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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량좌(草梁座소오리오자, 1914-1917)는 부산 동구 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극장이었다. 일제강점기의 부산 극장들은 대부분 일본인이 밀집 거주 지역이자 상업 지구였던 중구 지역에 집중되었으나 초량좌와 유락관(遊樂館유라쿠칸, 1921-1932)과 중앙극장(中央劇場주오게키조, 1930-1945)3개 극장은 동구지역에서 문을 열었다.

 

초량좌는 1910년에 개관되었다는 설도 있었으나 문헌으로 확인된 것은 191424일자 <매일신보>의 보도가 처음이었다. 이 기사는 이기세 대표가 이끄는 신파극 유일단(唯一團) 일행인 문수성, 이웅수, 윤상희의 지방순회 공연이 초량좌의 무대에 올라 성황을 이루었다고 보도했다.

 

1914111일 조선시보사가 발행한 <경상남도 안내> 11장의 부산의 극장 및 기석을 서술한 글에서도 부산좌, 행좌, 동양좌, 질자좌, 욱관, 보래관, 변천좌 등과 함께 초량좌가 개관되어 있었던 사실을 서술했고, 부산일보(1916621, 1917220)와 조선시보(1916827), 191741일 부산부청이 발행한 <부산부전도>에도 부산좌, 보래관, 대흑좌(동양좌가 개명된 극장), 행관, 상생관과 함께 초량좌가 수록되어 있었다.

 

 

초량좌의 위치는 경부선의 부산 종착지인 초량역 인근 초량천 하구 옆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량좌는 행좌(1903-1915)와 송정좌(1903-1911) 이래 개관된 총 10개의 극장 중에서 영도의 질자좌(1912-1918)와 함께 일본인 거류 및 상업 중심지였던 오늘날의 중구 지역에서 벗어나 설립된 유이의 극장이었다. 초량좌는 일본인들 외에도 조선인들이 자유스럽게 출입할 수 있었던 극장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박원표가 저술한 <향토부산(1967)>부산의 흥행가라는 글에서는 초량좌의 위치에 대하여 초량천을 사이에 두고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에 초량좌가 있었다고 기술했다. 이어 박원표는 초량좌가 “... 개화기에 있던 서울의 연극단들이 부산에 진출, ... 토월회가 이 곳 무대에서 그 연기를 자랑하였다고 기술했으나, 여기에는 오류가 있다. 토월회가 창립된 것은 1922년이므로 1917년경 폐관된 초량좌에서 공연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1921년 초량지역에 두 번째로 세워진 극장 유락관에서 공연되었다고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한편 박노홍은 <한국극장사5(1979)>에서 철로가 생긴 후(1905) 초량 너머에 있는 철도역 근변에 1912년 철도영관이라는 극장이 있었던 것만 가려내었다.”고 기술했다.

 

 

유락관은 부산의 일본인 거류민 1세대 사업가 오이케 타다스케(大池忠助)가 설립한 부산흥산(釜山興産) 주식회사가 자본금 15만원, 불입금 35백원을 출자하여 건축되었는데, 115명의 주주가 소유한 총주식 3천주 중에서 오이케 타다스케가 1280주를 보유한 대주주였다.

 

조선인 연극과 영화 및 연예공연에 배타적이던 대부분의 부산 극장들과는 달리 유락관은 조선인들의 공연과 관람에 개방적이었다. 최천택(조선일보, 192312), 부산여자청년회의 연극(동아일보, 192336), 교남학우회 순회연극(조선일보, 192387), 조선여자교육협회 순회극단(동아일보, 19231222) 등이 유락관에서 공연한 바 있었다. 유락관은 193212일 발생한 화재로 전소된 후 복구되지 못했다.

 

부산좌(1907-1923)와 유락관의 극장주 오이케 타다스케가 1930년 사망하자 장남 오이케 겐지(大池源二, 1892~?)가 이를 승계했고, 건축 중이던 중앙극장(1930-1936)도 완공해 경영했다. 중앙극장은 연극장으로 출발했으나 1936년 상생관 극장주 미츠오 미네지로(滿生峰次郞)가 인수하면서 대생좌(大生座다이세이자, 1936-1945)로 개칭,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전환되었다.

 

중앙극장과 대생좌는 조선인 영화를 상영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1932년에는 <방아타령>(31, 김상진)<금강한>(31, 나운규)을 시작으로 1934년에는 <아리랑>(26, 나운규), <아리랑2>(30, 이구영), 1936년에도 <홍길동전>(34, 김소봉), <춘향전>(35, 이명우), <장화홍련전>(36, 홍개명), <수일과 순애>(31, 이구영), <아리랑3>(36, 나운규) 등의 조선영화가 상영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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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래관(寶來館호라이칸, 1914-1973)1914년에 행정1정목 15번지(=중구 창선동115번지, 현 국민은행 광복동점 자리)에 문을 열었다. 극장주 오노하이루(小野入)는 보래관을 연극전용 극장으로 개관해 일본 신극과 가부끼 등을 주로 상연하였다. 개관 당시의 입장료는 1등석 25, 2등석 20,3등석 10전이었다.

 

보래관은 개관 4개월만인 191539일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재개관했다. 이는 욱관이 19143월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전환한 것에 자극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보래관은 욱관에 이어 부산의 활동사진 상설관 2호로 기록된 셈이다.

 

 

19141219일에는 행관(幸館)이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전환함으로써 욱관, 보래관과 함께 부산의 초기 3대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꼽혔다. 1916111월에는 동양좌가 대흑좌로 이름을 바꾸면서 활동사진 상설관 4호가 되었고, 19161031일에는 변천좌가 헐린 자리에 상생관(1916-1945)이 활동사진 상설관 5호관으로 들어섰다. 욱관이 1916, 대흑좌가 1918년에 폐관된 이후부터 보래관은 행관, 상생관과 함께 부산의 3대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꼽혔다.

 

보래관은 부산에서 가장 먼저 연속활극 시리즈물을 선보인 극장이었다. 191678일 길이가 124,000척으로 2550권짜리 대작 영화 <하트3!!>을 상영한 이래 바이타그라프사, 유니버셜사, 파테사, 워너사, 메트로사 등이 만든 미국의 연속활극이 대부분 상영되었다. 초기에는 동경천연색활동사진주식회사와 특약을 맺고 경성의 황금관과 동시에 활동사진을 개봉했고, 후에는 일본의 데이코쿠키네마주식회사와 닛카츠, 미국의 유니버셜영화사, 폭스사, 바이타그라프사, 워너사,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사, 그리고 프랑스, 독일 등의 유럽 영화까지 상영했다.

 

보래관은 행관에서 1929년 처음으로 발성영화를 상영한지 1년 후인 1930726일 닛카츠(日活)의 제1회 작품인 <고향>을 상영하면서 발성영화 상영관 시대의 대중화를 열어 나갔다.

 

보래관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은 이바라키현 출신의 이와사키 다케지(岩崎武二)였다. 그는 도쿄의 영화사에서 근무하다가 1914년에 조선으로 건너왔고, 한동안 경성에서 일하다가 부산에 와서 보래관에서 지배인으로 오래 근무한 후, 경영을 승계했다.

 

 

1928년 보래관은 재건축되었다. 상층 250, 하층 450, 700석 수용의 2층 목조 건물로 재건축된 보래관은 같은 해에 행관, 상생관과 함께 키네마협회를 결성함으로써 경쟁을 줄이고 협력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키네마협회는 1930년 행관이 화재로 폐관된 후 행관의 뒤를 이은 소화관을 받아들여 부산활동사진상설관동업조합으로 바뀌었고, 1944년에는 부산영화극장이 가입해 부산영화연예조합을 개칭하면서 4개 극장 담합체제를 유지했다.

 

193792일 당시 극장주 이와사키 다케지는 극장 노후화를 이유로 재신축을 결정, 상영 중인 영화 프로를 부산극장으로 이동해 상영해 가면서 11개월 동안 건축비 30만원을 투입한 끝에 1938105일 새로운 보래관을 개관했다. 이는 140평 대지 위에 3층 석조건물(총 건평 341)을 갖춘 현대식 극장으로 수용인원은 952석이었다.

 

보래관은 일제에 앞장서서 협조했던 대표적인 친일 극장 중의 하나였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에 협조하기 위해 영화광고(1941525일자 부산일보)에서도 국민 모두가 방첩 전사라는 구호를 싣는가 하면 만주 사변 기념흥행식의 표현으로 자국전쟁을 미화 홍보하는 상영광고를 서슴지 않았다.

 

보래관은 조선인이 제작한 조선영화를 철저하게 외면한 극장이었다. 개관한 전 기간 조선영화를 단 1편도 상영하지 않았으나, 1944년 제작된 친일 어용영화 <거경전>이 유일하게 개봉된 바 있었다.

 

8·15 광복 후에는 194611<국제영화극장>으로 명칭을 변경했고, 한때 미군 전용 극장으로 운영되다가 1949118<국립 극장>, 1950618<문화극장>으로 명칭을 바꾸었다가 1973827일 폐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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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국제영화제가 부산에서 열리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부산이 오래 전부터 극장과 영화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이는 영화관의 역사와 그 수가 말해 준다.

 

부산지역에서는 1903년에 첫 극장이 개관한 이래, 대한제국 말과 일제강점기(1903-1945)23개 영화관이 존재했다. 해방 후(1947-2014)에도 단관극장이 78개소, 소극장(1982-1999)48개소, 복합영화관(1993-2014) 27개소가 개관과 폐관을 거듭하면서 부산 영화인들과 관객들에게 영화를 가까이 하게해 왔다. 여기서는 일제강점기의 주요 극장들에 대해서만 일별해 보기로 하자.

 

부산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연 극장은 행좌(幸座, 1903-1915, 사이와이자)였다. 190312(추정), 부산의 사업가 하자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 1860-1942)가 남빈정 2정목 14번지(=중구 남포동245-1번지)에 개관한 행좌는 일본인들을 위한 연극장, 즉 가부키 극장이었다.

 

 

부산에서 두 번째로 개관한 극장은 송정좌(松井座마츠이자, 1903-1911), 행정 2정목(=중구 남포동, 또는 중구 광복동?)의 사안교(思案橋) 앞에 세워졌다. 부산의 여관업자 마츠이 고지로(松井幸次郎)가 설립한 이 극장은 연극장이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행좌와 송정좌에 이어 부귀좌(富貴座후키자, 1905-1907)가 부평정(=중구 부평동)에서 문을 열었으나 190781일 발행된 지도 <부산항시가 명세도>에 부귀좌가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 전에 폐관된 것으로 보인다. 1906315일 발행된 <조선실업> 10호가 “(행좌와 송정좌와 부귀좌의) 세 극장이 모두 비좁다고 서술한 것을 보면 부산의 초기 3대극장은 규모가 크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부산 최초의 대형극장은 부산좌(釜山座후산자, 1907-1923)이다. 부산의 일본인 거류민 1세대 실업가 오이케 타다스케(大池忠助)를 중심으로 야마모토 준이치(山本純一), 나까무라 토시마츠(中村俊松), 고지마 진기찌(五島甚吉)등이 공동 합자, 19074월 자본금 총액 3만원, 불입자본금 2만원을 출자하여 부산연극합명회사를 창립 후 부산좌를 건축, 그해 715일 개관했다.

 

부산좌 건물은 끽다점과 정원을 설치하는 등 부대시설과 조경에도 신경을 쓴 근대식 건축물이었다. 내부 관람석은 의자가 아니라 방석을 깔고 앉는 구조였다. 관람석 수는 무대 정면에 990, 좌우측이 각각 225석으로 총 1,540석으로 당시 조선과 만주를 통틀어 최대 규모였다. 연극 전용극장이었으나 연쇄극과 영화 상영도 계속되었고, 음악회, 무용발표회, 투견대회, 권투시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행사가 개최되었던 극장이었다. 특히 부산좌는 19151016<짝사랑>을 상영하면서 한국 최초의 연쇄극 상영극장으로 기록되었다.

 

 

1912년에는 4개의 극장이 추가로 개관했다. 변천좌(辨天座벤텐자1912-1916, 본정1정목, 중구 동광동116번지), 동양좌(東洋座도요자, 1912?-1918?, 부평정1정목, 중구 부평동), 질자좌(蛭子座히루고자, 1912-1918, 목도牧島, 영도), 욱관(旭館아사히칸, 1912-1916, 행정1정목, 중구 창선동)이 그것이었다.

 

변천좌는 극장주 교야마 하나마루(京山花丸)1916년 활동사진 상설관인 상생관(相生館아이오이칸)으로 전환하기 위한 개축공사에 들어가면서 5년 만에 폐관되었다.

 

동양좌는 부산좌와 함께 드물게 회전무대까지 갖춘 연극 전용 극장이었으나 1916년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전환하면서 대흑좌(大黑座다이고쿠자)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8년 발행된 <부산시가전도> 이후의 문헌에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대흑좌는 그 무렵 폐관된 것으로 보인다.

 

영도 지역에 처음 세워진 질자좌의 극장주나 폐관 이유 등이 밝혀져 있지 않으나, 아마도 일본인 거류지 중심가에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흥행이 부진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욱관은 기석식(奇蓆式) 연극 공연장이었으나 활동사진 상영 시설을 확충하고 일본활동사진주식회사와 천연색활동사진주식회사와 영화공급 계약을 맺은 후 1914312일부터 연중무휴로 활동사진을 상영하기 시작했다. 욱관은 부산에서 활동사진 상영관 시대를 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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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1926328)><부산역사문화대전>의 서술을 실마리로 국제관의 주소가 대창정 4정목(=오늘날의 중앙동4) 40번지이며, 옛 부산역(=오늘날 무역회관)의 중앙대로 건너 맞은편임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부산영화체험박물관>은 국제관의 주소가 부산부 안본정(岸本町) 5번지(지금의 중구 중앙동)”이라고 서술했다. 또 하나의 국제관 극장의 주소가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안본정 5번지가 오늘날의 중구 중앙동이라고 보충서술함으로써 이 주소가 대창정 4정목 40번지와 어떤 관계인지의 의문을 일으켰다. 국제관이 안본정에서 개관했다가 대창정으로 이전했거나, 혹은 동리 이름이 안본정에서 대창정으로 바뀌었던 것일까?

 

국제관의 위치에 대한 엇갈린 서술들을 정리하기 위해 우선 부산역부터 조사했다. 국제관에 관한 거의 모든 신문기사가 부산역전의 국제관이라고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1910년에 완공된 부산역. 왼쪽 날개 인근에 철도호텔(1912)과 공회당(1928)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사진은 1910-1911년 사이에 촬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국제관의 대창정 4정목의 주소가 옛 부산역과 연관되어 서술되어 있었던 것처럼, 안본정 5번지의 주소는 부산일보사 사옥의 위치와 연관되어 있었다. 1929328일의 <매일신보>의 국제관 화재사건 기사에 따르면 이 화재로 국제관이 전소하고 인근의 이시카와(石川)정미소 창고 외에 12호를 반소하였다고 보도했다. 또 기사는 인근 부산일보사 사옥이 있어 화재가 옮겨올 것을 대비해 대피소동을 벌였다는 서술도 있다.

 

<부산일보(釜山日報)>19052월에 부산 변천정(辨天町, 현 중구 광복동 일대)에서 <조선일보>라는 제호로 창간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시사신보>로 제호를 바꾸었다가 190710월부터 <부산일보>로 개칭했다. 당시 사장은 아쿠타가와 타다시(芥川正)였고, 1915년 현재 자본금은 4만원, 소재지는 변천정 3-3번지로 기록되어 있었다.

 

<부산일보>191921일부터 개인 경영을 벗어나 자본금 25만원의 주식회사로 전환했고, 이때 안본정(岸本町, 현 중구 중앙동)에 사옥을 신축하여 19204월에 준공하였다. 1926328일의 <부산일보> 1면에 나타난 주소는 부산부 안본정 1번지로 되어 있었다.

 

1919년에 작성된 < 신정명강계입부산시가전도 ( 新町名疆界入釜山市街全圖 )>에 나타난 부산역과 부산일보사 위치. 안본정(녹색 동그라미)의 어느 곳엔가 <국제관> 극장이 설립되었는데, 이 지도가 작성될 당시에는 아직 극장이 들어서지 않았다.

 

<부산영화체험박물관>은 국제관 주소가 부산부 안본정(岸本町) 5번지라고 했으므로 국제관과 부산일보사 사옥은 두어 집 건너 도로의 같은 쪽에 면해 있었고, 국제관에 화재가 발생했을 당시 불이 옮겨 붙을 위험에 처했던 것도 사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부산일보사 위치는 2장의 고지도에서 확인됐다. 하나는 1919년에 작성된 <신정명강계입부산시가전도(新町名疆界入釜山市街全圖)>였다. 이 지도에는 부산역이 부산정거장으로 표기되어 있고 길 건너편이 안본정(岸本町), 안본정 건너편이 중정(), 안본정과 중정의 남쪽이 대창정(大倉町)이었다. 이들은 모두 신축 매립지에 새로 만들어진 토지이며, 신매립지의 서쪽 건너편은 본정(本町) 4,5정목이었다.

