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량좌(草梁座소오리오자, 1914-1917)는 부산 동구 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극장이었다. 일제강점기의 부산 극장들은 대부분 일본인이 밀집 거주 지역이자 상업 지구였던 중구 지역에 집중되었으나 초량좌와 유락관(遊樂館유라쿠칸, 1921-1932)과 중앙극장(中央劇場주오게키조, 1930-1945)의 3개 극장은 동구지역에서 문을 열었다.
초량좌는 1910년에 개관되었다는 설도 있었으나 문헌으로 확인된 것은 1914년 2월4일자 <매일신보>의 보도가 처음이었다. 이 기사는 “이기세 대표가 이끄는 신파극 유일단(唯一團) 일행인 문수성, 이웅수, 윤상희의 지방순회 공연이 초량좌의 무대에 올라 성황을 이루었다”고 보도했다.
1914년 11월1일 조선시보사가 발행한 <경상남도 안내> 제11장의 부산의 ‘극장 및 기석’을 서술한 글에서도 부산좌, 행좌, 동양좌, 질자좌, 욱관, 보래관, 변천좌 등과 함께 초량좌가 개관되어 있었던 사실을 서술했고, 부산일보(1916년 6월21일, 1917년 2월20일)와 조선시보(1916년 8월27일), 1917년 4월1일 부산부청이 발행한 <부산부전도>에도 부산좌, 보래관, 대흑좌(동양좌가 개명된 극장), 행관, 상생관과 함께 초량좌가 수록되어 있었다.
초량좌의 위치는 경부선의 부산 종착지인 초량역 인근 초량천 하구 옆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량좌는 행좌(1903-1915)와 송정좌(1903-1911) 이래 개관된 총 10개의 극장 중에서 영도의 질자좌(1912-1918)와 함께 일본인 거류 및 상업 중심지였던 오늘날의 중구 지역에서 벗어나 설립된 유이의 극장이었다. 초량좌는 일본인들 외에도 조선인들이 자유스럽게 출입할 수 있었던 극장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박원표가 저술한 <향토부산(1967)>의 “부산의 흥행가”라는 글에서는 초량좌의 위치에 대하여 “…초량천을 사이에 두고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에 초량좌가 있었다”고 기술했다. 이어 박원표는 초량좌가 “... 개화기에 있던 서울의 연극단들이 부산에 진출, ... 토월회가 이 곳 무대에서 그 연기를 자랑”하였다고 기술했으나, 여기에는 오류가 있다. 토월회가 창립된 것은 1922년이므로 1917년경 폐관된 초량좌에서 공연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1921년 초량지역에 두 번째로 세워진 극장 유락관에서 공연되었다고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한편 박노홍은 <한국극장사5(1979)>에서 “…철로가 생긴 후(1905년) 초량 너머에 있는 철도역 근변에 1912년 철도영관이라는 극장이 있었던 것만 가려내었다.”고 기술했다.
유락관은 부산의 일본인 거류민 1세대 사업가 오이케 타다스케(大池忠助)가 설립한 부산흥산(釜山興産) 주식회사가 자본금 15만원, 불입금 3천5백원을 출자하여 건축되었는데, 115명의 주주가 소유한 총주식 3천주 중에서 오이케 타다스케가 1천280주를 보유한 대주주였다.
조선인 연극과 영화 및 연예공연에 배타적이던 대부분의 부산 극장들과는 달리 유락관은 조선인들의 공연과 관람에 개방적이었다. 최천택(조선일보, 1923년 1월2일), 부산여자청년회의 연극(동아일보, 1923년 3월6일), 교남학우회 순회연극(조선일보, 1923년 8월7일), 조선여자교육협회 순회극단(동아일보, 1923년 12월22일) 등이 유락관에서 공연한 바 있었다. 유락관은 1932년 1월2일 발생한 화재로 전소된 후 복구되지 못했다.
부산좌(1907-1923)와 유락관의 극장주 오이케 타다스케가 1930년 사망하자 장남 오이케 겐지(大池源二, 1892~?)가 이를 승계했고, 건축 중이던 중앙극장(1930-1936)도 완공해 경영했다. 중앙극장은 연극장으로 출발했으나 1936년 상생관 극장주 미츠오 미네지로(滿生峰次郞)가 인수하면서 대생좌(大生座다이세이자, 1936-1945)로 개칭,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전환되었다.
중앙극장과 대생좌는 조선인 영화를 상영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1932년에는 <방아타령>(31, 김상진)과 <금강한>(31, 나운규)을 시작으로 1934년에는 <아리랑>(26, 나운규), <아리랑2>(30, 이구영), 1936년에도 <홍길동전>(34, 김소봉), <춘향전>(35, 이명우), <장화홍련전>(36, 홍개명), <수일과 순애>(31, 이구영), <아리랑3>(36, 나운규) 등의 조선영화가 상영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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