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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가 요코하마를 떠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것은 1938111일이었다. 미주 첫 공연인 샌프란시스코 커랜 극장 공연은 122일로 잡혀 있었다.

 

따라서 예정대로라면 최승희는 111일과 22일 사이에 샌프란시스코에서 <대금강산보>를 상영해야 했다. 그것이 이 영화의 본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대금강산보>의 해외상영을 위해 최승희는 필름 한 벌을 따로 제작했고, 그 상영권을 전적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와 LA에서 <대금강산보>를 상영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미주 순회공연 흥행사가 이를 대행해 주는 것이었다. LA의 미주동포신문 <신한일보> 193823일의 기사에 따르면 최승희는 컬럼비아 컨설팅사와 흥행계약을 맺었고, 최승희의 대행사는 퍼킨스였다.

 

최승희의 세계순회공연(1937-1940)의 첫 기착지 샌프란시스코의 공연은 1938년 1월22일, <커랜극장>에서 열렸다.

 

그러나 최승희의 샌프란시스코 도착 후 <대금강산보>의 상영에 대한 보도가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아 컬럼비아나 퍼킨스가 영화의 미주 상영을 위한 업무를 대행했던 것 같지는 않다.

 

혹은 샌프란시스코의 일본 영사관이나 재미 일본인 혹은 한국인 단체들이 영화 상영에 관한 업무를 대신해 주었을 수도 있겠지만, 일본영사관의 최승희 관련보고서 문건에는 <대금강산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고, 재미 일본인 신문이나 조선 교포 신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최승희 본인이나 매니저 역할의 안막이 이 일을 직접 처리해야 했을 텐데, 영어에 능통하지 못했던 두 사람의 언어장벽은 별도로 하더라도 시간이 부족했다. 도쿄를 출발하기 전의 일주일, 혹은 태평양을 건너는 2주일 동안 미국 영화 배급사와 원격으로 계약을 맺고, 상영관을 확보하고, 미디어에 영화 광고를 집행하는 것은 가능하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미국에서 <대금강산보>를 상영하려면 국제무역 절차와 서류작업도 필요했겠지만, 무엇보다도 검열을 통과해야 했다. 1938년경 미국에는 두 가지 종류의 검열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다. 정부 검열과 영화업계의 자체검열이었다.

 

미국 영화의 정부 검열의 시작은 1897년에 시작되었다. 그해 메인 주가 도박성 권투 영화 상영을 금지하는 법률을 통과시키자 수개 주가 메인주의 선례를 따랐다. 1907년 시카고는 경찰청장에게 영화 검열권을 주었고, 이후 1백개 이상의 미국 도시가 시카고의 선례를 따랐다.

 

1915년 미연방 대법원은 영화는 예술이 아니라 상품이므로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보장한 미국헌법 제1수정조항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고 판결함으로써 정부의 영화검열을 뒷받침했다. 영화의 정부 검열은 1981년에야 미국에서 완전히 폐지되었다.

 

샌프란시스코 공연에서 최승희는 <대금강산보>를 상영하지 못했다. 당시 미국에서 상영되는 모든 영화는 정부 검열과 영화업계 자체 검열도 받아야 했다. (사진은 당시 미국 영화들이 자체검열을 받은 후 필름 앞부분에 삽입하게 되어 있었던 검열 통과 증명서.)

 

한편 영화업계는 자체검열도 도입했다. 1920년대의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영화들과 영화인들 사이에 만연한 비윤리적인 행위 때문에 영화계 전반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을 때, 영화계는 대중의 비난을 피하고 정부의 검열을 완화시킬 목적으로 자체 검열 제도를 도입했다.

 

1927년부터 도입되기 시작해 1934년에 확정된 <헤이스 코드>라는 자체검열 조항에는 신성모독나체,’ ‘국가, 인종, 신념 등에 대한 고의적 공격등의 <절대 금지 장면> 11개와, ‘국기국제관계’, ‘사형집행이나 범죄자에 대한 동정<주의할 장면> 25종이 명시되었다.

 

미국 영화에 대해서는 영화사, 외국 영화에 대해서는 배급사들이 자체검열을 실시했고, 19347월 이후에는 모든 영화가 이 검열을 통과한 증명서를 발급받아야 극장 상영이 가능했다.

 

<대금강산보>가 미국의 정부검열이나 영화사 자체검열에 저촉될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결과에 상관없이 그 두 검열 절차를 통과해야 했다.

 

그러나 최승희는 시사회 일주일 후에 요코하마를 출발했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후에도 공연까지 열흘밖에 시간이 없었다. 영화상영을 위한 서류작업은 물론 검열 절차를 통과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같은 절차상의 문제 때문에라도 최승희와 안막은 <대금강산보>의 미국 상영, 적어도 샌프란시스코와 LA 상영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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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강산보>의 경성 개봉일은 도쿄보다 일주일이 늦은 1938129일이었고 개봉관은 을지로의 황금좌였다. 황금좌는 당시 주소 황금정 제4정목 30번지에 위치한 극장으로 해방 이후의 국도극장,’ 지금은 국도호텔자리이다.

 

1907년 한국 최초의 근대식 극장인 원각사가 세워진 이후 광무대(1907), 단성사(1907), 연흥사(1907), 장안사(1908), 우미관(1910) 등이 차례로 설립되었고, 1913년에는 을지로4가에 황금연예관(黃金演藝館)’이 개관됐다. 줄여서 황금관이라고 불리던 이 극장은 1917동아구락부(東亞俱樂部)’, 1925경성보창극장(京城普昌劇場)’으로 이름이 바뀌어 운영되다가, 193611월 동양풍 르네상스식의 지상 3층 지하 1층의 대리석 극장 건물이 신축되었고, 이것이 1천명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던 황금좌(黃金座)’이다.

 

<대금강산보>의 서울 개봉은 1938년 1월29일, 을지로의 극장 <황금좌>에서였다.

 

1930년대 경성의 극장들은 청계천을 경계로 남북으로 나뉘어 있었다. 청계천 이북의 북촌에는 동양극장(東洋劇場), 우미관(優美館), 단성사(團成社) 등이 있었고, 남촌에는 명치좌(明治座)와 황금좌(黃金座), 희락관(喜樂館) 등이 있었다. 19385월호 <삼천리>에 따르면 북촌의 동양극장은 관객의 거의 전부가 조선인이었고 우미관은 조선인이 9, 일본인이 1’, 단성사는 조선인이 8, 일본인이 2이었다고 한다. 반면에 남촌의 명치좌와 희락관은 조선인과 일본인이 반반’, 황금좌의 관객은 조선인 6, 일본인 4이었다.

 

<대금강산보>가 황금좌에서 개봉된 것은 경성에서도 통용되던 일본 영화사의 배급 관행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소유한 남촌의 극장들은 각각 일본 영화사와 제휴되어 있었다. 신작 영화 개봉의 전속 계약이었다. 명치좌는 쇼치쿠(松竹), 약초극장은 도호(東寶), 경성극장은 신코(新興)의 영화를 개봉했고, 황금좌는 니카츠(日活) 영화사와 전속 계약이 되어 있었다. <대금강산보>는 니카쓰 타마카와 촬영소의 작품이었으므로 황금좌에서 개봉된 것이다.

 

당시 개봉관들은 토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주일 단위로 신작 영화를 상영했다. <대금강산보>1938129일 토요일부터 24일 금요일까지 황금좌에서 상영됐다. 이를 홍보하기 위한 <동아일보><매일신보>, <경성일보>의 극장 광고는 126일 수요일부터 시작되었고 개봉일인 129일에 기사와 함께 가장 큰 광고가 실렸다. 신작 영화 개봉 일수가 일주일에 머문 것은 아마도 경성 영화 관람객 시장의 한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금강산보>는 약 넉 달 후에 다시 극장가에 등장했다. 이번에는 재상영관이었다. 1938510일부터 13일까지는 신부좌(新富座), 514일부터 17일까지는 도화(桃花)극장이 <대금강산보>를 상영했다. 신부좌는 신당동의 극장이었고 도화극장은 마포의 극장이었다. 두 극장 모두 경성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 극장들이었고, 이미 개봉되었던 영화를 재상영하는 이른바 2류 극장들이었다.

 

개봉 직전, 1938년 1월27일의 <동아일보>에 실린 <대금강산보>의 광고문.

 

이상한 것은 두 극장이 <대금강산보>를 일주일이 아니라 4일씩 상영한 것인데, 이는 필름 임대료 때문이었다. 19385월호 <삼천리>에 따르면 당시 외화 필름 임대료는 1주일에 25백원에서 45백원까지 다양했다. 찰리 채플린의 <거리의 등불(1931)>45백원으로 가장 비쌌고 <오케스트라의 소녀(1937)>25백원으로 가장 저렴했다.

 

<대금강산보>의 대여비는 3-4천원선으로 채플린 영화 급이었다. 2류 극장들은 비싼 대여비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두 영화관이 공동으로 한편을 대여해 3-4일씩 나누어 상영했던 것이다. 신부좌와 도화극장은 193810월 다시 한 번 공동으로 <대금강산보>를 대여해 상영했다. 신부좌는 1021일부터 23일까지, 도화극장은 1022일부터 25일까지였다.

 

한편 <대금강산보>는 지방에서도 상영되었다. 1938728일의 <매일신보>오는 (7) 30, 31일 양일간 당지 읍애관에서최승희 주연의 <대금강산보>가 상영된다고 보도했다.

 

이렇게 <대금강산보>1938년 내내 경성과 지방에서 상영되었다. 같은 영화가 한 해에 경성에서만 3차례, 그리고 지방에서도 상영되었던 것은 이 영화의 흥행이 좋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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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강산보> 시사회가 있은 지 일주일 후인 19371229, 최승희는 오후 3시에 요코하마를 출발해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호화여객선 치치부마루(秩父丸)’ 1등실에 승선했다. 마침내 1935년 말부터 2년여 이상 준비하면서 기다렸던 세계 순회공연 길에 오른 것이다.

 

최승희는 치치부마루의 화물칸에 악기와 의상, 공연 소도구를 담은 수십 개의 여행용 가방을 실었는데, 그중에는 <대금강산보>의 필름이 담긴 가방도 포함돼 있었다. 최승희는 자신이 절실하게 원했던 <대금강산보> 필름을 가지고 세계 순회공연의 장도에 올랐던 것이다.

 

최승희가 도쿄를 떠난 지 3주 후, 1938121<대금강산보>는 마침내 도쿄 <후지칸(富士館)>에서 개봉됐다. 아사쿠사6구에 위치한 <후지칸>은 니카츠 영화사의 개봉관이었으므로, 타마카와 촬영소에서 제작된 <대금강산보>가 이 극장에서 개봉되는 것은 예정된 것이었다.

 

 

<대금강산보>는 1938년 1월21일, 도쿄 아사쿠사6구의 <후지관>에서 개봉되었다.

 

<후지관>19088월에 개관한 객석 18백석의 대규모 영화전문 극장이었다. <후지관>의 개관은 당시 일본 전역의 주요 도시에서 일었던 영화전문극장 개관 러쉬의 일부였다. 이 지역 최초이자 일본 최초의 영화상설관 <텐키칸(電気館)>1903년 아사쿠사6구 설립되었는데, 이는 쇼치쿠(松竹) 영화사의 개봉관으로 최승희의 <반도의 무희(1936)>도 여기서 개봉되었다.

 

이후 190741일의 <신성관(新聲館)>, 7월에는 오사카 최초의 상설관 천일전전기관(千日前電気館), 716일 도쿄 아사쿠사6구의 삼우관(三友館), 1220일 오사카의 제일문명관(第一文明館), 19087월에 아사쿠사6구의 대승관(大勝館)이 줄줄이 개관했고, 마침내 그해 8<후지칸(富士館)>이 개관한 것이다. 이후로도 10월 나고야 최초의 상설관 문명관, 11월에는 천일전일본관(千日前日本館)이 문을 열어, 이른바 일본은 영화전문 상영관 시대가 열렸다.

 

<대금강산보>는 주연 여배우가 없는 가운데 개봉된 것이어서 홍보와 판촉에 도움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반도의 무희> 개봉 때와는 달리 도쿄에서 발행되던 수십 종의 일본 잡지에는 <대금강산보>에 대한 기사가 거의 없었다.

 

더구나 <반도의 무희> 개봉은 도쿄에서만도 4개 극장에서 동시에 이뤄졌지만 <대금강산보>의 개봉관은 <후지칸> 하나뿐이었다. <대금강산보>의 예상 흥행 수준이 <반도의 무희> 때보다 낮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금강산보>는 보통 이상의 흥행을 이어나간 것으로 보인다. 1월말 도쿄의 <후지칸> 상영이 종료되자 오사카의 텐노지 신세카이 공원에 위치한 <다이산칸(大山館)>21일부터 상영을 이어받았다. 오사카의 니카츠 개봉관인 <다이산칸>이 발행한 홍보지 629호에는 <대금강산보>을 다음과 같이 홍보했다.

 

1939년3월 <조선악극단>이 도쿄의 <화요극장>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의 맨 왼쪽의 입간판을 보면 이 극장의 당시 상영 영화가 <대금강산보>였음을 알 수 있다.

 

“... 반도의 기이한 명승, 금강산의, ... 경승과 오랜 제사 행사의 진기함, ... 미지의 나라 조선을 남김없이 소개하고, 자신감 넘치는 최승희의 멋진 무용장면, ... 요염한 미희, 최승희의 무용 걸작집... 천연미와 미술미를 혼연시킨 이채편...”

 

오사카 <다이센칸> 상영은 193821일부터라고 되어 있었으나, 이후에도 일본 각지에서 <대금강산보>가 지속적으로 상연되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진도 발견되었다. 1935년에 결성된 <조선악극단>은 소속단원이 35명에 달했던 본격 악극단으로, 19393월 일본 순회공연을 단행한 바 있었다.

 

39일자 <매일신보>는 이 악극단이 카게츠(花月)극장에서 공연한다는 광고문이 실렸고, 악극단의 트럼펫 연주자 현경섭의 유품 중에서도 단원들이 <카게츠극장> 앞에서 촬영한 기념사진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 사진 속의 <카게츠극장>의 상연 영화가 <대금강산보>였던 점이 발견된 것이다.

 

1938121일 도쿄에서 개봉된 <대금강산보>가 적어도 1년 이상 오사카와 도쿄를 비롯한 일본 전역에서 지속적으로 상연되고 있었음을 보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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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4일자 <매일신보>에는 <대금강산보> 시사회에 이왕 전하와 함께 조선총독부의 오노 로쿠이치로(大野緑一郎) 정무총감과 요시다 히로시(吉田浩) 철도국장이 참석했다고 보도했다.

 

조선총독부의 2인자인 정무총감이 총독을 대신해 참석하고, <대금강산보>의 제작에 자금과 협력을 아끼지 않았던 철도국의 국장이 참석한 것은 이해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 참석할 사람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아이카와 가츠로쿠(相川勝六, 1891- 1973) 외사과장이었다.