 

이 지도에서 부산일보사의 사옥은 부산정거장 맞은편이었고, 아마도 부산일보사 인근의 안본정은 다른 시설물이 들어서지 않은 공터처럼 되어 있었다. 국제관 극장은 19208월에 개관했으므로, 1919년에 작성된 <싱정명 강계입 부산시가전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1930년 이후에 작성된 <대일본직업별명세도>에 나타난 부산역과 부산공회당, 부산일보사 사옥과 국제관 극장 위치로 추정되는 지역.

 

또 한 장의 지도는 <대일본직업별명세도>로 작성연대가 미상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지도에는 부산역 앞 광장에 <부산공회당>이 표시되어 있다. 부산공회당의 주소는 대창정 4정목 89-1번지이었으므로 부산역 주소인 대창정 4정목 87-7”의 바로 옆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지도에는 <국제관>이 표시되지 않았다. 부산공회당 개관이 19283월이고 국제관의 화재 소실이 192912월이므로 이 지도는 1930년 이후에 작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두 지도에 국제관은 나와 있지 않지만, 적어도 부산역과 부산일보사 사옥과의 연관성을 고려할 때 그 주소인 안본정 5번지는 후일 안본정이 대창정 4정목으로 개칭되고 번지수도 40번지로 바뀐 것임을 알 수 있다. , 1929년말의 <대창정 4정목 40번지>는 그보다 10년쯤 전인 1919년의 주소 <안본정 5번지>와 같은 주소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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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114일의 <경성일보>는 후지마 시즈에(藤間靜枝, 1880-1966)113일 부산에 도착해서 4일 국제관(國際館)극장에서 공연을 열었다고 보도했다. 1926328일의 <부산일보>는 이시이 바쿠(石井漠, 1887-1962)327일과 28일 국제관 극장에서 공연을 열었다고 보도했다. 일본 근대무용의 두 선구자들의 부산공연은 국제관에서 열렸다는 말이다.

 

국제관은 어떤 극장이었을까? <부산역사문화대전>은 영화상영관 국제관이 “19208월 부산역 앞(지금의 중앙동)”에 개관되었다고 서술했고, <부산영화체험박물관> 블로그에는 1920822일에 개관했다가 1929227일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정리했다.

 

국제관 화재사건은 1929228일의 <경성일보><매일신보>, <부산일보> 등의 기사로 확인되지만, 개관일에 대해서는 자료가 제시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일제강점기의 부산 부사(府史)나 오늘날의 시사(市史)를 조사하면 확인될 것으로 보인다.

 

1920년대 국제관 극장이 있던 부산부 대창정 거리 풍경 (사진은 1933년경 촬영된 그림엽서)

 

특히 불분명한 것은 국제관의 소재지이다. <부산역사문화대전>은 국제관을 “1920년대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에 있던 영화관이라고 소개하면서 “19208월에 부산역 앞(현 중앙동)에 개관했다고 서술했다. 문제는 오늘날의 부산역은 중앙동이 아니라는 점이다.

 

중앙동은 부산 중구의 동쪽에 위치해 남북으로 길게 자리 잡고 있다. 남쪽으로 롯데백화점부터 북쪽으로 영주고가교까지 이어지는 해안지역으로 중앙대로와 해관로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다. 북쪽으로 영주2, 서쪽으로는 동광동, 부평동, 남포동에 인접해 있다. 서북쪽에는 복병산이 있고, 서남쪽에는 용두산이 있다. 남쪽과 동쪽은 남해안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부산역은 이 중앙동 포함되지 않고 중앙동 북쪽의 초량동에 속해 있다. 그런데 부산역 앞(현 중앙동)”이라고한 <부산역사문화대전>의 서술은 어찌된 것일까?

 

결론은 부산역이 이전했기 때문이다. 중앙동은 본래 초량 왜관 남쪽의 해변 지역이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부산항이 개항되면서, 과거의 초량 왜관이 폐쇄되고 지금의 중앙동 지역이 일본인 전관(專管)거류지가 되었다.

 

일본인 인구가 늘면서 1880년 복병산과 용두산 사이의 해안지역에 북빈정이 신설되었고, 1908-1913년의 북빈정의 매축 공사와 영선산의 착평 공사로 대규모 매축지가 조성되었다. 1908년 경부선 기점이 초량역(현 부산진 역사 자리)에서 부산역(중앙동 87-7번지에 임시 역사)으로 옮겨졌고, 1910년에는 부산역사와 제1부두가 완공되면서 경부선 철도가 부산역을 거쳐 제1부두(=부산잔교역)까지 연결되었다.

 

1908년경부터 북빈정에 새로 생기는 매립지에 좌등정(左藤町), 매립신정(埋立新町), 대창정(大倉町), 안본정(岸本町), 중정(中町), 고도정(高島町), 경부정(京釜町)등이 생겼다가, 이후 대창정(大倉町) 1·2·3·4정목과 대교통(大橋通) 1·2·3정목으로 통합 개칭되었다.

 

오늘날의 네이버 지도에 표시한 옛 부산역(대창정4정목=중앙동4가 87-7번지)과 국제관 극장(대창정4정목=중앙동4가 40번지)

 

해방 후인 1947년 일본식 동명을 한국식 동명으로 변경하면서 대창정 1·2·3·4정목은 중앙동 1·2·3·4가로, 대교통 1·2·3정목은 대교동 1·2·3가로 개칭되었다. 1982년 대교동 1·2·3가가 중앙동 5·6·7가로 개칭되고, 부산이 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승격한 1995년 이 지역은 중앙동 1·2·3·4·5·6·7가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이같은 지명 개칭의 역사를 고려하면 1920년대의 대창정 4정목은 오늘날의 중앙동 4가로 이어진 것이다.

 

따라서 1920년대의 부산역 주소 대창정 4정목 87-7번지는 오늘날의 중앙동 487-7번지로 지금은 부산 무역회관이 들어서 있는 지역이다. 1929228일의 <매일신보>는 국제관 극장의 주소가 대창정(大倉町) 4정목 40번지로 밝혔으므로, 당시의 부산역과 국제관 극장은 가까운 위치였음을 알 수 있다.

 

, 1920년대의 대창정 4정목 40번지는 오늘날의 중앙동 440번지에 해당하므로 이를 오늘날의 지도에서 찾아보면 오늘날의 중앙대로와 부산전철1호선 중앙역를 사이에 두고 옛 부산역은 그 동쪽에, 국제관 극장은 그 서쪽에 위치했었음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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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마 시즈에의 1925114일 부산 공연에 대해서는 기록이 많지는 않지만, 7-8일의 경성공연 못지않은 성황을 이룬 것은 확실해 보인다. 1925114일의 <매일신보>조선인과 일본인을 물론하고 인기가 물 끓듯 하여 멀리 동래(東萊) 울산(蔚山) 방면으로부터 음악 동호자와 예기(藝妓)의 단체 총견의 신청이 답지하였다고 보도했다.

 

같은 기사의 보도에 따르면 후지마 시즈에 일행은 “3일 아침 부관연락선으로 부산에 상륙한 이후 후원사인 경성일보-매일신보사의 지국원들, 부산의 악단 및 음악 동호자들, 그리고 예기(藝妓) 단체의 환영을 받았다. 114일의 <경성일보>도 후지마 시즈에가 “(3) 정오부터 후원회인 부산 죽우회(竹友會)와 권번 예기 연합회의 발기로 카모카와(加茂川)에서 개최한 환영회에 참석했고, “오후에는 부산 악단 유지의 환영연에 참례했다고 전했다.

 

후지마 시즈에 일행은 4일 아침 부산부내를 자동차로 관광한 후, 그날 저녁 부산역 앞의 <국제관(國際館)> 극장에서 공연을 가졌는데, 114일자 <매일신보>오늘밤의 국제관은 건축 이후로 처음 보는 성황을 이루었다고 공연의 성황 소식을 전했다.

 

1925년 11월5일의 <경성일보>는 후지마 시즈에 일행이 부산에 도착했음을 사진과 함께 보도했다. 

 

일본 최고의 무용가라고 소개되었던 후지마 시즈에는 192511월의 부산 및 경성 공연 이외에도 이후 몇 차례 더 조선 공연을 단행했고, 그때마다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도 오늘날 한국 무용계가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보다 반년이나 나중에 조선에 데뷔했던 이시이 바쿠가 오히려 조선 무용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까닭은 무엇일까?

 

후지마 시즈에와 이시이 바쿠는 둘 다 일본 근대무용의 선구자들이었고, 일본의 패전 후에도 중견 및 원로로서 일본 무용계를 이끌어 나간 인물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무용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은 이시이 바쿠였다. 거기에는 최승희의 역할이 컸다. 이시이 바쿠가 조선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그가 최승희의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최승희의 영향을 제외하더라도 두 사람의 무용의 성격은 사뭇 달랐다. 이시이 바쿠는 그의 자전적 수필집인 <춤추는 바보(1955)>에서 후지마 시즈에와 자신의 무용 스타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3가지로 평가했다.

 

(1). “나는 일본무용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 제극의 연구생 시절, 돌아가신 미즈키 우타와카 스승에게 배우는 동안 정말 싫어하게 되었다. 그것이 내가 창작 무용 운동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2) “그러나 시즈에 씨의 춤은 ... (42) 뭔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이 있고, 그리고 그것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확신한다.” (3) “일본무용의 기본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일대 혁명이나 다름없, “질식해가는 일본무용을 소생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데, 그 일을 할 사람은 시즈에씨를 빼놓고는 다른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일본 전통무용을 싫어하는 이시이 바쿠도 후지마 시즈에의 무용만은 좋아한다는 언급은, 실상 후지마 시즈에의 무용이 일본 전통 무용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다만 이시이 바쿠가 관심을 갖는 것은 후지마 시즈에의 무용에 어떤 근대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 후지마 시즈에의 무용은 근본적으로 일본 무용이며, 일본의 전통 무용의 색깔을 유지하면서 그 형식이나 내용을 근대화해 나가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는 일본 전통 무용을 뿌리부터 부정하고 완전히 새로운 근대적 신무용을 창작해 나가던 이시이 바쿠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따라서 조선인들이 이시이 바쿠의 무용과 후지마 시즈에의 무용을 나란히 접했을 때에는 이시이 바쿠의 무용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무용에는 서구적 취향이 느껴질지언정 일본 냄새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후지마 시즈에의 무용은 그것이 가진 탁월한 근대성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들은 그것을 좋아할 수 없었다. 그의 무용이 근본적으로 일본 무용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후지마 시즈에가 최승희같은 조선인 제자를 얻지 못한 근본 이유였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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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근대무용가로 부산을 방문해 공연을 가진 것은 이시이 바쿠가 처음이 아니었다. 그에 약 5개월 앞선 1925113일 후지마 시즈에(藤間靜枝)가 부산을 방문한 바 있었다.

 

1925115일의 <매일신보>에 따르면 후지마 시즈에는 113일 부산에 도착, 114일밤 부산에서 공연을 가졌고, 115일 밤에 경성에 도착, 117일과 8, 경성공회당에서 2회의 공연을 가졌다.

 

후지마 시즈에의 공연은 부산과 경성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 정상급 무용가가 처음으로 조선을 방문해 공연을 가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인뿐 아니라 조선의 무용가들도 그를 반겼고, 그의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일대 성황을 이뤘다.

 

후지마 시즈에의 경성 첫날 공연 당일인 1925117일의 <매일신보>일본의 무용계의 여왕 후지마 시즈에 여사의 일행이 경성에 도착한 후로 시내의 인기는 거의 백열화하였다고 보도했다. ‘백열화하얀 색이 될 정도로 뜨거웠다는 뜻이다.

 

 

1925년 11월3일의 <경성일보>가 보도한 후지마 시즈에(藤間靜枝)의 무용 자태.

 

 

첫날 공연 상황을 보도한 1925119일의 <매일신보>경성 시중은 물론이요 멀리 인천 수원 등으로부터후지마 여사의 무용을 보기 위해 모여든 군중이 개장 한 시간 전부터 공회당 부근에 사람바다를 이루었고 정각인 여섯시가 되자 장내는 이미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고 했다. 113일의 <매일신보>는 후지마 시즈에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었다.

 

(=후지마 시즈에)는 본시 일본에서 미인의 산지가 되는 눈의 나라 니가타(新潟)에서 태어났다. 미인은 박명이라고 처녀의 몸은 구르고 굴러서 도쿄에서 기생노릇을 하게 되었었다. 어리고 고은 그는 비록 기생노릇은 하나 살에 주린 남자의 두려운 손길에는 죽기를 한하고 넘어가지 않았으며,

 

자나 깨나 문학서류만 애독을 하다가 당시 문명이 천하에 높은 젊은 문학가 나가이 카후(永井荷風, 1879-1959)씨와 사랑의 낙원을 열었으나 그의 애닯게 기대하던 첫사랑은 얼마 아니하여 무참히 깨어지고 말았다. 그는 눈물을 뿌리며 나는 일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가슴에 남은 정혈은 모조리 무용을 위하여 바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그 길로 무용연구에 심신을 바치자 일진월보하는 그의 천재는 차차 광명을 찾게 되어 나중에는 세상의 칭찬의 표적이 되었으며, 뒤를 이어 규수화가와 청년예술가들 사이에는 그의 빛나는 무용의 천재를 영원히 북돋고자 후지카게카이(藤陰會)라는 후원회까지 세우게 되었다.”

 

 

1925년 11월10일의 <매일신보>가 보도한 후지마 시즈에의 경성 공연 무대 장면.

 

이시이 바쿠도 후지마 시즈에의 사람됨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했다. 그는 저서 <춤추는 바보(1955)>에서 후지마 시즈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후지마 시즈에 씨가 신무용을 시작한 것은 꽤 오래된 일이다. 우리가 제극의 연습생 시절(1911-1915)이었던 것으로도 기억한다. 그 후 후지마 시즈에는 일본 고유의 고전 무용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스승 후지마 종가와 문제를 일으켰는데, 시즈에 씨는 순순히 후지마라는 이름을 종가로 돌려보냈다.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후지마의 그림자를 따르기 위해 성을 후지카게(藤陰)로 바꾼 것은 당시 우리들 사이에 평판이 자자했다.”

 

내가 시즈에씨와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이다. 만나서 이야기를 해 보니, 아주 싹싹하고 가시가 없고, 숨기는 것 없는 솔직한 태도가 좋았다. 그 후, 십여 명의 무용가들과 함께 무용가 클럽이라는 사교 클럽을 만들어, 매월 한 번 긴자의 모나미(モナミ)에서 식사를 함께 했으므로, 무용에 대한 서로의 의견이라든가 불만 등을 이야기할 기회가 많아졌다. 일본무용연맹도 약 1년간의 회합 속에서 만들어졌다.”

 

어느 해 말 마루노우치()의 마플(マープル)에서 후지카게카이 20주년 기념회가 열렸다. 모인 사람이 2백 명이었다. ... 시즈에 씨의 후원회도 훌륭하지만, 여자의 솜씨 하나로 오늘의 지위를 쌓아 올린 후지카게 시즈에는 실로 훌륭한 여성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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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부산공연] 1. 이시이무용단의 첫 부산공연

 

최승희는 1926327일 부산을 방문했다.

대구에서와 마찬가지로 생애 첫 부산 방문이었고 이시이 무용단과 함께였다.

 

최승희는 323일 오빠 최승일과 함께 이시이무용단의 경성공연을 관람한 후 대기실을 찾아가 이시이 바쿠에게 무용 입문을 요청했고, 25일 아침 경성역 2층 끽다점에서 최승희의 부형, 이시이 무용단, 그리고 경성일보의 학예부장 토시오 테라다가 동석한 가운데 계약을 맺고 이시이 무용단의 일원이 되었다. 최승희가 부산을 방문한 것은 무용단 입단 3일째였다.

 

이시이무용단의 대구 공연은 26일 하루였지만 부산 공연은 328일과 29일 이틀로 예정되었다. 부산 인구가 1925년 현재 11만 명으로 대구의 8만 명보다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시이무용단은 경성(34)에서는 3, 인천(6)에서는 하루 동안 공연한 바 있었다. 당시 조선 제3의 도시였던 평양(9)에서는 공연을 갖지 않았다.

 

1926328일의 <부산일보(7)>는 이시이 바쿠 일행이 “27일 오후 215분에 부산본역에 도착했다고 보도했다. 부산역이라고 한 것은 당시에 부산역이 하나 더 있었기 때문이다. 부산잔교역이었다. 잔교역은 본역을 지나 한 정거장 다음이었는데, 일본으로 가는 부관연락선에 바로 승선할 수 있도록 부두 바로 옆에 마련되어 있었다.

 

1926년 3월28일의 <부산일보>에 실린 이시이 바쿠-이시이 코나미 부산공연 광고문

 

부산역에 내린 이시이무용단 일행은 우선 숙소인 오이케(大池)여관으로 향했다. 대부분의 주요 여관들이 부산역 근처에 있었던 것과는 달리 오이케 여관은 시내 번화가에 있었기 때문에 이시이 일행은 자동차로 이동해야 했다고 <부산일보>가 보도했다. 오이케여관의 당시 주소는 부산부 벤텐초 1초메 38(오늘날의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138)이었다.

