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희PD의 최승희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253건

1926326石井舞踊団大邱テグ公演するリサーチは崔承喜朝鮮地方公演最初だったこの調査のために事前準備もたくさんし努力もたくさんけた原稿用紙120上回文章くようになったのを私自身いた一度公演についてけることがこんなにいとはわなかったからだ

 

大邱調査一段落させてからも不十分さがじられるのは仕方がないまだもっとらかに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がいからだ自分能力勤勉性けていた部分もあったが切実なのは資料不足だったあんなに一生懸命探したのに必要資料てこなくて残念だった今回大邱調査場合大邱近代歴史館大邱市立中央図書館所蔵する古新聞られなかった

 

崔承喜リサーチをしながらどんなテーマであれ六何するえをす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れば満足度があってもそれによってリサーチはいったん成功した調査だとえるようになったそのような今回大邱公演のリサーチは32程度成功した調査

 

1926年3月、京城公演で『囚はれたる人(1922)』を熱演した石井漠(左)は淑明女学校卒業生崔承喜(右)を新入団員として受け入れた。

 

まずらかにすることに完全成功しなかった当時満州-朝鮮巡回公演16石井舞踊団員だったのか完全解明できなかったそれさえも舞踊家4名前経歴らかにしたこととピアノ伴奏者舞踊団内部のマネージャーをらかにしたことが成果なら成果だったバイオリンの伴奏者だったかさえもっとっていたら満足度相当高くなっていたはずだりの人物照明音響舞台担当などを担当したスタッフ構成員だったはずだらは文献によくれない傾向がある.

 

じだった石井舞踊団大邱公演した作品21ることはできたがそのでどの作品<大邱劇場>舞台実際上演されたのか特定化す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上演するかどうか確信できないまま各作品詳細調査するのがむなしくじられそこで今回上演された事実かなめられた(1922)1作品だけをもうしく調査して整理した

 

いつどこでらかにできた1926326日午後6<大邱劇場>でだった大邱劇場位置せる当時地図今日地図確保したのはくなかった当時の大邱劇場の写真をもっとたくさん発見していたらもっと良かっただろう。

 

1926年3月26日、石井舞踊団の公演が行われた<大邱劇場>の様子。 崔承喜が舞踊団員となって訪れた最初の劇場でもある。

 

ほとんどの調査では'どのようにどうやってなぜ重要調査項目であるが今回大邱公演調査ではそのはほとんどらかだった舞踊団員たちがどのように移動、「どのように時間ごし、「どのように公演をしたかはまかにらかにすることができたらが大邱公演をした理由自明観客新舞踊ファン入場料収入げるためだった

 

大邱公演場合石井舞踊団入場料収入重要だった1926年満州-朝鮮巡回公演目的だったからだ石井漠1925年武蔵境2階建ての洋館から舞踊研究所建物新築したがその建築費さ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この問題さらに調査する必要があるため大邱公演調査結果にはめなかったおそらく大邱公演以前京城公演調査結果整理するめるとよいだろう

 

石井舞踊団19263朝鮮巡回公演であげた最大成果崔承喜発掘したことだ京城公演最終日323石井漠れた崔承喜はすぐ入団許可26大邱公演彼女舞踊団一員として参観した最初公演だったこの崔承喜心境感想ることができればいいがそのような内容資料はまだ発掘されていない

 

<大邱座=大邱劇場>があった1920年代の大邱東城町の街の風景。

 

大邱公演以降崔承喜石井舞踊団328-29釜山公演んだのでのリサーチは釜山での調査になるべきである

 

釜山公演わった翌日330石井舞踊団新入団員崔承喜一緒玄海灘って日本った崔承喜参観わり舞踊留学本格的まったのである(*)

 

,

1926326일의 이시이무용단 대구공연 리서치는 최승희의 국내 지방공연 중에서 첫 번째였다. 준비도 많이 하고 노력도 꽤 기울인 조사였다. 원고지로 120매를 웃도는 글을 쓰게 된 것을 보고 나 자신도 놀랐다. 한 번의 공연에 대해 쓸 것이 이렇게 많은지 몰랐기 때문이다.

 

대구조사를 일단락 짓고 나서도 미진함이 느껴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아직도 밝혀야 할 것이 많음을 알기 때문이다. 내 능력이나 부지런함이 모자라서 생긴 구멍도 있지만, 가장 절실했던 것은 자료부족이었다. 그렇게 찾아다녀도 필요한 자료가 나타나지 않아 무척 안타까웠다. 이번 대구조사의 경우 <대구근대역사관><대구시립중앙도서관>의 고신문을 열람할 수 없었던 것이 가장 아쉬웠다.

 

최승희 리서치를 하면서 어떤 주제이든 ‘6(六何)’에 대한 대답을 내놓을 수 있게 되면, 만족도에 차이가 있더라도, 그 리서치는 일단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조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이번 대구공연 리서치는 3분의2쯤 성공한 조사이다.

 

1926년 3월, 경성공연에서 <갇힌 사람(1922)>을 열연했던 이시이 바쿠(왼쪽)는 숙명여학교 졸업생 최승희 (오른쪽)를 신입단원으로 받아들였다.

 

우선 누가를 밝히는 데에 완전히 성공하지 못했다. 당시 만주공연을 마치고 조선순회공연에 나섰던 16명의 이시이무용단원이 누구였는지 완전히 밝혀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무용수 4명의 이름과 경력을 밝혀낸 것과 피아노 반주자와 무용단 내부 매니저를 알아낸 것이 성과라면 성과였다. 바이올린 반주자가 누구였는지만 더 알아냈으면 만족도는 꽤 많이 높아졌을 것이다. 나머지 인물들은 조명과 음향, 무대담당 등을 담당한 스탭 구성원들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름은 대개 문헌에 잘 나타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무엇을도 마찬가지였다. 이시이무용단이 대구에서 공연했던 작품을 21개로 좁혀놓을 수는 있었지만 그중에서 어떤 작품이 <대구극장> 무대에서 실제로 상연되었는지 특정화할 수는 없었다. 상연 여부를 확신하지 못한 채 각 작품에 대한 세부사항을 조사하는 것이 허망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이번에는 상연되었던 사실이 확실한 <갇힌 사람(1922)>의 한 작품만 조금 더 자세히 조사해서 정리했다.

 

언제어디서는 밝힐 수 있었다. 1926326일 오후6<대구극장>에서였다. 대구극장의 위치를 보여주는 당시의 지도와 오늘날의 지도를 확보한 것은 나쁘지 않았다. 당시의 대구극장 사진을 더 많이 찾아낼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1926년 3월26일, 이시이무용단의 공연이 열렸던 <대구극장>의 모습. 최승희가 무용단원이 되어 방문한 최초의 극장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다른 조사에서는 어떻게가 가장 중요한 조사항목이지만 이번 대구공연 조사에서는 그 점은 거의 자명했다. 무용단원들이 어떻게이동했고, ‘어떻게시간을 보냈고, ‘어떻게공연을 했었는지는 대략 밝혀낼 수 있었다. 그들이 대구에서 공연을 한 이유는 자명하다. 관객을 얻어 신무용의 층을 넓히고, ‘입장료 수입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대구공연의 경우 이시이무용단에게 입장료 수입이 특히 중요했다. 1926년 만주-조선순회공연의 주요 목적이 이었기 때문이다. 이시이 바쿠는 1925년 무사시사카이(武蔵境)2층 양옥으로 무용연구소 건물을 새로 건축했는데, 그 건축비를 갚아야했던 것이다. 이 문제는 더 조사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대구공연 조사결과에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아마도 대구공연 이전의 경성공연 조사결과를 정리할 때 포함시키면 더 좋을 것이다.

 

이시이무용단이 19263월의 조선순회공연에서 올린 최대의 성과는 최승희를 발굴한 것이다. 경성공연 마지막 날인 323일 이시이 바쿠를 찾아간 최승희는 바로 입단 허락을 받았고, 26일의 대구공연은 최승희가 무용단의 일원으로 참관한 최초의 공연이었다. 이때 최승희의 심경과 감상을 알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 같은 내용을 보여주는 자료는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대구좌=대구극장>이 있었던 1920년대의 대구 동성정의 거리 모습.

 

대구공연 이후 최승희와 이시이무용단은 328-29일의 부산공연에 임했으니, 다음 리서치는 부산 조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부산 공연이 끝난 다음날인 330일 이시이무용단은 신입단원 최승희와 함께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돌아갔다. 최승희의 참관은 끝나고, 무용유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

,

193689孫基禎ソン·ギジョン南昇龍(ナム·スンリョンがベルリン五輪のマラソン競技勝利した日本にとってはメダルとメダルを追加メダル集計総合8になった愉快事件であり日本合併された朝鮮にとっては民族気概誇示自主独立希望再確認させた快挙であった

 

孫基禎優勝のニュースを崔承喜チェ·スンヒはどうやってったある評伝によると810日午前129ごろ崔承喜安漠(アン·マク)とともに東京永楽町自宅からラジオ中継じて、「孫基禎1南昇龍3というニュースをいたという

 

評伝ラジオをきながら台所仕事をしていた崔承喜孫基禎南昇龍勝利えるとやっていたことをやめのふたをってをたたくようにきながらったった数日後崔承喜東京ラジオ放送出演日本ってうれしいしかし朝鮮人ってくれてもっとしいしたとえた

 

1936年8月9日、ベルリン五輪マラソンで1位と3位に入賞した孫基禎(右)と南昇竜(左)

安幕-崔承喜夫婦がそのリアルタイム中継放送いたというのは本当だったのだろうかチェ·スンヒがラジオ番組出演、「朝鮮々がってくれてさらにしいという当時としては危険かもしれない発言にしたのは事実だろうか

 

これらの疑問かす文献発見された日本女性雑誌婦人倶楽部193610月号だったこの雑誌には漫画家和田邦坊1899-1992崔承喜にインタビューして作成した記事った日本中学·高校歴史教科書るほど有名成金風刺漫画作家和田国保くて崔承喜さしてこのならってもいだろうな崔承喜いわよ孫選手だってどうです自慢したという

 

いて和田邦坊孫基禎選手彼女仲良しであったらかにし孫選手快挙のおかげで彼女鼻息したそして彼女言葉をこのようにえた。 「内地つより妾何倍しいですわ朝鮮生まれの全日本めにいたなんてこんな愉快なことはありませんこれにして和田邦坊郷土愛だなえた

 

1936年10月号の「婦人倶楽部」には崔承喜にインタビューした和田邦坊の記事が載っている。

 

崔承喜婦人倶楽部発言評伝引用した東京ラジオ発言とは語感がかなり。 「朝鮮人ではなく朝鮮まれたという表現使、「日本日本帝国ではなく全日本のためという言葉っていた

 

つまり崔承喜いたいことは全部言いながらも問題ける準備もしていたのだたような発言がラジオ放送雑誌のインタビューに使われていたのは質問事前予想して回答準備していたにいない何度予行練習をしたかもしれない

 

また、「後進クラブ記事には、「崔承喜午前1時半にラジオ放送いたという主張疑問げかける内容っている崔承喜和田邦坊対話

 

あのさんがったラジオいていてわずコドモをりつぶしたのよ/ ! 子供って?/ のコドモ/ ?/ ええしたの/ やれ安心した子供したというからまた彼女一粒種本当にやったのかとったなるほどならのコドモにいない」。

 

 [世紀の美人舞踊家 崔承喜(1994)」に掲載された孫基禎と崔承喜の写真

 

和田邦坊滑稽みたがそれとはこの記事崔承喜孫基禎選手勝利いたのがそのだったことをしているおそらく朝食支度をしながらニュースをいていたのだろう当時中継技術不足していた12時以後放送がなかったため地球反対側のマラソン試合中継をリアルタイムでくことができなかった

 

和田邦坊孫基禎崔承喜仲良宣言したのも意外だった2実力があり人気のある朝鮮人という共通点だけで、「仲良とはえなかったはずだ2東京時代実際交流をしていたにいないこれを証明するかのように写真集世紀美人舞踊家崔承喜には孫基禎崔承喜んでった写真っている(*)

,

193689일 손기정과 남승룡이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 경기에서 승리했다. 일본에게는 금메달과 동메달을 추가해 메달집계에서 종합 8위에 오르게 한 유쾌한 사건이었고, 일본에 합병되었던 조선에게는 민족의 기개를 과시하고 자주 독립의 희망을 다시 일깨워준 쾌거였다.

 

손기정의 우승 소식을 최승희는 어떻게 맞았을까? 한 평전은 810일 새벽 129분경 최승희가 남편 안막과 함께 도쿄 에이후쿠초(永樂町) 자택에서 라디오 중계를 통해 손기정이 1, 남승룡이 3이라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다른 평전은 라디오를 들으며 부엌일을 하던 최승희가 손기정과 남승룡의 승리 소식이 전해지자 하던 일을 멈추고 냄비 뚜껑을 들고 꽹과리를 치듯 두드리며 춤을 추었다고 했다. 며칠 후 최승희는 도쿄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일본이 이겨서 기쁘다. 그러나 조선 사람이 이겨주어서 더욱 즐겁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1936년 8월9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1위와 3위에 입상한 손기정(오른쪽)과 남승룡(왼쪽)

 

안막-최승희 부부가 그날 밤에 실시간 중계방송을 들었다는 것은 사실이었을까? 최승희가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조선 사람이 이겨주어서 더욱 즐겁다라는, 당시로서는 위험할 수도 있었을 발언을 공개적으로 했던 것은 사실이었을까?

 

이 의문들을 풀어주는 문헌이 발견되었다. 일본 여성잡지 <후진구라부(婦人俱樂部)> 193610월호였다. 이 잡지에는 만화가 와다 쿠니보(和田邦坊, 1899-1992)가 최승희를 인터뷰해 작성한 기사가 실렸다. 일본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실릴 만큼 잘 알려진 졸부 풍자만화의 작가 와다 쿠니보는 길고 강한 최승희의 다리를 가리키며 이런 다리라면 달리기도 빠르겠네요.”하고 물었고 최승희는 빠르지요, 손기정 선수하고 라면 어떨까요?”하며 뽐냈다고 했다.

 

이어서 와다 쿠니보는 손기정 선수는 최승희의 절친임을 밝히고 손 선수의 쾌거 덕분에 그녀의 기세가 등등하다면서 최승희의 말을 이렇게 전했다. “내지(=일본) 사람이 승리한 것보다 저는 몇 배나 기뻐요. 조선에서 태어난 사람이 전일본을 위해서 그런 일을 하다니, 이렇게 유쾌한 일은 없습니다.”

 

1936년 10월호의 <후진구라부(婦人俱樂部)>에는 최승희를 인터뷰한 와다쿠니보(和田邦坊)의 기사가 실려있다.

 

최승희의 <부인구락부> 발언은 평전이 인용한 <도쿄라디오> 발언과는 어감이 많이 다르다. “조선인이 아니라 조선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표현을 썼고, “일본이나 일본제국이 아니라 ()일본을 위해서라는 말도 들어가 있었다.

 

, 최승희는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면서도 논란을 피할 준비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비슷한 내용의 발언이 라디오 방송과 잡지 인터뷰에 반복적으로 사용된 것을 보면 사전에 이 질문을 예상하고 답변을 준비해 두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몇 번이고 예행연습을 했을 지도 모른다.

 

<후진구라부> 기사에는 최승희가 새벽 1시 반에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는 주장에 의문을 가질만한 내용도 나와 있다. 다음은 최승희와 와다 쿠니보의 대화이다.

 

나는 그날 아침, 손 선수가 이겼다는 라디오 방송을 듣다 말고 나도 모르게 아기를 붙잡아 으스러뜨려 버렸지요.”/ "! 아기를요?"/ "닭의 아기."/ "닭이요?"/ "그래요, 계란을 으스러뜨렸어요."/ , 안심했다. 아기를 으스러뜨렸다니, 나는 또 그녀의 외동딸을 으스러뜨린 줄 알았다. 과연, 계란이 닭의 아기인 것임에 틀림없다.”

 

<세기의미인무용가최승희(1994)>에 실린 손기정과 최승희의 사진

 

와다 쿠니보는 해학을 시도한 것이지만, 그와는 별도로 이 기사는 최승희가 손기정 선수의 승리 소식을 들은 것이 그날 아침이었음을 보여준다. 아마도 아침식사를 준비하면서 뉴스를 듣고 있었던 것이리라. 당시에는 중계기술도 부족한데다, 12시 이후에는 방송이 없었기 때문에 지구 반대편의 마라톤 중계를 실시간으로 들을 수 없었다.

