었다. 명목상 농업용수를 위한 댐과 저수지, 수로 등의 건설비와 관리유지비, 그리고 직원 인건비를 충당하기 위해 거두던 세금이었는데, 이는 일제가 1917년에 설치한 조선수리조합이 하던 일이 해방 후에도 그대로 이어진 것이었다. 1987년 징수된 수세는 1천억원(=2021년의 약 3275억원)에 달했다.

 

 

농민들은 수리시설이 철도, 항만, 도로와 마찬가지로 사회간접자본이므로 국가가 부담해야 하는 부문인데도 부담을 농민에게 떠넘기는 것은 부당하며, 일제 강점기 조선농민 수탈수단으로 강구되었던 것이 해방 후 40년이 넘도록 유지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수세거부운동은 해남에서 시작되었지만 가장 큰 규모로 활발하게 전개된 곳은 나주였다. 나주의 운동은 봉황면에서 시작됐다. 19871117, <봉황면 수세거부 대책위원회>가 결성됐고, 12월까지 나주의 각 면단위 조직이 완결되었다.

 

1229<부당수세거부 나주농민 결의대회>에는 나주 농민 1만여명이 참가했다. 12,073매의 수세납부고지서가 농조에 반납됐고, 10,026명이 수세폐지와 농조해체를 위한 서명운동에 참여했다. 이 결의대회에서는 수세거부운동의 구호 <못내 못내, 절대 못내, 부당 수세 절대 못내>가 채택되었고, 운동이 성공을 거둘 때까지 외쳐졌다. 이 구호는 고암 정병례 선생님의 <나주 수세거부운동 기념비>에도 새겨져 있다.

 

 

수세거부운동은 확산되어 19884<수세폐지를 위한 전남,북 농민대회>이 개최되었고, 1988111<전국 수세폐지 대책위원회>가 결성되면서 전국 62개 군으로 확산됐다. 1989213일 여의도 농민대투쟁 이후 3백평당 나락 23-28Kg이던 수세는 5Kg으로 대폭 감소되었다가, 1997년에 완전히 폐지되었고, 징수기관이던 농지개량조합도 폐지되어 2005년 한국농어촌공사에 흡수됐다.

 

수세거부운동의 과정과 결과는 2007년 수세거부운동 20주년을 맞아 세워진 기념비의 설명문에도 간략히 서술되어 있다. 이 설명문의 한국어판은 정확한 편이지만, 영문판에는 오류가 많기 때문에 신속히 교정해서 교체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1) 제목이 Naju Washingi Memorial이라고 되어 있는데, Washingi는 사전에 없는 단어이다. (2) ‘기념비가 1987년에 건립되었다(The monument was erected in 1987)’고 서술되었으나 이 기념비의 건립연도는 2007년이다. (3) 기념비가 농협(National Agricultural Cooperative Federation)의 폐지(death) 20주년 기념으로 건립되었다고 했으나, 수세거부운동으로 폐지된 것은 농협이 아니라 농지개량조합(Farmland Improvement Association)이다. (4) '농지개량조합'을 agricultural improvement unions라고 번역한 것은 잘못이다.

 

(5) 수세거부운동을 anti-water movement라고 표현했으나 이는 Anti-Irrigation-tax Movement의 잘못이다. (6) ‘수리시설이 폐지되었다(the irrigation system was finally repealed)’는 표현이 있으나 폐지된 것은 수세와 농지개량조합이지 수리시설이 폐지되었을 리 없다. (7) ‘전국농민회총연맹의 영문표기가 Republic of Korea Farmers Union이라고 되어 있으나, 이는 Korean Peasants League의 잘못이다. (8) 농림수산부는 Department of Agriculture and Fisheries인데 단체명을 소문자로 쓰는 것은 관행에 어긋난다. (9) 농지개량조합이 폐지되어 흡수된 기관은 '농림수산부'가 아니라 2000년의 '농업기반공사(Korea Agricultural and Rural Infrastructure Corporation)'이며, 이는 2005년 '한국농어촌공사(Korea Rural Community Corporation)'으로 개칭되었다. 

 

(10) 전체적으로, 영어 설명문의 내용이 부정확하고, 영어에 비문이 많다. (2022/9/4, 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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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1.) 한국어 설명문에 가깝게 영문 설명문을 재구성한다면 아래와 같은 시안을 제안할 수 있다.

Monument for the Anti-Irrigation-tax Movement in Naju

The monument was established in 2007 by the Committee for the 20th Anniversary Commemoration of the Anti-Irrigation-tax Movement in Naju, recognizing Naju farmers as the masters of their lives and the leaders of history against unfair tax systems.

As the results of the successful Anti-Irrigation-tax Movement in 1987, Korean peasant movement took a leap forward, resulting in the establishment of Korean Peasants League in 1990, the Irrigation-tax was abolished in 1997, and the Farmland Improvement Association, the tax-collecting agency, was dissolved and incorporated into the Korea Rural Community Corporation in 2005.