 

숙소에 간단히 짐을 푼 이시이 바쿠는 다시 부산역으로 나갔다. 부산역사 옆 철도호텔의 소휴게실에서 기자회견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자회견을 철도 호텔 라운지에서 가졌던 것은 다소 의외였다. 경성에서는 이시이 바쿠와 이시이 코나미가 경성역에 도착한 직후 경성일보와 매일신보, 조선신문 등의 신문사를 순방하며 도착 인사를 했었다.

 

공연 예술가들은 언론과의 만남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공연의 집중 홍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언론사도 마찬가지이다. 이시이 바쿠 정도의 세계적 명성을 지닌 예술가가 부산을 방문한 것은 뉴스 가치가 매우 컸다. 따라서 대개는 기자들이 이시이 무용단의 숙소를 방문하거나, 혹은 이시이 무용단이 신문사를 순방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부산에서는 기자회견을 위해 제3의 장소를 마련했다.

 

1926년 3월27일 이시이무용단은 부산정거장(오른쪽)에서 하차해 오이케여관(왼쪽)에 투숙했던 것으로 보도되었다. (지도는 1919년의 부산시가전도)

 

이 기자회견 자리에 최승희가 동석했는지는 의문이다. 아마도 이시이 바쿠와 이시이 코나미의 두 사람만 참석했을 가능성이 크다. 언론의 관심은 그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성에서는 최승희의 이시이무용단 입단이 큰 뉴스가 되었고, <매일신보>는 거의 한 면을 할애해서 경성역전의 이별의 장면까지 보도했지만, 그런 분위기가 부산까지 전해진 것 같지는 않다. 이시이무용단의 공연과 관련된 신문 보도에서 최승희가 언급된 것은 전혀 없었다.

 

또 기자회견이라면 부산지역의 언론사들이 모두 참여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실제로는 <부산일보>에만 회견문이 보도되었다. 당시 부산에는 부산일보 외에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경성일보와 매일신보 등의 지국이 활동하고 있었지만, 다른 신문들은 이시이 바쿠의 부산 도착 사실조차 보도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기자회견은 <부산일보>와의 단독회견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부산일보>가 이시이무용단 공연의 후원사였기 때문이다.

 

특이한 것은 이 공연의 주최측이 <이시이바쿠 부산후원회>였다는 점이다. 이시이 바쿠가 부산에서 공연하거나 방문한 적이 없는데 이미 결성되어 있었다는 것이 특이한데, 아마도 이시이 바쿠의 친구나 지인들이 결성했거나, 혹은 그의 세계적 명성 덕분이었을 것이다.

 

이시이 바쿠는 192212월부터 19243월까지의 유럽과 미국 순회공연을 통해 세계적인 무용가로 인정받았고, 특히 일본에서는 그의 명성이 대단히 높아져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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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요약과 결론

 

이 글을 통해 필자는 최승희의 민족 정체성 형성 과정과, 그것이 유럽 순회공연 중에 어떻게 주장되었고, 현지 매체들에 의해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살펴보았다. 최승희는 어린 시절과 숙명여학교 시절을 통해 자부심에 바탕을 둔 <조선인 정체성>을 형성했고, 일본 유학 기간에는 <예술가 정체성>, 조선 활동 시기에는 진취적인 <신여성 정체성>, 그리고 도쿄를 중심으로 벌인 일본 활동 시기에는 <세계일 정체성>을 내면화했다. 세계 순회공연을 시작할 무렵 최승희의 네 가지 정체성은 유기적으로 결착되었고, “조선무용을 세계에 알리고, 자신도 정상급 예술가로 발돋움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이 목표는 미국 공연에서는 좌절되었다. 한편으로는 미국 내 반일 정서와 일제 불매운동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 내 반일 분위기를 잠재우기 위해 최승희를 일본의 예술사절로 삼으려던 일제의 숨은 의도 때문이었다. 위험하고 미묘한 상황 속에서도 최승희는 자신의 조선인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미국 입국서류에 자신이 코리안임을 밝혔고, 미국민과 일제 외교당국이 부딪히는 위험 속에서도 자신의 무용이 조선무용임을 강조했다.

 

1939년 유럽 순회공연 중에 샹젤리제 거리에서.

 

일부 평전자는 미국 순회공연의 실패가 최승희와 재미 조선인 동포들 사이의 갈등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재미 조선인 단체들의 기관지였던 <신한민보>의 기사들에 따르면 재미 동포들은 최승희의 처지를 이해했고, 교민들의 요구는 협박이 아니라 미국인들의 일제 불매운동으로부터 최승희의 무용공연을 살려내기 위한 조언으로 보아야 한다.

 

미국에서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최승희는 유럽 공연에서 자신의 <조선인 정체성>을 관철해 냈다. 프랑스에 도착한 순간부터 조선인(꼬레안느)’임을 강조했고, 파리 언론과의 인터뷰와 공연 홍보를 통해 자신은 조선인 무용가이며 자신의 작품들은 조선무용임을 주장했다.

 

최승희의 노력이 항상 성공했던 것은 아니어서, 살플레옐 공연 전에는 거의 모든 파리의 매체가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로 소개했다. 이는 일본 대사관의 개입 때문이었다.

 

일본 대사관은 최승희 환영리셉션을 열었고 일본인 유학생과 교민들을 동원하는 등 최승희 공연을 성공시키기 위한 협조를 아끼지 않았는데, 이는 최승희를 일본 예술사절로 활용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일본 대사관의 개입으로 초기의 파리 언론은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로 인식했다.

 

초기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최승희는 꼬레안느 무용가의 꼬레안느 무용을 꾸준히 홍보했다. 또 최승희는 살플레옐 공연과 샤이오 공연의 레퍼토리를 조선의 역사와 풍습을 종횡으로 구성해 발표했다. 입국 서류와 신문 광고를 통한 최승희의 조선인 정체성 주장은 일제 외교공관의 개입으로 성공하지 못했지만, 공연을 통한 주장은 효과가 컸다. 살플레옐 공연 이후 최승희의 정체성은 꼬레안느 무용가즉 조선인 무용가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이같은 경향성은 파리 언론의 146개 기사 분석을 통해 실증적으로 확인되었다. 살플레옐 공연 전후에 보도된 기사 79건과 샤이오 공연 전후의 기사 67건을 조사한 결과,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소개한 기사는 살플레옐 공연 전에는 6퍼센트(54건중 3)에 불과했으나, 공연 후에는 80퍼센트(25건중 20)로 대폭 증가했고, 샤이오 공연 때에는 93퍼센트(67건중 62)에 달했다.

 

샤이오 공연을 보도한 주요 신문의 기사 5건이 최승희를 국적이나 민족명 호칭 없이 이름으로만 보도한 것도 최승희가 꼬레안느 무용가임을 전제한 것이라고 본다면 이 비율은 1백퍼센트라고도 할 수 있다.

 

이처럼 최승희는 유럽 순회공연을 통해 조선무용의 예술성을 널리 알렸을 뿐 아니라 이를 통해 자신의 조선인 정체성까지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한 성취가 가능했던 것은 최승희가 유럽 공연의 레퍼토리를 치밀하게 구성했고 완벽하게 발표했기 때문이라고 믿어진다. 파리의 일제 외교관들은 정치력으로 최승희의 민족 정체성 주장을 누르고 일제의 문화선전대로 활용하려 했지만, 최승희는 예술의 힘으로 정치를 누르고 자신의 민족 정체성을 확립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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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샤이오 공연의 보도 경향

 

한편, 최승희의 두 번째 파리 공연인 샤이오 극장 공연을 보도한 파리매체의 경향을 보면 살플레옐 공연 이후의 경향이 더욱 굳어졌음을 알 수 있다. 살플레옐 공연 이후 최승희는 벨기에의 브뤼셀과 안트베르펜, 네덜란드의 암스텔담과 헤이그에서 공연을 가졌고, 독일의 뒤스부르크와 프랑스 남부의 칸과 마르세유 등에서 활발한 공연 활동을 벌인 후, 615일 샤이오 극장에서 파리 2차 공연을 단행했다. 이 공연은 결과적으로 유럽 고별공연이 되었다

 

최승희의 살플레옐 공연 직후에 개관한 샤이오 극장은 2천명의 수용인원을 가진 파리 최대의 극장이었고, 개인 무용가로서 샤이오 극장에서 공연을 한 것은 세르주 리파르와 사하로프 부부 등의 정상급 무용가들에 이어 최승희가 세 번째였다.

 

샤이오 공연을 보도한 파리 매체의 기사는 모두 67건으로 조사되었다. 그중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라고 서술한 기사는 단 한 건도 없었고, 62건의 기사가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라고 서술했다. 나머지 5건은 최승희에 대한 수식어 없이 무용가 최승희혹은 그냥 최승희라고 보도했다.

 

1939년 6월15일 최승희가 파리 제2차 공연을 가졌던 샤이오 극장

 

이러한 경향은 131일의 1차 파리 공연 때와는 두 가지 면에서 사뭇 달라진 모습이다. 첫째는 최승희가 꼬레안느 무용가로 완전히 굳어졌다는 것이다. 살플레옐 공연 때는 79건의 기사 중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지칭했던 건수가 23건으로 전체의 29%에 불과했고, 그나마 대부분이 살플레 공연 이후의 기사들이었다.

 

살플레옐 공연을 전후로 나누어 파리 언론이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호칭한 보도를 다시 집계해 보면, 살플레옐 공연 전에는 모두 55건의 기사 중에서 3(5%)에 불과했으나, 공연 이후에는 25건의 기사 중에서 20(80%)이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지칭했다. 그러던 것이 샤이오 공연 때는 전 기간을 통틀어 67건의 기사 중에서 62(93%)이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호칭했을 뿐 아니라 일본인 무용가라고 한 기사는 한 건도 없었던 것이다.

 

두 번째 특징은 최승희를 국적이나 민족명 없이 그냥 최승희마드모아젤 최승희혹은 무용가 최승희라고만 부르는 신문이 늘고 있었다는 점이다. 민족명 조차 붙이지 않은 신문은 모두 5개였는데, 그중 <르주날(6/15)><르앵트랑지장(6/16)>, <파리수와(6/16)>는 발행부수가 1백만 부가 넘는 파리의 메이저 일간지였다.

 

이 신문들은 던컨이나 파블로바, 니진스키나 비그만이나 크로이츠베르크를 지칭할 때 미국인 무용가라든가 러시아계 무용가,’ 혹은 독일인 무용가라는 설명을 붙이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모든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정상급 무용가였기 때문이다.

 

 

드디어 최승희도 파리의 매체들에 의해 정상급 무용가로 대접받기 시작한 것이다. 만일 최승희가 한 시즌만 더 유럽에 머물러 공연 활동을 계속했다면, 유럽 전역의 매체들이 그에게 꼬레안느 무용가라는 수식어조차 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최승희가 파리에 처음 도착했을 때에는 일본인 무용가로 보도했던 파리 언론이 약 반년 만에 그를 꼬레안느 무용가이거나 혹은 호칭 없이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최승희의 조선무용 공연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공연들을 통해 최승희는 조선무용의 예술성을 한껏 과시했고, 이를 통해 조선무용이 일본무용과는 전혀 다른 예술이라는 점을 웅변적으로 보여주었다.

 

살플레옐과 샤이오 공연의 레퍼토리를 분석해 보면 그 이유를 더 뚜렷이 알 수 있다. 최승희는 이 두 공연의 발표 작품들을 조선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보여주는 한편, 조선인들의 성별, 연령별, 지역별 특성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치밀하게 구성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작품을 감상한 관객들이라면 언론인이나 평론가는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도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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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살플레옐 공연 후의 비평 기사

 

살플레옐 공연이 성공적으로 끝난 후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4>에 보이듯이 22일부터 31일까지 약 한 달간 파리 매체에 게재된 최승희 관련 기사는 모두 25건으로 조사됐는데 대부분 평론기사였다. 기고자들은 파리 예술계의 정상급 비평가들이었고, 이들은 대부분 최승희의 공연을 호평했다. 그리고 이들은 대부분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부르기 시작했다.

 

25개의 기사 중에서 최승희를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일본인 무용가로 서술한 것은 3, ‘극동의 무용가1건에 머물렀던 반면, ‘꼬레안느 무용가라고 소개한 것이 20건이었다. 1개의 기사는 최승희를 아무런 수식어 없이 그냥 무용가라고 불렀다,

 

일반적 경향이 역전되었지만 여전히 혼란스런 모습을 보인 매체도 있었다. <르앵트랑지장(L'Intransigeant)>22일의 공연 보도기사에서 최승희를 미카도 제국에서온 ... 극동의 무용가, 그의 작품을 꼬레안느 무용으로 서술했으면서도 다음날(2/3)의 평론기사에서는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 그의 작품을 일본 무용으로 서술했다.

 

 

1939년 1월31일, 파리의 살플레옐 극장에서 열렸던 최승희의 유럽 데뷔 공연 프로그램. 최승희는 "극동의 무용가"로 소개되었다.

 

 

이는 공연기사를 작성한 기자와 비평문을 기고한 평론가가 서로 다른 인식을 가지고 있음을 반영한 것으로, 당시 파리 언론인들이 아직 최승희와 조선의 상황에 대한 완전히 객관적인 인식을 공통적으로 가지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엑셀시오르(Excelsior)>19381226일의 기사에서 최승희를 극동의 무용가로 서술했다가, 한 달 후인 1939126일과 30일의 기사에서는 일본인 무용가로 바꾸었는데, 공연 당일인 131일 기사와 26일의 평론기사에서는 다시 극동의 무용가로 변경했다. 이 신문은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소개한 적이 없는 유일한 매체였다.

 

다만 공연 전까지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로 서술했던 파리의 유력 신문들이 공연 후에는 모두 꼬레안느 무용가로 서술을 바꾸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르땅(2/7)><르마탱(2/4, 2/6, 2/13, 2/17)>, <르주날(2/18, 2/25)><파리수와(2/25)> 등은 모두 당시 1백만부 이상의 발행부수를 기록했던 파리의 일간지들로서 이들이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소개한 것은 파리 시민들의 최승희 인식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력 매체들 중에서도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서술하면서 동시에 일본인으로 취급하는 모습을 보인 신문도 있었다. <르땅(2/7)>은 최승희를 동양의 무용가로 소개한 후 같은 기사에서 그를 할리우드식의 일본 미인이라고 서술했는가 하면, 정작 그의 무용작품은 꼬레안느 무용이라고 설명했다.

 

 

파리의 패션잡지 <보그(3/1)>도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라고 서술한 뒤에 매우 아름다운 일본인이라고 묘사하고, 그의 작품들을 섬세한 극동의 무용이라고 설명했다. , 살플레옐 공연 전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로 보도했던 파리의 매체들이 공연 이후 꼬레안느 무용가로 전환되었지만, 아직도 어느 정도 혼란의 여지는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일부 평론가는 이러한 혼란을 정리하기 위해 비평문의 일부로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설명하기도 했다. 예컨대 <파리 수와>에 최승희 공연 평론을 기고한 모리스 상펠(Maurice Champel)꼬레(Corée)와 일본(Japon)의 관계는 티롤(Tyrol)과 시실리(Sicile)의 관계와 같다고 논평했다.

 

당시 이탈리아는 일차대전 직후 오스트리아 영토인 티롤의 남부지역을 자국 영토로 합병해 지배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정부는 이 지역에서 사용되던 독일어를 금지하는 한편 이탈리아어 사용을 강요했고, 각급 교육기관과 종교단체들을 회유해 이 지역을 이탈리아로 동화시키기 위한 강압적 정책을 펴고 있었다. 모리스 상펠의 논평은 간단했지만 파리의 지성계와 일반 시민들에게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알리는 효과적인 정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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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일본대사관의 최승희 환영 리셉션

 

1939121일 파리주재 일본 대사관은 최승희 환영 리셉션을 개최했다. 이 자리에는 파리주재 외교관들과 언론인, 무용가와 무용평론가들이 대거 초청됐다. 리셉션 개최 목적은 최승희의 공연 홍보였다. 한편으로 이는 최승희의 바람이기도 했다. 유럽까지 와서 공연에 실패할 수는 없었으므로 얻을 수 있는 도움은 모두 얻어야했다.

 

따라서 일본 대사관이 제공하는 환영 리셉션을 흥행을 위한 기회로 받아들였다. 또 일본대사관의 협조를 거절할 명목도 없었고, 만약 이유 없이 거절했다면 더 심각한 상황에 봉착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 일본 대사관이 베푼 환영 리셉션은 최승희의 조선인 정체성 주장에 심각한 역효과를 초래했다. 자신을 꼬레안느 무용가로 소개하고 싶었던 최승희의 바람이 완전히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이 리셉션이 일본 대사관에서 열렸다는 사실만으로도 파리의 언론인들은 최승희는 일본인임을 인식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939년 1월22일의 <르앵트랑지장>에 보도된 일본 대사관의 최승희 환영 리셉션.