 

와다 쿠니보가 손기정은 최승희의 절친이라고 선언했던 것도 의외였다. 두 사람이 실력 있고 인기 있는 조선인이라는 공통점만으로 절친이라고 선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은 도쿄 시절 실제로 교류를 가졌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사진집 <세기의미인무용가 최승희>에는 손기정과 최승희가 나란히 찍은 사진이 실려 있다. (*)

,

東京五輪進行中選手たちのヒューマンドラマが続出しているコロナ19仕方ないが2年前から悪化した韓日政府対立五輪韓日首脳会談不発にまでつながり両国市民五輪観覧はそれほどしいものではなさそうだ

 

しかし市民がいつもこのように不便だったわけではないいくら政府対立しても市民はおいの立場理解いすることを同情することに同情しただしくは韓国日本植民地だった時期にもそのようなことがあった

 

19356舞踊家崔承喜チェ·スンヒ朝鮮舞踊公演のため名古屋訪問した当時日本列島五輪熱気名古屋例外ではなかった1936ベルリン夏季オリンピックまではまだ1年以上時間があったが日本りはすでにまっているちょうど1940のオリンピックを東京誘致したため日本市民りをらませた

 

1935年6月10日の<名古屋新聞>7面に載った崔承喜インタビュー記事「民族の表情」の写真

 

コロナ19経済制裁問題韓日間旅行制限される直前名古屋愛知県立図書館<中日新聞>前身である<名古屋新聞>記事つけた1935610日付新聞7掲載されたインタビュー記事だったマイクロフィルム読取機画面記事活字がつぶれて写真もぼやけていたが当時24崔承喜のはつらつとした姿確認することができた

 

当時崔承喜日本人気していた彼女りが日本伝統舞踊近代舞踊ではなく朝鮮舞踊だったにもかかわらず市民たちは歓迎してくれた朝鮮時代舞踊エヘヤ·ノアラ(1933)皮切りに剣舞(1934)僧舞(1934)崔承喜のトレードマークとなっていた

 

同記事作成した匿名記者朝鮮植民地状況崔承喜りの意味をよく理解していた崔承喜舞踊をこのように要約した彼女がユーモラスな交泰朝鮮彼女しく朝鮮。」

 

崔承喜民族伝統美世界新時代紹介したのは意外だった。 「新時代という表現理解できたが崔承喜人気朝鮮日本滞在していたであるそれでも記事民族伝統美世界いた

 

1935年6月10日の<名古屋新聞>7面に載った崔承喜インタビュー記事「民族の表情」の本文

 

この予告現実となった崔承喜1年半後19371229横浜から秩父丸って米国かったそれから3年間崔承喜はヨーロッパと南北米3大陸民族伝統美世界ったとしこの記事予言的中したわけだ

 

記者はまたこの新進朝鮮舞踊家にインタビューし五輪えたりたいという崔承喜言葉引用当時女性としては長身だった54=164センチさを指摘っていたらオリンピック選手になったはずという崔承喜のうきうきした発言したいて記者えたあなたはすでにオリンピックの舞踊家です

 

タイトルを民族表情としたこの記事当時朝鮮植民地状況日本のオリンピックの雰囲気背景崔承喜朝鮮舞踊性格芸術性もうまく表現している

 

この記事んだ読者はどうじたのだろうか日本人市民たちは植民地状況でも朝鮮舞踊公演まない崔承喜応援しただろう日本居住していた朝鮮人たちも民族文化ってくれる彼女らしかったはずだ

 

記事えられた写真崔承喜姿自然躍動的マイクロフィルムで写真背景もぼやけていて衣装見当がつきにくかったが表情だけはるくて力強朝鮮娘だったもしこの写真新聞社のアーカイブに保管されているならその原本たい

 

この記事読者から肯定的反応けたにいないそしてその読者には85年後五輪してこの記事したまれるその時間れにったこのような記事こそのジャーナリズムだと(*)

,

前述のように石井舞踊団員たちの舞踊家はほとんど家族だったところが石井一家ではないダンサーがいた松浦旅人1901-1927だった。 『日本歌劇俳優年鑑1921)』年齢20記録されていることから1901年生まれで1905年生まれの小浪より41911年生まれの栄子崔承喜よりは10年年上だった

 

松浦旅人大阪岩間櫻子舞踊団舞踊めたが、「つややかな美男関西地域人気かった舞踊文学においても卓越していてった短歌好評たというそのような人気えられ演技姿いた絵葉書発行されたりもした

 

松浦帯人1920年夏東京東京オペラ加入座長石井漠んだ。 『東京オペラ1920から北海道東北北陸巡回公演1921には関西山陽九州公演松浦旅人はこれに情熱的参加石井漠力量注目するきっかけとなった

 

松浦旅人(1899-1927)の舞う姿を描いた絵葉書

 

しかし興行よりも芸術性選択した石井漠19215東京オペラ解散192212から19244までヨーロッパとアメリカの巡回公演断行した松浦旅人東京オペラ解散後関西いくつかの活動館じてきたが192111ごろからは東京早稲田劇場余興じてきた

 

欧米巡回公演からってきた石井漠松浦旅人とどのように再会したのかをせてくれる記録つからなかったが松浦旅人19262まった石井舞踊団満州朝鮮巡回公演参加した京城公演初日石井漠一緒舞踊時<明闇>をデュエットで発表3日目児童舞踊<今晩>独舞公演した

 

しかし松浦旅人薄命だった19282発行された石井漠パンフレット2には大阪松竹座公演中肺髄膜炎れてくなったという訃報掲載された30にもならない舞踊家としての存分楽しむ病死したのだ

 

大邱公演石井舞踊団のダンサーは4内部マネージャーの石井八重子とピアニストの保科輝雄わせると6だったところが、『舞踊家石井漠生涯(2006)記録によると当時朝鮮巡回公演参加した舞踊団員16だという

 

 

『日本歌劇俳優名鑑(1921)』に掲載された石井漠(中)、石井小浪(右)、松浦旅人(左)の紹介文

1926年春から地方公演ぎました石井漠舞踊団一行16まず中国満州日日新聞後援大連公会堂において公演った旅順奉天長春吉林2月間巡業しました当時満州には日本人多数移住していてどの公演大盛況でしたその朝鮮りました。」

 

当時マスコミの報道名前言及された舞踊団員6ぎず新入団員崔承喜わせても7だった9団員たちはだったのだろうかまずバイアリン走者がいた崔承喜、「京城公会堂楽屋れたバイオリン伴奏いた回想したためだ

 

それにえて音響照明スタッフがいた劇場によってわる音響調整する専門家1十分だったはずだが照明にはなくとも4人必要だったのだろう当時石井舞踊団公演には左右中央照明がありそこにスポットライトがもうつあったしたがってなくとも4照明技師がいてそのうちの1照明責任者であったはずである

 

武蔵境時代「石井漠舞踊研究所」団員とスタッフ

 

そのほか舞踊団内部管掌していた石井八重子とは巡回公演対外業務管掌していたマネージャーがいた崔承喜入団のため崔承喜父親説得渡航証やかに発給してもらうため松岡京城日報社長訪問したりもした

 

以上計算により16人中13団員役割把握できたしかし3がどのような役割ったのかはまだ確認されていない(*)

,

앞서 보았듯이 이시이무용단원들 중 무용수는 거의 가족이었다. 그런데 이시이 가족이 아닌 무용수가 있었다. 마츠우라 다비토(松浦旅人, 1901-1927)였다. <일본가극배우연감(1921)>에 그의 나이가 20세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그는 1901년생으로 1905년생인 코나미보다 4, 1911년생인 에이코와 최승희보다는 10년 연상이었다.

 

마츠우라 다비토는 오사카의 이와마 사쿠라코(岩間櫻子) 무용단에서 무용을 시작했는데, “윤기 있는 눈을 가진 미남으로 간사이 지역에서 인기가 높았던 그는 무용뿐 아니라 연극과 문학에도 탁월해서 그가 지은 단가는 큰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그 같은 높은 인기에 힘입어 그의 연기 모습을 담은 그림엽서가 발행되기도 했다.

 

마츠우라 다비토는 1920년 여름 도쿄로 옮겨와 <도쿄오페라좌>에 가입하면서 그 좌장이던 이시이 바쿠와 인연을 맺었다. <도쿄오페라좌>1920년 여름부터 홋카이도, 도호쿠, 호쿠리쿠 순회공연을 단행했고, 1921년 봄에는 간사이와 산요, 큐슈 지역에서 공연했는데, 마츠우라 다비토는 여기에 열성적으로 참여했고, 이시이 바쿠가 그의 역량을 눈여겨보는 계기가 되었다.

 

마츠우라 다비토 ( 松浦旅人 , 1899-1927)의 모습을 담은 그림엽서

 

그러나 흥행보다 예술성을 선택한 이시이 바쿠는 19215<도쿄오페라좌>를 해산했고, 192212월부터 19244월까지 유럽과 미주 순회공연을 단행했다. 마츠우라 다비토는 <도쿄오페라좌> 해산 이후 간사이로 돌아가 여러 활동관에서 연기하다가 192111월경부터는 도쿄의 와세다극장(早稲田劇場)에서 여흥을 연기하고 있었다.

 

구미 순회공연에서 돌아온 이시이 바쿠가 마츠우라 다비토를 어떻게 다시 만났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마츠우라 다비토는 19262월 시작된 이시이무용단의 만주와 조선 순회공연에 참여했다. 그는 경성공연 첫날 이시이 바쿠와 함께 무용시 <명암(明闇)>”을 듀엣으로 발표했고, 셋째 날은 아동무용 <오늘밤은(今晩)>을 독무로 공연했다.

 

그러나 마츠우라 다비토는 박명했다. 19282월에 발행된 <이시이바쿠 팜플렛 제2>에는 그가 오사카 송죽좌에서 공연하던 중 폐부수막염으로 쓰러져 사망했다는 부고가 실렸다. 그는 30세도 안 된 나이에 무용가로서의 꿈을 마음껏 피워보기 전에 병사한 것이다.

 

&lt;일본가극배우명감(1921)&gt;에 실린 이시이 바쿠(가운데), 이시이 코나미(오른쪽), 마츠우라 다비토(왼쪽)의 소개문

 

대구 공연의 이시이무용단의 무용수는 모두 4명이었고 내부 매니저 이시이 야에코와 피아니스트 호시나 테루오(保科輝雄)를 합치면 모두 6명이었다. 그런데 <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생애(2006)>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조선 순회공연에 참가한 무용단원은 모두 16명이라고 했다.

 

“1926년 봄부터 지방 공연에 주력했습니다. 이시이 바쿠 무용단 일행은 16명으로 우선 중국에 건너가 만주일일신문의 후원으로 대련(大連) 공회당에서 첫 공연을 한 후 뤼순(旅順), 봉천(奉天), 장춘(長春), 지린(吉林) 등을 2개월 동안 순회 공연했습니다. 당시 만주에는 일본인이 다수 이주해 있어서 어느 공연이나 대만원의 성황이었습니다. 그 후 조선으로 돌아갔습니다.”

 

당시 언론보도에 이름이 언급된 무용단원은 6명에 불과했고 신입단원 최승희를 합쳐도 7명이었다. 다른 9명의 단원들은 누구였을까? 우선 바이얼린 주자가 있었다. 최승희는 경성공회당 분장실을 방문했을 때 바이올린 반주소리를 들었다고 회상했기 때문이다.

 

그에 더해 음향과 조명 스탭이 있었다. 극장에 따라 달라지는 음향을 조정할 전문가는 1명으로 충분했겠지만, 조명에는 적어도 4명이 필요했을 것이다. 당시 이시이무용단의 공연에는 좌우와 중앙의 조명이 있었고 거기에 스포트라이트가 하나 더 있었다. 따라서 적어도 4명의 조명기사가 있어야 했고, 그중의 한명이 조명 책임자였을 것이다.

 

무사시사카이 시절 &lt;이시이바쿠무용연구소&gt; 단원들과 스탭들

 

그밖에 무용단 내부를 관장하던 이시이 야에코와는 별도로 순회공연의 대외업무를 관장하던 매니저가 있었다. 그는 최승희의 입단을 위해 최승희 부친을 설득하고 도항증을 신속하게 발급받기 위해 마츠오카 경성일보 사장을 방문하기도 했었다.

 

이상의 계산을 통해 16명 중에서 13명의 단원들의 역할은 파악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3명은 어떤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이었는지 아직 확인되지는 않은 상태이다. (*)

,

石井舞踊団大邱公演レパートリーにらずになったのが公演団構成だった19263京城キョンソン仁川インチョン)、大邱テグ釜山プサン公演した石井舞踊団何人にのぼり各自役割だったのだろうか石井漠とパートナーの石井小浪新聞でよくじられたがりの団員名前役割しくらかにされなかった

 

しかし石井舞踊団動線報道した新聞記事総合すると朝鮮巡回公演参加した団員想像することができる1926325京城日報石井舞踊団員4明示した

 

本社後援京城かれた3日間新作舞踊大会十分天才発揮した石井漠·八重子夫人·小浪·ピアニストの保科輝雄さんら一行23日朝京城れをしみながら仁川かった

 

崔承喜と同い年の石井英子、彼は14歳で舞踊にデビューして崔承喜に会った時は、すでに満州と朝鮮巡回公演で独舞発表者だった。 石井英子の第1回独舞発表会の番組表紙(左)と石井英子の舞踊の姿を描いた絵(右)

 

石井漠·石井八重子結婚前名前大場八重子仙台郵便局長めた裕福中流階級家庭まれ学校えた記者挿絵画家広告モデルなど活発社会活動をしていた初婚失敗して石井漠再婚した舞踊団世話担当した

 

当時舞踊団構成するためには舞踊団内部のマネージャーと外部公演マネージャーがそれぞれ必要だったようだ石井八重子石井漠浅草オペラ設立したからその内部マネージャーを1924年以降石井舞踊団設立した同様だった

 

一方石井小浪氏石井八重子石井漠義妹だった1905年生まれの石井小浪本名大場千代子だったが石井漠弟子になったことで芸名石井小浪えた

 

19191920日本歌劇俳優名鑑によると小浪西光高等小学校=今日中学校卒業した石井漠指導14日本館でデビューし石井漠経営した浅草オペラ可愛らしい団員だった

 

<若きパンとニンフ>を公演中の石井漠(左)と石井小浪(右)

 

19221石井漠欧州巡回旅行同行した小浪17だった当時状況舞踊家石井聰生涯はこうべている

 

「(石井漠八重子小浪さんをれていくとった。 「ペアの相手必要だがコナミなら十分素質があり出演料わなくてもいい八重子突然戸惑って反対したがはダンスにしては頑固者だった一度切したらかないだったので八重子わざるをなかった」。

 

石井漠出演料節約するため家族のコナミを舞踊パートナーにしたというが小浪はすでに力量のある新舞踊家だった京城公演当時崔承喜よりわずか6歳年上だったがすでに国際的水準舞踊家だったのだ

 

当時石井舞踊団には石井漠家族がもう一人いた石井栄子だった1911年生まれの栄子末妹2年齢差25だった学校卒業した栄子教師看護婦学校進学しようとしたが石井漠舞踊えて弟子とした

 

1927年10月25日付の『京城日報』に掲載された石井舞踊団一行。 左から2番目と3番目が石井漠とその夫人の石井八重子。

 

1926京城公演石井栄子独舞わんぱく小僧じた当時石井舞踊団満州旅順奉天仙陽吉林などで公演えた朝鮮ったので石井栄子16ですでに国際公演経験んでいたのだ

 

6歳年上·小浪栄子崔承喜驚異感とともに自信安堵感える存在だったはずだらは自分よりからすでに舞踊家としてそのせていたにいない. しかしらにって一緒ごし崔承喜結局自分小浪栄子のように卓越した舞踊家になれるという自信たにいない(*)

,

이시이무용단의 대구 공연 레퍼토리 못지않게 궁금했던 것은 공연단 구성이었다. 19263월에 경성과 인천, 대구와 부산에서 공연했던 이시이무용단은 모두 몇 명이나 되었고, 그 각각의 역할이 무엇이었을까? 단장인 이시이 바쿠와 그의 파트너 이시이 코나미는 신문에 자주 보도되었지만, 그 밖의 단원들은 이름과 역할은 밝혀진 바가 없었다.