 

(사족 2.) 이 기념비는 내가 세계 곳곳에서 보아온 수많은 기념비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예술적으로 탁월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따라서 설명문을 수정할 경우 이 기념비를 디자인한 예술가(고암 정병례)가 설명문에 언급되면 기념비와 설명문의 격조가 한층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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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마지막 날인 지난 수요일, 고암(古巖) 정병례(鄭昺例, 1947-) 선생님의 새김아트 전시회에 갔다. 약 한 달을 벼르던 일이다. 발단은 올해(2022) 720일 나주를 방문, 금성관 근처에서 본 <나주 수세거부운동 기념비>였다. 나주성당에서 <째깐한 박물관>에 가려고 금성관로를 따라 걷는데 갑자기 나타난 이 기념비가 너무너무 인상적이었다.

 

길거리에 기념비를 세우는 건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이 기념비는 첫인상이 달랐다. 기념비라기보다는 미술관에 전시되어야 어울릴 예술품 같은 느낌이었다. 설명문을 읽어보니 비석의 취지는 길거리에 세울 기념비로 어울렸다. 그러니까 설치 자리는 맞는데, 기념비를 너무 예술적으로 제작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기념비의 자리 뿐 아니라 기념비 자체도 독특했다. 직육면체 돌덩이에 이리저리 글씨를 써서 가로나 세로로 세워놓은 평범한 비석이 아니었다. 직육면체의 돌덩이 두 개를 마주 세워놓은 것도 이례적이었고, 두 돌의 꼭대기 한쪽면만 곡선으로 처리한 것도 특이했다.

 

그러나 가장 독특했던 것은 표면에 새긴 그림을 색깔 처리한 것이었다. 빨간색과 녹색, 파란색이 사용됐고, 이것이 검은 바탕과 테두리, 그리고 판화 바탕처럼 그어진 다양한 흰색 줄무늬와 잘 어울렸다. 두 비석의 바깥쪽 측면에 쓰인 흰 글씨도 멋졌고 검은 바탕과 대비와 조화가 아주 좋았다.

 

두 비석 전면의 그림도 인상적이었다. 두 비석의 아래쪽 3분의1 부분에는 검은 바탕에 녹색 벼나 보리의 어린 줄기가 3단으로 형상화되어 있었고, 그 위에는 논밭의 모습(오른쪽 비석)과 쟁기질을 하는 사람의 모습(왼쪽 비석)이 새겨져 있었다. 사람은 붉은색으로, 논밭은 녹색으로 채색되어 있었는데 검은색으로 테두리와 여백이 채워진 색채 대비가 강렬했다.

 

 

쟁기질 하는 농부의 머리 위에는 달이 떠 있었는데, 달의 색깔을 연한 파란색으로 처리한 것이 신선했다. 또 오른쪽 비석에 새겨진 초록의 논밭의 위로 태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둥근 태양을 빙 두른 불꽃과 내부의 곡선이 이글거리는 태양의 뜨거움을 잘 표현하고 있었다.

 

관찰자의 착각 혹은 과잉 해석일수도 있으나, 달 아래의 쟁기질 농부의 모습은 한자로 달 월()’자처럼 보였고, 태양 아래 형상화된 논밭과 초목의 모습은 해 일()’자처럼 보였다. 밤낮없이 일하는 농부와 쉼없이 자라는 논밭의 작물을 형상화한 것이 아닌가 여겨졌다.

 

 

오른쪽과 왼쪽 비석의 바탕 무늬도 대조를 보였다. 태양 아래 논밭이 형상화된 오른쪽 비석의 바탕은 검은 바탕의 돌에 여러 방향으로 그어진 선들도 역동적인 분위기였고, 달 아래 쟁기질 농부의 모습을 형상화한 왼쪽 비석의 바탕은 주로 가로로 길게 새겨진 선들 때문에 대체로 차분하고 안정적인 모습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뒷면 바탕은 반대였다. 태양의 비석 뒷면에는 초록색 산봉우리 3개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 바탕은 차분하고 긴 가로선들이었고, 파란색으로 새겨진 강물의 흐름이 그려진 왼쪽 비석의 뒷면 바탕은 짧은 선들이 여러 방향으로 뻗어져 있어서 동적이었다.

 

나는 산처럼 움직이고 물처럼 생각해라(Move like Mountains, Think like Rivers.)’는 교훈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는데, 이 기념비의 뒷면에 새겨진 산과 물을 보자 작가에 대한 친밀감이 일었다. 내 생각을 경제적이고, 효과적이고, 성공적으로 대신 형상화해 주셨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독특하고, 멋지고, 철학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기념비를 언제 누가 제작했는지 설명문에는 적혀 있지 않았지만, 왼쪽 비석 측면에, 읽기가 그리 쉽지 않은 글씨체로, “20071212일 나주지역 수세거부운동 2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일동이 기념비를 세웠고, ‘고암 정병례 새김이라고 제작자가 밝혀져 있었다. 고암 정병례라는 호와 이름을 기억해 두기로 했다.