 

<대금강산보> 제작결정을 비롯해 초기의 신속한 진행은 아이카와 외사과장의 추진력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그의 목적은 총독부의 재정난 타개를 위한 해외관광객 유치였지만, 적어도 그의 업무 추진 방식과 능력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그는 최승희와 최승일을 도와 음악과 원작 마련을 지원했고, 최승희가 안무를 마칠 때까지 온갖 편의를 봐주었다

 

아이카와 가츠로쿠는 똑똑하고 능력있고 강직한 경찰공무원이었다. 도쿄제국대학 법대 출신이었고 고등고시를 통과해 내무성 공무원이 되었다. 1934년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장으로 승진했지만 1936년 우시오 시게노스케(潮恵之輔, 1881-1955)의 히로타(広田弘毅, 1878-1948) 내각 입각에 반대 의견을 내는 바람에 그 보복으로 좌천되었다. 그가 조선총독부 경찰부 경무국 외사과장으로 부임한 것이 그 때문이었다. <동아일보>의 사령 보도에 따르면 그가 총독부 외사과장으로 부임한 것은 1936422일이었다.

 

아이카와 카츠로쿠, 그는 1936년 4월부터 1937년 7월까지 조선총독부 외사과장으로 근무하던 중, 최승희의 <대금강산보> 제작에 적극 협력했다.

 

그의 외사과장 재임 중인 193685일 조선 총독이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에서 미나미 지로(南次郎)로 교체되었다. 아이카와 가츠로쿠는 신임총독을 충실히 보좌했는지 이후 미나미 총독의 신임이 두터워졌다. 19372<대금강산보> 제작 제안이 들어왔을 때 이를 적극 추진할 수 있었던 것도 총독의 신임 덕분이었을 것이다.

 

최승희가 <대금강산보> 제작을 위한 음악과 원작과 안무의 준비를 마쳤을 때, 촬영을 담당할 영화사로 니카츠를 선정한 것도 그의 수완이었을 것이다. 니카츠 영화사의 재정지원 요청을 만족시키기 위해 철도국의 참여를 유도한 것이다. 그 결과 71일 니카츠 영화사가 타마카와 촬영소에 <대금강산보>의 촬영을 할당한다는 발표가 나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듯이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대금강산보>를 위해서는 불운한 일이 2가지 생겼다. 하나는 앞에서 본바와 같이 77일 중일전쟁이 터진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이카와 외사과장이 78일자로 외사과장을 물러나 미야자키현(宮崎県)의 지사로 승진, 영전하게 된 것이었다.

 

75일자 도쿄 토메이 통신의 전화통지문을 인용한 <조선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76일의 일제 각의 결정으로 지방장관 4명이 사임하게 됨으로써 부장급에서 지사로 영전할 사람이 4명이 지명되었는데 그중의 한명이 아이카와 가츠로쿠였던 것이다.

 

이례적인 것은 아이카와 가츠로쿠는 외사과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장급으로 간주되어 지사로 승진한 것이다. 그가 우시오 시게노스케의 히로타 내각 입각을 반대했던 것이 옳았다는 점이 인정된 결과였던 것으로 보이며, 일시적인 좌천을 두 단계 승진으로 보상받은 것이다.

 

아이카와 카츠로쿠는 조선총독부 외사과장을 사임한 후 미야자키현의 지사로 영전했다. 사진은 미야자키현 종합공원에 세워진 그의 동상.

 

이후 아이카와 가츠로쿠는 1939년 히로시마현 지사, 1941년 아이치현 지사를 거쳐 1944년 중앙정부 후생성 차관으로 승진했다가, 일제의 2차대전 패전과 함께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1952년에는 자민당 소속으로 미야자키 지역구에서 중의원 선거에 당선된 이후 내리 8선을 달성했고, 자민당 안에서는 치안대책특별위원장으로 오래 재직했다.

 

만일 아이카와 외사과장이 조금만 더 재임했다면 <대금강산보>의 제작은 당초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었을 지도 몰랐다. 중일전쟁으로 총독부 정책의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하더라도, 그는 계획은 빠르고 목표를 반드시 이뤄내는 역량있는 행정가였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최승희도 조바심을 내며 4달이나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대금강산보>, 적어도 최승희를 위해서는, 원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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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강산보>는 한 달의 촬영과 한 달의 편집을 거친 뒤 완성되어서 1937년 12월21일 시사회를 열었다. 장소는 도쿄 소재 니카츠 영화사의 타마카와 촬영소였는데, 이 시사회 참석자들이 눈길을 끈다.

12월24일자 <매일신보>의 보도에 따르면 이 시사회에 “황공하옵게도 이왕(李王) 전하의 태림(台臨)으로 받들어 뫼시고, 오노 로쿠이치로(大野緑一郎) 정무총감과 요시다 히로시(吉田浩) 철도국장 등이 출석”했다고 전했다.

‘이왕 전하’란,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였으나 제위에 오르지 못하고 나라를 잃은 영친왕(英親王, 1897-1970)을 가리킨다. 1907년 황태자로 책봉된 후의 정식 호칭은 ‘의민태자’이지만, 조선이 일본의 보호령이 되자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그해 12월 강제로 일본 유학에 보내졌다. 

 

이토 히로부미에 이끌려 10세의 나이로 일본에 강제 유학을 갔던 의미태자와 그의 모친 엄귀비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합병되자 황제 순종은 왕으로 격하됐고, 의민태자도 왕세자로 격하되어 일본 황족에 준하는 예우를 받기 시작했다. 1920년 4월 그는 일본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와 결혼했다. 해방 후 귀국하려했으나 이승만 정부가 거부했고, 박정희 정권 때에야 국적을 회복했으나, 여전히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살다가 1970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사망했다.

이왕은 어떻게 <대금강산보>의 시사회에 참석하게 되었을까? 신문 보도에는 경위가 나와 있지 않지만, 주최측이 이왕을 초청했거나 이왕의 요청이 있었을 것이다. 일본에 머물며 아카사카 저택에 유폐되었던 이왕은 조선 미술품에 관심이 높았고, 특히 금강산을 사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아마도 이왕 쪽에서 요청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기는 하다. 

어떤 경우이든 이 자리에서 최승희는 이왕을 만날 수 있었고, 10세 때부터 일본에 억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능숙하게 조선어를 구사했던 이왕은 최승희와 조선어로 인사를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최승희에게 <대금강산보> 제작에 대한 이모저모를 묻기도 하고, 또 일주일 후면 요코하마를 출발해 장도에 오를 세계 순회공연에 대해서도 질문했을 법하다.

이왕과 최승희는 그보다 12년 전에 만났을 수도 있었다. 영친왕이 일본에 억류당한 이후 그는 도쿄 치요다구 소재 아카사카의 이왕 저택에 거주했는데, 이 저택은 조선의 숙명, 진명, 양정고보 학생들의 단골 수학여행 목적지의 하나였다. 이 세 학교는 영친왕의 어머니 엄귀비가 설립한 학교들이었기 때문이다. 최승희가 속했던 숙명17회 졸업생들도 3학년 시절인 1925년 일본 수학여행 중에 이 저택을 방문했고 이왕을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친왕이 살았던 도쿄 아카사카의 저택


그러나 최승희는 이때 이왕을 만나지 못했다. 1922년 최승희 집안이 몰락한 이래 지속적인 가난 속에 살았기 때문에 수학여행비를 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약 80명의 동급생 중에서 일본 수학여행을 가지 못한 학생은 5명으로 알려졌는데, 최승희가 그중 한명이었다. 

1925년에 이왕을 만나지 못했던 최승희는 마침내 1937년 12월21일 <대금강산보> 시사회에서 이왕을 만날 수 있었다. 아카사카의 이왕 저택에서는 아니었지만 그로부터 15킬로미터쯤 서쪽의 초푸시 타마카와 6초메의 니카츠 타마카와 촬영소에서였다. 

이왕은 저명한 무용가로 성장한 최승희가 숙명여고보 출신인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어머니가 설립한 학교의 졸업생이 일본 최고의 예술가가 된 것을 대견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왕이 금강산 영화를 관람한 것은 <대금강산보>가 처음은 아니었다. 1929년 조선을 방문했을 때 이왕은 다른 “금강산 활동사진”도 관람한 적이 있었다. 그해 10월6일자 <매일신보>는 “(영친왕) 전하께서 ... 조선사회사업과 금강산, 조선농업 등에 대한 제 활동사진을 어람하”셨으며, “<금강산>이란 활동사진에 대하여는 전하께서 실지로 어관람(=방문)하실 터이므로 예비지식을 준비하시기 위하여 더욱이 열심히 어람하셨더라”고 보도했었다. 

직접 금강산 관광까지 했던 이왕은 <대금강산보>에 촬영된 금강산을 어떤 기분으로 감상했을까? 자신의 영토였을 금강산을 빼앗기고 일본 땅에서 창살 없는 감옥살이를 하고 있던 그로서는 비록 영화로나마 다시 보는 금강산에 대한 감회가 남달랐을 것임에 틀림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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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대금강산보>의 필름은 소실되었다. 그것이 어떤 영화였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사의 문헌도 남아 있지 않다. 즉 원작이나 각본도 없고 필름도 없으니 <대금강산보>의 내용이나 작품성을 짐작할 자료가 거의 없는 셈이다.

 

다만 여기저기 흩어진 단편적인 미디어의 기사와 일본영화 데이터베이스의 배역 기록을 참고하면 그것이 대략 어떤 내용의 영화였는지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우선 <대금강산보>의 일본 개봉을 앞두고 살포된 전단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반도의 기이한 명승, 금강산의, ... 경승과 오랜 제사 행사의 진기함이 줄거리와 병행되어서, 미지의 나라 조선을 남김없이 소개하고, 그에 더해, 자신감 넘치는 최승희의 멋진 무용장면, ... 요염한 미희, 최승희의 무용 걸작집... 천연미와 미술미를 혼연시킨 이채편...”

 

이 홍보문에서 줄거리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은 별로 없다. 다만 유서깊은 제사 행사가 등장한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한편, 1938129일자 <경성일보> 3면에 게재된 영화 광고문에는 줄거리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대금강산보> 전단지, 영화 내용을 "반도의 무희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로맨스"라고 소개했다.

신기한 명승지 대금강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반도의 무희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로맨스를 묘사... 최승희의 반생을 가로지른 고투를 이야기하는 애련의 비창곡...”

 

고통스런 투쟁이란 무용가로 성공하기 위한 분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 ‘슬프고도 아름다운 로맨스애련의 비창곡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주인공 이승희가 무용가로서의 꿈은 이루지만 사랑까지 이루지는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금강산보>는 무용영화이므로 암시와 복선이 깔리고 반전이 숨어있는 복잡한 스토리는 필요하지 않았다. 단순한 스토리 속에서나마 금강산의 승경을 배경으로 최승희의 무용 자태가 소개되는 영화였음에 틀림없다. 다행히도 193823일자 <경성일보>에는 <대금강산보>에 대한 짧은 비평문이 게재되었고 여기에 대강의 줄거리가 서술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정략결혼을 피하여 조선으로 도망간 작곡가 지망의 일본인 대학생 토모다(=가사하라 츠네히코)는 부관 연락선에서 무희 이승희(=최승희)를 만난다. 금강산 속에 자리 잡은 그녀의 생가를 방문하는 사이에 두 사람은 사랑하게 되고 결혼을 약속한 뒤, 도모다는 부모의 승낙을 얻기 위해 도쿄로 돌아간다. 하지만 토모다의 부모가 승희와의 결혼을 허락할 리 없다, 그는 사랑에 몸부림치며 부모님의 집을 떠나 학업을 포기하고 <대금강산보> 작곡에 몰두한다.

 

한편, 무희가 되려는 승희도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무단으로 상경, 향토무용을 기초로 새로운 무용공부에 전념한다. 이윽고 승희의 힘겨운 정진은 결실을 맺어 반도의 무희;로서 화려한 데뷔의 날이 왔다. 그러나 바로 그날 병상에 누운 토모다는 완성된 <대금강산보>를 승희에게 바치면서 죽어간다.”

 

1938년 1월28일의 <동아일보>에 게재된 <대금강산보>의 한장면, 가사히라 츠네히고(왼쪽)과 최승희(오른쪽)

 

1937127일자 <미야코신문(都新聞)>에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서술이 한 가지 등장한다. 석왕사에 대하여 이 절은 올해가 축성 12백년 째였기에 114일의 촬영을 위해 특별 임시 대제(大祭)를 열게했다고 설명하면서 그 장면의 촬영을 위해 시골사람 총출동으로 거의 2천명에 가까운 엑스트라를 동원했다는 것이다.

 

80년 전의 영화 촬영에 2천명 가까운 엑스트라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그보다 20년 후에 제작된 <벤허(1959)>의 전차경주 장면의 엑스트라도 15백명이었다. 그런데 <대금강산보(1938)>의 석왕사 축제장면 엑스트라가 2천명이었다고 하니, <미야코신문>의 서술이 오류가 아니라면, <대금강산보>는 생각보다 규모가 큰 엄청난 영화였다는 뜻이다.

 

그 같은 대규모의 석왕사 축제 속에서 최승희 선생은 <승무><검무>, 혹은 <아리랑>이나 <봉산탈춤> 같은 조선무용 작품을 공연했던 것일까? 최승희의 무용작품뿐을 보고싶은 마음도 굴뚝같지만, 2천명의 엑스트라가 나오는 장면을 보기 위해서라도 <대금강산보>의 필름이 조만간 어디선가 발견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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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강산보>의 감독과 배우 지명이 다소 실망스러웠지만, 특급 촬영감독을 위촉한 것만으로도 니카츠 영화사는 성의를 보인 셈이었다. 금강산의 경치를 찍는 관광영화이자 최승희의 무용을 찍는 무용영화라는 점을 고려한 배려였을 것이다.

 

촬영이 시작되자 외사과와 철도국의 협조도 재개되었다. 철도국은 니카츠 촬영팀의 이동에 최대한 편의를 주었고, 외사과는 촬영지 섭외를 위해 애썼다. 특히 금강산 지역은 군사지역으로 지정되어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 많았지만, 니카츠 촬영팀이 이에 구애되지 않도록 일본군의 협조를 이끌어낸 것이 바로 외사과였다.

 

평전과 연구서들을 종합하면 니카츠 촬영팀의 조선 로케이션은 19371018일부터 1124일까지였다. 1022일의 <매일신보>1027일의 <동아일보>감독 미즈가에 류이치(江龍一) 14명의 선발대가 20일 오후 135분에 입경하여 그날 밤으로 금강산 로케이션을 떠났다고 보도한 것으로 보아, 이들은 1018일 도쿄를 출발했을 것이다.

 

<대금강산보> 촬영시 최승희가 '만상계(萬相溪)' 입구에서 부친과 남편, 동료 배우들과 포즈를 취해 기념 촬영. 

 

최승희는 촬영팀에 뒤늦게 합류했다. 1025일의 <매일신보>주역이 될 반도가 낳은 무희 최승희 여사는 일행과 함께 24일 오후135<아까츠키(あかつき)>로 입성했고 경성에서 2박한 후 25일 금강산으로 향할 터라고 전했다. 최승희가 늦게 합류한 것은 1014일부터 도쿄츠키지(東京築地)극장에서 공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최승희는 1달이 넘는 로케이션 기간 동안 촬영팀과 함께 조선에 머물지도 못했다. 예컨대 1030일에는 시마네(島根)현의 마츠에(松江) 시공회당에서 <최승희여사 신작무용 발표회>의 일정이 잡혀 있었으므로, 이 공연을 위해서라도 일본에 다녀왔기 때문이다.