 

그러나 이시이무용단의 동선을 보도한 신문기사들을 종합하면 조선순회공연에 참가했던 단원들을 짐작해 볼 수 있다. 1926325일의 <경성일보>는 이시이무용단원 4명을 명시했다.

 

본사후원으로 경성에서 열린 3일간의 신작무용시회에서 충분히 천재를 발휘한 이시이 바쿠(石井漠), 야에코(八重子)부인, 그 여동생 코나미(小浪), 피아니스트 호시나 테루오(保科輝雄)씨 등 일행은 23일 아침 경성에 이별을 아쉬워하면서 인천으로 향했다.”

 

최승희와 동갑의 이시이 에이코, 그는 14세에 무용에 데뷔해서 최승희를 만났을 때는 이미 만주와 조선 순회공연에서 독무 발표자였다. 이시이 에이코의 작품집 제1집 표지(왼쪽)과 이시이 에이코의 무용 자태를 그린 그림(오른쪽)

 

이시이 바쿠의 부인 이시이 야에코의 결혼전 이름은 오바 야에코(大場八重子)였고 아버지가 센다이 우체국장을 지낸 부유한 중류층 가정에서 태어나 학교를 마친 후 기자, 삽화가, 광고모델 등으로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었다. 초혼에 실패하고 이시이 바쿠와 재혼한 후 주로 무용단의 안살림을 도맡아 담당했다.

 

당시 무용단을 꾸리기 위해서는 무용단 내부의 매니저와 외부의 공연 매니저가 각각 필요했던 것 같다. 이시이 야에코는 이시이 바쿠가 아사쿠사 오페라단을 꾸릴 때부터 그 내부 매니저를 맡았고, 1924년 이후 이시이무용단을 설립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한편 이시이 코나미(石井小浪)는 이시이 야에코의 여동생으로 이시이 바쿠의 처제였다. 1905년생 이시이 코나미의 본명은 오바 치요코(大場千代子)였으나 이시이 바쿠의 제자가 되면서 예명을 이시이 코나미(石井小浪)로 바꿨다.

 

1919년과 1920년의 <일본가극배우명감>에 따르면 코나미는 서광고등소학교(=오늘날의 중학교)를 졸업한 후 형부인 이시이 바쿠의 지도로 14세에 니혼칸(日本館)에서 데뷔했고, 이시이 바쿠가 운영하던 아사쿠사 오페라좌(オペラ)의 귀염둥이 단원이었다.

 

<젊은 판과 님프>를 공연 중인 이시이 바쿠(왼쪽)와 이시이 코나미(오른쪽)

 

19221월 이시이 바쿠의 유럽 순회여행에 동행했을 때 코나미의 나이는 17세였다. 당시 상황을 <무용가 이시이바쿠의 생애>는 이렇게 서술했다.

 

“(이시이 바쿠는) 야에코의 여동생 코나미를 데리고 간다고 했다. ‘짝을 이룰 상대가 필요한데, 코나미라면 충분히 소질이 있고, 출연료를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야에코는 갑작스런 이야기에 당황해 반대했지만, 바쿠는 춤에 관해서는 고집불통인 사람이었다. 한번 말을 꺼내면 듣지 않는 사람이어서 야에코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시이 바쿠는 출연료를 아끼기 위해 가족인 코나미를 무용 파트너로 삼았다고 했지만, 코나미는 이미 역량 있는 신무용가였다. 경성 공연 당시 최승희보다 불과 6살 연상이었지만, 이미 국제적 수준의 무용가였던 것이다.

 

당시의 이시이무용단에는 이시이 바쿠의 가족이 한 명 더 있었다. 이시이 에이코(石井榮子)였다. 1911년생인 에이코는 바쿠의 막내 동생으로 터울이 25년이었다. 학교를 졸업한 후 에이코는 교사나 간호사 학교에 진학하려 했으나 이시이 바쿠가 무용을 가르쳐 내제자로 삼았다.

 

1927년 10월25일자 <경성일보>에 실린 이시이무용단 일행. 왼쪽에서 2번째와 3번째가 이시이바쿠와 그의 부인 이시이 야에코.

 

1926년의 경성 공연에서 이시이 에이코는 독무 <개구쟁이(わんぱく小僧)>를 공연했다. 당시 이시이무용단은 만주의 뤼순과 봉천, 센양과 지린 등에서 공연을 끝낸 후 조선으로 들어온 것이므로 이시이 에이코는 16세의 나이에 이미 국제 공연 경험을 쌓고 있었던 것이다.

 

6살 연상의 언니 코나미와 동갑내기 에이코는 최승희에게 경이감과 함께 자신감과 안도감을 주는 존재였을 것이다. 자신보다 어린 나이에 이들이 벌써 무용가로 이름을 내고 있었던 것은 분명 놀라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들을 만나 함께 지내면서 최승희는 결국 자신도 코나미와 에이코처럼 탁월한 무용가가 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얻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

,

京城公演最終日石井舞踊団公演観覧した崔承喜文化的衝撃舞踊するたな認識つようになった。『自叙伝(1936)崔承喜はこのように回想している

 

...熱心舞台めているうちにのすべてが強力魅力かれて舞台まれるようにじました.... これまで一度ることもくこともできなかったしく世界めて発見したびをじました」。

 

このような文化的衝撃チェ·スンヒはダンスにするたな理解つようになったこれまで遊興ネタとしてしか認識していなかったりが美的感興える芸術であることにづいたのだ。 『三千里19361月号において崔承喜のように回顧している

 

 

はあのあれはダンスではなく表現するのだろうとったわたしはまでりはうれしくしいときだけるものだとばかりっていた. しかし=石井漠今重くてしいことを表現していた」。

 

崔承喜石井漠舞踊表現しているとじた。『朝光19409月号崔承喜はその自分石井漠舞踊についてこう回想している

 

かったことだが、「というダンスでそして食欲」「われたなどいくつかだかからないほどされまたえさせしくわず正気った」。

 

実際、「しさと石井漠舞踊のテーマだった崔承喜自叙伝(1936)でこのしさとわされた経験のようによりしくしている

 

れるようにしくかれる肉体きとしいのようなメロディーのきにっぱらいのようにうっとりとした世界まれましたしかしそうして一目われたよりもいものがありましたえば石井先生有名作品われたメランコリー」、「ソルベージュののような舞踊れる力強精神さなにうごめいていたこしりなく共感してくれたのです」。

 

山を登る

 

崔承喜表現じたという代表的作品められただったこの作品大邱公演でも上演されたはずである石井漠初期代表作だったからだ

 

石井漠パンフレット1説明によると、『われた1922ヨーロッパ巡回公演中にベルリンで振付され初演されるや好評そのヨーロッパとアメリカの公演かせない人気作であったこの作品石井漠というドイツの文化映画にも出演している

 

われた音楽はラフマニノフのピアノプレリュード(作品番号3)2番曲であったが日本でもこの作品られると日本大衆にこのピアノ題名われたとしてられるようになったこの誤解すために石井漠石井漠パンフレット1原曲はラフマニノフのプレリュードであってわれたではない説明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また石井漠「『われた楽想らかにナポレオンのフランスがモスクワで敗北したことからられたこの舞踊作品主人公がナポレオンであるわけではないらかにしたそれよりも収奪され自由った人間がいかにきな苦痛けることになるかそして自由すことがいかに大切なことか表現した作品だと石井漠えた

 

崔承喜大邱公演われた二回目観覧した京城では素人舞踊観客立場だったが大邱では舞踊団員弟子立場師匠代表作るようになったのだ

 

自分人生方向性めた作品3ぶりにった崔承喜心情はどうだったのだろうか感激しおさまったとしても驚異えたはずだもう自分がああいう作品って公演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ったはずだ崔承喜舞踊授業大邱ですでにまっていたことだ(*)

 

,

大邱地域新聞閲覧不可能だったため石井舞踊団大邱公演するりの関心事すでにらかになっている事実をもとに推測解釈か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になったのは公演のレパートリーだった1926326大邱公演ではどんな作品発表されたのだろうか

 

大邱公演のレパートリーはこれまでらかになったことがない現地新聞では報道されたかもしれないが大邱近代歴史館大邱市立中央図書館では確認できなかった公演者だった石井聰聰観察者崔承喜チェ·スンヒ回顧録にも大邱公演発表作品言及されていなかった

 

しかし大邱公演のレパートリーも京城公演仁川公演のレパートリーとそれほどわなかったと推定された当時舞踊団東京京城1~2新作創作発表会いて都市巡回しながら作品再公演するのが慣行であったからである193267日付毎日新報にものような記事っている

 

1926年3月18日の『朝鮮新聞』に掲載された石井舞踊団の京城公演作品一覧

 

2ぶりに来選京城公会堂空前歓喜けた舞踊隊石井漠一行9日午後7から仁川公会堂新作舞踊公演会京城日報後援開催することになったが"プロ"京城発表したのとじだという

 

つまり193269仁川公演発表曲64-5かれた京城公演レパートリーと同一であるということであるしかし両公演完全じだったと断定するには1926318朝鮮新報石井舞踊団京城公演レパートリーをのようにじた

 

1. 舞踊詩 メランコリー, 2. 舞踊詩 夢見, 3. 舞踊劇 われた, 4. 児童舞踊 わんぱく小僧, 5. 舞踊詩 , 6. 舞踊詩 明闇, 7. 舞踊詩 ソルベイジの, 8. 表現的舞踊詩 マスク, 9. 舞踊詩 つらい, 10. 舞踊詩劇 とニンフ, 11. アンコール日本舞踊』」

 

この作品リストは京城公演まるにマスコミ各社けられたものなのでおそらく321京城初公演のレパートリーだったにいない一方324京城日報京城最後公演(323)作品のように報道しているがこれらの作品崔承喜観覧したものである

 

1926年3月20日の『京城日報』に掲載された石井舞踊団の京城公演作品一覧

 

舞踊詩 たそがれ』、表現派舞踊 奇妙』、児童舞踊 今夜』(山田耕作さん作曲·松浦ダービーと出演)、舞踊詩 あきらめヘブライのメロディ』、無音楽舞踊 習作とその7~8だが石井漠苦心振付した作品因果劇的雰囲気作品」。

 

このリストにタイトルがんだ6作品名前明示されていないその7-8わせると京城最後公演では13-14作品公演されたことになるところが、『自叙伝(1936)朝光(19409月号)寄稿文崔承喜われた』、『メランコリー』、『食欲観覧したと回想したしたがって題名らかにされていない作品3~4であるがこれらも京城初公演作品であったとわれる

 

したがって当時石井舞踊団各公演ですべて作品発表したのではなく公演のレパートリーのうち半分程度えて発表作品変化えていたことがかるこれは相次いで観覧する舞踊ファンへの配慮だろう

 

するに京城3日目公演のレパートリーの6作品初日2日目公演のレパートリーもそれほどの割合っていたら全体レパートリーは21したはずだこの作品プールから石井漠必要じて各公演発表作品選別したのだ

 

このため大邱公演のレパートリーを正確推測することは容易ではなかった21作品のうちどの作品大邱公演のために選定されたのかを判断するのはほとんど不可能だからだこれも追加的資料発掘切実分野(*)

 

,

1934発刊された大邱紹介する冊子大邱案内(1934)によると当時大邱では22新聞雑誌発行されていたが1939には25えた人口10万人1935大邱でこれほどくのマスコミが活動したのはくべきことだ

 

これは大邱人口のうち日本人割合30%以上だったという事実関連があるようだ日本人にはマスコミを設立する財力があり新聞雑誌余裕があったしその必要性もよくかっていたからだろうこれは大邱劇場かった理由ともじる劇場てる財力のある日本人かったし演劇映画しめる余裕のある人口かったからだ

 

その新聞には京城日本主要紙まれていた. 日本新聞では、『大阪朝日新聞大阪毎日新聞支局じて取材活動新聞普及活動ったまた京城朝鮮新聞京城日報などの日本語新聞だけでなく、『朝鮮日報東亜日報』、『時事新聞時代日報中外日報などの朝鮮語発行民族紙支局設置した

 

もちろん大邱本社新聞もあった大邱最初登場した近代新聞大邱日本人会19016創刊した週刊誌達成週報だった大邱府日本人読者のために日本語発行された達成週報4まで発刊されてまもなく廃刊となった

 

その19061大邱日本居留民団有志30民営新聞大邱日報創刊したが2新聞半身不随韓日協約という社説当局によってちに廃刊まれた

 

19063日本人地元朝鮮人有志たちがわせ隔日新聞大邱実業新報創刊したが経営難により翌年(1907)1日本人経営権この発刊周期日刊新聞名大邱新報大邱日日新聞わった。 『大邱新報朝鮮語版日本語版発行されたが日本人読者抗議3二重言語発行をあきらめ、『大邱日日新聞改題した日本語版のみ発行した

 

 

大邱日日新聞総督府施策宣伝重点いただけでなく朝鮮人蔑視する報道民族感情激発させたこれに対抗日本居留民団19089、『大邱時報創刊したが当時慶尚観察使·朴重陽パク·ジュンヤン仲裁により、『大邱日日新聞大邱時報合併同年(1908)10題号大邱新聞改称した

 

一方192410経済新聞大邱商報創刊され192610南鮮経済日報改称され192810には大邱日報創刊されたその、『大邱日日新聞朝鮮民報大邱日報大邱本社地域新聞として発行され1941戦争拡大してきた日本物資不足理由強要した一道一紙言論政策により、『朝鮮民報大邱日日新聞大邱日日新聞統合され解放えるにった

 

したがって石井舞踊団めて大邱公演った19263月現在大邱地域では大邱日日新聞朝鮮民報』、『大邱商報発行されていたなくとも3つの新聞発行されていたこの3つの新聞本格的地域新聞だったので石井舞踊団大邱公演をよりしく取材して詳細報道したものとられ筆者計画した大邱取材でもこの3つの新聞閲覧することが重要だった

 

 

さらに大邱地方版して発行した京城日報朝鮮新聞』、『毎日新報釜山日報』、そして東亜』、『朝鮮』、『中外』、『時事新聞などの民族誌調査する計画であった

 

1926年当時大邱発行された11新聞調査する計画このため2021720-21日大邱れたが計画実現しなかった新聞閲覧できなかったためだ

 

大邱古新聞所蔵する<大邱近代歴史館>学芸員わせたところ筆者閲覧しようとした新聞一部所蔵されてはいるものの電子アーカイブによって構成されていない新聞損傷することが懸念され閲覧られているとのことだった(*)

,

1934년에 발간된 대구 소개 책자 <대구안내(1934)>에 따르면 당시 대구에는 22개의 신문과 잡지가 발행되고 있었다, 1939년에는 그 수가 25개로 늘어났다. 인구 10만 명(1935)의 대구에 이렇게 많은 언론사들이 활동했던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는 대구 인구 중 일본인의 비율이 30%이상이었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일본인들은 언론사를 설립할 재력이 있었고, 신문과 잡지를 읽을 여유가 있었고, 그 필요성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는 대구에 극장이 많았던 이유와도 통한다. 극장을 세울 재력 있는 일본인이 많았고, 연극과 영화를 즐길 수 있는 여유 있는 인구가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신문들 중에는 경성과 일본의 주요 신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신문 중에는 <오사카아사히신문><오사카마이니치신문>이 지국을 통해 취재활동과 신문보급 활동을 벌였다. 또 경성의 <조선신문><경성일보> 등 일본어 신문뿐 아니라 <조선일보><동아일보>, <시사신문><시대일보><중외일보> 등의 조선어 발행의 민족지들도 지국을 설치했다.

 

 

대구에 본사를 둔 매체도 있었다. 대구에서 최초로 등장한 근대 신문은 대구일본인회가 19016월에 창간한 주간지 <달성주보(達成週報)>였다. <달성주보>는 대구부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대상으로 하는 신문으로 일본어판으로 발행되었으며, 등사판으로 제작되던 <달성주보>는 제4호까지 발간되다가 폐간되었다.

 

이후 19061월 대구 일본거류민단 유지 30명이 민영신문인 <대구일보>를 창간했지만, 2호 신문에 반신불수의 한일협약이라는 사설을 실었다가 당국에 의해 곧바로 폐간됐다.