 

서울에 돌아와 이 기념비에 감탄한 이야기를 정철훈 선생한테 했더니, 정병례 선생님이 나주 동강 출신의 새김 아티스트이며, 자신의 집안 형님뻘이시라고 했다. 나는 고암 선생님을 뵐 기회를 부탁했고, 그로부터 약 한 달 만에 전시회에 가게 된 것이다. (2022/9/3, 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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固城市立図書館郷土資料収録された朝鮮時代古地図6日本による植民地時代行政区域一覧表参考にして南益三氏故郷慶尚南道固城郡春元面光三村だったと推定した

 

固城郡だったこの地域1914年以来統営郡になり解放後1955年統営郡地域春元面地域忠武市昇格したが1995年忠武市統営郡わせて統営市になってっているこれに1914年以前光三村地域広道面することになった

 

南益三氏埋葬認許証記録された住所春元面光三村という名前はこのように歴史えた。 「光三村今日光道面にそのした程度ところが今日統営市地図光道面地域調べれば春元面がさらにっている

 

 

光道面海岸から竹林里徳浦里安定里黄里などで構成されているが過去地図比較してみればこの地域過去光三面あるいは光三村だったにいないところが安井工團内春元1ギル」、「春元2ギル」、「春元3ギルという名前っているこれと関連して統営市のウェブサイトは春元という名前由来のように叙述した

 

安井国家産業団地内道路であり旧地名春元浦由来する道路名黃里棉花山南側海岸位置気候のようにかい野原という意味春原朝鮮初期春原元変遷され地元地名チュンエオンゲ」、「チュノンケ」、「チュエオンケなどとばれた旧春元浦口最近海岸てられ安井工團として造成された。」

 

この記述通りなら春元浦黄里安亭里にまたがっていた浦口だったとえられる春元浦口ててったという安井国家産業団地黄里安井里両方にまたがっているためだ

 

 

春元浦15978元均(ウォンギュン)漆川梁海戦日本水軍敗北したててげる途中死亡したところでもあった春元浦位置壬辰倭乱著者たちによって黃里(ファンリ)安井里あるいはイェスン主張されたがまでは統営市光道面安井里だったということが多数説

 

しかし古地図<東輿図(1850年頃)>には春元面春元浦明示されたが轅門北側海岸のへこんだ湾南側春元浦という名前記録されているこれは春元浦黃里ではなく安井里海岸にあったことを示唆する

 

ただし<東輿島>統営市ウェブサイトそして壬辰倭乱研究書春元浦轅門以北海岸にあったと主張することには共通するしかし<東輿島>のすべての古地図春元面轅門以南地域すなわち統制営弥勒島龍南面地域だとった

 

春元という名前春元浦から由来春元浦安井里海岸だったとすれば々な古地図轅門以南地域春元面んだ理由だろうかこれは統制営移転したためだ

 

 

壬辰倭乱めて設置された統制営初代統制使李舜臣本来閑山島にいた丁酉再乱閑山統制営風飛雹散になった巨済島吾兒浦(オアポ)固城県春元浦などにみながら定着できなかったが16046代統制使李慶濬(·ギョンジュン)によって統営市地域定着したこの地域本来巨濟縣頭竜浦だったがすぐ春元面ばれめた

 

主要軍陣移転する地名一緒場合がよくあった巨濟助羅鎭(チョラジン)本来今日舊助羅鎭にあったが軍陣玉浦助羅鎭という名称ったまた金海市長有面チャンユミョンにあった新門津シンムンジン鎮海市安骨チンヘシ·アンゴル方向ると、「新門津という名前一緒移転した

 

三道水軍統制営安定里海岸春元浦にあったが統制営頭龍浦それがあった地名春元まで一緒それで統営市内地域春元面ばれるようになったとられる。 (2022/9/1趙正熙(チョウ·ジョン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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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行政区域改編前後地名対照して作成された報告書新旧対照朝鮮全図府郡面里洞名称一覧(1916越智唯七編纂中央市場発行)海東地図(1750年頃)慶尚道地図(1872)」、そして地図(1884)をはじめとする6つの古地図調査した結果今日統営春元面であったことがかった

 

しかし南益三氏故郷当時春元面自体ではないかもしれないという疑問があった埋葬認許証れた住所最後先三村という地名のためだった先三村または先三という地名新旧対照朝鮮全図府郡面里洞名称一覧収録されていなかった

 

しかし古地図調査していたところ筆者春元面のすぐ北側光三面があり漢字ているという事実えが到達したもしかしたら南益三氏埋葬認許証記録された先三村光三村誤記かもしれない

 

 

古地図れた地名光三ではなく光三それより北側位置した光一面光二面いて命名されたものとられる調査対象になった古地図海東地図(1750年頃)によると光一面光内一運面光二面光内二運面略語だったしかしこの地図光内三運面れていないことから18世紀には光三面設置されなかったものとられる

 