 

 

<3>에 보이듯이 리셉션 이후 살플레옐 공연 때까지 파리의 언론에 보도된 32개의 기사에서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소개한 것이 단 1, ‘극동의 무용가로 서술한 것이 5건에 불과했고, 대다수(26)일본인 무용가였다. 파리 언론은 꼬레안느 무용가로 소개되고 싶은 최승희의 소망보다 일본인 무용가로 홍보하려는 일본 대사관의 요청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3><2>와 비교하면 <파리 수와(Paris Soir)>18일의 보도에서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소개했지만 122일 보도에서는 일본인 무용가로 수정했다. <르마탱(Le Matin)>128일의 공연단신에서는 최승희를 극동인 무용가, 공연일정표에서는 일본인 무용가로 표기했지만, 사흘 후인 131일의 신문에서는 모두 일본인 무용가로 서술했다.

 

파리에서 발행되어 전 유럽으로 배포되었던 영자신문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120일과 22, 31일 기사에서 모두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라고 기술했으며, 당시 파리 내 발행부수가 가장 많은 신문이었던 <파리수와><르마탱>, <르땅><르피가로>, <르주날> 등이 모두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로 표기했다.

 

 

심지어 살플레옐 공연 당일에 배포된 프로그램조차도, 최승희 측에 의해 준비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꼬레안느 무용가가 아니라 극동의 무용가로 서술했다. , 최승희 자신도 입장을 후퇴시킨 것이었다. 이는 일본 대사관의 감시의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다만 이 시기에도 최승희의 작품은 모두 꼬레안느 무용으로 소개되었다.

 

일본 대사관의 리셉션이 최승희의 민족 정체성 주장을 저해했지만 순기능도 있었다. 최승희와 일본 대사관 사이의 긴장을 느낀 파리의 언론인들이 꼬레와 쟈폰의 관계에 대해 더 자세히 조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예컨대 <르앵트랑지장(L‘Intransigeant)>은 일본 대사관의 최승희 환영리셉션에 대한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시켰다.

 

일본 대사관은 어제 오후 5시 무용가 최승희를 위해 리셉션을 열었다. 최승희씨가 일본인이 아님을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그는 한국인으로서 극동인 중에서는 인종적으로 몽골 인종에 더 가깝다. 그러나 한국은 약 30년 동안 일본에 합병되었기 때문에, 일본제국의 대사대리와 미야자키 부인은 이 무용가를 동포로서 따뜻하게 환영했다.”

 

최승희가 일본인과 인종적으로 다른 한국인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고, 한국이 일본에 30년간 합병되었다는 사실도 적시했다. 이러한 보도가 이어지면서 파리와 파리 신문이 보급되는 프랑스의 다른 지역, 나아가 파리 신문이 전해지는 벨기에나 스위스 등의 유럽 각국에 일본이 한국을 강제병합한 사실과 최승희는 꼬레안느라는 사실이 점점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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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살플레옐 공연의 홍보

 

19391월 최승희는 살플레옐 공연의 홍보를 시작했다. 최승희의 유럽 순회공연 주관사는 <국제 예술 기구(Organisation de International Artistique)>, 프랑스내 대행사는 <발말레트(Valmalette)>, 매니저는 남편 안막이 맡았다. 따라서 홍보 실무는 <발말레트>가 담당했겠지만, 홍보의 내용은 최승희와 안막의 의견을 반영해서 결정되었을 것이다.

[2. 파리 매체에 나타난 최승희와 그의 무용 정체성 수식어 (193911-21)]

 

1939년 새해 파리의 최승희 공연 관련 최초의 기사는 <파리 미디(Paris midi)>의 인터뷰 기사였다. 이 기사는 최승희를 일본의 아르헨티나,” “꼬레안느,” “극동의 무용가등으로 소개했다. 최승희가 서구 신문에 파블로바 꼬레안느(Pavlova coréenne)”으로 소개된 적은 있지만, 스페인 무용가 라 아르헨티나(La Argentina, 1890-1936)에 비겨 소개한 것은 <파리 미디>가 처음이었다. 이는 최승희의 조선무용이 근대무용가 파블로바보다는 민족무용가 아르헨티나에 더 가깝다는 뜻이었다.

 

이 기사는 최승희를 출생에 따라서 꼬레안느, 귀화로 일본인, 직업상 미국인이라고 정리했다. 최승희가 미국인이라는 서술은 사실이 아니지만 아마도 미국 공연을 마치고 프랑스로 건너왔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일제의 조선 합병을 귀화(adoption)라고 표현한 것도 사실과 다르다. 기자가 당시의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알고 있으면서도 용어를 순화한 것일 수도 있지만, 꼬레 태생이지만 국적이 일본인 점으로 미루어 최승희가 일본으로 귀화했을 것으로 유추한 것일 수도 있다. 유럽에서는 국적변경이 비교적 자유로웠다는 점을 고려하면 후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어떤 경우이든 13일자 <파리 미디>의 기사는 최승희의 국적이 일본이지만 꼬레 태생임을 파리 시민들에게 알린 최초의 기사였다.

 

한편 18일자 <파리 수와>는 파리의 신문들 중에서 가장 먼저 최승희의 공연이 등재된 공연일정표를 게재했다. 공연일정표란 파리에서 열리는 각종 공연을 최근날짜를 선두로 내림차순으로 정리해 표로 만든 것인데, 파리의 거의 모든 일간지가 이를 문화면에 게재했다. <파리 수와>의 공연일정표에는 최승희가 꼬레안느 무용가(la célèbre danseuse coréenne)”라고 소개되었다.

 

[ 자료 3.  파리 일간지의 공연일정표 예시]

 

일주일 전(13일자) <파리 미디> 기사가 최승희를 일본인극동인꼬레안느미국인으로 두루 서술했지만, <파리 수와> 공연일정표는 꼬레안느를 선택했다. 아마도 최승희의 요청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공연일정표 작성을 위해서는 신문사가 대행사를 통해 공연 및 공연자 정보를 받았어야 했는데, 이때 최승희는 자신을 꼬레안느 무용가로 소개해 주도록 요청했을 가능성이 높다. <파리>호 승객 명단에 이어 최승희가 다시 한 번 자신의 조선인 정체성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그 공연일정표가 게재된 바로 다음 날부터 최승희의 이름이 각 신문의 공연일정표에서 사라졌다. 이는 이례적인 일인데, 한번 공연일정표에 이름이 오르면 날이 가면서 순위만 변경될 뿐 공연이 끝날 때까지 일정표에 머물게 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최승희가 다시 공연일정표에 등장한 것은 일주일이 더 지난 116일의 <르피가로><르주날>이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최승희가 일본인 무용가로 바뀌어 있었다. <파리 수와>는 첫 보도 이후 공연일정표에 최승희 공연을 수록하지 않았고, 다른 신문들은 일본인 무용가혹은 극동의 무용가로 소개한 것이다.

 

극동의 무용가일본인 무용가의 비율도 최승희의 도착 기사 때와 달라져 있었다. 최승희 도착 기사들에서는 9개의 기사 중 6개가 극동의 무용가’, 3개가 일본인 무용가였으나, 116일 이후에는 10개의 기사 중에서 9건이 일본인 무용가였고 극동의 무용가로 소개한 것은 1개뿐이었다.

 

 

이렇게 역전되어버린 경향으로 보아 최승희가 공연일정표에 자신을 꼬레안느 무용가로 소개하려던 시도가 난관에 부딪혔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때쯤 현지 언론도 최승희의 국적이 일본이지만 본래 꼬레 태생이며, 꼬레가 일본 제국에 병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승희 본인은 꼬레안느로 소개되기를 바라고 있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유럽인들에게 이 같은 상황은 낯설지 않았다. 스코틀랜드인이나 아일랜드인이 영국 국적보다 자신의 민족명으로 불리기를 선호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리 신문들은 최승희를 꼬레안느대신 일본인으로 기술했는데, 여기에는 아마도 일본 공관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 대사관이 최승희는 일본제국의 무용수임을 강조하는 보도문이라도 배포했다면 현지 언론은 공식 입장을 따라야 했을 것이다. 최승희가 18일의 공연일정표에 꼬레안느 무용가를 시도했으나 곧 철회되었고, 뒤이은 모든 공연자 정보가 일본인 무용가로 변경됐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다만 이때도, <2>에 수록된 (괄호 안의) 무용 수식어를 살펴보면, 최승희의 작품만은 여전히 꼬레안느 무용(danses coréennes)’으로 소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 당국에게는 최승희가 일본인인 것이 중요했을 뿐 그가 조선무용을 발표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승희에게는 발표 작품을 조선무용으로 발표하는 것도 중요했다. 자신의 조선인 정체성을 주장할 수 없는 상황이더라도 조선무용을 홍보하는 것도 그의 목적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 자신의 작품이 꼬레안느 무용으로 소개되면 될수록, 결국 최승희도 다시 꼬레안느 무용가로 소개될 반전의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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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승희의 파리 도착 보도

 

최승희의 조선인 정체성 주장은 그녀가 프랑스에 도착하는 날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승선했던 <파리>호는 르아브르에 기항하기 이틀 전 저명인사 승객의 명단을 무전으로 타전했고, 이 명단은 19381223일자 르아브르의 일간지 <주날뒤아브르(Journal de Havre>에 게재되었다.

 

13명의 승객 이름이 포함된 이 명단에서 최승희는 예술가로서 레종 되뇌르 훈장을 받은 프랑스의 오르가니스트 앙드레 마르샬과 함께 가장 먼저 언급되었고, 그의 호칭은 코레안느 무용가로 소개되었다.

 

1938년 12월23일의 <주날뒤아브르>에 실린 <파리>호 승객 명단, 최승희는 <꼬레안느 무용가>로 소개되었다.

 

이 명단이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라고 기록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공식 서류에 따르면 최승희의 국적은 일본(Japon)’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최승희가 자신을 국적보다 민족으로 기록해 주기를 특별히 요청했다는 뜻이다. 샌프란시스코를 통해 미국에 입국할 때 민족명을 일본인에서 코리안으로 정정했던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후 사태는 최승희가 바라는 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1>에 보이는 바와 같이 <주날뒤아브루> 이후 1224일부터 28일까지 최승희의 파리 도착 소식을 게재한 파리 일간지의 9개 기사 중에서 그녀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소개한 기사는 한 건도 없었다.

 

<르쁘띠 파리지앵(Le Petit Parisen)>을 비롯한 6개의 일간지가 최승희를 극동의 무용가라고 소개했고, <르주르(Le Jour)>를 비롯한 3개 신문은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라고 보도했다.

 

이처럼 뜻밖의 분포가 나타난 것은 프랑스 언론이 대부분 (1) 최승희를 일본인으로 알았거나, 혹은 (2) 동양의 무용가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최승희에 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3) 최승희가 꼬레안느 무용가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일본인 무용가로 홍보하는 일본대사관의 입장을 고려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중 어떤 것이 사실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파리의 모든 일간지들이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가 아니라 극동의 무용가혹은 일본인 무용가로 서술했던 것은 사실이다.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소개한 유일한 신문인 <주날뒤아브르>는 르아브르의 지역신문이었으므로, 최승희가 파리에 도착한 뒤 일주일 동안 파리의 시민들에게는 최승희가 꼬레안느조선인이라는 사실이 전혀 전해지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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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무용가와 조선 무용

 

최승희는 19381224일 프랑스에 도착했고, 193913일부터 언론을 통해 자신의 조선무용 공연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131일에는 살플레옐 극장에서 첫 번째 유럽 공연, 615일에는 샤이오 극장에서 두 번째이자 파리 마지막 공연을 단행했다.

 

일본 대사관은 121일 최승희 환영 리셉션을 열었고, 일본인 유학생과 교민들에게 최승희의 공연에 참석하도록 총동원령을 내렸다. 파리의 언론들은 기사와 광고의 형태로 최승희와 일본대사관의 입장을 선별적으로 보도했다. 파리 언론은 대부분 수동적인 입장이었겠지만 때로는 최승희와 일본대사관의 입장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독자적인 해설기사를 게재하는 능동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최승희의 살플레옐 공연과 샤이오 공연에 직접 관련된 프랑스 매체의 기사는 모두 146건이었다. 최승희의 조선인 정체성이 보도된 추이를 살펴보기 위해서 이 기사들을 5개 기간으로 나누어 내용을 살폈다.

 

1938년 12월27일의 <라디페쉬 드브레스트>는 "극동의 무용가" 최승희가 12일24일 르아브르를 거쳐 파리 쌍라자르 역에 도착했다고 보도했다.

 

(1) 1223일부터 12일까지의 최승희의 프랑스 도착에 관한 보도 (10개 기사), (2) 13일부터 121일까지의 최승희 공연 홍보 관련 보도(12개 기사), (3) 일본대사관 리셉션 다음날인 122일부터 131일의 살플레옐 공연까지 최승희 관련 보도(32개 기사), (4) 살플레옐 공연 이후 21일부터 약 한 달 동안의 최승희 관련 보도(25개 기사), 그리고 (5) 615일의 파리 두 번째 공연인 샤이오 공연을 전후로 한 최승희 관련 보도(67개 기사)였다.

 

각 기사로부터 두 가지 사항만 확인했다. 첫째는 최승희를 소개하는 문구이다. 각 기사가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로 서술했는지 꼬레안느 무용가로 서술했는지, 혹은 그 밖의 다른 문구로 소개했는지를 구분했다. 둘째는 최승희의 무용 작품을 일본무용으로 서술했는지 조선무용으로 서술했는지를 정리했다.

 

한 기사에 두 개 이상의 서술어가 등장할 경우 자의적으로 선택하기 보다는 모두 인용해 두기로 했다.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기사 중에 명시적으로 꼬레안느쟈포네스이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경우 기사 전체를 통해 일본이나 조선에 관한 언급이 나오는지를 찾아보고, 그에 따라 그 기사를 조선인 무용가혹은 일본인 무용가로 분류했다.

 

예컨대 기사 중에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혹은 미카도 제국이 언급되었다면 이는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로 서술한 것으로 보았다. 반면 기사 중에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표현이 나왔을 경우에는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지칭한 것으로 보기로 했다.

 

 

1938년 12월26일의 <엑셀시오르>(왼쪽)과 <르주르>(오른쪽>은 최승희의 파리 도착을 보도했다. <엑셀시오르>는 최승희를 "극동의 무용가"라고 서술한 반면, <르주르>는 "일본인 무용가"라고 보도했다.

 

대부분의 기사는 최승희를 쟈포네스 무용가(danseuse japonaise)’ 혹은 꼬레안느 무용가(danseuse coréenne)’라고 서술했지만 극동의 무용가(danseuse de l'Extrême-Orient)’라는 표현도 자주 등장했다. ‘극동이란 유럽에서 동쪽으로 가장 먼 아시아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북쪽으로는 시베리아에서 남쪽으로 인도차이나의 각국과 인도네시아와 자바 등의 남방 도서 국가들까지 포괄하는 말이다. 예컨대 23일자 <르악시옹 프랑세즈>에 실린 평론 기사에서는 인도, 발리, 캄보디아, 중국, 한국, 일본의 춤을 극동의 춤으로 서술한 바 있었다.

 

보통의 경우 프랑스 언론이 극동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특정 국가를 지칭할 필요 없이 동아시아 일반을 가리키기 위해서였지만, 최승희 관련 보도에서는 쟈폰(Japon)’꼬레(Coree)’라는 두 단어를 피할 수 있기 위해 사용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프랑스 언론인들은 일본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삼일운동이 대대적으로 프랑스 언론에 보도되었던 이래로 꼬레쟈폰의 식민지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최승희와 일본대사관의 주장이 대립되었을 때 프랑스 매체는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주기 보다는 극동이라는 표현으로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승희의 호칭에 따라 기사를 분류하는 방법은 최승희의 공연 작품을 가리키는 표현을 분류하는 데에도 똑같이 적용하기로 했다. 따라서 각 기사가 최승희의 무용을 조선무용이라고 지칭했는지 혹은 일본무용이나 그 밖의 다른 용어로 표현했는지를 구분해서 정리해 보았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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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파리 공연과 최승희의 조선인 정체성 주장

 

미국 공연 중단으로 반년 이상 뉴욕에서 보낸 최승희는 19381217일 프랑스 여객선 <파리>호로 뉴욕을 출발해 유럽으로 향했다. 8일간 대서양을 횡단한 끝에 그는 1224일 오후3시 프랑스 서안의 항구도시 르아브르에 도착했다. 기차로 갈아탄 최승희는 그날 밤 파리 생라자르역에 내렸고 기다리던 기자들의 카메라 세례를 받았다.

 

유럽 순회공연은 여러 면에서 성공적이었다. 파리와 마르세유, 브뤼셀과 안트베르펜, 암스텔담과 헤이그 등에서 열린 주요 공연은 모두 흥행에 성공했고 비평도 호평이 많았다. 특히 1939131일의 파리 살플레옐 극장 공연과 615일의 샤이오 극장 공연은 파리 시민들 사이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파리 무용계에도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최승희는 1938년 12월17일, 프랑스 여객선 <파리>호에 승선, 뉴욕을 떠나 프랑스로 향했다. 8일간의 항해 끝에 르아브르에 도착한 <파리>호의 승객명단을 보도한 1938년 12월23일의 <주날뒤아브르> 기사에 따르면 최승희는 <꼬레안느 무용가 최승희>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133건에 달하는 최승희의 파리공연 관련 기사에 따르면 조선무용의 예술성은 스페인과 인도, 일본과 발리 등의 민속 무용뿐 아니라 발레 루소로 대표되는 유럽 정통 발레와도 대등하게 비교 평가되었다.