 

19063월 일본인과 지역의 조선인 유지들이 합력해 격일간 신문 <대구실업신보>를 창간했했으나 경영난으로 다음해(1907) 1월 일본인에게 경영권이 넘어갔고, 이때 발간 주기를 일간으로 바꾸고 신문 이름도 <대구신보>를 거쳐 <대구일일신문>으로 바뀌었다. <대구신보>는 조선어판과 일본어판이 함께 발행되었는데 일본인 독자들의 항의로 3개월만에 이중언어 발행을 포기했고, <대구일일신문>으로 제목을 바꾼 후에는 일본어판만 발행했다.

 

 

<대구일일신문>은 총독부 시책의 선전에 치중했을 뿐 아니라 조선인을 멸시하는 보도를 일삼아 민족감정을 격발시켰다. 이에 대항하여 일본거류민단이 19089<대구시보>를 창간했다가, 당시 경상관찰사 박중양의 중재로 <대구일일신문><대구시보>가 합병해 같은 해(1908) 10월 제호를 <대구신문>으로 바꿨고 1912년에는 <조선민보>로 개칭됐다.

 

한편 192410월에 경제신문인 <대구상보>가 창간되어 192610<남선경제일보>로 개칭되었고, 192810월에는 <대구일보>가 창간됐다. 이후 <대구일일신문><조선민보><대구일보>가 대구에 본사를 둔 지역신문으로 발행되다가 1941년 전쟁을 확대해온 일제가 물자부족을 이유로 강요한 일도일지(一道一紙)의 언론정책에 따라 <조선민보><대구일보><대구일일신문>으로 통합되어 해방을 맞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이시이무용단이 첫 대구공연을 가졌던 19263월 현재 대구의 지역 언론으로는 <대구일일신문><조선민보><대구상보>가 발행되고 있었다. 이 세 신문은 본격 지역신문이었으므로 이시이무용단의 대구 공연을 더욱 자세히 취재해 상세하게 보도했을 것으로 짐작되었고, 필자가 계획한 대구 취재도 이 세 신문을 열람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이에 더해 대구에서 지방판을 덧붙여 발행되었던 <경성일보><조선신문>, <매일신보><부산일보>, 그리고 <동아>, <조선>, <중외>, <시사신문> 등의 민족지도 조사할 계획이었다.

 

1926년 당시 대구에서 발행되었던 11개 신문을 조사할 계획을 세웠고, 이를 위해 2021720-21일 대구를 방문했지만,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신문을 열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구의 고신문들을 소장한 <대구근대역사관>의 학예사에게 문의한 결과 필자가 언급한 신문들이 일부 소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전자 아카이브로 구성되어 있지 않은데다가, 종이 신문들은 손상될 것이 염려되어 일반열람은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

,

東京オリンピックが進行中間実力いた選手たちのヒューマンドラマが続出しているがコロナ19無視できない状況政府間経済制裁をめぐってんだ韓日関係のギクシャクした部分っており気楽五輪しむことは容易ではない

 

韓日両国民情緒がいつもこのように不便だったわけではない政府対立して政策いがても市民はおいの立場理解うことを同情することを同情しただしくは韓国日本植民地だった時期にもそのようなことがあった

 

19356舞踊家崔承喜チェ·スンヒ朝鮮舞踊公演のため名古屋訪問した当時日本列島五輪熱気名古屋例外ではなかった1936ベルリン五輪までまだ1年以上時間があったが日本のおりムードはすでにがっていたちょうど1940のオリンピックを東京誘致したため日本人自負心きくなった

 

しかし1940年東京五輪日本政府戦争挑発開催地資格剥奪された19377日本政府日中戦争めたからだった以後オリンピック開催地はヘルシンキに変更されたが19399ヒトラーがポーランドに侵攻ヘルシンキオリンピックまでされた)

 

1935年6月10日の『名古屋新聞』7面に掲載された朝鮮舞踊家崔承喜のインタビュー記事「民族の表情」

 

コロナと経済制裁日韓間旅行制限する直前名古屋市立図書館新聞記事つけたマイクロフィルムの画面れた記事活字がつぶれて写真もぼやけていたが当時24だった崔承喜のはつらつとした姿発見したのはきなやりがいだった

 

1935610名古屋新聞7写真とともに掲載されたこの記事朝鮮舞踊公演のため名古屋訪問したチェ·スンヒのいインタビューだった当時崔承喜2度目日本入以来日本きな人気していた彼女りは日本舞踊でもなく新舞踊でもなく朝鮮舞踊であった。 『エヘヤ·ノアラ(1933)をはじめ、『剣舞(1934)僧舞(1934)崔承喜のトレードマークとして位置づけられている

 

名古屋新聞当時朝鮮植民地状況崔承喜りの意味をよく理解していた記事彼女りをこのように要約した。 「彼女がユーモラスな交泰朝鮮彼女しく朝鮮。」

 

記事崔承喜民族伝統美世界新時代紹介したのは意外だった。 「新時代という表現当然のことだがチェ·スンヒの人気はまだ朝鮮日本まっていたそれでも民族伝統美世界いた

 

名古屋新聞予告はまもなく現実となったチェ·スンヒは同年末から世界巡回公演計画結局1年半後19371229には横浜から<秩父丸>って米国かったそれから3年間ヨーロッパと·北米3大陸崔承喜朝鮮舞踊民族伝統美世界っていたというから名古屋新聞予言的中したわけだ

 

記者はこの新進朝鮮舞踊家にインタビューし五輪かさなかった崔承喜当時女性としては長身だった54=164センチであることをあえてらかにし、「レースをしていたらオリンピック選手になっていたはずというコメントをしたそして記者えた。 「あなたはすでにオリンピックの舞踊家です

 

このインタビュー記事んだ読者はどうじたのだろうか日本人市民たちは不幸植民地状況にもせず朝鮮舞踊公演まない彼女気概応援したはずだ名古屋んでいた朝鮮人植民地母国朝鮮文化いでいく彼女りにっただろう

 

名古屋新聞崔承喜写真躍動的姿でうまくんだがマイクロフィルムで写真背景もぼやけて衣装見当がつかなかったが彼女表情だけはるくて力強朝鮮娘だったもし名古屋新聞のアーカイブに保管されているならこの写真原本をぜひ一度見てみたい

 

名古屋新聞崔承喜直接会ってありのままの事実らかにし読者から肯定的反応した読者には85年後まれるしのこの文章んでくれる皆含まれるだろうはこのような記事本当のジャーナリズムだとえる。 [趙正熙(チョ·ジョンヒ), 獨立PD/崔承喜硏究家]

 

=========================

以下は『名古屋新聞』の記事原文である。

 

 

れちやつたわこゝでんでいくわ九日來名、(?)公會堂舞台稽古をやつての崔承喜さんはにちよツとをおろした。「歡聲こえてくるわねグラウンドからなのりたいなア五尺四寸崔承喜さんがいスタートラインにフオームをつけたら々たる選手であらうまけぎらひでもろくて一途朝鮮娘民族傳統美世界らうとするしい娘彼女がユーモラスな嬌態るとき朝鮮つてゐる彼女がさびしくるとき朝鮮きてゐる無邪氣彼女私走つたらオリムピツク選手になつたわよといふいやいやはすでに立派にオリムピツク舞踊家になつてゐる。(*)

,

도쿄 올림픽이 진행 중이다. 오랫동안 실력을 연마한 선수들의 휴먼드라마가 속출하고 있지만, 코로나19의 검은 그림자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정부간 경제제재를 둘러싸고 냉각된 한일관계의 불편함도 남아 있어서 마음 편하게 올림픽을 즐기는 것이 쉽지는 않다.

 

한일 양국민의 정서가 언제나 이렇게 불편했던 것은 아니다. 정부가 대립하고 정책에 차이가 나더라도 시민들은 서로의 처지를 이해했고, 축하할 것을 축하하고 동정할 것을 동정하곤 했다. 심지어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시기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19356월 무용가 최승희는 조선무용 공연을 위해 나고야를 방문했다. 당시 일본열도는 올림픽 열기로 뜨거웠고, 나고야도 예외는 아니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까지는 아직 1년 이상 시간이 남았지만, 일본의 축제 분위기는 이미 달궈지고 있었다. 때마침 1940년 올림픽을 도쿄에 유치했기 때문에 일본인의 자부심은 한껏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1940년 도쿄 올림픽은 일본 정부의 전쟁 도발로 개최지 자격을 박탈당했다. 19377월 일본 정부가 중일 전쟁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올림픽 개최지는 헬싱키로 변경되었지만, 19399월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헬싱키 올림픽마저 취소되었다.)

 

코로나와 경제제재가 한일간의 여행을 제한하기 직전, 나는 나고야시립도서관에서 신문기사를 하나 발견했다. 마이크로필름 판독기 화면에 나타난 기사는 활자들이 뭉개지고 사진도 흐릿했지만, 당시 24세였던 최승희의 발랄한 모습을 발견한 것은 큰 보람이었다.

 

1935년 6월10일의 <나고야신문> 7면에 실린 조선 무용가 최승희의 인터뷰 기사 "민족의 표정"

 

1935610일의 <나고야(名古屋)신문> 7면에 사진과 함께 실린 이 기사는 조선무용 공연을 위해 나고야를 방문한 최승희의 짧은 인터뷰였다. 당시 최승희는 두 번째로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의 춤이 일본무용도 아니고 신무용도 아닌, 조선무용이었는데도 그랬다. <에헤야 노아라(1933)>를 시작으로 <검무(1934)><승무(1934)>는 최승희의 트레이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나고야신문>은 당시 조선의 식민지 상황과 최승희의 춤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기사는 그녀의 춤을 이렇게 요약했다. “그녀가 유머러스한 교태로 춤출 때 조선이 웃고, 그녀가 쓸쓸히 춤출 때 조선이 운다.”

 

기사가 최승희를 민족의 오랜 전통미를 세계에 자랑하는 신시대의 딸이라고 소개한 것은 조금 의외였다. ‘신시대의 딸이라는 표현은 당연하겠지만, 이 때는 최승희의 인기가 아직 조선과 일본에 머물러 있었을 때였다. 그런데도 민족의 전통미를 세계에 자랑한다고 썼다.

 

나고야 신문의 예고은 곧 현실이 되었다. 최승희는 그해 말부터 세계 순회공연을 계획하기 시작했고, 결국 2년반 후인 19381228일에는 요코하마에서 미국행 배를 탔다. 그로부터 3년 동안 유럽과 남,북미의 세 대륙에서 최승희의 조선무용은 민족의 오랜 전통미를 세계에 자랑하고 있었으니 나고야 신문의 예언은 적중한 셈이다.

 

기자는 이 신진의 조선 무용가를 인터뷰하면서 올림픽 이야기를 빼놓지 않았다. 그는 최승희의 키가 당시 여성으로서는 장신이었던 54(=164센티미터)임을 굳이 밝히면서 달리기를 했으면 올림픽 선수가 됐을 것이라는 멘트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기자가 덧붙였다. “당신은 이미 올림픽 무용가입니다.”

 

이 인터뷰 기사를 읽은 독자들은 어떻게 느꼈을까? 일본인 시민들은 불행한 식민지 처지에도 굴하지 않고 조선무용 공연을 쉬지 않는 최승희의 기개를 응원했을 것이다. 나고야에 거주하던 조선인들도 식민 모국에서 조선의 문화를 이어가는 최승희가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나고야신문>은 최승희의 사진도 역동적인 모습으로 잘 선택했다. 내가 마이크로필름으로 본 사진은 배경도 흐릿해지고 의상도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그녀의 표정만은 명랑하고 당찬 조선 아가씨였다. 혹시 <나고야신문>의 아카이브에 보관되어 있다면 이 사진의 원본을 꼭 한번 보고 싶다.

 

<나고야신문>은 최승희를 직접 만났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드러내면서, 독자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독자들 중에는 85년 후의 나도 포함되고, 나의 이 글을 읽어줄 모든 이들도 포함될 것이다. 나는 이런 기사가 진짜 저널리즘이라고 생각한다. (조정희, PD/최승희 연구가)

 

=========================

아래는 <나고야신문>의 기사 원문과 번역문이다.

 

[초여름 서경시] 민족의 표정, 최승희씨

"피곤해 죽겠어요 ! 여기서 쉬어갈게요." (19356)9일 나고야에 와서 공회당에서 무대연습(리허설)을 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최승희씨가 가볍게 난간에 기대어 앉았다. “어디선가 환성이 들려오네요. , 운동장에서 나는 소리예요. 나도 달리고 싶어요.” 54(164센티미터)의 최승희씨가 하얀 출발선에 자세를 잡고 서면 당당한 선수이겠지만 알고 보면 눈물 많고 순진한 조선 아가씨이다. 민족의 오랜 전통미를 세계에 자랑하는 신시대의 딸. 그녀가 유머러스한 교태로 춤출 때 조선이 웃고, 그녀가 쓸쓸히 춤출 때 조선이 운다. 그녀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말한다. "내가 달리기를 했으면 올림픽 선수가 됐을 거예요." 아니다, 당신은 이미 훌륭한 올림픽 무용가이다. (*)

,

<경성일보><조선신문>이 이시이무용단의 경성 공연을 자세히 보도했던 것에 비해, <부산일보>는 경성 공연 기사를 한 번도 내지 않았다. 반면 <부산일보>는 대구와 부산 공연은 다른 매체보다 빠르고 자세하게 보도했다. 여기에도 사업성영역개념이 작동한 것이리라.

 

지난 4년간 유럽과 미국 각지의 순회공연을 마치고 무용 연구에 몰두했던 이시이 바쿠와 코나미 일행은 경성을 출발해 오는 26일 하루 동안 대구극장에서 공연하기로 결정되었다.

 

위의 1926326일자 <부산일보> 기사는 이시이 무용단의 대구 공연을 보도한 첫 보도였다. <경성일보>는 이틀 후인 328이시이 바쿠와 코나미의 무용시 공연회는 26일 오후 6시부터 대구극장에서 개최되었다고 보도했다.

 

1920년대 부산 중앙동에 있었던 <부산일보> 본사 사옥

 

<부산일보><경성일보>의 기사를 종합하면 이시이무용단의 대구 공연에 대한 육하(六何)의 기본 정보가 모두 파악된다. 대부분은 <부산일보>가 이미 밝혀주었고, <경성일보>는 공연시간이 저녁6시였음을 추가로 제공했다.

 

두 기사 모두 [대구발] 기사로 두 신문사의 대구지국들이 송고한 것이지만 <부산일보>의 기사는 행사 전 알림 기사였던 반면 <경성일보>의 기사는 행사가 끝난 후 보고 기사였다.

 

이는 <부산일보>가 관객을 모으기 위한 홍보 효과도 노렸기 때문이었다. 328일과 29일의 <부산일보> 보도는 부산 공연을 홍보하는 광고문인데, 여기에는 부산 공연의 주최자가 <부산 이시이바쿠후원회>였고 후원자는 <부산일보사>였다. 대구 공연의 후원자도 <부산일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경성일보>, <조선신문>, <부산일보>를 제외한 다른 주요 신문들, 특히 조선어로 발행되었던 <매일신보><조선일보>, <동아일보><시사신문><중외일보>는 이시이무용단의 대구 공연을 한 번도 보도하지 않았다.

 

이 매체들도 모든 대구 지국을 운영했지만 그 활동은 당시 총독부의 기관지이자 최대 신문이었던 <경성일보>뿐 아니라, <조선신문>이나 <부산일보>에 비해서도 미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1926년 3월26일의 <부산일보>가 이시이무용단의 대구공연을 보도했다.

 

그나마 <매일신보>는 이시이 바쿠의 경성 공연은 보도했고, 특히 최승희가 이시이무용단에 입단하고 일본 무용유학을 떠나게 된 사정을 자세히 보도했다. 아마도 자매지 <경성일보>와의 기사공유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매일신보>도 대구 공연은 보도하지 않았다.

 

일본어 신문(경성일보, 조선신문, 부산일보)이거나 총독부 기관지(경성일보, 매일신보)를 뺀 조선어 민족지들은 이시이 바쿠의 조선 순회공연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이는 대구나 인천, 부산 공연뿐 아니라 경성 공연도 마찬가지였다.

 

유일한 예외는 1926221일의 <동아일보> 기사였다. 이 기사는 일본의 서양무도가로 제일인자인 이시이 바쿠는 금월 하순이나 내월 상순에 조선에 와서 경성에서 행연할 것이라고 전하고, 이시이 바쿠는 무도의 본바닥인 구라파 사람들도 칭찬하는 무용가라고 설명했다.