しかし慶尚道地図(1872)では春元面所在統制営玄関である轅門のすぐ北側光三面設置されたことがられるつまり海東地図時期にはなかった光三面慶尚道地図製作以前設置されたのだ。 『慶尚道地図南益三氏出生(1878年頃)する製作されたのでがここでまれたとすれば故郷春元面ではなく光三面で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だろう

 

しかし光三面はその後再姿した南益三氏出生直後製作された<地図(21884)>には轅門以南地域春元面とそのまま表記されていたが轅門のすぐ北側位置した光三面という表記えた反面それよりさらに北側には光一面光二面がそのまま存続した

 

 

えればこのには光三面春元面にすでに移属されたものと推定できるそのため南益三氏埋葬認許証住所春元という言葉先三(光三誤記推定)という言葉同時登場したのではないかとえられるおそらく光三面設置されたさな地域だったため春元面移属され光三村格下げされた可能性もあるこの光三村埋葬認許証先三村誤記されたものと推定されたのだ

 

光三面/村域1914年日帝行政区域改編統営郡することになった反面光一面光二面固城郡された光一面固城郡居留面光二面固城郡東海面まれその名前えた

 

反面光三村地域日帝行政区域改編道内面統営郡広道面になった光道面光三面道内面頭文字ってった名前だったため光三面はその一部ではあるが統営にその痕跡しているわけだ

 

 

このようにれば南益三氏故郷慶尚南道固城郡春元面光三村だっただろうもちろんこれはまだ推定埋葬認許証記録された南益三氏故郷住所半分以上確認されていない春六まれることもありうる地名そのような地名当時朝鮮行政区名目録にないという理由春元誤記断定した先三という表記光三誤記推定したなどがすべて事実合致する場合にのみ事実められるだろう

 

埋葬認許証南益三氏住所曖昧その資料がないためこのように推定でもしてみるのが筆者としては最善だったそしてやこの推定朝鮮内縁故してみるしか方法がない状況。 (2022/8/31趙正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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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益三氏埋葬認許証れた朝鮮住所地「春元今日統営という事実把握した筆者はこれを固城市立図書館発見した古地図確認することにした

 

同図書館所蔵する『固城郡誌(1-3)『固城史料集(1-3)には々な古地図収録されていたそのうちなくとも5つの古地図春元明示されていた

 

固城郷土資料掲載された時期古地図海東地図(1750年頃)だった812822構成された海東地図(ソウル大学奎章閣韓国学研究院所蔵本)には朝鮮全図朝鮮8道別地図そして全国330りの郡縣地図まれているすべての地図彩色筆写製作された海東地図5慶尚道地図まれているが<固城縣>もここにしている

 

 

この<固城縣>中央には山脈川筋固城をはじめとする地名かれておりその余白には固城縣地理人口兵力水勢状況付記されていた右下には12付属んでいるが、「春元面(チュンウォンミョン)最後収録されていたこの地図によると春元面きさは3070、固城12面積かった地図本文によると三道水軍統制営東側した丘陵地域春元面表記したことが鮮明えた

 

それから100年後製作された慶尚道地図(1872ソウル大学校奎章閣韓国学研究院所蔵本)にも春元面表記されていた1871辛未洋擾経験した全国的われた地誌地図編纂作業一環として慶尚監営編纂した慶尚道地図9()構成された郡縣地図牧場山城軍陣地図104地図まれている

 

慶尚道地図朝鮮政府最後編纂した全国郡縣地図一環として作成されたもので今日までっている郡縣地図内容詳細精密地図評価される郡縣地図各郡縣所属した山城牧場軍陣など軍事地域地図むものと地図作成目的国防関連したものだったことを推察させる開港後変貌する直前各郡·姿いたため朝鮮時代慶尚道各地域肖像画といえる地図

 

 

'春元面'記述した<固城府地図><慶尚道地図>9()収録されているが固城半島(=統営半島)南部彌勒島(ミルクド)めた地域'春元面'という表記がされている春元面には先山面光三面そのには光一面光二面える

 

にも固城市立図書館所蔵された各種郷土資料収録された地図'春元面'表記したことでは<輿地圖(1789-1795)><東輿図(19世紀哲宗年間在位1849-1864)>そして<大東輿地図1861)>などがある

 

以上5つの古地図はすべて18世紀19世紀中期地図南益三氏(1878ごろの出生)出生する以前地図出生した製作されたこの地域地図してみると1884刊行された<地圖(高麗大学図書館所蔵)>があった

 

 

<地図(1884)>では絵画風郡縣地図帖4構成されているが2()道別全圖3()各道所属郡縣個別圖まれている地図余白各道郡縣人口財政耕地面積四方警戒城郭名前位置する内容記録されている

 

この<地図(2)>収録された固城府地圖によると固城半島(=統営半島)設置された轅門以南地域'春元面'という表示になっていたそして統営半島南方のろしがかれている彌勒島(ミルクド)にも'春元面'という表示になっていた

 

