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宝塚朝鮮人追悼碑宝塚市切畑てられました宝塚市立公園である入口けられた親水広場片隅位置しています

 

ここはかつて舊福知山線鉄道っていたところですが路線わってから線路撤去しただけで枕木がほとんどそのままっていますそしてその線路沿って景色きやすい遊歩道造成されたため週末ごとに登山客わう場所でもあります

 

 

ところで、「宝塚朝鮮人追悼碑がなぜ玉瀬参拝墓ではなく切畑親水広場てられたのでしょうかそれは鄭鴻永(チョン·ホンヨン)-近藤富男調査チームの研究過程のためです1985から研究チームはこの地域われていた水道工事鉄道工事調査めましたその土木工事朝鮮人労働者大挙参加したという心証ったためです

 

宝塚鉄道工事水道工事1880年代まり1910-1920年代までわれたのでこの工事参加した朝鮮人強制動員労働者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日本帝国朝鮮人強制動員1930年代まりましたからねらは朝鮮での窮乏した生活打開するために日本きかけた々でした用語では労働移民者だったのです

 

しかし各種土木工事結果報告書には朝鮮人参加したという記録はほとんどありませんでした国策工事受注した土木工事および人材管理会社朝鮮人雇用記録していません

 

 

それにもかかわらず鄭鴻永-近藤富男研究チームはこの工事朝鮮人労働者大規模参加したという事実をよくっていましたなぜなら1980年代にもこの地域には朝鮮人多数居住していてらのほとんどは先代家族がその土木工事参加するために宝塚工事わったもそのまま定着することになった家族史っていたからです

 

そこで鄭鴻永-近藤富男研究チームは宝塚全域りながら高齢在日朝鮮人たちにインタビューしました198535にインタビューした徐巳用·サヨン85から1996721にインタビューした禹南喜·ナムヒ79るまで15のインタビュー記録鄭鴻永先生著書歌劇のもうひとつの歴史1997)』2収録されています

 

 

鄭鴻永-近藤富男研究チームは文献記録調査並行しましたが1985年春宝塚市史編纂室若林泰氏から3埋葬認許證入手しましたこれは西谷村役場発行した金炳順(キム·ビョンスン)南益三(ナム·イクサム)張長守(チャン·ジャンス)埋葬認許證でしたこれをまえ研究チームは朝鮮人合宿所川辺郡西谷村玉瀬イズリハ1-45番地にあったことをめましたが3朝鮮人埋葬墓参拝墓つけることはできませんでした

 

一方1993325研究チームは兵庫朝鮮関係研究会むくげの会員である堀内稔先生から1929のダイナマイト爆発事故朝鮮人2死亡3重傷ったとじた新聞記事のコピーを入手しました翌日鄭鴻永-近藤富男調査チームは武田尾から切畑事故現場踏査事故発生地域長尾山麓6トンネルの入口から50メートル前方左側さなであることを確認しました

 

 

8年間調査期間中鄭鴻永-近藤富男研究チームは5朝鮮人犠牲者文献確認しましたが事故場所埋葬地確認されたのは切畑だけでしたそれで鄭鴻永先生死去後近藤富男先生追悼碑てたのが切畑新水広場だったのです

 

ところが近藤富男先生真心感動したのか追悼碑建立2月前玉瀬滿福寺住職3朝鮮人無縁故三界万霊供養祭祀ってきた事実らせてきましたこのはすでに切畑親水広場追悼碑設立場所選定されすべての準備った状態だったため追悼碑玉瀬犠牲者3名前追加することにまとめられました

 

これが玉瀬3人犠牲者切畑2人分犠牲者追悼碑切畑てられることになったお便り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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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는 다카라즈카 시의 기리히타에 세워졌습니다. 다카라즈카 시립공원인 벚꽃동산()의 입구에 마련된 신스이광장(親水広場)> 한편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곳은 과거 후쿠치야마선 철도가 지나가던 곳인데 노선이 바뀐 이후 선로만 철거했을 뿐 침목들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옛 철로를 따라서 경치 좋고 걷기 좋은 산책길이 조성되었기 때문에 주말마다 등산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왜 타마세의 참배묘가 아니라 기리하타의 신스이광장에 세워졌을까요? 그것은 정홍영-콘도 도미오 조사팀의 연구과정 때문입니다. 1985년부터 연구팀은 이 지역에서 진행되었던 수도공사와 철도공사를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토목공사에 조선인 노동자들이 대거 참여했다는 심증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다카라즈카의 철도공사와 수도공사는 1880년대에 시작되어 1910-1920년대까지 이뤄졌기 때문에 이 공사에 참여한 조선인들은 강제 동원 노동자들은 아니었습니다. 일제의 조선인 강제동원은 1930년대에 시작되었으니까요. 이들은 조선에서의 궁핍한 생활을 타개하기 위해 일본으로 일자리를 찾아온 분들이었습니다. 지금 용어로 노동이민자들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각종 국책 토목공사의 결과 보고서에는 조선인들이 참여했다는 기록이 거의 없었습니다. 국책공사를 수주한 토목공사 및 인력관리 회사들도 조선인 고용기록을 남기지 않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홍영-콘도 도미오 연구팀은 이 공사에 조선인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참가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1980년대에도 이 지역에는 조선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고, 그들은 대부분 선대 가족이 그 토목공사에 참가하기 위해 다카라즈카에 왔다가, 공사가 끝난 후에도 그대로 정착하게 되었던 가족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홍영-콘도도미오 연구팀은 다카라즈카 전 지역을 다니면서 고령의 재일 조선인들을 인터뷰했습니다. 198535일 인터뷰한 서사용씨(徐巳用, , 85)로부터 1996721일 인터뷰한 우남희씨(禹南喜, , 79)에 이르기까지 15명의 인터뷰 기록이 정홍영 선생의 저서 <가극의 거리의 또 다른 역사-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의 제2부에 수록되었습니다.

 

정홍영-콘도도미오 연구팀은 문헌기록 조사도 병행했는데, 1985년 봄, 다카라즈카 시사(市史) 편찬실의 와카바야시 야스시(若林泰)씨로부터 3장의 매장인허증을 입수했습니다. 이는 니시타니(西谷) 촌사무소가 발행한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의 매장허가서였습니다. 이를 근거로 연구팀은 조선인 합숙소가 카와베군 니시타니촌 타마세마을 이즈리하 1-45번지에 있었음을 알아냈지만, 세 조선인의 매장묘와 참배묘를 찾아내지는 못했습니다.

 

 

한편 1993325일 연구팀은 <효고조선관계연구회><무쿠게회>의 회원인 호리우치 미노루(堀内稔)선생으로부터 1929년의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로 조선인 2명이 사망하고 3명이 중상을 입었다고 보도한 신문기사 사본을 입수했습니다. 이튿날 정홍영-곤도 도미오 조사팀은 타케다오(武田尾)에서 기리하타에 이르는 사고 현장을 답사했고, 사고 발생지역이 나가오산 자락의 신6호 터널의 입구에서 약 50미터 전방 왼쪽에 작은 공터임을 확인했습니다.

 

8년의 조사기간 동안 정홍영-콘도 도미오 연구팀은 5명의 조선인 희생자들을 문헌으로 확인했지만 사고 장소나 매장지가 확인된 것은 기리하타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정홍영 선생의 타계 이후 콘도 도미오 선생이 추도비를 세운 곳이 기리하타의 신스이광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콘도 도미오 선생의 정성에 하늘도 감동했는지, 추도비 건립 2달 전에 타마세 만푸쿠지의 주지스님께서 세 조선인의 무연고 만계삼령공양 제사를 해 온 사실을 알려오셨습니다. 이때는 이미 기리하타의 신스이 광장이 추도비 설립 장소로 선정되어 모든 준비가 갖춰진 상태였기 때문에, 추도비에 타마세의 희생자 세 분의 이름을 추가하는 것으로 정리되었습니다.

 

이것이 타마세의 3분 희생자와 기리하타의 2분 희생자의 추도비가 기리하타에 세워지게 된 사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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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ウリ學校舞踊靴>訪問団宝塚訪問することにしたのは意味深いことですそれは宝塚日本国民休養地歌劇都市漫画アニメの誕生地だからではなく20世紀初頭から朝鮮人痕跡っている都市だからです

 

その在日朝鮮人郷土史学者鄭鴻永(チョン·ホンヨン)先生のタイトルによくれています1997出版されたこののタイトルは歌劇のもうひとつの歴史副題宝塚朝鮮人です。 「歌劇とは少女歌劇団舞台である宝塚しますがこの地域にはこれまであまりられていなかったもうつの歴史があるということですそれは20世紀初この地域きた々な土木工事参加した朝鮮人苦難歴史します

 

 

宝塚中央図書館<宝塚市史>各種郷土歴史書写真集調査しましたが19世紀末明治時代からまったこの地域近代化過程朝鮮人労働者大挙参加した事実記録されていませんでした鄭鴻永先生ったもうひとつの歴史完全排除されているのですね

 

鄭鴻永先生1983から相棒調査研究パートナーである日本語教師出身社会活動家近藤富男(1950-2022)先生とともに宝塚朝鮮人痕跡々まで調査記録しましたその結果歌劇のもうひとつの歴史:宝塚朝鮮人1997)』です

 

この調査研究主導した鄭鴻永先生名前出版されましたがこのるまで文献調査踏査原稿執筆校正のすべての段階近藤富男先生助力絶対的だったことがかりました10近藤富男先生自宅訪問したさんと息子さんが近藤富男先生生前めて作業した資料せてくれました

 

 

引越きな2つにぎっしりまった資料には<歌劇都市のもうひとつの歴史>校正原稿もありその執筆するのに必要だった資料がすべてまれていましたそれに近藤富男先生使っていたパソコンにはまだ数千ものファイルがっているとおっしゃいました

 

近藤富男先生家族にその資料とファイルを調その結果近藤富男先生名前のために出版してもいとしてくれました前回訪問にはその仕事着手する準備ができていませんでしたが今回<ウリ學校舞踊靴>訪問期間にその資料をもう一度調べて整理調査する計画てることができることをっています

 

<歌劇のもうひとつの歴史>表紙のすぐには地図一枚描かれています地図のタイトルはたからづか朝鮮人のあしあとまつぷですそこには宝塚駅中心四方朝鮮人参加した各種工事現場居住していた住居地域そして朝鮮人犠牲になった各種事件事故にぎっしりとかれていますけられた番号ると全部35する内容がこの地図1縮約されています

 

 

宝塚朝鮮人関連事件事故玉瀬朝鮮人犠牲者まれています番号5けられた朝鮮人埋葬地がまさにそこです今回<ウリ學校舞踊靴>訪問団はここを訪問して犠牲になった朝鮮人たちを追悼らのために100年以上祭祀ってきた玉瀬婦女会員たちとさな音楽会くことになります

 

たちがれるもうつは<たからづか朝鮮人のあしあとまつぷ>10ダイナマイト事故朝鮮人2即死した場所83トンネル9水道保線工事参加した朝鮮人飯場地域です

 

ここでダイナマイト事故即死した朝鮮人2とは1929舊福知山線鉄道工事くなった尹吉文(ユン·ギルムン)吳伊根(·イグン)さんですこの2玉瀬犠牲者3一緒える宝塚朝鮮人追悼碑もこの地域てられています<ウリ學校舞踊靴>訪問団はこちらも訪問する予定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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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학교 무용신> 방문단이 다카라즈카를 방문하기로 한 것은 뜻 깊은 일입니다. 그것은 다카라즈카가 일본의 국민 휴양지, 가극의 도시, 만화-애니메이션의 탄생지이기 때문이 아니라, 20세기 초부터 조선인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는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그 점은 재일조선인 향토사학자 정홍영(鄭鴻永, 1929-2000) 선생의 책 제목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1997년에 출판된 이 책의 제목은 <가극의 거리의 또 다른 역사>이고 부제는 <다카라즈카와 조선인>입니다. ‘가극의 거리란 소녀가극단의 무대인 다카라즈카를 가리키지만 이 지역에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20세기 초반 이 지역에서 벌어졌던 갖가지 토목공사에 참여했던 조선인의 고난의 역사를 가리킵니다.

 

 

제가 다카라즈카 중앙도서관을 방문해 <다카라즈카 시사>와 각종 향토역사서와 화보사진집을 조사했지만, 19세기말 메이지 시대부터 시작된 이 지역의 근대화 과정에 조선인 노동자들이 대거 참여했던 사실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정홍영 선생이 말한 또 다른 역사는 완전히 배제되어 있는 것이지요.

 

정홍영 선생은 1983년부터 단짝 조사연구 파트너인 교사 출신의 사회활동가 콘도 도미오(近藤富男, 1950-2022) 선생과 함께 다카라즈카의 조선인의 흔적을 샅샅이 조사해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 결과가 <가극의 거리의 또 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입니다.

 

이 책은 조사연구를 주도한 정홍영 선생의 이름으로 출판되었지만, 이 책이 나오기까지 문헌조사와 답사, 원고 집필과 교정의 모든 단계에서 콘도 도미오 선생의 조력이 절대적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지난 10월 콘도 도미오 선생의 자택을 방문했을 때 사모님과 아드님께서 콘도 도미오 선생이 생전에 모으시고 작업하셨던 자료들을 제게 보여주셨습니다.

 

 

이삿짐용 큰 상자 2개에 가득 담긴 자료 중에는 <가극의 도시의 또 다른 역사>의 교정 원고도 있었고, 그 책을 집필하는 데에 필요했던 자료들이 모두 담겨있었습니다. 게다가 콘도 도미오 선생께서 사용하셨던 컴퓨터에는 아직도 수천 개의 파일들이 남아 있다고 하셨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가족들은 제게 그 자료와 파일들을 조사하고 그 결과를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이름을 위해 출판해도 좋다고 허락해 주셨습니다. 지난 방문 때에는 그 일에 착수할 준비를 갖추지 못했었지만, 이번 <우리학교무용신> 방문 기간에 그 자료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정리하고 조사할 계획을 세울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가극의 거리의 또 다른 역사>의 앞표지 바로 안쪽에는 지도가 한 장 그려져 있습니다. 지도의 제목은 다카라즈카의 조선인 흔적 지도입니다. 거기에는 다카라즈카 역을 중심으로 사방에 조선인들이 참여했던 각종 공사 현장과 거주했던 주거지역, 그리고 조선인들이 희생당했던 각종 사건과 사고들이 그림과 함께 빼곡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붙여진 번호를 보면 모두 35건에 달하는 내용이 이 지도 한 장에 축약되어 있습니다.

