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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익삼씨의 조선내 연고지를 추정하기 위해서는 매장인허증에 기록된 불완전한 주소에 의존해야 했는데, 이 주소에서 어떤 부분이 정확하고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는지 판단할 수 없었다. 따라서 부정확한 주소에서 어떻게든 믿을 수 있는 부분을 구별해 내는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필자는 우선 ----등의 행정단위를 모두 무시하고 지명을 나타내는 고유명사만 조사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 중청(中淸)’춘원(春元),’ ‘연북(連北)’선삼(先三)’이라는 이름만 남게 되었다. 또 초서체로 흘려 쓴 글씨 때문에 춘원과 비슷해 보이는 춘육(春六)’연북과 유사하게 보이는 연지(連地)’도 조사에 포함시켰다.

 

이 여섯 개의 지명을 <신구대조 조선전도 부군면리동 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1916, 越智唯七編纂, 중앙시장 발행)>에서 찾아봤다. 이 보고서는 1914년 일제가 조선의 행정구역을 개편한 결과를 정리한 것으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조선에서 사용된 행정구역 이름을 망라하고 있었다. 이 보고서는 본문만 1096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었지만, 1915년에 사망한 남익삼씨의 주소를 확인하기에 시기적으로 적절한 문헌이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20세기 초의 조선전도에 중청연북선삼이라는 지역 명칭은 없었다. ‘연지춘육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춘원(春元)’이라는 이름은 추적이 가능했다.

 

이 보고서에도 춘원이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1914년 이후의 통영군(統營郡)이 과거의 용남군(龍南郡)과 거제군(巨濟郡)을 통합한 지역임을 알 수 있었다. 고성-통영 지역의 행정구역 변천사가 다소 복잡했지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의 고성과 통영지역은 (1) 삼한 시대 이전에는 진국(辰國), 삼한 시대에는 변한에 속했던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가야시대에는 소가야(小伽倻) 소재지였다. (2) 남북국 시대 고자군(古資郡)으로 불리던 이 지역은 신라 경덕왕(재위 742-765) 때에 고성군(固城郡)으로 개칭됐고, 757년 강주(康州=지금의 진주)에 병합했다. (3) 1016(고려 현종9) 이 지역은 거제현(巨濟縣)으로 이관되었지만, (4) 1275(고려 충렬왕 2)에 남해현(南海縣)으로 이속되었다가 1308(충렬왕 복위10) 거제현으로 되돌려졌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5) 1604(선조 37) 이 지역에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되었는데 당시 이름은 거제현 두룡포(頭龍浦)였다. (6) 1677(숙종 3) 두룡포가 고성현(固城縣)에 이속되면서 춘원면(春元面)으로 개칭되었다. (7) 1869년 고성현 춘원면에서 호적분규사건이 일어났고, 조선 조정은 이에 대한 사후책으로 1870년 고성현을 고성부로 승격했다. (8) 1880년 고성부는 고성현으로 환원되었다가, 1884년 재차 고성부로 승격되었다.

 

(9) 1895(고종32) 춘원면 소재 삼도수군통제영이 폐지되었고, 고성부는 고성군으로 개칭되었다. (10) 1900년 통제영이 소재했던 지역이 고성군에서 독립하여 따로 진남군(鎭南郡)이 되었다. (11) 1909년 진남군은 용남군(龍南郡)으로 개칭됐다. (12)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용남군은 거제군과 함께 통영군으로 병합됐다.

 

통영군(1914)”에 병합된 용남군(1909-1914)”은 그 직전 이름이 진남군(1900-1909)”이었고, 그 전에는 약 230년 동안 고성현//군 춘원면(1677-1900)”이었던 것이다.

 

 

1915220일 사망한 남익삼씨의 매장인허증에는 그의 생년월일은 알려져 있지 않다(不詳)’면서도, 그의 사망시 나이가 37세라고 했다. 이를 역산하면 남익삼씨가 태어난 연도는 1870년대 말인데, 그 당시 통영의 이름은 고성부 춘원면이었다.

 

남익삼씨가 일본에 살면서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을 받았다면, ‘경상()도 고성부 춘원면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는 춘원에서 태어났고 첫 20년을 거기서 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20대 후반에 춘원진남으로, 30대 초반에는 다시 용남으로 바뀌었고, 조선을 떠나 일본 효고현에서 고베수도공사에 투입되었을 즈음 다시 통영이 되었지만, 지속적으로 바뀌는 고향의 공식 명칭에 그가 얼마나 친숙했을지는 의문이다. (2022/8/29,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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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시립도서관이 풍부한 향토자료를 소장하고 있었지만,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희생자들의 연고를 찾기 위해서는 그 대부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일본의 신문들이 이미 윤길문(尹吉文), 오이근(吳伊根)씨의 연고지가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면임을 밝혀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일은 고성 내에서 그들의 구체적인 연고지를 문헌이나 증언으로 확인하면 되고, 혹시 가족이나 친족 등의 연고자를 찾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강릉 조사에서는 경주김씨 수은공파 족보를 통해 김병순(金炳順)씨의 연고지를 확인할 수 있었으므로, 고성에서도 윤길문, 오이근씨의 족보 기록을 찾는 것이 가장 우선적인 관심사였다.

 

그러나 통영 조사는 사정이 달랐다. 일본에는 남익삼씨가 통영 출신임을 보여주는 기록이 없었다. 필자는 남익삼씨의 매장인허증에 나타난 불완전한 조선 주소를 바탕으로 그가 통영 출신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었지만, 그 추측은 문헌이나 증언으로 뒷받침되어야 했다.

 

 

남익삼씨는 1915년 고베수도공사 중에 터널 낙반사고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을 매장하기 위해 니시타니(西谷) 촌사무소에서 발행한 매장인허증에 그의 조선 주소가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주소는 초서체 한자로 쓰였기 때문에 읽기 쉽지 않았고, 간신히 읽어낸 주소도 당시의 행정구역과 일치하지 않았다.

 

매장인허증에 기록된 남익삼씨의 주소를 읽히는 대로 옮기면 조선 중청도 춘원우 연북면 선삼촌(朝鮮 中淸道 春元右 連北面 先三村)”이다. 그러나 이 주소에는 문제가 많았다.

 

우선 당시 조선에는 중청도(中淸道)’라는 행정구역이 없었다. 가장 근접한 것이 충청도(忠淸道)’이겠으나 이 역시 충청남도이거나 충청북도로 나누어 써야했다. 따라서 이 주소는 당시의 조선 행정구역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이 누군가 불러준 대로 받아썼던 것으로 보인다.

 

 

춘원우(春元右)’라는 기록도 문제다. ‘()’라는 행정단위는 조선에 없었다. 행정단위의 순서로 보면 ()’ 다음에는 ()’이 나와야 하는 자리이기는 하다. 또 춘원다음에 연북이 나왔기 때문에, ‘춘원우춘원군으로 읽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1914년 일제의 의해 이루어진 행정구역 개편 전후를 모두 살펴도, 충청남도와 충청북도에는 물론 조선 전역에 춘원군이라는 지명은 없었다.

 

춘원우다음의 연북면()’선삼촌()’도 마찬가지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의 전과 후를 통틀어 전국 13도의 모든 행정구역 명칭을 조사해도 연북면선삼촌혹은 선삼리라는 곳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 역시 잘못된 표기임에 틀림없었다.

 

, 남익삼씨의 조선 주소가 엉터리였다는 것인데, 이런 일이 왜 생겼는지 궁금했다. 매장인허증에 따르면 사망 당시 37세였던 남익삼씨의 정식 고용 기록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식 취업 자료가 있었다면 매장인허증에도 정확한 주소와 생년월일이 기록되었을 것이다.

 

 

1910년대 초반에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들 중에는 정식 취업 절차를 따라 이주한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일용직이나 막노동 일자리를 찾아간 사람들은 대개 사전 고용 절차 없이 무작정 도항했거나 밀항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일본에 도착해 철도나 하천 공사, 석탄과 철광석 등의 탄광에서 막노동 일자리를 찾곤 했다. 그럴 경우 고용 기록은 물론 신상 기록조차 작성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수도공사에 투입됐던 남익삼씨도 그런 경우였을 것이다. 그를 비공식적으로 고용한 기업은 물론 그가 거주했던 지역의 말단 행정기관에도 남익삼씨의 신상 정보는 구비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남익삼씨가 사망하고 그의 매장인허증을 발행해야 했을 때 촌사무소는 조선인 동료들의 전언에 의존했을 것이고, 동료들이 남익삼씨의 고향을 잘 몰랐다면 그의 주소를 제대로 기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조선의 행정구역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을 촌사무소의 서기가 이를 바로잡을 가능성도 없었을 것이다. 매장인허증의 남익삼씨 주소가 정확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그런 사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2022/8/29,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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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820日午後、固城到着した約束時間午後3だったが姜旭千先生ももう時間がかかった韓昌植先輩もまだ日課えていないとった

 

崔承喜(チェ·スンヒ)先生全羅南道羅州公演可能性打診するために広範囲南道取材中だったがこの日約束るため光州-統営固城バスターミナルに到着してみたら3時半だったしかし姜旭千先生事情により6時頃到着する予定だとらせてきたし韓昌植先輩5までは時間ることがしかったため2時間余裕時間つことになった

 

 

固城バスターミナルに到着したりの時間固城市立図書館資料調査めた固城るたびに図書館ぎてすぐに邑内中心街進入したりもした韓昌植先輩がいつも先頭ってけてくれたので図書館調査にあまりげなかった

 

しかし同日固城図書館郷土資料ながらこれまでえが間違っていたことがかったこの図書館はかなりの多様郷土資料所蔵していたまず『固城郡誌2015)』があった1ページ前後3構成されたこの郡誌先史時代以来固城のすべてを記録としてしていた固城沿革歴史叙述した1固城文化芸術および各村由来叙述した3非常必要だった

 

 

『固城郡誌えて『固城史料集にあったこれも3になっているが固城する歴史的文献集成した。『固城史料集1(2008)各種歴史書地理誌掲載された古城する記録をすべてめている渉猟した史書には<三国志><後漢書><日本書紀><三国史記><三国遺事><高麗史><高麗史節要><備邊司謄錄>などが網羅され地理誌にも<三国史記地理志><慶尚道地理志><高麗史地理志><世宗實錄地理志><慶尚道續纂地理志><新増東國輿地勝覽><東國輿地誌><輿地図書><慶尙道邑誌><大東地志><嶺南邑誌><嶠南誌>などが動員された

 

<固城史料集2(2010)>朝鮮王朝実録固城するての記録抜粋編集しただがその面数ページをえた<固城史料集3(2012)>1930年代独自編纂された邑誌鉄城誌(1930)『固城(1934)翻訳して掲載したがこのつの邑誌1ページをえるほど膨大だった時期邑誌2つも編纂されたのも異例だがこれらの邑誌日帝当局ではなく民間編纂したということも特異

 

 

<固城郡誌><固城史料集>シリーズだけでもかなりの資料だがそのにも固城文化院発刊した資料さらにあった<固城郷土地名社><固城名辭録><固城文化遺跡誌><固城先史石語録>などがそれだ

 

また固城郡編纂した<固城:写真地元固城のあののその姿>という写真集もいたがこのには歴史的固城んだ写真網羅して収録してその場所現在姿写真とペアをすように配置した立派資料集だった

 

そのにも固城のいくつかの地域散在した先史時代遺跡する資料集もあり伽倻新羅高麗朝鮮時代られた各種遺物遺跡各級文化財指定されたものを別途めて写真とともに説明えた親切資料集出版されていた

 

 

まで韓国日本米国欧州くの都市たちをって取材してきたが地元歴史文化についており固城のように膨大資料集具備しておいたはなかったようだ

 

固城する多様みのある資料沢山具備されているというのは研究者いことかしかないしかし<宝塚朝鮮人追悼碑>犠牲者尹吉文(ユン·ギルムン)吳伊根(·イグン)縁故すのにはどんな資料がどのようにとなるかまだからない

 

本格的調査まりこの資料をせんさくしてみればえてくるだろう(2022/8/24趙正熙(チョ·チョン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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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820日午後固城(コソン)到着した2次調査まりだった1回目調査訪問までわせれば5回目訪問だったが今回訪問目的固城-統営調査計画すことにしたまず1次調査積極的協力してくださった<固城放送局>韓昌植(ハン·チャンシク)先輩って調査再開議論することにした

 

この会合には文化企画者であり民芸総事務総長姜旭千(カン·ウクチョン)先生参加した姜旭千先生18日江原道訪問19ソウル延南洞かれた<小船たちの>コンサートと徹夜打げまで参加しても翌日固城約束れたすごい動線だしくべき情熱

 

同日約束2月前われたものだった統営トンヨン4回目訪問した6月末韓昌植先輩とダチの夕食会めてったダチとは一定のメニューがまっておらず時期った海鮮中心につまみを放題提供する方式した

 

これまで統営頻繁訪問したがたいてい単独訪問だったためダチをしむことができなかったダチは一人飯/一人酒1人客には提供されなかったおそらく経済性すなわち元手けていないためだろうたまにダチというメニューが広報されるがあえて1人顧客敬遠する風土らうにはならなかったそして統営にはのおいしい海産物食堂かったためでもある

 

そうしているうちについに韓昌植先輩とダチのごちそうをかちいながら時間ごしたのでとしては感激的時間いなかったそれでsns自慢をしたのだがすると姜旭千先生統営ダチ会合をもう一度しようとって820くから日付めた

 

この約束られるかは疑問だった8にはもがしいか休暇シーズンだったからだ随時文化行事日程消化しなければならない姜旭千先生事前計画もなく勝手にあちこち取材2月後のダチの約束可能性希薄えた

 

 

しかしたちは2ともこの日付記憶20固城まった韓昌植先輩もややった様子だった。 姜旭千先生合流するともっとしい姿だった韓先輩きな姿ると統営ダチのまりを頻繁に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もしたかにらすということがただそういうことではないだろうかきな人同士きなことをよく一緒にするのが人生だろう

 

とにかくたち3固城すぐ統営移動港南洞船艙街でタチねた金曜日夕方ほとんどすべての満員だったので3のドアをいて拒絶4番目でテーブルをったるやいなや新鮮海藻類甲殻類刺身がテーブルにがりめたえのあるたちはをすぐにそのしいんできたビールと焼酎めたバケツにれられたままテーブルのかれたバケツがいたらすぐにしくたされたさすがにダチらしい

 

 

港南洞タチ路地トッケビ(=)路地ばれたが路地のあちこちにそのようながついたアーチ型装飾物てられている漁師たちが一日労働苦労していだお一晩中全部はたいてべる居酒屋とおさんたちのためにけられた名前だというはそのような慣行えたが酒量えてぎるしかないトッケビ路地雰囲気もそのままっているようだ

 

々としくなるおつまみのたちはしながらまたした韓昌植先輩統営-固城面白姜旭千先生民芸総事務総長適応期興味深かった宝塚朝鮮人追悼碑犠牲者計画簡単らかにした

 

韓昌植先輩固城調査担当して尹吉文ユン·ギルムン)、呉二根·イグン縁故して 統営調査して南益三(ナム·イクサム)のゆかりをらかにします。」

 

これがすべてだったこの計画簡単で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議論するにはダチがとてもかったしいおつまみのために酒気がすぐがることがらかだった한창식先輩そうしようけたしい計画^^てられたこれから実行せばいい。 (2022/8/23趙正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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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헤야 노아라>는 최승희 선생의 최초이자 최고 히트 작품이었다. 조선 노인을 희화화한 이시이 바쿠의 작품 <캐리커처(1926)>를 불쾌하게 여겨 <우리의 캐리커처(1931)>를 따로 안무했던 것이 발단이었다. 이 작품은 조선에서도 인기를 끌었지만, 제목을 <에헤야 노아라>로 바꾸어 1933520일 도쿄 일본청년관에서 일본 초연된 이후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에헤야 노아라>는 최승희가 <나의 자서전(1936)>에서 부친으로부터 배운 굿거리 춤이라고 서술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부친 최준현의 <굿거리 춤>과 스승의 <캐리커처>를 비판하기 위해 안무한 <우리의 캐리커처>가 합쳐진 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에헤야 노아라>는 곧 일본에서 유명해졌고, 최승희 조선무용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시이 바쿠 무용단에서 독립하기 전인 19331022일 최승희는 <이시이바쿠 무용단 가을공연>에서도 <에헤야 노아라>를 상연했고, 1934920일 도쿄에서 개최한 첫 개인 발표회 <1회 도쿄공연>에서도 상연됐다. 19351025-27일의 간사이(오사카, 고베, 오카야마) 공연과 19351119일의 다카라즈카(寶塚) 공연, 1129일의 후쿠이(福井) 공연에서도 상연됐다.