したがって南益三氏出生直後1884年頃統制営周辺地域彌勒島めて轅門以南地域全てが'春元面'だったのだ(2022/8/30趙正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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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益三氏朝鮮内縁故地推定するためには埋葬認許証記録された不完全住所依存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がこの住所でどの部分正確でどの部分間違っているのか判断できなかったしたがって不正確住所からとか信頼できる部分区別する方法じ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筆者はまず----などの行政単位をすべて無視して地名固有名詞だけを調査することにしたそれで中清春元」、「連北先三という名前だけがることになったまた草書体した文字のため、「春元ているようにえる春六連北ている蓮地調査めた

 

この6つの地名新旧対照朝鮮全図府郡面里洞名称一覧(1916越智唯七編纂中央市場発行)調べてみたこの報告書1914日帝朝鮮行政区域改編した結果をまとめたもので19世紀末20世紀初めに朝鮮使われた行政区域名前網羅していたこの報告書本文だけで1096ページにする膨大分量だったが1915死亡した南益三氏住所確認するのに時期的適切文献だった

 

 

同報告書によると20世紀初めの朝鮮全図中淸連北先三という地域名称はなかった。 「連地春六じだったところが春元という名前追跡可能だった

 

この報告書にも春元という名前てこないが1914年以降統営郡過去龍南郡巨済郡統合した地域であることがかった固城-統営地域行政区域変遷史多少複雑だったが要約すればりだ

 

現在固城統営地域(1)三韓時代以前辰国三韓時代には弁韓していた古資彌凍國伽耶時代には小伽倻所在地だった(2)南北国時代古資郡ばれていたこの地域新羅景徳王(在位742-765)固城郡改称され757康州(現在晋州)併合された(3) 1016(高麗顯宗9)この地域巨濟縣移管されたが(4)1275(高麗忠烈王2)南海縣移属され1308(忠烈王復位10)巨済縣された

 

 

朝鮮時代って(5)1604(宣祖37)この地域三道水軍統制営設置されたが当時名前巨濟縣頭竜浦だった(6) 1677(肅宗3)頭龍浦固城県移属され春元面改称された(7) 1869に固城県春元面戸籍紛糾事件朝鮮朝廷はこれにする事後策として1870固城縣固城府昇格した(8) 1880固城府は固城還元され1884固城府昇格した

 

(9) 1895(高宗32)春元面所在三道水軍統制営廃止され固城府固城郡改称された。(101900年統制営所在した地域が固城から独立鎭南郡になった。(111909鎭南郡龍南郡改称された。(121914日帝行政区域改編龍南郡巨済郡とともに統営郡併合された

 

すなわち統営郡(1914)併合された龍南郡(1909-1914)はその直前名前鎮南郡(1900-1909)でありその230年間「固城//郡春元面(1677-1900)だったのだ

 

 

1915220死亡した南益三氏埋葬認許証には生年月日不詳としながらも死亡時年齢37だとべたこれを逆算すれば南益三氏まれた年度1870年代末だがその当時統営名前固城府春元面だった

 

南益三氏日本んでいた、「故郷はどこかという質問けたとすれば、「慶尚道固城府春元面えただろう春元まれ最初20年間をそこでらしたはずだからだ

 

20代後半春元鎮南30代前半には龍南わり朝鮮れて日本兵庫県から神戸水道工事投入された統営になったが持続的わる故郷公式名称がどれほど馴染んでいたかは疑問。 (2022/8/29趙正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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固城市立図書館豊富郷土資料所蔵していたが、「宝塚朝鮮人追悼碑犠牲者縁故すためにはそのほとんどが必要ではなかった日本新聞がすでに尹吉文ユン·ギルムン)、呉伊根·イグン本拠地慶尚南道固城郡固城面であることをらかにしたためだ

 

されたことは固城内らの具体的縁故地文献証言確認すればいいしもし家族親族などの縁故者つけることができればそれは錦上添花だろう江陵調査では慶州金氏樹隱公派系図じて金炳順(キム·ビョンスン)本拠地確認することができたので固城でも尹吉文, 吳伊根氏系図記録すことが優先的関心事だった

 

しかし統営調査事情った日本には南益三氏統営出身であることを記録がなかった筆者南益三氏埋葬認許証れた不完全朝鮮住所土台統営出身であると推測できたがその推測文献証言裏付けられ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南益三氏1915神戸水道工事中死亡した遺体埋葬するために西谷村役場発行した埋葬認許証朝鮮住所記録されていたしかしこの住所草書体漢字かれていたためみにくくようやくげた住所当時行政区域一致しなかった

 

埋葬認許証記録された南益三氏住所次第移せば朝鮮中淸道春元右連北面先三村しかしこの住所には問題かった

 

まず当時朝鮮には中淸道という行政区域がなかったいのが忠清道だがこれもやはり忠清南道忠清北道けてか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したがってこの住所当時朝鮮行政区域する知識がないかがんだりにっていたものとられる

 

 