 

1926년 2월21일의 <동아일보>는 이시이무용단의 조선순회공연을 단 1회 보도했을 뿐이었다. 

 

숙명여학교 우등졸업생 최승희의 이시이무용단 입단은 기자들에게 특종거리였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 대부분의 민족지 기자들은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의 동료나 선후배들이었다. 이시이 바쿠와 최승희에 대한 소식을 얼마든지 파악하고 보도할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런데도 민족지들은 이를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후원사였던 <경성일보><매일신보>가 다른 매체들의 취재나 보도를 금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후원사가 아니었던 <조선신문>의 경성 보도가 이를 증명한다.

 

또 기자들을 비롯한 젊은 조선인, 특히 일본 유학 경험이 있는 인텔리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이시이 바쿠의 평판도 좋은 편이었다. 따라서 일본인 무용가에 대한 민족적인 감정 때문에 취재와 보도를 기피한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이시이무용단의 조선순회공연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아직도 궁금하다. (*)

,

中央日刊紙朝鮮新聞くから石井漠新舞踊関心していた192547日付朝鮮新聞石井漠小浪がアメリカとヨーロッパの公演えて日本帰国したことをじた帰国日43だったので京城新聞にしては迅速報道だった。 

 

その記事添付された写真石井漠小浪2年余りの巡回公演えて横浜途中帰国船春洋丸甲板でポーズをったものだがマスコミ配布用準備されたものとられるしかし朝鮮新聞はこの記事はもちろん写真掲載しなかったする重要事案ではないと判断したのだろう

 

しかし、『朝鮮新聞はこの写真入手説明文とともに掲載した石井漠舞踊界名士であっても京城訪問したわけでもないにもかかわらず帰国写真報道したのは、『朝鮮新聞石井漠舞踊活動注目していたという意味である

 

1925年4月7日の「朝鮮新聞」は、石井漠と石井小波兄妹がヨーロッパとアメリカのツアーから日本に戻ったことを報じた。

 

石井舞踊団朝鮮巡回公演最初報道したのは朝鮮新聞である1926219日付記事であり京城公演がある1月前のことだ。 『東亜日報はそれから二日後(221)、『京城日報半月後(33310)、『毎日新報月後(316)じニュースをえた

 

記事昨年丘珠からってきた石井石井漠小浪兄妹朝鮮京城自慢のバレエダンス舞踊公演をすることにしたとし石井漠から郵便られてきたあいさつまで転載した石井漠挨拶後援社京城日報にもせなかったダネであった

 

また318日付朝鮮新聞石井舞踊団京城公演レパートリーを入手各作品題名とジャンル公演者名前まで報道したこれもやはり報道だった。 『京城日報320番組掲載したが、『朝鮮新聞11作品、『京城日報9作品だけ紹介している

 

1926年2月19日の『朝鮮新聞』は石井舞踊団の朝鮮巡回公演を真っ先に報じた。

 

京城日報のリストかられた作品石井漠松浦旅人のデュエット舞踊劇明闇石井小浪がアンコールとして準備した日本舞踊だったがこれら2作品いた理由らかにされていなかった

 

321日付朝鮮新聞世界的舞踊家石井漠コナミ兄妹一行20日午前7京城駅到着した列車入京原金旅館まり正午本社れたとし石井舞踊団動線までえた石井舞踊団京城到着した時間宿所らかにして報道したのは朝鮮新聞唯一である

 

また朝鮮新聞記事来月東京公演する3研究作品発表には多数朝鮮中国舞踊れてみるつもりという石井漠計画じた

 

新舞踊石井漠について関心せていた朝鮮新聞であったが石井舞踊団大邱公演報道されなかった1888仁川において創刊され1919本社京城中央紙となった朝鮮新聞大邱地域のニュースまでにする余力がなかったのだろうか

 

1926年3月18日の『朝鮮新聞』は、石井舞踊団京城公演のレパートリー11作品を公開した。

 

朝鮮新聞にも大邱支局があった1915214日付釜山日報<朝鮮新聞>大邱支局記念号発行という記事っていることから、『朝鮮新聞くとも1914から大邱支局運営していたにもかかわらず、『朝鮮新聞には大邱公演記事はなかったなぜだろうか

 

おそらく朝鮮新聞石井漠大邱公演のスポンサーではなかったからであろう京城公演京城日報大邱釜山公演釜山日報後援京城公演朝鮮新聞報道したが、『釜山日報後援する地方公演まで広報したくなかったとわれる

 

また大邱京城日報朝鮮新聞縄張ではなく、『釜山日報領域認識された京城公演後援した京城日報大邱支局送稿単身ではあるが大邱公演記事にしたが、『朝鮮新聞はそこまでする必要性じなかったようだ当時のマスコミ報道慣行すでに後援じた事業性地理的領域概念重要だったとわれる(*)

,

또 다른 중앙 일간지 <조선신문>은 일찍부터 이시이 바쿠의 신무용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192547일자 <조선신문>은 이시이 바쿠와 코나미가 미국과 유럽 공연을 마치고 일본에 귀국한 사실을 보도했다. 귀국일이 43일이었으므로 경성의 신문치고는 신속한 보도였다.

 

그 기사에 첨부된 사진은 이시이 바쿠와 코나미가 2년여의 순회공연을 마치고 요코하마로 돌아오는 길에 귀국선 하루미마루(春洋丸) 갑판에서 포즈를 취한 것인데, 언론배포용으로 준비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의 다른 신문들은 이 기사는 물론 사진도 게재하지 않았다. 시급하거나 중요한 사안은 아니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신문>은 이 사진을 입수해 설명문과 함께 게재했다. 이시이 바쿠가 무용계의 명사라고 하더라도 그가 경성을 방문한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의 귀국소식을 사진과 함께 보도한 것은 <조선신문>이 이시이 바쿠의 무용 활동에 주목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1925년 4월7일의 <조선신문>은 이시이 바쿠와 이시이 코나미 형매가 유럽과 미주 순회공연에서 일본으로 돌아온 사실을 보도했다. 

 

이시이무용단의 조선순회공연을 가장 먼저 보도한 것도 <조선신문>이었다. 1926219일자 기사였으니 경성 공연이 있기 한 달 전이다. <동아일보>는 그로부터 이틀 뒤(221), <경성일보>는 보름 뒤(33일과 310), <매일신보>는 한 달 뒤(316)에 같은 소식을 전했다.

 

기사는 작년 구주에서 돌아온 이시이 바쿠, 코나미 형매가 조선에 건너와 경성에서 그들의 자랑거리인 발레, 댄스 무용시 공연을 하기로 결정했다면서 이시이 바쿠가 우편으로 보내온 인사말까지 전재했다. 이시이 바쿠의 인사말은 후원사 <경성일보>도 싣지 못한 특종이었다.

 

318일자 <조선신문>은 이시이무용단의 경성공연 레퍼토리를 입수해 각 작품의 제목과 장르, 공연자 이름까지 보도했다. 이 역시 가장 빠른 보도였다. <경성일보>320일에 프로그램을 게재했는데, <조선신문>11개 작품을 소개한 반면 <경성일보>9개만 소개했다.

 

 

<경성일보>의 목록에 누락된 작품은 이시이 바쿠와 마츠우라 타비토(松浦旅人)의 듀엣 무용극 <명암(明闇>과 이시이 코나미가 앵콜곡(番外)으로 준비한 <일본무용>이었는데, 이 두 작품을 제외한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았다.

 

321일자 <조선신문>세계적 무용가 이시이 바쿠, 코나미 남매 일행은 20일 오전7시 경성역에 도착한 열차로 입경, 하라카네(原金) 여관에 투숙하였다가, 정오에 본사를 방문했다면서 이시이 무용단의 동선까지 전했다. 이시이무용단이 경성에 도착한 시간과 숙소를 밝혀 보도한 것은 <조선신문>이 유일했다.

 

이와 함께 <조선신문>의 기사는 다음 달 도쿄에서 공연하는 제3회의 연구 작품 발표에는 다수의 조선과 중국의 무용을 넣어볼 생각이라는 이시이 바쿠의 계획도 보도했다.

 

신무용과 이시이 바쿠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조선신문>였지만 이시이무용단의 대구 공연은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1888년 인천에서 창간되었다가 1919년 본사를 경성으로 옮겨 중앙지가 된 <조선신문>이 대구 지역 소식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던 것일까?

 

1926년 3월18일의 <조선신문>은 이시이무용단 경성공연의 레퍼토리 11작품을 공개했다.

 

<조선신문>에도 대구지국이 있었다. 1915214일자 <부산일보>“<조선신문> 대구지국 기념호 발간이라는 기사가 난 것으로 보아 <조선신문>은 늦어도 1914년부터 대구 지국을 운영했었다. 그런데도 <조선신문>에는 대구 공연 기사가 없었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조선신문>이 이시이 바쿠의 대구 공연 후원사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경성공연은 <경성일보>, 대구와 부산 공연은 <부산일보>가 후원했는데, 경성 공연은 <조선신문>도 보도했지만 <부산일보>가 후원하는 지방 공연까지 홍보하고 싶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 대구는 <경성일보><조선신문>의 영역(縄張)이 아니라 <부산일보>의 영역으로 인식되었다. 경성 공연을 후원했던 <경성일보>는 대구 지국의 송고를 받아 단신으로나마 대구 공연도 기사화했지만 <조선신문>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당시의 언론사 보도관행에 이미 후원을 통한 사업성과 지리적 영역개념이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

,

2021720-21大邱テグ取材断行した大邱メディアが石井舞踊団大邱公演をどのように報道したのかを調べるためだった大邱取材まず京城キョンソン新聞調べた

 

京城中央紙石井舞踊団大邱公演じたが最初報道はあまり正確ではなかった1926325日付京城日報石井舞踊団今夜仁川=24明後日釜山=261公演えて東京予定じたがこれは誤報だった仁川公演241日一日しいが釜山公演28-292日間だった26公演釜山プサンではなく大邱だったが大邱公演には言及されなかった

 

<京城日報>京城本社社屋

 

この誤報3日後328日付京城日報訂正したこの京城日報には大邱公演する記事2通掲載されていたつは釜山発もうつは大邱発だったじられた記事には石井漠小浪兄妹27大邱から釜山入りし2829両日毎日午後6から国際館でその妙技公開するじたこの記事にも大邱公演かどうかやその内容省略されている

 

しかし記事では石井漠小浪舞踊詩公演会26日午後6から<大邱劇場>開催されたと「(大邱府内官衛会社員をはじめにも多数観客まる盛況したじた。 「軍威会社員とは官員衛兵会社員すのでくは民官軍日本人観客まったという意味であろう

 

いて記事西欧芸術家推戴した石井舞踊には力強人間味があふれ陽射しに微笑むような小浪しい曲線ともよく調和観客魅了するのに十分だった公演最近ない大成功閉幕一行釜山かったえた

 

325京城版記事には誤報かったが釜山発記事大邱発記事公演する情報正確大邱発記事公演状況まで比較的詳細報道した

 

1926年3月25日の『京城日報』2面に掲載された石井舞踊団の京城、仁川、釜山公演の報道。

 

京城日報京城版記事不正確だった疑問である石井漠320日朝から25日朝まで京城6滞在しておりこれまで京城日報記者たちは取材する機会かった。 『京城日報石井舞踊団朝鮮巡回公演後援会社学芸部長寺田壽夫がこの公演イベントに直接確認して取材指揮したからだ

 

各種文献記録総合すると寺田壽夫学芸部長同期間石井漠舞踊団5直接会っているほとんど毎日会っているわけだにもかかわらず、『京城日報石井舞踊団京城公演後日程らなかったということは疑問いない

 

当時朝鮮最大新聞だった京城日報京城以外地域のニュースにはそれほど関心っていなかったようだ取材情報提供けたとしても紙面制限理由優先順位されたりしたこの短所うために京城日報地方主要都市支局設置した京城版報道された大邱公演記事、「釜山発記事釜山支局、「大邱発記事大邱支局送稿したものである

 

1926年3月28日の『京城日報』に掲載された石井舞踊団の大邱と釜山の公演報道

 

京城日報大邱支局ができたのは1919である支局役割きく3つだった中央紙をその地方普及することその地域のニュースを本社送稿することそして地域のニュースをめて地域広告とともに地方版ることだった

 

大邱支局活動活発だったようだ当時、『京城日報大邱版って現地印刷·配布していたかどうかは確認できなかったがなくとも石井舞踊団大邱公演取材して本社送稿したためであるおかげで1926326石井舞踊団大邱公演日時場所観客らの反応おおよその日程などについての詳細把握することができた

 

しかし大邱現地のマスコミ報道調査するため<大邱近代歴史館>学芸員わせてみたところ当時新聞一部所蔵しているが公開禁止されているというしたがって京城日報』「大邱版記事がさらにあったかどうかはまだ確認されていない(*)

 

,

2021720-21일 대구 취재를 단행했다. 대구 매체가 이시이무용단의 대구 공연을 어떻게 보도했는지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대구 취재에 나서기 전에 먼저 경성의 신문들을 조사했다.

 

경성의 중앙지들도 이시이무용단의 대구 공연을 보도했지만, 첫 보도는 그다지 정확하지 않았다. 1926325일자 <경성일보>가 이시이무용단이 오늘밤 인천(=24)과 모레 부산(=26)의 각 1회 공연을 마치고 도쿄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보도했는데, 이는 오보였다. 인천 공연은 24일 하루가 맞지만 부산 공연은 28-29일의 이틀이었다. 26일 공연도 부산이 아니라 대구였지만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경성일보> 경성 본사 사옥

 

이 오보는 사흘 후인 328일의 <경성일보>가 바로잡았다. 이 날짜의 <경성일보>에는 대구 공연에 대한 기사가 2꼭지나 실려 있었다. 하나는 [부산발]이었고, 다른 하나는 [대구발]이었다. 먼저 보도된 [부산발] 기사에는 이시이 바쿠, 코나미 남매는 27일 대구에서 부산으로 들어와 28일과 29일 양일 매일 오후 6시부터 국제관에서 그 묘기를 공개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 기사에도 대구의 공연여부나 그 내용은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곧 이어진 [대구발] 기사에서는 이시이 바쿠와 코나미의 무용시 공연회는 26일 오후 6시부터 <대구극장>에서 개최되었다고 전하고 (대구)부내 관위회사원(官衛會社員)을 비롯하여 그 외에도 다수의 관객이 몰리는 성황을 이루었다고 보도했다. ‘군위회사원이란 관원(官員)과 위병(衛兵)과 회사원을 가리키므로, 대부분 민관군의 일본인 관객이 몰렸다는 말이겠다.

 

이어서 기사는 서구의 예술가가 추대한대로 이시이의 무용에는 힘찬 인간미가 넘쳤고, 햇빛에 미소짓는 듯한 코나미의 아름다운 곡선과도 잘 어울려서 관객을 매료하기에 충분했다고 평하고, 공연은 근래에 없는 대성공적으로 폐막, 일행은 부산으로 향했다고 덧붙였다.

 

325일의 경성판 기사에는 오보가 많았지만 부산발 기사와 대구발 기사는 공연에 대한 정보를 정확히 전달했고, 특히 대구발 기사는 공연 상황까지 비교적 상세히 보도했다.

 

1926년 3월25일의 <경성일보> 2면에 실린 이시이무용단의 경성, 인천, 부산 공연 보도.

 

<경성일보>의 경성판 기사가 부정확했던 점은 의문이다. 이시이 바쿠는 320일 아침부터 25일 아침까지 경성에 6일이나 체류했고, 그동안 <경성일보>의 기자들은 그를 취재할 기회가 많았다. <경성일보>는 이시이무용단 조선순회공연의 후원사였고, 학예부장 테라다 토시오(寺田壽夫)가 이 공연 행사를 직접 챙기면서 취재를 지휘했기 때문이다.

 

각종 문헌 기록을 종합하면 테라다 토시오 학예부장은 이 기간에 이시이 바쿠와 그의 무용단을 다섯 번이나 직접 만났다. 거의 매일 만난 셈이다. 그런데도 <경성일보>가 이시이무용단의 경성 공연 이후의 일정을 잘 몰랐다는 것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조선 최대 신문이었던 <경성일보>는 경성 이외 지역의 뉴스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 같다. 취재를 하거나 제보를 받았더라도 지면 제한을 이유로 우선순위에서 밀리곤 했다. 이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경성일보>는 지방 주요도시에 지국을 설치했다. 경성판에 보도된 대구공연 기사도 [부산발] 기사는 부산 지국이, [대구발] 기사는 대구 지사가 송고한 것이다.