 

 

다카라즈카의 조선인 관련 사건과 사고 중에 타마세의 조선인 희생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번호가 5번으로 매겨진 조선인매장지가 바로 그곳입니다. 금번 <우리학교무용신> 방문단은 이곳을 방문해서 희생된 조선인들을 추도하고, 이들을 위해 1백년 이상 제사를 지내오신 타마세 부녀회원들과 함께 작은 음악회를 열게 됩니다.

 

우리가 찾아갈 또 한 곳은 <다카라즈카의 조선인 흔적 지도>10다이너마이트 사고로 조선인 2명이 즉사한 장소83호터널9번의 수도 보선공사에 참여한 조선인 함바지역입니다.

 

이 곳에서 다이너마이트 사고로 즉사한 조선인 2이란, 1929년에 후쿠치야마선 철도 공사에서 사망한 윤길문, 오이근씨입니다. 이 두 사람과 타마세의 희생자 세 사람을 함께 기리는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도 바로 이 지역에 세워져 있습니다. <우리학교무용신> 방문단은 이곳도 방문할 예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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宝塚市中部山間部位置する玉瀬宝塚中心部観光娯楽りの雰囲気とはうところです山奥がる盆地かに位置する農村だからですここで栽培されるお日本でも品質一番良いことで有名なブランドです

 

玉瀬仏教寺院滿福寺くには宝塚市からがりくねってれる武庫川沿いの武田尾駅からバスにって6停留所だけですこの1914-15神戸水道工事中にトンネル岩壁崩壊事故死亡した朝鮮人労働者金炳順(キム·ビョンスン)南益三(ナム·イクサム)張長守(チャン·ジャンス)位牌られた寺院です

 

三名様参拝墓滿福寺こうけられています10鄭世和先生滿福寺住職足立智教先生案内参拝墓ねましたが日当たりのけられたこぢんまりとした場所でした3実際埋葬墓玉瀬村共同墓地なのですがにあるうえ途絶れる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

 

 

3朝鮮人がここに埋葬された理由武庫川沿いの神戸水道第1次拡張工事1911~1921この地域われた工事現場でトンネル岩壁落盤事故死亡したからです金炳順さんは1914314南益三さんは1915121張長守さんは1915324くなりましたが玉瀬婦女会1914から毎年824滿福寺住職3朝鮮人のための祭祀めたそうです

 

3朝鮮人死亡事実1985在日朝鮮人郷土史学者鄭鴻永チョン·ホンヨン1929-2000先生宝塚市立中学校日本語教師近藤富男1950-2022先生文献調査現地踏査確認されましたが当時3遺骨玉瀬共同墓地埋葬されていた事実位牌滿福寺られていたことまでることはできませんでした

 

20001鄭鴻永先生他界した近藤富男先生20年間努力この地域くの活動家在日朝鮮人けをりて2020326朝鮮人犠牲者のための追悼碑てました追悼碑てられるという西谷玉瀬村にもがりこれに滿福寺住職自分たちが三人祭祀ってきたことをえてきました近藤富男先生1929福知山線鉄道改修工事くなった尹吉文(ユン·ギルムン)吳伊根(·イグン)さんとともに神戸水道改修工事くなった3追悼する追悼碑てることができました

 

 

玉瀬婦女会滿福寺住職100年以上3朝鮮人のために祭祀ってきたことは1914から2020まで住民いてはりませんでした善行右手のすることを左手らないようにしろという言葉がありますがそんなことを108年間続けてこられた々がいらっしゃったのです

 

3朝鮮人犠牲者のための三界万霊供養墓参拝した研究者好奇心えることができず住職僧侶いてみました。 「このたちが玉瀬共同墓地られた記録はありますか?」滿福寺った住職埋葬記録せてくださりそこにはかに3名前埋葬日とともにはっきりとされていました

 

 

はまたねました。 「玉瀬住民たちが縁故もない々をこのように丁寧祭祀してこられた理由ですか?」3朝鮮人祭祀めてった住職以来3ぎた住職就任された足立智教先生えはこうでした

 

ここはつためにられたもいます武庫川上流からりた々がされてたちの発見された々もいますどんな理由であれたちのってきた々をたちはくして埋葬しますしかし恒例祭祀までってきたのは異例のことですおそらくこの々が故郷異域しいをされたからだといますその残念った住民たちが毎年祭祀ってきたよう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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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라즈카시의 중부 산간지역에 위치한 타마세는 다카라즈카 중심부의 관광, 오락, 축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곳입니다. 깊은 산중에 펼쳐진 분지에 호젓하게 자리 잡은 농촌마을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경작되는 쌀은 일본에서도 품질이 가장 좋기로 이름이 난 명품입니다.

 

타마세의 불교사찰 만푸쿠지에 가려면, 다카라즈카시를 북에서 남으로 꾸불꾸불 누비며 흐르는 무코강변의 기차역 다케다오에서 버스를 타고 북쪽으로 6정류장만 가면 됩니다. 이 절이 1914-15년 고베수도공사 중에 터널 암벽붕괴 사고로 사망한 조선인 노동자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의 위패가 모셔진 사찰입니다.

 

세 분의 참배묘는 만푸쿠지의 길 건너편 산기슭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저는 지난 10월 정세화 선생님과 만푸쿠지의 주지스님 아다치 치쿄 선생님의 안내로 참배묘를 찾았는데, 양지바른 비탈에 마련된 아담한 처소였습니다. 세 분의 실제 매장묘는 타마세 마을의 공동묘지인데, 깊은 산 속인데다가 지금은 길도 끊어져서 찾아가 볼 수 없었습니다.

 

 

세 조선인이 이 곳에 묻힌 까닭은, 무코강을 따라 진행되었던 고베수도 제1차 확장공사(1911-1921) , 이 지역에서 진행되었던 공사 현장에서 터널암벽의 낙반사고로 사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김병순씨는 1914314, 남익삼씨는 1915121, 장장수씨는 1915324일에 사망했는데, 타마세의 부녀회는 1914년부터 매년 824일 만푸쿠지 주지스님의 집전으로 세 조선인을 위한 제사를 드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세 조선인의 사망 사실은 1985년 재일조선인 향토사학자 정홍영(鄭鴻永, 1929-2000) 선생과 다카라즈카 시립중학교의 일본어 교사 콘도 도미오(近藤富男, 1950-2022) 선생의 문헌조사와 현지답사로 확인되었으나, 당시에는 세 분의 유해가 타마세 공동묘지에 묻힌 사실과 위패가 만푸쿠지에 모셔진 사실까지 알아내지는 못했습니다.

 

20001월 정홍영 선생이 타계하신 후 콘도 도미오 선생은 20년의 노력 끝에 이 지역의 많은 활동가와 재일조선인들의 도움을 얻어 2020326일 조선인 희생자들을 위한 추도비를 세우셨습니다. 추도비가 세워진다는 소문은 니시타니의 타마세 마을에도 퍼졌고, 이에 만푸쿠지의 주지스님은 자신들이 세 분의 제사를 지내왔다는 사실을 전해왔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은 1929년 후쿠치야마선 철도개수공사에서 사망한 윤길문, 오이근씨와 함께 고베수도 개수공사에서 사망한 세 분을 함께 기리는 추도비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타마세 부녀회가 만푸쿠지 주지스님의 집전으로 1백년이 넘도록 세 조선인을 위해 제사를 지내왔던 사실은 1914년부터 2020년까지 마을 주민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선행을 베풀 때에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 있지만, 그런 일을 108년 동안 계속해 오신 분들이 계셨던 것입니다.

 

제가 세 조선인 희생자를 위한 삼계만령공양묘를 참배한 후에 연구자의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주지 스님께 여쭤봤습니다. “이분들이 타마세 공동묘지에 묻히신 기록이 있습니까?” 만푸쿠지로 돌아왔을 때 주지스님은 매장기록을 보여주셨고, 거기에는 분명히 세 사람의 이름이 매장 일자와 함께 또렷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또 물었습니다. “타마세의 주민들께서 아무 연고 없는 분들을 이렇게 정성스럽게 제사해 오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세 조선인의 제사를 처음 집전하신 주지스님 이후로 3대가 지난 뒤에 주지에 취임하신 아다치 스님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이곳은 산이 깊어 스스로 목숨을 끊으러 오신 분들도 있습니다. 무코강 상류에서 투신하신 분들이 떠 내려와 우리 마을에서 발견된 분들도 있고요. 어떤 이유로든 우리 마을에 들어오신 분들을 우리는 예를 갖춰 매장합니다. 그러나 연례 제사까지 지내온 것은 이례적입니다. 아마도 이분들이 고향을 떠나 이역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 점을 특별히 애석하게 여기신 마을 주민들이 매년 제사를 드려온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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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承喜研究舞踊靴キャンペーンのきっかけになったとすれば玉瀬婦女会滿福寺無縁故祭祀宝塚朝鮮人追悼碑調査するきっかけになりました1914-15神戸水道工事中事故死亡した3朝鮮人労働者位牌玉瀬仏教寺院万福寺られ玉瀬婦女会らを100年以上祭祀してきたことがかったからです

 

宝塚日本中西部つまり関西位置する特例市です関西関東首都圏いで日本第2人口産業密集地域ですが大阪京都神戸などの大都市がこれにしますこの地域3都市名前1文字ずつとって京阪神ばれることもあります

 

 

大阪難波宮4世紀以降奈良遷都710まで日本首都人口280東京23925日本第2大都市京都人口140万人奈良時代から明治維新まで1000年以上日本首都794~1869でした

 

中国遣唐使派遣港であり1868開港日本五大貿易港長崎神戸横浜新潟函館つに指定され外来文物流入通路となった神戸人口15011805月間日本首都役割たしたことがありますこのため関西または京阪神地域近畿地域ぶこともあります

 

 

大阪神戸自然地形では境界区分しいほど対立しているためこの地域をまとめて阪神地域びます神戸市大阪市には南海岸地域西宮市尼崎市北山間地域豊中市宝塚市があります西宮北宝塚神戸大阪とともに正三角形をしています日本では人口20万人以上であれば特例市申請可能ですが宝塚市人口22万人2003特例市指定されました

 

一般的宝塚といえば宝塚駅くをすのが普通ですが宝塚市はそれよりずっといです南北20キロほど分布した地域南部都心部中部北部山間部区分されます全体面積102平方キロメートルで韓国江原道束草市カンウォンド·ソクチョシきさがています

 

 

宝塚3つの名物のおかげで有名場所です温泉歌劇団そして手塚治虫です宝塚温泉はかつて1223小林という名前られ1887商業温泉開業して観光客殺到めました温泉宝塚開発基礎となりました温泉観光客交通利便性提供しようと1910阪急電鉄架設され観光客餘興提供するため1914にガールズグループショービジネスがまりました

 

19137阪急電鉄社長小林一三1873-1957宝塚少女歌劇団創立翌年41初公演いました今日のガールズグループの原型パリムーランルージュのカンカン歌舞団とアメリカのブロードウェイミュージカルを模倣した歌劇団です初公演出演者16でしたが6演技者だけで400人余プロデューサーと脚本演出音楽衣装舞台美術とオーケストラギターのステップまでめると規模900人余りにのぼります

 

 

手塚治虫1928-1989日本敗戦とともにった日本漫画界らせたです大阪府豊中市生まれの手塚治虫51933宝塚1951東京移住するまでそこに大阪大学医師授業けている漫画家としてのキャリアをスタートさせました1940-50年代漫画60年代のアニメで日本熱狂させた人物<鉄腕アトム(1963)><ジャングル大帝レオ(1965)><リボンの騎士: サファイア王子(1967)>などの漫画映画韓国でもきな人気めました1994宝塚手塚治虫える漫画博物館てられました

 

温泉やガールズグループ歌劇団そして漫画映画誕生地である宝塚日本のディズニーランドとばれかつて国民休養地として定着していたところ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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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연구가 무용신 캠페인의 계기가 되었다면, 타마세 부녀회와 만푸쿠지의 무연고 제사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조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14-15년 고베수도공사 중에 사고로 사망한 3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의 위패가 타마세의 불교사찰 만푸쿠지에 모셔졌고 타마세 부녀회가 이들을 1백년 넘게 제사해 오셨던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다카라즈카는 일본의 중서부, 즉 간사이에 위치한 특례시입니다. 간사이는 간토 수도권에 이어 일본 제2의 인구와 산업의 밀집지역인데, 오사카와 교토, 고베 등의 대도시가 여기에 속합니다. 이 지역은 세 도시 이름의 한 글자씩 따서 케이한신(京阪神)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오사카는 나니와(4세기)궁 이후 나라 천도(710)까지 일본의 수도였고 지금은 인구 280만으로 도쿄(23구의 925)에 이은 일본 제2의 대도시이고, 교토(인구 140만명)는 나라시대 이후 메이지유신 전까지 1천년 넘게 일본의 수도(794-1869)였습니다.

 

중국 견당사 파견 항구이자 1868년 개항 때에 일본의 5대 무역항(나가사키, 고베, 요코하마, 니키타, 하코다테)의 하나로 지정되어 외래문물 유입의 통로가 되었던 고베(인구 150)1180년 약 5개월동안 일본의 수도역할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간사이 혹은 케이한신 지역을 깅키(近畿)지역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오사카와 고베는 자연 지형으로는 경계 구분이 어려울 만큼 맞붙어 있기 때문에 이 지역을 묶어서 한신(阪神)지역이라고 부릅니다. 고베시와 오사카시 사이에는 남쪽 해안지역에 니시노미아시와 아마가사키시, 북쪽 산간지역에 토요나카시와 다카라즈카시가 있습니다. 니시노미야 북쪽의 다카라즈카는 고베와 오사카와 더불어 정삼각형을 이룹니다. 일본에서는 인구가 20만명 이상이면 특례시 신청이 가능한데, 다카라즈카시는 인구 22만명으로 2003년에 특례시로 지정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다카라즈카라고 하면 다카라즈카역 근처를 가리키는 것이 보통이지만 다카라즈카시는 그보다 훨씬 넓습니다. 남북으로 약 20킬로미터쯤 길게 분포한 지역으로, 남부의 도심지역과 중부와 북부의 산간지역으로 구분됩니다. 전체 면적이 102제곱킬로미터로 한국의 강원도 속초시(106제곱킬로미터)와 크기가 비슷합니다.

 

 

다카라즈카는 세 가지 명물 덕분에 유명한 곳입니다. 온천과 가극단, 그리고 데즈카 오사무입니다. 다카라즈카 온천은 일찍이 1223년에 <고바야시노유(小林)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1887년 상업 온천이 개업해 관광객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온천은 다카라즈카 개발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온천 관광객에게 교통편의를 제공하려고 1910년 한큐전철이 가설됐고, 관광객들에게 여흥을 제공하기 위해 1914년 걸그룹 쇼비지니스가 시작됐습니다.