 

최승희가 마츠에 공연을 마치고 촬영을 위해 언제 조선에 돌아왔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음 공연이 125일 도쿄 히비야 공회당의 <도구고별공연>이었으므로 아마도 다시 촬영팀과 합류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1025일부터 1030일까지 불과 5일 동안의 촬영으로 금강산과 석왕사를 포함, 부여와 수원, 경주와 평양 로케이션을 모두 소화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소 미숙한 감독과 배우, 스탭들과 분주한 공연 일정에도 불구하고 최승희는 촬영에 최선을 다했다. 무용영화였기에 다행이었던 것은 다른 배우들의 도움이 없더라도 8개 무용작품 장면만큼은 자신의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극영화로서의 성공은 보장할 수 없더라도 무용영화로서의 작품의 수준은 최승희가 결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최승희는 <대금강산보>의 촬영에도 대단히 적극적이었다. 1937127일자 <미야코신문(都新聞)>은 금강산 촬영장면을 이렇게 서술했다.

 

<대금강산보> 촬영을 위해 들것에 타고 금강산으로 올라가는 최승희. <미야코신문>은 최승희가 금강산을 오르내리는 동안에도 영어 공부를 했다고 보도했다. 

 

“(옥류담) 위로는 산 전체가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산 정상에서 최승희의 라스트 신을 찍었다. 으스스한 찬바람을 맞으며 그녀는 흰옷 한 벌만 입고 춤을 추었는데 산을 내려와서 보니 일손을 거들었던 일행은 모두 콧물을 훌쩍였지만 그녀만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미야코신문> 보도가 127일인 것으로 보아 옥류담 촬영은 최승희가 시마네현 마츠에 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11월 중순 이후였을 것이다. 11월 중순이면 금강산 속은 한겨울이었다. 찬바람을 맞으며 흰옷 한 벌만 입고 춤을 춘다는 것은 배우는 물론 무용예술가라면 절대 시도하지 않을 일일 것이다. 그러나 최승희는 이를 마다하지 않았고 기꺼이 촬영에 임했다. 그만큼 <대금강산보>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옥류담 촬영에 동참했던 동료 배우 코노 켄지의 발언도 주목할 만하다. “최승희는 (촬영을 위해) 금강산을 올라가면서도 이번 외국여행을 대비한다며 영어 단어를 외우고 있었다. 정말 감탄했다.”

 

당시의 최승희가 얼마나 의지가 단단하고 열의에 차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반드시 완성된 <대금강산보>를 가지고 세계 순회공연에 나서고 싶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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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강산보>에 쏟아졌던 초기의 열의가 사라지자 촬영 및 편집의 밀도가 현저하게 떨어졌다. 원작과 각색, 음악과 안무가 조선과 일본의 최고 전문가들에 의해 이뤄졌던 점은 앞에서 보았다. 하지만 중일전쟁 발발 4개월 후 촬영이 시작될 즈음에는 세계 수준의 무용영화를 만든다는 열의는 사라졌다. 그것은 니카츠 영화사가 구성한 감독과 배우진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니카츠 영화사는 <대금강산보>의 감독으로 미즈가에 류이치(江龍一)를 지명했다. 그는 해외 유학파이기는 했으나 세계 수준의 예술영화 제작 능력이 검증된 감독은 아니었다. 1937922일의 <매일신보>감독은 신진이라고 소개할 정도였다.

 

그는 <어머니의 미소(微笑, 1934)><소집령(召集令, 1935)>에서 와타나베 쿠니오(渡辺邦男) 감독의 조감독으로 실전수업을 받은 뒤 19375개의 영화를 감독한 바 있지만, 그중 4개가 러닝타임 3-40분의 국책 홍보영화였다. 극영화는 19371021일에 개봉된 <연애 하와이 항로(恋愛ハワイ航路)> 한 편이었다.

 

아마도 니카츠 영화사는 미즈가에 류이치 감독이 <연애하와이항로>를 완성한 것을 인정하여 그에게 <대금강산보>의 감독을 맡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극영화 제작 경험이 단 한 편인 감독에게 세계적 수준의 무용 영화제작 책임을 맡긴 것은 의아스러운 결정이 아닐 수 없다.

 

1937년 10월경 <대금강산보> 출연자 및 제작진과 함께 촬영한 기념사진,

 

실제로 미즈가에 류이치는 극영화 부문에서 그다지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고, <대금강산보>가 개봉된 후 19388월에 니카츠 영화사를 떠나 만주영화사로 이적했다. ‘만영에서도 12편의 국책영화를 더 만들었으나 1942년 이후에는 감독으로서의 활동을 중단했다.

 

한편 니카츠가 지명한 출연 배우도 대부분 신인이었다. 여주인공 이승희(李承姫) 역의 최승희부터 신인이었다. 비록 <반도의 무희> 출연경험이 있기는 했지만, 그의 연기가 칭찬받은 적은 없었다. 따라서 상대역의 리드가 필요했다. 하지만 니카츠가 지명한 남주인공 도모다 히데오(友田秀夫) 역의 가사하라 츠네히코(笠原恒彦)조차 데뷔 1년이 막 지난 신인배우였다.

 

더구나 그동안 가사하라 츠네히코가 출연한 8개 영화에서의 역할은 모두 조연이었고, 주연으로 발탁된 것은 <대금강산보>가 처음이었다. 그는 <대금강산보> 이후 4년간 더 배우로 활동했으나 1942년 이후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도 역시 만주영화사로 이적했다가 패전과 함께 영화계에서 은퇴한 것으로 보인다.

 

이승희의 여동생 순희(順姫) 역인 다치바나 키미코(橘公子, 1921- )1936년에 닛카츠에 입사한 이래 2편의 영화에 출연했던 신인이었다. 그나마 그가 출연했던 <꿈의 철모(鉄兜, 1937)><아버지의 노래시계(さんの歌時計, 1937)>는 국책영화였다.

 

이승희의 아버지 역을 맡은 코노 켄지(河野憲治)도 경력 짧은 단역이었고, 도모다 히데오의 어머니역의 미츠이 치에(三井智恵, )<대금강산보>가 처녀출연이었으며 1942년에 배우 생활에서 조기 은퇴했다.

 

1938년 1월26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대금강산보>의 한장면, 이승희 역을 맡은 최승희를 제외한 부친(왼쪽)과 여동생(가운데) 역은 모두 일본인 배우들이 담당했었다.

 

다만 도모다 히데오의 여동생 미에코(美枝子) 역의 무라타 치에코(村田知栄子, 1915-1995)는 중견배우로 1933년에 데뷔한 이래 26편의 영화에 출연한 바 있었다. 그밖에 도모다 히데오의 아버지 역을 맡은 다카기 에이지(高木永二, 1896-미상)와 무용교수 키시이(岸井) 역의 에가와 우레와(江川宇礼雄, 1902-1970)는 베테랑 연기자들이었다.

 

따라서 니카츠 영화사가 지정한 감독과 배우들은 그런대로 구색을 갖추기는 했지만 세계는커녕 일본에서도 일류라고 할 수는 없었다. <대금강산보>의 제작 초기에 보였던 세계 수준의 뛰어난 무용 영화를 목표로 하기에는 모자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니카츠 영화사의 결정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전쟁 중 총동원령이 내려질 것이 뻔한 마당에 <대금강산보>같은 예술영화가 흥행에 성공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제작이 취소되지 않고 진행된다 하더라도 후일의 손실을 줄이려면 현재의 투자를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니카츠 영화사가 당시의 2류 감독과 배우를 썼던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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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 초기(19377~10), <대금강산보> 제작이 중단된 것은 조선총독부 외사과와 철도국의 지원이 끊겼기 때문이다. 권력 및 재력기관이었던 이 두 부서는 중일전쟁 중의 정보수집 업무와 폭증하는 병력 및 군수물자 수송업무로 무용영화에 관심가질 여유가 없었다.

 

193710월에 들어서야 이같은 상황이 다소 완화되었다. 일본군은 중국 화북 지역을 장악했고, 상하이에서 승기를 잡았고,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난징 공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특히 랴오뚱과 산뚱반도를 점령한 일본군은 병력과 군수물자 수송을 한반도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졌다. 선편으로 바로 대련이나 청도로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중일전쟁 초기와는 달리 일본군의 조선총독부 의존도가 줄어들면서, 총독부로서는 숨 돌릴 여유가 생긴 것이다.

 

이에 따라 <대금강산보> 제작 당사자들의 관심도 되살아났다. 최승희와 니카츠 영화사로서는 7월초부터 10월말까지 거의 4개월 동안 끈질기게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1937년 10월7일자 <매일신보>, 금강산을 배경으로 한 무용영화 촬영이 오랜 지연끝에 시작할 예정이며, 영화 제작이 마치는대로 최승희가 유럽 순회공연을 떠날 것이라고 보도했다.

 

1022일자 <매일신보>는 마침내 <대금강산보> 제작에 대한 철도국의 후원이 확정되었다고 보도했고, 1027일자 <동아일보>는 철도국 지원금이 1만원이라고 전했다. 철도국 부담액은 전체 제작비의 10분의1에 불과했지만, 니카츠 영화사가 기다린 것은 단지 예산만은 아니었다. 촬영지 선정을 위해 조선의 주요 명승지에 위수령을 내린 일본 군부의 허락도 필요했고, 철도국이 보유한 필름들을 비롯, 각종 대외비 자료도 활용할 수 있어야 했던 것이다.

 

철도국의 자금 지원이 이뤄지자 니카츠 영화사는 1025일부터 촬영을 시작했고, 이후 일정은 다시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금강산과 석왕사, 평양과 경주와 부여와 수원에서의 촬영이 전부 야외 로케이션이었는데도 11월 말까지 한 달 만에 완료되었다.

 

그러나 <대금강산보> 제작을 위한 초창기 열의는 현저하게 식어 있었다. 철도국은 약속했던 지원금을 지급했을 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외사과도 중일 전쟁 정보 업무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특히 <대금강산보> 제작의 산파 역할을 했던 아이카와 외사과장이 사임하자, 무용영화에 대한 외사과의 관심은 크게 줄었고, 최승희나 니카츠 영화사의 요청에 수동적으로 협력하는 정도였다.

 

열의가 떨어진 것은 니카츠 영화사도 마찬가지였다. 그해 10월 중순까지만 해도 촬영이 시작되지 않았으므로 <대금강산보> 제작이 취소된다 해도 니카츠 영화사로서는 손해날 일이 없었다.

 

그러나 10월말 촬영이 시작되면서 문제가 달라졌다. 니카츠 영화사는 <대금강산보>를 국내 상영용으로 전환해 비용절감에 들어갔다. 해외 상연이 불가능해진 마당에 굳이 세계 최고 수준의 영화를 만들 필요가 없었고, 따라서 철도국 지원금 외에 자사 예산을 10만원이나 투입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1937년 10월27일의 <동아일보>, 최승희의 <대금강산보> 촬영이 시작됐음을 보도했다.

 

다만 최승희는 입장 변화가 없었다. 그는 반드시 해외 순회공연을 떠난다는 계획이었고, 일정을 연기해서라도 <대금강산보>를 가지고 떠나겠다는 결심이었다. 전쟁과 올림픽 취소로 관련자들의 입장이 모두 변했지만, 세계 순회공연을 앞둔 최승희만은 원래의 목표와 의도를 그대로 유지했다.

 

따라서 193710월말부터 <대금강산보>가 촬영되고 편집되어 1221일에 시사회를 가지게 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최승희의 노력 덕분이라고 해야 했다. 만일 이때 최승희까지 <대금강산보>를 포기했다면 이 영화의 제작은 중단되었을 것이다.

 

193710월은 최승희가 기다릴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었다. 해가 넘어가면 그의 순회공연 자체가 취소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시아에서는 중일 전쟁이 확대되고 있었고, 유럽에서는 히틀러의 재무장으로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유럽에서마저 전쟁이 터진다면 1935년 말부터 2년 이상 준비해온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 계획은 자칫 수포로 돌아갈 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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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71, 제작사가 니카츠(日活) 영화사로 정해지면서 이제 <대금강산보>는 촬영을 앞두고 있었다. 니카츠는 19124개 군소 촬영소가 합병되어 주식회사 형태로 설립된 최초의 메이저 영화사였고, 뒤이어 설립된 쇼치쿠(松竹, 1920), 도호(東寶, 1932)와 함께 당시 3대 영화사였다.

 

니카츠는 도쿄와 교토에 촬영소(studios)를 운영했는데, 1930년대 이래 교토의 다이쇼군 촬영소는 시대극, 도쿄의 타마카와 촬영소는 현대극을 제작했다. 조선총독부 외사과의 설득과 철도국의 지원 약속으로 니카츠는 <대금강산보>의 제작에 뛰어들었고, 촬영을 도쿄의 타마카와 촬영소에 맡겼다. 이로써 이제 <대금강산보>는 촬영과 편집과 배급만 남겨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대금강산보>는 촬영이 시작되기도 전에 중단됐다. 중일전쟁이 터진 것이다. 1931년 만주를 점령한 일본군은 193777일 베이징 서남쪽 외곽의 루고챠요(盧溝橋) 다리를 사이에 두고 중국군과 대치하던 중, 한 병사의 일시적 탈영을 트집삼아 중국과 전쟁을 일으켰다.

 

한국에서는 노구교(盧溝橋) 사건, 중국에서는 치치시벤(七七事變), 서방에서는 마르코폴로 다리사건, 일본에서는 로코쿄지켄(盧溝橋事件)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이 최승희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 제작에 치명타를 준 것이다.

 

니카츠 영화사는 조선총독부 철도국의 제작비 지원을 기다렸으나, 병력과 군수물자를 중국으로 수송하기 위해 총동원 상태에 돌입한 철도국은 해외 관광객 유치를 위한 영화 제작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최승희와 니카츠 영화사는 손 놓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대금강산보>를 지연시킨 또 다른 원인은 도쿄 올림픽의 취소였다. 1940년의 제12회 하계 올림픽 개최지는 도쿄와 헬싱키가 경합, 3627의 투표로 도쿄로 결정됐다. 중일전쟁으로 일본의 올림픽 개최권이 박탈당하자 개최지가 헬싱키로 변경되었지만, 19399월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유럽에서도 전쟁이 터지자 1940년 올림픽은 취소되었다.

 

히로히토 천황과 히틀러 총통이 올림픽을 목졸라 죽이자, <대금강산보>도 덩달아 말라죽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의 <대금강산보> 제작 동기는 구매력 높은 서양 관광객의 유치였다. 그러나 도쿄 올림픽이 취소되면서 일본을 방문할 관광객들이 사라져버렸다. 더구나 일본이 중국을 침략 중인데, 전장 바로 옆의 조선 관광에 나설 서양인들이 생겨날 까닭이 없었다.