 

1926년 3월28일의 <경성일보>에 실린 이시이무용단의 대구와 부산 공연 보도

 

<경성일보>의 대구 지국이 생긴 것은 1919년이다. 지국의 역할은 크게 세 가지였다. 중앙지를 그 지방에 보급하는 것과, 그 지역의 뉴스를 본사에 송고하는 것, 그리고 현지 뉴스를 모아 지역 광고와 함께 지방판을 만드는 것이었다.

 

대구 지국의 활동은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경성일보>에 대구판을 만들어 현지 인쇄 및 배포했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이시이무용단의 대구 공연 소식을 취재해서 본사에 송고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1926326일의 이시이무용단 대구공연의 일시와 장소, 관객과 그들의 반응, 대략의 일정 등에 대한 세부사항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구 현지 언론보도를 조사하기 위해 <대구근대역사관>의 학예사에게 문의해 본 결과 당시의 신문들은 일부 소장되어 있지만 공개는 금지되어 있다고 했다. 따라서 <경성일보> ‘대구판의 기사가 더 있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못한 상태이다. (*)

,

石井舞踊団大邱公演<大邱劇場>かれたこれまでの記録には開演時間明示されていなかったが午後6推定される(れた328京城日報記事6確認された) 翌日<国際館>かれた釜山公演開演時間午後6だった

 

<大邱劇場>大邱てられた4番目映画館だった19063月号朝鮮之実業10)』によると1905年夏大邱日本人劇場必要だという世論まった日本人居留民急増したためだ

 

190312月末25世帯76だった大邱日本人190412月末245世帯7301年間10増加したこのような増加えられ19048日本人居留民会設立された19108月末大邱在住日本人6,4306年半ぶりに9増加した

 

大邱初の劇場「錦座(1907)」

 

19063月初上田力松日本人達成館前釜山杏座した劇場てようとした杏座1904狭間房太郎現在釜山広域市中区光復洞建設した劇場釜山めて映画上映した場所達成館岡田喜八郎19045東城路にオープンした超大型料理店であるしかし結局この最初劇場建設計画成功しなかった

 

翌年(1907)3月 花屋旅館花月料亭主中村喜一さんがトタン屋根のバラック式建物錦座完成させ41にオープンした位置錦町3丁目=現在太平路3) 216番地、「大邱市街全図今日地図べると大韓通運のあった場所であることがかる錦座大邱名所としてげられたため当時発行された絵葉書にもその面影っている錦座日本人日本人のためにてた劇場だがこれで大邱でも劇場時代幕開けしたのだ

 

1910年代錦座繁盛している大邱倶楽部1911七星館チルソングァン1916)、大邱座1918がそれぞれしくオープンした大邱人口191431,947(朝鮮人24,522日本人7,271外国人154)日本人23%であったが1919には41,413(朝鮮人28,609日本人12,603外国人201)であり日本人30%えた大邱住民31日本人だったのだこのため劇場がさらに必要になったのだ

 

「大邱座(1918)」は大邱で4番目にオープンした大型劇場である。 1925年頃から「大邱劇場」と呼ばれてきた。

 

大邱座19186月初大邱企業株式会社15,000ウォンをじて十二間道路東側のシルム韓国相撲てられた現在中区花田ファジョン)4番地観光バス専用駐車場場所大邱座建立方式独特だったソウル龍山ヨンサンにあった劇場桜座途中大邱テグてたのだ坪数320建坪237~8定員1500とかなりきな劇場だった

 

1925山根初太郎中村喜一から大邱座劇場内外をリニューアルした同年9にオープンしたかこのから大邱座大邱劇場ばれるようになったようだ石井舞踊団公演した大邱劇場がまさにこの改装した劇場、「大邱劇場崔承喜京城公会堂2番目見物した劇場だった

 

『大邱市街地図(1928)』に登場する「大邱座」の位置。

 

大邱座はもともと演劇のための劇場だったので19282翠星座金小浪一行病妻」、「埋没した恋愛」、「五月雨」、「」、「」、「息子のことをなどを公演しており同年11には土月会月曜日」、「この大監びる大監」、「デイアボット」、「悲劇」、「いた烏口遣などを上演したこの大監びる大監朴承喜ベビジャン脚色したもので土月会代表的喜劇作品であり人気かった

 

大邱座時折映画上映192212には毒手」、19289には春姫いた19309には洋画タイタニック天使などを上映した。 「春姫平壌シネマの1回作品李慶孫(·ギョンソン)監督鄭基澤(チョン·ギテク)金一松(キム·イルソン)主演だった。 「天使チャップリンの映画である(*)

,

石井舞踊団大邱公演1926326日夜6だった公演準備前日にすでにませたので同日午後まではにすべきことはなかったらは公演時間までどのように時間ごしたのだろうか

 

1928616日付毎日新報には石井舞踊団九州巡業中観光った遭難したというニュースが報道された崔承喜いて石井舞踊団加入したチョ·テクウォンの寄稿のような記事せられた

 

退屈旅行れた2~3日休んでいる15無残ぬところでした発動船って名古屋古城見物車みずんでいたら高島から1ほどのところで発動船故障りのされにも転覆しそうになるところだったのです殺希望があったかもしれないがバクー先生夫人崔承喜容疑者らはどんなにめだったのでしょうか みんなきながらその光景え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です...ぬとって祈祷までしました.”

 

りかかった漁船けで石井舞踊団救助されたがこの記事じて石井舞踊団巡回公演中にも時間があれば観光もしていたことがかる

 

1920年代の大邱市内の元町通り

 

石井舞踊団1926320日朝7京城キョンソン到着翌日夕方から3日連続京城公会堂公演した24には仁川インチョン公演をし京仁線終電京城った12ぎた25日朝9京城駅崔承喜えてちに大邱テグ出発した4日間強行軍だったわけだ2526日午後まではめた

 

石井舞踊団大邱観光をしたとしたらどこを訪問しただろうか1920年代半大邱名所としてげられたのはゴルフ競馬場花嘗台達成公園刀水園などだった

 

100年前大邱にゴルフがあったのは意外だったかもしれないが当時朝鮮遠征ゴルフをしむ裕福日本人大邱ゴルフ日本人むプレミアムゴルフつだった

 

大邱競馬場ができたのは1924年大邱競馬倶楽部創立されたである1925年春には1回競馬会開催され1929には総督府認可けて朝鮮6大公認競馬場つであった

 

 

石井舞踊団がゴルフや競馬しんだ可能性はほとんどないおそらく大邱府直営のファサン台遊園地大邱神社があった達城公園または市内庭園桃水園れた可能性

 

和尚台現在花園遊園地である洛東江沿いの沙門津位置するこの遊園地有名だったが新羅景徳王本来地名雪火県花園県えたのもそのためである在位中9もここを訪問したという

 

達城公園三韓時代土城達伐城タルボルソンまたは達佛城であり宣祖26(1596)まで慶尚監営があった場所1905公園指定され合併直後日本人がここに大邱神社てた。 『大邱案内(1934)には公園がうっそうとした森林まれており四季折々のめがしいされている

 

 

刀水園杏町(現在七星洞118番地)位置する遊園地である朝鮮時代には大邱郷校運営していた詠帰亭(ヨングィジョン)であり達城判官(=大邱市長)尹成垣(ユン·ソンウォン)屋敷となったが1920日本人青乃家がこれをには公園には料亭としてった

 

19261119日付<東亜日報>刀水園広大貯水池には東屋がありなどがには十数隻以上あり詠帰亭古色蒼然っているした刀水園入場料1船賃5だった

 

崔承喜石井舞踊団半日時間てば刀水園訪問した可能性花園遊園地大邱駅から西15kmれている交通便なく府營バス料金片道1人当たり5であった達城公園大邱駅西南側2km地点なのでいが大邱駅東北側1km以内にあった刀水園一番近かった

 

崔承喜石井舞踊団新入団員として刀水園遠足行ったとすればそれから4年後大邱生まれの民族詩人李相和·サンファ193010月号別乾坤発表した大邱行進曲という、「達句成刀水園ったしみをのようにった

 

半分残ってれた達句城古跡

った刀水園

するくても

防川古木のようにやつれた々がいくらか」。

,

이시이무용단의 첫 대구공연은 <대구극장>에서 열렸다. 지금까지 나타난 기록에는 개연 시간이 명시되어 있지 않았으나 오후 6시경으로 추정된다. 다음날 <국제관>에서 열렸던 부산 공연의 개연 시간도 오후 6시였다.

 

<대구극장>은 대구에 세워진 4번째 극장이었다. 19063월호 <조선의실업(朝鮮之實業, 10)>에 따르면 1905년 여름 대구의 일본인들 사이에 극장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대두되었다. 일본인 거류민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190312월말 25가구 76명이었던 대구의 일본인들은 190412월말 245가구 730명으로 1년 사이에 약 10배 증가했다. 이같은 증가세에 힘입어 19048월 일본인거류민회가 설립되었다. 19108월말의 대구 거주 일본인은 6,430명으로 6년 반 만에 다시 9배나 증가했다.

 

 

대구 최초의 극장 <니시키자(錦座, 1907)>

 

19063월초 일본인 우에다 리키마츠(上田力松)가 달성관 앞에 부산의 행좌(杏座)를 모방한 극장을 지으려 했다. 행좌는 1904년 하자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가 지금의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에 건립한 극장으로 부산에서 처음으로 영화를 상영한 곳이다. 달성관은 오카다 기하치로(岡田喜八郞)19045월 동성로에 개업한 초대형 요릿집이다. 그러나 이 최초의 극장 건립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듬해(1907) 3월 하나야(花屋)여관과 카게츠(花月)요정의 주인인 나카무라 키이치(中村喜一)가 함석지붕의 바라크식 건물로 금좌(錦座, 니시키자)를 완공했고 41일 문을 열었다. 위치는 니시키초 3정목(錦町3丁目=지금의 태평로 3) 216번지로, <대구시가전도(1912)>와 오늘날의 지도를 비교하면 대한통운이 있던 자리임을 알 수 있다. 금좌는 이내 대구의 명소로 꼽혔기 때문에 그림엽서에도 그 모습이 남아 있다. 금좌는 일본인이 일본인을 위해 세운 극장이지만 이로써 대구에도 '극장 시대'가 열렸다.

 

1910년대에 들어 금좌가 성업 중인 가운데 대구구락부(1911)와 칠성관(1916), 대구좌(1918)가 등장했다. 대구의 인구는 191431,947 (조선인 24,522, 일본인 7,271, 외국인 154)으로 일본인이 약 23%였는데, 1919년에는 41,413(조선인 28,609, 일본인 12,603, 외국인 201)으로 일본인이 30%를 넘어섰다. 대구 주민의 약 3분의1이 일본인이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극장이 더 필요하게 된 것이다.

 

<대구좌(1918)>는 대구에서 4번째로 문을 연 대형 극장이었다. 1925년경부터 <대구극장>으로 불렸다.

 

대구좌(大邱座)19186월초 대구기업주식회사가 15,000원을 들여 12간도로 동쪽의 씨름장에 세워졌다. 지금의 중구 화전동 4번지 관광버스 전용 주차장 자리이다. 대구좌의 건립방식은 독특했다. 서울 용산에 있던 극장 앵좌(櫻座, 사쿠라자)를 뜯어다가 대구에서 재조립한 것이다. 총평수 320평에 건평 237~8, 정원 1,500명으로 상당히 큰 극장이었다.

 

1925년 봄 야마네 쇼타로(山根初太郞)가 나카무라 키이치로부터 대구좌를 인수하여 극장 안팎을 리모델링한 후, 그해 9월 다시 문을 열었다. 아마도 이즈음부터 대구좌는 대구극장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이시이무용단이 공연했던 대구극장이 바로 이 극장이었고, 대구극장은 최승희가 경성공회당에 이어 두 번째로 구경한 극장이었다.

 

대구좌는 원래 연극을 위한 극장이었기에 19282월 취성좌의 김소랑 일행이 <병처>, <매몰된 연애>. <오월비>, <새 우는 집>, <꽃 피는 집>, <아들 생각> 등을 공연했고, 같은해 11월에는 토월회가 <월요일>, <이 대감 망할 대감>, <데이아보트>, <비극>, <늙은 오입쟁이> 등을 공연했다. 특히 <이 대감 망할 대감>은 박승희가 <배비장전>을 각색 한 것으로 토월회의 대표적인 희극 작품이었다.

 

<대구시가지도(1928)>에 나타난 <대구좌>의 위치. 

대구좌는 간간이 영화도 상영했는데, 192212월에는 <마의 독수(毒手)>, 19289월에는 <춘희(春姬)>. 19309월에는 양화 <타이타닉크><거리의 천사(天使)> 등을 상영했다. <춘희>는 평양시네마의 제1회 작품으로 감독이 이경손, 주연 배우는 정기택과 김일송이다. <거리의 천사>는 챨리 채플린의 영화다. (*)

 

,

이시이무용단의 대구 공연은 1926326일 저녁7시였다. 공연 준비는 전날 이미 끝마쳤으므로 이날 오후까지는 따로 할 일이 없었다. 이들은 공연 시간까지 어떻게 시간을 보냈을까?

 

1928616일자 <매일신보>에는 이시이무용단이 일본 큐슈(九州)지역 순회공연 중에 배를 타고 관광하러 갔다가 조난당했던 소식이 보도되었다. 최승희에 뒤이어 이시이무용단에 가입했던 조택원의 기고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지루한 여행에 곤한 몸을 2-3일 쉬는 동안에 일행 15명은 무참히 죽을 뻔 하였습니다. ... 발동선을 타고 나고야(名護屋)의 고성(古城)을 구경 차로 부는 바람도 돌보지 않고 전진하다가 다카시마(高島)에서 약 1리쯤 되는 곳에서 발동선에 고장이 생겨 다시 고칠 희망이 없이 노한 물결에 쓸려 금방 전복될 듯 하기를 4시간이나 되었습니다. 남자는 혹 살 희망이 있었는지 몰랐겠으나 바쿠()선생 부인과 최승희 외 여자들은 어찌나 되었겠습니까? 모두 울며 토하여 그 광경은 참아보지 못하였습니다. ... 나도 아주 죽을 줄 알고 기도까지 하였었습니다.”

 

다행히 지나가던 어선의 도움으로 이시이무용단은 구조되었지만, 이 기사를 통해 우리는 이시이무용단이 순회공연 중에도 시간이 나는 대로 관광도 했었음을 알 수 있다.

1920년대 대구 동성정통-지금의 동성로

 

이시이무용단은 1926321일 아침7시에 경성에 도착했고, 그날 저녁부터 3일 연속 경성공회당에서 공연했다. 24일에는 인천공연을 했고 경인선 막차로 경성에 돌아왔을 때는 12시가 넘었다. 25일 아침 9시 경성역에서 최승희를 맞아 곧바로 대구로 출발했다. 4일 동안 강행군을 했던 셈이다. 다행히 25일과 26일 오후까지는 쉴 수 있었다.

 

이시이무용단이 대구 관광을 했다면 어디를 방문했을까? 1920년대 중반 대구의 명소로 꼽힌 곳은 골프장과 경마장, 화상대(花賞台)와 달성공원과 도수원(刀水園) 등이었다.

 

1백 년 전 대구에 골프장이 있었던 것이 뜻밖일 수 있겠지만, 당시 조선 원정 골프를 즐기는 부유한 일본인들이 많았고, 대구 골프장은 일본인들이 선호하던 프리미엄 골프장의 하나였다.

 

대구에 경마장이 생긴 것은 1924년 대구경마구락부가 창립되었을 때다. 1925년 봄에는 제1회 경마회가 개최되었고, 1929년에는 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조선의 6대 공인 경마장의 하나였다.

 

1920년대 대구 달성공원

 

이시이무용단이 골프나 경마를 즐겼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아마도 대구부가 직영하던 화상대 유원지나 대구신사가 있었던 달성공원, 혹은 시내의 정원 도수원을 방문했을 가능성이 높다.

 

화상대는 지금의 화원 유원지이다. 낙동강변 사문진에 자리 잡은 이 유원지는 꽃으로 유명했는데, 신라 경덕왕이 원래의 지명 설화현(舌火縣)’화원현(花園縣)’으로 바꾼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재위 중 아홉 차례나 이곳을 방문했다고 한다.