 

19137월 한큐 전철의 사장 코바야시 이치조(小林一三, 1873-1957)가 다카라즈카 소녀가극단을 창립, 이듬해 41일 첫 공연을 열었습니다. 오늘날의 걸그룹의 원형으로 파리 물랭루즈의 캉캉 가무단과 미국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모방한 가극단입니다. 첫 공연 출연자는 16명이었지만, 지금은 6개 조의 연기자만 4백여명, 프로듀서와 각본, 연출, 음악과 의상, 무대미술과 오케스트라, 기타 스텝까지 포함하면 규모가 9백여명에 이릅니다.

 

 

데즈카 오사무(手塚 治虫, 1928-1989)는 일본의 패전과 함께 맥이 끊긴 일본 만화계를 되살린 사람입니다. 오사카부 토요나카시에서 출생한 데즈카 오사무는 5(1933)에 다카라즈카로 이사, 1951년 도쿄로 이주할 때까지 그곳에 살면서 오사카대학에서 의사 수업을 받는 동안 만화가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4-50년대의 만화, 60년대의 애니메이션으로 일본을 열광시킨 인물로, <우주소년 아톰><흰 사자 레오>, <사파이어 왕자> 등은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1994년 다카라즈카에 데즈카 오사무를 기리는 만화 박물관이 세워졌습니다.

 

온천과 걸그룹 가극단, 그리고 만화영화의 탄생지인 다카라즈카는 일본의 디즈니랜드로 불리면서 일찍이 국민 휴양지로 자리 잡았던 곳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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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ウリ學校舞踊神>訪問団構成することは順調んでいます航空券購入され宿泊施設予約されたので必須準備いました1221日現在参加人数23さらにえています目標30ですが達成される可能性いです課題訪問日程具体化することですがそのために日本<チームアイ>会員たちがしくいています

 

<ウリ學校舞踊靴>訪問団準備がよくうには<希望来日><大陸学校>協力きな役割たしています<大陸学校>卒業生たちが訪問団参加準備委員会会計業務担当される<希望来日>常任理事ファン·グァンソク(황광석)先生のリーダーシップも際立っています

 

 

2010128創立された<希望来日>目的すでにそのによくれています。 "鉄道と共に希望に満ちた明日(hopeful tomorrow with railways)"という意味ですから。 釜山木浦から出発する列車がソウルと平壌あるいは江陵元山中央アジアとシベリアを横切ってモスクワとベルリンとパリとロンドンまでける鉄道開通するよう努力する団体です

 

<希望来日>活動家名刺前面にはソウルからヨーロッパの都市かう汽車切符印刷されていますがもらったファン·グァンソク先生名刺<ソウル-パリ>汽車チケットです^^ <ソウル-ベルリン><釜山-ロンドン>汽車票印刷されているはずです

 

<希望来日>理事長李哲(·チョル)先生国会議員韓国鉄道公社社長歴任されたです国際鉄道連盟のアジア地域議長めました<民族助運動>代表である李一榮(·イルヨン)先生先生<希望来日>共同代表めています理事長共同代表前歷だけをても<希望来日>究極的目的分断克服であることがかります

 

 

実際ユーラシア横断鉄道はすでにほぼいています<希望来日>目的達成されるには都羅山駅から開城駅そして猪津駅から鑑湖駅かう鉄道くだけですそこで<希望来日>活動はまもなく南北鉄道連結められます

 

南北鉄道をつなぐには難関いです200020072018南北首脳会談南北鉄道をつなぐ努力きましたしかし韓国保守政府発足すればすべての努力失敗わることもありますこのような難関克服するには民主政府必要専門的識見った必要ですそれで<希望来日>自主教育プログラムで<大陸学校>きました

 

20221212期卒業生輩出した<大陸学校>毎年30大陸リーダーを養成しています<希望来日>南北鉄道ぶための団体だとすれば<大陸学校>はなぜそうすべきかを説明実践するプログラムです。 「たちの歴史蓄積されてきた大陸的価値再発見専門的素養えた大陸リーダーを養成しようということですそのために<大陸学校>校長である元統一部長官丁世鉉(チョン·セヒョン)先生教頭である黃光石(ファン·グァンソク)常任理事奔走しています

 

 

「希望来日」の掛け声はもともと「南北を結び、大陸を抱く!」です。 ところで1123<希望来日>創立12周年後援参加してみたらしいスローガンが登場しましたね。 「海洋いて大陸がそれです保守政権との戦争<希望来日-大陸学校>通常活動がかなり制限されていましたので当分海外同胞統一力量めることにめることにしたのです

 

<希望来日><大陸学校>海洋とは米州日本居住する在外同胞々をします国内政治葛藤国際紛争によってこされた難関打開するためには中国とロシアの同胞々だけでなく米州同胞在日同胞力量つにめる必要があるということです

 

それは<舞踊靴>目的ともじです在日朝鮮学校舞踊靴沿海州舞踊衣装海洋いて大陸こうとするたちの努力もすでにまっています

 

その共同目的達成するためなら<舞踊靴><希望来日-大陸学校>くことに躊躇はないでしょ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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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학교 무용신> 방문단을 꾸리는 일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항공권이 구매되고 숙소가 예약되었으니 필수 준비는 갖춰진 셈입니다. 1221일 현재 참가인원이 23명에 이르렀고,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목표는 30명인데 달성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제 다음 과제는 방문 일정을 구체화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 일본의 <팀아이> 회원들께서 바삐 움직이고 계십니다.

 

<우리학교 무용신> 방문단의 준비가 잘 갖춰지는 데에는 <희망래일><대륙학교>의 협력이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대륙학교> 졸업생들이 다수 방문단에 참여하셨고, 준비위원회에 회계업무를 담당해 주시는 <희망래일>의 상임이사 황광석 선생님의 리더십도 두드러집니다.

 

 

2010128일 창립된 <희망래일>의 목적은 이미 그 이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철도와 함께 희망찬 내일(hopeful tomorrow with railways)"라는 뜻이니까요. 부산과 목포에서 출발하는 열차가 서울과 평양, 혹은 강릉과 원산을 거쳐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모스크바와 베를린과 파리와 런던까지 갈 수 있는 철도가 개통되도록 노력하는 단체입니다.

 

<희망래일> 일꾼들의 명함 앞면에는 서울에서 유럽 주요도시로 가는 기차표가 인쇄되어 있습니다. 제가 받은 황광석 선생님의 명함은 <서울-파리> 기차표입니다.^^ 다른 분들은 <서울-베를린>, 혹은 <부산-런던>의 기차표가 인쇄되어 있을 것입니다.

 

<희망래일>의 이사장 이철 선생님은 국회의원과 한국철도공사 사장을 역임하신 분입니다. 국제철도연맹의 아시아지역 의장을 담당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대표이신 이일영 선생님도 <희망래일>의 공동대표를 맡고 계십니다. 이사장과 공동대표의 전력만 보더라도 <희망래일>의 궁극적인 목적은 분단의 극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유라시아횡단철도는 이미 거의 이어져 있습니다. <희망래일>의 목적이 달성되려면 남쪽의 도라산역에서 북쪽의 개성역, 그리고 남쪽의 제진역에서 북쪽의 감호역으로 가는 철도가 이어지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희망래일>의 활동은 곧 남북철도 잇기로 모아집니다.

 

남북철도 잇기에는 난관이 많습니다. 2000년과 2007, 2018년의 남북정상회담으로 남북철도를 잇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보수정부가 들어서면 모든 노력이 무산되곤 합니다.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려면 민주정부가 필요하고, 특히 전문적 식견을 가진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희망래일>은 자체 교육프로그램으로 <대륙학교>를 열었습니다.

 

202212월 제12기 졸업생을 배출한 <대륙학교>는 매년 30명의 대륙 리더를 양성하고 있습니다. <희망래일>이 남북철도를 잇기 위한 단체라면 <대륙학교>는 왜 그래야하는지를 설명하고 실천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우리 역사 속에 축적되어온 대륙적 가치를 재발견하고 전문적 소양을 갖춘 대륙리더를 양성하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대륙학교>의 교장이신 전통일부장관 정세현 선생님과, 교감이신 황광석 상임이사님이 동분서주하고 계십니다.

 

 

<희망래일>의 구호는 원래 남북을 잇고, 대륙을 품다!”입니다. 그런데 제가 지난 1123<희망래일> 창립 12주년 후원의 밤에 참석해 보니 새로운 구호가 등장했더군요. “해양을 품고, 대륙으로가 그것입니다. 보수정부와 전쟁 때문에 <희망래일-대륙학교>의 통상적 활동이 상당히 제한되었기 때문에, 당분간 해외동포들의 통일 역량을 모으는 데에 힘쓰기로 한 것입니다.

 

<희망래일><대륙학교>가 말하는 해양이란 미주와 일본에 거주하는 재외동포 분들을 가리킵니다. 국내 정치 갈등과 국제 분쟁으로 야기된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중국과 러시아의 동포 분들뿐 아니라 미주동포와 재일동포의 역량도 한데 모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무용신>의 목적도 똑같습니다. 재일조선학교에 무용신을 보내고, 연해주에 무용의상을 보내기 시작하면서 해양을 품고 대륙으로 가려는 우리의 노력도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무용신><희망래일-대륙학교>와 함께 일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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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回目舞踊靴キャンペーンがわった202112韓国<チームアイ>今後進路について若干議論こりました日本全土朝鮮学校舞踊部員全員舞踊靴わり目標達成されたので活動中止しようという意見ました

 

また舞踊靴キャンペーンをけてもいつまでも一般募金って後援活動ができないので収益事業めようという意見てきました一方一旦始まった運動なので今後新たに舞踊部員になる小学生たちにも舞踊靴えようという意見ました

 

 

なくない会員<チームアイ>解体提案しましたが当時韓国<チームアイ>会長だった趙誠武(チョ·ソンム)先生反対でした結局韓國<チームアイ>解体されませんでしたがこのような論難のために舞踊靴キャンペーンを継続するための動力顕著低下しました

 

それでしくったまりが<舞踊靴>です<チームアイ>のように少数多数個人団体後援舞踊靴支援するのではなく後援者皆直接参加する一般まりをめたのです

 

2020210<舞踊靴2022>という名前しいグループトークをいたのですが最初はただ2022にも舞踊靴キャンペーンをけるための対話部屋としてまりました韓国<チームアイ>会員<舞踊靴2022>参加したので<チームアイ-舞踊靴>連続性維持されました

 

 

<舞踊靴2022>6回舞踊靴キャンペーンをじて2022しく舞踊部加入した100人余りの小学生たちにも舞踊靴しましたこれで韓国<チームアイ><舞踊靴>388個人後援17団体後援2700ウォンを募金1100人余りのウリ學校舞踊家たちに舞踊靴現在ウリ學校舞踊部員ならば一人かさ韓国<舞踊靴>日本<チームアイ>した舞踊靴ったことになります

 

それと<舞踊靴>沿海州事業めました江陵東海頻繁しながら<沿海州フォーラム>参加したのですがそこの会員々からロシア同胞民族芸術けるのに苦労しているというきましたにウスリスクの<アリラン歌舞団>団長であり<崔在亨(チェ·ジェヒョン)高麗人民族学校>校長であるキム·バレリア先生直接助けを要請してきましたロシア同胞には韓服韓国式舞踊衣装りないことがかりました

 

韓国<舞踊靴>日本<チームアイ>とのいのロシア同胞民族芸術活動支援することにしました韓国同胞在日同胞わせて同胞支援することは意義深かったですまたこのことが起爆剤となりこれまで出会いがくなかった在日同胞同胞交流えることを期待しました

 

 

韓国保守政権発足したことで関係悪化ロシア·ウクライナ戦争物流はもちろん移動不可能になった劣悪状況でしたが韓国<舞踊靴>はおよそ3百万圓義援金日本<チームアイ>20しい舞踊衣装製作40韓服舞踊衣装収集して沿海州ることができました

 

<舞踊靴>のグループトークの会員1100えましたしかし1~6回目舞踊靴キャンペーンに参加した々が388沿海州キャンペーンに参加してくださった々が84だったことをえると<舞踊靴>にまだ招待されていない々が300にもなります最初からグループトークや後援会構成考慮できなかった執行部のミスですしかし間違いはせばいいといます今後後援者々の連絡先一人ずつ<武勇靴>にご招待する計画です

 

今年目標つが100会員その目標達成されたわけですがここで満足することはできません来年(2023)には<武勇靴>会員300えることをっていますしい目標ですそうしてこそ来年舞踊靴キャンペーンと沿海州キャンペーンを無理なくけていけるとじているから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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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차 무용신 캠페인이 끝난 202112월 한국 <팀아이>는 향후 진로에 대해 약간의 논란이 일었습니다. 일본 전역의 조선학교 무용부원들에게 모두 무용신이 전달되었고, 목표가 달성되었으니 활동을 멈추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또 무용신 캠페인을 계속하더라도 언제까지나 일반 모금에 의존해서 후원활동을 할 수 없으니까 무언가 수익사업을 시작하자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다른 한편 일단 시작한 운동이니 앞으로 새로 무용부원이 될 초등학생들에게도 계속 무용신을 전달하자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적지 않은 회원들이 <팀아이> 해체를 제안했지만, 당시 <팀아이> 회장이었던 조성무 선생은 반대였습니다. 결국 <팀아이>는 해체되지 않았지만 이러한 논란 때문에 무용신 캠페인을 계속하기 위한 동력이 현저히 저하됐습니다.

 

그래서 새로 만든 모임이 <무용신>입니다. <팀아이> 때처럼 소수의 일꾼이 다수 개인과 단체의 후원을 이끌어내어 무용신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후원자들이 모두 직접 참여하는 일반 모임을 시작한 것입니다.

 

2020210<무용신2022>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단톡방을 열었는데, 처음에는 그냥 2022년에도 무용신 캠페인을 계속하기 위한 대화의 방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다행히 한국 <팀아이>의 회원들이 모두 <무용신2022>에 참여했으므로 <팀아이-무용신>의 연속성은 유지됐습니다.

 

 

<무용신2022>는 조성무 <팀아이> 회장의 주도로 제6차 무용신 캠페인을 통해 2022년에 새로 무용부에 가입한 1백여명의 초등학생들에게도 무용신을 전달했습니다. 이로써 한국 <팀아이><무용신>388명의 개인 후원과 17개의 단체 후원으로 약 27백만원을 모금해 1,100여명의 우리학교 어린 무용수들에게 무용신을 전달했고, 현재 우리학교의 무용부원이라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한국 <무용신>과 일본 <팀아이>가 전달한 무용신 선물을 받은 셈이 됐습니다.