 

이 작품의 상연은 일본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193673일의 타이완 타이페이 공연, 1937329일의 숙명여전 건립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경성 부민관 공연, 1938116일의 미국 뉴욕 길드극장 공연에서도 <에헤야 노아라>가 상연됐다.

 

그러나 의아한 점이 있었다. <에헤야 노아라>1937년까지는 활발하게 공연되었지만 세계 순회공연이 시작되자 그의 공연 레퍼토리에서 거의 사라진 것이다. 이후 이 작품이 다시 공연된 것은 최승희가 자신의 무용 경력을 총결산하는 1942126일의 도쿄 독무공연에서였다. 그렇게 인기 있는 대표작품을 어째서 더 이상 공연하지 않았을까?

 

 

사실 <에헤야 노아라>의 공연이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세계 순회공연을 준비하면서 최승희는 이 작품을 다시 한 번 개량해 이름을 바꾸었는데, 새 제목은 <신노심불로(身老心不老)>였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는 뜻이다.

 

<신노심불로>가 초연된 것은 193727일의 오사카 공연이었다. 이어서 211일 후쿠이 공연, 216일 교토 공연, 227일 나고야 공연 등에서도 시험 삼아 공연되었고, 331일에는 이왕직 본청이 주최한 경성의 윤황후 위로 공연에서도 상연되었다.

 

<신노심불로>는 해외에서 본격적으로 상연되었다. 19381월의 샌프란시스코 공연과 2월의 LA 공연에서는 <신노심불로>가 발표되지 않았지만, 116일 뉴욕 길드극장 공연, 1939131일의 파리 살플레옐 극장 공연, 26일 브뤼셀의 팔레드보자르 극장 공연, 42일 독일 뒤스부르크 공연, 417일 네덜란드 덴하크 공연, 510일 브뤼셀 2차 공연, 615일 파리 샤이오 극장 공연, 627일 덴하크 쿠어짤 극장 공연에서 잇달아 공연되었다.

 

 

이후 미국 공연과 남미 공연에서도 <신노심불로>는 빠지지 않는 레퍼토리였고, 마침내 세계 순회공연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온 후 처음 가졌던 1941222일의 도쿄 가부키좌 귀조공연에서도 상연되었다.

 

<신노심불로>의 주인공은 <우리의 캐리커쳐><에헤야 노아라>에서처럼 흰 조선 의상을 입은 조선 노인이다. 파리 살플레옐 공연 프로그램에는 <신노심불로>한국 노인이 앉아 담배를 피우며 책을 읽다가 갑자기 청년처럼 춤추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내 야위고 힘없는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실망하여 다시 노인으로 되돌아온다고 해설되어 있다. 이 짧은 서술로 미루어 볼 때 <신노심불로><우리의 캐리커처><에헤야 노아라>로 이어졌던 우스꽝스런 몸짓의 무용에다가 새로운 스토리를 가미해 구성력을 높인 차원 높은 작품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캐리커처(1931)><에헤야 노아라(1933)>, <신노심불로(1937)>를 발전의 연속선에 놓인 동일한 작품으로 본다면, 이는 최승희가 무용유학을 끝내고 공연 활동을 시작한 이래 10년 이상 쉬지 않고 지속적으로 공연된 유일한 레퍼토리였던 셈이다. (2022/8/28,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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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이 바쿠의 <캐리커처>1926년에 창작된 직후 제목을 <실념>으로 바꾸었고, 적어도 1940년까지는 계속 공연되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스승의 작품 <캐리커처>에 불만을 가졌던 최승희는 19315<우리의 캐리커처>를 창작해 경성에서 발표했는데, 오빠 최승일의 서술에 따르면 조선 공연에서 이 작품에 대한 호응이 높았다고 한다.

 

19333, 최승희는 다시 도쿄로 건너가 이시이 바쿠 문하에 들어갔고, 불과 2달 만에 무대 출연의 기회가 왔다. 520일의 <근대여류무용가대회>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원래 이시이무용단을 대표해 이시이 미도리가 참가할 예정이었으나, 그가 급성 늑막염 진단을 받는 바람에, 이시이 바쿠는 최승희를 대타로 지명해 대회에 참가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발표할 작품이었다. 대회를 불과 수 일 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새 작품을 안무할 시간은 없었다. 최승희는 이미 창작한 작품 중에서 한 곡을 선정해야 했고, 이때는 이시이 바쿠 문하생 신분이었으므로 스승과 작품 선정을 의논해야 했을 것이다.

 

이시이 바쿠는 최승희의 <우리의 캐리커처>의 작품성이 뛰어남을 알아보았고, 이를 출품작품으로 선정하면서, 다만 그 제목을 변경하도록 권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자전적 에세이집 <나의 얼굴(1940, 33)>에서 이시이 바쿠는 이때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 후 3년이 지나 나의 권고로 도쿄에서 제1회 발표를 하게 되었다. 승희의 무용에 특징을 주자는 의미에서, 그 때 빅터(=레코드사)의 용건으로 도쿄에 와 있던 조선무용의 대가 한(성준)씨 밑에서 조선무용의 수법을 속성으로 연습시켰고, 본인이 싫다는 것을 내가 억지로 정리해서, 제목도 <에헤야 노아라>로 명명해 상연한 것인데 예상치 못한 큰 평판이 났고, 그 후 스스로도 자주 조선풍의 무용을 상연하게 되었다. 정말로 본인에게도 경사스러운 일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이시이 바쿠의 이 회상에는 몇 가지 착오가 있다. <에헤야 노아라>를 발표한 <근대여류무용가대회>1933520일에 열렸으므로, 이는 최승희가 한성준 선생에게서 조선무용을 배우기(19346) 1년쯤 전이고, 최승희의 제1회 발표회(19349)보다도 1년반 전의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캐리커처>의 제목을 <에헤야 노아라>로 바꾸도록 권고한 것은 이시이 바쿠였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최승희의 작품 제목이 자신의 <캐리커처(1926)>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당시 스승 이시이 바쿠와 제자 최승희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갔을 것이다.

 

<캐리커처>는 이미 제목을 <실념>으로 바꿨지만, 기억하는 관객이나 평론가도 있을지 모르니, 모작 시비를 피하기 위해서 네 <우리의 캐리커처>의 제목을 바꾸는 것이 어떠냐?”

그럼 조선에서 흥을 돋우는 감탄사로 쓰이는 <에헤야 노아라>라고 할까요?”

그게 좋겠다. 앞으로 이 조선무용 제목은 <에헤야 노아라>로 하도록 해라.”

 

 

일본인 이시이 바쿠가 에헤야 노아라라는 조선식 감탄사를 알고 있었을 리 없다. 따라서 이 제목은 최승희가 제안했던 것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엄격한 도제식의 스승-제자 사이에서 최종 결정은 스승이 내린 것으로 기록되는 법이다. 이시이 바쿠가 <에헤야 노아라>의 제목을 자신이 결정한 것이라고 서술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시이 바쿠의 <캐리커처(1926)>와 최승희의 <우리의 캐리커처(1931)>은 둘 다 제목이 바뀌었다. <캐리커처><실념(1926)>으로, <우리의 캐리커처><에헤야 노아라(1933)>로 바뀐 것이다.

 

이후 이시이 바쿠의 <실념>은 조선 의상 대신 일본식 의상을 사용하면서도 노인의 모습을 희화화한 작품으로 계속 상연되었다. 최승희의 <에헤야 노아라>도 조선 남성을 주인공으로 하되, 반주 장단을 중모리에서 굿거리로 바꾸어 더 흥겹고 유쾌한 작품으로 바꾸었는데, 덕분에 조선과 일본, 유럽과 미주에서 공연되면서 큰 인기를 얻었다. (2022/8/28,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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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캐리커처(1931)>는 이시이 바쿠의 <캐리커처(カリカチュア, 1926)>에 불쾌감을 느꼈던 최승희가 이를 수정하고 보완하려는 의도로 창작한 작품이었고, 이것이 후일 <에헤야 노아라(1933)>로 개칭되었던 것이라고 필자는 추론했다.

 

이 추론은 <신여성(19345월호)>과 최승일의 <최승희 자서전(1937)>, 그리고 다카시마 유자부로의 평전 <최승희(1981[1959])> 등의 문헌으로 뒷받침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시이 바쿠의 <캐리커처>가 공연에서 발표된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1926년 이래 1940년대에 이르는 이시이 무용단의 숱한 공연 프로그램을 조사했으나, 그 모든 프로그램에 이시이 바쿠의 독무 <캐리커처>는 실려 있지 않았다. 이는 <캐리커처>가 창작은 되었으나 발표되지 않았거나, 혹은 다른 이름으로 발표되었다는 뜻이다.

 

 

<이시이바쿠 팜플렛(1, 1927)>에 실린 이시이 바쿠의 무용작품 목록에도 <캐리커처>라는 작품은 없었다. 다만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내용으로 창작된 <실념(失念)>이 있을 뿐이다.

 

<캐리커처>19263월 이시이 바쿠가 처음 경성을 방문했을 때 창작되었다. 이 경성 공연을 위해 이시이 바쿠는 그의 처제 이시이 코나미와 함께 경성역(=지금의 서울역)에 도착, 여관과 요정이 즐비하던 수정 2번지(=지금의 중구 필동)의 하라카네(原金) 여관에 숙소를 정했고, 경성일보 사옥(=지금의 태평로1가의 프레스센터)에서 인터뷰를 하고, 하세카와초(=지금의 소공동)의 경성공회당에서 321일부터 23일까지 공연을 열었다.

 

 

이때 이시이 바쿠는 경성역 앞을 배회하는 한 조선 노인의 모습과 그의 넋이 나간 듯한 표정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공연을 마치고 도쿄의 무사시사카이(武藏境)로 돌아가, 이 조선 노인을 희화화한 작품을 안무했다. 강이향(1993, 52)은 당시 상황을 이같이 서술했다.

 

(=이시이 바쿠)가 서울에서 맨 처음 본 것은 흰옷의 조선인들이 밧줄에 묶인 채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는 모습이었다. 그야말로 수인들의 무리였다. 그는 그곳에서 빼앗는 것들의 뿌리는 하나라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고 한다.

 

그러나 반드시 어두운 인상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 속에서도 활기찬 사람의 모습, 흰옷을 입은 노인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거리의 그늘 밑에 앉아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한가함을 즐기는 모습. 그는 그 모습 속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기도 했다.

 

그는 동경으로 돌아가자마자 그곳에서 본 노인의 인상을 테마로 하여 <실념(失念)>이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푸근한 사랑과 잔잔한 웃음이 흐르는 가운데 조선 남자의 백의를 상징하는 의상으로 춤추고 있는 그의 무대 사진은 지금도 남아있다.”

 

강이향의 서술과는 달리 이 작품이 노인의 푸근한 사랑과 잔잔한 웃음을 표현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흰옷 입은 조선 노인의 정신 나간 듯한 멍한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 이시이 바쿠는 조선 노인을 풍자적으로 희화화한 것인데, 그래서 그 제목을 <캐리커처(=희화, 풍자)>라고 붙였다가 나중에 <실념(失念=망각, 멍함)>으로 바꿨다. 최승일과 최승희가 이 작품을 불쾌하게 여겼던 것도 바로 이런 희화화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시이 바쿠의 <실념>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코믹한 작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공연에서 그다지 많은 인기를 누리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일부 남겨진 공연 사진을 보면 일본에서 <실념>을 공연할 때에는 조선 의상이 아니라 일본식 의상이 사용되기도 했었다.

 

예컨대 이시이 무용단이 19401215일 도쿄의 칸다(神田) 소재 공립강당에서 개최한 보호아동의 밤공연의 프로그램에, <실념>10개 작품 중 4번째 작품으로 실려 있었다.

 

프로그램의 작품 설명 난에는 자기 자신의 생활의 캐리커처라고만 간단히 서술되어 있어, <실념>이 조선에서 만난 조선인을 소재로 창작되었다는 연원도 밝히지 않았는데, 이로 보아 이 작품의 공연 의상도 조선식 한복이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2022/8/27,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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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헤야 노아라>의 초연이 1931년 경성에서 이뤄졌던 것은 사실일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 최승희 선생의 1931년 공연을 모두 찾아 봤다. 1931년에 이뤄진 공연은 모두 6회였는데, 그 각 공연에서 초연된 신작 무용작품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110-12일 단성사에서 열렸던 <3회 발표회>의 신작: <그들의 로맨스>, <향토무용, 농촌소녀>, <광상곡>, <그들의 행진> 4개 작품.

(2) 27일 경성공회당에서 개최된 <2회 무용 발표회>의 신작: <방랑인의 설움>.

(3) 193138일 예산극장에서 신명유치원 후원을 위한 예산공연의 신작: <가비(歌悲)>, <어린 용자(勇者)>, <유희>, <흙을 그리워하는 무리들> 4개 작품.

(4) 51-3일 단성사에서 열렸던 <3회 신작무용 발표회>의 신작: <어린이무용, 나는?>, <우리의 캐리커처>, <찌고이넬와이젠>, <남양의 밤>, <비가(悲歌)>, <봄을 타고 가는 시악씨들>, <, 약동>, <황야에 서서>, <어린이무용, 앞으로 앞으로>, <겁내지 말자> 10개 작품.

(5) 91-3일 단성사에서 열린 <신작무용 발표회>의 신작: <세계의 노래>, <자유인의 춤>, <토인 애사>, <미래는 청년의 것이다>, <인조인간>, <영혼의 절규>, <철과같은 사랑>, <고난의 길>, <이국의 밤>, <폭풍우>, <십자가>, <건설자> 12개 작품.

(6) 1023일 경성공회당에서 열렸던 양현여학교 후원공연의 신작: <번외, 향토무용>.

 

이상과 같이 1931년 최승희 선생이 새로 창작한 무용작품은 32개였다. 여기에 <에헤야 노아라>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에헤야 노아라>를 다른 제목으로 발표했다는 뜻이다. 위의 32개 작품 중 어떤 것이 <에헤야 노아라>였을까?

 

 

<에헤야 노아라>조선무용이자 독무였으므로, ‘현대무용중무군무를 제외하면 단 1개의 작품이 남는다. 그것은 193151-3일 단성사 공연에서 최승희의 독무로 초연되었던 <우리의 캐리커처>이다. 이 작품은 어떤 작품이었을까?

 

최승일은 <최승희 자서전(1937, 56-57)>에 실린 누이에게 주는 편지에서 최승희가 <우리의 캐리커처>라는 작품을 창작할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 언제인가 나와 너는 석정막씨의 <캐리커처>라는 제목으로 조선 옷을 입고 추는 춤을 보고서 대단히 불유쾌하게 생각하여, 곧 이기세(李基世)씨와 의논하야 가야금 산조 진양 중모리에다가 안무하야 <우리들의 캐리커처>라는 제목으로 너로서는 처음으로 <조선리듬>에 춤을 추지 아니하였느냐. 그때 일반의 평판도 좋았지마는 나는 그때 너는 조선의 딸이다하고 마음속으로 기뻐하였다.”

 

이시이 바쿠는 19263월 첫 조선공연을 위해 경성을 방문했을 때 경성역에서 보았던 조선 노인의 모습을 소재로 <캐리커처>라는 작품을 안무했다. 이 작품에서 이시이 바쿠는 한복 두루마기 의상으로 춤을 추었는데, 최승일과 최승희는 그것을 불쾌하게 생각할 만큼 조선인의 정서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최승희는 조선 남성의 의상은 유지하되 음악을 진양중모리 리듬의 가야금산조로 바꾸고, 무용 동작을 모두 새롭게 안무해서 제목을 <우리의 캐리커처>라고 한 것이다. 이는 <(이시이 바쿠가 본 조선의> 캐리커처>가 아니라 <우리의 캐리커처>라는 뜻이다.