 

달성공원은 삼한시대의 토성 달불성 자리로 선조26(1596)까지 경상감영이 있던 곳이다. 1905년 공원으로 지정되었고 합병 직후 일본인들이 이곳에 대구 신사를 세웠다. <대구안내(1934)>에는 공원이 울창한 삼림에 둘러싸여 사계절의 조망이 아름답다고 기록되어 있다.

 

도수원은 행정(杏町=지금의 칠성동118번지)에 자리 잡았던 유원지이다. 조선시대에는 대구향교가 운영하던 영귀원이었고, 후에 달성판관(=대구시장) 윤성원(尹成垣)의 저택이 되었는데, 1920년 일본인 기오노이에(靑乃家)가 이를 사들여 낮에는 공원, 밤에는 요정으로 꾸몄다.

 

1920년대 대구 도수원

 

19261119일자 <동아일보>는 도수원에 광활한 저수지에 정자가 있고 버드나무와 꽃 등이 울창하고 연목에 배가 십여 척 넘게 있으며 영귀정이 고색창연하게 서 있다고 서술했다. 도수원 입장료는 1전이었고, 배삯은 5전이었다.

 

최승희와 이시이 무용단이 반나절의 한가한 시간을 가졌다면 도수원을 방문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화원유원지는 대구역에서 서쪽으로 약 1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데다가 교통편도 적었고, 부영버스 요금이 편도 1인당 5전이었다. 달성공원은 대구역 서남쪽으로 약 2킬로미터 지점이어서 가깝지만, 대구역 동북쪽으로 1킬로미터 이내에 있었던 도수원이 가장 가까웠다.

 

최승희가 이시이무용단의 신입 단원으로 도수원에서 첫 소풍을 가졌다면, 4년 후 대구 출생의 민족시인 이상화는 193010월호 <별건곤>에 발표한 대구행진곡이라는 시 작품에서 달구성과 도수원을 빗대어 나라 잃은 설움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반 남아 무너진 달구성(達句城) 옛터에나

숲 그늘 우거진 도수원(刀水園) 놀이터에

오고가는 사람이 많기야 하여도

방천(防川)둑 고목(古木)처럼 여윈 이 얼마랴.” (*)

,

1926325일 오후 3시경, 최승희는 대구에 도착했다. 경성에서 나서 자란 그녀가 다른 도시에 발을 디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당시 최승희의 나이는 16, 숙명여학교를 졸업한지 3일만이었고, 무용 입문 첫날이었다.

 

이후 40년 동안 최승희는 조선의 20여개 도시와 일본의 40여 도시,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 유럽과 남북미의 40개 이상의 도시에서 무용 공연을 했다. 1969년 사망할 때까지 세계 각지의 1백 개가 넘는 도시를 누볐지만 최승희의 생애 첫 방문지는 대구였다.

 

대구 방문 3일 전인 323일 최승희는 경성의 명문 여학교 숙명을 졸업했다. 최승희의 4학년 성적은 평점 90.5점으로 17회 졸업생 76명 중 8등이었다. 턱걸이로 90점을 넘긴 덕분에 9명의 우등졸업생 명단에 올랐는데, 그해 수석 졸업생은 평점 99.9점을 기록한 박경순이었다. 필명 박화성으로 이미 등단해 있었던 박경순의 졸업 성적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최승희가 숙명여학교 졸업직후 일본 유학을 출발했을 당시의 사진

 

명문 숙명여학교를 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최승희는 우울했다. 76명의 졸업생 중에서 진로가 막막한 유일한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날 저녁 오빠 최승일의 졸업 선물이 그녀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이시이 바쿠의 무용 공연을 관람한 것이다.

 

일본 근대무용의 선구자 이시이의 공연을 본 최승희는 그 자리에서 무용 입문을 결심했다. 공연 후 대기실로 찾아간 최승희는 이시이 바쿠로부터 입문 허락을 받았다. 다음날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냈고, 일본으로 건너가기 위한 도항증도 발급받았다.

 

번갯불에 콩 볶듯 도일 준비를 마친 최승희는 25일 아침 9시 경성역 2층 식당에서 가족과 이시이무용단이 모인 가운데 입단 계약을 맺었다. 3년간의 일본 무용 유학이 시작된 것이다.

 

경성역 플랫폼에서 벌어진 어머니와의 이별은 다음날 아침 <매일신보>에 보도될 정도로 요란했지만, 그녀의 슬픔은 이내 잦아들었다. 첫 기차여행의 흥분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앞날에 대한 기대와 불안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시이 바쿠는 자서전 <춤추는 바보>에서 기차가 용산역을 지날 무렵 최승희는 차창을 바라보며 학교에서 배운 창가를 부르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대구역에 도착하는 급행열차를 묘사한 그림엽서.

 

 

오전10시 경부선 2등칸에 올라 경성을 출발한 이시이 무용단은 오후 3시경 대구역에서 하차했다. 다음날인 26일 저녁 7시에 <대구극장>에서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시이무용단의 조선 순회공연 일정은 경성(321-23)과 인천(24), 대구(26)와 부산(27-28)으로 잡혀 있었다.

 

그날 이시이무용단의 대구 숙소가 어디였는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아마도 대구역과 대구극장에서 가까운 일본식 여관이었을 것이다. 경성에서도 역과 공회당의 중간 지점에 있는 일본식 하라카네(原金)여관에 묵었었다.

 

1923년 대구여관조합에서 발간한 안내책자에 따르면 당시 대구역 근처에는 11개의 여관이 밀집해 있었다. 덴야(天屋), 하나야(花屋), 카야케(栢家), 요시다(吉田), 타다야(唯屋), 다나카(田中), 츠타야(ツタ), 시라누이(不知火), 고야마(小山), 모리타(森田)여관 등이 그것이었다. 이중 타다야 여관이 최고급이었고 다른 여관들은 중소규모로 값이 저렴했다. 2등칸 기차로 여행하던 이시이 무용단으로서는 타다야 여관을 제외한 다른 여관 중에서 숙소를 선택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대구역

 

무용단원들은 숙소에 짐을 풀고 저녁식사를 마친 후, 다음날 공연을 위한 음향과 조명을 설치하기 위해 <대구극장>으로 향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할 일이 있었겠지만, 입단 첫날인 최승희는 어쩔 줄 모르고 따라만 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무용 수업에는 엄격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자상했다는 이시이 바쿠가 최승희에게도 무언가 역할을 맡겼을 것임에 틀림없다.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을 때 최승희는 그날 이른 아침 체부동 집을 나서 대구의 여관방에 눕기까지를 곰곰 되새겨 보았을 것이다. 돈이 없어 수학여행을 가지 못했던 그녀로서는 그날 밤이야말로 집을 떠나 여관 잠을 자게 된 첫날이었다. 이후 최승희는 숱한 여관과 호텔 잠을 자야 했지만, 아마도 대구에서의 그 첫 밤을 평생 잊지 못했을 것이다. (*)

 

,

노다객 이헌구의 경성 다방 성쇠기다방문화의 개척자들이 공유한 다방 경험을 써내려간 주관적 문화사라면, 그 내용은 시대적, 지리적, 문화적 조건 속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우선, 다방문화의 개척자들은 대체로 1900년대 중반에서 1910년대 초반에 걸쳐 태어난 사람들이다. 이들은 1920년대 중반에야 청년기에 도달했으므로, 그 이전의 끽다점과 끽다문화를 경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들이 <손탁호텔>이나 정동의 다른 호텔에서 커피나 홍차를 마셔보지 못한 것은, 그때 그들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호텔>의 초기 끽다 서비스를 누려보지 못한 것도 그들이 아직 십대이거나 그보다 더 어린 청소년이었기 때문이다.

 

1914년 6월7일자 <매일신보>에는 탑골공원내에 개업한 <탑동 카페> 사진을 실었다. 이 카페는 커피와 차뿐 아니라 식사와 맥주도 제공했다.

 

그와 같은 이유로 더 이전의 끽다점들, <홍릉앞 끽다점(1889)>이나 <청향원(1900)>, <남대문역 끽다점(1909)>이나 <청향다원(1910)>, <탑다원(1914)> 등을 이들이 경험해 볼 수 없었고, 따라서 노다객 이헌구의 경성 다방 성쇠기에 포함될 수 없었다.

 

둘째, 초기 다방문화의 개척자들이 대체로 경성에 거주했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이들이 인천의 <대불호텔(1888)>이나 <스튜어드호텔(1888)>, 혹은 <꼬레호텔(1890)>을 경험하기 어려웠던 것은,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개업된 호텔들이기도 했지만, 설사 그 호텔들이 오래 유지되었거나 다른 끽다점들이 생겼더라도 이들이 인천까지 자주 여행할 용의는 없었을 것이다.

 

이들이 끽다문화를 향유한 것은 경성에서도 좁은 지역, <카카듀(1928)><멕시코(1929)><제비(1933)>가 있었던 종로와, <후타미><금강산><명치제과> 등이 있었던 충무로에 한정되어 있었다.

 

경성 다방 성쇠기는 또 하나의 지리적 배경을 안고 있었다. 도쿄였다. <청색지> 동인의 절반이 일본 유학을 경험했고, 해외문학파의 거의 전부가 일본 유학생 출신이었다. 그들이 유학했던 도시는 십중팔구 도쿄였다.

 

일본 최초의 끽다점으로 알려진 <카히사칸(可否茶館)>의 내부를 묘사한 스케치

이들은 도쿄 시절에 끽다경험을 습득한 이들이 근대적이고 선진적으로 보이는 그 문화습관을 이어나가려 한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도쿄에서 자신들이 즐기던 분위기의 끽다점을 선호했으리라는 것은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후타미>도쿄식 끽다점을 표방한 것도 그런 의도가 깔려 있었을 것이다.

 

셋째 경성 다방 성쇠사1920년대말과 1930년대 초의 도쿄와 경성이라는 시공이 연결되면서도 뒤틀리는 문화적 맥락을 반영할 수 밖에 없었다. 카페 문화와 끽다점 문화가 그것이다.

 

일본에서는 1910년대에 끽다점이 먼저 시작되고, 1920년대에 주류와 여급 서비스가 부가된 카페가 생겼다. 일본의 카페는 서양의 카페와 그 함의가 달랐다. 그것은 서양의 카페 개념에 알콜과 에로 서비스를 가미해 이뤄진 일본 독특의 문화였다.

 

그런데 경성에서는 1920년대 일본으로부터 카페 문화가 먼저 들어와 번성했고, 끽다점 문화는 1920년대 후반에 가서야 뒤늦게 도입되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도쿄와 경성의 두 도시에서 카페와 끽다점은 모두 넌센스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강조점은 달랐다. 카페는 에로()’라는 평가였고 끽다점은 그로(테스크)’라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경성의 끽다점 내부를 묘사한 박태원의 스케치

 

에로의 카페와 그로의 끽다점은 둘 다 사회적 용인 범위 안에 있었지만 끽다 문화를 직업없는 젊은이들의 비생산적인 소일거리로 비난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끽다객들은 끽다점을 시대적 고뇌를 털어놓고 창작의 계기를 마련하는 아지트로 활용하곤 했다. 노다객 이헌구가 경성 다방 성쇠기에서 전달하려고 했던 메시지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경성의 카페문화와 끽다점 문화의 생명은 그다지 길지 못했다. 이헌구의 경성 다방 성쇠기가 출판된 지 석달 후인 19387월 중일 전쟁이 발발하고 이것이 1941년의 태평양 전쟁으로까지 이어지면서 경성의 카페와 끽다점들은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

노다객 이헌구가 <청색지> 창간호에 기고한 경성 다방 성쇠기를 중심으로 1920년대와 그 이전의 끽다 관행과 끽다점에 대해 정리해 보았다. 이헌구의 글은 조선 근대 끽다객들이 향유하던 끽다 문화에 대해 귀중한 정보를 전해 준다. 그러나 이 글은 몇 가지 오해의 여지를 남기도 했고, 그 중 일부는 이글을 통해 바로 잡을 수 있었다.

 

노다객 이헌구가 서술하지 않은 중요한 사실은 조선인들의 끽다 관행과 끽다점 문화가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연원이 깊다는 것이다. 이헌구는 한국의 끽다문화가 1923년 진고개에 개업한 <후타미>1927년 관훈동에 문을 연 <카카듀>에서 시작되었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이번 조사 결과 <후타미>의 개업 시기는 1923년이 아니라 1926822일이었고, <카카듀>의 창업도 1927년이 아니라 19289월초였다. 또 노다객 이헌구는 <후타미>가 이른바 순끽다점이었다고 단정했지만 근거는 희박했다. <후타미>가 과자와 식사, 그리고 주류까지 판매했다는 광고문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왈츠와 닥터만>에서 마셨던 이 커피가 <카카듀>를 찾아나서는 출발점이었다.

 

과자점이나 식당, 주점에 병설된 끽다점은 <후타미> 이전에도 다수 존재했다. 과자점을 겸했던 <쇼카코오키나(1921)><다리야(1917)><후타미>보다 5-6년 전에 개업했고, 식사 제공을 했던 끽다점으로는 <탑동 카페(1914)><청향다원(1910)>, <남대문역 끽다점(1909)><청향원(1900)>, <홍릉앞 끽다점(1899)> 등이 존재했었다.

 

식사와 스낵 뿐 아니라 숙박과 함께 커피와 차를 제공한 호텔도 있었다. <조선호텔(1924)><손탁호텔(1902)>, <대불호텔(1888)>이 그것이다. <손탁호텔>과 동시대에 정동 인근에서 영업했던 임페이얼호텔(1903년 이전)과 팔레호텔(1901), 스테이션호텔(1901)과 서울호텔(1898)도 끽다 서비스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있고, <대불호텔>과 동시대의 <스튜어드호텔(1888)><꼬레호텔(1890)>에서도 서양인 고객들에게 커피와 차를 판매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본다면 조선의 끽다문화의 시작을 1923년의 <후타미>1927년의 <카카듀>로 규정한 노다객 이헌구는, ‘경성 다방의 역사에서 첫 40년을 생략해 버린 셈이다.

 

노다객 이헌구는 어째서 이 같은 실수를 한 것일까? 그 이유는 경성 다방 성쇠기의 첫 부분에 제시되어 있다. 그는 서울서 맨 처음 우리가 다점(茶店)이라고 드나든 곳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다. , 그는 경성 다방의 성쇠사()’를 서술한다고 했지만 그 역사는 우리들,’ 즉 이헌구와 그의 동료들이 경험했던 다방들을 중심으로 삼은 주관적 역사였던 것이다.

 

<청색지> 창간호에 실린 노다객의 기고문 "경성다방성쇠기"는 우리가 <카카듀>를 찾아나서는 열쇠가 되어 주었다.

 

<조선호텔(1914)>의 로비 라운지나 <팜코트 썬룸(1924)>은 이들이 편하게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듣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이 아니었을 것이다. 커피와 찻값이 비싸기도 했지만, 그런 곳에서는 벽화금붕어처럼 오래 머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노다객 이헌구의 경성 다방사에서 호텔들이 제외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남대문역 끽다점(1909)>이나 <경성역 티룸(1925)>은 왜 생략되었을까? 일본 유학 경험이 있는 그들은 경성역을 이용해야 했고, 거기에 끽다점과 티룸이 있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게다가 노다객 이헌구의 동료인 이상과 박태원도 작품 속에서 경성역의 끽다점과 티룸을 묘사하지 않았던가?

 

 

<왈츠와 닥터만> 커피 박물관에서는 <남대문역 끽다점(1909)>을 조선 최초의 끽다점이라고 서술했다.

 

하지만 이헌구와 그의 동료들에게는 <남대문역 끽다점><경성역 티룸>도 호텔의 끽다점들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그곳은 사람들이 시계바늘에 맞춰 움직이는 곳이지, 시간을 붙들어 매고 음악과 대화를 즐길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이상과 박태원이 그곳을 형상화했을 때에도 언제나 혼자서방문했던 곳으로 묘사되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노다객 이헌구의 경성 다방 성쇠기1920년대와 1930년대 서울의 다방에 대한 객관적 역사가 아니었던 것 같다. 따라서 그들이 경험하지 않은 끽다점들은 생략될 수 밖에 없었다. “경성 다방 성쇠기는 이헌구와 그의 문화예술계 동료들이 집단적으로 공유했던 주관적 문화사였기 때문이다. (*)

,

경성 다방 성쇠기의 저자 노다객이 다방 보헤미안의 수기의 저자 이헌구와 동일 인물임을 짐작하게 하는 또 다른 문헌 방증도 있다. 우선 노다객이 <카카듀>를 서술한 것을 읽어 보면 그가 이 끽다점에 대해 시시콜콜한 사항까지 잘 알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다.