 

중일 전쟁과 올림픽 취소로 총독부의 해외 관광객 유치 정책은 무용지물이 되었고, <대금강산보>에 대한 정책적 관심도 사라졌다. 그나마 영화 제작이 백지화되지 않았던 것은 최승희와 니카츠 영화사의 인내심 어린 노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최승희와 니카츠 영화사 사이에도 관점의 차이가 생겼다. 니카츠 영화사는 <대금강산보>의 해외 상영을 포기하고 국내 상영 중심으로 관심을 옮겼다. 해외 상영 자체가 불투명해졌으므로 내수 시장을 겨냥한 것인데, 이는 기업인 영화사로서는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제 <대금강산보>의 해외 상영이 필요한 것은 최승희 뿐이었다. 그가 세계 순회공연을 단행할 것이라는 소문을 최초로 보도한 것은 미주 일본인 신문 <타이호쿠닛포(大北日報)>였다. 소문을 전제한 19351018일의 기사에서 최승희가 내년(1936) 4월경 세계 순회공연을 계획 중이라고 보도했었다. 이 소문의 진위를 묻는 영자지 <재팬타임스(The Japan Times and Mail)>와의 인터뷰에서 최승희는 “1년쯤 후에 출발하겠다고 답변했다.

 

즉 최승희는 당초 193610월경 유럽과 미국 순회공연 계획을 세웠지만, 분주한 공연 일정으로 약 1년이 지체되었다. 마침내 1937927일 최승희는 도쿄극장에서 도구(渡歐) 고별공연을 열었는데, 이는 곧이어 유럽 공연 출발이 임박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최승희는 출발을 연기했다. <대금강산보>가 완성은커녕 촬영도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승희는 총독부 및 영화사와의 계약을 유지한 채 끈질기게 기다렸다. 유럽 공연 한 시즌을 포기하더라도 꼭 <대금강산보>를 완성해서 가져가겠다는 뜻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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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홍난파와 이종태가 작곡한 <대금강산보>의 주제가 <금강산곡(金剛山曲)>의 편곡은 야마다 코사쿠(山田耕作, 1886-1965)에게 의뢰되었다.

 

야마다 코사쿠는 당대 일본 최고의 작곡가 겸 지휘자로, 도쿄 음악학교 성악과를 졸업했고, 독일 베를린 왕립 예술 아카데미 작곡과에 유학하면서 막스 브루크(Max Bruch, 1838~1920)에게서 사사했다. 1914년 도쿄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수석지휘자로 취임했고, 1917년에는 뉴욕 카네기홀에서 자신의 곡들을 연주했다.

 

1920년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다이고쿠(帝國) 극장에서 바그너의 <탄호이저>를 일본 초연했고, 1924년에는 NHK 교향악단의 전신인 일본 교향악단을 설립, 연주활동을 이어나갔다. 활발한 해외 활동으로 1936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종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다.

 

 

최승희가 야마다 코사쿠에게 <금강산곡>의 편곡을 부탁한 것은 그의 탁월한 음악 실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무용을 이해하는 음악가였고, ‘음악과 무용은 하나라는 철학을 가진 사람이었다.

 

야마다 코사쿠는 제국오페라단 시절부터 최승희의 스승 이시이 바쿠(石井漠, 1887-1962)의 친구이자 동료로서, ‘무용시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이시이 바쿠의 무용시 운동을 지원했다.

 

이시이 바쿠가 19263월 첫 번째 경성공연에서 최승희를 매료시켰을 때 공연된 <젊은 판과 님프(きパンとニムフ)>의 작곡자도 야마다 코사쿠였다. 그밖에 이시이 바쿠의 초기 대표작인 <법열(法悦)><쓸쓸한 그림자(しき)>도 야마다 코사쿠의 음악에 맞추어 안무되었다.

 

훗날 최승희는 <아이들의 세계, 인형씨(子供世界, A.人形さん, 1936)><그놈의 오뚜기(彌次郞兵衛)> 등의 동심어린 작품을 안무했을 때에도 야마다 코사쿠의 음악을 사용했다.

 

한편 <대금강산보>의 원작을 최남선이 집필했다는 설이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일본 영화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원작자는 다마카와 에이지(玉川映二, 1903-1973)였다. 본명이 사토 하치로(佐藤八郎)인 그는 탁월한 글재주로 구제 와세다 고등중학교를 중퇴한 이래 수많은 시집과 소설 및 수필집을 낸 작가로 활동했다.

 

 

23세였던 1926년 첫시집 <손톱 색깔의 비(爪色)>를 시작으로 20권의 시집을 출판했고, 아사쿠사6구를 배경으로 한 소설 <엔코노로쿠(エンコの, 1931)>을 비롯해 3권의 장편 소설을 썼다. 그밖에도 유머 소설 12, 청소년 소설 38권을 내기도 했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에게 학교의 교가 가사를 부탁하는 경우가 많아서 다마카와 에이지가 작사한 교가는 66개에 달했다. 또 그는 야구팀 사이타마세이부 라이온즈의 응원가와 한큐 브레이브즈의 단가를 작사해 지금까지 운동장에서 불리고 있다.

 

다마카와 에이지는 <대금강산보(1938)>의 원작을 집필하기 전까지 <남자의 눈물(のなみだ, 1935)><벌거벗은 합창(はだかの合唱, 1936)>을 비롯해 7개의 영화 원작을 집필해 영화화된 바 있는 관록 있는 작가였기에 최승희는 그에게 <대금강산보>의 원작을 믿고 맡길 수 있었을 것이다.

 

원작을 영화대본으로 각색한 것은 전설적인 각색 전문가 야마자키 겐타(山崎謙太)였다. 그는 1931<사랑의 장총(長銃)> 이후 <대금강산보(1938)>를 포함해 평생 83편의 영화 각본을 각색했고, <장난삼아 사랑하지 말자(れにはすまじ, 1933)>를 포함한 11개의 영화 원작을 직접 집필했던 다작의 영화 원작 및 대본 각색자였다.

 

금강산 무용영화 제작 결정은 유력자들이 내렸고, 구체적인 작업 담당자들은 최승희를 포함해 모두 조선과 일본을 통틀어 각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이었다.

 

이는 세계 어디에 내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수준 높은 무용영화를 만들겠다는 최승희와 총독부의 의지를 반영했기 때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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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와 최승희 모두에게 <대금강산보>는 해외 홍보를 위한 영화였다. 따라서 세계 어디에서 상연하더라도 손색이 없을 만큼 최고 수준의 영화이어야 했다. 총독부는 최고 수준의 제작비를 책정했고 최승희도 각 단계의 제작자들을 최고 수준의 전문가로 선정했다.

 

<대금강산보>의 제작비는 10만원으로 책정되었다. 192814일자 <조선일보><조선영화계의 현재와 장래>라는 기고문에서 심훈(沈熏)은 당시 조선영화 한 편의 최고 제작비가 6천원이었다고 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무성영화가 토키영화로 바뀌고 장비와 필름이 비싸졌다고 해도, 조선영화의 제작비는 2만원을 넘지 못했다. 그런데 <대금강산보>의 제작비는 10만원이었으니 일본 유수 영화사 <니카츠(日活)>도 부담을 느낄 정도였다.

 

제작비뿐 아니었다. 최승희는 음악과 편곡, 원작과 각본, 의상과 조명 등의 담당자를 조선과 일본 최고 전문가로 지명했고, 관광협회와 총독부, 니카츠 영화사는 군소리 없이 이를 수용했다. 돈과 재능을 절약하려 해서는 안 되는 영화임을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홍난파는 <봉선화>와 <흥사단가>를 만들기도 했지만, 일본천황에의 충성을 노래하는 숱한 곡을 작곡하기도 한 친일음악가였다.

 

최승희는 영화음악 작곡자로 이종태와 홍난파를 선정했다. 본명이 홍영후(洪永厚, 1897-1941)인 홍난파는 이미 <애수(1920)><봉선화(1926)>의 작곡가로 널리 알려졌고, 바이얼린 연주자로서도 호평을 받고 있었다. 그밖에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고향의 봄>, <고향 생각> 10여곡의 가곡과 <나뭇잎><개구리> 1백여곡의 동요를 작곡했다.

 

19317월 미국 셔우드 음악학교에 유학했고 미국 유학기간에 안창호 선생이 이끄는 흥사단에 가입, 단우번호(266)을 받기도 했다. 1933년 귀국한 홍영우는 경성보육학교, 이화여전, 빅터레코드사, 경성방송국 등에서 음악주임 및 교사로 재직하면서 활발한 음악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19378월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일경에 체포되었고, 72일의 옥고 끝에 전향서를 쓰고 출옥했다. 이후 그는 1941년 사망할 때까지 음악과 저술을 통해 극렬한 친일음악인의 길을 걸었다.

 

그가 <대금강산보>의 주제가 작곡을 의뢰받았던 것은 19372월이므로 변절하기 전이기는 했으나 조선음악 대부분이 극히 더디고 느려서 해이하고 퇴영적인 기분에 싸였지마는 서양의 음악은 특수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거개 경쾌 장중하다는 의견을 가진 양악 예찬론자였다. 그런 홍영우가 어떻게 이종태와 함께 아악 분위기를 가진 <금강산보>를 작곡했는지 의문이다.

 

1939년 1월7일 <동아일보>의 조선음악 좌담회에 참석한 이종태(오른쪽)와 이병기(왼쪽)

 

한편 이종태는 아악 전문가로 알려져 있었지만, 그는 1930년 일본음악학교를 졸업한 후 서양음악과 궁중음악 등 영역을 가리지 않고 활발하게 활동했던 음악가였다. 1930년부터 <소년>, <내일>, <김소좌를 생각함>, <총후> 등의 친일 작품을 양산했다. 홍난파가 도중에 변절한 반면 이종태는 처음부터 친일음악인이었던 것이다. 다만 조선 전래의 궁중음악을 서양식 악보로 채록한 덕분에 조선 전통음악의 계승자로서의 업적을 낸 것이 인정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이왕직 아악부에 근무하는 10년 동안에도 일본국가 <기미가요><우미유카바>를 조선식 아악기로 연주하도록 편곡해, 경성방송국에서 자주 연주했는가 하면, 중동학교, 중앙불교전문학교, 경성고등음악학원, 이화여전 등에서 음악을 가르쳤고, 경성관현악단과 영미합창단 등을 지휘하기도 했다.

 

해방후 이종태는 42세의 늦은 나이로 군에 입대해 <상이군인의 노래>, <조국찬가>, <광복10> 등을 작곡하고 군대내 음악행사를 진행하면서 진급을 거듭했고, 이후 그의 친일 행적이 감춰지면서 국가유공자로 등재되었는가 하면, 사후에는 부인 스즈키 미사호(鈴木美佐保)와 함께 국립묘지 장군묘역에 묻히기에 이르렀다.

 

홍영우와 이종태가 일제강점하 탁월한 음악가였던 것은 사실이고, 바로 그점 때문에 <대금강산보>의 음악 작곡자로 선정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1937220일 밤10시에 최승희, 최승일과 함께 최초의 작곡회의를 열었던 네 사람이 모두 훗날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것은 그리 우연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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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와 경성관광협회가 주도한 <대금강산보> 제작 계획에 최승희는 수동적으로 동원되어 끌려간 것이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최승희 자신이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나서 이를 추진했다는 증거가 곳곳에 보인다.

 

1937218일자 <매일신보>에 보도에 따르면, 오빠 최승일은 예비교섭 자리에서 최승희가 일찍부터 금강산을 무용화하려고 연구해 왔다면서 외사과장의 제안을 수락했다고 한다. 이 말이 단지 총독부의 권력자 비위를 맞추기 위한 립서비스가 아니라면, 최승희는 이미 조선의 절경 금강산과 자신의 조선무용을 결합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또 다른 증거는 최초 보도에 이어진 219일의 <매일신보>의 보도이다. 이 기사는 “(공연 첫날인) 20일 밤10시부터 (장소미정) 이왕직 아악부 리종태씨와 음악가 홍난파씨, 최승일씨, 최승희 여사 등이 모이어 금강산 춤의 작곡 협의회를 열기로 되었다.”고 보도했다.

 

같은 날짜의 <조선일보> 기사를 보면 최승희의 경성 일정이 얼마나 분주했는지 알 수 있다. 20일부터의 고별공연을 압둔 최승희는 ... 경성도착은 19일 오전8... 그날 오후 6시부터 ... 좌담회에 참석하였다가, 8시의 모교 숙명여고의 환영회에 참석하기로 되었다.”

 

1937년에 발행된 일본철도성의 포스터와 1938년 발행된 일본 영문 화보잡지 <재팬>, 일본 정부는 <중일전쟁>발발 이후 나빠진 일본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적극적인 홍보 활동에 나섰다. <일본 철도성 포스터(1937, 왼쪽>은 파리 홍보물 전시회에서 금상을 받은 바도 있다.

 

공연 전날과 당일의 분주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최승희는 7시에 시작되는 첫 공연이 끝나자마자 밤10시에 이종태, 홍난파씨와 함께 금강산 춤의 작곡협의회 일정을 잡았다. 불과 하루 전에 저명 음악가들을 접촉해 수락을 얻어내었을 뿐 아니라, 바로 실무회의에 돌입한 것이다. 설사 오빠 최승일과 관광협회 및 당국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최승희가 이처럼 신속하게 준비작업에 돌입했던 것은 자신도 이 금강산 무용영화 계획이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었다.

 

<대금강산보> 제작을 위해 열린 첫 실무회의가 작곡협의회였던 것도 최승희의 제안이었다. 음악이 있어야 작품을 안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그가 무용가였기에 알 수 있었던 사항이다. 총독부와 관광협회가 일을 서두른 것은 사실이지만 최승희도 주도권을 가지고 적극성을 보였다는 말이다. 최승희는 어째서 금강산 무용영화에 이렇게 적극적이었을까?

 

세계 순회공연을 앞둔 최승희가 무용영화의 유용성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의 명승지를 세계에 소개해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한다는 것은 총독부의 관심이었다. 그러나 최승희의 관심은 조금 달랐다.

 

해외 공연을 앞둔 최승희는 <대금강산보>를 먼저 현지에 보내어 개봉한다면 자신의 공연 흥행에도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조선무용에 대한 현지의 사전인식을 넓히고, 비평가들로부터도 예술적으로 깊이 있는 평가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 최승희는 이 영화를 세계 순회공연의 선발대로 삼으려고 했다.

 

1937년 10월7일의 <동아일보>는 최승희가 <대금강산보>를 제작, 유럽과 미국에 미리 보내고 그 뒤를 이어 무용순업을 하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는 금강산 무용영화의 입안 초기부터 언급된 바 있었다. 1937218일의 <매일신보>그의 도구(渡歐)에 당하여 그의 예술을 통하여서 천하의 명승 금강산을 널리 세계에 선전할 것이라고 보도하는 한편, 1937107일의 <동아일보>니카츠(日活)에서 계획 중인 이 영화는 해외에 수출하기 위하여 제작한 것이며, “본래 계획은 대금강산보를 먼저 구미에 보내고 그 뒤를 따라 최승희씨가 무용행각을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었다.