 

갓을 쓴 두루마기 의상의 중년 남성의 춤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캐리커처><에헤야 노아라>와 같다. 다만 <에헤야 노아라>의 반주가 굿거리장단이었지만, <우리의 캐리커처>의 음악은 진양중모리 장단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우리의 캐리커처><에헤야 노아라>로 개명하면서 장단을 더 흥겨운 굿거리장단으로 바꾸었을 가능성이 있다.

 

, 193151일 서울 단성사에 초연된 <우리의 캐리커처><에헤야 노아라>의 원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2022/8/27,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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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선생의 첫 조선무용 작품이 <에헤야 노아라(1933)>가 아니라 <영산무(1930)>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많은 저자들이 1930년 경성에서 초연된 <영산무(1930)>의 존재를 알면서도 <에헤야 노아라>를 첫 조선무용 작품이라고 서술하곤 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일본 문헌을 답습한 때문일 것이다.

 

일본에서는 <영산무>보다 <에헤야 노아라>보다 먼저 발표됐던 것은 사실이다. <영산무>1934920일 일본청년관에서 최승희 선생의 <1회 무용발표회>에서 처음 공연되었던 반면, <에헤야 노아라>는 그보다 약 1년반 전인 1933520<레이조카이(令女界)> 주최의 <근대여류무용대회>에서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1933년 일본청년관에서 발표된 것이 <에헤야 노아라>의 초연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이 작품은 1931년 조선의 경성에서 초연되었음을 보여주는 문헌들이 있다.

 

먼저 조선의 여성지 <신여성(19345월호)>이다. 이 기사는 <에헤야 노아라>의 창작연대가 1931년이라고 서술했다. 필자는 처음에 이 서술에 의문을 가졌다. <신여성> 기사는 작품 제목을 <에헤노아라>라고 잘못 기록한 바 있다. 또 최승희 선생의 <에헤야 노아라> 공연 사진이 “193311월 도쿄 히비야 공회당에서 재발표할 때 촬영한 것이라고 밝혔는데, 실은 19331022일의 <이시이바쿠 무용단 가을공연>이었다. 날짜를 잘못 서술한 것이다.

 

<신여성> 기사의 이같은 오류들 때문에 필자는 <에헤야 노아라>의 창작연대가 1931년이라는 서술도 오류일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이 기사의 서술대로라면 <에헤야 노아라>의 창작은 <근대여류무용대회(1933520)>보다 약 2년이나 앞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사의 서술을 뒷받침하는 다른 문헌이 있다. 다카시마 유자부로(高嶋雄三郞)의 평전 <최승희(1981[1959])>이다. 이 책의 118쪽에서 저자는 <에헤야 노아라>1931년 서울에서 초연되었다고 기록했다. <에헤야 노아라>의 창작연대가 1931년이라고 서술한 <신여성>의 기사와 일치된 주장이다.

 

그러나 다카시마 유자부로의 서술에도 문제가 있었다. 같은 책 41-49쪽에서 저자는 <에헤야 노아라>1933년 작품이며, 여성잡지 <레이조카이(令女界)>가 일본청년관에서 주최한 <근대여류무용대회(1933520)>에서 초연되었다고 서술했다. 같은 책에서 같은 작품의 초연시기와 장소에 대해 전혀 다른 서술을 제공한 까닭이 무엇일까?

 

언론인(=신문기자)이자 안막-최승희 부부와 개인적 친분이 있었던 다카시마 유자부로가 이같은 사실을 서술할 때 추측이나 자의적 판단을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저자가 같은 사실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언급을 기록했을 때에는, 그 각각을 뒷받침하는 문헌, 혹은 증언 자료가 존재했었음에 틀림없다.

 

 

필자는 다카시마 유자부로의 ‘1933년 도쿄 초연설이 다른 언론사들의 기사가 근거였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근대여류무용대회>가 끝난 후 도쿄의 신문들은 최승희의 <에헤야 노아라>가 그의 첫 조선무용 작품이며 그날 일본청년관에서 발표된 것이 초연이라고 서술했기 때문이다.

 

반면, ‘1931년 서울 초연설은 최승희의 증언을 직접 듣고 기록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1931년 최승희는 경성에서 활동했고, 재차 도쿄에 가기 전이었으므로, 일본에서 활동했던 다카시마 유자부로는, 최승희의 증언이 아니었다면, 그 사실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혹은 다카시마 유자부로가 안막에게서 들었을 수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안막과 최승희의 결혼은 193159일이므로 안막은 최승희의 <에헤야 노아라>에 대해 직접 알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어떤 면으로 보나 ‘1931년 서울 초연설의 근거는 최승희가 다카시마 유자부로에게 직접 전했거나 혹은 안막의 증언을 통해 건네졌을 가능성이 크다.

 

어느 경우이든, 다카시마 유자부로는 같은 사건에 대한 상이한 서술을 기록하면서 어떤 것이 사실에 더 부합하는지 검토하지 않은 실수를 저질렀던 것은 사실이다. (2022/8/26,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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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820일 오후, 고성에 도착했다. 한창식, 강욱천 선생과의 약속은 오후3시였는데, 나도 늦었고 강욱천 선생도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한창식 선배님도 아직 일과를 다 마치지 못했다고 하셨다.

 

나는 최승희 선생의 전남 나주 공연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광범위하게 남도 취재 중이었는데, 이날 약속을 지키기 위해 광주-통영을 거쳐 고성 버스터미널에 도착해 보니 3시반이었다. 그러나 강욱천 선생은 사정상 6시경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알려왔고 한창식 선배님도 5시까지는 시간을 내기 어려우셨기 때문에, 나는 약 2시간의 여유시간을 가지게 됐다.

 

 

고성버스터미널에 먼저 도착한 나는 남은 시간 동안에 고성시립도서관에서 자료 조사를 시작했다. 고성에 올 때마다 도서관을 지나쳐 바로 읍내 중심가로 진입하곤 했었다. 한창식 선배님이 항상 앞장서서 도움을 주셨기 때문에 도서관 조사에 그다지 열을 올리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날 고성도서관의 향토자료들을 살펴보면서 그동안 내 생각이 틀렸음을 알았다. 이 도서관은 상당한 양과 다양한 종류의 향토자료를 소장하고 있었다. 우선 <고성군지(2015)>가 있었다. 1천쪽 내외의 책 3권으로 구성된 이 군지는 선사시대 이래 고성의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었다. 특히 고성의 연혁과 역사를 서술한 1권과 고성의 문화와 예술 및 각 마을의 유래를 서술한 3권은 매우 필요한 책이었다.

 

 

<고성군지>에 더하여 <고성사료집>이 따로 있었다. 이 역시 3권으로 되어 있는데, 고성에 관한 역사적 문헌들을 집성한 책이다. <고성사료집 1(2008)>은 각종 사서와 지리지에 실린 고성에 관한 기록을 모두 모아놓았다. 섭렵한 사서에는 <삼국지>, <후한서>, <일본서기>,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고려사절요>, <비변사등록> 등이 망라되었고, 지리지에도 <삼국사기지리지>, <경상도지리지>, <고려사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속찬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지>, <여지도서>, <경상도읍지>, <대동지지>, 영남읍지>, <교남지> 등이 동원되었다.

 

<고성사료집 2(2010)>은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고성에 관한 모든 기록을 발췌, 편집한 책인데 그 면수가 1천 쪽이 넘었다. <고성사료집 3(2012)>1930년대에 독자적으로 편찬된 읍지 <철성지(1930)><고성지(1934)>를 번역해서 실었는데, 이 두 읍지도 1천 쪽이 넘을 만큼 방대했다. 비슷한 시기에 읍지가 2개나 편찬된 것도 이례적인데, 이 읍지들은 일제 당국이 아니라 민간이 편찬했다는 것도 특이한 점이다.

 

 

<고성군지><고성사료집> 시리즈만 해도 상당한 양의 자료인데, 그밖에도 고성문화원이 발간한 자료들이 더 있었다. <고성향토지명사><고성명사록>, <고성문화유적지><고성선사석어록> 등이 그것이다.

 

또 고성군이 편찬한 <고성: 사진으로 보는 내 고장 고성의 그때 그 모습>이라는 화보집도 있었는데, 이 책에는 역사적으로 고성을 담은 사진들을 망라해 수록하고, 그 장소의 현재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과 짝을 이루도록 배치한 훌륭한 자료집이었다.

 

그밖에도 고성의 여러 지역에 산재한 선사시대의 유적들에 대한 자료집도 있었고, 가야, 신라, 고려,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만들어진 각종 유물과 유적 중에서 각급 문화재로 지정된 것들을 따로 모아 사진과 함께 설명을 곁들인 친절한 자료집들도 발간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필자는 한국과 일본, 미국과 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다니며 취재해 왔지만, 자기 고장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고성처럼 방대한 자료집들을 구비해 놓은 곳은 없었던 듯싶다.

 

고성에 대한 다양하고 심도 깊은 자료들이 많이 구비되어 있다는 것은 연구자에게 좋은 일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희생자 윤길문, 오이근씨의 연고를 찾는 데에는 어떤 자료가 어떻게 도움이 될는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되어 이 자료들을 천착해 나가다 보면 길이 보일 것이다. (2022/8/24,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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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820일 오후, 고성에 도착했다. 2차 조사의 시작이었다. 1차 조사 방문까지 합치면 다섯 번째 방문이었는데, 이번 방문의 목적은 고성-통영 조사의 계획을 다시 세우는 것으로 잡았다. 우선 1차 조사에서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셨던 <고성방송국>의 한창식 선배님을 만나서 조사 재개를 의논하기로 했다.

 

이날 모임에는 문화기획자이자 민예총 사무총장 강욱천 선생도 동참했다. 강욱천 선생은 18일 강원도 방문, 19일 서울 연남동에서 열린 <조각배들의 노래> 콘서트와 밤샘 뒷풀이까지 다 참석하고도, 다음날 통용 약속에 나타났다. 대단한 동선이고, 놀랄만한 열정이다.

 

사실 이날 약속은 두 달 전에 이뤄진 것이었다. 통영을 네 번째 방문했던 6월말에 나는 한창식 선배님과 다찌 저녁상을 처음 마주했다. 다찌란 일정한 메뉴가 정해져 있지 않고, 시절에 맞는 해물 중심으로 안주를 무한 리필로 제공하는 방식을 가리켰다.

 

 

그동안 통영을 자주 방문했지만 대개 단독 방문이었으므로 다찌를 즐길 수 없었다. 다찌는 혼밥/혼술의 1인 고객에게는 제공되지 않았다. 아마도 경제성, 즉 본전이 빠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더러 다찌라는 메뉴가 홍보되지만, 굳이 1인 고객을 꺼리는 풍토를 거스를 마음은 별로 들지 않았다. 그리고 통영에는 다른 맛있는 해산물 식당들도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던 차에 마침내 한창식 선배님과 다찌 한 상을 마주하고 좋은 시간을 가졌으니 나로서는 감격적인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sns에 약간 자랑질을 했던 것인데, 그랬더니 강욱천 선생이 통영 다찌 회동을 한 번 더 하자면서 820일로 일찌감치 날짜를 잡았다.

 

이 약속이 지켜질는지 의문이 없지 않았다. 8월이면 누구나 한창 바쁘거나 휴가철이었기 때문이다. 수시로 문화행사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강욱천 선생이나, 사전계획도 없이 내키는 대로 여기저기 취재를 다니는 내가 두 달 후의 다찌 약속을 지킬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하지만 우리는 둘 다 이 날짜를 기억했고, 20일 고성에 모였다. 한창식 선배도 약간 들뜬 모습이었다. 강욱천 선생이 합류하니 더욱 즐거운 모습이었다. 한선배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통영 다찌 모임을 자주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잘 산다는 게 그냥 그런 것이 아닐까?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좋아하는 일을 자주 같이 하는 게 슬기로운 인생살이일 것이다.

 

암튼 우리 세 사람은 고성에서 만나 이내 통영으로 이동, 항남동 선창가에서 다찌집을 찾아 들어갔다. 금요일 저녁이었고, 거의 모든 집이 만원이어서 세 집 문을 두드렸다가 퇴짜를 먹었고 4번째 집에서야 테이블을 잡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신선한 해초류와 갑각류, 생선회와 구이가 테이블에 오르기 시작했다. 먹성 좋은 우리들은 접시들을 금방금방 비웠고 그럴 때마다 새로운 접시가 날라져 왔다. 맥주와 소주는 얼음을 채운 바께쓰에 담긴 채 테이블 아래 놓였다. 바께쓰가 비면 금방 새로 채워졌다. 과연 다찌답다.

 

 

항남동 다찌 골목은 도깨비 골목이라고 불렸다는데, 지금도 골목 여기저기에 그런 팻말이 달린 아치형 장식물들이 세워져 있다. 어부들이 하루의 노동으로 애써 번 돈을 밤새 다 털어먹는 선술집과 아가씨들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고 했다. 지금은 그런 관행이 사라졌지만, 주량을 넘겨 과음할 수밖에 없는 도깨비 골목의 분위기는 지금도 그대로 남은 것 같다.

 

시시각각 새로워지는 안주 위에서 우리는 이야기하며 마셨고, 마시고 또 이야기했다. 한창식 선배의 통영-고성이야기도 재밌었고, 강욱천 선생의 민예총 사무총장 적응기도 흥미로웠다. 나는 아주 취하기 전에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희생자들을 찾을 계획을 간단히 밝혔다.

 

 

한창식 선배님이 고성 조사를 맡아서 윤길문, 오이근씨의 연고를 찾아 주세요. 저는 통영을 조사해서 남익삼씨의 연고를 밝혀 보겠습니다.”

 

이게 다였다. 이날은 뭐든지 간단해야 했다. 길게 의논하기에는 다찌가 너무 좋았고, 좋은 안주 때문에 술기운이 금방 오를 것이 뻔했다. 한창식 선배님도 그러자고 하셨고, 빠르게 술잔을 비우셨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계획(^^)은 세워졌다. 이제 실행에 옮기면 된다. (2022/8/23,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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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尚南道固城統営調査再開した。『宝塚朝鮮人追悼碑記録された犠牲者韓国内縁故調査である碑文によると南益三(ナム·クサム)19151兵庫県宝塚われた神戸水道工事でトンネル落盤事故死亡尹吉文ユン·ギルムン)、呉伊根·イグン19293国鉄福知山線工事でダイナマイト爆発事故死亡した

 

 

202011開始した固城1次調査3にわたる現地調査にもかかわらずこれといった成果せなかった20215までわれた調査では固城郡庁のキム·サンミン記録研究士固城放送局のハン·チャンシク代表積極的支援があったが犠牲者縁故確認できなかった

 

固城調査暫定中断したのはほとんど同時めた江陵調査急速進展したためだった。 「宝塚朝鮮人追悼碑記録された犠牲者金炳順(キム·ビョンスン)江陵ゆかりの物語20215系図記録確認された金炳順氏系図記録発掘するには慶州金氏樹隱公派江陵支会金子正(キム·ジャジョン)金喆旭(キム·チョルウク)先生けがきかった系図には金炳順氏名前とともに居日本という記録っておりいの余地がなかった

 

 

202111月中旬、「宝塚朝鮮人追悼碑建立した日本人在日韓国人感謝牌贈呈要請する請願江陵市提出した請願者日本鄭世和(チョン·セファ)大黑澄枝(ダイコク·スミエ)先生ソウルの安海龍(アン·ヘリョン)鄭澈勳(チョン·チョルフン)先生江陵姜承昊(カン·スンホ)洪眞善(ホン·ジンソン)柳善起(·ソンギ)先生だった江陵市議会のチョン·グァンミン議員をはじめ江陵市庁のイ·ジュンハパク·ジョンシパク·インスン係長などの実務担当者協力してくださったおかげで請願れられた

 

2022326江陵市長名義感謝牌日本人学者芸術家宗教家社会活動家6在日同胞歴史家事業家2された監査牌伝達決定され実行される過程東京所在江原道本部のカン·ビョンジク本部長とムン·ミヒョン部長けが絶対的だった

 

 

宝塚朝鮮人追悼碑建立江陵感謝牌贈呈々な記録としてっている金炳順氏縁故過程結果韓国日本くのマスコミに報道された江陵月刊雑誌江陵プラス(20223月号)韓日国境時代超越したヒューマニズムという題名特集記事報道したが宝塚江陵市民いに人類愛礼儀してきた過去歴史現在過程しく報道した

 

筆者江原大学校学術誌<平和たち(PEACES)>つの都市物語:江陵宝塚という論文寄稿した江原道兵庫県交流協力公共外交視点整理したものだが姜承昊教授(江陵原州大学国際通商学)江原道沿海州農業協力事例意義という論文とペアをむことになった

 

日本では在日朝鮮学校生徒たちが宝塚朝鮮人追悼碑毎年参拝することをめたというこれまで1914-15殉難者金炳順南益三張長守氏100年間祭祀してきた西谷滿福寺では犠牲者位牌った区域にムクゲとつつじを平和庭園造成すると発表した

 

 

感謝牌った宝塚日本人在日同胞江陵答礼訪問計画中だがこれが実現すれば江原道兵庫県交流協力拡大する見通しだこのようにして江陵出身殉難者キム·ビョンスン縁故すことは成功的わり両地域未来指向的展望いてくれた

 

江陵調査成功的えられ殉難者縁故張長守氏本拠地推定さえ不可能なほど資料がなかったが尹吉文吳伊根氏故郷慶尚南道固城調査され19151死亡した南益三氏本拠地統営推定された

 

らの縁故地縁故地確認するための調査再開したのだ(2022/8/20*趙正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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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고성과 통영 조사를 재개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기록된 희생자들의 한국 내 연고를 찾는 조사이다. 비문에 따르면 남익삼(南益三)씨는 19151월 일본 효고현 다카라즈카에서 진행되었던 고베수도공사에서 터널 낙반사고로 숨졌고, 윤길문(尹吉文), 오이근(吳伊根)씨는 19293월 국철 후쿠치야마(福知山)선 공사에서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로 사망했다.