 

조선사람 손으로 조선인 가()에 맨 처음 났던 다방은 9년 전 관훈동 초() 3층 벽돌집(현재는 식당 기타가 되어 있다.) 아래층 일우(一偶=한 구석)에 이경손씨가 포왜(布哇=하와이)에선가 온 묘령 여인과 더불어 경영하던 카카듀.

이 집은 이씨의 떼카(데카당스의 줄임말=퇴폐적) 취미를 반영하야 촛불을 켜고 인도 모직마포 테이블 크로스에다 조선가면을 걸어 놓고 간판 대신에 붉은 칠한 바가지 세 쪽을 달아 놓아 한때 경성 가두에 이채를 발하였다.”

 

영화 <밀정(2016)>에 재현된 <카카듀> 끽다점. 영화에서는 <카카듀>가 임시정부 요원들과 독립군들의 연락처로 활용되었다.

 

이 한 문단에 <카카듀>(1) 개업시기(9년 전), (2) 위치(관훈동 초입), (3) 건물(3층 벽돌집), (4) 경영자(이경손과 하와이 출신의 묘령 여인), (5) 조명(촛불), (6) 내부 장식(모직마포 테이블보와 조선 가면), (7) 간판(붉은 바가지 세 쪽) 등이 빼곡히 서술되어 있다.

 

경성 다방 성쇠기에 언급된 23개 다방 중에서 이만큼 자세하게 서술된 것은 없었다. 22개의 다방이 서술된 다방 보헤미안의 수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저자가 <카카듀>를 매우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친근감이나 애착심까지도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한편 1969819일의 <대한일보>에 실린 연재물 <문단교유기>에는 나와 해외문학 시대라는 이하윤의 기고문이 실렸는데, 이 글에도 <카카듀>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서술이 나온다.

 

해외문학파의 주창자의 한사람이었던 이하윤은 1928년 여름 회원들이 <카카듀>를 아지트로 활용했다고 회고했다.

 

그 무렵(=1928년 여름)에 북촌에는 다방이 하나도 없다가 안국동 네거리 가까운 관훈동의 돌집 아래층에 <까카듀>라는 이름의 끽다실(喫茶室)이 신장개업을 했는데 이선근의 아이디어가 많이 반영되었을 뿐더러 정인섭의 탈(가면)을 비롯한 실내의 장치와 조명이 주효하여 김진섭의 명명(命名)으로 <까카듀>는 문을 열게 된 것이다. 마담은 상해에서 돌아온 현여사, 영화감독 이경손이 턱시도를 입고 차를 나르기도 했다.

 

신문기자와 예술가들이 들러 가는, 아직도 상업화되지 않은 휴식처의 구실밖엔 못하던 오아시스, 여기가 우리 '해외문학' 동인들의 공적 집회소이기도 하였다. 밤 시간에는 가끔 촛불 밑에서 우리들만의 조용한 파티를 열고 즈불로브카로 젊은 기분을 돋우었다.” (이하윤, <연인>, 통권 30, 2016년 여름, 132-158.)

 

<카카듀>에 대한 이하윤의 회상도 상당히 구체적이다. 이 글은 <카카듀>가 개업한지 거의 40년 후에 쓴 회고문이지만 그 내용은 노다객 이헌구의 회상만큼이나 자세하다. 물론 이하윤의 서술에는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나 오류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 점은 나중에 다시 보기로 하고, 지금은 그의 회상이 노다객 이헌구의 회상과 내용상 얼마나 겹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해외문학파 동인 이헌구는 1928년 여름 <카카듀>를 중심으로 활동한 경험을 <청색지> 창간호에 기고했다.

 

대략의 비교만으로도 두 사람의 회상은 <카카듀>(1)개업 시기, (2)위치, (3)건물, (4)주인, (5)조명, (6)장식() 등에 대해 내용이 일치함을 알 수 있다. 노다객이 언급했으나 이하윤이 누락한 것은 마포 테이블 클로스간판을 대신했던 붉은 박 세 개뿐이다. 30년의 터울을 둔 두 회상이 이만큼 일치한 것은 그들이 함께 <카카듀>를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이하윤과 이헌구는 해외문학파 동인이다. 해외문학파의 전신 외국문학연구회는 1926년 가을 도쿄에서 7명의 동인으로 결성되었고 1927년 초 <해외문학> 창간호를 발간했다. <해외문학> 2호를 낼 즈음 8명의 회원이 더 가입했는데, 이때 이헌구가 해외문학파 동인이 되었다.

 

이들은 유학을 마치고 속속 귀국해서 1928년 여름 <카카듀>를 아지트 삼아 동인지 발간과 문학 행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1928913일의 <동아일보>에는 해외문학파의 젊은 문인들이 <카카듀>에서 톨스토이 탄생 1백주년을 기념하는 문학 모임을 열었다는 소식도 보도되었다.

 

 

, 이하윤과 노다객이 <카카듀>에 대해 거의 같은 회상을 한 것은 그들이 같은 시기에 <카카듀>에서 함께 활동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을 고려할 때 경성 다방 성쇠기의 저자 노다객이 해외문학파의 동인 이헌구와 동일인물이라고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론일 것이다. (*)

,

<청색지> 창간호(19385월호)경성다방 성쇠기를 기고한 저자 노다객은 결과적으로 몇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특히 <후타미><카카듀>의 개업시기에 대한 실수는 결정적이었다.

 

그 실수 때문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1923년에 개업한 <후타미>를 경성의 첫 커피 전문점으로, 1927년에 창업된 <카카듀>가 조선인 최초의 커피 전문점이라고 믿게 된 것이다.

 

문예동인지 <청색지> 1938년 5월호(창간호)에 실린 "경성 다방 성쇠기"는 1920년대와 30년대의 경성 끽다점들에 대한 흥미있는 정보를 많이 전해 주고 있지만, 적어도 <후타미>와 <카카듀>의 개업시기에 대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이 글의 저자 '노다객'은 누구일까? 

 

그런데 노다객은 누구였을까? “경성 다방 성쇠기의 첫 문단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서울서 맨 처음 우리가 다점(茶店)이라고 드나든 곳은 본정(本町, 혼마치=충무로) 3정목 현재 <> 근처에 있던 <이견(二見, 후다미)>이란 곳으로 이곳이 아마 경성 다방의 원조일 것이다. 그 다음이 현재 본정 2정목 식료품점 구옥(龜屋) 안에 있는 <금강산>으로 우리들과 같이 동경서 새 풍습을 익혀 가지고 돌아온 문학자나 화가나 그 밖에 지극히 소수의 내지인(內地人) 청년이 있을 뿐이었다.

 

아마 그 시절 다방 손님은 현재 적어도 나이가 30을 훨씬 넘은 중년으로 지금엔 대부분이 다방출입을 그만둔 이들이나 지금에 융성한 다방문화의 개척자들도 선공(先功)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글에 우리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우리동경서 새 풍습을 익혀 가지고 돌아온 문학자나 화가이며 현재 나이가 30을 넘었고 지금은 대부분 다방출입을 그만둔 이들이지만 다방 문화의 개척자들이라고 했다. 노다객도 그런 우리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당시 동인잡지의 관행에 따르면 작품이 아닌 잡문으로 여겨지던 세평이나 회고의 글은 동인들이 돌아가면서 집필하되 본명이 아니라 필명을 쓰곤 했다. 노다객이 <청색지> 동인의 한 사람일 것이라는 가정 아래 우선 창간호의 저자들을 모두 꼽아 보았다.

월간 문예동인지 <청색지> 1938년 5월호(창간호)에 실린 "경성 다방 성쇠기"의 저자는 '노다객'이라는 필명으로만 알려져 왔다. 그는 누구였을까? 그가 <청색지>의 동인이라면 아마도 '이헌구'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는 한달 전 <삼천리> 1938년 4월호에 "다방 보헤미안의 수기"라는 글을 기고했는데, 이 글은 소재와 주제의 양면에서 "경성 다방 성쇠기"와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글을 기고한 사람은 박종화, 김남천, 임화, 이원조, 윤태영, 청구자, 이헌구, 노다객, 안회남, 이상 등 10명이었고 편집자 구본웅까지 합치면 11명이었다. 임화는 2편의 글을 냈고, 전 해(=1937)에 사망한 이상의 글도 2편이 실렸다. 익명은 청구자노다객2명이었다.

 

이중 도쿄 유학 경험이 있는 사람은 김남천, 이원조, 이시우, 이헌구와 구본웅의 5명이었고, 30세가 넘은 사람은 이헌구(李軒求, 1905-1982)와 구본웅(具本雄, 1906-1952)이었다. 이헌구는 와세다대 불문과(1931)를 졸업했고, 구본웅은 니혼대 미학과(1929)와 다이헤이요(太平洋) 미술학교(1933)를 졸업했다. 두 사람 중 누가 노다객이었을까?

 

아마도 이헌구였을 것이다. 구본웅은 화가였고 글쓰기보다는 그림에 익숙했었음에 틀림없었을 뿐 아니라 당시 <청색지> 창간호의 편집을 맡고 있었으므로 따로 원고를 준비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노다객이 이헌구였을 것으로 단정하는 결정적 증거는 그가 한 달 전, 잡지 <삼천리> 19385월호에 다방 보헤미안의 수기라는 글을 기고했었다는 사실이다.

 

<청색지>에 실린 "경성 다방 성쇠기"의 저자 '노다객'은 <청색지>의 동인이자 해외문학파의 한 사람이었던 이헌구(왼쪽)로 추정된다. 오른쪽은 그의 와세다 대학 동창이자 해외문학파 동인이었던 절친 김광섭.  

 

다방 보헤미안의 수기는 당시 조선의 지식인과 문화예술인들이 다방 문화를 향유하는 방식을 서술하면서 각 다방들의 특징도 묘사했다. 따라서 다방 보헤미안의 수기경성 다방 성쇠기는 소재뿐 아니라 주제까지 거의 겹치는 글이다.

 

예컨대 다방 보헤미안의 수기에는 경성의 22개 다방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고, “경성 다방 성쇠기에도 23개의 다방이 언급되었는데, 그중 10개 이상이 공통된다. 따라서 경성 다방 성쇠기의 저자가 다방 보헤미안의 수기의 저자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은 대단히 높다.

 

물론 두 글이 각기 따로 언급한 다방들도 12(이헌구)13(노다객)에 이르기 때문에 두 글이 완전히 같은 글, 즉 재탕은 아니었다. 아마도 이헌구는 경성 다방 성쇠기다방 보헤미안의 수기의 속편 정도로 여겼을 것이다.

 

요컨대 경성 다방 성쇠기의 저자 노다객은 <삼천리>다방 보헤미안의 수기를 기고했던 이헌구와 동일 인물임에 틀림없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

,

경성 다방 성쇠기의 저자 노다객은 경성 최초의 끽다점이 <후타미>, 조선인 최초의 끽다점은 <카카듀>라고 회상했었다. 문예잡지 <청색지> 19385월호에 실렸던 기고문에서였다. 그러나 경성의 초기 다방을 기록한 다른 문헌들을 통해 검증해 본 결과 노다객의 회상이나 서술에서 착오가 발견되었다.

 

영화 <밀정(2016)>에 등장한 끽다점 <카카듀>. 그동안 <카카듀>는 1927년 영화감독 이경손이 개업한 것으로, 조선인이 세운 최초의 커피전문점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최근 조사에서 <카카듀>보다 먼저 생긴 다점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우선 <후타미>의 개업 시기는 1923년이 아니라 1926822일이었다. <후타미>는 노다객 등이 생각했던 것처럼 음악과 함께 커피와 차만 팔던 순끽다점이 아니었다. <후타미>는 커피와 함께 양과자와 샌드위치에 더해 칵테일까지 팔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타미>는 이전에 존재했던 <다리야(1917)><남대문역 끽다점(1909)>, <청향다관(1910), <오자와 신타로의 끽다점(1908)>과 송교(=신문로)<청향관(1908)>, 그리고 윤용주의 <홍릉앞 끽다점(1899)>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이 같은 조사결과를 종합하면 <후타미>뿐 아니라 <카카듀>에 대한 노다객의 서술도 근거가 허물어지게 된다. 일제 강점(19108) 이전에 개업됐던 <청향다관(19103)><청향관(1908)>, 그리고 <홍릉앞 끽다점(1899)>의 주인은 모두 조선인이었기 때문이다.

 

<청향다관(1910)>의 개업자는 윤진학(尹進學)이었고, <홍릉앞 끽다점(1899)>의 주인은 대한 사람윤용주(Yun Yong Ju)였다. 따라서 조선인 최초의 끽다점을 개업한 사람은 영화감독 이경손이 아니라 윤용주라고 해야할 것이다.

 

1928년 9월5일의 <동아일보>에는 <카카듀>의 개점 피로 행사 소식이 보도되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카카듀>의 개업시기는 1928년 9월초인 것을 알 수 있다.

 

호텔이나 식당과는 독립적으로 커피와 차만 판매하는 순끽다점만 고려한다면 <카카듀(1928)>가 여전히 최초의 조선인 다방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는 문헌 증거가 발견되었다. 종합 문예지 <개벽> 19265월호(통권69호)에는 첨구생(尖口生)이라는 필명으로 기고된 경성잡화(京城雜話)”라는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성용(李星鎔), 이관용(李灌鎔) 양 박사와 기독교 청년학관의 독일어 교사 낭승익(浪承翼)군은 남대문통 소광교 부근에 경성 초유의 <백림관(伯林館)>이라는 독일식 다점을 열고 영업을 개시하였다 한다. 아무 영업이라도 아니하는 것보다는 좋지마는 독일 유학생으로 다년간 연구의 결과가 그 뿐일까. 아마 그들의 전공한 학과는 다과(茶料)요 또 박사시험 논문에도 다점 설계서를 제출하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풍문에는 독일미인의 뽀이까지 있다고 하야 호기심으로 가는 사람이 많았었는데 실제에 가본즉 독일미인은 그림자(影子)도 업고 독신의 총각놈 뽀이만 쑥쑥 나와서 모두 실패하였다고.”

 

월간 종합시사문예잡지 <개벽> 1926년 5월호는 "경성 초유의 독일식 다점 <백림관>이 개업"되었음을 보도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경성 최초의 근대식 끽다점, 즉, 커피전문점은 <카카듀(1928년 9월개업)>이나 <후타미(1926년 8월개업)>가 아니라 <백림관>이 된다.

 

백림(伯林)’베를린의 한자식 음차어이므로 <백림관><베를린 끽다점> 정도로 번역될 수 있겠다. 기사에도 언급되었듯이 <백림관>독일식 다점이었다.

 

기사 후반부의 독일미인의 뽀이에 대한 풍문은 이성용의 <백림관> 경영을 돕던 그의 아내 마리 하우프트만을 여급으로 오해한 것이다. 이성용은 프라이부르크 유학 시절에 만난 체코 국적의 보헤미아 출신의 마리 하우프트만과 결혼, 192511월 함께 귀국했다.

 

<백림관(19265)>에 대한 다른 문헌이 추가적으로 발견되지 않아 더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백림관>은 이경손이 개업했던 <카카듀(19289)>보다 적어도 2년 이상 앞선 끽다점, 즉 커피 전문점이었던 것이다.

 

1926년 8월22일의 <경성일보>는 본정(=충무로) 3가에 '도쿄식 끽다점'을 지향하는 <후타미>가 개업했음을 알리는 광고가 실렸다. 이 광고는 22일부터 24일까지 열리는 개업 피로연 기간에 방문하는 고객에게 사은품을 증정하겠다고 홍보했다.

 

<백림관>의 발견은 경성 다방사를 근본적으로 뒤집어 놓을 예정이다. 그동안 경성 최초의 순끽다점으로 (잘못) 알려진 <후타미(19268)>보다 <백림관>의 개업이 넉 달 이상 앞섰기 때문이다.

 

경성의 첫 커피 전문점은 일본인 요시카와(吉川)가 개업한 <후타미>가 아니라 조선인 이성용(李星鎔)과 이관용(李灌鎔)과 낭승익(浪承翼)이 공동 창업했던 <백림관>이었던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