 

최승희 자신도 스페인의 라 아르헨티나(La Argentina, 1890-1936), 인도의 니오타 이뇨카(Nyota Inyoka, 1896-1971), 중국의 메일란팡(Mey Lanfang, 1894-1961) 등의 정상급 민속 무용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나아가 안나 파블로바(Anna Pavlovna, 1881-1931)와 마리 비크만(Mary Wigman, 1886-1973), 사하로프 부부(Alexander & lotilde Sakharoff, 1886-1963, 1892-1974), 하랄트 크로이츠베르크(Harald Kreutzberg, 1902-1968) 등의 현대 무용가들과도 동등하게 평가되었고, 유럽 발레의 세르주 리파르(Serge Lifar, 1905-1966), 다르자 콜린(Darja Collin, 1902-1967) 등과도 교류를 가졌다. 최승희는 세계일의 반열에 올라섰고, 전설적인 무용가들과 나란히 호명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평전들은 최승희가 이같은 예술적 성취와 함께 유럽에서 조선인 정체성을 한껏 펼쳤다고 서술했다. 정병호(1995)는 최승희가 (1) “국적의 성격을 띠기도 하는 민족명을 재패니스가 아니라 코리안이라고 했, (2) 파리에서 “‘코리안 댄서라는 말을 ... 사용한 데에는 자기가 조선 사람이라는 민족의식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3) 최승희가 프랑스에 도착한 이후 파리의 거리에는 조선의 자랑 최승희를 환영한다,’ ‘조선이 낳은 천재적 무희 파리 공연같은 표어로 된 플래카드가 나붙었다고 서술했다.

 

이 서술은 다른 평전과 연구서들에 널리 인용되었지만 몇 가지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 파리에 오래 거주하던 중 이차대전 발발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온 화가 배운성의 증언에 따르면 파리에는 조선동포가 10여명 있었을 뿐이므로 이들이 플래카드를 거는 등의 환영 행사를 조직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1930년대 르아브르 정경

 

더 중요한 의문은 코리안 무용가라는 표현에 대한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 말이 영사관에 해명해야 할 만큼 민감한 표현이었는데, 파리에서 그렇게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을까? 일제 외교공관들이 최승희를 일제 문화선전대로 활용할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면 파리에서도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로 홍보해야 했을 것이다. 파리 대사관이 미국의 영사관들보다 최승희의 민족 정체성 주장을 더 관대하게 대할 재량권을 가졌다고 가정할 근거는 없어 보인다.

 

마지막 의문은 파리 언론과 시민들의 반응이었다. 과연 파리의 관객들과 언론인들이 처음부터 최승희를 코리안 무용가로 환영할 수 있었을까? 파리의 일본 대사관이 암묵적, 혹은 명시적으로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로 홍보했던 반면, 최승희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민족 정체성을 코리안으로 주장했다면, 이처럼 상반된 입장을 목격하면서 파리의 언론과 관객들이 손쉽게 최승희의 편을 들어줄 수 있었을까? 만일 그랬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지금부터 최승희가 파리 체재 동안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민족정체성을 주장했고 일본 대사관은 여기에 어떻게 개입했는지, 그리고 파리 언론이 최승희와 일본 대사관의 상이한 주장을 어떻게 기사에 반영했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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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는 자신과 자신의 예술에 대한 민족 정체성으로 무장한 채 미주 공연을 시작했으나 공연과 정체성 주장 모두 실패했다. 자신과 조선무용의 정체성을 제대로 소개하지 못한 채 공연을 중단해야 했기 때문이다. 미국 내 반일 감정이 예상보다 심했고, 최승희의 무용공연도 일본인의 일본예술로 간주되어 불매운동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미주 순회공연에서 조선무용코리안 댄스로 소개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공연의 모든 레퍼토리는 조선무용이었으므로 이를 코리안 댄스로 소개하고 홍보하더라도 일본 교민 언론이나 미국 현지 언론, 그리고 일제의 공관으로부터 이의가 제기되지 않았다.

 

그러나 최승희를 코리안 무용가로 소개하는 일은 미묘한 사안이었다. 샌프란시스코와 LA 공연에 앞서 일본 영사관은 최승희 환영리셉션을 열어주었는데, 여기에는 현지의 외교관과 언론인, 예술가와 평론가들이 초대되었다. 이 리셉션 때문에 현지인들은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로 인식했고 언론도 그렇게 기사화했다.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의 첫 기착지는 샌프란시스코였다. 1938년 1월 금문교 아래서 기념촬영.

 

이에 대해 최승희는 나는 일본인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었다. 그가 소지한 일본여권 때문이기도 하지만, 공개적으로 일본인임을 부정하면 배일분자로 찍혀 송환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최승희는 그저 자신을 코리안으로 홍보하면서, 일본공관이 이를 “(일본인이자) 코리안으로 해석해 주고, 미국인들은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으로 이해해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결국 이 표현도 문제로 지적되었고, 최승희는 LA주재 일본 영사관을 방문해 코리안 댄서라는 표현을 해명해야 했다. 최승희는 <반도의 무희>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임을 강조하고, 이를 영어로 직역하면 댄서 오브 페닌슐라라는 우스운 말이 되므로 <코리안 댄서>로 의역해야 한다고 해명했다. 또 이미 일본에서의 정기공연에서 2년 연속 코리안 댄서라는 표현을 사용한 바 있었고, 당시에 아무 문제도 없었다는 점도 지적했다. LA영사관은 최승희의 설명에 납득했고, LA영사관의 보고에 따라 일본 외무부에서도 이를 양해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승희는 일본 외교공관이 자신을 일본인 예술가로 홍보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일제 외교공관이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로 홍보할수록 최승희의 공연은 일화배척, 즉 일제 불매운동의 대상이 되었다. 상황은 일본 외교공관과 최승희에게 모두 딜레마였다.

 

한편 일부 평전은 재미 조선인들이 일본인으로 소개되는 최승희를 비난했다고 서술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 평전들은 조선인 동포들이 최승희에게 일본인이 아니라고 공개선언하기를 요구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공연을 보이콧하겠다고 협박했다고 서술했지만, 최승희는 나는 코리안이라고 말할 수는 있었지만 일본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1938년 2월3일의 <신한민보>는 최승희가 "조롱속의 새"와 같은 신세이며, "가슴 가운데 쌓인 민족정서를 활발하게 발표하지 못함은 최승희 여사의 숨은 고충이오, 우리의 아픈 유감"이라고 서술했다.

 

사실 조선인 교민들의 요구는 협박이 아니라 조언이자 제안이었다. 모처럼 열린 조선무용 공연회가 미국인들에 의해 일본공연으로 분류되어 보이콧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재미 조선인들이 최승희에게 일본인이 아니라고만 말해 주면 자신들이 다른 반일 운동가들을 설득해 조선무용 공연이 진행되도록 하겠다는 뜻이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 일부 평전들은 또 최승희가 사이 쇼키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한 점, 일본 외교공관/언론사와 가깝게 협조하면서도 조선인단체/인사들과의 면담을 꺼렸다는 점을 들어 최승희를 비난했다고 서술했으나,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최승희가 한인단체/인사들과의 면담을 자제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일제공관이 최승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미주 조선인 동포들의 기관지 <신한민보>193823일자 기사에서 최승희가 조롱속의 새와 같은 신세라는 사실을 지적했고, “공개적으로 그 가슴 가운데 쌓인 민족정서를 활발하게 발표치 못함은 여사의 숨은 고충이오. 우리의 아픈 유감이라고 이해했다. 이같은 인식을 공유했던 조선인 동포들이 공연을 빌미로 최승희를 협박했을 까닭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미국내 반일 정서 및 일제 불매운동과 다른 한편으로 일본 공관의 예술사절 행사 강행이 맞부딪히는 상황 속에서 최승희의 미국 순회공연은 결국 중단되었고 최승희는 미국인들에게 자신의 민족 정체성을 제대로 주장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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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입국 기록에 나타난 코리안최승희

 

일제 당국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최승희는 자신이 조선인임과 자신의 무용이 조선무용임을 홍보하겠다는 목표를 포기하지 않았다. 다만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일제 당국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아야 했기 때문에 대단히 조심해야 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미묘한 상황이 처음으로 현실로 나타난 것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였다. 19371229일 요코하마를 출발한 최승희는 1938111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하선에 앞서 여객선 치치부마루(秩父丸) 측이 미국 이민국에 제출한 입국자 명단에 최승희와 안막의 국적(Nationality)일본(Japan)’으로, 민족(Ethnicity)일본인(Japanese)’로 적혀 있었다.

 

최승희와 안막의 민족정보를 일본인으로 표기한 것은 실수라고 보기 어렵다. 1937년경 최고 인기의 예술가였던 최승희의 별명이 반도의 무희였던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더구나 19364<반도의 무희>라는 제목으로 최승희 영화가 개봉됐고, 이 영화는 그 후 4년 동안 조선과 일본 전역에서 인기리에 상영되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일본열도를 내지,’ 조선을 반도라고 불렀다. 따라서 최승희가 조선인임을 모르는 일본인은 없었다. 그런데도 최승희를 일본인으로 표기한 것은 미국에서 그녀를 일본인 예술가로 소개할 필요가 있었던 일제 당국의 영향력이 개입했다는 증거였다.

 

태평양을 횡단하는 동안 치치부마루 선상에서 열리곤 했던 일본식 선상파티. 안막은 유카타 차림이지만 최승희는 한복차림으로 참석했다. 사진설명에는 최승희가 "조선인 무용가(Chosunese Dancer)"라고 소개되었다.

 

입국 수속 중에 잘못된 민족 정보를 발견한 안막과 최승희는 미이민국 관리에게 이의를 제기했고, 이에 따라 입국자 명단에서 두 사람의 민족 정보는 코리안(Korean)’으로 수정됐다. ‘일본인코리안으로 수정한 것은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는 데에 머문 것이 아니라, 최승희 미주공연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준비작업이었다. 조선무용 공연을 위해 미국에 온 최승희로서는 자신의 민족 정체성을 코리안으로 분명히 밝혀둘 필요가 있었다.

 

이로써 최승희는 일제 당국의 필요를 정면으로 거부한 셈인데, 이것이 문젯거리로 불거지지는 않았다. 최승희의 인종이 코리안인 것은 사실이었고, 최승희의 국적은 여전히 일본이었으므로 일제 공관들이 최승희를 일본예술가로 소개하는 데에 지장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이때 최승희는 자신의 민족명 표기를 조선인(Chosunese)’에서 코리안(Korean)’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요코하마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약 2주일 동안 항해하면서 최승희는 자주 선상 파티에 초대받았는데, 최승희는 항상 한복차림으로 참석했고 자신을 조선인이라고 소개했다. 최승희를 조선인(Chosunese)”이라고 설명한 선상 파티 사진도 발견되었다.

 

[자료. 최승희와 안막의 미국 샌프란시스코 입국 기록] 안막과 최승희의 국적과 민족명이 모두 일본/일본인으로 되어 있었으나, 아마도 두 사람의 이의 제기를 통해 인종명이 일본인에서 코리안으로 수정되어 있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에 내려 입국 수속을 밟으면서 최승희는 입국서류에 잘못 기입된 일본인(Japanese)”조선인이 아니라 코리안으로 수정했다. 이는 아마도 미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에 조선이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이미 널리 알려져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최승희는 미국과 유럽에서 자신을 조선인(Chosunese)”을 자칭한 적은 없었고, 언제나 코리안(영어)” 혹은 꼬레안느(프랑스어)”로 소개했다. 서구인들에게 낯선 이름을 새로 소개하기 보다는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이름에 편승하기로 한 것이다. ‘코리아는 고구려와 고려에서 유래한 이름이므로 이를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승희는 이미 일본에서도 두 차례에 걸쳐 자신의 이름 앞에 코리안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바 있었다. 193510월의 제2, 19369월의 제3회 신작무용발표회의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일본어 제목에 이어 영어 제목을 덧붙였고, 여기에 저명한 코리안 무용가(Noted Korean Dancer)”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나 정작 세계 순회공연이 결정되고 19379월에 개최한 고별무용회의 프로그램에는 코리안 댄서라는 영어 표현을 생략했는데, 아마도 해외 공연을 위해 출국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제당국의 경계심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조심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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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미국 공연: 정체성 주장의 실패와 공연 중단

안승자의 여권 발급이 거부됨

 

세계 순회공연이 결정되자 오빠 최승일은 최승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최승희라는 한 사람이 조선 민족을 세계무대에 내놓게 되었다는 것을 너는 깊이 인식해야 할것을 조언했고, 최승희는 중국 소설가 노신(魯迅)을 인용해 애굽(埈及)이 망했으나 그 민족과 예술은 망하지 아니하였으며 유대(猶太)는 망했으나 그 민족은 망하지 아니 하였다면서 조선민족과 그 예술이 건재함을 보이는 것이 세계 순회공연의 목표이라고 답장했다. (나의 자서전, 1937:71-73).

 

그러나 최승희의 계획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최승희는 남편 안막과 딸 안승자와 함께 순회공연을 떠날 예정이었고, 따라서 일본 외무성에 세 사람이 여권을 신청했다. 그러나 일본 외무성은 1937910일 최승희(여권번호#340980)와 안막(#340978)에게만 여권을 발급하고 안승자의 여권발급은 거부했다.

 

최승희와 안막은 1927년 12월29일, 요코하마에서 일본 여객선 치치부마루를 타고 세계 순회공연 길에 올랐다. 치치부마루는 태평양을 횡단, 하와이를 경유한 뒤, 1928년 1월11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안막-최승희 부부는 세계 순회공연이 3년으로 계획했으므로 5세의 딸을 떼어놓고 갈 수 없었다. 또 최승희는 안승자를 무용가로 키우고 싶었기 때문에 딸에게 세계 무용무대를 견학시키며 조기교육을 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안승자는 당시 취학연령이 아니었으므로 이 같은 가족적 이유는 보통 받아들여지게 마련이다. 일제 외무성이 안승자의 여권 발급을 거부한 것은 아마도 최승희 가족의 망명 가능성을 처음부터 차단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일제는 1931년의 만주사변에 이어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침략국으로 지탄을 받고 있었고, 특히 미국에서는 반일 분위기가 강해지면서 일제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특히 미국 여성들의 일제 실크 불매운동은 일본 무역수지를 악화시켰고, 일본군 무장 유지에 필수적인 석유와 철광석 및 고철 수입에 차질을 빚었다.

 

더구나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193711-19381)이 미국에 알려진 후 미국 내 반일 감정은 더욱 격화되었기 때문에 일제는 대책을 마련해야 했고, 최승희의 미국 순회공연이 그 대책의 일환이었다. 일본 최고의 무용가를 예술사절로 파견해 미국내 반일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던 것이었다.

 

세계 순회공연 중에 최승희 가족이 미국이나 유럽으로 망명을 시도한다면 일본은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될 터였다. 이를 우려한 일제 외무성은 딸 안승자의 여권발급은 거부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모의 세계 순회공연 동안 안승자는 할머니와 함께 도쿄의 자택에 머물러야 했다.

 

 

일본 외무성은 안막-최승희 부부와 딸 안승자의 여권발급 신청을 받고, 안승자의 여권은 발급을 거부한 채 1937 년  9 월 10 일, 최승희-안막 부부의 여권만 발급했다. 당시 5세의 딸 안승자는 도쿄 자택에 할머니와 함께 머물러야 했다.

 

안막-최승희 부부가 미국이나 유럽에서 망명을 기획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당시의 정황을 보면 최승희 부부가 망명 의사를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들은 둘 다 경성에 가족이 있었고 도쿄에 저택과 무용스튜디오가 있었다. 또 조선과 일본에는 그를 추앙하는 수천만의 팬들과 후원자들이 있었다. 최승희는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지 않고 자비로 세계 순회추진할 수 있었고, 2만 달러 이상의 예금과 상당한 주식을 일본에 남겨둔 상태였다.

 

따라서 최승희가 가족과 재산과 팬들을 버리고 외국으로 망명하기란 쉽지도 않았고 구체적인 실익도 없었다. 더구나 최승희의 목표가 세계 순회공연을 통해 조선무용을 세계에 알리는 것이었다면, 망명이나 난민 신청은 그러한 목표 달성에 도움이 될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 외무성이 안승자의 여권 발급을 거부한 것은 최승희의 망명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게다가 안승자를 인질로 일본에 잡아둘 경우 미국과 유럽에서 최승희와 안막의 언행을 통제하기가 훨씬 수월할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었다.

 

일본 외무성이 안승자의 여권발급을 거부한 사실은 일제 당국이 처음부터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세계 순회공연을 통해 민족 정체성을 주장할 계획이었던 최승희는 출발 전부터 일제 당국의 견제를 받았던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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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과 남승룡, 그리고 최승희

 

조선인 정체성과 자부심을 간직한 황실학교 졸업생들 중에는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아이콘이었던 인물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마라톤의 손기정(孫基禎, 1912-2002)과 조선무용의 최승희(崔承喜, 1911-1969)였다. 손기정과 최승희가 조선민족의 희망으로 추앙되었던 까닭은 그들이 조선일일본일을 넘어 세계일을 달성했기 때문이었다.