 

 

202011월에 시작했던 고성 1차 조사는 3차례 단행한 현지조사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20215월까지 진행된 조사에서는 고성군청의 김상민 기록연구사와 고성방송국의 한창식 대표의 적극적인 도움이 있었지만 희생자들의 연고를 확인하지 못했다.

 

고성 조사를 잠정 중단한 것은 거의 동시에 시작했던 강릉 조사가 빠르게 진척되었기 때문이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기록된 희생자 김병순(金炳順)씨의 강릉 연고가 20215월에 족보 기록으로 확인되었다. 김병순씨의 족보기록을 발굴하는 데에는 경주김씨 수은공파 강릉 지회의 김자정, 김철욱 선생의 도움이 컸다. 족보에는 김병순씨의 이름과 함께 일본에 거주한다(居日本)”는 기록이 남아 있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202111월 중순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건립한 일본인과 재일동포들에게 감사패 증정을 요청하는 청원을 강릉시에 냈다. 청원자는 일본의 정세화, 다이꼬꾸 스미애 선생님, 서울의 안해룡, 정철훈 선생, 강릉의 강승호, 홍진선, 유선기 선생 등이었다. 강릉 시의회의 정광민 의원을 비롯해, 강릉시청의 이준하, 박종시, 박인순 계장 등의 실무 담당자들이 협조해 주신 덕분에 청원은 받아들여졌다.

 

2022326일 강릉시장 명의의 감사패가 일본인 학자와 예술가, 종교인과 사회활동가 6인과 재일동포 역사가와 사업가 2인에게 전달되었다. 감사패 전달이 결정되고 실행되는 과정에서 도쿄 소재 강원도본부의 강병직 본부장과 문미현 부장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건립과 <강릉의 감사패> 증정은 여러 기록으로 남았다. 김병순씨의 연고를 찾는 과정과 결과는 한국과 일본의 여러 언론에 보도되었다. 특히 강릉의 월간 잡지 <강릉플러스(20223월호)>한일 국경과 시대를 초월한 휴머니즘이라는 제목의 특집기사를 보도했는데, 다카라즈카와 강릉의 시민들이 서로를 인류애와 예의로 대했던 과거 역사와 현재의 과정을 자세히 보도했다.

 

필자는 강원대학교의 평화학 학술지 <평화들(PEACES)>두 도시이야기: 강릉과 다카라즈카라는 논문을 기고했다. 강원도와 효고현 사이의 교류와 협력을 공공외교의 시각으로 정리한 것인데, 강승호 교수(강릉원주대, 국제통상학)의 강원도-연해주의 경제교류 문제를 다룬 강원도와 연해주의 농업협력 사례의 의의라는 논문과 짝을 이루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재일 조선학교 학생들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매년 참배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동안 1914-15년의 순난자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를 1백년간 제사해 왔던 니시타니의 <만푸쿠지(滿福寺)>에서는 희생자들의 위패가 모셔진 구역에 무궁화와 진달래를 심어 평화의 정원을 조성하기로 했다고 한다.

 

 

감사패를 증정 받은 다카라즈카의 일본인과 재일동포 활동가들이 강릉 답방도 계획 중이라는데, 이것이 실현되면 강원도와 일본 효고현의 교류와 협력이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이렇게 해서 강릉 출신의 순난자 김병순씨의 연고를 찾는 일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양 지역 사이에 미래지향적 전망도 열어주었다.

 

강릉 조사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서, 다른 순난자들의 연고를 찾아 나설 때가 왔다. 또 다른 희생자 장장수(張長守)씨의 연고지는 추정조차 불가능할 만큼 자료가 없었지만, 윤길문, 오이근씨의 고향은 경상남도 고성으로 조사되었고, 19151월에 사망한 남익삼씨의 연고지는 통영으로 추정되었다.

 

이제 이들의 연고지와 연고자를 확인하기 위한 조사를 재개한 것이다. (2022/8/20,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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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일의 남도 취재를 다녀오자마자 <하얼빈>을 읽었습니다. 오세훈 선생의 권독문을 읽자마자 인터넷으로 주문했고, 당일 책을 찾아왔습니다. 서점 창구 직원께서 선생님이 마지막 권을 사신 것이라고 하시더군요. 이런 책을 많은 분들이 사 읽는 걸 알고 안심이 되었습니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역시 김훈 선생의 문장력입니다. 단문을 가지고 담백하게 정곡을 찌르며 서사를 전개하는 필력이 놀라웠습니다. 내용도 그랬습니다. 군더더기 한 조각 없이, 하고 싶은 말들을 이렇게 적확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부럽더군요. <칼의 노래>의 감흥도 되살아났습니다.

 

 

<칼의 노래> 같은 작품이 이순신 사후 4백여 년이나 지나서 나오고, <하얼빈> 같은 작품이 안중근 사후 1백여 년이 지나서 나왔다는 것이 사실 이 민족의 슬픔입니다. 이런 작품이 더 일찍 나오지 못하게 만든 조선과 한국 사회가 안타까운 것이지요. 그러나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온 것은 다행스런 일이기도 합니다. 이 두 영웅의 이야기를 제대로 전한 사람이 <라면을 끓이며> 살았던 김훈 선생인 것도 어쩌면 필연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얼빈>의 주요 등장인물은 네 부류입니다. (1) 비루한 조선 왕족과 사대부들, (2) 의연한 포수 안중근과 담배팔이 우덕순, 그리고 의병과 독립군으로 싸웠던 숱한 민초들, (3) 이토 히로부미로 대표되는 무도한 일본 제국, 그리고 (4) 관망적이었던 조선 천주교회가 그것입니다.

 

작가가 각 주인공들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려고 세심한 노력을 기울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또렷합니다. 그게 뭔지는 책을 읽어보시면 금방 아실 수 있으실 테니까, 제가 주절주절 나열할 필요는 없겠지요.

 

 

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느꼈던 두 가지는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동안 안중근 선생님의 단편적인 에피소드를 많이 접했지만, 안중근 선생이 바로 이런 분이었구나, 하는 전체적인 그림(whole picture)을 그릴 수 있게 된 것은 이 소설 덕분입니다.

 

그것은 저자도 의도했던 바였더군요. 후기에서 토탈 픽쳐(total picture)라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포수, 무직, 담배팔이라는 핵심어로 세계사적 폭탈 속에서 무능한 조선 왕족/사대부들이 싸워보지도 못하고 문서 한 장으로 나라를 팔아먹을 때, 의연히 나서서 일제의 심장을 쏘아 버린 날 것의 청춘들을 드러낸 것이지요. 김훈 선생은 또 이렇게 썼습니다.

 

한국 청년 안중근은 그 시대 전체의 대세를 이루었던 세계사적 규모의 폭력과 야만성에 홀로 맞서 있었다. 그의 대의는 동양 평화였고, 그가 확보한 물리력은 권총 한 자루였다. 실탄 일곱 발이 쟁여진 탄창 한 개, 그리고 강제로 빌린(혹은 빼앗은)’ 여비 백 루블이 전부였다. 그때 그는 서른한 살의 청춘이었다.”

 

제가 깨달은 또 한 가지는 안중근 선생님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처단에 나섰던 우덕순 선생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는 점입니다. 한국의 독립운동사에 적지 않은 관심을 가진 축에 끼인다고 자부했던 저는, 그동안 우덕순 선생의 이름조차 낯설었던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하얼빈>을 읽고 나서야 일제가 남긴 우덕순 선생 심문기록과 재판기록을 읽어 보았는데, 안중근 선생 못지않게 훌륭하고 멋진 분입니다. 안중근 선생과 우덕순 선생의 차이점은 결국 누가 이토 히로부미 사살에 성공했는가의 차이뿐입니다. 두 분의 사상과 인성, 의기와 심지는 방향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수준의 차이가 아님을 느꼈습니다.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 우덕순(과 유동하) 선생이 이발을 하고 나란히 사진을 한 장 찍습니다. 그 사진이 지금까지 전해집니다. 그때 그분들이 나누었던 대화는 저자가 재구성한 것이겠지만, 사람으로 태어나 한 번 사는 동안, 저런 일을 하면서 저런 말로 마음을 주고받을 동지가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일까, 하고 부러움을 느꼈습니다.

 

역사적인 거사를 앞둔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동지들과 함께 후세에 전할 사진 한 장을 남길 여유를 챙기셨던 안중근 선생께 감사드립니다. (2022/8/24,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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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선생의 첫 조선춤, 즉 최승희류 조선무용의 첫 작품은 그동안 <에헤야 노아라(1933)>로 널리 알려져 왔다. 그러나 필자는 <에헤야 노아라>에 앞서 적어도 8개의 조선무용 작품이 창작되어 공연된 적이 있었음을 알아 낼 수 있었다.

 

193021일의 <1회 무용발표회(경성공회당)>에서 <영산무(음악 조선고곡 영산회상)>가 초연되었고, 1930330일에 열린 <1회 창작무용 발표회(단성사)>에서는 <농촌소녀의 춤(음악 조선민요)>가 발표됐다. 19301021일의 <2회 신작무용 발표회(단성사)>에서도 <장춘불로지곡(長春不老之曲, 음악 보허자)><정토의 무희(음악 조선정악)>가 초연되었다.

 

 

<향토무용: 농부(음악 조선민요)>193127<2회 최승희 무용발표회(단성사)>에서 초연됐고, 193151일의 <3회 최승희신작무용 발표회(단성사)>에서도 <우리의 캐리카추어(음악 가야금산조)>, <봄을 타고 가는 시악씨들>, <향토무용(음악 대취타)>가 초연됐다.

 

, 1933520일 도쿄 일본청년관에서 열린 <근대여류무용가대회>에서 <에헤야 노아라>가 발표되기 전에도 이미 적어도 8개의 조선무용 작품이 창작, 공연된 바 있었고, 그중 가장 먼저 발표됐던 <영산무(1930)>야말로 최승희 선생의 첫 조선무용 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에헤야 노아라>가 최승희 선생의 첫 조선춤이라고 알려져 왔었던 것일까? 그것은 그런 이름붙이기를 시도했던 것이 일본의 평론가들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최초로 공연된 최승희 조선무용 작품은 <에헤야 노아라>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보다 먼저 창작된 8개의 조선무용 작품들은 모두 경성에서 초연되었다. 그중 <영산무>1934920일 도쿄 일본청년관에서 열린 <1회 최승희 무용발표회>에서 <에헤야 노아라>, <승무>, <검무>와 함께 발표되었지만, 이미 돌풍을 일으킨 <에헤야 노아라>와 새로운 관심을 얻은 <승무><검무>에 눌려 <영산무>는 그다지 호의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다.

 

<영산무>가 호평을 받지 못한 것은 조선 공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공연 전에는 <영산무>가 주목을 끌었다. 예컨대 1930131일의 <매일신보(2)>조선정조를 가득 실은 가지가지의 무용이라는 제목 아래 영산회상의 고악과 영산무라는 부제를 사용할 만큼, <영산무>는 이 공연의 대표곡으로 소개됐다.

 

기사의 본문에서도 그 무용은 모두 조선의 정조를 가득히 실은 최양 독특의 무용들이며, “그중에도 <영산무><영산회상>이라는 조선고악에 맞추어 추는 춤으로 더 한층 조선의 향내를 발산하는 것이라고 특별한 설명을 곁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공연이 끝난 후에 신문과 잡지에 보도된 평론들은 <인도인의 비애><사랑의 춤>, <오리엔탈><마주르카> 등의 현대무용에 대한 감상이나 평론이 있었지만 <영산무>에 대해 언급한 글은 단 한편도 없었다. 관객과 평론가들의 이같은 무관심 때문인지 이후 최승희는 19333월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영산무>를 조선에서 다시 공연하지 않았다.

 

 

기대를 받았던 <영산무>가 조선에서 외면 받았던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최승희의 조선무용이 조선의 관객들에게 충분한 호소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일본유학을 통해 연마한 것은 서양식 근대무용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소재와 의상을 조선의 전통에서 찾기는 했으나 그것이 조선무용 작품으로 충분히 다듬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혹은 <영산무>에 최승희 선생이 직접 출연하지 않고 그의 제자 2-3명이 출연했던 것도 이 작품이 널리 알려지거나 호평을 받지 못했던 원인이었을 수 있다. 193021<영산무>가 경성공회당에서 조선 초연되었을 때에는 조영애(趙英愛)와 노갑순(盧甲順)에 의해 발표되었고, 1934920일 도쿄 일본청년관에서 일본 초연되었을 때에도 카이 후지코(甲斐富士子), 김민자(金敏子), 가토 에미토(加土惠美子)에 의해 공연되었다.

 

최승희 무용 공연, 특히 그의 초기 공연에서는 모든 시선이 최승희 본인에게 집중되었으므로, 그가 직접 출연하지 않은 작품에는 세간의 관심이 적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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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선생은 <에헤야 노아라(1933)>는 물론 <한량무(1938)>를 창작했던 시기까지도 한량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춘추> 19415월호에는 최승희와 여류명사 회담이라는 좌담회 기사가 실렸는데, 최승희와 참석자들 사이에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갔다.

 

 

최승희: ... 멕시코에 가니 거기에 옛날에 이민으로 가셨던 조선분이 한분 계신데 70노인이라고 해요. 열세 살 때부터 돌아다니며 춤추고 장구치고 그랬다는데 무슨 장단이고 못하는 게 없어요. 그분이 나를 찾아와서... 춤을 추는데 덩실덩실 어찌도 잘 추는지요. (일동 웃음) 소위 난봉꾼인가 봐요. 그런데 그분더러 장구쳐달라고 그랬죠. (일동 웃음) 그런데 활량이란 어떤 의미예요? 활량이라는 춤을 창작해서 추었지요.

 

고봉경: 활량이라는 게 화랑(花郞)이라는 말이 변해진 것이 아닐까요?

 

최승희: 기생꽁무니나 따라 댕기는 건달이라는 의미인 줄 알았는데, 어떤 분보고 물어봤더니 글도 잘하고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고요.

 

이근영: 그건 요새 말하는 활량과는 다를 겁니다. 신라 때의 화랑이란 문과 무도 겸한 채 호탕하게 지내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닐까요?

 

모윤숙: 원래는 글도 잘 짓고 활도 잘 쏘는 사람을 옛날에 전해오는 말에 화랑이라고 하잖아요?

 

박승호: 그렇지만 요즘이야 건달을 활량이라고 그러지.”

 

이 좌담회가 열렸던 것은 최승희 선생이 세계 순회공연(1937.12-1940.12)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였다. 일시는 194141일이었고, 좌담회 장소는 경성 반도호텔이었다.