 

최승희는 언제부터 금강산 무용영화의 유용성을 깨달았을까? <조광> 19374월호에 실린 <도구기념 좌담회>에서 그 답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서양에 가시면 특별히 뵈이기로 한 춤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최승희는 “<재팬(Japan)>이라는 잡지와 <오사카마이니치신문>의 영문판에 많이 소개가 되어 그들은 나의 춤이 어떤 것인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최승희는 영문판 신문과 잡지의 기사와 화보가 세계 순회공연의 사전 홍보에 도움이 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더 나아가 영화, 특히 금강산을 배경으로 한 무용 영화를 미리 배포한다면 그 효과는 잡지나 신문에 비할 바가 아님은 분명했다. , <대금강산보> 제작에 대해 최승희의 적극성과 열의를 보인 것은 곧 전개될 자신의 세계 순회공연을 위한 것이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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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와 30년대, 조선총독부는 재정난을 겪고 있었다. 192521일자 <개벽>에 실린 논설 <조선총독의 재정의 개요와 비평>에 따르면 총독부의 초기 재정은 만성 적자였다.

 

한일합방 이전인 1907년 일본 의회는 보호령이 된 조선의 통치를 위해 조선통감부에 5년간 2천만 원의 재정을 지원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강점(1910)까지 재정지원은 3년 만에 26백만원으로 늘어났다. 5년 예산을 3년 만에 초과한 것이다.

 

1911년부터 일본 정부의 총독부 예산 지원은 연간 1,235만원으로 더 늘었다. 일본정부는 1919년까지 조선총독부가 재정 자립을 이루도록 요구하면서 예산을 점진적으로 삭감했다.

 

그러나 1919년 삼일 만세운동이 터지면서 총독부는 경찰과 헌병 병력을 대폭 증가시켜야 했다. 지출 예산은 다시 늘었고 총독부는 재정자립에 실패했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 총독부는 매년 15백만원의 예산을 본국 정부로부터 지원받아야 했다.

 

만성 재정적자에 시달리던 조선총독부는 재정자립의 방법으로 1920년대부터 금강산 등의 관광자원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조선 총독부는 일본 정부로부터의 지원을 줄이고 재정 자립을 달성하기 위해 조선 내에서 산업을 일으켜야 했다. 가장 먼저 입안된 것이 관광 산업이었다. 비교적 소규모의 투자로 즉각적인 수입을 창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총독부는 금강산처럼 자연경관이 뛰어난 지역, 평양, 경주, 부여 등의 사적지, 그리고 주을과 동래, 유성 등의 온천지를 중심으로 관광지 개발에 착수했다. 그중에서도 금강산은 조선의 국립공원 후보지로 지목되어 개발의 최우선 순위였다.

 

1920년대 총독부는 금강산에 호텔과 온천을 짓고 관광객용 차량을 증편하는 한편 관광객들과 관광 업소를 지원하기 위한 통신 시설도 증설했다. 관광 숙소 부근에 도서관 등의 여가시설과 댄스홀 등의 오락 시설도 확충했다. 1931년에는 철원-내금강 사이의 금강산 전철이 개통되어 관광객 수송이 원활해졌다.

 

총독부는 금강산 홍보에도 박차를 가했다. 1921년에는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1858-1936) 총독이 직접 금강산 관광에 나섰고, 이듬해인 1922년에도 금강산을 휴가지로 선택했다. 언론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한 것은 물론이다.

 

금강산 관광안내서들도 출판되었다. <금강산 탐승 안내(1926)><금강산(1931)>, <금강산 탐승 안내기(1934)>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금강산 관광객 유치를 위해 이광수와 최남선 등의 조선인 작가들도 적극 동원되었다. 최남선의 <금강예찬(1928)>과 이광수의 <금강산유기(1924)>

 

조선인 작가들도 동원되었다. 이광수는 1921년과 1923년 두 차례 금강산을 여행한 후 <신생활><금강산유기>를 연재한 후 1924년 단행본으로 출판했다. 최남선은 1924년 금강산을 여행한 후 <시대일보><풍악기유>를 연재했고 이를 1928년에 <금강 예찬>이라는 단행본으로 간행했다. 조선인 작가들의 금강산 여행기는 금강산 관광을 자극했고, 관광객 증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총독부의 금강산 관광 진흥책으로 관광객 수가 늘어났다. 1926년 연간 8천명이던 금강산 관광객 수가 1927년에는 15천명으로 1년 만에 두 배로 증가했다. 1934년에는 22천명에 달했고, 1937년까지 그 수준을 유지했다. 총독부는 1937년경 금강산 관광의 내수가 포화된 것으로 판단했고, 이번에는 해외 관광객 유치에 나섰다.

 

총독부는 금강산을 비롯한 조선 관광지를 소개하는 영문 책자를 제작해 해외에 배포했다. 특히 이 시기는 1940년의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올림픽 관광을 위해 일본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을 조선으로까지 유치하는 방안이 다각도로 강구되었다.

 

금강산 무용영화계획이 나온 것이 바로 이즈음이다. 1937215일경의 관광협회와 로터리 클럽의 조선 호텔 간담회는 조선총독부의 재정위기 타개책을 자문하는 자리였고, 이 자리에서 나온 최승희의 금강산 무용영화제작안은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방책이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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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을 무대로 무용영화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처음 낸 것은 최승희가 아니었다. 그것은 경성관광협회의 기업인들이었고, 조선총독부의 외사과였다.

 

1937218일자 <매일신보>수일 전 조선호텔에서 열린 관광협회와 로터리클럽 회원들의 간담회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최승희의 도구(渡歐)에 당하여, 그의 예술을 통해 천하의 명승 금강산을 널리 세계에 선전하자는 의견이 제시되었다고 보도했다. 구체적으로 “(최승희가) 금강산을 배경으로 조선 정서가 농후한 금강산 춤을 추는 영화를 제작하자는 것이었다.

 

기사는 이 제안이 각 방면에서 크게 기대를 모았고, “총독부 외사과와 조선관광협회를 통하여 구체화되었으며, 217일에는 아이카와(相川) 외사과장이 최승희 여사의 친형 최승일씨와 예비교섭을 한 끝에 “(최승희) 여사의 입성과 동시에 실현될 모양이라고 전했다.

 

<매일신보>의 예상대로 <대금강산보> 제작 결정은 신속하게 내려졌다. 경성관광협회와 로터리클럽의 간담회 날짜가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수일 전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215일 전후였을 것이다. 이날의 간담회 결과는 바로 총독부 외사과에 접수되었고 내부검토 끝에 영화 제작이 결정되었다.

 

1937년 2월18일의 <경성일보>는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금강산을 배경으로 한 최승희의 무용 영화가 제작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이에 아이카와 가츠로쿠(相川勝六, 1891-1973) 외사과장은 17일 오후3<경성방송국>에 근무하는 최승일을 총독부로 초청했다. 아이카와 외사과장으로부터 최승희씨가 금강산 무용영화에 출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최승일은 즉석에서 동생이 일찍부터 금강산을 무용화하려고 연구해 왔다면서 이를 수락했다.

 

최승일이 지금의 국정원장에 해당하는 총독부 외사과장의 제안을 거절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 최승일의 승낙은 곧 최승희의 승낙이나 다름없었다. 최승희는 220-21일의 공연을 위해 19일 아침에 경성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최승일이 이 결정을 전화나 전보로 동생에게 알렸는지는 알 수 없는데, 아마도 최승희는 경성에 도착하고 나서야 이 결정을 통고받았을 것이다.

 

이후에도 일은 신속하게 진척되었다. 최승희는 음악이 있어야 안무할 수 있다면서 금강산 무용영화의 음악으로 아악과 양악을 함께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고, 이를 수용한 총독부와 관광협회는 음악에 대한 세부사항을 최승희에게 일임했다.

 

최승희는 아악에는 이왕직 아악부의 리종태(李鍾泰), 양악에는 홍난파(洪蘭坡)를 작곡자로 지명해 220일 밤10시에 작곡자 회의를 가졌다. 이종태와 홍난파는 바로 작곡에 들어가 49일 주제곡 <금강산의 곡(金剛山曲)>을 비롯해 모든 음악의 작곡을 끝냈다. 최승희는 악보를 바로 편곡자에게 넘겼고 526일경 편곡이 완성됐다. 최승희가 편곡된 음악을 바탕으로 무용 안무를 끝낸 것은 6월 말이었다. 이 과정은 모두 언론에 세세하게 보도되었다.

 

1937년 2월18일의 <매일신보>는 금강산을 배경으로 한 최승희의 무용 영화가 제작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한편 조선관광협회와 총독부 철도국 관계자들은 최승희를 대동하고 19373월말 강원도 고성군수의 안내로 외금강 일대를 시찰하면서 촬영계획을 세우는 한편, 6월 중순에는 총독부 외사과의 지원을 받아 유수 영화사인 니카츠(日活)에 금강산 무용영화 촬영을 의뢰했다.

 

니카츠 영화사는 제작예산이 10만원이라는 말에 재정난을 이유로 난색을 표했으나, 외사과의 설득과 철도국의 재정지원을 약속받고 촬영과 배급을 맡기로 했다. 마침내 71, 니카츠 영화사는 <대금강산보>의 촬영을 타마가와(多摩川) 촬영소에 배당했다고 발표했다.

 

215일경 경성의 기업가 간담회로 시작된 금강산 무용영화 계획은 불과 넉 달 반 만에 음악과 편곡, 안무와 원작을 마치고, 71일 영화사 선정을 끝낸 것이다. 일의 진척이 이렇게 빨랐던 것은 당시 조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관들이 나섰기 때문이었다. 외사과는 정보기관이자 권력 기구였고, 철도국은 전국적으로 조직이 가장 크고 돈이 많은 기관이었다. 권력과 돈이 함께 움직이니 모든 일이 일사천리였던 것이다.

 

도대체 금강산 무용영화가 누구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업이었기에 유력 기관들이 이렇게까지 발 벗고 나서서 그다지도 신속하게 일을 진척시켰던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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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영화 3편은 모두 무용영화라고 불리지만, 정확한 명명법은 아니다. 세 영화에 모두 무용 장면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무용 장면의 비중과 형식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반도의 무희(1936)>에도 무용 장면이 나오지만 원래 최승희의 성공기이며, 삽입된 무용장면도 주인공의 활동을 소개하는 방편이다. 따라서 <반도의 무희>는 엄격한 의미의 무용영화는 아니고 무용가에 대한 영화일 뿐이다.

 

그러나 <사도성 이야기(1956)>는 같은 이름의 무용극을 영화화한 것이므로 무용극 영화이고, <대금강산보(1938)>는 완결된 무용작품들이 포함된 본래적 의미의 무용 영화이다.

 

이 두 무용영화음악영화와 비교한다면, <사도성이야기>가 뮤지컬 영화 <오페라의 유령(2004)><맘마미아(2008)>에 가깝다면, <대금강산보><사운드 오브 뮤직(1965)>이나 <원스(2007)>에 가깝다.

 

1938년 1월26일의 <동아일보>에 실린 최승희의 <대금강산보>의 한 장면.

 

<대금강산보>에는 최승희의 무용작품 8편이 포함되어 있다. 이 영화의 필름이 재발견되지 않아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스토리라인의 적절한 부분 부분에 각각의 무용작품이 완결된 형태로 삽입되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제작을 위해 조선의 여러 명승지에서 로케이션을 했다는 기록과 함께 스튜디오에서 무용작품을 촬영했다는 기록도 있기 때문이다.

 

1937922일자 <매일신보>1027일자 <동아일보><대금강산보>의 촬영이 금강산과 석왕사, 평양과 경주와 부여와 수원에서 로케이션으로 이뤄졌다고 서술했는가 하면, 사진가 후쿠다 가츠지(福田勝治, 1899-1991)의 사진집 <봄의 사진술(1938)>은 그 책에 실린 3장의 최승희 사진이 스튜디오에서 <대금강산보>의 무용장면 촬영 때 동시에 촬영된 사진 작품이라고 서술했다.

 

<대금강산보>에 삽입된 무용작품들도 확인되었다. 1938129일의 <동아일보><조선일보>, <경성일보>에 나란히 실린 <대금강산보> 개봉 광고문에서 삽입 작품 목록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광고문에는 빼어난 풍광의 금강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반도 처녀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로맨스라는 선전문구와 함께 전편 춤추는 걸작 8이라는 제목 아래 무녀춤, 아리랑, 보살도, 검무, 봉산탈춤, 무녀, 승무, 금강산보라는 작품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전편 춤추는 걸작이라는 말뜻이 명확하지 않다. ‘영화 전편에 걸쳐 ‘8개의 작품이 부분부분삽입되었다는 것인지, 혹은 영화에 ‘8개 작품이 전편삽입되었다는 뜻인지 확실하지 않은데, ‘무용 영화라는 표현에 부합되려면 아마도 후자이었어야 할 것이다.

 

1938년 1월29일의 <동아일보>에 실린 <대금강산보> 개봉을 알리는 광고문. 이 영화에 삽입된 8개의 무용작품 제목이 실려 있다.

 

그런데 이 작품들은 거의 다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 레퍼토리였다. , 샌프란시스코, 로스엔젤레스, 뉴욕의 미국 공연과 파리, 브뤼셀, 암스텔담, 헤이그 등의 유럽 공연 레퍼토리를 살펴보면 <대금강산보>8개 작품 중 7개가 적어도 한번 이상 공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세계 순회공연에서 발표되지 않은 유일한 작품은 <금강산보>이다. 주제 작품이 왜 무대에서는 상연되지 않았을까? 그것은 <금강산보>가 서양 음악을 사용한 현대무용이었기 때문이다. 세계 순회공연에서 최승희는 1백퍼센트 조선음악을 사용한 조선무용 작품만 공연했었다.

 

<대금강산보> 삽입 작품들이 미국과 유럽 무대에서 공연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최승희가 처음부터 영화와 공연 둘 다를 위해 작품들을 창작하고 준비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 이 작품들은 처음부터 세계무대를 겨냥해 창작되었던 것이다.

 

최승희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와 그의 세계 순회공연 사이에 작품의 접점이 확인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최승희는 왜 <대금강산보>에 출연했을까? 그는 왜 세계 순회공연을 떠났을까? 영화와 공연을 통해 그가 하고 싶은 말, 특히 조선인과 일본인이 아닌 세계인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그녀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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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무용가 최승희 선생은 1939년 유럽 순회공연에서 자신이 주연한 무용영화 <대금강산보(1938)>를 상연했다. 217일 금요일 밤 9, 파리의 센 강변 트로카데로 정원(Jardins de Trocadéro)에 인접한 <살드예나(salle d'Iéna)> 극장에서였다.

 

2017년 여름 최승희 선생의 파리공연을 조사하던 중 나는 이 영화 상연을 보도한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르땅(Le Temps)>을 비롯한 파리의 6개 일간지가 이 사실을 보도했고, <랭트랑지장(L'Intransigeant)>은 간단한 비평도 게재했다. 이는 예상치 못한 발견이었는데, 이 취재를 위해 예습을 꽤 했었지만, 이 영화의 유럽 상연에 대한 연구는 전혀 없었고, 8권에 달하는 최승희 평전들도 이를 언급한 바 없었기 때문이다.

 

최승희 선생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1938)>가 상연되었던 파리의 <살 드예나> 극장.