 

조선민족의 희망이 되기 위해 <세계일 정체성>이 중요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을 이기고 독립을 이루는 것이 조선인들의 궁극인 목표였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극일(克日)의 희망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곧 민족의 희망이었을 수밖에 없었다.

 

극일을 위해서는 조선일(朝鮮一)로는 부족했다. 요즘의 국내 최고에 해당하는 조선일도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만, 극일의 준비단계일 수는 있겠으나 극일 자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숙명여고보 시절의 최승희와 양정고보 시절의 손기정

 

조선인이 일본일의 위치에 오를 경우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스포츠나 예술분야에서 일본일에 오른 사람이 많았다. 일본 예선을 거쳐 올림픽에 출전한 조선인 선수들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그러나 손기정과 남승룡을 제외하고는 그들이 조선의 희망으로 추앙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세계일을 달성하지 못하고 일본일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유도계에서는 성인(柔聖)이라고 불리던 이선길은 일본유도선수권대회에서 4회 우승을 차지한 바 있는 일본일의 조선인이었다. 그 역시 조선인의 희망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종목 자체가 일본 스포츠였다는 점도 있었겠지만, 일본일이 극일로 간주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계일은 달랐다. 세계일의 자리에 오른 조선인은 사계의 권위자라는 일반적인 의미에서뿐 아니라 극일(克日)의 화신으로 해석되었다. 보스턴대학과 하버드에서 수학한 후 뉴욕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조선을 소재로 문학작품을 발표하던 문사 강용흘(姜龍訖, 1903-1972)은 조선의 문필가들뿐 아니라 일반 대중의 영웅이자 신화였다.

 

세계일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조선인도 환영받았다. 권투선수 서정권은 세계챔피언 결정전에서 패배해 세계일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지만, 조선 언론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일반 대중들도 그의 패배를 안타깝게 여겼다. 성패에 상관없이 세계일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조선인들에게는 극일의 시도로 보았던 것이다.

 

세계일의 가장 극적인 예가 손기정과 남승룡의 올림픽 제패였다. 그들이 조선일과 일본일을 거쳐 세계일에 이르는 과정은 한편의 드라마처럼 기록되고 전파되었다. 시상대에서 고개를 숙인 그들의 모습은 슬픔을 넘어 분노로 번졌고 조선의 신문들은 그들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렸다. 극일을 하고도 극일이라고 말할 수 없었던 조선의 슬픔이자 분노였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세계일'을 달성한 두 조선인. 이들은 일제억압에 신음하던 조선인들에게 극일과 해방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경쟁 종목이 아닌 무용에서 최승희가 추구한 세계일은 세계적 무용가의 반열에 오르는 것이었다. 최승희의 목표는 이사도라 던컨과 마리 뷔크만, 우다이 샹카르와 라 아르헨티나와 메일란팡 등이었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 이미 일본일을 달성한 최승희가 세계 순회공연에 나선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세계일의 열망은 손기정과 남승룡의 그것과 같았다. 극일을 하려면 세계일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신여성 무용예술가 최승희의 세계일 정체성은 조선인 정체성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의 조선인 정체성은 자존심을 지킬뿐 아니라 자부심을 펼치는 것이었다. 황실학교 숙명여학교 시절부터 다져온 조선인 정체성은 결국 일본일을 넘어 세계일을 지향하게 만든 것이다.

 

손기정의 올림픽 우승 후 최승희는 도쿄 라디오방송과 잡지 인터뷰 등에서 일본이 우승해서 기쁘다, 그러나 조선인이 이겨주어서 더욱 기쁘다고 말했던 것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어쩌면 최승희는 여기에 덧붙이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었던 말이 한마디 더 있었을 지도 모른다. “대한제국 황실학교 출신들이 이겨주어서 더더욱 기쁘다.” 손기정과 남승룡은 둘 다 양정학교 졸업생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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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세계일 정체성>: ‘조선일일본일을 넘어서

 

19333월 최승희는 두 번째 도일 후 다시 이시이바쿠 무용단의 일원으로 무용 활동을 재개했다. 이 시기는 최승희가 조선무용을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평전들은 19335월의 <여류무용가대회>에서 발표된 <에헤야 노아라>를 그 효시로 보고 있다.

 

이후 최승희의 신작무용작품들 중에서 조선무용이 차지하는 비중은 급속히 높아졌고 <승무(1934)><검무(1934)>, <가면춤(1935)><조선풍의 듀엣(1935)> 등은 최승희의 대표작이 되었다. <서정시(리릭포엠, 1934)><희망을 안고서(1934)>, <길을 잃은 사람(1935)><마음의 흐름(1935)> 등의 현대무용 작품들도 일본 관객들의 찬사를 받았으나 압도적인 찬사는 조선무용에 쏟아졌다.

 

19341월 카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938:210)최승희가 일본일(日本一)”이라고 선언한 이래 최승희는 자타가 공인하는 일본 최고의 서양식 예술무용가로 떠올랐고, 막 결성되어 활동을 시작한 대규모의 화려한 소녀가극단에 못지않은 높은 인기를 누리는 무용가로 꼽혔다.

 

일본의 문호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일찌감치 최승희를 '일본일'의 신무용가로 선언했었다.

 

그러나 최승희의 목표는 일본일이 아니라 세계일(世界一)이었다. 1926년 이시이 바쿠의 제자 시절부터 최승희의 목표는 인도의 우다이 샹카르와 스페인의 아르헨티나와 같은 세계적인 무용가”(서만일, 1957(10):71)였고, 도쿄를 방문한 안나 파브로바, 이사도라 던컨, 마리 비크만 등의 정상급 무용가들이 추는 춤을 보고 무용적 움직임과 표현의 특색을 연구했다. (정병호, 1995:38). 1927년 경성공연에 참가했을 때도 일본에서 더 많은 실력을 쌓아 세계적인 무용가가 될 결심을 굳혔다(김찬정, 2003:50).

 

최승희는 19315월 안막과 결혼할 때도 세계 제일의 무용가가 되고 싶다고 자신의 포부를 털어놓았고(다카시마 유자부로, 1981:35; 강이향, 1993:87), 19333월 자존심을 접고 다시 이시이바쿠 문하로 들어간 것도 세계적 무용가가 되려면 도쿄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인식 때문이었다(정병호, 1995:72). 최승희는 19354월 자전적 영화 <반도의 무희(1936)>의 대본작가 유아사 가츠에(湯淺克衛)에게 저는 반드시 세계 제일의 무용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유아사 가츠에, 1952: 175). 최승희는 자신이 세계일이 되고 싶었을 뿐 아니라 딸 안승자가 엄마보다 더 훌륭한 무용가가 되어 세계를 돌아다니며 세계 제일의 무용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까지 가졌다(다카시마 유자부로, 1981:71).

 

 

1930년대 중반, 최승희는 예술과 예능의 부문을 통틀어 가장 인기있는 일본일의 예술가였다.

 

최승희의 세계일 열망은 다른 사람들도 인정했다. 최승희의 <1회무용발표회>를 취재한 <신동아>기자는 최승희가 일본의 무용가로서만이 아니라 머지않아 세계의 무용가로서 활동할 것을 확신한다고 보도했고, 잡지 <개조>의 사장 야마모토 사네히코(山本實彦)19353월 대학을 졸업한 안막에게 최승희는 세계적인 무용가가 될 소질을 가지고 있으니 당신은 소설가가 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최승희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하면서 최승희를 후원하기 위해서는 사상운동에서도 손을 씻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설득했다(김찬정, 2003:137). 잡지 <백광(19374월호)>의 기자도 최승희여사 신문기라는 인터뷰 기사에서 최승희를 세계의 무희라고 불렀고, 야마모토 사네히코도 <삼천리(193512월호)>세계적 무희 최승희에게 전하는 말이라는 글을 기고했었다.

 

최승희의 세계일(世界一) 열망은 그가 가진 <조선인 신여성 예술가>라는 정체성에 바탕을 두었다. 그가 조선무용에 매진하고, 신무용의 요소를 가미한 것도, 오락과 연예로 빠지지 않고 예술무용에 정진한 것도 세계일열망을 실현하기 위한 토대가 되어 주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은 일본을 이기는 방법으로 세계일을 추구하곤 했다. 조선인들이 마라톤의 손기정과 남승룡, 권투의 서정권 등에 열광한 것도 세계일에 도전했거나 이뤄냈기 때문이었다. 최승희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세계일의 무용가가 되는 것이 일제의 차별을 보란 듯이 비웃어줄 유일한 방법이었다. 최승희가 자타가 공인하는 일본일의 무용가로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면서도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 순회공연을 시도한 것도 바로 이같은 민족정신이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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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취적인 <신여성 정체성>

 

가족과 관객과 평론가들에 의해 벌거벗고 춤춘다고 요약된 신무용이 발전은커녕 제대로 전개되기도 어려웠으므로 이는 최승희의 공연 활동에 난관이었고 그의 창작활동을 위축시켰다.

 

193110월호 <삼천리>에서 최승희는 민요의 예술화를 추구하고 싶지만 재정이 없어 스튜디오 유지조차 어렵다고 고백했다. “그만치 명성이 높은 터에 7-8백원의 돈도 최승희양을 위해 던지는 분이 없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최승희는 대답했다. “있다면 있다고도 하겠지요. 그러나 그런 분들은 어디 예술무용을 잘 자래우기 위하여 주어야 말이지요. 그런 분들은 대개 딴 목적이 있대요. 저는 싫어요.” 딴 목적이란 <신여성 예술가>의 성적 대상화였다.

 

귀국 직후인 192911월 최승희는 고시정 19번지의 일본인의 저택을 빌어 첫 무용연구소를 설립했지만, 반년도 안 되어 19304월에 옥천동 65번지로, 19306월 필운동(번지 미상)으로, 19309월에는 적선동 195번지로, 19315월에는 서빙고로(정병호, 1995:59) 무용연구소를 옮겨야 했다.

 

1929년 11월28일의 <동아일보>에 실린 적선동 소재 무용연구소를 소개한 기사.

 

스승 이시이 바쿠가 1924년 무사시사카이에 무용연구소를 설립, 1928년 지유가오카로 확대 이전한 후 약 30년 동안 한 곳에서 신무용의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경성의 최승희 무용연구소는 약 3년 동안 5군데나 옮겨 다녀야 했던 것이다.

 

최승희에게도 패트론을 자처한 부호들이 있었지만 재정지원의 댓가로 신여성 예술가 최승희를 애인이나 첩으로 삼고자 했고, 최승희는 그런 제안을 수락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과 자신의 예술에 대한 성적 대상화를 중단시키는 유일한 방법으로 최승희는 안막과의 결혼을 단행했다. 남편 안막은 최승희의 무용 활동을 재정으로 지원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미혼 신여성 무용가의 성적 대상화를 저지시켜 주었다.

 

안막과의 결혼 후에도 최승희는 무용가로서의 직업 활동을 중단하지 않았고, 딸 안승자의 출산 이후 남녀평등에 대한 확실한 견해를 갖게 되었다. 이는 또 1930년대 새로 대두된 현모양처라는 여성의 역할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다. 가부장제의 남존여비와 여필종부가 설득력을 잃었지만 신여성의 사회활동과 자유연애도 역시 부정되는 가운데 제기된 현모양처의 역할은 가부장제가 신여성을 포섭하려는 어정쩡한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최승희와 딸 안승자. 최승희는 딸에게 '남자를 이기라'는 뜻의 이름을 직접 지어 주었다.

최승희는 결혼과 출산, 그리고 지속적인 무용 활동을 통해 그의 <신여성 정체성>을 독특하게 확립했음을 알 수 있다. 봉건적인 가부장제의 여필종부와 신여성의 자유연애를 모두 거부했고, 여성을 가정에 가두려는 현모양처 요구에도 머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승희는 자신과 신무용을 성적 대상으로 이해하는 가부장제 관행도 거부했지만, 가부장제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성적 방종을 채택한 자유주의적 신여성도 비판했다.

 

딸을 출산했을 때 최승희는 아들보다 낳은 딸이라는 뜻으로 승자(勝子)라는 이름을 지었는가 하면, 예술 활동을 중단해야할 경우 시부모를 모시는 평범한 여성으로 돌아갈 각오도 내비쳤다. 남녀평등, 나아가 여성우월의 태도는 전통적 여성상과 구별되었지만, 시부모를 모시는 며느리가 되려는 결심은 신여성과 매우 다른 태도였다.

 

최승희가 독특한 <신여성 정체성>을 갖게 된 것은 자신의 가부장들로부터 받았던 전폭적인 지원 덕분일 것이다. 부친 최준현은 딸인 최승희에게 신교육을 받을 수 있게 했고, 큰오빠 최승일은 최승희에게 신사상의 정신적 자양분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를 예술가의 길로 이끌어 주었다. 스승 이시이 바쿠는 남녀 차별과 민족 차별 없이 최승희를 예술가로 교육시켰고, 자유연애가 아니라 중매결혼을 통해 맺어진 남편 안막은 자신의 경력을 희생하면서 최승희의 무용 활동을 지원했다.

 

가부장들로부터 이같은 특별한 지원을 받은 최승희의 <신여성 정체성>은 가부장제에 대한 저항과 대결의식이 특징이었던 일반적 <신여성 정체성>과 달랐다. 최승희의 <신여성 정체성>은 가부장들의 지원에 힘입어 자신감과 진취성을 가졌던 것이 특징이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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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여성 정체성>: 선망과 경멸의 대상

 

유학을 끝낸 최승희는 19298월 조선으로 돌아왔다. 18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조선인 정체성><예술가 정체성>으로 무장되어 있었고 자신의 이름이 걸린 무용단을 설립한 최승희에게는 또 하나의 정체성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여성 정체성>이었다.

 

조선의 신여성 현상은 1910년대에 여성교육운동에서 시작되어 1920년대 일제의 문화통치정책으로 조성된 자유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 여성의 사회 활동 참여로 활발해 지고 있었다. 신여성들은 신학문, 단발과 양장 등의 외양으로 나타난 신문화와 가부장제에 대항하는 남녀평등과 자유연애 등의 신사상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이들은 일본의 관행을 따라 흔히 모던걸이라고 불렸다.

 

새로운 능동적 주체를 지향한 신여성은 <신여자>, <신여성> 1920년대의 여성 잡지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펴는 한편, 학문과 교육,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선구적 신여성으로 김일엽, 김활란, 나혜석, 박인덕, 유각경, 허영숙 등이 꼽힌다. 최승희는 이들의 뒤를 이어 1920년대 말부터 신여성의 대열에 합류한 셈이다.

 

 

신여성은 젊은 세대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기성세대에게는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위험요소였다. ‘신여성에 대한 반발은 부정적 낙인찍기로부터 시작되었다. 신여성은 (1) 허영과 사치에 물든 반사회적존재이자 (2) 육아와 가사 노동을 부정하는 반가정적존재로 묘사되었다. 전자는 신여성들이 단발과 양장, 하이힐과 화장품으로 대표되는 서구문물을 수용했기 때문이었고, 후자는 남녀평등을 주장하며 직업 활동에 뛰어드는 한편 자유연애와 연애결혼을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신여성에 대한 부정적 편견은 학문과 문필에 종사하는 신여성에게도 부여되었으나, 신여성 예술가, 특히 공연예술가들에게는 가혹했다. 여성 연극인과 영화배우, 무용가는 과거 봉건적 사회질서 속에서 기생과 재인 등 천민들이 담당했던 직종이었기 때문이었다.

 

최승희의 유학기간이었던 1920년대 후반 일본에서는 여학생이나 여성 예술가, 특히 여성 무용가에 대한 낯선 눈길은 거의 사라졌다. 일본의 개국(1858)과 메이지유신(1868)으로 신문명을 받아들인 지 이미 두 세대가 지났고, 여성교육과 신예술이 보편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선 사회는 신여성을 대하는 태도가 사뭇 부정적이었다. 개국과 근대화가 강제적이었던 만큼 반외세, 반일감정과 결합된 봉건적 가부장제의 저항이 심했기 때문이다. 특히 신여성의 자유연애와 연애결혼은 정조관념 부재와 성적 타락으로 강한 비난을 받았다.

 

 

이같은 사회분위기 속에서 여성 무용가는 신여성으로 범주화되어 젊은 세대와 일부 인텔리계층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기성세대에게는 비난의 대상이었다. 젊은 세대의 선망은 무용 활동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기성세대의 비난은 큰 방해가 되었다.

 

유학시절 딸을 기생으로 팔아먹었다는 비난을 견디며 훌륭한 무용가가 되어 돌아오라는 편지를 보낼 만큼 인식의 변화를 보였던 최승희의 모친조차 정작 최승희의 경성 공연을 관람하고 무대에서 내가 반라의 모습으로 공중 앞에 나타나 춤추는 것을 심한 굴욕으로 여기시고, 부끄럽고 체면이 구겨진다고 느끼곤 했을 정도였다.