春元右という記録問題。 「という行政単位朝鮮にはなかった行政単位ればにはてこなければならないではあるまた春元連北てきたので、「春元右春元郡むのが自然だろうしかし1914年日帝によってなされた行政区域改編前後調べても忠清南道忠清北道にはもちろん朝鮮全域春元郡という地名はなかった

 

春元右連北面先三村じだった1914行政区域改編前後わせて全国13のすべての行政区域名称調査しても連北面先三村あるいは先三里というところはれなかったこれも間違った表記いなかった

 

つまり南益三氏朝鮮住所間違った記録だということだがなぜこのようなことがきたのだろうか埋葬認許証によると死亡当時37だった南益三氏雇用記録はなかったとられる就職資料があったとすれば埋葬認許証にも正確住所生年月日記録されただろう

 

 

1910年代初めにして日本った朝鮮人には正式就職手続きにって移住した々もいただろうが日雇いや肉体労働した々はたいてい事前雇用手続きなしにむやみに渡航したり密航した々もいた

 

らは日本到着鉄道河川工事石炭鉄鉱石などの炭鉱肉体労働仕事したりもしたその場合雇用記録はもちろん身上記録さえ作成されていない場合かった水道工事投入された南益三氏もそのようなケースだっただろう非公式的雇用した企業はもちろん居住した地域末端行政機関にも南益三氏身元情報えられていなかっただろう

 

南益三氏死亡埋葬認許証発行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村役場朝鮮人同僚伝言依存したはずであり同僚たちが南益三氏故郷をよくらなかったとすれば住所をまともに記録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だろう朝鮮行政区域する知識くなかった村役場書記これを可能性もなかっただろう

 

埋葬認許証南益三氏住所正確でなかったのはまさにそのような事情のためだっただろう。(2022/8/29趙正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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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시립도서관의 향토자료에 수록된 조선시대 고지도 6점과 일제강점기의 행정구역 일람표를 참고하여, 남익삼씨의 고향은 경상남도 고성군 춘원면 광삼촌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고성군이었던 이 지역은 1914년 이래 통영군이 되었고, 해방후 1955년 통영군 지역을 제외한 춘원면 지역이 충무시로 승격했다가, 1995년 충무시와 통영군이 합쳐 통영시가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에 따라 1914년 이전의 광삼촌 지역은 지금의 광도면에 속하게 되었다.

 

남익삼씨의 매장인허증에 기록된 주소 중에서 춘원면광삼촌이라는 이름은 이렇게 역사 속으로 사려졌다. ‘광삼촌()’자가 오늘날의 광도면(光道面)에 그 자취를 남긴 정도다. 그런데 오늘날의 통영시 지도에서 광도면 지역을 살펴보면 춘원면의 흔적이 더 남아 있다.

 

 

광도면 해안은 남에서 북으로 죽림리와 덕포리, 안정리와 황리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과거의 지도와 비교해 보면 이 지역이 과거의 광삼면 혹은 광삼촌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지금의 안정 공단 내에 춘원1,’ ‘춘원2,’ ‘춘원3이라는 길 이름이 남아 있다. 이와 관련 통영시의 웹사이트는 춘원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안정국가산업단지 안의 도로이며, 옛 지명 춘원포(春元浦, 春原浦)에서 유래된 도로명이다. 황리(黃里) 면화산(棉花山)의 남쪽 해안에 위치하여 기후가 항시 봄날처럼 따뜻한 넓은 들이라는 뜻에서 춘원(春原)이라 칭했다가 조선 초기에 춘원(春元)으로 변천되었으며, 토박이 지명은 춘언개’, ‘추넝깨’, ‘추엉깨등으로 불리었다. 옛 춘원 포구는 최근 해안이 매립되어 안정공단으로 조성되었다.”

 

이 서술대로라면 춘원포는 황리와 안정리에 걸쳐 있었던 포구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춘원 포구를 매립해서 만들었다는 안정국가산업단지가 황리와 안정리 모두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춘원포15978월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 수군에 패배한 후 배를 버리고 도망가다가 사망한 곳이기도 했다. 춘원포의 위치는 임진왜란 저자들에 따라 황리안정리,’ 혹은 예승리등으로 주장되었는데, 지금까지는 통영시 광도면 황리였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그러나 고지도 <동여도(東輿圖, 1850년경)>에는 춘원면과 함께 춘원포가 따로 명시되었는데, 원문(轅門)의 북쪽 해안의 움푹 들어간 만 남쪽에 춘원포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춘원포가 황리가 아니라 안정리 해안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다만 <동여도>와 통영시 웹사이트, 그리고 임진왜란 연구서들은 모두 춘원포가 원문 이북 해안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데에는 공통된다. 그러나 <동여도>를 제외한 다른 모든 고지도들은 춘원면을 원문(轅門)의 이남 지역, , 통제영과 미륵도, 지금의 용남면 지역이라고 했다.