 

그와 함께 <무용신>은 연해주 사업도 시작했습니다. 제가 강릉과 동해를 자주 왕래하면서 <연해주 포럼>에 참여했는데, 그곳의 회원 분들로부터 재러시아 동포들도 민족예술을 이어가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특히 우수리스크 <아리랑 가무단>의 단장이시자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의 교장이신 김발레리아 선생님은 직접 도움을 요청해 오셨습니다. 러시아 동포들에게는 한복과 한식 무용의상이 모자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국의 <무용신>은 일본의 <팀아이>와 의논 끝에 러시아 동포들의 민족예술 활동도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한국 동포와 재일 동포가 힘을 합쳐 재러 동포를 지원하는 일은 아주 뜻 깊어 보였습니다. 또 이 일이 기폭제가 되어 무용신이나 무용의상 지원에 그치지 않고, 그동안 만남이 많지 않았던 재일동포와 재러동포들의 교류도 늘어나기를 기대했습니다.

 

 

한국에 보수정부가 들어서는 바람에 한러 관계가 악화되었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계속되어 물류는 물론 인적 이동도 불가능해진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한국 <무용신>은 약 3백만원의 성금을 모았고, 일본 <팀아이>20벌의 새로운 무용의상을 제작하고 40벌의 한복과 무용의상을 수집해서 연해주에 보낼 수 있었습니다.

 

<무용신>의 단톡방 회원은 1년 만에 1백명이 넘어섰습니다. 그러나 1-6차 무용신 캠페인에 참여하신 분들이 388,, 연해주 캠페인에 참여해 주신 분들이 84분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무용신>에 아직 초대되지 못한 분들이 3백분이나 됩니다. 처음부터 단톡방이나 후원회 구성을 고려하지 못했던 집행부의 실수입니다. 그러나 실수는 바로 잡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후원자분들의 연락처를 알아내어 한 분 또 한 분씩 <무용신>에 초대드릴 계획입니다.

 

올해 목표 중의 하나가 1백명 회원이었고, 그 목표는 달성된 셈이지만, 여기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내년(2023)에는 <무용신> 회원이 3백명이 넘어서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새로운 목표입니다. 그래야 내년에도 무용신 캠페인과 연해주 캠페인을 무리없이 계속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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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チームアイ>けがなかったら韓国<チームアイ><舞踊靴>もできなかったでしょう韓国では舞踊靴費用うために募金運動をしたのがてですが実際舞踊靴制作して学生たちにしたのは全面的日本チームアイだったからです

 

舞踊靴製作することはそれほど簡単なことではありませんまず舞踊靴生徒把握しなければならず各生徒寸法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この準備忠実かつ正確遂行してくださったのがまさに日本チームアイです

 

製作された舞踊靴学生たちにえるのも面倒です学生たちがまる一括的伝達できれば一番良いですが仕事がそんなに容易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地域あるいは中央競演大会まで時間がたくさんっていたりあるいはすでにぎたそして競演大会があっても参加できない学校があれば各学校ねて舞踊部学生たちにいちいち舞踊靴伝達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の仕事担当してくださったのがチームアイ会員々です

 

 

1回舞踊靴キャンペーンは20201月末募金228日四国朝鮮学校31日神戸朝鮮学校舞踊部生徒たちに舞踊靴しましたこのまりや団体がなく李仁珩先生個人的進行したそうです

 

その116京畿地域朝鮮学校舞踊部生徒教師170舞踊靴えることにした2回舞踊靴神キャンペーンがみました1回目舞踊靴35用意するのとは比較にならないほど仕事きくなったのでくの人手必要でした

 

そこで韓国では9まって<ウリ學校朝鮮舞踊後援会>という臨時名前めましたチョン·フェソン(정회선)黃雄吉(ファン·ウンギル)クォン·ホンウ(권홍우)カン·チュンホ(강충호)李仁珩(·インヒョン)李元榮(·ウォニョン)趙誠武(チョ·ソンム)鄭澈勳(チョン·チョルフン)趙正熙(チョ·ジョンヒ)創立メンバーです。 (鄭澈勳先生創立会かれたので最初から苦労してくださったチョ·ウンジュ(조은주)先生創立メンバーとるべきでしょう^^)

 

 

この日本でも朝鮮学校支援するための結成されました正確日付えていませんがおそらく202010月中だったといます日本語教師出身日本人活動家近藤富男先生在日同胞写真鄭世和(チョン·セファ)先生先頭ってくださいました

 

名前近藤富男先生がつけましたこのにつけた名前チームアイでしたこの名前んだられたにいありませんでしたってくださったラインメールで近藤富男先生はこういました

 

『「アイにはいろいろな意味があります韓国語アイ子供青少年します日本語中国語アイです英語アイ)(I)(eye)しますそれで<チームアイ>子供たちの成長見守目覚めている個人まりです。』

 

 

その日本<チームアイ>会員30人余りが活動しているといています日本人活動家在日同胞々で構成されているそうですこの々は2回舞踊靴キャンペーンのから日本われるべきことを担当してくださいました完成した舞踊靴せて各学校訪問して生徒たちに舞踊靴えながら激励言葉をしてさることは<チームアイ>会員たちがけて担当しました

 

日本韓国<チームアイ>2020112回目のキャンペーン近畿地域170202133回目日本全域, 200)、2021104回目漏落した中級部学生, 89)、202215回目初級部学生, 438キャンペーンを継続しました

 

5舞踊靴キャンペーンをじて334個人後援10団体後援25百万圓募金されこれを伝達された日本<チームアイ>1千足舞踊靴製作日本全域のウリ學校舞踊部伝達しました

 

2年前まではおいの存在らなかった々ですが<チームアイ>わせて数百人後援者わせてげた根後援運動結果で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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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팀아이>의 도움이 없었다면 한국 <팀아이><무용신>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무용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모금운동을 한 것이 전부이지만, 실제로 무용신을 제작해서 학생들에게 전달한 것은 전적으로 일본의 <팀아이>였기 때문입니다.

 

무용신을 제작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무용신을 전달 받을 학생들의 수를 파악해야 하고, 각 학생들의 신발 치수도 알아야 합니다. 이 준비를 충실하고 정확하게 수행해 주신 것이 바로 일본의 <팀아이>입니다.

 

제작된 무용신을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것도 번거로운 일입니다. 학생들이 한데 모이는 자리에서 일괄적으로 전달할 수 있으면 가장 좋지만, 일이 그리 수월하지 않았습니다. 지역 혹은 중앙경연대회까지 시일이 많이 남았거나 혹은 이미 지났을 때, 그리고 경연대회가 있더라도 참가하지 못하는 학교가 있다면, 각 학교를 찾아가서 무용부 학생들에게 일일이 무용신을 전달해야 합니다. 그 일을 담당해 주신 분들이 바로 <팀아이> 회원 분들입니다.

 

 

1차 무용신 캠페인은 20201월말에 모금을 시작해 228일 시코쿠조선학교, 31일 고베조선학교 무용부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전달했습니다. 이때는 모임이나 단체가 없었고 이인형 선생과 제가 개인적으로 진행했더랬습니다.

 

그해 116일 깅키지역 조선학교의 무용부 학생과 교사분들 170명에게 무용신을 전하기로 한 제2차 무용신 캠페인이 진했됐습니다. 1차 때 무용신 35켤레를 준비하는 것과는 비교가 어려울 만큼 일이 커졌기 때문에, 많은 일손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9명의 일꾼들이 모여서 <우리학교 조선무용 후원회>라는 임시 이름으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정회선, 황웅길, 권홍우, 강충호, 이인형, 이원영, 조성무, 정철훈, 조정희가 창립멤버입니다. (정철훈 선생의 집에서 창립모임이 열렸기 때문에 처음부터 수고해 주신 조은주 선생도 창립멤버라고 보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이때 일본에서도 조선학교를 지원하기 위한 모임이 결성되었습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202010월 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교사 출신의 일본인 활동가 콘도 도미오 선생님과 재일동포 사진가 정세화 선생님이 앞장서 주셨습니다.

 

모임의 이름은 콘도 도미오 선생님께서 지으셨습니다. 이때 지으신 이름이 <팀아이>였습니다. 이 이름은 깊고 많은 생각 끝에 만들어진 것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제게 보내신 라인 문자에서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이에는 여러 뜻이 있습니다. 한국어 아이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가리킵니다. 일본어와 중국어 아이()’는 사랑입니다. 영어의 아이(I, eye)'는 나와 눈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팀아이>아이들의 성장을 사랑으로 지켜보는 깨어 있는 개인들의 모임입니다.”

 

 

이후 일본 <팀아이>는 회원들이 늘어나서 지금은 30여명이 활동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인 활동가와 재일동포 분들이 반반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분들은 제2차 무용신 캠페인 때부터 일본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들을 담당해 주셨습니다. 특히 완성된 무용신을 차에 싣고 각 학교를 방문해서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전하면서 격려의 말씀을 해 주시는 일은 모두 <팀아이> 회원들이 나누어 담당하셨습니다.

 

일본과 한국의 <팀아이>202011월의 2차 캠페인(깅키지역 170켤레)20213월의 3(일본 전역의 약 2백켤레), 202110월의 4(누락된 중학생 89켤레), 20221월의 5(초등학생 438켤레) 캠페인을 계속했습니다. 다섯 번의 무용신 캠페인을 통해 334명의 개인후원과 10개 단체의 후원으로 약 25백만원이 모금됐고, 이를 전달받은 일본 <팀아이>는 약 1천 켤레의 무용신을 제작, 일본 전역의 우리학교 무용부에 전달했습니다.

 

우리는 2년 전만 해도 서로 몰랐던 사람들이지만, <팀아이>의 이름아래서 수백 명의 후원자들의 도움을 이끌어 냄으로써 풀뿌리 후원 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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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回構成される韓日訪問団日韓訪問団答礼訪問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123から8まで大黒澄枝真銅敏之鄭世和先生韓国訪問しました3とも日本<チームアイ>会員これまで舞踊靴追悼碑沿海州キャンペーンに参加してくださった々です

 

日韓訪問団々で韓国<チームアイ><舞踊靴>会員々とこれまで一緒仕事ができたことに感謝しながら今後交流協力げていこうとおっしゃっていましたこの々をえた韓国同胞えだったことがよくわかりました

 

 

統営江陵ソウルでも愉快まりがありましたが羅州まりは印象的でしたチェ·ヒョンサム先生<ケアファームもっと>のブドウ農場ハウスでかれた夕食会には林東聖(イム·ドンソン)金順熙(キム·スンヒ)鄭在春(チョン·ジェチュン)先生などの羅州々だけでなく帰農画家パク·ホンギュ画伯版画作品のプレゼントをって参加シンガーソングライターインディアンスニ先生参加して数曲雰囲気和氣靄靄とさせてくださいました

 

にインディアンのスニ先生<臨津江>って座中粛然とさせましたがおそらくチョン·セファ先生音楽会のアイデアをかべたのがこのではないかと推察しますインディアンのスニ先生韓日訪問団参加して宝塚日程でもう一度<臨津江>ってほしいとおっしゃっていましたから

 

インディアンスニ先生訪問団参加申請をしませんでしたがそのわり朴寅浩パク·インホ)先生をはじめとする国楽演奏団<風流会>会員たちが音楽会参加することになったのはきな進展です朴仁浩(大笒, テグム先生とともに李秀哲·スチョル牙箏, アジェン)、金賢淑(キム·ヒョンスク, 大笒)、カン·ヘソン伽倻琴, カヤグム先生韓国側演奏担当してくれることを期待しています

 

 

一方日本でも国楽器演奏準備されているといています二人在日同胞玉瀬音楽会のために演奏準備しているところでにも在日同胞声楽準備しているもいるそうです

 

このように羅州いで比較的偶然提示された音楽会のアイデアは既成事実化され具体的準備われています訪問団では朴寅浩先生演奏団長委嘱して音楽会準備万全してくださるようおいしています

 

玉瀬音楽会国楽中心音楽会用意されるのはとても意味深いことだといます100年余故国異域苦労してくなった5朝鮮人労働者める音楽会になるからです

 

 

それだけでなく演奏曲目<臨津江>とともに<アリランのえて>まれそうです。 「臨津江北韓芸術家韓国ったりまた韓国歌手もたくさんって有名ですよねパッチギという映画じてこのめてきましたがにまつわるげさなようですが歌自体歌詞だけでなく音楽までも素晴らしいだったとえています

 

アリランえてはそれほどられているではありません鄭世和先生父親鄭鴻永先生調査内容個人経験をもとに日本人音楽教師(神戸公立学校)ポンシロー先生歌詞いた作品ですにダイナマイトのれるのは1929のダイナマイト爆発事故くなった尹吉文吳伊根さんをえるためだとわれます

 

そのにもどんな演奏会まれるかは朴寅浩先生をはじめとする演奏団によってまるといますが慰労感謝やかで意味深音楽会になるよう準備万全していただきたいですまた日本準備されている々も演奏会場めていただき出演者たちも交渉して々なプログラムの演奏会ができれば錦上添花だと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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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구성되는 한일 방문단은 일한 방문단의 답방인 셈입니다. 다이꼬꾸 스미애(大黑澄枝), 신도 도시유키(真銅敏之), 정세화(鄭世和) 선생님께서 지난 123일부터 8일까지 한국을 방문하셨습니다. 세 분 모두 일본 <팀아이>의 회원들이시고, 그동안 무용신과 추도비, 연해주 캠페인에 함께 해 주신 분들입니다.

 

일한 방문단은 가는 곳마다 한국 <팀아이><무용신> 회원 분들과 만나 그동안 함께 일할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하시면서 앞으로도 교류와 협력을 넓혀가자고 하셨습니다. 이분들을 맞으신 한국동포들도 같은 생각이었던 것임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통영과 강릉, 서울에서도 유쾌한 모임이 있었지만, 나주 모임은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최현삼 선생의 <케어팜 더욱>의 포도농장 하우스에서 열린 저녁식사 모임에는 임동성, 김순희, 정재춘 선생 등의 나주 분들만 아니라, 귀농 화가 박홍규 화백이 판화 작품 선물을 가지고 참석하셨고, 싱어송라이터 인디언 수니 선생도 참석하셔서 여러 곡의 노래로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특히 인디언 수니 선생은 <임진강>을 노래해서 좌중을 숙연하게 하셨는데, 아마도 정세화 선생께서 음악회아이디어를 떠올리셨던 것이 이 때가 아닌가 짐작합니다. 인디언 수니 선생도 한일 방문단에 참여하셔서 다카라즈카 일정 중에 다시 한 번 <임진강>을 불러 주시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으니까요.