 

가족의 인식이 이 정도였으니 일반 관객들은 두말할 나위 없었다. 19309월호의 <별건곤>에 실린 기고문에서 최승희는 무용 여하보다 반나체로 뛰어 나오는 최승희를 보고자 모이는 분이 많다고 했고, 193119일의 <매일신보>도 최승희의 무용이 관심을 끄는 것이 예술을 찬미함이 아니라 벌거벗고 춤춘다는 것때문이라고 서술했다.

 

무용에 대한 이정도의 사회 인식이 팽배한 가운데 신무용 활동을 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처음 몇 번의 공연은 일본인들과 일본을 통해 개화의 물을 먹은 인텔리들의 후원으로 제법 성황을 이루었으나, 시간이 가면서 일반 대중의 관람은 줄어들었다. ‘반나체로 뛰어 나오는공연을 자기들의 예술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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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무용과 예능무용 사이에서

 

최승희가 새롭게 내면화한 <예술가 정체성>은 이내 도전에 직면했다. 한 가지 도전은 조선에서 날아왔다. 조선의 관행에 따르면 이란 기생의 할 일이었다. 최승희는 근대도시 도쿄에서 신무용에 정진하고 있었으나 경성의 조선인들의 눈에는 그저 기생의 일뿐이었다. 유학시절 최승희가 받은 모친의 편지가 그 점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여기(=경성) 사람들은 최씨 가문의 살림이 곤란하게 된 끝에 소중한 딸을 기생으로 팔아 버린 것이라는 말들을 하고 있단다. 그런 말들은 살을 베는 것처럼 나를 괴롭힌단다. 하지만 언젠가 사람들의 소문이 터무니없는 것임을 알게 될 날이 오겠지. 너는 꼭 훌륭한 무용가가 되어서 이 더러운 소문을 내는 사람들이 후회하도록 해주기 바란다.

 

모친의 기대는 어그러지지 않았다. 최승희의 예술에 대한 이해는 깊어졌고 자신을 예술가로 동일시하는 수준은 대단히 높아졌다. 3년 반이 지나 무용수업이 끝나갈 무렵의 최승희의 눈에는 그의 스승 이시이 바쿠의 예술조차 정체된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은 무용을 시작한 지 3년이 지난 어느 날나는 너에게서 이런 편지를 받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면서 <나의 자서전(1937)>에 이렇게 썼다.

 

1927년경 무사시사카이의 이시이바쿠무용연구소에서 최승희는 스승 이시이 바쿠의 지도아래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해 가고 있었다.

 

오빠, 저는 요사이 무용예술이란 어떤 것인가와 예술가의 양심이라는 것을 깨달아갑니다. 그것은 이런 데서 발견됩니다. 석정 선생님이 처음 독일에서 돌아와 야마다 코사쿠(山田殺作)씨의 반주로 안무된 작품과 요사이 만드는 작품의 차이가 왜 그다지도 정신과 감홍이 다릅니까? 저는 차차 석정 선생님에게 환멸을 느껴갑니다. 요사이 그의 예술에는 시가 없어요. 그것도 결코 무리는 아닙니다. 그는 춤을 추어서 수십 명의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합니다. 집이 없으니 집을 지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는 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요즘 제 마음은 마치 관솔불처럼 활활 타오릅니다.”

 

새로 접한 예술에의 열의에 사로잡힌 최승희의 관찰은 옳았을 것이다. 분주한 생활 속에서 이시이 바쿠 작품의 예술성은 저하되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최승희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이시이 바쿠의 예술성이 일시적으로나마 저하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였다.

 

1920년대 일본의 대중문화는 꽃피었다. 인쇄발달로 책과 잡지, 축음기의 발달로 노래와 음악이 발달하면서 통속화되기 시작했다.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무르익고, 경제가 여유로워지는 가운데, 문화는 에로그로난센스의 통속화 경향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무용도 예외가 아니었다. 예술무용의 시대가 가고 예능무용의 시대가 온 것이다.

 

예능무용은 1913년 다카라즈카 창가대의 발족으로 시작되었지만, 1919년 다카라즈카소녀가극단(寶塚少女歌劇団)이 결성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24년에는 다카라즈카 대극장이 완성되면서 쇼 비즈니스는 본격 궤도에 올랐고, 1927년에는 일본 최초의 레뷔(Revue)로 꼽히는 <몬파리(モン・パリ)>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예능무용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다카라즈카소녀가극단(1919)과 쇼치쿠소녀가극단(1928)은 1920년대와 30년대의 쇼비지니스의 양상을 바꿔놓았고, 예술무용은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사진은 1930년 8월 다카라즈카 대극장에서 열린 다카라즈카소녀가극단 츠키구미(월조)의 공연 파리세테(Paris-Sette).

 

1928년에는 쇼치쿠소녀가극단(松竹少女歌劇団)이 결성되어 다카라즈카소녀가극단과 함께 경쟁적으로 1930년대의 쇼 비즈니스를 주도했다. 예능무용이 성행할수록 예술무용은 위축되었고, 소녀가극단이 성행할수록 예술무용단의 흥행은 저조해졌다. 이시이 바쿠는 무용단을 유지하고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수입을 유지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도쿄에서뿐 아니라 지방 공연을 늘려야 했고, 그럴수록 창작을 위한 시간과 열정은 줄어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최승희는 조선 기생의 길을 피하며 예술의 길을 걸었으나, 예술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무렵 예능의 거센 물결에 직면해야 했다. 그러나 1929년 당시만 해도 최승희는 이같은 대중문화계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했고, 이를 단지 이시이 바쿠의 예술성이 시들고 있다고 판단해 무용 유학의 계약기간 만료를 기회로 이시이 바쿠의 문하를 떠나 조선으로 돌아왔다.

 

비록 현실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이때의 최승희는 <조선인 정체성>과 함께 <예술가 정체성>으로 단단히 무장되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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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술가 정체성: 기생과 가극단 사이에서

이시이 야에코의 증언

 

최승희는 19263월 숙명여학교 졸업과 동시에 무용에 입문, 3년 반의 일본 무용유학을 시작했다. 이 시기에 최승희는 처음으로 식민 모국 일본 사회와 조우했고, 조선인에 대한 제도적, 일상적 차별을 받았고, 그로 인해 숙명여학생으로서 다져왔던 <조선인 정체성>에 상처를 받았다. 자존심이 강한 최승희는 그 같은 상처를 글로 남긴 적이 없지만, 스승 이시이 바쿠의 아내 이시이 야에코(石井八重子)생각날수록 보고 싶은 최승희라는 제목의 회고록에서 최승희가 상처받았던 세 사건을 기록해 놓았다.

 

첫 사건은 최승희가 일본 유학을 위해 필요한 도항허가증을 받기 위해 <경성일보>의 마츠오카 사장 저택을 방문했을 때 일어났다. 이시이 야에코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 무렵 마츠오카 요코씨의 아버지가 <경성일보>의 사장을 맡았는데 그분이 (최승희의) 보증인이 되어주어서 그 댁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최승희씨도 오빠(=최승일)와 함께 방문했습니다. ... 요코 씨는 그 당시에 일곱 살짜리 소녀였는데, 아버지가 '요코야, 서울의 조선인 생활에 대해 말해 보아라'고 하니까, 그녀는 어린 마음에 느낀 대로 조선인들에 대한 나쁜 말을 했습니다. 최승희씨가 굉장히 불쾌했던 것 같고, 저도 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시이 야에코, “생각날수록 보고 싶은 최승희”)

 

스승 이시이 바쿠의 부인 이시이 야에코는 일본 유학 기간 최승희가 민족적 자존심을 상했던 경우가 여러번 있었다고 기술했다. 

 

최승희의 민족의식이 관찰되었던 두 번째 사건은 도쿄에서 이시이 무용단 학생들이 모리나가 제과공장을 방문했을 때 발생했다. 이에 대해 이시이 야에코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것은 최승희씨가 여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이므로 다이쇼 15(=1926) 봄이었습니다. 당시 유행 중 하나가 명사 일행을 모리나가 제과 공장에 초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있던 곳에서도 최승희 씨 등을 데리고 간 적이 있습니다. 모리나가 공장은 시나가와 쪽에 있었고, 그 때 여기저기 비스킷을 만드는 곳으로 우리를 안내해 주었습니다. 한 방으로 들어갔을 때 안내원이 이건 중국이나 조선쪽으로 가는 비스킷이고, 대놓고 말할 수는 없지만 집을 만들 때 쓰는 벽돌가루를 섞어서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최승희씨는 굉장히 싫은 얼굴을 했고, 당연히 나도 마 아이야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리나가 제과 안내인의 말은 농담이었거나 적어도 사실은 아니었을 것이다. 조선으로 보내는 비스킷을 사먹는 사람도 대부분 일본인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중국 수출품에 벽돌가루를 섞는다는 것은 모리나가 같은 대기업이 취할 영업 관행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공장 견학의 안내인이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일본 사회에는 조선과 중국을 얕잡아보는 인식이 퍼져 있었고, 일본인들끼리는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승희가 부정적인 감정을 보였던 것은 모리나가 제과의 관행 때문이라기보다 일본인들의 차별의식에 대한 것이었을 것이다.

 

도쿄유학(1926년) 초기 모리나가제과의 비스킷 공장에서 민족차별 언사를 들은 적이 있었으나, 1934년 모리나가 제과의 모델로 활동했다.

 

세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사건은 최승희가 다이쇼 천왕의 영구열차에 절하기를 거부했던 사건이다. 이때의 일에 대해 이시이 야에코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 후 점점 연습에 익숙해져서 반년도 지나지 않았을 무렵, 다이쇼 천황이 서거했습니다. 우리 집은 무사시사카이 역 바로 옆이었기 때문에, 다이쇼 천황의 장례식 열차가 지나갈 때 우리는 모두 나가 절을 했습니다. 그런데 최승희 씨만은 고개를 뒤로 돌리고 절을 안 해요. 집에 돌아왔을 때 이시이가 말했습니다. ‘왜 승희는 절을 안 했느냐고 했더니, 최승희는 우리나라를 괴롭힌 가장 높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뜻으로 말했습니다.

 

"우리는 깜짝 놀랐지만, 이시이가 눈시울을 닦는 모습을 저는 보았습니다. 그때도 최승희 씨는 일본이 자기 나라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지 못했고 그만큼 강한 민족적인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최승희 씨에게 특히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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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녀회와 양명회

 

숙명여학교가 대한제국 고종의 황귀비 엄씨(皇貴妃嚴氏, 1854-1911)가 설립한 학교로, 교원과 학생들의 조선인으로서의 자존심과 자부심이 높다는 점은 조선 합병 전부터 일본 통감부의 염려사항이었던 것 같다.

 

1907318일의 <황성신문>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1850-1924) 조선군 사령관이 명신귀족여학교의 조황(條況)을 친찰(視察)하고 학도의 성적이 극히 양호함을 대찬(大讚)하고, 15원금을 보조하여 장학하면서 엄귀비 전하께서 근학(勤學)하시는 성의를 찬양했다고 보도했다. 조선군 사령관이 여학교를 시찰한 목적이 장학일 리 없었고, 합병 저해세력을 정탐한 것이리라.

 

실제로 대한제국 황실과 숙명여학교는 매우 가까웠다. 엄귀비는 학교 이름이 명신에서 숙명으로 바뀔 때 친필 휘호를 써주었고, 1907년 퇴위한 고종이 덕수궁에 머무를 때도 숙명학생들은 수동남문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고종과 엄귀비는 수시로 숙명여학교 학생들에게 학용품과 과자를 선물했고 교사 위로 연회를 열었다. 졸업식과 운동회와 원족 때마다 금일봉과 선물을 내렸는데, 날이 덥다며 부채 1백 개를 하사한 적도 있었다. 고종과 엄귀비의 생일이면 숙명학생들이 손으로 만든 조화나 자수 작품을 진상했다.

 

숙명여학교를 설립한 고종의 황후 엄귀비(가운데)와 그의 아들 이왕세자(오른쪽), 그리고 숙명여학교 졸업생 최승희(왼쪽)

 

대한제국 황실이 숙명여학교에 내린 최대의 선물은 학교를 사립재단으로 독립시켜준 것이다. 망국의 기운이 짙어지자 엄귀비는 경기도와 황해도의 황실 전답 중에서 2백만 평을 숙명여학교에 귀속시키고 그 소출로 학교를 운영하게 했다. 그 덕분에 대한제국의 관립학교들이 일제강점과 함께 총독부 산하의 공립학교체계 안에 편입되어 사라지는 동안 진명, 양정, 숙명의 세 학교는 사립학교로 전환, 총독부 학교체제에 흡수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일제 강점 후에도 황실과 숙명여학교는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일본에 억류되었던 이왕세자(懿愍皇太子李垠, 1897-1970)는 모친이 세운 학교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고, 조선을 방문할 때는 이 학교들을 방문했다. 1918123일의 <매일신보>에는 이왕세자가 숙명여학교를 방문한 사진이 실렸다. 세 학교는 일본 수학여행 일정에 이왕 저택 방문을 꼭 포함시켰다.

 

이 세 학교 학생들은 졸업 후에도 양명회라는 연합 동창회를 결성해 활동했는데 황실학교였다는 공통점 때문에 결속력이 좋았다. 양명회는 1927년 최승희의 경성 공연때에 간친회를 열었고, 숙명여학교 동맹휴학 발생시와 1929년의 진명여고보 학생들의 대규모 교통사고가 발생했을 때 공동대처하는 단결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1927년 10월30일자 <조선일보>는 <양명회>가 최승희의 경성 공연을 맞아 숙명여학교 교정에서 간친회를 개최했다고 보도했다.숙명여자보통학교에 입학해 1926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8년간 숙명여학교에 재학하면서 조선인, 특히 엘리트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가정형편상 1925년의 수학여행에 참가하지 못했고, 따라서 그해 도쿄에서 이왕을 만나지 못했지만, 세계 순회공연을 떠나기 직전인 1937년 12월 자신의 두 번째 영화 <대금강산보>가 완성되었을 때 그 시사회에 이왕을 초청했다.

 

최승희가 숙명여학교와 이시이무용연구소를 졸업한 후 본격적인 무용 활동을 벌일 때에도 숙명 동창생들의 도움이 컸다. 숙명여학교 졸업생들은 황실학교 연합동창회 양명회와는 별도로 숙녀회라는 숙명동창회를 구성했다. 1927년 최승희의 첫 공연 때 숙녀회는 재학생들과 함께 단체관람을 했고 공연 중간에 꽃다발 증정식도 마련했었다.

 

또 최승희가 지방 순회공연을 다닐 때는 전국 각지의 숙녀회 회원들이 그를 맞아 침식이나 편의를 제공했고, 무용공연이 성공하도록 응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193711월 최승희가 전남 광주에서 공연을 가졌을 때 숙명 동창생들과 찍은 기념사진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상의 몇 가지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최승희가 강한 <조선인 정체성>을 가졌던 것은 숙명여학교 재학시절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조선인 정체성>은 대한제국 황실학교 학생으로서의 자존심과 자부심을 그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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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 17회 졸업생 4

 

19263월에 졸업장을 받은 숙명17회 졸업생들은 <조선인 정체성>이 확실했던 것을 알 수 있다. 76명의 졸업생들이 모두 그랬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이름이 알려진 졸업생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들의 자존심과 자부심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박화성(朴花城, 1903-1998)은 숙명17회 수석졸업생이었다. 본명이 박경순인 박화성은 어린 시절부터 글쓰기에 천재성을 보였고, 17회 졸업생이 되기 전에 이미 문단에 등단했다. 한 상태였다. 일본유학까지 마친 오빠 박제민이 노동쟁의 끝에 사망한 후 박화성은 고향인 목포에서 꾸준히 작품을 썼다. 1932년 단편 <하수도공사>와 장편 신문소설 <백화>를 발표했고, 이어서 일제 강점기의 고통 받는 도시노동자, 서민, 농민들을 그린 장,단편 20여편을 발표했다. <논 갈 때(1934), <한귀(1935)>, <홍수전후(1935)>, <고향 없는 사람들(1936)> 등은 자연재해로 고통 받는 극한 상황을 그렸고, <비탈(1933)>, <헐어진 청년회관(1934)>, <불가사리(1936)>는 일제 치하에서도 자본주의적 향락에 젖어 사는 부친과 형제 사이에서 고뇌하는 민족주의자의 모습을 그렸다. <온천장의 봄(1934)>, <중굿날(1935)>은 돈에 팔려가는 여인들의 행로를 담아냈다. 해방전 박화성의 작품세계는 조선인들의 삶에 밀착되어 있었다.

 

1932년 6월3일의 <동아일보>에 실린 박화성의 연재소설 소식(왼쪽)과 1936년 3월11일에 실린 노남교의 2년6개월 복역후 출감 소식 (오른쪽). 