 

 

위의 대화에 따르면 이때까지도 최승희 선생은 한량의 의미를 잘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저 기생꽁무니나 따라 다니는 건달이라는 의미인 줄알고 있었다면서, “한량이 어떤 사람이냐고 되물었기 때문이다. 최승희 선생의 질문에 답을 해 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고봉경이나 이근영, 모윤숙과 박승호 등의 참석자들은 한량이 본래 글도 잘하고 활도 잘 쏘는, 즉 문무를 겸비한 신라 화랑에서 유래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좌담회 당시, 즉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에는 한량이 그와는 정반대의 젊은이들, 즉 술과 기생을 좋아하는 건달이나 난봉꾼으로 변질된 상태였던 것이다.

 

최승희의 멕시코 공연은 1940111일이었으므로 위의 대화에 등장한 멕시코 에피소드는 <한량무(1938)>가 창작되었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 한량을 소재로 <한량무>가 창작된 것이 1940년 전후, 즉 세계 순회공연 중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보다 7년 앞서 도쿄에서 초연된 바 있었던 <에헤야 노아라>가 한량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고 보기는 대단히 어렵다.

 

한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헤야 노아라>의의와 평가를 서술하면서 이 작품이 “1933년 조선춤의 소재를 서양춤의 기법으로 살려낸 최승희의 첫 조선무용 작품이라고 소개했고, “이 작품의 성공을 발판으로 최승희는 그녀만의 독자적인 스타일을 발견하고 훗날의 최승희류 조선무용확립에 이르게 되었다고 서술했다.

 

 

<에헤야 노아라>에 대한 이같은 평가는 대부분 사실이지만, “최승희의 첫 조선무용 작품이라는 표현은 유보되어야 한다. <에헤야 노아라(1933)> 이전에도 최승희 선생은 <영산무(1930)><농촌소녀의 춤(1930)>, <장춘불로지곡(1930)><정토의 무희(1930)> 등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들이 조선무용 작품이었다는 것은 우선 그 음악으로 알 수 있다. <영산무>의 음악은 조선고악(영산회상)’이었고, <농촌소녀의 춤>조선민요로 반주되었다. <장춘불로지곡>의 음악은 조선아악(보허자),’ <정토의 무희>의 음악은 조선정악이었다고 한다.

 

또 이 작품들은 그 제목으로 미루어 조선음악과 함께 조선의상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들을 조선무용으로 보는 데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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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최승희 선생의 <에헤야 노아라>한량의 술 취한 모습을 묘사한 춤이라고 서술했다. 작품의 의상에 대해서도 전통적인 한량 복장에 갓을 쓰고 경쾌하게 추는 춤이라고 했고, 결정적으로 한성준에게서 배운 태평무와 한량무를 기초로 새롭게 해석한 춤이라고 서술했다.

 

그러나 과연 <에헤야 노아라>가 한량의 모습을 묘사한 춤이었을까? 조선시대의 한량이란 하는 일 없이 노는 부잣집 젊은이를 가리켰다. 학문이나 수양에 힘쓰는 넉넉한 집안의 자제를 한량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없었다. 주색잡기에 빠진 젊은이, 혹은 난잡성이나 퇴폐성은 그보다 덜하더라도 풍류와 노름에 빠진 부잣집 젊은이를 한량이라고 불렀던 것이 보통이다.

 

 

한량이란 특정신분이나 직업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기 때문에 복식이 별달랐을 리 없다. 한량이라면 보통 양반 자제이었으므로 그들의 복장은 양반 복장이었고, 집안이 부유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므로 좋은 옷감의 바지저고리에 쾌자와 가죽신 등을 곁들인 호화로운 복장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한량 복장이라는 특별한 복식이 따로 있었을 리는 없다.

 

또 최승희가 이 춤을 한성준에게서 배운 태평무와 한량무를 기초로 창작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시기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에헤야 노아라>의 초연은 1933520일인데, 최승희가 한성준으로부터 조선무용을 사사받은 것은 19346월경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승희가 창작한 작품 중에 <한량무(1938)>가 따로 있다. “한성준에게서 배운 태평무와 한량무를 재해석해 창작했다는 작품은 바로 이 <한량무>일 가능성이 크다. 정병호(1985)에 따르면 이 <한량무>의 창작연대는 1939년이었는데, 필자의 조사에 따르면 193822LA 이젤극장 공연이 그 초연이었다. 어떤 경우이든 이 작품은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1937.12-1940.12) 중에 창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춤(=<에헤야 노아라>)1933년에 창작되었지만 춤을 무대에 올린 것은 19345월 동경의 일본청년회관에서 열린 여류무용발표회라고 밝혔던 것을 보면, 이 작품이 <한량무(1938)>가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그보다 5년이나 이른 시기에 창작된 <에헤야 노아라(1933)>는 한량을 묘사한 춤이라고 보기 매우 어렵다.

 

<에헤야 노아라>가 한량을 소재로 한 춤일 수 없다는 사실은 최승희 자신의 증언에서도 잘 드러났다. 그는 <나의 자서전(1936)>에서 <에헤야 노아라>는 자신의 부친 최준현씨가 추던 <굿거리춤>을 배워서 작품화한 것이라고 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술에 취한 자신의 아버지가 추었던 굿거리춤에서 영감을 얻어낸 작품이라고 서술했다. <나의 자서전(1936, 7-8)>에 서술된 내용을 직접 인용해 보자.

 

도련님으로 자라신 아버지는 대단한 미남이셨고, 게다가 술자리도 좋아하셨던 분이기 때문에 예능에도 능하셨는데, 그중에서도 <굿거리춤>을 가장 잘 추셨습니다. 흥에 겨워 아버지가 추시던 굿거리춤을 재미있게 바라보면서 어린 나도 어느새 이 춤을 외워버렸습니다.

 

나중에 이시이 바쿠 선생님의 작품 발표회에서 네 작품도 하나 발표하지 않겠느냐?’ 하시는 선생님의 말씀에 가장 먼저 아버지의 <굿거리춤>을 떠올렸습니다. 쇠퇴한 조선무용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어 예술적으로 소생시키고 싶었던 나에게, 조선에서 태어난 무용가인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새로운 예술작품 창작의 기회가 왔을 때 바로 그 춤을 소재로 삼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나의 중요한 레퍼토리 중의 하나인 <굿거리춤>은 결국 아버지가 추셨던 <굿거리춤>을 바라보면서 자연스럽게 외워버렸던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생겨난 것입니다.”

 

 

, 이 작품의 주인공은 중년 이상의 조선인 양반 남성이다. 그리고 중년 혹은 노년의 남성을 한량이라고 부르는 것은 조선시대의 관행이 아니었다.

 

이상의 여러 문헌 증거와 상황 추론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에헤야 노아라>의 소재를 술 취한 젊은 한량으로 보는 것은 무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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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동 선생 인터뷰 때문에, 박경중 선생 인터뷰의 후속조사가 지체됐었다. 정병호 선생이 중학생 시절에 최승희 공연을 관람했다는 박경중 선생의 증언에 따라, 그 공연이 언제 어디서 열렸던 공연이며, 그 공연의 레퍼토리가 무엇이었는지 조사하던 중이다.

 

그런데 정병호 선생이 언급한 3개의 연제 중에서 <초립동><보살춤>은 쉽게 공연 레퍼토리에서 찾아지고 정리되었지만 <에헤야 노아라>는 약간 복잡했다. 이 작품은 해당 공연 레퍼토리에 등재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제목과 창작 및 초연시기 등에 대해 모호한 점이 있다. 또 이 작품은 최승희 선생의 첫 조선무용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 점도 확실하지 않다.

 

 

우선 제목. 조선의 여성지 <신여성> 19345월호는 이 작품을 <에헤노아라>라고 불렀다. 이는 <에헤야 노아라>의 잘못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이 잘못된 제목이 지금까지 전해진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작품의 제목구성 및 형식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제목) 에헤라노아라; (정의) 최승희가 조선의 춤을 바탕으로 창작한 최초의 작품; (구성 및 형식) 이 작품은 조선의 고전음악을 관현악곡으로 편곡한 음악을 사용하며, 전통적인 한량 복장에 갓을 쓰고 경쾌하게 추는 춤이다. 최승희는 한성준에게서 배운 태평무와 한량무를 기초로 새롭게 해석하여 애수와 즉흥성이 강한 춤으로 재창작하였다.”

 

이 두 문장 한 문단짜리 짧은 서술에 오류가 5개나 포함돼 있다. 첫째가 제목, 둘째가 반주음악을 관현악 편곡이었다고 한 점, 셋째는 한량 복장이라는 표현, 넷째는 <에헤야 노아라>가 한성준에게서 배운 태평무와 한량무를 기초로 창작했다고 서술한 점, 다섯 번째는, 이 작품이 조선의 춤을 바탕으로 창작한 최초의 작품이라고 소개한 것이다.

 

 

우선 제목을 <에헤라노아라>라고 한 것은 <에헤야 노아라>의 잘못이다. 이 제목이 처음 활자로 인쇄된 것은 1933520일의 <근대여류무용대회> 공연 직후의 언론보도였을 것이다. 이 공연의 프로그램은 발굴되지 않았고, 또 발굴된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이름(아마도 이시이 미도리)과 그의 연제가 인쇄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시이 미도리가 급성 늑막염에 걸렸기 때문에 최승희 선생이 불과 대회 이틀 전에 핀치히터로 이 대회에 출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반년후인 1933922일의 <이시이무용단 가을공연>1934920일의 <최승희 제1회 발표회>의 공연 프로그램에는 분명히 <에헤야 노아라(エヘヤ・ノアラ)>로 표기되어 있다. 이것이 어떤 경위로 <에헤노아라>로 전해졌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오류는 어법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 한국의 감탄사에서 에야는 정조 상승의 감탄사이고, ‘에라는 정조 하강의 감탄사이다. 에야는 흥을 돋우는 감탄사인 반면, ‘에라는 탄식이 밴 감탄사이다. 여기에 음절이 가운데 끼어들면 각각의 감탄사를 강조하게 된다. 에헤야는 흥을 더욱 돋우는 감탄사이고, ‘에헤라는 더욱 깊은 탄식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군밤타령>이나 <호미타령>같은 빠르고 흥겨운 민요곡에서 감탄사 에헤야를 자주 사용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반면 <성주풀이>같은 느리고 탄식조의 민요풍 노래에서 에라 만수를 추임새로 사용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에라에야의 구별이 자주 혼동된다. 그래서 정태춘 선생의 <에헤라 친구야(1978)>는 가사의 내용상 <에헤야 친구야>로 바꾸는 것이 어법에 맞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을 들은 한 평자는 정태춘 선생의 목소리의 톤이 낮고 우수적이며, 가사가 체념성 평화(요즘 말로 하면 소확행)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에헤라 친구야>가 더 맞을 수 있다고 평가했다. 어떤 경우이든 에라에야를 구별한 필자의 주장을 인정한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최승희 선생의 <에헤야 노아라>한량이 술에 얼큰하게 취한 상태로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배를 볼록하게 내민 채 팔자걸음을 걸으며 추어,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춤이라고 설명했다. 흥겨운 모습을 묘사한 코믹한 춤의 제목에 탄식과 체념의 감탄사 에헤라를 쓸 수는 없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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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팀아이><무용신2022>6<무용신> 캠페인이 진행 중입니다. 나주 봉황면 욱실마을의 <케어팜 더욱(대표 최현삼)>과 협력하고 있습니다. <케어팜 더욱>이 올가을 추석명절 선물을 위해 출시한 <빨간 양파즙>을 구입해 주시면 1상자에 5천원씩의 기부금이 <무용신>에 전달됩니다.^^

 

 

저는 지난 2달 동안 <케어팜 더욱>3번 방문했습니다. 이 사회적 협동조합이 시작된 계기와 경과도 살펴보고, 진행 중인 사업들의 설명도 들었습니다. 농활 삼아 일주일동안 머물면서 일도 해 봤습니다. 어제 다시 한 번 나주를 방문해 구체적인 협력 방안을 의논했는데... 상황은 생각보다 절박하네요.

 

<케어팜 더욱>은 연로하신 농촌 어르신들의 건강 돌봄을 목표로 3년전에 설립됐습니다. 어르신들께서 무리없는 노동 참여를 통해 건강도 돌보고 수입도 드리는 사업으로 나주 시정부의 지원도 받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선두주자에 해당하는 선진적인 시도입니다.

 

 

이내 여러 난관에 부딪혔고, 재정난 타개를 위해 양파와 포도(샤인머스캣) 재배를 시작했습니다. 샤인머스캣 출하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양파는 <빨간양파즙>으로 가공해 지난달부터 시판하고 있습니다. 최현삼 대표가 귀농 후 3년의 노력 끝에 낸 첫 생산품인데, <빨간양파즙>의 성공적인 시장진입 여부에 따라 향후 사업들의 성패가 좌우될 것 같습니다.

 

이번에 출시된 <빨간양파즙>은 여느 양파즙과 다르다고 합니다. 최현삼 대표의 3년간 연구와 실험을 반영했기 때문이죠. 3가지 특징을 들 수 있다고 합니다. (1) 물로 희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맛과 색이 진합니다. 색깔은 사진으로도 확인 가능하듯이 빨간 포도주와 같은 색깔입니다만, 맛은 직접 보셔야 알 수 있겠지만요.

 

 

(2) 양파즙 제조과정에서 침전물을 모두 제거했다고 합니다. 침전물이 남으면 색깔이 진해지기 때문에 물로 희석해도 어느 정도 농도를 유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빨간양파즙>은 침전물을 제거하는 대신 물로 희석하지 않는 다소 바보 같은방법을 택했더군요. 이런 건 소비자들이 알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3) 건강한 당도를 위해 스테비아를 사용했고, 건강효과에 변화를 주기 위해 야관문석류’, ‘솔잎의 액기스를 첨가했습니다. 그래서 <케어팜 더욱><빨간양파즙>은 세 가지입니다. <엄마 좋아 석류>, <아빠 좋아 야관문>, <모두 좋아 솔잎> 빨간양파즙이 그것이죠.

 

 

최현삼 대표의 3년간의 노력에 대한 보상과 향후 진행될 케어팜 계획을 위해서는 이번 <빨간양파즙> 판매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합니다. 자금 압박에서 벗어나 다음 단계로 나가기 위해서는 <빨간양파즙>이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입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최현삼 대표는 맛과 품질에 자신이 있다고 합니다. 제발 시험해 보아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내년에 <케어팜 더욱>이 어떤 발전된 모습을 보일지 혹시 궁금하지 않으세요? 최현삼 대표의 청사진을 후원하고 싶으세요? 그럼, <빨간양파즙>을 구매해 주세요. 가정용으로도 주문해 주시고, 주변 선물용으로 다량 구매해 주세요.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올 가을 판매량이 1천 박스만 넘어서면 일단 <케어팜 더욱>이 생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2백 박스가 주문된 것을 보면, 품질과 맛이 좋은 것을 아실 수 있으실 겁니다. 여러분께서 앞으로 3주일 동안 8백 박스만 더 주문해 주시면 <케어팜 더욱>의 꿈과 계획이 계속될 수 있습니다.

 

<케어팜 더욱><무용신> 캠페인이 여러분의 도움을 기다립니다. 고맙습니다.

 

조정희 드림 (2022/8/20)

 

<케어팜 더욱><빨간양파즙> 주문 정보

주문 전번: 010-5340-0578 (최현삼 조합장)

입금 계좌: 농협 351-5340-0578-43 (최현삼)

 

 

<무용신> 6차 캠페인 후원계좌

카카오뱅크: 7979-20-34510 재일 조선학교 무용부 지원(이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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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는 1920년대에 태동해 30년대에 꽃을 피우기 시작하다가 40년대 들어서는 일제의 군국주의적 문화 압살 정책에 짓눌려버렸다. 그래서 일제에 부역하는 일부 국책영화를 제외하고는 예술영화가 설 자리는 없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내내 예술 장르이자 계몽의 수단이었던 연극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사실상 호남지역의 연극은 다른 지역에 비해 그 뿌리도 깊고 저변도 넓은 편이었다.