 

춘원이라는 이름이 춘원포에서 유래했고, 춘원포가 지금의 안정리 해안이었다면, 여러 고지도가 원문의 이남 지역을 춘원면이라고 불렀던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통제영이 옮겨간 것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처음 설치된 통제영(초대 통제사 이순신)은 본래 한산도에 있었다. 정유재란으로 한산의 통제영이 풍비박산이 난 후 거제도 오아포, 고성현 춘원포 등지로 옮겨 다니면서 자리를 잡지 못하다가 1604년 제6대 통제사 이경준에 의해 지금의 통영시 지역에 정착했다. 이 지역은 원래 거제현 두룡포(頭龍浦)였지만 이내 춘원면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주요 군진이 이전할 때 지명도 함께 옮겨가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거제의 조라진은 원래 오늘날의 구조라진에 있었지만 진이 옥포로 옮기면서 조라진이라는 명칭도 옮겨갔다. 또 김해시 장유면에 있던 신문진도 진해시 안골방향으로 옮겨 가자 신문진이라는 이름도 따라 갔다.

 

삼도수군통제영도 원래 안정리 해안의 춘원포에 있었으나, 통제영이 두룡포로 옮겨가면서 그것이 있었던 지명 춘원까지 따라 옮겨갔고, 그래서 지금의 통영시내 지역이 춘원면이라고 불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2022/8/31,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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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행정구역 개편 전후의 지명을 대조하여 작성된 보고서 <신구대조 조선전도 부군면리동 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1916, 越智唯七編纂, 중앙시장 발행)><해동지도(1750년경)><경상도지도(1872)>, 그리고 <지도(1884)>를 비롯한 6개 고지도를 조사한 결과 오늘날의 통영이 춘원면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남익삼씨의 고향은 당시의 춘원면자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문이 들었다. 그의 매장인허증에 나타난 주소 맨 마지막의 선삼촌(先三村)’이라는 지명 때문이었다. 선삼촌(先三村) 혹은 선삼(先三)이라는 지명은 <신구대조 조선전도 부군면리동 명칭일람>에 수록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고지도를 조사하던 중 필자는 춘원면의 바로 북쪽에 광삼면(光三面)’이 있었고, 한자 먼저 선()’자는 빛 광()’자와 유사하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어쩌면 남익삼씨 매장인허증에 기록된 선삼촌광삼촌의 오기일 수도 있는 것이다.

 

 

고지도에 나타난 지명은 광삼이 아니라 광삼으로 그보다 북쪽에 위치한 광일면광이면에 이어 명명된 것으로 보인다. 조사대상이 되었던 가장 오래된 고지도 <해동지도(1750년경)>에 따르면 광일면은 광내일운면(光內一運面), 광이면은 광내이운면(光內二運面)의 줄임말이었다. 그러나 이 지도에 광내삼운면(光內三運面)이 나타나 있지 않는 것으로 보아 18세기에는 광삼면이 설치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경상도지도(1872)>에서는 춘원면 소재 통제영의 현관인 원문(轅門) 바로 북쪽에 광삼면이 설치된 것을 볼 수 있다. <해동지도> 시기에는 없었던 광삼면이 <경상도지도> 제작 이전에 설치되었던 것이다. <경상도지도>는 남익삼씨가 출생(1878년경)하기 전에 제작되었으므로 그가 이곳에서 출생했다면 그의 고향은 춘원면이 아니라 광삼면이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광삼면은 이후 다시 사라졌다. 남익삼씨 출생 직후에 제작된 <지도(2, 1884)>에는 원문의 이남 지역은 춘원면으로 그대로 표기되어 있었지만 원문 바로 북쪽에 자리잡았던 광삼면이라는 표기는 사라진 반면, 그보다 더 북쪽에는 광일면과 광이면이 그대로 존속했다.

 

 

다시 말해 이때쯤이면 광삼면은 춘원면에 이미 이속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랬기 때문에 남익삼씨의 매장인허증의 주소에 춘원이라는 말과 선삼(先三, 광삼(光三)의 오기로 추정)’이라는 말이 동시에 등장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마도 광삼면은 나중에 설치된 작은 지역이었기 때문에 춘원면에 이속되면서 광삼촌(光三村)으로 격하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 광삼촌이 매장인허증에 선삼촌으로 오기된 것으로 추정된 것이다.

 

광삼면/촌 지역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통영군에 속하게 되었던 반면, 광일면과 광이면은 고성군에 남겨졌다. 광일면은 고성군 거류면에, 광이면은 고성군 동해면에 포함되어 그 이름이 사라졌다.