 

노동운동가 노남교(盧南橋, 1907-2006)는 최승희와 입학동기였지만 사회주의 독립운동과 관련되어 3학년이던 1924년에 퇴학당했다. 이후 일본 유학 중에는 근우회 활동을 했고, 고향인 김해에 돌아와서도 경남지역 여성운동과 노동운동을 이끌었다. 1931년의 <김해 메이데이사건>으로 시위를 주도하다가 처음으로 투옥됐고, 도쿄 유학시절 지하 노동운동을 주도했던 것이 발각되어 오사카와 사가 형무소에서 2년반을 추가로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북한 인민군의 도쿄 주재 스파이로 일하던 중 맥아더 사령부의 상륙작전 최종 목표지가 인천임을 탐지해 북한 인민군 사령부에 타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공훈을 인정받아 노남교는 영웅 혁명가라는 칭호롤 받고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이정희(李貞喜, 1910-?)는 권기옥(權基玉, 1901-1988), 박경원(朴敬元, 1897-1933)과 함께 조선의 초기 3인의 여류비행사였다. 이정희도 최승희와 입학동기였으나 졸업하지는 않았다. 그는 가난한 집안 형편에도 불구하고 비행사의 꿈을 가졌고, 거의 혼자의 힘으로 천신만고의 도쿄 비행학교 유학 끝에 3등과 2등 비행사 자격증을 받았다. 그러나 1등 비행사가 되지 않는한 항공사 취업이 불가능했고 여성에게는 1등비행사 응시자격이 없었으므로 자기 자신의 비행기를 갖지 못하면 하늘을 날지 못했다. 이 때문에 박경원은 일본 체신성 대신 고이즈미 마타지로의 후원으로 비행기 <청연>을 불하받아 조선으로 비행하려다가 추락사했다. 이정희는 그 길을 가지 않았고 해방될 때가지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그러나 1949917일의 <동광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정희는 대한민국 현역 공군대위로 임관되어 전투기를 운전했다. 식민지 조선의 하늘을 날지는 못했지만, 해방된 대한민국 공군의 조종사가 된 것이다. 그는 195040세의 나이로 여자항공대 대장으로 임명되어 근무하던 중 한국전쟁 중에 실종되었다.

 

1928년 7월16일의 <매일신보>의 이정희 항공대회 입상 소식(왼쪽)과 1929년 11월28일 <동아일보>의 최승희의 무용연구소 개소 소식(오른쪽)

 

최승희(崔承喜, 1911-1968)의 무용 활동은 널리 알려져 있었고, 1930년대에는 조선은 물론 일본에서도 조선무용가 최승희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따라서 주요한 무용 관련 프로젝트가 있었다면 우선 최승희가 거명되곤 했다. 하지만 최승희는 일본 국책 사업에 지원하거나 요구에 응한 적이 없었다. 유일하게 수락한 것이 영화 <대금강산보(1938)>의 주연을 맡은 것이었는데, 이것도 금강산을 해외에 홍보한다는 대의와 자신의 세계 순회공연에 활용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백제가 일본의 식민지였음을 내용으로 하는 국책 무용작품 <부여회상곡(1941)>과 조선청년의 일본군 지원을 부추키는 국책영화 <그대와 나(1941)>에 출연하기는 거부했다. 거액의 예산이 책정된 <부여회상곡>은 조택원(趙澤元, 1907-1976)이 맡았고, <그대와 나>의 주연은 문예봉(文藝峰, 1917-1999)에게 돌아갔다.

 

이 네 사람의 숙명17회 졸업생의 공통점은 강한 <조선인 정체성>을 지녔고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특히 자신의 활동분야에서 조선인의 자부심을 잃지 않았고 일제의 도움을 받거나 정책에 동원되어 조선인과 조선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으려 했다는 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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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인 정체성: 자존심과 자부심

삼일만세운동과 숙명17

 

일제강점 직후인 1911년에 태어난 최승희는 총독부 치하에서 양육되고 교육받았다. 어린 시절 최승희의 집안은 유복했기에 일제 제도적, 일상적 조선인 차별을 심각하게 경험하지 않아도 되었고, 엘리트 교육기관 숙명여학교에서 수학하면서 <조선인 정체성>의 근간을 형성했다.

 

최승희의 숙명여학교 재학 중 등하교 길은 광화문통을 가로질렀다. 보통학교(=초등학교) 때는 수창동-수송동이었고, 고등보통학교(=중학교) 때에는 체부동-수송동의 왕복 길이었다. 이 등하교 길은 대한제국의 황궁 정문이었던 광화문 앞을 지나도록 되어 있었다.

 

당시 광화문 안쪽의 경복궁에서는 조선왕조의 전각들이 헐리고 조선총독부의 신청사가 건축되고 있었다. 경복궁내 건물들이 철거되기 시작한 것은 1915년의 조선물산공진회의 전시장을 조성하기 위해서였다. 이후에도 왕궁의 전각들이 줄줄이 헐렸고, 총독부 청사는 흥례문 자리에 1916710일에 착공, 192614일에 완공되었다.

 

1925년 10월20일의 <동아일보>에 실린, 광화문과 거의 완성된 총독부 신청사. 최승희는 최승희는 8년동안 숙명여학교 등하교길에 경복궁의 우아한 전각들이 헐리고 그 자리에 육중한 총독부 신청사가 건축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총독부 신청사는 1926년 1월4일, 최승희가 숙명여고보를 졸업하기 2달 전에 완공되었다.

 

최승희의 숙명여학교 재학기간이 19184월부터 19263월까지였으므로, 그녀는 등하교 때마다 조선 왕궁의 전각이 헐리고 육중한 총독부 건물이 올라가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모교의 모태인 대한제국의 경복궁은 자부심의 근거였지만, 그 왕궁이 헐리고 일제의 총독부 청사가 건축되어가는 것은 자존심이 짓밟히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19193월의 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최승희는 8살의 나이로 숙명보교 2학년 재학 중이었다. 최승희는 광화문통에서 만세운동의 규모와 처절함을 직접 목격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배재고보 재학 중이던 큰 오빠 최승일은 만세운동 이후 퇴학, 유학길에 올랐다. 그의 배재 중퇴가 삼일운동에 참가한 결과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개연성은 충분하다. 최승희는 거리에서 목격한 만세운동의 격렬함 못지않게 큰오빠의 거취를 통해 삼일운동을 실감했을 것이다.

 

최승희가 인식하고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삼일 만세운동은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의 운명도 결정했다. 군 출신으로서 무단정치를 자행하다 삼일운동을 촉발시켰던 그는 조선인들의 만세운동을 총칼로 가혹하게 진압했으나 결국 경질되고 말았고, 수년 간의 자괴심과 병고를 겪다가 쓸쓸하게 죽었다. 삼일 만세운동에 대한 일제의 보복은 가혹했지만 상처받았던 조선인들의 자존심을 다시 세워준 거국적 운동이었다.

 

숙명여학교도 최승희의 자부심의 근거였다. 최승희가 숙명여자보통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할 당시 조선 아동 취학률은 3.8퍼센트였고, 그나마 남학생 취학률이 6.4퍼센트였으므로 여학생 취학률은 1.0퍼센트 남짓이었다. 학령(=8)에 도달한 여자아이 1백 명 중 보통학교에 입학한 사람은 1명에 불과했다.

 

1926년 3월7일의 <조선일보>에 실린 숙명여고보 졸업자 사진과 졸업후 진로상황.

 

고등보통학교(=중학교)는 더 심했다. 최승희가 숙명여고보에 입학했던 1922년의 남녀 고등보통학교 재학생은 28개교에 918명이었다. 여학생 수는 남학생의 절반 이하였으므로 여고보 취학률은 0.2퍼센트, 1천 명 중 2명꼴이었다. 일제의 조선인 교육 억제와 조선 사회의 여성교육 기피 관행이 중첩된 결과였다. 그 때문에 1920년대의 조선 여성은 보통학교만 졸업해도 식자층이었고 여고보를 졸업하면 최고 인텔리였다.

 

1926년 숙명여고보를 졸업한 최승희는 이미 조선사회의 엘리트였고, 이른바 최고의 신여성 신부감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숙명여학교 졸업자들은 엘리트 지위를 개인적으로 활용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192637일의 <시대일보>에 따르면 숙명17회 졸업생 76명 중에서 졸업과 함께 혼인한 학생은 16명에 불과했고, 사범학교 진학생이 39, 일본 유학이 13, 국내 전문학교 진학자 5, 교원 취업자가 2명이었다. 고등교육 진학자가 많았을 뿐 아니라 직업 혹은 사회활동을 시작한 졸업생들이 많았던 것이다.

 

숙명17회 졸업생들 중에서 사회활동에 두각을 나타낸 인물로는 무용가 최승희를 비롯해 소설가 박화성, 혁명가 노남교, 비행사 이정희, 약사 장금산, 영화배우 김현정 등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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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존 연구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은 근대사 혹은 예술사의 연구 주제로 떠오른 적이 없다. 자료 부족 때문이다. 유럽이나 미주, 남미 공연 소식이 더러 평전에 인용되었지만, 대부분 최승희가 순회공연 중 현지에서 스크랩한 것을 발췌 번역한 것이었고, 이후 다른 연구자가 별도의 조사를 벌인 적은 없어 보였다. 필자가 2017년 여름의 유럽 취재를 통해 발굴한 신문과 잡지 기사와 사진, 공연 팜플렛 자료는 평전들이 소개한 자료의 수백 배에 달했다.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은 여전히 전인미답의 연구 분야이다.

 

평전들은 최승희 세계 순회공연의 일정과 각 공연의 레퍼토리를 파악하지 못했다. 서만일(1958)의 세계 순회공연 서술은 한쪽의 5분의1에 불과했고, 다카시마 유사부로(1959)160쪽 중에서 9(81-89)을 할애했을 뿐이다. 정병호(1995)에서도 유럽순회공연 서술은 평전 전체 362쪽 중에서 13(151-163), 강준식(2012)에서도 424쪽 중에서 16쪽에 머물렀다. 세계 순회공연에 포함된 30개 도시 150개 공연의 서술로는 턱없이 부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세계 순회공연에 임했던 최승희의 민족 정체성과 그것이 현지 언론에 반영되었던 양상에 대한 연구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이 연구는 세계 순회공연에 임했던 최승희의 민족정체성에 관련된 자료를 발굴하고 연구부문의 지형을 살피는 탐색적 성격을 가진다. 그리고 일정한 한계 속에서나마 평전들이 제시한 최승희의 민족정체성 주장을 가설로 다듬어 문헌분석을 통해 검증하게 될 것이다.

 

 

이글에서 사용하는 정체성이라는 용어는 풍부한 역사적 준거나 엄밀한 개념적 분석을 거친 정치한 용어는 아니다. 가장 간단한 의미에서 정체성은 개인이 처한 환경 속에서 스스로 내면화한 지위와 역할에 대한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은 다양한 사회에 처할 수 있고, 또 각 사회 속에서의 지위와 역할이 다양할 수 있으므로 개인의 정체성은 다중적일 수 있으며 시간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인들이 식민모국 일본에 합병된 조선사회에 살면서 조선인이자 일본인이라는 이중적 정체성을 가져야 했던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이 있었던 시기(1937-1940)는 조선이 일본에 병합된 지 거의 한 세대가 지난 시기였고, 일본의 군국주의가 극단으로 치닫기 시작했던 시기이다. 따라서 조선인이나 조선무용이라는 표현은 내선일체황국신민화정책에 위배되는 처벌 대상이었다. 따라서 나는 조선인이다는 선언은 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의 조선인이라는 뜻일 때만 허용되었고, ‘조선무용이라는 장르도 일본무용의 일부임을 인정하는 한에서만 통용되었다.

 

 

이글에서는 1930년대말 최승희가 세계 순회공연을 단행할 즈음에 가졌던 정체성을 여러 문헌을 통해 정리하고, 특히 최승희의 민족정체성이 미주와 유럽 공연 중에 어떻게 표현되었으며, 현지 언론이 그것을 어떻게 보도했는지 살폈다. 조사연구의 단순화를 위해 최승희가 세계무대에서 자신을 조선인 무용가, 자신의 무용작품을 조선무용으로 소개한 것을 민족정체성의 지표로 삼았고, 이 민족정체성이 현지 언론에서 어떻게 보도되었는지를 조사했다.

 

여덟 권의 평전에 서술된 단편적인 언급을 종합하면 최승희의 정체성은 그녀의 성장 과정, 그가 직면했던 상황, 그리고 그에 대한 반응에 따라 대체로 네 시기로 나누어 고찰될 수 있다.

 

1기는 최승희가 경성에서 태어나 숙명여학교를 마칠 때까지의 시기이고, 2기는 도쿄 무용유학 시기, 3기는 3년 반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무용연구소를 개설하고 안막과 결혼한 시기, 4기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무용의 창작과 공연 활동에 몰두하다가 해방을 맞을 때까지의 시기이다.

 

이 연구의 초점은 제4, 그중에서도 유럽 순회공연 시기에 맞춰져 있지만, 최승희가 다중의 정체성을 갖게된 과정을 보기 위해 앞선 시기의 상황을 개략적이나마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초기의 조선인 정체성과 유학기의 예술가 정체성,’ 조선활동기의 신여성 정체성과 일본과 세계활동기의 세계일 정체성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각각의 정체성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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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유럽 공연에서 드러난 최승희의 민족 정체성

-현지 매체에 보도된 파리공연 기사를 중심으로-

조정희, PD/최승희연구가

 

1. 서론

최승희(崔承喜, 1911-1969)193712월부터 194012월까지 만 3년의 세계 순회공연을 가졌다. 미국과 유럽, 중남미의 30여개 도시에서 150여회의 조선무용 공연을 열었다. 조선과 일본공연을 제외한 첫 해외 공연이었던 이 순회공연에서 최승희는 (1) 조선무용을 세계에 알리고, (2) 자신도 세계 정상급 무용가로 인정받겠다는 두 가지 목표를 세웠다.

 

조선과 일본의 언론 보도에 따르면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은 성공 일색이었다.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고, 공연마다 만석을 이뤘고, 현지 관객과 비평가들의 극찬을 받았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그러나 조선과 일본 매체의 보도가 사실의 전부는 아니었다. 최승희의 무용공연은 때로 보이콧 당했고, 계획한 공연이 취소되기도 했다. 만석은커녕 비평가 몇 명만 객석에 앉힌 채 관객 없는 공연을 며칠씩 계속해야 했던 때도 있었다.

 

그 같은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최승희는 자신의 두 가지 목표를 달성했다. 조선무용을 유럽과 남,북 미주에 알렸고 자신도 세계 정상급 무용가로 인정받았다. 이 같은 예술적 성과는 근본적으로 조선무용의 미학적 잠재력 덕분이었겠지만, 이 잠재력이 현실화된 것은 최승희의 예술적 재능과 치열한 노력의 결과이었음에 틀림없다.

 

1939년 1월31일, 최승희의 유럽 데뷔 공연이 열렸던 파리 시내 <살 플레옐> 극장

 

최승희의 예술적 성취의 궁극적 수혜자가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당시 조선 매체들과 오늘날의 다수 연구자는 최승희의 예술적 성공을 조선인의 건재함과 조선예술의 우수함의 증거로 보았지만, 일부 연구자들은 최승희가 식민모국 일본제국의 문화적 선전대 역할을 수행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이렇게 상반된 주장이 나온 것은 최승희가 세계 순회공연을 통해 시도한 민족정체성 주장이 얼마나 성공했는지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대다수의 평전과 평전을 인용한 연구서들은 최승희가 세계 순회공연을 통해 자신이 조선인이며 자신의 무용은 조선무용임을 지속적으로 주장했고 그 주장이 관철되었다고 서술했다.

 

반면에 최승희의 민족정체성 추구가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고 평가한 연구자들도 있다. 일본의 중국침략이 시작되었고 히틀러의 유럽침략을 눈앞에 둔 전운 속에서 진행된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은 일제의 호전성을 숨기고 무마하기 위한 제스처에 불과했다고 해석되곤 했다. , 최승희의 민족정체성 주장은 실패했고, 최승희는 일본제국의 아이돌이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이 글은 최승희가 세계 순회공연을 자신과 자기 무용예술의 민족적 정체성이 국제무대에서 인정받을 기회로 삼았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 같은 의도가 1938년 미국에서는 실패했지만 1939년 유럽에서는 성공했다고 평가한다.

 

1939년 6월15일, 최승희의 2번째 파리 공연이 열렸던 <팔레 드 샤이오> 극장. 

 

이글의 목적은 최승희의 민족정체성 주장이 미국에서는 실패했지만 유럽에서 성공했던 요인이 무엇이었는지, 환경적 조건과 주체적 노력의 양면에서 살피는 것이다. 유럽에서의 민족 정체성 주장이 성공한 것은 최승희-안막 부부와 일제 당국, 그리고 현지 언론 사이의 미묘하고 복잡한 상호작용의 결과임을 보이게 될 것이다.

 

이글의 논의와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일본 외무성의 최승희 관련 문건과 유럽 현지 매체의 보도문들이 사용되었다. 현지 언론 자료는 필자가 20175월부터 6월까지 유럽 7개국 14개 도시를 방문해 수집했고, 이후 각지의 도서관과 기록보관소와의 사후연락을 통해 보강되었다. 최승희 관련 일본 외교 문건은 2018<일본 외무성 역사자료 아카이브>에서 얻어진 것이다.

 

2017년의 유럽 취재와 2018년의 일본 취재는 사단법인 <후아이엠(당시 회장 차길진)>의 일부 재정지원으로 이뤄진 것임을 밝히며, 지금은 타계하신 차길진 회장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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