 

호남 연극이 태동한 것은 1909년경이었다. 판소리가 서구 연극적 형태로 이행돼 만들어진 창극이 우리나라 연극의 시작인데, 김창환이 정학진, 유성준, 김정길 등 이 지역 명창 50여 명을 규합하고 <김창환협률사>를 조직, 그해(1909) 가을 광주천변(현 양림교 부근)에 가설무대를 설치해 공연한 것이 그 시초였다.

 

 

호남 연극사를 보면, <김창환협률사> 이후 1910년대에는 신파극이 유입되었고, 1920년대에는 근대극이 형성되었다. 1930년대에는 연극이 항일운동의 수단으로 활용되었으나, 1940년대에는 일제관헌의 검열을 받아야하게 되면서 잠복기에 들어갔다.

 

해방 후 호남인들의 연극 욕구는 다시 폭발했다. 19489월 창립된 조선대 연극회가 그 신호탄이었다. 그리고 이같은 연극 붐은 195611월 광주극장에서 첫 막을 열었던 <전국학생연극제>에서 절정에 달했다. 이번 조사에 중요한 것은 조선대 연극회가 창립된 것이 호남 연극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과 이학동 선생님이 그 연극회의 창단 멤버이셨다는 점이다.

 

정식 이름이 <조선대 극예술연구회>인 조선대 연극회는 현지에서는 <조대극회>라고 줄여 부른다. 이 대학의 연극 동아리인 조대극회는 오늘날까지도 그 위용이 대단하다. 20101111일자 <경향신문>은 조대극회의 1백회 정기공연을 보도하면서 조대극회가 (201011) 17~18일 두 차례 펼칠 연극 <철종 13년의 셰익스피어> 연습 무대를 소개했다.

 

 

이 연극은 인간의 탐욕, 권력욕, 성적 일탈 등을 꼬집은 셰익스피어 작품 37개를 각색해, 저물어가던 조선말의 현실을 풍자하는 블랙 코미디였다고 한다. ‘철종 13은 진주민란이 일어난 1862년을 가리킨다. 유교사회 기득권에 대한 민중봉기의 물꼬를 튼 대사건이다.

 

조대극회의 100번째 정기 공연은 연극의 뿌리가 깊은 광주전남의 연극사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진기록이다. 이 작품의 러닝타임은 3시간인데 어떤 기성극단도 해내지 못한 일이었다. 출연 배우가 57, 연출, 조명 등 스태프가 20명에 이르렀다. 이 공연의 총기획자인 김영윤씨(81학번)는 직접 참여하지 못한 선배들은 약 2달 사이에 제작비 1억원을 모금했다고 전했다.

 

정기공연 1백회만 하더라도 대학 연극부가 해낸 것은 조대극회가 유일하다. 그만큼 조대극회의 저변이 넓고 깊이가 깊다는 뜻이다. 조대극회로부터 시작된 전남 광주 지역의 연극 붐은 1956<전국학생연극제>로 절정에 달했고, 이후 연극협회 전남지부 발족(1962), 전대극회 창립(1965) 등으로 이어졌다. 전남 광주 지역의 연극 붐은 7-80년대에 전국적인 침체기를 거쳤으나 광주연극제 시작(1987), 광주학생연극제의 부활(1991), 광주지역 여배우들의 모임인 여우회창립(1996), 소극장연극축제의 시작(1998) 등으로 이어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광주 전남 지역의 연극이 융성하게 된 계기가 1948년의 조대극회 창립이었다는 점은 지금도 높이 평가되고 있는데, 당시 조대 미대 3학년이었던 이학동 선생이 그 창단 멤버 중의 한 분이셨던 것이다. 그해 9월 현 무등시네마 자리인 동방극장에서 <무의도 기행>이 상연되었던 것이 조대극회의 첫 정기공연이었고, 1952년 한국전쟁 와중에도 <귀촉도>를 들고 목포, 군산 등을 누빌 만큼 조대극회의 활동은 왕성했다.

 

이학동 선생님의 작품 <남매>가 나주극장에서 상연되었던 것도 전남 연극 붐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이 작품의 기획과 연출, 상연과 반응 등을 조사하여 잘 정리하는 것은 전남 연극 운동을 이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학동 선생님 2차 인터뷰에서는 나주극장에서 1달간 상연되었던 <남매>가 중요 사안으로 조사되어야 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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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동 선생님은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1회 졸업생이라고 하셨다. 1946929일 조선대학교가 개교할 때에는 4개 학부, 12개 학과에 모두 1,194명의 학생들이 등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4개학부에 미술대학이 있었을까? 혹은 12개 학과에 회회학과가 있었던 것일까?

 

조사 결과 조선대 개교할 때는 미술대학이 단과대학으로 독립되어 있지 않았지만 회화과는 설치되었다. 이 회화과는 문리대에 속해 있었고, 그 안에는 서양화 전공과 한국화 전공이 분리되어 있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학동 선생은 오지호 선생으로부터 서양화를, 허백련 선생으로부터 한국화를 사사했다고 한다.

 

(지금은 조선대에 미술체육대학이 단과대학으로 독립되어 있고, 회화학부와 공연예술무용과를 포함한 10개 학과가 개설되어 있다. 회화학부에 서양화 전공과 한국화 전공이 분리되어 있는 것은 개교 초기와 같다.)

 

 

2019510일 조선대학교 미술관은 <김보현과 실비아올드 미술관(조선대 본관 소재)>에서 개관 30주년기념 <찰나의 빛, 영원한 색채, 남도>전을 개최, 조선대 미대와 인연이 있는 원로, 중견작가들의 소장품을 중심으로 남도 미술을 이끌어온 작품들을 전시했다. 이 전시회는 조선대 미술대학의 역사를 반영해 3부로 구성되었다.

 

1부는 해방직후 개교 초기(40년대말-50년대초)에 강단에 섰던 김보현, 백명수, 윤재우, 천경자의 작품이 전시됐고, 2부는 조선대학교가 인상파 화풍의 산실이었던 1950년부터 1980년대 전반까지 활약했던 오지호, 임직순, 김영태, 오승우, 조규일, 국용현 등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3부는 남도 화풍의 토대 위에서 독자적 화풍을 탐구한 진양욱, 황영성, 최영훈, 진원장, 이강하, 한희원, 김유섭, 박구환 등의 작품이 걸렸다.

 

이 전시회에서 필자가 주목한 것은 이학동 선생님이 (1) 전남 고흥 출신의 천경자(千鏡子, 1924-2015) 선생과 동년배였지만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림을 배웠다는 사실과 (2) 전남 화순 동복면 출신의 오지호(吳之湖, 1905-1982) 선생의 제자였다는 사실이었다.

 

 

2016923일자 <중앙일보>호남 화맥의 산실로 69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한조선대 미대가 <조선대학교 미술 70> 전시회를 열었다고 보도하면서 조선대 미대 동문과 전,현직 교수 320여명이 총 4개 분야로 나뉘어 전시에 참여했다고 전했다.

 

1부의 창립시기(1946-1970)에서는 개교 초기의 김보현, 윤재우, 천경자, 오지호 교수의 지도 아래 조선대 학파가 탄생하는 과정을 보여주었고, 이후 (2) 격동의 시기(1980), (3) 현대미술의 다양성과 대중화를 시도하던 시기(1990), 그리고 (4) 명예교수 및 타대학 출신교수인 김보현, 조복순, 김영태, 오지호의 작품이 전시되었다고 한다.

 

특히 이 전시회 기간 중에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가졌던 조선대 미대 1회 졸업생 김영태 선생은 소감을 묻는 질문에 조선대 미술인이라면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면서, “지금이야 홍익대나 서울대가 더 높다고 인식되지만 당시에는 중앙에서도 조선대를 알아줬다고 회상했다고 한다. 조선대가 한국 최초의 민립대학으로 태동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대 미대는 한국 최초이자 최고의 화풍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 두 전시회 소개 기사에 따르면 조선대 미대의 초기 주요 인물은 김보현, 오지호, 윤재우, 천경자 등의 교수진과 이학동, 김영태, 나점석 등의 1회 졸업생들이다. 이들에 대해 후속조사가 필요하고, 이학동 선생님 2차 인터뷰에서도 자세히 질문드릴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학동 선생이 한국화를 사사했다는 허백련(許百鍊, 1891-1977, 진도 출신) 선생은 조선대 미대의 창설과 초기 활동 문헌에 등장하지 않는 것이 특이하다. 조대 미대 70주년 기념전이나 조대 미술관 30주년 기념전에도 허백련 화백의 작품은 출품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학동 선생이 허백련 선생과 어떤 방식으로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었는지 후속조사 및 인터뷰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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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동 선생님이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제1회 졸업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조선대학이 개교한 것은 1946929일이므로 그는 19469월에 입학해, 19506월에 졸업한 셈이 된다.

 

광주 소재 조선대학교는 흔히 대한민국 최초의 민립대학이라고 불린다. 조선대학교의 역사를 살펴보니 그 서술은 반만 맞다. 조선대학교 설립운동은 해방 직후 19465월 조선대학설립동지회(=동지회)와 창립준비위원회가 결성되면서 시작되었다.

 

194685일 동지회는 광주서중학교에서 발족식을 열었다. “개성교육생산교육영재교육이라는 건학 이념과 민족국가 수립에 기여할 지역사회의 인재를 양성이라는 설립 이념을 채택했다. 같은 해 99<광주야간대학원>의 설립이 인가되었고, 9294개 학부, 12개 학과, 1,194명의 학생이 등록한 <광주야간대학원>이 마침내 개교, 수업에 들어갔다.

 

 

동지회원들은 그해 12월부터 트럭을 타고 전라도 각 지역을 샅샅이 돌면서 모금운동을 벌였다. 군수와 면장, 이장과 경찰서장부터 기생에 이르기까지 당시 쌀 2말 값에 해당하는 100원짜리 설립동지회권을 구매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깨, , 미역, 장작 등의 현물을 기부했다.

 

당시 광주시장 서민호와 광주법과대학을 세우려던 이규정 등이 주축이 되어 모집된 동지회 가입회원은 194772,195명에 달했다. 가입 회원들의 거주 지역도 호남권은 물론 충청권과 제주도까지 포함할 만큼 광범위했다. 명실공이 민립대학이라고 불리는 것도 당연했다.

 

19461123<조선대학>으로 명칭을 변경했는데, 여기에는 광주시장에서 전남도지사로 영전한 서민호의 역할이 컸다. 그는 광주 지역에 국한된 대학이 아닌 전국의 인재를 키우는 대학을 목표로 제시했고, “정부수립 전에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민족과 국가의 미래를 이끄는 초석이라고 주장했다. 1948526일 재단법인 <조선대학>이 미군정청의 설립 인가를 받게 되었고 박철웅 초대 총장이 취임했다.

 

 

조선대학교의 설립은 지역적 견지에서 이례적이었다.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연세대(1885), 고려대(1905), 숭실대(1906), 이화여대(1927), 숙명여대(1938), 한양대(1941)는 모두 경성에 있었다. 해방 이후 정부 수립 전에 설립된 홍익대(19464)와 서울대(19468), 성균관대(19469)와 단국대(194711)도 마찬가지였다.

 

지방에서 설립된 종합대학은 조선대(19465)와 부산대(19465)가 유이(唯二)했다. 그런데 부산대는 정부 주도로 설립된 국립대학이었던 반면, 조선대는 전남 민중의 힘으로 설립한 민립대학이었다. 그만큼 전남인의 교육열이 서울 못지않게 높았다는 뜻이다.

 

전남인이 민중의 힘으로 돈을 모아 조선대학교를 설립한 것은 요즘식으로 말하면 크라우드 펀딩으로 대학을 세운 것이다. 1946년의 전남인들이 조선대학교를 설립한 것은 1988년 한국인들이 <한겨레신문>을 창간한 것에 비견될 수 있다.

 

그러나 규모는 <조선대학교>가 훨씬 컸다. <한겨레신문>4천만명의 국민 중 61천여명이 주주로 참여했지만, <조선대학교>는 전국 인구가 19백만명(1948), 전라남도 인구가 3백만명(1949)이던 시절 72천명의 동지회원이 모은 돈으로 설립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민립으로 설립된 조선대학교는 초대총장 박철웅의 비리로 엉망이 되고 말았다. 박철웅은 기부된 현물을 현금화하는 일에 수완을 발휘하는 등 조선대 설립과정에서 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총장 취임과 함께 동지회의 중심인물들을 제거하고, 동지회원 72천명의 기부내역을 은폐하면서 조선대학교를 사유화했기 때문이다. 그는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정권의 비호 아래 조선대학교를 사유화하고 세 차례 총장직을 차지하면서 30여년간 전횡을 일삼다가 1987년에야 물러났다.

 

따라서 조선대학교는 설립운동과 개교까지는 민립대학이었으나, 개교 후에는 박철웅의 사립대학으로 변질되었고, 그 후유증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박철웅이 자행한 비리로 인해 오늘날 조선대학교의 교육의 질은 초기 민중의 교육열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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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동 선생님의 별명은 무궁화 화가이다. 조선대 미대 1회 졸업생이고, 허백련 선생과 오지호 선생으로부터 한국화와 서양화를 사사, 지금까지 연 1-2회의 전시회를 꾸준히 열어, 통산 40여회의 개인전을 여신 분이니 화가라는 타이틀은 당연하다. 또 동,서양화를 넘나들면서 무궁화 소재의 작품을 꾸준히 제작하셨으니 무궁화의 화가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 이번 인터뷰에서는 그가 연극인으로도 활동했었던 뜻밖의 경력이 드러났다. 이학동 선생님과의 첫 인터뷰에서 필자는 그의 출생 및 가족 배경과 학력과 경력을 되도록 자세히 알아내려고 했다. 그중에서도 그분의 배경이나 경력 중에서 <나주극장>과 관련된 사항이 있는지 찾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의 연극인으로서의 경력이 새롭게 드러났고, 그의 작품이 <나주극장>에서 상연된 사실이 발견됐다. 이 작품의 제목은 <남매>였고, <나주극장>에서 약 한달 가량 장기 상연됐다고 했다.

 

 

그동안 언론이나 학계는 이학동 선생님의 연극인경력에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주 언론과 전남의 언론, 나아가 전국지들이 무궁화 화가에 대한 기사를 많이 보도했지만, 그를 연극인으로 소개한 기사는 없었다. 유일한 예외는 201513일자 나주 신문 <빛가람타임스>의 기사였다.

 

천년고도 목사고을 예향 나주에서 예술을 논하는 자리가 마련되면 어김없이 9순의 팔방미인 청운 이학동(李學童 91) 화백(畵伯)이 거론되곤 한다. 그는 나주를 대표할 수 있는 화단의 거목으로 동서양의 미술세계를 오가는 화가이자 연극인이며 연주자로서도 결코 프로에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 기사도 이학동 선생을 화가이자 연극인이며 연주자라고 소개하면서도 그가 연극인으로 활동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이 없었다. 다시 말해 이학동 선생의 화가이자 연주자로서의 활동상은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했지만, 그가 왜 연극인이기도 한 것인지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날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이학동 선생님은 내가 각본을 쓰고 연출했던 <남매>라는 연극이 <나주극장>에서 한 달 동안 상연되었다고 증언하셨다. 자신의 연극 경력에 대해 최초로 구체적인 사실을 밝히신 것이다. 이 작품이 <나주극장>에서 초연되었을 뿐 아니라, 한 달 동안이나 장기상연 되었다고 하니 필자로서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이학동 선생님은 이 연극 상연을 위해 각본과 연출뿐 아니라 무대 장치를 직접 제작했고, 배우가 모자라서 자신이 직접 일부 배역을 담당해 출연하기도 했다고 하셨다. 이같은 사실이 밝혀진 것은 언론 보도 영역에서라면 이른바 단독혹은 특종이라고 불릴 만한 내용이다.

 

그러나 필자는 <남매>의 상연 시기와 배역, 출연진과 스탭진, 이 작품이 <나주극장>에서 상연된 사정과 경과가 어떠했는지 자세히 묻지 못했다. 인터뷰가 이미 1시간 가까이 길어졌기 때문에 이학동 선생님께서 피곤해 하셨기 때문이다. 다만, <남매>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라고 하셨던 것으로 미루어, 아마도 1950년대 중,후반이나 1960년대 초의 작품이었을 것으로 짐작했을 뿐, 더 구체적인 사항은 후속 인터뷰로 미루기로 했다.