 

인디언 수니 선생은 방문단에 참가신청을 하지 않으셨지만, 그 대신 박인호 선생을 비롯한 국악연주단 <풍류회> 회원들께서 음악회에 참가하시기로 하신 것은 큰 진전입니다. 박인호(대금) 선생과 함께 이수철(아쟁), 김현숙(대금), 강혜성(가야금) 선생들께서 한국쪽 연주를 담당해 주실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한편 일본에서도 국악기 연주가 준비되고 있다고 전해 듣고 있습니다. 두 분의 재일동포께서 타마세 음악회를 위해 연주를 준비하시는 중이고, 그밖에도 재일동포 중에 성악으로 노래를 준비하고 계신 분들도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나주 모임에서 비교적 우연하게 제시된 음악회 아이디어는 빠르게 기정사실화되어서 구체적인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방문단에서는 박인호 선생을 연주단장으로 위촉드려서 음악회 준비에 만전을 기울여 주시도록 부탁해 놓고 있습니다.

 

타마세 음악회에서 국악 중심의 음악회가 준비되는 것은 아주 뜻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1백여년전 고국을 떠나 이역에서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신 다섯 분의 조선인 노동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음악회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연주곡목에 <임진강>과 함께 <아리랑의 고개를 넘어서>가 포함될 것 같습니다. <임진강>은 북한 예술가들이 한국에 왔을 때 부르기도 했고, 또 국내 가수들도 많이 불러서 유명한 곡이지요? 저는 <박치기>라는 영화를 통해서 이 노래를 처음 들었는데, 노래에 얽힌 이야기는 약간 과장인 듯 싶지만 노래 자체는 가사뿐 아니라 음악까지도 훌륭한 노래였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서>는 그리 많이 알려진 노래는 아닙니다. 정세화 선생의 부친 정홍영 선생님의 조사 내용과 개인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인 음악교사(고베공립학교) 퐁시로(ポン史郎) 선생이 곡과 노랫말을 쓰신 작품입니다. 노래에 다이너마이트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1929년 다이너마이트 폭발 사고로 사망하신 윤길문, 오이근씨를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밖에도 어떤 곡들이 연주회에 포함될 것인지는 박인호 선생을 비롯한 연주단에 의해 결정되겠지만, 위로와 감사의 잔잔하고 뜻 깊은 음악회가 될 수 있도록 준비에 만전을 기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싶네요. 또 일본에서 준비하시는 분들도 연주회장을 잘 정해 주시고 다른 출연자들도 교섭하셔서 다양한 프로그램의 연주회가 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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ウリ學校舞踊靴訪問団大阪朝鮮中高級学校<創立70周年記念公演>観覧だけでなく兵庫県宝塚市朝鮮人追悼碑参拝その地域住民たちとさな音楽会くことにしました宝塚行事日程まれたのはくはこの2年間この地域きたことのためですがくはこの108年間歴史たに発見されたからです

 

2020326宝塚市武田尾園入口親水広場5朝鮮人労働者える追悼碑てられました前面には越鳥南枝漢字かれておりその5犠牲者名前まれています神戸水道工事中死亡した金炳順(キム·ビョンスン)南益三(ナム·イクサム)張長守(チャン·ジャンス)福知山線鉄道工事事故くなった尹吉文(ユン·ギルムン)吳伊根(·イグン)さんがらです

 

 

日本全域には170りの朝鮮人追悼碑/慰霊碑てられており写真家安海龍先生にも30りの追悼碑つけました<宝塚朝鮮人追悼碑>日本国内200朝鮮人追悼碑最近建てられたものであるだけでなく韓日両国市民在日朝鮮人同胞長年努力結果としててられたものだという特徴的です

 

追悼碑裏面説明によりますと金炳順南益三張長守さんは1914~1915神戸水道改修工事中くなりましたが玉瀬住民はその遺骸共同墓地埋葬仏教寺院滿福寺位牌った108年間無縁故者祭祀ってきました

 

一方在日朝鮮人地域史家鄭鴻永先生日本人教師近藤富男先生1929鉄道工事くなった尹吉文吳伊根さんの死亡経緯結果発掘鄭鴻永先生著書歌劇のもうつの歴史:宝塚朝鮮人1997)』記録しました

 

 

鄭鴻永先生死去後近藤富男先生はこの々のための追悼碑てるために20年間努力した大阪神戸そして阪神地域日本人活動家在日朝鮮人協力<宝塚朝鮮人追悼碑>建設しました

 

このことをった韓国<チームアイ><舞踊靴>会員たちは殉難者たちの韓国内縁故地調査した金炳順さんの故郷江原道江陵であることを確認江陵市追悼碑建立者たちに感謝牌贈呈してほしいという請願書しましたこの請願れられ2022326追悼碑てられて2ぶりに江陵市わって東京所在江原道本部のカン·ビョンジク本部長宝塚訪問8追悼碑建立貢献者感謝牌しました

 

江陵市江原道感謝表示鼓舞された玉瀬住民今後殉難者祭祀けることにする一方らの参拝墓りにムクゲやツツジをえて追悼公園にすることをめましたこの公園来年326わせて造成され開場するとされています

 

 

殉難者死後100年余鄭鴻永-近藤富男先生調査発掘および記録から20年余そして追悼碑建立されてから2年間<宝塚朝鮮人追悼碑>はこの地域くの注目韓国でもら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

 

今回<ウリ學校舞踊靴>訪問団宝塚朝鮮人追悼碑訪問参拝することにしたのもこの一連事件結果結果ですまた追悼碑参拝にとどまらずさいながらも音楽会くことにしたのは朝鮮人殉難者面倒てくださった日本人住民在日同胞感謝するためです

 

20世紀前半韓国日本不幸歴史きてきましたが両国市民冷酷外交政治でも人類愛れませんでしたそしておいにする人之常情表現配慮してきました

 

訪問団宝塚訪問じて韓日両国不幸過去れずにそれを両国市民友好善隣昇華させるきっかけになることをっ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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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학교 무용신 방문단은 오사카조선중고급학교의 <창립70주년 기념공연> 관람 뿐 아니라, 효고현 다카라즈카시의 조선인 추도비를 참배하고, 그 지역 주민들과 작은 음악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다카라즈카 행사가 일정에 포함된 것은 짧게는 지난 2년 동안 이 지역에서 일어난 일 때문이지만, 길게는 지난 18년 동안의 역사가 새롭게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2020326일 다카라즈카(寶塚)시 다케다오(武田尾)에서 가까운 사쿠라공원() 입구의 신스이광장(親水広場)5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을 기리는 추도비가 세워졌습니다. 앞면에는 월조남지(越鳥南枝)’라고 한자로 씌여 있고, 그 아래 다섯 희생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고베수도공사 중에 사망한 김병순(金炳順), 남익삼(南益三), 장장수(張長守)씨와 후쿠치야마선 철도공사에서 사고로 숨진 윤길문(尹吉文), 오이근(吳伊根)씨가 바로 그들입니다.

 

 

일본 전역에는 약 170여개의 조선인 추도비/위령비가 세워져 있고, 사진작가 안해룡 선생은 그밖에도 30여개의 추도비를 더 찾아냈습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는 일본내 약 2백여개의 조선인 추도비 중에서 가장 최근에 건립된 것일 뿐 아니라, 한일 양국 시민들과 재일조선인 동포들의 오랜 노력의 결과로 세워진 것이라는 점에서 특징적입니다.

 

추도비 뒷면의 설명에 따르면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는 1914-1915년의 고베수도 개수공사 중에 사망했는데, 타마세 주민들은 그 유해를 마을 공동묘지에 안장하고, 불교사찰 만푸쿠지(滿福寺)에 위패를 모신 후 108년 동안 무연고자 제사를 드려 왔습니다.

 

한편, 재일조선인 지역사가 정홍영(鄭鴻永) 선생과 일본인 교사 콘도 도미오(近藤富男) 선생은 1929년 철도공사에서 사망한 윤길문, 오이근씨의 사망 경위와 결과를 발굴해 <가극의 거리의 또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에 기록했습니다.

 

 

정홍영 선생의 타계 후 콘도 도미오 선생은 이분들을 위한 추도비를 세우기 위해 약 20여년간 노력한 끝에 오사카와 고베, 그리고 한신 지역의 일본인 활동가와 재일조선인들의 협력을 얻어 20여년만에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건립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한국의 <팀아이><무용신> 회원들은 순난자들의 한국내 연고지를 조사한 끝에, 김병순씨의 고향이 강원도 강릉임을 확인하고, 강릉시에 추도비 건립자들에게 감사패를 증정해 달라는 청원서를 냈습니다. 이 청원은 받아들여졌고, 2022326, 추도비가 세워진 지 2년 만에 강릉시를 대신해 도쿄 소재 강원도본부의 강병직 본부장이 다카라즈카를 방문해 8분의 추도비 건립 공헌자들에게 감사패를 전달했습니다.

 

강릉시와 강원도의 감사표시에 고무된 타마세 마을 주민들은 향후에도 순난자들의 제사를 계속하기로 하는 한편, 이들의 참배묘 주위에 무궁화와 진달래를 심어 추도공원으로 꾸미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공원은 내년 326일에 맞춰 조성되고 개장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순난자들의 사망 이후 1백여년, 정홍영-콘도 도미오 선생의 조사와 발굴 및 기록 이후 20여년, 그리고 추도비가 건립된 후 2년 동안,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는 이 지역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고, 한국에도 널리 알려지게 됐습니다.

 

이번 <우리학교 무용신> 방문단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방문하고 참배하기로 한 것도 이 일련의 사건들이 좋은 결과를 맺은 결과입니다. 또 추도비 참배에 그치지 않고 작으나마 음악회를 열기로 한 것은 조선인 순난자들을 잘 보살펴주신 일본인 주민들과 재일동포들에게 감사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20세기 한국과 일본은 불행한 역사 속에 살았지만, 양국의 시민들은 냉혹한 외교와 정치 속에서도 인류애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인지상정을 표현하고 배려해 왔습니다.

 

방문단의 다카라즈카 방문을 통해, ,일 양국의 불행한 과거를 잊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두 나라 시민들 사이의 우호와 선린으로 승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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がるじです朝鮮舞踊家崔承喜(チェ·スンヒ)先生人生とダンスを研究していてウリ学校(=在日朝鮮学校)舞踊生徒たちの舞踊作品してみるととてもきれいでありがたくて舞踊靴キャンペーンをめました舞踊部学生たちに舞踊靴めたのです

 

キャンペーンの規模きくなるのでえないのでさんに参加をおいしましたがいにもくの々が参加してくださいましたそしてついに<舞踊靴>後援会朝鮮学校公演くにりました

 

 

朝鮮学校めてったのは201910月初めの京都ででした崔承喜先生1935年京都公演調べるために図書館資料調査をしましたが時間くの銀閣寺きましたもともとは境内かなところですが修学旅行生徒たちでわっていたので観覧をあきらめててきててられた朝鮮学校案内板たのです

 

その沿ってると京都朝鮮中高級学校がありました位置した学校正門ったら生徒たちが体育大会練習をしていました遮日進行担当していた教師けで舞踊部指導教師ユン·ギョンスク教員とチョ·ミョンホ校長先生いました二人朝鮮舞踊るためには11月初めに大阪かれる中央芸術競演大會るようめられました

 

それで1月後にまた大阪って新鮮衝撃けました85年前崔承喜先生日本めた朝鮮舞踊再現されていたからです文章だけで想像していた崔承喜先生のダンス動作生徒たちのダンスをながら理解されめました崔承喜先生解放以前作品った映像っていないので学生たちの公演研究けるためにからかったのようにじました

 

 

競演会場鄭世和(チョン·セファ)先生ったのもきな幸運でした以後たちは朝鮮舞踊研究とウリ學校後援のために協力しながら成果してきました舞踊靴追悼碑沿海州キャンペーンなどがそれですそしてついに今回日本訪問団構成するにったのです

 

日本訪問団来年128土曜日には宝塚市朝鮮人参拝墓新水公園内朝鮮人追悼碑訪問して参拝地域住民いてさな音楽会開催します翌日129(日曜日)には大阪朝鮮中高級学校開校70周年記念公演観覧することになります

 

大阪朝鮮中高級学校2018年大阪朝鮮高級学校(=大阪朝高)東大阪朝鮮中級学校統合日本全体じて最大規模朝鮮学校となりましたが統合以前大阪朝高開校日大阪朝鮮中高級学校開校日としています

 

 

大阪朝高1952410日大阪市生野区田島開校1957810日河内市(=現在東大阪市)玉串本町1973年現在東大阪市菱江校舎新築して移転しました

 

日本高等学校にあたる朝鮮学校高級学校ぶのは朝鮮学校日本正規教育機関としてめられない各種学校分類されるからです朝鮮学校日本政府規定した教科一部いませんえば朝鮮学校国語国史朝鮮語朝鮮史であり日本語1外国語日本史世界史一部としてえます

 

 

大阪朝高朝鮮学校同様学生たちの活発小組(=サークル)活動をおめします公演芸術部としては舞踊部声楽部民族器楽部吹奏楽部代表的美術部活動活発です体育部では鬪球(=ラグビー)とサッカー成績しておりそのにもボクシングとバスケットボール卓球部などが活動しています

 

今回訪問団観覧することになる大阪朝高創立70周年記念公演希望のナレたちのという主題公演芸術部学生たちが総出演して大阪朝鮮中高級学校過去現在そして今後繰げられる未来紹介することになります公演大阪から南西4キロれた東大阪市文化創造館われ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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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번지는 느낌입니다. 최승희 선생의 삶과 춤을 연구하다가 우리학교(=재일조선학교)의 무용을 알게 됐고, 학생들의 무용 작품들을 접하고 보니까 너무 이쁘고 고마워서 무용신 캠페인을 시작했었습니다. 무용부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보내기 시작한 것이지요.

 

캠페인의 규모가 커지니까 버거워서 여러 분들에게 동참을 부탁드렸는데, 다행히도 많은 분들이 참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무용신> 후원모임이 조선학교의 공연을 보러 가기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조선학교를 처음 만난 것은 201910월초 교토에서였습니다. 최승희 선생의 1935년 교토 공연을 조사하느라 도서관에서 자료를 뒤지다가, 쉬는 시간에 인근 긴가쿠지(銀閣寺)에 갔습니다. 원래는 경내가 조용한 곳이지만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로 번잡했기 때문에, 관람을 포기하고 나오다가 옆길 입구에 세워진 조선학교 안내판을 보게 된 겁니다.