 

무대 예술가인 최승희가 영상에 등장하는 것이 낯선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무용가가 극영화에 출연한 것은 본인이나 관객에게 의미 있는 일이었을 것이고, 특히 그런 영화를 자신의 순회공연 중에 상연한 데에는 특별한 의도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비록 80년쯤 늦기는 했으나, 이글은 최승희의 그 특별한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찾아보기 위한 시도이다.

 

최승희는 평생 3편의 무용영화를 촬영했다. 해방 전의 <반도의 무희(1936)><대금강산보(1938)>, 해방 후의 <사도성 이야기(1956)>였다. 그밖에도 <백만인의 합창(1935)>에 단역으로 출연했고, <그대와 나(1941)>에도 출연 교섭을 받았으나 고사한 바 있었다.

 

해방 후 <춘향전(1948)><반야월성곡(1949)>, <맑은 하늘 아래서(1955)> 등의 무용극이 영화화되었을 가능성은 있으나, 최승희의 북한시절 활동에 정통한 이애순(2002)과 김채원(2008)의 책에 따르면, 영화화된 작품은 <사도성 이야기>뿐이었다.

 

더구나 <사도성 이야기>는 컬러영화였으므로 최승희의 무용영화라는 무용사적 의미와 함께, 북한 최초의 컬러영화라는 영화사적 의미도 갖는다. 참고로, 한국 최초의 컬러영화는 안창호 선생의 아들 안철영 감독의 <무궁화동산(1949)>과 홍성기 감독의 <여성일기(1949)>였다.

 

그러나 한국영화사에서는 <대금강산보>가 낯설다. 인기있는 미인 예술가 최승희 주연의 나름 인기 있던 영화였지만, 다른 배역이 모두 일본인이었고, 언어도 일본어였을 뿐 아니라, 제작자도 일본 영화사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금강산보>는 이경손이나 나운규 감독의 무성영화나 문예봉이나 김일송이 출연한 한국 영화들과 나란히 언급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일본 오사카의 <타이센칸(大山館)>에서 발행한 <대금강산보>의 홍보 전단

 

<대금강산보>는 일본 영화사에서도 별로 언급되지 않는다. 일본 영화 데이터베이스에는 <대금강산보>의 기초정보가 등재되어 있지만, 연구 대상이 되기는커녕 일본 영화사 저술이나 자료집에서도 다루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일본영화테레비전 프로듀서협회가 편찬한 <프로그램영화사: 다이쇼에서 이차대전까지(プログラム映畵史: 大正から戰中まで, 1978)>라는 책에는 <백만인의 합창>의 포스터가 실려 있지만, <반도의 무희><대금강산보>는 자료 제시는커녕 언급조차 없다. <백만인의 합창>의 출연자 명단에도 최승희의 이름은 올라있지 않았다.

 

최승희의 무용영화들이 한국과 일본의 영화사에서 외면당한 것은 해방 이후 계속된 이데올로기적 격동 때문이다. 일제의 패전으로 최승희는 더 이상 일본 신민이 아니었지만, 북한에서 활동하게 됨에 따라 한국과 일본에서는 그의 행적과 업적이 폄하되거나 잊혀진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최승희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의 제작과 배급, 특히 해외 상연 과정을 자세히 살폈다. 영화의 내용과 성격을 살피는 한편, 이에 출연하고 상연했던 최승희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를 계기로 최승희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가 재조명되고 남,북한과 일본 영화사에서 조금 더 활발하게 논의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 연구의 주요 자료는 2017년 필자의 최승희 유럽 순회공연 취재를 통해 발굴되었다. 이 취재는 <후암재단>의 재정지원으로 이뤄졌음을 밝히며, 고 차길진 회장께 깊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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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살플레옐 공연의 마지막 작품은 <서울의 무녀(Sorcière de Séoul)>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무녀춤> 혹은 <무당춤>이다. 작품 해설에는 한국의 무녀는 때로는 웃음으로 때로는 눈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유혹한다. 때로는 승려를 유혹하기도 한다. 무녀의 아름다움이 인생의 지혜보다 더 강하다는 설명도 덧붙여져 있다.

 

 

<무당춤>, 서울의 무녀(Sorcière de Séoul)

 

무교는 한국의 역사시대 이전부터 민간에 뿌리박은 신앙으로, 불교와 유교와 기독교 등의 외래종교가 전래된 이후에도 강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무속신앙의 제사장인 무당도 그만큼 연원이 오래고 민간의 생활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무당이 민간과 만나는 행사가 굿이며 굿을 통해 신적 존재와 인간을 이어주는 무당의 움직임이 이다.

무당춤은 무당의 역할을 기준으로 강신무와 세습무로 나뉜다. 신내림을 받은 무당이 신령의 역할을 하면 강신무이고, 신령과 인간을 잇는 제사장 역할을 하면 세습무이다. 프로그램의 해설에 따르면 최승희의 <무당춤>은 세습무로 분류될 것이다.

 

무당춤은 지역에 따라서도 구별된다. 강원도의 강릉굿과 삼척굿, 경상도의 부산굿과 영덕굿과 통영굿, 전라도의 진도굿 등이 널리 알려져 있으며 각작 독특한 특징을 갖는다.

 

프로그램의 제목이 서울의 무당이기 때문에, 최승희의 <무당춤>은 서울식 굿춤이다. 서울굿은 무복이 아름답고 춤도 우아하며 차분한 편이다. 무당은 쾌자를 입고 깃을 꽂은 높은 관이나 절립을 쓰고 한 손에 방울, 다른 손에 삼불제석(三佛祭釋)을 그린 부채를 드는 것이 보통이지만, 때로는 삼치장이나 장검, 혹은 길고 붉은 수건을 사용하기도 한다. 타악기 중심의 음악이 보통이나 리듬악기를 쓰기도 한다. 도드리, 굿거리, 타령 등의 빠른 리듬을 사용한다.

 

<무당춤>, 서울의 무녀(Sorcière de Séoul)

 

<신한민보(1938210)>도 로스엔젤레스 이젤 극장 공연에서 발표된 <무당춤>에 대해 통 높은 갓에다 구슬끈을 다라쓰고 전포를 입고 부채를 들고 방울을 흔들며 점을 치는 춤이라고 묘사하고, “부채를 폈다 접었다 방울을 흔들며 분주히 돌아가는 것이 대체로 보아 이것도 활기 있는 춤이라고 설명했다.

 

무당굿이 예술무용으로 전화된 것은 근대의 일이며 이는 최승희의 <무당춤>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무당춤이 초연된 것은 1936922일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렸던 제3회 발표회였으나, 무당춤의 연구는 1929년 무용유학을 마치고 경성으로 돌아왔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19333월 다시 도쿄로 돌아갈 때까지 최승희는 한반도 곳곳의 무당과 기생들을 찾아다니면서 춤사위를 배웠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후 <무당춤>은 최승희 공연의 주요 레퍼토리였다.

 

서울 무당춤에서 방울 대신 또 하나의 부채를 들면 <부채춤>이 되고, 부채 대신 방울만 사용하면 <쟁강춤>이 된다. 또 붉은 수건만 들고 악령을 쫓는 춤을 추면 <수건춤>이 된다.

 

따라서 무당춤은 오늘날 예술무용으로 정착된 각종 전통무용의 원류이자, 다양한 발전을 위한 소재로 작용해 왔음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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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그 다음 작품은 <칼춤> 혹은 <검무>이다. 프로그램은 이 작품을 전사의 기사정신은 조금씩 사그러들었지만 최승희의 춤이 위축된 정신을 불러 일으켜 활발하게 고양시킨다고 설명하고 있다.

 

<검무(1934)><에헤야 노아라(1933)>, <승무(1934)>와 함께 최승희가 창작한 초기 조선무용 작품이다. 칼춤은 신라시대 황창의 영웅적인 행위를 칭송하기 위한 목적의 빠르고 힘있는 무용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주로 기생들에 의해 주안석에서 연희되는 방식으로 계승되는 바람에 빠르고 힘찬 원형은 잦아들고 칼의 교묘한 움직임을 위주로 하는 섬세한 춤으로 변했다고 한다. 최승희는 이를 다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여 장쾌하고 쾌활한 춤으로 재창작했다는 것이다.

 

<검무> (Danse de l'Epée)


이는 최승희가 조선 전통무용의 고증을 위한 자세한 리서치를 추진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 강준식(2012, 118-120)은 최승희가 19335<레이조카이>가 주최한 여류무용대회에서 발표한 <에헤야 노아라>가 폭발적인 성공을 거둔 데에 힘입어 새로운 조선무용을 창작하기 위해 심형을 기울였다고 서술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 고전문헌에 대한 리서치가 필요했는데, 그같은 고증 작업에는 남편 안막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고 서술했다.

 

강준식이 그 한 가지 예로 든 것이 바로 <칼춤>이었다. 안막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경상도 정주부 인물조에 기록된 신라시대 황창(黃昌)의 고사를 찾아냈고, 거기에서 <칼춤>의 모티브를 찾아냈다. 황창의 칼춤이 백제 저잣거리에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결국 백제왕을 살해하기에 이르렀을 정도로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것이었다고 해도, 실제로 그것이 어떤 모양으로 연기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에 안막은 다시 정약용의 시선집에 실린 <무검편증미인> 부분에서 칼춤에 대한 기록을 찾아 주었다.

 

안막이 정약용의 칼춤을 번역해서 읽어주었을 때 최승희는 그 시가 주는 감동만 가지고도 혼자서 칼춤을 출 수 있었다고 한다. 북한의 <문학신문(1961620)>에 실린 <무용과 문학>이라는 기고문에서 최승희는 이렇게 썼다. “이 시는 그 동작묘사에서 얼마나 선명하고 생동한가? 이 시를 읽으면 칼춤을 모르는 사람도 칼춤을 만들 수 있고 칼춤을 출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정약용의 <칼춤>에도 섬세함과 부드러움이 주조를 이루고 있어서, 황창 검무의 장엄하고 용맹스러움을 복원시키려면 또 다른 영감이 필요했다. 이에 안막은 이덕무와 박제가가 정조의 명을 받아 집필한 <무예도보통지><무예도>를 찾아왔다. 여기에는 무기를 다루는 동작을 비유법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용이 바다에서 뛰어오르는 기세라거나 붉은 봉새가 날개를 펼치는 기세혹은 엎드린 호랑이의 기세로 일격을 가하는 형세등의 서술이 그것이었다. 이러한 기록은 실제 동작을 서술한 것이라기 보다는 비유법을 주로 사용한 것이지만, 최승희는 이런 비유적 서술을 통해 오히려 더 생생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 최승희의 검무는 직선적이고 폭이 큰 춤사위와 발산적인 힘의 분출, 사지의 예리한 뻗침과 탁탁 끊기는 춤사회가 두드러졌으며 검무라고 해서 이렇게 칼을 가지고 무사 비슷하게 갑옷 같은 것을 입고 장화에 뿔같은 모자를 둘러쓰고 샷샷샷하고 춤추던 모습으로 완성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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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제목이 <옥중 슌코의 고통(Détresse de Shunko dans la prison)>이라고 번역된 이 작품의 원제목은 <옥중춘향> 혹은 <춘향애사>이다. 프로그램의 해설에는 춘향의 이름이 슌코(春子)’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표기됐다. 춘향이 유럽에서 춘자(春子)’가 되어 버린 셈인데, 그래도 작품 해설에서는 봄 향기(parfum de printemps)’라고 제대로 뜻풀이가 되어 있다.

 

살플레옐 프로그램은 춘향은 젊고 매력적인 한국의 기생으로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소설의 여주인공이라고 소개하면서 작품의 내용을 이렇게 해설했다. “춘향은 부패한 사또의 사랑을 받지만 이를 거부한다. 이미 젊은 학동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또는 춘향이를 박해하고 투옥한다. 봄 향기와도 같은 젊음과 아름다움은 감옥에 갇혀 고통 받는다.”

 

<옥중춘향>, 옥중 슌코의 고난(Détresse de Shunko dans la prison), 이 작품의 사진은 발견된 것이 없고, 작품구상에 사용된 스케치가 남아 있다. 

 

<옥중춘향>은 유럽 공연 이전에 발표된 기록이 없으므로 살플레옐 공연이 초연이다. 강준웅은 최승희가 반년 이상 뉴욕에 체재하면서 새로운 작품을 구상했다고 서술한 바 있고, 정병호(1995:151)도 최승희가 파리에 도착한 후 자그마한 스튜디오를 빌려 ...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기 시작했다고 서술했다. 이런 기록으로 미루어 <옥중춘향>은 뉴욕이나 파리에서 창작된 것으로 보인다.

 

최승희는 어째서 세계 순회공연을 떠나기 전에는 미리 준비하지 않았던 춘향전 이야기를 갑자기, 그것도 외국에서 안무할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193811월호 <삼천리>에 실린 최승희의 기고문 <춘향전의 향기>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 글에서 최승희는 신협 극단이 도선(渡鮮) 공연의 각본에 <춘향전>을 택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면서 춘향역은 어느 분이 하십니까하며 배역에까지 관심을 보였다. 조사해 보니 최승희가 궁금해 하던 춘향의 역은 일본인 배우 아카고메 란코(赤米蘭子)가 맡았다.

 

신협(新協)이란 <신극협회(新劇協會)>를 가리키며 도쿄에서 활동하는 일본극단이다. 신협의 <춘향전> 극본은 장혁주(張赫宙, 1905-1998)가 맡았다. 대구 출신의 소설가 장혁주는 1938<춘향전>을 일본어로 번역했는데, 원문대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일본식 ()’의 희곡 형식으로 편역했다. 이 작품을 신협의 무라야마 토모요시(村山知義)가 연출을 맡아 도쿄와 오사카와 교토에서 공연한 것인데 일본인 관객의 호평을 받았다.

 

<춘향전>의 일본 공연이 성공한 것에 힘입어 조선 공연도 결정되었는데 그 흥행을 최승일이 맡았다. 최승희는 신협의 <춘향전>이 오빠의 주도 아래 조선에서 공연된다는 소식을 듣고 축하 겸 격려의 편지를 보냈고, 최승일은 이 편지를 <삼천리>에 공개한 것인데, 아마도 최승일은 동생의 인기를 빌어 흥행에 보탬이 되게 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 달 후의 <삼천리(19391월호)>는 최승일이 최승희 무용회의 성공 경험을 믿고 (춘향전의) 공연계약을 체결했으나 결국 4천원의 손해를 보았다고 전했다. 당시의 4천원은 오늘날의 약 1억원(임금 기준) 정도이다.

 

1949년 12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아 부인대회에 출품된 무용극 <춘향전>에 출연한 최승희(오른쪽)

 

최승희의 편지는 최승일의 <춘향전> 흥행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최승희 자신은 이를 계기로 뉴욕 혹은 파리에서 <옥중춘향>을 새로 안무했던 것 같다. 이 작품은 살플레옐 극장에서 초연된 이후 브뤼셀과 뒤스부르크, 암스텔담과 헤이그 등에서도 공연되었지만, 언론에는 <옥중춘향>의 언급이 별로 없었고 해설이나 평론기사도 없었다. 유럽인들에게 그다지 인상적인 작품으로 비쳐지지 않았다는 말이겠다.