 

반면 광삼촌 지역은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도내면과 함께 통영시의 광도면이 되었다. 광도면은 광삼면도내면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이름이었기 때문에 광삼면은 그 일부나마 통영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보면 남익삼씨의 고향은 경상남도 고성군 춘원면 광삼촌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아직 추정이다. 매장인허증에 기록된 남익삼씨의 고향 주소 중에서 절반 이상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 춘육(春六)이라고 읽힐 수도 있는 지명이, 그런 지명이 당시 조선의 행정구명 목록에 없다는 이유로 춘원(春元)의 오기라고 단정한 점, 선삼(先三)이라는 표기도 광삼(光三)의 오기라고 추정한 점 등이 모두 사실에 부합할 경우에만 사실로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매장인허증의 남익삼씨 주소는 모호했고, 그 밖의 다른 자료가 없으니 이렇게 추정이라도 해 보는 것이 필자로서는 최선이었다. 그리고 이제 이 추정을 발판으로 그의 조선 내 연고를 찾아보는 수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이다. (2022/8/31,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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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익삼씨의 매장인허증에 나타난 조선 주소지 춘원(春元)’이 오늘날의 통영이라는 사실을 파악한 후 필자는 이를 고성시립도서관에서 발견한 고지도에서 확인하기로 했다.

 

이 도서관이 소장한 <고성군지(1-3)><고성사료집(1-3)>에는 다양한 고지도가 수록되어 있었다. 그중 적어도 5개 고지도에 춘원이 명시되어 있었다.

 

고성 향토자료들에 실린 가장 이른 시기의 고지도는 <해동지도(海東地圖, 1750년경)>였다. 812822장으로 구성된 <해동지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에는 조선전도와 조선8도의 도별 지도, 그리고 전국 330여 군현지도가 포함되어 있다. 모든 지도가 채색필사로 제작된 <해동지도>의 제5책에 경상도 지도가 포함되어 있는데, <고성현도(固城縣圖)>도 여기에 속해 있다.

 

 

<고성현도>의 중앙에는 바다와 산맥과 강줄기 사이사이에 고성을 비롯한 지명들이 적혀 있었고, 그 여백에는 고성현의 지리와 인구, 병력과 수세 상황들이 부기되어 있었다. 특히 오른쪽 하단에는 12개 부속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춘원면은 맨 마지막에 수록되어 있었다. 이 지도에 따르면 춘원면의 크기는 가로 30, 세로 70리로 고성현의 12개 면 중에서 면적이 가장 넓었다. 지도 본문에 따르면 삼도수군통제영의 동쪽, 바다에 면한 구릉지역에 춘원면(春元面)”이라고 가로로 표기한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로부터 약 1백년 후에 제작된 <경상도지도(慶尙道地圖, 1872,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에도 춘원면이 표기되어 있었다. 1871년 신미양요를 겪은 뒤 전국적으로 벌어진 지지와 지도 편찬 작업의 일환으로 경상감영이 편찬한 <경상도지도>9()으로 구성된 군,현지도와 목장, 산성, 군진의 지도를 포함하여 모두 104매의 지도가 포함되어 있다.

 

<경상도지도>는 조선 정부에서 마지막으로 편찬한 전국 군·현지도의 일환으로 작성된 것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군·현지도 중에서 내용이 가장 상세하고 정밀한 지도로 평가된다. 특히, ·현지도 외에 각 군·현에 소속된 산성, 목장, 진보 등 군사 지역의 지도를 포함한 것으로 보아 지도 작성의 목적이 국방과 관련된 것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개항 후 변모되기 직전의 각 군·현의 모습을 그렸기 때문에 조선 시대 경상도 각 지역의 초상화라 할 수 있는 지도이다.

 

 

춘원면을 서술한 <고성부지도><경상도지도>의 제9()에 수록되어 있는데, 고성반도(=통영반도) 남부와 미륵도를 포함한 지역에 춘원면이라는 표기가 되어 있다. 춘원면의 북쪽에는 선산면과 광삼면, 그 위쪽에는 광일면과 광이면이 보인다.

 

그밖에도 고성시립도서관에 소장된 각종 향토자료에 수록된 지도 중에서 춘원면을 표기한 것으로는 <여지도(輿地圖, 1789-1795)><동여도(東輿圖(19세기, 철종연간, 재위 1849-1864)>, 그리고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1861)> 등이 있다.

 

이상의 5개 고지도들은 모두 18세기와 19세기 중반의 지도들로 남익삼씨(1878년경 출생)가 출생하기 이전의 지도들이다. 그가 출생한 후에 제작된 이 지역의 지도를 찾아보니 1884년에 간행된 <지도(地圖, 고려대학교 도서관 한적실 소장)>가 있었다.

 

 

<지도(1884)>는 회화식 군현지도첩으로 총 4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2()에 도별전도, 3()에 각도 소속 군현의 개별도가 포함되어 있다. 지도의 여백에 각 도와 군현의 인구, 재정곡, 경지면적, 사방경계, 성곽, , 면의 이름과 위치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지도(2)>에 수록된 고성부 지도에 따르면 고성반도(=통영반도)의 좁은 길목에 설치되었던 원문(轅門) 이남 지역에 춘원면이라는 표시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통영반도 남쪽, 봉화가 그려져 있는 섬 미륵도에도 춘원면이라는 표시가 되어 있었다.

 

따라서 남익삼씨 출생 직후인 1884년 경, 통제영 인근 지역과 미륵도를 포함하여 원문의 이남 지역 전부가 춘원면이었던 것이다. (2022/8/30,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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