 

그 길을 따라 올라가니 교토조선중고급학교가 있었습니다. 숲속에 자리 잡은 학교의 정문을 들어섰더니 학생들이 체육대회 연습을 하고 있더군요. 차일 밑에서 진행을 담당하시던 교사 분의 도움으로 조명호 교장 선생님과 무용부 지도교사 윤경숙 교원을 만났습니다. 두 분은 조선무용을 직접 보려면 11월초 오사카에서 열리는 중앙예술경연대회에 오라고 권하셨습니다.

 

그래서 한 달 후에 다시 오사카에 갔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85년 전 최승희 선생이 시작했던 조선무용이 눈앞에서 재현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글을 통해서만 상상했던 최승희 선생의 춤 동작들이 학생들의 춤을 보면서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최승희 선생의 해방 이전 작품을 담은 영상이 전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학생들의 공연은 내 연구를 돕기 위해 하늘이 내려주신 선물처럼 느껴졌습니다.

 

 

경연대회장에서 사진가 정세화 선생을 만난 것도 큰 행운이었습니다. 이후 우리는 조선무용 연구와 우리학교 후원을 위해 협력하면서 성과를 내어왔습니다. 무용신과 추도비, 연해주 캠페인 등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번에 일본 방문단을 꾸리기에 이른 것이지요.

 

일본 방문단은 내년 128(토요일) 다카라즈카시의 조선인 참배묘와 신수이광장의 조선인 추도비를 방문해 참배하고, 지역 주민들을 초청해 작은 음악회를 개최합니다. 다음날인 129(일요일)에는 히가시오사카시 문화창조관(東大阪市文化創造館)에서 열리는 오사카조선중고급학교의 개교 70주년 기념공연을 관람하게 됩니다.

 

오사카조선중고급학교는 2018년 오사카조선고급학교(=오사카조고)와 히가시오사카조선중급학교와 통합하여 일본 전체를 통해 가장 규모가 큰 조선학교가 되었는데, 통합 이전의 오사카조고의 개교일을 오사카조선중고급학교의 개교일로 삼고 있습니다.

 

 

오사카조고는 1952410일 오사카시 이쿠노(生野)구 타지마(田島)에서 개교, 1957810일 카와치(河内)(=현재의 히가시오사카(東大阪)) 타마쿠시모토마치(玉串元町)로 옮겼다가, 1973년 현재의 위치인 히가시오사카시 히시에(菱江)에 교사를 신축해 이전했습니다.

 

일본의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조선학교를 고급학교라고 부르는 것은 조선학교가 일본의 정규교육기관으로 인정되지 않는 각종학교로 분류되기 때문입니다. 조선학교는 일본 정부가 규정한 교과목의 일부를 따르지 않습니다. 예컨대 조선학교의 국어국사는 조선어와 조선사이며, 일본어는 제1외국어, 일본사는 세계사의 일부로 가르칩니다.

 

 

오사카조고는 다른 조선학교들과 마찬가지로 학생들의 활발한 소조(=동아리) 활동을 권장합니다. 공연예술부로는 무용부와 성악부, 민족기악부와 취주악부가 대표적이며, 미술부의 활동도 활발합니다. 오사카조고의 체육부로는 투구부(=럭비부)와 축구부가 좋은 성적을 내고 있고, 그밖에도 권투부와 농구부, 탁구부 등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번 방문단이 관람하게 될 <오사카조고 창립70주년 기념공연>희망의 나래, 우리의 노래라는 주제아래, 공연예술부 학생들이 총출연해서 오사카조선중고급학교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소개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공연장인 히가시오사카시 문화창조관은 오사카조고에서 서남쪽으로 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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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12日大阪到着した20203関西空港れて帰国してから2年半ぶりのことだ飛行機着陸したのが5時頃だったがターミナルをくなったそれで今回大阪がくれた最初じは突拍子もなく、「ここはむんだなだった緯度なく経度数度違うだけなのに太陽じられるのが不思議だった

 

 

2年半前日本たのは舞踊靴えるためだった李仁珩·インヒョン先生一緒だった同年31神戸朝鮮学校卒業式直後李仁珩先生舞踊部練習室まった学生たちに韓国同胞たちがめての舞踊靴えた

 

鄭世和(チョン·セファ)先生がそばで伝達手伝ってくれて写真った李仁珩先生神戸城高校舞踊部のリ·ジュソン指導教師舞踊靴写真以後2年半続いた舞踊靴キャンペーンの象徴となった

 

 

今回訪日一人だった李仁珩先生家族日程のため同行できなかったイム·サンテク先輩同行することになっていたが航空便都合2日後到着することになっていた

 

日本往来めたのは朝鮮舞踊家崔承喜(チェ·スンヒ)先生日本公演調査するためだった20185安海龍(アン·ヘリョン)先生恵那クヌギさんと一緒った東京調査めてだったその後約2年間日本くの都市図書館記録保管所崔承喜先生朝鮮舞踊公演調査したえてみると北海道から沖縄まで42都市訪問した

 

そんな201910月初めに偶然機会京都朝鮮学校のチョ·ミョンホ校長先生とユン·ギョンスク舞踊教員中央芸術競演大會紹介された11月初めに大阪朝鮮学校かれた舞踊競演大會参観朝鮮舞踊する関心急速拡大した1930年代崔承喜先生めた朝鮮舞踊80年余りがぎた日本全域公演されているのが不思議だった

 

 

舞踊競演大會映像撮影担当された鄭世和先生ったのがには幸運だった鄭世和先生から在日朝鮮学校在日同胞する事情具体的くことができ崔承喜先生するをすることができた

 

神戸朝高のための舞踊靴キャンペーンをめたのも鄭世和先生とのいをじてまったものだったそのたちはおいにえなくても2年半6のキャンペーンをじて11百人在日朝鮮学校舞踊部学生たちに舞踊靴えることができた

 

往来途絶えたのはコロナ防疫のためだった韓日間貿易紛争外交的対立一役買った往来はなかったがたちは在日朝鮮学校舞踊神キャンペーンと宝塚朝鮮人追悼碑プロジェクトそして沿海州高麗人舞踊衣装後援事業推進した仕事結果すほど玄海灘こう一緒いてくださった鄭世和先生信頼つようになった

 

 

関西空港から南海線って大阪市内進入大阪駅環状線えて天満駅かい期待ちていた鄭世和先生天満駅えにくとらせてきたためだはすっかりくなり駅周辺飲食店街かりがともった天満駅入口たちは再会した2年半ぶりだったが不慣れではなかったたちはおいに両手をつないでしくりながらいのつめたいできてしいです

 

ホテルのチェックインをえてたちはまた天満駅前夕食にし間懐かしがっていたビールを注文することができた約束場所到着すでに食堂調査をしておいた鄭世和先生めでたちはてんぷら専門店いた

 

 

鄭世和先生はあれこれ説明しながらぷらと串焼きを相次いで注文したがその時何べたのかよくせないただがつまずいた乘用車いてられた鄭世和先生電車時間のためにれなければならないまでわしたがわしたのかも曖昧

 

しかしその日天満駅鄭世和先生った場面よくれたスチール写真のようにまれたいできてしいです本当しいです(jc, 202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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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12일 오사카에 도착했다. 20203월 간사이공항을 떠나 귀국한 지 약 2년 반 만이었다. 비행기가 착륙한 것이 5시경이었는데 터미널을 빠져 나오는 동안 날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그래서 이번에 오사카가 준 첫 느낌은 생뚱맞게도, ‘여기는 해가 빨리 지는구나였다. 위도 차이 없이 경도가 몇 도 다를 뿐인데 빨리 지는 해가 느껴지는 게 신기했다.

 

 

2년 반 전에 일본에 왔던 것은 무용신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이인형 선생과 함께였다. 그해 31일 고베조선학교의 졸업식 직후, 이인형 선생이 무용부 연습실에 둥그렇게 모여선 학생들에게 한국 동포들이 보내는 첫 무용신을 전달했다.

 

정세화 선생께서 옆에서 전달을 도왔고, 나는 사진을 찍었다. 이인형 선생이 고베조고 무용부의 리주선 지도교사에게 무용신을 전달하는 사진은 이후 2년 반 동안 계속된 무용신 캠페인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이번 방일은 혼자였다. 이인형 선생은 가족 일정 때문에 동행할 수 없었다. 임상택 선배님이 동행하시기로 하셨지만 항공편 사정으로 이틀 후에 도착하시게 되어 있었다.

 

내가 일본을 왕래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무용가 최승희 선생의 일본공연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20185월 안해룡 선생과 에나 크누기씨와 함께 했던 도쿄 조사가 처음이었다. 이후 약 2년 동안 일본 여러 도시의 도서관과 기록보관소를 찾아 최승희 선생의 조선무용 공연을 조사했다. 세어 보니 홋카이도에서 오키나와까지 42개 도시를 방문했다.

 

그러던 중 201910월초 우연한 기회에 교토 조선학교의 조명호 교장선생과 윤경숙 무용교원을 만났고, 중앙예술경연대회를 소개받았다. 나는 11월초 오사카 조선학교에서 열린 무용경연대회를 참관했고, 조선무용에 대한 관심이 급속히 확대됐다. 1930년대에 최승희 선생이 시작한 조선무용이 80여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 전역에서 공연되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무용경연대회에서 영상 촬영을 담당하신 정세화 선생을 만난 것이 내게는 행운이었다. 정세화 선생으로부터 재일조선학교와 재일동포들에 대한 사정을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었고, 나는 최승희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해 드릴 수 있었다.

 

고베 조고를 위한 무용신 캠페인을 시작한 것도 정세화 선생과의 의논을 통해서 시작된 것이었다. 이후 우리는 서로 만나지 못하면서도 2년 반 동안 6차례의 캠페인을 통해 11백 명의 재일 조선학교 무용부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전달할 수 있었다.

 

왕래가 끊어진 것은 코로나 방역 때문이었다. 한일간 교역 분쟁과 외교적 대립도 한 몫을 했다. 왕래는 없었지만 우리는 <재일조선학교 무용신> 캠페인과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프로젝트, 그리고 <연해주 고려인 동포 무용의상 후원> 사업을 추진했다. 일이 결과를 내어갈수록 현해탄 건너편에서 함께 일해 주신 정세화 선생에게 깊은 신뢰를 갖게 되었다.

 

 

간사이공항에서 난카이선을 타고 오사카 시내에 진입, 오사카역에서 순환선으로 갈아타고 텐마역으로 향하면서 나는 기대에 찼다. 정세화 선생께서 텐마역에서 마중하겠다고 알려 오셨기 때문이다. 날은 완전히 어두워져서 역 주변 먹자골목에 불이 환하게 밝혀진 텐마역 입구에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3년반 만이었는데 전혀 낯설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 두 손을 붙잡고 마구 흔들면서 서로 얼굴을 한참씩 바라보았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호텔 체크인을 마치고 우리는 다시 텐마역전으로 나와서 저녁식사를 함께 했고, 나는 오래 그리워하던 일본식 생맥주, 나마비루를 주문할 수 있었다.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해 이미 식당 조사를 해 놓으신 정세화 선생의 권유로 우리는 튀김 전문집에 자리를 잡았다.

 

 

정세화 선생은 이것저것 설명하시면서 튀김과 꼬치를 연달아 주문하셨지만, 그때 뭘 먹었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냥 이야기가 꼬리를 물었다. 차를 두고 오신 정세화 선생의 전철 시간 때문에 헤어져야 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는데,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도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그날 텐마역에서 정세화 선생과 만났던 장면은 잘 찍힌 스틸 사진처럼 내 마음에 새겨졌다. 반갑습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jc, 202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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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에 김혜정 장편소설이라고 되어 있지만 나는 이 작가가 누군지 모릅니다. 물론 내 탓입니다. 오랜 외국생활로 한국 출판계의 흐름을 놓쳤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게 내게는 좋은 점이기도 합니다. 거품 낀 유명세나 기획된 유행에 휘둘리지 않고 내 시점을 유지한 채 작품을 대할 수 있기 때문이죠.

 

<하이킹 걸즈>의 첫 인상은 좋지 않았습니다. 제목 때문입니다. 씨바, 왜 제목조차 제나라 말을 못 쓸까? 한국어 작가 맞아?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게다가 걸즈라니... 최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서는 하이킹이라는 말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라고 인정했습니다. 어원이 영어 방언인 하이크(hike)’에는 멀리 떠나다와 함께 올리다라는 뜻이 있기 때문이죠. 고양과 성숙을 위해 먼 길을 걷는 전통이 없는 한국에는 하이킹에 해당하는 말이 없습니다. 기껏해야 방랑이라는 말이 있을 뿐인데, 그건 하이킹과는 전혀 다른 말이니까요.

 

굳이 말하자면 <하이킹 걸즈>는 청소년 소설이자 성장 소설입니다. 나도 아들이 대학 준비할 때 읽어보라고 사준 책인데, 일차언어가 한국어가 아닌 아들은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당시 아들의 절친은 책보다는 리그 오브 레전드였으니까요. 이후에도 애들 책이라고 생각해서 꽂아만 두고 있다가 이번에 버리기 전에 읽자는 심정으로 지금 막 다 읽었습니다.

 

두 소녀가 비단길을 걷는 이야기입니다. 우루무치에서 둔황까지 약 12백킬로미터를 걸으면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한 이야기죠. 카미노와 올레를 다녀오고, 기회 있을 때마다 둘레길이나 자락길을 걷는 저에게는 당연히 혹할 만한 소재입니다.

 

 

그렇다고 비단길의 풍광이나 역사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책은 아닙니다. 나온다고 해야 사막길의 신기루와 오아시스, 그리고 명사산 정도가 나오고, 스파게티가 비단길에서 시작된 음식이라는 설명 정도일까요? 그보다는 어두운 경험과 격렬한 갈등으로 얼룩진 두 소녀의 내면이 정화되면서 인생의 방향이 생기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실 그게 도보여행의 목적이고, 도보여행 소설의 주제이기도 하죠.

 

이 소설의 주인공은 소년원에 가는 대신 비단길 하이킹을 택한 거짓말쟁이 상습절도범보라와 욱하는 성격의 상습폭력범은성이지만, 10대 소녀 말고도 두 명의 여자가 더 등장합니다. 두 소녀의 하이킹을 이끌어주는 20대의 마귀할멈미림과 이 책을 쓴 (아마도 당시) 30대의 김혜정씨입니다. 김혜정씨의 인생여정과 하이킹 경험은 미림에게 전수되고, 미림의 인내어린 잔소리가 은성과 보라의 마음을 잡아주는 이야기입니다.

 

 

청소년 성장소설이라고만 생각했으면 이 책을 읽거나 독후감까지 쓸 생각은 안했을 겁니다. 은성이와 보라의 과거 비행이 서술된 것을 읽으면서, 모든 개인의 문제에는 원인, 특히 사회적 원인이 있다는 데에 다시 한 번 생각이 미쳤고, 그것은 개인의 힘으로 극복하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주변 사람과 사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죠.