 

최승희가 셰계 순회공연을 마치고 도쿄로 돌아온 후에도 <옥중춘향>다시 공연한 기록이 거의 없었다. 귀조 후 2년이 지난 194212월의 공연에서 한 번 더 공연된 것이 유일하다. 이 작품이 때로 <춘향애사>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해방 전까지 최승희에 의해 다시 공연된 적이 없었다. 최승희 자신도 이 작품에 그다지 애착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옥중춘향>은 해방 후에야 무용극으로 개편되면서 크게 발전되었다. 최승희는 19487월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무용극 <춘향전>을 공연했고, 194912월에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아 부인대회에서도 무용극 <춘향전>을 무대에 올린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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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가 끝난 후에는 긴 중간 휴식(ENTR’ACTE)이 있었다. 9개의 작품을 모두 독무로 공연한 최승희는 숨 돌릴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막간 휴식이 끝난 후 시작된 3부에서는 <초립동(1937)>, <춘향애사(1939)>, <검무(1934)>, <무녀춤(1936)>의 네 작품이 발표되었다.

 

3-1. 프랑스어로 꼬마 신랑(Enfant marie)”으로 번역된 작품의 원제는 <초립동>이다. 프로그램은 이 작품이 과거 한국에서는 조혼이 성행했다고 소개하고 결혼식을 마친 후 더 이상 아이가 아니고 어른이 되었지만 꼬마신랑은 풀로 만든 모자를 쓴 채 명랑하고 순진하게 행동한다고 작품을 설명한 후 과연 꼬마신랑은 사랑을 아는 걸까?”하고 묻는다.

<초립동>, 꼬마 신랑(Enfant marie)

 

풀잎으로 만든 작은 모자(petit chapeau d'herbes)’란 초립(草笠)을 가리킨다. 초립은 어린 나이에 결혼한 사람이 쓰던 갓을 가리키며 보통은 가늘고 누런 빛깔이 나는 풀이나 말총으로 엮어서 만들었던 작은 모자이다. 순 한국말로는 풀갓이라고도 불렀다. 최승희가 <살 플레옐> 공연을 마친 후 이 모자가 파리 여성들에게 유행했다는 기록도 있어 당시 최승희의 <초립동>과 그 소품 초립의 인기를 짐작케 한다.

 

로스엔젤레스 공연 직후에 공연평을 실었던 <신한민보>는 이 작품을 <신랑춤>이라고 불렀고 코흘리는 초립동이가 신부를 맞는데 청바지 저고리에 분홍 두루막을 입고 초립을 쓰고 혼자 남모르게 좋아서 춤도 추고 생각도 하고 명상도 해보는 로맨스의 곡이라고 해설했었다.

 

<신한민보>에 묘사된 <초립동>의 의상은 이 작품의 밝고 명랑한 분위기를 상상하는 데 도움을 준다. <초립동>은 오늘날에도 재일 조선학교 무용부의 학생들에 의해 자주 공연되는데 이들의 의상이 지금도 푸른색 바지 저고리에 분홍색 두루막을 입고 초립을 쓴 차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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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살플레옐 프로그램은 <봉산탈춤> 혹은 <유랑예인(Bouffon errant)>한국 풍습의 전형적인 한 가지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며, 최승희는 이 작품에서 유머러스하고 환상적인 해석을 통해 원시적인 기괴성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움을 완성했다고 설명했다.


<봉산탈춤>, 유랑예인(Bouffon errant)

 

이 작품이 미국에서 공연되었을 때는 가면을 쓰고 하는 코믹한 유랑패의 춤(<LA 헤럴드 앤 익스프레스, 193823)>”이라고 서술되었고, “<조선의 유랑패거리>... 번갈아가면서 활기찼다가 쭉 빠지는 모습은 분위기를 전달하며 커다란 가면은 우스꽝스러운 면모를 더해 준다(<뉴욕 월드 텔레그람>, 1938220)”라고 보도되기도 했다.

 

즉 살플레옐 공연 프로그램은 가면을 언급하지 않았으나 <유랑예인>은 가면을 쓰고 춘 우스꽝스런 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1938210일의 <신한민보>의 공연평에는 <유랑예인>이나 그와 비슷한 이름의 작품은 없었고, 그 대신 최승희가 가면을 쓰고 추었던 우스꽝스러운춤으로 <봉산탈춤>을 기록했다.

 

이 춤이야말로 대활극이다. 통바지 저고리에 왕발을 들고 바가지 같은 탈을 쓰고 쌍말로 하면 지랄 네굽을 부리는 모양은 관중으로 하여금 허리를 붙잡지 않으면 안 될 대활계극이다.”

 

나는 유럽 취재기에서 <유랑예인>19351022, 도쿄의 히비야 공회당에서 초연되었던 <호니호로시(ほにほろ)>의 조선풍 버전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 추정은 빗나간 것으로 보인다. 로스엔젤레스와 뉴욕의 신문보도와 <신한민보>의 감상을 종합할 때, <유랑예인>의 원래 제목은 <봉산탈춤>으로 <호니호로시>와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었다.

 

정병호-다카시마 유사부로의 <세기의 미인무용가 최승희(1994)>210쪽에 실린 사진이 <봉산가면무(Korean Vagabond=조선의 유랑인)>라는 제목을 갖고 있었고, 이 사진이 최승희의 <남미 순회공연 팜플렛(1940)>에 실렸던 것임을 고려할 때, 살플레옐 공연에서 발표된 <유랑예인>의 원래 제목이 <봉산탈춤>이었다는 사실은 더욱 확실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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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낙랑의 벽화(Fresque de Royang)>에 대해 프로그램은 낙랑은 동방문명의 요람으로 여겨지며, 아름다운 여인이 그려진 낙랑의 벽화에 대한 명상을 통해 이 작품이 창작되었다고 설명했다. 김채원도 <낙랑의 벽화>천년의 꿈을 말하듯 벽화에 그려진 고대 가인을 통해 보게 된 환상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낙랑군은 기원전 108년 고조선이 망하면서 한사군의 하나로 평양 지역에 설치되어 372년 미천왕이 이를 멸망시켜 고구려에 복속시킬 때까지 거의 5백년 가까운 국체를 유지했었다. 낙랑군이 망한 뒤에도 중국에서는 이 지역을 차지한 고구려를 낙랑이라고 부르는 관행이 있었고, 삼국이 통일되고 난 뒤에는 통일신라와 고려도 낙랑이라고 지칭한 예도 있다.

 

따라서 최승희가 <낙랑의 벽화>라고 한 것은 <고구려의 벽화>라는 뜻이다. 평양 부근에서는 다수의 고구려 벽화가 발굴되었는데, <사신도><행렬도>, <하례도> 등이 그것이다. 한편 지린성 집안 지역에서 발굴된 무용총의 <무용도>에는 14인의 남녀가 한복차림으로 춤추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아름다운 여인이 그려진 낙랑의 벽화라는 설명으로 보아 아마도 무용총의 <무용도>가 최승희의 작품 <낙랑의 벽화>의 소재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볼 수 있다.

 

 

<낙랑의 벽화>의 소재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구려의 무덤 무용총에서 출토된 <무용도>

 

<낙랑의 벽화>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공연에서도 공연되었다. 193823일의 <신한민보>는 전날 밤 이벨극장에서 열렸던 최승희 공연 중의 <낙랑의 벽화>에 대해 머리에 화관을 쓰고 은행색 옅은 빗깔 우에 어깨로부터 붉은 띠를 걸어 허리에 두르고 앞으로 늘어뜨린 그 모양만 보아도 낙랑 고대의 그 화려하고 귀족적인 것을 찾아 볼 수가 있다고 해설했다.

 

<낙랑의 벽화>1936922-23일 도쿄 히비야(日比谷)공회당에서 열린 최승희 제3회 신작무용 발표회에서 처음 무대에 올려진 작품이다. 19373월 경성의 부민관에서 열린 공연과 같은 해 12월 동경에서 열린 도구(渡歐)고별공연에서도 잇달아 공연되었다. 1938219일 미국 뉴욕 길드극장 공연에서도 이 작품이 등장했다. 최승희가 얼마나 애착과 자신을 가졌던 작품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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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프랑스어로 젊은 엽색가(Un jeune charmeur)’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작품의 원제목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를 <에헤야 노아라>로 보는 이도 있지만 <한량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프로그램에 따르면 매력적이고 쾌활한 서울의 젊은이가 호기심 많은 여성들의 마음을 유혹하는의 작품이며, “투명한 젊음에는 걱정과 계산이 없다고 덧붙여져 있다. 이는 조선시대의 한량과 개념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에 일부 평전이나 학술서들은 이를 <한량무>라고 불렀다.

 

<한량무>, 젊은 엽색가(Un jeune charmeur)

 

그러나 최승희의 작품들을 유형별, 내용별로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한 김채원의 최승희 작품목록에는 <한량무>라는 작품이 없고, <한량춤>에 대한 거의 모든 서술은 <에헤라 노아라>와 일치시켰다. 즉 이 작품을 <에헤야 노아라(1934)>이거나 그 변주곡이라고 본 것이다.

 

<에헤야 노아라>는 최승희가 안무한 최초의 조선무용이자, 일본에서 공연된 최초의 조선무용이기도 하다. 1933520일 당시 일본 잡지사 레이죠가이가 주최하고 일본 청년회관에서 개최된 여류무용대회에서 초연되었다. 최승희는 <에헤야 노아라>는 기생들의 춤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마음을 표현한 새로운 무용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춤은 술에 취한 자기 아버지의 굿거리 춤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작품이라고 고백한 바 있었다.

 

그러나 <최승희팜플렛 1(19352)><2(19359)>에 나오는 <에헤야 노아라><남미 순회공연 팜플렛(1940)>에 나오는 <한량무>는 스틸 사진만 보아도 다른 작품으로 보인다. , <에헤야 노아라>는 중년의 남성이 흰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모습이지만, <한량무>는 청년 남성이 채색 쾌자를 입고 전립을 쓴 모습이다.

 

이 같은 차이는 정병호-다카시마 유사부로 공편의 사진집 <세기의 미인무용가 최승희>178-9쪽의 <에헤야 노아라>207쪽의 <한량무>를 비교해 보아도 금방 알 수 있다. 1938210일의 <신한민보><한량무>전립을 적게 쓰고 쾌자를 걸쳐 입고 거들거려 추는 춤이라며, “몸짓, 어깨짓, 눈짓, 발짓, 별별 멋을 다 부리는 흥춤이라고 해설했다. 그러나 <한량무>의 초연이 언제인지는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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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가 끝나고 약간의 사이(Pause)를 두었다가 시작된 2부에서는 <보살춤(1937)>, <한량춤(1938)>, <낙랑의 벽화(1936)>, <유랑예인(1935)>의 네 작품이 공연되었다.

 

2-1. <보살(Bodhisativa)>불교 분위기에 푹 잠긴 최승희는 차분하고도 우아한 불교 예술의 아름다움, 즉 순수하고 고요한 부처의 청정심, 곧 열반의 심상을 표현하려고 한다고 설명되어 있다.

 

보현보살(왼쪽)과 최승희의 <보살품>, (Bodhisativa)

 

1부에서 공연된 <승무>가 불교를 비판하는 내용이었고, 그 비판은 불교의 타락과 사회적 악영향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1부 첫작품으로 <승무>를 배치했던 최승희는 2부의 첫작품으로 <보살춤>을 선정하면서 불교의 원래적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보살춤>의 초연이 언제였는지 알려지지 않은 상태이다. ‘보살이라는 말이 들어간 최초의 작품은 <보현보살(1937)>인데, 이 작품은 19373월말 혹은 4월초의 이왕직 본청 주최의 순정효황후 윤씨의 위로 특별공연에서 초연되었다.

 

한편 최승희는 같은 해 927일부터 사흘 동안 도쿄극장에서 열린 특별 공연에서도 <보살도>라는 제목의 작품을 발표했는데, <보현보살>과 같은 작품이거나 수정 또는 개작된 작품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본다면 파리 플레옐 공연에서 공연된 <보살춤>의 초연시기는 1937년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후 최승희는 <가무보살(1941)><관음보살(1941)>, <지장보살(1947)><암굴의 보살(1947) 등의 보살춤 시리즈를 잇달아 발표했으나, <보살춤(1937)이나 <보현보살(1937)>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참고로 <보살도(1937)>를 제외하고는 <보살(Bodhisativa)>이라는 제목은 서양 공연에서만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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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부 마지막 작품의 프랑스어 제목이 젊은 날의 꿈(Rêve de sa jeunesse)’이지만 해설을 읽어보니 원제목이 <신노심불로(身老心不老)>이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는 뜻이다. 프로그램의 설명에는 한국의 노인이 담배를 피우며 책을 읽다가 갑자기 청년처럼 춤추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내 야위고 힘없는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실망하면서 다시 노인으로 되돌아온다고 되어 있다.

 

김채윤도 이 작품을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고, 지나간 청춘시절의 추억에 빠져 젊은 날 추었던 춤을 추려고 해도 쇠한 육신이 그 꿈을 이뤄주지 못한다는 내용이라고 풀었다.

 

하지만 이 작품에는 개인의 노화로 인한 좌절감 표현을 넘어서는 사회적 의미도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한때는 강성했던 조선이 힘도 잃고 꿈도 없이 늙어버린 상황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신노심불로>, 젊은 날의 꿈(Rêve de sa jeunesse)

 

이 작품도 <옥적곡>과 함께 1937년 순정효황후 윤씨(1894-1966)의 위로 특별공연에서 초연되었다. 이 특별공연은 왕실 행사로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언론에도 보도되지 않았다. 그러나 정병호(1995:116)는 예술원 회의 성경린의 증언과 당시의 프로그램을 근거로 순정효황후 윤씨를 위로하기 위한 이왕직 본청 주최의 특별 무용공연이 인정전 서행각 앞에 설치된 가설무대에서 열렸다고 서술했다.

 

이 공연이 열린 시기는 최승희가 부민관에서 숙명여자전문학교 창립을 위한 특별공연을 가졌던 1937329일 이후 사리원 지방공연을 가졌던 43일 사이의 어느 시점이었을 것이다. 이 공연의 레퍼토리는 10작품이었는데, 그중 8작품이 최승희에 의해 공연되었던 것으로 확인되므로 이 공연은 사실상 최승희가 이왕직의 전속 반주로 순정효황후 윤씨를 위해 마련한 개인공연이었던 셈이다. 이 공연의 레퍼토리와 연희자는 다음과 같았다.

 

[1] 1. 속무(속곡) 최승희, 2. 옥적곡(고전곡) 최승희, 3. 인도조(타악기반주), 장귀희, 4. 초립동(속곡), 최승희, 5. 세 개의 전통적리듬(고전곡), 최승희, [2] 1. 보현보살(고전곡), 최승희, 2. 신노심불로(고전곡), 최승희, 3. 민요조(속곡) 와가구사로시고, 4. 무녀춤(속곡), 최승희, 5. 즉흥무(고전곡) 최승희

 

이때 최승희가 윤황후를 위해 초연한 <신노심불로> 등의 5곡이 파리 살플레옐 극장 공연에서도 공연되었던 것인데, 이 다섯 작품은 일반 공연 전에 조선의 황족을 위해 먼저 특별 공연되었다는 특별한 기록을 갖게 되었다.