 

 

이학동 선생님은 또 자신의 연극인 경력이 조선대 미술대학 재학 시기에 시작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자신은 조대 연극부의 창단 멤버였고, 당시 여러 학생들과 협력해 정기 공연을 시작했으며, 자신은 미대 학생으로서의 특기를 살려서 무대장치를 도맡아 제작했다고도 하셨다.

 

또 여수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던 동안에는 학생들을 조직해 <교우>라는 제목의 연극을 상연한 적이 있다고도 하셨다. 이학동 선생님의 답변을 종합하면서, 필자는 그의 연극인 경력에 호기심이 급중했다. 그래서 당시의 전국 및 전남 지역의 연극계 상황을 미리 공부하면서 이학동 선생님의 2차 인터뷰를 준비하기로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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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동 선생님 인터뷰는 나주시청 문화예술과의 주선으로 이뤄졌다. 윤지향 팀장이 손수 나서서 도움을 제공한 것은 현재 진행 중인 <나주극장> 문화재생사업에도 도움이 되기를 바랬기 때문일 것이다. 지역극장 조사는 내 <최승희의 삶과 춤> 조사연구의 일부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학동 선생님께 <나주극장>에 관한 질문을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학동 선생님도 <나주극장>에 몰래 들어가다가 덜미 잡히곤 했던 이야기를 가장 먼저 꺼내셨다. 극장주 성방명 선생은 보고 싶은 게 있으면 그냥 와서 얘기하라고 하셨다고 한다. 성방명 선생의 부인과 이학동 선생님의 자당께서 가까우셨기에 베풀어진 호의였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같은 <도둑 극장>형 에피소드는 사실 매우 보편적이어서 진부할 정도다. 내용도 다들 비슷하다. “몰래 영화/쇼를 보려고 극장의 뒷담/개구멍/화장실/창문 등으로 들어가다가 붙잡혀 매를 맞거나, 손들고 무릎을 꿇거나, 부모님한테 알려져서 야단맞은 이야기. 조사연구서에서 인터넷 블로그의 포스팅까지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식상할 정도로 많다.

 

 

그에 못지않게 많은 극장의 추억이 <횡령 극장>형이다. 심부름 돈으로 영화를 보고 나중에 야단을 맞는 것이 골자다. 영화 <씨네마 천국(Cinema Paradisso)>에서 페페는 엄마한테 받은 심부름 돈으로 영화를 보고, 극장으로 쫓아온 엄마한테 귀를 잡혀 끌려간다. 5리라 지폐는 길에서 잃어버렸다고 거짓말을 해 보지만, 그런 거짓말을 꿰뚫어보지 못할 엄마는 없다. 알프레도의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모면한 페페의 영화사랑은 더욱 열렬해졌고, 그는 극장의 영사기사를 거쳐 마침내 영화감독이 된다.

 

세 번째 유형의 극장 추억은 <극장 푸념>형이다. 극장을 너무 뻔질나게 드나들다가 집안일이나 공부를 게을리 했거나, 혹은 무언가 사고를 쳐서,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는 이야기들이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정병호 선생의 최승희 평전 서문에서도 읽었고, 벌교의 염색 장인 한광석 선생님한테서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극장 푸념>형 에피소드의 결말로 등장하는 이 모양 이 꼴은 대체로 문화예술계를 가리키는 게 보통이다. 한국 교육의 특징인 추상적 암기식 공부가 재미있을 리 없는 청소년 시기에, 시청각 포함 오감을 자극하는 연극과 노래와 춤, 그리고 종합예술로서의 영화에 흠씬 빠지게 되는 것 자체가 많은 청소년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함정이다.

 

 

그래서 정병호 선생님은 무용가를 거쳐 무용학자가 되셨고, 한광석 선생님도 편집과 염색의 장인이 되셨고, 이학동 선생님도 화가가 되신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극장은 청소년들의 앞날을 예술가와 비예술가로 구분하는 리트머스 시험지 역할을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학동 선생님에게는 어린 시절의 짙은 추억이겠지만 듣는 이들에게는 진부할 수밖에 없는 <도둑 극장> 에피소드에 궁금한 점이 있다. 도대체 <나주극장>의 어디에 개구멍이 있었을까?

 

나는 오늘날 나주로 129번지소재 옛 <나주극장> 건물을 여러 차례 답사했고 사진도 많이 찍었다. 맞은편 5층 건물에 올라가서 극장의 지붕 사진까지도 찍었고, 그 사진들을 꼼꼼히 살폈다. 이 건물의 전면은 크게 개축되었지만, 그 기본구조는 변함이 없었다. 나주로 쪽에서 바라본 건물의 양쪽 끝에 출입구가 마련된 외에는 다른 입구가 없어 보였다. 몰래 관람실로 들어갈 수 있는 담장이나 창문이나 화장실이 어디에 있었을까? 다음 번 인터뷰 때에는 그 점을 꼭 질문 드려보기로 했다. 이야기가 진부함을 벗으려면 디테일을 첨가해야 하는 법이다.

 

 

또 그렇게 개구멍을 드나들면서 이학동 선생님이 보셨던 영화나 연극, 혹은 쇼가 어떤 것이었는지도 궁금하다. 물론 그것이 어떤 영화나 쇼였는지가 그리 중요하지 않았을 수는 있다. 볼거리가 드물었던 시절이니, <도둑 극장> 자체가 청소년들에게 흥미진진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인터뷰의 목적이 <나주극장>인 만큼, 이학동 선생님이 경험했던 <도둑 극장>은 어떤 것이었는지 더 구체적으로 더 알아낼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학동 선생님의 기억을 조금 더 자세히 자극해 수집해 드릴 필요가 있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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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손은 나주에서 이연년의 반란을 진압한 후 추밀원 지주사(樞密院知奏事)로 임명됐다. 그러나 그의 공과 승진을 시기하는 사람이 많아서 자주 모함을 받았다. 어떤 자가 최이(崔怡)에게 김경손 부자가 상공(相公)을 해하려 하며 반역을 음모하고 있다라고 참소했다가, 최이가 조사 끝에 근거 없는 모함임을 밝혀내고 참소한 자를 강물에 던져 죽였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의 추밀원은 국사책에 흔히 왕명출납,’ ‘궁중 숙위와 군기를 담당한 기관으로 설명된다. 아직도 이런 한자어로 한국사를 가르친다면 문제라고 생각한다. 요즘말로 하면 대통령의 의사결정을 돕는 비서실과 경호를 맡은 경호실, 그리고 수도를 지키는 수도방위사령부를 겸한 곳이다. 즉 추밀원은 권력과 무력이 집중된 통치기구였던 것이다.

 

김경손의 추밀원 첫 관직인 지주사(知奏事)는 정3품의 고위 관직이었다. 그의 직전 관직은 전라도 지휘사로, 도지휘사의 지시를 받는 하급 관직이었다. 지방으로 파견되었던 하급 무관이 내관직의 지주사로 임명됐으므로 크게 승진한 것이었다. 지주사 아래로는 좌,우승선과 부승선, 당후관이 있었고, 위로는 직학사와 부사와 원사, 그리고 추밀원의 수장 판원사가 있었다.

 

 

그의 초고속 승진을 시기한 누군가가 상공(相公)에게 반역을 꾀한다고 참소했는데, 상공이란 최이(崔怡)를 가리킨다. 최이는 최우(崔瑀, 1166-1249)가 집권한 이후 개명한 이름이다.

 

1170년 정중부(鄭仲夫, 1106-1179)가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뒤, 피바람과 함께 이의방(李義方, 1121-1175), 경대승(慶大升, 1154-1183), 이의민(李義旼, ?-1196)으로 무신 권력이 이어지던 중, 1196년 최충헌(崔忠獻, 1149-1219)은 이의민을 죽이고 권력을 차지했다. 최충헌은 1219년까지 23년동안 실권을 행사했고, 아들 최우에게 권력을 물려주었다. 최우는 1249년까지 30년동안 고려를 통치해, 최충헌-최우 부자는 반세기 넘도록 고려왕조를 좌우했다.

 

김경손은 아버지 김태서(金台瑞, ?-1257)의 장남, 즉 김경손의 큰 형 김약선(金若先)이 최이의 사위였고 고려 원종의 후비 순경태후 김씨가 그의 딸이기 때문에 왕실과 정방에서 모두 위세를 떨쳤다. 김경손이 모함을 받았을 때에도 최고권력자 최이는 자신을 죽이려했다는 심각한 모함에도 불구하고 자세한 조사를 통해 김경손의 무죄를 밝혀주는 성의를 보였다.

 

 

최이(=최우) 집권 시기 김경손은 부친과 큰형의 후광으로 주변의 질시와 모함을 이겨낼 수 있었지만, 1249년 최이의 서자 최항(崔沆, 1209-1257)이 집권하자 사정이 바뀌었다. 서출이자 천출이라는 핸디캡으로 불안감과 시기심이 짙었던 최항은 근거 없는 무고에도 제대로 된 조사도 없이 피모함자를 살해하거나 유배 보냈다. 아버지 최이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이 무렵 김경손은 추밀원 부사(副使)로 승진해 있었으나, 집권 직후부터 김경손의 인망을 꺼린 최항은 그를 백령도(白翎島)로 귀양 보냈다. 그뿐 아니라 1250년에는 추밀원부사 주숙(周肅)을 살해하고, 1251년에는 자신의 계모 대씨(大氏)를 독살했다. 실권을 강화하기 위한 숙청작업이었다. 후환이 두려웠던 최항은 독살당한 대씨와 연관된 모든 사람들을 살해했는데, 여기에는 대씨의 전 남편의 아들인 오승적(吳承績)도 포함되었다. 오승적은 강물에 던져져 익사했다.

 

최항은 김경손도 오승적과 인척 관계라 하여 그가 귀양 간 곳으로 사람을 보내 김경손에게 독주를 먹인 후 바닷물에 던져 죽였다. <고려사>에서는 김경손은 여러 번 큰 공을 세웠으며 조정이나 민간에서 모두 그를 믿고 소중히 여겼는데 갑자기 간적(姦賊)에게 살해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애통하게 여겼다고 기록했다.

 

 

실제로 김경손은 외적을 막고 내란을 진압하는 등 탁월한 공을 세운 고려 충신이다. 특히 김경손 장군이 정주성에서 12명의 병력으로 몽골군을 격퇴한 것은, 12척의 함선으로 왜수군을 격멸한 이순신 장군의 업적에 비겨질 만하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김경손 장군의 인지도가 높지 않고 추앙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은 그의 친일파 후손과 공산주의자 후손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지독한 친일부역자 김동인-김동원 형제와 북한의 백두혈통이라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이 김경손 장군의 직계 후손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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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동 선생님을 인터뷰하던 중 생가가 북성터에 있었다는 답변 때문에 나주성곽과 성문에 대해 후속 조사를 하던 중, 김경손 장군이 전라도 지휘사 시절에 나주성을 근거로 이연년(李延年) 형제의 반란을 진압했다는 기록을 읽었다.

 

이는 필자가 전혀 몰랐던 사실(史實)이었으므로 호기심에 <고려사(103)> 열전16권에 실린 김경손의 기록을 찾아 읽었다. 특히 김경손 장군이 이연년 형제의 반란을 토벌하기 위해 나주 성문을 나서는 장면을 서술하면서 사용된 현문(懸門)’이라는 표현에 관심이 집중됐다.

 

김경손의 원래 이름은 김운래(雲來), 평장사 김태서(金台瑞)의 아들이다. 문음(門蔭, 음서제도)으로 벼슬하다가 고종18(1231) 정주(靜州) 분도장군으로 임명됐다. 몽골군이 압록강을 건너 철주(鐵州)를 함락하고 정주까지 침입하자 김경손은 12명의 병력으로 몽골병을 물리쳤다.

 

 

재차 대군이 몰려오자 귀주(龜州)로 퇴각, 귀주성 남문을 수비하던 중 적장을 활로 쓰러뜨리고 적군을 물리쳤다. 이어 귀주성 수비 책임자로 20여 일간의 전투 끝에 몽골군을 격퇴했다. 이 공으로 대장군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승진, 고종24(1237) 전라도 지휘사로 임명됐다.

 

나주에 부임한 김경손은 백제부흥을 목표로 원율(原栗=담양)에서 봉기한 이연년 형제의 난을 진압했다. 이연년 형제가 해양(海陽=광주)을 함락하고 나주성을 포위하자, 김경손은 별초(別抄=특공대) 30명을 선발, “너희 고을은 어향(御鄕=왕의 고향)이므로 적에게 항복해서는 안 된다고 독전하고, 금성산신에게 제사한 후 출정했다. 이 부분의 원문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성문을 열고 나가는데 현문(懸門)을 속히 내리지 않으므로 수문장을 불러 죽이려 하니 곧 현문(懸門)을 내렸다. 이때 이연년이 그의 부하들을 경계하여 지휘사는 귀주 싸움에서 성공한 대장이다. 인망이 높은 사람이니 내가 이 사람을 생포하여 도통(都統)으로 삼을 작정인즉 활을 쏘지 말라고 하고 ... 단병 접전으로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이연년은 자기의 용맹을 믿고 곧바로 앞으로 내달아 김경손의 말고삐를 잡아끌고 생포하려 했다. 김경손이 검을 뽑아 들고 싸움을 독려하니 별초들이 몸을 생각지 않고 싸워서 이연년을 죽이고 높아진 기세를 내몰아 적들을 패멸시켰다. 되었다. 그래서 그 지방이 다시 평정되었다.”

 

 

이 기록에서 당시의 나주성이 현문식 성문을 가진 석축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문이란 바닥에서가 아니라 성체(成體=성벽)의 일정한 높이에서 만들어진 문이다. 출입을 위해서는 사다리 형식의 내리는() ()’을 사용하는 구조였다. 이는 사다리를 내리고 올려야 하는 출입의 불편을 감수하는 대신 적군의 침입으로부터 성문 수비를 강화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현문 구조는 5-6세기 신라시기부터 산성을 중심으로 널리 사용됐고, 남북조 시대를 통해 한반도에 광범위하게 분포했을 뿐 아니라, 그 형식을 발전시켜 고려시대에도 사용되었다.

 

이상한 점은 국립문화재연구원의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이 김경손 장군 시기의 나주성이 토축(土築), 즉 흙으로 지은 토성(土城)이었다고 서술한 점이다. 이 자료는 나주성이 석축으로 재건된 것이 조선 태종4(1404) 10월이거나, 문종1(1451) 8월이었고, 그 완성은 김계희(金係熙)의 나주목사 재임(14578-145911월 사이) 시기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현문이 설치된 성벽은 대부분 석축(石築)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 13세기 김경손이 이연년 형제의 반란을 진압할 시기의 나주성은 석축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 시대에 들어 나주성을 석축성으로 개축 또는 증축했던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것이 신축이었다고 보기 어려운 대목이다.

 

13세기 김경손 장군 시기의 나주성이 석축성이었다는 필자의 주장은 아직 추정이지만, 15세기 중반에 나주목사 김계희가 증축한 나주성은 옹성을 부가한 홍예식 성문 구조였다. 이후 나주성은 임진왜란 직후를 비롯해 2차례 개축되면서 대한제국 시기에도 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세기 초 일제에 의해 성벽과 성문이 대부분 철거된 후, 그 헐린 북문에 이학동 선생님의 생가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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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동 선생님께서 첫 인터뷰에서 자신의 생가가 북문터에 있었다고 답변하신 것을 계기로 당시 나주성과 북문터가 어떤 상태였는지 궁금했다. 일제강점기 나주 사진이나 지도를 찾아내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1913년의 <지적원도>를 기준으로 삼기로 했다. 이 지도는 일제 조선총독부가 토지조사사업(1910-1918)을 시행한 결과로 작성된 것으로 <토지조사부>와 함께 20세기 초 한국의 토지소유 및 사용 현황을 그나마 제대로 보여주는 자료이다.