 

그러면서 오늘날 한국 사회의 태극기/일베/메갈의 문제가 겹쳐졌습니다. 일탈사회학 측면에서 보면 이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그냥 개인이나 소집단의 일탈 문제가 아닙니다. 해방 후 7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독립군과 친일파의 싸움이 전개되는 기형적인 현대사가 낳은 결과일 수 있습니다. 한 때 이 문제는 시간만이 치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시간도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미 세대를 건너 고착되기 시작했으니까요.

 

 

한국 사회의 이 고질병을 치료할 한 가지 방법을 <하이킹 걸즈>가 제시합니다. 하이킹입니다. 자기 자리를 떠나볼 수 있어야 하고, 거기서 자기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모습이 객관화되고, 자리와 조건이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마귀할멈 역할을 해 주어야 할 종교와 학문, 언론이 무너진 한국사회는 명사산 꼭대기에서 세상을 내려다 볼 수 있었던 은성과 보라의 경험을 제공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러다보니 얼척 없는 윤석열 정부가 탄생한 거죠. 아이고~ (jc, 2022/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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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극장의 초기역사 시론 (by 조정희, 최승희 연구가, 예술사회학)

 

I. 서론

 

나주극장은 건물이 현존하는 나주시 유일의 근대극장이다. 1930년대에 설립되어 1950년대에 개축된 나주극장은 약 1세기 동안 영화와 공연, 그리고 각종 지역 행사를 유치해 나주시와 인근 지역 주민들에게 연예와 유흥과 예술을 제공하던 극장이다.

 

특히 일제강점기를 통하여 나주극장은 나주 유일의 상설관이었고, 더구나 설립자가 조선인이었기 때문에 시민사회와 학계, 문화예술 행정당국의 관심을 끌었다. 지금은 나주시가 나주극장 건물을 매입해 문화재생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재활용하는 방안을 강구 중이다.

 

나주극장은 역사적, 문화적 의미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그 초기 역사는 밝혀진 것이 거의 없다. 그 설립자가 변사 출신의 성방명(成邦明)이라는 점은 알려져 있지만, 그가 나주극장을 언제 설립했는지, 그가 처음 설립한 극장의 위치와 크기가 어떠했으며, 어떤 영화를 상영하고 어떤 공연을 상연했는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는 일차적으로 나주극장에 대한 조사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계의 연구는 단행본 <호남의 극장문화사(위경혜, 2007)>5쪽 남짓 서술된 것이 전부이고, 연구논문으로는 최근에 발표된 나주(羅州)지역 극장의 생성과 역사적 전개에 관한 연구(김남석, 2022, <인문학연구 32>)”가 유일하다.

 

나주극장에 대한 연구가 희소한 것은 일차 자료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한 자리 수를 넘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신문기사가 문헌 증거의 전부이고, 그밖에는 2000년대 이후에 이루어진 구술자료가 약간 있을 뿐이다. 더구나 이 구술 자료조차 너무 뒤늦게 수집된 것이어서 1950년대 이전의 나주극장에 대한 회고 내용은 거의 없다.

 

 

필자가 나주극장의 초기역사에 관심 갖게 된 것은 최승희 무용공연 조사 때문이었다. 조선무용가 최승희의 공연을 조사해 온 필자는 2017년의 유럽공연 조사, 2018년의 미국공연 조사, 2019-2020년의 일본공연 조사에 뒤이어 20203월부터 국내공연을 조사했다. 코로나 때문에 남미공연 조사를 단행하지 못한 채, 일단 국내 조사를 시작했던 것이다.

 

전남지역의 최승희 공연을 조사하던 중, 필자는 목포와 광주, 벌교와 순천과 여수에서 최승희의 무용공연이 이뤄졌다는 점을 발굴하거나 확인했다. 벌교공연은 과거에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 발견된 공연이었기에 그 발견의 의의는 사뭇 컸다.

 

벌교공연을 발굴한 직후 필자는 1930년대에 더 큰 도시였던 나주에서도 최승희의 무용공연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조사를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나주극장의 존재도 알게 되었다. 조사 결과 최승희의 나주극장 공연은 없었던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려야했지만, 나주 조사를 도와주신 분들의 요청으로 나주극장에 대한 조사는 계속했다.

 

 

3개월의 조사를 결산하는 이 글에서는 그동안 취약했던 나주극장의 초기역사, 즉 해방 이전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발굴하는 데에 일차적 관심을 두었다. 이글을 위해서는 기존 문헌이 재검토되고, 관련 문헌이 새로 발굴되기도 했지만, 현지 원로와 전문가들의 면접이 가장 중요한 자료를 제공했다.

 

특히 1백세를 넘어 장수하시는 이학동 화백과 나주 문화원장을 오래 역임하신 박경중 원장님을 각각 두 차례씩 면접할 수 있었고, 나주극장의 설립자이신 성방명씨의 4남 성순재씨를 만나 면접하고 수시로 연락을 주고 받으며 질문을 드릴 수 있었던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자리를 빌어 세 분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또 나주극장의 문헌 조사와 면접 조사를 위해 나주 실학강독회와 나주학회가 큰 도움을 주었다. 특히 실학강독회의 임재택, 김순희, 최현삼 선생, 그리고 나주학회의 정찬용 선생의 참여와 도움에 감사드린다. 또 문헌자료를 자문해 주신 나주시청의 김종순 과장과 나주 문화계 원로 면접을 주선해 주신 윤지향 팀장께도 감사드린다. (2022/10/3, 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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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承喜(チェ·スンヒ)先生人生りを研究しながら崔承喜憑依されたといういたりもした研究ノートをジャーナルと学術誌発表するきながら崔承喜心情意図推測した内容えたりもしたためだ。 「巫俗という皮肉ではなくても客観的ではないという批判だったのだろう

 

<社会学概論>では社会学つの流派があると要約したりもする経験主義empiricism記録して解釈学hermeneutics記録意味理解しようとし批判criticism記録れた意味そうとする実際その3つは背馳されていない事件総体的理解するためには3つとも渉猟しなければならないためだ

 

それで憑依という巫俗用語社会学解釈批判のための方法論になる心理学自己開発書愛用する感情移入共感もグッドパン憑依言葉日常使立場えるswitching shoes)」きくわらない言葉だからだ

 

 

近藤富男先生憑依みた南益三氏参拝墓発見されたという連絡けたどんなじだったのだろうか

 

2020223近藤先生宝塚市立中学校教員時代同僚だった大黑澄枝先生から電話けた。 「朝鮮人労働者3参拝墓玉瀬満福寺けられており婦女会寺院100年以上祭祀ってきたということだった大黒先生教員時代だった足立有里さんのメッセージを近藤先生えたのだ

 

足立有里さん満福寺5代住職足立泰教氏夫人であり自身足立智教という僧名4代住職歴任したことがある歴代住職じて自分えてきた大黒先生近藤先生えたのだ

 

 

参拝墓玉瀬満福寺にあるというニュースは近藤富男先生にとってくべき衝撃だっただろう鄭鴻永-近藤富男調査チームは1986年秋玉瀬3朝鮮人犠牲者埋葬墓地発見しているいてらの参拝墓すために西谷墓地寺院々まで調査したがつからなかったという

 

これは多少疑問埋葬墓玉瀬にあったとすれば参拝墓もそのくにあるということはしくなく推論できるところでどうして二人玉瀬参拝墓発見できなかったのだろうか満福寺調査かられていたのだろうかあるいは調べたが発見できなかったのだろうか

 

いかなる場合でも残念なことだったおそらく近藤富男先生そのなぜ満福寺をさらにしく調べなかったのかという悔恨ったのだろうその参拝墓発見していたら追悼碑はもっとてられることもできたし鄭鴻永先生いだった追悼碑建立他界しただろう

 

 

他方近藤富男先生ればせながら参拝墓発見されたことをいとえたにいない鄭鴻永先生他界してから20年以上探った参拝墓偶然発見されたことはどれほどしいことだっただろうかしかも追悼碑建立直前だったのでかった5犠牲者名前一度追悼碑むことができたからだ

 

それから2年後近藤富男先生他界したことをえるとこの発見はさらに意味のあることだったこの発見のおかげで鄭鴻永-近藤富男調査チームは自分たちが選択した使命35ぶりにたしこのったことになった

 

 

また近藤先生満福寺足立泰教さんと足立智教さんそして同僚大黒澄愛先生感謝気持ちをったのだろう鄭鴻永先生自分埋葬墓跡らかにするにまったがらのけで参拝墓まで発見することになったのだから感謝せざるをなかっただろう

 

2020223満福寺参拝墓らせをいた近藤富男先生このように悔恨安堵感謝複合的感情まれ感慨無量だったことを推察するのはそれほどしくなかった。 (2022/9/13趙正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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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선생의 삶과 춤을 연구하면서 최승희에 빙의됐다는 말을 듣곤 했다. 연구노트를 쓸 때나, 저널과 학술지에 발표할 글을 쓰면서 최승희의 심정이나 의도를 추측한 내용을 덧붙이곤 했기 때문이다. ‘무속이라는 비아냥은 아니더라도 객관적이지 않다는 비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
사회학개론>에서는 사회학에 세 유파가 있다고 요약하곤 한다. 경험주의(empiricism)기록을 찾아 읽고, 해석학(hermeneutics)기록의 뜻을 이해하려 하고, 비판(criticism)기록의 숨은 뜻을 드러내려고 한다. 사실 그 셋은 배치되지 않는다. 사건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면 세 가지를 다 섭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빙의라는 무속 용어는 사회학에서 해석비판을 위한 방법론이 된다. 심리학과 자기개발서들이 애용하는 감정이입이나 공감도 굿판의 빙의와 비슷한 말이다. 일상에서 쓰는 입장 바꾸기(switching shoes)”와 크게 다르지 않은 말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콘도 도미오 선생에게 빙의를 시도했다. 그는 남익삼씨의 참배묘가 발견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어떤 느낌, 어떤 생각이었을까?

 

2020223일 콘도 선생은 다카라즈카 시립중학교 교원 시절 동료였던 다이꼬꾸 스미애(大黑澄枝) 선생의 전화를 받았다. “조선인 노동자 3명의 참배묘가 타마세의 만푸쿠지(滿福寺)에 마련되어 있고, 부녀회와 사찰이 1백년 넘게 제사를 드려왔다는 것이었다. 다이꼬꾸 선생이 교원 시절의 제자였던 아다치 유리(足立有里)씨의 메시지를 콘도 선생에게 전달한 것이다.

 

아다치 유리씨는 만푸쿠지의 5대 주지 아다치 타이쿄(足立泰敎)씨의 부인이고, 자신도 아다치 치쿄(足立智敎)라는 승명(僧名)으로 4대 주지를 역임한 바 있다. 그는 역대 주지 스님들을 통해 자신에게 전해 내려온 이야기를 다이꼬꾸 선생을 거쳐 콘도 선생에게 전달한 것이다.

 

 

참배묘가 타마세의 만푸쿠지에 있다는 소식은 콘도 도미오 선생에게 놀라운 충격이었을 것이다. 정홍영-콘도 도미오 조사팀은 1986년 가을 타마세에서 세 조선인 희생자의 매장묘터를 발견한 바 있었다. 이어서 이들의 참배묘를 찾기 위해 니시타니의 묘지와 사찰을 샅샅이 조사했으나 찾아내지 못했다고 했다.

 

이것은 다소 의문이다. 매장묘가 타마세에 있었다면, 참배묘도 그 인근에 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추론될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 두 사람은 타마세에서 참배묘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일까? 만푸쿠지가 조사에서 누락되었던 것일까? 혹은 조사했지만 발견하지 못했던 것일까?

 

어떤 경우라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아마도 콘도 도미오 선생은 그때 왜 만푸쿠지를 더 세밀히 조사하지 않았던가하는 회한을 가졌을 법하다. 그때 참배묘를 발견했더라면 추도비는 더 일찍 세워질 수도 있었고, 정홍영 선생도 소원이던 추도비 건립을 본 후 타계하셨을 것이다.

 

 

다른 한편, 콘도 도미오 선생은 뒤늦게나마 참배묘가 발견된 것을 다행으로 여겼음에 틀림없다. 정홍영 선생이 타계하신 뒤로 20년이나 더 찾았던 참배묘가 우연한 기회로나마 발견된 것은 얼마나 반가운 일이었겠는가. 더구나 추도비 건립 직전이어서 때가 좋았다. 다섯 명의 희생자의 이름을 한꺼번에 추도비에 새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년 후 콘도 도미오 선생이 타계하신 것을 생각하면 이때의 발견은 더욱 의미 있는 일이었다. 이 발견 덕분에 정홍영-콘도 도미오 조사팀은 자신들이 스스로 선택한 사명을 35년 만에 완수하고 세상을 떠난 셈이 되었다.