 

순정효황후 윤씨(純貞孝皇后 尹氏, 1894년 양력 919(음력 820) ~ 196623)는 대한제국의 황후이자 한국사의 마지막 황후이다. 대한제국 순종의 계후(繼后)이며, 일제 강점기의 이왕비, 이왕대비로 칭해졌다. 그는 190712세의 나이로 황태자비로 책봉되었고, 그해 황태자 순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그녀도 황후가 되었다.

 

순정효황후는 1910년 병풍 뒤에서 어전 회의를 엿듣다가 친일 대신들이 순종에게 한일병합조약의 날인을 강요하자, 국새(國璽)를 자신의 치마 속에 감추고 내주지 않는 결기를 보이기도 했다. 결국 백부 윤덕영에게 국새를 강제로 빼앗겼고, 이후 대한제국의 국권은 일제에 피탈되어, 순종이 황제에서 이왕으로 격하되면서 자신도 이왕비로 내려앉았고,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에 머물렀다가, 19264월 순종이 사망하자 대비(大妃)로 불리며 창덕궁 낙선재(樂善齋)로 거처를 옮겨 살고 있었던 것이다.

 

윤황후가 최승희의 <신노심불로>를 관람할 때의 나이는 40대로 아직 신노(身老)’라고 할 만한 연배는 아니었으니, 이 작품은 윤황후나 혹은 다른 어떤 개인을 지칭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뇌쇠하여 과거의 영화를 회복하기는커녕 식민지로 전락해버린 조선의 상태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작품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 조선인들은 마음으로는 옛날의 영화를 잊지 않고 있지만, 지금은 나라를 잃고 옛 영화를 회복할 능력이 없음을 개탄하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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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기생춤(Danse de Kiisan)>장구를 맨 기생이 춤추며 노래하면서 방랑 시인의 관심을 빼앗는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소품으로 장구가 등장하기 때문에 흔히 <장고춤>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기생(妓生)을 일본식 발음의 게샤(geisha)라고 쓰지 않고 한국식 단어에 가깝게 키생(Kiisan)으로 발음되도록 철자를 사용한 것이 눈에 띤다.

 

 

<기생춤>, (Danse de Kiisan)

 

다른 작품 설명과는 다르게 <기생춤>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한 수 덧붙여져 있다. 앞선 곡해설과 연결해 이해한다면, 장구를 메고 춤을 추던 기생이 지나가는 방랑 시인을 유혹하면서 부르는 노래로 볼 수 있겠다.

 

젊음은 지나가는 법입니다

슬퍼하거나 괴로울 게 무엡니까?

죽고 나면 우리는 어찌 될까요?

아름다운 여인들과 위대한 영웅들도

모두 죽었고 여기에 없는 것을...

 

젊음은 지나가는 법(Il faut que jeunesse se passe)”이라고 직역한 첫 줄은 프랑스 속담이다. 대개 애들은 애들일 뿐이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여기서처럼 젊은 시절은 곧 지나가므로 맘껏 즐겨야 한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따라서 이 속담은 한국민요 <성주풀이>의 받는 소리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로구나/ 놀고놀고 놀아봅시다/ 아니 노지는 못허리라와 그 뜻이 같다. 이후의 구절들도 낙양성 십리 하에 높고 낮은 그 무덤들/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세가인이 그 누구냐<성주풀이>매기는 소리와 내용이 같다.

 

이 시는 다섯줄에 불과하고 프랑스 속담까지 동원해 번역됐지만 내용은 한국적이다. 아마도 안막과 최승희가 <성주풀이><편시춘>의 가사를 제공했고, 이를 기획사나 주관사가 프랑스어로 번역하면서 위의 구절이 등장하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하지만 이 번역이 <성주풀이><편시춘>의 비관과 낙관, 허무와 쾌락이 혼재된 분위기를 얼마나 프랑스 관객들에게 잘 전달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지나가는 길손을 유혹하는 기생의 매혹적인 노래와 교태로 넘치는 최승희의 <기생춤>은 그같은 정조를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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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두 번째 작품 <천하대장군>은 조선시대 마을 입구마다 세워진 장승을 희화화한 작품이다. 프로그램에 텐카 타이쇼군(Tenka Taishogun)으로 표기된 것은 천하대장군의 한자를 일본식 발음으로 읽은 것이다.

 

<천하대장군> (Tenka Taishogun)

 

장승(長栍)은 마을 또는 절 입구에 세운, 꼭대기에 사람의 얼굴 모양을 새긴 기둥이다. 지방에 따라서는 벅수라고도 한다. 장승은 이정표 또는 마을의 수호신 구실을 한다. 일반적으로 남녀 한 쌍의 모습으로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으며, 남자 장승에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이라 씌어져 있고, 여자 장승에는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라 씌어있는 것이 보통이다. 나무나 돌로 만든 것이 대부분인데, 나무로 만든 장승이 더 일반적이고 이를 목장승이라고 부른다. 제주도의 돌하르방은 육지의 돌장승이 특화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역사적으로 장승에 대한 기록은 삼국시대에도 더러 발견되지만 마을마다 보편화된 것은 조선시대이다. 장승을 세울때는 얼굴부분에 험상궂거나 우스꽝스런 모습을 조각하는데, 이는 장승이 악귀나 외부세력을 쫓는 수호신의 역할을 한다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보통 마을의 어귀에 세우기 때문에 경계를 표시하는 이정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최승희의 <천하대장군>자신이 최고로 강하고 똑똑하다고 뽐내는 장군을 비웃는 환상적인 작품으로 설명되었는데, 조선의 지배세력이 강역을 지키지도 못하고 일제의 침략을 물리치지도 못했음을 풍자한 셈이니, 결국 조선 지배층을 풍자적으로 비판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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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살플레옐 공연 프로그램에 나타난 레퍼토리와 그 해설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1-1. 불교의 유혹자 (Séductrice Bouddhiste=<승무>, 고전 음악): 그녀는 불교 승려로 위장하고 사원에 들어가 북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면서 불교도를 타락시키려 한다. 이 무용은 지나치게 강해진 불교도를 상대로 한국인들이 투쟁하기 시작했던 시대를 회상시킨다.

 

“2. <천하대장군> (Tenka Taishogun, 타악기 반주): 자신이 제일 힘세고 똑똑하다고 믿는 장군의 맹목적의 자기 우상숭배의 이미지를 폭로하는 환상적인 춤이다. 토템 시대의 우스꽝스런 장면.

 

“3. 매혹적인 멜로디 (Melodie enchanteresse=<옥적곡>, 고전 음악): 멀리 높은 하늘에서 여신들이 연주하는 멜로디가 희미하게 들린다. 그녀는 매혹적이고 고상한 피리 소리에 이끌려 꿈꾸듯 춤춘다. 하늘은 항상 높고 푸르다.

 

 

최승희의 <살플레옐> 공연의 프로그램. 3부로 나뉘어 총 13작품이 공연되었다.


“4. <
기생춤> (Danse de <Kiisan>, 민속 음악): 장구를 맨 기생이 춤추며 노래하면서 방랑시인의 관심을 빼앗는다.

젊음은 지나가는 법입니다

슬퍼하거나 괴로울 게 무엡니까?

죽고 나면 우리는 어찌 될까요?

아름다운 여인들과 위대한 영웅들도

모두 죽었고 여기에 없는 것을...

 

“5. 젊은 날의 꿈(Rêve de sa jeunesse=<신노심불로>, 타악기 반주): 책을 읽으며 담배를 피우던 한국 노인이 젊은 시절을 꿈꾼다. 갑자기 그는 젊은이가 된 것처럼 춤추기 시작한다. 하지만, 어쩌랴, 그의 마르고 연약한 다리가 고통스럽다. 노인은 크게 실망하면서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2-1. <보살춤> (Bodhisativa, 궁정 음악): 불교 분위기에 침잠하여 최승희는 차분하고 우아한 불교 예술의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그것은 깨끗하고 고요한 불교적 평온함, 즉 열반의 마음 상태이다.

 

“2. 젊은 엽색가 (Un jeune charmeur=<한량무>, 민속 음악): 서울 젊은이의 유쾌함을 보여준다. 그는 매력적이고, 쾌활, 명랑하며, 솔깃해하는 여성들의 마음을 유혹한다. 투명한 젊음에 걱정과 계산은 없다.

 

“3. <낙랑의 벽화> (Fresque de Royang, 궁정 음악): 한국에서 낙랑은 동방 문명의 요람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이 춤은 최승희가 아름다운 여인이 그려진 벽화를 바라보면서 명상에 잠겨있던 중에 안무한 작품이다.

 

“4. 유랑예인 (Bouffon errant=<봉산탈춤>, 타악기 반주): 이 춤은 한국의 가장 전형적인 풍습의 하나이다. 최승희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환상적인 해석을 가미하자 이 풍습은 완성되었다. 그것은 원시적 그로테스크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이다.

 

“3-1. <어린 신랑> (Enfant marie=<초립동>, 민속 음악): 옛 시대 한국인들은 일찍 결혼하곤 했다. 혼례가 끝난 후, 인제 성인이 된 꼬마는 초립을 쓰기는 했지만 여전히 즐겁고 천진난만하다. 그는 사랑을 알까?

 

“2. 옥중 슌코의 고난 (Détresse de Shunko dans la prison=<옥중춘향>, 고전 음악): 이름의 뜻이 봄의 향기인 춘향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소설의 여주인공으로, 젊고 매력적인 기생이다. 그녀는 포악한 사또의 사랑을 받지만 그의 사랑을 거부한다. 그녀는 이미 학생 몽룡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또는 그녀를 박해하고 투옥한다. 봄 향기와도 같은 그의 젊음과 아름다움이 모두 감옥에 갇혔다.

 

“3. <검무> (Danse de l'Epée, 타악기 반주): 늙은 용사의 기사도 정신은 조금씩 사라진다. 기생들이 그의 정신을 불러일으키려고 춤을 추지만 그것도 이젠 예전같지 않다. 최승희가 이 정신을 고양시키고 생기를 불어넣는다.

 

“4. 서울의 무녀 (Sorcière de Séoul=<무녀춤>, 고전 음악): 한국의 무녀는 때로는 웃음으로 때로는 눈물로 손짓하고 유혹한다. 그녀는 심지어 불교의 현자도 유혹한다. 무당의 아름다움과 향기는 인간의 지혜보다 강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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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플레옐 공연 팜플렛의 최승희 소개는 몇 가지 면에서 이례적이다. 몇 줄의 약력으로 줄일 수 있는 내용이지만 8면 팜플렛의 한 면을 통으로 할애했고, 문단을 자주 바꾸고 읽기 쉬운 단문을 사용해 최승희의 출생과 출신, 무용입문과 성공적인 공연활동을 자세히 소개했다.

 

살플레옐 공연이 최승희의 유럽 데뷔 공연이었던 만큼 작품 설명에 앞서 무용가 최승희 자신을 알리는데 공을 들인 것은 이해할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오류와 과장이 포함된 것은 지적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최승희가 도쿄 무용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것은 1930년이 아니라 1929년이었고, 최승희가 젊은 음악가들과 작곡 활동에 관여했다는 것은 다른 증거가 필요한 주장이며, 미묘한 정치적 지형 때문에 미국 공연이 초기에 중단된 사정은 언급되지 않았다.

 

특히 최승희가 1934년부터 1937년까지 2백만 명 이상의 관객을 위해 6백회 이상의 공연을 했다는 주장은 숫자를 이용한 호소력있는 표현이지만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과장이었다. 일주일에 3일씩 33백명의 관객 앞에서 4년간 공연을 해야 가능한 숫자인데, 당시 조선과 일본에는 객석 3천 이상이 극장은 없었다. 최승희가 자주 공연했던 서울의 경성공회당과 도쿄의 히비야공회당의 수용인원도 2천명 남짓이었다.

 

사소한 오류와 과장에도 불구하고 이 소개문은 다른 문헌이 언급하지 않은 새로운 사실을 보여준다. 첫째는 최승희의 모교 숙명여학교를 소개한 것인데, 숙명여고보 졸업생이 유럽에 공개적으로 소개된 것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1930년대의 숙명여고보는 조선 최고의 여학교임에 틀림없었으나 졸업생들의 대부분은 조선에 머물렀고, 해외 활동도 일본과 중국 등에 국한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최승희 덕분에 숙명여학교는 유럽에 소개된 최초의 조선 여학교가 된 것이다. 다만 유감인 것은 숙명(淑明)이라는 원래의 이름이 아니라 슈쿠메이(Shukumei)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알려진 것이었다. 이는 '최승희(崔承喜)'가 아니라 '사이 쇼키(Sai Shoki)'라고 발음되었던 것과 같은 이유였다.

 

살플레옐 공연 팜플렛은 최승희가 14세에 무용에 입문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최승희 유럽데비 8년전인 1930년에야 오르세 미술관 영구소장이 결정된 에드가 드가의 <14세의 어린 무용수>를 연상시켰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무용유학을 떠났던 시기 최승희의 나이가 14세였다고 밝힌 것이다. 출생연도를 비롯해 각종 연도나 최승희 나이를 밝히는 데에 적극적이지 않은 소개문에서 무용입문시기의 나이만 밝혀놓은 것이다.

 

최승희가 이시이 바쿠를 따라 무용유학에 나섰을 때 경성의 신문들은 최승희가 16세라고 보도했었다. 그러나 이를 14세로 밝힌 살플레옐 팜플렛이 오류를 범한 것은 아니다. 당시 최승희의 만나이가 14(+4개월)이었기 때문이다.

 

14세라는 나이를 밝힌 것은 최승희의 천재성을 암시하려는 의도였겠지만, 그와 함께 최승희를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의 조각작품 <14세의 어린 무희(La Petite Danseuse de Quatorze Ans, 1880)>와 연관시키려는 시도였을 수도 있다.

 

회화에서도 무용수를 자주 소재로 삼았던 드가는 1881년 제6회 인상파 전시회에 <14세의 어린 무희>를 출품했는데 평가는 좋지 않았고 아즈텍 원주민이냐는 인종차별적 비난까지 받았다. 그러나 밀랍으로 만들어 인체 질감이 생생하고, 진짜 무용복을 입히고 댕기까지 새틴으로 묶어주어 화제가 되었던 이 작품의 모델은 벨기에 출신의 무용지망생 마리 반 고템(Marie van Goethem)이었고, 드가의 모델이 되었을 때 그녀의 나이가 14세였다.

 

반세기 동안 화제를 뿌린 후 <14세의 어린 무희>는 마침내 1930년에 오르세 미술관에 영구 소장되었다. 최승희의 파리 데뷔 8년 전이. 동양에서 온 새로운 무용가가 ‘14세에 무용을 시작한 무희로 소개되자 드가에 대한 기억이 생생한 파리 시민들은 <14세의 어린 무희>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드가의 <14세의 어린 무용수>를 생각하면서 공연에 왔던 파리 시민들은 깜짝 놀랐을 것이다. 드가의 모델 마리 반 고템과는 달리 한국 무용가 최승희는 빼어난 미인이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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