 

한 가지 미리 지적할 것은 전남지역, 특히 나주지역의 지적원도가 매우 이른 시기에 작성되었다는 점이다. 경성 중앙부인 광화문통의 측량이 191210월부터 1127일까지 끝났고, 1912년에 지적원도가 제작되었다. 1914315일부터 추가측량이 이뤄졌다는 기록이 부기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는 이미 완성된 지적원도를 부분적으로 수정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전남 나주군 나주면의 측량이 1913224일부터 38일까지였고, 지적원도가 완성된 것도 바로 그해(1913)였다. 경성 중심부와 나주면의 측량 시기 차이가 불과 4개월에 불과하다. 나주면의 측량은 당시 조선 제2의 도시였던 평양(191351-531)보다 약 3개월이나 빨랐고, 제주도(1914)나 강원도(916)에 비해서는 훨씬 빨랐다. 아마도 호남의 곡창지대에 위치한 나주의 토지 측량에 우선순위를 두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913년 발행의 나주군 나주면(지금의 나주시 읍성권)의 지적원도에서도 나주성 4대문의 위치를 식별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이 지도에는 토지 구획과 함께 용도 및 번지수만 기재되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문터를 짐작할 방법은 있었다. 지적원도에서 (1) 성벽()(2) 주요도로()가 만나는 지점에 (3) 국유지()로 표시된 주소지를 찾으면 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지적원도에 나타난 나주면 남문정 59-2번지는 성벽에 접해있고, 간선도로에 면해 있는 택지()로 표시되어 있는데 괄호 안에 국유지()라고 되어 있다. 이를 오늘날의 지도와 비교해 보면 남고문(南顧門)의 위치와 일치한다. 즉 오늘날 남고문의 주소 나주시 남내동 2-20번지는 일제강점기의 나주면 남문정 59-2번지였던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오늘날 나주성의 동문인 동점문(東漸門)의 주소인 나주시 중앙동 126-8번지1913년 지적원도에서는 나주면 북문정 130번지였으며, 이 지점이 앞서 말한 세 조건, 성벽과 간선도로가 교차하는 국유지였다. 또 오늘날 나주성의 북문인 북망문(北望門)은 오늘날 주소가 나주시 금남동 1번지이지만, 1913년의 지적원도 상의 주소는 나주면 북문정 30번지였고, 바로 이곳이 성벽과 간선도로가 만나는 국유지인 택지였다.

 

그러나 나주성의 서문인 영금문(映錦門)은 위의 규칙에서 약간 벗어나 있었다. 영금문의 오늘날의 주소는 나주시 서내동 108-2번지이다. 하지만 1913년의 지적원도에는 성벽과 간선도로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국유지 택지가 없었다. , 이 지역에 몰려있는 나주시 서문정 77, 78, 79번지와 105, 106번지와 107번지등의 6개 주소지가 성과 간선도로가 만나는 주소들이었는데, 이중 어느 것도 국유지가 아니었다.

 

 

서문 인근의 국유지인 택지는 그보다 다소 동쪽으로 떨어진 나주시 서문정 103번지였다. 그러나 103번지가 성문이 있던 곳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성문은 원래 성벽과 도로가 만나는 곳에 소재해야 제 기능을 발휘하는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서문이 가장 이른 시기에 헐린 후 일찌감치 개인들에 의해 주택지로 점유, 또는 사유화되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한편 나주성의 북문터로 파악된 북문정 30번지는 이학동 선생님의 생가 주소임이 거의 확실하다. 왜냐하면 이 주소를 제외하면 인근의 다른 주소들은 모두 논이나 밭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북문정의 길 건너편의 박정리 1-7번지주택들이 이학동 선생님의 생가였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다만 이 주거지들은 국유택지가 아니었는데, 어쩌면 나주성의 서문과 비슷하게 일찌감치 철거된 성문터를 주민들이 점유 혹은 사유한 상태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좀 더 구체적인 지도 및 주소 자료가 필요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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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중에 나는 이학동 선생님께 출생지를 여쭈어 보았다. 그분의 출생지에 대한 궁금증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인터뷰의 모든 질문은 육하(六何)를 파악하는 데에 집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중 언제어디서는 사건의 배경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며, 그런 배경에서 누가무엇을의 좌표가 찍힐 수 있기 때문이다.

 

출생지를 묻는 질문에 이학동 선생님은 북문터라고 답변하셨다. 이 대답에 나는 의아했다. 북문은 지금의 북망문(北望門)을 가리킬 터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북망문은 국유지였을 것이다. 생가가 북문에 있었다니 이학동 선생님은 어떻게 국유지에서 태어나셨던 것일까?

 

추가 조사를 통해서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알 수 있었다. 이학동 선생님의 출생 당시인 1923년경 나주성곽의 북문은 헐리고 없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북문이 헐린 자리에는 주택들이 들어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중 한 집이 이학동 선생의 생가였을 것이다.

 

 

일제강점 하에서 나주 성곽과 성문들은 모두 철거되었다. 특히 성문들은 도로망 건설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모두 헐렸거나 제 모습을 유지하지 못했다. 1913723일자 <매일신보(2)>는 나주읍민들이 간신히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남문을 허물지 말고 이를 개수하여 보수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제목) 나주남문(羅州南門) 보존희망(保存希望), (본문) 나주는 구일(舊日) 전남의 수도(首都)되었던 역사가 유()하여 성문 누각이 구시(舊時)의 성황(盛況)을 상기할 자가 불소(不少)한 바 현금에는 불편한 성벽은 태반(太半) 철거되고 광주가도에 과재(跨在)한 동대문은 왕년에 자연 후폐(朽廢)되어 일야풍우에 전부 도괴(倒壞)하고 지금은 기영(基影)을 지()할 뿐이오, 금우(今又) 시중에서 나주 정거장에 통하는 대도(大道)의 성벽을 실()하여 고성낙일(孤城落日)의 자(姿)를 정()하여 아직 도괴(倒壞)의 액()을 면하였으나 일조풍우(一朝風雨)에 제회(際會)할 시()는 자연 동문의 예를 불면(不免)하리라는 우려가 유()한데, 기보존법(基保存法)을 강구(講究)하여 고적(古蹟) 보존하기로 나주의 일반 인민이 희망한다더라.”

 

이 기사에는 나주의 북문(北門)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그러나 나주의 동문은 이미 무너져 있고, 남문조차 그 파괴된 상황이 심각하다고 서술한 것으로 보아, 서문과 북문은 1913년경 이미 그 유적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상태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원의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에 따르면 나주성에 대한 최초의 문헌기록은 <고려사(高麗史, 103)> 열전(16) ‘김경손(金慶孫)이다. 이연년의 난을 토벌할 때 나주에는 문루와 현문 형식의 성문을 갖춘 토축의 읍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태종실록(太宗實錄)> 410월의 기사는 전라도에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성나주급보성(城羅州及寶城)’을 축성했다고 기록했다. 이후 문종 1(1451) 8월 병술조에도 나주읍성의 개축작업이 필요하다는 서술이 있고, 이 공사는 나주목사 김계희(金係熙, 재임, 14578-145911)이 완성했다.

 

이렇게 토성으로 축성되고 석축성으로 개축과 증축을 거듭한 나주성벽과 성문들은 일제강점기에 모두 헐렸다. 왜구를 막으려고 축성된 나주성이 결국 일제에 의해 철거되고 만 것이다.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인 1920년경에 남고문을 마지막으로 읍성 및 4대문이 철거되고, 대부분의 읍성터는 대지나 밭, 그 밖의 지목으로 등록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위에 인용한 <매일신보(2)>의 기사에 따르면 그보다 7년 전인 1913년에 나주성의 동,,북문은 이미 일제에 의해 철거되고 남문만 남았다. 따라서 북문은 일제가 국권을 침탈한 19108월과 남문만 남았다고 보도된 19137월 사이에 헐렸던 것으로 추론된다.

 

성문과 성벽이 철거된 후에 그 터가 대지로 등록되었다는 것은 주민들이 거기에 집을 짓고 살았다는 뜻인데, 이학동 선생의 생가가 바로 그 북문이 헐린 터, 혹은 그 일부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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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백년을 살면서 같은 일을 한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자연에서야 거의 모든 게 그렇지만 인간에는 그런 게 거의 없기 때문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지만 강과 산 그 자체가 변한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이 손을 댄 것은 무엇이나 10년 정도의 세월로 변하게 마련이다. 요즘 문화적 세대 단위가 30년에서 10년으로 줄어든 것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런데 강산이 10번쯤 바뀌는 동안에도 한결같이 그림을 그려온 분이 나주에 계신다. 청운(靑雲) 이학동(李學童, 1924-) 선생님이다. 해방 직후부터 서양화와 한국화를 넘나들며 작품 활동을 해 오신 분이다. ‘까치를 잘 그리는 화가로 충남 연기 출신의 장욱진(1917-1990) 선생이 있지만, ‘무궁화를 잘 그리는 화가이학동 선생님은 전남 나주 출생이다.

 

 

84일 오후3시경 이학동 선생님을 인터뷰했다. 나주 과원동 16-1번지(영산로 6366번지) 소재 <청운 아틀리에>, 이학동 선생님의 화실에서였다. 인터뷰는 나주 시청 문화예술과의 윤지향 팀장이 마련했고 나주극장 문화재생 프로젝트 담당자 3사람이 동석했다. 또 인터뷰 후에 봉황면 욱실마을 숙소로 돌아갈 차편을 제공하기로 하신 김순희 선생도 참석했다.

 

인사를 나누고 소파에 앉으신 이학동 선생님은 허리가 굽으셨기 때문에 맞은편에 앉은 나를 올려다보셔야 했다. 그래서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나는 티테이블 아래로 내려가 바닥에 앉았는데, 그렇게 해서 이학동 선생님과 자연스레 시선을 맞출 수 있었다. 소파와 테이블 사이가 너무 좁아서 가슴에 압박이 약간 느껴지긴 했지만, 인터뷰를 시작하자 금방 이학동 선생님과의 대화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날 인터뷰의 주제는 <나주극장>이기는 했으나 그에 앞서 선생님의 기초 인적 사항과 교우 범위에 대한 질문을 먼저 드렸다. 이학동 선생님은 자신이 1924년생이라고 하셨고, 태어나신 곳은 나주 북문터라고 하셨다.

 

 

증언을 확인하기 위해 추가 조사를 해보니, 이학동 선생님의 실제 생년은 1924년이 아니라 1923년이었다. 당시에는 영아 출생 후 1-2년을 기다렸다가 출생 신고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영아 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에 생존이 확실해 진 다음에야 호적에 등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로써 이학동 선생님의 올해 연세를 백세라고 하는 이유도 분명해졌다. 1923년생이시라면 올해 세는 나이로 1백세가 되신 것이 맞다.

 

이학동 선생님의 공식 생년이 1924년이어서 손해 보신 일이 있었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일제는 만20세가 된 갑자년(1924)생의 조선 청년들을 심각한 신체적 결함만 없으면 무조건 징병대상으로 삼았다. 이것이 묻지 마라 갑자생이라는 말이 생긴 이유였다.

 

국가기록원의 <강제동원자명부>에 이학동 선생님에 대한 기록이 남았는지 조사해 보았다. 일제는 중국침략과 함께 1938<국가총동원법>을 제정,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조선인을 강제 동원했다. 2004<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특별법> 제정을 위한 국회청원자료에 의하면, 7,879,708(국내 6,126,180, 국외 1,390,063, 군인·군속 363,465)의 조선인이 강제 동원되었다.

 

 

조선인들은 어떤 역할로 강제 동원되었는지에 따라 노무동원(노동자, 군속, 근로보국대, 근로정신대 등), 병력동원(군인), 성동원(일본군위안부’, 10만 명 이상 동원)으로 구분되었는데, 이학동 선생님은 병력동원의 경우로 분류될 수 있다.

국가기록원의 <강제동원자명부>에는 14명의 이학동씨 이름이 등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1924년생 나주 출신의 이학동 선생님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이 <강제동원자명부> 작성에 사용되었던 <일정(日政)시 피징용자명부(전남 지역편, 57, 143, 229)>에는 3명의 이학동씨가 등재되어 있다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청운 이학동 선생님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기록의 원본에는 본적이나 주소가 없더라도 이름은 한자로 씌였을 것이므로 이학동 선생님의 기록인지의 여부를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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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중 선생 인터뷰를 계기로, 정병호 선생이 관람했던 최승희 공연이 언제(19414월 혹은 19422), 어디서(경성 또는 광주) 열렸던 것이었는지, 최승희 선생의 1940년대 공연들을 중심으로 추론해 가는 중이다.

 

(정병호 선생이 최승희 공연을 처음 보았던 것이 중학 시절이라고 했으므로, 정병호 선생이 재학했던 중학교가 어느 중학교였는지 알아낸다면 추론의 범위는 훨씬 좁혀질 테지만, 아직 그 점을 조사해 내지는 못했다. 정병호 선생이 경성에서 중학교를 다녔다면 그가 보았던 최승희 공연은 19414월의 경성공연이나 1942년의 경성공연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만일 그의 중학교가 광주에 있었던 것이라면 19414월말이나 19422월말의 광주공연이었을 것이다.

 

정병호 선생의 중학교를 알아내면 훨씬 간단할 수 있을 추론을 이처럼 복잡하게 진전시키는 데에는 개인적인 이유가 있다. 그동안 최승희 선생의 공연활동을 조사해 오면서 가장 취약했던 것이 1940년대의 공연들이었다. 따라서 박경중 선생이 언급하신 정병호 선생의 공연관람 에피소드를 계기로 아예 1940년대의 공연 전체, 특히 1941-1942년의 일본과 경성의 공연활동을 조사해 보는 것이 최승희 연구 전체를 위해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공연의 레퍼토리를 중심으로 정병호 선생이 관람한 최승희 무용공연을 추론해 보기로 하자. 정병호 선생은 자신이 처음 관람한 최승희 공연에서 <에헤야 노아라><초립동><보살춤>을 관람했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보살춤>은 어린 중학생의 눈에도 선정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작품으로 보였다고 했다. 그 때문에 공연 관람 후에는 최승희 공연 때마다 판매되었던 최승희 무용사진 브로마이드를 사가지고 돌아왔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병호 선생이 보았던 공연의 레퍼토리에 대한 서술을 조사하면서 한 가지 난점이 떠올랐다. 그것은 1941-1942년의 공연에서 <초립동><보살춤>은 레퍼토리의 일부였음이 확인되었지만, <에헤야 노아라>가 공연된 사실은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19412월의 도쿄공연(귀조 제1회 공연)과 그 이후의 후속공연들의 레퍼토리는 모두 13작품으로 그중 전통작품이 2, 동양작품이 3, 조선작품이 8개였다. 이 레퍼토리는 4월초의 경성공연과 4월말의 광주공연에서도 거의 그대로 발표되었을 것이다.

 

1(1) 두 개의 속무(조선), (2) 검무(전통), (3) 옥적조(조선), (4) 화랑무(조선), (5) 신노심불로(조선), (6) 보현보살(동양), (7) 두 개의 전통적 리듬(전통), 2(1) 긴 소매의 형식(조선), (2) 꼬마신랑(조선), (3) 관음보살(동양), (4) 가면무(조선), (5) 동양적 선율(동양), (6) 즉흥무(조선).”

 

 

한편 194111월의 도쿄공연(이른바 귀조 제2회 공연)과 그 이후의 후속 지방공연들의 레퍼토리는 모두 12작품이었고, 그중 일본무용이 6, 국적을 밝히지 않은 조선무용이 5, 중국무용이 1개였다. 이 레퍼토리를 공연순서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신전의 춤 (일본), 2. 화랑의 춤 (조선), 3. 옥피리의 곡 (일본), 4. 천하대장군 (일본), 5. 칠석의 밤(일본), 6. 즉흥무(고곡), 7. 무혼(일본), 8. 보살도(가무보살과 보현보살, 일본), 9. 초립동(조선), 11. 당궁의 무희(중국), 10. 옥중춘향(조선), 12. 세 가지 전통 리듬(조선).

 

 

두 레퍼토리에 모두 <초립동><보살춤>이 들어있으므로 정병호 선생이 관람했던 공연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에헤야 노아라>는 두 작품 모두에 들어 있지 않다. 사실 <에헤야 노아라>는 최승희 조선무용의 데뷔작이자 최고인기를 끌었던 작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과 미주 순회공연의 레퍼토리에는 그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만일 <에헤야 노아라>라는 제목이 변경되었다면, 그 작품은 <신노심불로>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최승희의 유럽순회공연 취재기에서도 어느 정도 밝혔지만, <신노심불로><에헤야 노아라>에 스토리를 강화한 작품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두 제목의 작품이 모두 노년의 조선인 남성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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