 

 

또 콘도 도미오 선생은 만푸쿠지의 아다치 타이쿄와 아다치 치쿄 부처, 그리고 동료 다이꼬꾸 스미애 선생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정홍영 선생과 자신은 매장묘터를 밝히는 데 그쳤지만, 이들의 도움으로 참배묘까지 찾은 것이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2020223일 만푸쿠지의 참배묘 소식을 들은 콘도 도미오 선생이 이렇게 회한안도감사의 복합적인 감정에 휩싸여 감개무량했었을 것임을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2022/9/13,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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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鴻永-近藤富男研究チームが神戸水道工事朝鮮人殉難者3埋葬墓地発見したのは1986年初秋のことだった1914-1915金炳順(キム·ビョンスン)南益三(ナム·イクサム)張長守(チャン·チャンス)がトンネル落盤事故犠牲になって70ぎただったしかし調査はそこで袋小路にぶつかりこれ以上進められなかった

 

参拝墓用意されたと推定した2地元のお過去帳調べたり墓地をまわつて墓石無縁仏してみたりしたがどうしてもそれらしい場所確認す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たが3参拝墓つからなかった

 

らの参拝墓発見されたのはそれから35ぎた2020223だった1929年福知山線鉄道工事死亡した尹吉文(ユン·ギルムン)吳伊根(·イグン)える追悼碑建立準備大詰めをえた玉瀬仏教寺院満福寺から連絡これについて近藤富男先生、『むくげ通信3002020531)』寄稿した文章以下のようにべた

 

 

今年2020223このにもかかれていない重大なはなしがもたらされた西谷玉瀬にある満福寺のかたからだったおそらく100 年以上にわたって地域婦人会朝鮮慰霊をしているが婦人会高齢化人数なくなってそろそろおしまいにしたいとおもっているついてはこのたちはどういうだったのかりたいというものであった電話であらましをきいてすぐ訪問約束をし26にうかがってくわしくおはなしをきいた

 

毎年824、『無縁さんをつづけてきた住職婦人会会員無縁仏さんと三界萬霊手向盆菓子々お線香めてきたおそらく100ぐらいがれてきているうちにその意味合いがただしくつたわらなくなっていた以前先住職さんは武田尾のトンネル爆破工事くなった朝鮮人っているとおっしゃっていたということであった

 

おはなしのあと現場案内してくださり菓子をそなえておをあげてくださったわたしが今年3 26 追悼する建立しますとつたえるとこれまで自分たちがつづけてきた慰霊気持ちをうけついでいただけると大変よろこんでくださったそしてなんと完成するわたしたちよりもはやく住職夫婦現地法要をおこなってくださった」。

 

 

近藤富男先生満福寺から重大なはなしっただけでがどのような方法連絡してきたのかはべなかったところがこれは大黑澄枝先生じてであったことが最近明らかになった大黑澄枝先生ってくださったカカオトークのメールでこうった

 

20202、教え子満福寺足立有里さんから玉瀬婦人会100年以上期間ったのですがもう中断したいという提案があります相談したらいいですか?」という電話近藤富男先生連絡しました326建設予定だった追悼碑神戸水道工事犠牲になった3えることになりましたとても劇的記念すべきことでした」。

 

大黑澄枝先生近藤富男先生とともに宝塚市立中学校教師満福寺足立有里さんは大黑澄枝先生だった僧侶となった足立有里さんは僧命足立智教めた満福寺4代住職として足立智教さんが婚姻した足立泰教さんが5代住職として在職中

 

 

3朝鮮人参拝墓100年以上維持しながら祭祀してきた満福寺事情しくなると足立智教さんは師匠大黑澄枝先生相談大黑澄枝先生はこのらせを宝塚同僚活動家近藤富男先生らせたのだ

 

1986年秋鄭鴻永先生とともに3朝鮮人埋葬墓跡した近藤富男先生ついに足立智教さんと大黑澄枝先生けでらの参拝墓再発見されたのだ埋葬墓跡発見されて35ぶりの再発見だった。 (2022/9/12趙正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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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영-콘도 도미오 연구팀이 고베 수도공사의 조선인 순난자 3인의 매장묘터를 찾아낸 것은 1986년 초가을이었다. 1914-1915년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가 터널 낙반 사고로 희생된 지 약 70년이 지난 후였다. 그러나 조사는 거기서 막다른 골목에 부딪혀 더 진행되지 못했다.

 

참배묘가 따로 마련되었을 것으로 추정한 두 사람은 지역 사찰의 과거 기록을 뒤지고 묘지를 돌아보면서 묘비나 무연고 묘소를 찾아보았지만 세 사람의 참배묘는 찾을 수 없었다.

 

 

이들의 참배묘가 발견된 것은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2020223일이었다. 1929년 후쿠치야마선 철도공사에서 사망한 윤길문, 오이근씨를 기리는 추도비 건립 준비가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때, 타마세의 불교사찰 만푸쿠지(満福寺)에서 연락이 왔다. 이에 대해 콘도 도미오 선생은 <무쿠게 통신(300, 2020531)>에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올해 2020223일 아침, 정홍영 선생의 책에도 서술되지 않은 중대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니시타니의 타마세(玉瀬)에 있는 만푸쿠지(満福寺)에서 온 소식이다. 100년 이상 사찰과 지역 부인회에서 조선인들을 위령하고 있는데, 부인회도 고령화되고 인원수도 줄어들어 이제 그만 마무리를 지으려 한다는 말씀이었다. 다만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 전화로 대략 방문 약속을 하고 26일에 절에 찾아가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만푸쿠지에서는 매년 824일 아침 무연고 참배를 계속해 왔다. 주지 스님과 부녀회원이 무연불(無縁仏)씨와 삼계만령(三界萬霊)에게 꽃과 쟁반 과자를 바치고 각각 향을 피우며 영혼을 위로해 왔다. 아마도 100년 정도 계승되어 오는 동안에 그 의미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선대 주지 스님이 옛날 타케다오의 터널 폭파 공사로 사망한 조선인들을 추도하고 있다는 말씀이 계셨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나눈 후에 (주지 스님이) 현장을 안내해 주시고, 꽃과 과자를 갖추어 불경을 외워 주셨다. 금년 326일에 다카라즈카의 조선인을 추도하는 비를 건립한다고 전하자, 지금까지 자신들이 계속해 온 위령의 마음도 이어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면서 몹시 기뻐해 주셨다. 그리고 놀랍게도 추도비가 완성되는 날 아침 만푸쿠지의 주지 내외분이 우리보다 일찍 현지를 찾아 추도비 앞에서 법요(法要)를 지내 주셨다.”

 

 

콘도 도미오 선생은 만푸쿠지에서 온 중대한 소식이라고 하셨을 뿐, 누가 어떤 방법으로 연락해 왔는지는 서술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는 다이꼬꾸 스미애(大黑澄枝) 선생을 통해서였음이 최근에 밝혀졌다. 다이꼬꾸 스미애 선생은 내게 보내신 카톡 문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20202월 제 제자인 만푸쿠지의 아다치 유리(足立有里)씨로부터 저에게 타마세 부인회에서 100년이 넘는 기간을 제사했는데 이제 중단그만하고 싶다는 제의가 있습니다. 누구에게 상담하면 좋습니까?’라는 전화가 와서 콘도 도미오 선생님에게 연락했습니다. 326일 건립 예정이었던 추도비에 고베 수도공사에서 희생된 3명의 이름을 더해 새기게 되었습니다. 굉장히 극적이고 기념할만한 일이었습니다.”

 

다이꼬꾸 스미애 선생은 콘도 도미오 선생과 함께 다카라즈카 시립중학교의 교사로 근무하셨고, 만푸쿠지의 아다치 유리씨는 다이꼬꾸 스미애 선생의 제자였다. 졸업 후 승려가 되신 아다치 유리씨는 승명(僧名)을 아다치 치쿄(足立智教)로 정하셨고, 아다치 다이쿄(足立泰教)와 결혼해 만푸쿠지의 3대 주지부부로 재직 중이셨다.

 

 

세 조선인의 참배묘를 1백년 이상 유지하며 제사해 오던 만푸쿠지의 사정이 어려워지자 아다치 치쿄씨는 스승인 다이꼬꾸 스미애 선생님께 상의해 왔고, 다이꼬꾸 스미애 선생님은 이 소식을 다카라즈카의 동료 활동가 콘도 도미오 선생님에게 알려주셨던 것이다.

 

1986년 가을 정홍영 선생님과 함께 세 조선인의 매장묘터를 찾아내셨던 콘도 도미오 선생은 마침내 아다치 치쿄씨와 다이꼬꾸 스미애 선생님의 도움으로 그들의 참배묘도 재발견하신 것이다. 매장묘터가 발견된 지 35년 만의 재발견이었다. (2022/9/12,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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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1915年神戸水道工事犠牲になった3朝鮮人労働者する鄭鴻永(チョン·ホンヨン)先生記録玉瀬埋葬墓確認してわった

 

鄭鴻永先生らが間違いなく西谷のどこかにめられているはずであつた確信しながら地元のお過去帳調べたり墓地をまわつて墓石無縁仏してみたりしたがどうしてもそれらしい場所確認す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たが以後朝鮮人労働者行跡つからなかったとした

 

その鄭鴻永-近藤富男先生兵庫県在日朝鮮人歴史再構成するための研究邁進10にわたる研究結果歌劇のもうひとつの歴史:宝塚朝鮮人(1997)という出版された

 

 

宝塚朝鮮人3部構成となっている112研究結果報告書215鄭鴻永先生がインタビューした在日朝鮮人115証言3には調査過程確保した資料年表収録した西谷朝鮮人労働者11収録されたことからこれが鄭鴻永-近藤富男調査研究チームの最初調査研究だったとられる

 

この関西在日朝鮮人史研究者歓迎された力著だが一般にはあまり注目されないままれられ初版発行後絶版となった筆者絶版になったこのむことができたのは幸運だった鄭鴻永先生長男である伊丹居住写真家鄭世和先生自分所蔵本特送郵便ってくれたためだ

 

筆者鄭世和先生ったのは2019年崔承喜(チェ·スンヒ)先生日本公演調査するために関西地域訪問しただったちょうど大阪かれた<在日朝鮮学校中央芸術競演大会>参観したがその会場行事記録担当していた鄭世和先生った

 

すぐしくなったたちはあらゆるわした. 崔承喜先生調査研究をし鄭世和先生朝鮮学校をしてくれた。 「宝塚朝鮮人追悼碑がまもなく建立されるというめていたのもその鄭世和先生からだった

 

 

鄭世和先生紹介真銅敏之先生にも近藤富男先生にもったこの々は鄭世和先生父親鄭鴻永先生とともに兵庫在日朝鮮人調査研究踏査旅行参加した々だった

 

近藤富男先生20001鄭鴻永先生他界した朝鮮関係研究けた韓国有機農学校給食とハングル用例研究した<むくげ通信>長期連載されたりもしたしかしよりも宝塚水道鉄道工事犠牲になった朝鮮人労働者のための追悼碑てたいという鄭鴻永先生遺志れなかった

 

近藤富男先生20にわたり兵庫県大阪府知識人在日同胞活動家たちの努力糾合したついに20203宝塚朝鮮人追悼碑てた神戸水道工事福知山線鉄道工事犠牲になった5朝鮮人労働者のための追悼碑だった<むくげ通信>20205月号寄稿した近藤富男先生追悼碑建立するやいなやその鄭鴻永先生けつけ追悼碑建立報告をしたいた

 

 

本来追悼碑福知山線鉄道工事死亡した2朝鮮人労働者のために建設される予定だったところが追悼碑建立直前20202近藤富男先生宝塚玉瀬仏教寺院滿福寺大京足立住職から電話けた3朝鮮人労働者参拝墓滿福寺境内けられており玉瀬婦女会とともに100年以上彼らに無縁故者として祭祀ってきたというだった

 

これに近藤富男先生追悼碑建立関係者たちと当初2のために建立しようとした追悼碑5人追悼碑変更同年326日追悼碑建立えた鄭鴻永先生他界して20鄭鴻永-近藤富男調査研究チームが神戸水道工事殉難者たちを調査めて35ぶりのことだった。 (2022/9/7趙正熙(チョウ·ジョン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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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1915년 고베수도 공사에서 희생된 3인의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정홍영 선생의 기록은 타마세의 매장묘를 확인하면서 끝났다. 정홍영 선생님은 이들이 틀림없이 니시타니 어딘가에 묻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이 지역 사찰의 과거 기록을 뒤지고 묘지를 돌아보면서 묘비나 무연고 묘소를 찾아보았지만 이후 조선인 노동자들의 행적은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이후 정홍영-콘도 도미오 선생은 효고현의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한 다른 연구에 매진했고, 10여년에 걸친 연구 결과는 정홍영 선생의 <가극의 거리의 또 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다카라즈카와 조선인>3부로 구성되었다. 1부의 12개 장()은 연구 결과 보고서, 2부의 15개 장은 정홍영 선생이 인터뷰한 재일 조선인 115명의 증언이다. 3부에는 조사과정에서 확보한 자료들과 연표를 수록했다. 니시타니의 조선인 노동자 이야기가 11장에 수록된 것으로 보아, 이것이 정홍영-콘도 도미오 조사연구팀의 첫 번째 조사연구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간사이 지역의 재일조선인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환영을 받은 역저이지만, 일반에는 큰 주목을 끌지 못한 채 잊혀 졌고, 책도 초판을 발행한 후 절판되었다. 필자가 절판된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정홍영 선생님의 장남이신 이타미 거주 사진가 정세화 선생이 자신의 소장본을 특송 우편으로 보내 주셨기 때문이다.

 

필자가 정세화 선생을 만난 것은 2019년 최승희 선생의 일본 공연을 조사하기 위해 간사이 지역을 방문했을 때였다. 때마침 오사카에서 열린 <재일조선학교 중앙예술경연대회>를 참관했는데, 그 대회장에서 행사 기록을 담당하셨던 정세화 선생을 만났다.

 

빠르게 친해진 우리는 온갖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주로 최승희 선생 조사연구 이야기를 했고 정세화 선생은 조선학교 이야기를 해 주셨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곧 건립된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것도 그때 정세화 선생님으로부터였다.

 

 

정세화 선생의 소개로 신도 도시유키(真銅敏之) 선생도 만났고 콘도 도미오(近藤富男) 선생님도 알게 되었다. 이분들은 정세화 선생의 부친 정홍영 선생님과 함께 효고현의 재일조선인사 조사연구나 답사여행에 동참하신 분들이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20001월 정홍영 선생님이 타계하신 후에도 조선관계 연구를 계속하셨다. 한국의 유기농 학교 급식과 한글 용례를 연구하신 글은 <무쿠게 통신>에 장기 연재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도 다카라즈카의 수도, 철도공사에서 희생된 조선인 노동자들을 위한 추도비를 세우고 싶다는 정홍영 선생님의 유지를 잊지 않으셨다.

 

콘도 도미오 선생은 약 20년에 걸쳐 효고현과 오사카부의 지식인과 재일동포 활동가들의 노력을 규합한 끝에 마침내 20203<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세웠다. 고베수도공사와 후쿠치야마선 철도공사에서 희생된 5인의 조선인 노동자를 위한 추도비였다. <무쿠게 통신> 20205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콘도 도미오 선생은, 추도비를 건립하자마자 그길로 정홍영 선생의 묘소로 달려가 추도비 건립을 보고드렸다고 썼다.

 

 

원래 추도비는 후쿠치야마선 철도공사에서 사망한 2인의 조선인 노동자를 위해 건립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추도비 건립 직전인 20202,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다카라즈카 타마세의 불교 사찰 만푸쿠지(滿福寺)의 주지 타이쿄 아다치 스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3인의 조선인 노동자의 참배묘가 만푸쿠지 경내에 마련되어 있고, 타마세 부녀회와 함께 1백년이 넘게 이들에게 무연고자 제사를 드려왔다는 말씀이었다.

 

이에 콘도 도미오 선생은 추도비 건립 관계자들과 의논해 당초 2명을 위해 건립하려던 추도비를 5인 추도비로 변경했고, 그해 326일 추도비 건립을 마쳤다. 정홍영 선생님이 타계하신지 20, 정홍영-콘도 도미오 조사연구팀이 고베수도공사 희생자들을 조사하기 시작한지 35년만의 일이었다. (2022/9/7,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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